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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07
    해방의 소식 - Q & A로 보는 신약성서이야기(3)
    김강

해방의 소식 - Q & A로 보는 신약성서이야기

아래 글은 성공회대 교양과목 <종교와 인간> 교재 중 신약성서 부분입니다. 신약신학자로서 여성신학과 민중신학을 연구하시는 최영실 선생님께서 초고를 쓰셨고, 제가 Q&A 형식으로 대폭 다듬은 글입니다.^^

 

30분만에 신약성서의 대략의 내용을 파악하고 싶다면 한 번 읽어보세요*^^*

 

 

 

신약성서가 들려주는 기쁨의 소식

 

 

“신약성서”는 어떤 책인가요?

 

‘신약성서’란 소위 구약성서를 말하는 ‘옛 약속’(Old Testament)에 대비하여 ‘새로운 약속’(New Testamet) 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말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구약과 신약을 대비하면서, ‘약속’과 ‘성취’라는 도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즉 구약성서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의 내용을 담고 있다면,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새로운 약속의 책, 혹은 약속 성취의 책으로 일컫는 ‘신약성서’는 맨 처음에 수록되어 있는 마태복음에서부터 마지막의 요한계시록까지 27권의 크고 작은 분량의 글들로 묶여져 있습니다. 이 27개의 책들은 각각 저자가 다르고, 쓰여진 시기와 시대적 상황이 다르고, 쓰여진 목적이 다릅니다. 신약성서 중 가장 먼저 쓰여진 데살로니카 전서의 연대를 대략 기원 후 50년 초로, 가장 늦은 시기에 쓰여진 목회서신의 연대를 기원 후 2세기 중반 경으로 추정한다면, 신약성서는 약 100여 년이라는 긴 기간을 거쳐 오늘의 형태로 편집되어 한권의 책이 된 것이지요.

 


신약성서가 편집된 것이라면 그것을 “하느님의 계시”로 볼 수 없는 것인가요?

 

성서를 경전으로 사용하는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성서가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리고 계시로서의 성서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으로서의 성서에 대한 이해와 연결되었지요. ‘주어진 것’은 ‘만들어진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혹은 우리의 노골적 이해에 따르면 ‘하늘에서 떨어진’ 성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묻는 것은 불경(不敬)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성서의 기록자나 편집과정에 대한 질문 자체가 불신앙으로 매도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언제나 진리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묻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성서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가 아니라 인간 역사의 산물이라는 견해는 18세기 계몽주의 이래로 발전된 역사적-비평적 성서연구들을 통해 이제는 상식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서는 역사와 무관하게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경험 속에서 신과 인간, 세계와 구원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신앙 고백적 문서인 것이지요. 성서가 “하느님의 계시”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종교 경험과 고백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정말로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왔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신약성서의 각 책들은 저자, 기록시기, 장소 및 기록 목적, 형식 등의 차이 때문에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그 신학적 사상 내용과 문학적 형식에 따라 신약성서를 크게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

 

1. 복음서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요한복음
 -이야기체 형식으로 예수의 생애, 죽음과 부활에 대해 다루고 있음

 

2. 서신서(편지들) :
   1) 바울 서신: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 고린도전서와 후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2) 일반서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와 후서. 요한 1서. 요한2서. 요한3서. 유다서
   3) 목회서신-디모데전서와 후서. 디도서
 -편지, 논설, 선언문의 형식으로 복음의 진리와 성도의 삶에 대한 권면을 담고 있음

 

3. 묵시문학-요한계시록
 -환상과 예언, 묵시의 형식으로 예수와 교회, 세계의 미래를 다루고 있음

 


