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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을 재생산하는 동아시아 역사인식의 문제점…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생관계
▣ 임지현/ 한양대 교수 · 사학과
1992년 부다페스트의 한 강연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홉스봄(Eric J. Hobsbawm)은 역사학이 핵물리학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 있다. 모든 역사가는 예기치 않게 정치가가 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변이었다. 비단 동아시아의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권력판과 시민사회를 뜨겁게 달군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이 북한의 핵무장이나 일본의 재무장 못지않게 동아시아의 평화 체제를 위협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일본에 진 뒤 베이징 거리에 모인 중국 시민들. 과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밑바닥에는 현재의 국가간 대립과 갈등이 숨어 있다.
(사진/ AP연합)
갈등의 촉매제로 작용하는 역사
과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밑바닥에는 사실상 현재의 국가간 대립과 갈등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이오유·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일본·중국·대만의 갈등, 쿠릴·치시마 열도를 놓고 벌이는 러시아와 일본의 신경전, 독도·죽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오랜 영토분쟁 등이 역사전쟁의 정치적 배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 파동에서 시작되어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한층 가열된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은 과거의 역사적 실체를 사실적으로 구명한다고 해서 해소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 각국은 모두 문제가 되는 영토에 대한 자신들의 영유권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역사는 해결책이 아니라 갈등을 유발하고 증폭하는 촉매의 역할을 한다. 다이오유·센카쿠 열도나 독도·죽도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이 가끔씩 국기를 들고 상륙하는 해프닝을 벌일 뿐, 자연적인 거주민이 없는 무인도이다. 어느 나라도 그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들과의 문화적 유대를 주장할 현실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곳이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라는 각국의 주장은 과거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만 정당화될 뿐이다. 이때 역사학은 영토 분쟁의 학문적 첨병으로 복무한다. 유럽의 역사전쟁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때때로 고고학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많은 경우, ‘역사적 진실’은 역사전쟁의 정치학을 학문의 이름으로 혹은 진실의 이름으로 은폐할 뿐이다.
역사전쟁의 가장 큰 인식론적 특징은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 개념이 먼 과거에 개념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이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중국사의 공간적 범주로 규정하는 중국의 공식적 역사인식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반도 북부에도 일부 걸쳐 있었지만, 만주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의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에 대해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는 문화적·형질적 연속성을 근거로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일부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한국 역사학계와 시민사회의 주류는 역사적 정통의 계승을 강조하는 ‘역사 주권’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중국의 ‘국가 주권’적 관점에 비하면 한국의 ‘역사 주권’적 관점은 근대 국민국가의 시각을 먼 과거에 그대로 투영하는 시대착오주의에서 다소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독도와 센카쿠열도 등의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에서 보듯이, ‘역사 주권’은 이 섬들에 대한 ‘국가 주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곧 비약된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고토수복’을 외치며 한국의 주권을 만주 지역까지 넓히자는 일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의 주장도 따지고 보면 ‘역사 주권’을 근거로 하고 있다. 과거에 대해 ‘국가 주권’을 고집하는 중국이나 이에 맞서 ‘역사 주권’을 주장하는 한국은 모두 근대 국민국가의 ‘국경’ 개념을 역사의 ‘변경’에 뒤집어씌우기는 마찬가지이다.
지도 위에 컴퍼스와 연필로 확실한 선을 그어 결정되는 근대 국민국가의 ‘국경’과는 달리 역사의 ‘변경’은 단일한 선을 가로질러 넘나드는 복수의 점들로 산포되어 있다. 변경은 이질적인 언어와 문화, 풍습 등을 지닌 다양한 종족들이 만나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의 가교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다이내믹한 독자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공간이다. 고구려의 역사가 가지는 의미도 한반도와 만주, 대륙의 서로 다른 문화와 종족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간 다양성과 역동성 그리고 그것이 대륙과 한반도에 미친 영향력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중국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집회.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은 과거의 역사적 실체를 사실적으로 규명한다고 해서 해소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 (사진/ 류우종 기자)
‘국경’에서 ‘변경’을 구출하라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나 한국사 어느 한쪽에 귀속시킬 것이 아니라,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고구려인들을 역사적으로 복권시켜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쿠카와막부의 가신이자 조선 왕의 신하였던 쓰시마 영주와 그 섬의 과거를 일본사에서 구출하여, 동아시아의 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변경’의 역사로 복원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한국사로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오해하지는 마시기를!). 자신에게 익숙한 지역의 과거가 자기 민족만의 독점적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동아시아의 역사인식이 갖는 큰 문제인 것이다. ‘과거는 외국’인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가 함축하는 그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한국의 주류 학계나 시민사회의 대응은 우리의 민족주의였다. 19세기 독일의 문헌학적 전통이나 랑케류의 실증사학이 이미 독일의 역사를 발명하고 모든 나라의 국사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임에도, 한국의 역사학계가 반론으로 제시한 역사적 실체나 진실은 아무리 객관성이나 과학성으로 포장해도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해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산케이신문>이 일본의 우익 수정주의 역사가들에게 한국의 국정 역사교과서를 본받으라는 사설을 게재했을 때, 이미 한국 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대응방식은 사실상 전략적 파산을 선고받은 것이었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보다 더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한국 국정교과서의 해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은 국내에서는 통용될지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현상적으로는 첨예하게 충돌하지만, 사유의 기본적인 틀과 이데올로기적인 전략을 공유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민족주의 혹은 그 역사적 해석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신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동아시아의 민족주의가 맺고 있는 적대적 공범 관계의 은폐된 현실을 직시한다면,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들의 민족주의 앞에서 우리의 민족주의를 무장해제시킨다는 단순논리는 더 이상 현실의 비판을 견뎌낼 수 없다. 한국의 ‘국사’를 정사로 놓고, 중국이나 일본의 ‘국사’가 틀렸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고구려사에 국한해보자면, ‘국경’에서 ‘변경’을 구출하는 것이야말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가장 신랄하고 날카로운 비판의 무기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일말의 여지 없이 당연시되는 ‘국사’는 일제의 용어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민족과 국가를 역사의 주체이자 발전의 정점으로 간주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을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하는 효과적인 권력의 기제이다. ‘국사’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한, 동아시아의 역사학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획일적 ‘국민’ 주체를 만드는 규율 권력의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국사의 해체와 역사학의 민주화
한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5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국사’를 해체하고 국가의 멍에로부터 역사학을 민주화할 때, 동아시아 민중연대와 평화체제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이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화되어 있는 한, 역사전쟁은 소재와 형식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그것은 다시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 관계를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 ‘다시, 동아시아!’는 어떤 반론에도 열려 있습니다. bretolt@hani.co.kr로 제안 바랍니다.
