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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가 이번 대선을 본다면

원효가 이번 대선을 본다면

 
이남곡 2012. 11. 02
조회수 116추천수 0
 

 

 

가을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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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 좋은마을

 

 

 

오랫만에 서울에 다녀 왔다. 선후배들을 만나서 회포를 풀었다. 너무 찐하게 풀어서 후유증이 며칠 갔다. (옛날의 술 버릇은 나이를 잊고 오래 간다. 남들은 후배들이 나를 술 마시게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반대다. 내가 후배들을 술 마시게 하는 것 같다. 이번에도 반성했고, 단주를 결심했지만, 장담하지 못할 것 같다)

 

나는 '길게 보면 역사는 후퇴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짧게 보면 무수히 많은 후퇴와 좌절들을 경험한다. 역사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제도적 문화적 바탕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서울에 가서 여러 벗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역사의 후퇴에 대한 절박한 염려를 느낄 수 있었다. 후퇴하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른바 역사의 물줄기를 뒤로 돌리려는 세력을 막는 것이 필요조건이라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충분조건이다. 통합, 상생, 정의라는 가치를 어떻게 결합하고 조화시킬 것인가? 이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자칫하면 서로 충돌하는 가치로 되기 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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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전인미답의 길을 가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전인미답의 길은 아니다. 이미 시대와 사회가 다름에도 인류의 지혜는 일관되게 축적되어 온 것이 있다. 내가 사회적 진보(민주화를 포함해서)와 인문운동의 결합을 주장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이번 논실학교에서 인문학 강좌를 준비하면서 다시 원효에 대해 공부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번에 <원효의 화쟁사상과 켄 윌버>라는 주제로 오랫동안 과학자이면서 영성을 탐구해 오신 조효남 교수가 강의를 하였다.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 시대의 화쟁적 통합철학을 창조하는 과정에 바탕이 되었으면 하는 선인들의 지혜를 새삼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었다.

 

우선 원효의 화쟁적 언어관이다.

“이치(理)는 말을 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을 끊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이치는 또한 말을 끊는 것이기도 하고 끊지 아니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하여 이언(離言;말을 떠남)⁄의언(依言;말에 의존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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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실인문학교에서 조효남 한양대 명예교수의 `원효와 캔 윌버 사상' 강의

 

 

언어가 참뜻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또한 말을 떠나서는 어떤 이치도 존재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장님이 부분적인 코끼리를 말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 장님이 코끼리를 말하는 것도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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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화쟁은 언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태도로 어떤 표현 방식으로 말해야 의견이 같거나 다른 사람들을 리(理)를 잃지도 않고 정(情)을 잃지도 않으며 화해시킬 수 있는가?’일 것이다. 이에 대해 원효는 ‘동의하지도 않고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으며 말한다(非同非異而說)’는 자세와 방식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원효의 화쟁논리인데, ‘극단(極端)을 떠남’과 ‘긍정과 부정의 자재(自在)’의 두가지 논법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극단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극단적인 말이나 표현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원효가 보기에 모든 다툼은 사람들이 집착에 빠져 있어 단정을 하고 자기 주장만을 하기 때문에 집착을 없애는 것이 화쟁의 근본해결방법이라는 것이다.

 

우선 일차적으로 언어의 한계를 이해시켜 어떤 말이나 개념들이 다 상대적으로 성립함을 지적해서 한 쪽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면서 또 다른 극단도 버리도록 하고 있다.

 

예컨대 유(有)•무(無)의 쟁론에 대해 ‘유무의 관계는 유가 아니면 무인 관계가 아닌, 유가 없으면 무도 없는 상호의존적이고 상대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도(中道)도 유무와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므로 그것도 불변의 실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즉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리는 양 쪽을 다 긍정하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이중부정(二重否定)⁄이중긍정(二重肯定)이라는 ‘긍정과 부정의 자재’의 논리 구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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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진영

 

 

둘째로 원효는 모든 이쟁(異諍)의 화쟁에서 긍정과 부정이 자재해야함을 보여 주고 있다. 언어적 차원에서 보면 언어로 표현되는 모든 차별상은 상대적으로 성립함으로 긍정과 부정이 자재로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정을 하는 이유가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지만 아니라는 것에 대한 집착도 또 다른 집착이기 때문에, 즉 극단을 떠나라고만 강조한다면 그것도 또 다른 극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연비불연(非然非不然;그렇지 아니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님)이라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고 하는 것에 또 집착을 하므로 그것을 부수기 위해 아닌 것도 아니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논어의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와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자재의 논법이야말로 대긍정의 태도를 이끌어내는 방법이 아닐까!

