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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30
    횡단의 정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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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8/30
    오대산3-부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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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8/28
    오대산2-엄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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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8/28
    오대산1-게아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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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8/24
    중구난방 참여 후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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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8/16
    똥 묻은 개....(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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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8/15
    높임표현을 추방하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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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8/15
    어느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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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8/15
    내 안의 괴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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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8/14
    관계의 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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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의 정치

  현재 자신의 정체성과 멤버십에 기반을 두면서도, 그것을 본질화하지 않으며, 타자를 동질화하지 않고 상대방의 상황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대화가 횡단의 정치이다. [중략] 횡단의 정치는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과 그 개인이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를 구별하며, 대화의 과정을 정치적 목표로 삼는다. 초월적 보편이 아니라 소통 가능한 보편을 지향하며, 기원이나 본질이 아니라 자신을 '오염'에 개방하면서 '오염'된 자신을 드러내면서, 움직이는 현실을 타고 넘나드는 것이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중에서]

 

나와 관련된 모든 관계에서, 내가 가고 싶은, 그래서 지금 내가 나를 계속 괴롭히고 있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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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3-부처

월정사에 갔다.

흐린 날씨에 조금씩 흩뿌리는 빗발이 참 맘에 들었다. 날씨에 따라 변덕을 부리는 내 마음이 부질없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그 맛이 다르니까 흔쾌히 그 때 그 때의 기분에 충실히 젖어 본다.

 

일단 대웅전을 찾았다. 그다지 크다고 생각들 지 않는 대웅전.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들여다보니 대웅전보다 더 크다 싶은 불상이 실내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불상은 온 몸에 금(진짜 금인가?)칠을 잔뜩 두르고 어마어마한 덩치에 살짝 웃는 모습으로 정좌를 하고 있다.

 

그 불상을 바라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무언가 때문에 못마땅하다.

 

무엇때문에 웃고 있을까?

자신의 깨달음에 스스로 만족해서? 자신의 이야기가 '말씀'으로 많은 민초의 숭배를 받고 있어서? 지금 돌아가는 요꼬라지의 세상이 흡족해서?

그 웃음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맘이 뾰로통해진다....

 

왜 저 높은 곳에 '모셔져' 있는 게지?

웬만한 사람 키만한 높이의 단상에 '올려져' 있는 불상. 그 높이는 다소 다르지만 모든 절의 부처상은 항상 단상에 '올려져' 있다. 누가 올려 놓았을까? 고대의 불교에서는 불상조차 없었다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현실의 질곡을 깨트릴 수 없었기에, 절대적 존재의 힘에나마 의존하고 싶었던 민중의 바람이었을까? 우리 문화 속에서 호랑이는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하나는 우스꽝스러운 해학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신격화되어 숭배되는 형태로. 왜냐면 호랑이는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존재였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연 속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해학을 통해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숭배를 통해 호랑이를 달래고 호랑이의 절대적 힘으로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님, 절대적 힘의 절대적 숭배를 통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해를 확고히 하고자 했던 당시 지배계급들의 욕망이었을까?

현실의 질곡을 깨트리고자 하는 민중의 열망과 지배계급의 이익을 굳건히 하려는 계급적 욕망. 적과의 동침. 난 올려진 불상은 오히려 민중의 아픔을 상징하는 것이려니....생각한다. 불상을 내려놓자..

 

왜 불상은 저리 큰 게야?

큰 절일수록 불상이 크다. 작은 절일수록 불상이 작다. '돈'의 문제인가? '과시'의 문제인가? '권력'의 문제인가? 이미 종교도 권력화, 제도화되어 가고 있는 마당이다. 어느 노래엔가 '꿈을 먹고 사는 젊은이여'라는 가사가 있던데....이건 완전히 '민중의 꿈을 먹고 배부르는 욕망덩어리여'이다...모든 조형물은 상징이다. 세계에서 제일 큰 어쩌구저쩌구, 아시아에서 제일 큰 어쩌구저쩌구...는 필요없다. 자연을 닮은, 인간을 닮은, 억압받는 자의 삶을 닮은 '실제'의 상징이 중요하다.

 

난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왕이면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표정'의 불상이 사람들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앉아 있는 모습이 어떨까?

 

그렇게 하면, 더이상 종교가 아닌가?

 

대웅전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데, 여기저기에 풍뎅이며 메뚜기며 '밟혀서' 생을 마감한 존재들이 수두록하다...단지 신발 밑에 잘못 기어들어간, 혹은 위치 선정을 잘못한 그네들의 책임만을 아닐 것이다...불상을 찾아 온 욕구는 어차피 소유적인, 이기적인 개인의 욕망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발로 밟는 자는 발 밑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안개비에 촉촉히 젖은 나뭇잎과 풀들이 그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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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2-엄마의 노래

오대산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지어 먹었다.