그렇다면 신약성서를 관통하는 중심주제는 무엇인가요?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각각 다양한 시대적 상황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신앙을 독특하게 증언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일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 인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예수를 메시야, ‘세상에 올 인자’, ‘구세주’와 ‘해방자’로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메시야와 구원자로 증언하는 신약성서의 이 이야기들을 올바로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 저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메시야’, ‘구원자’, ‘구원’, ‘해방’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가 쓰여지던 당시, 즉 1세기의 구약-유대교 전통과 당대 그리스-헬레니즘 세계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들을 차용해서 신약의 저자들의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한 개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신약성서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구약, 유대교,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인간, 세계, 신, 죄, 구원 등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먼저 분명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 후에 신약성서 저자들이 어떻게 그것들을 새롭게 해석, 수정, 삭제, 편집하면서 신과 세계, 인간, 죄, 구원, 해방에 대한 신학을 독특하게 전개시켜 갔는지를 파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지금 21세기의 나와 우리가 어떠한 가치관과 신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날 무턱대고 “성서말씀대로!”를 외치는 한국교회는 이런 점에서 오히려 성서의 참된 의미가 아닌 교회의 이데올로기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전하는 위험에 빠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은 신약성서를 무턱대고 적용하기 이전에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요. 역사비판학적 성서해석 방법론이 대두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성서를 그야말로 하느님의 계시의 책으로서, 글자 하나도 틀림이 없는 무오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중세기에는 성서를 문자 그대로 생활에 적용하여 사람들에게 무서운 형벌을 가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18세기 계몽주의 이래로 발전된 역사 인식과 함께, 사람들은 성서가 하느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책일지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손을 빌어 쓰여진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헌비판학, 전승사와 양식사, 편집사적 연구방법 등에 의해 사람들은 각 복음서들의 기록시기와 저자의 사상 내용과 문체를 밝혀내고, 성서 이야기들의 전승들의 양식과 편집자의 신학적 의도를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볼까요? 신약 성서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는 네 복음서가 각기 예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네 복음서는 예수의 말과 행적에 대해 매우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어떤 것은 상호 모순되는 내용이 있기까지도 합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네 가지의 다른 모습의 예수가 있는 셈입니다. 성서를 무오하다고 믿는다면 이렇게 모순되기까지 하는 예수의 모습을 도저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네 가지의 다른 모습의 예수”에 대해서 조금만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우리가 네 복음서에서 일차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소위 역사적 예수가 아닙니다. ‘역사적 예수’라는 것은 신학적 용어인데, 말 그대로 역사 속에 실제적으로 왔던 사람 예수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수라고 할 때, 그가 역사 속에 실재했던 대로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예수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듯이, 우리가 만난 예수는 누군가가 소개하는 예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소개되는 예수는 소개하는 사람의 입장, 혹은 관점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네 복음서를 갖고 있고, 그 4개의 복음서가 다 다른 것은 예수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복음서 저자들이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과 독자, 그들이 강조하려고 했던 신학적 사상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에서 일차적으로 만날 수 있는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그 사람 예수이기 보다, 복음서기자들에 의해서 해석된 사람, 예수인 것이지요. 역사적 예수는 그 해석된 예수 뒤에 서 있다 하겠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부터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구세주)”라는 고백에 기초한 이름입니다. 성서를 쓴 사람들, 성서에 나온 사람들에게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 왔던 한 사람 예수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고, 그래서 그를 다양한 메시야적 칭호로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아들’, ‘빛’, ‘진리’, ‘생명’ ‘진리’, ‘부활’로 부르면서, 예수를 구원자와 해방자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자리에서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그 당시 어떠한 사회적 상황에서 예수를 어떻게 경험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를 고민하며 복음서를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분명히 해야만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있는 ‘우리 자신’은 ‘누구’인가? 라는 점입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최근 들어 크게 주목받고 있는 ‘여성신학’적 성서해석들은 바로 이 점, 즉 “독자의 자리” 혹은 “해석자의 자리”를 매우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해석”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와 내가 관계적으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해석자의 자리가 다르다면 해석된 내용 역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서구 전통의 신학이 성서를 제 1세계, 백인, 남성, 인간 중심으로 해석해 왔다면 이들은 고난받는 제 3세계, 유색인, 여성, 생태학과 자연, 생명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며, 생명과 평화와 공존의 신학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서 저자들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에 관한 소식을 살펴보면서, 동시에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 자신은 예수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진지하게 물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복음서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예수는 어떤 분인가요? 가장 짧은 마가복음부터 설명해 주세요.

