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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년' 북한은 왜 조용할까?

"김일성 父 김형직이 3.1운동 지도…'수령 영도' 없어 실패한 운동"
2019.03.01 11:50:48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회담 장소였던 베트남 하노이에서 100주년 3.1절을 맞으면서 '북한의 3.1절'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과 만찬 등 베트남 공식 친선방문 관련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며, 3.1절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공개 언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1948년 정권 수립 이후부터 3.1운동을 '3.1 인민봉기'로 불렀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항쟁으로 기리기는 했지만 그 중요성은 한국에서와는 크게 달랐다. 

한국은 국체(國體)의 요강을 밝힌 헌법 전문(前文)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3.1운동은 대한민국 정부 정통성의 뿌리다. 때문에 매년 국가 수반인 대통령이 경축사를 발표하고, 각계 인사를 초청해 성대한 경축식을 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3.1운동에 대해 "자주 독립을 염원한, 식민지 통치 하에서 쌓이고 맺힌 인민의 원한과 분노의 폭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폭발한 우리 인민의 전민족적 반일봉기"(북한 <조선대백과사전>, 2000년 발간)라고 규정하지만, 고(故) 김일성 주석의 무장 항일투쟁을 북한 정권 정통성의 기반으로 내세우는 만큼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3.1절을 중요하게 기념하지는 않는다.  

북한에서 3.1절은 기념일도 공휴일도 아니며, 정권 수립 이래 지난 71년간 3.1절 기념행사에 북한 최고 지도자가 참석한 경우도 없다.  

1980~90년대까지는 평양 시내에서 매년 '3.1 인민봉기 기념보고회' 등의 행사를 열었다는 북한 관영매체의 보도가 있었지만 이후로는 평양 시민들이 '중앙계급교양관' 전시장을 찾아 3.1운동의 의의를 되새겼다는 등의 보도가 간간이 있는 정도였다. 

1992년 73주년 3.1절에는 평양에서 '3.1 인민봉기 73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가 열렸고 강희원 당시 북한 정무원(현 내각) 부총리가 참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996년과 1997년에도 각각 77돌, 78돌 맞이 '평양시 보고회'가 열렸으며 96년 행사에는 양형섭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이 참석했다.  

2009년에는 평양에서 '3.1 인민봉기 90돌 기념 평양시보고회'가 있었다는 소식이 보도됐는데, 이는 1999년 80돌 기념행사에 이어 10년 만에 열린 것으로 전해진다. 1999년과 2009년 행사에도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했고, 특히 2009년 행사에서는 그가 직접 행사 보고를 했다.  

2018년 3.1절에는 '3.1 인민봉기 99돌 기념행사'가 평양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교단에서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으나 행사 주최는 '조선종교인협의회'였고, 3.1절 자체의 의미를 기리는 성격보다는 남북관계 완화 국면에서 남측 종교단체들이 보낸 축전을 공개 소개하는 장으로서의 의미가 더 주목받았다.  

당시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보면, 99돌 기념행사에는 강지영 조선종교협의회장과 북한 종교인들이 참석했을 뿐 노동당이나 내각 인사들은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강지영 회장은 2013년 박근혜 정부 때 북한이 남북 당국회담 수석대표로 내세운 인물로, 당시 직함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장이었다. 북한은 조평통 서기국장이 한국의 장관급에 해당한다고 주장했고, 한국은 차관급에 불과하다고 맞서며 결국 회담이 무산됐던 적이 있다. 

북한의 주장대로 강지영이 장관급 인사라 한들, 그가 주최한 작년의 3.1절 기념행사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한국의 3.1절 경축식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작은 행사인 셈이다. 1990년대나 90주년 기념(2009년) 행사도 부총리급(양형섭)이 주재했다. 

한편 작년 기념행사에서 보고를 맡은 북한의 윤정호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부위원장은 "반일 민족해방운동사에 빛나는 장을 아로새긴 3.1 인민봉기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제의 야만적 식민지 통치에 항거한 거족적 반일애국항쟁이었다"며 "일제 식민지 통치 기반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은 3.1 인민봉기를 통해 조선 민족은 결코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자주 정신이 강한 민족이며,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기개와 열렬한 애국정신을 지닌 민족이라는것을 온 세상에 과시했다"고 언급했다. 

윤 부위원장은 그러면서 "3.1 인민봉기가 있은 때로부터 한 세기가 되어 오지만 조선 민족은 아직도 외세에 의해 분열돼 완전한 자주권을 실현하지 못하고있다"며 "지금이야말로 온 겨레가 3.1 인민봉기자들처럼 분연히 떨쳐일어나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야 할 때다. 조선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바라지 않는 미국과 일본, 그에 추종하는 민족 내 보수세력들이 제 아무리 북남관계 개선의 앞길을 가로막으려고 발악해도 민족의 통일 염원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 북한 정권의 공식 입장을 되풀이해 강조했다. 

기념행사 소식이 없었던 해에도 북한은 매년 3.1절에는 <노동신문> 등 관영 매체를 통해 '남조선(한국)의 민족적 자주권은 여전히 유린되고 있고,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외세를 배격하고 통일을 이루자'는 취지의 주장을 꾸준히 내놨었다.  

올해 3.1절에는 '3.1 인민봉기 100돌 기념 사회과학부문 토론회'가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렸다는 <노동신문> 보도 외에는 관련 행사 등 소식이 없었다. 

북한은 왜 3.1절을 크게 기념하지 않나 

3.1운동을 보는 북한 지도층의 관점은 '위대했지만 실패한 투쟁'이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북한은 3.1운동을 김일성 가계의 우상화·신격화 작업에 동원하기도 했다. 

