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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김재규는 두 가지를 착각했다

[조명]“김재규는 두 가지를 착각했다”
[뉴스메이커 2005-11-04 11:42]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 출간한 안동일 변호사 “더 큰 희생 막으려 ‘거사’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 10·26사건 주요 관련자들의 변호인으로서 1심에서 3심까지 재판의 전 과정을 지켜봤던 안동일 변호사(65)가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랜덤하우스중앙)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10·26사태 26주년에 맞춰 나온 이 책은 그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10·26사태의 성격과 김 전 부장의 ‘범행’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해주는 요소들을 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책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담당 변호인이 쓴 본격적인 역사 기록물이라는 데 있다. 이제까지 나온 10·26 관련 저작물은 재판기록이나 수사기록, 관련자의 증언에 의존해 취재기자나 작가가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와 달리 공판조서와 법정 메모, 피의자 면담 등을 토대로 한 안 변호사의 기록은 10·26의 실체와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10월 26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배재빌딩 사무실에서 안 변호사를 만나 10·26의 실체에 한걸음 더 접근해 보았다.

책을 보면 김 전 부장이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혁명가로 묘사돼 있는데….

“어디까지나 그의 주장이죠. 내가 그걸 혁명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발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준비한 것은 사실이에요. 유신 선포 이후부터 ‘이건 민주헌법이 아니다’라며 회의를 품었던 거죠. 1974년 건설부장관에 임명됐을 때는 권총을 넣고 들어갔는데, 바지 담배주머니가 불룩한 그때의 사진을 법정에 증거물로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발탁되는 바람에 생각을 달리 한 겁니다.”

생각을 달리 했다는 건 무얼 의미합니까.

“그 전까지는 박정희와 자기가 같이 사라지자는 생각이었는데 중정부장이 되자 ‘아, 이건 선의로 해결할 수 있다’며 마음을 바꿔먹었어요. 모든 정보의 총책임자가 되고 항상 대통령과 독대하는 위치니까 유신체제를 완화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거죠.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중에 들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등식을 세우기를 박정희가 바로 유신의 핵이다, 박정희가 있는 한 자유민주주의는 회복이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없어져야 된다, 이런 확신적인 등식을 하나 만들어 놓고….”

왜 선의로 해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어요.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거지요. 차지철도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어요.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 본인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하니까…. 더 큰 국민의 희생을 한 사람을 희생함으로써 막자는 거였죠.”

그런 취지로 혁명을 위한 거사를 했다면 그 뒤의 행동과는 앞뒤가 맞지 않지 않습니까.

“착각한 거지요. 착각한 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유신의 핵을 제거하면 7년여 동안의 유신체제, 더 나아가 박정희 18년 압제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모든 국민이 일제히 일어나 자기를 열렬히 환영할 것이라고 본 거죠. 두 번째는 거사가 성공하면 틀림없이 미국이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한 겁니다.”

거사 직후 육본이 아니라 중정으로 갔다면 가능했을 법한데요. 김 전 부장의 판단이 순간적으로 흐려진 겁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정승화씨를 믿었고, 또 육본으로 가도 계엄만 선포되면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판단이 흐렸다기보다 치밀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죠.”

김 전 부장이 재직 시절 긴급조치 10호를 대통령에게 건의한 내용이 책에 나오는데 그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은 얘기 아닙니까.

“긴급조치 9호의 나쁜 점은 죄목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그 조치를 비판조차 못하게 하고 헌법 개정 논의는 아예 안 되게 했으니….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걸 완화하고 두 가지 ‘시퍼런 칼날’을 추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노동계와 종교계를 규제할 수 있는 조항을 넣는 데 주안점을 두었어요. 표면적으로는 9호를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중요한 알맹이를 빼는 것이었죠. 이게 거의 될 뻔했는데 내부 반발 때문에….”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부분에서 책과 진실위 중간발표 내용이 상치됩니다. 김 전 부장의 ‘작품’이 아니라고 확신합니까.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그해 10월 초입니다. 김재규씨의 말을 들으면 그걸 자기가 자체조사시켰다는 겁니다. 그 보고를 받지 못하고 10·26이 났죠. 자기가 한 일이라면 굳이 조사를 시켰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아주 분개했어요. 정보부장을 지낸 사람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이느냐고요.”

당시 역학관계상 김 전 부장이 그 일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김형욱 처리문제에 대해 항상 온건한 방법을 건의했었죠. ‘돈이 필요하면 돈이라도 줘서 막읍시다’ ‘신변 보장이라든가 자리를 요구하면 그렇게 해줍시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쪽을 설득해놓으면 저쪽이 안 듣고 저쪽을 해놓으면 이쪽이 안 되고…. 그래서 안 됐다고 했어요.”

궁정동 안가에서 간 여성이 200명쯤 되고 웬만한 일류 연예인은 다 불려갔으며 항간에 나돌던 간호장교 이야기,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 등 박 전 대통령의 여성편력에 대한 내용이 세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건 중요한 얘기가 아닌데…. 김재규씨도 '남자는 벨트 아래 얘기를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박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 돌아가신 다음에는 많이 흔들렸거든요. 권력이란 건 10년 이상 잡게 되면 그렇게 되나 봐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 전 부장의 명예회복 문제로 진통을 계속하고 있는데….

“내게도 오라고 했는데 안 갔어요. 책을 쓰고 있는데 나는 이걸 자료로 주겠다고 했어요. 실제로 어제 책을 보냈고요.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와 ‘패륜아의 우발적 범행이다’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데 나는 그 판단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안 변호사는 경기고·서울법대 출신으로 4·19시위 참여 후 민족통일연맹(민통) 활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에도 깊이 가담했다. 사단법인 4월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4·19세대다. 5·16쿠데타 직후 민통 관련자 일제 검거 때 도피하는 바람에 중형을 면한 그는 1980년 5월 10·26사건 대법원 확정판결 후에도 발 빠르게 잠적했다. 함께 변론했던 강신옥 변호사는 그때 연행돼 곤욕을 치렀다. 10·26 관련자들에 대한 변론을 너무 ‘열심히’ 한 괘씸죄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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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과 유럽사민주의

 '제3의 길'과 유럽사민주의의 변천:

독일사민당, 영국노동당, 프랑스사회당, 이탈리아좌파민주당의 비교

 

정병기

2003.04.25 국제정치학회 춘계학술대회, 2003.05.24 맑스코뮤날레 발표논문

맑스코뮤날레 조직위원회 편. 2003. 『Marx Communnale: 지구화 시대 맑스의 현재성』, 제2권. 문화과학사. pp. 50-69 수록l

 

차  례 

1. 서론

2. 현대적 국민정당화와 '제3의 길'

1) 노동자 계급정당의 창당과 이념 및 목적

2) 현대적 국민정당으로의 변천

3. '제3의 길'의 이념과 정책

4. 결론

  

1. 서론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는 언제나 양 극단이 존재했던 것처럼 '제3의 길'을 둘러싼 논쟁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따라서 지구화 시대로 표현되는 오늘날의 세계질서에서도 또 다른 '제3의 길' 논쟁이 일어난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제3의 길' 논쟁도 시대와 체제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 시대적 배경과 체제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과 내용을 달리해 왔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 등장 이후, 과거의 제3의 길 논쟁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또는 맑스주의)간 '체제(system)' 대안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논쟁은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의 '최소국가'와 '복지국가'간 '국가 개입 대안'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1)

물론 각 국이 취하는 '제3의 길'의 구체적인 주장과 내용이 동일하지는 않다. 영국과 독일의 '제3의 길'이 기든스(A. Giddens)의 논리에 입각하여 중간층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치의 한 지류로 빠져들어 간 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길은 현대의 '전통 사민주의'(복지국가와 케인즈주의) 노선에 중간층 강조 전략을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차이는 프랑스 사회당이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을 비판하며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대응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2)

'제3의 길'에 대한 평가도 상이하다. 퍼거(W. A. Perger)가 현재의 '제3의 길'을 '공산당 선언 이후 정치적 이념 시장에서 일어난 최대의 성공적 거사'로 칭송한3) 것과는 달리, 독일 사민당을 비판한 초이너(B. Zeuner)는 '노동운동의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해 간 길'4)이라고 혹평하였다.

이 글은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사민주의 정당들5)의 강령상 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위와 같은 역사적 변천을 추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계급정당으로서의 창당 당시로부터 최근의 '제3의 길'을 선택하기까지 네 정당들의 이념과 정책 및 변화를 몇 가지 주요 기점으로 나누어 정리하여 그 계기와 내용을 비교 분석하면서 최종적으로 '제3의 길'의 본질적 내용을 천착하고 비판할 것이다.

사민주의 정당들은 계급정당으로부터 출발하여 맑스주의 및 자본주의비판과 오랫동안 관련되어 왔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 일반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네 정당들의 비교 분석은 맑스주의 및 자본주의비판과의 관련성 속에서 계급정당의 국민정당6)화 과정에 맞추어 그 내용을 밝히고, 또 국민정당화 이후의 과정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책에 대한 고찰은 지면 관계상 일반적 경향에 한정해 비교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혀 둔다.7)

  

2. 현대적 국민정당화와 '제3의 길'

 4개국 좌파정당들의 변화과정을 단계별로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고 이를 다시 그림으로 표시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창당이념과 노선변화 과정

 

독일 사민당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이탈리아 좌파민주당

창당 과정

·1875, 사회주의노동자당(SAP): 라쌀의 전독일노동자연맹(ADAV)과 맑스주의적 사민주의노동자당(SDAP)이 통합

·1891, 사민당으로 개명

·1900, 노동대표위원회: 영국노총(TUC) 주도에 독립노동당, 사회민주동맹, 페이비언 협회가 참여

·1906, 노동당으로 개명

·1905, '인터내셔널 프랑스지회(SFIO): 맑스·블랑키즘적 사회당(PSdF)과 개혁주의적 사회당(PSF)이 통합

·1969∼74, 사회당으로 개명 후 사회주의자들 통합

·1921, 이탈리아공산당(PCI): 맑스의 혁명적 사회주의

·곧 그람시의 '진지전' 개념 수용

창당 이념과

목적

라쌀주의(국가사회주의)와 맑스주의(혁명적 사회주의)의 절충(사회주의적 목표와 의회주의적 실천)

노동조합의 이익을 국회에서 대변

개혁적 사회주의와 블랑키즘 및 맑스주의의 병존

혁명적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그람시의 진지전 전략 수용

주요

노선변화

과정

① 1891, 에어푸르트 강령으로 맑스주의 강화

② 1890년대∼1차대전(수정주의 논쟁), 맑스주의 포기와 라쌀주의 복귀; 공산주의자 분리

③ 1959, 고데스베르크 강령으로 '친근로자적' 국민정당화

① 1918, 생산·분배·교환수단의 사회화와 산업민주주의(당헌 4조)

② 1950년대, 수정주의(산업민주주의 포기)와 케인즈주의로 국민정당화

③ 1970년대 후반, 케인즈주의까지 포기하는 신자유주의적 경향 노정

① 1920, 혁명적 사회주의자 분리로 개혁주의적 사회주의로 잔존

② 1969∼74, 급진공화파들까지 통합하여 당내 정파 재편, 1970년대는 좌파와 중도파가 주류

③ 1978, 공산당과 결별, 우파세력 강화, 좌파도 우선회

① 1944, 톨리아티의 살레르모 대중정당화 선언

② 1956, 이탈리아식 사회주의 선언(스탈린 노선 비판 시작)

③ 1977∼79, '역사적 타협'으로 '유로코뮤니즘' 본격화

최종 노선 변화와 '제3의 길'

·1989, 베를린 강령으로 현대화 노선 강화

·1998, '신중도' 노선 등장, 녹색당과 연정구성

·1999, 블레어-쉬뢰더 성명으로 현대적 경제정당화

·1994, 블레어의 '신노동당' 노선 등장

·1995, 당헌4조 폐지, 현대적 경제정당화

·1997, 노동당 집권

·1991, 전통 사회주의 이념 포기하고 다원주의화(국민정당화)

·1997, '쇄신좌파' 노선 등장, 공산당 및 녹색당과 연정구성

·1991, 1차 당명개정(PDS)으로 공산주의와 결별

·1996, 중도정당들과 연정구성

·1998, 2차 당명개정(DS)으로 유럽사회주의 (유럽사민주의)공식화

 1) 노동자 계급정당의 창당과 이념 및 목적

 네 나라중 사민주의 계급정당이 가장 먼저 등장한 국가는 독일이다. 라쌀주의적 전독일노동자연맹(ADAV)과 맑스주의적 사민주의노동자당(SDAP)이 합당하여 사회주의노동자당(SAP)이 창당된 것이 1875년이었다. 그후 1891년 에어푸르트(Erfurt) 전당대회를 통해 독일 사민주의 정당은 오늘날의 이름인 사민당(SPD)으로 개명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사민주의 정당이 창당된 것은 독일보다 약 25∼30년 뒤늦은 1900년과 1905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사민주의 정당들도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현재의 당명을 갖게 되었다. 영국 노동당과 사민당은 창당한 지 6년 혹은 16년 뒤에 개명을 했지만, 프랑스 사회당은 오랜 통합과 분열의 역사를 거쳐 창당 후 64년이 지난 1969년에야 오늘날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공산당은 당시 사회당으로부터 분리해 나온 그람시(A. Gramsci) 등에 의해 1921년에 설립되어 일정한 노선변화를 겪은 후 1991년에 좌파민주당(PDS)으로 개명하여 점차 사민주의화되어 왔다.8)

창당 당시의 이념과 목적도 창당 배경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났다. 영국 노동당이 노동조합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과 달리, 독일 사민당과 프랑스 사회당은 노조운동과는 별개로 독자적 노동자정치운동의 성과물로 탄생하였다. 물론 독일 사민당과 프랑스 사회당도 노동자계급정당이라는 속성에 따라 창당 이후 노조와의 관계가 긴밀해졌음은 당연하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당명과 같이 맑스의 혁명적 사회주의(또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창당된 후, 그람시의 전략적 발전에 따른 진지전을 도입하게 되었다. 노조와 정당의 관계에 있어서는 진지전에 의한 그람시적 설정이 양자의 변증법적 관계에 가장 충실한 형태라 할 수 있지만, 이후에는 점차 공산당의 지도를 강조하게 되면서 당에 대한 노조의 종속성이 생겨나기도 했다.9)

영국 노동당은 영국노총 TUC에 의해 '노동조합이 대표하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의회에서 대변'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당되었다. 노동당의 창당에는 물론 기존 노동자계급정당인 독립노동당과 맑스주의적 사회민주동맹10), 그리고 사회주의적 지식인들의 모임인 페이비언 협회도 참여했다. 그러나 노동당내 조직구조와 의사결정구조에는 최근의 변화가 있기까지 단체당원제와 블록투표제에 의해 노조의 권한이 강력하게 보장되어 왔다.

프랑스 사회당과 독일 사민당의 창당에는 노조의 영향력이 작용하지 못한 반면, 이탈리아 공산당을 제외하면 맑스주의자들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컸다. 특히 독일 사민당에서 맑스주의자들의 역할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라쌀주의자들과 대등한 것이었다. 때문에 창당 이념은 맑스주의적 이념과 라쌀주의적 실천의 절충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면밀히 관찰하면, 강력적 이념에 있어서도 맑스주의적 혁명성이 제대로 표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프랑스 사회당의 모태가 되는 사회주의 정당이 출현하게 된 것은 시기적으로 영국 노동당 창당과 비슷하지만, 출현 방식으로는 독일 사민당과 유사하게 기존 두 정당이 통합하는 형태였다. 혁명적 세력으로 분류되는 맑스주의자 쥘 게드(J. Guesde)와 블랑키스트 바이양(E. Vaillant)이 이끌던 '프랑스의 사회주의당(PSdF)'과, 라쌀주의와 유사하게 공화국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는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자인 조레스(J. Jaurès)가 이끌던 '프랑스 사회주의당(PSF)'이 통합하여 탄생한 '인터내셔널 프랑스지회(SFIO)'가 그것이다. 그러나  PSdF 내에 두 계파가 존재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프랑스 사회당은 세 입장의 절충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현대적 국민정당으로의 변천

 네 정당 모두 전반적인 우경화 현상을 보여 왔다. 그러나 창당한 지 약 20년이 지난 후 이탈리아를 제외한 세 나라의 좌파진영에서는 공통적으로 좌파들의 강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각 국의 특수한 정치경제적 배경과 창당이념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회 진출을 통한 정치적 수단에 의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킨다는 목표에 머물렀던 영국 노동당의 1차 노선 변화는 1918년 전당대회에서 당헌 4조의 채택에 의해 이루어졌다. 생산·분배·교환 수단의 사회화와 기업경영에서의 산업민주주의를 당의 강령적 목표로 삼게 된 것이다. 이후 사회화의 현실적 형태인 '국유화'가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복지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노동당의 최종적인 강령 목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급진적 노선 변화는 당시 영국 인민들의 의식변화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노동당은 약 5년 후인 1923년 191석을 얻어 자유당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기도 했으며, 1929년에는 악화되는 경제 위기 속에서 제1당이 되는 데 성공했다.

노동당의 2차 주요 노선변화는 세 차례 총선에서 패배한 1950년대였다. 영국 자본주의의 황금기인 이 시기에는 케인즈식의 재정금융정책으로 소득증대와 완전고용 및 소득재분배를 이룩할 수 있다는 신념이 노동당의 지도부와 이론가들 사이에 팽배했었다. 그래서 독일 수정주의가 독일 자본의 번영기에 등장했던 것과 같이, 국유화나 계획화 및 산업민주주의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수정주의와, 노동당은 더 이상 노동조합의 정당이 아니라 국민의 정당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이 시기에 크게 대두했다.

세 번째 주요 노선변화는 케인즈주의적 신념까지 포기하는 1970년대 후반의 변화이다.  1973년 야당 시절의 노동당은 국민기업청(NEB) 설립을 통한 국유화를 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정책 강령11)을 발표하는 등 일시적 좌선회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 캘러한(J. Callaghan) 노동당정부는 IMF 구제금융을 전후해 임금 억제와 재정지출 삭감 등을 실시함으로써 처음으로 신자유주의적 경향으로 전환하였다.12)

노동당의 최종 노선변화는 1994년 블레어 당수의 취임으로 시작된 '신노동당' 노선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신노동당 노선은 블레어가 '유일한 제3의 길(The Third Way)'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대체로 보수당 정부의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계급정치'가 아닌 '국민정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신노동당 노선은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전통사민주의 노선을 완전히 탈피하였다.13) 1970년대 후반의 신자유주의 경향 시작이 IMF 구제금융에 따른 외부적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면, 1990년대 신노동당 노선의 신자유주의는 집권을 위한 자발적 선택이었다. 1995년 당헌 4조의 폐지는 이러한 노선변화에 따른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영국 노동당의 현대적 국민정당화는 독일 사민당과 같은 '현대적 경제정당화'에 다름 아니었다.

라쌀주의와 맑스주의의 동거로 시작된 독일 사민당의 1차 노선변화는 1891년 에어푸르트(Erfurt) 강령에서 나타났다. 독일 사민당은 창당 시기가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보다 20여년 앞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1차 노선변화도 그만큼 빨랐다. 1차 노선변화의 시기는 사회주의자탄압법이 실패로 드러나고 경제침체에 따른 노동자 생활의 악화를 배경으로 맑스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화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에어푸르트 강령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대안과 혁명적 노동자운동이라는 투쟁목표를 제시하면서 노동자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지를 명확히 제기하였다. 물론 이 강령도 실천 강령에서는 라쌀주의를 그대로 답습했고,14) 이념 부분에서도 변형된 맑스주의15)로 현상했다는 지적이 있다.16) 그렇지만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고타(Gotha) 강령에 비해서는 분명 좌선회의 모습을 띤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곧 이어 시작되어 1차대전까지 이어지는 수정주의 논쟁을 계기로 독일 사민당은 의회주의적 계급정당의 길을 노정하게 된다. 수정주의 논쟁 이후의 사민당은 라쌀주의가 담보하고 있던 온건한 혁명성조차 상실해 간 것이다.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탈당하게 되는 계기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유럽 대륙의 혁명 열기가 사민당 내에서는 수정주의를 강화시킨 반면, 사회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을 강화하여 사민당과 결별하고 독자적 정당을 꾸리는 방향으로 작용한 것이다.17)

한편 1950년대 영국 노동당의 국민정당화 시작과 대비되는 독일 사민당의 변화는 같은 시기인 1959년 고데스베르크(Godesberg) 강령에서 나타났다. 이 강령에서 선언되고 1960년대 중후반 연정참가로 완성된 국민정당 노선은 근본적으로 계급관을 포기한 것으로서 자본주의 질서의 유지를 목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질서를 수용하는 한도에서나마 당시에는 아직 사민당이 '친근로자'18)적 이념과 정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 사민당이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의 속성조차 포기한 것은 1989년 베를린 강령과 1999년 블레어-쉬뢰더 성명을 통해서였다. 당의 사회적 기반을 중간층으로 이동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이념과 정책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중도'와 '제3의 길'로 수용되는 '현대적 국민정당'은 영국 '신노동당' 노선과 마찬가지로 국가 경제의 국제경쟁력을 강조하는 '민족적 경쟁정당'이자 시장 원리를 신봉하는 '현대적 경제정당'을 일컫는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의 1차 노선변화는 영국 노동당과 같은 시기인 1차대전을 전후하여 일어났으며, 당시의 혁명적 열기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공산당의 분리 창당으로 작용하였다. 1920년 투르(Tours) 전당대회를 통해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분리해 나가고, 개혁적 세력만이 블룸(L. Blum)을 중심으로 SFIO에 남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조레스와 블룸의 노선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좌파로부터는 공산주의 세력과 구별짓고 우파로부터는 공화주의 세력과 구별짓게 되었다. 특히 조레스적 관점에서 본다면, 프랑스 사회당의 목적은 무계급사회가 아닌 국민적 합의에 기반한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1920년 이후의 프랑스 사회당은 계급정당의 정체성을 갖지 않았거나 매우 약하게 띠었다고 할 수 있다.19)

프랑스 사회당의 2차 노선변화는 1920년대의 분열과 오랜 정체 기간을 거쳐 사회주의가 프랑스 정치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는 1970년대에 일어났다. 1969년 알포르빌(Alfortville) 전당대회를 통해 기존의 SFIO가 사회당으로 탈바꿈한 것이 그 전조였다. 이 사회당은 1971년 에피네(Epinay) 전당대회를 거쳐 1974년에는 다양한 사회주의 정당들을 통합하고 중도파를 이끄는 미테랑(F. Mitterrand)을 중심으로 커다란 성격 변화를 겪게 되었다. 새로운 통합 사회당의 정파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테랑의 중도파 외에, 좌파로는 슈벤느망(J. P. Chevènement)을 중심으로 한 맑스주의 연구집단 CERES(Centre d'études, de recherches et d'éducations socialistes)가 있었고, 우파로는 제3공화국 급진공화당(Parti Radical) 세력을 이끌던 로카르(M. Rocard)의 급진공화파가 있었다.20)

일부 평자들이 에피네 전당대회를 사회주의에 대한 급진주의의 승리로 평가할 정도로, 급진공화파의 합류는 1920년 이래 사회당 노선의 중대한 변화를 의미했다.21) 대외적으로도 사회당은 공산주의와 급진공화주의 사이에서 후자에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사회당내 세력관계의 변화는 물론 세 정파간 연합의 결과였다. 그러나 당권을 장악한 미테랑은 사회주의자이기 이전에 공화주의자였으며, 당은 그에게 권력의 장악과 행사를 위한 도구였다. '인간의 권리에 기반한 사회주의'를 강조하는 미테랑 계파의 중심된 가치는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결합, 특권의 해소 등이었다.22)

이러한 변화는 사회당이 공산당에 비해 낮은 지지율을 얻은 1978년 선거를 계기로 나타나는 3차 노선변경에 직접 반영되었다. 좌파진영 대변에 위기를 느끼게 된 사회당 내에서는 공산당과 연대를 주도했던 좌파인 CERES 그룹이 약화되고 우파인 로카르 계파가 강화되었다. 로카르는 공산당과의 공동강령이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이며 중앙집중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반자코뱅적이고, 지방분권적, 자주관리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경제정책적으로는 긴축정책, 인플레이션 억제, 유럽과 세계에 대한 개방화를 주장하였다.23)

그러나 사회주의 개념의 수정은 우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슈벤느망도 1984년 '현대 공화국(République moderne)'이라는 새로운 정치집단을 만들고 CERES 그룹 명칭을 '사회주의와 공화국(Socialisme et République)'으로 변경하였다. 이어 1987년 릴(Lille) 전당대회에서의 슈벤느망의 주장에서 나타났듯이, 이들에게도 이제는 사회주의가 먼 미래의 일로 치부되고 현재적·현실적으로는 공화국만이 쟁점이 된다는 것이다.24) 좌우를 막론한 당내 정파들의 전반적 우경화는 1991년 이후의 최종적 노선변화를 예고했다.

1991년 임시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당 기획안은 10년 동안을 주도했던 기존 원칙과의 단절을 명확히 했다.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도덕과 방법'이라는 텍스트의 한 절에서 사회주의는 하나의 '도덕' 또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정의되었다. 곧, 하나의 제시된 길로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유, 평등, 사회적 정의, 연대, 관용, 책임 등 다양한 가치들을 배제하지 않는 다원주의성을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국 노동당이 1995년 이후 '현대적 경제정당화'의 의미에서 현대적 국민정당화의 길을 완성했고, 독일 사민당도 블레어-쉬뢰더 성명을 계기로 영국 노동당의 뒤를 밟아간 것과 달리, 프랑스 사회당은 국민정당화의 시기는 빨랐지만 최종적인 노선변화에 있어서도 '친근로자성'을 유지하는 국민정당 노선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의 주요 노선변화도 크게 네 차례로 나타난다. 1차 노선변화는 1944년 톨리아티(P. Togliatti)가 귀국한 후 살레르모(Salermo)에서 대중정당(massparty)화를 선언하면서 정치전략과 사회전략을 구분한 것이 계기였다. 곧, 사회전략 면에서는 반독점과 산업노동자에 핵심을 두지만, 정치전략 면에서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반파시즘 투쟁을 중심으로 여러 진보정당들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정치전략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계급정당 노선을 고수하되 당의 구조와 전술을 개방하려는 노력이었다.

2차 노선변화는 영국 노동당과 유사한 시기인 1956년 이탈리아 공산당 8차 전당대회에서 시작되었다. 2차 노선변화 역시 톨리아티의 주도로 시작된 것이었는데, 주요 내용은 탈스탈린화를 통해 "사회주의로의 이탈리아식 길(via italiana al socialismo)" 노선을 정립한 것이다. 2차 노선변화는 1차 노선변화와 달리 유로코뮤니즘의 초석이 되는 한편, 1980년대에까지 이르는 장기적 변화의 계기로 직접 작용하기도 하였다.

