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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23
    아침 지하철에서의 단상...(2)
    곰탱이
  2. 2006/10/22
    알토란 같던...(2)
    곰탱이
  3. 2006/10/12
    녹색이더이다^^(3)
    곰탱이
  4. 2006/10/10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곰탱이
  5. 2006/10/09
    누구의 역성을 들랴...^^...(2)
    곰탱이
  6. 2006/10/09
    잡생각...(3)
    곰탱이
  7. 2006/09/19
    우리 우리 자란다, 칭찬 먹고 자란다^^!(5)
    곰탱이
  8. 2006/09/09
    불혹에 대하여...(8)
    곰탱이
  9. 2006/09/07
    선생되기의 필요조건.(3)
    곰탱이
  10. 2006/09/02
    나-모순된 존재(7)
    곰탱이

나 이제부터 죽었다...

오늘부터 일주일 간 기말고사 기간이다.

시험문제 무엇을 낼지도 거시기하고...

시험 끝나면 채점하고 성적 내서 인터넷에 올려야 하고...

그런 다음 바로 성적 때문에 아이들한테 전화가 가끔씩 오고...

설득하고 대답해 주려면 시간 많이 걸리고, 그래서 귀찮고...

그냥 시험을 pass 또는 non-pass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왜 A부터 F까지 줄을 세우는지 원...

이것도 비율 맞춰서 주려면 머리 좀 많이 써야 한다...

 

다른 한편 더 죽을 맛은 학기 중 펑펑 놀다가(? 근데 뭐하고 놀았냐?...) 

책 원고 써 줘야 한다. 연말까지!!!

아주 벼락치기다.

그래서 세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고 했던가...

학교 다닐 때 벼락치기하는 습관을 들여놔서 아주 골때린다...

좀 평소에 하면 누가 잡아먹냐!!!

 

청춘~~~을 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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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는 역시 유기적 관계보단 기계적 관계가 흐~~~~....

 

흐~~~ 이따 집에서 깍두기에다 소주 한잔...

크어~~~~... 앗싸 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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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내가 뭐 이런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너무 참담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뉴코아 노동조합 위원장과 순천지부 지부장이 명동성당에서

천막 농성을 하고자 명동성당 신부에게 무릎까지 꿇어야 하는

이런 상황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노동자가 노동자 자신을 스스로 보위하지 못하고,

종교단체에 농성자리를 구걸하도록 하고 있으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 한뼘도 없다니...

왜 우리는 노동자인 우리 자신을 보위할 수 없는 것일까...

투쟁할 진지 한조각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현재 우리 노동자의 모습을 보니, 그 모습이 꼭 이순신을 닮아 있구나...

진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와 이순신이...

 

우리는 언제까지 짓밟히며 구걸하면서 떠돌아다녀야 하는가!!!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coolmedia&id=1654 

(뉴코아 노조 위원장 명성 농성 관련 참세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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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보...

요즈음은 수업에서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만 예쁘고,

수업에서 같이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은 별로 예쁘다는 생각이 안 든다.

예전에 모두 다 예뻤는데...

우째 인간이 가면 갈수록 퇴보하는 것 같다.

ㅠㅠ...

일케도 되는 기야?!!!

퇴보하는 인간 = 보수적인 인간?

 

인격수양이 너무너무 필요하다는 생각만이...

 

철학은 왜 공부하냐!!!

 

불혹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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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sex)에 대한 끄적거림...

<여성되기>와 관련된 글을 구상하던 차에, 이러저러하게

생각이 흘러가다가 성(sex)과 관련하여 생각이 멈추면서

이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생각나는 대로 끄적여 보았다^^...

 

혹시 지적해 주실 것 있으면 지적해 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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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과 인간관계, 자유와 평등 #


1. 성-사회적 관계의 토대이자 생산물(결과물).