국제 결혼은 애국심을 죽이는가. 하는 다소 선정적인 글을 읽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글을 올린다.
나는 현재 외국에 이민을 와서 산지 3년 정도 되는 이민자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국제결혼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혹자가 농담삼아, '아들이 나중에 노랑머리 며느리 데려오면 어떻할거야?' 하면 속으로 별 덜떨어진 생각이 다 있다는 식으로 반응 했던 것 같다. 아니, 아들이 노란머리를 데려오던 깜둥이(노란머리 데려오면 어쩔거냐는 사람들의 가장 적절한 표현일듯 싶은...)를 데려오던 그게 왜 어째야 하는 일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 말이다.
모든 인류는 피부의 색깔과 관계 없이 평등하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국제결혼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 됐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국제결혼의 사회성과 그 사회성이 제공하는 현실의 탄탄한 장벽을 정확히 보자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박 노자 선생님이 마지막에, 언제 우리 사회가 탈자본적으로 가서 국제결혼이 단지 사랑을 놓고 야기 될 수 있는 시기가 올까... 하는 내용을 보면서 그것은 단지, 자본주의적 야수성이 야기시키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국제결혼은, 단지 자본의 문제가 아닌 인종적 문제와 남녀의 문제가 핵심이 되는 문제로 작용한다. 물론 박 선생님의 지적대로, 우리도 국가적인 경제력을 배경으로 동남아에서 국제결혼의 배우자를 수입? 한다. 그리고 우리도 결혼으로 국적취득을 꾀하기도 한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수입? 하는 배우자는 열에 열, 전부 여자일 것이다. 신부인 것이지 신랑을 수입하는 경우가 어디 있으며 있다면 얼마나 있는가?? 똑 같은 식으로 소위 우리가 가서 살고 싶어하는 주류 국가에서의 국제결혼은 열이면 열 전부 우리나라 여자들이 한다. 백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우리나라 남자와 백인여자의 결혼을 특례로 들어 내 주장을 무력화 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사람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알듯이, 우리가 수입하는 배우자는 신부이고, 우리가 수출하는 배우자 역시 신부이다. 먼저 이 부분을 정확히 집기 전에는... 국제결혼에 대한 심도 있고 정확한 고찰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자본주의적 폐해와 경제력의 야수성을 논하기에 앞서서, 우리 인류의 냉정한 현실중 하나가 바로 이런 남녀의 차별성이다. 200년된 자본주의의 역사보다 100배가 더 됐을 이 성적 차별성은 사회적 기인이라고만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본능적인 부분을 내포한다. (이 부분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논란은 글의 목적과 다르니 사양하고 싶다.) 결국 모든 사람이 동의 하는 것... 그것은 인종 차별과 남녀차별의 현실성이다.
이 두가지 현대사회의 최대 화두가 절묘하게 조화된 것이 바로 국제결혼이라는 생각이다. 즉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 형제 이웃이 열등한 인종(피부)를 사냥하고 정복하여 거느리는 것은 문제되지 않으나 열등한 인종(피부)에 우리의 사냥감을 뺏기는 것은 사회적인 수치' 라는 지독히도 남성주의 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논리가 바로 현실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엄청난 힘이 없이는(그것이 경제력이든 다른 무엇이든) 한국 남자가 백인 여자 거느리고 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여자가 백인 남자에게 시집 가는 일은 요즘 세상에 정말 흔해 빠진 일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당사자들의 말들이 공허해 질 정도로 우리나라 남자가 국제결혼을 하면 그것은 소위 우리보다 못한 나라의 신부를 데려 오는 것이요, 우리나라 여자가 국제결혼을 하면 무조건 백인에게 시집가는 것이 압도적인 현실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경제력을 탓하기에 앞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근본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인종차별과 남녀차별이다. 아주 쉽게 우리나라 여자가 우리가 수입해 오는 신부들의 나라의 남자와 국제결혼을 했다고 하자. 그것에 분명한 현실적 거부감이 있듯이, 우리나라 여자들이 백인들과 결혼할 때 똑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만 지독히 있고, 외국은 합리적이라서 그런게 없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것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남자들도 똑같은 비율로 외국 나가 있고 외국인과 사회생활 하는데... 여자들만 국제결혼을 해서 그 나라 영주권을 취득하고 남자들은 하나같이 못나서(?) 정말 화제가 될 만큼 백인여자를 거느리지(!) 못하는가...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의 로맨스는 터부시되고 불쾌감을 전달해서 만들지 않는다는 영화계의 기본이 있다고 들었다. 그와 같이 인종차별과 남녀차별이 명확한 현실에서... 우리나라 여자들은 전부들 사랑으로 그걸 극복하고 합리적인 외국인들과 결혼해서 잘 들 사는거고... 우리나라 남자들은 하나같이 사랑을 못만나고 합리적 외국인들을 못만나서, 백인여자들과는 결혼을 전혀(이 단어를 써도 무방할 만큼) 못하는 것일까??