3차 노선변화는 '유로코뮤니즘'의 본격화로 알려진 1970년대 말 베를링게르(E. Berlinguer)당수의 '역사적 타협(compromesso historico)'이다. 중산층과 중도세력과의 동맹을 목표로 하는 '역사적 타협' 전략은 1977∼79년간 의회다수 참가의 형태로 정권에 참여하게 된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공산당이 의회내 정부불신임 투표를 포기하는 댓가로 기민당 정부의 긴축정책에 공산당의 사회개혁 정책을 수용한다는 정책연립의 형태였다. 이 전략은 유로코뮤니즘의 일환으로서 "소비에트 사회주의와 자유방임 자본주의간 제3의 길"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유로코뮤니즘의 '제3의 길'은 사민주의적 길과는 달리 아직 맑스주의와 레닌주의 및 그람시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않았다.25)

'역사적 타협'에 대해 이탈리아 노조들도 양보노선으로 선회하여 공산·사회계 정파노조인 노동총동맹(CGIL)이 제안한 EUR노선(로마의 회담장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으로 일컬어지는 전략을 통해 정부의 긴축정책을 수용하고 임금인상투쟁을 자제하는 대신 공산당과 개혁세력의 개혁정책을 기대하고 지원했다.26)

그러나 이 '역사적 타협' 전략은 기민당 당수 모로(A. Moro)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기민당 우파에 의한 권력장악으로 인해 지속될 수 없었고, 그에 따라 공산당내 지도부도 약화되었다.27) 이러한 지도부 약화는 1987년의 선거실패와 소련·동구의 변화라는 악재를 만나 개혁파들의 더욱 강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여성해방에 대한 관심 증대, 환경정책 중시, 선거제도를 처음으로 이슈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과 친밀한 관계 강화 등, 두 차례의 당명개정을 통해 최근 '제3의 길'로의 노선변화로 이어지는 일정한 강령변화가 이루어졌다.28)

1989년 18차 전당대회에서는 '민주주의'와 '강력한 개혁주의(reformismo forte)'를 전략목표로 설정하고 본격적인 당명개정 논의를 시작했으며, 1991년에는 '커다란 현대적 개혁정당'으로 자기위상을 정리하고 '좌파들의 민주주의 정당(PDS: Partito Democratico della Sinistra)'이라는 색깔 없는 당명을 선택했다.29) 1차 당명개정은 아직 사민주의화의 완성은 아니지만,사민주의화의 길로 연결되는 탈공산주의화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탈공산주의화의 길도 국민정당화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며, 이러한 국민정당화의 과정은 '좌파민주주의자(DS)'로의 2차 개명과 중도 포용 노선의 강화로 이어진 선거전략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30) 그러나 독일 사민당이나 영국 노동당과 달리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을 벗어나지는 않았으며, 프랑스 사회당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전통적' 사민주의 노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위 그림 참조).

  

3. '제3의 길'의 이념과 정책

 '급진중도'로 표상되는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은 복지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전략으로서, 사회민주주의가 취해야 할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당은 '권리는 반드시 책임을 수반한다'는 의미에서 '포지티브 복지' 또는 '새로운 혼합경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당 차원의 '제3의 길'을 의미하는 '신노동당' 이념은 1995년 개정된 당헌 4조에 잘 나타난다. 즉, 노동당은 '민주적 사회주의당'으로서, "권력과 부의 기회가 소수의 손에 있지 않고 다수의 손에 있"으며, "권리를 향유하면서도 의무를 수행하고", "연대와 관용과 존경의 정신으로 자유롭게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31) 이 때 '신노동당'이 규정하는 사회적 정의는 시민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가리키되, 경제적 효율성을 저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평등이란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 각자가 자기의 잠재력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그러나 실질적 기회, 시민적 책임,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노동당'의 강조는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초극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특수한' 정치철학을 형성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만약 경기가 나빠져 실업률이 상승한다면, 조세나 재정적자의 증가를 반대하는 '제3의 길' 노선은 힘을 잃고, 결국 전통적인 유럽사민주의 정책(국유화나 재정적자 증가에 의한 경기부양책)이나 신자유주의 정책(건전 재정의 유지로 실업을 증가시키는 정책)으로 휩쓸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결국 신노동당의 '제3의 길'은 매우 애매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평등'에 대해 '제3의 길'은 기회의 평등이나 개인의 책임을 중시함으로써, 결과로 나타나는 불평등을 사실상 인정한다. '지구화'에 대해서도 불가역적 과정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야기하는 온갖 폐해를 시정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지구화와 타협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신중도'로 불리는 독일 사민당의 '제3의 길'은 1989년 베를린 강령에서 시작되어 1999년 블레어-쉬뢰더 성명으로 완성된다. 우선 베를린 강령은 '사회적 정의'를 "재산과 소득 및 권력의 분배에서 더 많은 평등을 요구"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32) 그러나 이 강령에서 언급되는 '사회적 정의'도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목표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추상적 규범으로만 제시된 것이다. 따라서 영국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그 '정의'가 요구하는 '더 많은 평등'도 엄격히 결과적 평등의 개념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기회와 출발의 평등으로 전환될 여지가 있다.

1960년대 말 집권기에 평화정당의 성격을 획득한 이후 경제적 분배와 평등을 넘어 탈물질주의적 가치들로 무장한 현대 사회의 새로운 문제점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측면에서 이 강령은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강령의 문제점은 경제적 사안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치들에 있어서조차 경쟁 및 시장의 개념과 타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통일 이후 1990년대에는 이러한 정의 개념에 대한 언급조차 줄어들다가 1998년 연방의회선거 당시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33) 추상적 규범으로 제시된 '민주적 사회주의'가 정책적 실천으로 이어지면서 일정한 모순을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블레어-쉬뢰더 성명은 베를린 강령과 현실 정부정책간의 괴리를 후자에 맞추는 방향으로 해소한 것으로서 '현대적 경제정당'화로의 노선변화를 완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른바 '현대적 사민주의자들'은 '제3의 길'로 포장된 '신중도'를 "21세기를 위한 현대적 통치"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그 실질적 내용은 경제적 지구화를 옹호하고, 재정안정과 조세부담경감이라는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반면,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라인 자본주의(rheinischer Kapitalismus)'와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으로부터 사민당을 단절시키고자 하는 것이다.34)

독일 사민당과 적녹연정의 '제3의 길'은 명백히 고전적 분배정책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곧 분배의 결과가 아니라, 부 자체의 증가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도 증가한다는 이른바 '엘리베이트 효과'를 강조한다는 것이다.35) 그 전략은 성장과 경쟁력이 될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경제력과 시장의 역할에 의지하고 그 강화와 확장을 위해 또 다른 형태의 물신화된 "권력환상(Machtillusion)"36)으로 현상한다.

한편 조스팽 사회당 정권에 의한 복지국가의 개혁은 상당부분 1984년 이래 사회당이 추진해 온 복지국가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회당내 다수 중도계열을 형성하고 있는 미테랑 계열의 조스팽은 사회당의 좌우 편향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중간적인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회당 자체가 이미 상당부분 우경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중도의 길 역시 우경화된 중도임에는 틀림없다.

프랑스 사회당이 표방하는 '쇄신좌파'는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당내 우파들이 주장해온 공화주의 강조를 좇아간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당의 정체성은 사회주의적 조치를 통해 유지되기보다는 '공화주의적 연대'를 통해 재형성되고 있었고, 조스팽 정부의 정책에서도 그 점은 지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과 독일의 '제3의 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전통적 사회주의의 맥락을 덜 벗어났다는 평가도 가능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공화주의'라는 프랑스식 개혁 사회주의의 가치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지개 연정의 구체적인 정책도 공산당의 연정참여라는 요소를 차치하면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의 수렴이라는 보다 넓은 범주의 일반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곧 부유층에 대한 세금 증가를 비롯한 소득 불평등 감소 정책이 전통적 좌파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음이 인정되지만, 기업의 사회적 부담금을 낮추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연장선상에 놓인 조치들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탈리아 좌파민주당이 주장하는 '유럽사회주의'는 1차 당명개정 당시 민주집중제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고(실질적으로는 이미 베를링게르 사후 1984년에 포기했다), 자본주의 극복을 언급하지 않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제는 사회전략적으로도 산업노동자가 사회구조상 중심이 아니라는 입장으로 전환하였으며, 공정하고 효율적인 공공행정과 깨끗한 환경으로 대표되는 'better services'라는 특별 이슈로 '시민'에게 다가가고자 한다.37)

유럽 사민주의 진영에 가장 늦게 합류하여 아직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의 영역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이탈리아 좌파민주당도 이제는 수권정당의 이미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좌파민주당이 진단하는 이탈리아의 위기는 '도덕적, 사회적, 제도적 위기'로서 '지배계급의 혁신과 민주체제의 재구축'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좌파민주당이 원하는 수권정당의 이미지는 이러한 위기를 '좌파의 막강한 힘과 현 정부에 대한 신뢰할 만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개혁정당'이다.38)

그렇지만 이탈리아 중도-좌파 정부의 정책적 내용은 유럽통화동맹 가입을 위한 긴축재정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색채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하원에서의 절대다수 의석 확보 실패로 인해 재건공산당의 지지를 받아야 했던 집권연립(월계수동맹 l'Ulivo)은 재건공산당이 제시한 주35시간제 도입, 남부빈곤문제 해결, 적극적 실업해소정책을 유럽통화동맹 가입 후에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2년후 유럽통화동맹 가입에 성공한 후에도 재건공산당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에 따라 1차 월계수동맹 내각은 붕괴되었다. 뿐만 아니라 연정 지지를 두고 재건공산당이 분열함으로써 새로운 연정 수립에 성공한 2, 3차 월계수동맹 내각도 적극적 사회경제 정책의 실시에는 소극적이었다.

  

4. 결론

 독일 사민당,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과 이탈리아 좌파민주당은 모두 창당 당시에는 노동자계급정당이라는 정체성을 가졌었다. 그러나 노조가 자신의 정치적 대변을 위해 만든 정당인 영국 노동당은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노동자계급의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확보하고 향상시킨다는 의미에 한정된 계급정당이었다. 독일의 사민당도 처음부터 혁명적 사회주의와 구별되는 국가사회주의적 전통을 가졌다는 점에서 영국 노동당과 유사하다. 프랑스 사회당에서도 공화주의적 성격을 띤 개혁주의적 사회주의파가 창당 때부터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공산당의 분리 건설 이후에는 주도 세력이 되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탈계급적인 '국민정당화'의 가능성을 배태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공산당으로 출발한 이탈리아 좌파민주당은 그람시적 전략의 변화 개연성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혁명적 계급정당의 원칙에 충실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신노동당'의 '제3의 길'은 자본의 세계화 흐름에 대해 현상타파적이 아니라 현상추수적이라는 점에서 보수당의 신자유주의를 계승하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독일 사민당의 '신중도'도 계급정당과 국민정당 사이에서 선택된 '제3의 길'이었던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을 넘어 부르조아적 국민정당과의 또다른 '제3의 길'인 '현대적 경제정당화'를 선택함으로써 역시 우파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이어받았다. 특히 블레어-쉬뢰더 공동성명 이후 두 정당의 차이점은 더욱 줄어들어, 대미관계 등 대외정책상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그와 달리 프랑스 사회당은 공산당과의 끊임없는 경쟁으로 인해 국민정당화의 길은 빨랐지만, 최종적 노선변화에서도 '현대적 경제정당'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으며 아직도 상대적으로 친근로자성과 공산당과의 연대가능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탈리아 좌파민주당도 '좌파'의 이미지를 고수하면서 현대 사민주의의 전통적 정책을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중도-)좌파 정부가 실행하는 정책들도 신자유주의적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이 '제3의 길'은 여러 측면에서 나라와 시기별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한편, 영국과 독일, 프랑스와 이탈리아라는 두 국가집단별로 상이하게 현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동시성의 측면에서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이념의 수준이나 획기적 정책의 고안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기존의 좌파적 정체성을 상실해 간 길이라는 일반성을 띠었다. 현대 사민주의의 전통적 케인즈주의 정책 외에는 세계화 시기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대안 마련에 실패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정책을 답습해 간 결과이다. 따라서 '제3의 길'은 사민주의라는 '현대적 국민정당'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정치이며, 현대 정당정치 지형에서 좌우 개념은 '친근로자적' 국민정당과 부르주아적 국민정당의 경쟁지형으로 현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제3의 길'로 포장된 유럽 사민주의의 최근 노선도 신자유주의 시기에 합리화의 수혜자들과 사회적 신흥계층들과 같은 새로운 "지구화 계급(globale Klasse)"39)을 위한 것으로서, '아래로부터 위로의 재분배'를 통해 사각지대나 사회저변층들을 더욱 벼랑으로 몰고 가는 신자유주의 기획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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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주>

1) Gerhard Hirscher and Roland Sturm, ed., Die Strategie des 'Dritten Weges': Legitimation und Praxis sozialdemokratischer Regierungspolitik (München: Olzog, 2001), p. 9 참조.

2) Frankfurter Rundschau, 1999. 10. 28.

3) Die Zeit, 1999. 9. 16.

4) Bodo Zeuner, "Der Bruch der Sozialdemokraten mit der Arbeiterbewegung: Die Konsequenzen für die Gewerkschaften," in Klaus Dörre, Leo Panitch and Bodo Zeuner, et al., Die Strategie der 'Neuen Mitte': Verabschiedet sich die moderne Sozialdemokratie als Reformpartei? (Hamburg: VSA, 1999), p. 131.

5) 물론 이탈리아 좌파민주당의 경우는 공산당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세 국가의 사민주의 정당들과 사뭇 역사를 달리한다. 그러나 이탈리아 좌파민주당도 1991년 이후 사민주의를 표방하는 만큼 사민주의 정당들과의 비교가능성이 충분하며, 특히 '제3의 길'과 관련된 논의에서는 더 이상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6) 일반적으로 '국민정당(Volkspartei)'은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계급정당의 대당 개념으로서,  ① 당원과 지지자의 사회구조적 성격이 사회 전체의 계층구조와 상당할 정도로 일치하고, ② 수평적·수직적 당조직구조에서 사회의 이해관계 다원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이해관계의 균형과 갈등의 해소가 민주적으로 규정되고 운영되며, ③ 당의 정책은 국민 일반의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당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정당들이 각계 각층의 지지 획득을 위해 주장하는 내용일 뿐, 현실적으로는 ① 계급 화해와 국민 통합에 기여하는 한편, ② 당내부적으로 당원구조를 은폐하고 당외부적으로 사회적 기반(지지자)구조를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고 비판된다. Alf Mintzel, Die Volkspartei: Typus und Wirklichkeit. Ein Lehrbuch (Opladen: Westdeutscher Verlag, 1984), p. 24 참조. 이 글에서는 '국민정당'을 강령적·조직적 측면에서 탈계급적인 정당을 지칭하는 개념에 한정하여 사용한다. 한편 당조직이 대중에게 개방되어 가입서를 제출하고 일정한 당비를 내는 당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정당을 지칭하는 '대중정당(massparty)'은 '간부정당'의 대당으로서, 국민정당과는 구분의 차원을 달리하는 개념이다. Maurice Duverger, Political Parties (London: Methuen & Co., Ltd., 1978) 참조.

7) 영국과 프랑스에 관한 많은 부분은 김수행, 안삼환, 홍태영과 함께 수행한 연구의 결과인 근간 단행본『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 영국,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서울대 출판사)와 정병기, 「신자유주의와 '제3의 길': 영국, 독일, 프랑스의 비교」, 『현장에서 미래를』, 제83호, 2003년 1월 참조.

8) 여기에서 영국의 사민당과 이탈리아의 사회당 및 사민당은 논외로 한다.

9) 정병기, 「독일과 이탈리아의 노조-좌파정당 관계 비교: 독일 사민당(SPD)과 노총(DGB), 이탈리아 좌파민주당(DS)과 노동총동맹(CGIL)」,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편), 『현장과 이론 3』, 콜로키움 발표 논문집, 도서출판 현장에서 미래를, 2001,

10) 맑스주의자 하인드만이 1881년 결성한 '민주연합(Democratic Federation)'이 1884년 개명한 조직으로, 이후 '영국공산당(Communist Party of the Great Britain)'으로 성장했다. Malcolm Pearce and Geoffrey Stewart, British Political History 1867∼2001: Democracy and Decline (London: Routledge, 2002). p. 240.

11) 고세훈, 『영국노동당사: 한 노동운동의 정치화 이야기』, 나남, 1999. 366∼384쪽 참조.

12) 김수행, 「영국 노동당 100년의 역사」, 『다리』, 2000년 여름과 Geoffrey Foote, The Labour Party's Political Thought, 3rd edition (London: Macmillan, 1997). 참조.

13) Eric Hobsbawm, Ken Gill, Tony benn, et al., The Forward March of Labour Halted? (London: NLB, 1981) 참조.

14) 박호성, 『노동운동과 민족운동』, 역사비평사, 1994, 63∼64쪽; Hermann Oncken, Lassalle: Eine politische Bibliographie (Stuttgart und Berlin: Deutsche Verlagsanstalt, 1923), p. 526.

15) Carlo Schmid, Europa und die Macht des Geites, Bd. 2 (Berlin, München und Wien: Scherz, 1973), p. 280.

16) 맑스주의적 정당으로 건설된 사민주의노동자당 강령에서부터 이미 라쌀주의의 영향은 근본적으로 나타났으며, 현대 사민당에 이르기까지 라쌀주의의 의미는 실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강령적인 면에서도 결코 포기되지 않고 있다. 독일 사민주의 정치의 변화는 맑스주의의 전통에서 혁명적 성격을 수정해 온 결과가 아니라, 라쌀의 전통에 맑스주의를 이론적으로 접목하려던 과정이 실패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병기, 「라쌀의 국가관과 독일사민당에 대한 라쌀주의의 영향과 의미」, 『한국정치학회보』, 제36집, 2002년 여름 참조.

17) 이와 반대로 영국에서는 노동당 내의 좌파 세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8) '근로자'라는 표현은 일제의 잔재이자 군사정권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탈각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용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서 '일자리수요자(Arbeitnehmer)'가 있다. 다른 대안이 없는 한, 여기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용어로서 '근로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19) Alain Bergounioux and Bernard Manin, Le régime social-démocrate (Paris: Puf, 1989) 참조.

20) 통합 이후에도 사회당은 일정한 기간 동안 개혁적 사회주의 노선이 주류를 형성했지만, CERES 그룹의 주도 아래 유로코뮤니즘적 공산당--1976년 프랑스 공산당도 22차 전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폐기하였다(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와 독재』, 최인락 역, 연구사, 1988 참조)--과 연합하여 '공동강령'을 채택하기도 했다(Fernando Claudin, Eurocommunism and socialism (London: NLB, 1978), pp. 65∼67).

21) Hugues Portelli, "L'intérgration du Parti socialiste à la Ve République," in Olivier Duhamel and Jean-Luc Parodi, ed., La Constitution de la Ve République (Paris: Presses de la FNSP, 1988).

22) Alain Bergounioux and Gérard Grunberg, Le long remords du pouvoir. Le Parti socialiste français 1905∼1992 (Paris: Fayard, 1992), p. 259.

23) Michel Rocard, Parler vrai (Paris: Seuil, 1979), p. 117이하.

24) 물론 공화국과 사회주의의 연관성과 관련된 슈벤느망의 주장도 공화국의 확대를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는 조레스 이래 지속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25) Erhard Brütting, ed., Italien-Lexikon (Berlin: ESV, 1997); Santiago Carrillo, 'Eurokommunismus' und der Staat (Hamburg and Berlin: VSA, 1977) 참조.

26) 정병기 (2001), 앞의 글, 55∼77쪽 참조.

27) 그에 따라 1984년부터 베를링게르(E. Berlinguer)의 뒤를 이은 나타(A. Natta) 당수 시절에는 지도부의 약화로 인해 세 파간 다수책임제가 등장하였다. 당시 공산당의 주요 세 정파는 중도파 베를링게르계(berlingueriani), 좌파 잉그라오계(ingaiani), 당개혁파 나폴리타노계(napolitaniani)였다(Gianfranco Pasquino, "Programmatic Renewal, and Much More: From the PCI to the PDS," West European Politics, vol. 16 (1993), p. 158).

28) Ibid., pp. 167∼170.

29) 20차 전당대회에서 당권파이자 개혁파인 오케토(A. Occhetto)/나폴리타노(G. Napolitano)계가 발안한 당명개정안에 대해(67.4% 찬성) 네오그람시언인 잉그라오계(ingraiani)와 스탈린주의자들인 코수타계(cossuttiani)가 반대하였다(26.6% 반대). 그러나 당명개정이 확정되자 잉그라오계는 잔류했으나 코수타계는 외곽의 좌파들과 결합하여 재건공산당(공산주의재건당 RC)을 창당하였다. 잉그라오계도 잉그라오(P. Ingrao)가 은퇴한 후에는 대부분 재건공산당으로 이적하였다(Piero Ignazi, Dal Pci al Pds (Bologna: Il Mulino, 1992), p. 133)

30) 1차 개명은 탈당한 정통 공산주의자들이 다른 좌익 소수파들과 연합하여 재건공산당(RC)을 창당함으로써 기존 노선과의 단절이 뚜렷했던 것과 달리, 2차 개명은 중도-좌파 정권(월계수 연맹) 출범후 부총리로서 좌파민주당내 월계수파를 이끌던 벨트로니(W. Veltroni)와 당수로서 다수파 지도자인 달레마(M. D'Alema) 사이의 노선 논쟁과 주도권 다툼의 결과일 뿐, 노선의 변화나 '정당'으로서의 조직변화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벨트로니가 월계수연맹을 미국의 민주당과 같은 느슨한 형태의 통합된 정당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반면, 달레마는 월계수연맹과 무관하게 좌파민주당을 중북부 유럽 좌파들의 특성들을 소화하며 중도적 좌파들까지 포함하는 범좌파 연합체로 재조직할 것을 구상했었다. 그러나 달레마의 보다 궁극적 목적은 강령노선의 변화보다, 월계수연맹이 정부를 이끌어 가는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강력한 수권 주체를 세우고, 더 나아가 국내와 전유럽 좌파 진영에서 입지를 높여나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2차개명에서 '당'의 생략은 실질적 의미를 갖지 못하므로 DS도 '좌파민주당'으로 번역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2차개명과 관련된 논쟁과 정파간 갈등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Partito Democratico della Sinistra, Cristiano sociali, Comunisti unitari, Repubblicani per la sinistra democratica and Socialisti laburisti, eds., Un nuovo Partito della Sinistra: Documenti e materiali (Roma: Salemi Pro. Edit., 1997); Rinaldo Vignati, "Il leader e il partito. Il Pds dopo il II congresso," in Luciano Bardi and Martin Rhodes, eds. Politica in Italia: I fatti dell'anno e le interpretazioni, edizione 98 (Bologna: Il Mulino, 1998); Valdo Spini, La rosa e l'Ulivo: Per il nuovo partito del socialismo europeo in Italia (Milano: Baldini and Castoldi, 1998).

31) Pearce and Stewart, op. cit., p. 569.

32) Vorstand der SPD, ed., Grundsatzprogramm der Sozialdemokratischen Partei Deutschlands (Bonn, 1999).

33) Uwe Jun, "Die Transformation der Sozialdemokratie: Der Dritte Weg, New Labour und die SPD," Zeitschrift für Politikwissenschaft, vol. 10 (2000), Nr. 4, p. 1518.

34) Birgit Mahnkopf, "Formel 1 der neuen Sozialdemokratie: Gerechtigkeit durch Ungleichheit. Zur Neuinterpretation der sozialen Frage im globalen Kapitalismus," Prokla: Zeitschrift für kritische Sozialwissenschaft, vol. 30 (2000), Nr. 4, pp. 489∼491.

35) Klaus Dörre, "Die SPD in der Zerreißprobe: Auf dem 'Dritten Weg'," in Dörre, Panitch and Zeuner, et. al., op. cit., p. 10.

36) Wolf-Dieter Narr, "Gegenwart und Zukunft einer Illusion: Rotgrün und die Möglichkeiten gegenwärtiger Politik," Zeitschrift für kritische Sozialwissenschaft, vol. 29 (1999), Nr. 3, p. 374.

37) Pasquino, op. cit., pp. 171∼172; Giuseppe Mammanella, "Il partito Comunista Italiano," in Gianfranco Pasquino. La politica italiana: Dizionario critico 1945∼1995 (Roma and Bari: Laterza, 1995), pp. 287∼309.

38) Spini, op. cit. 참조.

39) Joachim Bischoff and Richard Detje, "Widersprüche der 'Neuen Mitte': Strategie zur Bändigung des Kapitalismus?," in Dörre, Panitch and Zeuner, et. al., op. cit., pp. 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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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의 노동관

노동 거부와 자기가치화

-노동에 대한 자율주의의 관점 정립을 위한 몇 가지 생각-

문제설정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지구적 투쟁의 다양성,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서의 편차들
로스엔젤레스: 흑인, 유색인 노동자들-시위, 약탈과 방화
사빠띠스따: 원주민 농민들 --봉기
프랑스: 실업자,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 시위
한국: 조직된 대중 노동자--파업
인도네시아: 학생, 시민 --시위, 약탈과 방화

1.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견해

1.1.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과 그 한계
1.1.1.인간의 삶에서 생산 활동을 특권화, 여가까지 재생산으로 환원,

"인간은 의식, 종교, 또는 그가 무언가를 의욕한다는 점에 의해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들 자신과 동물을 구별짓기 시작한 것은 ...그들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면서부터였다."(청년사,42)

1.1.2.생산의 노동으로의 환원--헤겔에 의해 정의된 노동 개념의 계승--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의 연속성(독일 이데올로기)

위의 정의에는 동물로부터의 인간의 구별, 혹은 인간(정신)의 현상학이라는 헤겔적 문제의식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1.1.3.삶의 노동으로의 환원에 의한 소외보다 노동의 소외를 문제로 설정, 임금 노동, 노동 일반이 아니라 노동의 특정 형태에 대한 비판.(경철수고)

"노동 대상의 소외 속에는 단지 노동 활동 자체 속에서의 소외, 외화가 요약되어 있을 뿐이다.---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다.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즉 강제 노동이다."(박종철, 1, 75-6)

1.1.4.생산수단, 특히 노동 수단의 발전을 역사의 진보와 동일시함. 자동장치 노동수단automaton의 형성을 코뮤니즘의 물적 전제조건으로 간주(그룬트리세)--노동자계급에 의한 생산수단 통제를 혁명의 핵심 과제로 설정하는 것은 이 논리의 연장.

1.1.5.코뮤니즘을 '노동이 삶의 제일차적 욕구로 되는 사회'(고타강령 비판)로 정의하는 것은 자동장치에 의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임금 노동, 강제된 노동에서 벗어날 때 과연 노동이 삶의 제일차적 욕구로 될 것인가? 그것은 삶의 다양성 속에 해소되어 삶의 욕구의 비특권적 일부로 되는 것이 아닌가?