성, 섹스. 이 주제는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잘 모르는 영역의 주제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자주 이야기하면서도, 성이 무엇인지, 왜 성관계를 하는지, 성관계가 도대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대체로 술자리 등에서의 음담패설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는 사람들이 대체로 성을 동물적인 본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성은 동물적 본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인간적이지 않은 꺼림직한 것이고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인간 이하 또는 저질 인간이라는 눈총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성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고 사회적인 활동이다. 인간은 성을 통해서 사회적 관계의 기초를 만든다. 즉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생산한다. 성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인간임을 확인하면서 기존의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대를 생산하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예를 들면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 서로 닮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고 껴안음으로써 서로의 관계 폭을 넓혀가는 것이다. 서로간의 관계의 폭넓음은 또 다른 이들과의 관계맺음의 폭을 넓혀 준다. ‘연애를 해 본 자가 연애를 더 잘 한다.’

그런데도 왜 성은 동물적 본능의 영역 속에서 억압되어 있는 것일까? 이러한 것이 왜 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지배 이데올로기)이 되었을까?

  

2. 성-사회적 관계로부터의 자유이며 동시에 사회적 관계에로의 자유.


우리는 성에 대해 공론화하지 못한다. 성에 대한 공론화는 도덕적 비난뿐만 아니라 법적 처벌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성의 공론화는 이른바 ‘전문가’라는 특권층에게만 한정되어 있으며 대중 일반에게는 금지되어 있다. 도대체 왜 대중 일반에게 성은 이렇게 금기의 영역에 있어야 하는가? 도대체 대중에게 성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길래 금기의 영역으로 남게 되는가?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지배, 피지배 문제, 즉 인간의 서열화, 계급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구체적 현실화는 평등하지 않고 불평등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성적 욕구는 모두 평등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현실 속에서 성적 욕구의 실현은 결코 평등하지 않고 불평등하다. 인간의 성적 욕구의 실현은 인간의 서열화, 계급화를 통해 서열화되고 계급화된다.  성적 욕구는 인간적인 것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것으로 이분화된다, 지배계급의 성적 욕구의 실현은 인간적인 것이 되고 피지배계급의 성적 욕구의 실현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성, 그리고 그 성과 연관된 욕구는 평등하다. 그런데 도대체 평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흔히 공산주의 사회를 평등한 사회라고 할 때,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평등’을 산술적인 평등으로 생각하며, 그리하여 결국은 평등을 산술적 의미로만 제한시키게 된다. 1/n이라는 산술적으로 평등한 사회는 이루어질 수 없다. 평등이란 자유를 필연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즉 평등이란 인간의 ‘자유’로운 관계맺음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모든 측면에서, 전방위적으로!  그렇지만 그 관계맺음은 끝이 없으며, 하나의 타입이 존재하지 않으며, 시․공간적으로 특이하다. 관계의 무한함, 그 무한함에 따르는 자유로움……. 이러한 관계의 기초가 바로 성이며, 이 욕구 역시 무한하며 자유롭다. 그래서 평등하다.

성적 욕구의 자유와 평등은 인간관계의 자유와 평등, 변화와 발전을 내포하고 있다. 즉 성적 욕구 자체가 변태(metamorphosis)이고 인간관계 자체가 변태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가 변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낡은 관계로부터 새로운 관계를 꿈꾼다. 그 관계의 기초인 성에서도 새로운 무엇인가를 꿈꾼다. 그래서 바람을 쐬기도 하고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그 꿈의 원동력은 <상상력>이다. 변태는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을 통하여 성은 낡은 관계로부터 새로운 관계로 변태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3. 성의 타입화와 상품화-성 욕구 실현 불평등의 기원.


그런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변태 자체를 비정상으로 본다. 변태는 서열화, 계급화되어 있는 관계의 질서를 송두리째 파괴해 버린다. 오르가즘은 기존 관계의 파괴이다. 그것도 핵폭탄급 이상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때, 기존의 세계는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동시에 상상력은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며 사람들은 이 상상을 현실화시키려고 노력한다. 매번의 섹스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섹스는 매번 그 형태와 깊이를 달리한다. 그 속에서 새로운 자기를 발견한다. 인간으로서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 이것이 섹스의 원동력이며, 사랑을 지속시키는 끈끈이이다.

섹스는 단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는 혁명적․실천적 활동이다. 바로 이러한 성의 특성 때문에 지배 계급은 대체로 이 성을 암흑의 저 깊숙한 우리에 가두어두고자 했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적인 성을 가축처럼 길들이려고 하였다. 이 길들여진 성이 <인간화된> 성이다. 이 인간화된 성은 <상품화된> 성이다.