한국여자들의 현지 사회에서의 인식은 우리가 수입?해 온 한국남자들의 배우자들과 절대 다르지 않다. 그것이 외국인은 합리적이고 어쩌고 하는 것으로 숨길 수 있거나 최면을 걸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본다.
결국 사람은 결코 사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므로... 나는 한국 여자들의 국제결혼을 ... 마음 아프게 반대한다. 한국 남자와 한국 여자의 국제결혼 비율이 국가별로 인종별로 50:50 가까이 되기 전에는... 현실에서 국제결혼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사랑으로 극복되는 어쩌는 엉뚱한 해결책이 불가능 한 것이 아닐까??
인종차별과 남녀차별... 국제결혼의 근본에 존재하고 있다.
한겨레21 싸이트 독자마당에서 퍼온 글입니다.
시내버스 '몰래카메라' 발견... 인권침해 논란
[오마이뉴스 이승욱 기자]
▲ 몰래카메라가 설치돼 있는 부분. 안쪽으로 1Cm크기의 소형 렌즈가 반쯤 가려진 채 보인다. ⓒ2004 오마이뉴스 이승욱
대구지역 한 시내버스 운전석에서 '몰래카메라'가 발견돼 사측에 의한 인권침해 논란을 빚고 있다.
대구 서구의 S여객에서 일하고 있는 금아무개(34)씨는 1일 오후 2시쯤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이 운행하는 시내버스(대구 70자 XXXX)를 몰고 업무를 시작했다.
운전석에 앉은 금씨는 운전석 밑으로 평소에는 없었던 흰색 전선이 있어 의아해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선을 따라간 금씨는 핸들 키박스 덮개 안에 조그마한 물체가 설치돼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내버스 운전석 부근에서 초소형 카메라 발견
▲ 몰래카메라는 붉은색 실선 원 안의 구멍을 통해 촬영이 돼도록 설치돼 있었다.(사진 왼쪽) ⓒ2004 오마이뉴스 이승욱금씨는 평소 알고지내던 동료를 불렀고, 키박스 덮개 안쪽으로 지름 1Cm 가량의 초소형 카메라렌즈가 설치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운전석 뒤쪽 버스 아래 부분에서 비디오테이프가 저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박스도 발견했다.결국 금씨와 동료들은 오후 5시쯤 인근 파출소로 신고를 접수했다.
8년째 버스운전을 하고 있는 금씨는 "너무 황당하고 놀라 마음이 좀체 진정이 되지 않는다"면서 "항상 일하던 곳에서 누군가 나를 감시하려고 했다는 것이 분하다"고 말했다.
현장을 확인했던 버스노동자협의회 전 부의장 최태일씨는 "버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에 대한 불법 감시 등이 횡행하고 있다"면서 "일단 변호사를 대동해 테이프 판독을 실시하고, 경찰의 수사의뢰 뿐 아니라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하는 등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최태일씨는 "금씨가 그동안 회사측과 임금체불 등을 놓고 마찰을 빚어왔던 사실이 있다"면서 "회사측에서 금씨에 대해 불이익을 주기 위해 설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회사 마찰 빚은 노동자 탄압용" 주장
▲ 몰래카메라 렌즈가 부착돼 있는 부품 뒷편. 접착제로 키박스 덮개에 부착해놨다. 전선을 따라 버스 아래쪽 비디오 테이프 박스와 연결돼 있다. ⓒ2004 오마이뉴스 이승욱
대구참여연대 윤종화 사무처장은 "전후 사정을 더 확인해봐야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합의없이 설치된 몰래카메라는 명백한 인권침해"라면서 "만약 앞으로 경찰이 수사에 나선다면 철저한 수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밝혀내고 인권침해를 방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S여객 한 관계자는 몰래카메라 설치에 대해서 "담당자들이 퇴근해서 사실 관계는 확인할 수 없다"면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회사가 경영이 어렵다 보니 독려차원에서 설치했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애매하게 말했다.
회사 측이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하더라도 법률적인 처벌이 어렵다는 점도 있어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승욱 기자
아~~ 인권이란 없는 나라 대한민국...
경제가 어렵다 회사가 어렵다란 경제 논리에 인권이란 침해받아도 되는 권리란 말인가?
노동자들을 하나의 인격이 아닌 돈 버는 도구로서만 받아들이는 이노무 사회~~~
건설 노동자도 이주 노동자도 모두 이 사회의 타자이고 자신이 맘대로 써먹다 버려도 되는 물건으로만 취급하는 사회...
모든게 지 맘대로인... 이제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최소한의 권리만이라도 제발 보장해라... 25년째 외치고 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자본의 미디어 전략,... 참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민중의 미디어 전략이 조속히 수립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래 뉴스툰에 있는 카툰[최인수의 울퉁불toon]을 퍼날라 봅니다.
어느덧 이 별 것도 아닌 세계의 평화 축제에 진정한 평화로서의 반전의 외침은 쑥 사그라져 버렸네요. 반전 촛불집회가 열려야 할 공간에서는 올림픽 응원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진정한 민중의 실상을 담아야 하는 미디어에선(지금까지 담아본 적이 거의 없지만...) 계속 금 금 금만이 외쳐지고 있습니다. 쩝 제길... 정말 욕나와... (하지만 욕은 적들의 앞에서만 하기로 결심했기에 제길만을.. ^^) 스포츠여 스포츠여 진정한 평화의 도구로서 사용되기 위해선 우선 자본성과 국가성을 벗고 경쟁을 벗어난 유희로서만 존재하거라. 그냥 그렇게... 토너먼트가 아닌 승자가 없는 리그로서만...
