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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기록되어 마땅하다” 죽음 마중하는 서른명의 자서전



등록 :2022-12-24 07:30

수정 :2022-12-24 09:11

장수경 기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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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

마지막을 기록하는 사람들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의향서 작성한 무명씨 사연 등 책 속에 담아

민주화 투사 어머니, 이산가족, 시각장애인, 차별받은 여성 등 이야기

“그래도 괜찮게 살았구나” 반추…가족에게 ‘마지막 화해의 시간’ 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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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사실모)은 4년째 장삼이사들의 구술자서전을 만들고 있다. 사실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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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난 유아무개씨는 딸만 둘 낳았다는 이유로 집에서 내쫓긴 어머니 대신 네살 많은 언니의 정을 받고 자랐다. 집안 사정 탓에 학교는 다니지 못했고, 14살 때 서울로 상경해 옷 만드는 일을 했다. 그마저도 바늘에 손을 다쳐 양장점을 그만뒀다. 22살 되던 해 ‘난임 부부에게 아기를 낳아주면 잘살 수 있다’는 지인의 말에 지역으로 내려가 아기를 낳아 건넸다.

 

이후 유씨는 중매로 자신보다 16살 많고 아들이 셋인 남성과 결혼했다. 남편은 인격이 훌륭했지만, 그렇다고 유씨의 삶이 편안해지진 않았다. 남편 병수발, 집안 살림, 공장 노동까지 고된 삶의 연속이었다. 말년이 돼서야 복지관에서 사교댄스를 배우고 얼굴에 있던 천연두 자국도 지우는 여유를 가졌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2020년 간외담관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8월 인생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자신이 이른바 ‘씨받이’(대리모)였다는 사실은 임종 전 자신을 간병하던 딸에게 털어놨다.

 

매년 3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유씨처럼 다른 차원의 세계로 떠난다. 그중 소수만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주로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이들이다. 그렇지 않은 대다수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기억만 남긴 채 떠난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흐릿해지고 잊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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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사실모)은 4년째 장삼이사들의 구술자서전을 만들고 있다. 사실모 제공

 

역사를 미분해보면 연, 월, 일마다 개별적 사건이 벌어진다. 개별 사건 속엔 무수한 ‘무명씨’들이 있다. 보통의 삶을 가치 없음으로 여길 수 없는 이유다. 때론 고난의 시간을, 때론 기쁨의 시간을 지나온 모든 무명씨들에게 ‘생의 찬미’를 보내는 특별한 자서전이 나왔다. 서점에선 살 수 없는, 500권뿐인 귀한 책이다. 제목은 <모든 삶은 경이롭다>.

 

모든 삶은 기록되어 마땅하다는 책을 만든 곳은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사실모)이다. 임종 과정에 이르렀을 때를 대비해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신청을 받는 기관으로 2019년부터 무명씨들의 구술자서전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아보낭 살아졈수다’(살아보니 살아지더라)라고 고백하는 제주 해녀, 남동생과 피난 와서 이산가족이 된 구순의 어르신, 중도 시각장애인, 민주화 투쟁을 하다 고문받은 아들을 잃을 뻔했던 어머니 등 ‘경이로운 삶’을 살아낸 30명의 이야기가 실렸다. 지난 13일 구술작가로 참여한 강유정(62), 윤서희(51), 전효선(54)씨와 홍양희(73) 사실모 공동대표를 서울 성북구에 있는 사실모 사무실에서 만났다. 홍 공동대표가 “작가님들”이라고 언급하자, 작가들은 “전문 작가는 아니”라며 부끄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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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서전 <모든 삶은 경이롭다>를 만든 강유정 작가(왼쪽부터), 전효선 작가, 홍양희 사실모 공동대표, 윤서희 작가.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못 배웠더라도, 가사 노동만 했더라도”

“한 구술작가가 ‘다른 이의 삶을 보니 경이롭더라’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만장일치로 올해 책 제목 ‘모든 삶은 경이롭다’가 나왔다.”(홍양희 공동대표)

 

타인의 삶을 애정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매년 책 제목에 고스란히 담긴다. 2019년 첫 구술자서전 <감사의 꽃으로 피어난 내 인생>, 2020년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들>, 2021년 <세월이 쌓이니 인생이더라>에 이어 올해까지 4년 동안 아름다운 153명의 삶이 기록됐다. 인터뷰 대상자는 주변이나 기관의 추천을 받기도 하고, 작가들이 발굴하기도 한다.

