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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을 논하다.

학교 운영위원회의 두 번째 이야기.

 

어제부터 2005년도 학교 운영위원 임기가 정식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정기 학교 운영위원회가 열렸다. 안건이 8개였고, 이것을 모두 처리하는 데 4시간이 걸렸다. 3시간이 지나면서 교장, 교감 선생님은 지쳐있음이 얼굴에 완연했다. 회의 끝나고 교장선생님은 다음부터는 회의 시간을 줄이자고 강력(?)하게 주창했다.



겨우 4시간 가지고 뭘~~ ^^ 우리는 16시간 회의, 끝장토론도 하는데.
어찌됐든 일사분란하고 짧은 회의에 익숙한 원로급(?) 선생님들에게는 4시간 회의가 버거웠나보다.

 

안건 중에는 학교규칙 개정이 있었다.
올해부터 매월 1회씩 토요휴업이 있는 관계로 수업일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개정은 불가피하였다. 동시에 교사 체벌에 관한 조항에 대해서도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개정전>
제45조 6)체벌을 가하기 전 또는 가한 후에는 반드시 학부모에게 체벌의 이유와 그 결과를 전화·편지 또는 직접 상담을 통할 수 있도록 한다.

 

<개정안>
제45조 6)체벌을 가하기 전 또는 가한 후, 체벌교사는 교사로서 판단에 따라 당해 학부모에게 체벌의 이유와 그 결과를 24시간 이내 전화·편지 또는 직접 상담을 통하여 통지할 수 있다.

 

놀라웠다. 이런 규칙이 있었다니. 교사 체벌에 대하여 여러 논란이 있겠지만 위 규칙은 무척 과격할 정도로 진보적인 규칙이 아닌가.

 

반면 개정안은 교사의 재량에 모든 것을 맡긴, 실제로는 '규칙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정안을 제출한 교사위원은 주임(무슨 주임인지는 아직 모름)교사로 급식위원회 학생참여를 '아직 미성숙하여 판단력이 의심스럽고, 법적으로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반대한 바 있는 선생님이었다. 개정안 설명에서 체벌 전후에 '반드시' 학부모에게 통지하는 것은 교사들의 교육의지를 꺾는 효과가 있음을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물론 나는 개정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상식과 양심을 성문화하는 것이 규칙이라고 할 때 실질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규칙은 결과적으로 교사의 상식과 양심을 일상적으로 배반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문화된 '규칙'을 '교사의 양심'으로 대체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교사의 양심을 믿는다면 성문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나는 수정발의했다.

'교사로서 판단에 따라 당해 학부모에게'를 '교사로서 판단 및 학부모의 요청에 따라 당해 학부모에게'로 학부모의 권리 조항을 삽입하는 것이었다.

 

모든 위원들이 동의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정경화 동지가 수정안을 발의했다.
맨 마지막 문구를 '통지할 수 있다.'에서 '통지해야 한다.'로 못박아야 한다는 요지였다. 의무 없는 규칙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술렁이며 논란이 있었고, 각자의 교육철학까지 쏟아져 나왔다.
한 학부모위원은 '우리 딸이 중2인데 다른 애가 잘못했는데도 모든 아이들이 매를 맞았다. 허벅지에 피멍이 들도록 매를 맞았는데 누구 하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면서 사랑의 매는 당연하다며 수정안 발의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옆에 있던 3명의 엄마위원들도 맞장구를 쳤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상식이 스스로 상식임을 입증하던가, 또는 누군가가 왜 상식인지를 입증시켜야 할 판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많은 엄마들 체벌에 대하여 그 학부모위원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단다. 어찌 보면 다행인가. 내 둘레에는 누구도 노골적인 체벌찬성론자가 없었고, 심지어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고 하는 체벌 절대 반대론자들도 많은데, 이렇듯 많은 엄마들이 노골적으로 체벌에 찬성한다는 사실을 알게됐으니 말이다. 사실을 사실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

 

난 급히 수정안을 제출했다.
수정된 원안 말미에 '단, 학부모의 요청이 있을 시 반드시 통지하여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넣는 것이다.
교장, 교감 선생님은 지쳐서 그런지 아니면 내 의견에 동의해서 그런지 곧바로 동의의사를 표시했다. 다른 이견이 없었으므로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체벌은 참으로 어려운 주제이다. 대학시절 교육학시간에도 논란꺼리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논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벌을 노골적으로 동의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그것이 그 엄마들의 교육열의 한 표현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과 사회의식 수준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참으로 멀고도 험하여라! 우리가 갈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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