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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2)..영은묻고 나 답하기..

  • 등록일
    2009/08/13 14:51
  • 수정일
    2009/08/13 14:51

으으.... ...뭐야.....

영은 너무하는 거 아니야...이건....흑흑흑..

이건 뭐랄까 ....영은이 땜시

완존 내가 숙제하는 기분이랄까...?

이렇게가지 해주면 난 어떻게 하란 말인지.....^^;;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겨우

가물가물한 기억력 몇 가닥인데

이처럼 마구마구 숙제를 던져주면...난...난....흑흑흑

으아아아앙......

 

옆에 혜린샘이나 종민샘 있으면 대신 답하라고

강요하고 싶어질 정도군....크크크

 

여튼

이렇게가지 영은이가 정리했는데

밍기적 거릴 수 도 없고....그렇다고 걍 가물가물한 기억을 믿고

부정확하게 답할 수 도 없고

진짜로 난감하군....갸갸갸갸....

 

여튼

나 진자로 기억이 잘 안나...하는 자기방어적 변명을 먼저 하고 싶어진다...ㅎㅎ

진짜로 머리가 딴나라로 놀러 갔다는 것 이해해주고 읽어주길 바란다....ㅎㅎ

 

나중에 네가 책 돌려주면

제대로 나두 정리해 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단다...ㅎㅎ...물론 나중에 시간이 되면

이라는 단서가 붙지만....히히힛

 

여튼

네가 묻고 있으니 외면할 순 없고

뭐...여튼 답은 해 볼 요량....ㅎㅎ

 

악과 공포

 

 

영은

악과 공포는 샴쌍둥이에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악이고 악이라고 하는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래요. 근데,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모두가 악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죽음도 악인가요?

여기서 악은 설명 할 수 없는 것, 이해 할 수 없는 것, 칸트에 말로는 인간이 이해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닌 예지계에 속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지계에 있는 것들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존재를 알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여기서 궁금한건 앞에서 악이라는 것이 설명 할 수 도 이해 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뒤에서는 계속 악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읽으면서 종종 그래서 도데체 악이 뭔데? 하는 생각이 들고 악이란게 정의 되지 않으니까 뭔가 계속 한편에서 납득이 잘 안간달까.. 그래요.

 

=>

음 말그대로 악과 공포는 샴쌍둥이가 맞는 듯 하다.

다만 한몸이면서도 다른 존재랄까 ?

결국 우리들을 공포스럽게 하는 것...그렇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써

즉, 두려워하는 존재로써 우리들은 악을 상정한다는 거겠지.

결국 공포가 오면 우리는 그 공포를 우리에게 주는 어떤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데 그것이 곧 악이 아닐까 싶구나. 그렇니까 공포가 오면 악도 따라서 온달까 ?.....ㅎㅎ

내가 칸트는 잘몰라서 말하기 많이 망설여지지만 생가해 보면 우리 인간이 상정하는 악이라는 것은

어쩌면 구체적인 현실 혹은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관념적 상징처럼 보인단다.

즉,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악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이지.

따라서 성서에서 예언서들이 하는 역할 즉, 보여주고 현시하도록 해주는 것이 아닌 막연하게 던져주고 그 공포감을 가지고

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공포를 만났을때 막연히 그 공포를 받아들이든 저항하든지 간에

그 공포를 주는 어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악이라고 상정하고 혹은 명명한다는 것처럼 보인단다.

따라서 이렇게 악이라는 것 자체에 이해불가능성을 상정하고 있기에 우리가 이해 혹은 납득할 만한

무엇으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이 악이라는 개념이 아닐까 싶다.

 

 

영은

이성은 보편적이고 사라지지않은 것이에요. 이성이 어떤 것을 이해할때는 도구상자와 작업방식에 있어요. 도구상자와 작업방식이 발달 될 수록 이성이 점점 약화된데요. 악을 이해할때요. 왜 그런거에요?  [이성의 작업방식이 더 효율적이 될수록, 악에대한 잡업만큼은 더 부적절해지고 분에가 많기 된다.]라고 나와요. 악이 이해 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라서 그럴까요? 그럼 왜 악이 설명되거나 이해 될 수 없을까요? 죽음에서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잖아요.

