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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심원청년신학포럼 & 카이로스 콜로키아>에서는 아마도 향후 몇년간 민중신학 진영 안에서 전면화될(그러나 당장은 아마도 별 관심을 받지 못할) 논의를 담은 묵직한 글이 발표되었다. "고통의 스칸달론 - 21세기 신학사용법에 대한 어느 민중신학도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정용택은 그동안 끊임없이 고민해왔을 자신의 민중신학의 방법론으로서 '성찰성'을 전면화했다.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전반부에서는 '교회신학'과 대비되는 '문화신학' 혹은 근대적 의미의 학문이 아니었던 신학을 '학문'이 되게끔 한 근대 신학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신학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나 신앙체제 속으로 가둬질 수 없는 학문임을 드러내었다. 특히 성서학은 18-19세기에 '신학의 모든 것'이었던 '교의학'에 정면으로 맞서서 근대 학문으로서 신학의 출발을 알렸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뒤를 따라 슐라이어마허, 리츨, 하르낙 그리고 트륄치가 각각의 영역에서 '교회신학'이 아닌 '문화신학'(이것은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과 다른 것이다.)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직업적 (신)학자'에 의해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포함한 '세상'이라는 대상(Text)을 배경(Context)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해석학적 전통에 의해서든, 유물론적 전통에 의해서든 오늘날 이러한 학자 주체와 대상, 컨텍스트의 관계는 근대적 학문에서와 같이 구분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용택은 저자 혹은 주체 역시 하나의 컨텍스트일 뿐임을, 그리하여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끊임없이 구분불가능하며 유동하는 오늘날의 학문상황 속에서 '성찰성'이 과제로 등장한다고 말한다. 근대정신을 열었던 데카르트의 회의가 주체를 세우는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다면, 성찰성은 이 주체의 (불)가능성을 사유하는데로 나아간다. 자유주의적 문화 신학과 교회 신학이 공히 멈춘 이 지점에서 등장한 각종의 '상황 신학'들은 서구신학을 성찰성의 계기로 몰아넣은 신학이라 할 수 있었다. 상황 신학들은 교회 신학이나 근대적 문화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부문의 신학'이나, '특수 신학'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신학이 '상황 신학'일 뿐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정용택이 좀더 주목하는 것은 같은 시대에 진행된 '신의 죽음의 신학'이다. 대중적인 오해와 달리 신의 죽음의 신학은 '무신론'이 아니다. 신은 있거나(유신론) 없어야 한다(무신론)는 것은 신을 '대상'으로 삼아 사유하는 전형적인 근대적 학문의 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죽었다'는 것, 혹은 신의 무력함을 사유하는 것은 주체가 (불)가능해진 경험의 지평에서 사유를 강제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근본적으로 타자경험이며, 민중신학에서 이것은 "민중의 고통" 앞에 선 민중신학자의 '성찰'로 나타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통의 현장 앞에서 민중신학자는 모든 것을 몰락시키는 영도(零度)를 체험하며, 그 사건을 '민중사건'으로서 증언하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방법론을 이러한 '성찰성'에 둠으로써 정용택은 안병무의 주장과는 달리 민중을 '개념화'하려 했던 후학들의 시도를 문제에 붙인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대상'으로서 사유할 수 없다. 민중신학자는 민중에 의해 사유를 강제당한 이들이지, 민중을 탐구하는 근대적인 학자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2세대의 민중신학은 민중을 설명하는 더 나은 방식들 - 이를테면, 맑스주의 - 이 대두됨으로써 몰락하게 된다. 정용택은 1세대의 민중신학자들에게서 보아야 할 것은 그들의 민주화 운동의 실천이 아니라 그들이 민중 앞에서 마주했던 그 영도의 체험과 그것이 낳은 민중에 대한 '증언들'이라고 말한다. 민중신학이 '학문'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 성찰성의 의미에서 학문인 것이며, 따라서 이 학문은 근본적으로 기술적이며 설명적인 학문이 아니라 '비평'으로 나타난다.(그리고 이 '비평'의 견지에서 민중신학은 '윤리성'을 확보한다.) 물론 여전히 민중신학은 이론적 차원을 갖게 될 터인데, 바로 이러한 비평의 방법론을 서술하고 있는 정용택의 이 글과 같은 것이 민중신학의 '이론적 차원'이라 할 것이다. 당연히 이 차원이 여타의 학문들과 구분된 독립된 이론적 언어를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정용택의 민중신학에 근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정용택의 논지를 따라가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지점은 민중신학의 성찰성이 비평가로서의 '민중신학자'라는 규정조차 해체하는데까지 나아갈 수 있지/나아가야 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정용택이 이야기하는 성찰성은 민중신학자를 근대적 의미의 학자의 형상 - 합리적 학문 규칙에 입각해서 대상을 탐구하는 주체의 형상 - 으로부터 구출해내지만 여전히 자신의 영도의 체험을 기술하며 비평작업을 수행하는 학자로서 남겨두는 듯 하다. 여기서 윤리는 수동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이 된다. 함부로 어떤 것을 제단하지 않는 것, 민중을 대상화하지 않는 것, (근대적 의미의) 주체로서 행동하지 않는 것이 민중신학의 윤리성(성찰성)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수동성만이 민중신학-함의 전부인 것일까. 성찰성이라는 이 형식의 논리적 운동은 곧 성찰성 자체를 성찰하게 되는데로 나아가게 되지는 않을까?
다시 안병무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논문을 쓰는 '신약신학자 안병무'와 비평을 수행하는 '민중신학자 안병무', 그리고 성명서를 쓰고 투쟁 현장에 나서는 '민주화운동가 안병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 정용택은 '그렇다'고 말하는 듯 하다. '민중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번째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비평과 학문, 비평과 실천의 구분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병무가 경험했던 민중사건의 경험은 주-객의 거리를 삭제하며, 심지어 주-객의 자리를 전복하는 경험이었다. 이것이 단지 성찰적인 비평의 작업만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일까? 안병무는 이 경험들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되는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또한 '구원'이라는 신학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안병무의 민주화운동을 어떤 고정된 성격을 갖는 것으로, 그리고 단순히 안병무라는 '운동가 주체의 실천'만으로 기술할 수 없다. 민중이 개념화 될 수 없다는 것은 성찰성의 차원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변용'의 차원에서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민중'역시 안병무의 '민중-되기' 속에서 끊임없이 변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안병무에겐 민중신학-함이며 '구원'이지 않았던가. 이 변용의 능동적 차원 - 그러나 근대적 의미의 주체의 능동성과는 전혀 다른 - 이 민중신학자에게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신학과 성찰적 비평으로서의 신학 모두를 근거짓는 근본차원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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