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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성완종, 1억 전달 전 홍준표와 직접 만났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4/14 10:38
  • 수정일
    2015/04/14 10:3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등록 :2015-04-14 01:27수정 :2015-04-14 10:14

성완종-홍준표
성 전 회장 측근 “전달 직후 성 회장이 홍 지사에 확인 전화했다 들어”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지난 2011년 6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 선거를 준비하던 홍준표 후보(현 경남지사)에게 경남기업 전 고문 ㅇ씨를 통해 1억원을 전달하기 전 홍 후보를 직접 만났었다고 성 전 회장의 측근 인사가 밝혔다. 이런 사실은 성 전 회장과 홍 후보가 자금 지원 문제를 사전에 협의한 뒤에 ㅇ씨를 통해 1억원이 전달됐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서 검찰 수사가 주목된다.

 

성 전 회장의 측근인사는 13일 “여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 국면에서 성 전 회장이 서울 여의도의 엠호텔에서 홍 지사를 만났다”며 “그 다음날엔가 성 전 회장 지시로 ㅇ씨가 의원회관으로 홍 후보를 찾아가 쇼핑백에 든 현금 1억원을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호텔에 만나러 갈 때 성 전 회장의 수행비서도 동행했다”며 “돈이 전달된 직후 성 전 회장이 직접 홍 지사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홍 지사는 그러나 지난 10일 기자간담회에서 “2011년 당대표 선거 때 전국을 순회하면서 서산 태안 지역 당원을 상대로 간담회를 할 때 성 전 회장을 본 일이 있다”면서도 “그 외에는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홍 지사는 또 13일 오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다른 분들은 대선 관련 자금인데 유독 저만 당내 경선 자금이고 또 저만 직접 주지 않고 한사람 건너서 전달했다고 합니다. 당도 다른 고인이 한나라당 경선에 다른 경선후보도 많은데 잘 알지도 못하는 저에게만 자금을 전달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라고 자금 수수 의혹을 부인했다. 홍 지사의 반론을 듣고자 13일 저녁 전화를 여러 차례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성 전 회장이 남긴 메모에 등장하는 8명 가운데 유일하게 홍 지사의 경우에는 자금 전달자로 거명되는 제3의 인물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홍 지사 사건은 성 전 회장의 메모에 등장하는 다른 금품 수수 내용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종훈 최혜정 기자 cjh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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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하순 남북해외 대표자회의 추진한다”


<광복70주년 릴레이 인터뷰⑫>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수정)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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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13  16:4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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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70돌 준비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은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과 9일 6.15남측위원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달 1일, ‘광복 70돌, 6.15공동선언발표 15돌 민족공동행사 준비위원회’(이하 광복70돌 준비위원회)가 발족돼 6.15민족공동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성사 여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광복70돌 준비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은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9일 오전 서울 서대문 소재 6.15남측위원회 사무실에서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우리는 꼭 성사시켜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야 한다”면서 구상의 일단을 밝혔다.

이창복 의장은 “이달 하순 중국 심양(선양)에서 남북해외 대표자회의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 계기를 통해서 구체적인 방안이 논의 될 것”이라고 전제하고 “특별히 북측 대표단 100명 정도, 해외 대표단 100명, 남측 대표단 500명 정도로 대표단을 구성할 구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2년 전부터 금년을 바라보면서 ‘6.15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단 회의’ 등을 통해서 6.15와 광복절, 10.4 공동행사를 하자는 것에 의기투합해서 쭉 실천해왔다”며 “6.15공동행사를 성사시키는 데 가장 유리한 조건이 서울에서 개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결과로 우리가 제안까지 하기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서울에서 남북해외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치를 예정인 6.15민족공동행사는 14일 전야제 형식의 문화행사와 15일 오전 기념식, 오후 부문별 교류행사, 저녁 광복 70돌 학술토론회 등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그는 “북측도 ‘급’이 되는 사람이 와서 청와대도 가야 한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 평양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5주년 민족통일대축전 입장식 모습. 10만 평양시민의 환호 속에 남북해외 민간대표단은 물론 남북 당국대표단도 함께 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는 특히 “북측 대표단 체재비를 남측 대표단이 분담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종전과 다른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초청자의 입장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밝혔다.