북한은 1950~70년대까지는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수십만의 서울시민이 반일투쟁을 시작해 발생했다"고 공식 문서(리나영 1958 <조선민족해방투쟁사>, 교육도서출판사 1971 <조선력사> 등)에서 기술하고 있으나, 1980년대부터는 서울이 아닌 자신들의 수도 평양에서 3.1운동이 발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올해 <노동신문>은 3.1절 100주년 '사회과학부문 토론회'에서 나온 북측 학자들의 발표 내용을 보도했는데, '사회과학원 연구사 후보원사 교수 박사'라는 직함의 조희승은 "3.1 인민봉기에서 평양의 선봉적 역할은 무엇보다 전국적으로 처음으로 투쟁의 봉화를 든 데서 찾아볼 수 있다"며 "반일 애국정신이 매우 투철했던 평양 사람들이 제일 먼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뒤이어 격렬한 반일 시위투쟁을 벌였다", "평양의 선봉적 역할은 평양을 중심으로 봉기가 급속히 파급되고 평양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이 봉기의 불씨마냥 각지로 달려가 투쟁의 불을 단(지핀) 사실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평양숭실중학교 학생들의 주동적 핵심적 역할에 의해 평양에서 시작된 독립시위운동의 불길이 서북부지역으로 번졌으며, 평양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이 남부지역까지 달려가 3.1 인민봉기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적극 기여"했다는 것이다.  

특히 1990년 평양에서 열린 '3.1 인민봉기 71돌 기념보고회'에서는 3.1운동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에 의해 주도됐다는 주장이 공식 발표됐다.  

1990년 3월 1일자 <노동신문>도 사설에서 "3.1 인민봉기는 반일민족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의 지도 아래 벌어진 평양시민들의 대중적 반일시위 투쟁을 도화선으로 하여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김형직은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반면 북한은 최근 문재인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공식 서적에서 기술하지 않다가 1999년 펴낸 <조선대백과사전>에서 "3.1 인민봉기 때 일제를 반대해 용감하게 싸운 여학생"으로 소개하고 있다. 

북한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리기는커녕 3.1운동을 "혁명적 당의 지도"가 없어 결과적으로 실패한 운동으로 보고 있고, 특히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는 그 이후의 친일 행적 등에 초점을 두어 "철두철미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배신행동이었으며 일제 강점자들에 대한 비굴한 투항 행위"를 저지른 이들로 규정(1972 <조선전사>, 1984 <근대조선력사> 등), 비난하고 있다.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인민이 피흘리고 싸울 때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미국에 대한 애국운동만 진행했다. 이들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나라의 독립을 선사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타산(계산)하고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아양을 떨면서 원조를 구걸했다"(조선전사)라거나 "자산계급 출신의 일부 부르주아 민족운동분자들이 망명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표방하면서 사대주의적인 매국배족행위를 감행했다"(조선력사)라고 폄하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3.1운동이나 임시정부는 독립을 성취하지 못한 실패한 운동이었고, 3.1운동 이후 김일성 등의 무장유격투쟁이 실질적 독립을 이룬 바탕이라는 게 북한의 공식 입장인 셈이다. 작년 3.1절 <노동신문> 사설은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중략) 일제의 중세기적인 무단통치 하에서 상갓집 개만도 못한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오던 겨레의 쌓이고 쌓인 원한과 분노는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으로 폭발하였다. 봉기자들은 '조선 독립 만세!', '일본인과 일본 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힘차게 외치며 일제 군경의 총칼 탄압에 굴함 없이 맞서 싸웠다. 봉기는 전국적 판도로 번져 갔으며 해외에 있는 조선 동포들에게까지 파급됐다. 수백만 군중이 나라를 찾으려는 공통된 지향을 안고 항쟁의 거리로 달려나왔던 3.1 인민봉기는 우리 민족의 반침략투쟁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겼다. 일제 침략자들을 전률케 한 3.1 인민봉기는 죽을지언정 외세의 노예로 살지 않으려는 조선 민족의 불굴의 기개를 높이 떨친 거족적인 반일애국항쟁이었다.

그러나 피타는 절규만으로써는 결코 조선 독립의 염원을 성취할수 없었다. 3.1 인민봉기는, 인민대중이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자면 반드시 탁월한 수령의 영도를 받아야 하며 발톱까지 무장한 침략자들과는 무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피의 교훈을 새겨주었다. 자주와 독립, 강국에 대한 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은 백두산 절세위인들(김일성 일가)에 의해 빛나게 실현되게 되었다. 우리 인민이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조국 해방의 역사적위업을 성취할수 있었던 것은 항일의 전설적 영웅이시며 백전백승의(…중략) 김일성 동지를 높이 모셨기 때문이다." 

올해 <노동신문>에 보도된 '사회과학부문 토론회'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되풀이됐다. 박학철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사(박사)는 "3.1 인민봉기가 민족사에 남긴 교훈은 첫째로 민족해방 운동은 탁월한 수령의 영도, 혁명적 당의 지도가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민족해방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거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도세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넷째로 무장한 원수들과는 조직적 무장투쟁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다만 북한 중등교육(고등중학교 1학년 과정) 교재인 <김일성 원수 혁명활동>에는 김일성 주석이 8세 때 3.1운동 시위 대열에 참가해 '조선 독립 만세!'를 적극 외쳤다는 내용도 싣고 있고, 3.1운동으로 인해 일제의 식민통치가 큰 타격을 받았고 다른 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운동에도 고무적 영향을 주었다는 등 긍정적 면도 일부 평가하고 있다. 

 

곽재훈 기자 nowhere@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국제팀에서 '아랍의 봄'과 위키리크스 사태를 겪었고, 후쿠시마 사태 당시 동일본 현지를 다녀왔습니다. 통일부 출입기자 시절 연평도 사태가 터졌고, 김정일이 사망했습니다. 2012년 총선 때부터는 정치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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