네. 먼저 마가복음을 살펴봅시다. 오랫동안 갈릴리와 예루살렘 지역으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며 싸우던 유대 민족은 결국 주후 70년 유대전쟁에서 강대국 로마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마가복음은 바로 이 시기에 복음서들 중 가장 먼저 쓰여졌습니다. 때문에 이 책은 특히 예수의 수난을 강조합니다. 팔레스타인 땅의 민중들이 겪었던 전쟁이라는 극한의 고통이 예수를 해석하는데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수난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도 공통적으로 다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물론 예수의 수난이야기는 모든 복음서에 다 나오는 것으로 마가복음에만 독특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처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부터 수난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활동 초기부터 예수를 수난과 연결시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활동은 예수와 동시대에 활동한 예언자 세례요한의 체포와 함께 시작됩니다. 즉 예수의 출발에서 이미 수난이 예고되어 있는 것입니다(마가1:14,15). 마가복음 2장에서 시작된 예수와 바리새인과의 논쟁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차 분명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3장 6절에 이르러서 이미 예수의 죽음이 암시됩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이렇게 초반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예수의 수난은 3차에 걸친 죽음에 대한 예고(8:30-31; 9:30-32; 10:33-34)와 예루살렘에서의 논쟁, 재판, 십자가 처형을 통해서 점차로 고조됩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수난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우둔함을 통해서 더욱 강조됩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실패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는 세 번에 걸쳐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음에도 그들은 예수와 다른 길을 가려 합니다. 예수가 수난과 죽음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영광을 꿈꿉니다. 결국 예수의 죽음에 직면해서, 그들은 모두 “다 예수를 버리고”(14:50) 도망합니다. “수제자”라 일컬어지는 베드로조차도 예수를 3번씩이나 부인합니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의 수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예수의 모든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의 길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과는 달리 마가복음에서 수난의 길을 가는 예수야말로, 참으로 하느님 나라의 새 역사를 이루는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이 기뻐하는 아들이고 메시야라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수난 당하기 직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던 그 때에 예수를 찾아가,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 이것은 하나의 장례예식을 상징합니다. -  이름 없는 여인, 그리고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르며 복음 사역에 동행했고, 예수의 수난의 현장을 지켜보고 무덤을 찾아가서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선포한 ‘갈릴리의 여인들’이었습니다. 마가가 보기엔 이 여인들이야 말로 십자가에서 수난 당하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고, 끝까지 그를 따르며 섬긴 참된 제자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참된 신앙은 권력자와 율법학자들에 의해 무고하게 수난 당하며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칭호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무력한 순간에 이방사람인 로마의 백부장에 의해 고백됩니다.(15:49). 예수는 수난 당하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높은 자리, 영광된 자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마가가 고백하는 예수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의 예수상은 그렇다면 어떤 모습인가요? 마태복음하면 유명한 “산상수훈”이 생각이 납니다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와 유대교와의 대립이 매우 중요한 내용을 이룹니다. 마태복음이 쓰여진 80년대 중반의 상황은 유대전쟁으로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이 로마와 근동지역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유대교”라는 민족적, 종교적 공동체를 형성하며 그 정체성을 확립해가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유대교와 초대 그리스도교는 말하자면 “경쟁관계”에 처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마태복음에는 유대교에 대립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나는 곳이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5-7장입니다. 여기서 예수는 당시 율법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해석하면서 힘없는 사람들에게 죄인의 멍에를 지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멸시했던 유대 율법학자들과 대립하면서, 하느님이 요구하고 있는 참된 ‘의’가 무엇인지를 선포합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의’를 내세우면서 사실은 ‘율법을 불법으로 만들고 있다’ 고 질책하고, 하느님의 참된 의를 실천하라고 요구합니다.

