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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공약집 바깥에 있다.

정치는 공약집 바깥에 있다.

<복음과 상황>의 대선 특집 기사를 비판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복음과 상황>류(流)1)는 정치와 정책을 혼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혼동의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라는 패러다임으로 나타나는 “기독교 세계관”(여기서 ‘기세’는 대중화된 형태의 개혁주의 세계관을 지칭한다)의 정치철(신)학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현실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패배주의나 현실에 기독교를 끼워다 맞추는 기독교 현실주의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5년 전, <복음과 상황>류의 현실주의가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던 반면, 올해 대선은 패배주의로 귀착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선 판에선 어떤 드라마가 나타날지 모르니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기독교 현실주의와 패배주의는 여하간 ‘현실’에 기독교가 굴복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지금까지의 노무현 정부와 앞으로 들어설 정부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복음과 상황> 206호(를 비롯하여 여러 번의 특집/기획)의 대선 특집은 대부분 후보들의 정책 분석과, “기독교인들의 정책-투표 기준”에 할애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정치”는 빠져 있다. 문제는 지난 5년을 돌이켜보건대 대중의 삶을 지금의 모습으로 빚어낸 것은 명백하게 정책이 아니라 정치였다는 것이다. 정책으로 정치를 설명하려 할 때 왜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겠다. 새만금 개발 중단하겠다.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 국민참여의 시대를 열겠다.”던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왜 이라크에 수천 명의 국군을 파병하고, 새만금 방조제를 막고, ‘국민 참여’를 일상적으로 경찰을 동원해 짓밟고, 비정규직을 거리로 내몰았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정책이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북유럽형 사민주의의 길을 모색한다던 참여정부가 왜 지금 한미FTA를 맺어가면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신자유주의의 페달을 밟고 있는지 설명할 길도 정책에 있지 않고 정치에 있다.


정책과 정치

정책이 문자의 영역이라면, 정치는 ‘힘’(혹은 ‘힘’들의 관계)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약간 농담처럼 이야기하자면 정책이 ‘이(理)’라면 정치는 ‘기(氣)’다. 정책이 ‘율법’이라면 정치는 ‘육화된 말씀’이다…… 등등) 참여정부는 왜 국가보안법조차도 개/폐시키지 못했을까? 그럴 ‘힘’과 제대로 관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민주의적 경제정책과 노사정 대타협 모델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도 그런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사회적 힘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근에 터진 삼성 비자금 논란을 통해 노무현 정부의 사회적 힘과 기반이 애초부터 노동자/서민 대중이 아니라 ‘삼성’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아가고 있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힘’을 주된 사회적 관계로 맺고 정치를 하는 정부가 노동자-서민을 위한 ‘정책’을 내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최초의 의도가 좋았고, 주변에 진보적인 ‘정책’을 가진 참모진들이 있었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정우와 정태인이 청와대를 나오고 그 자리를 경제 관료들이 채운 건 비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정책은 참여정부가 관계 맺고 있는 사회적 힘의 선택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물론, 나는 참여정부와 관계된 사회적 힘이 삼성과 재벌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를 ‘힘’들의 관계로 정의할 때 “국민의 정부”니 “참여 정부”니 하는 표현은 모순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어떤 정부도 “국민” 자체를 대표하거나 “국민 전체”의 참여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동일자적인 ‘힘’이나 ‘일반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참여정부 5년 내내 주장했던 사람이 최장집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는 것을 말해왔다. 그는 참여정부의 실패가 국민을 마치 동일자적 존재로 파악하고 그들의 동원(참여)을 통해 국정을 운영했다는 점에 있다고 보았다. 그 결과 대통령이 (각 이해세력의 대표체인)정당을 무시하고 정치의 장 바깥에 있는 국민과 직접 대면하는(놀랍게도 이런 모습은 ‘군주’와 닮았다.)존재로서 나타났다고 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 정당정치가 관료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어 관료들이 정치와 정책을 좌우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대안은 제대로 된 정당정치를 복구하는 것이다. 정당이 ‘국민’이라는 허구적 동일자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정당이 이해를 달리하는 국민대중의 각 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정치 구도로 정치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나는 그의 대안인 정당정치의 복구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혹은 정책)가 아니라 힘-관계로서의 정치라는 그의 분석만큼은 깊이 동의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왜 정치에 무능한가?