=난타 멋대로의 생각=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국회의원의 건물 1층에 세를 들어 살던 시절..
왠놈에 데모질은 그리도 해대는지.. 매일같이 최류탄 가스를 마시며
저 빨갱이 놈들을 왜 나라님께서는 처분해주시지 않는지 기도를 한적도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 학교에서는 1학기에 1차례정도 운동장에
거대한 텐트를 쳐놓고 ' 난 공산당이 싫어요 '라는 영화를 틀어주며
공산당은 쥐뿔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 난 정말 공산당이 싫어 " 라며
마음속에 항상 되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또한 매일 저녁 5시마다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짐하는 아이들에게 데모를 하면서 여기저기 돌을 깨고 피를 흘리고
화염병을 던지는 데모꾼들이 좋게 보일리 만무했다.
어찌되었건 우리 집앞에서 데모를 하다 화염병 몇개가 창문을 부수고 집으로 쳐들어온다.
물론 막을 재간도 없었거니와 기름불이라서 물을 부어도 꺼지지는 않는다.
" 뽀삐야~~ 뽀삐야~~ " 연신 강아지 이름을 불러대며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된채
강아지를 끌어안고 안락한 자기집이 불타는 모습을 쳐다보는 아이에겐
일생 최대의 충격이 될만도 했다.
그 일이 있고난뒤 의경들은 집 옆에 가건물을 하나 세우고 24시간 보초를 서게 된다.
대략 30명쯤이 가건물에서 생활을 하며 여기저기 입구에 보초를 서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하게 된다.. 그쯤되니.. 좀 살만해지기도 했었던것 같다..
그당시 철저하게 사상무장(?)이 되어있었던 의경들은 쪼꼬만 녀석이 매일
강아지를 끌어안고 놀고 있으니 귀엽게도 보였으리..
매일 같이 다가와서 장난질을 걸어왔다.. 귀여운 녀석들..
도대체 자기 여자친구 이야기는 왜 해주는건지.. 또 이런저런 뻥을 휘갈기며(당시에는 몰랐다)
공산당은 다 죽여버려야 하는 나쁜놈들이라든지..
어제 누가 진압하다가 다쳤는데 가서 아이스크림 갖다주고 뽀뽀 해주라고 하든지..
가끔은 미친 변태쉑히가 야한 이야기와 사진도 전해주었다. 아마도 이때의 사건들이
지금의 나를 미친 변태로 만든것 같기도 하다.. ㅡ.ㅡ;
이처럼 어느덧 그 의경들과 나는 인생을 공유하고 있는듯 했다.
아주 기억에 남는 의경이 한분 계시다..
아주 더운 어느 여름날.. 쮸쮸바를 쪽쪽 빨며 강아지와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한 의경이 근무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미친 피플 다가간다.
" 아저씨 근데 그 똥그란거 수류탄이에욥?? *^^* "
" 아~ 이거는 사과탄이라고 하는거야 "
" 앗~ 그르면 그거 수류탄 아니에욥??? "
" 응 수류탄은 아니고 아주 매운거야.. 고춧가루가 들어있어서 "
" 우와우와~~~ 나 구거 한번 만져봐도 되요??? 앙~~~ ^-^ "
" 음.. 그럼 다른건 만지지 말고 들어보기만 해.. "
미친 변태 피플!! 드디어 끼가 발동한다..
하기사 사과탄을 나에게 쥐어준 그 의경이 미친놈이겠지만..
어쨌든 아이의 호기심과 순수함은 죄가 아니다..!! ㅋㅋㅋㅋ
피플 드디어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한다.. 아.하.하.하.하.하
" 나는 나쁜 공산당을 물리치는 영웅이다~~ 아.하.하. "
쪼그만게 본거는 있어가지고 살짝 수류탄의 사용법을 떠올려본다..
사과탄에는 고리도 달려있다.. 고리만 뺀다음 적을 향해 던지면 되겠지?? ㅋ
' 뻥~~ 스르르르르륵~~ 쉬이이이이익~~~~!!! '
그날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뒷창문 너머 가건물에서
누군가 밤새 두드려 맞는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분께서는 병원으로 후송을 떠나셨다..
그 이후엔 그분을 만날 수 없었다......
그새 세월이 흘렀는지 나는 중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보게 되었고
집에서는 교육환경을 바꿔야 한다며 다른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때 그 시절 그 의경 형들이 그립다..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고..
어렸을때의 추억이라면 추억이기 때문일테니..
" 의경 형들.. 어떻게 살아가다보니 저도 그때 제가 그렇게 싫어하던
데모질하는 사람이 되어있네요..^^
정의롭지 못하고 올곳지 못한 세상을 그냥 참고 바라볼수만은 없겠더라구요..
지금의 제 행동들이 언젠가는.. 아니 곧.. 당신과 그리고 나의 우리의 행복의 끈을
이어줄수 있을것 같거든요..
참.. 저만이 아니라 형들도 조금은 달라졌을거란 생각이 들어요..
다들 회사에 취직들 하셨을텐데..
아마 다들 노동조합에서 열심히 투쟁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
적어도 행복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다면..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다들 자신의 공간에서 행복한 투쟁하면서
홧팅하고 살았으면 싶네요 ^^ 마음속으로나마 연대를 다짐합니다.. "
정말 기고한 인생을 산 것 같군. 너무 너무 좋아서 퍼왔습니다. ㅋㅋㅋㅋ 신나라.
이주노동자 농성 들어가던 날, 메달, 난타
쉬리와 난타 (난타 미안해요 ^^;)
포커스 아웃기술이다-_- 알밤이랑 신나랑
명동성당에서 진행 중인 강제추방저지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한
이주노동자 농성투쟁장에서, 현숙씨랑 슈웰씨랑
자이드씨, 현숙씨, 슈웰씨, 이쁜 동지들 ^^
맛나게 드세요!