 

그 다음 화쟁방법인데 원효의 화쟁방법은 ‘동의도 않고 동의하지 않지도 않으며 말함(非同非異而說)’과 ‘경전 내용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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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엇갈려 쟁론하고 있는 때에 유견(有見)에 의해 설한다면 공견(空見)과 다를 것이요, 또 만일 공집(空執)에 동의하여 설한다면 유집(有執)과 다른 것이다...이런 까닭에 동의도 하지 않고 이의도 제기하지 않으면서 설한다. 동의하지 않는다함은 말 그대로 모두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고,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함은 그 뜻을 살펴서 들이면 허용되지 않는바가 없기 때문이다.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情)에 어긋나지 않고,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리(理)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서 리(理)와 정(情)에 어긋나지 않게 되고 그래서 화쟁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으면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화쟁의 방법으로서 화쟁하는 사람의 언어적 표현의 태도가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음의 둘 모두를 떠나서 자유로운 입장에서 화쟁을 해야 화쟁하는 사람이 집착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고 이것이 화쟁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동의하지도 동의하지 않지도 않는게 아니라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一心之源)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두 번 째로 원효는 ‘경전 내용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화쟁의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다. 쟁론을 일삼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아는 일부 (경전) 내용에 대한 낮은 소견을 갖고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진리에 대한 낮고 부분적인 소견에서 벗어나 보다 넓고 깊은 전체적인 이해를 하도록 고쳐주고 인도하는 것이 화쟁의 방법이다.

 

사실 이 점은 좀 생각해야할 점이 있는 것 같다. 원효에게 있어서 이미 달(진리)은 부처를 통해 설해져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화쟁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특정한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에 화쟁적 통합철학을 세워야하는 시대적 요구 앞에 있는 것이다.

달(진리) 그 자체가 이미 설해져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 점에서는 켄 윌버의 창발적 진화에 의한 지도(地圖)만들기도 의미 있게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태도가 더 다가오는 느낌도 든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리라.”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요즈음 정치의 계절이다. 어쩔 수 없이 ‘나라의 운명’과 ‘세계의 미래’를 우리 같은 촌부(村夫)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입장들이 교차하고 있는 가운데, 지혜를 모아 밝은 대도(大道)로 민족과 세계의 명운을 여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염원이다. 대통령 후보들을 포함해서 정치인들과 더 나아가서는 주권자인 우리 국민들이 호연지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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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말을 소개하고 싶다.

"펼침과 합함이 자재하고(開合自在) 주장하고 반대함이 걸림이 없으며(立破無碍), 펼쳐도 번잡하지 아니하고 합하여도 좁지 아니하며 주장하여도 걸림이 없고 반대하여도 잃음이 없는 것이 일심(一心)이다."(以開合自在 立破無碍 開以不繁 合以不狹 立以無碍 破以無失)

 

7세기의 원효의 사상이 21세기에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그 때는 마음의 선각자들이 자각하는 세계였는데, 이제는 세계 그 자체가 진화해야할 목표로 보이는데 까지왔다. 두 문(門), 종교와 과학, 주체적 자각과 사회적 실천, 마음과 현상이 서로 어울려 개합자재(開合自在)하고 입파무애(立破無碍)한 세계를 향해 세상은 나아가고 있구나! 산개(散開)하면 개인이고, 보합(補合)하면 공동체다. 지금은 산개하여 개인이 해방되는 시기이지만 무질서와 혼란으로 번잡하지 않고, 보합하면 공동체이지만 서로 침범하고 간섭하는 좁은 세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을 세우거나(立) 무엇을 파기하여도(破) 사리사욕에서가 아니라 공의(公意)공욕(公慾)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걸림이 없다. '내' 생각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아서 주장하여도 걸림이 없고, 반대하여도 잃음이 없는 무타협(無妥協)의 세계에 노닌다.

 

이러한 마음으로 이러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진정한 호연지기가 아니겠는가! 깊어가는 가을, 이런 마음의 산책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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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서울대 법대 재학 때부터 민주화에 투신 4년간 징역을 살고 나온 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겸손으로 진리를 향한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정토회 불교사회연구소장을 거쳐 경기도 화성 야마기기마을공동체에 살았으며, 2004년부터 전북 장수의 산골로 이주해 농사를 짓고 된장·고추장 등을 담그며 산다. 서울에서 매주 ‘논어 읽기’ 모임을 이끈다.
이메일 : namgok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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