 

통상 북측의 대규모 대표단이 방남할 경우 정부의 남북협력기금 등을 지원받았지만, 남북 당국 간 관계가 원활치 않고 언론 상황 등 우리 사회의 보수화 경향을 감안할 때 자체 경비로 북측 대표단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남측 대표단이 상당 부분을 부담하게 되고, 십시일반으로 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라며 “우리 능력에 맞게 대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민간통일운동이 정권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며 “정권으로 하여금 정책을 변화시키고 국민의 여론을 수렴해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나가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못했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6.15남측위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복70돌 준비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6.15남측위원회를 초월해서 더 폭넓은 인사와 대중들이 함께 참여하기 위해서 준비위원회를 새로 발족시켰다”며 “준비위원회가 이 행사 전반을 책임지고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지난 1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광복70돌 준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에서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이  발언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나아가 “이번에 1차로 조직됐고, 조직재편을 확대해서 곧 발표하게 될 것”이라며 “조직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훌륭한 개인을 못 모신 결함이 있어 개인 차원의 유능한 분들을 영입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6.15공동행사 성사 여부에 대해서는 “정부가 가능한 한 빨리 방침을 결정해주길 바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며 “정부가 주도하는 광복절 공동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려면 민간이 주도하는 6.15공동행사에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6.15공동행사가 불발되면 광복절 공동행사도 쉽지 않을 것”이라며 8.15 광복절 공동행사에 대해서도 “정부는 정부의 역할이 있고, 민간은 민간의 역할이 있어서 상호 보완하는 방향에서 이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특별히 “우리들이 이번 기회에 꼭 이루어지고 싶은 것이 6.15해외측위원회 위원장의 문제”라며 “일본과 미국의 그 지역을 대표하는 위원장이 공동으로 해외측위원장으로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물론, 6.15남측위원회가 해외측 운운은 적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8천만 민족이 함께하는 행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 조직의 완결성을 위해서라도 해외측 조직정비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

 

   
▲ 2013년 7월 중국 선양에서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단 회의가 열렸다. 왼쪽부터 김완수 6.15북측위 위원장,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곽동의 6.15해외측위 위원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6.15해외측위원회는 문동환.곽동의 공동위원장 체제로 운용되다가 문동환 위원장이 2009년 6.15해외측위 내부 사정과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한 뒤 곽동의 위원장 단일체제로 유지되고 있다.

 

그는 “금년은 분단 70년과 광복 70년인데, 6.15공동선언 발표 15돌, 6.15민족공동위원회가 조직된 지 10년이 되고,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됐다”며 “분단상태에 머물러 있고 외교환경도 더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 돼버렸지만 이럴 때 일수록 남북관계를 극적으로 변화시킬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또한 “우리 의지를 한데 모으고, 미래에 대한 구상을 밝힘으로써 국민들이 희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며 “국민과 함께, 대중과 함께, 대중의 힘을 모아서 우리의 추동력을 강화하고 강화된 추동력에 근거해 정권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6.15공동행사부터 시작해서 8.15, 10.4로 쭉 치러나가는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8천만 민족의 통일의지를 고양시키는 확실한 계기가 되도록 할 것”이라며 “그와 동시에 남남갈등도 해소시키는 방향을 견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재야에 오랫동안 몸담아 온 이창복 대표상임의장은 '마음'과 '가슴'을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오랫동안 재야에서 민주주의와 통일운동에 앞장서다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뒤 다시 통일운동 일선에 선 그는 “남북 동포와 형제들이 서로 화해하고 마음을 주고받고 어울리려고 하는 마음이 증폭될 때 평화정착도 통일도 가능할 것”이라며 “뜨거운 가슴으로 통일문제를 바라보고 추진시켜야 하는데 기능적, 정책적 측면에서만 바라본 것은 아닌가 싶다”고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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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가족 형제자매, '너에게 보내는 편지'...

"다음 생에도 내 오빠로"... 광장 나온 희생자 형제자매

세월호 유가족 형제자매, '너에게 보내는 편지'... "참사 1년, 무엇이 바뀌었나요"

15.04.12 20:53l최종 업데이트 15.04.12 21:03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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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로 띄우는 편지... 얘들아 보고 있니' 12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 유족 형제자매가 여는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부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열렸다. 사진은 참가자들의 모습.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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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광장은 향 냄새로 가득했다. 세월호 유족 농성장이 있던 자리에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분향소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영정사진이 빼곡히 붙은 분향소 뒷편 광장에 유가족 형제자매들이 섰다. 세월호 참사 후 1년, 이들 말대로라면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은 지금, 희생자 형제자매들 마음을 처음 표현하는 자리"였다.  