다큐 찍으시는 현숙씨는 늘 밝은 모습으로 이노분들에게 힘이 되는 분 ^^
식사하시는 모습, 에헤
천막에서 쪽잠을 자고 매끼니 식사도 이렇게 밖에서 해야 하는
힘든 투쟁이지만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이니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마석마임팀 W.A.W 멤버 미투씨
현숙씨가 찍으신 농성투쟁장의 친구들 모습을 보고 계신 모습
농성 6일차에야 비로소 명동성당 한켠의 샤워공간을 얻을 수 있었다
정말 기뻐하셨던 이노분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
마석분들~
현숙씨 슈몬씨랑 명동성당 농성장으로 가는 길에, 이뽀라 ^___^
현숙씨 너무 귀엽잖아요 -_-+ 훗
우리의 모습과 행동이 비록 완벽해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목소리는 희망이 되어 퍼져나갈 것이라 굳은 믿음을 가져봅니다. 우리에겐 꿈이 있기에 희망이 있기에 서로간의 사랑이 있기에 언제나 행복할 수 있고 즐거울 수 있답니다.
정은임 (1968~2004) 추모 정은임
[필름 2.0 2004-08-09 20:00]1992년 11월 2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첫 방송 오프닝 멘트
초콜릿과 사탕, 여자 친구, 남자 친구, 선물. 3월 14일은 그렇게 요란하게 지나갔습니다. 화이트 데이라고요.... 그렇다면, 3월 15일 지난 하루를 여러분은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3.15 마산의거. 4.19혁명의 씨앗이 된, 우리 역사의 달력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날이죠. 35년 전 마산 땅을 울린 그 민주의 함성이 이제는 거대한 사탕 더미에 깔려 신음 소리로 변하고, 또 어느새 우리의 달력에서는 사라져 버린 날이 된 것 같네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현대 사회에 있어서 한 마을에 이집 저집이 동시에 제사를 맞게 되는 것, 그곳은 슬픔과 공포의 역사일 따름이지요. 양민 학살이 자행되었던 거창군 신원면, 경찰 총기 난동이 있었던 의령군 궁유면, 4월 3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 제주, 그리고 아직 채 시신도 인양하지 못하고 있는 부안군 위도 마을, 모두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 곳입니다. 아깝게 목숨을 잃은 분들의 명복만 빌 뿐입니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자신보다 더 유명한 소피 마르소를 데리고 프랑스 대통령이 방한했습니다. 고문서 반환이라는 선물을 앞세워서요. 프랑스 대통령 최초의 방한을 환영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 반환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진작 돌려주지 않고 하필 고속철 TGV가 선정된 뒤일까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홍대 앞에서 여의도까지 오는 데 2시간 30분이 걸려도 코스를 잘못 잡은 자신을 탓하기. 내가 사는 아파트가 바다 모래로 지어졌다는 것이 밝혀져도 이사 잘못한 자신을 탓하기. 다리가 무너져도, 그래, 체중 많이 나가는 우리가 너무 많이 지나갔어, 이렇게 생각하기. 앞서 말한 행동 강령은 대학민국 국민으로, 서울 시민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철칙이었습니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신청하신 곡은 영화 <파업전야>의 '임을 위한 행진곡'. 금요일 첫 곡이었습니다. 천리안으로 어느 분이 이런 글을 올리셨네요. 요즘은 신문에 읽을 거리가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국내뿐 아니라 세계가 온통 아수라장이 돼가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슬퍼요....우리 늦기 전에 시작합시다. 한방울의 물이 모여서 거대한 폭포가 일듯 우리 한 사람의 힘이 점점 파문을 일으키면 뭔가가 변화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셨죠?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꽃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 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 이별이 아니고요. 제가 좋아하는 시인 구광본 시인의 시 중에서 한 구절로 오늘 시작했는데요. 시구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반대네요. 제가 92년 가을에 방송을 시작했으니까 꽃 지는 날 그대와 만났고요. 이제 봄이니까 꽃피는 날 헤어지는 셈이 되었네요. 오늘 여러분과 만나는 마지막 날인데요. 덜덜 떨면서 첫 방송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침 햇살이 남다르게 느껴지거나 책을 읽다 멋진 글을 발견할 때면 맨 먼저 떠올렸던 게 바로 이 시간이었습니다. 저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1995년 4월 1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마지막 방송 클로징 멘트
대학교 3,4학년 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회는 또 어떠해야 하나, 그런 문제들 때문에 고민에 빠졌었거든요. 87학번이니까 그때의 친구들도 다 비슷한 고민들을 했을 것 같은데... 그런 대학 시절을 보내고 방송국에 들어오면서, 다르게 말하면 사회인이 되면서 나도 모르게 잊어버리는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내 이전의 정체성과 지금 처한 환경과의 괴리에 불편해 하면서도 물들어가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로저와 나>는 내가 가졌던 생각들을 단번에 환기시켰고, 그것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그때 얼마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몰라요.
영화 월간지 'KINO'와의 인터뷰
영화를 보지 못하는 환경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밤 12시까지 아이 뒤치다꺼리 하더라도 꼭 새벽 3시까지 영화 1~2편씩 보고 나서 잤어요. 사람이 보수화되는 가장 큰 이유가 가족이 생기는 거예요. 특히 2세가 생기면 생각이 달라지죠. 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건 할 수 있겠는데 결코 우리 아이에게는 나의 신념을 관철시키지 못할 것 같거든요. <허공에의 질주>를 떠올리며 생각해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요즘은 그게 가장 큰 화두예요.
