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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제사를 지낼까?

1.

연수원으로 가야하나 아님 바로 집으로 가야하나. 5시가 가까와 오는데,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5시 15분 이번에도 안 되면 연수원 가는 걸 포기하고 집으로 가야지... 그런데 마침 아내가 받는다.

 

'나 오늘 연수원 신입생 환영회가 있어서 8시에 끝나는데, 수업듣고 가면 안 돼?'

'... 몇시까지 올 수 있는데?'

'9시 쯤.'

'9시 반까지 꼭 올 수 있으면 그렇게 해.'

 

아내의 목소리는 불만이 섞여 있다. 모르겠다. 내가 내심 그렇게 짐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들렸는지도 말이다. 하여간 내가 받은 느낌은 불만이 상당히 섞여 있었고, 그것은 내게 다시 없는 압박이었다.

 

연수원 수업을 마치고, 함께 수업을 듣는 자문위원이 자신이 책임진다고 환영회에 잠깐 갔다가 가자고 한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양해를 구해 집으로 왔다.

 

2.

오랫동안 활동해왔었고,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지향했던 나였지만, 이상스럽게 지금까지 꼬박꼬박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것도 명절 빼고 1년에 다섯번 씩이나.

 

누구 제사냐고? 말하면 놀라겠지...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이렇게 다섯번을 지낸다.

 

오늘이 증조할머니 제사다. 물론 지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이면 마음이 무겁다. 제사를 안 지냈으면 하는 아내와 이런 사정은 아랑곳 않고 제사지내는 걸 '존재의 이유'로 여기는 엄마...

 

오늘 제사를 지내면서 이제 증조할아버지 할머니는 안 지내도 되지 않을까? 아니야, 할머니 할아버지를 묶어서 한꺼번에 하는 건 어때? 등등의 생각이 지나갔다.

그러면서 내가 왜 제사를 지내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3.

내가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나태한 이들이 잘 바꾸지 않는 그런 종류의 '습관'일 수도 있지만,

엄마에게 행하는 '보상' 성격이지만, 나름대로의 '배려'(?)가 아닐까 한다.

 

배려라고 써놓고 보니 조금 이상하다.

오히려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하는 불효자들이 무언가 '하나'를 효도의 '상징'으로 작심하고, 그거에만 '집착'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 적절하겠다.

 

그래 이러나 저러나 이런 식이라면 제사를 지낼 적마다 늘 노심초사해야 하고, 우울해 해야 할 것 같다.

 

알면 바꿔야 하는데, 그거이 잘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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