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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잠에 빠져 죽은 여자 2007/08/29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잠들어있었다.

죽은 것처럼 고요하고도 무겁게, 침대 위에 조금 이상한 자세로 몸을 꼬고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안고 있는 이불은 그녀의 가슴을 지나 허리를 돌아 엉덩이부터 발끝까지를 대충 덮고 있다.

목덜미와 등이 어슴프레 하얗게 드러나 있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옷을 모두 벗고는 그녀의 등쪽으로 천천히 몸을 기댔다.

 

[왔어?]

 

그녀가 '뜨거운 잼같은 잠'이 듬뿍 묻은 목소리를 낸다.

 

[응, 언제부터 잤어?]

 [어제부터. 그냥 안일어났어.]

 

그녀가 충분히, 너무 많이 잤다고 생각하며,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만지고 어깨에 키스를 한다.

아직 눈은 감은 채로, 그녀는 그를 향해 돌아눕고, 그에게 완전히 밀착한다.

 

[20시간이나 잔거야? 일은 어떻게 하고?]

[오늘은 일하기가 싫었어. 너무 잠이 와서. 좀 있다 일어나서 밤새려고.]

[밥은?]

[밥?]

[밥도 안먹고 잠만 잤어?]

[응]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한 손으로 여전히 그녀의 가슴과 배와,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다.

 

[밥부터 먹자.]

[응]

 

그는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불을 켜고 냉장고 문을 연다.

그녀가 부스스 일어나 눈을 부비며 그를 따라와서는 그의 등에 매달린다.

 

[너무 졸려]

[아직도?]

[잠에 취했나봐.]

[저런. 밥먹고 나면 좀 나을꺼야. 가서 얼굴이라도 씻고 와.]

 

8월이 되면서, 그녀의 잠이 늘기 시작했다.

워낙에 잠이 많은 그녀이긴 하지만, 그가 퇴근할 때까지 잠을 자는 일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세수를 하고 면티셔츠를 걸친 다음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고무줄로 대충 묶는다.

그는 베이컨을 꺼내어 굽고 김치를 가위로 대충 잘라서 접시에 담고,

2개의 밥그릇에 밥을 퍼서 식탁위에 얹는다.

 

[잠이, 꼭 늪같아.]

[베이컨 더 구울까?]

[아니, 잠이 꼭 늪같아. 듣고 있어?]

[응]

[처음에 잠들때는 부드러운 진흙을 밟는 것처럼 따듯하고 편안하고 미끄러지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몸이 잠에 갇혀버리는 것처럼 느껴져.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고 팔은 허공에 가까스로 흔들리고,

목까지 가득찬 다음에는 입과 코를 틀어막아.

환각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뇌에 충격이 와.

뇌주름 어딘가 슬쩍 끼어있던 사소한 기억들이 튕겨져 나오기도 하고.

대개는, 무서운 기억들이야.

환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게 돼. 그러면, 차라리 편해질테니까.]

[너무 많이 자서 그래. 날씨도 더운데. 내일은 내가 출근할때 깨워줄게.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

[응.]

 

격렬하지 않은 애무로 가벼운 섹스를 하고 그는 하루의 피곤에 지쳐 잠이 든다.

그녀는 컴퓨터 앞에 앉아 해야할 일들을 한다.

연신 하품을 하며 눈앞의 뿌연 안개를 부벼내면서 타입을 고르고 작업된 세부들을 다르게 배치해본다.

 

새벽녘에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내려놓는다.

자동인형처럼 그는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살짝 잡아당긴다.

그리고는 아기처럼 갑작스레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 그는 그녀를 깨우지 못한다.

새벽까지 일 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퇴근했을 때에도 그녀를 깨우지 못한다.

그녀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밥솥에 밥이 없다.

그는 밥을 새로 짓고, 간단한 샐러드를 만들고, 그녀를 다시 깨운다.

그녀는 일어나지 않는다.

 

가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미지근한 입술만이 분홍빛으로 살아있는 듯 하다.

머리를 쓸어올려 관자놀이에 가볍에 키스를 해준 다음

그는 혼자서 샐러드와 밥을 먹는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저녁에도, 그 다음다음날의 아침에도, 저녁에도,

그는 혼자서 밥을 먹는다.

 

주말에 그는 결심했다.

그녀를 잠으로부터 구출해내기로.

그녀는 잠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더 늦기 전에 그녀를 구출해내어 인공호흡과 필요한 조치를 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몸은 완전히 잠의 것이 되어버린다.

 

심장에 귀를 대본다.

작지만 확실하게 규칙적으로 심장이 뛰고 있다.

팔목의 맥도 짚어본다.

작은 난쟁이가 그녀의 몸으로부터 나오기 위해 곡괭이질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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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9 00:43 2007/08/29 0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