1.1.6.강제로서의 노동과 욕구로서의 노동 사이에서: 노동에 대한 부정적 정의(벗어나야할 것, 기계화되어야 할 것, 강제로서의 노동)와 긍정적 정의(욕구로서의 노동) 사이에서 갈등

1.1.7.마르크스의 변증법은 노동 규정에 있어서는 프루동적 색채를 띤다. 노동의 악한 측면을 버리고 선한 측면을 취하라. 노동의 강제성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노동하게 하라. 그는 노동 자체를 거부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으며 노동을 인간의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활동으로 전화시킬 조건과 방법을 연구한다. 러시아 미르 공동체를 이행의 동력으로 인식하게 되는 말년의 시기는 그의 혁명 이론에서는 하나의 '창조적 예외'를 구성한다.

2. 엥겔스, 제2인터내셔널, 스딸린주의의 노동 개념

2.1.엥겔스

노동을 인류의 류적 본질로 사고. 자본주의적 노동과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의 노동을 구별치 않음. 그리고 자연을 인간에 의한 지배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노동을 자연 지배의 과정으로 봄.

"노동과 더불어 시작된 자연에 대한 지배는 새로운 진보가 있을 때마다 인간의 시야를 확장시켰다. ....노동으로부터 그리고 노동을 가지고 언어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이 유일하게 정당한 것..."(원숭이의 인간화에서 노동이 한 역할, 박종철, 5, 382)

2.2.고타강령

1875년 5월 23일에서 27일까지 고타에서 열린 라쌀레파와 아이제나흐파의 통합대회에서 제안된 독일노동자당 강령 제1조: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현 사회에서 노동 수단은 자본가계급의 독점물이다...그에 따른 노동자 계급의 예속은 모든 형태의 빈곤과 노예상태의 원인이다"(프롤레타리아 당 강령, 68)

<마르크스의 고타강령 비판>

고타강령에 격분한 마르크스는 '비판'에서 격렬한 어조로 강령을 비판한다: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의 원천이다. (그리고 물질적 부는 바로 이 사용가치로 이루어진다.) 노동 자체는 자연력의 하나인 인간 노동력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노동이 그것에 속하는 대상과 도구와 더불어 수행된다는 점을 고려하는 한 문구는 옳다. 사회주의적 강령은 이러한 조건들을 묵살하는 부르주아적 말투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모든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의 첫 번째 원천인 자연에 대해 처음부터 그 소유자로서 관계를 맺는 한에서만, 즉 자연을 인간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한에서만 인간의 노동은 사용가치의 원천이 되며 따라서 부의 원천도 된다. 부르주아들이 노동에 초자연적인 창조력을 부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거름, 저작선, 232)[마르크스는 여기서 '물질적 부, 사용가치, 노동' 전체를 특정의 역사적 조건[인간이 자연에 소유자로서 관계를 맺는 역사적 조건]을 중심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엥겔스에게서 인류의 유적 본질로 확정된 자연 지배력으로서의 노동은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해되며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된다. 더 깊이 생각해 볼 것.]

2.3.에어푸르트 강령,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1891년 7월 독일 사회민주당 강령 초안은, 쟁점을 회피하면서 제1조를 노동수단의 소유문제, 특히 그것의 독점 문제에서 출발시킨다. "노동자가 노동수단으로부터 분리되고 그것을 사회 성원 중의 일부가 독점하게 됨으로써 사회는 노동계급과 유산계급의 두 계급으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계급투쟁을 분배의 문제로 사고하게 한다.

그리고 경제의 객관적 과정들에 대한 숭배에 빠지는 이후의 사회민주주의. 이른바 노동 숭배의 경제주의의 대두.

2.4.레닌의 노동개념

테일러주의에 대한 긍정. 자동화, 전력화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2.5.USSR 헌법 초안

"USSR의 새로운 헌법 초안의 주요한 기초는 그 주요한 기둥이 이미 성취되고 실현된 것들인 사회주의 원칙이다: 토지, 임야, 공장, 작업소, 그리고 그 밖의 생산 도구 및 수단의 사회주의적 소유; 착취 및 착취 계급들의 폐지; 대다수의 빈곤 및 소수의 사치의 폐지; 실업의 폐지; '노동하지 않는 자는 또한 먹을 수도 없다'는 정식에 따라 모든 능력있는 시민들의 의무적이고 명예로운 의무로서의 노동; 노동할 권리 즉 모든 시민들이 고용을 보장받을 권리; 쉬고 여가를 즐길 권리; 교욱의 권리 등등."(스탈린 선집, 2, 101) 마르크스는 노동을 모든 부의 원천으로 정의하는 고타강령의 논리적 결론은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추론한다:"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므로 사회 속의 그 어느 누구도 노동 생산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부를 얻을 수가 없다. 따라서 스스로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노동에 의해 사는 것이며 그의 문화 또한 남의 노동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고타강령은 마르크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변경없이 통과되었었다.

2.6.반스딸린주의적 급진 좌익의 노동 개념: 노동자 통제

스딸린주의나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급진적 좌익들 역시 '노동'의 역사적 특이성보다는 그것의 역사적 보편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노동의 특권화. 많은 역사적 노동자평의회들 역시 노동의 계획적 조직화의 기구로 전화된다. "생산 과정에 대한 노동자 통제에의 명령하달자의 의존과 임금 노동에 기반을 둔 그들의 평의회주의적 프로그램을 확인함에 있어서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는 자신들이 어느 정도로 평의회주의적 관점에 매달려 있는지를 보여주었는데,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그것의 구체적 연구들 중의 일부는 그 관점을 멀리, 말하자면 숙련 기술 노동자의 관점으로부터 멀리 이동시켜야만 했다. 전후 호황을 파국적 종말로 가져가게 되었던 관점과 투쟁들은 대중 노동자의 관점과 투쟁들이었다. 숙련 노동자의 급진적 관점이, 그/녀가 생산 과정 전체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자본주의적 기생충이 불필요하게 되는 노동자 통제의 개념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테일러화된 대중 노동자의 투쟁은 소외된 노동 과정 전체의 거부, 즉 노동 거부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다."(아우프헤벤, 쇠락의 이론)

3.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획기성

3.1.노동 거부론의 맹아: '일하지 말라'

이런 맥락에 비추어 볼 때, 프랑스 68혁명 당시 '일하지 말라'(상황주의자들)라는 구호의 등장은 획기적이다. "경제는 세계를 변혁하지만 그것은 오직 경제의 세계로의 변혁일 뿐이다."(스펙타클, 30) 이 말을 '노동은 세계를 변혁하지만 그것은 오직 노동의 세계로의 변혁일 뿐이다'라고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호는 아직은 직관적이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시간에 집착하는데 이 시간은 순환적 시간에서 해방된 최초의 시간이다.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비로소 일은 역사적 조건들을 변형시키는 노동이 된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을 가치로 여긴 최초의 지배계급이다. 부르주아지는...노동의 진보를 자신의 진보로 삼았다.(스펙타클, 119)" "이 비활동은 결코 생산활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않다. 비활동은 생산활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산의 필수품들과 결과물들에 대한 어색하면서도 감탄섞인 굴복이다"(스펙타클, 22) ""현재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즉 여가의 증대는 노동 내에서 이루어지는 해방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같은 노동이 창조하는 세계로부터의 해방도 아니다. 노동 속에서 상실된 활동이 노동의 결과에 대한 굴복 속에서 회복될 수는 없다."(스펙타클, 22) 노동 내에서 이루어지는 해방, 그것은 무엇일까? 드보르는 노동자평의회 속에서 노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해방을 찾는다. 그것은 대중 노동자들이 이룬 노동 거부의 성과를 다시 숙련 노동자들의 노동관 속에 포섭시키는 것은 아닌가? 일하지 말라는 소외된 노동에서 벗어나자는 마르크스의 생각의 단순한 계승이다.

*전 상황주의자 Bob Black: 만국의 노동자여 휴식하라.

3.2.이딸리아 자율운동과 노동 거부

"1970년대 동안에, 자율주의자들은 노동 거부에 관한 가장 발전된 이론화를 생산했다. 또 그들은 자본주의의 위기 및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의 역동적 이론을 위하여 파국주의적 위기 이론에 대한 비판을 생산했다. 자율주의자들은 '사장들의 위기는 노동자들의 승리이다'라는 슬로건에서 예증된 계급 투쟁적 위기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그들을, 생산 관계에 의한 생산력의 질곡으로 초래된 자본의 쇠락에 의해 야기된 일반적 위기를 가지고서 자본의 내적 모순이라는 측면에서 위기를 설명하는 위기에 대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설명과 날카롭게 충돌하게 했다. 자본이 생산력을 속박한다는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이지만, 노동자계급이 강한 때에 그 계급은 자본주의적 의미로 이해된 생산력을 속박한다는 점을 망각한다. 노동자계급은 생산력의 발전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필요에 대립될 때에는 생산력의 발전을 속박한다.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항의 의미는 만인을 위한 노동이라는 사회주의적 꿈 속에서 망각되어서는 안된다. 네그리가 표현했듯이, "생산력의 해방: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가장 총체적인 형식 속에서 폐지에 이르는, 부정에 이르는 과정의 동력으로서이다. 노동-으로부터의-해방으로부터 노동을-넘어-가는 형식으로의 전환은 코뮤니즘의 정의(定義)의 중심, 핵심을 이룬다.""위기가 진척됨에 다라, 새로운 조류가 스스로를 연루시켰었고 구 좌파주의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노동 거부는 통화주의와 노동의 대규모 재부과의 맹습을 받고 비틀거렸다."(Aufheben, 쇠락의 이론)

4.노동 거부를 둘러싼 아우또노미아 내부의 논쟁

4.1.스펙트럼

(좌파)노동 일반의 거부와 노동의 삶으로의 통합(볼로냐, 호보, 클리나멘 지, 맛시모)
(중도파)소외된 노동의 거부(네그리와 하트)
(우파)노동 거부를 노동 시간 단축으로 양적으로만 이해(고르)

4.2.하트와 네그리의 노동 거부관

"작업(work; lavoro)의 거부는 결코 노동(labour; laboro) 그 자체의 거부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생산성, 창조성, 혹은 창의성(inventiveness)에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특수한 관계의 거부였다"(Hardt 1993: 114).... '노동 그 자체'라는 것이 계급 지배의 형식 속에서 추상 노동으로서가 아니라면 과연 실제로 존재했는가. 사회주의적 감수성의 일종에 근거를 둔 것

4.3.{클리나멘}지의 견해

밀라노에 근거를 둔 저널인 {클리나멘}의 편집자들은 '노동 일반'에 대한 비판이 아닌 임금 노동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계속 거부했다(Klinamen 1992: 56). 데 안제리스에 의해 취해진 태도 역시 비슷하며 그리고 그것의 언어 사용에서 거의 동일하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해방 일반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De Angelis 1994: 35)."

4.4.재연된 논쟁에서 호보의 입장

복권 사무실에 근무하던 나이든 여성 피고용인의 운명에 관한 논쟁: 복직인가 편안한 삶인가 그녀는 이른바 새로운 기계들을 작동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해고되었다. 이 일화에 대한 토론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빠도바 ECN의 호보(Hobo)가 끼여들어 '모든 사람이 노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덜 일하자'는 노선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 여성이 복직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싶지 않으며 오히려 그녀가 편안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싶다'(Hobo 1995).

4.5.고르의 양적 관점

노동 시간 단축

4.6.클리버의 종합

노동 거부는 노동의 창조성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의 종말이 산 노동의 특권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은 삶의 다양한 욕구들 중의 하나로 자리잡을 것이다. 이렇게 변형된 창의적 활동성을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노동은 자본주의적 상품 세계에서 의미를 갖는 추상, 광범위한 구체적 활동성(동사들)의 추상이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에 대한 양적 관점에 머물면서 그 질적 변형의 시야를 놓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마르크스주의 범주들, 자본의 위기, 오늘날 사회적 주체성의 구성])

5.노동거부와 자기가치화

5.1.네그리의 생각

네그리는 노동거부를 대중 노동자의 전략으로 이해하면서 사회적 노동자로의 계급 재구성의 결과 노동 거부보다 자기가치화가 주된 전략으로 대두된다고 본다.

그 논거: 오늘날의 노동이 비물질적 노동으로 전화됨으로써 가치가 노동 시간에 의해 측정될 수 없게 된다. 가치 법칙이 위기에 처하고 죽는다.

비물질적 노동 ---대중의 지성---사이보그---자기가치화

이런 관점에서 네그리는 오늘날 가장 생산적인 부문인 사회적 노동자가 혁명의 새로운 주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사회적 노동자 개념은 많은 빈 공간을 남기고 있다. 네그리의 생각 속에서도 그것은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네그리는 한 때 사회적 노동자를 학생과 정보기술 부문 및 행정 부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즉 사회적 노동자를 노동자의 특정한 계층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사회적 노동자의 헤게모니는 그 양적 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적 구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네그리와 아꾸아띠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사회적 노동자를 노동자의 특정한 계층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오늘날 노동자 구성의 질적 특징으로 정의하게 된다.

5.2.네그리에 대한 자율주의자 내부의 비판들

5.2.1.볼로냐의 네그리 비판

계급투쟁의 중심 지대로서의 직접적 생산의 영역에 대한 네그리의 포기가 '재앙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뿐이라는 볼로냐의 생각에 동의를 표하면서, 로마 분파는 그러한 차이는 더 깊은 방법의 차이를 깔고 있다고 믿었다.

5.2.2.스티브 라이트의 네그리 비판

만약 60년대 말에 네그리가 당시의 다른 노동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이한 노동자계급 층들의 특유성을 대중 노동자의 층들로 포섭하는 위험을 무릅썼다면, 70년대 후반의 그의 작업은 계급에 대한 이 부분적으로 구체적인 이해마저도 일반적(generic) 프롤레타리아트 속으로 용해시킬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완전히 자율적인 동기들'을 가진 상이한 주체들의 혼합물로서, 사회화된 노동자의 개념은 제한된 발견적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이제 유통과정의 모든 계기를 가치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는 공장-사회 관계를 둘러싼 노동자주의의 오랜 긴장을 날랜 이론적 책략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계급 형상의 묘사, 상당한 주의와 시간을 요하는 하나의 프로젝트는 경향을 현실로 와해시킴으로써 간단히 성취되었다.

네그리가 위기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개념규정들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동안에, 그 자신의 틀은 같은 정도로 파국론적으로 되었다. '권력의 균형은 역전되었다'라고 2만부나 팔린 1977년의 한 팜플렛에서 그는 썼다: "노동자계급, 그 계급의 사보타지는 더 강한 권력이며 무엇보다도 합리성과 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다. 이제부터 투쟁에 의해 생산된 이 역설을 망각하는 것은 이론에서조차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지배의 형식이 자기자신을 더욱 완전하게 하면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 텅비게 된다; 노동자계급의 거부가 더욱 성장할수록, 그것은 합리성과 기치로 더욱 충만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수이다."

5.2.3.G. Caffentzis의 네그리 비판

네그리는 '가치법칙이 완전히 부패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혹은 '가치법칙은 죽어가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시골 지역에서의 '뉴 엔클로져는 산업에서의 자동화 과정의 상승을 수반하며, 켬퓨터는 땀공장을 필요로 하고, 사이보그의 존재는 노예를 조건을 삼는다. 고기술 영역에서의 새로운 노동자의 성장을 자기가치화와 연결지은 것은 옳지만 그것은 산 노동의 자기가치화가 아니라 죽은 노동, 즉 자본의 자기가치화이다. 자본의 자기가치화는 지구적 프롤레타리아의 퇴락을 전제로 한다. 지구적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네그리의 망각은 계급의 가장 생산적인 요소들로부터 혁명적 주체를 종합해 내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공리의 하나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혁명과 생산의 방법론적 동일시는 역사 속에서 거듭 오류로 확인되었다. 1994년에 발간된 디오니소스의 노동이 그해에 발발한 사빠띠스따 봉기를 혁명적 투쟁으로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은 네그리가 산업 노동자 중심의 레닌주의를 계승하고 있다는 증거이다.'([노동의 종말인가 노예제의 르네상스인가? -리프킨과 네그리 비판])

6.삶과 자기가치화

삶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다양성의 시공간이다.
노동은 삶의 창조적 활동성의 부르주아적 포착형태이다.
노동은 가치화의 법칙에 종속된다.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가치화의 파괴, 가치법칙의 폐지, 삶의 노동시간 및 노동으로의 환원의 거부를 지향한다.
자기가치화는 거부를 통해 확보된 시공간을 채워나갈 수 있는 하나의 안내선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치화의 단순한 역전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다시 가치법칙의 덫에 걸릴 수 있다.

자기가치화는 가치화, 가치법칙과의 투쟁없이, 달리 말해 노동 거부 없이는 자기위안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치법칙의 종언이라는 테제는 위험하며 지구적 노동 현실에 대한 그룻된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가치법칙의 위기가 하나의 경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직 현실인 것은 아니다. 자본은 가치법칙을 부과할 길을 부단히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보화 역시 그 모색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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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슈타인과 사민주의 연구 경향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 연구경향을 중심으로

목 차


1.머리말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1)독일사회민주주의 역사적 발전과정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


4.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한국의 연구경향


5. 맺음말


* 영문초록(Abstract)


* 참고문헌.


1. 머리말



최근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통해 급속도로 해체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19세기 중엽 이후 출현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인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상황 속에서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온 흐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요구하고 있다. 전자는 최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나타나고 있으며, 후자는 서구 자본주의 진영 속에서 새롭게 발전한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관심 집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91년 이후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소개가 활발하게 소개되어왔다. 이에 비해 사회민주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경향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 발전해 왔는가를 검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위해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개념,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과 한국에서의 연구 경향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보다 깊이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개념



1)독일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기에 앞서 독일사회민주주의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고, 현재 사회민주주의를 어떻게 규정해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크게 3 단계의 시기를 거쳐 발전해 왔다.


첫번째 단계는 1890년대 중반에 베른쉬타인이 제기하여 일어난 수정주의 논쟁 시기이다. 베른쉬타인은 1896년의 독일사회민주당 슈투트가르트 대회에 제출했던 의견서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전면적 수정을 제기탖다. 베른슈타인은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에 따른 궁핍화 법칙, 자본주의 멸망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 등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들 둘러싸고 지지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들 사이에서 논쟁이 진행되었다.


두번째 단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나타났던 경제민주주의의 구상을 둘러싼 시기이다. F. Naphtali가 경제민주주의 구상을 창안하였는 데, 이것은 공적 개입에 의한 경제의 민주화와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전제하는 자주관리형태의 경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1925년 독일노동자 총연맹 브레슬라우대회에서 제창되어, 1928년의 함부르크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세번째 단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시장경제론의 전환을 둘러싼 논쟁 시기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면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공정한 사회질서의 건설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보호하고 장려하려 한다. 사회화론을 부정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1951년에 창립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의 '민주적 사회주의의 목표와 임무'라는 제목의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1959년의 [고데스베르크강령] 등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2) 사회민주주의 개념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 상황이 변화되어옴에 따라 그 안에 다양한 내용을 담아왔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의 사회민주주의와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 개념은 크게 다르다. 19세기 후반에 사회민주주의는 곧 맑스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전통 위에서 현대적 상황의 변화를 담은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의 독일사회민주주의의 개념을 토마스 마이어(T. Meyer)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이어는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요한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첫째, 사회주의는 윤리적 필연성이며, 사회주의는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정도에서만, 그리고 그 실천 형태로서만 존재할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는 건설적 사회개혁과 그것에 의해 가능해지는 노동자의 경험 및 지식의 증가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건설된다. 그것은 모든 영역에로의 민주주의의 점진적 확장이다. 세째,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사회화란 반드시 국유화나 전면적인 몰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생산수단에 대한 개별적 소유권을 다양한 사회적 이해의 담지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한 사회화란 반드시 시장의 철폐를 의미하지 도 않는다. 네째, 민주주의 국가는 사회 전체를 위하여 기능할 수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며, 그것 자체가 사회주의의 일부이다. 다섯째, 사회주의적 원리의 의미에서, 사회구조는 폭력적, 혁명적 반란에 의해서 건설적으로 개조될 수 없다. 사회주의적 사회 관계의 창조적 건설은, 민주주의 속에서만 점진적으로, 또한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된다.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 동향


  그럼 독일사회민주의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사회민주주의는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베른쉬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의 검토는 베른슈타인 당대의 수정주의논쟁에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의 기본적인 틀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19세기 후반 수정주의논쟁의 제공자인 베른슈타인의 기본 입장부터 시작해보기로 하겠다. 베른쉬타인은 자신의 수정주의적 입장을 1896-1898년 사이에 걸쳐 {신시대(Die Neue Zeit)}지에 기고한 [사회주의의 제문제]라는 연재기사에서 명확히 하였다. 이것은 보다 보충되어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과 사회민주당의 임무}로 출판되었다. 베른쉬타인은 이 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맑스주의를 새로운 상황에 맞게 '수정'하려 했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엥겔스의 사회주의의 이론적 전제와 독일사회민주당의 실천 사이에 하나의 모순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제 진부하고 공상적으로 된 이론을 검토하여 당의 실천 정책들과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단점으로 지나친 추상성과 이 추상성으로 인한 이론편향적 경향들을 지적하였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론과 현실분석 중 맞지 않는 것으로 붕괴론을, 즉,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체제가 그 속성상 머지않아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항상적으로 기대하는 견해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 붕괴론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내재한 본질적인 오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면서, 그 본질적 오류로 헤겔주의류의 변증법적인 선험적 연역론과 유물론적인 역사관, 운명론 및 결정론 등을 들었다. 베른쉬타인은 또한 사회의 양극화이론, 즉 점증하는 빈곤화와 중간층의 프롤레타리아트화 이론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경제적 위기의 점진적인 심화와 그에 따르는 혁명적 긴장의 고조에 대한 개념들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러한 테제들이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현실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일의 진행이 맑스가 희망하고 예견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는 생산의 집중도 없었고, 대규모기업에 의한 소규모기업의 소멸도 없었다. 상업과 산업에서도 집중은 매우 느리게 발생했고, 농업에서 소규모 생산단위의 소멸 역시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중간층이 프롤레타리아화 하지도 않았으며,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향상됨으로써 계급투쟁은 강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되었으며, 따라서 사회의 양극화 현상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이 수정주의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자, 일련의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바이레른 사회주의자이며 가장 열렬한 베른쉬타인 옹호자가 된 폴마르(Georg von Vollmar), 제국의회 의원과 바이마르 때 국회의장을 역임한 농업이론가 다비드(David), 1차 세계대전 발발 때 적극적인 활동을 자원한 이상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인 프랑크(Ludwig Frank), 윤리적 사회주의자인 아이스너(Kurt Eisner), 가치이론과 사회주의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경제학자인 콘라드 슈미트, 그리고 독자적으로 베른쉬타인과 유사한 논점에 도달한 캄프마이어(Paul Kampmeyer) 등이 그들이다. 수정주의적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월간 사회주의(Sozialistische Manlatshefte)}를 통해 자신들의 집장을 피력하였다. 비록 다양한 논제에 걸친 논문, 평론, 단상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폭력에 대한 반대, 윤리의 강조, 개량적 활동과 협동조합에 대한 찬양, 여성해방, 노조활동의 고무, 교육환경의 증진 등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러한 연합전선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와 비슷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던 개혁주의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을 지지하게 되면서, 수정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었다. 수정주의는 맑스주의에 대한 지적 비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윤리적인 사회민주적 세계관을 구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개량주의와 구별된다. 개량주의적 입장을 지니고 수정주의 진영에 합류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레기엔(Legien), 라이파르트(Leipart), 팀(Tim), 움브라이트(Umbreit), 엘름( von Elm) 등과 같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조합정책 수준에 머물렀다. 두 번째 부류는 에버트(Friedrich Ebert)같은 당직자들이다. 그들은노동조직의 성장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보았고, 정책간의 타협을 중요시하였다. 세 번째 부류는 가장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 입장을 보였던 쉬펠(Schppell), 칼베르(Calwer), 힐데브란트(Hildebrand) 등과 같은 보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선택적 관세에 대한 지지로부터 시작해서 세계대전 중의 가장 극단적인 사회제국주의로 완결된다. 이러한 입장들은 베른쉬타인의 기본 입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베른쉬타인은 사회제국주의와 명백히 다른 입장에 서있다. 수정주의와 개혁주의를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는 지지도 받았지만, 동시에 많은 비판도 받았다. 카우츠키와 로자 룩젬부르크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공격하는 데 가장 선두에 섰다. 이중에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이 가장 대표적인 비판으로 뽑히고 있고, 이후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로자 룩젬부르크의 견해에 많이 의존하게 된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제문제]시리즈에 주목하다가 {전제}가 출판되자 수정주의의 전 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그녀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에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사회개혁과 혁명을 사회민주주의 사상 내에 밀접하게 결합되어있는 것으로, 그리고 개혁을 수단으로 혁명을 목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녀는 이에 비해 수정주의는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회혁명 - 사회민주당의 목적인 - 을 폐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면서 비판하였다. 궁극목표는 바로 사회민주주의의 심장이므로, 그러한 목표를 폐기하려는 시도는 이미 전술적 수정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 모두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포기했으며 관념론으로 복귀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의 자본주의체제 분석이 그의 관념론의 지주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평가절하하면서 그것을 "적응성", "지속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자본주의의 적응성에 대한 베른쉬타인의 주장은 한낱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전례없이 명확해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했던 신용의 증가와 국제화는 실제로는 전유방법과 생산방법을 더욱 단절시키고, 소유관계와 생산관계를 더욱 괴리시킴으로써 오히려 자본주의의 몰락을 재촉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카르텔과 트러스트와 관련해서도 베른쉬타인을 비판하였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바와 같은 자본주의의 안정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그러한 현상 들은 극소수의 수중에 부가 집중되는 자본주의의 최종국면의 징후로 보았다. 그녀는 더욱이 공황이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베른쉬타인의 주장을 유치한 오류로 비판하였다. 1890년대의 상대적 번영이 장차 도래할 자본주의 대격동의 그림자를 가릴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번영은 생산과 교환간의 최후의 모순을 위한 전제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출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부분적이고 국지적인 공황이 무제적한적인 세계공황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수정주의의 기초를 검토한 룩젬부르크가 제출한 결론은 수정주의는 사회주의적 이론이 아니라 절충주의 철학을 지닌 부르주아 개량운동이라는 것이었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전술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수정주의자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적 활동, 사회개혁, 그리고 현대국가의 정치적 민주화라는 세 가지 동력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고자 한다. 룩젬부르크는 이러한 세가지 전술 모두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첫째, 노동조합은 맑스의 임금법칙을 파괴할 수 없다. 노조는 착취를 폐지할 수 없으며, 노동조합 세력이 무한히 확대될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낙관론은 근거가 없다. 노조는 그들이 ?하는 대로 생산계획에 영향을 행사할 수 없다. 노동자는 생산의 규모뿐만 아니라 기술적 방법에도 관여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은 수정주의자들이 산정했던 바의 공격적인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두번째, 사회개량은 장기적인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역시 한게가 있다.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양립될 수 있는 한에서는 개량을 허용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더 이상 개량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룩젬부르크는 사회개량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러한 착취에 질서와 규칙을 제공할 뿐이다."라고 보았다. 세번째, 수정주의자들은 민주화의 성숙에 의존하고 있는 데, 그러한 민주화과정은 식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국가 내에서,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허용되며, 지배계급들이 위협당할 때는 언제든지 폐기된다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 다음처럼 결론을 내렸다. 수정주의의 철학적 기초는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에 다름아니며, 그 전술은 사회주의적 승리를 잉태할 수 없으며, 그러한 승리는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인 권력장악으로서만 쟁취될 수 있다. 베른쉬타인의 전술은 결코 현존 체제 내에서의 사소한 개량이상을 끌어낼 수 없기때문에 수정주의자들의 목표는 급진파의 궁극목표와 현격하게 다르다. 그리고 수정주의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사회민주당은 수정주의가 없으면 그 지위가 한층 더 상승할 수 있다.