 


“의”라고 하면 뭔가 정의로운 행동이나 선행을 일컫는 말인 듯 한데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뭔가 다른 의미로 이 ‘의’를 사용하고 있나요?

하느님의 의라는 개념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의 준수”가 곧 “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복음서기자는 마태복음 5장 17-48절에서 당시 율법학자들이 내세우는 ‘의’의 위선을 폭로합니다. 또 마태복음 6-7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행위를 문제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그들의 거룩함과 의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굶주린 사람에게 자비와 자선을 베풀지 않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죄인의 멍에를 지우는 불의한 사람들로 그려집니다(마태 12: 1-8). 예수는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이 죄인이라고 멸시하던 세리와 창녀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28-32)고 설교합니다.


이렇듯 마태복음에서의 예수는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과 의를 자랑하면서 실제로는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착취했던 불의를 심판합니다. 그리고 거짓된 예배와 위선적인 종교행위를 그치고, 권력과 법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착취했던 것을 한 푼도 남김없이 되돌려주는 의로운 행위를 통하여 진정한 회개와 화해를 이루라고 촉구합니다(마태 5: 21-26). 그리고 유대인들이 보복심과 미움을 부추기면서 적대시하고 멸시하며 억압했던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원수’가 아니라, 하느님이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와 비를 주면서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그들의 ‘형제’임을 일깨웁니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멸시하지 말고, 저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걸려 넘어지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촉구합니다(마태 18: 6-9). 뿐만 아니라 ‘원수’로 여길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하라고 명합니다(마태 5: 38-48).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요구하고 있는 ‘하느님의 의’는 형식적이며 위선적인 율법 수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이 조문을 넘어서서, 율법을 통하여 본래 하느님이 요구하고 있는 참된 정의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의 예수는 참된 의의 선포를 통하여 당시 유대인들의 위선을 책망하고, 저들에 의해 억압받고 죄인의 멍에를 메고 신음하는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풀어주며 구원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누가복음은 어떤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나요?

누가복음의 예수는 평화와 희년 사건을 성취하는 자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이야기는 누가가 본 예수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의 탄생을 목격한 가난한 목동들은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누가 2:14)”라고 찬송합니다. 예수가 주는 평화는 세상(로마)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평화는 세상의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세상의 불평등한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할 뿐인 거짓 평화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평화는 세상의 잘못된 질서를 뒤엎고 하느님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46-55절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노래는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될 평화의 새 역사는 부자와 권력자에게 더 큰 부와 권력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런 모습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지 않나요? 오히려 ‘저항’에 가까운 모습인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러 왔지만, 유대인들로 대표되는 불의한 ‘세상’을 향해서는 ‘불을 던지고’,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선언합니다(누가 12:49-53).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나사렛 설교에서 분명해지는데, 여기서 예수는 구약에서 예언된 희년이 “이 성서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누가 4:21)” 그리고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은 배부르게 될 것이고,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웃게 되며, 배척을 당하고 욕을 먹고 누명을 받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지만, 반면에 지금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칭찬을 듣는 사람은 화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누가 6: 20-26). 이러한 선포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희년”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었습니다.

 


말씀 중에 “희년”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는데요,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요?