내가 묵은 숙소는 00여관이다. 아는 분이 잘 다니는 곳이라 도움을 받았다ㅋㅋㅋ 비수기라서 숙박을 공짜로 해결했걸랑...

요즘 유행한다는 펜션이나 콘도는 아니지만 매우 저렴한(^^) '공짜'라는 숙박 비용을 생각한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낮에 계곡에서 심하게 놀았나보다...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어디선가 노랫 소리가 들려 온다.

풍부한 성량에 기가 막힌 바이브레이션이 아니지만 구성진 가락은 어디에도 흠잡을 데 없다.

술 마시고 처량하게 아님 기분 만땅의 자뻑 노래가 아니라,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듯 한껏 제끼는 노랫 소리이다.

한 두 분이 아니다. 어깨춤 들썩이며, 방구들 꺼져라 발구름에, 장구 가락 부럽지 않은 손뼉 장단에, 왁자지껄 웃음 한보따리 노랫 소리가 창을 넘고 길을 넘고 산을 넘고 하늘에 닿는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노래 이음과 올려야 할 때 올리고, 내려야 할 때 내리고, 넘어갈 때 넘어가는 완벽한 호흡은 1~2년 맞춘 것이 아니라 한 평생 어울려야 가능한 경지이다.

가사가 틀린들 어떠랴. 내 인생이 노래인데.

음정이 흔들리면 어떠랴. 까짓것 기분에 부르는 것인데.

노래가 끊긴들 무슨 상관이랴. 주면 받고, 받으면 주면 되는 것을.

시끄럽다고 한들 뭔 걱정인가. 시끄러우면 너도 와서 부르면 되지.

 

아까 보았던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이 곳 산자락에 놀러 오신 '엄마'들이다.

 

내 엄마는 노래를 잘 못 부르신다. 노래방에 같이 가면 언제나 부끄러워 하신다. 사실 음정과 박자, 가사를 제대로 맞게 부르신 적은 - 내 기억으로는 - 없다. 엄마가 마이크를 잡으면 그 음정과 박자와 가사에 따라 가야 한다. 따라 가면 된다. 그런들 어떠랴. 조용필의 노래가 어디 조용필만의 것이냐. 엄마가 부르면 엄마의 인생이요, 엄마의 사연이 되는 것을. 그 노래나마 이럴 때 이렇게라도 부르지 않으면, 그저 마늘까며 혼자 중얼거리던 것이 전부였을 엄마의 노래....

 

엄마들의 노랫 소리가 시끄럽지 않은 건....그 엄마들의 인생 어쩌구저쩌구의 시건방진 감정이입이 아니라....목소리가 갈라져도 한껏 웃어 제끼며 풀어놓는 노랫소리가 듣는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한껏 제끼는 그 풀어놓음이 나마저도 흥겹고 즐겁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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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1-게아재비

게아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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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아재비...물사마귀라고도 한다. 작은 수생곤충, 올챙이 등을 잡아 먹으며 성충의 경우, 꽁지의 긴 호흡관을 수면 밖으로 내밀어서 숨을 쉰다.

 

주말에 오대산에 다녀 왔다.

출발하기 전부터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것이라는 소식에 맘이 불편했지만, 이왕 가기로 한 것이기에 일단 출발한 것이다.

역시...일기예보를 믿지 않은 건 잘 한 일이다. 지금껏 일기예보가 제대로 맞은 걸 본 적이 없어서 일기예보를 우습게 알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디 갈라치면 일기예보를 꼭 확인하게 된다...무슨 심뽀인지...

오대산에 도착해서 작은 계곡에 발을 담글 때 쯤에는 늦여름 햇볕에 등짝이 남아날라나 은근히 걱정될 정도였다.

오대산 입구 전에 월정분교가 있는데 그 분교 옆에 작은 계곡(?)이 있다. 오랜 가뭄에도 불구하고 물살이 제법 쎄다. 물 바닥의 돌멩이들은 돌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서 닿는 족족 몸 중심잡기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계곡 본류로의 접근은 포기하고 계곡 옆에 제법 널찍이 고여 있는 물웅덩이로 갔다. 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니 지나가는 여름이 아쉽기만 하다.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어릴 적 부산에서 자랐지만, 부산은 산과 계곡이 많아 가재며 물방개며 쫓아다니며 놀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내가 어렸을 때 물망초라는 계곡이 있었는데, 6.25때 폭격으로 산의 절반이 잘려 나간 옆에 그 상흔을 어루만지기라도 하듯 계곡의 개울물이 휘감아 돌아가는 곳이다.

