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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중신학이 걸어온 길

 

 

 

한국 민중신학이 걸어온 길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16) 특수한 상황에서 시작된 한국의 민중신학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2/11/06 [22:29] 최종편집: ⓒ 자주민보
 
 

한국 민중신학으로서의 통일신학

이승만 독재정권을 4.19혁명으로 물리치고 민주주의 정권을 처음 수립하였다. 하지만 박정희 쿠데타로 인하여 4.19혁명의 피로 세운 민주정권은 간데 없이 사라져 없어지고 말았다. 박정희 쿠데타 군사정권이 등장하여 60년대부터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포악한 통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하에서 수없이 많은 인권침해 사건들이 계속하여 일어났는데 학생, 노동자, 농민 특히 힘없는 가난한 민중들의 피해가 날로 더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신앙만을 강조하면서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관여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보수주의 기독교는 정교분리의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는 오히려 박정희 독재정권이 반공주의와 반민족 반통일 정책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데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는 미국의 백악관 조찬기도회를 본받아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를 대표하는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가면서 경쟁적으로 청와대 조찬기도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의 지도자들은 총칼로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권을 탈취한 반민족적인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을 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 기독교의 부패를 비판하면서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는 양심적인 소수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있었다.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분발한 소수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른바 한국의 민중신학을 처음으로 제창하기 시작했다.

서구문명 속에 존재하고 있는 서구 기독교는 민중의 역사현장에 참여하는 데에는 관심이 전혀 없으며 오직 서구 문명을 지배하고 있는 소수의 엘리트 권력자들과 왕정의 통치가 수백년 동안 지속하고 있는 서구의 기독교적 정치문화속에 평안히 안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서구 문명의 통치권 속에서 수백년 동안 안주하고 있는 서구 기독교 신학은 민중의 고난의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한국의 민중신학의 외침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민중신학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 동기와 원인은 그들이 고난당하는 민중과 직접만나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를 통해서 시작됐던 것이다. 양심적인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과정에서 교회에서 쫓겨났고 대학 강단에서 추방당하였으며 감옥에 갇히게 됐다. 여기서 민중 신학자들은 민중이야말로 독재의 희생자들이며 민중들이 역사의 중심적 위치에 놓여져 있어야함을 깨닫게 됐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은 고난당하는 민중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사명의식을 다시 새롭게 재인식하고 민중신학의 역사적 과제에 직면하게 됐던 것이다.

민중신학을 상황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미국의 흑인신학 한국의 민중신학은 그 때 그 곳의 실제적 상황에 따라서 교회의 사명의식으로 발생한 상황신학이다.

1. 민중신학과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항쟁

한국 민중신학은 1970년대 초반의 특수한 한국적 상황에서 생성한 상황신학이다. 박정희 정권은 초창기에 무리한 수출로 독재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한국의 원자재 수입과 가공품 수출에 있어서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미국의 1/15, 일본의 1/8 정도 이었다. 세계 최고의 장시간 노동과 무대책한 억압적인 노동환경으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36년 동안 일본 식민통치를 겪었는데 또 다시 일본에 정치, 경제적으로 예속되고 있는데 대하여 노동자들은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1961년 5월 16일에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1972년에 이르러서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군부통치의 악행으로 독재정권의 본색을 드러냈다. 한국노총은 독재정권에 어용화되고 있었으며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짓밟으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1970년 11월 13일에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 청년 전태일의 죽음을 통하여 박정희 군부 독재정권에 항의하는 투쟁의 불길이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과 박종철의 죽음을 비롯하여 수없이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비극적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계기로 인하여 한국 교회의 민중신학자들이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노동자와 민중들의 비극적인 삶의 현장에 직접 동참하기 시작했다.

민중신학이 70-80년대에 외친 요점은 다음 세 가지다.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다”, “하나님은 민중의 편에 서신다”, “민중신학은 이론보다 실천을 우선한다.” 이와 같이 민중신학의 기본 요점이 고난받는 민중의 삶속에 일치하는 것이 바로 민중신학의 기본자세였다.