 희년은 해방의 선포이며, 모든 억압과 불평등으로부터 자유의 선포입니다. 구약성서 신명기에 의하면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보다 더 중요한 희년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다음해, 즉 매 50년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하느님이 그들을 애굽의 억압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거저 땅과 소산을 주신 것을 기억하고, 그들도 자신들의 가난한 동족을 해방시키고 땅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명합니다. 또 가난한 이방 노예들도 풀어주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구약 시대에는 이 희년법이 올바로 지켜진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스라엘이 고난의 역사를 겪은 것은 이 희년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처음부터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와서 불의한 법 체제와 맞서며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킴으로써 희년의 사건을 성취합니다. 예수의 복음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장애인, 세금징수원, 여성과 같이 당시 세상에서 인간 취급을 못 받던 자들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는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고, 불의한 권력자에게 회개의 행위를 촉구합니다. 이 회개의 행위는 단지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삭개오의 고백에서 말하는 것처럼 누구의 것을 착취한 것이 있으면 4배로 되갚는 정의의 행동을 통하여 모든 불의한 상태를 뒤바꾸는 구체적인 행위를 요구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평화를 주기 위해 온 예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국가를 전복시키고, 백성을 선동하는 자”(누가 23: 1-5, 14)라는 죄목으로 로마 당국에 고발당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오늘날도 불의한 권력자와 종교가들은 거짓된 안정과 거짓된 평화를 가르치면서, 가난한 사람과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억눌린 사람을 해방시키는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와 함께 일어나 모든 불의한 권력과 체제에 맞서 싸우며, 참 평화의 길을 선포해야 합니다. 만일 오늘날에도 우리가 참된 평화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누가복음 19장 41-44절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아름다운 교회당과 높은 빌딩들도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이 ‘가난한 사람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이 가난한 자, 억눌린 자들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단지 그들만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억압받는 자의 회복을 통해서만이 전체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이어지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통해서, 실제로 이 희년의 역사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 성령을 받은 성도들의 공동체 안에서 성취된 사실임을 보도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야말로 참된 평화를 실현시킨 자임을 깨달은 사도들, 교사와 예언자, 목사와 집사,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한 많은 남녀 신도들에 의해서 평화와 희년의 구원 역사가 계승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세 복음서는 다르면서도 또 정의와 평화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앞의 세 복음서와는 달리 매우 추상적이고 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요?

네 맞습니다.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앞에서 말한 세 복음서들과 매우 다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탄생은 “태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요한1:1) 이것은 당시 헬라세계에 펴져 있던 영지주의사상의 구원자 신화를 차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영지주의와는 커다란 차이를 나타냅니다. 예수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하느님 자신인 로고스라는 점에서 영지주의와 접근하면서도 그 예수가 세상 한 가운데에 ‘육(肉)이 된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하느님을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 나타내 보인자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도 ‘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인간적인 이야기라는 말씀이신가요? 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가 심지어 ‘하느님’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책이 아닌가요?

그렇지요. 요한복음의 큰 주제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집중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로고스가 육이 됨”으로서 “하느님을 나타내 보인” 자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일을 수행하는 ‘아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영광 받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가장 빛나는 신앙의 고백은 예수의 제자 도마의 고백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도마는 부활한 예수를 보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0:28)”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제외하면 복음서 어디서도 예수가 직접적으로 ‘하느님’으로 고백되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역사의 인물인 예수의 말과 행적을 통해 그를 ‘하느님과 하나된 자’, ‘하느님과 동등한 자’로 증언하는가 하면, 영지주의 사상에서 계시자, 혹은 신의 자기 현현적 용어인 ‘참 빛’, ‘생수’, ‘길’, ‘진리’, ‘포도나무’, ‘생명’, ‘부활’이라는 개념을 예수에게 적용하여 역사적 인간인 예수가 ‘하느님 자신’이라고까지 증언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인간 예수가 하느님일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생물학적이며 신비적이며 존재론적 차원에서 예수가 신과 하나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대교적 개념으로 ‘일’(활동)에서의 동일성, 즉 예수가 하는 행위와 일이 곧 아버지의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행위를 통해 아버지가 어떤 분임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피곤함을 느끼며, 목말라하며 물을 구걸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며 죽는 육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이 분명히 부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을 수행합니다. 그는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오가며,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생수를 주며, 죄인으로 멸시받던 눈먼 소경을 고쳐주고, 자신의 손으로 손수 노예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어줍니다. 그는 자신의 살과 피를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의 떡으로 제공하고, 죽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는 이 모든 “사랑의 행위”를 통해 아버지와 하나됨을 이루고, 또한 그를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됨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하느님이 사랑’(요일 4:8) 이심을 온 몸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도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예수와 하나됨을 이루며,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의 친구이며, 참된 제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와 아버지와 하나된 자입니다. 요한복음은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려고 하고, 영지주의자나 신비주의자들이 금식과 금욕, 신비적 행위로 신을 알려고 했던 구원의 길을 모두 부인합니다. 그는 이 세상 안에서 살고, 자신의 육체를 내어주며 다른 사람을 사랑한 역사의 인물 예수의 행위를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천명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매우 ‘영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참으로 인간적인 이야기를 한 셈이겠군요. 요한은 왜 이런 글을 써야 했을까요?