 

물에 발을 담그고 허리를 잔뜩 구부려 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혹시 반가운 옛 것들을 만날 수 있을려나....새끼 손가락 절반만한 크기의 송사리 아가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놀고 있다. 문명의 폭력 속에 그저 살아남아 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하나씩 하나씩 돌멩이들을 들추어가며 숨바꼭질 놀이하듯 기억 속의 것들을 찾아 본다. 가재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라 하더라도 수생곤충들이나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물은 깨끗하다만, 그건 나에게나 깨끗한 물이지 그네들이 살기에는 참 어려운 환경인가보다. 인간들은 모든 것들이 인간인 줄 아나보다. 개를 보든 고양이를 보든 소를 보든 비둘기를 보든 잠자리를 보든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서 본다. 개나 고양이나 그네들의 모습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슬프면 개도 슬퍼야 하고 인간이 기쁘면 고양이도 기쁜 것이다. 개와 소가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면 인간들은 서로 다른 종의 사랑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호들갑을 떤다. 정말이지 놀고 있다....

 

한참을 뒤적이다가 정말 반가운 곤충을 만났다. 게아재비....물사마귀라고도 하는 게아재비는 먹잇감이 근처에 오면 사마귀처럼 앞의 두 다리로 먹이를 낚아챈 후, 주둥이의 긴 관으로 먹잇감의 체액을 빨아 먹는다. 그래서 알고 보면 정말 무서운 녀석이다.

 

게아재비도 있는데...라는 생각으로 늦여름 땡볕에 목덜미가 후끈거리는 것도 잊은 채 다른 녀석들도 찾기 시작했다. 어디 있을까? 아무리 뒤적여도 더 이상 내 기억 속의 그네들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어디 갔을까? 깨끗하기로 소문난 오대산 물줄기조차 아니라면 그네들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어디로 갔을까?

 

산 좋고 물 좋은 건 나에게만 그런가 보다...인간에게만 그런가 보다...허기사 시멘트와 아스팔트에 둘러싸여 배기 가스로 숨을 쉬며 웰빙을 찾아다니는 인간에게는 어딘들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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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난방 참여 후기...

  8월 19일. 토요일. 오후 3시.

  한국노동정책이론연구소(한노정연)에서 '열린포럼 중구난방' 두 번 째를 연다기에 땡볕을 뚫고 혈혈단신으로 찾아 갔다.

 

  왜 갔냐구? 중구난방이라길래....

  참고로 아는 척하면^^

  중구난방 (衆 : 무리 중  口 : 입 구  難 : 어려울 난  防 : 막을 방)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소공(召公)이 주여왕(周勵王)의 탄압 정책에 반대하며 이렇게 충언(衷言)하였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개천을 막는 것보다 어렵습니다[防民之口 甚於防川]. 개천이 막혔다가 터지면 사람이 많이 상하게 되는데, 백성들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를 막는 사람은 물이 흘러내리도록 해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말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왕은 소공의 이 같은 충언을 따르지 않았다. 결국 백성들은 난을 일으켰고, 여왕은 도망하여 평생을 갇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즉 대중의 말길[言路]과 자유로운 생각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맘껏 떠들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없는, 거침없는 상상력이 이야기될 수 있는 자리라길래 갔던 것이다. 난 그동안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입에 걸치고 다녔다. 난 '남'의 이야기가 마치 '나'의 이야기인 양 또 다른 '남'들에게 떠들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와 '남'의 이야기 사이의 깊은 골은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왜냐면 '남'의 이야기가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점점 '나'의 이야기는 자취를 감추고 '남'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스스로 착각하며 지내왔다. 그것은 편했다. '남'의 이야기를 내 것으로 편집하는 것도 쉬웠고, 내 속의 나를 끊임없이 되돌아 보며 힘들어 할 필요도 없었다. '남'의 이야기가 맞으면 그냥 내 속으로 집어 넣으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 내 이야기를 하려고 갔다기 보다는 그러한 상상력과 이야기들이 흘러 넘치는 소리에 목이 말라서 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게다. '나'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기에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고 어딘지 모자라고 자신없었다. '자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래서 더욱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다른 자리들보다 더 큰 기대를 가지고 갔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중구난방에 초청된 사람은 다큐영화 '돌 속에 갇힌 말(87년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 농성 사건)'의 감독인 '나루'님이다. 이 다큐영화는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구로구청에서 발각된 부정투표함에 시민, 학생 등이 항의하며 시작된 농성이 국가의 폭력으로 짓밟히게 된 사건을 다룬 것이다. 당시 상황을 찍었던, 유일하게 남아있는 영상과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과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민중의 열망에 대해 폭력으로 답하는 지배계급과 국가의 모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민중들에게 무차별 행해지는 폭력의 모습은 볼 때마나 울화가 치밀고 가슴은 먹먹하며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살인폭력 자행하는 국가권력 해체하자!! [고 하중근 열사를 추모하며]

