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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인양하라” 세월호 유가족 영정 품고 1박2일 도보행진

 

“침몰하는 대한민국 진실을 인양하라”

옥기원 기자 최종업데이트 2015-04-04 14:41:12 이 기사는 현재 건 공유됐습니다

4일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합동 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와 온전한 선체 인양을 촉구를 위한 도보 행진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4일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합동 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와 온전한 선체 인양을 촉구를 위한 도보 행진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상복을 입고, 영정사진을 든 세월호 유가족들이 1박2일 도보행진을 시작했다. 세월호 1주기를 앞두고 ‘특별법 정부 시행령 폐기’와 ‘선체 인양’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4일 오전 9시께 경기 안산 정부 합동분향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실종자가 돌아오고, 진실이 밝혀질 때가지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는 결의를 내비쳤다. 이어 유가족 250여명은 합동분향소에 안치된 영정사진을 받아들었다. 또 유가족 18명은 출발 전 삭발식을 진행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미진하나마 제정된 특별법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할 줄은, 실종자를 가족 품에 안겨주겠다는 약속이 이렇게 방치될 줄은 몰랐다”며 “실종자를 가족 품에 돌려받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며, 인양 시점을 최대한 앞당기는 것이 정부의 책무인 만큼 정부는 빨리 인양을 결정하고 정부 시행령을 철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일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합동 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와 온전한 선체 인양을 촉구를 위한 도보 행진을 하기 전 삭박을 하고 있다.
4일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합동 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와 온전한 선체 인양을 촉구를 위한 도보 행진을 하기 전 삭박을 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예상하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정작 이렇게 영정사진을 들고 서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도보행진이 발이 부르트고 온몸이 부어서 힘든 게 아니라 1년이 지났음에도 진상규명은 커녕 어느 것 하나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유가족들이 영정사진을 앞세우고 자식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알기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며 “희생자들 가족 앞에서 돈으로 능욕하며 진상규명을 방해하려는 처사를 멈추고 가족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을 잘 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세월호 실종자 고 허다윤 양 아버지 허흥환 씨는 “잔인한 4월 16일 다가온다. 하지만 분향소조차 들어가지 못한 9명 실종자가 있다”며 “정부는 조속히 세월호를 인양해 실종자 9명을 찾기 위한 모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명선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아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자식들을 가슴에 품고 도보행진을 시작한다”며 “선체 인양을 통한 실종자 수습, 철저한 진산규명을 통해 떳떳한 부모가 되기 위해 끝까지 행동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도보행진에는 세월호 가족뿐만 아니라 시민 1000여명이 함께 했다. 행진단은 오전 10시께 안산 합동분향소를 출발해 1박2일간 서울 광화문 광장까지 행진한다. 이들은 행진을 마친 5일 오후 5시께 광화문 광장에서 진행되는 ‘1차 집중촛불’ 집회에 참석한다.

4일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합동 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와 온전한 선체 인양을 촉구를 위한 도보 행진을 하기 전 영정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4일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합동 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와 온전한 선체 인양을 촉구를 위한 도보 행진을 하기 전 영정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정의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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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공기에 봄 내음이 나는 게 두려워요"

"벌써 공기에 봄 내음이 나는 게 두려워요"
[귀농통문]세월호·① 4월16일
 
 

지난해 8월 어느 날, 나는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을 만나려고 대구로 갔다. 대구지하철참사가 일어난 날은 2003년 2월 18일. 그로부터 1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희생자 대책위원회' 사무실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지난 세월의 흔적이 묻은 듯 조금은 어수선한 사무실에서 윤석기 대표와 황순오 씨가 나를 맞아주었다. 인사를 건네고,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숨 쉬는 것조차 일순 멈춰버렸다. 그곳에는 희생자들의 영정 사진이 가득 담긴 커다란 현수막이 자리하고 있었다.

 

192명.

 

대구지하철참사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다. 그 '숫자'가 그 순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나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세월호 이전의 참사에서 나는 한 번도 희생자 '개인'을 기억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대형 참사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만큼이나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던 지난 참사를 우리 사회는 어떻게 겪었고 또 어떻게 잊어버리게 되었는가. 아마도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의문이었을 것이다. 그 대답 하나가 거기에 있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씨랜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춘천 산사태…. 뉴스를 가득 채웠던 참사들을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그때 뉴스를 꽤나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분노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영정 사진들 앞에 선 나는 자신에게 깊은 질문을 던져야 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미 '아는 것'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손문상

 

 

나는 왜 세월호 참사를 기록하게 되었나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의 일원으로, 나는 지난해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에 함께했다. 그 기록은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집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지음, 창비 펴냄)이라는 책으로 올해 초 세상과 만났다. '금요일'은 화요일에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생각해본다. 기록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의 나에게 세월호 참사는 어떤 사건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가슴아파하면서도 조금씩 관심의 거리를 떨어뜨려갔을지 모른다. 일상의 관성에 이겨보려고 해도 삶이 주는 무게가 너무 무겁다며, 혹은 나날이 쏟아지는 새로운 사건에 짓눌려 '아이고, 힘들다' 하며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뜻에서 세월호 참사 기록에 참여한 것은 그 누구보다 '나'를 위한 일이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펴낸 뒤 작가기록단은 책에 실린 열세 분의 부모님들과 안산에서 만남을 가졌다. 책을 내기 전과 후의 생각의 변화 그리고 이 책을 받아든 마음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이날 함께 자리해준 2학년 4반 고 김동혁 군(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쓸 때마다 '고'자를 붙일 것인가 말 것인가 늘 망설인다. 아직 아이의 '사망 신고'를 하지 못한 부모들이 많다.)의 엄마 김성실 씨는 책을 읽고 난 소감을 묻는 말에, 책에 실린 부모들이 "달리 보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세희 아빠하고는 어디 발언할 때만 같이 한 번씩 가서 '진상을 규명해야 되고…' 이런 얘기만 막연하게 들었지 세희에 대해서 들은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건우 엄마도 우리 반이긴 하지만 워낙에 얌전하시고 대화를 잘 안 하시니까 건우에 대해서도 나는 잘 몰랐어. 그냥 '건우라는 아이가 있고 그 엄마가 아프다'고만. 근데 그 정도인지는 몰랐지. 책을 읽고 나서 다시 세희 아빠를 봤을 때는, 그전에는 그냥 먼발치서 이웃집에 창문 너머에 있는 사람을 봤다면 이제는 한방 안에 같이 있는 느낌. '저 사람 마음도 내 맘하고 똑같구나'. 그런 생각도 들고. 이 사람의 눈빛을 보고 책을 읽었을 때 저 사람의 무너지는 마음이 느껴졌던 게 보이는 거야."

  

7반 고 이준우 학생의 엄마 장순복 씨는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우리가 겪었던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고, 또 같이 함께하지 못한 가족들도 다 똑같은 마음인데 그걸 이번 기회에 헤아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들이 더 숨 쉬는 느낌도 나고. 어제는 한 분한테 전화가 왔더라고요. 우리 아이는 말이 없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달라 보인다는 거예요. 책을 읽고 우리 아이에 대해서 다시 소중하게 느꼈다고 감사하다고." 

  

동혁 엄마와 준우 엄마의 말에는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대할 때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한다. 이 말은 분명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참 추상적이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구체적인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세월호 참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다. 그때 '안다'는 것은 단지 사고의 '직접' 원인을 밝히는 것에 한정되지 않으며, '창 밖'에서 고통을 바라보는 데 머무는 것 또한 아니어야 한다.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 집안 풍경도 살피고, 얼굴도 마주보고, 손때 묻은 물건도 펼쳐보며 이야기도 나누어야 한다. 그 안의 사람이 '풍경'이 아닌 '숨 쉬는' 존재가 되도록 말이다. 그러니까 이때 우리의 '기억'이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닌, 굉장히 의식적인 행위이다.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말이다.  

  

 

▲'특별법 무력화 시도 정부 시행령안 폐지'를 요구하며 삭발에 나선 세월호 희생자 '시연 엄마' 윤경희 씨. 엄마들의 머리를 잘라주는 미용사들도 함께 울었다. ⓒ프레시안(손문상)

 

 

무엇을 남기고 기억할 것인가 

  

기록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 '무엇'에 대해 고민하는 위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생생히 살려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의 목격자이자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보여준 온갖 병폐와 부조리에 대한 생생한 증언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특히 유가족들의 참사 이전의 삶에 주목했다. 그것은 단지 희생된 아이들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유가족들은 균질한 존재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 304명의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아닌 304개의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하듯이 희생된 이의 가족과 이웃, 친구들의 고통도 한 덩어리가 아니다. 저마다의 삶의 맥락을 살펴볼 때만이 이들이 진정으로 이 참사로 '무엇을 빼앗긴 것인지'가 드러난다.

  

나는 한편으로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가 발 딛고 선 사회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고통에 대해 슬퍼하고 두려워하거나 극복하는 것, 두 가지의 서사만이 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실제 한 인간이 고통에 반응하고 그것을 겪어내는 과정은 그런 구분이 무의미하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물속에 오래 있어 시신이 훼손된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갈등을 겪었다. 본 사람은 본 사람대로, 안 본 사람은 안 본 대로 후회했다. 그런가 하면 얼굴이 없어진 아이 모습을 확인하고 무너진 마음을 '살아 있을 때 좋았던 모습만 생각하라고 안 보여주고 갔구나' 하고 다잡는 사람도 있다. 그중 어떤 것도 더 낫거나 못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그저 저마다의 최선이 있을 뿐이다. 하나하나의 슬픔을 마주하면서 내가 깨닫게 되는 것은, 그 모든 슬픔을 존중하고 공감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사실이다.  

  

참사를 낳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개인의 삶에서 해야 할 실천부터 구조적인 문제까지 아우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것도, 유가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다. 

  

단원고 2학년 5반 오준영 학생 어머니는 '<금요일엔 돌아오렴> 서울 북콘서트'에서 "공기에 벌써 봄 냄새가 나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창 밖'이 우리는 흩어지는 기억을 붙잡으려 애쓰지만, 고통의 '집안'에서 유가족들은 도저히 흩어지지 않는 기억에 붙잡혀 신음한다. 세월호 참사에서 슬픔의 위로는 '진상 규명'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편으로,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서 상처를 지우거나 유가족들의 일상을 참사 이전으로 복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유가족들이 짊어진 기억의 무게를 나누어 질 수는 있다. 희생자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함께 숨 쉬는 사회적 기억이 될 때, 유가족들의 눈물이 우리를 마주보고 흐를 때, 우리는 서로를 지탱하며 함께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신호성 군이 쓴 시 한 편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세월호 참사와 지금의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 통렬한 은유가 살아 있는 시다. 

  

나무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곳 
식물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곳 
이 작은 나무에서 누군가는 울고 웃었을 나무 
이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나무꾼은 누구인가 
그것을 말리지 않는 우리는 무엇인가 
밑동만 남은 나무는 
물을 주어도 햇빛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추억을 지키고 싶다면 
나무를 끌어안고 봐보아라 
 

 
 

 

*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4년 9월 현재 71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 바로가기 : 전국귀농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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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슬, 그 사람

등록 :2015-04-03 21:23수정 :2015-04-04 10:42

 

김민기.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이진순의 열림, 김민기 (상)

이진순이 만난 학전 대표 김민기
속마음 털어놓은 최초의 인터뷰
1970~80년대 청년 문화의 원형을 만든 인물이자 노래와 연극,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 지평을 연 르네상스적 인간. 나이 만 스물에 지은 ‘아침이슬’이 평생 꼬리표가 된 사내.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를 수식하는 말은 그가 지나온 험한 세월만큼이나 많다. 1991년 개관한 소극장 학전은 황정민, 조승우,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를 배출한 한국 문화계의 산실이자 가수 김광석이 숨지기 전 1000회 공연을 한 곳이다. 김 대표가 직접 연출한 <지하철1호선>은 2008년 종연 때까지 15년간 71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4000회나 공연된 국내 최장수 뮤지컬이 됐다. 지난 10여년간 고집스레 청소년극과 아동극에 공을 들이고 있는 김 대표는 공연 홍보 등을 제외하곤 속내를 털어놓는 긴 인터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한겨레> 토요판 인터뷰 코너 ‘이진순의 열림’의 초대에 응한 그는 네 차례에 걸쳐 무려 15시간 동안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가장 강조한 말은 ‘돈 안 되는 일’이었다. 사진은 지난달 24일 첫 인터뷰 때의 모습이며, 다음주에는 제2회가 실린다.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

 

후줄근한 점퍼 차림에, 고개를 푹 수그린 사내가 벌서러 교무실 끌려오는 소년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막걸리 세 통이 든 비닐봉지가 덜렁덜렁 들려 있었다.

 

“내가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못할 것 같아서….”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 그가 씩 웃었다. 공연물의 홍보를 위해 기자들을 만난 적은 있지만 자신의 “옛날 얘기”를 듣겠다고 청해 오는 인터뷰는 번번이 사양을 해왔는데, 어쩌다 술김에 하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며 그가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20년 넘게 극단 학전을 이끌어온 대표이자, 15년 롱런의 경이적 기록을 세운 <지하철1호선>의 연출가. 그러나 그는 상업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대중적으로 나서는 일을 여전히 병적으로 혐오하는 듯했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원형질을 제공한 국내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콘서트 한번 안 했는데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그의 노래가 불린 사람, 공장 노동자로 농사꾼으로 막장 탄부로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그 스스로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되었던 사람, 미술에서 시작해서 노래와 연극과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사람. 김민기(64), 그는 동시대 그 누구보다도 밀도 높은 삶을 살아왔다.

 

‘아침이슬’이 담긴 데뷔앨범을 낸 게 그의 나이 만 스무 살 때이니,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지나온 삶의 아픔과 갈등, 회한과 소망을 담담히 들려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 험한 시대를 가장 뜨겁게 겪어냈으면서도, 가시 돋친 공격성이라곤 없이 유순하고 담담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뭔지, 어떻게 이 남자는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나도 그가 건네는 막걸리 한 잔을 받았다.

 

지난달 24일 오후 첫번째 인터뷰 장소인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난 김민기는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못하겠다”며 연신 막걸리를 들이켰다. 불콰한 얼굴의 그는 특유의 낮고 굵은 저음으로 느리게 말을 이어나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음반 팔아 마련한 배우들의 못자리, 학전

 

그가 가장 덜 부담스러워할 질문, 학전에서 최근 준비 중인 인문학 강좌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그리스신화에 대한 강좌가 곧 시작될 거라던데.

 

“학전 문예 강좌를 시작한 게 94년인데, 유홍준, 이태호, 윤용이 교수 같은 분들 모시고 한국학 관련된 걸 주로 하다가 이번에 11번째로 잡은 주제가 그리스신화다. 서양에서 인문학의 원조라면 그리스신화인데, 유재원 교수(한국외대 그리스학)가 내가 알기론 이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이다. 3년 동안 총 30강 계획으로 학문적인 총정리를 해보려 한다.”

 

-인문학 강좌를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정작 당신은 왜 강의를 한번도 안 했나?

 

“난 ‘쟁이’지, 평론가나 정치가가 아니거든. 내가 추상화를 걸었는데 누가 와서 이게 뭘 의미하냐고 물으면 난 할 말이 없어. 작품을 말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그리는 시늉 하며) 직접 만드는 팔자가 있는 거니깐. 그걸 설명할 재주가 있었다면 그림을 안 그리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제야 그와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내친김에 나도 조심스럽게 그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를 꺼냈다.

 

-그간 하신 인터뷰를 찾아 읽어봤는데 좀 아쉬운 점이 느껴졌다. 김민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형화된 선입관을 깨겠다는 마음에서 그랬을 테지만, 어떤 대답은 너무 무성의하고 위악적이다. 예를 들어, 옛날에 공장 가고 탄광 간 것 물어볼 때마다 ‘아무 뜻 없고, 그냥 먹고살려고 간 거다’라고 답한다든지, 정치적인 질문에 대해서 ‘난 그런 데 신경 쓸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한다든지. 정말 그게 다인가? 대한민국 평균 시민도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 쭉 그렇게 답해왔다. 그동안은 내가 하는 작품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건 들을 생각 안 하고 다른 얘기, ‘너 어떤 사람이야?’ 자꾸 이런 걸 물으니까… 난 그저 ‘몰라. 그거 얘기할 준비도 안 돼 있어’라고 말하려던 건데. 나중에 그게 인용이 되면 또 다르게 비치기도 하고… 나도 이번엔 에잇, ‘발가벗으라면 벗자’ 하는 심정으로 나왔다.”

 

-감사드린다.(웃음) 젊은 시절의 김민기를 우상화하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자신을 폄하하지도 마시고, 균형 잡힌 회고를 해주셨으면 한다. 오늘은 ‘그간 무엇을 하셨는가?’보다는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여쭙겠다.