베른슈타인과 베른슈타인의 지지자들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이러한 비판은 형성중에 있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약점을 통렬하게 공격함으로써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세계대공황의 발발과 나찌즘의 대두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수정주의에 대한 룩젬부르그의 비판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결국 룩젬부르크의 입장은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사회주의 이론으로 간주하면서 부르주아 급진주의의 한 분파로 파악하려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릭케(Dieter Fricke), 라쉬짜(Annelies Laschiza), 라드뽅(Gunter Radczun), 그리고 테뵉(Manfred Tetzel)등이 이어 받어 발전시겼다.


1950년대초 이전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연구대상으로 선호되지도 못하였다. 그 결과 심지어 베른슈타인이이라는 커다란 명성에도 불구하고, 베른슈타인의 원저작들이 전집형태로 정리되지도 못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는 1950년대 초 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다가, 1970년대에서야 비로소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서 이 과정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하나의 독창적인 새로운 포괄적 체계로 파악하고자 한 대표적 학자로 피터 게이를 들 수 있다. 게이는 19세기 후반에 수정주의는 시대적 상황의 반영으로서 불가피한 것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 베른슈타인의 공적이라고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만약 베른쉬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기의 전환기에 독일의 정치.경제적 조건은 개량주의적 이론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정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은 진기한 이론이라고 깜짝 놀란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상황의 이론적 인정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수정주의가 즉각적인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이론이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주고 아울러 맑스주의가 그랬던 것 처럼 논리적인 체계로 모든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경쟁적인 개념구조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터 게이는 베른슈타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었던베른슈타인에 대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을 재비판하였다. 피터 게이는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해 다음의 네 가지 점에서 비판을 가하였다.


첫째,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폐기'를 너무 멀리까지 끌고가 버렸다. 사실 맑스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주의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녀는 투쟁 자체를 문제시하는 쉬펠(Schipell)과 베른쉬타인의 이론 비판을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차이를 충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두번째,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그녀의 이론적 주장은 프롤레타리아가 실제로 자신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가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 베른쉬타인의 이론구조가 그 취약성으로 곤란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현실감각은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그의 수정주의는 노동자들에게까지 파급된 번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세번째, 로자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은 독일은 물론이고 여타 국가에 대해서도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경직된 혁명적 사고 패턴은 영국노동계급의 평화적인 권력획득을 부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기득권 계급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담보를 과소평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리하여 베른슈타인이 독일적 상황에 대해 오판했던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녀는 영국적 상황을 오판했던 것이다. 네째, 혁명적 전술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옹호는 대책없는 모순들을 잉태한다. 그녀는 특정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염두에 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블랑키주의적 쿠데타는 노동계급에게 심각한 불행을 안겨주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장악 시기, 혁명의 형태 등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베른슈타인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녀의 사상 속에서도 혁명이라는 난제와 개혁이라는 난제 간의 딜레마는 결코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한 피터 게이의 이러한 반비판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이외에 그노이스(Gneuss)도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당 내에 존재하는 개혁주의적 입장의 체계화의 산물로 긍정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다가 1970년대 들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유로코뮤니즘과 유럽사회주의가 대두된 1970년대에 바우어(O. BGauer) 르네상스와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사회민주주의 연구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 바우어 르네상스는 유로코뮤니즘의 대두에 따른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의 재평가와 관련이 있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는 1969년 이후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권과 관련이 있다. 베른쉬타인 연구는 1970년대 초 이전까지는 매우 적었으나, 197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활성화되었다. 1977년에 베른쉬타인을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가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이것을 입증해준다. 이 대회 의장을 맡았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의 하나인 토마스 마이어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20세기의 전환기에 가장 올바른 입장으로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사회중의의 원리와 실천 간의 괴리가 점점 커지는 상황속에서 수정주의가 사회주의 노동자운동의 내부로부터 대두되었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의 모순을, 이론적 기반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의 실제적 발전과의 현실적 관련에 기반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수정주의는 결코 반 마르크스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건설적인 개량작업을 방해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요소들을 비판하고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이어는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단순히 수동적 입장에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역사적 시대상황에 적응하기위해 고안된 진일보한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으로 평가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새로운 평가들을 미 출판된 초고와 편지들을 통해서 뒷받침하는 작업들과 정통적 입장에서 계속 비판하는 시각들이 서로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다.



4.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 연구 동향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여러가지 요인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후 공간 시기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압도되어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1950 년대에는 조봉암의 진보당을 통해 사민주의적 입장이 잠시 현실화되다가 '진보당 사건'으로 좌초되었다. 5.16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 마저도 부인되는 열악한 현실 상황에서 사민주의는 현실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연구되기 어려웠다. 다만 이 시기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에 참여하기 위한 일환으로 관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형식적으로 존재했었을 뿐이다.


한국에서 사민주의를 하나의 현실적 대안으로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 시기는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한국사회가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사회라는 인식이 확대되었고 , 이에 따라 한국에서 서구 자본주의국가와 같은 '개량'의 가능성이 존재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가능성 논의는 1980년대 후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한국에서 수입되는 과정 속에서 , 그리고 90년대 초 현존사회주의가 해체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본격화되었다.


현실 영역에서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과 영향이 적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사회민주주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동안 김윤환, 안병직 등이 열악한 현실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이후 사민주의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전문적으로 이루저어지기 시작했다. 나라 별로는 스웨덴, 영국, 독일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 중에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엽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다. 대표적 연구자들로 박호성, 강신준, 강철구, 최영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사민당일반에 대한 개설적 연구이거나 한 특정부분에 관한 부분적 연구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사민당에 대한 한국에서의 연구는 아직 초보 단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사민주의 초기의 핵심적 문제의 하나인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의 형성과정과 쟁점 들을 둘러싼 논의들은 거의 소개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5.맺음말



이상으로 독일과 한국에서의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았다. 독일에서는 1970년대 후반 이후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통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한국에서는 1990년 대 초 이후에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동안 기회주의, 개량주의, 그리고 독창적인 내용이 없는 절충의 산물이라는 기존의 견해들이 비판적으로 검토되었다. 동시에 독일사회민주주의의 원조가 되는 베른쉬타인을 하나의 독창성있는 포괄적인 체계로 파악하려는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한국에서도 1990년대 초 이후의 급변하는 세계적 상황 속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지니는 장점들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여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는 이제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확인되었다. 앞으로 보다 많은 심도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이러한 부분이 채워진다면 20세기 사회사상사를 한국의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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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슈타인]

Eduard Bernstein



                

0. 들어가며


1989년 동유럽과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민주적 통제의 부재, 경직된 경제체제와 자율적 참여로부터 단절된 정치체제 등의 문제점을 핵심적 모순으로 하여 붕괴되었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프란시스 후꾸야마는 ꡐ역사는 끝났다ꡑ며 시장경제의 영원한 승리를 선언했고, 90년대는 개방, 탈규제화, 단일 시장화의 시대로 되면서 전세계는 신자유주의의 세상이 되었다. 소련의 국가주도의 사회주의가 경직성과 그에 따르는 현실적 어려움, 페레스트로이카 등의 외부적 충격으로 붕괴되었다면, 그와 더불어 사회주의적 이상을 지닌 또 다른 한 축인 사회민주주의는 어떠한가.

80년대 정세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유럽 좌파정당의 실각과 미국과 유럽, 그리고 영국에서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경우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의 변혁이 가능하리라는 이념 자체의 문제와 궁극 목적과 수단과의 딜레마, 또한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자기 정체성의 동요 등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득표기반의 확대와 연립정부에의 참여가 가져온 제약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의 탈과격화와 자기정체성의 동요를 가져온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민당들이 민영화 등 시장경제적 요소를 과감히 도입하고 복지수당 삭감을 비롯한 긴축정책을 표명하며 좌파정당에서 탈피해 사실상 중도정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토론과 득표활동, 의회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권력장악이라는 목적과 민주적 방법을 통한다는 원칙 사이에 딜레마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헤롤드 라스키는 ꡒ자본제적 민주주의는 투표라는 돌발적 행위를 통해 유권자가 섣부르게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결정하는 것까지 용납하진 않을 것ꡓ Herold Laski, 1935, 'Democracy in crisis',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두 경로가 이와 같이 모두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과연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질서는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세계 곳곳에서 폭력적 방식에 의한 세계화가 진행되고 자유시장제도에 의한 여러 가지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과제물에서 체제대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이론을 최초로 이념적 정식화한 베른슈타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로부터 현재 나타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이념적 근원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것이다.



1. 생애


베를린 시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은 1850년 1월 6일 베를린 중하층계급 거주지에서, 배관공이었다가 후에 철도 기관사가 된 쟈코프 베른슈타인(Jakob Bernstein)의 일곱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베른슈타인은 명석한 학생이었지만 김나지움을 졸업하지는 못하고, 열 여섯 되는 나이에 베를린 은행의 수습사원이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 두게 된다. 그 후로 공식 교육 없이 혼자 공부하는데, 그것이 대학출신 지식인들로 이뤄진 사회주의 운동권 내에서 이론가로 활동하는데 큰 걸림돌은 되지 않았다. 1869년 말 수습사원을 마치고 다른 은행에서 행원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1878년 독일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1870년대 초, 그와 몇몇의 동료들은 ꡐ유토피아ꡑ라는 이름의 소그룹 토론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사회주의 이론을 얕은 수준에서나마 접한 베른슈타인은 당시 라살레주의자들과 치열하게 다투고 있던 아이제나허에 입당했다. 1872년 2월의 일이다.

베른슈타인이 사회민주당원으로 첫발을 내딛던 1870년대 초반 독일 사회주의는 라살레주의자와 아이제나허로 분열되어 소모적인 싸움을 하던 시기였다. 이는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 탄압정책 1871년 이후 물가상승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개되자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발의하고 노동자조직과 좌파 출판물에 체계적이고 전횡적인 탄압을 가했다. Franz Mehring, Geschichte der deutschen sozialdemokratie, Ⅳ, pp.39-48.

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어려움에 처하게 했는데, 그 결과 1874년 선거에서 라살레주의자와 아이제나허 모두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 베른슈타인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중연설 활동으로 당 지도부 내에서 교제범위를 넓혀 나갔고 베벨과도 친교를 갖게 된다. 이론적인 차이를 넘어 서로에 대해 저열한 인신공격까지 퍼부었던 두 분파는 1874년 제국의회 선거결과를 두고 통합을 고려하게 된다. 마침내 1875년 2월 14일과 15일에 걸쳐 고타(Gotha)에서 최종적으로 당대회가 열리고 5월 22일에서 27일에 걸쳐 통합당대회를 개최하고 고타강령을 채택함으로써 통합된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이 출범했다. 엥겔스는 고타강령 초안을 보고 맑스주의 원리가 위태롭게 된다는 견지에서 통합에 반대하는 편지를 베벨에게 보냈고 마르크스는 브라케에 보낸 ꡐ고타강령 비판ꡑ에서 ꡐ이 강령은 훌륭하기는커녕 라살레주의에 대한 신앙을 떨쳐내지도 못했다ꡑ고 논평했다.

후에 베른슈타인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이론적 수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대체로 당시의 아이제나허들은 맑스의 이론이 지닌 역사적, 사회적 기본이념의 깊은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사회주의관은 이론적으로 맑스보다는 라살레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그들이 라살레가 요구하고 제안했던 어떤 것들을 거부하긴 했지만, 이들은 라살레의 사상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주장, 즉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사회주의 운동 시기에서 유래하는 주장들을 토대로 하여 자신들의 사회주의 이론을 수립했다. 그러므로 고타 강령은 맑스가 말했던 종류의 라살레주의자들의 승리가 아니라, 아이제나허들이 가지고 있던 불충분한 이론적 통찰의 결과였다. Bernstein, Sozialdemokratische Lehrjahre, pp.45-46



신당은 비스마르크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1877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베를린, 함부르크등 도심지에서 우세를 보이며 9%의 득표율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 동안에 베른슈타인은 은행원으로 계속 일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877년 선거에서도 자기 몫을 다했다. 그러나 1878년 빌헬름 1세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을 구실로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시작했고, 마침내 1878년 9월 19일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입법되었다. 1878년 11월, 베를린에 준계엄이 포고되고 78명의 사회민주당 당원이 수도에서 추방되었다.


쥬리히 시대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발효되기 직전, 스위스에 있던 부유한 청년 사회주의자 회흐베르크로부터 비서직을 제의 받고 1878년 10월 12일 베를린을 떠나 스위스의 루가노로 이주했다. 회흐베르크는 엥겔스의 조소의 대상이 될 만큼 별 볼일 없는 공상가였는데, 그런 그의 일면은 사회주의가 인텔리겐차를 변화시킴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는 그의 발상에서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그러한 발상에 신랄한 비난을 퍼부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법화된 당은 좀 더 적극적으로 선전활동에 나설 필요를 느꼈는데, 이러한 필요에서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쥬리히에 파견된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주목하고, 쥬리히에서 중앙당신문을 창간할 것을 제안했다. 베른슈타인은 1879년 쥬리히에서 ꡐ사회민주주의자ꡑ가 창간될 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881년 1월 편집장으로 임명되면서 편집자로서의 경력을 쌓는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베른슈타인의 일시적 외국체류를 망명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쥬리히는 런던과 더불어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중심지여서 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과 사회민주주의 활동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불법화된 상황에서 외국에서 비밀당대회를 개최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활동을 벌인다.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은 당 동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ꡐ사회민주주의자ꡑ를 후에 엥겔스가 언급한 대로 ꡐ당 역사상 최고의 신문ꡑ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또, 사회주의자 탄압법 기간 중 처음으로 진행된 1881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12명의 의원을 진출시키며 승리를 거두고, 이에 자극 받은 비스마르크는 국가의 입법에 의한 노동자의 복지향상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1883년 의료보험 입법, 1884년 사고보험법, 1889 노후보험법을 입법한다. 모든 방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1884년 선거에서도 승리한 사회민주당은 그러나 곧 당내 좌우파간 분열이 노골화된다. 분열은 독일의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식민지 팽창에 대한 입장에서 불거져 나왔는데, 다수파는 식민지 확장이 독일노동자들의 고용기회를 창출한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선로 건조에 찬성했고, 베벨을 포함한 소수파는 모든 선로개척에 반대했다. 베른슈타인의 ꡐ사회민주주의자ꡑ또한 소수파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러한 분열양상은 나중에 사회민주당을 심각한 분열에 빠뜨릴 제국주의의 문제가 처음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저널리스트로서 성공을 거두고 있던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은 1886년 결혼을 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1887년 의회선거에서 다시 한번 10%의 득표율을 보이며 승리한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베를린에 있는 스위스 대사에게 압력을 가하고, 곧 있을 독일-스위스간 무역협정 개정에서 스위스 측에 양보를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쥬리히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베른슈타인은 런던에서 ꡐ사회민주주의자ꡑ를 계속 발행하기 위해 1888년 5월 12일 스위스를 떠났다.


런던 시대

베른슈타인은 런던에 체류하는 기간, 마르크스주의에 최초의 체계적, 이론적 수정을 가하면서 국제적 인사가 되었으며, 17세기 영국 내전에 대한 뛰어난 역사저작을 간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런던에 체류한 기간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으로 보기도 한다. 런던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비스마르크는 실각하고,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1890년 폐지되기에 이른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더 이상 해외에서 당 기관지를 발행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여전히 수배자였던 베른슈타인은 런던에 머물면서 ꡐ전진ꡑ의 런던 통신원과 카우츠키가 발행하던 이론지인 ꡐ신세대ꡑ의 정규 기고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주요조항이 폐지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몇 가지 결과를 낳았다. 그 중 하나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탄압기를 거치면서 득표수를 3배 이상 증가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민주당이 의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정당으로 된 것이다. 새로워진 합법정당은 1890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20% 득표수를 보이며 경의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점차로 개량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개량화의 움직임을 감지한 베벨은 1891년 에어푸르트 당대회에서 기존의 라살레주의적 요소들을 일소하는 새로운 당 강령을 채택하게 한다. 에어푸르트 강령의 이론부분은 카우츠키가, 전술부분은 베른슈타인이 책임집필했으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견지해 불과 몇 년 후 시작될 수정주의 공세에 저항해 스스로를 지탱할 기반이 되었다.

1890년대는 베른슈타인이 그의 수정주의 이론을 만들어낸 중요한 시기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유언 집행인으로 지목될 만큼 엥겔스의 신임을 받았던 그가 베른슈타인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는 최초의 논문을 엥겔스의 사망 1년 후인 1896년에 낸 것으로 보아 엥겔스와의 관계 때문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이탈이 늦어졌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피터 게이, ꡐ민주사회주의의 딜레마ꡑ 한울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게 되는 계기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영국의 개량주의적 분위기를 들 수 있는데, 베른슈타인은 자기 조국과는 달리 공장법이 제정되어 있고 경찰이 파업을 파괴하지 않는 영국의 상황을 보면서 평화적으로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1890년대 유럽은 근현대사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시기였고, 영국의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또한 페이비언들의 점진적인 방법이 그가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에 그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의 기술에서 수정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나던 시점에 그의 고민을 들여 볼 수 있다.


저의 이러한 ꡐ털갈이ꡑ는 바로 장구한 이론적 진전의 결과이며, 이러한 전환이 특정주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자체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기까지 오랜 고민이 있었습니다. 2년 전까지 저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가르침을 적용함으로써 그것을 실천적 현실에 끼워맞추고자 했습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이론을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것은 우둔한 짓입니다.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타당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분별해 내는 것입니다. Bernstein to Bebel, 1898. 10.20., Bernstein Archives


ꡐ마르크스의 이론이 타당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ꡑ을 분별하고자 했던 베른슈타인의 사고의 전환은 1896년에서 1898년까지 ꡐ신세대ꡑ지에 게재된 ꡐ사회주의의 제문제ꡑ라는 논문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사회주의에서 헤겔주의의 문제, 헤겔주의 대신에 윤리적 측면을 강조할 것, 프롤레타리아 궁핍화 테제, 자본주의 붕괴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때의 논조는 비교적 조심스러웠으나, 그의 논문이 사회주의의 궁극 목적을 무시하고 있다는 영국의 사회주의자 벨포트-백스의 지적에 대해 ꡐ나는 사회주의의 궁극목적에 관심이 없다. 다만 내게 의미있는 것은 단지 운동 자체이다.ꡑ라고 대답함으로써 폭풍 같은 논쟁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격렬하게 진행되는 논쟁 속에서 카우츠키와 베벨에게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라는 요구를 받고 1899년 3월에 ꡐ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ꡑ라는 책을 내게 된다. 후에 이 책은 수정주의의 경전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베벨과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의 ꡐ수정ꡑ을 격렬히 비판하고, 스스로 당을 떠나주기를 요구했으나 끝내 그를 제명하지는 않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결국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원으로 남은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 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이 현안이 되어 있던 1901년 1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귀국한 베른슈타인은 1902년 3월 선거에 출마해 의회로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1912년 외교정책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는 의회에서 별로 주목받는 인사가 아니었다. 계속된 수정주의 논쟁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당내 급진파들은 베른슈타인의 제명을 요구했으나, 토론 끝에 급진파는 제지당하고 또한 수정주의자도 견책을 받는 등 결론은 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행동은 수정주의식으로 하고 동시에 수정주의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급진파와 가까워지게 된다. 이는 베른슈타인이 대부분의 동료 수정주의자들과 달리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베른슈타인은 황제가 주장하는 ꡐ영국의 위협ꡑ이라는 것은 조작된 것이고 독일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군비증강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동맹이라고 주장, 외교정책 논쟁에서 뛰어난 발자취를 남긴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일어난 1914년, 그는 전시공채 발행에 대한 태도에서 판단착오를 일으킨다. 베른슈타인은 사라예보 암살사건과 프랑스 사회주의자인 조레스 피살사건의 배후를 러시아로 보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개전 초기의 유유부단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는 전쟁에 대한 반대의사를 나타내고, 전시공채 발행 투표에서 기권하는 등 동료 수정주의자들과 관계가 소원해지게 된다. 한참을 망설이면서까지 당이 분열되기를 원치 않았던 베른슈타인은 그러나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제 2인터네셔널을 붕괴시키고 온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고 간 정권을 지지한 독일 사회민주당과 1916년 3월24일 결별하게 된다.

말년의 베른슈타인은 점차로 고립되어 갔다. 당으로 복귀했으나 당 지도부와의 접촉도 단절되고 1920년에 의회에 다시 들어갔지만 주된 활동은 집필활동과 후대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말년에 정치적으로 무력해진 그는 히틀러 집권 6개월 전인 1932년 12월 18일 눈을 감았다.



2. 사상


수정주의 등장의 배경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변화된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공식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실천과 대비되는 개량주의적 실천의 이론적 기반으로 자리잡게 된 사상체계라고 규정할 수 있다. 송 병헌, 1999, p90-91, 당대

또한 그에게서 파생된 사회민주주의는 ꡒ사회주의를 목표로서 주장하고 그러한 사회주의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이상적 정치과정으로서 의회민주주의를 고수하는 운동을 가르킨다ꡓ Wilde, L. 1994, Modern european socialism. Aldershot: Dartmouth publishing company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를 ꡐ수정ꡑ하게된 계기를 베른슈타인 개인의 성향과 그가 망명생활을 하던 영국의 개량적 분위기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으로 수정하겠다고 나서기 이전부터 이미 독일 사회민주당의 활동은 개량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를 들고나서자마자 많은 수의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남부 독일지역 당원들의 경우, 1890년대 초반의 농업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선거인의 다수가 소농이기 때문에 소농에 대한 지원방침을 강령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개량적인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정주의의 등장배경을 좀 더 구조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베른슈타인이 수정주의적 사고를 하게 되는 1800년대 후반에는 자본주의가 성숙되면서 마르크스의 시대와는 다른 양상이 벌어진다. 그것은 사회보험에 포괄되는 인원의 증가, 신 중간계층의 등장, 노동자층의 생활수준의 향상 등이었는데 이러한 현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적 붕괴론에 대해 의심을 갖게 했다. 이런 측면에서 수정주의를 1890년대의 경제적 호황기의 이론적 반영이라고 하는 평가도 있다. Steinberg, 1976, Sozialismus und deutsche Sozialdemokratie. s. 37

또한 정치적으로는 비스마르크의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의회 내에서 세력을 성장해 나간 상황에서 전술적으로 의회활동에 점차 더욱 치중하게 되는 경향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1890년대이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국가로의 통합가능성에 공감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개량적 조류의 확산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뿐만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 라살레주의, 페이비언주의도 베른슈타인에게 영향을 준 조류들이다. 거기에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의 일부 부분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인용하고 재해석,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다.


부르조아지 및 정부는 노동자당의 비합법적 활동보다는 합법적 활동을, 반란의 모든 결과보다는 각 선거의 결과들을 훨씬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또한 투쟁의 조건들이 본질적으로 변화하였다. 1848년까지 모든 곳에서 최종적인 승패를 결정하였던 구식의 폭동이나 바리케이트를 친 시가전은 상당한 정도 쓸모가 없게 되었다.

                                            -엥겔스, 1895, ꡐ프랑스 계급투쟁ꡑ에 붙인 서문.


결론적으로 베른슈타인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과, 실재하는 의회내에서 벌이는 개량적 활동과의 괴리를 없애기 위해 경직된 이론에 수정을 가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정주의의 이론적 전개

에어푸르트 강령의 예상과는 달리 19세기 말 자본주의는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하고 있었다. 1893년에서 1902년 독일의 산업생산률은 45% 증가했는데 이는 186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이와 같은 상황과 더불어 선거에서의 계속되는 승리를 보며, 붕괴론적 전망을 기본으로 한 에어푸르트 강령의 사회혁명론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의회 민주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달성 할 것이라는 개량주의적 전술의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전략은 합법적 틀 안에서 다양한 계층들을 노동자와 사민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되었고, 또한 이론은 변화된 현실에 맞추어 ꡐ수정ꡑ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변화된 현실이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경제의 집중과정을 통해 소기업이 몰락하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생, 유산자와 무산자의 차이가 확대되어 마침내 붕괴한다는 것인데, 베른슈타인이 보기에 현실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기업의 집중화가 일어나긴 했으나, 소기업이 몰락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광범한 중간계급과 새로운 소기업의 등장으로 붕괴론적 예견과 어긋나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ꡒ더 이상 붕괴론적 사회관은 현재의 발전하는 사회에 전혀 맞지 않는다ꡓ E.Bernstein, 1908, 'Zum Reformismus'. Sozialistische Monatshefte, ?,3, S. 1402

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현실의 상황에 대해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붕괴론을 부정한 베른슈타인은 계층변화의 양상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갖게 된다. 그것은 카우츠키식의, 혹은 더 나아가 마르크스-엥겔스의 계급관점에서 이탈하는 것인데, 결정적으로 정통이론의 계급 양극화론과 프롤레타리아트 궁핍화론을 부정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보기에는 계급의 양극화론은 현실을 무시한 극도로 단순한 관점이며, 현실의 상황은 오히려 자본주의 집중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의 숫자가 늘어나며, 궁핍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체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베른슈타인은 자본가와 고소득자를 거의 등치시키고 있다. ꡒ현실에서 자본가의 수는 경제기업의 강력한 집중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 증가해 왔다. 따라서 프로이센에서는 50만 마르크 이상의 재산 소유자 수가, 소득통계가 최초로 이루어진 1895년부터 1914년까지 50%이상 증가했으며, 최상위 소득계층은 더욱더 강력하게 늘어났다.ꡓ Bernstein, 1923, 'Die nachsten moglichen Verwirk- lichungen Sozialismus' Der Sozialismus einst und jetzt. S. 129

이렇게 자본가의 개념을 확장시키다 보니, 시민계급의 내용을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외한 사회의 상당수 구성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게 되었고, 계급투쟁론에서도 ꡐ계급투쟁과 타협은 결코 절대적 대립물이 아니다. 이것들은 운동의 형태들이며 운동만이 영원한 것이다ꡑ Bernstein, 1901, 'Classenkampf und Compromise' S.162

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만약 현실에서 중간계층이 소멸하지도 않고 오히려 증가한다면 노동자-자본가 계급대립이 첨예화되어 전통적 의미의 산업노동자들의 숫적 증가에 의한 정권장악이라는 에어푸르트 강령에서의 사회주의 전망의 타당성에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베른슈타인에게는 노동자는 아직 사회주의를 달성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인구의 작은 부분이며, 단일한 이해와 요구를 지닌 그러한 덩어리도 아니었다. 이런 발상에서 베른슈타인의 현실 개량적인 전략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사회주의 달성의 대안적인 전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확대였다. ꡒ민주주의는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다. 곧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획득하는 수단이며,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형태이다.ꡓ Bernstein, 1977, 'Die Vo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 Berlin: J.W.H. Dietz S. 134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속에서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공장법의 제정을 두고 보통선거권의 획득에 의해 노동자 권리의 현실적 성장이 가능해졌으며, 좋은 공장법에는 공장 전체를 국유화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회주의가 들어있다고 언급했다. 베른슈타인이 이처럼 중요하게 여겼고 사회주의 실현의 방도라고 본 개량은 과연 어떤 개념인지는 다음 언급에 나와 있다.