상품화된 성은 변혁적인 변태로서의 성의 상상력을, 즉 저항으로서의 성의 상상력을 <타입화>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상상력을 지배계급과 자본의 이익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러한 자본의 이익 방향이 타입화이다. 이 타입화의 컨셉은 이른바 <섹시함>이다. 그러나 이 섹시함은 구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정형화된 타입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본과 지배계급은 이 섹시함이 기거할 유일한 하나의 장소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객관화시켜 대중들에게 종교처럼 설교한다. <너희가 섹시함을 믿느냐? 이것이 바로 섹시함이니라!> 이제 섹시함의 이데아는 34-24-34의 몸매를 지닌 스타급 연예인으로 왕림하신다. 부처를 믿으면 부처가 되듯이 누구나 위의 숫자에 다가갈수록 섹시함의 이데아가 된다. 이제 섹시함의 이데아는 객관화되고 동시에 수량화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량화는 곧 상품화를 의미한다. 즉 사고파는 것을 뜻한다. 섹시함의 이데아는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돈이 없는 자는 섹시함의 이데아에서 타락한 자들이다. 그들에겐 참된 인간다움의 섹시함이 없고, 오로지 동물적 본능으로서의 성적 욕구만이 있을 뿐이다. 섹시함의 이데아 계에서 추락하고 타락한 돈 없는 자들은 자신의 성 욕구가 동물적인 것임을 깨닫고 섹시함의 이데아를 상기시켜 섹시함의 이데아 세계로 돌아가고자 기를 쓰고 몸부림친다. <넌 어떤 타입을 좋아하니?> <김태희 정도?!> 또는 <비 정도?!> 이 타입화는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이 섹시함의 이데아를 돈을 들여 추구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비정상이거나 모자란 사람이다. 즉 얼짱도 몸짱도 아니면 여자도 아니거나 남자도 아니거나 또는 세상물정 모르는 완전히 바보이거나 불평불만자이다. 이것은 아마도 성 정치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배제의 정치학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의 상상력을 복원하여야 한다. 그래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성의 상상력의 복원은 섹시함의 이데아를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이데아, 타입의 절대적 보편성을 깨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노동계급을 포함한 피지배 계급의 주체적인 새로운 수많은 타입들이 생산되어 타입들의 물결이 흘러넘치도록 해야 한다. 우리 모두 변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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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삶은 죽음처럼 당당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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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그저께 토요일에 후배 하나가 자살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출산 후유증 중 하나인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거다.

평소 늘 밝고 잘 웃는 사람이었는데...

둘째 낳고서 우울증에 상당히 시달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문상을 갔다 왔는데, 문상 같이 한 결혼한 다른 여자 후배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깊은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도 마음이 안 좋다.

 

얼마 전에 티비에서 아이 다섯을 낳은 미국 여성이 결국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 다섯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아는 사람 중 하나(여성)가 우울증에 시달리다 먼 이국 땅인 미국에서 자살을 했단다.

난 그저 우울증이란 주위 사람들이 잘 신경 쓰고 시간 지나면 낫는 가벼운 정신 질환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닌가보다.

 

여성이 출산 이후에 겪는 우울증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인 것 같다.

그런데도 이것이 별로 사회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아마도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노동은 언제나 부차적이며 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속에서 또한 여성은 언제나 투명인간과도 같은 존재감 없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니 여성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부차적이고 사적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 개인 혼자서

사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여성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기 일쑤이다.

(이는 조직 차원에서 보더라도 조직의 내부 살림을 담당하며 어머니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발언은 종종 무시당하기 일쑤이다. 실제로 어머니들이 일상 생활에서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무시 당하며

사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볼 수 있다.)

 

여성 노동자들이 출산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단지 경제적인 생존의 측면에서만은 아닌 것 같다.

 

우울증을 혼자 해결하라고 내버려 두는 것은 일종의 살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우울증뿐만 아니라 여성과 관련한 모든 문제가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정신이 맑지 못하다.

뭔가 얘기를 하고 싶은데, 잘 안 된다.

자살한 후배가 눈에 밟힌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서 차분히 정리해 봐야겠다.

 

자살한 후배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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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6.

 

(7) 플라톤   

 

플라톤은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자들을 종합적으로 통일하여 지신만의 독특한 이데아론을 확립한 사람이다.