한국의 민중신학은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민중신학으로 출발했다. 그러므로 한국의 민중신학은 인간의 일상적인 보편신학을 포함함과 동시에 또한 특수한 상황에 대처하는 특수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서구문명권에 속하는 기독교는 어떠한가? 서구 기독교는 외형상으로는 인구의 대부분이 말로는 기독교인들이다.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교회는 텅 비어 있다. 전통적으로는 기독교 문명을 자랑하지만 서구 문명권은 이제는 완전히 “신 없는 사회”이다. 오늘 미국과 유럽은 중세기의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이탈하여 모든 면에서 비종교적이며 특히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반종교적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기독교만이 중세기적 서구 종교의 낡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 식민지하에 있었던 정교 분리적인 보수주의 신앙형태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1900년대 초 미국과 영국, 호주 그리고 캐나다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일본 침략자들을 옹호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서 “정교 분리정책”의 선교를 시작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는 “그저 못본척 하라”고 하면서 한국민에게 우선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자가 되어 서구문명을 본받아 개화운동에만 전심하라고 선교를 했다. 그러면서 한국민족에게 영적 구원을 얻는 것이 보다 유익하다라고 설득시키는 방법으로 선교를 했다. 그래서 한국의 교회는 아예 처음부터 일본의 식민지 침략문제에 관여하거나 침략적인 정권을 비판하는 것을 비신앙적인 행위로 여기고 오직 내세의 복락을 위하여 현세의 문제를 멀리하도록 미국 선교사들은 선교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선교정책을 배경으로 하여 발전한 한국 교회는 교회의 물량적 발전을 목표로 하여 대교회 지향적인 개별 교회 이기주의, 교파들과 교권의 이기주의, 교회의 기업화 현상 그리고 개인의 기복 일변도의 보수주의적 신앙 부흥 운동만을 추구하고 성행하는 제도적 교회로 한국의 기독교는 고착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위기에 처한 기독교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 민중신학은 반민중적인 기독교를 탈피하고 민중적인 기독교 정신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민중신학은 나라와 민족의 비극적인 운명을 등에 걸머지고 한국적인 종교개혁을 감행하여 개혁적인 민중의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그마한 공간속에 등불을 켜놓고 그곳만이라도 민족의 암울함에서 벗어날 것을 희망하여 민중을 위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것이 바로 1980-90년대의 민중신학이었다고 평가된다.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민중신학이 민중의 고난을 말로만 서술하는 신학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절실히 회개하게 됐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은 민중의 힘을 결집하고 조직하여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건설 과정을 중요시하게 된다. 민중신학과 사회과학이 결합하여 분단된 민족문제를 풀어 나가는데 공헌하려는 시도가 이루어 졌다.

특히 90년대에 들어서서 민중신학은 노동자의 인권투쟁에 관여하면서 물질적인 생산활동, 물질과 신체성, 물질의 공산적 나눔 등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됐다. 민중신학은 신학의 해석학적 이론으로 양자의 만남과 대화를 통한 배움과 서로의 약점을 보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2. 민중신학을 21세기 통일신학으로

한국의 민중신학과 통일신학을 하나의 주제로 취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민족사, 종교, 문화, 사회, 이념 등 다양한 우리 민족의 삶의 전체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하고 또 재조명하는 포괄적인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통일신학은 한국 민족의 하나님 이해, 역사 이해, 분단문제 이해에 있어서 민족 분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통일의지를 일깨워 주는 것을 제일의 사명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세계가 분열되어 있는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 분열과 분단은 한국민족의 문제인 동시에 또한 세계적인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라는 인식에 의하여 한국의 통일신학은 세계사적인 의미의 역할과 사명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신학의 핵심을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미국의 세계 지배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분단 상황은 상징적으로 세계분단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또 우리 민족에게는 반민족적인 비극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세계사적 신학의 궁극적 목적인 미래의 평화를 실현함에 있어서 통일신학은 같은 맥락에서 세계사적인 역사성을 가진다고 하겠다.