 

“완전 보안사 취조실이네. ‘너 왜 그랬어?’ 하는….(웃음)”

 

-학전 얘기부터. 학전은 어떻게 오픈하게 된 건가? 돈도 별로 없으셨을 것 같은데.

 

“연우무대라는 극단이 있었다. 내 친구, 선후배들이 하는 극단이어서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돕고 그랬는데, 내 지인이던 지금의 건물주가 ‘연우무대가 온다면 소극장을 지어주겠다’ 한 거야. 난 연극인도 아니고 중간다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떠맡게 됐지. 근데 돈이 있나? 그래서 대형 음반사를 찾아갔다. 선불금을 5천만원 해줄 수 있냐고 하니까 당장 해주겠다고 그러데. 그래서 할 수 없이 떨이로 음반 넉 장을 낸 거지. 노래할 생각이 조금치도 없었는데.”

 

그때 나온 음반이 <김민기 전집>(1993)이다. 71년 그의 첫 음반이 압수된 이후 처음으로 정식 녹음한 음반이었다. 그 돈으로 91년 학전이 개관했다.

 

-학전은 유명 배우들을 배출해낸 연기사관학교로 불린다. 황정민, 조승우, 김윤석,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들이 모두 학전 출신이니.

 

“학전(學田)이 한자로 배울 학에 밭 전 자다. 학전 처음 열 때 내가 한 말이 있다. 여기는 조그만 곳이기 때문에 논바닥 농사가 아니다, 못자리 농사다. 못자리 농사는 애들을 촘촘하게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게 될 거라고.”

 

-그 말대로 되었다. 학전에서 자란 연기자들이 한국 문화계 주역이 되었으니.

 

“뭐 더러 잘되는 놈도 있지만 아직도 잘 풀리지 못해 자괴감에 빠져 있는 놈들이 90퍼센트가 넘으니 걔네들이 더 밟히지.”

 

-배우를 캐스팅할 때 뭘 제일 중요하게 보시나?

 

“학전 오픈할 때, 내가 연극이나 뮤지컬에 대해서 미리 배워놓은 게 없으니까 뭘 가르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내가 백지(白紙)니까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백지인 애들을 뽑은 것 같다. 이미 어디서 뭘 배워 온 사람들, 나쁘게 말하면 ‘쿠세’(굳어진 습관)랄까, ‘쪼’가 있는 사람들은 내가 컨트롤할 능력도 없고. 나처럼 백지 입장에서 같이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막걸리 세 통 들고 나타난 그
자신 드러내길 병적으로 혐오해온
학전 대표, <지하철1호선> 연출가
그가 발가벗는 심정으로 나왔다

 

15년간 관객 71만명 끌며
매표수입 100억 넘긴 <지하철1호선>
4000회 끝으로 돌연 중단 선언
대신 10년째 청소년·아동극에 공
“세상엔 돈 안돼도 해야 할 일 많아”

 

김광석과 유재하를 먼저 보내고…

 

-학전 입구에 김광석 노래비가 있던데, 김광석에 대한 남다른 애틋함이 있는가 보다.

 

“학전에서 광석이가 1000회 공연을 했는데, 처음 만난 게 84년도던가? 광석이가 가수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노래를 들어보니까 너무 못하는 거다. 그래서 ‘너 가수 하지 마라’ 그랬는데….”

 

-김광석이 노래를 못한다고?

 

“비틀스가 그렇게 유명하지만 비틀스도 노래는 잘 못하지. 테크니컬한 측면에서는.”

 

-(갸우뚱) 일단, 그렇다 치고….

 

“학전 오픈하고 몇 개월 만에 빚이 한없이 늘었다. 100퍼센트 대관이 된다고 해도 계속 적자…. 마침 그때가 대중문화의 판도가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해에 서태지가 나왔으니까. 통기타고 뭐고, 아날로그 음악 하던 놈들이 하루아침에 된서리를 맞았지.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야. 어차피 극장 빚은 쌓여가고 그건 내가 지고 가는 거니까, ‘니들 와서 노래하고 싶음 해라!’ 그랬지. 그래서 광석이가 온 거다.”

 

김광석 콘서트가 예상 밖의 큰 호응을 거두면서 땡볕 아래 대로변까지 관객들이 줄을 섰다. 김광석은 “나는 벽에 붙어서 노래해도 좋으니” 최대한 많이 들이자고 고집해서 복도 문짝까지 떼어내고 관객을 받을 정도였다.

 

-노래를 못하는 애라고 하셨는데.(웃음)

 

“그래도 광석이의 미덕이 하나 있다. 젊은애들이 딴따라를 하게 되면 대개 싱어송라이터를 하고 싶어 한다.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이거지. 근데 싱어송라이터들은 자기 곡만 줄기차게 부르려고 해. 광석이는 지가 만든 곡이 여럿 있지만 다른 좋은 노래를 계속 찾아다니면서 부른 거야. 그러기 쉽지 않은데 큰 미덕이지.”

 

‘이등병의 편지’(원곡 전인권)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원곡 김목경)도 그렇게 리메이크된 곡들이다. 그러던 김광석이 96년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런 인연으로 김광석 추모사업회장을 맡으셨나?

 

“내 팔자에 어쩌다가 먼저 죽은 후배들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었는지… 유재하도 비슷한 케이슨데, 걔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재하가 죽기 일주일 전 날 찾아왔어. 내가 그때 그 녀석한테 준 선물이 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나온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박봉술 선생의 흥보가였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박봉술 선생의 창법은 당시까지는 ‘썩은 목’이라고 불리던 건데, ‘한국말을 어떻게 하면 이렇게 텁텁하게 할 수 있는지’ 공부하라고 준 거지. 재하 창법이 판소리에서 말하는 ‘노랑목’이어서. 근데 아마 그 녀석, 안 들었을 거야.(피식 웃음) 재하 사십구재 공연도 내가 연출해서 했고, 작년부터 재하네 그룹이 학전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어. 어쩌다 보니 광석이, 재하 요 두 라인이 학전 팔자에 이상하게 끼어 들어와 있네.”

 

-김광석이나 유재하는 시장에서 말하는 소위 ‘블루칩’ 같은 존잰데, 그걸로 돈을 만들어서 ‘뭔가 더 의미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쓰겠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게 경영자 마인드 아닌가?

 

“그렇게 나온 대형 뮤지컬도 몇 편 있다. <그날들>이라든가 <디셈버>…. 근데 난 그걸 못하겠다.”

 

-왜?

 

“인터뷰 못하는 거랑 똑같다. 그냥 체질에 안 맞는 것.”

 

-돈이 싫은가?

 

“아우, 돈이 얼마나 필요한데. 학전에 지금 빚이 몇 억인지. 요새 계산도 안 돼.”

 

-<김광석 다시 부르기> 콘서트도 관객이 몰리니까 학전에서 하던 걸 바깥의 대형극장으로 내보내고. 오는 돈도 마다하시는 판국이다.

 

“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야.”

 

-정 그러면 대본이나 연출 이외의 업무들, 기획이나 제작 같은 비즈니스는 누구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게 고용이 되거든. 그러면 그쪽에서도 돈의 논리 때문에 나한테 (상업성 있는) 작품 내용을 요구하게 된다고. 근데 나는 그 돈 벌겠다고 내용을 그렇게 바꾸고 싶지가 않은 거지.”

 

 

‘쟁이’가 뭐냐고? 병이지, 결벽증 같은…

 

91년 이래 적자 누적으로 폐관 위기에 놓였던 학전에 극적 회생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94년 초연된 뮤지컬 <지하철1호선>이었다. 독일 그립스극단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지만, 김민기의 거듭된 수정 번안을 통해 완전히 한국의 뮤지컬로 재창조된 작품이다. <지하철1호선>은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전부이던 한국 공연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원작자인 폴커 루트비히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이로 재해석된 작품”이라고 칭송했다. 소극장 뮤지컬에서 라이브 연주를 도입한 것도, 원작자에게 저작권료를 제대로 지급하고 무대에 올린 것도, 출연진과의 ‘서면계약’이나 ‘러닝개런티’ 제도를 도입한 것도, 학전이 처음이었다. 전국순회공연과 해외공연까지 성황리에 마친 <지하철1호선>은 그러나 2008년 4천회 공연을 끝으로 돌연 중단을 선언했다.

 

-15년간 관객 71만명을 끌어들인 작품인데 왜 공연을 중단했나?

 

“그게 아마 매표수입이 100억원을 넘겼을 건데.”

 

-저런! 계속했으면 ‘창조경제’의 모범이 되었겠다.(웃음)

 

“중단한 이유? 돈만 벌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거 같아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 이런 걸까. 더 뭐를 물어봐야 할지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면… 어, 저, 관객수가 줄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니고, 그냥 ‘끊은’ 거다. 장기공연으로 가다 보니까 배우들의 체력이나 감성을 고려해서 1년에 2팀이 돌아가며 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이 완전히 부속품이 되더라고. 나 이러자고 세상 사는 거 아닌데, 내 나이도 낼모레 환갑이고 이 짓 하다가 죽을 거냐 싶더라. 그래서 딱 끊었다.”

 

-‘끊었다’고 표현하신다!

 

“어차피 난 돈 되는 거 할 줄 모르는 놈이니까, 내가 해야 할 일, 내 나이에 맞는 걸 해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지금 고생하고 있지만. (옆에 있는 직원을 보며) 대번에 고개 끄덕거리는 것 좀 봐.(웃음)”

 

돈 되는 <지하철1호선> 대신,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기며 김민기가 10여년째 공을 들이는 건 청소년, 아동극이다. ‘학전 청소년무대’ 시리즈로 <굿모닝 학교> <복서와 소년>을, ‘학전 어린이무대’ 시리즈로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무적의 삼총사>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어린이물은 방학 중에만 올리고 평상시엔 성인물을 올리는 게 연극계의 상례인데, 학기 중에도 어린이, 청소년극에 전력투구하고 있으니 공연을 할수록 적자만 느는 게 당연하다. 작년부터 어린이정가를 1만8000원에서 1만2000원으로 바꾸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소득수준이 낮은 가정의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자는 김민기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언제부턴가?

 

“아주… 오래전부터. 71, 72년에 양희은이랑 판 낼 때도 애들 노래는 꼭 들어갔다. 그냥 왠지 애들에 대해서 늘 관심이 가더라고. 동학에서 최시형이 ‘애 때리지 말라’고 한 것도 자꾸 마음에 맴돌고. 쟁이라는 게 ‘어떻게 계산하면 돈이 될지’는 따지지 않으면서, 자기가 딱 꽂히면 거기서 피할 수가 없다. 그게 쟁이의 속성이다.”

 

-‘쟁이’의 정의가 뭔가?

 

“어이쿠, 뭐 그런 어려운 질문을… 병이지, 뭐 결벽증 같은.”

 

-그래도 계속 적자를 보면서 할 수는 없지 않나?

 

“(언성 높이며) 내 목표는 더 이상 빚낼 수 없어서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하는 거지. 이건 피할 수 없는 내 팔자야. 그래도 이런 것 정도는 우리한테 있어야 된다고! 논리를 떠나서! 낫살 먹은 놈이 해야 될 일을 하는 것뿐이지.”

 

따박따박 돈 얘기만 물고 늘어지는 데 그는 부아가 난 모양이었다. 최소 경상지출만 한달에 4천~5천만원인데 그는 어떻게든 빚을 내서 직원들 월급을 밀린 적은 없다고 했다. 아이엠에프(IMF) 때 딱 한번 빼고는. 작곡·작사가로서 그간 만든 노래의 저작권료가 재정적 도움이 되나 궁금해 물으니 “월 백만원대”란다. 100여곡에 달하는 노래를 만든 사람의 저작권료로는 믿어지지 않는 액수다. 그래서 이번에 저작권 신탁관리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 새로 생긴 ‘함께하는 음악저작인협회’로 옮긴다고 했지만, 돈의 액수 때문이라기보다는 투명성에 대한 불신 때문인 듯했다.

 

 

문둥이 아이를 받아내던 산파 어머니

 

김민기는 1951년 전쟁통에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민군에 학살당해 돌아가시고 과부가 된 어머니가 유복자인 민기를 낳았다. 원산이 고향인 어머니는 숙명여고를 나오고 연희전문 1기로 입학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연희전문 시절, 조선학생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며 들고일어났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산파) 자격증을 따서 돌아와, 아이 받는 일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출생부터 파란만장하시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기적이지. 어머니는 늘 바쁘시고 형제들은 학교 가고 혼자 놀면서 컸는데, 어려서 제일 무서운 게 뭐였는지 알아? 아이고, 근데 내가 취했다. 자꾸 반말을….”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웃음) 제일 무서운 게…?

 

“제일 무서운 게 문둥이하고 팔다리 잘린 상이군인들이었다. 근데 방학이면 서울에 있는 형, 누나들이 온다고 해서 역에 마중 나가는데, 역에서 그 무시무시한 문둥이들이 우릴 보고 막 다가오는 거야. 굉장히 무서웠다. 근데 그놈들이 어머니한테 인사를 굽실하고… 알고 보니 어머니가 일정 때부터 받아준 놈들이야. 어머니가 그 사람들한테 돈을 받았겠어? 내 말은 세상에 돈 되는 일만 다가 아니다 이거지. 그 전쟁통에 그 아이들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거야? 돈이 안 돼도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은 해야 된다. 내가 아동극을 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을 거쳐 66년 경기고에 입학한다. 경기중·고 시절 미술반 활동은 그의 “청소년기의 모든 것”이었다. “난 경기중·고를 다닌 게 아니라 경기중·고 미술반을 다녔다”고 말할 만큼.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았나?

 

“경기고 미술반이 프라이드가 무지하게 셌는데, 그때 우리 모토가 ‘정물화는 안 그린다’였다. 미술실에서 앉아서 그리면 안 된다!”

 

-그럼 뭘 그리나?

 

“무조건 화판 들고 나가는 거지. 중학교 1학년 때 미술반 선배가 ‘어디서 사과나 꽃병을 그리고 자빠졌어? 나가!’ 해가지고 남대문 시장 좌판에 가서 그리던 기억이 난다. 그거 때문인지, 내가 만든 노래들은 내가 살면서 어딘가 (현장에) 따라가서 이렇게 그린 거야. (그리는 시늉) 단지 붓이 아니고….”

 

-음악으로 그렸다?

 

“노래로 그린 거지. <지하철1호선>도 사실은 풍속화야.”

 

김민기는 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그에게 정형화된 미대 수업은 따분할 뿐이었다. 1학년 1학기에 낙제를 한 그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아르바이트 삼아 듀엣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재동국민학교 1년 후배인 양희은을 만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이전의 인터뷰 보니, ‘아침이슬’이나 ‘상록수’ 얘기만 나오면 굉장히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시던데 왜 그러나?

 

“그 노래들이 내 몸에서 나간 거긴 한데, 나간 것의 백배가 되어서 돌아오면 내 몸이 버거울 수밖에….”

 

-87년 시청앞 광장에서 이한열 노제가 벌어질 때 어디 계셨나?

 

“나, 거기 있었다.”

 

-어떠셨나?

 

“앗, 뜨! 뭐 그런 느낌… 백만명이 부르는데, 그 백만명이 다 각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부르는데 내가 그걸 뭐라고 감히 말하겠나? 그때 생각했다. 아, 이건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71년 발표된 ‘아침이슬’은 그의 험난한 인생의 출발점이었지만, 처음엔 누구도 그 노래의 장대한 후폭풍을 예감하지 못했다. 김민기 1집에 실린 곡 중 제일 먼저 방송금지된 것은 ‘꽃 피우는 아이’. “무궁화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로 시작하는 가사가 화근이었다. 72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김민기가 이 노래를 부른 것 때문에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되고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다. 그는 불온한 사상범이 되고, 수시로 체포, 고문, 취조받는 일상이 이어졌다. ‘아침이슬’은 그 와중에도 은밀한 바람처럼, 소리 없는 잉걸불처럼 퍼져나갔다. 결국 75년엔 구체적 사유도 명시되지 않은 채 금지곡이 되었다.

 

“내 몸서 나간 ‘아침이슬’ ‘상록수’
나간 것 백배가 돼 돌아와 버거워
1987년 시청앞 이한열 노제때
백만명 부르는데 앗, 뜨 그런 느낌
아,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우리말의 생동성 처음 깨우쳐준
김지하에게 무한한 고마움 가져
그러나 정치적 입장에는 전혀…
나와 무관하고 영향 준 바도 없어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나를 죽이던 사람들, 나 때문에 죄를 짓는구나

 

-몇 번이나 잡혀갔나?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던가?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 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미안했다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그게, 몇 살 때인가?

