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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성전(?) - 금란교회
계속해서 요한복음 2장에 대한 묵상입니다.
1.
마흔 여섯해나 걸려서 지은 웅장한 성전. 이스라엘 본토, 지중해, 아프리카, 아라비아의 전지역에서 몰려온 유대인 순례객으로 넘쳐나는 예루살렘, 그들이 그 순례기간 동안 풀어놓는 엄청난 돈, 헌금, 그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종교적 서비스. 이런 것들이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유월절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서 있던 성전은 헤롯 대왕이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성전은 애초에 허름하게 지어진 성전이었고, 그나마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침략으로 훼파되고 불결하게 되어 버린 성전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도 아니었던 헤롯 대왕은 이 성전을 무려 46년에 걸쳐 그리스 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다시 지음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통치를 위한 '국민통합'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성전에 의해 만들어진 성전체제는 수탈체제였습니다. 민중에게 초월적 하느님을 '서비스'해주는 대가로 이 체제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까지 탈취했습니다. 민중은 로마제국에 바치는 세금과 함께 성전세를 이중으로 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성전이 완성됨으로써 각 지방의 토착적 유대종교는 모두 이단이 되어버리고, 성전종교에 흡수되던지, 아니면 배제되어야 했습니다. 예수의 고향인 갈릴래아 사람들도 '자신들의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예루살렘의 하느님'을 강요받았을 것입니다.
예수가 무너뜨리려 한 건 단순히 성전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이 성전체제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공중의 새와 들의 풀도 먹이시는 하느님을 성전체제는 그 체제에 충성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아왔습니다. 예수는 그 성전체제를 향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일갈하십니다.(16절)
2.
오늘도 많은 종교들이, 많은 교회들이 하느님을 팔고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잔치로 만민을, 특히 고난 받는 이들을 초청하여 먹이는 게 교회의 사명일진대 교회는 거기에 충성하는 이들에게만 하느님을 팔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죄 용서받고, 복 받고, 부자 되고, 대학 가고, 죽어서 천국 간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들을 향해 여전히 소리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종교의 지도자들만이 예수의 비난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들도 예수의 이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그 어떤 지배 체제도 대중의 공모 없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대중은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성전을 짓는다고 세금을 쥐어짜고, 노역에 동원할 때는 힘들어 저항하기도 하고, 대규모 공사에 대한 반감도 드러내지만, 막상 46년이 지어 거대한 건축물이 지어졌을 때 그들은 저항하기를 그치고 성전을 자랑스러워하며 금방 성전체제에 흡수되고 맙니다. 물론, 이건 저의 역사적 상상이지만, 단순히 상상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일이 역사에 반복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추진한 청계천 복구를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일단 지어지고 나면,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피해와 고통을 입었고, 그 결과와 과정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는 더 이상 회자되지 않고, "어쨌든 그는 성공했다."는 신화만 남아 대중의 찬사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대중은 기꺼이 그것이 만든 새로운 풍경 속에 흡수되어 버리지요.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배제된 자들의 아픔은 은폐되고 맙니다.
예루살렘의 대중들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고, 이 새로운 성전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에게 환전과 제물을 제공하고, 여행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은 꽤나 돈을 벌었을 것이고 이내 성전이 단순히 하느님 계신 곳만이 아니요, 자신들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화수분임을 깨닫고 그 체제에 충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통에, 이전까지는 함께 고통 받던 사람들을 대중들 스스로가 배제하고 성문 밖으로 내어 쫓았을 것입니다. 성전체제의 봉사자인 이들 예루살렘의 대중 역시 예수의 비판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3.
더 나아가 예수는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성전을 허물면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그것을 "자신의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예수에게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성전과 거기에 기생하는 성전체제는 허물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는 몸소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성전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성전 안에, 혹은 종교체제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몸 안에 계신 것입니다.
성전체제는 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지만, 예수는 민중의 몸으로 부활하십니다. 갈릴리 촌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하고, 성령을 받고,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온 지중해로 퍼져나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체제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성전인 사람들입니다. 종교나 정치 체제, 이데올로기 같은 초월적 체제로 도피하여 자신의 안식처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에 직면하여 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헤롯 성전'으로 도피합니다. 영화 <밀양> 속의 신애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이러한 우리들 모습의 대표격인 캐릭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바람피다가 사고로 죽은 남편이 자신에게 준 고통을 그대로 직면하지 못하여, "남편을 잊지 못해 남편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미망인"이라는 허위 의식 속으로 도피합니다. 아들이 유괴당하여 죽자, 그 고통을 직접 대면치 못하고 마약과 같은 즐거움을 주는 초월적 종교 안으로 도피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이웃과의 관계, 아들과의 관계, 그를 흠모하는 종찬(송강호)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에서 피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헤롯 성전으로 도피하는 이들은 이웃과의 관계 역시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전인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증언을 필요치 않습니다.(25절) 아름다운 미망인인척할 필요도 없고, 땅을 알아보러 다니는 알부자인 척 할 필요도 없고, 위대한 믿음의 일꾼인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죽는 그날까지 헤롯 성전이 마련해 준 자리에서 고통 받으며, 또 고통을 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우리를 몸-성전의 삶으로 초청합니다. 스스로 성전이 되어,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헤롯 성전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것을 무너뜨려야 우리는 성전으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성전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누구의 증언도 필요치 않는 참 자유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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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ster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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