둘째,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 선교사에 의하여 전수됐는데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와 반공주의가 포함된 채 그대로 전수됐다. 21세기 오늘에 이르러서 참된 기독교 신학의 세계사적 진리와 의미의 해석학적 견지에서 볼 때 한국의 기독교 신학은 미국 선교사들이 선교한 기독교 신학과 오늘의 상황과 혼돈되고 마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신학은 역사적 현실과 동떨어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으며 비판과 극복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통일신학의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셋째, 통일신학은 역사의 현장에 직접 찾아오시는 그리스도 관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통일신학은 어떤 형이상학적이며 낭만적인 예수에 대한 추론이 있을 수 없다. 통일신학이 추구하는 사명이행은 우리 민족의 분단의 역사 현장에 직접 찾아오신 예수와 함께 동역자가 되는 통일신학이다.

통일신학은 신비한 관념적 환상이 아닌 세계 역사도상에서 민중의 해방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통일신학은 한반도 분열의 재통합과 제3세계의 변혁의 과제에 공헌하면서 동시에 서구 기독교 신학의 갱신을 촉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통일신학의 과제는 좁은 의미로 혈연과 혈통적 개념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과거 일제식민통치 하에서의 고난과 한국전쟁의 상처에 대한 화해적 차원 그리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영구분단 정책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의 실현을 위한 민족적 개념으로서의 통일신학의 과제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통일신학은 우리 민족의 과제는 통일이며 통일만이 예수의 “하나되게 하는 정신”을 성취하는 평화와 자유의 길이 되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통일신학의 중요한 명제는 “평화통일”이다. 평화통일을 전제로 한 통일방도만이 우리 민족이 외세를 배격해야할 정당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통일신학의 목표와 중요한 과제는 앞으로 전쟁이 없는 현상유지를 지속하거나 또는 북과 남의 체제경쟁에 따른 적절한 타협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통일신학은 1989년에 김일성 주석-문익환 목사 공동선언에 밝힌 통일방도와 그리고 6.15선언과 10.4선언에 제시된 자주 평화 통일의 방도를 우리민족끼리 민중의 힘으로 실현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며 절체절명의 과제로 삼고 있다.

통일신학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민중의 고민으로서의 민중신학의 문제들을 가슴에 품고 진리가 당하는 아픔으로 통일신학의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재해석한다. 한국 교회의 변혁을 위하여 통일신학은 도전한다. 한국교회-민중신학-통일신학으로 발전하여 행동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통일신학은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 신앙 형태상 강대국의 식민지배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한다.

한국 통일신학은 타락하고 외세를 추종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 교회를 살리는 사명이 있다. 민중의 교회가 살아야 우리 민족이 산다. 한국 기독교가 바로 살면 서구의 죽어가는 교회도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3. 꺼지지 않고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 민중신학

암흑한 7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선교 100주년을 구가하고 있던 한국의 보수주의 일변도의 교회를 향하여 민중신학-통일신학은 기독교와 자주적 민족의식과 접목을 시키기 위하여 크게 용감하게 외쳤다.

이렇게 외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필자의 짧은 기억으로는 그들의 명단을 다 밝힐 수 없다. 하지만 대표적인 목회자, 신학자들과 해직 교수들은 수 백명에 이르고 있었던 사실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감옥살이의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필자는 서남동 목사를 기억한다. 서남동 목사의 민중신학은 기독교가 한국 민족 앞에 범한 문화, 역사적 죄악에 대한 “참회의 신학”이었다. 서남동 목사의 민중신학의 언어는 한국 민중이 <한>에 사무친 역사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의 참회적인 민중신학 과정에 있어서 그의 참회의 과정의 결실이 나타나 보이기 전에 애석하게 옥중생활로 인하여 얻은 질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갔다. 그러나 그의 정신과 신학은 죽지 않고 아직도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민족의 한풀이”를 계속하고 있다.

민중신학-통일신학의 거목 안병무 교수를 생각한다. 안병무 교수는 줄곧 크게 주장하기를 한국 민중에게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것은 “갈릴리의 예수”라고 했다. 안병무 교수의 유일한 신학적 관심은 전태일을 비롯한 수많은 무명의 노동자들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교회의 사회참여를 추구하는 신학적 운동이었다.

