창세기

from 2006/12/17 12:14

태초에 눈이 있었다.

 

그는 동쪽에서부터 햇수로 8년을 걸었다.

그녀는 남쪽에서부터 햇수로 8년을 걸었다.

 

확실한 것은 불확실함 뿐이었지만,

그들은 확신을 갖고 걸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났다.

 

바닥에도 하늘에도 사방으로도 온통 눈이었다.

그들이 걸어온 길에 찍힌 두줄의 발자국은

그들이 서로를 비스듬히 보고 있는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그녀를 만날 때를 대비해서 매일 세번씩 자위를 했다.

8년이나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린 만남.

그들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어색함 속에 그는 그녀의 허리를 살짝 잡고 머리를 그녀 어깨에 묻었다.

그녀는 뻣뻣하게 서서 불편한 자세로 그를 견딘다.

 

처음 만난 두 마리의 야수들처럼

그들은 서로의 눈을 피한다.

꼬리를 내리고 냄새를 맡고 다시 조금 떨어져서 곁눈질로 상대의 눈동자 주변을 살핀다.

 

그녀의 입술에서 거칠지만 단호한 입김이 쏟아진다.

그는 그녀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진 눈위에 앉아 사방을 바라본다.

그녀는 아까부터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잃었다.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의 오른속 새끼손가락은

그녀의 왼손 새끼손가락으로부터 1m 정도 떨어진 곳에 놓여

그녀의 손가락들이 눈보다도 더 차갑다고 느낀다.

 

그녀는 하나씩 옷을 벗는다.

길고 검은 외투를 벗고, 약간 큰 스웨터를 벗고, 너덜너덜한 스니커를 벗고

검은 양말을 벗어 스니커 안에 넣는다.

코듀로이 바지도 벗는다.

그녀는 하늘색의 남방만 입고 있다.

 

그는 아무 것도 벗지 않는다.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두손으로 그녀의 오른발을 잡아 조심스럽게 문지른다.

그녀의 발은 거칠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아주 작다.

그는 손가락끝의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어 그녀의 발안쪽에 있는 가는 뼈들을 인식한다.

그는 발기하지 않는다.

제대로 준비가 된 것이다.

두개의 심장이 같은 속도로 강하고 빠르게 펌프질을 하고 있다.

핏줄이 확장되면서 얼어있던 모든 세포들이 뜨거운 피의 세례로 새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녀는 그의 엄지손가락을 핥기 시작한다.

그를 중심으로 눈이 녹는다.

눈은 엄청난 속도로 녹아 간다.

내리는 눈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작은 물방울로 변해서 그들을 적신다.

엄지손가락은 그녀의 입속에서 완전히 젖었다.

그리고 그녀의 날카로운 이가 그 손가락끝을 물어뜯는다.

그녀는 피를 마신다.

이제 그들은 하늘이 보이지 않는 둥글고 검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들은 바다를 만들어 그 안으로 숨었다.

그녀는 그를 아주 조금씩 오랫동안 잘근잘근 씹어 먹는다.

 

그를 양분으로

그녀는 상상의 아이들을 만들어 물에 띄운다.

아이들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기위해 자신의 길을 떠난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일부를 잘라준다.

아이들은 그것을 먹고 기운을 내어 먼 곳까지 갈 것이다.

 

이것이 세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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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12:14 2006/12/17 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