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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 말이다. - 발터 벤야민, "주유소", 『일방통행로』
우리는 어떻게 '사실' 혹은 '실재'를 말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역사의 예수'에 대한 논쟁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아무리 용을 쓰고,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추적하고, 고고학적 자료를 발굴한다 하더라도 거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예수는 해석된 예수이지 실재의 예수는 아닐 것이다. 비단 예수 많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며 실천하며 살아가는 세계는 모두 이런 해석, 혹은 '확신'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사실은 삶이 실재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므로 진정한 것을 찾기 위해서는 오히려 문학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은 여기서 이러한 생각을 뒤집어서 '사실'(Fackten)을 다시금 요청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힘을 보유한 이 '사실'의 자리는 대체 어디인가? 적어도 벤야민이 여기서 우리에게 익숙한 객관적이고 대상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다. 벤야민은 그것을 '실천'과 결부시킨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 뿐이다." 따라서 벤야민이 요청하는 문학은 순수한 문학, 진정성의 문학이 아니라 팸플릿이나 포스터, 잡지 기사 등의 형식들 속에 있다. 『일방통행로』는 사실상 온갖 것들 속에서 현재의 '확신'된 세계를 무너뜨리는 이미지들을 찾아내는 '사실'들의 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벤야민은 이것을 '사유이미지'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사실들이 있는 자리, 그것은 객관적이고 주체에게 인식가능한 차원이 아니라 확신이 무너지며 삶이 새롭게 구성되는 그 '사건의 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일관되며 논리적으로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적인 것이다.
벤야민은 이것을 '약간의 윤활유'라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한다. 흔히 사람들은 사람들의 견해들을 사회생활이라는 거대한 기구의 윤활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우리의 과제가 그런 윤활유를 엔진에 콸콸 쏟아붇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짜 윤활유는 "숨겨져 있는, 그러나 그 자리를 알아내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뿌려지는 약간의 기름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실'은 사건적으로 '확신'의 세계를 몰락시키며 나타난다.
다시 예수 이야기로 돌아가서, "진짜 예수"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확신'을 찾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예수"라는 사실은 그것이 기존의 "예수"를 무너뜨릴 때 사건적으로 도래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기독교인이었던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을 때, 그리고 그의 수기들이 발견되고, 그의 장례가 영락교회에 의해 거부되었을 때, "나도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던 그의 말이 70년대의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세계상을 무너뜨려 그들을 구원했을 때, 하나의 '사실'로서의 예수가 그 사건 속에 도래하는 것이다. 아, 물론 여기서 전태일이 또 하나의 '확신'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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