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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http://kimkang.net 에 썼던 글.
누구일까요?
'신'과 '신화'는 연결되어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단절되어 있다.
신화는 신을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 신화를 통해 권력은 대중을 길들인다.
어떤 신화는 대중들로 하여금 바람직한 공통성을 형성하도록 독려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신화는 대중들로 하여금 노예상태에 머물도록 만든다.
성서 역시 신화이다. 성서적 신화는 어떠한가?
성서의 신화는 대중들로 하여금 바람직한 공통성을 형성하도록 이끄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성서를 철저히 인류의 노예화를 위해 동원하였다.
그들은 대중들로 하여금 종교적 의례와 실천("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에만 몰두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은 언제나 분노에 휩싸인 노예-기독교인들이다.
겉으로 웃고 있어도 그들은 분노하고 있다.
동성애에 대하여, 공산주의에 대하여,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아웃사이더들에 대하여.
분노는 때로 연민과 동정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연민과 동정의 대상들이 저항과 투쟁에 나설 때는 결국 본모습인 분노가 나타난다.
기독교의 '하나님(하느님)'을 비롯하여 신의 여러 이름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신의 이름'이 아니다.
이 이름들을 신의 이름들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는 빈약하다.
이 이름들은 신화적인 이름들이다. 이 이름들은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어 신으로 이끌 수는 있으나
보통의 경우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더 쉬운 이름들이다.
결국 신화는 신과는 상관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것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신화를 넘어서 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신화를 넘어서 신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동시에 도덕을 넘어서 윤리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서의 신화에서 어떻게 신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먼저 성서의 신화에서 바람직한 공통성 - 타자와의 마주침이 존재의 능력을 증가시키는 -을
형성토록 하는 내용을 찾아내고 그러한 삶을 서로 독려해야 한다.
그러한 공통성의 형성을 통해 우리의 존재의 능력이 증가할 때
우리는 신화를 넘어서 신으로의 도약을 감행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사랑의 첫째 계명(신에 대한 사랑)과 둘째 계명(이웃에 대한 사랑)은 여기에서 만난다.
사실상 신은 세계에 다름아니다.
세계는 신에 속하고 신은 세계에 속한다.
펼쳐진 만물들은 신적 실체의 변양들이다.
때문에 우리가 공통성을 형성하고, 공통개념들을 형성할 수록
우리는 신의 인식에, 신의 형상에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초월자가 아니다.
예수가 사랑하라 말하는 신은 초월자 하느님이 아니다.
그 신이 초월자 하느님이라면 사랑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서로 상관이 없는 분리된 명령이다.
그러한 초월자 하느님-'세계 저편에 계시는 그분'-은 우리를 무능력자로, 노예로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까운 이들과의 사랑을 주목한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 신으로 나아가는 열쇠가 있다.
우리는 세계의 평화를 주목한다. 그 속에 신으로 나아가는 열쇠가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물신숭배를 넘어서는 꼬뮨적 관계들을 주목한다. 그 속에 신으로 나아가는 열쇠가 있다.
혁명이야 말로 가장 경건하며, 신적인 행위이다.
덧붙임. 그러므로 나에게 신학은 정치학이다.(정치신학)
이것은 신화를 통해 정치학을 신학으로 만든 성직자들의 신학-정치에 대한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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