바로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작은 활동이다. 현대 노동운동의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센세이셔널한 전투가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씩 더 강인해지는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다가오는 지위이다. Bernstein, 1901, 'Zusammenbruchstheorie und Colonialpolotik: Nachtrag' Zur Geschichte und Theorie des Socialismus: Gesammelte Abhandlungen. S. 246, 247



또한 그는 사회주의의 달성이 자본주의의 위기와 그에 따른 긴박한 붕괴상황이 아닌 작은 규모의 현실적 진전에서 반드시 올 수 있다며 개량 가능성에 대해 낙관주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념은 동시에 사회에 대한 진화론적 신념이 수반된 것이다.

또한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수정주의적 전망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윤리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붕괴론을 부정한 그는 사적 소유권이 보장된 상태에서의 일종의 혼합된 사회주의 개념을 내세웠고,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에서처럼 필연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ꡐ윤리적 요소ꡑ에 의지한 것이다. 그는 정의에 대한 관념이나 윤리적 이상이 사회주의를 이끌어 내는 추동력이며 지속적인 대중행동을 위해서는 ꡐ도덕적 충동ꡑ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사회주의 개념규정은 정치, 사회조직에 대한 규정보다는 사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의 형태로 보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회주의를 ꡐ윤리적 사회주의ꡑ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회주의 규정은 자유주의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듯이 사회주의 달성에서 시민사회에서 독립적인 집단간의 연대성이 그토록 중요하며, 개인의 권리, 동등한 자유와 특권의 폐지 등 윤리적 이상이 사회주의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자유주의와 이념적으로 무척 유사한 것이 된다.


수정주의 비판

베른슈타인이 상정한 수정주의적 사회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의사결정 과정을 통한 입법으로 소유권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이뤄내는 체제이다. 자본주의적 발전과 더불어 ꡐ사회적 연대ꡑ로써 점진적으로 그러한 이상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는 진화론적 신념을 담은 것이다. 그러한 그의 수정주의가 지니고 있는 한계지점은 무엇인가.

먼저 진화론적 관점에서 비롯된 개량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를 들 수 있다. 그는 기존 질서 안에서 개량적인 활동이 ꡐ누적ꡑ되어 가는 것에 대해 과대평가했다. 또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질적 단절점을 무시함으로써 사회주의라는 목적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관점은 생산 및 소유 관계에 따르는 계급모순을 무시한 것으로, 역사를 경제적 진보와 더불어 발전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진화론적 관념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또, 그의 진화론적 관점은 식민주의에 대한 긍정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발달된 선진 공업국가에서 의회주의를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후진지역에서의 사회주의 성립의 가능성이나, 제3세계 식민지국가의 민족해방운동의 진보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베른슈타인에게 식민주의는 선진국의 제도와 산업을 식민국가에 이전시킴으로써 식민지에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발상이다. 한국의 경우에서는 6,70년대 파시즘적 성장을 옹호하는 경제사가들이 역사발전에 있어서 질적 차이를 무시하고 양적 성장을 중심으로, 일제 식민지 시기를 성장의 시기, 근대화의 시기, 6,70년대의 경제성장의 밑바탕이 되는 시기로 규정하면서 긍정적이며 진보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른슈타인의 사상과 부르조아적 자유주의와의 친화성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베른슈타인의 계급관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는 자본가를 생산수단 소유의 관점이 아닌 화폐의 소유여부에서 바라보아, 시민계급과 자본가를 결정적으로 혼동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는 중산계층의 계급적 지위와 역할, 성격을 정확히 규정하지 않고, 신 중간계층의 진보성에 대해 근거없이 낙관함으로써 노동자-자본가간의 원천적 모순을 간과했다. 게다가 그는 노동계급에 대한 이상화된 관념- 부르조아지, 성숙한 노동자, 중간계급간의 사회적 연대라는-을 지녔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실 예로, 그가 사망한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나찌가 집권했는데, 이는 신 중간계급의 진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체를 확인하기 힘든 것이며 얼마나 유동적인 것인지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상의 추상성과 모호함, 그리고 ꡐ윤리적 사회주의ꡑ라는 개념은 독일 사민당의 체제 안주적인 실천을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결국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 구상은, 자본주의 내에서의 사회주의의 점진적 성장이라는 낙관론적 신념에 포박되어 개혁을 진전시키기 위한 현실정치적 고려와 계급정치적 고려를 결여한 ꡐ진화론적 개량주의ꡑ로 귀결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송 병헌, 1999,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 당대, p243




3. 나오며


지금까지 베른슈타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수정주의적 사상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서유럽 사민당의 사상적 좌표가 되어 왔고, 현재는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자기 정체성 상실과, 목표와 수단간의 딜레마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개량주의적 경향은 비단 서유럽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그것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 지면상의 한계와 본인의 역량의 한계로 학생운동권에 한해, 베른슈타인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으로 이 과제를 마치고자 한다.

한국의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먼저 제3세계 국가로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변화를 추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제3세계 국가들이 변혁운동에서 승리하는 과정은 주로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통일전선체와 주로 외세와 결탁된 소수의 지배세력간의 싸움에서 강력한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한 반외세 진영이 대다수 민중의 지지를 근거로 지배세력을 정치적으로 왜소하게 만들고, 전민봉기를 통한 것이었다. 물론 2000년대 한국의 상황을 베트남이나, 대장정 당시의 중국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나,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서유럽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동유럽과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운동권 사이에서는 ꡐ의회환상ꡑ이 일정정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른바 민족해방계열이나, 21세기 진보학생연합 계열, 민주민주계열을 상관하지 않고 나타나는 경향이다. 한국사회를 절차적 민주주의가 보장되어 있고 외부로부터의 영향에도 비교적 독립적인 시민사회로 보는 관점에서 섣부르게 의회주의로 이행한 것인데 이에는 논란의 여지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 구체적 사례를 한 두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97년 대통령 선거, 그리고 2000년대.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우리 국민들의 변화된,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소중한 바램대로 싸워야만 합니다. 국민들의 바램대로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해 민중들이 믿을 수 있는 민주적 정권을 세우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염원과 같이 진정한 국민들의 편,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국민의 대안으로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정치세력화를 해야 합니다. 97년 대통령 선거,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독자후보를 추대하여 선거에 임하고 여기에서 얻은 성과와 신뢰를 바탕으로 민족민주운동의 정당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당을 중심으로 투쟁하며 2000년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집권을 향해 뛰어야 합니다.

내년 대선 투쟁. 전국연합과 민주노총이 공동추대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독자후보와 함께 합시다. 우리의 후보와 함께, 국민들과 함께 자주 민주 통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선전합시다. 그리고 모든 진보진영이 철통같이 단결해 투쟁해서 8%이상을 득표합시다. 이렇게 투쟁하면 내년 대선은 우리 민족민주운동진영 정치세력화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입니다. 1996, 40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자료집 ꡐ민중과 함께 승리하는 한총련ꡑ 김경수, 박상진 선거운동본부, p41 


이들은 민족해방계열 내에서 ꡐ사람사랑계열ꡑ이라고 불리는 소수의견을 내놓았던 사람들로, 92년 대선 까지는 비판적 지지론을 폈으나, 96년 4.11 총선에서는 민족민주운동이 ꡐ국민정당ꡑ건설로 일대 도약을 이뤄낼 것이라고 주장하며, 지역별로 ꡐ진보적ꡑ인 후보들에 대한 지원사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97년 대선에서는 국민승리21 지원사업을 하며 민족해방주류의 입장과 차이를 보였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96년 4.11총선은 정치세력화의 발판이며, 97년 대선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민족민주운동권이 정치세력화 했음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2000년대에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는 단계론적 구상을 보였다.


...하지만 총파업투쟁 이후 초기 사회세력화에 성공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진보정치세력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민중들의 요구들을 반영하지 못하는 보수정치의 균열은 이제 더 이상 봉합되지 않는다. 97년 대선, 98년 지자체, 그리고 2000년 총선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 건설을 향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막힘 없이 흘러갈 것이다. 지역으로부터의 풀뿌리 정치세력화, 중앙정치구도의 보수/진보구도로의 개편은 국민승리21의 진군과 함께 가속화될 것이다. 1997, 41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자료집 ꡐPower of one 세상을 바꾸는 힘ꡑ 박종화, 감동완 선거운동본부, p21


위의 글은 41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서 ꡐ21세기 진보학생연합ꡑ이 펼친 주장의 일부이다. 이들은 90년대 들어 학생운동권에 나타나기 시작한 수정주의적 경향의 대표적인 세력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특히 ꡐPower of one', 즉 개인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다분히 개인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구호를 들고 나왔으며, 올해에는 ꡐ충동ꡑ이라는 구호를 들고 선거에 출마해, 베른슈타인의 ꡐ개인의 도덕적 충동이 사회변혁의 추동력ꡑ이라는 말과 연관됨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또한 사회적 모순을 보수, 진보의 대립으로 보고 그러한 형태로 전선을 재편하는 것이 한국사회 진보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민중당의 실패에서 보듯 -또한 김문수, 이재오, 이부영의 최근 행보로 볼 때- 한국사회에서 보수, 진보의 구도라는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또한 한국사회가 서유럽과 다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 또한 대선에서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지원 사업을 벌여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들이 지지하는, 혹은 지지했던 국민승리21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러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국민승리21의 성격을 함부로 규정해 버렸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이 글에서 국민승리21의 성격을 말할 때 풍부한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는 최초로 총파업을 호소하는 대선후보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현실의 선거운동 과정에서 과연 그랬는가는 구체적 정책, 선거운동 방식, 내걸었던 구호 -사민주의적 정책, 전철역에서 유럽좌파의 상징인 장미꽃을 나눠주고, TV토론회나 선거 팜플렛에서 지나치게 표를 의식하는 점, ꡐ일어나라 코리아!ꡑ라는 구호- 를 미뤄 봤을 때 의문의 여지가 많으며, 오히려 대중추수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지난 대선을 평가하면서 92년 백기완 후보의 득표와 97년 권영길 후보의 득표수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지만 백기완 후보는 주로 도시 인텔리 계층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고르게 득표를 보인 반면, 권영길 후보는 울산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노동자층이 두터운 지역에서 선전했다는 점을 들어 노동자들의 계급정치적 의식의 확대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자의적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울산지역의 높은 득표수가 과연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울산지역의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ꡐ민주노총 위원장ꡑ인 권영길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장 노조, 혹은 민주노총과 진보정당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되는데, 마지막으로 한가지 에피소드를 지적하며 끝마치고자 한다. 이것은 과연 진보정당의 행보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정말로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97년 초 정국을 강타했던 총파업이 시일을 끌면서 민주노총 상층에 부담을 주게 된다. 나중에 국민승리21을 구성하게 되는 일부 민주노총 상층은 그러한 상황에서 이른바 ꡐ수요일파업ꡑ이라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지침을 내리게되는데, 물론 결과는 처참하게 끝났다. 이러한 지침은 아무리 봐도 한국의 산업현장에서 파업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희생을 요구하며 어떤 성과를 남기며 준비과정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타산한 것이라기 보다는 한국사회에서, 그것도 노동악법이 날치기 통과된 상황에서 파업은 어떤 의미였을까. 파업은 노동자의 요구를 내세우는 가장 강경한 수단이고 힘의 균형에서 한번 밀려나기 시작하면 작년 4.19 지하철 파업에서 보았듯이 노조에 상당한 피해를 가져오는 방법이며 그것을 대중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는 아무리 강력한 노조가 있는 사업장이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파업의 장기화에서 비롯된 자신들의 이른바 ꡐ국민여론ꡑ에 대한 부담과 계속 파업을 조직화 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 현장의 요구사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결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사민주의의 딜레마와 관련해서 한번 음미했으면 하는 일화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문헌

송 병헌. (1999)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 당대

피터 게이, 김 용권 옮김 (1994) 「민주사회주의의 딜레마」한울

보 구스타프손, 홍 성방 옮김 (1996)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사회주의」 새남

강 경성 (1992) 「베른슈타인의 맑스주의 수정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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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슬리 리뷰]남한: 정치 투쟁 상황

외국 학자가 본 '남한 정치 투쟁 상황'

아메리카 좌파 경제학자인 마틴 하트-랜즈버그가 지난 8월15일 먼슬리리뷰에서 운영하는 사이트 엠아르진(MR Zine)에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비교적 길지 않은 글을 썼는데, 이 글의 후속편으로 '남한: 정치 투쟁 상황'이라는 글을 얼마전에 다시 엠아르진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이 글은 우리로서는 지극히 평이한 수준의 글입니다. 하지만 외국 학자의 우리 상황 이해가 어느 수준인지 판단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읽어볼만 할 겁니다. 또 혹시라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측면이 담겨 있을 지도 모릅니다. 길지 않기에 번역해봤습니다.

동북아시아에 대한 글을 주로 쓰는 하트-랜즈버그는 우리에게 비교적 알려진 인물입니다. 3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한국 100년의 역사를 아메리카의 개입과 관련지어서 정리한 책인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당대, 2000) 폴 버캣과 함께 쓴 논문을 모아놓은 <일본경제 들여다보기> (미토, 2005), 역시 버캣과 함께 쓴 것으로 중국의 경제체제가 사실상 자본주의라고 비판한 책인 <중국과 사회주의> (한울, 2005)가 국내에 출판된 책들입니다. 하트-랜즈버그는 얼마전에는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 번역문 보기 --


남한: 정치 투쟁 상황

(South Korea: The State of Political Struggle)

저자: 마틴 하트-랜즈버그(Martin Hart-Landsberg)

출처: 먼슬리리뷰진 2005년 9월5일 (원문 mrzine.monthlyreview.org/hartlandsberg150905.html)

외환 위기 이후 남한 경제의 경로는 일하는 이들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리고 남한 노동운동과 좌파운동은 진행중인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편을 격퇴하기 위한 아주 힘든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운동이 직면한 도전 몇가지를 논할 것이다. 이는 전세계 노동자와 활동가들도 점점 더 이와 비슷한 도전에 직면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의 투쟁에 대해 알고, 그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집단적 지혜를 연마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점은 특히 남한의 경우가 더 그런데, 지당한 것이지만 남한 운동은 용기와 전투성으로 아주 유명하기 때문이다.

투쟁의 지형(Terrain of Struggle)

남한의 외환 위기 이후(1997-98년) 경제 구조 개편은 외국인 투자 및 수출에 대한 의존도를 아주 높였다. 남한 재벌들이 경제 위기로 약화된 정도인 데 반해, 중소기업은 최대 시련을 겪었다. 예를 들어 많은 재벌들은 외국 기업들과 연합을 형성했고 이는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게 해줬다. 남한 국내외 경제 지도자들이 최우선 순위로 삼은 것 한가지가 노동 운동 약화이다. 그들은 “노동시장 개혁”이 없다면 투자와 생산을 중국으로 옮겨가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경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친 노동계 인사로 여겨졌음에도, 이런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예를 들면, 정부는 기업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걸 더 자유롭게 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경제 위기 이전의 42%에서 현재 54%로 급격하게 늘었다. 그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53%에 불과하다. 아주 실제적인 자본 이탈 위협과 함께 이런 조처들은 거대 제조업체들이 노동 비용을 줄이고 이윤을 높일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기업의 이윤이 새로운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성장률은 낮은 수준에 머물고 이는 정부로 하여금 기업에 더 양보하도록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미 저임금과 불평등 및 빈곤 확대, 불안 심화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은 어두운 미래를 직면하고 있다.

민주노동조합총연맹(KCTU)

한국의 주도적인 노조 총연맹인 민주노총은 (더 보수적인 노총이 하나 더 있다) 노동자의 이익을 지키려 애쓰고 있다. 민주노총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촉구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사용 확대를 위한 새로운 법률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고, 날로 늘어나는 이주 노동자의 노조설립 권리와 그들에 대한 보호를 지지하며, 공공부문 노조의 완전한 권한 쟁취를 위해서 싸웠다. 최근에는 노동부 관련 모든 자문 위원회에서 탈퇴했다. 불행하게도 이런 노력은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뒀다. 그리고 최근 노조 가입률이 11%까지 떨어지면서 정치적 비중도 줄고 있다. 노조 활동가들이 다음 단계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와중에 그들이 직면한 주요 쟁점이 두가지 있다. 민주노총 내부 조직 문제와 정치적 지향 문제다.

구조적 쟁점들:

노조 조합원들은 노동자들의 더 넓은 관심사로부터 날로 고립되고 있다. 이렇게 되는 주된 이유는 남한 노조가 기업별 노조라는 점이다. 그리고 노조조직률은 기업의 규모와 연관되어 있다. 노동자 1000명 이상의 거대 사업장들은 노조가 있는 전체 기업의 2.7%를 차지하는 반면, 이들 기업 노동자들이 전체 노조 조합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1.2%에 달한다. 그래서 민주노총 조합원 대다수는 거대 제조업체 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에 비해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향유한다.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지위에 있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점점 더 적대적이 되어가는 노동 환경에 직면해 있다. 대기업들은 공격적으로 인력을 줄이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하청을 통해 인력 감축을 달성하고 있다. 임금과 각종 혜택의 감축도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 소속 노조들은 이런 행위에 저항하려 시도할 뿐 아니라 노동현장 내 권한 강화도 꾀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 노조는 투자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최근 이 노조는 성과급 분배에 발언권을 요구하면서 압박 수단으로 경고 파업을 선언했다. 기아차 노조는 이사회 참여와 인사위원회 노사 동수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한 투쟁들이긴 해도, 이들 노조가 개입하고 있는 쟁점들은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생존에 관련된 쟁점들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들이다.

기업별 노조체제는 중소기업 노조 조직률을 높이려는 민주노총의 노력도 저해한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활발한 조직화 활동 또는 노조 활동을 유지할 인적, 재정적 자원이 없다. 민주노총 자체도 이들을 도울 여력이 없다. 노총은 자원이 제한되어 있고 대기업 노조들은 자신들 소속 조합원의 이익과 직결되지 않는 활동을 위해 노조기금을 공유하기를 꺼린다.

이런 상황이 민주노총 내부에서 조직 개편의 필요성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촉발했다. 많은 활동가들은 민주노총을 강화해 노총 차원의 노동교육 프로그램과 함께 조직화 활동을 후원하고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또 이 단계에 적합한 체제로서 산별 노조 구성을 요구한다. 다른 활동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 구조가 가장 민주적이고 노동자들의 필요와 이익에 가장 잘 반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쟁은 어떻게 하면 노동계급 대표성과 활동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포함한 노조 형식과 목표에 대한 중대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정치적 쟁점들:

다른 쟁점 하나는 반자본주의 운동 형성에 대한 민주노총의 자세다.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비판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남한 경제의 급진적 구조 개편 운동을 전개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많은 면에서 이 점은 1990년대 초 노동 활동가들이 좌파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노조의 권한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두기로 한 결정의 결과다. 이 결정은, 좌파에 대한 정부의 무자비한 공격과 소련의 붕괴, 북한과 미국의 핵 문제를 둘러싼 긴장 고조라는 상황에 대응해서 내려졌다. 1995년 마침내 민주노총이 출범했다.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은 3년 뒤인 1998년이지만 말이다. 경제가 확대되는 동안엔,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생활조건과 노동조건 개선 압력을 넣을 수 있었고 이는 꽤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경제 위기 이후 정부와 기업에서 노조가 경제 회생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조합원 문제에만 집중한 정책이 역효과를 낳았다.

많은 노동 활동가와 정치 활동가들은 민주노총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려 했으면 폭넓은 좌파 정치세력과 관계를 복원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이 좌파 정당의 창출을 지원하길 원한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은, 이런 시도는 시기상조이고 자원과 활동을 노동운동에서 다른쪽으로 돌림으로써 민주노총 자체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하튼, 상당수의 활동가들은 민중승리21을 구성해 1997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고 이듬해 지방선거에 여러 후보를 출마시킴으로써 일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대한 민주노총 지도부의 지원은 제한적이었고 득표도 많지 않았다. 2000년 민주노총의 더 큰 지원을 받는 가운데 더 많은 활동가 집단이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10석을 확보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은 상당한 승리를 얻었다. 이 승리는 또 다른 문제들을 제기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적절한 관계는 무엇이며,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정책 일반, 특히 노동 정책에 대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민주노동당(DLP)

민주노동당은 자신들의 목표를 “민중이 완전히 참여하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진보적인 정치적 힘”을 갖추고 확장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공약은 “사회주의의 원칙과 이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가운데 “국가 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걸 추구한다고 선언한다.

선거에서 이 당이 거둔 성공의 상당 부분은 유권자가 후보와 정당에 각각 투표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얼마전 선거제도를 개혁한 덕분이다. 국회의 경우, 299석 가운데 243석은 지역구에서 직접 투표로 결정되고 46석은 정당명부제에 의한 투표 결과로 배정한다. 민주노동당은 정당명부제 투표에서 13% 이상을 득표함으로써 8석을 확보했고 지역구에서는 2석을 얻었다. 두 주요 정당의 득표 차이가 적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의석수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 이후 15-20%의 지지율을 확보하면서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이제 국회내 논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 새로 확보한 의회 내 대표권이 중요하긴 해도 활동가들은 여전히 민주노동당이 새로 확보한 영향력을 가장 잘 활용하는 문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입법 발의와 개혁 관련 협상에 개입하는 걸 피하고 대중 운동의 목소리가 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진보적인 의제를 촉진할 수 있을 때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유주의 성향 집권당과 함께 일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컨대 민주노동당은 무상 교육과 보편적 의료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정부의 경제 정책을 한목소리로 비판하지만, 상당수는 노 대통령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대북한 정책 결정을 지지한다.

민주노동당의 미래와 관련된 쟁점들:

민주노동당은 선거를 중요하게 보고 선거에서 힘을 강화하려고 시도해야 하나, 아니면 선거를 국회내 교두보를 유지하면서 정치 관련 논쟁을 날카롭게 하는 도구로 활용해야 하나? 현재 이 당은 당비를 납부하는 회원이 6만명이다. 구성으로 보면 45%는 산업 노동자들이고 35%는 사무직 노동자들이며 20%는 학생과 (소규모 농민 대표자들을 포함한) 기타 세력이다. 당은 내년까지 당원을 10만명 이상으로 확대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을 당원으로 확보하는 데 민주노총에 의존해야 하는가, 아니면 독자적인 접근 통로를 구축해야 하나? 특정 사회 계층에서 당원을 확충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나?

국회내 지위 덕분에 민주노동당은 정책 연구소를 지원할 국고 보조를 받고 있다. 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는 현재 전임 연구원 6명을 두고 있다. 연구소의 책임은 당이 “한국 사회의 진보에 기여할 사회, 정치, 경제 대안 모델을 제시하는” 걸 돕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사회 질서로 이행하는 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관련된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현재 이 연구소는 (브라질에서 시행된 것과 같은) 주민참여 예산제도와 (아메리카에서 찾을 수 있는 것같은) 생활임금 조례 같은 대안적 사회 실험을 조사하고 있다. 이런 조사활동이 건설적인 정치 공약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반면 변화에 대한 개량주의적 시각을 강화할 위험도 있다.

위에서 주목한 과제와 문제들에 대한 단순한 답은 없다. 사실 이것들이 서로 얽혀있는 문제들이라는 특성은, 이 문제에 답하려 시도할 때는 전반적인 전략적 관점의 안내를 받아야 하되 이 전략적 관점은 대중적 투쟁에 계속 중요하게 참여하는 걸 통해서 형성하고 바꿔가야 한다는 걸 상기시킨다. 기대하건대, 한국의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유용한 지침을 제시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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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하트-랜즈버그는 오레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루이스 앤드 클라크 칼리지 경제학과 교수다. 그의 저서로는 (개발을 향한 질주 -남한내 경제 변화와 정치 투쟁) (한국어판: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도서출판 당대, 2000)가 있다. 공저로는 (폴 버킷과 함께 쓴) (한국어판: 중국과 사회주의, 한울, 2005)가 있다. (이밖에 하트-랜즈버그가 폴 버킷과 함께 쓴 논문 세편을 번역한 <일본경제 들여다보기> (미토, 2005)도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다.)