 

“스물서너살? 그러고 풀려났는데 그때 한참 해방신학이 뜰 때였지. 누가 그러데.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는 총으로 쏴서 죽여야 된다’고 했다고. 근데 나는, 죽어가면서 나를 고문한 놈들한테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했다. 그래서 본회퍼 식의 해방신학은 아닌 것 같다 그랬지.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내 참, 별 얘기까지 다 하네.(웃음)”

 

그거였을까?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고, 유순한 소년의 마음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문득 가슴에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라 얼른 막걸리 잔을 비웠다.

 

-71년 얘기로 돌아가자. 김지하를 그 무렵 처음 만났다고 하던데, 당시로선 하늘 같은 선배였겠다.

 

“아니, 그러진 않았고… 미대 선배가 소개를 해줬는데, 혜화동 명륜다방에서 처음 만났지. 그때가 지하 형이 <오적>을 쓰고 도피할 때였는데 만나는 순간 느낌이 별로였다.”

 

-왜?

 

“수배 중이었는데 굉장히 럭셔리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었거든.(웃음) 그 이후로 일을 참 많이 같이 했지. 친동생 이상이었어.”

 

그는 “지하 형”과의 관계를 과거형으로 말했다. 오랜 기간 김지하와 나눈 인간적 우애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기간에 김지하가 보인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일’ 이후로 다시 만나지도,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셨으니 그분이 왜 그랬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예전에도 문화운동 쪽에서는 김지하 옆에 내 이름이 늘 따라붙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김지하한테 무한한 고마움을 가지는 건, 내게 우리말의 생동성을 처음 깨우쳐준 선배라는 점. 문자에 갇혀 있지 않고 살아 있는 말의 생동성. 그게 판소리하고도 통하는 건데… 그래서 내가 학전 배우들한테도 유난히 강조했던 게, 배우는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었다. 그 점에 있어선 여전히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난 그 양반의 사상적인,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고 영향을 준 바도 없어. 최근 몇 년 동안 그 양반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그건 그 양반 생각이고.”

 

-화제를 좀 바꿔보겠다. 그렇게 많은 노래를 지었으면서 왜 변변한 연애 노래는 없나? 연애 안 해 보셨나?(웃음)

 

“하고 싶었지. 왜 그 나이에. 20대 초반에 연애를 안 하고 싶었겠어?”

 

-게다가 기타 잘 치는 남자는 인기도 많은데.

 

“내가 지금은 얼굴이 시커멓지만 그때는 아이돌이었어.(웃음)”

 

-그런데 왜 연애 노래가 없으시냐고?

 

“(답답하다는 듯) 내 뒤에 항상 기관원들이 따라붙고 있는데 어떻게 연애를 하나? 친한 친구를 길거리에서 만나도 모른 척하고 다니던 땐데.”

 

-남들은 도망 다니면서 연애만 잘하던데.(웃음)

 

“연애는 숨어서 할 수 있는지 몰라도 노래를 만들기까지는 숙성이 돼야 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숙성을 시킬 여유가 없었어.”

 

-안타까운 일이네.

 

“내 가사 중에 사랑이란 낱말이 뭐냐고 물어보는 노래가 하나 있어. ‘두리번거린다’에서….”

 

그의 얘길 듣고 노랫말을 나직이 읊조려 보았다.

 

 

“헐벗은 내 몸이 뒤안에서 떠는 것은/ 사랑과 미움과 배움의 참(眞)을/ 너로부터 가르쳐 받지 못한 탓이나/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 파서 두리번거린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두리번거린다’ 1972년 작)

 

 

외로운 스물한살 청년의 프로필이 머리 희끗한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은 깊어가고 우리는 아직 할 얘기가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다음주에 계속>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이진순 언론학 박사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김민기를 만든 시간들

 

1951년 3월31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출생. 아버지가 인민군에 피살당해 유복자로 태어남.

 

1955년 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전북 이리(현 익산시)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1963년 서울로 이사. 재동국민학교(현 재동초) 졸업. 경기중 입학해 미술반 활동.

 

1966년 경기고 입학. 서울대 음대 다닌 셋째 누나한테서 기타 선물 받고 독학으로 연습. ‘친구’ 작곡.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 입학. 미대 동기이자 고교 동창인 김영세와 듀오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활동.

 

1985년 결혼식 비가 많이 내리던 날, 서울 구기동 ‘서울미술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981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사설미술관인 서울미술관은 당대 전위미술을 이끈 곳으로 평가된 곳입니다.

 

1970년 양희은 만남. ‘아침이슬’ 작곡해 양희은 통해 발표.

 

1971년 <오적> 쓰고 도피 중인 김지하 만남. ‘민중 주체의 민족문화운동’(김지하) 지향하는 모임 ‘폰트라’(쓰레기 더미 위의 시) 참가. 신정동 야학,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아침이슬’, ‘친구’ 등 담긴 음반 <김민기> 출시.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금지곡 지정된 ‘꽃 피우는 아이’ 불렀다 음반 전량 압수, 동대문경찰서 연행.

 

1973년 김지하 희곡 <금관의 예수> 공연 참가. 주제가 ‘주여 이제는 여기에’ 작곡.

 

1974년 70년대 마당극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마당극 <아구> 제작 참여. 10월 카투사로 군 입대.

 

1975년 보안부대 소환된 뒤 최전방으로 배치. 군 생활 동안 ‘식구 생각’, ‘늙은 군인의 노래’ 등 작곡. ‘아침이슬’ 금지곡 지정.

 

1977년 5월 제대. 인천 부평 봉제공장 취직. 동료 공장노동자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 작곡. 공장 생활 중 대학 졸업장과 중등교사 자격증 받음.

 

1978년 ‘상록수’, ‘밤뱃놀이’, ‘천릿길’, ‘늙은 군인의 노래’ 등 김민기 노래로만 채워진 양희은 공식 음반 출시. 노래굿 ‘공장의 불빛’ 제작. 중앙정보부 연행 뒤 훈방. 고향 전북 익산으로 내려감.

 

1979년 10·26 뒤 전북 김제로 거처 옮겨 소작농 생활.

 

1991년 겨레의 노래 총감독 한겨레신문사가 한민족의 노래를 발굴해 보급하자는 취지로 제작한 음반 <겨레의 노래> 총감독을 맡아 엔딩곡으로 ‘아침이슬’을 불렀습니다. 그해를 넘긴 뒤, 과로로 폐결핵에걸렸습니다.

 

1981년 황석영 주도로 만들어진 극단 ‘광대’ 창립 기념공연. 김제·전주지역 연극패들과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 창작. 경기 전곡에서 참깨 농사, 충남 보령에서 탄광 일.

 

1983년 농촌 생활 접고 서울로 돌아옴.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연출.

 

1984년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1> 제작.

 

1985년 아동 뮤지컬 작업 같이 한 인연으로 만난 이미영과 결혼. 서울 불광동 두 칸 전세방에서 어머니와 두 조카와 함께 살림 시작. 당시 나이 서른다섯.

 

1987년 ‘6월 항쟁’으로 금지곡 일부 해제. 탄광촌 이야기 담은 아동 뮤지컬 <아빠 얼굴 예쁘네요> 발표.

 

1989년 한살림모임 창립해 초대 사무국장 지냄.

 

<겨레의 노래> 공연 직후 서울 잠실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왼쪽), 김지하 시인(오른쪽)과 함께 술자리를 하던 모습입니다.

 

1991년 한민족의 노래를 발굴해 보급하자는 취지로 제작된 음반 <겨레의 노래> 총감독, 학전 소극장 개관.

 

1993년 직접 부른 39곡 수록된 음반 <김민기 전집> 발표.

 

1994년 5월 국내 최장수 기록 가진 뮤지컬 <지하철1호선> 공연 시작.

 

1995년 록 오페라 <개똥이> 공연.

 

1997년 록 뮤지컬 <모스키토> 공연.

 

1999년 김광석 추모사업회 회장. 포크음악 30주년 기념한 김민기 헌정 공연에 불참.

 

2007년 괴테 메달 수상 독일 정부가 세계적 예술가나 학자에게 수여하는 문화훈장인 괴테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가장 왼쪽에 있는 이가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우리는 친구다> 등의 원작자 폴커 루트비히입니다.

 

2001년 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대상 및 연출상 수상.

 

2007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 메달 수상.

 

2008년 <지하철1호선> 종연. 15년 동안 4천회 공연, 71만명 관람.

 

 

 

 


2011년 학전 20주년 1991년 3월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면서 설립된 극단 학전이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날 함께해준 이들만으로도 200석 극장을 꽉 채우고도 넘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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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유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현장] 안산시민궐기대회, 정부 시행령 폐기 및 배·보상 중단 촉구 도보 행진 나서

15.04.04 09:45l최종 업데이트 15.04.04 09:4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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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오후 안산문화광장에서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안산시민대책위원회가 주최한 ‘세월호 특별법 무력화 정부 시행령 폐기를 위한 안산시민궐기대회’ 참석한 단원고 2학년 2반 고 허다윤양 어머니 박은미씨가 시민들에게 눈물로 온전한 선체 인양을 호소하고 있다.
ⓒ 박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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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윤이 엄마인데 우리 딸한테 해줄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울음) 하루하루 사는 게 정말 피가 마르고, 하루에도 하지 말아야 될 생각들을 너무 많이 하고 삽니다…(울음) 실종자 9명을 다 찾을 때까지 함께 해주시고, 그리고 대통령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최선을 다해서 찾아주겠다는 그 약속 지킬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도와주세요. 저희는 아직 4월 16일 그날을 찾고 있습니다. 실종자가 아니라 유가족이 되고 싶습니다…(울음) 저희도 유가족이 될 수 있도록,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여러분이 함께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353일째인 3일 오후 7시 40분 안산 단원구 안산문화광장. 단원고 2학년 2반 고 허다윤양 어머니 박은미씨가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이 일렁이는 가운데, 눈물을 쏟으며 목을 놓아 울었다. 시민들도 광장 곳곳에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안산지역 50여 개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안산시민대책위원회는 세월호 특별법 무력화 정부 시행령 폐기와 진상규명 전 배·보상 중단을 촉구하는 안산시민궐기대회를 이날 오후 7시부터 문화광장에서 열었다. 

안산시민궐기대회는 5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세월호 참사 희생자에 대한 묵상으로 시작했다. 시민들은 손에 촛불을 밝힌 채 '온전한 선체인양', '정부 시행령 폐기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박근혜 정부가 입법예고한 특별법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선체 인양, 실종자 수습을 촉구했다. 

유경근 집행위원장 "정부 시행령 갈가리 찢어 쓰레기통에 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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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오후 안산문화광장에서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안산시민대책위원회가 주최한 ‘세월호 특별법 무력화 정부 시행령 폐기를 위한 안산시민궐기대회’에서 유경근 4·16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정부가 입법예고한 특별법 시행령과 배·보상 등에 대한 유가족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 박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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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입법예고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의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에서 박주민 변호사(세월호 유가족 법률대리인)는 "이 시행령은 정부가 파견한 공무원이 주요 보직을 장악하고, 특별조사위원회 인원 중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하는 업무는 정부가 조사해서 발표한 그 결과만 분석하라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라며 "정부 시행령이 통과되면 김재원씨가 말한 것처럼 특조위는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세금으로 주는 월급만 축내야 한다"고 역설적으로 비판했다. 

이어 4·16 가족협의회 유경근 집행위원장이 발언에 나섰다. 유 위원장은 "적어도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가장 정확하고, 가장 분명하고, 가장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가족들"이라며 "이 시행령은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진상규명에 도움이 되는 게 단 한 글자도 없어 갈가리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어 "어제(2일)  삭발을 했는데 삭발은 내 목숨을 내 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제 딸 예은이가 떠나간 그 순간 저는 이미 죽었다. 이미 죽었는데 무슨 각오를 다시하나. 죽었으면 예은이 한테 가야하는데 못가는 거다. 정말 가고 싶은데, 예은이 한테 혼날까봐, 내가 아빠 그렇게 부를 때 내 곁에 와주지도 않았으면서 아무것도 못해 놓고 또 오냐고, 살아서 내 억울함 풀어달라고 하는데 그것도 못하고 지금 오냐고… 그래서 가고 싶어도 못간다"며 울부짖었다. 

이어 진행된 시민발언에서 홍연아씨는 세월호 선체 인양 촉구에 관한 안산시민의 의지를 밝히면서 "우리는 오늘 4.16 이전과 똑같은 내일을 강요하려는 세력을 목도한다"면서 "진실을 가리려는 자는 바로 참사의 범인으로 그 범인과 싸우는 데 타협이나 물러섬이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엄마의 노란손수건 정세경 대표는 '엄마가 보내는 편지'를 통해 "별이 된 아이들아, 절망의 구렁텅이에 있는 엄마, 아빠를 외면하고 미소를 짓던 대통령을 기억할게"라며 "그리고 함께 할게.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이 더 가까이 외롭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너희의 엄마가 되려했듯이 엄마 아빠 곁을 우리 엄마들이 지켜줄게"라고 말했다.

이날 안산시민궐기대회는 시민들이 '세월호 특별법 무력화 정부 시행령'이라고 쓴 대형 현수막을 찢는 퍼포먼스에 이어 '정부 시행령 폐기 온전한 선체 인양 배·보상 절차중단'이라는 문구가 적힌 대형 현수막을 문화광장 뒤에서 시민들 머리 위로 펼치는 퍼포먼스로 막을 내렸다. 

안산시민 도보행진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대통령이 책임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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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오후 안산문화광장에서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안산시민대책위원회가 주최한 ‘세월호 특별법 무력화 정부 시행령 폐기를 위한 안산시민궐기대회’에서 정부 시행령 폐기를 위한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다.
ⓒ 박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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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오후 안산문화광장에서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안산시민대책위원회가 주최한 ‘세월호 특별법 무력화 정부 시행령 폐기를 위한 안산시민궐기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온전한 세월호 선체인양’ 등의 펼침막을 들고 중앙역 광장까지 도보행진에 나섰다.
ⓒ 박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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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마지막 한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끝까지'라는 문구를 트럭 위에 설치한 선도 차량을 따라 '정부 시행령 폐기하라'는 손 피켓을 들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대통령이 책임져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문화광장을 출발해 중앙역 광장까지 거리 행진을 했다. 

거리 행진을 하는 동안 선도 차량에서는 정부의 특별법 시행령을 규탄하는 시민 발언이 이어졌으며, 대열을 따라 귀가하던 시민들도 발걸음을 같이 했다.  

거리 행진을 유심히 지켜보던 여고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학생은 "어른들은 우리가 잘 모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제 부모님들이 삭발한 거나 정부가 진상규명 막기 위해 시행령 만든 것 등 SNS로 주고받아 다 안다"며 "4월 10일 문화광장에서 안산지역 고등학생들이 여는 추모문화제(안산고교회장단연합이 주최하는 '기억, 희망을 노래합니다')가 열리는데 모두들 알고 있다. 학교에서 야자를 해도 친구들 하고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중앙역 광장에서 4일 오전 8시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서울 광화문 광장까지 도보행진에 나서는 유가족들과 동행할 것을 약속하는 구호 제창과 함성으로 내지르며 오후 9시 40분경 마무리 집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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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미사일 4발 발사..동창리에서 대동강 방향 이례적


합참, 김정은 참관 추정..KN-02 계열인 듯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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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03  20: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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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 3일 오후 평안북도 동창리에서 대동강 하구 방향으로 KN-02계열 미사일 4발을 발사했다. 사진은 KN-02 미사일. [자료사진-통일뉴스]

 

북한이 3일 오후 4시15분경 평안북도 동창리에서 대동강 하구 방향으로 KN-02계열로 추정되는 단거리 지대지 미사일(사거리 140km) 4발을 발사했다.

북한이 동창리에서 대동강 하구 방향으로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이번이 이례적이며,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현장에 있던 것으로 군 당국은 추정했다.

합참은 이날 "오후 4시15분경부터 5시까지 평안북도 동창리 일대에서 서해 대동강 하구 해안가 방향으로 단거리 발사체 4발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합참 관계자는 "(KN-02계열로) 봐도 무리가 없다"며 "대동강 해안가, 일부는 대동강 해안가에서 가까운 내륙에 떨어졌다. 대동강 하구에 떨어진 것은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이 앞서 지난 2일 오전 10시30분경 KN-02계열 단거리 미사일 발사체 1발을 시험발사했고, 이번 발사는 실제사격으로 추정됐다.

KN-02 미사일은 길이 6.4m로, 북한은 최대사거리를 120km에서 170km로 늘리고 최신형 GPS를 장착, 목표물 명중 오차가 50m 내외 수준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발사 직후 3~4분 만에 최대사거리에 도달하며 15분 이내에 재발사가 가능하다.