'FILM2.0'과의 인터뷰
그때는 영화를 다루는 매체가 많지 않아 라디오 영화 프로그램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때마침 ‘문청(문학 청년)’들이 ‘영청(영화 청년)’으로 바뀌며 문화 담론이 폭발하던 시기였고, 제 프로가 바로 그런 열기의 창구였지요. 이제는 영화 문화 환경이 많이 달라졌고, 영화가 일상인 시대를 살고 있죠. 청취자도 달라졌고 모든 매체가 영화를 다루고요. 하지만 과연 얼마나 영화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다루고 있는가는 미지수지요. 영화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행복하게 담아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문화일보'와의 인터뷰
관계자 외 출입 금지, 만차... 어떠세요? 이런 문구를 보면요. 어쩐지 뒤로 물러나고 싶지 않으세요? 하지만요, 골목 안 어느 곳엔가 숨어 있어서 간판도 잘 안 보이고 입구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 작은 칼국수집, 선술집에는 언제나 누구나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습니다. 새벽 3시에요. 아직은 어둡고 쌀쌀하죠. 이 가을 골목길 누구나 쭈뼛거리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작지만 아주 편안한 문 열어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 오늘 첫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래니 크래비츠, 'It Ain"t Over "Til It"s Over'.
2003년 10월 19일 다시 시작한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첫 방송 오프닝 멘트
부안 내부에서는 이미 핵 폐기물 유치에 대한 찬반이 갈리고 있는데, 투표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투표에까지 가도록 치열하게 부딪치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라고 오현석 씨는 생각한다고 하셨어요. 동감입니다. 오현석 씨는 예전에 영화와 관련 없는 정체 불명의 사연을 우리 영화음악 게시판에 올려도 될까요 라고 한번 질문을 하신 바로 그분이시죠.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 우리 삶의 문제를 다시 직시하고 그 힘으로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영화는 삶 전반에 대한 시각을 넓혀준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글을 올려주셨던 게 기억이 나네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삶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작은 일들 때문이라는 것. 이건 진짜 맞더라고요. 사는게 작은 일들, 아주 사소한 일들이 뭉쳐져서 겹겹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그 하나하나를 신경 쓰지 못하면 삶 전체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전 그렇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즘은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서시'로 FM 영화음악 문을 열었는데요 서시... 우리 말로, '여는 시'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해서 시를 쓸 사람이 영원한 시작의 의미로 쓴 글이죠. 항상 아이러니해요. 이 끝 방송을 하게 되면 그래...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 하는 의미에서 이런 시를 골랐어요. 꼭 그 마음입니다. 단 한 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펴주지 못하고 그냥 연기만 피우지 않았나... 자, FM 영화음악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오늘 첫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래니 크래비츠, 'It Ain"t Over "Til It"s Over'....
2004년 4월 26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마지막 방송 오프닝 멘트
창문이 모두 영화 속 창문 장면으로 그려진 건물. 영화학을 하는 사람이 주인일까. '창문으로서의 영화'를 생각하게 한다. 구멍을 내어 바깥 세상을 보는 한 면을 제공하는 창문은 때때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케케묵은 답으로도 쓰이니까. 그러나... 이 건물은 정말 멋졌다. 그 위에 걸린 하늘도.
2004년 6월 5일 싸이월드 '은임이 다락방'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테러리즘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테러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엄 촘스키와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에서, 오늘따라 눈에 띄는 대목이다.
2004년 6월 21일 싸이월드 '은임이 다락방'
예전부터 내게 빗길 운전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기'였다. 빗줄기가 형체를 허물어뜨린 풍경은 움직이는 파스텔화. 이제 나는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2004년 7월 5일 싸이월드 '은임이 다락방'
사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대부분의 아름다움은 강렬하고 화려하고 찬란할수록 빨리 사그라들고 시들고 부서지지 않나요?
2004년 7월 19일 싸이월드 '은임이 다락방'에 남긴 마지막 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 특히 아주 젊어서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들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묻혀서 아름답게 기억되는 이유. 여러가지가 있죠? 그들은 더이상 실수나 과오가 없을 테구요, 또 배신도 변절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너무 변하는 세상, 믿지 못할 사람들 속에서 결코 변하지 않을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참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0년전 우리 가슴속에 묻힌 후에 그는 한번도 우리를 배신한 적이 없죠. 리버 피닉스. 피닉스라는 그의 성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져요. 23살. 그때 죽었지만 그렇게 참 불사조처럼 우리 마음속엔 이렇게 오래 살아 남아있네요.
<정은임의 FM영화음악>
지난달 22일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던 MBC 정은임 아나운서가 8월 4일 오후 6시 반, 결국 세상을 떠났다. 90년대 초반부터 라디오 프로그램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등을 진행하며 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세상을 향한 신실하고 심지 굳은 태도로 대중과 호흡했던 그다. FILM2.0은 그가 남긴 말과 글 중 일부를 발췌하는 것으로 추모를 대신한다.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타난 사회-정치적인 논제
Socio-political Themes in The Smurfs :: J. Marc Schmidt
1) 서론
다음은 80년대 대부분의 시기동안 방송되었던 Peyo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관한 논설적인 분석이다. 즉, 내가 "개구쟁이 스머프-이하 스머프-"라는 프로그램에서 알아챈 사회-정치학적인 경향을 분석한 글이다.
"스머프"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우선 이 프로그램은 만화이고 어린이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만화나 티비 프로그램과는 달리 논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머프"는 몇몇 등장인물들의 모험보다는 한 사회집단과 사회 내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 사회와 외부인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나는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가 기독교에 대한 우화이듯이 "스머프"는 정치적인 우화라고 믿는다.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대한 우화이다.
