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군복무 마치고 복직한 곳은 신규공장 건설현장이었다. 회사 차원에서도 새롭게 시작하는 분야였고, 각 사업장마다 뛰어난 사람들을 TFT에 모아놨기 때문에 현장은 매우 활력이 넘쳤다. 행인이야 뭐 뛰어난 사람 축에 들어서 거기 간 것은 아니고, 줄을 잘 못 서서 간 거니까 좀 어이없긴 했다만... 아무튼 갯벌 메운 자리인지라 지반강화공사가 상당히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겨우 겨우 H빔 세워 공장 골격을 만드는 때부터 현장에서 노가다를 뛰게 되었다.

 

근데 이넘의 공장, 사실은 부실 그 자체였다. 명색이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곳이라 각종 원료의 종류가 워낙 다양했고, 각 원료들을 최상의 조건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장의 모든 설비들은 가장 적절한 재료와 이동경로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설계도는 완벽했다. 사실은 일본에서 가장 잘 움직이고 있는 동일한 제품생산공장의 설계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고, 거기다가 일본 현지에서 발생한 문제점들까지도 개선하는 차원에서 작성된 설계도였으므로 최상의 공장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건설비 절감을 통해 실적을 올리려는 욕심에 가득찬 공장장에 의해 설계도는 매일 달라졌고, 작업이 진행될 때마다 완공된 이후 설비가동시에 발생할 문제점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성질 더러운 행인, 결국 공장건설과정 내내 과장, 부장, 이사들과 사사건건 충돌하고야 말았다. 하루는 새벽같이 출근해서 어제의 공사현장을 다시 점검하고 그날 할 일을 검토하고는 배관용접현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째 현장의 배관이 설계도면과 전혀 다른 것이다. 용접하는 인부에게 따졌더니 하라는 대로 한 거란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언제 이렇게 하라고 했느냐 하면서 결국은 언성이 높아졌고, 시키는 대로 한 거 가지고 왜 쥐랄이냐고 버럭 버럭 우기는 작업자와 더 이상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과장을 찾아갔다. 어떻게 된 거냐고 하자 사람 좋은 과장은 우물우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데, 생산부장이 끼어들었다. 부장한테 따지자 부장이 자기가 시킨 거란다. 현장 관리자도 모르는 일이 진행된 것에 대해 항의하자 배관 그렇게 해도 생산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란다. 작업지시가 제대로 된 경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중에 생산과정에서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하자 부장이 하는 말, 그럼 내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하면서 작업해야하냐, 니가 내 상관이냐, 나중에 생산과정에서 문제 생기면 내가 해결하마... 걸찍한 욕설과 함께 행인은 행인대로 부장은 부장대로 성질 벅벅 내다가 끝났다.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공장은 완성되었고, 원래 설계과정에서의 예산보다 거의 100억에 가까운 공사비 절감을 하게 되어 공장장은 공장 완공과 함께 이사가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 기쁨과 반비례해서 작업 현장에서는 허구헌날 터지는 공정이상으로 인해 작업자들이 뺑이를 치고 있었다. 최첨단 설비와 완전 자동화 공장이라는 선전과는 달리, 작업자들은 라인과 각종 베셀 안의 원료들과 제품들이 굳어 버리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햄머를 들고 다녀야 했다. 최첨단 햄머냐...

 

그렇게 공장이 돌아가게 되었다. 1년 여를 건설현장에서 돌고 돌다보니 공장의 볼트 너트가 어디에 몇 개나 있는지까지 다 알게 되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내가 지은 공장을 내가 돌린다는 생각을 하고 싶었지만 그게 맘같지 않았다. 가끔은 파이프라인을 죄다 박살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들 정도로 공장은 애물단지였다. 제품 자체가 온도유지 및 이송과정을 충실히 해주어야 하는데, 한 번 이송이 멈추거나 온도가 맞지 않으면 원료고 제품이고 다 굳어버린다. 제대로 굳어버리면 돌덩어리보다도 딱딱해져서 최악의 경우에는 설비를 아예 뜯어내야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그래서 햄머질은 계속되었다.

