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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예비교사 어린이.청소년인권 연대선언에 참여하며 펼친 고민의 나래(주형)

 

 

 

1.

나는 지키지도 못할 말을 뱉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5월에는 세상의 전부가 평택인 줄 알았고, 그 다음에는 한미FTA 운운했으며 지금은 청소년인권이라니, 세상에나. (이래서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들에게 많은 운동단체들이 신뢰를 보내지 못하는 것이리라. 물론, 모든 운동하는 학생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한 반성적 비평일 뿐.) 가끔 나의 이상과 현실이 뭔가 이상하게 괴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나의 이상이 제대로 짜여있지 않을뿐더러 나의 현실은 억압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켄 노치가 데이미언의 입을 빌려서 한 말은 이런 나를 제대로 까고(!) 있다.

“무엇에 반대하는 가를 아는 것은 쉽지만 무엇을 원하는 가를 아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무엇’에 반대하는 것을 멈춰야 하는 거냐고 물으면 대답은 아니올시다. 억압에 대한 자발적인 분노가 형성되고 난 뒤에야 새로운 대안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탐구해볼 가능성이 형성되는 것 아니겠냐고.


2.

<예비교사 어린이·청소년인권 연대선언>에 참가하고 나서 느낀 소감을 써달라고 처음 부탁을 받았을 때, 애매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애매한 느낌이란, 되게 쉬울 것 같다는 느낌이 너무 뻔 한 글이 될 거 같다는 느낌과 짬뽕이 된 것을 말한다. 아마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을 받으신 담당자 분이나 이 글을 읽으실 분들도 일정부분 어떤 내용을 담은 어떤 형식의 글을 이미 기대하고 계시다가 내가 쓴 이 ‘이상한 글’을 읽는 순간 당황하셨으리라.

‘아니, 좋았어요 이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글을 쓰면 될 것을 왜

이따위 잡설을 길게 쓰는 거냐고!’

그런 분들께는 정말로 죄송하다. 그러나 지금 이런 형식, 나는 이것을 ‘잡상의 흐름기법’이라고 부른다, 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또 내 고민의 나래를 펼치기에 가장 합당한 형식인 점을 알아주십사 부탁드린다.


3.

이번 <예비교사 어린이·청소년인권 연대선언>에 같이 참여할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제안하고 다니던 중, 한 동기가 자기는 참여할 수 없다면서 한 이야기가 있다.

“나는 아직 청소년인권이라든가 학생 인권이라든가에 대해서 잘 모르겠고, 여기 선언문에 적혀있는 내용들이 지켜져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심정적으로는 동의가 되는데 내가 만약에 교사가 되면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근데, 선언이라는 것은 일종의 약속이잖아. 내가 지금 여기서 이 선언에 참여한다고 하고 선언식을 해 버리면 나는 이런 것을 지키겠다고 약속해 버리게 되는 건데 책임질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을 거 같애.”

내가 지금 여기서 쓸 글은 사실은 이 동기에 말에 대한 대답이었고, 이 동기를 설득하려고 했던 나의 고민들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하는데 실패한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4.

분명히 우리 동기의 말은 지극히 ‘합당하고 올바른’ 말이다. 자기가 진작 고민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그냥 동의할 수 있는, 혹은 동의해버리면 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의문도 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라는 거지? 우리는 정치라든가 경제라든가 혹은 교육 ‘따위’의 학문들에서 우리가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한지도 모를 수많은 합의와 동의를 이미 하지 않았던가?

<예비교사 어린이·청소년인권 연대선언>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이 선언이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는 데 있다. (아마도 전문이 어딘가에 실릴 것 같아서 한번 참고해 보시면 좋을 듯하다.) 이번 선언은 사실상 교육운동을 한다는 여러 진영 내부에서 ‘청소년인권’이라는 화두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 혹은 할 것이라는 것을 최초로 ‘말 해낸’ 것이고, 선언식보다는 앞으로 청소년인권이라는 화두에 대해서 어떻게 고민해 나갈지가 중요한 첫 시발점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코 한 번만에 약속을 하겠다/못 하겠다로 끝날 문제여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선언에 참여한 개개인의 예비교사 입장에서 바라보아도 비슷하다. 나는 내 자신이 역설적이고 모순적일 수 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데, 같은 맥락에서 나 자신도 그리고 이번 선언에 참여한 모든 예비교사들도 진정 현장에 나갔을 때 선언내용에 대해서 완벽하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기는 힘들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교사는 철인이 아니며 그러하기를 요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선언 왜 했냐고?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같이 교사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번 선언을 통해서 청소년인권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번 선언에 참여한 사람들은 (물론 참여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 그 화두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될 것이고 이번 선언에 참여했다는 데에 대한 나름의 부담감이 가슴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고민·부담감이 앞으로 우리가 현장에서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다시금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지 않을까?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자세로 돌이킬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5.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이번 선언에 참여함으로 청소년인권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다는 것 혹은 고민을 가진다는 것과 그냥 묻어두고 지나간다는 것이, 앞으로 교사가 되어서 잘못을 했을 때나 혹은 그러한 욕망이 발생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교사가 되는 것과 그냥 관성화 되고 무디어져서 우리가 비난하던 그런 교사가 되는 것의 간격만큼의 차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내 동기는 내 대답·고민·말에 대해서 아직 확신이 없어 선언에는 참여 못 하지만 그 후에 있을 <청소년동성애자인권 워크샵>과 <청소년인권워크샵>에 참여해서 청소년인권에 대해 고민해 보겠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오지 않음으로 나에 가슴에 대못을 박았지만-_ㅠ.) 이 글을 읽는 많은 예비교사분들은 내 (깊지도 못하고 허접하면서도 도발적으로 비칠 듯 해서 죄송한)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 주실지 궁금하다.


“우리, 청소년인권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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