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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원강의안] "대중이 운동권을 구원하리라" 4 (終)

4.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서두에서 저는 두 가지 목표, 대중을 객관적인 대상이나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운동의 주체로서 그려내는 것과 그 “대중의 활약”을 운동권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야 사건”으로 읽어내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 목표에 관해서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두 번째입니다. 사실 이게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론 우리도 그 안에 참가하고 있는)대중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촛불 앞에서 운동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촛불봉기 이전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어쩌면 더 악화된 지옥의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공부하는 민중신학은 “예수가 민중이고, 민중이 예수다.”라는 말 한마디로 보수적인 기독교계의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이 말은 민중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초월적인 메시야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민중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 그것이 2000년 전 예수 사건의 진상1)이었고, 그리고 그 사건은 오늘날도 반복되고 있다고 민중신학자들은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신학에 대한 문제제기만은 아니었습니다. 민중신학은 서구의 존재론적이고 이원론적인 신학은 답습하며 탈정치화의 길을 걷는 교회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 당시 사회과학 담론의 “민중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서구 근대의 학문 방법론에 따라” 민중을 개념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서구의 학문은 모든 것을 개념화해서 파악하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민중을 설명하면 개념이 되고, 개념이 일단 성립하면 그 개념은 실체와 유리된 것이 되어버려요. 그 다음에는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닌 죽은 개념하고의 싸움만 남거든요. 그래서 나는 끝끝내 민중을 개념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2)


그렇다면 민중신학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민중의 자기 초월”이라는 “구원 사건”입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민중의 일반적인 정의와 사건론적 정의를 구분합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오클로스를 다루면서 안병무는 나름대로의 사회과학적 개념을 가지고 그들의 계급적/사회적 성격을 분석합니다.3)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민중에 대한 일반론적인 정의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독특성은, 혹은 안병무가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까지 격상시킨 이유는 그들이 그러한 계급적/사회적 성격을 탈(脫)하는, 안병무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자기 초월”하는 “사건”의 주체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민중은 2000년 전의 예수와, 예수의 민중과 연결되어 “메시야”, “구원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론을 통하여 민중신학자들은 “전태일 사건”과 그 뒤를 이은 70년대의 노동자 투쟁들 속에서, “광주 사건”, “박종철 사건”과 87년의 봉기 속에서 죽음을 딛고 부활하는 메시야를 목격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민중신학자들이 말하는 “구원”이란 대중-되기를 통한 민중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4)


그러나 이러한 민중의 해방은 단지 민중의 자기-구원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민중신학은 신학과 사회과학의 “위로부터의” 구원론을 거꾸로 뒤집어 버립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국가가, 지식인이, 계급정당이, 사회단체가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되어버립니다. 민중이 자기를 구원하고, 또 그들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구원자로서만이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반그리스도의 극복자로서도 오는 것이다”(벤야민) “반그리스도5)의 극복”, 그것은 민중의 바깥에서 구원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민중의 “대중-되기”의 사건 속에서 촉발 받고, 그들 역시 “대중-되기”를 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민중신학(자)의 탄생부터가 바로 그러한 사건 - 전태일의 분신 - 에 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촛불봉기라는 거대한 “대중-되기”의 사건은 그동안 대중의 구원자를 자처해온 운동권의 혁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촛불집회 내내 조직된 “운동권”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에 끊임없는 불화가 이어졌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오해나, 이데올로기에 의한 반감도 많이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운동권의 경직성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촛불 집회 초창기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문화제를 하면서 연설이 이어지고 있는데, 민주노총 간부가 올라와서 “여러분,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민주노총의 조직된 노동자대오가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연설을 했다. 썰렁했습니다. “그냥 나오면 되지 뭘 저렇게 비장하게.” 그것이 대중의 반응이었습니다. 조직의 결의가 있어야만 봉기에 참가할 수 있는 이들, 나와서도 “조직의 지침”이 있어야만 그 곳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이들은 결코 봉기의 주인일 수 없었습니다.


운동권에게 익숙한 급진적인 구호들이 그들의 혁명성을 담보해주지 못합니다.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말로 자본주의를 수백 번 뒤집고, 국가를 수천 번 뒤집어도 존재가 국가와 꼭 같은 모습으로 닮아 있으면 결코 혁명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대중은 대부분의 경우 무능하고, 예속을 열망하고, 자본의 논리에 따라 살아갑니다. 하지만 촛불 봉기라는 사건 속에서 대중은 오히려 메시야로 나타났습니다. 그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앞으로의 사회운동의 진로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승천한 메시야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 천사는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약속을 줍니다. 예외상태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상례가 되어버린 지금, “매초 매초가 언제라도 메시야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벤야민)이기에 우리는 다시금 일어날 봉기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촛불의 메시야적 활력이 잦아든 이때에 여전히 자신들의 역사철학과 운동의 교의, 조직체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대중을 대상으로만 바라본다면(회원으로 가입할 대상이건, 계몽하고 지도해야 할 대상) 또 다른 사건의 연쇄 속에서 다시금 봉기가 잃어났을 때 그들은 똑같은 일만 반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중이 보여준 대중-되기를 통해 자신의 신체를 바꾸고, 새로운 조직화의 길을 모색하고 실천한다면 다시 올 봉기는 “희극적 반복”(맑스)이 아니라 이전과는 결코 같을 수 없는 새로운 삶의 창조가 될 것입니다. 물론, 다시 올 봉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국가와는 다른 모습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 있겠지만요. “여러분이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6)


1) 이에 대해서는 안병무,《갈릴래아의 예수》, 한국신학연구소 참조


2) 안병무,《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p27


3) 이에 대해서는 각주2 참조.


4) 그렇다면 역사적 예수는 전술한 의미에서의 “전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성서 속에서 반그리스도, 혹은 적그리스도는 메시야의 재림 이전에 메시야를 자처하며 교회를 속이고 세상에 악을 뿌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6) 마태복음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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