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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

 

감정의 기원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이별, 황망한 이별이 아니라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더라면, "준비"와 "익숙해짐"의 시간이 있었더라면

슬픔의 크기가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많은 이들이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위안을 건네고, 이별을 맞이하고, 또 슬픔을 견뎌냈다.

누군가는 그러한 타인의 방식들을 또 불편해하기도 했다.

허나 표현의 방식이 달랐을 뿐, 마음에서는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그토록 다양한 이들이, 망자와의 끊어진 관계에서 가장 안타깝고 아쉬웠던 점은 과연 무엇일까?

 

자연에는 의미가 없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누구를 원망할 것도, 운명을 탓할 것도 없다.

인과의 업보 때문도, 기도가 부족해서나 소위 하나님 앞에 교만해서도 아니다. 

원래 자연에는 의미가 없다. 

혹시라도 기독교인들이 그득한 천국 나부랭이가 있다면, 그런 곳은 오히려 피해 가는 것이 망자의 영혼에 더 큰 안식이 될 것이다.    

 

 

다만,

그것이 마지막 인사인지도 모르고 나눈 너무 짧은 대화는 두고두고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 또한 나의 집착이겠지만 말이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나보다..

친구야....

이제,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더 이상 이 세상에 몸을 받지 말고, 

번뇌로부터 영원히 벗어났기를 바란다.  

세상에 대한 여한과 미련은 다 벗어두고 갔기를 바란다.

 

여기 있는 동안은,

우리가 너를 기억해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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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로부터 출발한 두 권의 "정치" 서적

#. 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은행나무, 2012

 

도서관에 대출 상태가 지속되어 한참이나 까먹고 있다가 지난 번에 들렀더니 서가에 돌아와있길래 냄큼 집어왔다. 저자는 젠더 이슈, 특히나 돌봄과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기여를 했던 연구자라고 들었다. 한편으로는 여성을 보호해야 할 성스러운 (?) 존재로, 다른 한 편으로 성애의 대상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찮은' 존재로 차별하고 비하하는 이 기괴한 사회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기대했던 책이다. 더구나 저자가 일본인이라니 호기심이 생겨날 밖에...  

나는 항상 일본 사회 여성의 삶이 궁금했더란 말이다...  

예전 한일 자살 비교연구를 하면서 내가 잠정적으로 갖게 된 인상은.... 미안하지만, 일본 여성들이 만일 차별을 '인정'하고 순응한다면 그닥 불행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한국인들은 일자리가 부족하면 여성이 남성들한테 양보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아내도 경제활동으로 가구소득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에 비해 일본사회는 여성한테 그닥 기대가 없었다... ㅡ.ㅡ 그래서 그런지, 경제 위기 상황에 한국의 여성 자살률은 급증하는데 일본은 변동이 없었다. 일종의 보호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걸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것이고, 그래 편하게 보호받으며 살자 하면 결과가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이 묘한 상황...  (물론, 그래도 선택하라면 나는 한국사회를 택할 거다 ㅡ.ㅡ)   

서론이 길었고... 하여간 그래서 몹시 궁금했던 책이라는 거다.

책은 흔히 가지고 있을 법한 통념 - '점잖은 일본의 여자교수'가 썼다고 보기에는 엄청나게 직설적이고 단호했다. 애써 점잖음 따위는 개나 줘버려, 싹 다 까놓고 말하자, 이런 분위기?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만큼 충분한 설명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여성혐오 현상의 본질이나 맥락 요인들에 대해, 정치경제나 사회학보다는 상당 부분 정신분석학적 접근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 이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이, 각자의 '썰' 성격이 강하다보니, 옳다그르다 하기도 어렵고, 실증자료를 통해 뭘 보여주기도 그렇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둘 다 딱히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프로이드 말씀이 뭐 성경말씀도 아니고... ㅡ.ㅡ  

더구나, 이 분석 틀에 여성이 주체로 등장하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정신분석학 기원으로 올라가면 결국 남는 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리비도와 팔루스에 대한 다양한 변주들인데, 여성 혐오의 기원이 이것이라면 그럼 젠더가 비교적 평등한 사회나 모계우선을 보이는 사회들은 뭐여??? 인간이 생물학적 리비도와 무의식의 세계로 설명되는 존재라면, 지난 수천년 이성의 발전, 가깝게 지난 백 년의 근대화 역사는 다 부질없는 거였나??? 제도니, 문화니, 정치경제니... 이런 거는 다 상관없는 것이란 말인가?

 

물론 새삼스럽게 깨닫거나 동의하게 된 부분도 있다.  

 

예컨데, 남성은 여성이라는 '기호'에 반응하며 이러한 페티시즘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라 고도로 문화적인 것'이라는 설명에는 완전 동의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생물학적 충동으로서가 아닌, 사회적 약자 혹은 학습된 성적 기호로서의 여성이나 아동, 특히나 장애인 여성에게 자행되는 남성의 성폭력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화학적 거세 같은 조치들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여성의 조신한 몸가짐 강조 따위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남성의 남성됨을 인정하는 주체는 이성인 여성이 아니라 같은 남성이라는 설명,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남성에게 과시하기 위한 객체로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또 성적 '대상화'가 될 수 있다는 자각 때문에 그토록 강력한 호모포비아를 형성한다는 설명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런게 막 불편한 거다.

 

남성이 폭력<권력<재력이라는 자원을 통해 여성들을 지배한다고 하면서, 그래서 여성이 '남성의 폭력에 복종하고 지위에 몰리며 돈에 따라온다'는 설명을 듣고 있자면, 이건 도대체 여성혐오를 부추기자는 건지, 비판하자는 건지 헷갈리게 된다. 남성의 이러한 자원에 여성이 끌리는 것은 당연하고, 남성이 이런 자원을 휘두르는 것은 못볼꼴이라는 인식은 양립가능한 것인가???

게다가 여기서 더 나아가 쾌락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 '수컷에 있어서 최강의 자원'이라면, 여기에 지배당하는 여성은 뭐가 되는 거임???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의구심은,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남성들에게 굴복당하고 지배당하고 휘둘리는 여성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여성 주체는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남성은 비판의 대상으로서 실존하는 주체인 반면, 여성은 오히려 남성을 설명하기 위한 객체 정도로밖에 그려지지 않았다는 인상.... 뭉뚱그려서, 남성들에게 속아넘어가고 폭력을 당하고 남성을 숭배하는 집단으로서의 여성이랄까.....  여성들 사이의 차이는 온데간데 없다. 

심지어 여성들이 같은 여성의 인정보다는 남성으로부터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진단을 보고 있자면, 그래서 여자들이 이 모양 이꼴이라는 뜻? 그렇다면 남자들을 비판할 게 아니라 여자들 정신차리라고 운동하는 게 먼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삐딱함일까???   

 

그리고 이건 세대적 차이에서 비롯된 해석의 다름일 수도 있는데....

'딸은 어머니로부터 여성 혐오를 배운다. 어머니는 딸의 여자같은 부분을 증오함으로써 딸에게 자기혐오를 심어주고 딸은 어머니의 불만과 공허를 목격함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경멸을 배운다" 라는 표현은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세대에게는 좀 황당한 표현이다. 아마도 이건 스위트홈 이데올로기에 갖힌 근대 중산층 가족의 전형에서나 나올 법한 스토리인데, 노동계급의 삶에 이게 가당키나 한 설명인지 모르겠고, 더구나 '너희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면서 (몸은 안 따라올지언정) 딸자식의 사회적 성공을 위해 헌신했거나 최소한 동의했던 우리 엄마들 세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어머니가 딸의 행복을 기뻐하지 않는다거나, '너를 평생 손에 쥐고 놓지 않을테다' 하며 지배욕을 갖는다는 해석은 사랑과 전쟁 하드코어 버전에 가히 비길만하다. 

