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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차금붕

차금봉, 빈민 출신 노동자 그리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최규진(역사학 연구소 연구원, 성균관대 강사)


1. 신문에 기록된 어떤 편지와 한 운동가의 죽음

식민지 시대의 흐릿한 신문을 뒤적이다 보면, 일제 경찰에 검거된 수많은 운동
가와 노동자 농민의 투쟁을 다룬 큼지막한 기사들이 무슨 암호처럼 적혀있는 
것을 쉽사리 찾을 수 있다. 굶어 죽은 사람과 가난을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
은 사람, 그리고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찾아 헤메는 사람들에 대한 글도 드물
지 않다. 1929년 봄부터 번데기 장사가 나타났다는 별난 기사에도 식민지 민중
의 가난한 살림살이가 묻어 있다. 신문은 "굶주린 사람이 갑자기 번데기 많이 
먹으면 배탈. 그러나 계속 먹으면 괜찮아"라고 덧붙여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이
런 기사를 읽다보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보게되고 못내 마음
이 무겁고 아리다. 더구나 일제가 조선의 '사상범'을 가둘 감옥을 더 짓고 경
찰 예산과 인원은 크게 늘린다는 기사 따위는 오늘날에도 섬뜩하다. 예나 지금
이나 엇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일들을 볼 때면, 조금은 사람사는 세상의 이치같
은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나 철지난 신문에 늘 심각한 것만 실려있는 것은 
아니다. 촌스럽고 다듬어지지 않은 그림들을 보는 것은 흘러버린 세월을 느낄 
수 있어 재미있다. 바르면 머잖아 머리카락이 나온다는 대머리 약이나 온갖 성
병을 간단하게 치료한다는 광고를 보면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신문은 특별한 사건이나 남다른 사연을 싣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중외일보』
의 어떤 기사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개인의 안부편지를 소개하고 있어 오
히려 읽는 이의 눈길을 더 끈다.

윤호야 잘 있니. 할아버지 할머니 무사하고 엄마하고 동생하고 일가족 여러 어
른이 평안하시냐. 서너번 엽서는 받아보았으나 답할 근력도 없고 정신마저 완
전치 못하여 답장을 할 수 없었다. 윤호야 이번에 짓부스(장티프스)라는 열병
에 시달리다 하마터면 죽을걸 ··· 살아났다. (중외일보 1929년 3월 12일)

아들 윤호의 이름을 빌어 아내에게 쓴 이 사사로운 편지가 신문에 소개되었던 
까닭은 그 주인공이 남달랐기 때문이리라. 이 편지를 쓴 사람이 바로 차금봉이
다. 무학대사가 "삼천명의 홀아비가 탄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곳에 세워
져 켜켜이 한을 쌓아둔 서대문 형무소. 그곳에서 가족을 그리며 차금봉이 편지
를 쓴 것은 1929년 초겨울이었다.
죽다 살아나 힘겹게 안부 편지를 썼던 차금봉은 끝내 가족을 보지 못한 
채, '심장성 각기증'으로 1929년 3월 10일 임시 독감방에서 죽고 말았다. 모
진 고문을 당한 끝에 갑자기 찾아온 병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63살되는 아버
지 차용진과 늙으신 어머니 이성녀, 24살의 부인 김씨, 그리고 네살배기 아들
과 두살배기 딸이 있었는데 ···
원산총파업의 거센 물결이 미처 가라앉지 않은 1929년 3월 14일, 나이 31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차금봉 장례식이 있었다. 일제는 만장과 요령을 압수하고 
말탄 경찰을 배치하여 그의 죽음길마저 가로막았다. 그들은 노동공제회와 노농
총동맹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장례대표 서정희를 서대문 경찰서에 소환했으
며,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400명을 모두 해산시켰다. 오랫동안 신문배달부를 
했던 차금봉 장례식에 신문배달부들이 와서 상여를 매는 것도 막았다. 그때 
{조선일보』는 일제 경찰이 영결식마저 못하도록 했다는 것 등을 크게 다루었
다.

