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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일하는 방식

하느님의 일하는 방식

휴심정 2017. 03. 06
조회수 245 추천수 0
 

 

 

태극기 집회를 그저 바라만 보시는 하느님

                                              

주말마다 서울시청 광장에 수많은 노인들이 모여 대통령을 탄핵하지 말라 외치고 있습니다. 제 처는 티브이 화면을 가득 메운 태극기 물결을 보면서 분노하고, 걱정하고, 절망합니다,


‘왜 저 말도 안 되는 주장에 태극기가 동원되느냐, 태극기는 온 나라 사람들의 태극기인데’하면서 분노합니다. ‘저런 일이 반복되면 태극기 자체에 대한 혐오감이 일반화되는 거 아니냐’면서 걱정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모자라서 자신과 남들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저런 사람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야하는 현실에 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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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집회 모습. 사진/한겨레 김태형 기자

 

나는 이렇게 처를 위로합니다. ‘저 장면이야말로 소위 보수 세력들의 실상을 일반 국민들에게 확실하게 깨우쳐주는 훌륭한 학습과정이니 잘된 일이야. 저 노인네들이 저러면 저럴수록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세력들은 점점 쪼그라드는거야.’ 저 장면이 반복되는 한, 반 토막도 안 되게 떨어진 집권여당 지지율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할 거고 야당 지지율이 50퍼센트를 향해가는 추세가 계속될 겁니다.


우리 어머니는 저런 멍청한 노인네들이 있게 만든 하느님을 원망하지만, 나는 요즘 돌아가는 일들을 보면서 하느님은 일일이 세상사에 간섭하는 ‘일하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욱 새록새록 듭니다. 
노자는 이를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상무위 이무불위)’라 했습니다. 道(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일도 없다는 뜻이니, ‘도’를 ‘하느님’으로 바꾸어, 하느님은 하시는 일없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고 새겨도 무방합니다.


사실 ‘도’ 또는 ‘전체’를 향해‘하느님’이라 이름 붙이면 하느님도 또 하나의 ‘존재’에 불과한 듯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그 결과로 하느님을 사람처럼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면서 세상사를 일일이 챙기는 분으로 생각하고, 이분 비위를 맞춰가며 제 소원 들어 달라고 졸라대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유대인들은 하느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꼭 필요하면 ‘야훼’라는 이름 대신 ‘ㅇㅎ’하는 식으로 자음만 썼습니다. 노자도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를 도라 이름 부르면 영원한 도가 아니라 하셨지요. 그러면서도 노자 자신도 어쩔 수없이 도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처럼 ‘ㅇㅎ’께서는 아무 일도 않으심으로 모든 일을 이루시니, 당신께서  판단능력 부족하고 제 잇속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저 노인들이 태극기 흔드는 걸 그냥 놔두는 식으로 만사에 일일이 개입하시는 건 아닙니다.


얼마 전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들 숫자가 900명에 다가섰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염수정 추기경께서는 이를 두고 ‘놀라운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아닙니다. 신부되겠단 이들을 점점 찾아보기 어려운, 쇠퇴하는 유럽 교회는 그러면 하느님이 은총을 거두어 가셨다는 말이 되니 그렇습니다. 기왕이면 우리 교회고 유럽 교회고 모두에게 은총을 내려주시는 게 더 좋지 않겠는가, 저 불쌍한 노인들이 퍼뜩 정신을 차려 잘못한 대통령을 탄핵하는 게 자신들에게도 득이 된다는 걸 깨닫게 하시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놀라운 하느님 은총이 우리에게 내리셨다는 표현이 자칫 하느님의 활동을 인간의 그것과 비슷한 양 오해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좋은 일 말고 궂은 일에 대해서도 그 분의 은총이라 표현해야 합니다. 내가 아픈 것도, 내가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도, 이 세상에 못되거나 어리석은 이들이 득실대는 것도 다 그 분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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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바라보면, 내가 잘 되게 해 달라고 ‘ㅇㅎ’께 기도하는 건 당신을 우리 같은 ‘사람’으로 전락시키는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기도란 곧 ‘바람’인데,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대리주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저 노인들이 바보같이, 혹은 아집 때문에 증오에 차서 태극기를 흔들고 다녀도 하느님은 아무 일도 않으시고 그저 두고 보시지만, 그걸 바라보는 대다수 국민들이 정나미가 떨어져 보수정당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 방식으로 그 일을 처리하시니 ‘無爲 而無不爲’입니다.

 

자연과학의 인과율이나 불가의 연기 (緣起)법칙이 바로 당신이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일의 방식입니다. 
<주역> 계사전에서는 그걸 이렇게 표현합니다. “一陰一陽之爲道(일음일양지위도)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되는,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는 걸 일컬어 도라 한다.” 도,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힘으로 모든 걸 陽(양)으로만, 모든 걸 선(善)으로만 휘몰아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도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 식민지배와 유대 왕족, 종교지도자 집단의 억압에 묶여있던 당시 암울한 상황을 두고서도 ‘때가 다 찼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가까이 있다.’고 하셨고, 하느님 나라는 조그만 겨자씨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란 모든 게 다 선(善)으로 완성된 상태가 아닌 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아들이라는 예수님도 전지전능의 힘으로 악인들을 응징하거나 모조리 착한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사랑을 가르치다가 결국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있슴과 없슴’을 넘어선 도(道), 전체이신 하느님은 우리 같은 ‘인격’도 아니고, 사람들처럼 의도를 일으켜 이를 행함으로써 만사에 일일이 개입하는 분도 아닙니다. 
법정에서 탄핵을 기각시켜달라고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저 흰 눈썹 변호사의 청을 들어 주실 리 만무하고, 태극기 노인들이 난리치는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보시는 당신을 원망하는 우리 어머니 한숨에도 그저 빙긋 웃고 넘어가실 겁니다.


無爲 而無不爲 (무위 이무불위). 
당신의 그 긴 호흡을 감당하기엔 우리 삶이 너무 짧고, 당신의 그 기묘한 이치를 이해하기엔 우리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음과 양, 선과 악을 다 품어 안는 당신의 사랑을, 그저 할 수 있는데 까지 흉내 내어 볼 뿐인 것입니다.     

 

 이 글은 <공동선 2017. 3·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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