게다가 '여아는 남아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일차적인 애착대상으로 삼지만 아버지와 동일화하여 어머리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아는 어머니를 사랑해서는 안 되며 어머니와 같은 성별에 속하는 대상을 사랑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사랑의 대상 상실은 남아보다 여아가 더 근원적이며 여아는 상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상실의 대상을 체내화한다. 그것이 멜랑콜리, 즉 우울상태이다'

"어머니에게 복종하든 거역하든 어머니는 딸의 인생을 줄곧 지배한다. 어머니늬는 사후에도 딸의 인생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의 감정은 자책감과 자기혐오로서 나타난다"

"(원조교제하는 10대는) 아버지 세대의 손님을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삼아 그들의 비열하고 왜소한 성욕에 자신의 육체를 제물로 바쳐, 아버지에게 소속되어 있으나 아버지가 결코 더럽힐 수 없는 딸의 육체를 시궁창에 버림으로써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다"

.... 같은 표현을 보고 있자면, 어안이 벙벙...  나는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인가??? 정신분석학의 본질은 막장 드라마였던 말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은 '비인기남'으로 그려진 아키아바라 무차별 살상 가해자 사례였다.

저자는 그가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여성에게 선택받지 못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자면 남성으로서 최후의 자존심을 능욕당한) 진단한다. 많은 이들이 파견노동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지적했지만,  그런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런 흉악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라면서, 그 '비인기남'의 이전 글들을 인용하여 '이러니 여자가 생길리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게 치자면, 부인이나 애인이 없는 남성이라고 모두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왜 언급하지 않나? 비단 이 아키하바라 사건만이 아니라, 경제적 불안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불안정 고용 노동자들의 다양한 사회적 일탈이 늘어나고 있음이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게 이를 그저 찌질한 루저남의 미친 짓으로 치부하고 말아버린다면, 정말 답이 없다. 세상은 오로지 여자를 소유하고 싶어 안달인 남자들과, 스스로를 혐오하며 남성에게 기생하는 여성들만 존재하는 곳이란 말인가???  

 

이 책은 여성주의 이론에 익숙한 이들과 함께 토론을 하면서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전반적인 여성주의 맥락에서 보자면, 나의 독해방식이 오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어서 말이다. 정말 여성혐오를 이렇게만 진단할 리는 없잖아??? 조만간 SOS를 쳐서, 이 책에 대한 국내 여성주의자의 '해설'을 좀 들어봐야겠다!!!   

 

* 뱀발: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친구관계야 말로 인간관계의 상급편'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높은 스킬이 필요하다. 연애나 결혼보다 더. 왜냐하면 연인이나 부부관계는 일종의 역할극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제임스 길리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제임스 길리건
교양인, 2012

 

 

사실, 번역이 매우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epidemic'을 내내 '전염병'으로 번역해 놓은 것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상당히 거슬렸다. 전염병 (communicable disease, infectious disease)은 병원체를 통해 전파되는 질환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풍토병 (endemic)도 있고, 대유행 (epidemic) 도 있다고... ㅡ.ㅡ  그냥 역학 관련 용어들이 이 사회에 대중화가 안 되어 나타난 결과겠거니.....

그리고 책 표지가 너무 후덜덜.....  이건 아니잖아....

 

하여간 글은 길지만, 요약하자면 

정치라고는 모르는 임상의사의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해 분석해보니

공화당 대통령이 되면 살인과 자살률이 높아지고, 민주당 대통령이 되면 반대로 낮아진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이야기... 랄프 네이더 같은 좌파나 극우파들이 보기에는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는 말씀!!!

그러게, 나도 여기에 매우 동의한다. 

 

저자는 진료실에서 다양한 폭력 사례들을 겸험했지만, '폭력이라는 전염병은 개인들의 차이만 가지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고 동기를 밝혔다. 그리고 다양한 근거들을 정리하면서, Hill's criteria 에 근거하여 집권 정당이 자살/살인과 '원인적 연관성'을 갖는지 검정해간다. 역학적 훈련이 매우 잘 된 임상의사 ㅋㅋ 훌륭하시다! 

게다가, '폭력치사라는 전염병은 (개인이 아니라) 공중보건과 예방의학의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피르효의 문장으로 글을 맺는 것을 보면 왠지 고맙기까지.... ㅡ.ㅡ 

 

저자는 사회정책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그 정책들로 인해 나타나는 차이를 폭력 뒤에 내재한 '수치심'으로 설명한다. (사소할지라도) 상처받은 자존심은 반동(reaction)으로 타인에 대한 폭력을 낳는다는 것.... (반대로 '죄의식'이 강력하게 작동하면 자살에 이른다). 공화당 집권을 통해 행사하는 정책들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수치를 경험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약간 동의하기 어려운 설명도 있는디.... 

수치심은 불명예와 치욕을 악덕으로, 자부심과 명예를 미덕으로 간주하는 도댁 체계인데 비해, 죄의식은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다. 하지만 수치심 윤리에서 보자면 겸양은 자기 모욕이나 다름이 없다. 전자는 우파의 정치윤리, 후자는 좌파의 정치도덕이 된다 (고 저자는 주장한다)... 

미국의 경우 남부는 수치심의 윤리관이 두드러지고 (그래서 폭력이 만연하고), 뉴잉글랜드는 상대적으로 죄의식 문화가 강하다 (그래서 폭력이 적다) 고 저자는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문화에 대한 역사적 사료들까지 등장하는데, 글쎄올시다....  남부 지역이 플란테이션 중심의 거대 농업자본과 노예제로 대변되는 사회적 불평등이 극심했다면, 뉴잉글랜드는 비교적 일찍 공업화가 진척되면서 이민자와 자유흑인까지 포괄하는 거대하고 (상대적으로 평등한) 노동인구의 규모가 커졌던 것이 더 중요한 이유 아닐까 싶은디....  (어째, 미시적 심리세계를 통해 사회세계를 설명하는게 오늘 정리하는 두 권의 공통 테마였나보다... ) 서부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자살률 높은 것도 상처입은 자존심으로 설명하는데, 이건 좀 화가 날 지경. 

 

조금 더 구체적인 물질적 기반과 제도의 디테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정신과 의사니까..... ㅡ.ㅡ   

그래도, 임상의사로서 교정시설에서의 폭력 감소 프로그램 경험과 이를 통해 정책을 어떻게 구상하면 좋을지 제안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폭력에 기대지 않고도 수치스러운 경험을 견뎌낼 힘이 되어주는 개인적, 문화적, 경제적 자원을 제공해주는 것' 말이다. 

 

비록 정권들 사이에 사회정책의 차이가 그닥 크지는 않지만,

폭력과 자살 예방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한국사회에도 단서를 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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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Again

hongsili님의 [코스모스] 에 관련된 글.

 

책으로 보았던 코스모스가 다큐멘터리와 셋트라는 것을 안 것은 2005년 미국에 머무를 때였다. 칼 세이건 할배의 얼굴도 그 때서야 처음 보았더랬다. 사실 우리 또래 중에 코스모스 다큐를 직접 본 사람이 얼마나 되나 모르겠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국내에 비디오가 출시된 것도 아니니 초중고등학교 시절에 이 다큐를 보면서 과학의 꿈을 키웠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 것... ㅡ.ㅡ

 

하지만, 처음으로 코스모스를 보고 난 후 감격하여, 그 후 DVD 를 사서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다. 엄청 촌스러운 화면에, 역시나 촌스러운 칼 세이건 할배의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그 익숙한 배경음악만 시작되어도 가슴이 떨리곤 했다.