차금봉, 그는 누구길래 이토록 죽음길까지 일제와 맞서야 했으며 신문에도 크
게 보도되었던 것일까. 줄여 말하면, 무엇보다 그는 노동자였고 조선공산당 책
임비서였으며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살해된 사람이었다. 그동안 훌륭한 독립운
동가였다고 믿어왔던 이런저런 사람이 사실은 친일파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참
담한 마음이 들었다면, 차금봉의 삶에서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다. 차금봉의 
삶을 뒤돌아본다면, 그동안 기억에서 지워야 했던 역사의 한자락을 어렴풋하게
나마 되살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2. 차금봉, 그의 삶이 곧 노동운동사

차금봉은 아직껏 민족해방운동가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뿐더러 그가 한 활
동마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동작동 국립묘지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지
금 어디에 묻혀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차금봉. {중외일보』는 '어떤 중대사건
의 중요간부'였던 차금봉이 "학교에서 조직적으로 공부한 일은 별로 없으나 조
선 사회운동에서는 10년 이래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고 썼다. 그리고 노동공제
회 창립 때부터 집행위원을 했고 노농총동맹 창립부터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
맹으로 나뉘어 질 때까지 중앙상무위원으로 있었다고 소개했다. 또 그 신문은 
차금봉이 을축청년회 창립자이며 경성배달동맹 집행위원장을 지냈고 신간회 경
서지부(마포방면) 창립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고 기록했다.
차금봉이 관계 맺었던 노동공제회, 노농총동맹, 신간회, '어떤 중대 사건'인 
조선공산당 사건 등은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큰 줄기였다. 그가 이 모든 조
직에 참여했다는 사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가 시대의 고민을 비껴가지 않
았던 실천적 운동가였음을 짐작할 것이다. 그의 일생이 바로 노동운동사였다
는 그때의 신문기사는 그다지 부풀린 것이 아니었다.

차금봉은 1889년에 경성 화천동(和泉洞)에서 빈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인전
기에 흔하게 나타나는 그럴싸한 태몽이 있었다거나 어렸을 때 아주 빼어났다
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14살에 미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역 철도기관의 화부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얼마 뒤에 기관사가 되었다. 그
는 집안도 보잘 것 없고 그다지 배운 것도 없이 어린 나이에 노동자로 사회생
활을 시작했다. 그런 차금봉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운동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계기는 1919년 3.1운동이었다. 차금봉은 3.1운동이라는 '투쟁의 학
교'를 졸업하면서 선진노동자로 자라났다. 3월 1일부터 두달 남짓 격렬하게 일
어났던 3.1운동에서 노동계급도 빠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저마다 만세 시위
에 참여하거나 조직적인 파업투쟁을 벌였다. 차금봉은 1919년 노동자 시위와 
파업을 계획하다가 그것이 들통나 해고된 뒤 곧바로 용산철도공장, 정미공장, 
마차부 파업을 조직했다. 3월 27일 서울역 앞에서 '노동대회', '조선독립'이라
는 큰 깃발을 앞세우고 많은 노동자가 시위운동을 할 때 차금봉이 그것을 지도
했다. 조선에서 맨처음 일어나 파업시위로 알려진 이 3월 27일 투쟁에는 철도
국 노동자 800명이 참가했는데 차금봉 같은 선진노동자가 투쟁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0만이 넘는 민중이 참가했던 3.1운동은 끝내 실패했다. 3.1운동에서 민중이 
크게 저항했는데도 일제를 물리칠 수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패배주의에 빠진 
사람도 있었다. 또 '문화정치'라는 거짓 개량에 휩쓸려 친일파가 되는 사람도 
늘어났다. 일제가 휘두르는 '채찍'에 겁먹었던 그들은 일제가 내미는 '당
근'에 더욱 솔깃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그토록 많은 민중이 일제
에 격렬하게 맞서 싸웠다는 사실에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차금봉처럼 3.1운동
을 '투쟁의 기억'으로 간직한 채, 더욱 힘차게 민족해방운동에 나섰던 운동가
들은 새로운 운동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새로운 운동 
이념으로 사회주의가 폭넓게 받아들여졌으며 조직의 시대라고 일컬을 만큼 노
동자 농민단체가 많이 생겼다.

