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내가 '벌금 50만원'을 낼 수 없는 이유

7개월 끌어온 희망버스 재판, 다시 시작합니다

12.11.19 09:20l최종 업데이트 12.11.19 09:31l
강정민(ho089)

 

 

지난해 6월 '1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13시간가량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머문 뒤 떠나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법원에서 등기가 왔다.

"강정민씨 본인 맞죠? 여기 서명해주세요."

서명하면서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런데 서명받는 우체국 아줌마는 날 어떤 사람이라 생각할까? 작년엔 경찰서에서 보내는 등기를 신나게 받더니 올해엔 법원에서 보내는 등기를 계속 받는 나를 생긴 것과는 다르게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추측하진 않을까? 좀 민망했다.

위 사건에 관한 2012. 11. 1. 판결에 대하여 2012. 11. 7. 검사로부터 항소장이 제출되었음을 통지합니다.

검사의 항소,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그런데도 한숨이 난다. 내가 재판을 받는 이유는 희망버스를 탔기 때문이다.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반대해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씨를 응원하기 위해 사람들이 탔던 버스다. 그 버스에 내가 몸을 실은 이유는 <오마이뉴스>에서 동행취재를 의뢰받았기 때문이다.

작년 6월, 희망버스를 타고 들어간 한진중공업에서 가족대책위 아내 중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를 보았다. 돌도 안 된 저 어린 핏덩이를 데리고 집회현장에 나와서 젊은 엄마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궁금했다. 그날 들은 이야기를 기사로 써 <오마이뉴스>에 올렸다.(관련기사 : <11개월 아기의 일상이 왜 이리 힘든 걸까요>).

그리고 한 달 뒤, 경찰서에서 보낸 소환통지서를 받았다. 그 후로 경찰서에선 줄기차게 소환통지서를 보냈다. 그리고 급기야 형사가 두 번이나 집으로 찾아왔고 전화는 엄청나게 했다. 사실 지금은 다 지난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은 척 글을 쓰고 있지만, 당시에는 형사의 전화 한 통에도 손이 떨리고 무릎이 꺾였다. 결국, 남편까지 동행해서 난생 처음 경찰서에서 피의자 조사도 받았다. 그 뒤로 형사가 전화를 안 해선 정말 마음이 편하고 살 만했다.

그런데 얼마 뒤, 내 통장의 개인정보와 내 이동전화 통화내역이 몇 차례 경찰에 의해 조회되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누군가의 책상 위에 내가 낱낱이 까발려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불쾌했다.

'정보기관이 가지고 있는 내 개인정보가 이것뿐일까? 혹 더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고 두려웠다. 우편물 한 장 한 장에 내 처지가 어떤지 내가 어떤 사회에 사는지 맨얼굴로 알려줬다. 치욕스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동행취재 때문에 벌금 200만원... 내 죄명에 나도 놀랐다

부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해고를 반대하며 희망버스에 참가한 시민들이 지난 5월 9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희망의 버스 사법탄에 맞서는 돌려차기 기자회견'을 열고 희망버스에 대한 무분별한 기소와 조사 등을 규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올 2월에는 벌금 200만 원 '약식명령서'를 받았다. 약식명령서에 적힌 내 죄목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이다. 내 죄명에 나도 놀랐다. 공동주거침입 죄명이 그렇게 무시무시할 줄이야.

정식재판을 신청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200만 원을 벌금으로 내버리기엔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장 고민이 되는 건 '아이가 셋인 내가 부산까지 재판을 받으러 가는 것이 가능할까'였다. 게다가 주변에 법을 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식재판을 신청해서 생길 실익이 많지 않을 거라고 했다. 재판으로 나 혼자 고생을 한다면 별 고민 없이 신청하겠지만, 아이들과 남편까지 고생을 시켜야 하니 재판이 망설여졌다.

그때 심정을 솔직하게 글로 써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올렸다(관련기사 : <"남편아, 미안해... 벌금 200만원 나왔어">. 글을 쓰고 보니 문제가 정리됐다. 그리고 중학생인 첫째가 재판에 대해 어떤 걱정하는지 알게 되었다.