 

  영화 상영을 끝내고 중구난방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으레 그렇듯이 처음에는 서로 잘 모르는 사이이기에 무언가 말문을 연다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다. 나루감독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구난방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속에는 '아무리 중구난방이라지만 그래도 이야기 자리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 중심을 잡고 이야기가 오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직도 나는 내 이야기가 자유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어색해서 무언가의 틀거리가 주어지고 그 속에서 그것에 맞게 이야기하는 것에 여지껏 익숙해져 있는 것이었다. 한 번 물이 들면 그 물이 빠지기는 무척 어려운가 보다.

 

  건방지지만 시건방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돌 속에 갇힌 말'이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좋았다. 그것도 역사로 불리우는 투쟁 속에 그 투쟁의 역사적 의미 등등에 대해 재조명 어쩌구저쩌구가 아니라 그 투쟁 과정과 이후의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개인적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다큐영화는 끝에 이런 말을 남긴다. "역사에 대한 예의 그러나 인간에 대한 예의가 우선이다."

 

  감히 말하건대 우리는 인간을 위해 투쟁해야지 투쟁을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돌 속에 갇힌 말'에 보면 당시 그 사건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관망하고 지시하는 사람 부류'와 '직접 뛰어들어 행동하는 사람 부류'이다. 관망하고 지시하던 사람들은 공권력의 폭력이 자행되던 그 순간에 아무도 구로구청 현장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부정투표함의 사수가 민주주의의 사수라는 그 하나의 믿음으로 모여 들었던, 직접 뛰어들어 행동했던 시민, 학생 등 민중들만이 국가의 폭력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역사의 뒷 켠으로 밀려나 있는 동안, 그 투쟁과 폭력 그리고 그 이후를 오직 한 개인으로 감당해야 했던 그들은 역사의 그늘 속으로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었다. 역사라고 할 것까지 없다. 바로 우리에 의해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었다.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 간다.'고 했던가. 역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결의를 요구하지만, 결국 그것은 개인의 희생으로 정리될 뿐인 것 말이다. 우리의 투쟁 속에 명분과 당위가 아닌 '인간'은 있는가? 명분과 당위 속에 '인간'은 희생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투쟁과 조직의 이름 앞에 '인간'은 배제되어 있지는 않은가? 국가든, 민족이든, 학교든, 가정이든, 조직이든 그 명분과 당위 앞에서 '인간'은 고려되고 있는가? 나 역시 적을 닮아 가고 있지는 않은가?

 

  중구난방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우리'라는 속의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되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아무도 '누가 틀렸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강변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고 그 다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자신의 덜익은 생각과 떨리는 가슴과 부끄러운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의 잣대를 갖고 듣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위해 내 스스로 노력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참여한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충분히 공감했다.(적어도 내 생각에^^;)

   그래서 그랬는지 세꼬시 집으로 옮겨서 계속된 뒷풀이 자리는 나머지 아쉬운 여운을 남길 만큼 즐거운 자리였다. 나만 그랬나?^^; 중구난방...담에도 꼭 가야지...ㅋㅋㅋ

 

   여전히 나의 머릿 속에는, 가슴 속에는 그 말이 남아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우선이다"

 

[덧붙여] 참, 마지막 진행자님의 '정리발언'은 중구난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는디. 그 자리의 의미는 여러 가지일텐데 하나의 의미로 정리되는 것 같아서리. '하나'의 의미로 정리되는 것은 참여한 각자의 마음 속이면 충분할테니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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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묻은 개....

난 오늘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정직 3월"의 징계의결통보서를 받았다...정직 3월이면 해임 바로 밑이다...

8월9일자로 정직이란다...11월9일까지...

모든 직무 정지....학교에서 수업도 업무도 아무 것도 못한다...학교도 못나간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했던가?

 

8월 15일 KBS 밤 뉴스는 정말 한심하게 돌아가는 이 한국 사회를 그대로 보여준다...

뉴스를 보고 적은 내용과 기억을 중심으로^^; 아래에 정리해 놓았다.

 

아랫글 밑에 글 하나가 더 있다...이번 징계의결통보서에 명시되어 있는, 징계의결 근거이다...

 

뉴스 내용과 징계의결 근거를 한 번 비교해 보시라....

