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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과학의 상품화 3부

홍실이님의 [] 에 관련된 글.

자본주의 경제에서 학술 계층의 존재 조건은 과학자들의 신념과 태도를 일반적인 자유주의적 보수주의 전통의 일부로 강화시킨다. 과학자들의 신념에서 나타나는 폭넓은 차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상반된 믿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하게 부르주아를 나타낼 수 있는 일관되고 암묵적인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이 포함된다. - 개인주의 : 과학에서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대한 부르주아의 원자론적 관점은 소수의 개인들(여기에서는 단지 “우리”)에 의해 진보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과학자들은 스스로를 자신의 의도를 독립적으로 추구하는 자유로운 주체라고 생각한다. “천문학이 지구의 공전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지구의 정지성과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즉자적 감각에 있었던 것처럼, 역사학에서 개인이 공간과 시간의 법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독립성에 대한 직접적 감각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지식인들만큼 독립성에 대한 느낌이 강하고 기만 상태가 한심하게 나타나는 곳도 없다. 과학에서의 개인주의는 인구집단이나 사회의 원자(유전자)들의 속성으로부터 집단의 속성을 유추할 수 있다는 보편적 믿음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해왔다. 이는 또한 출세욕이라는 주관적 경험을 변환시킴으로써 이기주의라는 진화의 법칙을 고안해냈다.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부정이다.


- 엘리트주의 : 소수 지식인 집단의 우월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종종 인류의 생존이 이들 지식인들이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을 설득하고 부추겨서 그들에게 득이 되는 일을 하게 만드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믿게 만든다. 이러한 편견은 특히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을 다룬 공상 과학 소설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소수의 헌신적인 과학자들은 억압적인 지배자를 계략으로 물리치기 위해 공모를 벌인다. 이러한 엘리트주의는 근본적으로 반(反) 민주적이며 전문지식에 대한 숭배를 부추긴다. 또한 대중 조작의 미학적 포장이자 학계의 방식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이기도 하며, 때로는 인종주의와 성 차별주의를 강화하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의 지식을 하찮게 여긴 결과는 농업 발전에서의 재난으로 이어졌다. 엘리트주의 관점은 지적인 삶에 대한 관리적 접근을 옹호하며, 학계나 기업 엘리트의 수용적인(cooptive) 자기선택을 인간사 해결의 합리적 방법으로 여긴다. 과학 내부의 이론적 문제에서, 엘리트주의는 위계적인 조직 개념에 대한 믿음과 환원주의적 세계관에 들어맞는 통제 요인을 탐색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유전자, 사회, 심지어 생태계의 명령 계통 모형을 선호함으로써 각 부분들의 호혜적인 상호침투에 관한 연구들을 지연시키고 있다. 개인주의가 세상에서 부분들(이를테면, 생태계의 종들)이 본질적으로 독립적이라는 모형을 선호한다면, 엘리트주의 패러다임은 자율성을 가로막는 구조를 강요한다. - 실용주의 : 서구 이념에서 “실용주의적”이란 용어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는 “이념적”이라는 단어와 반대로 찬미의 뜻이 담겨 있다. 과학자들에게 실용주의란 상품화와 전문화에 의해 부과된 경계 조건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왜”라는 질문 없이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미사일 전문가에 관한 톰 레러(Tom Lehrer)의 노래 가사를 보면 그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로켓이 발사되면 그것들이 어디로 떨어질지 과연 누가 신경을 쓸까? 내 부서가 아닙니다. 베르너 폰 브라운(Werner von Braun)은 말했지.” 과학자들이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경로는 컨설턴트로서 “정책 결정자”들에게 전하는 자문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효과적이려면 신뢰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문은 수용 가능한 영역에 한정되어야 한다. 신뢰를 거두어들이는 듯한 고객의 치켜 뜬 눈썹은 과학자들이 자문 제공에 좀더 신중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결국 자문가의 지적 지평을 협소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실용주의자의 관점에서, 사회 체계의 불공정에 관한 뚜렷한 감정은 필연적으로 이념적이라는 혐의에 연결되며, 학문적인 냉철함에 반대되는 미성숙성을 의미한다. - 감정과 이성의 분리 : 과학자들은 한 때 세계에 관한 모든 주장들은 증거에 의해 입증되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수립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었다. 권위에의 호소도, 스스로의 소망도, 학문적 논란에서는 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감정으로부터 이성의 일정한 분리는 학문의 정통성을 수립하기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것이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감정과 이성의 분리는 자의식적인 학술 행위의 방해물이 되었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근원에 토대를 두고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거나 연구 방법을 선택하는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학술 논문의 양식화된 서문을 강요한다. 과학자들을 1인칭 대명사를 제거하고 수잔 그리핀(Susan Griffin)이 “수동적인 비(非)인칭”이라고 기술한 문법 형태의 채택이라는 비열한 장치를 통해 스스로 창조적인 작업 과정으로부터 빠져나간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질문들이 가치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형식상 자유로워진 후, 그들이 쉽게 재결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철학자들이 “~이다(is)”와 “~해야 한다(should)”를 어떻게 관계 지어야 할지 평생에 걸쳐 논쟁을 벌이는 반면, 과학자들은 “비용 효과성”, “살상 비(比)” 같은 비(非)인칭적인 어휘들의 완충 효과 덕분에 자신의 노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자유롭게 온갖 종류의 무기들을 만들 수 있다. 이제,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은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이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결과 중의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감정의 보호자로서 사회화가 되어온 여성들이 학문을 하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거나, “보다 감정적”인 것이 덜 이성적인 것을 의미하기라도 하는 양 구조적으로 평가 절하되는 것이다. - 환원주의 : 연구에서 학술 노동과 통제 기능이 분화되면서, 일반 세계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조직화 모형이 학술 사회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관련성 있는 유사한 작업들이 학과장 하에 편재되고, 다소 차이는 있지만 관계있는 업무들이 학장 하에 조직화되고, 각기 무관한 작업들은 다른 단과대학이나 부서별로 조직화된다. 이러면서 회사나 대학의 조직도를 따르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인식된다. 실천에서의 이러한 분화는 원자론적 개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과학자들의 암묵적인 철학 체계 안에서 여전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환원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과학의 상품화 이전 시대로 되돌아가자고 호소하기 위해 과학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트러스트를 야기했던 과거의 바로 그 상황들을 재현하고자 했던 반(反) 트러스트 법만큼이나 쓸데없는 짓이다. 우리의 의도는 이와 다르다. 과학의 상품화,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의 전면적인 결합은 학술 활동을 위한 삶에서 지배적인 사실이며 과학자의 사고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것의 힘에 종속된 채로 남아 있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은 우리 부자유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노동하는 과학자로서, 우리는 과학의 상품화가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그들 노동의 산물로부터 소외되는 일차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는 과학의 강력한 통찰력과 이에 상응하는 인류 복지의 향상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때로는 공표된 목표와 모순되는 결과들을 생산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굶주림이 지속되는 것은 식량 공급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방해하는 어떤 강력한 걸림돌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농업이 이윤과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반면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과는 단지 간접적으로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건의료 조직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기업이며 사람들의 건강 필요에 의해서는 단지 부차적으로만 영향을 받는다. 과학적으로 정교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합리성들은 지성의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집요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는 또한 부산물로서 인간 지성을 유산시킨다. 일부 국가들이 자본주의와 갈라서고 있는 현실에서, 현재 과학의 존재 방식이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현재의 구조는 자연의 섭리가 아닌 자본주의에 의해 부과된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방식을 열심히 따라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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