현재 북한은 KN-02 미사일 1백여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차량에 장착하는 미사일 발사대(TEL)도 30여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군 당국은 분석했다.

합참은 "최근 한.미연합 독수리훈련, 민간단체 풍선 부양 움직임과 관련해 대남 압박을 위한 무력시위성 도발로 분석된다"며 "북한의 추가 도발에 대비하여 감시를 강화하면서 만반의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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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과 예비역 청춘은 두 번 힘들다

 
2015. 04. 02
조회수 134 추천수 0
 

 장기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올해 초 영구 귀국했다. 6개월 이하 외국체류의 경우 예비군 훈련이 사라지는 혜택이 없어서 그런지 2월에 귀국과 함께 기자를 반겨주는 것은 3월부터 시작되는 예비군훈련이었다.
2주 연속 4일씩의 동미참 훈련(동원지정을 받지 못한 동원대상자가 받는 동원 미지정 훈련)과  3주차 하루 일정의 향방훈련의 예비군 훈련이 한꺼번에 잡혀서 곤혹스러웠다. 2015년 국방부의 예비군 훈련 강화기조 역시 이 무렵 발표되면서 개인적인 경험과 국가적인 정책시행 시기가 맞물리게 되었다. 2015년 3월의 예비군훈련을 통해 예비군훈련제도를 분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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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군은 고달프다그들에게 정예화된 전투력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지 않을까?


  예비군 제도 창설의 배경과 태생적인 문제점

 

  대한민국 예비군의 역사는 1961년 11월에 제정된 향토예비군 설치법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법안은 향토방위, 병참선 경비, 후방지역 피해 통제 등만 명시했을 뿐 7년간 거의 집행되지 않는 형태로 존재했으나 1968년의 1.21 사태(일명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를 결정적 계기로 예비군은 현재의 준군사적 성격의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당시는 주변 국제환경상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데다 북한이 군사적 모험주의로 치닫던 시기여서 안보문제가 각종 사회문제에서 최우선 고려사항이었던 시절이었다.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 모태인 국방각료회담이 열린 것도 1968년 5월인데, 제1차 국방각료회담에서 향토예비군의 무장을 지원하는 문제가 논의되었고, 같은 해 10월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거치며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추진지시에 의해 1969년 제2차 국방각료회담에서 향토예비군에 대한 추가적인 소화기 지급이 결정되었다. 이는 향토예비군 창설 배경이 미국의 동북아 군사전략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1970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가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대권 경쟁자인 박정희에게 패배하면서 예비군 제도 폐지는 무산되었다. 당시는 북한도 아직 노농적위대와 붉은청년근위대를 창설하기 이전이므로, 예비군의 확충은 박정희의 독재 연장을 보조하기 위한 대북 공포분위기 조성의 일환으로도 여겨졌다. 그러나 계속되는 북한의 대남무력도발들로 인해 전국민적인 안보중시 분위기가 무르익어, 1970년 예비군은 예비군설치법 제2조에 의해 “현역 군부대 편성과 작전 수요를 위한 동원 대비”라는 성격으로 정립된 준상비군으로 그 위상이 확립되었다. 
1972년에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피해 예방과 응급복구”라는 민방위의 성격이 추가되었으며 1980년에는 경찰기능까지 추가되어“경찰력만으로 대처할 수 없는 무장소요가 있거나 우려가 있는 지역에서 이를 진압하고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국가방위라는 예비군 본래의 임무성격에서 크게 변질되었다. 이는 신군부가 계엄령을 통해 군사독재를 실시하고 있던 당시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상 제2의 계엄군으로 예비군이 활용될 수 있는 법적근거를 만든 것으로 이해되는데, 쉽게 말해 예비군제도는 냉전시대의 안보개념에 입각해 공산세력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한다는 이유로 사실상 “국민동원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초석의 역할도 수행했다고 해석된다는 의미이다.
사실 예비군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당 제도가 가지고 있는 정책철학에 있다고 여겨진다. 즉, “안보”라는 것이 국가정부를 위한 것인지 국민을 위한 것인지 명확히 하는 것이 현행 예비군 제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 혹은 냉전식 사고방식에 따르면 국민은 국가정부의 유지존속을 위한 종속적 지위를 가지며, 국민 개개인의 희생을 통해 국가가 저렴하고 편리한 정책추구가 가능하다면 ‘애국심’이라는 명목 하에 국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었고 이러한 분위기가 국민들 사이에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사실 현행 징병제 역시 이러한 의식 혹은 정책철학에 의거해 수립된 것이다.

 

예비군 제도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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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와 배고픔에 쓸쓸한 두 예비군의 뒷모습총도 전투장구류도 구시대에 머물러있다.

 

 

  예비군은 크게 동원예비군과 향방예비군으로 나뉘는데 훈련과 전시소집에 대해 동원예비군은 병역법, 향방예비군은 향토예비군설치법의 통제를 받는다. 동원예비군은 전시에 현역과 동일하게 취급되며 주로 전시소집부대는 전방 전투부대나 동원사단, 전시창설부대(민사대대, 포로수용소관리대 등)이다. 수도권 거주 동원예비군 거의 상당수가 경기도나 강원도쪽 전방부대로 지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수도권, 강원도 거주 예비군 중 일부는 수방사, 3군, 1군 예하의 향토사단이나 전방 군 병원(강릉병원 등), 수도병원에 동원지정되는 경우도 있으나 그 수는 많지 않다. 2작사 지역 거주 예비군 중 상당수는 향토사단이나 계룡대, 군수사와 같은 후방 사령부 등 후방부대로 지정되기도 한다. 향방예비군과 다르게 개인별로 군사특기가 지정되어 있으며, 기행병과 특기 전역자는 대체적으로 그 특기로 지정되는 경향이 있다.
  향방예비군은 전시에 거주지 인근의 주요 시설물이나 거점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는 예비군으로 전시소집부대는 거주지 관할 향토사단 예하부대(후방 지역), 전방 군단 경비연대 예하 향방부대(전방 지역)로 지정된다. 출신 군사특기에 상관없이 향방예비군은 기본적으로 보직이 소총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당 예비군이 소속된 예비군 동대가 곧 전시소집부대다. 1~4년차의 경우 평시에는 3일 간 출퇴근제 동미참훈련 대상이다. 
하사 이상 간부는 동원지정이 되지 않은 동원 미지정자라도 2박 3일간 입영훈련을 하는 간부 동미참훈련을 받게 된다. 간부의 동원지정은 필요한 보직에 따라 달라져 계속 동원 미지정이다가 5년차나 6년차에 동원지정이 되기도 한다. 예비군은 보통 병사와 간부로 나뉘어 관리를 받는데 각 지정자원에 따라 훈련시간도 다르다.

<예비군 자원별 구성특징 및 훈련시간>

 

구분

구성특징

훈련시간

1~4년차 동원 지정 예비군

현역 출신 중 학생 제외

동원훈련(2박 3, 28시간)

5~6년차 동원 지정 예비군

향방기본(6시간) + 향방작계

(6시간) + 동원소집점검

(4시간)

1~4년차 동원 미지정 예비군

현역 출신 중 학생과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보충역필

동미참(4일에 걸쳐 30시간)

향방작계(6시간) 2

5~6년차 동원 미지정 예비군

향방기본(6시간) +

향방작계(6시간) 2

7~8년차 예비군

잔여 훈련시간이 없으면

훈련을 받지 않는다

간부

1~6년차 동원 지정 예비군

현역 출신 중 학생 제외

동원훈련(2박 3, 28시간)

1~6년차 동원 미지정 예비군

현역 출신 중 학생 등

동원 미지정자

동미참(2박 3, 28시간,

입영훈련)

7~계급정년 예비군

현역 출신에 한하지만 훈련은 받지 않는다민방위로 넘어가지 않고 정년 도달시 퇴역

 


  공군 병 출신의 경우 2011년부터 예비군 전용부대가 수원에 증설되면서 훈련체계에 변화가 생겼다. 공군교육사령부 소속 27예비단은 2010년까지는 공군 간부 전용 예비군 교육을 전담했으나 27 예비단에 제 2교육대가 창설되면서 병과 간부 예비역 모두 공군에서만 훈련받게 되었다. 공군 예비군의 특징으로는 1~4년차의 경우 동원 지정자와 미지정자가 2박 3일에 걸쳐 28시간동안 입영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동원 지정자는 자신이 소속된 공군부대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게 되고, 미지정자는 수원과 진주에서 동미참 숙영훈련을 받게 된다. 물론 5~6년차 공군 예비역의 경우 향방작계를 받게 되어 있지만 운이 없는 경우 동원지정 1박 2일 훈련을 받는다.
  해군 병이나 간부, 특히 공군 간부의 경우 거주지역에 따라 장시간을 이동해 훈련을 받으러 가야 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해군의 경우 예비군 훈련장이 적고, 군종의 특성상 기지들이 해안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진해나 평택 등의 도시로 가야 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공군 간부는 수원과 진주로만 가야 하므로 역시 장거리 이동이 불가피한 예비역이 많다. 육군 간부출신 예비역 역시 동원지정자일 경우 철원 등 예비역 간부자원이 많이 필요한 전방지역으로 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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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한 도시락을 맨바닥에 먹는다예비군식당의 수용은 50명정도 훈련대상은 450식사또한 편하지 않다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들에게 안보란 개개인의 자유와 시간을 희생해서라도 지켜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당시의 북한은 지금처럼 낙후한 무기체계와 빈궁한 경제체제가 아니었으므로 현실적으로 국민의 희생이 있더라도 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예비군 동원은 창설 당시부터 일용직 노동자 등 취업이 불확실한 사람 등에 대한 생계대책이 전무하다고 비판받았다. 현행 예비군 설치법 제 10조는 “타인을 사용하는 자는 그가 고용하는 자가 예비군 대원으로 동원되거나 훈련을 받을 때는 그 기간을 휴무로 하거나 그 동원이나 훈련을 이유로 불이익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고용이 불확실한 노동자들이나 자영업자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으며, 교대시간에 직장예비군의 훈련을 실시하고 당일 근무를 계속시키는 것은 향토예비군 설치법 제 10조에 저촉되지 않으므로 결국 예비군훈련으로 인해 노동 강도가 강화되는 사태를 초래한다. 또한 이 조항은 야간 근무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이들은 주간에 훈련을 하고 야간에는 직장업무를 보거나 생계를 위해 야간작업을 해야 하는 불합리성을 해결할 수 없으며, 2015년 현재 실시되고 있는 야간 예비군 훈련의 경우 반대로 주간에 직장에서 업무를 마치고 야간에 예비군 훈련을 받은 뒤 다시 다음날 주간업무에 복귀해야 한다. 
  육군본부의 「육군동원 50년 / 10년 발전사」에 따르면 중식비 지급은 1996년부터, 교통비 지급과 예비군 중대 운영비 지급은 1997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는데, 그전까지는 국가를 위해 현역병 복무를 3년간 수행하다 돌아온 죄밖에 없는 사람들을 무료 혹은 그에 준하는 비용으로 국가가 노동력∙시간을 갈취해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훈련에 따른 보상비 또한 있기는 하지만 현 사회의 물가수준, 아니 각 시대의 최저임금과 비교해 봐도 어처구니 없는 액수가 책정되어 있다. 국방백서에 따르면 예비군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수령하는 금액은 다음과 같다.

 

 

동미참향방훈련의 실비(교통비 중식비 / 1)

구 분

2009

2010 – 2011

2012

2015

금액 ()

7,000

9,000

10,000

12,000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의 법률상 최저시급은 5,580원이므로 8시간 훈련에 동원된 인원에게 최저시급으로 임금을 계산해 지급할 경우 44,640원을 지급해야 한다. 즉,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예비역 인원들에게 최저시급의 약 4분의 1밖에 안 되는 돈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형편없는 액수 또한 동원예비군이 아닐 경우, 예비군 교장에서 도시락을 사먹는다면 6,000원의 중식비를 떼이게 된다. 문제는 적지 않은 수의 예비군 교장은 PX(매점)가 없고 점심을 배달시켜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니 대부분의 예비군 동원 인원들은 보상비의 절반을 중식비에 쓰게 되고, 나머지 절반에서 교통비를 사용하고 나면 1인당 약 2-3천원 가량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에 거의 무료로 봉사하라는 의미인데, 이러한 열악한 상황 하에서도 현재 국방부는 점점 예비군 훈련을 강화하는 정책기조로 나아가 전국민적인 불만을 야기하고 있다. 과거에는 9시로 정해진 입소시간에서 9시 30분까지는 지연입소로 처리해 추가훈련시간을 받고 나면 입소로 인정해주었는데, 이제는 9시 이후에는 전면적으로 입소를 인정하지 않고 불참처리를 한다. 예비군 훈련 불참에 대한 벌금도 과거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이었으나 이제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면서 2,000원이 인상된 예비군 보상비에 비해 지나친 벌금 상승폭을 보여 인센티브는 약하게, 패널티는 과도하게 물려서 국민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현 대한민국 국방부의 마인드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지목되고 있다.

 

  정당한 대우와 보상은 요원, 늘어가는 국가의 요구사항

 

  더욱이 국방부는“실제 싸워 이길 수 있는 성과 위주의 훈련 시스템”을 적용한다고 지난달 27일 발표했다. 3월 2일부터 적용되는 성과 위주 훈련 시스템에 따라 예비군들은 1년에 1회 실시하는 예비군 동원훈련 기간 동안 부대 내 생활관에서 생활할 수 없고 작전임무 지역이나 산지 등에서 텐트를 설치해 숙영한다. 동원훈련 보상실비가 올해 1,000원 증가한 것에 비해 지나치게 훈련의 강도가 증가되었다. 지각을 면하기 위해 택시를 타거나, 여러 사유로 인해 불참해 벌금을 내게 되면 예비군 개인의 호주머니에서 지출되는 금액이 예비군 훈련 보상비로 받는 금액에 비해 더 크다. 훈련에 참가하면 이득이 거의 없는 반면 훈련에 불참하면 많은 손해를 주는, 예비역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전근대적인 방식 및 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군복무는 물론 예비군 훈련까지 훌륭히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인센티브가 거의 없는 실태는 분명히 현행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군복무 기간이나 예비군 훈련 기간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의미 없는 기간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군복무나 예비군 훈련에 소요되는 시간은 엄연히 각 개인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시간이며, 보상비를 충분히 주고 이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하다. “집에 두어 시간 빨리 보내주는 것이 충분한 인센티브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방부의 현 수준을 보여주는 탁상행정이라는 것”이 이번 훈련에서 만난 예비군들의 의견이었다. 
  사실 대한민국 국방부가 예비군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지 않다. 2009년 6월 27일, 지금까지 현역 출신인 예비역 중 제대한 후 대학이나 특수직장(정부청사 공무원, 교사, 일부 대기업 등)에 종사하지 않을 때 1년에 1회 받게 되는 동원훈련은 입소하여 2박 3일, 동미참 훈련은 8시간씩 3일 연속 출퇴근 체제로 운영되어 온 것을 다시 옛날처럼 4박 5일로 늘린다는 계획이 발표되어 수많은 예비역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발표 후 예비군들의 생계문제 및 시대를 역행한다는 비난이 쇄도하자 이명박 정부는 늘 그랬듯이 “참여정부 시절부터 추진해온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참여정부에서는 군복무 기간을 1년 6개월로 단축시키고 예비군 훈련을 4박 5일로 늘리는 것이었는데 복무기간 단축은 동결시키고 훈련 기간만 늘렸으니 이는 아전인수격 해석에 불과하다. 해당 계획에 따르면 단계적으로 예비군 교육시간을 늘려나가다가 2016년부터는 3박 4일, 2020년부터는 4박 5일 체제로 바뀌게 되며, 향방 훈련 시간도 지금의 18~20시간에서 36시간으로 확대된다.
  또한 2011년 11월 23일 국방부는 2012년 1월부터 예비군 대상으로 현역복무부대 동원지정제를 실시할 예정이라 발표하였는데, 이는 다시 말해 수도권 지역과 강원도 지역 거주 예비군 대상으로 현역 시절 복무했던 부대로 동원지정을 하겠다는 것으로 각 부대에 대한 현역 시절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이용하여 현역 수준의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하자는 게 골자이다. 그러나 전라, 경상, 충청 등 2작사 지역 거주자는 기존 방침처럼 거주지 위주로 동원 지정된다. 또한 수도권, 강원지역 거주자이더라도 현역복무부대가 2작사 지역에 있는 경우에는 현역복무부대 동원 지정제를 적용받지 않는다. 
  이 제도에 따르면 거주지가 복무했던 부대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이동에 시간이 지나치게 소요되거나 현역복무시 갈등관계에 있던 선임, 후임, 간부들을 다시 만나 같이 훈련하는, 예비역 입장에서는 고역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는 현실적인 부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국방부 관계자들의 무사안일한 생각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당연히 당시 예비역들은 극심하게 반발했고 수많은 전문가들 역시 이는 무리한 제도라고 지적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국방부는 해당 제도를 강행했다. 그러나 시행 이틀 만에 반발에 부딪혀 해당 제도를 잠정 보류하고 결국 1군, 3군, 수방사 지역 부대에서 복무했던 동원 대상자 중 희망자에 한해서 시행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 현역복무부대 동원지정제는 실질적으로 실패한 제도가 됐다.
위의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대한민국이 예비군을 배려하는 수준은 상대적으로 보나 절대적으로 보나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다. 이는 국가방위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기제에서 출발하지 않고 국민을 저렴하고 편리한 동원 및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서 출발한 현행 예비군제도 자체의 태생적 결함이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해 냉전이 끝난 지 벌써 4분의 1세기가 되어가는 현재, 국가방위에 희생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배려하려는 시도는커녕 형편없는 대우와 급여로 현역병에게 마음껏 노동을 착취하던 사고방식 그대로 예비군 역시 마음껏 국가편의 위주로 다루려는 사고방식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 혹은 국방부가 더 이상 대한민국의 성인 남성들을 편리한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방위와 안보를 위해 가장 귀중한 시간을 희생했고, 희생하고 있는 감사해 마땅한 주체로 인식을 전환해야 할 시기가 이미 한참 지났다. 예산을 핑계로 정당한 보상을 거부한다면, 해당 시스템은 폐지돼야 마땅하다. 예비군제도가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말 중요한 문제라면 국민에게 존폐의 여부를 물어야 하며, 이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않는 국가안보의 수단 및 방식의 운영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이미 성숙한 시민 사회에 접어든지 오래된 대한민국 시민들을 냉전논리로 이토록 부당하게 대우한다는 사고방식은 시대에 뒤쳐졌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형평성 측면에서 봐도 젊은 시기 국가에 병역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들이 전역 후에도 이런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며 국가에 추가적으로 봉사해야 하는데 비해, 미필이나 여성 등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병역기간 외에 예비역 기간에도 아무런 의무를 부과 받지 않으니 결과적으로 현역병으로 성실히 입대한 사람들만 손해를 보기 때문에 현행 예비군 제도는 불합리하다. 
  결론적으로 현행 예비군 제도 운영은 대한민국에 팽배해 있는 “군대 갔다 온 사람이 손해”라는 인식을 부채질하고 있는 문제투성이 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비군 훈련 정신교육 시간에 목도한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우리는 예비군”이라는 말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언제까지 군필자들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라고 요구할 것인가.