 

자서전 사업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러 온 어르신들이 한풀이하듯 자신들의 인생을 털어놓는 데서 시작했다. 사실모에서 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는 전 작가는 “어르신들이 삶이 허무하고 불안하다는 한탄을 많이 했다. 상담 중 삶에 대한 지지와 공감을 보내면 ‘나도 참 잘 살았네’ 하기도 하고, ‘역경을 통해 성장했다’고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생을 마무리할 즈음, 자신을 긍정하도록 만들자는 데 마음이 모였다. 첫걸음은 2018년 ‘소원노트’였다. 살아온 인생을 각 문항에 적고, 앞으로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 등을 기록하는 노트였다. 노트엔 질곡의 삶들이 적혔다. 윤 작가는 “잘 버텨온 삶들이 그냥 흘러가게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다음해 구술자서전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작가들은 대체로 50~70대로, 사실모 상담사거나 상담전문가다.

 

처음에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자서전이냐’며 경계하던 이들도 두번, 세번 작가들을 만나며 상호 신뢰(라포)가 형성된 뒤엔 자신의 인생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강 작가는 “최소 3~4번 만나고, 한번 만날 때 3시간 정도 대화를 나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작가가 다 들어준다는 신뢰를 갖게 되면, 자서전에는 싣지 않은 내밀한 이야기와 가족사까지 털어놓는다. 그럼 같이 웃고 같이 운다.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괜찮게 살았다고 스스로를 긍정한다.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터뷰 대상자들은 복지관 친구들에게 줄 자서전을 더 구하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자신이 나온 글만 복사해서 주변에 나눠 주기도 한다. 윤 작가가 말을 보탰다. “과거엔 분노밖에 남지 않았던 일도 현재 시점에서 다시 회상할 땐 뇌에서 재해석이 일어난다. 이후 정화된 글 자체로 책이 인쇄됐을 땐 내 삶의 재진술이 된다. 바로 글쓰기 치료다.” 그렇기에 구술작가들은 작가이자 상담사, 치료자다. 전 작가는 “그의 삶에 어떤 굴곡이 있더라도, 못 배웠더라도, 애만 키웠더라도 삶은 소중하다는 걸 늘 염두에 두고 위로와 공감, 지지를 건넨다”고 말했다.

 

작가들의 이런 노력 때문일까. 지난 9일 자서전 출판기념회 땐 가슴 철렁한 일이 있었다. 기념회 당일 아침 윤 작가가 인터뷰한 이○○(81)씨가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치매를 앓고 있기에 걱정은 더 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념회에 참석하려고 목욕탕에 갔던 것. 목욕재계하고 기념회에 참석한 이씨는 윤 작가에게 “내가 선택받은 사람 같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감동을 대다수는 잘 모르기에 인터뷰 대상자를 모집하는 건 쉽지 않다. 가족사가 공개된다며 자녀들이 반대해 무산되거나 자서전을 쓸 만큼 대단한 인생이 아니라며 거절하기도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다’ 편의 주인공 황은식(87)씨도 마찬가지였다. 황씨는 “성실하게 살았지만, 내놓을 만한 업적이나 자랑할 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중도 시각장애인 남궁광수(57)씨도 같은 마음이었다. 남궁씨는 “처음에 제안받았을 때, ‘한 것도 없는데 뭘 쓰나’ 싶어 망설였다. 그러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응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국가품질명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남궁씨는 2013년 ‘급성간농양에 의한 패혈증’으로 시신경이 손상돼 안구를 적출했다. “몇달을 침대에 누워 눈물만 흘렸지만” 2년 동안 2500시간의 수업을 들으며 안마사 자격증을 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열심’으로 산 남궁씨의 인생은 자서전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래도 남궁씨는 조금 후회가 든다. “아내가 읽어주는 자서전을 들으며 인생을 한번 점검했다. 열심히는 살았지만 남을 위해서 산 것은 아닌 것 같다. 앞으론 남을 위해 살고 싶다. 아들과 며느리는 울었다고 하더라. 가족에게 좋은 선물이 된 것 같다.”

 

자서전을 만드는 과정에 가족이 참여하면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화해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8살 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를 인터뷰한 오영규(가명·26)씨는 이번 자서전이 “자신의 뿌리를 찾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전까진 할머니의 꿈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었고,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어떤 분인지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만 고민해왔는데 뿌리와 가족을 생각하게 됐다.”