[3시 정각] 하늘로 편지를 띄운다, 돌아오지 못할 너에게 

이날 열린 추모행사의 제목은 '너에게 보내는 편지(부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발신인은 '세월호 희생자 형제자매'와 온라인 사전 신청을 한,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행사 진행자는 "유족 형제자매들은 아직도 언론에 노출되는 걸 두려워 한다"며 "너무 가까이서 형제자매들을 촬영하거나 말을 거는 것은 피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후 3시, 형제자매들과 일반시민을 합쳐 총 48명이 피켓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섰다. 이순신 동상 앞에 ㄷ자 형태로 서되, 행인들이 사진을 잘 볼 수 있도록 바깥 도로 방향으로 섰다. 피켓에는 유족 형제자매들이 다시는 볼 수 없는 형·누나·오빠·동생에게 쓴, 눈물 젖은 편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오빠, 다음 생에도 나의 오빠로 태어나 줘. 그 땐 지금처럼 후회하지 않게, 더, 더욱더 잘해줄게!" 
- 2학년 5반 고 이진환 학생, 동생


"단비 언니, 언니가 없는 밤이 너무나 외로워. 세월호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저녁시간 밖에 없었는데, 그 시간도 빼앗긴 것 같아서 너무 화가 나. 사고가 일어난 후부터 매일은 아니지만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카톡 메시지 옆) 그 1이라는 숫자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내가 사춘기 핑계 대면서 말도 잘 안했는데, 언니가 먼저 다가와 줘서 너무 고마웠어. 너무 사랑해!"
- 2학년 10반 고 이단비 학생,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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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동생이어서 너무 좋았어"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사진은 고 유혜원 학생의 동생.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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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없어도 시간은 흐르고..."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사진은 고 권순범 학생의 유족.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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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내가 보낸 카톡 언제 읽을거야'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사진은 고 이단비 학생의 동생.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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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윤아, 깜비가 기다려... 빨리 와" 실종자 허다윤양의 언니도 다윤이에게 편지를 썼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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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아, 잘 지내고 있지? 널 너무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어서 너무 힘이 드네... 네가 옆에 있을 때 더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형이 누구보다 널 좋아하는 거 알거라 믿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언제나 내 동생이어서 고마웠고, 자랑스러웠어. 사랑한다."
- 2학년 4반 고 김호연 학생, 형


"수인아, 12년 동안 같이 지냈는데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네. 수인아. 니 몫까지 열심히 살고 니 몫까지 이모에게 신경쓰면서 살게. 그리고 네가 왜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게. 사랑한다 수인아."
- 2학년 7반 고 곽수인 학생, 사촌형
  

온통 "사랑한다", "보고싶다", "잘 지내"라는 안부인사로 채워진 편지였지만, 그 중에는 일반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들도 있었다. "저도 이런 큰 사고가 제 가족의 일이 될 줄 몰랐다, 외면하지 말아달라(2-1 고 김민희 학생의 언니)"거나, "노란색은 정치적 색이 아니라 기다린다는 의미다, 실종자가 모두 돌아올 때까지 '끝'이라고 하지 말아달라(2-6 고 권순범 학생의 누나)"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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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없는 대한민국 떠나고 싶어요, 누나 살려내요"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사진은 고 정예진 학생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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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색, 정치적 아닌 기다림의 의미"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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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제게 이런 일 일어날 줄은..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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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도 댓글 다 보고 있어요... 특례법 원하지 않아요"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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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 밝힌다고 동생이 돌아오진 않겠지만..."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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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페이스북과 뉴스 댓글 다 보고 있습니다. 너무 심한 말이나 근거 없는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대학 특례법 원하지 않아요. 우리 집엔 대학갈 사람도 없습니다. 단지 다시는 이런 일이, 당신들에게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섯살배기 아들이 '삼촌 어디갔냐'고, '왜 죽었냐'고 물어보면 전 뭐라고 해야 하나요?"
- 2학년 4반 고 김건우 학생, 누나


"진실이 밝혀지면 동생이 돌아오나요? 안전한 사회가 되면 동생이 돌아오나요? 저희는 그저 저희같은 아픔과 슬픔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싶은 거예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은 거예요. 그게 잘못된 일인가요?" 
- 2학년 3반 고 최윤민 학생, 첫째 언니
 

[3시 10분~3시 30분] 눈시울 붉힌 행인들... "가해자는 어디가고, 피해자만"

사진을 보는 행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리둥절해하며 광장을 지나가다 멈춰서서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상하다는 듯 위아래를 훑어보며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들 손을 잡고 지나가다가 멈춰서서 한참을 서 있는 여성도 있었다.