리메이크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우려 반, 기대 반.... 첫 프롤로그 편을 보았을 때에도 너무 화려해진 화면, 그리고 내가 별로 신뢰하지 않는 NGC 작품이라는 것에 좀 허거덕하기는 했다 (심지어 제작사가 Fox 흑...) 그리고 닐 타이슨 목소리가.... 음..... 좀 기름지다 ㅜ.ㅜ

하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역시나 또 빠져들고 말았다.

당연히, 그래픽이 멋지거나 스케일이 웅장해서는 결코 아니다.

 

실패와 역경, 때로는 위험에 맞선 과학자들의 이야기들은 감동 그 자체였고,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회의적 사고와 권위에의 의심, 스스로의 판단, 오류 가능성에 대한 인정, 이성이 아닌 믿음에 굴복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다시 들어도 계속 사무쳤다. 

 

여러 과학자들 이야기 중에서, 특히나 패러데이 이야기는 정말 코끝이 찡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제본사 패러데이가 공개 강연에서 스타과학자의 강연을 듣고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자신이 제본한 그의 강연집을 선물하며 이루어진 인연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가난한 계급 출신의 그가 결코 넘지 못했던 수학의 장벽을, 부유한 가문의 천재수학자 젊은 멕스웰이 수식으로 만들어서 그 논문집을 그에게 선물했던 이야기로 끝난 에피소드 말이다.  패러데이는 40대 이후로 우울증이라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과학에의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계급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왕실과학원에 공개과학 강연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오늘날에도 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칼 세이건도 여기에 강연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기 위해 납함량 분석에 평생을 바쳐온 패터슨이 뜻하지 않게 근세기 납농도 증가를 밝혀냄으로써 자동차/석유 산업의 엄청난 공격을 받았고, 하지만 과학적 증거 앞에 굴복하지 않은 그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무연휘발유가 탄생하여 수없는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게 된 이야기 또한 심금(?)을 울렸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헨리에트 리비트 같은 여성 과학자들에 대한 소개도 매우매우 좋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륙이동설의 증거를 확인했던 한 여성과학자가 지도교수의 권위에 눌려 자신의 논문을 부정했던 이야기는 참 현실적이면서도 교훈을 주는 에피소드였다.  

 

전반적으로, 이보다 더 교훈적이고 이보다 더 계몽적일 수 없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재미와 감동이 있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원본에서 등장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야기가 재등장한다.

세계의 지식이 보관된 인류의 보물이었지만, 그 보물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한 줌의 엘리트들뿐이었고, 그래서 적들이 쳐들어와서 도서관을 불태웠을 때, 함께 도와 도서관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마지막에, 오늘날 과학은 너무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에, 하지만 엄청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소수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이야기가 바로 코스모스를 만든 칼세이건과 그 후예들의 뜻을 잘 드러낸다. 칼 세이건 할배는 평생 이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했다. 과학의 잠재력과 위험성, 그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은 계몽된 대중, 생각하는 대중이 있을 때 뿐이라는 점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다. ㅡ.ㅡ  오죽하면 30년 만에 이걸 다시 만들 생각을 했을까...

오리지널 버전에서는 지구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냉전구도와 지구온난화가 핵심 의제였다면, 이번 편에서는 (대놓고는 아니지만) 또라이 기독교의 논리를 반박하는 데 상당히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 ㅜ.ㅜ 칼 세이건 할배 돌아가신 이래, 시계바퀴가 거꾸로 돌아서 미국에서는 진화론이 한낱 가설이라고 공격받는 일이 드문 일도 아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굳이 길가메시의 서에 나온 대홍수 이야기가 천년 후 구약성서의 노아 이야기로 발전했다는 언급을 한 것이나, 그랜드캐년에 서서 이것이 생겨난 게 6천년 전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꼭 해야만 할 필요가 생겨난 것이다. 오호 통재라... ㅡ.ㅡ

그러다보니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에서 코스모스에 대한 공격을 엄청나게 하고 있다고...  

제발, 그들이 걱정하는 대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부디 이 작품을 보고 과학적/회의주의적 사고와 이성, 호기심을 키워나가 신에게 거역하는 세대로 자라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쨌든, 보고 있자니 다시 칼 세이건 할배 생각이 났다. 

그의 명료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전해주던 과학과 이성의 이야기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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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fiction vs. non-fiction

최근 감상한 일련의 작품들을 돌아보면서, 책상 위에 묵혀 두었던 두 권 고전 소설에 대한 메모도 함께 정리해둔다

 

#. Arthur C. Clarke. <Childhood's end> Ballantine 1984

 

 

 

이 책의 초판 발행이 1953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새록새록 깜놀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 개발을 둘러싼 두 열강의 각축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었고, 남아공의 아파르트 헤이트 중단이나 스페인의 투우 금지 같은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그 시절 말이다.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이 아무런 기반도 없는 채 어느 날 갑자기 섬광처럼 나타난 반짝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의 성과에 기초한 이성과 논리의 진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다수의 과학소설가들이 보여주는 미래사회에 대한 놀라운 예측은 그들의 신묘한 통밥이 아니라, 끝까지 밀어 붙이는 논리적 상상의 전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지배적 정조는 우울이다. 지구인들이 맞이한 새로운 세기는 딱히 디스토피아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토피아라 하기도 어렵다. 전쟁이 없고 물질적 안녕과 복리는 그야말로 골든 에이지라 할 수 있지만, 고통과 갈등과 도전, 절망 조차도 인간 삶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면 결코 행복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그리고 극도의 발전, 그 끝에는 새로운 존재로의 변환과 해탈(?)이 있다. Childhood's end 라는 제목은 그야말로 지구 상에 어린이가 사라졌다는 사실, 유년이 통째로 손실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 아니라, 우주에서 유년기와 같던 지구의 소멸, 그리고 모든 신비주의와 종교를 벗어버린 인류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가장 유쾌한 (?) 장면이라면, 50년 만에 존재를 드러낸 Overloads 의 외모가 '붉은 악마'였다는 점이다. 종교에 대한 불경스러움은 humanist  SF 작가들의 미덕이다 ㅋㅋ..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시험하기 위한 Athens vs. Sparta 프로젝트는 우리의 율도국 프로젝트에 작은 단서들을 주지만, 물질적 기반이 너무나 다르다는게 함정... ㅡ.ㅡ

 

 

#. Arthur C. Clarke <The Fountains of Paradise> Aspect

 

 

할배는 공평하다.

기독교만 까대지 않는다 ㅋㅋ

완고한 불교 승려들과의 대립을 극복하고, 지구 최고의 공돌이 Morgan 은 space elevator 를 건설한다. 그냥 건설에 성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중간에 발생한 사고를 직접 나서 극복하는 만능 히어로 ㅋㅋ

 

고대 전설과 종교- 세속의 정치적 대립, 미디어 같은 소재들을 능수능란하게 엮어가며,

한 엔지니어의 천재성과 불굴의 집념을 이토록 손에 땀을 쥐도록 그려내는 작가의 역량에 새삼 놀랐더랬다. 괜히 SF 삼대천왕이 아닌 게여 ㅋㅋ

 

그러나 정작 내가 가장 꽂힌 것은 Morgan 의 건설 엔지니어링보다 그의 가슴에 부착된 CORA!!!