 

=>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선은 악이라는 것이 이해불가능한 어떤 것들로 우리가 상정하는 그 출발에서 문제가 있는듯 싶구나

이성이라는 것을 통하여 인간들은 어떤 대상 혹은 실체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데

이런 이성적인 작업을 통해서도 납득하거나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우리는 악이라는 개념을 빌려서 사용한다고 치면

결국 이런 악을 상정하는 것 자체를 이성적 작업을 통하여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수록 이상한 딜레마에 빠지거나 더욱더 부적절한 어떤 것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지/

결국 이성적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것들을 악으로 상정한다는 것.....

이런 문제가 아닐까 ?

 

 

 

영은

과거에는 이해불가능성 띈 악의 관념을 표면화하지 않았어요. 악이란 죄를 짓게하는 것이였고 죄를 진 죄인은 벌을 받아야 했죠. 그래서 고통(벌)을 받는 사람에게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고백하고 회개하라고 강요했어요. 정신분석가들은 현재의 고민이나 문제는 어린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어요. 그렇기에 계속해서 앞에 처럼 인식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시절의 경험을 찾으려 하기도 하죠. 악에 대해서 죄를 찾는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알 지 못하죠. 그리고 악과 죄에 대한 관련이 있는 것 조차 의심없이 믿고 있구요. 오히려 빠져나갈 곳을 찾기위해 원죄같은 걸 만들어 놓기도 하죠.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욥기라는 것이에요. 욥기는 성서에 한부분으로 욥이라는 아주 신실하고 착하고 아무튼 벌을 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 나와요. 그런데 그 사람은 계속 벌을 받게 되는 거죠. 기독교는 착한 사람이 복받고 나쁜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교리가 있잖아요. 욥기는 이걸 깨고 불분명하게 하죠. 재밌어요. 여기서 재미있는 해석은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자신의 힘이 공포스럽기 위해서는 예측불가능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는거에요. 욥이 그것을 모르는 이유는 근대인이 아니라서 구요.

 

=>

과거에는 악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었던것 같다. 다만 그 받아들이는 것을 악과 죄라는 것을 통하여 실행하려던 것도 같다,

즉, 우리에게 설명되어지거나 이해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그에 따르는 벌을 가하는 것으로

그 악을 제거했다고 생각하였다는 거다.

딱히 설명되어질 수 없는 악에 대하여 그렇게 원죄까지 들추려고 했었던 것은 결국 과거의 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악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적당한 벌을 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탓이겠지...

 

여기서 문제는 악에서 죄를 찾는 것...에 있는 듯 싶구나.

절대적으로 상정된 악이란 이해불가능성에 기반한다고 치면 결국 악은 죄와 다른 측면이 있는것이다.

우리가 죄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구체적인 ㅅ니체를 가진 무엇이라고 상정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결국 인ㄱ나이 지배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실체를 지녔다고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악을 제거하기 위한 죄의 설정은 그 죄를 벌할 수 있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죄라고 상정한다면 차라리 죄를 벌과의 상관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를 듯..

하지만 악은 우리가 벌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이해불가능성에 기반하는 것으로 보인단다.

따라서 악에서 죄를 찾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무엇인가를 찾지 못한다는 것인 아닌

악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악은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를 띄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여기서 한가지...

용기는 일종의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든단다.

즉, 우리가 신의 섭리라는 권선징악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일들이 발생하였을때

빠지게 되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장치가 욥기인것 같다는 거다.

즉,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신은 어쩌면 자신의 변덕으로 치부하면서

오히려 그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인간들에게 이해하려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

욥기의 원칙이라는 것이지

이렇게 보면 이해불가능성에 기반한 공포를 심어주는 것은 [신]과 [악]은 동일한것 같다.

즉, 차라리 [악]은 이해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제거하여야 하는 대상으로서

보다 인간의 적극적인 의지들을 반영하는 반면에 [신]은 인간 자체를 수동적이고 그저 공포를 받아들이는 미미한 존재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는 거다.