따라서 대선을 대함에 있어서 우리가 정작 봐야 할 것은 공약집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5년은 “공약을 배반한 5년”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노무현정부가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힘-관계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지켜봐야 할 것은 대선후보들의 공약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하는 사회적 힘들이다. 우리가 대선 후보에게 일차적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대의민주주의 식으로 말하자면 “당신은 누구를 대표하고 있는가?”여야 할 테고, 민중민주주의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어떤 운동과 함께 하고 있는가?”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과 상황>류는 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이들은 대신 “정책을 보고 판단하자”고 말한다. 왜 이들은 정책이 아닌 ‘정치’에 대한 질문에 무관심할까?(혹은 무능력할까?) 그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 혹은 이데올로기에 기인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라는 패러다임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기독교 세계관”의 정치철(신)학이다.


대중화된 기독교 세계관 도식인 창조-타락-구속의 논의에서 하느님은 한 분이다. 그리고 세상도 하나다. 세상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타락했고, 그리고 구속받았다.(혹은 구속 받아야 한다.) 이러한 도식에서 그리스도의 자리는 세상 안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세상을 다스리는 왕적 통치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구속받은 ‘하나의 세상’의 통치자다. ‘하나의 세상’은 “한분 하느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하나의 법” 혹은 하나의 세계관(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해서 통치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관에 입각할 때 정치는 ‘힘’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의 문제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하나의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릴 통치자를 구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마치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다시피 하느님의 대답은 “그렇게 하든지 해라. 하지만 없는 게 더 좋을 껄?”이었다.)


그러나 서구식으로 말하자면 ‘세속화’되었고,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다원화’된 사회에서 이런 이상은 ‘불가능한 이상’이다. 따라서 기독교인 역시 세속에서는 다양한 이익집단과 계급/계층으로 나눠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정치를 힘-관계의 문제로 다시 사유하는 것이 필요할 텐데, 안타깝게도 <복음과 상황>류는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라는 패러다임을 그대로 두고 이상만 낮추어 버렸다. 그 결과 이들이 택한 길은 “기독교 현실주의”였고, 그것은 몇 차례의 대선에서 “현실적으로 당선 가능한” 김대중-노무현 지지로 나타났다. 그리고 올해 대선에서 이들은 특히 경제 문제를 해결할 좋은 왕(혹은 좋은 ‘자본가’)을 찾고 있고, 대략 ‘문국현(그 자신이 기독교인이기도 한) 지지’로 정리되는 듯하다.


따라서 <복음과 상황>류가 때로 서민들의 살림을 말아먹을 게 뻔 한 한미FTA를 찬성하기도 하고(199호 최은상), 대선 분석에서 아예 민주노동당을 논외로 하기도 하며(205호 최은상), 사실 관계를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낸 채 범여권을 ‘분배를 중시하는 진보’로 규정하여 대놓고 지지를 선언하는 것(201호 강경민)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들이 택한 길은 ‘현실주의’였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보았으면서도 그 비슷한 성격의 후보나 집단을 선택하는 것은 이들의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 패러다임”과 그것의 비극적 사생아인 “현실주의”가 그만큼 뿌리가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올 해 그들의 ‘현실주의’는 패배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수는 갈릴리 사람이었다

그러나 패배의 위기는 언제나 변화의 기회이기도 하다. 나는 이 시점이야말로 <복음과 상황>류의 정치철(신)학이 변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뭐, 그렇다고 내가 독창적인 사고를 제안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오래된 미래, 갈릴리의 예수로 되돌아가서 생각을 해 보자는 것이다.