이거 보고 웃지 않으면, 스스로를 의심해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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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뉴스 내용]

 

제목 : ‘군국화 우려’ 어느 일본 여교사의 투쟁

<앵커>
일본의 우경화 바람속에서 교단에도 애국심이란 이름으로 군국주의가 부활하면서 이에 맞서는 교사들의 양심이 갈수록 설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리포트>
중학교 교사인 기미코씨(중학교 교사)는 얼마 전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지난 3월 졸업식에서 일장기가 게양될 때 일어서지 않았기 때문.

<기미코> :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어릴때부터 좋아하게 하는 것은 '일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도록' 만드는 것"

기미코씨와 뜻을 같이 하는 교사 2천 여명은 각종 집회와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도오루 (히노마루·기미가요 강제 반대 교사 모임 사무국장)> :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일본 제국주의와 침략전쟁의 상징"

학교 행사에서 일장기 게양과 국가 제창이 의무화된 것은 국기 국가법이 통과된 지난 99년부터. 도쿄도 지역에선 기립 여부를 감시하고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 크기까지 체크.

<기미코> : "저는 교사로서 잘못된 일에는 가담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로 징계를 받은 교사는 지금까지 350여명. 특히 다음 달 애국심 교육 강화를 골자로 하는 교육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해고되는 교사도 속출할 것.

침략전쟁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사들의 목소리가 거센 우경화의 바람 속에 점점 그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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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교육청 징계의결(정직 3월) 근거 - 징계의결통보서 내용]

 

- 국가공무원법 제63조 품위유지 의무 위반


   : 징계혐의자(교사 이용석)가 학생조회나 교직원조회, 학교운영위원회 등이 개최될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으며,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나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고 판단되며, 이에 대하여 징계혐의자는 개인적 가치관에 따르는 행동이었다고 주장하나, 개인의 사상 또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교실에서 발설한 것은 ~ 교사의 자질이나 국가교육에 대한 심각한 사회적 우려를 초래하였던 바, 이는 개인적 가치관에 국한된 문제의 범위를 넘어 교육공무원 신분으로서 그 품위를 사회적으로 크게 손상하는 행위를 행한 것.


- 국가공무원법 제56조 성실의 의무 위반

    * 교육기본법 제3조 학생의 학습건 침해

    * 교육기본법 제6조 교육의 중립성 훼손


   : 징계혐의자가 ~ 군대의 폭력성을 강조하면서 "폭력적 군대라면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발언한 사실 ~ 다른 시각에서의 해석이 필요하다고 발언한 것은 사회의 일반적, 보편적 가치와 기본 이념을 부인하고, 나아가 학생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가치관을 갖도록 할 소지가 있으며 ~ 개인적인 편견을 학생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부적절한 수업의 예시를 들었던 것으로 판단되는 바 ~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 교육의 중립성을 훼손하였다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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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참....그럼 나는? 이 사회는? 

[국가주의를 거부하는 교사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음....

계속 이 길을 가렵니다...많은 조언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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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임표현을 추방하자!!!

한국의 말과 글은 높임표현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그 높임표현도 세분화되어...

객체높임, 상대높임, 주체높임, 청자높임....

아주높임, 예사높임, 두루높임, 두루낮춤, 예사낮춤, 아주낮춤....

직접높임, 간접높임, 직접낮춤, 간접낮춤....

 

이 사회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제 갓 말을 시작하기 시작하는 애기 때부터 높임표현이 내면화된다...어느 정도 문장 구사력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는 아예 대놓고 어른이나 나이많은 사람들에게 높임표현을 쓰도록 강요한다...부드러운 협박으로...

 

아이 : 그거 사 줘.

어른 : "그거 사 주세요"라고 해야지.

아이 : (아빠보고) 너 왜 그래!

어른 : 아빠한테 '너'가 뭐니?

아이 : 할아버지, 밥 먹어.

어른 : "진지 잡수세요"라고 해야지.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이의 표현이 이 사회의 높임표현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 싶으면 바로 수정된다...

 

나이가 어리다싶은 사람이 반말이라도 하면 바로 들어온다..."너 몇 살인데 반말이야?"

나이가 많다싶은 사람이 반말이라도 하면 역시 바로 들어간다..."왜 저한테 반말이세요?"

 

반말에 대한 불만....그것은 권력관계에 의한 높임표현에 대한 유지이자 저항이다...

 

높임표현....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높임표현은 권력 관계를 자연스레 형성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만든다.

높임표현은...

나이주의에 따른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고 강화하며,

성별차이에 따른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고 강화하며,

지위와 권위에 따른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개개인의 내면에 무의식적으로 권력 관계를 정당화시키며,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권력 관계의 재생산을 정당화시킨다.