 

 글/사진 유원 인턴기자 bittersweet04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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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내 약혼녀가 자기를 겁탈한 놈과 결혼하다니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임병도 | 2015-04-03 09:24:5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 글은 제주4.3사건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하고 있는 다큐소설의 일부입니다. 제주4.3사건을 기록한 ‘4.3은 말한다’ (제민일보 4.3취재반)와 ‘4.3사건의 진상’(오성찬),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나온 증언을 기초로 했습니다. 등장인물 등은 가명이며, 제주어로 된 증언자의 이야기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표준어로 바꾸었습니다. 글 속에 있는 그림은 강요배 화백의 화집 ‘동백꽃 지다’에서 발췌했습니다.

#그 남자 1
 
해방이 됐다. 제주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던 일본군이 드디어 제주를 떠났다. 해방된 조국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됐다. 먹을 것이 없어 물질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들풀을 뜯어 먹던 아이들이 책상에 앉았다. 칠판에 한글로 내 이름을 적었다. 도대체 얼마 인가?
 
일본에 끌려가 공장 생활을 하면서도 공부했다. 다시는 노예처럼 살기 싫었다. 학교 시설은 낡고, 식량 사정이 나빠 아이들 얼굴이 영양실조로 누렇게 떴다. 굶주린 아이들이지만, 수업시간에는 나만 쳐다봤다.

교사 모임에서 어릴 적 동네 아이를 만났다. 스무살 어린 나이지만 당찬 선생이 되었다. 곱디고운 얼굴과 가날픈 몸매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다부졌다. 교사들의 모임이 끝난 뒤, 그녀를 쫓아가 고백했다. '양 선생, 평생 어떻게 하면 좋은 스승이 될지,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동료 교사들의 축복 속에 약혼했다.

동네에 깡패 같은 남자들이 들어왔다. '서청'이란다. 북한에서 넘어온 청년들이란다. 서청은 이승만 사진을 팔러 다녔다. 안 사주면 야쿠자처럼 가게 물건을 엎었다. 학교까지 찾아왔다. 교실에 있던 이승만 사진이 낡았다며 바꿔야 한다고 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쌀 한 가마니 값을 내란다. 대쪽같은 교장은 서청을 향해 나가라고 소리쳤다. 서청은 교장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고 젊은 나는 몸을 던져 서청의 몽둥이를 막았다.

다음 날 서청은 총을 들고 나타났다. 서청은 교장과 나를 술 공장 창고로 끌고 갔다. 창고에 가보니 형님도 잡혀 왔다. 서청은 마구잡이로 사람을 팼다. 재판도 없이 사람들이 끌려나가 총으로 쏴 죽였다. 총살장으로 끌려가는 형님을 부르다 얻어맞고 겨우 형의 발목 한 번 만졌다. 마지막 인사였다.

서청은 무자비한 구타를 하다가 심심하면 남자와 여자를 불러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교를 강요했다. 여자들의 옷을 벗겨놓고 국부를 지지기도 했다.

사람들 앞에서 성교를 거부하면 고문을 했다. 엄지손가락 두 개를 묶어 공중에 매달고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맨살을 지졌다.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나도 형을 따라 가야한다. 갑자기 서청 사람으로 구성된 특수부대 남 상사가 나를 불러냈다. ‘양선생 아나?’ ‘내 약혼녀입니다.’하자 남 상사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성산 일출봉 해변에 숨었다. 갑자기 수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술 창고에 갇혔던 남자 40명 중 28명이 죽었다.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천운으로 살아났다고 했다.

#그 여자 1
 
어릴 때부터 선생이 되고 싶었다. 일본도를 차고 일본말로 천황 폐하를 외치는 무서운 선생은 되기 싫었다. 책을 옆에 끼고 다니며 수재소리를 듣던 동네 오빠에게 수줍게 물어봤다. ‘어떻게 하면 선생이 될 수 있나요?’ 오빠는 조선말을 잊지 말고 공부하라고 했다. 반드시 조선은 해방된다고 했다. 해방된 조선에서 오빠와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는 상상만으로 행복했다.

일본으로 끌려갔던 오빠가 돌아왔다. 옆 마을 국민학교 교사가 됐다고 했다. 오빠 덕분에 나도 선생이 됐어요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읍내 교사 모임에서 오빠를 만났다. 오빠가 나와 함께 평생 살고 싶다고 했다. 조선이 해방된 다음으로 기뻤다.

오빠가 서청에 끌려갔다. 오빠가 끌려간 창고로 갔지만, 우락부락한 서청 사람들은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끌려간 남자들이 하나둘씩 시체로 나왔다. 누군가 서청 간부에게 돈을 바치라고 했다. 결혼할 때 쓸려고 모아 놓은 돈을 들고 서청 간부를 만났다. 
 
술을 마시던 서청 간부는 벌게진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옆에 앉아 술을 따르라고 했다. 무서웠지만 술을 따랐다. 서청 간부가 갑자기 나에게 덤벼들었다. 옷고름을 찢고 가슴을 움켜쥔 억센 손을 온 힘을 다해 뿌리쳤다. 갑자기 서청 간부가 ‘김 선생을 살리고 싶지 않은가 보지?’라고 말했다. 그날 밤 서청 간부는 아랫도리가 헐어 피가 나올 때까지 내 몸에 올라타 내려오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그저 ‘우리 오빠 살려줍소’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남자 2
 
살아나자마자 보고 싶던 약혼녀의 집으로 갔다. 약혼녀는 나오지 않고 동생이 나와 ‘언니는 결혼했으니 이제 오지 마라’고 했다. 불과 한 달 만에 어떻게 나를 버리고 결혼했는지 분노가 치밀었다.

약혼녀가 결혼해 사는 집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묻고 싶었다. 왜 나를 버렸느냐고? 몰래 집 앞에 갔더니 약혼녀가 남편에게 맞고 있었다. 남편은 서청 간부였다. 남편이 떠나고 ‘이렇게 살려고 날 버렸니?. 서청 간부 같은 깡패가 그리 좋았냐’고 묻고 싶었다. 곱디고운 얼굴이 엉망이 된 모습을 보니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약혼녀의 동생이 나타났다. ‘언니는 오빠를 살리기 위해 서청 간부에게 몸을 바치고 결혼했어요’

내가 죽었어야 했다. 고문을 받다가 혀를 깨물고 죽었어야 했다. 서청이 여자들을 겁탈하고 고구마를 쑤셔대며 히히덕거릴 때 덤비다 맞아 죽었어야 했다.

‘오빠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 될 수 있어요’라고 묻던 어린 소녀가 비에 떨어진 동백꽃처럼 바람에 날리운다. 

<4.3은 말한다에 수록된 증언 중에서>
 
49년 3월 3일에는 한 군인이 처녀를 강간하려다 반항하자 총살한 사건이 벌어져 가족과 주민들을 분노케 했다. 군인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은 희생자는 강매옥(姜梅玉, 19, 이명 강명옥)이었다. 강매옥의 언니인 강경옥 씨는 지금도 학살자의 성씨와 얼굴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4명이 임시 주둔했는데 그 중에서 ‘최 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지요.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맘대로 되지 않자 총을 쏜 겁니다. 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姜景玉(78. 안덕면 감산리)의 증언
 
이북 출신 경찰관 노(盧) 순경은 한 처녀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김용식(金龍植, 20)에게 시집을 갔다. 앙심을 품은 노 순경은 1949년 3월 22일 중산간 순찰 때 마침 민보단원이던 김용식과 같은 조에 편성되자 그를 총살했다. 토벌대는 또 부녀자 겁탈을 밥먹듯 했다. 한 주민은 이를 ‘처녀토벌’이라고 말했다. 주로 소개민이 당했지만 김녕리 주민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밤만 되면 부녀자들은 숨기에 바빴다.
 
박 할머니에게는 스무살 가량의 오아무개란 손녀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들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손녀를 데리고 성산포에 있는 딸의 집에 가서 살았지요. 그런데 그 손녀는 주변에 소문난 미인이었습니다. 서청이 그녀를 탐했지만 할머니는 완강히 막았습니다. 화가 난 서청은 오후 2시께 그 할머니를 대로상으로 끌어내 총살해 버렸습니다.

북한에서 넘어온 서북청년단은 무법자들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친위부대였던 서청 단원들을 경찰이나 군인으로 채용했다. 서청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미군정이나 경찰 간부들은 겁간과 학살을 자행하는 서청 단원들을 격리하기도 했다.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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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내각 산림총국, 국방위 산하로 재편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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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5/04/03 09:45
  • 수정일
    2015/04/03 09:4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북 내각 산림총국, 국방위 산하로 재편[단독] 대외창구 '조선녹색사업개발협회'도 활동중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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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02  15: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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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직접 지시로 대대적인 산림녹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이 사업을 책임진 내각 국토환경보호성 산하 산림총국이 국방위원회 산하로 재편됐으며, ‘조선녹색사업개발협회’가 구성돼 대외창구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1일 “최근 산림총국이 내각 산하에서 국방위원회 산하로 옮겨졌고, 국방위원회가 더 큰 권한을 갖고 산림녹화를 추진하게 됐다”며 “산림녹화 과정에서 인민군의 역할도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사실관계 확인을 요청받은 통일부 관계자는 2일 오후 “아는 바 없다”고 답했다.

   
▲ 지난달 <노동신문>이 보도한 벽성군산림경영소 모체양묘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달 7일자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북한 내각은 전당, 전군, 전민이 총동원되여 산림복구사업을 힘있게 벌려나가기 위한 결정을 채택.발표했으며, 산림조성 10년 전망계획에 따라 산림복구에 필요한 자재, 설비, 자금을 국토환경보호성 산림총국을 통해 확보하기로 했다.

내각 결정은 “산림조성10년전망계획을 현실적조건에 맞게 구체적으로 세우고 산림복구전투에 필요한 자재,설비,자금을 국토환경보호성 산림총국을 통하여 계획화하여 보장하며 그 실현을 위한 산림복구전투계획작성과 인민경제계획시달 등은 국가계획위원회와 국토환경보호성 산림총국,림업성,농업성을 비롯한 해당 단위들에서 진행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따라서 ‘산림조성 10년 전망계획’의 책임단위인 산림총국이 내각 국토환경보호성에서 국방위원회 산하로 편재됐다는 것은 국방위원회가 이 사업을 책임지고 이끌도록 한 조치로 풀이된다.

국토환경보호성 산림총국 채종양묘국 강현 국장(45살)은 재일 <조선신보>와 지난달 16일자 인터뷰 기사에서 “현재 평양시 대성구역에 있는 산림과학원을 다시 새로 건설하고 각 도들에 있는 산림과학원들의 물질기술적토대를 축성하기 위한 사업계획을 세우고있다”면서 “최근에 중앙과 각 도, 시, 군들에 산림복구전투지휘부가 조직되였다. 앞으로 중앙산림복구전투지휘부의 지도밑에 도, 시, 군들에서 해당 지역의 산림복구전투를 하게 된다”고 밝혔다.

소식통은 “여러 기관들이 참여하는 산림녹화 사업을 효율적이고 힘있게 추진하기 위해 국방위원회가 이 사업을 관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며 “예를 들어 군인들이 무단 벌목을 할 경우 내각이 단속하기 어렵지만 국방위원회가 책임지고 단속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통신은 내각 결정에 “산림복구전투지휘부를 조직하며 산림복구전투를 위한 군민협동작전을 강화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들도 지적되여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앞서, 김정은 제1위원장은 2월 26일 당, 군대, 국가경제기관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전당, 전군, 전민이 산림복구전투를 힘있게 벌려 조국의 산들에 푸른 숲이 우거지게 하자>를 통해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앞으로 10년안에 모든 산들을 푸른 숲이 설레이는 보물산, 황금산으로 전변시키자는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며 의지”라면서 “전당, 전군, 전민이 총동원되여 산림복구전투를 힘있게 벌리자!”는 구호를 제기했다.

특히 “모든 사업에서 다 그러하듯이 인민군대는 산림복구전투에서도 선구자적역할을 하여야 한다”면서 “인민군대에서는 산림조성사업과 산림보호사업을 각급 부대 정치위원들이 직접 책임지고 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산림복구전투에서 군민협동작전을 잘하여 군민대단결의 위력이 높이 발휘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북한은 1990년대 중후반기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땔감과 식량생산을 위해 산이 헐벗었고, 헐벗은 산으로 인해 홍수.가품 피해가 확대되는 악순환에 빠졌다.

그러나 최근 협동농장에서 분조관리제를 보다 세분화 한 포전담당제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식량생산을 위해 산을 개간하는 행위가 많이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강현 국장은 “지금 고난의 행군의 후과로 벌거벗은 산들이 그대로 있는데 결과 최근년간 여러 지역에서 장마철에 큰물피해를 받았고 비가 적게 내리는 봄철이면 가물피해를 받아 경제적손실을 보았다. 또한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서 요구되는 목재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있는것과 함께 환경오염도 막지 못하고있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나아가 “앞으로 10년안에 벌거벗은 산들에 푸른 숲이 우거지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산림조성계획과 산림보호계획을 3월말까지 다 세워 그를 집행하기 위한 대책들을 강구해나간다”고 말해 이번 산림총국의 조직재편도 이 과정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 지난달 <노동신문>이 보도한 산림과학원 애국수목조직배양연구소.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러나 당장 산림녹화를 위해서는 묘목(나무모)을 확보해야하는 첫 번째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김정은 1위원장은 ‘2.26담화’에서 “나무모를 키우는것은 산림조성사업의 첫 공정이며 산림복구전투의 성과는 양묘장들에서 나무모생산을 어떻게 따라세우는가 하는데 달려있다”면서 “양묘장들에서 나무모를 원만히 생산보장하지 못하면 산림복구전투를 성과적으로 벌릴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앙양묘장과 각 도에 지방양묘장이 이 역할을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묘목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온실 속 관수(스프링쿨러 작동)와 환기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고 이는 결국 안정적 전력공급 보장 문제로 귀착될 수 밖에 없다.