그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서구 신학의 지배적 전통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안병무 교수의 신학은 현실에서 무엇이 또 어떤 “사건” 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갈릴리 예수의 견지에서 해석하고 또 재해석하면서 마침내 “사건신학-민중신학”을 창조하여 서구 문명 하에서 노예가 되고 있는 제국주의 신학에 대하여 “신학의 혁명”을 시도했던 것이다.

다음은 오늘 현재 한국에 살아 생존해 있는 여성 신학자로서 “평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통일신학 사상”을 평생 동안 주장하고 있는 여성 신학자가 있다. 필자는 수 년 전 서울 방문 때 박순경 교수를 접견했다. 또 박순경 교수가 감옥에 갔을 때 박순경 교수석방대책위원의 활동에 재미동포의 한 사람으로써 동참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박순경 교수는 1991년 10월 24일에 법정에서 “피고인 모두 진술”을 통하여 그의 통일신학적 관점을 70고개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당당하면서도 울분을 터트리면서 주장했다. 박순경 교수의 법정 “모두 진술”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ㄱ) 반공 일변도의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신학적 입장은 범죄행위가 될 수 없다.
ㄴ) 민족 복음화 선교는 분단된 조국의 남북 통일의 문제를 꼭 취급해야만 한다.
ㄷ) 주체사상을 반대만할 것이 아니라 통일 선교차원에서 꼭 재해석이 필요하다.
ㄹ) 자주통일 전망은 남과 북 어느 쪽의 흡수통일이 아니라 평화통일 방안이다.

박순경 교수의 1991년에 주장한 “모두 발언”에 나타난 통일신학은 고령자로서 오늘을 사는 그녀의 삶에 있어서 조금도 변함이 없다.

필자의 제한된 기억력으로 생각나는 민중신학-통일신학의 선각자적인 목회자와 신학자, 기독교인사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존칭 생략) 문익환, 김재준, 한완상, 김찬국, 홍동근, 박형규, 이부영, 한승헌, 손봉호, 이만열, 이영빈, 선우학원, 박재순, 강정구, 김애영, 김경재, 리영희, 강의조, 손규태, 노정선, 이유정 등을 기억한다.

하지만 필자가 일일히 여기에 기록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민중신학-통일신학에 크게 헌신하고 활약한 귀중한 기독교계의 인사들에게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 또한 박순경 교수의 석방을 위한 활약에 애국적으로 동참한 인사들의 명단이 있는데 1991년 10월 1일 현재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의 수는 1,210명 이상이었다.

1900년대를 마감하고 2000년대를 향한 변혁기에 이르러서 한국 교회에서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민중신학-통일신학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 이었다. 1990년 8월 15일에 제1차 범민족대회에 참가한 국내외의 통일운동의 열기는 기독교인들이 그 운동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으며 민중신학-통일신학의 연결선상에서 진행되고 활약하였다. 한국의 국민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것이 자랑스러운 민족적으로 거대한 범민족대회 행사였다.

민중신학-통일신학의 말 없는 연결선상에서 범민족대회가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전개되었던 것이다. 범민련 운동에 있어서 역사 인식에 깊이 의식화된 기독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백두산과 판문점에서 범민족대회를 개최한 것은 큰 의미와 역사성이 내포되어 있는 민족통일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물론 많은 문제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범민족 대회에 참가한 시람들의 90%가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에 있어 민중신학-통일신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민중신학-통일신학이 조국통일 운동의 연속적 계승을 위하여 지속하면서 다각적으로 공헌한 역사는 길이 남을 깊은 뜻이 있다고 여겨진다.