 

높임표현이 공경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나이가 많은, 남성에 대한, 지위가 높은, 권위가 있는, 다시 말해서 이 사회에서 작은 권력이라도 그 권력을 가지고 있는 대상에 대한 내 꿇림의 표현일 뿐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높임표현을 쓰면 되지 않느냐? 고 한다면....그 순간 높임표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한 동의이다. 왜냐면, 서로가 누구에게나 높임표현을 쓴다면 낮춤표현이라는 것이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 높임표현은 그냥 말과 글의 일상적 표현 방법일 뿐이다...

 

높임표현을 쓴다는 것이 굳이 그러한 권력 관계의 재생산과 강화라는데 기여한다고만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진심으로 높임표현을 쓰고 싶은 경우도 있지 않는가? 라고 한다면....나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내가 높임표현을 진심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별로 없이 그냥 높임표현을 써왔지만, 높임표현을 진심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을 해 봤을 때에도 이런저런 권력관계 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진짜 나이가 많거나, 진짜 대선배이거나, 진짜 존경하는 사람이거나, 진짜 어떤 사람이거나간에 나와 상대 사이에 형성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권력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거나 형성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도 반말이라도 한 번 할라치면 "싸가지 없는 후배" 정도로 "재는 어쩔 수 없어"라는 것으로 되돌아 오게 되기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반말은 좀 그렇다!!"라면서..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운영위원 중 하나인 교장에게 "아무개교장선생님"이라고 하지 않고, "아무개위원"이라고 한 번 불렀다가, "아니 교장선생님에게 '위원'이라니!!!"하면서 난리난 적도 있다....등등등....

 

사람에 대한 공경은 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이 관계를 결정짓게 되면 그 말은 폭력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국 말과 글에서 높임표현을 추방하라!!!

ㅋㅋㅋ 그럴려면 진짜 싸가지 없는 년놈이 되어야 하는데....은근슬쩍 높임표현을 쓰지 않는 적도 있지만....웬지 켕기고, 내가 버릇없는 사람인 것 같고, 그랬을 때 내가 당할 뒷감당에 자신이 없어서...아직도 생각만 그렇게 하고 있다....쩌비^^;

 

날 아는 사람들....혹 내가 반말 써도 기분 나빠하지 않기^^

[소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즐겨라]...언제쯤이나 일상의 반역이 일상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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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할머니...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 앉아 있기가 싫어서 밤산책을 나갔다.

이미 하루를 마친 햇발은 찜질방의 훈기를 도시에 남기고 갔나보다. 여전히 후텁지근한 것이 영 끈끈하다.

주택가에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마뜩찮아 다른 길로 접어 들었더니, 큰 길로 나오게 되었다. 늦은 밤, 하늘만 밤이지 거리 가로등이며 네온사인은 아직 밤이 아니라고 웅변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도시라는 이 공간은 하루 중 단 한 순간도, 단 한 군데도 진정한 '밤'과 '진정한 '침묵'을 제공하지 않는다...지겹다...지겨워...

 

조금 걸었을까....

큰 길 옆 전봇대 뒷 쪽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할머니였다.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더 많은...

흔히 일컫는 몸빼바지에...

반팔 흰 티셔츠를 입고....

시장표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피곤하신듯 전봇대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앞에는 분홍색 보자기를 펼쳐 놓은 채, 상추며, 강낭콩이며, 양상추를 얹어 놓고 팔고 있다.

 

이 시간에, 여기서....

 

걸어 가면서 자꾸 뒤돌아 보았다...아니, 자꾸 뒤돌아 보게 되었다...

 

할머니가 팔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온 삶일까? 살아갈 삶일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지금이라는 삶일까?

 

심심해서 나온 것일 거라고...말도 안될 것 같은 상상으로 무거운 마음을 변명하면서...*같은 세상이라고 혼자 화풀이해본다...

 

그래도 할머니는 행복해 할 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딱 한 마디만 하겠다..."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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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괴물2

   “국가라는 괴물”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이유로 현재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김훈태 선생님의 글을 읽고 생각해 본다. 과연 지금 국가라는 것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가?

   국가는 끊임없이 ‘전체’를 위해 ‘개인(소수)’이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전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농산물 개방, 교육 개방, 노동유연화, 한미FTA, 평택미군기지 확장 이전, 비정규직 법안, 노사관계 로드맵 등 전체를 위해서라는 일련의 모습들 속에서 희생하고 참아야 하는 것은 결국 누구인가? 남성중심 가부장 문화,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 개발 과 경쟁 중심의 경제 논리, 학벌주의 등 그러한 일련의 가치관 속에서 희생하고 참아야 하는 것은 결국 누구인가?