 

그날도 그랬다. 첨단설비의 약점은, 이상이 발생해도 전자시스템이 이를 감지해내지 못하면 작업자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서 문제가 심각해질 때까지 상황을 전혀 확인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제품 이송라인에 문제가 생겼는데도 시스템이 이를 감지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현장 순회중이던 작업자가 황급하게 연락을 했다. 건조기 송풍압력이 위험수치까지 올라갔다는 것이다. 센서이상으로 인하여 시스템은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고, 결국 공장 전체를 세우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얼마나 진행된 사태였을까... 파이프라인은 완전히 막혀버렸고, 송풍라인에 위치한 베셀들에는 제품이 꽉 찬 채 굳어 있었다. 정상적인 송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베셀의 온도는 정상치보다 떨어져 있었고, 내용물은 거의 돌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베셀을 뜯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서져라 햄머질을 해댔지만 내용물들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베셀 입구로 들어가면서 석탄을 캐듯, 정과 망치를 가지고 틈을 내고 곡괭이로 내용물을 찍어내기에 이르렀다. 깨지지도 않는다. 베셀이 한 두개도 아니고, 대용량의 것은 그나마 움직이기나 편할텐데, 작은 것이 왜 이리 많은지...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온 몸으로 화학약품은 쩔어들어오고, 숨은 차고...

 

그 때, 그 원수같은 부장이 쫓아올라왔다. 올라오더니 개새끼, 소새끼 어쩌구 하면서 벼라별 욕을 다한다. 공장을 어떻게 돌렸냐는 거다. 못들은 척 하고 있으니까 갈수록 말이 지나치다. 다른 작업자들, 얼굴엔 불만이 가득하지만 그냥 묵묵히 욕을 들어먹고 있었다. 갑자기 버럭 성질이 났다. 베셀 밖으로 나가 부장 앞으로 갔다. 지금 욕이 나오냐? 당신들 공장 지을 때 멋대로 설계 변경해서 결국 이렇게 된 거 아니냐? 그랬더니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배째라 뭐 이런 식으로 뻗팅긴다. 왜 욕하냐고 했더니 되려 욕을 더한다. 자칫 멱살잡이까지 갈 위기에 처했는데, 사람들이 말리고, 해서 공장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부장이 해결한다고 했으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역시 다혈질인 부장, 바로 햄머들고 쫓아간다. 가봐야 뭐 별거 있나??? 지나 내나 거기서 거기지...

 

암튼 그렇게 뺑이를 치고 나서 겨우 내용물을 긁어냈고, 파이프라인과 베셀 등 설비를 뜯어내는 위기는 넘기게 되었다. 정상가동은 다음날 저녁때나 되어야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대충 일을 정리하고 퇴근하려는데, 회식을 한단다. 뭐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돼지비계라도 좀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분이 풀리지 않은 행인은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리고 달래는 통에, 까짓거 어차피 어딜 가서라도 오늘 같은 날 술은 마실 거니까 그냥 가자 하고 회식자리에 가게 되었다.

 

술 몇 잔이 돌았다. 화가 풀리지 않은 상황이라 부장이 뭐라고 하면서 건배도 하고 어쩌구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혼자 술을 마셨다. 부장이 또 무슨 일장연설을 하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하고 딴 소리를 했다. 그러다 결국 사고가 터졌다. "야, 이 XXX야~!"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부장이 행인을 보고 소릴 지른 거였다. "그래, 너 이 쉑기야, 부장 말이 말같이 안들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달리 할 말은 없고, "부장님 많인 취하신 거 같은데 오늘은 조용히 집에 들어가시죠?" 했더니 갑자기 재털이가 날라왔다. 유리로 된 재털이였는데,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쳐서 뒷 벽에 가서 부딪쳤다.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떡 일어나 뭔가를 손에 들고 같이 집어던졌는데, 날라가서 부장 뒤 벽에 부딪쳐 깨진 것은 소주잔이었다. 사람들이 다 일어나고 뜯어 말리고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그렇게 해서 술집에서 나온 후 사람들에게 이끌려 맥주집으로 소주집으로 또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항상 친동생처럼 행인을 생각해주던 한 형님하고 단 둘이 남은 것은 새벽 서너시쯤 되어서였을 거다. 그게 제물포역이었는지 주안역이었는지 확실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데, 통근버스가 서는 정류장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새벽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계속 마시다가 출근버스 타고 들어가자는 생각이었을 게다. 암튼 그 자리에서 그 형님 붙들고 소주를 퍼 부으면서 연신 부장 욕을 하고 있었다. 그 쉑이 말요, 공장 지을 때 말이지, 사고 나면 지가 다 책임 지겠다고 했걸랑, 설계도 다 뜯어 고친 거 형님도 알 거 아뇨, 그 때마다 아 내가 얼마나 치고 박았는지도 알 거 아뇨, 근데 오늘 하는 거 봐봐... 끝까지 잘났다고 그러는 거야, 그치가. 그게 부장이야, 이런 쉬버럴... 머 하여튼 이런 욕을 하면서 부장을 안주거리로 삼아 엄청나게 뒷다마를 까고 있었다.

