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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선에서도 드러나는 기성정치의 대위기

 
 
2017년 5월 6일 프랑스 남서부 생장 피드 포르의 거리에서 경찰관이 대선 후보들의 포스터 옆을 지나가고 있다. 올해도 에마뉘엘 마크롱과 마린 르펜의 양자 대결이 될 가능성이 제일 높다. ⓒ사진=뉴시스

 

편집자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재선이 거의 확실한 프랑스 대선의 1차 투표가 4월 10일 치러진다. 예상대로라면 마크롱이 과반을 얻지 못하고 4월 24일 치러지는 2차 결선투표에서 마리 르펜과 양자 대결을 펼쳐 이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국민이 현 정권에 만족하는 건 아니고 프랑스 사회가 통합돼 있는 것도 아니라는 파이낸셜타임스의 기사를 소개한다.

원문:  France votes: Macron’s frontrunner status conceals deep rifts in society

 질르 레르메는 참을 만큼 참았다.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다. 45년간의 노동, 프랑스 정치의 끝없는 좌파-우파 번갈아 먹기 사이클, 불량배들이 불을 붙여 활활 타는 자동차들, 만연한 의료진의 부족, 점점 수준 낮아지는 공공서비스, 그리고 이민자들 모두 지긋지긋했다. 


레르메는 론데인 강 산업단지에 위치한 라 리카마리에 있는 자기 술집 카운터 뒤에 서서 말했다. “이민자가 너무 많아요. 그들이 우리 일자리를 뺏는 건 아니에요. 어차피 일자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이민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잖아요”. 극우의 주장과 같은 얘기였다.

1970년대에 탄광과 공장들이 문 닫은 이후 빈곤, 실업, 열악한 주거 환경이라는 쓰라린 현실을 안고 있는 여느 탈산업화 도시가 그렇듯, 자유주의 대통령 에미뉘엘 마크롱과 중도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는 모든 기성 정치인들을 경멸하는 라 리카마리였다.

어느 여론조사를 보더라도 4월 10일의 1차 투표로 시작되는 대선에서 마크롱의 재선이 유력하다. 하지만 라 리카마리와 같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파리 엘리트들에 대해 지속적인 분노를 가지고 있다. 마크롱은 승리하더라도 전국적인 노란조끼 시위로 폭발했던 그런 분노도, 그리고 그 분노를 악용해 득세하고 있는 극단주의적인 정치인들도 오랫동안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개선문 주변에서 프랑스의 시위진압 경찰이 노란 조끼를 입은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 2018.12.1 ⓒAP

 
지난 2월 러시아가 유럽연합(EU)의 동쪽에 있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기적으로 대화를 해 온 마크롱이 외교적 협상에 나섰다. 그러면서 마크롱은 전시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지지율을 더 끌어올릴 수 있었다. 유럽 도시들이 러시아로부터 공격받고 함락되고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 국민이 피난을 가고 있으니 이슬람 교도의 이민이나 범죄 등 대선에서 야당이 제기한 정치적 이슈들이 갑자기 덜 중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경제정책, 사회정책, 치솟는 생활비 등 중요한 사회문제들도 묻히게 됐다. 마크롱이 중요한 국내 문제들을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오만하고 서민의 고통에 무감각하다는 국민들의 인식은 더 확고해졌다.

이번 대선에서 기권하겠다는 유권자가 많다.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약 3분의 1이 투표 계획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이번 대선의 투표율은 전례 없이 낮아질 것이고, 상대적으로 경제가 나쁘지 않음에도 마크롱의 정통성이 향후 5년 간 약할 수밖에 없다.

투표율이 낮고 극우와 극좌의 대선 성적이 괜찮다면 프랑스는 앞으로도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의 부딪히는 주요 전장이 될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선 승리, 그리고 브라질부터 필리핀까지 독재형 지도자들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세력 구도가 유지될 것이다.

프랑스사 전문가 줄리안 잭슨은 마크롱의 승리로 인해 프랑스가 자유민주주의의 견인차라는 지위를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다는 현실이 가려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극우가 1980년대부터 2차 대전 이후 굳어진 정치적 구도를 뚫고 등장해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것도 짚었다. 그는 “마크롱이 극우의 득세를 막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능하겠는가? 우려스러운 것 중 하나는 거의 확실시되는 그의 당선이 현상 유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크롱이 지난 대선처럼 돌풍을 일으키는 것이 전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인 물에 빨래하는 프랑스 노숙자 ⓒ사진=뉴시스
좌도 우도 아님을 강조해 선풍적 인기를 끌며 마크롱이 2017년 대선에서 승리했을 때도 라 리카마리와 같은 곳은 마크롱을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도세력을 거부하고 대선 1차 투표에서는 극좌의 장뤽 멜랑숑, 결선 투표에서는 극우의 마린 르펜을 찍었다.

