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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언저리에서...

1. 산책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보다. 새벽 일찍 눈을 떴지만 일어나지 않고 억지로 눈을 다시 붙였다. 몸을 생각해서다. 밖에는 충주호수로 연결되는 삼탄강이 흐르고, 뒤로는 옥녀봉이 자리 잡은 충주 리조트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내 행동이 달라지기는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깨는 순간 이리저리 주변 산책을 다녔을 터인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장인 충주리조트 옆에 있는 하천리 마을



뒤척거리다 일어나 씻고 나오니 정윤광 위원장님이 피티체조를 하고 계신다. 팔굽혀펴기를 하시는 것이 20대 젊은이 못지않다. 상대적으로 젊고, 상대적으로 힘없는 몸을 가진 난 민망하여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함께 식당으로 내려가니 8시 정각이 되어야 아침을 먹을 수 있단다. 이왕 함께 나온 김에 이런 저런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 밥을 먹고 나서는 아예 산책을 갔다. 9시에 있을 예정인 운수노조(추) 운영위원회까지는 30분이 남았기 때문이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훠이훠이 옆 마을까지 함께 갔다 왔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산책이고 대담이었다. 내용은 치열해도 말이다.


2. 전통은 또 다시 깨지고...


전날 밤 운수노동자들의 전통이 또 한 번 깨졌다. 전통이 당연히 이어질 것으로 확신한 집행부에서는 보기에도 넉넉하게 술을 준비했다. 그것도 종류를 다양하게 하여서 말이다.


밤 10시가 넘어 시작한 술자리. 자리가 비좁아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올 정도로 성황이었다. ‘성황’이 ‘쇠퇴’의 전주곡임은 술자리에서도 적용되는가? 열 댓 명의 택시 대표자들은 아예 다른 방에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이윽고 술자리가 무르익을 즈음, 요즈음 민주노총 내에 어용시비에 휘말리는 모 연맹 위원장이 다른 연맹 위원장 두 명과 함께 왔다. 그들이 오면서 화제는 자연스레 그들 중심이 되었다. 그들이 손님이니까...


갑자기 화제는 운수노동자의 단결과 산별노조 건설이 아니라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또는 ‘거기 사는 아줌마’로 바뀌었다.


처음에 손님대접하려고 억지로 참는 이들 중,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둘씩 자리를 떴다. 난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나하고 술 한 잔 하겠다고 찾아온 류재운 애니메이션 위원장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그는 다 알다시피 민주노총 내에서도 원칙주의자이고, 대단히 전투적이기 때문이다.


류재운의 얼굴이 찡그러지는 걸 보는 순간 난 그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잠자리로...


다음날 ‘술방(?)’을 치우러 올라가니 1.8L 피티 8개, 소주 6병, 팩소주 10개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마 내가 나오고 얼마 안 있어 술자리가 파했나보다. 하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술맛이 나겠는가.

 


하천리 사과밭 풍경

 

3. 칡꽃


오전 10시.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다. 정시에 도착하는 모범을 보이자고 우르르 몰려갔다. 별로 사람들이 많지 않다. 사실 전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성원’을 걱정했다. 보건의료노조 교섭이 타결됐다고는 하지만 조합원 총회 등으로 대의원들이 참석하기 어려울 것이고, 공무원노조도 정부의 탄압으로 어려움이 있다.


난 자리를 잡은 뒤에 아예 밖으로 나왔다. 장내 정리를 하기 위해 끝없이 자리를 옮겨달라는 요청이 있을 것이고, 하여간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본 대회는 시간이 좀 지나서나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아침에 정윤광 위원장님과 함께 갔던 길로 산책을 떠났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말이다.


그것은 이성의 저항을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서서히 제압하는 몽롱한 유혹이다. 유혹에 저항하지만 점점 무장해제당하는 이성이 짙은 안개 속 같은 알 수 없는 혼미한 쾌락으로 빠져드는 몸뚱아리를 힘겹게 움켜잡아도 패배는 명백하게 예정돼있다. 패배한 이성은 마지막 탄식을 하며 소멸되어간다. 아~!


내가 칡꽃의 향을 느낄 때의 감성이다. 몽롱한 달콤함. 그 꽃의 향기를 언젠가 난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표현을 매우 독특하다고 했고...


칡꽃의 향기를 제대로 맡으려면 한여름 햇볕이 왕성이 내리쬐는 오후 2시쯤이 제격이다. 이때쯤이면 작열하는 태양에 광합성은 최고로 왕성해진다. 광합성이 얼마나 왕성한지 뿌리와 줄기가 미쳐 땅속 물기를 충분히 대주지 못할 정도다. 헐떡이며 거친 숨을 토해내는 잎새들은 축축 늘어지고, 그 숨 속에는 향기가 있어 이때에는 칡꽃뿐만 아니라 칡 잎새와 줄기 모두에서 칡꽃향이 나온다.