편지들을 읽으며 눈물을 닦던 안아무개(여, 36)씨는 행사를 위해 강원도 양양에서 3시간이 걸려 왔다고 했다. "진실이 밝혀져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한다"고 말한 안씨는 결국 행사 중간에 피켓을 들고 참가자들 옆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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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보는 행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리둥절해하며 광장을 지나가다 멈춰서서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상하다는 듯 위아래를 훑어보며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여성은 아들 손을 잡고 지나가다가 멈춰서서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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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친구에게 행사 내용을 설명하며 사진을 본 양아무개(24, 고려대 재학 중)씨는 "사실 한국인으로서, 친구에게 이런 일을 설명하는 게 창피했다"고 말했다. "그 커다란 배가 바다에 빠졌는데, 국가가 아무도 구하지 못하고 학생들이 다 빠져 죽었다는 게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함께 온 미국인 필립(24, 성균관대 교환학생)씨는 "뉴스에서만 접했지 이렇게 본 건 처음"이라며 "실제로 보니 더 비극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인 박근화(여, 27)씨는 사진들을 훑어보는 내내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하도 울어 눈 주변이 빨갛게 물든 박씨는 기자에게 "아이들이 잘못한 게 아니지 않냐, 잘못한 사람들은 다 어디 가서 숨어 있고, 피해자인 아이들이 나와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뭐라도 돕고 싶은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3시 35분] 풍물패 공연에 더욱 모여든 사람들... 이어진 침묵의 시간 

참가자들이 피켓을 드는 동안, 이들 뒤에서는 풍물굿패 '신바람'과 '우리마당' 등이 참여한 풍물 공연이 10여 분간 이어졌다. 한편에서는 직사각형 틀을 커다란 비닐로 감은 뒤, 비닐 위에 붉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오빠 진실을 밝혀줄게", "다음 생에도 보고 싶다"고 쓰는 문화 예술 행동도 펼쳐졌다. 

꽹과리·장구 등 커다란 풍물 소리에 등산복을 입은 등산객과 남녀 커플 등 행인들이 더욱 모여들었지만, 공연이 끝나자 이내 흩어졌다. 이후 광장에는 10여분간 정적이 흘렀다.

[3시 45분] "형제자매들의 슬픔 늦게 알아 죄송합니다" "손 잡고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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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을 너무 늦게 알아 죄송합니다" 행사 도중, 한 여학생이 종이를 들고 참가자들에게 인사했다. 종이에는 "형제자매분들의 슬픔과 고통을 늦게 알아 진심으로 죄송하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하겠다"라고 써 있었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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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45분. 조용한 광화문 광장에서, 갑자기 뿔테 안경을 쓴 여학생이 종이 한 장을 높이 들고 광장을 돌기 시작했다. 손에 든 A4용지에는 "형제자매분들의 슬픔과 고통을 늦게 알아 진심으로 죄송하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하겠다"라고 써있었다. 여학생은 유족 형제자매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종이를 들어 보이며, 한 명 한 명 눈을 맞춘 뒤 고개 숙여 인사했다. 굳은 표정의 참가자들도 이에 고개 숙여 화답했다.   

한 대학원생은 이들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쓴 뒤 같은 방식으로 광장을 돌았다. 추모행사를 지켜보던 대학원생 김아무개씨는 "훨씬 더 많은,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어"라며 "얘들아 서로 손 잡고 같이 가자, 형제자매 동생들 사랑해"라고 하트와 함께 쓴 A4용지를 들어보였다. 마스크를 쓴 참가자들은 따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짓으로 그에게 화답했다.