   혹시 국가라는 괴물이 내 안의 괴물을 먹고 자라는 것은 아닐까? 난 7년차 교육노동자이다. 보이지 않는 ‘전체’라는 허상과 그 허상을 유지하기 위한 기존 가치관들의 재생산을 위해 ‘개인과 다양성’이 희생되는 것이 당연하게 내면화되는 학교라는 공간에 충실한 내 안의 괴물들. 그 괴물들을 나의 학교 일과에 비추어 재구성해본다.


  [교무회의]

   학생부장 왈 “학생들 두발과 복장에 대해 철저히 단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명찰을 교복 왼쪽 가슴 부분에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일정한 규정에 맞추어 머리 모양이 비슷해지도록 하란다. 왜 그래야 하나? 머리 모양이 아이들의 생활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있지 않을까? 명찰은 탈부착이 가능한 상태에서 본인의 의사에 따라 패용하면 되지 않을까? 그 아이의 이름이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본인이 원하지 않음에도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나 그 아이의 이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심각한 사생활 침해가 아닐까? 두발 규정이든 명찰 패용이든 아이들을 하나의 틀거리 속에서 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통제받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내면화하는 것은 아닐까?


  [1교시]

   “반장, 수업 시작합시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차렷’과 ‘경례’...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 인사가 자꾸 귀에 거슬렸다. ‘차렷’과 ‘경례’는 군대에서 쓰는 용어가 아닌가? 군대가 아닌 학교에서 이러한 용어들이 쓰이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군대는 기본적으로 폭력과 집단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는 국가주의를 내면화시킨다.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은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것을 표현한다. 무의식 중에 나누는 인사가 상명하복과 전체주의를 내면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섬찟했다. 내가 진심으로 고민하고 선택하기 전에 이미 군사문화와 국가주의는 ‘차렷, 경례’라는 용어 속에,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라는 행위 속에, 운동장 조회 때의 군사적 도열 속에서 나에게 내면화되어 있던 것이다.


  [2교시]

  수업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잡담이 들리기 시작한다.

    “남자가 왜 그렇게 말이 많냐?”

  잉? ‘남자’가?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것은 남성중심 가부장 문화의 핵심인데...남자이고 여자이기 전에 모두 ‘인간’이 아닌가?

  여자가 여자다워야 한다는 것은 사실 남자에게 복종하고 순종할 줄 아는, 그래서 남성들의 가치관에 적합하고 남성들의 시각에 만족스러운 여자의 모습을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여성들에게조차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지는 않은가?

  또한 남성들조차 ‘남자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왜 남자는 강해야만 하고, 힘도 좋아야 하고, 듬직해야 하고, 말이 많으면 안 되는가?

  수업 시간에 내가 했던 여러 가지 무의식적인 말 속에는 이미 그러한 성역할에 따른 성차별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3교시]

  수업 중에 한 아이가 질문을 한다.

  “선생님! 왜 저희들은 투표권이 없죠?”

  “너희들은 아직 어리고 판단력이~~”

  어쨌든 난 아이들보다 오래 살았고, 오래 산만큼 경험도 많고, 그만큼 아이들보다 객관적이고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래저래 아이들에게 많은 말(잔소리)을 하게 되고,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내가 그 고래의 주체적 의지를 배려한 것이라기보다는 ‘칭찬’을 이용해서 그 고래에게 나의 가치관과 기준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아이들을 하나의 주체적 존재로 보고 그들의 이야기와 판단을 존중하기보다는 아이들을 ‘부족한 그 무엇’으로만 보고, 그래서 가르쳐야만 하는 비주체적 존재로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4교시]

  “선생님 앞에서 그 태도가 뭐야?”

  수업이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계속 자고 있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아이는 매우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마지 못해 일어난다.

  “교실 밖으로 나가서 무릎 꿇고 있어”

  난 왜 그랬을까? 그 아이에게 잘못했음을 지적하고 바꾸어나가는 과정에서 난 그 아이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생각하기는 한 것인가? 잘못한 것과 잘못한 것에 대해 아이가 책임지는 것은 다르다.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손상시키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사랑의 매’는 없다. ‘매’는 본질적으로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폭력’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하물며 인간이 아닌 다른 그 어떤 대상에게도 말이다.