북한에 양묘 지원사업을 했던 임병수 SNGreentech 대표는 “남북교류가 가능했던 때 북 양묘장에 태양광 발전 등을 지원했다”며 “평양 중앙양묘장과 개풍, 금강산 양묘장 정도는 시설이 갖춰져 있고, 시도급 90여개의 양묘장이 모두 정상화 돼야 북한의 산림녹화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5.24조치로 인해 남북경협이나 지원사업이 모두 가로막힌 상황에서 북측이 출구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주로 중국일 수 밖에 없다.

북한 산림녹화 지원사업을 담당해온 단체들의 연합체인 ‘겨레의 숲’ 관계자는 2일 “현재 묘목 지원 등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사업은 없다”고 확인했으며, 개별 NGO 차원에서 묘목 지원을 위한 반출승인이 통일부에 제출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이 중국에 대규모 양묘장을 마련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고, 다른 한 소식통은 “북한의 각 기관별로 유실수 묘목 확보를 위해 뛰고 있고, ‘조선녹색사업개발협회’가 대외창구 역할을 맡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녹색사업개발협회’의 명칭과 활동이 알려진 것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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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잘한 일'에 걱정 드는 이유?

 
[주간 프레시안 뷰] AIIB와 중국몽
 
 
'일대일로'와 AIIB
 
우리 정부가 3월 26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sia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말 잘한 일입니다. 짝짝짝!
 
AIIB는 아시아·태평양지역 개발도상국의 인프라 구축을 목표로 합니다. 2013년 10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아시아를 순방하던 중 공식 제안했고 2014년 10월 24일 아시아 21개국(중국, 인도, 파키스탄, 몽골, 스리랑카, 네팔, 오만, 카자흐스탄, 쿠웨이트, 카타르, 우즈베키스탄 11개국과 인도네시아를 제외한 아세안 10개국 등)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죠. 처음에는 500억 달러 규모로 출범하지만 장차 1000억 달러 선까지 늘릴 계획이죠. 유럽에서는 3월 12일 영국이 참여를 선언했고 이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국가들도 가입했습니다. 
 
미국이 발끈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보면 미국에도 큰 도움이 되는 구상입니다. 2차 대전 이후 서유럽 부흥을 위한 마셜플랜이(실제로 미국의 돈은 얼마 들어가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만) 전후의 호황을 이끌었듯이 AIIB는 현재의 장기침체를 극복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테니까요.  
 
미국이 두려워하는 건 오바마 정부가 '아시아로의 선회(Pivot to Asia)'를 선언한 이래 착착 진행시킨 중국봉쇄망이 뚫리기 때문입니다. AIIB 설립에 참여할 나라들을 보면 동아시아, 동남아, 인도양, 중동, 중앙아시아, 태평양, 유럽을 총 망라하고 있습니다. 이 은행은 이들 나라를 모두 연결하는 인프라에 투자하겠다는 거죠. 
 
이 구상은 이른바 "일대일로(一帶一路)" 계획의 일환이고 최근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회는 이 구상의 실행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일대일로란 육상의 실크로드 경제지대와 해상의 21세기 해상실크로드 등 양대 축을 도로와 항로로 연결하면서 인근 일대를 총체적으로 개발하겠다는 거죠. 가히 "중국의 꿈"(中國夢)이라 부를 만합니다.  

▲ 지난 2011년 하와이에서의 사드 발사 실험 모습. ⓒAP=연합뉴스

그림에서 보듯, 땅으로는 고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유럽 대륙까지 연결하고 바다로는 중국 연해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인도양을 거쳐 유럽과 남태평양까지 이어집니다. 육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이른바 '5대 통(通)’(정책, 인프라, 무역, 자금, 민심)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일대일로'의 자금 줄이 AIIB죠. 또한 중국은 400억 달러에 달하는 실크로드 기금을 조성했고  50억 달러 규모의 해상 실크로드 은행 설립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2049년까지 25년 동안 15조 달러 이상의 자금을 투입한다는 겁니다. 과연 인류 역사상 최대 프로젝트라고 할 만합니다. 
 
이 어마어마한 구상은 기실 중국 내부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즉 중국 내륙의 개발과 과잉 생산된 철강 등 원자재의 해소를, RCEP(포괄적지역경제동반자협정,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과 결합한 무역의 확대, 4조 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의 축소, 위안화의 국제화라는 국제적 과제와 결합한 겁니다.  
 
한국의 전략은? 
 
이 프로젝트에 한국이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참여정부 때 추진된 동아시아 공동체 전략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때 우리도 각국의 외환보유액에 기초한 동아시아개발기금을 구상했으니까요. 하다못해 대형 리조트에 목매달고 있는 우리 건설업체라도 살릴 수도 있겠죠. 
 
장기침체의 원인이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저축 과잉"(버냉키의 주장)에 있건, 아니면 미국의 과잉 소비에 있건 현재의 글로벌 불균형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서도 동아시아는 역내 수요를 늘릴 수밖에 없는데 '일대일로'와 AIIB는 훌륭한 수단이 될 겁니다. 
 
내친 김에 우리가 아시아 공동의 통화금융정책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위앤화의 국제화보다는 가상의 동아시아 통화(예컨대 ACU, Asian Currency Unit, 이하 아쿠)를 만드는 게 각국의 의구심을 누그러뜨리는 데 훨씬 낫습니다. 아쿠를 달러 및 유로에 대해 절상시키되 각국 통화는 아쿠와 일정 기간 고정 환율을 갖도록 할 수 있을 겁니다(역내 부분적 고정환율제). 각국의 자본시장 개방 정도가 다르므로 역내 환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동의 자본유입통제 정책이 필수적인데 토빈세를 동아시아에서 먼저 도입하면 되겠죠. 
 
동아시아 역내 무역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 케인즈의 국제청산동맹제도를 도입할 수 있을 겁니다. 즉 무역 적자국가에 "공동관리기금"에서 일정한 이자율로 돈을 빌려 줄 뿐 아니라 무역 흑자국가에도 흑자 규모에 비례하여 일정한 비율의 벌금을 물리고 이자와 벌금은 역내 낙후지역에 투자하는 겁니다. 이 제도 역시 동아시아에서 먼저 모범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통화체제는 결국 현재의 달러체제를 전환시키는 디딤돌이 될 테니 중국도 환영할 겁니다.  
 
현재 세계 전체의 수출 증가율 둔화는 기본적으로 각국의 임금 인상에 의해 해결해야 합니다. 즉 소득주도성장을 아시아가 선도할 수 있는 거죠. 여기에 역내 공동의 수요가 확대되면 금상첨화겠죠. 특히 군사적 이유 때문에 한국의 인프라 투자를 꺼리는 북한의 개발에 AIIB는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이 핵개발을 중단하는 것을 요구해야겠죠. 효과도 의심스럽고 비싸기 이를 데 없는 미사일 방어체계(사드, THAAD)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중국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중국을 설득해야 합니다. 일본이 동참하면 더욱 효과적이겠죠. 이런 방향의 발전은 미국도 내놓고 반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부의 결정은 백번, 천번 칭찬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정부가 AIIB 참여의 반대급부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사드(THAAD)에 가입한다면 AIIB 참여는 안 하느니만 못할지도 모릅니다. 불행하게도 박근혜 정부는 곧 그렇게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눈부신 4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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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돈으로 능욕”…세월호 엄마들 ‘눈물의 삭발’

등록 :2015-04-02 20:07수정 :2015-04-03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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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어머니들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 즉각 폐기, 세월호 선체 인양 공식 선언 때가지 배상·보상 절차 전면 중단 등을 정부에 요구하며 삭발을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진실규명 침묵하더니…” 배·보상 절차 전면중단 촉구
“특위 시행령 철회 요구와 선체인양 요구 먼저 답하라”
내일 2차 삭발·도보행진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1주기를 앞두고 끝내 머리를 밀었다. 삭발을 하는 이들도,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도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들은 “돈 몇푼 더 달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호소했다.

 

2일 오후 세월호 희생자·생존자 가족들이 정부가 입법예고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 폐기와 세월호 선체 인양을 공식 선언할 때까지 모든 배상 및 보상 절차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단체로 삭발했다.

 

가족 150여명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가 참사 1주기 이전에 해야 할 일은 선체 인양을 통한 실종자 완전 수습과 철저한 진상규명이지 배상과 보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전날 정부가 희생 학생 1인당 8억원이 지급된다는 배·보상 지급 기준을 발표한 것을 두고는 “희생자·피해자 가족들을 돈으로 능욕한 정부를 규탄한다. 배·보상 절차를 전면 중단하라”고 했다.

 

이들은 정부의 배·보상금 발표가 “시행령안 폐기 여론을 잠재우는 한편, 유가족들이 돈 몇푼 더 받아내려고 농성하는 것으로 호도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정부 행태에 분노하고 또 분노한다”고 했다.

 

삭발한 이들은 모두 52명이다. 48명은 광화문광장에서, 아직 전남 진도를 떠나지 못한 이들 4명은 팽목항에서 머리를 밀었다. 삭발에 나선 이들은 “왜곡되는 우리의 뜻을 바로잡고, 진상규명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삭발한다”고 했다. 5개 조로 나눠 10분씩 삭발이 진행되는 내내 광화문광장 곳곳에서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 정동수군의 아버지 정성욱씨는 “저희가 원하는 게 돈입니까?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아이들에게 떳떳한 부모가 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이 도와달라”고 했다. ‘유민양 아버지’로 잘 알려진 김영오씨는 “정부 시행령안은 다시 시간을 지난해 4월16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세월호가 다시 또 침몰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얼굴사진이 담긴 학생증을 목에 건 엄마·아빠들의 머리카락은 전동이발기에 뭉텅뭉텅 잘려 나갔다. 한 희생 학생 어머니는 “머리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깎을 수 있다. 이 머리가 자라기 전에 진실이 밝혀지면 좋겠다. 부모들의 힘이 부족해 벌써 1년이 지났지만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다.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함께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했다. 가족들은 4일 경기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광화문광장까지 도보행진을 하기에 앞서 다른 가족들이 다시 삭발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정부가 배·보상 계획을 갑자기 발표한 것을 두고 유가족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왜 지금, 이런 방식’이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고 이보미양의 어머니 정은영(45)씨는 “선체 인양과 제대로 된 진상규명 요구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가 갑자기 유가족들이 몇억씩 돈을 받는다는 식으로 기습 발표를 했다. 돈 때문에 시위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고 김초원 교사의 아버지 김성욱(55)씨는 “정부의 발표 뒤 주변에서 ‘돈을 또 받는 거냐’는 전화가 쇄도했다. 지금까지 유가족들은 정부로부터 아무런 배·보상금을 받지 못했는데도, 마치 엄청난 돈을 받았다는 근거 없는 소문에 시달려왔다. 진상규명과 선체 인양 문제에는 침묵만 하다가 뜬금없이 돈을 들고나오는 정부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안산지역 50여개 시민단체들은 3일 저녁 7시 경기 안산문화광장에서 정부 시행령안 폐기와 진상규명 전 배·보상 중단을 촉구하는 안산시민궐기대회를 열기로 했다.

 

김규남 기자, 안산/김일우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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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삼켜버린 세월호 참사, 대통령이 삼켜버린 약속


[기고] 다시 거리로 나선 유가족, 그 비통해서 강력한 마음
명숙 /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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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4.02  09:5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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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폈다. 눈이 시리다. 1면에 입법예고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의 폐기와 세월호 선체 인양을 촉구하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로 항의방문을 가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사진 때문이다. 경찰에 막혀 청운효자동 주민센터로 가지 못한 채 건너편 푸르메 재단 앞에서 담요를 덮어 쓰고 쪼그려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엄마들,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망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다음 장을 넘겼다.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의 요구는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얼마나 보도됐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건 4월 29일 보선과 관련한 야당들의 주도권 경쟁 기사였다. 4월에는 세월호 참사 1주기도 있지만 선거도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고는 어느새 어깨가 내려앉는다. 작년 5월이 생각난다.

 

   
▲ 세월호 유가족들과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가 '청와대 행진'이 막힌 채 광화문 광장에 주저앉아 있다. 앞서 이들은 30일 오후 1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안 폐기 및 세월호 인양을 촉구했다. (사진=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작년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사과하고 세월호 특별법과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을 만들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약속했다. 6.4 지방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월호 참사 가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듯했다. 참사 발생 50일 만에 치르는 선거라 새누리당은 국민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며 도와달라고 읍소하며 세월호 진상조사와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정부 여당이 내놓은 특별법안은 문제투성이었다. 그렇다고 새정치민주연합이라고 다른 것은 없었다. 17개 광역단체장을 기준으로 새누리당 8곳(부산·대구·인천·울산·경기·경북·경남·제주), 새정치민주연합 9곳(서울·광주·대전·세종·강원·충북·충남·전북·전남)으로 사실상 야당이 패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7.30재보선도 15곳 중 4곳만이 의석을 차지할 정도로 연이어 참패한 새정치민주연합은 마음이 급했는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비수를 꽂았다. 박영선 원내대표는 새누리당과 함께 야합에 가까운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려고 했었다.

 

신문을 덮었다. 정치의 계절이라는 선거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정치가 삼켜버린 세월호 참사 피해가족들의 눈물, 그들의 삶이 내 목울대에 꺽~하고 걸린다. 유가족들의 울음과 닮은 꺼억 꺼억…. 2014년 4월 16일 이후로 멈춰진 그들의 삶, 그들의 꿈을 잊게 될까 두렵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는 달라져야한다는 이웃으로서의 약속은 선거라는 좁은 의미의 정치로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확인시켜 준 우리의 정치적 책임은 부정의한 사회구조를 바꾸는 실천이다. 아이리스 영의 말처럼 공유된 책임은 그 책임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 함께 집단행동을 통해 사회와 구조적 과정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면제될 수 있다.

다른 정치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세월호 참사를 겪고 나서야 세상을 알게 됐다는 유가족들. 내 가족과 내 일만 생각하고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평탄하게 살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냐고 자문하는 유가족들이 이제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섰다. 간담회도 하고 북 콘서트도 하며 사람들을 만난다. 지금은 정부 덕에 다시 노숙생활을 시작했다. 단원고 희생자 임세희 학생의 아빠 임종호 씨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21년 전 서해 페리호 침몰 현장에 있었어요. 21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전혀 없어요. 그때 저는 잠재적 유가족이었죠. 그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21년이 지나고 유가족이 됐습니다. 나는 다른 분들이 더 이상 유가족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다닙니다. 세월호 참사는 유가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_임종호 씨

폐허가 된 삶에서도 피어나는 정치란 이런 것이 아닐까. 정부가 ‘순수 유족’ 운운하며 참사가 정치와 무관한 듯 덮으려 했지만 이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희생자들이 남긴 숙제를 풀고 있다는 유가족들로부터 다른 정치를 생각해본다. <비통한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파커 팔머가 말했듯이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비통함만큼 강력한 것은 없”으니까.

 

   
▲ 세월호 참사 한 달 후인 지난해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진상규명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명운을 걸겠다고 약속했다(사진=YTN뉴스 캡처)
팔머는 혹독한 곳에 서 있을 때 그곳에 오래 머문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고, 현실과 가능성 사이의 긴장을 참지 못해 우리를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냉소주의나 이상주의(환상의 세계)에 기울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희망을 가지고 견디며 행동하는 일이 가장 큰 도전이라고 했다. 유가족이라고 안 그랬을까. 얼마 전 제주에서 열린 <금요일엔 돌아오렴> 북 콘서트에서 지치고 힘들어서 그냥 회피하고 싶을 때는 없었는지, 시민이 물었다. 단원고 희생자 이창현 학생의 아버지 이남석 씨가 말했다.

 

“세월호 참사 일어나고 3개월 정도 됐을 때 신문사가 개최하는 좌담회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싫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사에는 실리지 않았지만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김익환 교수가 그건 회피다. 왜 불의를 보고 싸우지 않고 당신만 떠나려고 하느냐,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은 불의에 짓밟히고 살라는 말이야, 그러시더라구요. 그때 제가 말을 잘못했구나, 나 혼자 편하려고 도망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안산이 싫어가지고 이사 가려고도 마음 많이 먹었습니다. 너무너무 괴롭고 힘들어서요. 지금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단원고에 가까운 곳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이곳은 내 아이가 지냈던 곳이구요, 아직도 (아이는) 수학여행 중이구요. 불의에 회피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싸워서 이기고 싶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저희 가족들이 잘 싸워왔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가족들만의 힘으로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고 여기에 같이 동참해준 시민들, 불의를 보고 함께 해준 국민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싸워오고 있습니다. 특별법이 미비하게 통과됐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밝혀진다면 그 책임자를 법대로 처벌하고 한 발짝 더 나아간 안전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_ 이남석 씨

그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안고 행동한다. 그리고 옆에는 그 마음에 공감하며 부정의에 맞서 싸우는 시민들이 있다. 그게 힘이라는 것을 세월호 가족들도 알고 우리도 안다. 비슷한 영혼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될 때 용기와 상상력이 배가 되었던 경험이 한번쯤 있지 않은가. 다른 정치는 고통을 우회하지 않고 직면할 때, 고통이 다른 이들과 연결되었음을 깨닫고 정치의 주체로 나설 때 시작된다. “공유되는 비통함은 상호이해의 가교가 되어 서로를 향해 걸어가도록 해줄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것은 세월호 가족들의 고통과 신음이고 그들이 꿈꾸는 다른 세상이다. 이제 다른 정치를 위해 광화문으로, 청와대로, 팽목항으로 가자. 그곳을 비통한 자들의 정치로 물들이자.