그러나 나는 "스머프"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복적인 선전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할 지라도 당시의 단지 플라스틱 완구류의 판매를 위해 제작되었었던 캐릭터 만화('toyetic' cartoons)의 범람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든, 이 에세이는 "스머프"에 대한 굉장한 찬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어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냉전의 시대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을 보여주었는가? "스머프"는 은유(metaphor)와 동화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어린이들에게 정치적인 주제를 소개했다는 점에서 찬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만약 Peyo가 사회주의자였다면, 그는 소련연방(the Soviet Union)과 동구의 경찰 국가권에서 실행되던 형태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상주의자(utopian)였다. 따라서 스머프 마을에는 경찰도 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드물게 그들 스스로 적과 싸울 시민 의용군을 결성한다. 경찰 국가와는 명백히 대치된다.
"스머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을 짧게 분석한 후, 페미니즘과 동성애의 관점 또한 다뤄보려고 한다. 그러나 에세이의 주된 관심은 "스머프"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우화라는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토피아(Marxist Utopia)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 생활체의 완벽한 전형이다. 완전히 독립적이며 토지는 개인이 아닌 전공동체의 ('소유하다'는 단어가 '사유하다'는 개념일 경우)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Karl Marx)를 나타낸다. 그는 스머프들의 지도자라기 보다는 그들과 평등한 관계로 다만 그의 나이와 지혜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그는 칼 막스처럼 수염을 길렀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의 캐리커쳐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관습적으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의 캐리커쳐인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 마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물론 트로츠키 또한 USSR(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추방당했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각기 다른 직업/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완벽하게 평등하다. 따라서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욱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는 '스머프'이므로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모두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주인이다. 스머프는 자유 시장 경제와 그에 따르는 탐욕과 불공정을 거부하며, 집단은 개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통일체는 그 성분들의 집합보다 더 위대하다. 존 레논(John Lennon)은 우리에게 '사유 재산이 없는 것을 상상하도록(imagine no possessions)' 요구한다. 스머프 마을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자본이 생산 수단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집단이 소유하고 조정하며 고친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명칭에 모두 '스머프'를 붙인다. 예를 들면, 똘똘이 스머프, 목수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른 사람을 지시할 때 좀 더 선별된 호칭이 아닌 '동무(comrad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집단 내의 완벽한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공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마오 제복을 떠오르게 한다.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神)도 사제 스머프(Priest Smurf)도 도 없다. 자연 어머니(Mother Nature)와 시간 아버지(Father Time)를 통해 은유적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물리적 현상의 '실재하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파파 스머프, 가가멜, 발타자르 등의 인물들이 실행하는 마법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종교에서 그러하듯 초현실적인 기호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니며,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시리즈 중에서 '대왕 스머프'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탐욕스런 왕들(그리고 자본가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민을 착취하는 사악하고 압제적인 정부와 마르크스가 공식화한 선하고 인류 평등주의에 입각한 정치 모형 간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충돌에 대한 예시이다. 이 이야기에서 파파 스머프가 없는 사이에 왕이 된 똘똘이 스머프를 전복시키기 위해 스머프들은 시민군을 결성하고, 파파 스머프가 돌아오자 유토피아의 질서는 회복된다. 마르크스를 나타내는 파파 스머프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Gargamel)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스머프는 작고 희귀하며 이를테면 사슴과 같이 먹기 좋은 음식이 되지는 못할 것이므로 이러한 가가멜의 욕구는 비정상적이다. 그것은 실베스타(Sylvester)가 골프공 크기의 트위티(Tweety Bird)를 잡아먹고자 하는 강박관념과 유사하다. 이것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은유적으로 가가멜이 스머프로 대변되는 사회주의를 멸망시키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다. 냉전 기간 동안 서구 사회가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국들에게 포위 정책을 통해 사회주의의 멸망을 획책했던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완전한 자본가인 가가멜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바로 가가멜이 스머프를 잡아서 하고자 했던 두 번째 계획 역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궁극적인 초자본가인 그는 평등이나 선 보다는 자신의 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아담 스미스식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가가멜에게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돈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가멜은 차갑고 신랄하며 근본적으로 공허한 인간이다. 그의 삶은 부와 재산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실리적인 합리주의의 반사회적 효과에 대한 확증적인 실례이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Azrael)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 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불평할 수 없는 노동자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그의 임금을 교섭할 수도 없다. 아즈라엘은 주인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가멜보다 작고 덜 때깔이 난다는 사실은 가가멜이 부르주아인 반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은 은유한다. 아즈라엘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한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세기 동안 노동자들이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된 채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 속에서 고통받아 왔던 것과 유사하다.
가가멜은 자신의 집과 그 안의 연금술 도구라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스머프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유한다. 가가멜의 집에 스머프들과 같은 정치적 구조가 존재한다면, 가가멜의 더 우수한 신체, 지식, 기술에도 불구하고 가가멜과 아즈라엘은 동등한 소유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80년대 시리즈의 후반에 새롭게 등장한 스머플링(Smurflings)과 같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의 인기와 판매력을 증가시키려는 현실 세계의 상업적인 이해 관계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소련 연방의 궁극적인 종언을 예고했듯이, 방송에서 그들은 은유적으로 스머프 마을의 유토피아적인 조화를 위협하는 서구의 침입을 나타낸다.
3) 페미니즘과 스머프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에 의하면 남성은 그의 직업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반면 여성은 '여성'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희생자 명단은 종종 "교사 한 명, 배관공 한 명, 여성 한 명" 하는 식으로 작성된다. 스머페트(Smurfette)는 스머프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성 또는 진짜 스머프들처럼 직업이나 개성에 의해서가 아닌 성(性)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성(性) 때문에 사회의 실재적인 구성원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만화 속에서 그녀가 가가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접미사 'ette' 또한 스머페트가 남성들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두 번째 성(性)인 것이다.