예수는 세상 위에 계시지 않았다. 그는 1세기에 팔레스타인 지방, 그것도 북쪽 갈릴리 농촌을 살았던 이다.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의 등장을 이야기하면서 그 배경을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로 제시한다. 이것은 요한과 예수의 사역이 바로 이들 통치자들과의 대결 속에서 이루어 진 것임을 보여준다. 예수는 갈릴리 사람으로서 티베리우스 황제와 빌라도 총독과 헤롯 분봉왕과 안나스와 가야바 대 제사장이 지배하던 갈릴리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활동하며 그들의 ‘힘’과 대립하는 ‘힘’으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세상 전체를 지배하는 왕적인 통치자로 살지 않았다. 그의 정치는 언제나 세상 안에서, 이 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가 관계를 맺고, 옹호하고, 더불어 행했던 이들을 마가복음 저자는 ‘오클로스’라고 불렀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오클로스’들을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이들은 높은 지대와 세금, 부채를 견디지 못해 땅을 버리고 떠도는 사람들, 민중봉기를 진압하는 로마군의 가혹행위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 병이나 장애로 인해 율법에 기초한 당시의 시민사회에서 배제되어 ‘죄인’이 된 사람들, 남편이 없는 여인들, 아버지 없는 아이들, 반란을 꿈꾸던 사람들의 무리였다. 예수는 이들을 이끌고 갈릴리 각지를 돌아다니며 이들의 인권을 옹호하고, 병과 장애를 고치며, 사회적 차별을 낳는 예루살렘 성전체제를 비판하고, 비폭력 저항의 방법을 가르치고, 율법이 아니라 평등과 정의, 사랑에 기초한 새로운 농민 공동체들을 건설하셨다.2)    


예수가 정치범만이 당하는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 빌라도 총독, 가야바와 안나스 대제사장, 산헤드린 공회, 헤롯 분봉왕, 바리새 교사들로 이루어진 당대의 정치적 힘 관계에 대항하여 오클로스로 이루어진 새로운 힘 관계를 세웠기 때문이다. 오클로스들은 심지어 예수가 죽었음에도 “그가 살아났다”고 믿고, 그렇게 살고 운동했다. 아무리 짓밟고 쓰러뜨려도 예수운동은 다시금 일어나곤(부활) 했다.


왕적 통치, 대의민주주의, 그리고 반-정치

때문에 예수의 정치란, 자신들을 세상의 정치적 관계 바깥에 포지셔닝하고서 “누가 우리를 다스릴 괜찮은 정책을 갖고 있나?”를 논하는 정치가 아니라 세상의 정치적 관계 한 복판에서 ‘대항하는 힘’으로 움직이는 정치여야 한다. 특히 예수와 오클로스의 관계를 주목할 때 우리가 세워야 할 ‘대항하는 힘’은 “정치에서 배제된 자들”, 즉 사회적 소수자3)의 ‘힘’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정당정치의 복원을 말하는 최장집과 의견을 달리한다. 그는 각각의 이익집단을 각각의 정당이 대의하는 정치 구도를 만들 것을 정치권에 주문한다. 정책대결/정치대결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보다는 정당이 정치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세력이라면 실질적으로 노동을 대의할 수 있는 정당을 구성해야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의민주주의 정치는 “대의 불가능한 이들”까지 대의해줄 수는 없는 정치이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지난 번 비정규직 법안에 관한 노사정 토론회 때의 풍경이다. 양대 노총 지도부와 노동부, 경총이 주체가 되어 열린 토론회에 정작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들이 회의장에 난입했을 때(지극히 정당한 행동이 아닌가?! 자신들의 삶과 관련된 문제인데.) 토론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일은 도처에서 벌어진다. 이주노동자를 한국인 노동자가 대표(대의)할 수 있는가?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대표할 수 있는가? 장애인을 비장애인이 대표할 수 있는가? 대추리 주민들을 그 바깥에 사는 사람들이 대표할 수 있는가? 동성애자를 이성애자가 대표할 수 있는가? 천성산의 도룡뇽과 새만금을 사람이 대표할 수 있는가? 386세대가 “88만원 세대”를 대표할 수 있는가? 이들은 정치 바깥에 존재한다. 달리 말하면 정치가 이들 바깥에 있다. 때문에 이들의 “정치”는 반-정치요, 소수-정치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예수와 오클로스가 벌인 운동은 바로 이런 반-정치가 아니었던가. 예수 당시의 정치적 대립은 “황제와 총독과 분봉왕과 산헤드린의 정치”와 이들의 정치 바깥에 있는 “오클로스들이 반-정치” 간의 대립이었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을 때, 동일 방적 노동자들이 똥물을 뒤집어썼을 때, YH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점거했을 때 그들이 수행한 것은 바로 그들을 대의하지 못하는 정치에 대한 반-정치였고, 그래서 민중신학자들은 이들이 벌인 반-정치 사건을 “예수-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이 반-정치는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복음과 상황>류는 여기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그 정치 얘기 지겹다!