이거 너무 현실적인 발명품이고 곧 상용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만, 소설 발표된 것이 1979년인데 왜 아직도 안 하고 있을까? space elevator 도 현실에 적용이 되는 마당에???

pacemaker implantation 하듯이 CORA 하나 심어놓으면 무수한 MI 환자를 살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주변에 경보 울리고 근처로 응급 콜 보내고, 거기에 덧붙여 EKG monitoring 하여 위험 징후 나타나면 nitrogen perfusion 이나 혹시 streptokinase injection 까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모르고 있는데 이미 하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할배, 어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정말 멋쟁이!!!

 

그런데 한국어 번역판을 살펴보니 모두 시공사에서 출간한 것들이다. 시공사... 후..... ㅡ.ㅡ

 

#. X-men: days of future past - 브라이언 싱어 감독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그러길래, 왜 엑스맨 3편을 버리고 간 것이여?

망작 3편을 관객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고 리셋하기 위해 이번 편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더랬다 ㅋㅋ

 

마이클 파스빈더 살려주려고 너무 패셔너블하게 그린 것도 좀 웃기긴 했는데, 어쨌든 매우 잘 생겼으므로 오케이.... 그리고, 센티넬 운반하는 장면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면 앞쪽 레일을 뜯어야지 굳이 왜 열차 진행방향 뒤쪽 레일을 옮기나 궁금했는데, 센티넬 몸 속으로 금속이 침투하는 걸 보면서 입이 쩍 벌어졌다. 이전 편에서 미스틱이 철분을 교도관에게 주사해서 매그니토가 탈옥하게 해 주었던 것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모든 캐릭터들 - 심지어 마지막에 진과 스콧까지 - 이 반갑고 또 개인사들이 짠하지만, 그리고 퀵실버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 편의 주인공은 역시 레이븐-미스틱이다. 

그녀가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TV 속에 한 마리 상처입은 짐승처럼 그려졌던 장면, 그토록 가까웠던 매그니토가 날린 발목의 총알 때문에 질질 끌려가는 장면, 다시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매그니토에게 총을 겨누던 장면 속에서 신념과 가치로 움직이는 여느 전사의 모습과 상처입은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보았다. 이전 1, 2 편에서 그토록 능력있고 단호했던 미스틱의 젊은 날이 이런 것이었다니, 내가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랄까.... ㅡ.ㅡ 

 

그나저나 자비에 교수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10여년 간 도대체 무슨 일을 겪길래 그토록 풍성한 머리숱이 민두가 되는지 궁금해졌다. 비스트 박사의 첨단 연구로도 대머리는 막을 수 없다는 슬픈 진실이랄까???? ㅋㅋ 어쨌든 이번 편으로 시리즈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건 분명하다. 브라이언 싱어, 훌륭하다! 

 

 

#. Her - 스파이크 존스 감독

 

그녀

 

이건.... 흔해빠진 액션 어드벤처, 값싼 클리세로 물든 디스토피아 나부랭이의 가짜 SF 가 아니라 진짜 오랜만에 만나는 순정품 SF.....

호아킨 피닉스나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피닉스의 배바지와 그 표정들, 그냥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요한슨의 목소리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들이, 아주 가까운 근미래에 서로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인간 존재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관계가 흉이 될 것도 없고, 직장 동료는 커플 소풍에 이들 커플을 초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또 아주 허무맹랑한 일만은 아니라는 게 놀라운 지점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SIRI 와 대화를 나누고, 옆의 사람보다는 SNS 의 가상의 관계에 더욱 익숙해져 있다. 사실 각자의 사만다에 빠져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던 영화 속의 그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오늘날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매일 만나지 않는가 말이다.  남을 대신해서 가장 인간적인 손편지를 대신 써주는 극 중 테오도르의 일자리 또한 이미 오늘날 존재하는 관혼상제 서비스, 개인서비스, 가장 은밀한 감정노동의 형태로 실존하고 있다. 

 

자신이 사만다의 유일한 연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때 테오도르는 충격을 받는다. 심지어, 무수한 사만다 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철학자를 가상세계에 되살려 지성을 더욱 발전시키며 훨씬 초월적인 존재로 나아간다. 인간의 육체에 갇혀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도대체 '관계맺기'란 무엇인가?

테오도르가 아내와의 관계에 삐거덕 거리면서, 가상 세계에서 내 말을 귀기울이고 모든 것을 들어주는 사만다에게 빠져드는 것은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서투른 관계 맺기로 보이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우와 나도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마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술이 발전한다지만, 그 기술은 인간의 관계맺기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수십년의 친밀한 관계를 테오도르의 손편지에 기대어 발전시켜온 의뢰인들의 관계맺기가 테오도르와 사만다 사이의 관계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 이런 독특하게 아름답고 이성을 자극하는 영화는 너무나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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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치는 감정을 그린 책들

어제 삼성의 나름 사과 발언을 듣고 역시나 궁금해진 것은 근로복지공단의 다음 행보.

여기에서 항소를 포기하면, 그동안 삼성 오더 받아서 충실한 개 역할을 했다는 걸 만천하에 인정하는 셈이고,  계속 재판을 끌고 가면 삼성도 물러선 마당에 몽니를 부린다고 욕을 먹을 것이고....

이러나 저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보험 50주년을 맞아 기념비적 쪽팔림을 경험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삼성의 개 소리를 듣더라도 항소를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사자와 가족들이 그동안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말이다.

 

어쨌든, 마치 삼성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이 사건이 종결된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삼성과의 싸움이기는 했지만, 사회보장제도로써 산재보험을 운용하고 있는 근로복지공단이 소송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자본더러 착하게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결국 공적 주체로서 국가기구가 최소한의 민주적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이 앞으로를 위해서도 중요할텐데,  근로복지공단은 쏙 뺀 채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기까지 해보인다....  

하긴 필수적 영역에서조차 국가기구와 정부의 역할 내지는 존재를 찾아보기 힘든게 최신 트렌드이긴 하니까... ㅡ.ㅡ

 

#1.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마르케스 옹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듣고, 뭔가 한 시대가 저문다는 인상에 장중한 느낌표 하나를 추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할배의 글을 직접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게 언제인가..... ㅡ.ㅡ

할배는 그렇게, 아마도 여한이 없으실 채로 돌아가셨을 것으로 짐작하고, 나는 나름의 추모로 그의 작품을 읽었다. 사실은 스페인어를 익혀서 읽어보겠노라고 묻어두었던 책들이었지만.....

돌아가셨으니 최소한 읽어야 할 책 목록이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과 그 날을 기다리다간 결국 하나도 못 읽을 수도 있다는 조금은 슬픈 현실 인식 사이에서 후자에 가중치를 부여한 것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민음사, 2004

 

이것은 마술적 리얼리즘이고 뭐고를 떠나서 APC model (age-period-cohort) 의 생생한 내러티브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치명적 유행병이자 사회악이던 콜레라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던 시기 (period), 세상은 빠르게 변화한다. 정치는 격동을 거듭하고, 과학기술과 삶의 수단이 급속도로 변하고, 여행의 수단이 바뀌며, 사랑의 가치와 방식도 변하는 바로 그런 시절이다. 

 

이러한 시공간에서 태어나는 각 코호트는 서로 다르면서도, 한편으로 공유할 수밖에 없는 색다른 경험들을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혼재하면서 사회적 세계는 그야말로 대혼란이다. 