먼저 아낙시만드로스의 체계를 받아들인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최초의 자연 질서라 할 수 있는 온․냉, 건․습의 대립적 체계를 받아들여 이데아들의 대립적 체계를 세운다. 예를 들어 김․짧음, 넓음․좁음, 깊음․앝음, 아름다움․추함 등의 이데아의 대립적 체계를 세운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아의 대립적 체계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처럼 유한한 몇 개의 대립 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무수한 대립 쌍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원자론자들의 원자의 무수함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런데 원자론자들의 원자의 무수함은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처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불러일으키므로, 그리하여 <다(多)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투쟁을 종식시켜 <다(多)의 공존>을 가능하게 위해서는, 즉 이러한 투쟁을 극복하여 사회를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강력한 중앙 권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하나의 강력한 중앙 권력이 플라톤에게는 여러 이데아들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관계 맺게 하는 <선(善)의 이데아>로 나타난다. 선의 이데아는 모든 이데아들을 비춘다.

이런 선의 이데아는 헤라클레이토스의 Logos(영혼, 이성, 정신) 개념을 받아들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헤라클레이토스의 Logos는 자기 자신 안에 변화의 개념을 안고 있다. 변화의 개념을 안고 있다는 것은 결국 권력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플라톤 역시 귀족정을 옹호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권력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은 귀족정이 다른 권력 체제, 즉 민주정으로 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플라톤에게는 권력 자체가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의 일원론과 <운동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 자체 영원불변하는 것이 된다.

플라톤은 세계를 두 개의 세계, 즉 세계에 대한 참된 진리를 알 수 있게 하는 불변적 가지(可知)계인 이데아 계와 참된 진리를 파악할 수 없는 변화하는 가시(可視)적인 현상계(만물계)로 나눈다. 그런데 이데아들은 어떻게 만물을 낳는가? 다시 말해서 서로 상반된 성격의 두 세계는 어떻게 관계를 가지게 되는가? 이에 대해서 플라톤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우주적 조화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가, 세계가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는지, 또 어떻게 조화롭게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이 피타고라스학파의 한계임을 위에서 보았다. 플라톤은 이것을 넘어서서 어떻게 조화롭게 관계하는지를 설명한다. 이는 <관여> 또는 <분유(分有)>(methexis)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1)

<관여>또는 <분유>라는 개념은 현상계(경험 세계)의 경험할 수 있는 개별적인 사물이 이데아 계(경험으로 알 수 없는 세계,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세계)의 보편적 본질을 나누어 가진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유될 수 있는가? 이는 <상기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상기설>은 인간의 참다운 인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상기설>은 아낙시만드로스의 과학적 세계관의 체계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이데아 계에 속해 있던 존재이다. 인간은 신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영혼은 이데아 계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혼이 신체와 결합하여 현상계에 속하는 인간(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만물의 하나로서의 인간)이 될 때 영혼은 신체에 속박 당하게 되고2) 그리하여 신체와 결합하기 이전에 영혼이 인식했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허망한 현상계 속에서 인간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즉 <나 자신을 알기>3) 위해서는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참다운 본질을 인식하였던 영혼이 있음을 일깨우는(상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데아에 대한 분유가 일어나게 되고 완전한 앎으로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4)

그런데 이데아에 대한 앎에 도달하는 과정, 즉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은 일의적이 아니라, 이중적이다.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은 크게 수학적 사유(오성적 사유)와 변증법적 사유(이성적 사유)로 대별된다. 수학적 사유는 이데아에 대한 분유가 일어나게 되는 과정이고, 변증법적 사유는 이데아에 대한 완전한 앎으로까지 도달할 수 있는 과정이다.5) 변증법적 사유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영향 받은 바(<너 자신을 알라>와 관계된 산파술)가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데아에 대한 인식(상기)은 교육(사유의 계발)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데 이 교육은 귀족과 시민에 한해서만 이루어졌다. 귀족정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당시의 귀족정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귀족정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시민을 주축으로 한 민주정과 혼합된 형태의 귀족정이라고 할 수 있다(예> 호민관). 이것은 곧 사회의 분업화 과정에 따른 것이고, 또한 지배 계급의 이원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여전히 귀족을 우선순위에 두었다.6)    

이러한 상기설과 관련하여 플라톤은 자신의 국가론을 정립한다. 플라톤의 국가는 세 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통치 계급, 수호(전사) 계급, 생산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인식론과 관련해서는, 통치 계급은 변증법적 사유(이성적 사유), 수호 계급은 수학적 사유(오성적 사유), 생산 계급은 감각적 지각과 대비된다. 존재론과 관련해서는, 통치 계급은 선의 이데아, 수호 계급은 이데아, 생산 계급은 현상계의 만물과 대비된다.