번역: 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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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과 그람시 - 이종래

Antonio Gramsci의 생애와 사상 -노동운동과 그람시

                                                 


                                           이종래(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1. 들어가면서: 그람시 사상의 배경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반도의 최남단인 자르디니아 지방인 알레스(Ales)에서 1891년 출생하여 1937년에 죽었다. 이태리 공산당 활동을 한 대가로 1927년부터 1937년까지 만 10년간의 수형생활을 하였으며 이 기간에 '옥중수고'라는 저작을 남긴 맑스주의자이다. 그의 아버지가 낮은 직위의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던 사실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의 어린시절은 가난과 질병으로 점철되어 있다. 즉 그는 어린시절 얻은 질병으로 인해 곱추라는 신체적 장애까지 얻게 되지만 당시 맑스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소아병적 편협에서 비롯된 사상적, 정신적 불구에서 벗어난 사상가로 평가된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보면 그람시의 정치적 입장은 너무나 예외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예외성과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한  생애사적 연구는 여전히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람시의 출생지역인 남부 이태리의 사회적 상황을 먼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남부 이태리는 산업화된 북부와는 판이한 농업지역이다. 그람시 스스로가  강조한 '남부 이태리 문제'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경제적인 갈등을 봉합하는 현상에서 출발한다. 이 지역에서 카톨릭이라는 종교는 사회적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된 북부의 노자간의 계급대립과 달리 봉건적인 지주와 소작인 관계가 여전히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그람시는 남부 이태리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인습과 관념과의 투쟁 없이 불가능한 사정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남부 이태리 문제에 대한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사회주의 운동 전체로 이전되면서 이른바 전략과 전술의 수립으로까지 확장된다. 다시 말해 사회구조와 행위주체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을 메우기 위한 의식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즉 그람시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일상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변혁적인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의 도입은 주체의 자각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람시가 자신의 인생을 "3배 혹은 4배로 뒤떨어진 지방민"이기 때문에 "후진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옥중수고 15: §19)1)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자평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상생활에서의 인식과 활동을 변화시키는 계기의 문제를 문화와 결합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그람시를 문화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칭호를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람시의 이런 시도는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나온 경험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람시는 경험에서 체득된 생활의 원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규범과 질서로 사회화되는 장을 '시민사회'(società civile)로 개념화한다.2) 하지만 동유럽과 서유럽사회의 차이를 시민사회의 역사적 존재유무로 구분하였다고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을 협소화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람시의 본래적 모습인 실천가로서의 모습보다 그에 대한 평가가 이론가로서 국한될 가능성이 커지기도 하지만 그람시의 본래적 관심사는 노동자 계급운동이었다는 사실이 호도될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먼저 그람시의 생애를 짧게나마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된 '옥중수고'에서 '남부 이태리문제'에 관한 글들은 이태리에 국한되는 문제를 가진 반면 서유럽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한 '포드주의' 혹은 '아메리카주의'라고 표현한 주제들은 국내에 소개조차 변변히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노동운동가로서 안토니오 그람시를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2. 청년기의 그람시: 대학시절



그람시의 청년기는 1912년 투린 대학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3) 그람시는 이태리??그리스 문학, 역사학, 철학, 언어학, 법학(사법)을 전공과목으로 택한다. 이 과목 중에서 언어학을 첫 번째 전공으로 한다. 이후 자신의 정치이론에서 대표적인 개념으로 알려진 '헤게모니'도 언어학에서 차용된 개념이라는 사실도 알고 보면 바로 이런 전공과목의 선택으로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4) 그리고 전공과목들의 선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인문학에 대한 그람시의 높은 관심과 반대로 경제학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런 대학시절 전공과목들의 조합은 이후 2차 인터내셔날 시기에도 그람시가 경제주의로 기울지 않고 문화적 관심을 강조한 이유를 밝혀주는 논거로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당시 노동자계급 운동에서 경제주의적으로 환원하는 우파와 문화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좌파로 쉽게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람시의 독자성은 두드러진다. 그람시의 이런 독자성은 유년시절의 경험과 함께 대학시절의 학업과 정치활동에서 토양이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이후 그람시의 사상을 가능하게 한 토대로 보여 진다.  


그람시는 대학시절 새로운 지식습득과 더불어 실천 활동을 병행한다. 1913년 이래 그람시는 이태리 사회당(PSI)의 당원이었고, 1914년 그는 사회당내 '변혁적 좌파그룹'에 합류한다. 1915년 그는 졸업이후 대학이나 중등학교에서 이미 보장된 교수나 교장과 같은 좋은 직장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지만, 사회당 중앙위원회에서 발간하던 잡지 'Avanti'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그는 이 사회당 기관지에 지방정치, 시사문제 그리고 각종 문화 비평적인 글을 주로 발표한다. 그람시가 1916년에서 1920년 사이 170편에 달하는 연극평론을 발표한 것도 바로 이런 활동의 연장선상으로 보여 진다.


그람시는 1915년 키엔탈(Kienthal)과 1916년 짐머발트(Zimmerwald)에서 열린 반전회의에서 레닌의 정치적 입장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정통 맑스주의와 교감을 시작한다. 물론 이전의 시기에도 그람시는 속류 맑시스트들의 글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통 맑시스트의 이론을 처음으로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통 맑스주의와의 만남이후 그람시는 맑스의 글을 정독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1918년 5월 4일 사회당 투리노 시지부의 주간지에 맑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된 '우리의 맑스'에서 그람시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자신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람시는 먼저 정치경제학에 담겨진 이념이 순수한 진실로서 의미가 있기보다 그 이념이 경제적 현실의 부당성을 알리고 폭로하는데 유용하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즉 정치경제학적 이념은 "자의적인 성격"과 "허구로 가득 찬 종교적이거나 사회학적인 추상"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뿐만 아니라 실현될 수 있는 이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그람시는 주장한다(Gramsci, 1918: 37).


여기서 우리는 2차 인터내셔날 시기 자본주의 경제의 자연붕괴에 따른 국가소멸론이 유행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람시의 주장이 지닌 의미성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경제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자본주의가 자연 붕괴할 때까지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보다 자본주의 모순의 본질인 경제적 착취 구조를 널리 알려 사회적 설득력을 높여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실천적 활동이 당면과제라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대한 인식은 맑스주의를 절대적 진리로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활동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맑스의 정치경제학은 종교적인 진리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활동을 밑받침할 수 있는 정당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맑스주의의 탁월성은 존재한다고 그람시는 주장한다. 그람시의 이런 맑스주의 해석은 주의주의(Voluntarismus)적 전통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노동자 계급운동에서 자신의 입장은 주의주의적 운동과 거리를 분명히 두면서 자신만의 독자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3. 노동운동가로서 그람시



러시아에서 소비에트혁명5)이 일어난 1917년에 그람시는 세계 1차대전(1914-1918)으로 야기된 자본주의 위기국면에서 노동자 계급의 적극적 개입은 절박할 뿐만 아니라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한 '화해할 수 없는 혁명 그룹'에 가입한다. 그람시의 이런 정치적 입장은 당시 사회당이 취한 전쟁 불개입이라는 소극적 태도에 대한 명확한 반대가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는 이 혁명 그룹의 조직원이자 이태리 사회당 투린 시지부의 책임자로서 1919년 6월 기업내부 노동자 조직을 러시아의 소비에트 모형에 따라 재편할 것을 제안한다. 즉 그람시는 이태리에서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제안한 것이다. 그람시의 이런 제안은 1920년 투린 시에서 2십만 명이 참가한 총파업으로 현실화되지만, 그람시가 주도한 '노동자평의회'운동은 독일의 칼 립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1919)와 로자 룩셈부르그(Rosa Luxemburg: 1871-1919)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6).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이 가진 급진적인 '기동전'에 반대하여 '진지전'적인 사고를 그람시는 이미 그 당시에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만 한정되었다면 그람시는 이 운동을 문화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즉 이태리 '노동자평의회'운동의 기관지인 'Ordine Nuovo'는 정치적인 선전??선동잡지가 아니라 문화 잡지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람시가 노동자평의회 운동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노동자적인 사고, 표현방식과 태도라는 점이다. 여기서 기존의 지배질서가 묻어 있는 사고와 표현방식, 태도가 아닌 노동자적인 혁명적인 사고, 표현방식과 태도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가 혁명의 관건이라는 그람시의 문제의식이 돋보인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단을 모태로 하는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은 1918/19년에 독일 공산당(KPD)을 만드는 계기로 되듯이, 이태리에서도 노동자평의회운동은 1921년 이태리 공산당(PCI)이라는 조직을 만드는 초석이라는 점에서 두 운동의 공통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조직건설은 러시아의 소비에트 혁명의 방식이 일반화되던 시기에 이른바 전위정당 건설이 시대적으로 요청된다는 사실에서 이해가 되긴 하지만, 노동자평의회운동의 활동내용의 차이는 이후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에서 전위정당의 역할과 내용을 두고 논쟁거리로 된다.



4. 정치가로서 그람시



1921년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의 지도 아래에서 이태리 공산당(PCI)이 건설된다. 당시 이태리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운동이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보르디가의 이태리 공산당은 파시즘을 특별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당시 이태리 공산당 지도부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어차피 부르조아 계급독재의 사회이기 때문에 파시즘은 그 다지 대단한 위협이 아니라 정상에서 조금 벗어난 변종일 뿐인 것이다. 이런 정세인식에 따라 보르디가의 이태리 공산당은 볼셰비키 혁명과 같은 군사 쿠테타를 일으킬 수 있는 전위정당화가 주요한 당면과제라고 보았다. 즉 파시즘에 반대하는 계급연합의 결성이 당면한 일차적인 과제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보르디가는 부르조아적인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계급연합 보다 노동자 계급내부의 단결력과 응집력을 높이는 도구로서 전위조직의 건설이 당면 과제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보르디가의 이런 정세인식과 달리 그람시는 노동운동에 대해 파시즘이 지닌 위협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대중의 동원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파시즘 반대를 위한 대중동원 투쟁은 사회당, 부르조아 민주주의자와의 연합으로 더욱 사회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입장이 나오게 된다. 바로 이렇게 해당 시기의 단기적인 정세에 대한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식과 운동전망을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명목적인 이런 차이는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실제적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람시가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주도하였을 때 그의 정치적 입장은 1차 대전이라는 자본주의 위기상황을 방관으로 일관하던 당시의 좌파 주류세력에 반대하여 노동자 계급의 적극적 투쟁을 조직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주의주의적 전통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이 주의주의적 흐름이 급진화된 소수 전위정당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그람시는 대중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의주의적 흐름과 일정 정도 차이를 분명히 한다. 대중이 주체가 된 투쟁이 없으면 서유럽 사회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그람시적인 인식은 바로 이 시기에 획득된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을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의 단순한 표현양태로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반동의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인식은 시대를 앞선 그람시만이 가진 탁월성이다.


그람시가 미리 예측한 노동운동의 위기상황은 1922년 10월 무솔리니가 '로마로의 행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사실로 드러난다.7)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1926년까지 의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긴 했지만 이태리 공산당에 대한 합법??반합법??불법적인 백색테러를 벌인다. 이런 정세에서 그람시는 1922년 이태리 공산당 대표로 임명되어 코민테른의 본부로 이동하여 잠시 화를 면하지만, 1923년 파쇼정권은 공산당 지도부인 보르디가와 그람시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면서 탄압을 본격화한다. 파쇼정권의 탄압으로 당의 유지가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1924년 4월 그람시는 면책특권을 지닌 의원 신분을 가지고 이태리로 돌아온다. 같은 해 코모(Como)에서 비밀리에 열린 이태리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그람시는 보르디가의 종파주의적 노선을 강력히 비판하지만, 대의원 다수를 획득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같은 해 8월 코민테른에 의해 이태리 공산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된다. 이로서 그람시는 정치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람시는 당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반파쇼 연합을 위해 야당들에게 '반(Anti)의회'를 제안하지만 성사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람시는 반파쇼 연합의 필요성을 계속해서 주장하였고 농민과 노동자의 계급연대를 최종적인 목표로 설정한다. 이 노력은 1926년에 당내에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즉 그람시의 노선이 이태리 공산당 3차 전당대회에서 다수파의 지위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이태리 공산당은 전위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지향하는 방향성의 전환을 하게 되었지만, 파쇼정권은 같은 해에 의회를 해산하면서 공산당을 불법화한다. 그람시는 1928년 재판에서 20년의 형을 판결 받는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람시는 1928년부터 집필허가를 얻어 사상의 편린이 담긴 짧은 글들을 쓰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짧은 그들의 모음집이 이후 '옥중수고'로 출판되면서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로 된다.8)


    


4. 사상가로서 그람시



그람시가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에 끼친 공헌과 평가는 우선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그람시는 서유럽 맑스주의의 원조로서 이야기된다. 이전의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구권 사회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그람시가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이후 정통 맑스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지금의 상황에서 그람시 연구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 정통 맑스주의와 서유럽 맑스주의의 차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대비해 봄으로써 지금의 노동운동이 처한 대안 상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그람시 연구를 통해 노동운동에게 하나의 대안적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그람시 연구는 그람시의 사상적 공헌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새롭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그람시가 맑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차용한 많은 개념들이 현대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회자되면서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현대 사회과학에서 학문적으로 빠뜨릴 수 없는 중요 개념인 '시민사회', '헤게모니', '역사적 블록', '진지전', '기동전', '포드주의'와 같은 개념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람시가 개발한 개념들 중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분석을 위한 개념보다 문화에 대한 개념이 현대사회에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이다.9) 그람시하면 문화주의자라는 애칭이 의례적으로 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통속적인 분류법은 그람시 이해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왜냐하면 그람시가 문화에 관심을 가진 까닭은 문화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시 노동자 계급의식과 노동조합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문화적 접근법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람시는 자본주의적 생산력발전이 가져오는 상부구조의 변화는 노동자 계급의식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즉 그람시는 현대자본주의 발전은 노동자 계급운동에 부정과 긍정이라는 이중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당시의 속류 맑스주의자들은 기술발전에 무한한 신뢰를 주었지만 그람시는 기술발전에 부응한 생산력 상승이 계급운동의 성장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람시는 기술발전이 노동자 운동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면서 기술발전에 대한 신뢰는 아무런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논박한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그의 탁월성을 알 수 있다.


노동운동의 전망에 대한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먼저 '미국주의와 포드주의'에 대한 짧은 글들에서 파편적으로 실려 있다. 그람시는 포드 자동차회사에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한 고임금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에 우선 관심을 가진다. 여기서 그는 포드기업의 고임금정책이 산업발전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주장에 대해 먼저 반론을 제기한다. 그 이유로 그는 포드기업 종사자의 높은 이동성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빈번한 직장이동이 일어나는 포드기업의 고임금정책은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과 결과를 가지는지에 주목한다. 먼저 그람시는 포드의 고임금정책은 노동자 계급의 내부분화를 촉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즉 기업은 평균노동시간이 동일한 조건에서 생산성 증가를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유형의 숙련 그리고 노동력의 양과 사용방식의 변화를 강제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드 자동차회사의 고임금을 그람시의 표현대로 하면 "기업이 노동자들에게서 차별성을 요구"(옥중수고 9: 1129)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인식에서 그람시는 포드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합리화를 꾀한 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포드주의는 노동자 계급의식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그람시는 포드주의적 대량생산방식이 기업과 노동조직의 합리화로 이어져 생산체제의 변화를 수반하지만 이것이 노동자의 삶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 중심으로 자본운동이 전환하는 사회적 이행과정에서 자본주의적 모순은 심화되면서도 기술발전으로 인한 물질적 분배는 더욱 용이해져 노동자 계급의 체제내 포섭이 강화되는 이중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노동자들을 체제의 이익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자본주의의 본래적 모순은 더욱 은폐될 수도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의 생존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도 있다는 그람시의 지적은 미국주의적 문화적 비평으로 더욱 강화된다. 그람시는 유럽과 미국사회의 차이를 먼저 개인주의적 전통의 유무에서 구한다. 유럽사회에서 이해관계에 기초한 경제적 개인주의는 다양한 이해집단을 형성하는 근거가 된다. 즉 유럽에서는 전통적인 성직자, 관료, 대지주, 대상인과 같이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집단의 형성이 불가피한 반면, 미국에서 이해집단은 생산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노동자와 자본가로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이다.10) 다시 말해 구체제의 잔존물인 사회집단이 부재한 미국은 자본운동의 진행에 따라 사회적 재편이 그 만큼 더욱 용이할 수도 있다고 그람시는 평가한다. 즉 유럽과 비교하여 산업생산에 기초한 금융자본의 분배와 축적의 기제가 미국에서는 더욱 쉽게 적용되면서 미국적 실용주의의 전통이 형성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다.


자본이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 중심으로 이행하면서 자본운동의 고도화는 진행된다. 금융자본주의의 단계에서 자본운동은 수와 양의 계산에 바탕을 둔 자본 합리성으로 현상적으로 드러난다. 게다가 이 단계에서 자본운동은 시장의 무계획성까지 조절 예측하려 한다는 점이다. 즉 자본주의가 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면서 시장의 비예측적인 성향 역시 제어될 수 있다는 평가한 그람시는 당시 서구자본주의를 '계획된 경제'로의 진입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당시 힐퍼딩(Hilferding)이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자본운동이 중심이 이동하면서 자본주의는 자신의 얼굴을 '조직된 자본주의'(Organisierter Kapitalismus)로 바꾼다는 주장과 동일한 맥락에 놓인다. 쉽게 말해 금융자본이 중심이 되면서 자본주의는 자본 합리성에 의해 운용될 수밖에 없다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수요에 대한 예측에 기초한 대량생산방식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람시는 노동자가 개성을 상실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고 본다. 노동자의 운명이 테일러가 말했듯이 마치 '옷 입은 고릴라'와 같은 대량생산 노동자로 전락할 가능성을 그람시는 미국에서 본 것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런 비관적 전망과 더불어 그람시는 미국주의의 유럽적 적용은 자본주의 발전에서 또 다른 변종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걱정과 염려를 한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 노동자 계급의 탈계급화 현상은 또 다시 굴절될 가능성이 있다고 그람시는 평가한다. 즉 미국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적 세력인 대토지를 소유한 전통적인 지주계급과 대자본이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 간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고 그람시는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전통적 부르조아지와 신생 부르조아지간의 계급연합이 형성되면서 파시즘적인 국가조합주의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람시의 파시즘에 대한 해석은 정통 맑스주의적 해석과 달리한다. 즉 파시즘의 등장을 자본주의가 지닌 내재적 모순의 결과로 해석하는 정통적 해석과 달리 그람시는 자본과 전통적 지배세력이 야합하는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지배계급 내부의 타협은 자본주의의 체제위기를 극대화하려는 노동운동의 급진성을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를 가지면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져온다. 그람시가 당시 코민테른의 지배적 견해와 달리 이태리에 등장하기 시작한 파시즘을 노동운동의 위기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파시즘의 도발에 대해 노동자 계급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제보다 자유민주주의적인 체제의 유지가 당면의 과제라고 그람시는 강조한다. 전통적 지배계급과 신흥 지배세력이 연합하여 사회적으로 세력을 행사하는 '헤게모니'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운동은 우선 권위적 국가조합주의의 대응형태인 '사회적 조합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타당하다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이런 '사회적 조합주의'의 건설이 노동자 계급운동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그람시는 전통적 맑스주의 내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던 개량과 변혁이라는 이분법적 인식구조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발전은 노동자 계급에게 의도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개량이 아닌 변혁적 내용을 담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람시는 주목한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서 포드주의가 일반화하면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이 순환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생활방식은 '물질적 궁핍'(Knappheit: Marx)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노동자의 전투적이고 적대적인 계급의식은 시민사회적인 규범과 질서의식으로 바뀔 수도 있다. 즉 생산방식의 변화는 노동자 계급에게 바로 동전의 양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수동혁명'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 놓여 있다. 소비에트 혁명과 같이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여 주체적으로 '능동혁명'을 이룩하는 것과 반대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변화에 순응 혹은 적응하면서 계급적 자의식을 상실한 노동자 대중이 형성될 가능성을 그람시가 가장 먼저 본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집단주의적 전통이 경제적 개인주의와 접목하면서 노동조합운동이 더 이상 확대 재생산되지 못하고 조직적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현재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람시의 우려가 기우가 아닌 현실로 벌어질 수 있는 고민임을 알 수 있다.


그람시가 말하는 포드주의란 단순반복 노동에 길들여진 테일러적인 노동자들이 대중화하면서 기계적인 노동에 길들여진 무리로서의 노동자들이 새로이 형성된다는 의미이다. 즉 노동력의 질과 조직이 평준화??균질화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집단성은 해체되면서 무리화되고, 이들의 존재양식은 자본운동에 종속되면서 노동자 계급내부의 직업구성은 더욱 분화, 전문화되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이후 노동조합운동의 점진적 무력화와 더불어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층의 해체가 사실로서 증명된 서구 사회발전에서 그람시의 예측은 현실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람시가 서구 사회발전을 '포드주의'라는 짧은 용어로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상가로서 그람시의 면모를 숨김없이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비관적 예측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대항하는 노동운동의 방향성까지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천가로서 그람시라는 또 다른 면모도 아무런 여과 없이 드러날 수 있다.   


정통 맑스주의자들의 기대와 달리 그람시는 현대자본주의의 생명력은 앞으로 더욱 연장될 수 있다고 전제면서 노동운동에게 새로운 대응을 요구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람시는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포드주의가 노동조합과 노동자에게 사회적 조건으로서 탈계급화의 경향성을 가져온다면, 이에 대응하는 노동운동은 새로이 형성된 공간에서 자신의 활동력을 강화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을 수밖에 없다. 즉 포드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상대적 고임금을 보장하면서 '강력한 내수시장'을 가져온다. 게다가 기업의 입장에서도 내수시장의 증대는 이윤확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반대의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내수시장의 형성은 '비생산적인 부문에 종사하는 중간층'을 만들 수 있게 한다. 시민사회에서 자기 발언권을 지닌 시민층이 형성되면서 자본주의가 지닌 내재적 모순 혹은 노자대립에 따른 필연적 '재앙'은 완충되는 효과가 생긴다. 즉 파시즘으로 대변되는 국가조합주의가 우연이 아닌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인 까닭도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중간층의 지지를 누가, 어떻게 획득하는가에 따라 사회적 권력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기존의 지배세력이 중간층의 획득을 얻는다면, 자본주의는 중장기적으로 생존이 연장될 수 있다. 즉 당시 코민테른의 공식적 입장과 달리 그람시는 미국적인 포드주의가 유럽사회에 적용될 수 있다고 전망하면서 노동운동의 대응은 소비에트 혁명과 같은 '기동전'이 아닌 장기적인 '진지전'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노동운동이 지도적 혹은 지배 계급으로 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계급연합의 체계인 '역사적 블록'을 만들어 내는데 달려 있게 된다. 하지만 그람시는 이 계급연합을 무조건적으로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람시는 계급연합이 가능하려면 노동운동이 자본주의와 시민적인 국가에 반대하는 대중적 동원역시 허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11)


  


5. 결론: 그람시 다시보기



똘리아티는 1927년에 이미 그람시를 '노동자 계급의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똘리아티는 이태리 공산당기관지인 'Lo Stato operario'에서 그람시를 공개적으로 처음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 당의 역사는 앞으로 계속해서 쓰여져야 할 것이다. 누가 이 역사를 쓰던지 간에 특별한 정치적 사건을 뛰어 넘으면서 전위로서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형성을 가능케 한 위대한 노선을 성립한 공헌은 안토니오 그람시에게 있다"(Togliatti, 1967). 똘리아티의 이런 평가와는 전혀 달리 그람시는 스스로를 남들에 비해 내세울 것 없는 3배 혹은 4배나 뒤떨어진 지방출신임을 스스럼없이 밝힌바 있다. 바로 이런 자신에 대한 평가는 체포된 이후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지금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에 나는 조용히 다시 내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게다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즉 사람은 그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뭔가를 계획하고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나의 도덕적 입장은 가장 훌륭하다고 본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나를 악마로 여기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나를 성자로 떠받들고 있지만 나는 순교자나 영웅이 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자신의 신념에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 신념을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극히도 단순한 보통사람일 뿐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타인이 내리는 극찬에 대해 그람시 자신이 내리는 자신의 평가는 지극히도 담담하면서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평가와 달리 그람시의 진면목은 1989년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전의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정통인양 주장한 '기동전'의 비극적인 결과가 그대로 드러나면서 서구 사회과학계에서 그람시 다시보기가 이어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이다. 게다가 동구권과 비교하여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이 지닌 특수성을 강조한 그람시의 사상적 편린은 다시 부메랑이 되어 동구사회의 일반적 문제로 회자되고 있다.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원인 중에 이른바 시민사회의 부재가 이유로 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시민권적인 권리마저 획득하지 못한 노동자 계급은 자신이 누려야 할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에 앞장섰다는 역사적 역설마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자보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법??제도적으로 훨씬 나은 노동조건을 보장받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체제를 배신한 이 행동들의 기원은 시민사회의 부재보다 다른 이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가장 주요한 이유는 현실과 이론과의 괴리에서 발생한 간극이 체제의 위기로 나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설명 가능하게 하는 이론의 구성은 그람시만의 고민이 아니라 노동운동을 거쳐 간 모든 이들의 고민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그람시의 시도는 처음이 아니라 모두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람시 다시보기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 이태리의 특수한 조건을 염두에 두면서도 매 시기마다 자신의 견해를 끊임없이 펼치는 그람시의 태도는 노동운동에 관심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태도일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일반적 의미조차 얻기 어려운 러시아적 모형을 반복 재생산하려는 일각의 시도가 무의미한 이유를 찾는 작업은 그람시 다시보기를 통해 쉽게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종교적 신념과 같은 믿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변화를 모색하려는 행위로 발현된다는 그람시적인 해석이 의미를 가진다. 노동자 계급의 행위는 하루아침에 변혁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 일상생활에서 사고와 행위가 그물처럼 촘촘히 이어지면서 서서히 변화한다는 그람시의 평가에 이제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노동운동도 이제는 짧은 호흡보다 긴 호흡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이런 평가와 기대는 우리 이전에 그람시가 이미 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Baratta, Giorgio, 1990, 「'Die Hegemonie geht aus der Fabrik hervor' Gramsci zu Amerikanismus und Sozialismus」, in 『Utopie und Zivilgesellschaft』, Uwe Hirschfeld/Werner Rügemer (Hg.), Berlin: Elefanten Press, pp. 157-178.


Gerratana, Valentino, 1975, 「Einleitung」, in 『Gefängnis Hefte I』, Klaus Bochmann(Hg.), Hamburg: Argument 1991, pp. 21-41.


Gerstenberg, Heide, 1969, 『Der revolutionäre Konservatismus』, Berlin: Duncker & Humblot.


Gramsci, Antonio, 1917, 「Unser Marx」, in 『Antonio Gramsci - vergessener Humanist?』, Harald Neubert (Hg.), Berlin: Dietz Verl., pp. 36-40.


- , 1967, 『Philosophie der Praxis』, Hamburg: Argument.


- , 1975, 『Gefängnis Hefte』, K. Bochmann??W. F. Haug(Hg.), Hamburg: Argument.


Kebir, Sabine, 1991a,『Gramsci's Zivilgesellschaft』, Hamburg: VSA-Verlag.


- , 1991b,「Antonio Gramsci (1891-1937)」, in 『Klassiker des Sozialismus II』, Walter Euchner(Hg.), München: C. H. Beck, pp. 209-222.



1) 인용의 편리를 위해 그람시의 옥중수고에 한해 앞으로 저자명이 아닌 책제목을 그대로 쓴다. 뒤에 나오는 수는 책의 권수를 의미한다. 특수문자인 §는 그람시의 옥중수고에 번호를 매기면서 생긴 표시인데 이것을 원문 그대로 인용한다.  


2) 그람시는 '실천의 철학'에서 "시민사회를 '사적'이라고 이름 붙여진 모든 조직체의 총체"라고 개념을 정의한다(Gramsci, 1967: 412). 공적인 지배도구인 국가와 달리 사적 영역이 개입된 규범과 질서는 시민사회의 발현물이라는 점이다. 국가가 아닌 바로 이 시민사회가 사회 유지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그람시의 사상적 독자성은 인정된다.   


3) 2차 대전이후 이태리 공산당(PCI)를 이끈 팔미로 똘리아티(Palmiro Togliatti)역시 자르디니아 출신이었고, 똘리아티와 그람시는 같은 해에 자르디니아 지역의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였다(Kebir, 1991a). 두 사람의 이런 특수한 관계는 그람시 연구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4)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대학시절 스승인 언어학자 바르톨리(M. G, Bartoli)에게서 습득한 개념이다. 바르톨리는 프랑스 언어학자인 소쉬르(F. Saussure)의 영향을 받아 언어란 구체적 실체 없이는 나타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한 언어의 발현능력은 문화와 기술적 문명화의 전파능력과 직접적으로 비례한다고 바르톨리는 주장하는데, 그람시는 이런 개념을 정치적인 개념으로 전환시켜 재해석한다(Kebir, 1991b).