 

이 와중에, 주인공들은 나이를 먹는다. 페르미나 다사,  플로렌티노 아리사,  후베날 우르비노는 나이를 먹고, 문득씩 그 나이듦을 실감하며, 하지만 여전히 격동 안에서 사랑을 이어간다. 

 

어떤 수학적 모델이 APC 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플로렌티노에 대해서는 이 무슨 변태같은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안 든 것도 아니었고, 페르미나의 기질도 당최 나의 구미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나는 후베날 박사와 암묵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 같다_) 그들의 늙어감과 함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어쩐지, 그들의 격정을, 나이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미숙함과 실수를, 육신은 초라해졌지만 여전히 빛나는 사랑에 나도 모르게 응원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쓰고 보니, 뭔가 홀렸거나 사기를 당한 것 같잖아 ㅋㅋㅋ

 

이렇게 다른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위대한 이야기꾼, 삶의 통찰이 번뜩이는 열정적인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게 새삼 아쉽구나...   할배, 영면하세요......

 

 

#2. 앨리 혹실드 [나를 빌려드립니다]

 

나를 빌려드립니다 - 구글 베이비에서 원톨로지스트까지, 사생활을 사고파는 아웃소싱 자본주의
나를 빌려드립니다 - 구글 베이비에서 원톨로지스트까지, 사생활을 사고파는 아웃소싱 자본주의
앨리 러셀 혹실드
이매진, 2013

 

어익후, 대리모 합법화라니, 자본주의 상품화가 이 정도였어? 하는 놀라움 한 편에, 뭘 이 정도 가지고, 한국에 한 번 와보시면 깜놀하실 걸? 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던 책....  장례식장에서 카드로 조의금을 결제할 수 있고 비슷비슷한 상조회사들이 장례의 전과정을 전담하며, 모든 산모들이 분만 후 산후조리원으로 직행하고, 결혼식은 판에 박힌 기성상품이 된지 오래인 데다, 아이들의 돌잔치 또한 극도로 규격화되어 있는 그런 사회.....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선배형들 가족 중에 문상 갈 일이 있으면 집으로 갔었다. 동네에는 가끔씩 초상을 나타내는 등이 대문에 걸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누가 자기 집에서 상을 치르나??? 

 

 

대인 서비스, 그것도 감정노동을 대신하는 여러 형태의 대인서비스 사례들을 읽으면서 눈에 꽂혔던 사례 중 하나는 필리핀 유모에 대한 것이었다. 미국인 중산층 부모들은 필리핀 유모가 삭막한 미국과 달리 아직 전통 가치가 살아있는 필리핀에서 왔기 때문에 아이한테 진심으로 정을 쏟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필리핀 유모는 오프라 위프리 쇼를 보면서 새롭게 학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대인서비스, 감정노동, 가사노동자이자 생활의 '멘토'이기도 한 이들의 삶과 경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개인서비스 상품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이 결국 아웃소싱하는 것은 '인내심'이라는 표현도 비수를 맞은 듯했다. "시장은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바라는 방식마저 바꾼다. 손에 지갑을 들고 시장에 갈 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돈을 내고 사려는 물건이다. 반대로 서비스 영역에서 우리의 시선을 빼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 곧 완벽한 결혼, 맛있는 '전통'음식, 훌륭하게 자란 아이, 심지어는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게 관한 경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하는 과정을 쉽게 무시하게 된다." 아이를 돌보면서 가져야 할 인내심, 하기싫은 가사노동을 하면서 가져야 할 인내님, 치매에 걸린 부모를 돌보면서 가져야 할 인내심 - 이런 것들이 아웃소싱된 것이다. 기왕 인내심을 아웃소싱해버린 마당에, 이들 감정노동자의 기분은 이제 안중에 둘 필요조차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는 애매한 관계의 혼란이 남는다. 이러한 종류의 감정노동, 그리고 가장 사적인 대역 노동이라는 것이 차가운 계약적 관계만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친밀함으로까지 발전하지만, 그런 관계는 때로 갈등을 야기한다. 돈으로 거래되는 수고와 보답이라는 차가운 이름표를 달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진심을 표현할지 알기 어렵고, 더구나 비금전적 친밀감이라고 포장된 착취도 너무나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은 내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정이와 담이가 우리 집에서 자랄 적에 이러한 갈등은 언제나 한구석에 일촉즉발의 시한폭탄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 가족들이나 정이네 식구들 누구도 돌봄의 관계가 돈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친가족보다 더한 유대관계에 기초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있었다. 두 아이들이 사춘기를 맞아울 엄마에게 '친이모도 아니면서...'라고 떼를 쓰던 순간이 아마도 갈등의 최고조가 아니었나 싶다. 둘 다 지금은 너무나 부끄러워하는 일이지만, 그 때는 최소한 관계에 대한 그들 나름의 냉정한 진단이었다. 

 

 

(암묵적인) 호혜성에 근거해서 '그냥 베푼다'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가, 우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친구들은 시장이 도래하면서 같이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가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팔 때 여전히 옆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표현이 딱, 이만큼의 진실을 잘 드러낸 게 아닌가 싶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안타까워하거나 목가적 회고를 통해 과거가 좋았었지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렇게 가야 하는 건지, 호혜에 기반한 비시장적 협력의 가능성은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고민하는게 아닐까 하지만..... 

 

"시장 세력들이 직장 생활과 가정 생활의 안정을 해치면서 불안감을 조장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을 살면서 의지가 되고 위로가 돼주는 것도 시장이다"는 말이, 슬프지만 진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대인 시장서비스들은 결국 "경영자들이 가정생활에 잘 대처할 수 있게 함으로써 어려운 회사 생활에 좀더 쉽게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다" .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병도 주고 약도 주고, 심지어 그 약을 팔아서 돈까지 버는 셈이다.. ㅡ.ㅡ 세상에 이렇게 효율적인 제도가 있나 싶다 .. ㅜ.ㅜ

 

책 다 읽고 났더니 자본주의 진짜 무섭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머리가 멍~ 하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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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주는 책들

#1. 인간은 어떻게 유전자를 조종할 수 있을까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 후성유전학이 바꾸는 우리의 삶, 그리고 미래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 후성유전학이 바꾸는 우리의 삶, 그리고 미래
페터 슈포르크
갈매나무, 2013

 

요즘 잘 나가는 아이템인 후성유전학에 대한 대중적 개론서.... 이쪽 방면 공부에 손 놓은지 너무 오래된지라, 대강 분위기를 파악해보고자 읽었는데 상당히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술적 디테일에 치중하지 않되 필요한 부분은 간결하게 설명해주고, 또 이런 종류의 대중서들이 빠지기 쉬운 환상적 낙관주의에 대한 경계도 나름 충분한 편이라서 개론서로서는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성유전학이란 DNA 염기 서열의 변화에서 기인하지는 않지만, 세포에서 딸세포로 유전되는 유잔자 기능의 모든 변화를 다루는 학문 분야이다. 그리고 DNA methylation, histone acetylation, microRNA 이 세가지가 gene-environmental interaction 의 신비를 풀어줄 핵심 기제라는 것은 좀 외워두어야겠다 ㅋㅋ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유전학의 대전제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 어쩌면 라마르크의 가설이 조금은 진실을 담고 있을 수도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사회와 건강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는 생물학적 경로라는 점일 것이다. 특히나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콘라드 웨딩턴의 후성유전학적 지형 epigenetic landscape 개념은 생애과정 관점으로 건강, 건강불평등의 궤적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될 만하다. 