그리고 우리의 정치가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입법예고 기간인 4월 6일을 지나서도 이어졌으면 좋겠다. 아니 4월 29일 보선 이후에도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 강정해군기지 반대 주민, 밀양 송전탑 반대주민,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 등 다른 고통들과 만나 우리가 연루되어있음을 재확인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패하더라고 더 과감하게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정치는 시간의 한계도, 공간의 한계도 뛰어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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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등록 :2015-04-01 04:15수정 :2015-04-02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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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101

첫 편지를 보낸 2년 전, 
어떻게든 당신이 잘하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건 헛된 기대였고 공연한 바람이었습니다
절대왕정의 공주로서 성장을 멈춘
당신의 꿈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이젠 이 편지를 끝내려 합니다
안녕할 전망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안녕을 빕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싱가포르 시내에 위치한 싱가포르 국립대학 문화센터에서 열린 리콴유 전 총리의 국가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 싱가포르/뉴시스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당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이미 <한겨레>의 석진환 기자가 왜 가야 했는지 의문을 제기했고(28일치 2면), 권보드래 교수가 세습의 또다른 왕조 싱가포르의 천박성을 따진 글(28일치 23면)을 기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되짚어보는 까닭은 이번 행차만큼 ‘당신의 꿈’을 잘 드러낸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석 기자가 지적한 대로, 나라의 품격을 높이자면 지지난해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추모식에 참석했어야 합니다. 실리를 따지자면, 지난 1월 사망한 세계 최고의 갑부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 장례식에 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와 황우여 교육부 장관을 각각 조문 사절로 보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해외 조문을 한 건 15년 전이었습니다. 이렇게 드물고 귀한 대통령 조문외교의 대상으로 당신은 리 전 총리를 택했으니, 당신은 그를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겨두었던 것일까요.

 

리콴유 전 총리 장례식 조문단의 면면을 보면…

 

아버지가 40년, 아들이 10년째 통치하는 현대판 세습체제가 싱가포르라는 사실을 애써 상기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조문단의 면면을 보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37년째 군사정권인 미얀마에선 대통령이 왔고, 3대 세습 체제인 북한도 대규모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공산당 1당 지배 체제인 중국에서도 부총리가 왔고, 2차 대전 A급 전범으로 일본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 총리가 왔습니다. 그들과 나란히 있었던 것은 리콴유보다 먼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총통체제를 굳혔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었습니다.

 

싱가포르는 잘사는 나라일지는 몰라도 행복한 나라는 아닙니다. 정문태 분쟁지역 전문기자는 이 사실을 <한겨레>(28일치)에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돈은 넘쳐나지만 국민은 기계의 부품처럼 살아가고, 엘리트들은 최고의 풍요를 누리지만 서민은 가난한 나라의 지표를 말입니다.

 

국내총생산, 청렴, 정보기술, 사업 편의, 국제 경쟁력, 경제 자유 및 세계화 지표에선 단연 정상급입니다. 하지만 국민의 행복지수는 조사 대상 151개국 가운데 90위(2012년 신경제재단)였습니다. 껌 씹기와 화장실 물 내리기 그리고 성적 취향까지 법으로 규제하고 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태형이 존재하고 사형 집행률이 가장 높기도 합니다. 돈 많은 아랍의 이슬람 국가나 다를 게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171개 조사 대상 국가 가운데 153위(2015년 ‘국경 없는 기자회’ 언론자유 보고서)에 올랐습니다. 독재로 악명이 높은 미얀마(144위)나 콩고민주공화국(150위)보다 떨어집니다. 모든 신문과 방송을 리씨 집안이 장악하고 있으니 언론 자유는 논할 계제도 아닙니다. <조선일보>는 이번에 리 전 총리를 신격화하기라도 하듯이 칭송했는데, 언론을 사실상 국유화하고 세습 족벌의 지배 아래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랬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통제받는 까닭에 싱가포르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국민으로 꼽혔습니다.(2012년 갤럽 조사) 국민은 입 닫고 눈감고 귀 막고, 그저 국가가 시키는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싱가포르와 리콴유를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북한의 세습 병영 체제를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싱가포르는 우리보다 더 오랫동안 북한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그런 지도자를 두고 당신은 조문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리 전 총리는 우리 시대의 기념비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 이름은 세계사의 페이지에 영원히 각인될 것입니다.” 국민을 ‘최첨단 우리 속 배부른 돼지’로 키우는 사육사가 위대한 지도자라고요? 그런 사육사가 꿈인 지도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칭송할까요.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듯이, 국민도 사육당하는 것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첫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순 없었는데…

 

당신에게 이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2013년 4월이었습니다. 상습적인 탈세, 병역 회피, 투기, 사기, 표절, 극단주의 등으로 점철된 ‘조각 명단’ 때문에 새 행정부가 출범도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국가기관의 선거부정 때문에 실망하고, 또 그런 최악의 인선 때문에 다시 실망했지만,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인 당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당신이 잘하기를 바랐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던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대한 진저리쳐지는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임기는 비비케이 거짓말에서 시작해 자원외교, 4대강 거짓말 등으로 채워졌습니다. 국민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국가보다 패거리를 더 챙기고, 마사지 걸 등 추접을 떨면서도 근엄한 척, 경건한 척, 아는 척, 잘난 척 하는 것에 넌더리가 났습니다. 게다가 불치병을 핑계로 병역을 회피한 사람이 걸핏하면 군용잠바에 선글라스 착용하고, 당신의 부친 ‘박정희 흉내’를 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끔찍했습니다. 당신은 적어도 그렇게 천박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둘째는 부친의 출세주의와 기회주의로 뒤얽힌 난잡한 개인사가 당신에겐 반면교사가 되리라 여겼습니다. 부친은 일제 치하에선 일본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서하고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등 출세 코스를 밟았습니다. 해방이 되자 사회변혁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민족적 사회주의 계열로 표변해 여순반란사건의 한 주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동지들을 팔아넘겨 구명도생한 뒤 반공의 화신으로 출세주의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결국 총으로 권력을 잡았고, 총의 힘으로 종신지배체제를 구축했고, 결국엔 총으로 피살되어 18년의 왕조를 마감했습니다. 그런 개인사를 곁에서 지켜봤을 당신이 그런 부친의 뒤틀린 길을 갈 리 없으며, 자신과 국민을 또 불행에 빠트리는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2월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원 정치·대선 개입 사건’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1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던 원 전 원장은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곧바로 법정 구속됐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셋째는 지난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저질러진 불법 부정 행위가 오히려 당신을 더욱 성찰적인 인간, 소통하는 지도자, 배려하는 정치인으로 성숙시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신 자신의 흠결이 당신의 반면교사가 되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원칙과 신뢰, 당신이 입만 열면 하던 말을 그때까지도 믿었습니다.

 

이런 기대 속에서, 총과 음모가 난무하는 근육질의 정치에서 관용과 온정의 정치로, 배제와 차별의 정치에서 포용과 통합의 정치로, 탈법과 사기의 정치에서 원칙과 신뢰의 정치로 나아가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매향처럼 언뜻 스쳐가는 연정이 편지에 묻어날 수 있기를 감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건 헛된 기대였고, 공연한 바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남자들보다 더 근육질이었고, 음모적이었으며, 완고하고 차별적이었습니다. 거짓에도 능했고, 위선적이었으며, 더 출세 지향적이었고 더 기회주의적이었습니다. 무지하면서 오만했고, 나태하면서 핑계를 대기만 했습니다. 그런 당신을 보는 것은 실망과 분노요, 짜증과 욕이었습니다. 입이 더러워지고, 머릿속이 혼미해지고, 마음은 강퍅해졌습니다. 더 편지를 쓴다는 건 저 스스로 인간성을 파괴하는 짓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편지를 끝내려 합니다. 숫자에 의미를 둔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캐나다의 소설가 얀 마텔이 스티븐 하퍼 총리에게 보낸 편지의 횟수와 같아졌습니다. 마텔은 이웃과 다른 생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상상력이 결여된 하퍼 총리에게, 문학을 통해 그런 이해력과 상상력과 꿈을 수혈하자며 2007년 4월부터 2011년 2월까지 격주로 문학작품을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퍼는 실제로 가장 즐겨 읽는 게 <기네스북>이라고 자신있게 떠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텔은 그가 캐나다 예술위원회 50돌 기념행사에서 딴짓에 몰두하는 걸 보고 저와 총리 그리고 캐나다와 국민을 위해 편지를 쓰기로 했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스티븐 하퍼 총리처럼 나를 지배하는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상상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의 꿈이 자칫하면 나에게는 악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나중에 책으로 묶은 <총리에게 보낸 101통의 편지>의 서문에서 밝힌 배경입니다.

 

캐나다 소설가 마텔도 당신에게 이런 충고를 했는데…

 

이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시작한 편지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끝납니다. 총리 보좌관으로부터 의례적인 답장 대여섯 번 받았을 뿐 총리에게선 한 장도 답장을 받지 않았습니다만, 그는 4년간 편지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보냈습니다. 그가 마지막 편지에서 추천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신도 읽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난해하지만 두려움과 나태함을 극복하도록 돕는’ 이 책이라도 한번 같이 읽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마텔은 당신에게도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한국어판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가 출간되던 2013년 4월이었습니다. “조금은 뒤로 물러나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독서가 필요합니다. 현재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광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통령님이 진정으로 무엇을 하기를 바라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냉철하게 판단하기 힘들 것입니다. 소설을 읽으십시오.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모든 정치인이 원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과연 소설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었는지 궁금합니다. 하퍼는 기네스북이라도 즐겨 읽었다지만, 당신은 어떤 책을 즐겨 읽는지 알려진 게 없습니다. 기껏해야 성추행으로 쫓겨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칼럼을 읽고는 주변에 돌려보도록 했던 게 당신의 독서 수준이었으니, 사람들은 더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문 글이나 제대로 읽었을까 의심할 뿐입니다.

 

이석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3월24일 오후 서울 서초동 특위 사무실을 방문한 세월호 유족들과 만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당신은 리콴유에게서 아버지를 보고 느꼈습니다. 그 아버지는 리콴유보다 먼저 공포와 억압으로 왕조를 쌓아올렸습니다. 돌아보면 당신의 꿈은 그런 체제의 부활이었고, 그 체제 안에서 다시 왕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겐 새로운 세상의 꿈이 필요없었고, 더 나은 세계를 추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절대왕정의 공주로서 성장이 멈춰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발현되는 건 회귀 본능뿐이었습니다. 만인이 우러르고, 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그런 왕녀! 당신의 꿈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상징적입니다. 아이들 250명을 포함해 304명의 시민이, 모든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죽어갔는데, 당신은 아무런 책임도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티브이가 생중계를 하다시피 했는데, 당신은 그걸 보지도 듣지도 않았는지, 뒤늦게 대책본부에 나타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만 했습니다. 그게 벌써 1년 전입니다.

 

대한민국을 개조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그건 어리숙한 정부와 어리숙한 지도자의 실수 때문이라고 합시다. 그 뒤 이 정부와 여당 그리고 그 추종자들이 한 일은 피해자를 조롱하고, 야유하고, 자식 잃은 부모를 불한당으로 내몰고, 돈이나 밝히는 패륜부모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을 비하하고, 놀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대한민국을 개조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그 출발이라 할 참사의 진상은 어떻게든 덮으려고 했습니다. 왜 이 정부가 단 한 사람도 구하지 않았는지, 대통령과 이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덮는 데 혈안이었습니다.

 

국민의 원성에 못 이겨 겨우 하나 한 것이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정부는 이미 따귀 빼고 기름도 뺀 위원회이지만, 그마저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정부는 조사 대상이지 조사 주체가 아닙니다. 왜 한 사람도 구조하지 않았는지 조사를 받아야 할 집단입니다. 그런 정부가 위원회를 관장하고 통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정부가 파견한 공무원이 조사 기획도 하고, 조사 범위와 대상도 정하고, 위원회에 보고한 조사보고서도 결재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조사 인력도 예산도 대폭 줄이려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위원회를 해체하자고 하지, 참으로 철면피 정부이고 정권입니다.

 

곽병찬 대기자
진상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숨겨야 할 게 그리도 많습니까? 그러고도 이 정부를 어떻게 대한민국 정부라 할 수 있고, 대통령을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철부지 전제군주를 꿈꾸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런 패륜적 작태를 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런 당신은 우리의 대통령이 아닙니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닙니다.

 

안녕할 전망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안녕을 빕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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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주간 논평] 문재인, 이런 식으론 집권 어렵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천안함 침몰 5주년을 앞둔 지난 3월 25일 해병대 2사단 상륙돌격장갑차대대를 찾아가 "북한의 잠수정이 감쪽같이 들어와서 천안함을 타격한 후에 북한으로 복귀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도 야당 보 자격으로 '천안함 폭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북한을 그 장본인으로 명확히 지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냥 '폭침'이란 표현과 '북한 잠수정에 의한 폭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차이의 의미는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국제연합(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의 논쟁을 통해 보다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2010년 7월, 안보리 의장은 천안함 침몰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면서 '천안함 침몰을 초래한 공격을 규탄한다'고 하면서도 끝내 '북한이 천안함 침몰에 책임이 있다고 결론내린' 남한 주도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지 않았다. 

또한 이 성명에는 북한의 연어급 잠수함도, 1번 어뢰도, 폭발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저 침몰을 초래한 공격이라고만 추상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것은 의장 성명에 적시된 대로 대한민국(한국)의 안보리 의장 앞 서한(S/2010/281)과 더불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안보리 의장 앞 서한(S/2010/294)에 유의'하고 '여타 관련 국가들의 반응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폭침 발언에 앞서 설명되어야 했던 것들 

문재인 대표가 지난 대선에서 천안함 침몰을 '폭침'이라고 언명한 것이 과연 북한의 부인을 '유의'하고 여타 관련 국가들의 반응에 '주목'한 결과인가는 논외로 하자. 하지만 적어도 침몰 5주년을 맞아 '북한 잠수정의 소행'이라고까지 구체적으로 규정하려면, 문 대표가 반드시 유의하거나 주목했어야 할 국내외의 이견과 과학적 반론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준비했어야 했다. 

우선, 문대표는 천안함 폭침의 '결정적 증거'와 관련된 과학 논쟁에 대해 어떻게 유의하고 주목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천안함을 침몰시킨 어뢰 부품에서 찾아낸 폭발 물질이라고 제시한 것을 몇몇 과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침전 물질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한국 정부 주도의 조사에 참여했던 미국 측 토머스 에클스 단장조차 한국 정부에 보낸 이메일에서 "전문가들의 의심을 제거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그들은 일상적으로 부식이 일어나는 바다 속의 환경에서도 해당 물질이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믿는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완곡하게 피력한 바 있다. 

또한, 문 대표는 북한 잠수정이 침투해 어뢰를 발사했다는 정부의 가설을 사실로 믿게 된 근거에 대해서도 국민과 지지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천안함을 침몰시킨 주범으로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을 지목했는데, 2010년 5월 20일 중간 발표에서는 130톤급 최신예 잠수정이라고 발표하고, 6월 4일 유엔 보고에는 70~80톤급 구형 잠수정이라 보고했다. 70~80톤급 구형 잠수정은 중어뢰를 발사할 수 없다. 유엔이 폭침설을 인용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이후에도 정부는 120톤, 190톤으로 오락가락하는 발표를 해서 논란을 빚었다. 이 모든 혼란이 천안함 사건 5년 전부터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을 추적해왔고 그 성능과 제원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는 군의 반복된 실수였던 건가? 

마지막으로 천안함 침몰 이후 정부의 발표에 대해 제1야당이 제기했던 문제제기들과의 일관성을 고려하더라도 무언가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 예컨대 2010년 9월 정부가 천안함 최종 보고서를 발표한 직후에도 당시 민주당 대변인은 "진실을 밝히기에 부족했고 국민적 의혹만 더 커졌다"라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특위 재가동을 주장했다. 새누리당이 문대표의 뒤늦은 개과천선을 수용하면서도 '이토록 늦어진 데 대해 사과하라'고 추가압박을 가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은 2010년 9월 이래 국회 차원의 검증 작업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문 대표가 스스로 입장을 바꾼 것에 따른 귀결일 수 있겠다. 
 