이 국가론은 개인의 영혼의 구성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개인의 영혼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 머리, 가슴, 배로 이어진다. 머리는 이성, 지혜로 나타난다. 가슴은 의지, 용기로 나타난다. 배는 욕망, 절제로 나타난다. 국가론과 관련해서는, 머리는 통치 계급을, 가슴은 수호 계급을, 배는 생산 계급과 대비된다.

그런데 이 세 부분(영역)은 헤시오도스의 우주 생성 신화에서처럼 각기 다른 부분(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통치 계급은 국가 통치에만 관여해야 되고, 국방 부문이나 경제 부문에 절대 관여해서는 안 된다. 특히 돈과 관련해서는 돈에 눈독을 들여서는 안 된다. 다른 계급들도 마찬가지이다. 수호 계급이나 생산 계급이 통치를 한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 신분 상승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자신이 맡고 있는 부분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이 꿈꾸던 다(多)의 공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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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현상2?

이빨 씌웠던 게 깨져서 거금을 들여 이빨 치료하고 있는데,

어제밤부터  멀쩡하던 오른쪽 아래 어금니가 아프기 시작하더니만,

오늘 오전에는 너무 쑤시더라.

그래서 치과 갔더니,

이빨에 금이 가면 신경을 건드려서 그렇게 아프다고 설명하더라만...

근데 이것도 일종의 금단 현상인 것처럼 생각되는데...

치과에 들어가서 치료 받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치과에 괜히 왔다는 생각이...

치과에 온 게 너무 후회되더라!!!

그냥 좀 참고 개겼으면 혹시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요즘 의사를 못 믿는 희안한 버릇이 생겼다...

아주 이젠 사람 못 믿는 게 금단 현상이 돼 버린 건 아닌지...

사람 못 믿는 금단 현상이라면,

금주, 금연 금금주, 금금연할까부다...ㅠㅠ...

 

아직도 치료한 이빨이 아파서 점심도 못 먹고 있다.

이따 운동은 어찌 할꼬...

 

그리고 공부는 어찌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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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금단 현상??

금주한 지 벌써 두 달이 되어 간다. 

그런데 3주 전부터인가...

일단 왼쪽 머리의 편두통이 시작되었다.

그러더니 왼쪽 귀가 아프고 왼쪽 어금니 쪽의 잇몸이 붓기 시작했다.

이틀을 앓은 후에 약국 가서 약을 사먹고 나서는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위의 증상들이 많이 없어지고 나자,

2주 전부터는 목이 따끔까끔 아프기 시작했고,

가래도 끓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니, 술 끊고 난 뒤의 금단 현상이라고 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여 사는 곳 근처의 내과의원에 가서 물어 보았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지...

그랬더니 그 의사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

잘 모르시겠단다...

아~~~...

그러더니 목이 아픈 것은 편도선 때문이 아니라 인후염일 가능성

(인후염이라고 확실한 진단도 아닌...)이 높다고, 그래서 약을 지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찰비가 올라서 3천 4백 원하더라...(4백원 올랐스...언제...).

약값 1800원...

 

그러다 지난 주 금요일부터 감기 몸살기가 살살 오더니 결국 몸살이 왔다.

이번엔 몸으로 버텼다.

그런데 지금은 몸살기는 많이 나아졌는데,

또 지난 번처럼 목이 아프다.

담배 안 핀 지 3일째다.

담배 생각이 별로 안 난다.

 

이게 이른바 금주 금단 현상일까?...

술 끊으면 이런 생고생을 하나?...

왜 그런지 잘 모르니까 답답하다.

 

누구 술 끊으신 분 왜 그런지 좀 가르쳐 주시면 감사감사감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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