요한의 예수 이야기에는 요한복음이 기록된 주후 2세기 무렵의 교회 공동체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역사적 예수의 행위를 주목하기보다는 제도화된 교회체제 속에서 세례와  성만찬, 금식과 금욕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신과의 합일을 이루며, ‘영지’를 소유하여 신적인 진리와 구원에 도달하려는 분위기에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요한은 세례를 예수의 발 씻김의 행위로, 성만찬을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예수의 사랑의 행위로 선포하면서 이 인간 예수의 행위야말로,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본 모습임을 재천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점은 오늘날 “예수 없는 예수교회”가 되어가는 한국교회에도 크나큰 시사점을 줍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 그것은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거나 신비 체험을 함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의 삶의 길을 따라 삶으로서 하느님의 참 모습을 올바로 깨닫고, 그와 하나 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내어주는 참된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서를 보면 복음서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울”이 쓴 편지들입니다. 바울은 어떤 이야기를 했나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소식을 ‘복음’의 기쁜 소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복음”이라는 말은 바로 바울의 글에 나타난 말입니다. 바울의 글을 읽기 위해서는 바울의 편지를 받아야 했던 공동체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복음서기자들이 다양한 입장에서 예수를 해석했듯이, 바울도 ‘복음’의 대상자들의 입장에서 그의 복음을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당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있었던 유대인과 비유대인(그리스인, 로마인 등)의 갈등상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특히 비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사도로 나선 바울은 당시 유대교(와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가 주장하는 율법주의에 맞서, “하느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21-27)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율법의 행위를 통해 종말적 구원인 ‘의’를 얻고,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김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의’를 얻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매사의 척도를 율법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서 1장 18-3: 20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나 비유대인들이 모두 죄 아래 있다는 점을 말합니다. 비유대인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죄인이라고 비판하는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율법대로 살지도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율법을 준수할 수 있는가를 되묻습니다.(로마 7장) 결국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로마 3:10-20)고 결론짓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이야기한 건, 결국 기독교인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죄인인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자신들의 율법 준수의 행위 없이, 하느님에 의해 거저 의롭다고 여김을 받고 구원을 얻는 놀라운 은혜의 사건이 일어났다(로마 4: 4-5)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유대교 전통에 있는 화목제물, 즉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희생의 제물로서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해석하면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인간의 율법 준수 행위 없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의롭다고 선언되었음을 주장합니다. 


죄인이 대가 없이 의롭다고 선언되었다는 것, 그것은 결코 존재론적 의미에서 불의한 인간이 도덕적으로 의롭고 완전한 존재로 변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 용서를 받고 사랑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전한 예수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선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당시 로마교회와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당시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합니다. 그는 내부에서 율법과 교리 문제로 서로 싸우던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무조건 용서받고 받아들여졌듯이 그들도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사랑하라고 촉구합니다.


때문에 바울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당시의 상황과 분리하여 교리적으로 이해해 버리면 당시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이 빠졌던 문제에 동일하게 빠지게 됩니다. 즉 “기독교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라는 식으로 “복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느님의 “무조건”의 은혜를 율법적인 “조건”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바울의 정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의 회원”이 되거나,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은혜를 주신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용납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린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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