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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원강의안] "대중이 운동권을 구원하리라" 3

3. 전위 : 지도부인가 대중-되기인가?


앞선 논의에서 살펴본 대중에 대한 관점은 촛불봉기 내내 논란이 되었던 “지도냐, 자발성이냐”의 문제를 바라보는데 있어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이 논쟁은 처음에는 조직된 운동권과 비조직된 시위대 사이에서 시작되어 이후 여러 형태로 반복되었습니다. “지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자발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문제의식은 “대중의 역량이 어떻게 상승할 수 있는 가”에 있습니다. 저 자신이 논쟁에 참가1)한 사람으로서 중립의 위치에서 양 입장을 검토하지는 못할 것 같고, 여기서는 주로 “지도”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지를 반박하면서 앞서 살펴본 “바둑과 장기”의 견지에서 지도, 자발성, 그리고 “전위”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시해보려 합니다.


“지도”를 옹호하는 이들은 “정부가 탄압”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대중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중이 “단결”된 하나의 신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운동그룹 간에 차이는 당연히 존재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운동이 ‘분열’되지 않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연합한 국민대책회의가 거리 행진과 시위를 주최하고 책임질 때, 더 크고 안정적인 행진이 가능할 것이고, 정부도 쉽게 탄압하지 못할 것입니다…(중략)… 그리고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인지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뜻을 모으는 '합의'는 결코 대중의 자발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2)


“단결을 의식적으로 쟁취하지 않으면 단결은 결정적 물음에 부딪힌 운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 각각의 물음과 대결해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운동의 단결이 보장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운동은 분열로 실패하게 된다…(중략)… 희망을 대중이 “자발적으로” 가지려면 온갖 언론의 자발성·순수성 주장과 정반대로 오히려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갖고, 그것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응답하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3)


저는 이들의 주장이 “지도부”와 “전위”를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들이 국면을 돌파할 강력한 리더십을 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시민사회단체들이 연합한 국민대책회의”에 하나의 대표권을 주는 데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동은 대중이 “하나”된 통일체여야 한다는 이들의 강박증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이들에게 있어 “조직화”라는 것은 차이를 거세하고 하나의 정치적 통일체가 되는 것을 말하거나, 혹은 “차이를 가진 개별자”들이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합의에 따라 하나의 실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내부성의 환경 속에서 코드화된 장기의 조직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의 조직화, 말하자면 바둑의 조직화도 있습니다. 앞서서 “바둑은 열린 공간에 바둑알이 분배되어 공간을 확보하고 어떠한 지점에서도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둑판은 “전선 없는 전쟁”입니다. 바둑알들은 어디서나 출현하여 판세를 뒤흔들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들을 일으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둑의 조직화는 “더욱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한 조직화”입니다. 지도를 옹호하는 이들에게는 “조직화”가 아니면 “아나키”입니다. 실제로 저를 비롯해서 이들의 실천과 입장을 비판하는 이들은 곧잘 “아나키스트”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개의 조직화가 있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차이를 없애고(관리하고) 하나가 되기 위한 장기의 조직화”와 “더욱 특이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바둑의 조직화”


장기의 조직화는 근본적으로 국가의 조직화 방식입니다. 저는 국가를 이긴다는 것은 국가와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도를 옹호하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국가와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질서”, “합의”, “권위”입니다. 그 내용은 다를지 몰라도 형식에 있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촛불봉기의 초창기에 대중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 것, 그리고 국가가 대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알지 못해 우왕좌왕하도록 만든 것은 대중의 질서 있고, 하나 된 투쟁이 아니라 그들이 국가와는 질적으로 다른 형식으로 조직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자리에 어떻게 놓일지 모르는 바둑알-대중, 누구를 어떻게 진압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바둑알-대중.


실제로 대형 방송차도, 통일된 지도부도 없었던 초창기의 행진은 결코 무질서하거나 무능하지 않았습니다. 방송차가 없기에 대중은 각자의 능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지도부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스스로 지도부가 되어 머리를 굴려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논쟁과 토론, 정서적 감응을 통한 소통이 일어나며 대중은 대중-되기를 끊임없이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방송차가 등장하자 대중은 모두 방송차의 압도적인 음량 앞에서 자신의 구호가 아닌 지도부의 구호를 외쳐야 했고, 자신이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기보다 지도부가 무엇을 할지를 기다리는 존재로 전락해야 했습니다. 6월 1일의 대중은 2만 명도 안 되는 숫자가 권력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시민들을 강력하게 촉발할 수 있었지만, 6월 10일의의 대중은 수십만 명이 모였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오히려 그 이전까지 배후를 찾고, 지도부를 찾아 우왕좌왕하던 정부 여당과 경찰은 6.10 이후 전열을 가다듬고 전선이 명확해진 촛불을 대대적으로 공략할 수 있었습니다.


지도를 옹호하는 이들은 “그래도 국면을 돌파할 때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느냐?”라고 반론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국면을 돌파하는 “전위”는 언제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부”가 아닙니다. 전위란 오히려 “대중-되기”의 주체입니다. 대중이 하나의 모습으로 경화(硬化)될 때, 그 대중 안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자, 대중이 한 방향으로만 나아갈 때 거기에 “여러 방향”을 제시하는 자, 곧 “소수적 흐름”을 창조하는 자들이 “전위”인 것입니다. “강력한 리더십” = “합의를 통한 지도”가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대중 안에서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냄으로써 국면을 전환시키기고, 그것을 통해 대중의 힘을 상승시키는 이들이 “전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위”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수많은 시민사회단체의 연합체” 따위일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나 전위가 될 수 있습니다. 국면을 돌파하는 상상력과 강철의 체력(!)으로 사건을 창조하는 누구나 “전위”일 것입니다. 촛불봉기는 수많은 “전위들”을 가진 운동이었습니다. “지도부”는 항상 한발 늦게 올 뿐이었습니다. 저들의 말대로 “순수한 대중”, “순수한 자발성” 따위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존재가 되려는 욕망으로 이글대는 수많은 “대중-되기”들, “전위들”이 있습니다. 촛불봉기의 힘은 그 “전위들”에게서 나온 것이지 “지도부”에게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1) 김강기명, <대중을 관리하려 들지 마십시오>, 오마이뉴스; <방송차가 ‘혼란’, 시민들이 ‘질서’였습니다.>, 오마이뉴스

 

2) 한규환, <촛불을 지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마이뉴스

 

3) 최일붕, <현 촛불시위의 잠재력과 과제>, 맞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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