결국 동전의 양명처럼 [신]과 [악]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다른 곳을 보는 것이겠지...ㅎㅎ

 

 

 

영은

근대 철학은 리스본의 재해에서 부터 시작됬다고 하네요. 근대철학은 불규칙적인 자연재해와 의도적이고 목적성 있는 도덕적인 악으로 나뉘어 져요. 자연재해도 죄와 관련있다고 생각했던 생각에서 독립한거죠. 변신론이라는 신의 결정은 모두 선한 동기가 있다는 신을 보호하는 거에요. 그것을 깨게 된것이죠.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 자연재해의 이유를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으로 루소. 그리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악을 제거 하자는 말이 나왔어요. 과학과 기술이 있으면 인간이 악을 제거 할 수 있는 범위는 넓어지고 또한 모든 악을 제거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 인간이 제거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악은 자연적 악이에요? 이 때는 인간적 악이 크게 문제되던 시기가 아니니까, 자연적 악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겠죠?

 

=> 근대철학은 리스본의 재해에서 찾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드디어 자연이나 신이 아닌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든단다.

즉, 이제가지의 고대 철학들이 자연을 이해하거나 신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불가능한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면

이젠 그 한계에 다다른 철학이 드디어 리스본 재해를 통하여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 근대철학의 시작이라는 의미겠지.

결국 악의 제거라는 것을 단순하게 자연을 이해하거나 혹은 신의 섭리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거고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한가지 가능성이 인간에게서 찾자는 것이 근대철학의 방식은 아닐까 ?

결국인간을 바라보면서 근대철학 혹은 근대과학이 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불가능성이라는 것을 통하여 상정된 악을 이제는 이해하게 됨으로서 악의 지위에서 내려와 과학의 위치로 바꾸어 준 것이겠지.

이제가지 알수 없어서 악으로 치부해 버렸던 것들이

과학을 통하여 그 원인을 이해하면서 드뎌 과학적으로 규정되면서

우리들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무엇으로 상정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악을 제거한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따라서 이제 문제시 되는것은

우리 인간의 문제 즉 인간적 악의 문제라는 것으로 시선이 모아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결국 근대철학은 인간적 악을 발견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라고 볼수 도 있다는 것이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욱더 알수 없어진 것인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겠지.

자연을 과학을 알아갈 수록 인간을 더욱더 모르게 되어버렸다는 것

그런 인간들에게 더 큰 공포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근대철학의 암울함이랄까 ?

 

 

 

영은

근데 이제 인간적 악이 문제가 되기 시작해요.아우슈비츠 사건이에요. 아우슈비츠 사건은 유태인 대학살을 이야기해요. 인간적 악이 자연적악처럼 무시무시해 지는 거죠. 아무튼. 아우슈비츠 사건은 변신론이 리스본 사건으로 무너지고 나타난 변신론을 대신하던 것도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 주었어요. 그렇다면 변신론을 대신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앞에서 나온 것 처럼 인간이 악을 제거 할 수 있다는 믿음을까요? 신이 죄를 짓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는 선한 동기라는 변신론이 무너지면서 인간은 예측 할 수 없는 벌의 공포를 가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악을 과학의 힘으로 제거? 아니면 근대의 모든 법률이 가지고 있는 가정, 모든범죄에는 반드시 사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일까요?

 

=>

철학의 시선이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대상이 인간으로 돌아오면서

문제는 그 시선의 주체이면서 객체가 되어버린 인간의 몰이해성이 더 큰 공포를 준다는 것이겠지.

가령 자연의 이해불가능성은 어쩌면 쉽게 잊어버릴 수 도 혹은 신의 섭리로 알수 없는 자연의 섭리로 외면할 수 도 있었던 문제들이

인간의 시선에 포착된 인간은 그런 외면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겹치면서

우리에게 더 큰 공포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바로 인간의 문제인것 같다.