5) 1917년에 일어난 소비에트혁명을 흔히 '2월 혁명' 이라는 고유명사로 일반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용어는 역사적인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달력으로 2월 27일에 일어난 혁명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일력으로는 3월 12일이 된다. '2월 혁명'이 아니라 '3월 혁명'이 맞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지만, 당시 러시아인들이 사용한 용어가 역사적 용어로 되었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6) '노동자평의회'운동은 노동자 계급이 작업장에서 권력을 장악하여 자본가 계급인 관리자가 아닌 생산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권력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평의회운동'은 공장점거 투쟁을 선호한다. 이런 투쟁방식은 노동자 계급에 의한 군사적인 위협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러시아적인 모형인 볼셰비키 혁명방식이 다른 국가에서도 차용된 결과의 하나이다. 하지만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은 베를린 시에서 이루어진 시가지 바리게이트전을 마지막으로 지도부인 룩셈부르그와 립크네히트가 체포되어 압송되는 도중에 즉결처형 됨으로써 패배한다.     


7) 무솔리니는 사회당 정치인이었던 경력을 이용하여 좌파적 선전요소를 자신의 정치선전에 사용한 최초의 우파 정치인이다. 그는 당시에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사회주의적 이념을 우파의 언어로 재무장한다. 즉 그는 볼셰비키 혁명이후 유행어로 등장한 '혁명'을 '우파의 혁명'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런 우파 급진주의는 대중동원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모형을 창출하는데, 이것의 대표적 보기가 '로마로의 행진'이다(케비르, 1991b: 216). 하지만 파시즘이 발흥하던 시기 유럽의 정치지형에서 보면 무솔리니의 우파 급진주의를 이태리만의 특수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독일의 에른스트 융어(Ernst Jünger)로 대표되는 파시즘 이론의 원조들이 '청년 보수주의'(Jungkonservativ), '보수혁명'(Konservative Revolution), '혁명적 보수주의'(Revolutionäre Konservatismus)를 부르짖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Gerstenberg, 1969). 즉 1930년대 자본주의적 체제위기에서 비롯된 경제위기를 정치적 국수주의로 봉합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시대를 민족국가라는 정체성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면서 각종의 '애국주의'가 대중화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8) 그람시가 1929년 감옥에서 기획한 '옥중수고'는 똘리아티의 각별한 관심이 없었더라면 세상에 알려지기 어려웠다. 즉 역사의 바다에 한 알의 모래알처럼 잊혀질 위기에 처했던 그람시의 사상은 똘리아티의 관심과 노력으로 전후 복원된다. 이 편지글들은 '옥중수고'라는 이름으로 1947년부터 출판되어 이후 전 31권으로 구성된 미완성 유고집으로 발간된다. 하지만 '옥중수고'의 편지글들은 형식이 가진 한계로 인하여 그람시 사상의 편린과 단편을 종합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짧은 글 모음집이라는 점에서 그람시 사상을 종합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편화된 편지글에 불과하였던 옥중수고를 똘리아티가 다른 동료 당원들과 1938년부터 출판 가능하도록 바꾸는 작업에 들어간다(Gerratana, 1975: 37).     


9) 그람시의 문화개념은 문화산업에서 파생한 허위의식으로서 문화에 한정되지는 않고 막스 베버적인 전통 사회학적 해석인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초점이 놓인다. 즉 그람시는 문화개념을 현대 산업사회에서 인위적으로 산출되면서 조작되는 문화산업의 광기적 허구에 대한 비판으로서가 아니라 사회변혁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대중적 의식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해부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한다. 예를 들어 혁명적이어야 한다는 당위성만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활방식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봉건적 혹은 파쇼적인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이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탐문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람시의 관심은 이해가 될 수 있다.


10) 그람시의 이런 지적을 노동조합운동에 적용해 보면 설명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유럽사회에서 노조조직의 전통은 길드조직의 독점적 영업활동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영업권을 보장하기 위해 장인의 수를 제한한 길드조합의 독점적 지위 인정은 노동시장에 대한 인위적 규제 장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사회에서 초기 노조들의 조직대상은 전문 숙련공들이라는 점도 역시 고려해야 한다. 즉 노조조직의 성격은 시장경제의 무제한적 경쟁에 대항하여 시장 내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하려고 하면서 획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노조운동에서 바로 이런 전통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사회발전의 맥락적 차이에서 노동자 계급의식의 굴절 가능성도 유추가 될 수 있다.


11) 바로 이 전제조건에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계급연합의 유의미성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한국 노동운동 진영에도 상당한 정도로 세력을 형성한 비판적 지지가 의미를 상실해가는 과정역시 '국민의 정부'가 보여준 일방적인 계급성에 대한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른 정권과의 무차별성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시민적 권리마저 제대로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판적 지지란 무의미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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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지그룹 노무관리 실태와 해고자 문제