[4시 16분] 네가 떠난 시간, 우리도 침묵을 접을게 

"지금은 아이들이 떠난 시간, 4시 16분입니다. '너에게 보내는 편지' 피켓 퍼포먼스를 종료합니다.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켓을 든 지 한 시간이 넘은 시간, 고 최윤민 학생의 언니 최윤아(24)씨가 추모행사 종료를 선언했다. 행사 시작 당시 48명이던 참가자는 계속 늘어나 70명이 돼 있었다. 이어 참가 시민들과 유족 형제자매들이 모여 간담회를 열었다. 마이크를 잡은 최씨는 "사람들은 보통 세월호 참사 피해자로 생존자만을 떠올리지만, 유족 형제자매들도 많이 아프다"며 "그 마음을 알리고 싶어서 이런 행사를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참가자들에게, "행사 중간에 풍물놀이 공연했을 때 사람들 관심과 시선이 쏠리는 것을 느끼지 않았냐"고 물은 뒤 "그게 바로 사고 이후 저희에게 쏟아진 관심이었다, 그러나 풍물패가 떠났을 때 느껴진 허전함과 공허함처럼, 저희들도 같은 허전함을 느끼며 요즘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 날 참가자들은 다양한 연령대였지만, 특히 10, 20대 젊은 층이 많았다. 20대 중반의 남성 참가자는 "세월호 사건 터졌을 때 저는 군인이었고 지금은 전역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며 "저기(청와대) 높으신 분들은, 잊으라고 강요하진 않지만 잊혀지도록 놔둔다는 게 너무 화난다"고 말했다. 

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는 "제가 들고 있던 피켓은 고 이장환 친구(의 동생 편지)였는데, 제가 장환이가 잠시 되어 본 느낌이었다"며 "유족이 된다는 건 이 시대 가장 큰 짐인데 오늘 짊어져 보니 (그 짐을) 같이 들 수 있겠다고 느꼈다, 제 스스로 작은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고마워했다. 

최윤아씨는 이후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사실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두렵다, 셔터 소리만 들려도 누가 날 사진 찍는가 싶어 깜짝깜짝 놀란다"며 "(그럼에도 유족 형제자매들이 나선 것은) 부모님들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모님들께서 행진하고 삭발하고, 어디까지 하실지 몰라 겁이 났다"는 설명이었다. 

최씨는 이날 행사 참가자들에게 특히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저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어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너무 많이 봤다"며 "왜 정치인들이 거짓말하고 약속 안 지키는 게 당연한가, 어릴 땐 모두 잘못된 거라고 배우지 않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씨는 "동생을 잃기 전까지 저는 '착한아이 증후군'에 걸린 것 마냥 어른들 말이면 다 옳은 거라고 봤다"며 "동생을 잃고서야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여러분은 저처럼 너무 큰 걸 잃기 전에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다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추모행사는 4시 40분께 참가자들이 모두 박수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 

○ 편집|박순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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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초등학생들을 보호하는 일본시민들

‘안심하고 등교하라, 호위무사가 지켜주마’재일동포 초등학생들을 보호하는 일본시민들
요코하마=이계환 기자  |  k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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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12  23:2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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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 요코하마 역전에 나타나다

   
▲ 재일동포 초등학생들의 ‘입학을 축하하는 응원단’이 4일 아침 일본 요코하마 역전에서 둥글게 둘러서서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재일동포 초등학생들의 등교를 보호하는 ‘호위무사’(護衛武士)가 지난 4일 아침 일본 요코하마에 나타났다.

이른바 재일동포 초등학생들의 ‘입학을 축하하는 응원단’(응원단). 이들 ‘응원단’은 주로 일본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이날은 일본에 있는 민족학교들이 일제히 개학을 하고 신입생들이 입학하는 날.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가 있는 요코하마역 앞 다카시마야(高島屋) 건물 앞에 오전 8시 30분경 30여 명의 ‘응원단’이 삼삼오오 모였다.

이들은 요코하마 YMCA 회원들 및 전문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북일 국교정상화를 지지하는 단체 성원, 평화헌법을 수호하는 단체 성원, 생협 담당자, 다문화교육네트워크 담당자, 국제교류재단 성원, 고등학교 현직교사, 시립도서관 사서 그리고 재일동포 2세를 남편으로 둔 릿교대학 박사과정에 있는 호주 여성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30여 명의 ‘응원단’은 한국의 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처럼 주황색 리본을 왼쪽 가슴에 달아 동질감을 표시하고는 다카시마야 건물 앞에 둥글게 둘러섰다. 1년에 한 번 만나고 또 올해 경우 반 정도는 새로운 참가자라 서로 인사와 소개를 하기 위해서다.

