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바간> 백마 탄 기사를 만나다

양곤에서 오후3시에 출발한 버스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바간으로 들어선다. 바간은 도시전체 입장료가 10불인데 새벽에 징수원들이 버스로 올라와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만 내리라고 한 뒤 표를 판다. 즉 표를 사지 않고서는 도시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다. 자다 내려 표를 구매한 뒤 바간 지도가 있길래 1000짯을 주고 하나 산다. 10달러나 받으면서 그냥 하나 줘도 되겠구만 궁시렁거리며 지도를 펴보니 버젓히 프리맵이라고 써 있다. 참 가지가지로 챙긴다 싶다. 이건 어째 민간인들은 이리도 순박한데 공무원들이 더하냐 말이다. 열받아봐야 나만 손해니 그냥 1000원 버렸다 생각하기로 한다.


바간은 11세기부터 13세기 몽고의 침입이 시작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5,000여 기의 불탑이 세워졌다고 하는 미얀마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이다. 뭐 지금은 세월의 풍화에 따라 2,500여기만 남아있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2,500개지 야트막한 평원지역에 불탑이 수도 없이 서 있는데 붉은 흙 위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탑들이 붉게 물든 석양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물론 2,500개를 다 둘러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몇몇 유명한 사원을 중심으로 하루 이틀 돌아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무래도 밤새워 버스를 탄 뒤 바로 투어를 하기에는 무리인 것 같아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내다 한국인 아저씨 한 분를 만난다. 라오스에서 한 번, 태국에서 한 번, 그리고 미얀마에서 세 번째 부딪히는 데 정년퇴직한 교장선생님이다. 방콕에서 만났을 때 미얀마에 나보다 4일이나 먼저 간다고 해서 만날 일이 없겠지 했는데 어찌어찌 또 만나버린 것이다. 아무리 한국 사람이 그리워도 사실 나이 많은 아저씨가 게다가 전직 교장선생님이 일행으로서야 그리 반가울 턱은 없는데 대충 다음 일정이 비슷하다. 그래도 다음 일정이 트레킹이니 혼자 가는 거 보다야 낫겠지 싶어 다행이다 생각하기로 한다.


첫날은 혼자서 호스카-뭐 별 건 아니고 말이 끄는 차 즉 마차다-를 타고 사원이 밀집되어 있는 올드 바간 쪽을 돌아보기로 한다. 조조라는 호스카 드라이버가 끌고 나타난 마차는 으아.. 백말이다. 내 인생에 백마 탄 왕자님이야 있을 리 만무하지만 비록 드라이버이긴 해도 -뭐 드라이버가 우리말로 하면 기사 아니던가- 백마 탄 기사 하나는 등장한 셈이다^^. 여튼 백마가 모는 마차를 타고 하루종일 탑들을 돌아본다. 아난다사원, 술래마니사원, 탓빈뉴사원, 담마얀지사원, 고도빨린사원, 밍글라쩨디 사원, 부바야 파고다, 쉐산도 파고다 등등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사원과 탑들이 저마다의 모양과 사연을 가지고 나타났다간 사라진다. 말이 모는 오솔길을 따라 이름 없는 사원에 들어가는 느낌은 그럴 듯한데 사원에 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뭐 당연하게도 물건을 파는 상인들인데..


