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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자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2)

 

붓다, 예수 서울에 입성하시다_이흥덕, 1998

 

 

계속해서 요한복음 1장에 대한 읽기입니다.

 

1.

성령이 임했다(32절)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저는 그것을 예수가 하느님의 호흡을 가졌다는 말로 생각합니다. 구약의 루아흐나 신약의 프뉴마는 본래는 '숨', '공기의 흐름'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령이란 곧 하느님의 숨이 아닐까요. 숨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인지 동서양의 많은 영적 수행들은 언제나 호흡에 집중합니다. 불교에서는 호흡을 관(觀)하면 몸을 관하고고, 감각과 감정을 관하고, 마음의 작용을 관하고, 세계의 연기적 관계를 관한다고 합니다. 나의 호흡에 세계가 담긴 샘입니다.

 

세례 요한은 '옛 말씀'의 사람이었지만 예수가 새로운 말씀, 곧 하느님 자신이요, 하느님 나라(차별 없는 하나인 전체 세상)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옛 말씀에 근거하여 매우 큰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메시야'(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옛 말씀의 불충분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율법을 회복하고, 이스라엘의 회개를 부르짖자 그를 메시야로 생각했지만, 그는 메시야는 옛 말씀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예수를 만나자 그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를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말합니다. 유월절에 야훼의 진노를 넘어가게 한 그 어린 양을 떠올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를 대신하여 광야를 향해 나아가는 속죄일의 염소를 떠올렸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이 된 존재였습니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현에서 저는 요한이 한 발은 새 말씀에, 한 발은 옛 말씀에 걸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말씀의 틀에서 사유합니다. 그것은 율법과 죄와 심판의 틀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는 예수가 유대인들만을 위한 어린 양이 아니요, '세상'을 위한 어린양이라고 말함으로써 차별과 분별의 옛 말씀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그에게 보내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시몬과 안드레가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2.

영적인 수행을 깊이 한 사람들은 때로는 신통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도교에서 신선이 된 사람들의 기록이나, 공중을 나는 요가 행자에 대한 기록들, 혹은 옛 이야기에서 마법이나 기적을 일으키는 현자나 성인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종종 접하게 됩니다. 예수 역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한 사람이었고, 또한 이 요한복음 1장에서는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천리안이라고 하던가요.

 

예수의 타겟이 된 이는 나다나엘이었습니다. 그는 친구 빌립이 예수를 소개하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게 나겠느냐?"라고 묻지만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빌립을 따라 예수를 만나러 옵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미 그가 한 말을 알고 있었고, 그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도 알아 맞춥니다. 저는 왠지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47절)하신 말씀이 칭찬이 아니라 약간의 빈정거림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옛 말씀'의 시각에선 나사렛에서 선한 게 나올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온다면 그건 '거짓'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다나엘은 옛 말씀의 영역에 속한 사람, '거짓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것이 아닐까요.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 밑에서 예수에 대해 냉소하던 자신의 모습을 예수가 알아 맞추자 놀라서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합니다.(49절)

 

그러나 예수는 그의 태도를 책망합니다. 왜냐하면 신통력이 곧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발휘한 신통력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깊은 깨달음에 이르른 현자들은 하나같이 수행 중에 얻게 된 신통력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신통력에 취해 거기에 빠질 때 그가 수행한 열매는 간데 없이 사라지고, 다시금 자아와 타자의 분별과 이기심이 도입되기 때문입니다. 저야 그 정도 경지까지 다다라 본 일조차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렇답니다. 예수는 신통력보다 더한 것을 나다나엘이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들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랍니다.

 

저는 이것을 사람의 아들들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고 감히 해석합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사람으로써 그 몸이 하느님 나라를 체화한 몸이었듯이, 사람의 아들들도 예수를 본받아 그와 함께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자, 그리스도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자아와 타자의 분별을 넘어서서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차별, 이기심, 탐욕을 넘어서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자신만이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자가 아니요 우리 역시 그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기독교인'이라 이름하는 우리는 종종 예수의 신통력에 놀라고 그의 신통력을 의지합니다. 그의 병고침이나 기적에 놀라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죄를 짓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그가 죄를 용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신통력을 발휘해 주리라 믿고 그에게 기도를 드립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떠받들던 나다나엘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에게서 보아야 할 것은 그의 신통력이 아니라 그가 가진 하느님의 호흡이요, 그럼으로써 그가 그 몸에 체화한 하느님(나라)가 아닐까요.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비전,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들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 비전을 우리는 과연 몸으로 경험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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