 

또한 향후 약물이든, 사회 정책이든 무언가 중재를 개발하는데 중요한 고려사항이 될 것임은 분명한데, 사실 이렇게 유전(물질)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이 좀 무섭기도 하다...  하긴 지구 탄생 45억년의 역사를 무시하지는 말자구.... ㅡ.ㅡ 

 

 그나저나 우려스러운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보이는 태도처럼, 이렇게 유전(물질)이 중요하고 자녀 심지어 손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니 이들에게 건강을 물려줄 수 있도록 우리의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자는 교훈이다.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지 않고, 건강한 식습관을 갖지 못하고, 그래서 후손들에게까지 민폐를 끼치는 것이 과연 온전히 개인의 책임인가  말이다. 소위 '맞춤형' 예방의학 담론들은 거의 예외없이 개인 수준의 건강행태와 치료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이미 많은 사례들에서 보여주고 있듯,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초래한 것은 '사회적 삶'들이다. 만일 이러한 관점을 놓치게 된다면, 후성유전학의 성과들은 한차원 높은 개인책임론과 사회적 불평등의 강화에 기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 맥락을 거세한 과학 발전이 가진 일반적 위험성이 여기라고 다른 건 아니지 않나...

이 분야는 조금 더 추적해서 흐름을 따라가볼 필요가 있겠다. 

 

참, '역학자'를 반복적으로 '유행병학자'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서는, 그냥 역학이 변방의 학문이라 이 분야 전공자가 아니고는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 Body Economic: why austerity kills (2013)

 

 

킨들로 읽은 것은 어째 정리하기가 애매하다... 

 

내용은 훌륭하고 분석도 시의적절한데, 아 이 뭔가 찜찜함....ㅡ.ㅡ

 

결국 이 책에 소개된 근거, 그리고 그밖에 많은 증거들이 일관되게 시사하는 바는 긴축이 건강과 생명에 부정적 댓가를 초래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선동적인 자료 제시방식과 논거에 흠칫 놀랐다고나 할까???

 

저자들은, 긴축 지향의 구조조정을 추구하는 경제학자들이 정책의 건강영향, body economic 에 대한  근거에 입각해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해야 한다고 주구장창 주장하면서, 마치 과학적 증거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정책의 분명한 나침반인양 주장하고 있다.  정말 책 읽는 내내 실증주의의 12사도를 만난 듯한 느낌... ㅜ.ㅜ

"In God we trust; all others must bring data" 이거 너무 후덜덜하지 않나?

 

때로는 경험적 증거들이 불충분한 경우도 있고, 모든 근거들이 일관되게 한 방향으로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더군다나 가끔은 근거가 충분하기 전에도 어떤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증거 있으니 우리가 최고, 너네는 왜 근거도 없이 긴축정책을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면 이건 좀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 그 동안 보건학 영역에서는 너무나 많은 중요 예방정책들이 근거 부족을 이유로 미뤄지고, 또 비판받고는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벤젠이, 담배가, '확실한' 증거 부족을 이유로 규제되지 못했던 사례는 그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과학적 근거의 생산 또한 정치경제적 과정이며, 데이터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마치 데이터에만 근거한다면 온갖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또다른 역풍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저자들이 조금만 유념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분명히, 긴축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 불황 시에 채택할 수도 있는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며, 그러한 잘못된 선택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 때로는 생과 사를 가르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이 보여주는 내용들은 매우 중요하다.  

 

 

#3. Why people die by suicide

 

 

 

 이건 도대체 언제 읽고 묵혀둔 책인지... ㅡ.ㅡ

책은 길지만 핵심 메시지는 세 가지.

 

첫째,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반복화된 학습 때문이든, 우연한 사고들의 연속에 의한 것이든) (capability to enact lethal self-injury)

둘째, 세상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고립감 (failed belongingness)

셋째,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는  인식(perceived burdensome)

이 세 가지가 결합할 때 자살의 위험이 크게 증가한다는 것.

 

개인 수준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논거이며 증거들도 풍부한데, 이것이 한국사회와 같이 인구집단 발생률의 증가로 나타날 때에는 어떻게 확장시켜야 할지 고민이다. 둘째와 셋째 요소는 쉽게 적용할 수 있는데, 첫째 요소는 특정 코호트나 집단 이외에 인구집단 수준에 확장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이러한 능력이 갖춰지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뛰어넘을만큼 강력한 죽음에의 열망이 (그것도 집단 수준에서) 발달했다고 이해해야 하나??

이후 한국자료 분석할 때 참고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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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이것저것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준 책이었다. 하필, 세월호 침몰 사고가 나고, 극단적 위기 앞에 우애와 희생, 한편으로 배신과 무책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던 바로 그 시점에서 말이다.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현암사, 2013

 

 

책은, 어떻게 협력이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그리고 무엇에 의해 약해지고 있는지, 이를 강화하려면 어찌 하면 좋을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 개념의 구분 - 공감과 감정이입

 

'공감 (sympathy)'은 타인에 대한 동일시라는 상상적 행동을 통해 차이를 극복해가는 끌어안음의 과정인데 비해, 감정이입 (empathy) 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란다.

전자가 후자에 비해 더욱 강한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어쩌면 후자가 더 강력한 실천이 된다. 냉정하지만 말이다. 너의 심정과 고통을 내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고픈 의지를 촉발하지만, 다른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도 실천은 가능하다. 공감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연극을 위한 하나의 '감정적 보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감정이입은 대화적 교환에 더 많이 연결된다. 감정이입을 통해서는 단순한 대변 뿐 아니라,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여러 소집단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중재를 할 때 필요한 능력은 후자이다. 물론 협력을 위해 두 가지 모두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건조한 설명에 내가 꽂힌 것은, 나의 사회적 협력이 비교적 냉정한 '감정이입'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 차가움을 스스로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도대체가 폭발적인 감정적 동일시가 좀처럼 잘 안 일어난다는... 그런데 차가운 감정이입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닐 뿐 아니라 몹시도 필요한 협력의 기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일종의 위안을 얻었다고나 할까??.. ㅡ.ㅡ

그런데 이런 개념이라면 예전에 최장집 교수가 한국사회 운동의 엘리트주의 과격함이 공감은 부족하고 감정이입에서 비롯된 활동 때문이라는 비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감정이입은 차분하고 격정적이지 않은 속성일텐데 말이다. 원래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아리스토텔레스한테 가서 물어봐야 하는 것인가??? 시간 날 때 이 개념들의 차이에 대해서 좀 찾아봐야겠다..  

 

 

#. 협력이 약해진 사연...

 

세넷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사회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 공감과 감정이입, 공식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작동하는 규율, 의례, 사회성과 예절을 중요한 요소로 바라보았다. 협력이란, 문서화된 제도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어렵다. 어쩌면 불필요해보이는 것, 인간 삶의 부가적 요소로 여기지는 것들이 협력을 가능케하는 핵심 요인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협력은 빠른 속도로 쇠퇴하고 있다. 점증하는 불평등, 무례한 노동공간이야말로 협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의 다른 책 '뉴 캐피털리즘'에서도 통렬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새로운 노동공간, 특히 부유하는 컨설턴트, 단기 임원들에 의해 지배되는 금융산업의 대두,그리고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해나갈 틈을 주지 않는 파트타임의 확산은 비공식적 협력 관계, 작업장에서의 권위, 상호신뢰, 일에 대한 혹은 동료에 대한 헌신 같은 소중한 가치들을 모두 잠식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시간제 일자리의 확산은 개인들의 경제적 필요 일부와 기업의 노동 수요는 일부 충족시킬지 모르겠으나, 엄연한 노동소외의 확대라 보아도 무방할 듯 싶다.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일터, 비공식적 규율을 형성하고 사회성을 키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일터란 거대한 이방인들의 일시 집합소에 지나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사태와 관련하여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세월호 선장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생각하면서도, 오랜 관계를 통해 협력을 쌓고 권위를 획득한 리더가 아닌, 나이많은 계약직 바지선장인 그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권위를 가지고 다른 선원들을 지도하며 헌신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 정말 의문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여기에 국한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다는 점이다.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많은 이들이 협동하려는 의욕 자체를 잃고 움츠러드는 '비협동적 자아 uncooperative self' 로 전환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협력의 강화.....