ⓒ프레시안(최형락)


이렇게는 종북몰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참여연대는 지난 3월 26일 "만약 문 대표가 시민들과 국제사회가 제기해온 합리적 의혹들에 대해 정부로부터 새로운 과학적 근거나 증거를 제공받았다면 마땅히 이를 공개해 국민들도 진실을 알도록 해야 한다"라는 논평을 발표했다. 

하지만 문재인 대표는 3월 29일 대표 취임 50일 기자 회견에서 천안함 사건을 북한에 의한 폭침사건으로 규정한 이유에 대한 설명은 회피한 채 자신의 최근 행보가 수권 능력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에둘러 주장했다. 굳이 의역하자면 정부와 보수 언론의 천안함 폭침론에 편승하는 대신 도리어 여당의 안보 무능을 비판하여 정권 교체의 발판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문 대표가 과거 당의 입장을 근거 없이 바꾸어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설을 인정하고 들어간다고 해서 과연 집요한 종북몰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올해 3월 <리얼미터>의 여론 조사 결과, 천안함과 관련해 응답자의 47% 이상이 정부 발표를 '신뢰할 수 없다'고 답하고, 39% 안팎이 정부의 조사 결과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설사 문 대표가 미봉책을 동원해 요행히 종북 프레임의 개미지옥을 탈출한다 해도 여전히 수많은 시민들이 남아 있게 된다. 

문재인 대표의 폭침 인정은 과반에 가까운 국민을 불순분자 혹은 음모론자로 몰아가는 종북 프레임에 힘을 보태는 일이다. 게다가 신앙 고백하듯 천안함 폭침을 인정한 문재인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이 이후의 대선 가도에서 또 다른 비논리와 비이성의 신앙 고백을 강요받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떡 하나 더 주면 안 잡아먹지" 식의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다. 

'새 정치'의 비전과 책임은 어디에? 

천안함 폭침 논란을 제외하더라도, 문재인 대표가 이끌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은 최근 들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굵직한 외교 안보 현안들에 대한 정면대응을 회피해왔다. 우방국(미국)의 요청만 있으면 얼마든지 국제 평화 유지라는 이름으로 다국적군 파병에 응할 수 있는 해외 파병 참여 법안 발의, 한국군 전시 작전 통제권 환수의 무기 연기와 미군 기지 이전 협정의 일방적 변경, 한·미·일 간 군사 정보 공유 약정의 기습 체결과 한·미·일 미사일 방어 협력,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사드 배치 논란에 이르기까지 제1야당의 공식적인 입장은 모호하기 그지없다. 

안보에 강한 수권 정당임을 과시하겠다는 문재인 대표의 행보에서는 역설적으로 종북 프레임에 휘말리는 것에 대한 공포와 온당치 못한 정략적 고려가 느껴진다. 이 공포와 자기 검열은 종국에는 새 정치의 주체가 형성될 민주적 공론장을 위축시킴으로써 문 대표가 그리는 수권의 꿈마저도 질곡에 빠뜨릴 것이다. 더불어 정치인 문재인과 새정치민주연합이 제시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 비전의 폭도 협소해지고 말 것이다.

정치인 문재인은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렇게 해서 집권하기도 어려우려니와 만약 집권할 경우에도 북한의 어뢰 공격을 천안함 침몰의 원인으로 단정한 대통령으로서 폭침을 부인하는 북한과 폭침에 대한 응분의 댓가를 치러야 한다고 압박하는 남한 보수 여론 사이에서 어떤 경륜을 펼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래서는 자신의 정치적 장래를 어둡게 함은 물론 자칫하면 이 나라 민주주의와 평화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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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유족들 "참다 참다... 삭발합니다"

 

2일 집단 삭발식 예고 "정부 이간질, 더는 못 참겠다"

15.04.01 22:51l최종 업데이트 15.04.02 10:26l

 

 

[2신 : 2일 오전 8시 10분] 
삭발 참여 인원 더 늘어나... "최소 20명 이상" 

세월호 가족협의회는 2일 오후 1시 광화문 광장에서 정부의 배·보상 절차 강행 등에 항의하는 의미로 집단삭발식을 연다고 공식 발표했다. 아이들의 1주기를 앞두고 노숙농성에 이어 삭발까지 하는 부모들의 숫자들은 당초 정한 인원보다 더욱 늘어났다. 

유경근 대변인은 이날 오전 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로 "고민 끝에 선체 인양과 진상규명, 배·보상 절차 중단을 촉구하는 피해 가족들의 순수한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삭발을 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그는 "인원은 계속 취합 중이나 최소 20명 이상일 것 같다"고 했다. 

<오마이TV>는 오후 1시부터 세월호 유가족의 집단 삭발식을 생중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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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세월호 유가족이 지난 3월 3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416시간농성선포 기자회견을 마친 뒤 청와대로 서한 전달 행진을 하던 중 경찰에 가로 막혀 고개를 숙인 채 맨 바닥에 앉아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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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 : 1일 오후 10시 51분]

세월호 참사 유족들이 2일 집단삭발식을 한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아래 세월호 특위)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해양수산부의 특별법 시행령안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단원고 고 이재욱 학생 어머니 홍영미씨는 1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내일(2일) 낮 12시 광화문 광장에서 저와 4·16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협의회 간부진을 중심으로 11명이 함께 삭발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말도 안 되는 (4·16 세월호 참사 특별법) 시행령을 내놓고 얼렁뚱땅 통과시키려고 하는데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해수부는 지난 27일 특별법 시행령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동안 세월호 특위에는 '정해진 안이 없다,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던 해수부였다. 바로 전날까지 해수부에 시행령 잠정안 관련 의견서까지 보냈던 특위로선 황당한 일이었다. 

더 큰 문제는 내용이었다. 해수부안은 세월호특별법이 정한 세월호 특위 사무처 직원 정원을 120명에서 30명 줄인 90명으로 못 박고, 사무처 3국(진상규명·안전사회·지원국) 가운데 진상규명국만 국장급으로 유지했다. 직원들의 비율도 파견 공무원이 더 높은 쪽으로 정해 사실상 특위를 정부가 장악할 수 있게 했다. 이석태 세월호 특위 위원장이 3월 29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가 예고한 시행령안에 의하면 특위는 허수아비가 될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한 이유였다.

'진상규명' 하나만을 보고 특별법 제정에 힘썼던 유족들도 반발하고 있다. 세월호 가족협의회는 3월 30일 오후부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해수부안 전면 폐기를 요구하며 '416시간 집중 농성'에 들어갔다. 일부 유족들은 청와대 쪽으로 행진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불법 미신고집회'라며 자신들을 막아선 경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공무집행방해죄로 체포됐다.

홍영미씨는 정부가 비슷한 시기에 배·보상 문제를 거론하는 것에도 분노했다. 그는 "정부가 아주 치밀한 작전으로 국민과 유족들을 이간질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 추모기간인 4월에 정부가 돈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예의가 아닐뿐더러, 이는 유족이 돈을 더 받아내려고 농성하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국민 여론을 분열시키려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홍씨는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삭발을 하려고 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삭발이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걸 상징한다고 하더라. 현실이 바뀔 수만 있다면 삭발은 어렵지 않다. 부모이기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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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한반도 배치결정의 평가기준을 제언한다


<칼럼> 곽태환 전 통일연구원 원장
곽태환  |  thkwak3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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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02  09: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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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환 / 미국 이스턴 켄터키대 명예교수, 전 통일연구원 원장
 

지금 사드의 한반도 배치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여 찬반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에 있는 가운데 본 칼럼에서 한국정부의 사드의 한반도 배치 결정과 관련한 평가기준을 제언하고자 한다. 최종적으로 사드 배치 사안은 국내에서 공론화하여 국민적 합의를 도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8개월의 장고 끝에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에 35번째 창립회원국으로 참여하겠다는 통 큰 결정을 내린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AIIB 참여가 국가이익을 신장하고 장기적으로 경제적 실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현명한 판단은 흔히 사드인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THAAD) 사안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경제 협력과 안보 협력을 구별하는 지혜와 판단에 감사드린다. 장기적 차원에서 본다면 동북아 경제협력은 동북아 안보협력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젠 사드의 한반도 배치에 관하여 박근혜 정부가 지금까지 일관성 있게 주장해 온 "전략적 모호성"으로부터 해방되어 확실하고 분명하게 통 큰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장기적으로 미국이 현재 구상하고 있는 “지휘통제와 통합 대공미사일 방어체계(Integrated Air and Missile Defense:IAMD)는 사드보다 상위방위체계로 이런 큰 전략 구상에 관해 지난 3월27일 서울에서 마틴 템프시 미 합참의장과 한국 최윤희 합참의장 간에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사드의 한반도 배치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여 찬반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에 있는 가운데 본 칼럼에서 한국정부의 사드 한반도 배치 결정과 관련한 평가기준을 제언하고자 한다. 최종적으로 사드 배치 사안은 국내에서 공론화하여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일부 논객들은 박근혜 정부에게 국가이익에 입각하여 사드배치를 결정하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국가이익 자체가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인 평가기준이 필요하다. 국가이익의 개념은 크게 주관적 이익과 객관적 이익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다. 주관적 이익은 정책결정자가 주관적으로 국가이익이라고 정의하는 것인데 반해 객관적 이익은 정책결정자의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국가이익이다. 사드배치는 주관적 이익에 의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이익의 득과 실을 계산하여 결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여기서 국가이익은 안보이익뿐 아니라 국가의 생존에 영향을 끼치는 비(非)안보적인 국익도 존재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객관적 국익 차원에서 사드 한국배치의 득과 실을 어떠한 기준에서 평가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필자는 9가지 평가 기준을 고려할 것을 제안한다. 그 동안 많은 논객이나 분석가들이 제시한 사드 배치 찬반론 주장을 중심으로 9가지 평가기준을 정리하여 질문형식으로 구성하였고 한국정부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이 사드 한반도 배치의 최종결정 과정에서 잣대로 사용하길 바란다.

9가지 평가기준은 무엇인가?

사드의 한반도배치와 관련한 9가지 평가기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북한의 핵탄두 미사일 능력 평가. 북한이 핵전쟁을 시작할 의도가 있는가? 핵탄두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 북한의 핵 위협의 객관적인 평가는?

2. 사드 한반도 배치의 필요성. 만약 북한이 핵탄두 미사일을 사용할 경우(이런 경우 핵전쟁 가상)에 사드가 필요한가? 한반도 급변사태 시에 미국이나 다른 지역에서 사드공수가 가능한가? 사드 배치가 북한이 지적한 대로 어떤 경우에 선제공격용 체제인가?

3. 사드의 실효성. 현시점에서 사드가 북한의 핵미사일을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는가? 실전에 사용한 적이 없어 미국의 군산복합체나 무기상들이 증언하는 사드의 실효성의 문제는 없나? 전쟁 억제력으로 실효성이 있는가? 한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KAMD)와 사드 배치를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가?

4. 사드배치의 고비용. 한국경제의 위협이 될 사드배치의 고(高)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과연 실용적이고 국가안보의 이득이 있는가?

5.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 중장기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무엇인가?

6. 사드배치가 한중 관계와 한러 관계에 미치는 영향. 한중/한러 경제관계에 미치는 부정적 관계가 과연 국익인가?

7. 한미동맹의 미래. 사드배치가 한미동맹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겠지만 사드배치로 인한 동북아 안보지형의 변화가 국익차원에서 향후 한미동맹의 미래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8. 장기적으로 한반도 평화와 합의 통일에 미치는 영향. 사드배치로 인해 향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합의에 의한 통일프로세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9. 사드 배치의 대안 모색. 사드배치의 다른 대안은 없는가? 한반도 이외 지역에서 급변사태 때 공수할 수는 없는가?

하나의 대안으로 남북관계 개선과 사드배치 보류가 바람직하다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 현재 한미 합동군사훈련 기간 중에 북한당국이 연일 대미 대남 비난 수위를 높여가면서 최하 수준의 저질 언어로 한국과 미국을 막말로 비방하면서 압박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금년 초에 기대했던 남북대화는 아마도 한미 군사훈련이 끝나는 4월 24일 이후에 현재 꼬일 대로 꼬인 남북관계의 물꼬를 틀 새 출구전략이 제시되지 않으면 남북관계 복원은 영영 '헛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남북대화 재개와 북미 관계 개선의 걸림돌은 상호신뢰 부족으로 상호양보와 타협하려는 의지결여가 핵심이다. 북한은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을 고집하고 있고 한국은 조건 없는 남북대화를 먼저 열어 핵심 이슈들을 협상 테이블에서 논의하자고 주장하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대화조차 이룰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한미 당국이 과거에 했던 것처럼 대북 물밑 접촉을 최대한 구사하여 김정은 제1위원장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도록 유인하기 위해 어디든지 공식적인 국제행사에 남북정상들의 만남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정치적 의지만 있으면 남북간 현안을 타결하기 위해 남북정상의 만남은 쉽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직시한 바탕 위에서 새로운 전략을 짜는 것이 바람직한데 언제까지 한미 양 정부가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인가? 언제까지 남, 북, 미국 3국간 상호비방이나 막말로 허송세월 할 것인가? 이제는 어떻게 남, 북, 미 3국간 상호양보와 타협하는 새 전략을 짜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지름길을 모색해야 할 단계이다.

만약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보류하고 남북대화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모색하면, 한반도 위협을 줄이고 경제협력을 증진시키면 사드 한반도 배치의 필요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사드배치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 한다. 한국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은 합리적인 정책결정을 위해 상기 9가지 평가기준을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득과 실을 현실적으로 전략적으로 계산 한 후에 사드배치를 합리적으로 최종 결정해야 할 것이다. 상기 9가지 평가기준에 따라 사드배치의 득과 실을 평가한 후 손실이 이득보다 많을 경우에 정부는 단호하게 사드 배치를 보류 혹은 반대하는 것이 합리적인 정책결정일 것이다.

만약 주한미군이 독자적으로 사드를 배치하면 또 다른 남북한 간 군비경쟁(Arms Race)시대에 돌입하게 되고, 동북아 안보지형의 큰 변화를 가져와 동북아 안보체제의 전략적 불안정이 생기게 되어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안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만약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보류하거나 반대할 경우에 다른 대안 모색이 필요한데 남과 북이 함께 공동으로 창조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현시점에서 한국정부가 성금하게 사드배치 결정이나 반대 결정보다 사드배치 보류 결정을 하면서 진정한 남북대화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것이 사드 배치의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라 주장한다. 그런 다음 평화정착을 이뤄 한반도 통일을 위한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조성하여 사드의 한국배치가 필요로 하지 않은 방향으로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 장기적으로 남과 북이 주축이 되어 양보와 타협을 기본으로 한 경제협력을 통해 통일로 가는 길에 유리한 안보환경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남과 북이 공동으로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한국정부는 사드배치를 보류하는 통 큰 결정을 하고 남과 북이 주축이 되어 남북관계의 복원에 노력하며 동시에 남북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중국을 설득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대화로 유인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동북아 중심에 위치하고 G-2 시대에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여 있는 보잘 것 없고 힘없는 ‘새우’가 아니라 이젠 중견국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때이다.

한국은 이제 중견국가로서 대미, 대중 균형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서 한국의 국익을 증진하면서 미.중간 가교(架橋, bridge) 역할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G-2 시대에 한국의 역할은 미.중간의 대결로부터 미.중간 공동 협력과 강대국간 이익의 조화를 이끌어 내어 동북아 평화안보협력체 구축하는데 한국의 가교 역할을 기대해본다. <끝>

 

곽태환 박사 (미 이스턴 켄터키 대 명예교수/전 통일연구원 원장) 
 
   
 
미국 클레어먼트 대학원 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1969). 
미국 이스턴 켄터키 대 국제정치학 교수(1969-1999);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소장(1995-1999); 통일연구원 원장(1999-2000). 
현재 경남대 석좌교수, 미국 이스턴 켄터키대 명예교수, 한반도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한반도 중립화통일협의회 이사장, 통일전략연구협의회 (Los Angeles)회장. 
30권의 저서, 공저 및 편저; 200편 이상의 학술논문출판; 
주요 저서: 국제정치 속의 한반도: 평화와 통일구상 (1999). 
공저: 한반도평화체제의 모색 (1997)등; 영문책 Editor & Co-editor: North Korea and Security Cooperation in Northeast Asia (Ashgate, 2014); Peace-Regime Building on the Korean Peninsula and Northeast Asian Security Cooperation (Ashgate, 2010)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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