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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말씀이 아닌 게 말씀입니다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1)

떼제 공동체

 

요한복음 1장에 대한 읽기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합니다.(1절) 그리고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은 반면,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도 이야기합니다.(17절)

 

말씀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습니다. 말씀이 말씀이 아닌 것이 말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그 동안 '말씀'이던 것들은 '말씀'이 아닌 게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 말씀이 아닌 -  한 인간이 말씀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아닌 것이 말씀인 것입니다.

 

이전에 '말씀'이었던 건 율법이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이 옛 말씀의 세계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옛 말씀은 나와 너를 가르는 말씀입니다. 말하는 자와 말을 듣는 자가 있습니다. 말을 집행하는 자와 말을 집행당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갈등을 해결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권력을 가진자가 이 '말씀'을 무기 삼아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기도 하고, 때로는 민중이 이 '말씀'을 무기 삼아 권력자에게 대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이 옛 말씀은 나와 너, 자신과 타자를 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말씀'은 '말씀이 아닌 것'이어야 했습니다. '말씀'이 자신과 타자를 분별하여 가르는 것이었다면 새 '말씀'은 분별이 없는 삶을 여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은혜와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히브리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차별없는 하나입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이나 산헤드린의 니고데모 의원님이나 차별없는 하나입니다. 물론 옛 말씀도 좋은 의도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시대에선 옛 말씀은 그저 옛 말씀일 뿐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의를 가졌습니다. 예수의 의입니다.

 

이 새로운 말씀, 육화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옛 '말씀'의 틀로 가두어선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18절)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차별 없는 하나인 전체 세상 바깥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을 바깥에 계시다고 생각하니 하느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없고 '말씀'만 남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교리만 있고, 하느님은 없는 것입니다.

 

육화된 말씀인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봅니다. 하느님은 곧 차별없는 전체인 세상이요, 영생이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 말씀이나 교리를 '말씀'으로 받은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말씀이 아닌 말씀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몸으로 읽는 것이고, 논리로 받는 게 아니라 실천으로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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