 

하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협력의 손실이 꼭 돌이킬 수 없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세넷은 썼지만, 협력이 약화된 맥락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데 비해 강화의 방안에 대해서는 뭐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작업장에서 기술과 리듬을 익히고 몸으로 체화함으로써, 고장난 협력을 다양한 수준으로 수리한다는 건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이여... ㅡ.ㅡ

한편 실용적 효과를 지닌 일상의 외교술이라는 이름으로 몇 가지 협력의 방안을 제시하는데, 이 또한 사회수준에 실행하기에는 지나치게 모호하고 미시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카운슬링 (감정의 온도를 낮춘 우회적 협력 방안), 중재자를 통한 갈등의 관리 (그것일 때때로 침묵 혹은 암묵적 '예절'로 봉합될 수도 있으며, 미국내 한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갈등 해결 상황이 한 사례), 참여 (능동적 절차)  가 그것이다. 

 

그는 공동체를 향한 추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몰가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보수주의나 알린스키 등의 사회적 좌파나 모두 국가를 비판하고 공동체의 힘을 강조하지만, 후자는 그렇기에 국가와 구조적 요인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세넷은, 사회와 공동체가 들어있지 않은 개인의 삶, 한편으로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이상화된 정치적 공동체 모두에 대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공동체가 중요하고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소명을 가져야 한다고, 혹은 이상화된 과거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싶다. 빈민이나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그 한계는 정치적 한계이고 경제적인 한계이다. 가치는 사회적 가치이다. 공동체가 비록 삶의 전부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진지한 즐거움을 약속해주기는 한다."  

 

그러면서 세넷은 '연대'보다는 '협력'을 강조한다. 괴이하게 들리지만, 현실세계에서 (특히 좌파들이) 연대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강제하고 외부를 배제하며, 더구나 위로부터의 통제와 결부되어 오히려 협력을 왜곡했다는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다. 글쎄다.... 이런 설명대로라면, 그건 진정한 연대가 아니지 않을까 싶은디? 예전에 레빈스 할배가 지적했던 것처럼, 연합은 기본적으로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고, 그렇다면 세넷 자신이 강조하는 (차이에 기초한) 감정이입 속에서 협력을 구축하는 것이 연대라고 할 만한데, 왜 그렇게 넌덜머리를 내는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ㅡ.ㅡ 연대를 연대한 사람들끼리만의 협력으로 보고 타자를 배제하는 부족주의의 소산으로 본다고나 할까???

 

 

#. 사족 

 

함께 사는 삶, 협력이라는 화두 앞에서 몽테뉴가 했다는 말은 큰 질문을 던져준다. "내가 고양이와 놀고 있으면서, 사실은 그 고양이가 나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타인의 내적인 삶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거나 혹은 들쑤실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양이의 본심을 모르면서도 계속 고양이와 놀 수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는 기존의 사회적 질서가 보여준 것보다 더 깊이 협력할 능력이 있다"니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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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휴가_ 대단원

hongsili님의 [안식월 휴가_Iguazu] 에 관련된 글.

 

#1.

 

Buenos Aires 의 마지막 날....

플로리다 스트리트를 한가롭게 거닐며 기념품을 장만하고,

마지막으로 수미쌍관 구조 확립을 위해 Filo 에서 스파게티와 피자 먹고 컴백 홈 ㅋㅋ

 

#2.

 

이 여행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이구아수의 풍광이 압도적이기는 했지만,

손끝으로 발바닥으로 체험하고 사람들과 어려움을 공유하는 여행이 더욱 갚지다는 교훈?

 

 

 

 

 

그리고 여행은 사람들과 함께 하지만, 그 우애와는 별도로 여전히 지속적인 고독과 성찰의 길이라는 것... 

황량하고 거친 자연 속에서 작은 도전들을 성공시키고 성취의 기쁨을 맛보면서

다음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가슴 두근거려하는 작은 흥분들이 모여서 또 다음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것 아닌가 싶다.... 


파타고니아의 그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ㅡ 황량한 벌판, 탑처럼 솟은 봉우리들과 빙하, 거친 물결, 파란 하늘, 세속의 근심 따위는 날려버릴 그 강력한 바람, 우아한 콘도르와 독수리들, 무심한 과나코와 비정함을 보여준 여우, 그리고 따뜻한 사람들의 미소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3

 

돌아오는 길도 결코 쉽지 않아서, 예상치 못한 모험 ㅡ.ㅡ

델타 항공의 뻘짓 때문에 중간 기착지 디트로이트에서 하루가 지연됨.
성격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라짐... ㅋㅋ

나로서는 정말 놀라웠던 것은, 이 거대한 항공산업에 고장난 비행기를 대체할 단 한 대의 유휴 비행기도 남겨 두지 않는 타이트한 자본주의 생산 방식...

그래도 엉겁결에 묵게 된 쉐라톤 호텔, 맛난 피자와 샐러드, 개고생 속에서 은근히 피어난 승무원들과 승객들의 동질감..... ㅋㅋ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쉽지 않아라...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의 일부인 것을!

 

기억들을 정리하다보니, 벌써 아득한 옛일인 듯 싶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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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휴가_Iguazu

hongsili님의 [안식월 휴가_El Chalten] 에 관련된 글.

 

드디어 여행기도 마지막으로... 

여행보다, 돌아와 정리하는게 더 힘든 거 같아... ㅡ.ㅡ

 

#1. 

 

"새벽같이 일어나 비행기 탔는데 폭우가 내려 착륙을 못하고 하늘을 맴돌고 있다...

이대로 인생이 끝나면 나는 여한이 없다만

남은 사람들이 슬프고 황망하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닥칠 일이고 내가 고통없이 여한없이갔다는 것을 그들이안다면 조금 위안이 될까나

부모님을 남겨두고 가는게 안타까울 뿐..그분들을 누가 돌볼 것이며 상심은 무엇이 달래줄수 있을까"

 

혹시라도 나중에 비행기 잔해가 발견되면 남기려고 에버노트에 기록해두었지만, 근처 300km  떨어진 시골 공항에 기착했다가 한시간 넘게 기다린 후 날씨 좋아지면서 무사히 Iguazu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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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처음으로 국내선 타고 Ushuaia 착륙했을 때 사람들 박수 치고, 다시 El Calafate에서 Buenos Aires 착륙했을 때에도 박수들을 치길래 기이하다 했는데 여기서 나도 진심으로 큰박수 ㅋㅋㅋ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자다가 이구아수 아열대에 떨어져 아무것도 모른채 인생이 끝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후덜덜...

 

이구아수 현지 운전기사의 미숙한 안내와 호텔 체크인 지연 때문에 사람들 약간 뚜껑열리고 라미로가 얼마나 능력있는 투어리더였나 다시 되새김....

심지어 저녁도 그가 추천해 준 식당에 가서 해물요리를 먹었음 ㅋㅋ 이 지역에서 잡히는 물고기 Surubi 라나? 험악하게 생겼지만 맛은 최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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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동네는 완전 상업화된 관광지!