 

 

영은

아이히만의 얘기로 넘아갈까요? 아이히만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사람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아이히만에게서 이야기기 해야 할 것은 관료제에요. 아이히만은 관료제에 충실했던 것 뿐이라는 거죠. 악. 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사람은 아주 평범하고 우리와 다를것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와 같은 다른 사람들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인 거죠. 다만 아이히만은 특별한 상황이였던 것이죠. 그리고 그런 자신의 이익 추구로 부수적피해가 일어난 것이구요. 그리고 아이히만은 유대인에 대한 학살에 대한 의도가 없어었죠. 다만 조직의 윗사람의 명령에 따른것 뿐이고 따르지 않으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죠. 여기서 앞에서 얘기 했던 모든 범죄에는 반드시 사악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 라는 가정을 위협하게 해요. 그러한 가정을 위협하는것은 관료제에 있어요. 관료제는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지 않아요. 인간의 감정은 수시로 바뀌니까요. 다만 복종을 요구할 뿐이죠.

관료제에 있는 악은 두가지 특징이 있어요. 악의 평범화와 합리성이 있어요. 관료제에 있는 사람들의 의도와 동기를 모르는 체 악이 될 수 있어요. 이것이 악의 평범화 아닐까요?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관료제 안에서 동기가 없는 악이 되는 것이죠. 근대 사회에서는 이미 악의 없이도 악을 행할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합리성은 관료제 안에서 위에서 오는 임무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합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관료제에서의 악은 평범화보다 합리성이 두드러 진대요.

 

=>

관료제라는 것이 어쩌면 근대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것처럼 보인단다.

그런 의미에서 관료제라는 조직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지...ㅎㅎ

어떻게 보면 아이히만은 가장 두드러진 근대를 대표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단다.

즉, 단순히 조직에 대한 충성과 충실한 가족의 구성원..그리고 철저한 개인주의   랄가 ?

 

신자유주의라는 것의 추종자였던 영국의 총리 대처라는 사람이 한말이 있단다.

 

"사회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만 있을뿐..."

 

결국 관료제로 대표되는 아이히만은 어저면 신자유주의의 전형적인 인물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한단다

(나의 생각일뿐...ㅎ)

 

즉, 모든 판단과 결정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그런 개인적인 판단과 결정에 충실하기만 하면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겠지.

명령과 사회적인 악 사이에서 결국 그는 조직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결정한 것일텐데

이런 것들이 결국 현재 우리들이 겪는 사회의 문제가 아닐가 싶고

또한 우리가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 인ㄱ나적인 악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행태가 아닐까 싶다는 것이지.

악의 없이도 악을 행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에서 이해할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해불가능성...???

각 개인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와의 관계 혹은 사회라는 체제속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파편화되고 있는 것을 

우리느 악의없이 악을 행한다고 보는 것은 아닌지 싶구나....ㅎㅎ   

 

영은

인간의 이성이 근대적으로 쓰이면서 인간은 긴 우회로를 달리고 있었어요. 가면 갈수록 문제가 해결 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원래로 돌아가게 되죠. 우회로. 우리는 지금도 자연적인 악, 재해를 막지 못하고 있고 위험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죠. 실은 인간적인 악이라는 자연적인 악만큼이나 예측이 어렵거나 불가능하고 무시무시한 재해를 만든 것인지도 몰라요.

인간이 만든 악은 자연적인 악만큼이나 예측불허해요. (왜?) 그리고 자연적인 악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적인 악을 예측하지 못해요. 이런 현대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면서 외면하고 고개 돌리기도 하구요.

칸트의 정언명령이 나와요. (윤리선생님도 어려운거라면서 잘 설명해주시 않은게 기억나더라구요.아무튼,)"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이거죠.  사실 이부분이 잘 이해가 안가요. 보편적 입법원리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구요. 보편적 입법원리와 대립하는 이중 잣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런건가.. 생각하긴해도 전혀 맞는 것 같지도 않구요.