코리아반도의 분단이 7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 미국은 여전히 분단의 책임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분단의 영구고착을 위하여 핵무기 위협과 경제적인 제재를 날로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우리 민족끼리의 완벽한 통일의지와 통일방도를 무서워하면서 악랄하게 파괴공작을 계속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미국이 어떠한 파괴공작을 계속할지라도 절대로 한 발자국이라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통일신학의 역사적인 뿌리 깊은 맥락에서 6.15공동선언과 10.4공동선언의 통일방안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통일방안에 대해 북은 결코 빈말이 아니라 핵은 핵으로, 미사일은 미사일로, 코리아반도를 보호할 수 있는 당당한 억제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코리아반도 남녘에는 6.15공동선언과 10.4공동선언을 실천하고 사수하기 위하여 투쟁을 하다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자주민보의 이창기, 한성 기자가 있으며 또 남쪽 범민련의 이규재, 노수회, 이경원 그리고 한상렬 목사와 정연길 목사들이 있다. 이들 외에도 58명의 양심수들이 오늘 현재 조국통일의 밑거름이 되기 위하여 무명의 투사가 되어 고난의 감옥생활을 감수하고 있다. “민가협”은 이들 양심수들을 돕는 활동을 침묵 속에서 계속하고 있다.

이들이 당하고 있는 수난은 바로 민중신학-통일신학을 창안하고 실천한 민족적 선각자들이 걸어간 발자국을 묵묵히 따르고 있는 신실한 통일운동의 애국적인 장엄한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 인터넷시대에 있어서 자주민보, 통일뉴스, 사람일보, 서프라이즈 그리고 민족21을 비롯하여 수백 개의 언론매체들이 코리아반도의 남녘에서 이명박 반통일 정권의 탄압 속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우리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을 위하여 활약하고 있다. 이들 언론인들이 투쟁하고 있는 것은 권력 앞에서 눈치를 보지 않는 언론인들의 애국적인 용기이다.

이러한 여러 형태의 투쟁의 모습들은 70-80년대에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신 민중신학-통일신학의 선각자들의 꿈이 오늘의 현실적인 민중들의 삶속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6.15공동선언과 10.4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오늘의 통일운동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여기면서 투쟁을 전개하였던 70-80년대의 민중신학-통일신학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재현된 산물이라고 필자는 감히 주장하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서구의 신학자들 중에도 개혁적이며 선각적인 신학자들이 있었다. 신학자 칼빈은 말하기를 “농땡이 부리는 목회자들(idle bellies)은 목회자 명단에서 그 이름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진리에 게으르고 악한 종들에게 어떠한 명예와 존경을 주지 않는다”라고 했다.

또 서구의 현대신학계에서 혜성처럼 유명한 실존주의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는 “목사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큰 질문으로 제시했다. 그는 말하기를 “목회자들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자칫 잘못을 저지르면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을 저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교회에서 목회자들의 리더십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다. 서구의 위대한 신학자들 두 사람 칼빈과 칼 발르트는 신학의 총수로서 서구의 기독교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을 깨닫고 진리의 세계에서 눈을 바로 뜰 것을 경고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 기독교는 교회의 갱신과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의 과감한 혁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오늘 한국 기독교는 교회 안에 물질주의적 축복관이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 물질주의적인 축복의 우상을 철저히 철거해야 한다.

기독교의 예수의 본질은 그의 새 나라를 창건하는 과정에 있어서 세리나 이방인들 같은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를 맺었으며 또 연약한 민중들과 억압받는 여성들에 대한 관심을 모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예수상이다.

한국의 민중신학-통일신학의 창시자들과 그 신학을 추종하는 선량한 사람들은 모두 다 평범한 예수상을 추앙하는 민중들이다. 그들은 평범한 민족의 삶의 길을 추구하는 통일운동의 충실한 일군들이다.

6.15, 10.4공동선언은 우리 민족이 민족자주와 평화통일을 성취하여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삶을 누리기 위한 우리 민족의 숭고하고 순수한 시대정신이다. 2012년 12월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는 민중신학-통일신학의 염원의 성취이며 또 우리 민족의 공통된 유일한 염원의 성취이다. 이번 선거에서 기필코 정권교체를 실현해야 한다.

우리민족의 통일의 길을 가로 막으려는 외세의 분열공작은 여전히 2012년의 대선의 기회를 망가뜨리려고 책동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통일만이 우리 민족의 살 길이다.(2012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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