앞서 나는 마을의 모든 스머프들은 평등하다고 단언했었다. 어느 정도까지 이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처음에는 모두 남성 뿐이었고, 스머페트의 개입으로 가부장적인 질서가 위협받지도 않았다. 따라서 스머페트는 정치적으로는 여타의 스머프들과 평등한 관계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상적인 성차별적인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과 외부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 종사하지 않으며, 물론 노동도 하지 않는다. 스머페트는 제작자가 고맙게도 그녀를 머리가 텅 빈 허튼 계집애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유일한 일은 예쁘게 보이며 주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확실히 파파 스머프를 제외한 나머지 스머프들 보다는 다소 똑똑하다.
스머페트는 확실히 남성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대상(object)'이다. 그녀는 대상이며, 남성들은 주체이다. 그들은 능동적이지만, 그녀는 수동적이다.
스머페트에게는 유방이 없다. 스머페트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고려할 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가가멜의 거의 프랑켄슈타인적인 창조물로 삶을 시작했다. 자본가인 가가멜은 당연히 그녀를 만들고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으며 그에게 돈을 벌게 해줄 상품으로 취급했다. 여성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출산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정한다. 스머페트에게 유방이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자연의 부정, 여성을 가부장적인 체제에 의해 부과된 사회 규범에 순응하게 만들어 그들을 제어하려는 남성들의 시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머페트는 남성 스머프들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부차적인 창조물이다. 그녀는 돌로 된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으로 부자연스럽다. 물리적이고 은유적으로 그녀는 '진짜' 스머프가 아니다. 곧 그녀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을 바라봐온 관점과 마찬가지로 사악하고 잘못된 존재이다.
어떻게 해야 보다 훌륭한 여성을 만들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해야 여성을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하나는 그녀의 모든 투지를 빼앗는 것이다. 그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남성 지배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규칙에 따르게 만들어라. 이에 대한 하나의 가시적인 사례로 그녀가 검은 머리라면 금발로 변화시켜라. 서구 사회는 관습적으로 짙은 모발의 여성은 머리가 좋은 반면, 금발 머리의 여성은 머리는 나쁘지만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더 훌륭한 여성을 만들기 위한 다른 방법은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파파 스머프가 스머페트를 '진짜' 스머프로 만들기 위해 마법을 걸자, 그녀의 외모는 아름다워졌다. 그전에는 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여성에게 적용될 때, 못생긴 것은 나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그러나 왜 하나는 아름답고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한가? 누가 그래? 그것은 가부장적 질서이다.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이 99 : 1인 스머프 마을은 완전히 가부장제 사회이다. 이것은 여성은 상품이라는 사고에 더해진다. 그녀는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 맞춰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에 대해 고마워한다.
글로리아 스테이넘(Gloria Steinem)은 예전에 '여성은 역사상 최초의 드렉 퀸(drag queen; 여장한 게이를 일컬음)'이라고 했다. 즉 여성의 아름다움의 이상은 전부 가부장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여성이 성(性)들 간의 구별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거나, 남성들의 시선의 포착물, 단순한 대상인 여성에 대한 개념을 강화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부장제 사회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스머프 마을의 성비가 50 : 50이라면 어떨지 상상할 수 있는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방송에서 본 바와 같은 유토피아는 분명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상적인 마르크스주의 국가는 성(性)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평등할 때만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여성인 스머프 마을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깊이 내재하는 성차별주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스머프들에게 여성이 '자연스러운' 성(性)이라면 왜 그들이 모두 스머페트처럼 생겨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아름다움의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근거나 '금발의 귀여운' 같은 표현으로 등식화된 외연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4) 동성애자 천국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스머페트가 오기 전에는 항상 전부 남성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절대다수가 여전히 남성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방법(여성에 의한 출산)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며, 그들 사회에서는 '이성애(heterosexuality)'가 규범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느 사회보다도 순수한 민주주의에 가까웠다고 믿고 있는 아테네와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정부는 모든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란 남성만을 가리킨다. 여성은 공적인 행사에 참여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동성애는 드문 것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눈살을 찌푸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스머프도 스머페트와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의 어린애 같은 연애 경쟁의 초점이 되기는 하지만, 마을 안 어디서도 진짜 이성애의 긴장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적인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는 스머페트 보다는 서로에게 인상을 주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이 보인다.
스머프 마을에 오랫동안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머프들은 스머페트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확실히 자연은 스머프들에게 남녀간의 접촉의 경우를 보여줬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여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이성애 또한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 스머페트가 다른 스머프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제작자들은 이성애가 존재하지도 않고 이성애의 매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언급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성애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점에 대해서, 나는 제작자들은 제외시키기로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성애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그들은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덩치 스머프, 편리 스머프, 허영이 스머프가 남성동성연애자의 전형이라고 믿는다. 허영이 스머프는 영국의 시트콤인 "Are you being served?"와 같은 인습적인 연예 산업에서 보편적으로 보여지는 종류의 동성애자이다. 반면 편리 스머프와 덩치 스머프는 "Village People"과 같은 맥락에서 극도의 인습적인 남성성으로 과장된 동성애자의 전형이다. 게다가 주책이 스머프와 똘똘이 스머프는 동성애자 커플의 전형을 보여 준다.
5) 결론
나는 Peyo가 우화적인 동화의 형식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고 믿는다. "스머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조명함으로서 뛰어난 판타지 문학으로 성공하고 있다. "스머프"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보여주는 우화라는 증거는 매우 많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이 유토피아적인 이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기엔 너무 개연성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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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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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너무 마음에 든다. 오늘 하루종일 되내어 읽었던 글... 국사의 해체와 역사학의 민주화... 고구려는 그냥 이국일 뿐이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