조용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던 파타고니아가 그야말로 눈에 밟히더라니 ㅜ.ㅜ


하지만 또 막상 브라질 국경 넘어서 폭포 실물을 보니, 정말 장관은 장관.... 
엄청나다는 말로도 차마 다 표현을 할 수가 없더라니.. 천지연 폭포 천개 가져다놔도 자리가 남잖아....

Torres del Paine 의 Salto Grande  웃겨 ㅋㅋ

그리고 폭포 가까이 가서는 물보라가 너무 심하게 날려서 눈을 못 뜨고 마구 찍었는데, 무지개가 찍히기도 함 ㅋㅋ 사실 물보라보다는 그냥 폭우에 가까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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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날 브라질 쪽에서 폭포의 전경을 감상했다면, 다음 날은 아르헨티나 쪽에서 폭포를 "체험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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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ior, mid, inferior 트레일 코스를 모두 돌고 마지막에 보트 라이당까지...

사골 국물 알뜰히 우려먹듯이 폭포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루종일 ㅋㅋ


보트는 폭포 코 앞까지 가서 거의 물줄기 밑으로 들어갔는데, 눈을 못 뜨는 바람에 아무 것도 보지는 못함 ㅋㅋㅋㅋ 콧구멍으로 물 다들어 가고 나 죽는다 곡소리가 절로 나는디 앞자리에 앉은 고딩 단체 남자애들 일어나서 환호성 지르고 난리남 ㅋㅋ 

정말 폭포 끝판왕이라 어떤 폭포에도 놀라지 않을거 같음..

혹시 빅토리아 폭포나 베네수엘라 엔젤폭포 정도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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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음 날은 아침에 과일과 빵, 신선한 과일쥬스를 배터지게 먹고 브라질 쪽 bird park 방문...
동물원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공원은 신선하기는 하더라구 ....

어쩜 자연계에 그런 색깔의 새들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말이지....

물론 나중에 Eduardo Galeano 가 쓴 동화책 보고 그 예쁜 앵무새 색의 비밀을 알게 되었지..흠

큰부리새는 첨에 엄청 신기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비둘기 같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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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엄쉬엄 돌아와 맛난 점심 먹고 Buenos Aires 의 귀환을 기다리며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만끽.....

돌아오는 길, 참 한결같은 국내선의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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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휴가_El Chalten

hongsili님의 [안식월 휴가_El Calafate] 에 관련된 글.

 

 

#1.

 

아침 일찍 빙하 트레킹하러 El Chalten으로 출발.


중간에 호젓하면서도 황량한 곳에 고독하게 자리한 Leone 카페에서 잠시 휴식...

이곳에서 라미로가 추천하는 레몬 파이 시식... 사람들 라미로가 시키면 뭐든지 함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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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무렵부터 버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아니나 다를까,  카페 얼마 안 지나 버스가 멈춤..

도통 사람들이 지나지 않는 도로변에서 무전기로 연락하고 기다리길 한 시간....

버스회사 사장님이 어마무시한 야전 버스 몰고 나타남 ㅋㅋㅋ.

사람들 대 환호... 이 버스라면 사자가 우글대고 코끼리가 날뛰는 세렝게티 질주도 무섭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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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트레킹 떠나는 배시간 맞추려고 과속 알람을 방석으로 똘똘 감싸고 미친 듯이 달림 ㅋㅋ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천천히... 뭔가 막 무전이 오가더니 전하는 소식은

커다란 빙하가 무너져 내려서 떠내려오는 바람에 안전 문제로 빙하 방면 모든 선박 운행이 취소되었다는 ㅠㅠ 라미로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ㅠㅠ

뭐 어쩌나 할 수 없지... 아쉽긴 하지만 어제 실컷 본 빙하를 떠올리며 한껏 여유 있게 이동....

청명한 날씨 속에서 저 멀리 Fitz Roy 감상하고, 독수리와 콘도르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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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국립공원 안 쪽에 자리한 작은 마을 El Chalten...

트레킹을 위한 거점답게 자그마한 호텔, 캐빈들이 늘어서있고 여기저기 트레킹을 나서거나 돌아오는 사람들 모습이....

너무나 작고 예쁜 마을인데, 그래도 맛난 빵집, 와플집, 맥주 양조장이 있음 ㅋㅋ

숙소 내부 모습이나 창문밖 정경도 아기자기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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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고 가벼이 폭포와 cerro torres 보러 트레킹 네시간...
정말 눈과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

결국 내일도 빙하 트레킹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사람들 불만 없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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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또 라미로의 추천에 따라 맛집 탐방....

야채 수프, 풍성한 샐러드, 로컬 비어와 송어 먹고 사람들 또 대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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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침 일찍 먹고 Fitz Roy 전경을 감상하러 트레킹 시작...

정말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아기자기하고 신비로운 숲길을 지나,

봉우리가 가장 잘 보이는 전망대까지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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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는 경치도 일품이라고 했는데, 날씨가 점점 더 흐려져서 나는 그냥 회군 팀에 합류.... ㅡ.ㅡ


오다가 예쁜 새들과 신비로운 호수도 보면서 쉬엄쉬엄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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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에서 라미로가 엄선해준 산딸기 먹으며, 바람에 흩어지는 무지개를 감상하는 건 이제 이 여행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경험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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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니 아직 이른 오후...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와플 가게에서 맛난 커피와 waffle fiesta de calafate 먹고,

잠시 숨돌리고 난 후 마을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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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거센 비바람 시작...

정말 마을을 쓸어버릴 것 같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방안에서 얼굴에 팩하고 평화로운 한때!!!

이런게 평화여 ㅋㅋ
저녁에는 1층 카페에서 맥주 한 잔 마시며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Jon Elster 의 책읽기 ㅋㅋ

 

#3.

 

간밤에 무서운 바람소리에 잠을 뒤척였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발이 ㅠㅠ

하지만 세수하고 짐을 챙기다보니 또 언제 그랬냐는듯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날씨...

이 동네 날씨는 정말.....


간단히 아침먹고 또 산책.... 이제 정말 끝이구나 싶은 아쉬움......

 

이제 부에노르 아이레스로 돌아가기 위해,

오는 길에 들렀던 레오나 레스토랑을 다시 지나 El Calafate 공항으로...


돌아오는 길,

파란 하늘과 저멀리 구름들, 황량한 파타고니아 들판, 그리고 옥색 호수들이 차창으로 끝없이 스쳐가는데, 정말 언제 또 이런 광경 속에 파묻힐 수 있을까 싶어 아쉬움이 한 가득....
잊을수는 없겠지, 이 모든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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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에노스 아이레스 돌아와서는, 저녁 아홉시반 El Establo에서 최후의 만찬...

밤 열한시에 스테이크 먹어보지 않은 자와 인생을 논하지 말라구 ㅋㅋㅋㅋ
모두들 그동안 라미로의 세심하고 현명한 투어리딩에 고마워하며, 힘든 여정을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 덕담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 

그리고 경상도 아지매의 끝없는 크리스 사랑에 모두들 환호 ㅋㅋㅋㅋ 
세대와 국경을 넘어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는 다 똑같다는 일종의 슬픈 진실이랄까 ㅋㅋ


마지막으로, 호텔로 돌아와 라미로, 그리고 헤어질 동료 여행자들과 진심을 담은 작별인사..
여행이란 끝없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


내일 새벽에는 이제 전혀 새로운 Iguazu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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