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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1.

1990년 1월 22일은 내게 있어 특별한 날이다.

역사적인 전노협의 창립일이기도 한 이날은

내가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해 상근을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전노협 결성식(1990. 1. 22)

 

 

전날 전야제가 열리던 밤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렸었다.

나는 출근준비를 이유로 전야제에 불참했고,

대신 성수동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마셨다.

 

한참 술을 마시는데 옆에서 어떤 청년이 혼자서 흘쩍거리며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궁금해서 왜 우냐고 물었더니

여자 친구가 영남 사람인데, 자기가 호남사람이라서 여자쪽에서 결혼을 반대한다는 거였다.

그 시절이 그랬다.

 

 

 

2.

상근을 시작하기 불과 반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만,

그것이 사회주의자에게 그렇게 심각한 것인지 몰랐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한

고르비 동지의 페레스트로이카 성과의 부작용 정도로 생각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1989. 8)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년만에

소/비/에/트/가/ /무/너/졌/다.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이었다.

소비에트의 붕괴는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주의혁명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의 붕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절망한 많은 동료들이 현장을, 조직을 떠났다.

어떤 이는 천년의 팍스 아메리카시대가 올 것이라고도 했다.

 

돌이켜보면 소비에트 붕괴가

나를 노동운동 언저리에 계속 있게 한 커다란 이유 중 하나였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붕괴의 절망 속에서 난 일종의 '오기' 또는 '책임감' 비슷한 것이 생겼다.

천생 리버럴하니 오기나 책임감이 조직에 쓸모있는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철거되는 레닌 동상/ 현실로써 혁명이 우리의 가슴 속으로부터 철거되는 느낌이었다.

 

 

3.

이제 퇴직할 시간이 임박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꽤 긴 시간이었다.

 

내 성향이 노동(노조)운동과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도

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 낸 사표다.

 

사표를 내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임원과 내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표를 내고 나서 내가 오해한 것이란 말을 들었지만...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돼버린 뒤였다.

 

어쨌든 사표는 돌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어쩜 내심 바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퇴직이 임박하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무거운 짐이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노동(노조)운동이 침몰하는 상황에서 낸 사표는

형식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도피'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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