라 리카마라의 바 주인 레르메는 ‘불복하는 프랑스’의 멜랑숑보다 ‘국민연합’의 르펜을 지지한다. 레르메는 지난 36년 간 ‘룰렛바’를 운영했다. 룰렛바는 60대의 백인 노동자들이 파스티스나 값싼 와인 한 잔을 하며 위안을 얻기 위해 찾아오는 술집이다. 파리와는 거리가 먼 작은 마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바에 들어와 이미 와 있던 5~6명과 악수를 하고, 1945년 이후 30년 동안의 경제 성장과 산업발전에 대한 향수를 나눈다. 

레르메는 “그때는 일자리가 있었다. 광부들도 있었고 동료애가 있었다. 좋은 시절이었다. 피르미니에 있는 크루소-르와르 제철소나 다른 회사에 매일 2만 명씩 일하러 갔다. 이제는 일자리가 없다”며 착잡해 했다.

공산당 소속의 시릴르 본느포아 시장은 석탄 광산과 중공업, 강력한 노조들과 수 천 개의 일자리가 있어 처음에는 남부 유럽과 동부 유럽에서, 나중에서 프랑스의 이전 북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이민자들이 이주해 온 좋은 옛 시절을 떠올렸다. 1980년대부터는 터키 시골의 이민자들과 구 유고슬라비아의 난민들이 왔지만 이제는 일자리가 거의 없고 중산층이 많이 빠져나갔다. 실업률은 17%로 전국 평균의 두 배가 넘고, 주거의 4분의 3은 정부 주택이거나 노후된 아파트와 수리가 필요한 주택이다.
 
프랑스 대선의 극우 후보 에릭 제무르와 마리옹 마레샬-르펜. ⓒ사진=뉴시스
 
극우에게 좋은 조건

지역 병원의 간호사로도 일하고 있는 본느포이는 한때 좌파의 텃밭이었던 이곳에서 이제는 르펜의 극우 선거운동원들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선거운동을 하게 된 분위기를 얘기하며 씁쓸해 했다. 그는 “국민연합의 버스가 이 지역 여기저기를 돌며 전단을 배포하는데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30년 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여기 뿐만 아니다.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많은 노동자들이 유럽 회의론과 이민 억제를 내세운 르펜으로 돌아섰다.

여론조사에서 르펜은 지지율 약 19%로 28%의 마크롱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오는 4월 10일의 1차 투표를 통과해 결선투표에 올라 지난 대선에서와 마찬가지로 마크롱과 맞대결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민에 대해 르펜보다도 더 신랄하게 비판하는 텔레비전 토크쇼 논객 출신의 에릭 제무르는 현재 11%로 4위를 달리고 있다. 그는 지난주 ‘이민자 재이주’ 부처를 신설해 5년 내에 이민자 100만 명을 추방한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공화당 지지자들도 공화당 경선에서 이긴 발레리 페크레스를 찍어야겠지만 최근 그녀의 중도적인 정책들을 지지하지 않을 정도의 극우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를 모두 합하면 극우는 상당한 득표율을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가장 최근에 나온 여론조사에 의하면, 2차 결선 투표에서 마크롱과 르펜은 지지율 56%와 44%로 2017년 결선 결과였던 66%와 34%보다 격차가 현격히 줄었다. 이는 1970년대에 르펜의 아버지가 창당한 이후 극우가 기록한 최고 성적으로, 극우에게 프랑스의 권력 장악이 손에 닿을 듯한 위치라는 것이다.

다음 대선에서는 극우가 패배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번 대선 결선 투표에서 르펜이 패배하면, 르펜이 제무르와 제무르 대선 캠프에 있는 우파의 떠오르는 젊은 스타인 르펜의 조카 마리옹 마레샬-르펜과 손잡는 등 극우세력의 재편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마크롱이 만든 빈 자리

하지만 프랑스 정치가 파리 제도권과 극우세력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생테티엔의 장모네대학교 법대 3학년에 재학중인 나엘라 암망은 바 주인 레르메처럼 마크롱 정권 하에 있는 프랑스의 현재 상태에 울분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민자를 탓하기는커녕 알제리계 프랑스 여성으로서 멜랑숑과 그의 정당 ‘불복하는 프랑스’를 열렬히 지지한다.

암망은 지난 선거 직전에 극단적인 이민 반대 세력이 부상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되기 시작해 마크롱의 즉흥적이고 독단적인 코로나 대응 방식을 보며 정치적 입장을 굳혔다고 했다. 그녀가 마크롱이 수차례에 걸친 락 다운과 ‘말도 안 되는’ 보건 패스로 대중교통과 문화시설 사용을 제한하는 등 프랑스 국민의 자유를 마음대로 제약했다고 생각한다.