  바득바득 대드는 아이들을 보면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따지는 아이들을 보면서, 수행평가 성적에 불만을 가지고 항변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교사로서 내가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말하면 안 된다는 그 어떤 근거가 있는가? 오히려 교사인 내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과 소통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교사이기 이전에 인간인 나의 인권이 중요하듯이, 학생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아이들의 인권도 중요하다. 인권은 신분과 나이와 성별과 인종과 취향을 초월해서 평등한 것이다. 진정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과연 교권이라는 것이 필요할까? 교권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권위적이지 않은가? 교실에서의 평등. 그것은 아이들끼리만의 평등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의 평등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청소 시간]

  오늘은 학교 대청소의 날이란다.

  교무실 청소 담당 아이들이 내 책상 위의 컵을 씻겠다고 가져 간다. “고마워”라고 하며 컵을 맡긴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신이 사용한 컵은 자신이 씻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수업이 끝나고 나면 칠판을 닦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었다. 난 수업이 끝나면 그냥 나오고, 수업이 시작될 때 칠판이 닦여져 있지 않으면 아이들을 나무랬다. 하지만 내가 쓴 칠판은 내가 닦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는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시킨다’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었다. 내가 해야 할 일도 아이들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일까? 아이들은 학생이고, 어리고, 어른이(교사가) 시키는 일이니까?

  학교 대청소라기에 모든 학년, 모든 학급, 모든 학생들이 청소용구를 들고 청소를 시작한다. 세제를 풀어 교실 바닥까지 박박 닦아낸다. 그래서 나도 빗자루를 들고 아이들과 함께 교실 청소를 했다. 청소도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공동 생활을 위해 각자에게 필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청소용구를 들고 쓸고 닦는 것이 청소교육일까? 더군다나 학교 지침에 따라 일제히 청소를 하는 이 모습이 말이다. 이건 교육이 아니라 그저 힘든 청소일 뿐이다. 학교를 위해서 아이들이 동원되는, 옛날의 새마을 운동같은.

  청소교육이 아니라 환경교육이어야 하지 않을까? 내 주변, 내 교실, 내 학교가 보다 친인간적 환경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이 환경교육일 것이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필요하다면 빗자루를 들어야 할 것이다.


[학급단합대회]

  오늘은 토요일. 학급단합대회를 하기로 한 날이다.

  “한 명이라도 참석하지 않으면 학급단합대회가 무슨 의미가 있니?”

  조바심이 났었다. 교사가 되어 처음 하는 학급단합대회. 한 명이라도 참석하지 않으면 단합대회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고,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들이 참석하지 못한다고 하면 단합대회는 엉성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참석하지 못한다는 아이들을 이렇게 저렇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고 전체를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들이다. 전체를 먼저 생각할 줄 알게 하는 것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음 주에 학교 체육대회를 하고 나면, 교직원 체육대회를 한단다. 이런. 하필이면 그 때 나는 약속이 있는데. 교직원 체육대회도 좋지만 내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뭐. 교감선생님께 참석이 어렵다고 말씀드린다. 교감선생님 왈 “전체 교직원의 단합을 위한 것이고, 함께 잘 해보자는 것인데 참석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선생님 일은 뒤로 미루고 참석하세요” 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왜냐면 지금 내 일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 역시 아이들에게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는 않았을까?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것은 강요가 아닐까? 전체를 위한 것이든 개인을 위한 것이든 그 선택은 모두 각 개인의 몫이다. 개인의 의사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묵살되어서는 안 된다. ‘전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그 다양성이 모였을 때 ‘전체’가 의미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학교는 어느 공간보다 진보적이어야 한다. 진보란 무엇이겠는가?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가치관과 그에 따른 통제가 아니라 다양성이 존중되고 다양한 관점이 논의되고 그에 따라 자율적으로 판단해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교실은 다양성과 평등이 존중되고 실현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전체, 나이, 성별, 장애, 피부색, 개인 가치관, 취향 등에 의해 특정 대상이 배제되고 소외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차이가 차별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단 이것은 교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이들을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부족한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내 안의 괴물이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덧붙여] 내 안의 괴물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이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이 오랜 시간 동안 내 내면 속에 ‘당연히 그러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던 결과일 것이다. ‘내 탓이오’는 모든 책임을 나에게만 묻는 것일 뿐이다.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며 내 안의 괴물과 싸우고 싶다. 동시에 국가라는 괴물, 자본이라는 괴물과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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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반역...

MIC님의 [아내가 결혼했다.] 에 관련된 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등 그 어떤 관계든 그 관계 속에 권력 관계가 만들어지면 그 관계는 해체되어야 한다.

 

사랑하면서 내 마음 속에 생기는 질투의 감정마저도 그 사랑이 온전히 나만의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 아닐까? 즉 소유라고 하는 권력 관계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나만을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이 마음은....어찌 할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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