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기억은 핏속에 남는다

* 이 글은 쭌모님의 [집단체벌.. 그 기억..] 에 관련된 글입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지금도 그 이름을 잊지 않는 당시의 담임. 차마 이름을 밝히지는 못하겠고. 어쨌든 이 담임, 돈은 무지하게 밝히면서 편애를 엄청나게 심하게 했다. 학교 관악부 지도교사를 하면서 돈 좀 되는 애들만 관악부에 집어 넣었고, 허구헌날 학부모들과 은근한 대화를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새카맣게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이 너무 싫었다.

 

못사는 동네라서 그런지 육성회비 못내는 애들이 꽤나 많았다. 물론 행인도 그런 부류 중의 하나였고... 그런데 분기별로 학교에서는 육성회비 완납을 독촉하는 일이 있었다. 최초로 전원이 완납한 반의 담임은 교무회의에서 칭찬을 받았고, 가장 납부율이 저조한 반의 담임은 상당히 괴로운 쿠사리를 들어먹어야 했다. 당시 육성회비가 매 월 45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누런 봉투에 매달 도장 찍는 칸이 있었더랬다.

 

우리 반은 납부율이 상당히 좋은 편에 속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담임이 어찌나 닥달을 하는지 견뎌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빚을 내서라도 육성회비는 갖다 내야 했다. 그래서 최초 완납반이 될 수 있었는데... 학생 하나가 결국은 육성회비를 못내고야 말았다. 아주 친한 친구였다. 그런데 그넘 집이나 우리 집이나 사는 형편이 피차 일반이어서 궁색하기 이를데가 없는 처지였고, 그 덕분에 항상 담임에게 찍혀서 벼라별 힘든 일을 다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만 이넘이 육성회비까지 납부를 못했던 거다. 어느날인가, 갑자기 이 담임이 씨끈벌떡하고 교실문짝이 부서져라 밀치고 들어오더니 친구넘 이름을 불렀다. 그냥 부른 것이 아니라 "이 개XX..." 등등 당시 우리 생각으로는 아주아주 못된 넘들이나 씨부려대는 그런 욕지거리를 쏟아 내면서 말이다. 사색이 된 그넘, 대역죄라도 지은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앞으로 나갔다.

 

줄지어 선 책상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담임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어찌나 주어팼는지 그 모습을 보는 동안 충격을 받아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때리고 또 때리고, 그 작은 몸뚱이가 몇 번은 바닥에 엎어지고, 또 몇 번은 교실 벽에 충돌하고, 또 몇 번은 앞쪽에 있던 책상 위로 굴렀다. 쌍코피를 터뜨린채 책상위에 널부러져 숨을 몰아쉬는 그넘을 보면서,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계속 씩씩거리던 담임은 기어코 친구넘의 머리채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일으켜 세우더니 칠판에 집어던져 버렸다.

 

친구넘의 머리가 칠판에 부딪치면서 칠판에는 구멍이 뚫려버렸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은 울고 있었고, 남자아이들은 고개를 책상에 파묻고 있었다. 나는 계속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깡다구가 좋아서? 천만의 말씀이다. 너무 두려웠다. 그래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몸은 부들부들 떨려왔고, 정말 오줌이 마려웠다. 담임의 분노한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별로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가 30년이 다 되어가는 그 옛날 어떤 정신나간 인간의 어느 순간 표정을 기억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다.

 

폭풍이 지나간 후, 그넘하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두려움이 가시지 않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참을 가다가 이넘이, "그래도 내 머리 진짜 단단하지 않냐?"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혹만 주먹만한 것이 나고 머리가 깨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눈이 감길정도로 시퍼렇게 부어오른 두 볼따구를 움썩거리면서 희죽희죽 웃는데, 그 때는 같이 웃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나는 날이 저물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펑펑 울었다. 무서웠고, 불쌍했고, 서러웠다. 그깟 월 450원 때문에 떡이 되도록 두드려 맞은 친구가 불쌍했고, 그놈이나 별반 다를바 없는 우리집 형편에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두드려 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왜 우리는 이렇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지 너무나 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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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용하는 작은 배낭 뒤에 몇 십개 되는 버튼이 붙어있다. 그 버튼 중에는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는 작은 버튼도 있다. 그 버튼을 볼 때마다 나는 어릴적 소위 선생님이라는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지독스레 야만적인 폭력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 사람들, 지금은 대부분 정년퇴직을 했거나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줄에 접어들고 있을 거다. 그 사람들은 알까? 자신들이 저질렀던 그 폭력의 기억을 죽을 때까지 혈류 속에 간직하며 살고 있는 '제자'들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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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2 07:47 2005/02/02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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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5/02/03 14:51

    행인 형의 글을 읽다가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트랙백한다... <이 글은 행인님의 [폭력의 기억은 핏속에 남는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나는 8학군으로 유명한 강남의 모 고등학교를

    • Tracked from
    • At 2005/02/03 23:01

    * 이 글은 행인님의 [폭력의 기억은 핏속에 남는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세상이 어떤지 잘 몰랐던 국민학교 시절을 제외하고 나면 중고등학교 선생들 가운데서는 선생이라 이름 붙일 만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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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t 2005/02/04 02:08
    Subject: 옛날 생각

    * 이 글은 행인님의 [폭력의 기억은 핏속에 남는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글을 읽다가 나도 내가 학교 다닐 적을 생각해봤다. 내 경우에는 여학생이란 특성 상 조심히 다루려는(?) 경향이 존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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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t 2005/02/04 13:29

    * 이 글은 무명씨님의 [불량선생에 대한 기억.] 에 관련된 글입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홉살 시절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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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t 2006/08/18 15:29

    행인님의 [폭력의 기억은 핏속에 남는다] 에 관련된 글. 훈련소 초짜 훈련병에게 '비상'이라는 단어는 여러 모로 사람 미치게 만드는 단어다. 왜 비상일까, 또 뭔 훈련일까, 얼마나 힘들까 등등

  1. 에고..목이 메여요...나쁘다. 나빠. 진짜 나쁘다. 그래도 그 친구 그런 상황에서 웃어낼 수 있어서 참 훌륭해요.

  2. 초등학생에게.. 흐음.. 욕밖에 안 나옵니다. 저런 사람들은 세상에 왜 존재할까? 내 생각엔 누구나 무엇이나 존재는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저런 인간도 있을까?

  3. 그런 일이 너무 많았던 거 같아요. 중학교때나 고등학교때... 중학교 때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저렇게까지 폭력적인 일은 몇 번 없었는데, 고등학교 다닐 때는 거의 악몽수준이었어요... 물론 애들이 드센 탓도 있었지만...

  4. 민주노총 대대와 관련해서 쓴글같기도 하고..그런건가요?
    사실 폭력이 정당화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 극으로 치닫게되면 모 그럴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씁쓸한건 사회가(특히 남성) 폭력에 너무 무감각하게 체화되어있고 원인은 군부독재를 지나온 역사적 측면과 함께 어릴적 자연스럽게? 교육되어진 측면이 있다는 생각때문인데...

  5. 민노 대대와 관련한 글은 아닌데요... 민주노총 이번 대대 건에 대해서는 사실 참 착잡한 측면이 있습니다. 답답하기도 하구요.

  6. 과외하는 애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전히 체벌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무지막지한 폭력은 많이 사라진듯 해요. 지하실에 끌려가서 봉걸레가 부러지도록 맞은 적도 있다고 이야기하니 '왜 안 꼰질렀냐?'고 하더군요.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우리를 구타하던 그 선생들 요즘 학교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7. 읽으니 가슴이 먹먹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