 

50~70대 시니어 작가들의 시행착오

 

전 작가의 말을 빌리면, 인터뷰 대상자는 수도권에서 제주까지 “전국구”, 주로 60~90대다. 이들의 삶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민주화 등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일제강점기 1931년 대신 ‘쇼와 6년’으로 자신의 태어난 연도를 기억하는 김○○씨, 17살에 신랑 얼굴도 못 본 채 결혼했던 권○○씨, 한국전쟁 때 가족을 잃은 손○○씨 등의 삶은 역사 속 한 페이지다. “수영복이라는 게 없었을 때, 한복 속곳을 입고 바다 수영을 했다고 한 분이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부근의 행정구역이 예전엔 경기도였다는 걸, 자하문 지역에 과수원이 있었다는 것도 구술자서전 사업을 하며 들은 이야기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한국 근현대사가 새로 태어난다.”(윤 작가)

 

우리 주변에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A4용지 8장에 사진 5~6장과 함께 실린다. 한국전쟁 등을 겪다 보니 어린 시절 사진이 없는 경우도 많지만 족두리한 결혼사진, 큰아들이 죽은 일주일 뒤 찾아온 나비 사진, 초등학생 손녀가 그려준 초상화, 치매 노인이 꿈에서라도 자유롭게 거닐고픈 꽃동산 작품 등 각자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사진을 건넨다. 홍 대표는 “집안이 종갓집인 한분은 17명 조상의 비석이 있는 사진을 꼭 넣어달라고 하기도 했다. 각자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진을 보는 감동이 있다”고 말했다.

 

작가들은 최대한 인터뷰 대상자들의 언어를 그대로 옮긴다. 윤 작가는 “어떤 의미일지 해석해서 그분의 입장에서 쓴다. ‘남편은 장단에 맞춰 젓가락을 두들기는 음악을 좋아했다’ 같은 표현은 내가 쓸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신 작가들은 대상자들이 기억에 의존해 말하는 이야기의 팩트를 확인한다. “한 인터뷰 대상자가 ‘고향에 있는 다리 밑 모래로 찜질하면 건강에 좋다’고 했는데, 실제 검색을 해보니 맞더라”고 전 작가가 말했다.

 

전문 작가가 아니다 보니 초반 시행착오는 있었다. 50~70대라 녹음기 사용 방법이 서툴러 녹음 파일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고, 맞춤법이 틀리는 건 예사, 팩트 확인이 부족해 지명을 잘못 쓴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홍 대표의 ‘빨간 펜’ 자국이 글 곳곳에 있었다.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이 작가는 어쩜 맞춤법을…’ 혹은 ‘스마트폰으로 금방 확인할 수 있는데’ 같은 생각도 들었다. 최종본이 나오기 전까지 얼마나 읽었는지 인터뷰 대상자가 출판기념회에 오면 누군지 알아볼 정도였다.(웃음)”(홍 대표) 최근엔 작가들에게 녹음하는 방법부터 자서전의 의미, 글쓰기 방법 등을 강의한다. 대학교수를 초청해 인문학 강의도 했다. 윤 작가는 “매년 작가도 성장하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3명 자서전 못 보고 사망

 

자서전을 만드는 과정은 대상자뿐만 아니라 작가에게도 치유의 과정이다. 대상자가 자신의 인생을 지지·공감받는다면, 작가는 다른 이의 삶을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 강 작가는 서울 중구 필동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는 이○○씨의 삶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 걸은 적이 있다. “분식집에 손님이 많아 인터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대신 이씨가 포장마차를 운영했던 자리, 이씨가 다니던 교회 등을 가보니 이씨의 삶을 함께 걷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어머니를 잃은 윤 작가는 인터뷰 대상자들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전 작가는 죽음을 앞두고 동네 사람들에게 떡을 돌린 유○○씨, 여행 가기 전에 항상 유언장을 써놓는 안○○씨, 시각장애 1급임에도 다른 시각장애인에게 점자를 가르치는 신○○씨 등에게 삶의 지혜를 배운다.

 

강 작가는 앞으로 노숙인 자서전을 만들어 “그들을 삶을 세워주고” 싶다. 윤 작가가 말을 보탰다. “구술자서전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할 때 ‘그런 사람들이 남길 게 뭐가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데 대상자 제한은 없지 않나.”

지난해 인터뷰 대상자 두명, 올해는 한명이 자서전을 받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자서전은 받지 못했지만, 사망한 이들이 인터뷰를 통해 마지막 삶을 잘 마무리했을 것이라고 작가들은 확신한다. 구술자서전이 “인생의 쉼표”(전 작가), “자존감을 세워주는 위로”(강 작가), “존엄한 배웅이자, 존엄한 마중”(윤 작가)이라는 작가들은 내년에도 자신의 삶을 풀어내줄 이들을 기다린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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