암망은 한때 세계의 본보기가 됐던 프랑스의 보건 및 교육 제도가 무너지고 있고, 마크롱 하에 공공서비스가 계속 축소됐음을 지적하며 멜랑숑의 급진적인 정책들을 지지하게 됐다고 했다. 멜랑숑은 모두를 위한 일자리 보장, 부자들의 세금 인상, 이민자 환영, 대마초 합법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 등을 주장한다.
 
안보관련 행사에 참여한 장-뤼크 멜랑숑 프랑스 대선 후보. 2017.3.31 ⓒAP
뒤늦게 지지율이 오른 멜랑숑은 14%의 지지율로 마크롱과 르펜에 이어 3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한때 우크라이나에 적대적이었고 푸틴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점이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암망은 “우리는 미국의 초제국주의에 반대한다. 그렇다고 푸틴을 봐주지는 않는다”며 그런 비판을 일축했다.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좌와 극우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이 두 세력은 제도권에 대한 분노, 세계화, NATO, EU를 불신하는 프랑스 민족주의, 전통적인 정치로부터의 소외감과 경제적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느낌 등을 공유하고 있다.

암망의 부모 모두 최저임금을 받고 있고 레르메는 평생 일했지만 매월 받는 연금은 955유로에 불과하다고 투덜거린다. 2018년말부터 시작돼 마크롱 정권을 뒤흔들어 놓다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약화된 노란조끼 시위 때에도 좌와 극우가 거리에서 함께 할 때가 많았다 (노란조끼 운동은 녹색연료세에 대한 보수파의 저항으로 시작됐다가 잠시 극우를 끌어들였고, 좌도 합세했다. 마지막으로 무정부주의자들마저 가담하면서 폭력적인 프랑스 시위 진압 경찰에 맞서 거리에서 함께 싸웠다.)

마크롱이 전통적인 보수 공화당과 중도좌파 사회당의 양당구조를 깨뜨린 후 공백이 생겼다. 잭슨에 따르면 “전통적 우파와 전통적 중도좌파가 마크롱을 중심으로 중도에 빨려 들어가면서 그들이 있던 자리가 비게 돼 포퓰리즘이 들어갈 틈이 생겼다”.

마크롱이 직면한 문제들

여론조사 결과대로 가뿐하게 재선에 성공하더라도 마크롱은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선 6월 총선이 있다. 효과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서는 마크롱 세력이 반드시 총선에서 승리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마크롱이 인기가 없다는 점이다. 마르크 라자르 파리 정경대 교수의 말대로 마크롱은 사방에게 전례 없는 혐오의 대상이 됐다. 좌도, 우도, 대중도 모두 그를 미워한다.

프랑스의 경제적 및 사회적 이슈들을 제대로 토론하지 않은 채 마크롱이 승리하면 선거 이후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늘 그렇듯 대중적 소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프랑스의 18~24세 청년 8000명에 대한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무려 22%가 시위를 하거나 자기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37%는 정부 부처 건물을 점거하는 것을 용납 혹은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정부의 반대 세력이 의회가 아닌 거리에 있을 수 있다.

마크롱의 한 최측근은 “우리 엘리트들은 잘 살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다수가 무질서와 급격한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브렉시트와 트럼프는 영국과 미국을 극도로 양극화시켰다. 그와 같은 일이 프랑스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프랑스가 벼랑에서 떨어지면 유럽 전체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극우 지지자 질르 레르메 ⓒ사진=빅토르 말렛

 
파리의 거리가 다시 가득 메워져도 라 리카마리 주민들은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레메르는 “마크롱은 꼭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 같다. 공장을 계속 문 닫게 하는데도 실업률이 떨어진다. 우리는 계속 국민에게 긴축재정을 강요하는 정권 아래 살았다. 40년 간 그게 이어졌다. 좌, 우, 좌, 우, 번갈아가며 말이다”라며 불만들 터뜨렸다.

한때 주차장이었던 룰렛바 바깥의 시장에는 저소득층을 끌어들일 만한 저렴한 물건들이 많다. 레페 크리스마스 맥주 12병이 6유로, 신발 한 켤레가 3유로다. 그곳에서는 불어와 아라비아어, 동유럽 언어들이 뒤섞여 있다. 나라를 끌고 있는 멍청이들에 대한 불평불만도 들려온다.

시장 옆의 공중화장실 문에는 자본주의의 부당함을 규탄하는 포스터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리고 거기엔 파리 기득권 정치인들에게 위협적인 예리한 메시지가 적혀 있다.

‘선거라는 코미디에 맞서야 한다. 2022년 대선 보이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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