근대에 이성은 독점을 형성하고 배타성을 확보하는데 있어요.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거나 다른사람들 (우리와 다른)를 배제하는 것에도 쓰이고 그것을 문제 삼지도 않아요. 근대적 이성은 행복을 추구하고 그것을 보편적인 소유물이라고 해요. 하지만 근대적 이성은 이러한 보편성 보다 특권을 위해 봉사해 왔어요,

그리고 인간적 공포가 무시무시하게 확대됨에 따라 생긴것이 있어요. 바로 신뢰성의 상실이에요. 아이히만이 지극히 정상이였던 것 처럼, 우리 주위에 사람들이 언제 악이 될지 모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오류가 있어요. 분명 많은 사람들은 악을 싫어하고 거부하겠죠. 하지만   적당한 조건이라는 것이죠. 적당한 조건에서 우리는 악이 될 수 있는 거에요. 그렇기에 리스크를 생각한다면 모두를 의심해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해겠죠. 아.. 인간관계의 아슬아슬함을 말해요.
 

==>

결국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유동하는] 세상을 이야기하고픈 것이겠지.....ㅎㅎ

근대 이성이라는 것이 철저한 각 개인성을 기반으로 한 고립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란다.

즉, 모든 것들 실은 굉장히 사회적인 문제까지도 

이 사회에서는 그저 각 개인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책임으로 돌려 놓으므로써

더이상 [악]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제거하려는 노력들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란다.

결국 과거의 [신]처럼 어쩌면 세상은 

[자본]이라는 것을 신의 위치로 삼고 수동적 인간...그저 악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이겠지

이는 근대철학의 문제이기도 한것 처럼 보인단다.

인간이 가진 시선이 인간을 주체 겸 객체로 만들고 다른 모든것들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순간

인간들은 헤어나올 수 없는 딜레마에 갇혀서 허우적 거리게 된것처럼도 보인다는 거지

 

최근

이런 개인성 혹은 개별화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쉽게 볼 수있는 것 같단다.

사회전체 혹은 공동체의 문제마저도 등한시됨녀서

철저하게 개인의 관심사 혹은 개인의 문제가 오히려 공공의 논의들에 자주 등장하고

나아가서 그 해결과 책임도한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는것

그리고 각 개인들은 그저 리얼리티 쇼 처럼 그저 방청객이면서

마치 참여자로 착각하게 만들어버리는 사회

더 나아가 자신들이 행하는 악의없는 악에 대하여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마는 자기사면의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었단다....ㅎㅎ

 

===>

두서 없이 말만 한것 같아 미안하구나....ㅎㅎ

처음에도 이야기 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ㅎㅎ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재미있었다고 생각했었던 것은

이런 유동하는 사회 그리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고립된 개인의 사회에서

우리는 그저 가벼운 네트워크 정도의 관계들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범죄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반성을 했었던 것 같다.

 

아이히만처럼 

우리는 어쩌면

공포를 상정하면서 그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그저 [신]처럼..자본주의의 신인 [자본]에 맹목적으로 온몸으로 빌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더 나아가 애초에 공포를 이해하려기 보다는 모든 것들을 악으로 간주하고

그 악을 단순히 미워하는 선에서 모든 문제들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하고 있었던 듯 싶기도 하구나....ㅎㅎ

 

영은이가 이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길 바라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읽고 좀더 개별화되는 사회에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함개 살아간다는 것에대한 공부들을 해보는 것은 어떨지 싶구나...ㅎ

뭐...나보다 바쁜 고딩이니 그러기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

네가 사회 혹은 공동체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어질땐

항상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단다.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공포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 말이다....ㅎㅎ

 

여튼

약속대로 미션을 수행했으니

음....주기로 한것은 주지....푸하하하

 

곧 감행하기로 한 1박 2일 가출을 멋지게 성공하길 빈다....

여행에서 가출에서 보자....수고  

 

(아차차...생각해보니 칸트 이야기를 빼먹었군....캬캬캬

음 정언명령이니 하는 문제는 잘 모르겠고

아마도 도덕적 의무감인가..? 싶다.

도덕적 이성으로써 해야한다고 판단된 것은 해야한다는 것...이겠지.

감성 혹은 동정 혹은 감응 등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감으로서 

해야 할일들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은 듯 싶구나....ㅎㅎ

뭐 자세한 것은 나두 칸트를 좀 만나보고 이야기 해주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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