자료/『현장에서 미래를』17(1997/01)
해고노동자 문제를 통해서 본
LG 그룹의 노무관리 실태와 부당노동행위 보고서
최형익(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세상에 태어나 보람된 일, 성취감을 느끼는 일을 많이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런 꿈을 다 접어두고 장렬히 산화하고 싶은 충동만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이 황폐화되고 가정이 황폐화되어 가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 볼 수가 없습니다."-이동렬(LG 전선 안양공장 해고노동자)
1. 들어가며
문민정부라고 자처하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93년 3월 10일, 당시 이인제 노동부 장관은 지난 5, 6공 군사정권 하에서 해고된 5,200여 해고노동자들을 전원 복직시키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물론 이러한 발표가 선언에 그친 측면도 있지만, 실제로 노동부 장관의 발표 직후 전교조 해직교사를 비롯하여 지하철, 현대, 대우, 삼성, 기아, 태평양 등 많은 사업장의 해고 노동자들이 전체 또는 일부분 복직되어 정든 일터로 돌아갔다. 또한 96년 최근, 공공부문 노조들은 해고자 복직 문제를 임투과 연계하여 해고자 문제가 단체협상의 의제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였고, 그 결과 일정한 성과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해고자 복직 문제에 미동도 하지 않는 기업이 있으니, 바로 국내 굴지의 재벌인 LG 그룹이다.
LG 그룹의 경우 해고자 문제에 관한 한 완전히 무소불위, 치외법권의 영역인 양 행세하고 있다. 유독 LG 그룹에서만 해고노동자 문제가 개선은커녕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실제로 LG의 경우 1995년 8월 현재 53명이던 해고자의 수가 줄기는커녕 1996년 7월 현재 오히려 늘어나 67명에 이르고 있으며, 복직을 시킨 사례도 전무한 실정이다(『주간 노동자 신문』, 96. 5. 7. 참조). 그러나 더욱 악질적인 것은, 노동자들의 해고사유가 하나같이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의 실현, 특히 노조활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사실상 부당 노동행위와 노조파괴로 인한 해고라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LG의 전근대적이고 악랄한 수법의 노동자 탄압이 결코 우연적이 아니며, 그룹 차원의 구조적이고도 치밀한 노무관리 아래 자행된 것이었음을 본 연구과정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자료 2
LG그룹의 노무관리 실태와 부당 노동행위 보고서
LG 그룹의 노무관리는 삼성의 무노조 정책과는 달라서, 표면적으로는 노조를 인정한다
) 삼성의 노무관리에 대해서는 김기원, 「삼성재벌의 노사관계」,『이론』, 1995 가을, 새길, 제130∼152면을 참조하기 바란다.
. 그러나 일단 노조가 들어서면 길들이기에 나선다. 노조를 노무관리의 일개 부서화하고 사용자의 구미에 맞는 어용노조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며, 이러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가 들어설 경우 노조 자체의 와해를 위해 노조집행부와 노조에 적극적인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는 등 부당 노동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실례로, 길게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지금까지 11년, 짧게는 올 96년 한 해에 해고된 LG 그룹의 해고자들의 경우, 모두 노조활동에 적극 가담한 사람들로 밝혀졌다. LG 그룹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은 95년말까지 64명이었는데, 최근 LG 화학 청주공장 노조간부 3명이 추가로 해직돼 총 67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해고노동자들은 모두 노조위원장, 대의원, 노조간부 등으로서, 사규에 근거한 해고치고는 뚜렷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LG의 해고노동자들은 87년 이전 노조설립 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과 그 이후의 해고자들로 분류할 수 있다. 그 대부분은 87년 이후 민주노조 설립과 조합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활동했던 분들이다. 89년과 90년을 지나면서 민주노조 진영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LG 그룹에서는 기획조정실을 만들어서 노조탄압의 선봉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민주노조의 핵심인 노조위원장, 지부장, 노조 집행간부, 대의원 등을 무자비하게 집단 해고시키고 고발, 구속시켰다. 심지어는 노동조합 전체 간부들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여 노조활동을 극도로 억압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가 그룹 전체 해고자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64명
) 해고자 현황에 대해서는 LG 그룹 해고 노동자 복직 실천 협의회 간(刊), 자료집 『LG 그룹 해고자 현황과 그룹측의 입장 및 탄압사례』(1996), 본고 부록 <자료­1>을 참조하기 바란다.
에 이른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노조파괴와 활동억압의 일환으로 자행된 노동자 해고를 사업장 중심으로 먼저 살펴보고, 그러한 해고과정에서의 부당 노동행위의 유형을 사례 중심으로 고찰해보기로 하겠다.
2. LG 그룹 주요 사업장 해고자들의 해고사유
현재 LG 그룹 해고노동자 복직실천협의회에 소속된 해고노동자 단위사업장은 LG 전자(구 금성사) 창원 1·2, 구미, 평택 공장, LG 산전(구 금성 산전) 창원 공장, LG 전자부품(구 금성 알프스) 광주 공장, LG 전선(구 금성 전선) 안양, 군포 공장등이다. 먼저 안양, 군포 공장의 경우 해고자는 조용표 외 10명이다. 이들 중 조용표, 김옥수, 김원식, 허태홍, 도영호, 정원용은 LG 전선에 노조를 설립하기 위해 활동하던 중 사규위반 및 명령 불복종 등으로 해고되었다. 그리고 김종식과 김상호, 양송욱은 87, 88, 89년 각각 임단협 투쟁의 활동으로 구속·해고되었으며, 이동렬의 경우 89년 1월 노조 조사통계부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부당한 출장명령을 거부한 뒤 명령불복종으로 해고되었다. LG 산전 창원 공장의 박원주와 성홍식은 88년 8월경 대의원으로 피선된 후 89년 임단협 투쟁을 주도하다 사측의 고소로 89년 5월경 폭력 및 업무방해 등으로 구속되었으며, 7월경에 단협투쟁(파업)과 관련하여 사규위반으로 구속된 상태에서 해고되었다.
또한 LG 전자 창원 1공장의 해고자는 이균하 외 3명이다. 이균하는 대의원으로 활동하다가 89년 5월경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상태에서 89년 파업과 관련하여 사규위반으로 해고되었다. LG 전자 창원 2공장의 해고자는 하태욱 외 11명인데, 대부분 89년 단협 때의 파업과 관련, 사규위반으로 구속 중 해고되었다. 당시 사측의 고소로 무려 70명의 노조간부 및 노조원이 집단으로 고소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가장 최근에 발생한 해고사업장은 LG 화학 청주 공장으로, 여기서는 신종 부당노동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91년부터 93년까지 청주지부 산업안전부장이던 임진용의 경우, 색상 구분이 잘 안되는 색약자이어서 근무가 불가능한데도 94년 12월 30일 회사측이 제조실로 부당한 인사발령을 내렸다. 이에 부당한 인사발령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작업거부를 하자, 사측에서 인사명령 및 작업거부로 1995년 2월 6일부로 징계·해고 조치하였다. 또한 대의원을 2회 역임하고 94년 청주지부 교육선전부장을 역임한 오현식의 경우, 95년 11월 대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자 사측에서 청주공장 모노륨 생산과에 근무하던 사람을 돌연 본사 C/S 팀으로 부당한 인사발령을 내렸다. 이에 부친이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어서 가정형편이 어려움을 호소하였으나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측은 인사명령 거부로 1996년 1월경 징계·해고하였다. 노조 대의원을 3회 역임하고 96년에도 청부 지부 대의원을 맡았던 이강칠의 경우에는, 96년 4월 15일 청주 공장 공무실에 근무하던 사람을 업무 관련성이 전혀 없는 서울 본사 C/S팀으로 부당한 인사발령을 내렸다. 이에 본인이 부당한 인사명령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휴직계를 제출하고 C/S팀으로의 출근을 거부하자, 사측은 1996년 7월 9일 무단결근 및 지시불이행으로 징계·해고 조치하였다.
LG의 이러한 무단적 노무관리에서 여성노동자들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과거 금성 알프스 전자로 알려진 LG 전자부품 회사는 노조 간부들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87년 노동자 투쟁을 거치면서 민주노조를 세우고 조합원들의 전폭적인지지 하에 노조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측은 단지 여성이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노조를 간섭하고 탄압해 오다가, 90년 임금 협상을 앞두고 지부장, 부지부장을 집시법 위반, 노동조합법 위반 등의 이유로 구속시켰다.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조합원들이 항의하며 준법투쟁을 하며 맞서자, 또 다시 교육선전부장과 사무장을 구속시키고 40여명의 여성간부 모두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여 정직, 출근정지, 해고 등을 자행했다. 해고자 9명 모두가 미혼인 여성간부였는데, 회사측이 여성 조합원들을 구타하고 실신시켜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광주 지역에서는 구사대의 폭력에 항의하는 집회가 계속되었다.
아홉 명의 해고자들은 출근투쟁을 하였고, 회사측은 경비들과 노무과 직원들을 동원하여 또 다시 폭력으로 대응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결혼하는 사람도 있게 되어 복직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지 못하다가, 93년 해고무효 소송을 제기하고 정부의 복직시키겠다는 발표에 힘입어 다시 복직투쟁을 전개하였다. 현재는 LG 본사를 상대로 복직투쟁을 하는 해고자도 있고, 결혼한 해고자는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회사 앞에서 출근투쟁을 벌이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여성은 해고를 시켜도 결혼하면 그만이니까라는 생각으로 무자비하게 해고시킨 회사측의 생각을 깨고, 이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면 하는 바램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LG에서 자행된 해고사례를 단위사업장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규위반과 명령불이행 등의 명령으로 해고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LG의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점차 지능화·전문화되고 있다는 점을 잘 반영해준다. 사규위반과 명령불이행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그 이전에 노조파괴와 부당 노동행위가 진행되었고, 사규위반과 해고는 그러한 노무관리의 예정된 수순이다. 그렇다면 노동자 탄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해고 노동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기에 해고되었는지에 대해 수집된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3. LG 그룹의 노동자 탄압과 부당 노동행위의 사례 및 유형
사례1> 노조 규약 개악을 통한 노동운동 무력화 기도:LG 화학
청주에 본조를 두고 청주, 울산, 나주에 5개의 지부를 두고 약 4,500명의 조합원으로 결성되어 있는 LG화학 노동조합은 1963년 5월 15일 창립대회를 치루고 결성되어 87년도 이전까지는 조합의 대표자를 간선제로 선출하다 87년도 민주화 대투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하여 현재까지 12대 집행부 33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사용자들은 과거 87년 이전에는 간선제로 당선된 집행부를 철저하게 지원하여 노조는 완전히 어용화되어 있었다. 87년도 이후 직선제를 쟁취하고도 사측의 치밀한 계획과 노­노 갈등에 의해 민주적인 집행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88년도부터 90년도 까지 장기집권했던 김병욱 위원장이 재선되어 사측의 지원을 받으며 어용의 길을 걸었다. 91년도와 93년도에는 민주후보가 당선되었으나 사측의 분열전술과 리더십 부족으로 이용만 당하였다. 94년부터 96년에는 사측에서 지원한 어용후보가 당선되어 철저한 노조 길들이기를 하여, 96년 8월 28일 대의원­위원장의 이중 간선제가 전격 도입되었다.
화학은 87년 이후 무쟁의를 기록하고 있을 만큼 대외적으로는 노사화합이 잘 되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94년부터 LG 전자를 모델로 하여 간선제를 도입하겠다는 목표 아래 쟁의도 한 번 없던 회사에서 "1) 노조대표자에 출마했던 사람들에 대한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고, 2) 전·현직 노조간부들에 대해 공장에서 본사로의 인사이동 명령을 하여 노조와 단절시키고, 3) 이러한 인사명령을 거부하면 무단결근 및 지시 불이행 등 사규위반으로 해고를 시키는 방법으로 노동자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고 LG 화학 노조 민주화 추진위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다
) 대의원 대회 당시 부당 노동행위 현황에 대해서는 <자료­2>를 참조하라.
특히 LG 화학의 경우에는 이러한 탄압이 어용화된 노조집행부와 일부 대의원들과 회사의 공모 아래 추진되었다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사측은 96년도 임기 대의원대회에 개입하여, 모든 선거구에서 민주파 쪽에서 출마하려는 조합원들을 회유·협박하여 출마를 저지하였고, 그래도 출마할 경우에는 모노륨 2공장 오현식의 경우처럼 입후보 등록 다음날 전격 본사로 인사조치 하였다. 그리고 타일부 김형오의 경우에는 입후보 등록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거공고에는 명단조차 나오지 않았고, 투표용지에도 단순히 찬반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간선제 도입과정에서는 해고와 강제 사직서 제출, 강제 직제간 전환을 통한 조합원 자격 박탈, 그리고 부당전직 및 노조지부장과 애로사항 면담 후 인사이동 조치 등의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동탄압 기술을 구사했다. 이와 같은 사측의 뛰어난 각본에 힘입어 노조집행부는 대의원 대회를 통한 대의원­위원장 간선제 도입이라는 희대의 코미디를 연출했다(『중부매일』, 96. 9. 3.;주간 『내일신문』(96. 9. 18.), 자료­3> 참조).
사측과 노조는 대의원 대회 당일에도 민주파 대의원의 참석을 저지하기 위해 협박·회유하였으며, 불응할 경우 교육 및 출장 명령을 내렸고, 거부하면 사규에 의해 처리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교육 및 출장을 거부하고 대의원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의원 총인원 48명 중 상기한 이유로 28명이 참석한 대의원 대회 장소에서조차 대회에 참석하려는 민주파 대의원을 복지관에서 관리자들과 노조 집행부 간부들이 1차 저지하고 본관에서 다시 2차 저지하였다. 그리고 대의원대회에 일반 조합원들이 참관하는 것을 철저히 저지하고 그 자리에 사측의 중역들과 관리자들만이 대거 참석했다. 또 민주파 대의원 9명에게는 발언권을 전혀 주지 않았고, 규약이 변경되었으면 변경된 규약에 의거하여 대의원을 재선출하고 위원장 간선제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대의원으로 위원장 선거를 강행하려 하였다
) 자세한 내용은 『충청리뷰』(96. 10), '왜 그래요, LG! 노조 어용시비에서 사용자 지배개입 의혹까지 … ' 안의 '정도 경영'(제68∼71면) 기사를 참조하라.
그러나 이 날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단연 규약개정이었다. 총 제적 대의원 28명 중 19명의 찬성 하에 단행된 규약개정은 "노조 위원장, 지부장, 대의원 간선제 도입"(21조, 42조), "임단협 교섭위원 위원장 지명"(51조), "운영위원은 위원장 재청한 자로 선출한다"(25조), "교섭권, 체결권은 위원장이 가진다"(51조), "선거규정은 운영위원회에서 제정, 개폐한다"(39조), "해고자와 지부가 없는 곳으로 인사이동시 조합원 자격을 박탈한다"(11조)를 기본 골자로 하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제21조 대의원 간선제 규정과 제51조 임단협의 교섭권과 체결권을 위원장이 갖는 소위 직권조인 조항이다. 먼저 제21조는 "조합대의원 선출은 지부대의원 중 지부대의원 대회에서 직접, 비밀,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고 조합원 100명 단위당 1명을 선출하며 단수 51명을 초과할 시에는 1명을 초과선출할 수 있다. 단, 대의원의 총수는 20명 이상이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자료­4>). 이 조항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독소조항임과 아울러, 노동조합법 제20조 제2항 "대의원은 조합원의 직접, 비밀, 무기명 투표에 의하여 선거되어야 한다"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불법조항이다. 또한 제51조 위원장 직권조인 조항은, 87∼88 노동자 대투쟁의 최대 성과물이자 어쩌면 세계 노동운동, 아니 더 나아가 아래로부터의 진정한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임단투 쟁의행위와 임단협 체결시 조합원 전체의 총의를 묻는 조합원 투표조항을 무화시켜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 하는 폭거이다.
현재 LG 화학에서 자행되고 있는 부당 노동행위는 사측과 노조 집행부의 공모에 의한 것이지만, 이러한 사태에 노동자의 단결된 힘으로 단호히 대처하지 못한 민주노조 세력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폭거 이후 청주를 중심으로 LG 화학 노조 민주화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지금 현재 힘있게 투쟁하여 직선제 쟁취(『매일노동뉴스』 제1123호, 제11면)를 다시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사례 2> 유기용제 솔벤트 5200 사용에 의한 산업재해 은폐기도:LG 전자부품
LG 그룹의 대표적인 부당노동행위로 우리는 유기용제 솔벤트 5200의 사용과 관련된 산재 은폐기도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LG 전자부품(주) 경남 양산 공장에서 20명의 여성 노동자와 8명의 남성 노동자의 성염색체가 손상되고, 이중 특히 2명의 여성노동자가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중증의 진단을 받음으로써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국내시장의 30%를 점유하는 대량 생산체계였기 때문에, 산재사건이 발생할 때에도 주야 맞교대에 하루 평균 11∼13시간씩 근무하였으며, 작업자의 휴가 시에는 다른 동료들이 철야와 특근 등으로 생산 부족분을 채워야 했을 정도였다. 특히 잔업과 특근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해서, 매월 생산실적 96∼99%의 성과달성을 자랑할 정도였다고 한다.
작업과정 중 부품세정 용제로 쓰는 솔벤트 5200+SPG 6AR의 혼합 침지액은 94년 2월 경에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휘발성이 강한 붉은 색의 용제였는데, 사용 초기에 휘발 악취로 인해 갖가지 고통들을 호소했다. 호흡곤란, 현기증, 두통, 안구통증이 극심했다. 그런 점들을 관리자들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이 건의하거나 호소하면 '일본에서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해 오는 것인데 걱정말라. 만약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내가 책임지겠다. 근무시간에 데모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반응하며 '주동자'를 찾으라고까지 했다. '주동자'라는 말에 움츠려진 분위기 탓에 작업환경 개선과 관련된 어떠한 건의도 어려워진 상황이었는데도, 작업자들은 후각의 마비증상 때문인지 그럭저럭 근무해왔던 것이다. 외부인들이 '작업장이 이렇게 공기가 안 좋은데 어떻게 일을 하느냐'고 말할 정도로 작업장 내 환기는 최악의 상태였다.
또한 작업의 생산성 때문에 밀폐된 공간이었으며, 94년 여름엔 ISO-2000 인증을 위해 작업장과 기계들의 청결이 강조되다 보니 밀폐된 공간 내에서 기계를 청소할 때면 침지액을 계속 겁 없이 사용해 댔다. 그해 여름 기상청 설립 이후 최고 온도가 연일 갱신되던 무더위 속에서, 고장난 환기시설과 가동되지 않는 국소배기장치 시설로 인해 가히 찜통같은 살인적인 실내온도로 많은 동료들의 건강에 이상증상들이 나타났다. 95년 1, 2월에 두 명의 동료가 재생불량성 빈혈로 회사를 그만두었고, 동료들도 온몸에 멍과 같은 반점들이 생기고 한 번 걸린 감기는 낫지 않았다. 이러한 자각증상들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인의 질병이라 여겼다.
95년 7월 7일 다섯 동료들간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생리중단과 생리불순 문제가 전체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제서야 94년 가을 이후 대개의 동료들이 갖가지 원인 모를 질병들에 시달려온 것이 알려졌다. 생리중단, 두통, 현기증, 지속적인 감기, 뇌기능 감퇴, 요통과 신경통, 말초신경염 등의 증상이 나타났고, 온몸에 멍이들고 심지어는 고막이 터지는 등 실로 광범위하고 다양한 자각증상들로 고생하고 있었다. 또 검사상 밝혀지지도 않는 이상증상들이 있었는데도 과로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들만 하니 벙어리 냉가슴 앓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95년 8월 10일 두 명의 노동자가 중증 재생 불량성 빈혈로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서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도 '불규칙한 습관 때문이다', '용제는 일본에서도 아무 이상이 없으며, 용제의 성분분석 결과는 없으나 다른 것이 문제지 용제는 문제가 아니다. 작업장 전환을 해줄 테니 이야기하라'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최 과장이라는 자는 '미혼사원들이 술·담배를 많이 하고, 아침식사를 걸러서 그렇다'는 식으로 말했으며,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기 그지없는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다 알아서 해주겠다는데 뭐가 걱정이냐, 일이나 하라'고 하는 등 문제의 본질은 외면한 채 여전히 헛소리만 해댔다. 또한 작업환경의 개선이라고는 전혀 없이, 여전히 유기용제에 노출된 상태에서 특근과 잔업, 철야를 강요받아야 했다(『집단중독 사건 자료집』, 「공청회」 부분 중 차미진의 증언, 제50∼53면, 자료­5>).
더구나 이러한 산재 은폐기도에 대항하여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해야 할 노조위원장이 회사에 빌붙어 한몫 거들고 나섰다는 점이 노동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노조위원장은 95년 7월18일에는 사태를 중재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오히려 사태수습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1) 잔업을 재개하라, 2) 치료 받을 병원을 물색하겠다, 3) 개인적인 질병으로 발생할 수 있다'면서 사태의 본질을 호도했다. 또한 96년 3월 8일, LG 전자부품 유기용제 집단중독 사건 공청회 개최를 알리는 포스터 부착 여부에 대해 대책위가 노조에 문의했으나 위원장은 이를 외면했다. 이러한 노조의 비협조로 인해 피해 환자들의 실상과 현황을 알릴 길이 막혀있다 보니, 다른 현장의 동료 노동자들에게조차도 피해환자들의 실상이 잘못 알려져 있어서 피해노동자들은 이중의 격리감을 갖게 되었다고 토로했다(『집단 중독 사건 자료집』, 「보도자료」, 제111면).
피해 노동자들의 산재처리 요구에 대해 노조위원장은 '산재 신청을 안하는 이유는 회사에 책임을 묻기 위해서이다. 산재에 맡기면 회사는 손뗀다.'고 하였다. 또, 생리중단과 관련해서도 '호르몬 치료만 받으면 깨끗이 해결된다', '알아봤더니 다른 사람들도 다들 조금씩은 문제들이 있더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외면하여, 피해 노동자들은 심지어 "LG 전자부품 솔벤트 중독사건 시민대책위가 구성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현장에서 미래를』, 96년 4월호)였다고 한다. 환자와 피해자 가족에 대한 개별 접촉을 통해 사태를 미봉으로 해결하려는 기도에 맞서서, 피해 노동자들은 95년 12월 LG 전자부품 솔벤트 중독 피해자 협의회를 결성하고 시민대책위와의 공조 아래 힘있게 싸움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96년 3월 6일에는 시민대책위 33개 단체들과 함께 300명 이상이 참석한 공청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이러한 투쟁에 힘입어 세계 최초로 유기용제 솔벤트에 의한 중독을 직업병으로 인정(『부산일보』, 96. 1. 12.)받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96년 6월에는 솔벤트 5200의 주성분인 2­브로모프로판에 대한 동물실험 결과 인체의 생식 및 조혈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노동부 산하 한국 산업 안전공단이 발표함으로써, 산재 투쟁에 새로운 전기를 이루게 되었다(『부산일보』, 96. 6. 4., 자료­6>).
그러나 이러한 직업병 인정과정에서 LG 부품측은 은폐기도(『국민일보』, 95. 8. 20., 자료­7>)를 계속하였다. 직업병 판정이 나지 않았다며 노동자들을 솔벤트 용제에 계속 노출시킨 채 작업을 강행(『부산매일』, 95. 8. 20., 자료­8>)하는 등, 몰지각한 행위를 서슴지 않아 호된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 자민련의 정우택 의원은 96년 국정감사에서 LG 화학이 산재 사실을 은폐하고도 무재해 5배 달성장을 수여 받은 사실을 밝히면서, 'LG 에서는 산재 은폐도 노경 협력사항에 해당되느냐'고 힐난했다(『매일 노동뉴스』 1118호, 96. 10. 23., 제8면).
사례 3> 노조 확대 간부회의 및 대의원 대회 방해 사례:LG 전선
LG 전선 노조의 경우에는 95, 96년 두 해 동안 정기, 임시 대의원대회 등 노조의 정상적인 활동이 사측의 치밀한 방해공작으로 무산되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다. 최초의 방해는 95년 2월 12일 사측의 조장제도를 비롯한 신인사제도 저지를 위한 '확대 대의원, 간부 비상 연석회의'를 사측이 무산시키려 기도한 것이었다. 노조 노보에 따르면, 회의 방해과정에서 사측은 전 부서 관리자를 동원하여 조합간부, 대의원에게 회유, 협박, 납치를 자행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노보 『깃발소식』 제9호(95. 4. 4.) 참조). 심지어 조합간부의 집에 부서관리자가 술, 음료수, 안주를 사들고 쳐들어와서 회의 불참을 종용하고 '노조활동을 하면 어떠 어떠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주기도 하였다는 것이다(동 노보 제8호(95. 3. 27.) 참조). 이날 회의는, 현 노조집행부가 들어선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사측에서 '성과급 차등지급'과 '조장 제도'를 일방적으로 도입한 데 따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고 한다.
한편, 노조측은 2. 12. 조합회의 방해사건과 관련하여 경기도 지방 노동위원회에 사측을 상대로 '부당 노동행위 구제 신청서'( 자료­9>)를 1995년 3월 16일 접수시켰고, 96년 6월 27일 현재 5차 공판까지 열렸다. 5차 공판에서는 피고측 증인 안양 공장 노경 개발실장 주종명 씨에 대한 원고(노조)측의 심문이 진행되었다. 피고측 증인은 "조장제도는 새로운 직책을 만든 것이 아니고 기존에 실시하던 제도를 확대 실시한 것이다"라고 증언하고, 징계규정에는 징계 8급에 경고장 발급이 징계의 종류로 분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고장 발부는 징계가 아니다"라며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하였다(동 노보 제71호(96. 7. 2.) 참조).
정당한 노조활동에 대한 회사측의 방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95년 3월 24일 조합원의 생존권이 걸린 임단협 요구안을 확정하는 매우 중요한 임시 대의원 대회가 있었다. 이 대회에서 사측과의 긴밀한 협조 아래 일부 대의원들은 ― 대의원 대회 동안 일부 대의원이 무단으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구미 지역 대의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매우 조직적으로 대회장을 이탈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밝혀졌는데, 구미 노경과 차장과 대의원 9명이 모 음식점에서 10시 30분부터(음식점 종업원 진술) 술과 음식을 시켜 놓고 먹고 있는 것을 조합 상근간부가 목격한 것이다. 음식대 금 16만 7천원을 노경과 직원이 지불하는 것도 목격하였고, 카메라와 비디오에 담기도 하였다(동 노보, 95년 제 8호 제4면 참조) ― '대회장소가 비좁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대의원 대회를 무산시켰다. 96년에도 일부 대의원들이 임원 인준건과 관련하여 조직적으로 대회의 의사진행을 방해함으로써, 임단협을 위한 임시 대의원 대회까지 무산시켰다. 이들이 얼마나 조합원의 대의를 왜곡시켰는가 하는 점은, 무산된 대의원 대회를 대신하여 96년 3월 20일 개최된 임단협을 위한 임시총회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임단협 요구안이 89.2%, 교섭위원 인준이 86.9%라는 매우 높은 찬성율을 얻어 총회안건이 가결된 것이다.
사측의 방해 메들리는 96년 임단투 국면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구미 지부의 경우를 보면, 6월 27일 권선사업부에서 조합원 신분의 반장들이 쟁의결의가 결정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파업을 하면 안 된다'라는 요지의 서명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구미 지부는 성명문을 통해 "이러한 반장들의 행위는 조합원 동지들의 분노를 더 살 뿐이다"라고 강하게 질타하였다. 그리고 '사측의 책임 있는 사람이 공개사과하고 서명을 즉각 중단하고 명단을 소각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권선사업부 관리자들의 관리능력에 대한 설문조사를 통해 퇴진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천명하였다(동 노보 96년 제71호 참조). 사측은 또한 7월 12일 쟁의행위 찬반 투표를 무산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동 노보 참조).
그러나 이러한 사측의 부당노동 행위에 대해 노조는 정확하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노조는 동 노보 제75호(96. 7. 10)의 집중분석 '사측의 의도적 탄압행위, 무엇을 노리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금 사측의 임단협 파괴공작이 비정상적인 사람의 치마바람처럼 온 공장에 날리고 있다. 사측의 부당 노동행위의 목적은 투표불참을 강제하여 노조의 정상적인 결의행위 자체를 무산시켜 보겠다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투쟁을 통해서는 한 가지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향후 노사관계에서 현장을 힘으로 장악하고 앞으로 말 잘 듣는 노조를 양성하겠다는 포석으로 분석된다. 사측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조차도 만족하지 못하는 수준의 안을 제시해 놓고, 노조더러 임단협을 끝내는 협상을 하자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사측의 또 다른 목적이 노조에 싸움을 거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노조를 궁지로 몰아넣고 성과를 하나도 내지 못하는 집행부 이미지를 심어주고, 집행부를 무력화 시킨 후에 사측이 일방적으로 몇 가지 안을 더 제시하여 '임단협은 사측에서 알아서 주는 것'이라는 인식을 조합원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이러한 과정에서 회사의 말을 듣지 않고 부당 노동행위라고 주장하거나 노조활동을 활발히 하는 자에게는 사규위반 = 해고만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러한 자는 다시는 현장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는 것, 바로 이러한 수순이 LG 그룹의 노­경협력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4. 노조탄압과 해고노동자 문제의 성격:LG 기조실 간(刊), 『노무관리 자료집』(1988. 2. 15)의 분석
지금까지 우리는 LG 그룹 해고 노동자의 문제를 다루면서 일정한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LG 그룹의 부당 노동행위와 해고 노동자 문제는 대개 어용노조와의 협력아래 자행된다는 것이다. 즉, 노조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노조를 통한 분할­지배 전략(divide and rule)이 구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료집』은 이미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하여 노조의 합리적 운영방안을 검토해 본다. 가) 노조견제 세력의 구축. 강력한 노조가 탄생하면 창구일원화로 일사분란한 노조접촉에 편리하고 실익이 있을 수 있으나, 한편으로 경직성과 강력한 요구사항 위주의 폐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사태발생의 예방을 위해 '대의원 선거 낙선자, 현 집행부에 대한 불평자' 등을 포섭, 노조에 대한 반대세력을 구축해야 한다(제148면, 자료­10>)." 그러기 위해서 "노조는 세력을 너무 키워서도 안 되고 약체화해서도 안 되므로 조정가능한 범위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본다(제154면)." 만일 노조 본조의 어용화 기도가 실패할 경우에는 LG 화학과 LG 전선의 예에서처럼 지부를 어용화 한다든가, 아니면 집행부와 조합원들을 연결하는 대의원들을 회유하여 사측의 의도를 어떻게든 관철시키는 집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바로 인간화 경영과 한 쌍을 이루는 공작적이고 음모적인 노무관리 체계이다.
『자료집』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근로자들의 본질적인 만족의 증대는 그들을 '인간'으로서 인정해주고 '우리' 의식을 갖게 해주며 더 나아가서 성장감과 성취감을 갖도록 해주는 데서 비롯된다 … 이를 위해 기업이 인본주의 사상에 입각한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을 갖추어야 한다."(제20면) 그렇다. 정답은 '인간중심, 정도경영'이다. 이러한 경영방침을 실현하기 위해서 친목회, 향우회, 동문회, 입사동기회, 군동기모임(제179면) 등의 비공식 그룹(informal group)을 활성화하고, 이를 위해서 "재정지원 등 적극적 지원으로 사원 개인간 유대를 강화하여 인화기반의 구축을 유도"(제66면)한다. 더구나 이러한 "조직 내 비공식 그룹(친목, 취미활동 전개, 단체)의 적극적인 후원은 의사소통의 통로를 다원화하여 구성원의 요구를 수렴하고 조직목표에 대한 자율적인 참여를 유도"(제110면)하기 위한 취지도 아울러 갖는다. 그러나 인간경영의 실현을 위한 비공식 집단이 허울을 벗으면, 사측 정보조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본색을 드러낸다. 『자료집』을 보자.
"라. 노조 및 현장사원의 동태파악을 위한 정보망 구축. 노조 및 현장사원의 동태파악을 위한 정보망 구축은 노무관리의 필수적인 업무이다. 이것은 주시할 필요가 있는 사원에 대해서는 사내뿐만 아니라 사외활동에 대해서도 소상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정보망 구축에 있어서는 2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사내 사원을 정보요원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예) 운반원 ― 현장 이동작업자이므로 정보수집 용이.
인적, 취미동호인, 동향인 ― 확실한 정보수집이 가능.
신입사원 ― 의도적인 채용이므로 정보수집 가능.
둘째, 사외 정보요원 확보 활용방법이다.
요주의 대상자를 선정하여 추적정보 수집.
예) (1) 주의대상자 주거 인근지역의 가게, 술집의 종업원 포섭.
(2) 회사 주위 음식점 요원 확보 정보수집 가능
(3) 공장 출입의 납품업자에서도 정보수집 가능
(4) 사내 인포멀 그룹 내 정보요원을 확보"(제151면, 자료­11>).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소위 비공식 정보망 운영방안의 기본원칙까지 마련해 놓고 있다.
"가. 기본원칙. # 노무담당자 직접관리(중간보고 매체 없음. # 점조직으로 운영(정보는 신분노출 절대방지). # 구두보고 원칙. # 정보원 관리 신중(신원확인 및 적절한 보상)"(제179면, 자료­12>)
) LG는 심지어 극우조직인 반공연맹까지 자신의 노무관리에 활용하려는 제3자개입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공장장은 반공연맹 지부장이며, 부지부장은 인사부장, 그 산하에 정보부, 공안부, 조직부, 교육홍보부를 두고 있다(『자료집』, 제277면, <자료­13>).
또한 LG는 현행 노동법에서 금하고 있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노무관리에 활용하였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부당 노동행위를 자인하고 있다.
"동향일지 작성(럭키 울산):공장 내 전 기능직을 대상으로 노사분규시 가담정도 및 가입 인포멀 그룹, 성격, 교우관계 등을 파악하고 강경파 List를 작성하였으며 그중 특히 주동급 인물에 대해서는 따로 동향일지를 작성하여 그 부서장을 통해 주 1회 이상 수시로 동향을 파악하고 있으며, 문제점 발견시 즉각 대처하고 있음."(제185면)
두 얼굴의 쌍둥이 LG 경영진의 야누스적 행태는 계속된다.
"경영관리자들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바람직한 노사관계의 정립과제를 최우량 노사관계의 구축이라고 집약했을 때 최우량 노사관계의 지도이념은 … 노동자측에서는 분배의 공정화를 포함해서 '인간성' 및 '민주성'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즉, 현대의 자본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은 근로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일실(逸失)하지 않는 가운데 축적된 부를 '配分的 正義' 원칙 하에서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자료집』, 제186면)
그런데 갑자기 다음과 같이 태도가 변한다.
"향후 노사전망은 사회 전반적인 민주화 물결에 의한 근로자 및 노조의 인간화 요구 및 경제적 배분요구가 강화될 전망이며, 특히 좌경의식화 세력의 현재화 및 실질적 대두가 예견되는바 종업원의 건전한 생활보장과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경영 풍토 개선 및 불순세력에 대한 기업내 대응조직 활동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제187면)
자신들이 민주성과 인간성을 말하면 건전하고, 노동자들이 말하면 불순하다는 식의 발상에는 노동자를 단지 이윤창출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불순한' 기업 논리가 깔려있는 것이며, 이러한 사고방식과 노무관리 방식을 LG 그룹이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LG 그룹의 부당 노동행위와 그에 따른 해고노동자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5. 결론에 대신하여:대기업 노사관계와 해고노동자 문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LG 그룹의 해고노동자 문제는 전근대적 노무관리 과정에서, 즉 사측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를 압살하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를 현장에서 격리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음습한 노사관계의 현실과는 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LG 그룹의 노무관리는 찬양 일변도이다. 실제로 96년 환경노동위 노동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LG 그룹 내 LG 정보통신이 95년 대기업 부문 노사화합 대상을 수상하였고, 노동부 산하 한국 노동교육원 노사협력 센터가 수집한 사례집에서 LG 전자의 노사관계가 노사협력 모법사례로 선정되었다. 『매일노동뉴스』 1118호는 「'초우량' LG, 그들만의 '정도경영'」이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동부 산하기관인 한국노동교육원이 발행한 '혁신하는 자만이 미래를 연다'는 제목의 '노경혁신 사례'는 LG 전자를 '공동체적 노경관계를 구축하여 세계적인 초우량기업'이 되었다고 극찬하고 있는데, 이런 류의 치사는 정부관계자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700만원의 예산으로 약 2000부를 발행하여 기업과 언론사 등에 무료배포한 이 책에는 LG 전자의 '노경협력' 사례 49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노조가 앞장서 에어컨 판매에 나서고 바뀐 회사 로고를 알리는 홍보활동을 벌인 사례, 'LG 사랑회'라는 사원 부인 모임 등을 통한 '家社不二' 운동 등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 또 일반소주에 勞經不二酒라는 딱지를 붙여 노조와 회사의 간부가 상견례를 갖는 회식장에 내놓았더니 모두 그 술만 찾더라는 '노경불이주를 아시나요', 임단협 교섭장에 '신뢰', '영원한 사랑' 등의 꽃말을 가진 각각의 꽃을 앞에 놓고 회장의 말씀을 교양강좌로 들으며 교섭을 시작한다는 사례는 이 회사의 노경협력이 평범한 수준을 넘어섰음을 알 수 있게 한다."(『매일노동뉴스』 1118호, 제5면)
다시 말해서 LG의 노사관계와 노무관리는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21세기 노사관계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철저한 노조관리를 통해 노조를 기업 내에 묶어두고 소위 '협조적 노사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LG의 노사관계가 다른 기업도 준용해야 할 동시대의 모범으로 회자되고 있으므로, 현재 LG의 노무관리 기법은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LG 해고노동자와 부당 노동행위의 차원을 넘어 전체 노동자 계급의 문제와 맞닿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앞서의 『매일노동뉴스』 기사를 반박하기 위해 사용자의 입장에서 기고한 글인 「價値를 創造하는 LG 新勞經文化」(이하 「신노경문화」)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역설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신노경문화」는 용어 사용에서부터 남다르다. 「신노경문화」에 따르면, "노사라는 표현은 사용자가 근로자를 수단으로 삼아서 목적을 달성하자는 사상이 깔려있고, 지금과 같이 고도화된 시장경제를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은 일정한 목적을 가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내부에서 뚜렷한 역할분담은 생겨나지만 인간적으로는 대등한 관계에 있으므로 이것을 어떻게 협조적, 생산적으로 조화시킬 것인가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왔다고 한다. 또 이를 위해 "노조의 역할을 이해하며 근로자와 경영인이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협력하여 참여의 제 역할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자는 노경관계를 만들어 내었다"(제6면, 강조는 인용자)는 것이다.
더 나아가 노경관계는 "단순히 용어의 변화가 아니라 질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공동체적 노경이라는 신노경문화를 창조하게 되는 기반 및 추진력이 되었다"(제6면)고 설파한다. 노경관계가 이렇게 심오한 뜻을 가지므로 이제 우리는 '노사관계'라는 말조차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노사관계 개혁 특별위원회'도 「신노경문화」에 따르면 "사용자가 근로자를 수단으로 삼아서 목적을 달성하자는 사상"이 깔려 있으므로 실패한 것 아닌가. 「노경관계 개혁 특위」라고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러나 이러한 시답지 않은 용어변화 그 자체에 눈을 뺏기지 않는다면, 「신노경문화」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노경관계'라는 용어는 '질적 전환'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질적 전환'이 한국 노동교육원의 연구위원 및 관변학자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권장하는 '협조적 노사관계'라고 할 수 있다. 「신노경문화」는 이것을 '공동체적 신노경문화'라는 신조어로 정의하며, 그 목표를 "첫째, 노경 partnership의 강화", "둘째, 유연하고 창의적인 조직문화의 정착", "셋째, 정도경영으로 세계화 선도(제7면)"라고 규정한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 살펴볼 점은 두 번째의 유연하고 창의적인 조직문화의 정착이다. 「신노경문화」는 "조직과 제도개혁 추진"을 통해 "인적 자본의 참여와 협력을 생산적으로 조직하였다"(제7면)고 말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붕붕데이(상대방을 칭찬하는 날), flexible time제, two-to time제(오전에는 기획 관련 업무, 오후에는 기타 업무를 하는 업무능률 향상제도), 반일 휴가제 등이 유연한 조직문화로써 창의성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고, 발탁승진 및 능력주의 처우 보상체계, 사내공모제 등은 HLP(high performing leader)를 육성하는 제도이며 고충처리 전용 전화 운용, speak up 제도, 구로 공장의 소사장제(현장 책임사원에 사장 직위 부여), 구미 공장의 뚝딱 시스템(다품종 소생산을 위한 고능률 생산 시스템), 평택 공장의 바로바로 시스템(고능률 자율생산 시스템) 등은 인적자본의 참여와 협력을 이끌어내어 자율경영팀으로 나아가는 기반이 되고 있다."(제7면)
간단히 말해서, 「신노경문화」가 부르짖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조직문화란 "발탁승진 및 능력력주의 처우 보상체계"와 "HLP(high performing leader)"와 "소사장제" 등 직반장 체계의 완비를 통해 현장 통제력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러한 사측의 '공동체적 신노경문화'가 현실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LG 전선(노조위원장 장건)의 소위 '신인사제도'이다. '신인사제도'는 '성과급 차등지급'과 '조장제 도입'으로 집약된다. 이에 대해 사측의 입장인 「신노경문화」에서는 "조직과 제도 개혁 추진을 통해 인적자본의 참여와 협력을 생산적으로 조직"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 현장의 노동자들은 전혀 상반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LG 전선 노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합원들은 사측의 탄압에 강력한 대응을 원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지금 사측의 신인사제도 도입에 따른 불안감과 고용문제의 심각함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번 집행부는 위원장, 지부장 모두가 신인사제도 저지를 최고공약으로 걸고 당선되었다. 이런 조합지부의 일체감으로 인해 사측은 집행부가 강력한 집행체계를 잡기 전에 성과급 지급보류 공작과 차등지급을 일방적으로 실시하고 신인사제도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조장제도를 도입하여 집행부를 초기에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다.
집행부는 희생을 각오한 투쟁을 하고 있다.
이런 사측의 노조 무력화 기도를 직시한 조합지부에서는 군포지부 성과급 차등지급 조합원 보고대회, 여의도 항의방문 투쟁 등을 벌여 나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동들은 집행부가 조합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행동들이다 …
집행부는 다시금 새로운 '각오'로 희생을 감수하여야 한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집행부에서는 조합원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더욱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장건 위원장의 행동신조인 '필사즉생'의 각오로 사측의 교묘하고 지능적인 노동조합 말살책동을 박살내고 신인사제도 도입 기도 분쇄와 성과급 차등지급 철폐, 조장제도 철페를 위한 투쟁의 길은 지금보다도 더 험한 가시밭길인 것이다. 하지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더욱 힘차게 전진하는 집행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LG 전선 노보, 『깃발소식』 제10호(1996. 4. 11.))
이러한 노조 집행부의 의지는 근거 없는 억측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조합원들의 설문조사에 기반하고 있다. 소위 신인사제도라고 알려진 두 가지 조치에 대해서 일반 노조원들의 절대 다수가 반대했다. 노조가 신인사제도와 관련하여 실시한 조합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대 다수가 임금격차가 커지며(92.9%), 고용안정이 침해당하며(90.8%), 노조가 무력화될 것(90.7%)이라고 답했다(동 노보 제8호(1995. 3. 27.);자세한 내용은 자료­14> 참조). 또한 실제로 조장으로 임명된 일부 조합원들은 "조장 임명장을 반납하거나 찢어버리는 일까지 발생"(동 노보 제8호(95. 3. 27.))했다고 한다.
LG의 '공동체적 신노경문화'가 표방하는 목표나 그것의 일환으로 실행된 '신인사제도'는, 대기업에 열풍으로 밀어닥친 소위 '신경영전략'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신경영전략이 왜 새로운 전략인지, 그리고 노사관계가 아니라 '신노경문화'에 왜 새로울 '新'이 들어가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현대중공업 노조와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가 공동으로 현대 중공업을 사례로 하여 신경영전략을 장기간에 걸쳐 심도있게 추적·분석하였다. 그 결과물인 『신경영전략과 노동조합』(1995)에 따르면, 신경영전략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첫째, 개별적 노사관계 관리의 정비와 체계화라는 성격을 지닌다. 둘째, 조합원들을 분열시키고 경쟁하게 만들어 서로 통제하게 한다. 셋째, '강압적 통제'와 '유화적(부드러운) 통제'를 동시에 구사한다. 그리하여 넷째, 밑(현장)에서부터 노조를 무력화시킨다. 다섯째, 극단적인 노동강도와 효율적 노동력 이용을 통해 최대한의 노동력 지출을 뽑아낸다.(『신경영전략과 노동조합』, 제16∼18면 참조).
정리하면, '신경영전략'은 노조의 현장 장악력을 와해시키고 현장에 대한 자본의 통제력을 높여서, 궁극적으로 노조를 회사에 종속시키는 '협조적 노사관계'를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다. LG 그룹의 경우에는 약한 노조를 바탕으로 소위 '신경영전략'을 성공적으로 이식시켰기 때문에 자본의 귀감이 되었다. 그에 따라 영광에 빛나는 95년 노사화합 대상(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노사협력 사례집에 일순위로 들어간 것이다. 그다지 어렵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만일 이러한 신경영전략 및 그와 관련된 정리해고제와 변형시간 근로제를 핵심으로 하는 개별적 노사관계의 개악이 민주노조의 적절한 대응책 없이 그대로 관철될 경우 노동자 계급에게 닥칠 현실은 끔찍한 것이다. 노동강도를 가일층 강화시켜 정신과 육체를 피폐하게 만들 것이며, 신인사제도에 관련된 앞서의 설문조사가 잘 보여주듯이 동료 노동자들간에 경쟁을 격화시켜 고용불안을 초래할 것이다. 또한 노동자를 경쟁력 강화와 '가치창출'을 통한 이윤 제고라는 기업논리에 맹종하게 하여, "하는 일이 재미있고 이기는 일이 하고 싶어 출근하는 삶터를 만들어 영원한 승리자가 되고자"(「신노경문화」, 제7면) 부당 노동행위도 감수하게 만들 것이다. 결국 쓰다 녹슬면 버리는 고철기계처럼 산재와 직업병으로 시들어진 노동자를 폐품 처리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아닌가.
) "어떻게 하루가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일이 많아졌다. 퇴근 뒤 쓰러져 잠만 자 가족들로부터 '통나무'란 핀잔까지 듣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산재사고가 크게 늘었다는 얘기도 곳곳에서 들리고 직업병도 심각하다는데 이러다 큰일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태산같다. 그러나 고충을 함께 나눌 사람도 없다. 같은 작업반 동료도 이제는 경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상대평가와 다름없는 반장의 고과점수에 따라 호봉승급의 차이가 나게 되어 있어 동료를 밟고 서지 못하면 내가 밟히게 된다.
올해 들어서만 5백여 명의 동료들이 이곳을 떠났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다. 몇 년 전만 해도 퇴근 뒤 동료들과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그 날의 피로를 달랬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한숨만 나온다.(중략) 집회에 참가하려 해도 큰맘을 먹어야 한다. 반장에게 찍히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나 하나 때문에 반의 실적이 떨어져 도매금으로 고과점수에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하는 반장과 동료들의 눈총이 따갑다. 이것은 '신경영전략'이 성공적(?)으로 도입된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생각이다."(『한겨레 21』(1995. 7. 20., 제68호), 「대우 조선 '옥포의 눈물':고속성장 이면에 고단위 노동통제. "희망90s에 절망"」)
노사협력 대상에 빛나는 LG가 동시에 "LG 화학 청주 공장 등 49곳 산재은폐"(『한국무재해신문』 제89호, 제1면) 등 이 분야에서도 제1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앞으로 개별적 노사관계의 개악과 신경영전략의 정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해고 노동자 문제가 현재처럼 LG나 일부 기업에 집중된 부당 노동행위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제 합법적으로 자행되는 전체 노동자의 문제이므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민주노조 전체의 사활이 걸린 대안책이 시급히 나와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기원, 「삼성재벌의 노사관계」, 『이론』, 1995 가을
·럭키금성 기획조정실, 『노무관리 자료집』, 1988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 『매일노동뉴스』 제1098, 1106, 1108, 1118, 1123, 1124흐
·현대중공업노동조합·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신경영전략과 노동조합-현중노조 정책수립을 위한 연구보고서 요약집』, 1995
·LG 그룹 해고노동자 복직 실천협의회, 『LG 그룹 해고자 현황과 그룹측(계열사)의 입장 및 탄압 사례집』, 1996
·LG 전선 노조회보, 『깃발소식』, 1995, 1996
·LG 전자부품(주) 솔벤트중독 피해자협의회, LG 전자부품(주) 노동자 유기용제 집단중독 사태해결과 모성보호, 노동자 건강권 확보를 위한 시민대책위원회, 『LG 전자부품(주) 노동자 유기용제 집단중독 사건 자료집』,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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