이것이 호스카다


사원에서 바라 본 바간의 탑들


미얀마 사람들은 순박하면서도 집요한데가 있어 묘하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데 바간에서는 그 정도가 지나쳐 거의 이성을 상실할 지경까지 만든다. 일단 이 상인들은 나전칠기 그릇이나 페인팅을 파는 것이 주목적인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들이 사원을 관리하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벽화를 보려면 이들이 따주는 문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데 그러면 일단 물어보는 말을 무시하기는 어렵게 된다. 대략 질문은 종이에 써서 외운 것처럼 동일한데 어디서 왔냐.. 바간은 처음이냐.. 미얀마는 얼마나 오래 있느냐.. 이름은 뭐냐.. 그리고 그 다음이 예쁘다이다. 그럭저럭 가족 관계까지 파악당하고 나면 사원 구경은 대략 끝이 나는데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페인팅 뭉치가 어디선가 등장하고 백여 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페인팅을 들춰가며 하나하나 설명을 시작한다. 다 들어주려면 한 시간은 걸릴 것 같다. 미안하지만 대략 그냥 가려고 하면 하나도 못 팔았다.. 니가 이 그림을 사주면 나는 정말 해피할 것이다 등등 이제까지 이야기를 나눈 인정상 차마 그냥 갈 수 없게 만든다. 그래도 끝끝내 뿌리치고 돌아서면 마지막으로 프레젠트라는 말이 나온다. 안 살거면 볼펜이라도 주고 가라는 것이다. 물론 미안한 표정으로 준비된 게 없다고 하면 또 그런대로 웃으면서 노프라블럼 이라는데 괜시리 사람 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하지만 처음엔 볼펜이나 좀 가져올 걸 하는 생각은 한 열 번쯤 반복되면 니가 나한테 볼펜 맡겨놨냐는 마음으로, 스무번쯤 들으면 짜증으로 삼십번쯤 들으면 사원 들어가기가 두려워지는 것으로 바뀐다. 참 웃는 얼굴에 침도 못 뱉겠고 여튼 아름다운 만큼 상인들도 꽤나 집요한 곳이 바간이다.


점심때  먹은 미얀마 백반. 향이 조금 달라 그렇지 한국 백반과 비슷하다.


사원에서 만난 아이들


담날은 자전거를 빌려 조금 먼 뉴바간을 둘러 본다. 관광객들은 유명사원이 몰려 있는 올드바간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나머지 사원들은 거의 방치된 채 버려져 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가 맘에 드는 곳이 있으면 들렀다가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다니니 상인들에게 시달리는 것 보다는 이것이 훨씬 낫지 싶다. 뉴바간 어느 식당인가에 들어가 음료수를 마신다. 강변에 있는 식당인데 음료수가 1000짯이나 하는 나름 고급 식당이다. 의자가 반쯤 젖혀져 깜빡 잠이 든다. 눈을 떠 보니 음료수를 가져다 준 웨이터가 그대로 서 있다. 이곳 식당은 고급일수록 웨이터가 곁을 안 떠나서 좀 불편하다. 민망하다. 자고 있는데도 안 갈 줄을 정말 몰랐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포장도로라도 군데군데 패인 데가 많아 일몰을 보고 나면 너무 어두워질 것 같아 해질녁에 맞추어 숙소로 돌아온다


사원에서 바라 본 바간의 탑들2


바간의 일몰


저녁에는 숙소에서 만난 부산에 사는 남학생과 거리를 걷다가 또 다른 선생님 한 분을 만난다. 가족과 함께 오신 사회 선생님이다. 누가 방학 아니랄까봐 선생님들 참 많이 본다. 전교조 활동을 하신다는 사회 선생님이 사주시는 맥주를 마시며 미얀마 현실에 대한 얘기를 잠시 듣는다. 미얀마 정부가 독재 정부는 분명한데 이 정권이 무너지면 바로 개입할 세력은 미국이고 민주화 세력의 대모격인 아웅산 수지 역시 미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라고.. 이 나라 사람들이 힘으로 민주화를 이뤄내기 전에는 이 정권이 무조건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 역시 대안이 없다는 것인데.. 그저 여행자일 뿐이라고 가이드북에도 나와 있듯이 가급적 그런 애기들은 나누지 말자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고민하기 싫었던 것의 핑계는 아니었을까 싶다. 참 지하자원도 많고 땅도 넓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나라인데 이 나라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잠시 복잡한 마음이 된다.    


바간이 너무 좋아 며칠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아직 일정이 가늠이 되질 않아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행선지로 떠날 준비를 한다. 앙코르와트도 좋았지만 바간은 색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다. 바간에 오면 좋아서 죽을 몇몇 인간들이 떠오른다. 첫 번째로 바이러스, 이 녀석은 아직 앙코르도 안 갔다와서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오면 제일 좋아할 것 같고.. 다음은 쿠.. 어느 파고다 밑에서 술병 끼고 앉아 세월 가는 줄 모를 것 같고 마지막으로 조커.. 비교적 정상적으로 공부도 하고 와서는 행복해.. 행복해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닐 것 같다. 언젠가 미얀마에도 직항이 생기면 아니 그건 더 비싸겠고.. 육로가 열리면 중국에서든 태국에서든 밤버스타고 와서 바간에서 며칠이고 빈둥거리다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