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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초현실주의>(1929) memo

-오늘날 (초현실주의의) 그 발전 경향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라공이 거기서 영웅들의 명단을 우리에게 남겨줬던 영웅적 단계가 끝이 났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운동들에서는 비밀결사의 원초적인 긴장이 권력과 지배를 둘러싼 구체적이고 세속적인 투쟁 속에서 폭발하거나 공적인 선언으로 해체되고 변형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지금 초현실주의가 이러한 변형 단계 속에 있다.(145)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그것이 영감에 가득 찬 꿈의 물결의 형태로 그 창립자들에게 밀려들어왔던 그 당시에만 해도 가장 온전한 것, 완결된 것, 절대적인 것으로 보였다. 초현실주의가 접촉한 것은 모두 그것에 융합되었다. 삶은 깨어남과 잠 사이의 문지방이 마치 이리저리 넘쳐흐르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발자국들로 밟히듯이 모든 이의 삶 속에서 밟혔을 때에만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듯이 보였다. 언어는, 소리와 이미지가, 그리고 이미지와 소리가, '의미'라는 동전이 들어설 틈이 더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자동기계적인 정확성을 갖고 서로 행복하게 맞아떨어질 때에만 언어 자체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지와 언어가 가장 먼저 입장할 권리를 갖는다.(145-146)
 
-종교적 각성(과 환각제 등을 통한 그런 초월적 각성)을 참되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결코 환각제를 통해서가 아니다. 그 극복은 범속한 각성(profane Erleuchtung), 유물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영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한 영감에 대마초나 아편 또는 그 밖에 어떤 것이든 선례를 줄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선례는 위험한 선례이다. 그리고 종교들의 선례는 더 엄격하다.) 이러한 범속한 각성은 초현실주의를 언제나 그 각성의 절정에서, 그 초현실주의의 절정에서 발견한 것은 아니다.(147)
 
-이 (파리의 낡아버린) 사물들이 혁명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아무도 이 작가들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다. 어떻게 해서 사회적 빈곤뿐만 아니라 똑같이 건축상의 빈곤, 실내장식의 빈곤, 노예화된 사물들과 노예화시키는 사물들이 혁명적 니힐리즘으로 반전하는지를 이 예언자들과 기호해석자들 이전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150)
 
-사물세계를 극복할 트릭은 과거를 향한 역사적 시선을 정치적 시선과 맞바꾸는 데 있다. […] 이런 사물세계의 중심에 그들이 가장 갈망해 마지않던 대상인 도시 파리 자체가 있다. 그러나 폭동이 비로소 그 도시의 초현실주의적 얼굴을 남김없이 드러내준다. 그리고 어떤 얼굴도 한 도시의 진짜 얼굴만큼 초현실주의적이지 않다.(152)
 
-브르통에게서는 사진이 아주 희한한 방식으로 개입한다. 사진은 도시의 거리, 성문, 광장들을 삼류 소설의 삽화로 만들고, 이 수백년 된 건물들에게서 그것들의 진부한 명징함을 뽑아내어 그것들을 어떤 묘사된 사건에, 옛날 하녀들이 읽던 책들에서와 똑같이 글자 한 자 다르지 않은 인용문들과 쪽ㄷ수가 가리키는 그런 사건에, 가장 원초적인 밀도를 갖고서 결부시킨다.(154)
 
-좌파 부르주아 입장 전체에서 특징적인 점은 이상주의적 도덕을 정치적 실천과 구제불가능하게 연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신념'의 무력한 타협들과 대비했을 때에만 초현실주의, 아니 초현실주의 전통이 지닌 어떤 핵심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다. […] 우리는 악에 대한 숭배를, 정치를 온갖 도덕화하는 딜레탕티슴에 대항하여 소독하고 격리하는 장치로서 발견한다.(158)
 
-신비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고 환상적인 능력과 현상들을 진지하게 규명하는 작업에는 낭만주의적 머리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어떤 변증법적 교차의 사고가 전제된다. […] 오히려 우리는, 일상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적 시각의 힘으로, 그 비밀을 일상 속에서 재발견하는 만큼만 그것을 꿰뚫을 수 있다. […] 독서하는 자, 사유하는 자, 기다리는 자, 거리 산보자는 아편복용자, 몽상자, 도취된 자와 마찬가지로 각성한 자의 유형들이다. 그것도 후자의 사람들보다 더 범속한 자들이다.(163-164)
 
-염세주의를 조직한다는 것은 정치에서 도덕적 메타포를 추방하는 일, 정치적 행동의 공간에서 백 퍼센트의 이미지 공간을 발견하는 일 이외의 다른 것을 듯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미지 공간은 명상적으로는 전혀 측정할 수 없다. […] 실제로 중요한 일은 부르주아 출신의 예술가를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거장으로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그를, 그의 예술 활동을 희생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이 이미지 공간의 중요한 장소들에서 기능을 발휘하게 만드는 일이다. (165-166)
 
-그 이미지 공간은 '안락한 방'이라는 게 없는, 보편적이고 완전한 현재성(Aktualitat)의 세계이며, 한마디로 정치적 유물론과 신체적 피조물이 내적 인간, 영혼, 개인 도는 우리가 그것들에게서 비난하고자 하는 그 밖의 것을, 변증법적 정의에 따라, 그리하여 어느 부분도 그것에서 찢겨 나가지 않은 채로 있지 않도록, 서로 공유하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 아니 바로 그와 같은 변증법적 파괴 뒤에 - 그 공간은 여전히 이미지 공간이며, 더 구체적으로 말해 신체공간(Leibraum)일 것이다. […] 집단 역시 신체적이다. 그리고 기술 속에서 그 집단에게 조직되는 자연은 그것의 정치적이고 객과넞ㄱ인 현실에 따라 볼 때 저 이미지 공간 속에서만, 즉 범속한 각성이 우리를 친숙하게 만드는 그 이미지 공간에서만 생성될 수 있다. 그 자연 속에서 신체와 이미지 공간이 서로 깊이 침투함으로써 모든 혁명적 긴장이 신체적인 집단적 신경감응이 되고 집단의 모든 신체적 신경감응이 혁명적 방전이 되어야만 비로서, 현실은 <공산당 선언>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 자체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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