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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운명과 성격(1919)

운명과 성격(1919)


 

-벤야민의 초기 글. 이렇게 난삽하다니.ㅡㅡ;


 

-어쩌면 이 글은 현대의 생명정치적 환경이라는 배경 속에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에서 다루려는 것 중 하나는 일련의 (신체)기호들로 작성된 ‘성격’의 윤리담론을 넘어서려는 것이다.


 

-통상 서구의 신비학 전통에서 성격과 운명은 분리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점성술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양의 ‘사주명리학’도 비슷하다. 사주를 까보면 성격도 볼 수 있고, 운명도 볼 수 있다.) 현대에 와서 운명과 성격은 서로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에 비해 성격은 뭔가 현재와 과거에 놓여 있는 것 따라서 인식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66) 그러나 양자는 모두 기호를 통해 조망되는 것들이며, 내부와 외부로 서로 구분될 수 없는 것이다. cf. 니체, 스토아


 

-성격과 운명이 구분됨으로써 성격은 윤리적 연관으로, 운명은 종교적 연관으로 달려간다. 벤야민은 이러한 전치의 오류를 밝혀내려 한다.


 

-먼저 운명과 종교적 연관: 그것은 ‘죄 개념’과 결부됨으로써 생겨난다. 운명적 불행은 곧 종교적 죄지음에 대한 신의 응답! 그리스에서는 행복조차도 교만으로의 유혹으로 파악. 따라서 운명은 언제나 죄와 관계하며, ‘지복’은 운명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그리하여 이 종교적 연관은 법의 저울을 찾는다. “운명의 법칙들인 불행과 죄는 법을 인격의 척도로 상승시킨다.”(70)


 

-이것에 대한 극복은 ‘비극’ 속에서 나타난다. 비극 속에서 창조적 정신은 마성적 운명을 돌파한다. 무슨 화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적적 인간이 말 없이, 미성숙하게 저 고통스러운 세상의 흔들림 속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는 것.(71) 비극 속에서 인간은 운명과 죄 연관의 지배 아래에 놓이지 않게 되며 ‘근본적으로 운명을 가진 존재가 아님’을 드러낸다.


 

-그 다음 ‘성격 개념’은 도덕적 연관과 결부된다. “이 직조의 실 가닥들 속에서 결국 한 빈약한 지성이 해당 성격의 도덕적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성격에서 좋은 특성과 나쁜 특성을 구별하였다.”(73) “그러나 도덕이 입증할 일이지만 결코 특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행동들만이 도덕적 중요성을 지닐 수 있다.” 벤야민의 이러한 서술은 어쩌면 성격과 도덕에 대한 지식-권력의 담론적 배치를 넘어서는 실천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린다.


 

-도덕으로 화하는 성격 담론을 넘어서기 위해 벤야민이 선택하는 것은 ‘희극’이다. 희극의 ‘악당’의 행동은 “성격의 빛을 갖고서 그 행동들 위에 쏟아지는 관심만을 얻으며... 도덕적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고도의 명랑함(heiterkeit)의 대상이다.”(74) “성격은 그 인물들에게서 그 성겨그이 유일한 특성의 광채 속에서 태양처럼 전개되는데, 그 광채는 어떤 다른 특성도 그 특성 주변에서 보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가린다.”(75)


 

-종합정리: “운명이 죄지은 인물의 엄청난 분규, 그 인물의 죄의 분규와 연계성을 전개해나가는 반면, 성격은 죄 연관 속에 있는 인물의 신화적 노예화에 대해 창조적 정신의 답변을 준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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