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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형제, '사회의 적'과 환대에 대하여

스포일러 있음.

 

 

영화 제작 노트에는


<쉬리>, <태풍> 등 한국영화 속에서 심심찮게 소재로 등장했던 남과 북. 그 동안 대부분의 영화에서 북한은 국가적인 위협을 가하는 ‘적’으로 그려져 왔고, 주인공들은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각기 다른 이념을 내세우며 갈등했다. 


그러나 <의형제>는 국정원 요원과 남파 공작원이라는 주인공들의 신분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남북 소재 영화들과 차별성을 지닌다. 이는 단지 캐릭터의 출신이 남한과 북한일 뿐이며, 이념에 따른 갈등이 아닌 서로 다른 두 남자의 ‘소통’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라고 나와 있는데, 글쎄. <태풍>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쉬리>가 과연 '남과 북의 이념갈등'을 다루고 있었던가. 오히려 <의형제>는 쉬리의 길을 걷는다. 쉬리에서도 주된 정치적 갈등선은 남과 북이 아니라, 남과 북의 호전주의적 분파로 그려진다. 의형제에 나오는 "그림자"라는 킬러, 혹은 테러리스트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소통을 다루었다 하면 한석규와 김윤진도 진한 소통의 주인공이었고.  

 

이명박 이후 노골적으로 다시금 '공산당이 싫어요' 모드로 돌아서는 영화/드라마들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지난 10년간 북한은 영화에서 곧잘 이런 존재 - 화해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테러집단 - 으로 묘사되어 왔다. 사실, 이것은 북한에 대한 더욱 악랄한 재현이었는데, 북한은 이제 국가의 적이 아니라 '사회의 적'이 되기 때문이다. <의형제>는 바로 이 '사회의 적'에 대한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남북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회의 적'은 당연히 정치적 적대보다 훨씬 더 방대한 장소에서 발생/존재하기 때문이다. '적'은 자본주의 사회의 먹고사니즘 속에서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위치한다. 국정원 요원부터 흥신소, 간첩,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환대와 증오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만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베트남인 자매가 끌어안는 장면에서 환대의 극치를 보여주고, 이내 열려진 환대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하는 건 여전히 알 수 없는, 즉 정치적으로 아무리 가까워져도 수많은 '사회적' 위험요인들로 마주하게 되는 '북한'이다. 정치적 지령이 없어도 배반자를 죽이는 살인마의 이미지는 사실 모든 '사회의 적'을 향한 우리의 공포를 반영하는 듯 하다.  

 

영화는 결국 '누구도 배신하지 않는' 지원(강동원 분)이라는 비극적 주인공을 통해 이 문제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이 영화의 앤딩은 사실 두 개로 보인다. 하나는 죽어가는(혹은 그저 후송되는) 지원이 바라본 가족의 환상, 그리고 또 하나는 탈북에 성공한 지원의 가족과 한규(송강호 분), 지원 모두가 영국으로 가는 마지막 해피 앤딩이다. 아무리 보아도 마지막 장면은 그저 환상처럼 보인다. 지원은 사실상 죽은 것이 아닐까. 누구도 배신하지 않은 자로서, 그리고 어떤 구원도 주지 못하는 대속자로서.  '사회의 적'에 대한 환대와 소통은 바로 이런 어려움 상황 속에 놓여 있음을 <의형제>는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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