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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을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영생입니다.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5)

 

 

요한복음 3장에 대한 묵상입니다.


'옛 말씀'의 사람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옵니다. 스스로 성전인 사람(2장)들은 사람들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성전체제의 부속품인 사람들은 그처럼 거침없이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어야 예수를 찾아올 수 있었던 니고데모는 온갖 '옛 말씀'들로 자신을 묶고 있는 우리들의 초상일지도 모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신통력을 보고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선 묵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신통력을 보고 예수를 쫓는 것은 옛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일으키는 기적이나, 그의 멋진 말들에 감동하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예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듭난다'고 표현합니다.


8절에서 재밌는 표현을 만납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와 같다." 영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전에 그를 규정하던 정체성들, 옛 말씀들, 오늘날의 말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진리가 율법이나 옛 말씀이라면 그것은 자유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의 진리는 인간이 그 몸에 하느님을 갖는 성전이 되는 것, 인간이 하느님의 호흡(성령)을 가진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자유롭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9절) 놀란 니고데모의 질문에 예수님은 "믿음"을 답으로 제시합니다. 믿음은 신뢰요, 따라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예수를 신뢰하고, 그가 보여준 삶의 길을 우리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럼 거듭납니다. 거듭난 이의 삶은 끊임없이 살리는 삶, 영생입니다. 옛 말씀의 논리는 심판의 논리요, 죽음의 논리입니다. 옛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정죄받고 심판을 받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민족주의 ․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따르지 않으면 비국민으로 정죄를 받습니다. TV광고가 보여주는 대로 소비하고 살지 못하면 인생의 패배자로 낙인찍힙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옛 말씀은 죽음과 심판을 배면에 깔고 있습니다. "죽기 싫으냐? 그럼 내 말을 따라라."


그러나 실상은 그 길 자체가 죽음의 길입니다. 율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수많은 폭력, '민족'과 '국가'가 저지르는 전쟁과 테러, 소비자본주의 하에서 죽어가는 인간과 자연을 우리는 매일매일 경험하고 봅니다. 결국 옛 말씀의 귀결도 '죽음'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18절)는 말씀은 바로 이런 뜻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자가 되어 누구의 증거도 필요치 않고 오직 살림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만드는 이들은 죽지 않기 위해 살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빛으로 행합니다. 살리기 위해 삽니다.


그러나 다만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합니다."(14절) 십자가는 죽지 않기 위해 삶을 아등바등 붙드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십자가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혼자 깨달아 하늘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을 위한 죽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승으로만 살 수 없고 대승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랜드-뉴코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저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봅니다.(그러나 그들의 십자가가 무겁지 않기를!) 예수가 옛 말씀의 사람들에게 희생당하였듯이, 그들도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에게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은 지금 옛 말씀의 실상인 '죽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뒤는 부활입니다. 죽음 다음은 살림입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그 살림을 살고 싶습니다. 살림을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영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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