"엄마가 재판하다가 힘들면 너희한테 짜증 낼 텐데 어떡하니?"
"그렇지. 나도 그게 좀 걱정이 되지."

아이의 답을 듣고 웃었다. 내 속을 빤히 꿰뚫고 있는 아이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재판을 받게 되더라도 절대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며칠 뒤 정식재판을 신청했다. 다행히 주소지로 재판이 옮겨져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인 성남지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4월 어느 날, 법원으로부터 첫 공판일을 알려주는 '피고인소환장'을 우편으로 받았다. '피고인 소환장'엔 '구속영장'이란 단어가 써 있다. 구속영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경고문.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도망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하여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수가 있습니다.

구속영장이란 단어로 내 사건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첫 공판에선 내 신분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고 2차 공판에선 누굴 증인으로 신청할지 정하고 끝났다. 그즈음 나에게 희망버스 동행취재기사를 의뢰했다는 <오마이뉴스> 편집국 내부 게시글이 증거로 제출되었다. 그 말을 듣자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차까지 증인심문이 있었다. 총 6명의 증인이 재판정에 와서 증인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7차로 변론종결일에 검사는 벌금 200만 원을 구형했다. 검사가 구형할 수 있는 한계까지 구형하는 모습을 보면서 검사가 무죄판결이 나오면 항소할 거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검사도 항소, 나도 항소... '무죄판결' 위해 다시 시작합니다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309일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지난해 11월 10일 크레인에서 내려와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을 외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봄에 시작한 1심 재판은 가을이 돼서야 마무리됐다. 예상보다 길어진 재판 일정을 견디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특히 오후 재판이 열린 날에는 이 집 저 집에 여섯 살 막내를 돌봐달라고 부탁 전화를 해야 했다. 그럴 때는 '정말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죄를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하면 이쯤에서 아이들도 고생을 그만 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다.

선고일, 법원으로 가는 버스에서 무죄에 대한 기대감은 있었지만 설렘은 없었다. 왜냐면 검사의 항소가 예상되어 재판이 언제쯤이면 끝날지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항소심은 수원에서 열린다. 집에서 수원까지는 두 시간 거리다. 그동안 아이들이 고생할 걸 생각하면 막막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 재판은 빨리 끝내야 한다. 이 재판을 가장 빨리 끝내는 길은 뭘까? 판사가 검사가 원하는 대로 벌금 200만 원을 선고하고 내가 항소를 안 하는 거다. 그런데 벌금 200만 원은 약식명령 그대로다. 그럼 재판을 괜히 받은 거고 난 바보짓을 한 거다. 여태 고생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

재판정에 도착했다. 변호사는 다른 재판 때문에 참석을 못했다. 판사가 벌금 50만 원 형을 선고한다. 판결문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지만 왜 유죄인지 잘 모르겠다. 판결문을 좀 쉬운 말로 해주면 안 될까? 항소 가능 기간인 일주일 동안 항소할지 말지를 충분히 고민하고 싶었다. 하지만 변호사가 전화로 날 설득했다.

"항소취하는 언제든지 할 수 있어요. 일단 항소장 접수하고 가세요."

결국, 항소장을 접수하고 법원을 나섰다. 멍했다. 무죄판결을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억울했다. 이제 어느 기자가 농성하는 노동자를 취재할 수 있을까? 나 같이 처벌받게 될지 모르는데.

그리고 며칠 뒤 변호사가 보내준 판결문을 보았다. 글로 읽는데도 해석이 쉽지 않다. 난생 처음 듣는 단어와 문장의 조합은 법률지식이 부족한 나는 해석하지 말라고 비웃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며칠 뒤, 검사가 항소했다는 통지서도 받았다. 내 죄를 가리기 위해 저쪽(?)에서도 정말 많은 사람이 애쓰고 있었다. 한진중공업에 취재하기 위해 들어간 내 행동이 이리 여러 사람이 애를 써서 죄를 가려야 할 만한 일일까? 이 모든 사회적 비용이 진정 아깝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