나는 이제 <복음과 상황>류의 정치 이야기가 지겹다. 언제까지 그렇게 고고한 자리에서 정책검증만 하고 있을 건가.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세상이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지난 5년간 똑똑히 봐 오질 않았었나. 그런 정치는 이제 좀 그만 하면 안 되는가? 솔직히 말해 잘하는 것도 아니질 않나.


물론, 대통령 선거 중요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가 우리의 삶을 직접 바꾸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을 가장 잘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장난스럽게 말해 대통령이 바꿀 수 있는 나의 삶이란 대통령의 능력의 1/50,000,000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인 것이다. 예수가 규정한 “우리”는 대의되지 않는 자들, 사회의 반-정치적 ‘힘’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정치’도 명확하지 않은가? 교회가 이러한 반-정치의 공간이 되면 안 되는가? 그래서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 놓은 삶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로 우글우글한 공동체가 “교회”이면 안 되는가?(사도행전의 교회는 그러하지 않았나?)


그리고 이러한 교회가 다른 여러 소수자들의 반-정치적 ‘힘’들과 연대하여 새로운 삶의 관계들을 창조해나가는 정치를 상상할 수는 없는가? <복음과 상황>이 그런 “상황”과 반-정치의 “복음”을 담아내는 잡지이면 안 되는가? 기독교적 가치관이 마치 세상과 따로 존재한다는 듯, 어떤 문제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적용해보자는 식의 기사는 이제 그만 보고 싶다.(특히 이랜드와 대선문제를 다룬 기사들이 그러했다고 생각한다.)4) 예수의 가치관은 오클로스와 따로 있지 않았고, 오클로스의 해방사건 속에서만 존재했다. 예수는 개념을 정의하지 않았다. 그냥 오클로스와 더불어 살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복음과 상황>도 소수자들의 해방 사건을 추상적인 ‘기독교적 가치관’보다 우선하는 당파적 언론이어야 하지 않을까. 2008년에는 다른 언론에서는 볼 수 없는 <복음과 상황>의 정치를 보고 싶다. “갈릴리 예수”의 정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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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에서 <복음과 상황> 류(流)란, 주로 <복음과 상황>에서 정치와 관련된 글을 쓰는 논객들과 그들의 정치적 관점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2)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리차드 호슬리, <예수와 제국>


3) ‘소수’는 ‘양적’ 개념이 아니라 ‘질적’ 개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소수자이지만 한국 사회 그 어느 집단보다 ‘다수’ 집단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회적 소수자란 수동적으로는 사회적 척도 바깥, 정치 바깥으로 배제된 자들이라 할 수 있고, 능동적(반-정치적 실천)인 면에서는 척도를 거부하고 탈주와 새로운 관계의 구성을 도모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예수와 그의 오클로스(그리고 초기 교회)는 이 두 측면을 잘 보여준다.  


4) 이전 점에서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 결국 플라톤주의의 이원론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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