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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의 투병생활보다 더 나쁜 삶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7)

노숙인 추모제에서...

 

 

요한복음 5장에 대한 묵상입니다.

 

명절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 활기찬 예루살렘이었지만 아마도 어제나 오늘이 별로 다르지 않은 곳이 있었으니 본문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가'였을 것입니다. 연못 주변의 다섯 개의 주랑에는 병자들과 장애인들이 노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결함과 불결함을 선과 악의 문제로 판단하고 구별하는 성전종교체제에서 버려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장애와 병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부정한 죄인들로 취급을 받았고, 자신의 땅과 가족을 가지지 못한 채 이렇게 노숙생활이나 떠돌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이 이 연못가에 몰려 있는 이유는 이 연못가에 간간히 천사가 찾아온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사가 물을 휘저어 놓을 때(아마도 갑자기 연못 물이 움직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물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을 고치고 정결하게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났던 것이지요. 체제가 그들을 버린 이상 이들은 이런 작은 희망이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이들 중에 있던 한 병자를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병을 앓아온 지 서른여덟 해나 되었던 것 같습니다. 후에 병자가 그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걸로 보아서(13절) 예수는 홀로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곳에서 그 병자를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을 고쳐주고는 이내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리셨지요. 아마도 그날이 안식일이고, 또 유대 사람들의 정치적 탄압이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예루살렘을 다니셨던 것 같습니다.(16절)

 

병자가 예수님을 다시 만난 건 성전 안에서였습니다. 38년간이나 죄인으로, 병자로, 부정한 자로 살아갔던 이 사람은 드디어 성전에서 예배드릴 자격을 얻었던 것이지요. 다시 만난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 사람의 나음을 기뻐하시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라"(14절)

 

이 말씀은 그가 병을 얻은 것이 그의 "죄"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서의 다른 부분에서 어떤 사람이 장애인이 된 원인을 묻는 제자들에게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바 있지요. 그렇다면 병 나은 사람에게 "죄를 짓지 말아라."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다시 베데스다 연못가로 되돌아가 봅니다. 그 곳의 풍경은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줄 때만 기다리는 병자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물이 움직이면 이들은 어떻게 반응을 보였을까요? 모두가 우물을 향해 자신이 가진 힘을 쥐어 짜내어 움직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도와줄 사람이 있는 사람은 좀 더 빨리 움직였을 것이고(7절), 이 병자처럼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몇 미터 기어가다가 포기했겠지요. 병을 고치고 정결한자가 되어 사회에 복귀하기 위한 "무한 경쟁" 그것이 이 우물가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레이스는 '승자'만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승자 독식" 게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모습에 관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체제에서 배제되어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이런 성전체제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밀려난 이들도 밀려난 곳에서 서로를 밀치고 배제하고 있었습니다. 밀려나버린 이들의 꿈은 오직 병을 고쳐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하겠다는 마음뿐이었고, 그것을 위해 계속해서 다른 이들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가려는 경쟁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런 모습이 성전체제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는 것을 지적하려 하신 건 아닐까요?

 

저는 그리스도교의 '원죄'란 흔히들 생각하듯, 사람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죄악된 성향이나,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의 힘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체제나, 베데스다 연못가의 풍경처럼 모두가 누군가를 배제하며 살아가고 있는, 배제함으로써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로 하여금 이러한 성전체제의 부속품이 되어 계속하여 죄를 짓는 삶을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신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이어서 그에게 "더 나쁜 일을 당하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 병보다 더 나쁜 것, 그것은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병을 고침 받고 성전에서 매일 매일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성전에 세금을 내고 살아갈수록 '죄인'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성전체제는 조금씩 더 자라납니다. 그는 아마 자신이 매우 올바르고 착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올바름과 착함' 때문에 누군가는 고통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어쩌면 누군가의 희생과 배제를 그 아래에 깔고 성립된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이 사회의 정상인들이 정상적 삶을 살기 위해 아등바등 경쟁하며 성실이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어쩌면 그 배제와 희생의 넓이와 깊이는 더욱 커져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여 번 돈으로 삼성 핸드폰을 목에 걸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이마트에서 쇼핑을 할 때, 한편에서 노동자들은 탄압당하고, 아프리카의 농민들은 죽자 사자 일해도 헐값에 커피를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절망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죄를 짓지 않고,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 삶이란, 바로 이런 죄-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며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런 삶은 스스로 성전이 되는 삶이요, 더불어 함께 살림을 살아가는 '영생'의 삶일 것입니다. 갈릴리인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한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잔치를 즐기는 그런 삶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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