여름, 특히 지금쯤 차를 타고 산길을 간다면 에어콘을 끄고 차창을 열어 보자. 문득 문득 알 수없는 향기가 스친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칡꽃 향기일 것이다.


난 길을 걷다가 칡꽃 향기에 취해 주변을 들러보니 칡덩굴이 도로 가드레일을 넘어 아스팔트길 위로까지 여기저기 뻗어있다. 꽃은 보이지 않지만 잎이나 줄기를 들춰보면 그 속에 보랏빛 꽃송이가 숨어 있겠지. 그러나 굳이 찾아보고 싶진 않다. 거기에 있음을 안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칡향에 빠져 사진도 못 찍었군...

 


잔대꽃/ 돌아오는 길 옆 여러 포기가 있었다. 꽃이 작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4. 하천리


충주리조트 바로 옆 동네이름이 하천리다. 개울이 있는 동네라는 뜻은 아니고, 샘 천(泉)자를 쓰더라.


 

사실 정윤광 위원장과 산책을 할 때 멀리 보이는 큰 산소가 눈에 띄었고, 그곳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재차 산책길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그 산소의 주인은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낸 홍공(洪公)이다. 비석에 그렇게만 나와 있다. 봉직랑(奉直郞) 홍공(洪公), 공인(恭人) 안동 권씨 합묘다.

 

성균관 전적 홍공(洪公)의 무덤


‘성균관 전적’은 정6품 문관직으로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주로 거치는 자리이다. 이런 시골에서 성균관 전적을 지냈으면 당시에는 인근에서 대단했을 것이다. 뭐 정6품 자리가 별거야 할 사람들도 있으리라. 그러나 조선시대를 연구해보면 문관이 된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문벌이 있는 소수 가문을 빼고 말이다. 우의정으로 관직을 마감한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도 62세에 정6품직인 사헌부 지평으로 출사하였던 사실로도 그 직책이 만만치 않은 자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천리에는 TV에서나 볼 것 같은 펜션형 주택들이 여러 채 있다. 밭들은 거의가 사과 과수원이고, 주택들은 과수원 사이에 듬성듬성 자리잡고 있다. 촌로에게 물어보니 외지인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5. 정토사지


대의원대회장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다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았다. 멀리 마을 끝 언덕에 특이한 정자가 하나 있다. 전통 양식이 아니라서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정자 안에 커다란 비석이 있다. 심봤다.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와 보호각

 

팻말 등 별다른 설명이 없지만, 대단히 장대한 게 멀리서 보아도 뭔가 대단한 것 같았다. 가까이 가보니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이다. 비의 몸체만도 3M가 넘는 대작으로 비 받침의 거북은 여의주를 물고 있고, 머릿돌은 용 조각이 되어 있다. 비 전문에는 글자가 빽빽하다. 글을 지은이는 최언위(崔彦爲)다. 최언위는 고려 태조 때 사람이니 상당히 오래된 비석이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26년(943) 법경대사(法鏡大師)의 공덕(功德)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니 1천년이 넘었다. 비석 조각은 특이하게 승려 4명이 하였다고 한다.

 


몸체만도 3m가 넘는 대작이다. 곳곳에 총탄자국이 있다. 이 시골 땅에도 한국전쟁의 흔적이 있다. 전쟁은 없어야겠다. 정말로.. 영원히...

 

글씨도 상당히 힘이 있다. 돌아와서 검색을 해보니 글씨를 쓴 이는 구족달이다. 구족달(仇足達)은 요즈음 경향신문에 연재되어 소개된 우리나라 명필들 중 한 사람이다.

 


비의 머릿돌과 받침돌/ 승려 4명이 법경대사를 기리는 마음을 담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6. 무산된 대의원대회


허위허위 돌아오니 대의원대회장이 술렁이고 있었다. 성원에 150명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조금 있으니 조준호 위원장이 나와 대의원들에게 대대 성원을 채우지 못한 데 대하여 사과를 하면서 대회 무산을 선포했다.


한 동지가 고함을 치며 항의하였지만, 다른 이들은 항의조차 하지 않고 곤혹스런 표정으로 대의원대회장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될 것인가. 무기력한 민주노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투쟁을 할 수도 없고, 내부 어용세력을 도려내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혁신’을 외친다. 누가 무엇을 위한 혁신인가?


정윤광 위원장과의 아침 대담이 생각났다. 혁신은 정말 혁신하려고 나서는 사람, 조직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전진이든 해방연대든 기존의 방식을 벗어던지고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를 조합원들에게 분명히 하고, 당당하게 심판받아야 한다고. 비록 단 한명의 최고위원, 단 한명의 임원을 배출하지 못해도 말이다. 그래야만 조합원들이, 당원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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