1920년대의 노동단체의 첫걸음은 1920년 4월 11일에 서울 황금정(지금의 을지
로)에서 조직된 노동공제회에서 시작되었다. 노동공제회는 이 땅에 맨처음 나
타난 근대적 대중 노동단체였다. 물론 1920년 이전에도 30개 남짓한 노동단체
가 있어 노동계급에게 단결의 통로를 마련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노동자
를 소개하고 일자리를 구해주는 일종의 '노무공급기구' 노릇을 했다. 이에 견
주어 노동공제회는 노동자들의 친목과 상호부조만을 꾀했던 것이 아니라 노동
자들의 계급의식을 높이고 전국 차원에서 노동자를 결속시킬 것을 목표로 삼
은 조직이었다.
노동공제회를 조직했을 때 회원이 678명이었고 1921년 3월에는 1만 7천명 가량
으로 크게 늘었다. 그러나 노동계급 속에 소작인을 포함시켰을 뿐만 아니
라, "노동문제의 중심 대상은 소작인이다"고 단정하기까지 했다. 또 노동공제
회는 노동단체들의 연합체가 아니라 회원은 개인자격으로 참가하여 그 구성이 
아주 복잡했다. 인텔리 출신과 노동자 출신 사이에 대립과 갈등도 있었다고도 
한다.

노동공제회 발기인 가운데 한사람인 차금봉은 초대 교양부 간사가 되었다. 이
미 그는 1920년 2월에 조선노동문제연구회 제1차 총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조직적인 노동운동에 첫발을 디뎠었다. 그는 1921년 3월, 노동공제회 제2회 정
기총회 예비총회에서 61명의 대표위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뽑혔다. 차금봉은 최
상덕과 함께 노동자 출신을 대표하여 조선노동공제회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전에도 차금봉은 노동공제회 기관지인 {공제』 편집부와 자주 충
돌했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자기 뜻대로만 {공제』의 편집방향을 잡았기 때문
이었다. 각 파벌의 활동과 복잡하게 얽혀 있던 노동공제회 지도부는 1922년 가
을에 걷잡을 수 없는 분열에 휩싸였다. 차금봉 등이 지도부를 차지하자 윤덕
병 등의 또다른 그룹은 1922년 10월에 노동공제회 해체를 선언하고 노동연맹회
를 창립했다. 한 그룹이 떨어져 나간 노동공제회는 노동연맹회에 대립하면서 
1924년 노동총동맹에 합류할 때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는 못했다.
이 무렵 차금봉은 노동공제회를 지키면서 '조선노동공제회에 대하여', '현하
의 조선사회' 등의 강연을 했다. 차금봉의 강연은 많은 노동자에게 감명을 주
었다. 그가 노동자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말솜씨 때문이 아니라 노
동현실에서 겪은 생생한 경험 때문이다. 그가 노동자 출신이라는 사실이 노동
자들에게 큰 호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다른 보기를 들면, 노동공제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용산철도공장 노동자 김길인이 한 즉흥연설은 많은 사람에
게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차금봉은 노동공제회의 '반인텔리투쟁'을 이끌었으며 사회주의자 정재달에게 
테러를 하기도 했다. 1920년대 초에는 노동운동의 기본방향이나 인식도 채 갖
추어 지지 않았던 상태에서 노동운동가들 사이의 다툼도 심심찮게 생겼다. 누
가 올바르고 누가 잘못이었는지 가리기 힘들만큼 혼동된 시기였다. 그 혼동은 
운동가들이 3.1운동 이전의 낡은 운동방침을 부수고 새로운 운동 방침을 세워
야 할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차금봉은 바로 그때에 서울계와 관계
를 가지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그 사상을 실천하려 했다.
차금봉은 1922년 9월 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된 뒤에는 1923년 전반까
지 조선금물직공조합, 경성신문배달조합이 창립되는 것을 지도했다. 그해 7월 
서울에서 유기직공 동맹파업이 일어났을 때 지원했으며, 9월 서울계 사회주의
자들이 이끄는 조선노농대회의 발기인이 되기도 했다.