 

취한 형님 역시 동의를 하면서도, 야,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머 부장이 무슨 죄가 있냐, 지도 월급받아 먹는 월급쟁인데 다 힘들고 그런 거지 머... 하고 달래기도 한다. 기가 살은 행인, 아니 그러면 더더욱 같은 월급쟁이끼리 그러면 안 되지, 서로 보듬어 주고, 응? 뭐 그렇게 해야 하는 거 아냐? 이게 뭡니까, 이게... 또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구두쇠같은 포장마차 주인이 카바이드 불 하나 켜놓고 장사를 하는 통에 앞에 앉은 사람 얼굴 확인하기도 힘든 포장마차 안에서 그렇게 부장은 행인의 요리감이 되어 구워지고 삶아지고 튀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누가 내 등을 툭 치는 거였다. 안 그래도 뭔가 건드리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는데, 그바람에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뒤로 훽 돌아섰다. 컴컴한 포장마차 안에서 내 등을 친 그는 행인만한 작은 키에 몸집도 작은 40대 남자였다. "야, 이 쉑기야..." 하는데, 힘알머리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가만히 보니 웬수같은 부장나리가 아닌가... 순간 술이 확 깨는 것이다. 비록 웬수같다만 없는 자리에서 입에 담을 욕 담지 못할 욕을 줄줄이 늘어놓았는데, 언제부터 들었을까... 순간 당황하는 행인... 하필 여기와서 마주친단 말인가...

 

"소주 한 잔 줘봐 임마..."

방금 전까지 죽이니 살리니 하면서 부장 욕을 하던 행인이 마뜩찮은 기분으로 소주 한 잔을 따랐다. 순식간에 원샷을 한 부장, 잔이 깨지라고 내려놓더니 고개를 푹 떨군다. 그러곤 손을 들어 내 어깨 위에 올리더니 한숨을 푹 쉰다. 그리곤... "나도 힘들어 임마..."하는 거다....

 

그렇게 퍼마셨던 술이 다 깨버리고 난 후, 행인 앞에는 작은 중년의 사내가 하나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리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운 거는 미운 거지만, 술취한 얇은 어깨마저 축 쳐진 한 사내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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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5 22:55 2005/02/25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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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씁쓸하네요......'중간 관리자'라는 직책이 애매한 직책이라...이거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는 이상한 분위기랄까

  2. 사업장에서 건강상담하다보면 노사갈등의 한 복판에서 불면증과 위장관 증상 등등 스트레스와 관련된 증상을 심각하게 호소하는 중간관리자들을 가끔 봅니다. 그 중에는 사표를 쓴 사람도 있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어요. 공권력이 투입되어 현장 노동자들이 끌려가고 난 자리에 빗자루 들고 청소하러 들어갔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괴로와하던 사람도 기억나네요. 그럴 때면 연민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넘지말아야 할 기본선이 있다는 생각에 냉정해지더군요. 내가 그 선을 넘을까봐 두렵기도 하고요

  3. 음....슬프긴 슬프네요..아주 짠합니다.

  4. 어? 약한 모습!! 술이 웬수다..
    충성하느라고 공사비 줄이고 인건비 줄여서 자기는 출세하고,
    나머지 노동자들 다 뒤지게 고생시키고, 사고나서 죽이고...
    그래도 노동자들은 다 용서해 준다니까요...ㅎㅎ

  5. 히야,
    정말 행인은 대체 산전수전공중전까지 안겪은 일이 없구만.
    여지껏 거쳐간 공장만해도 몇개에요?? @.@

  6. 언더/ 지금은 그냥 픽 하고 웃는답니다.
    뻐꾸기/ 저도 항상 두렵거든요... 만일 제가 그 자리에 올라간다면 저 사람보다 잘 할 수 있을까... 그와 똑같이 된다면, 아니 더 심한 넘이 된다면... 그게 두려워요.
    붉은사랑/ 그래도 저 부장은 괜찮은 거에요. 진짜 악질적인 인간들 여럿 있었거든요...
    산오리/ 맞아요... 술이 웬수죠... 근데 이상하죠? 지날수록 연민이 생겨나니... 제가 고생을 덜했나봐요 ^^;;;
    정양/ 거쳐간 공장은 몇 개 되지 않는뎁셔??? 하긴 뭐 워낙 뻥구라를 쳐대니 많은 분들이 혼란스럽겠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