차금봉은 노농총동맹을 조직하는 데서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24년 4월 18
일 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서 7명 기초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1920년
대 중반에 가까워질수록 곳곳에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이 크게 성장하
고 노동자 농민들의 조직이 잇달아 나타났다. 이 조직들은 전국 조직으로 모아
야 한다는 요구가 차츰 커졌고 드디어 1924년 4월 20일에는 노농총동맹의 닻
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날 열린 회의에서 차금봉은 50명 중앙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일제는 노농총동맹을 매우 경계했다. 

이 동맹은 공산주의 선전기관의 의혹이 있음은 물론이며 그 강령 초안에 밝히
고 있는 것과 같이 단체의 위력을 가지고 계급제도를 파괴하고 공산사회의 실
현을 목적으로 하는 직접행동의 기관이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인정된다. 또 
오늘의 제도 아래에서 민족발전을 꾀하려는 동아일보계의 민족운동을 배척하
고 ··· 과격한 발언을 하는 등 치안을 방해할 염려가 있으니 그 집회를 금
지하고 ···

일제가 노농총동맹을 '공산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파악한 것이 터
무니없지는 않았다. 노농총동맹의 강령은 "노동계급을 해방하여 새로운 사회
를 실현하고" "철저하게 자본가계급과 투쟁하며" "노동자 계급의 복리를 증진
하고 경제적 향상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노농총동맹이라는 공개된 노동조직
이 '공산주의 선전기관"의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노농총동맹을 조직하
기 얼마 전에도 전조선노동대회장에 낫과 망치를 엇걸어 그린 휘장이 나타날 
만큼 사회 분위기가 급진적이었고 사회주의 영향이 컸다.
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을 때 그 산하에 260여 단체를 거느리고 회원 총수는 5
만 3천명이었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노농총동맹은 탄압 
속에서도 합법투쟁을 조직하려 했으나 일제는 이 동맹의 활동을 봉쇄해 버렸
다. 강연회마저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차금봉을 비롯한 서울계와 북풍회 그
리고 화요회계 사회주의자가 두루 참가하여 조직한 노농총동맹은 각 그룹 사이
의 결합이 느슨했다. 또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노동자와 농민을 한 조직으로 
묶는 것도 한계였다. 그럼에도 노농총동맹 임시대회에서 민족개량주의 사상을 
선전하던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결의하자 동아일보의 모든 중역이 사표를 내야 
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차금봉은 노농총동맹에 적극 참여하여 간부를 맡
았을 뿐만 아니라, 1925년 10월에는 을축청년회의 집행위원이 되기도 했다.

노동공제회부터 노농총동맹에 이르기까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조직형태와 
노선이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발전하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제대로 발맞
추기 위해 노농총동맹을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
었다. 여기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도도 있었다. 일제가 노농총동맹을 탄압하고 
조선공산당원을 검거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마침내 1927년 9월에 두 조직으로 
분리되었다. 1926년 '3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927년 1월에 경기도를 책임
지는 자리를 맡았던 차금봉은 노농총동맹 분립과정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1927년 8월 노농총동맹 상무집행위원회에서 뽑은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
맹 선거위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물론 차금봉은 노동운동 쪽을 맡은 노총부 
위원이었다.
중앙기구 부서를 정비한 노동총동맹은 일제의 갖가지 탄압 속에서도 적잖은 파
업을 지도하거나 지원했다. 차금봉도 1927년 11월 밀양 양화직공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격문을 보냈으며, 파업을 선동하고 확대시킨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속되기도 했다. 1928년 3월, 그는 신간회 경서지부 설립을 주도
하여 설립대회에서 간사가 되었으며 신간회 전국대회 출석대표위원으로 뽑혔
다. 조선공산당의 당원이 된 그는 신문배달로 생활을 하면서 신문배달부를 조
직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신문배달총동맹을 결성하고 그 집행위원장
이 되었다.

1928년 3월은 차금봉에게는 특별한 때이다. 이때 그는 '4차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와 경기도 책임자를 함께 맡게 되었다. 철도 노동자로 출발한 그가 비합
법 전위조직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1925년 4월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조선공
산당은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자신의 사상을 이론에서 실천으로 옮기면서 거둔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거듭 무너졌지만 그
때마다 당을 다시 만들어 일제에 맞섰는데, 차금봉이 바로 마지막 조선공산당
의 책임비서를 맡은 것이다. '4차 조선공산당'은 신간회와 근우회 등에 관심
을 쏟았으며, '조선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테제' 등을 마련하여 자신의 혁명노선
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4차 조선공산당'은 5개월이 채 안되어 170여명이 검
거됨으로써 활동이 거의 마비되고 말았다. 7월에 당중앙 간부와 지방간부 대부
분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차금봉은 오사카를 거쳐 도쿄로 몸을 피했으
나 일본 경찰에 곧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이다.


3. 마지막 투쟁, 그리고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

차금봉은 일제의 고문으로 살해되었다고 해야 정확하다. 그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일제 경찰에 맞서 훌륭한 '수사
투쟁'을 벌였다. {차금봉 조서』에는 그의 마지막 투쟁을 엿볼 수 있는 다음
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질문)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서 무엇을 했나?
답변) 공산당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질문) 그렇다면 너는 책임비서로서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는가?
답변) 어떤 방침이나 계획도 없었다.
질문) 공산당의 선언이나 강령을 아는가?
답변) 모른다.
질문) 말이 되는가?
답변) ···

질문과 답변 사이에 그리고 한 질문과 다른 질문 사이에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이 쏟아졌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차금봉은 그 고문을 견디면
서 자신이 지켜야할 그 무엇을 끝내 지키고 있었다. 잡동사니 말보다 침묵은 
훨씬 더 많은 사실을 전한다. 구차한 삶보다 의로운 죽음이 더 생명이 긴 것
을 역사에서 본다.
빈 공간이 알맞게 자리잡은 그림이나 압축된 시가 오히려 넉넉한 느낌이 들고 
상상력도 부추긴다. 이것을 '여백의 미학'이라고 하던가. 그런데 보도검열에 
걸려 삭제된 차금봉 관련 기사에서도 '여백의 미학'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는 마침 서대문형무소에서 시체를 운반하여 들어오는데 그
로부터 부모는 물론이오 그의 부인의 애곡은 차마 듣지 못할 만큼 애를 끊었
다. 그의 어린 아들과 딸은 관 속에 들어있는 아버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
었는데 금봉의 부인은 목이 멘 소리로 ···(두 줄 삭제)···라고 부르짖
는 모양은 뜰앞에 모여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짓게 하였다.({중외일
보』 1929년 3월 12일)

운동가로 짧은 삶을 마친 남편의 주검 앞에서 젊은 부인은 도대체 무슨 말을 
외쳤을까. 일제는 왜 그 외침을 삭제해야 했는가. 이처럼 삭제된 기사는 읽은 
이의 상상력을 북돋운다. 그리고 식민지 민중의 한과 울분을 더욱 깊이 생각하
게 만들면서 '사실보다 더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워진 것은 신문 기사만이 아니다. 일제는 더 살아야 할 차금봉의 삶을 고문
으로 없앴고 우리는 그가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발자취를 역
사에서 오랫동안 지웠다.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노동운동사는 이미 '여백의 미
학'이 아니다. 그저 허전하게 비어 있을 따름이다. '집단적 기억상실증' 속에 
묻혀진 노동운동사를 들추어내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 선진노동자
의 삶을 오늘에 되새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차금봉이 꿈꾸었던 '노동계급 
해방'이라는 새세상은 '오래된 미래'인가 아닌가. 우리가 오늘 비로소 차금봉
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어떤 뜻에서인가. 차금봉의 삶과 죽음에는 이토록 긴 
여운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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