오렌지색 리본 달고 거리 행진

   
▲ ‘응원단’이 주황색 리본을 단채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를 향해 도보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자기소개에 이어 이날 행사와 관련한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자 ‘응원단’은 주황색 리본을 단채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를 향해 도보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응원단’은 20분에 걸쳐 자유롭게 행진을 하면서 새로운 이야기, 못다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이 행진의 유래는 이렇다. 2002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 북한당국이 일본사람을 납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실 인정’과 ‘진상 규명’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납치 문제’만 불거져 일본열도가 분노로 들끓었다.

일본인들은 연일 반북시위를 개최하고 재일동포들에게 위협을 가하자, 재일동포들은 공포에 떨고 기가 죽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은 일본사람들의 위협과 해코지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이에 양심적이고 뜻있는 일본사람들이 나섰다. 이들은 골목골목마다 지켜 서서 재일동포 학생들이 학교까지 무사히 등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같은 전통이 벌써 12년이 지나 올해가 13년째다. 그때 초등학교 1학년이던 학생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쳐 올해 12년 만에 첫 졸업을 했다.

손님맞이 청소하는 학생들

   
▲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 학생들이 손님맞이를 위해 빗자루를 들고 교문 계단을 청소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응원단’이 학교에 도착하자 어린 학생들이 손님맞이를 위해 빗자루를 들고 교문 계단과 운동장을 청소하고 있었다.

입학식 날인 이날은 휴일인 토요일이라 학부모는 물론 모든 가족이 참석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눈에 띄고 형제자매들도 보였다.

올해 입학 신입생은 모두 11명. 학교 측은 올해 입학생 수가 줄었다고 밝혔다. 전체 학생은 70여명 정도.

   
▲ 가족사진을 찍고 있는 김진주(6) 학생 일가족.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재학생이 신입생들에게 이름표와 꽃을 달아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축제 분위기인양, 학교건물 현관에서 신입생 가족들이 입학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앞서 재학생 선배가 신입생들 한 명 한 명에게 이름표와 꽃을 달아주었다.

신입생들은 선배가 달아준 이름표와 꽃에 기뻐하며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가족사진을 찍고 난 김진주(6) 학생에게 입학 소감을 묻자 “긴장하고 있어요. 하지만 기뻐요”라고 답한다.

   
▲ 응원단의 깃발 호위를 받으며 선생님과 함께 입학식장으로 들어가는 신입생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그 사이에 응원단은 운동장에서 ‘입학 축하해요’라고 한글과 일본어로 쓰인 깃발을 조립했다.

이윽고 깃발 조립이 완성되자 응원단은 신입생 입학식이 열리는 체육관 입구 길 양옆에 깃발을 들고 마치 ‘호위무사’처럼 우뚝 선 채 또는 ‘수호천사’처럼 한없는 웃음을 머금은 채 신입생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치 ‘신입생들이여 우리가 보호하고 있으니 마음 놓고 등교하세요’ 하는 것처럼.

신입생이 주인인 입학식

   
▲ 입학식장 광경.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응원단이 입학식 모든 과정을 호위하듯 입학식장 맨 뒤에 깃발을 들고 앉아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오전 10시경 체육관 내에서 2015년도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 입학식이 진행됐다.

무대 연단은 꽃장식으로 둘러싸여 있고 계단식으로 된 무대에는 모두 11개의 의자가 있어 이날의 주인공들이 앉을 자리가 준비돼 있었다. 무대를 바라보고 왼쪽엔 재학생들, 오른쪽엔 학부모들이 자리잡았고, 맨 뒤엔 ‘응원단’이 마치 오늘 입학식 전 과정을 보호하겠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깃발을 들고 앉아 있었다.

이윽고 신입생들이 화환으로 된 터널을 지나 재학생들이 뿌리는 색종이 가루를 맞으며 학부모 등 참가자들의 세찬 박수 속에 보무당당히 입장해 단상에 올랐다.

   
▲ 이날의 주인공인 신입생들. 무대 중앙에 자리잡았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한 신입생이 교장 선생님한테 교과서 선물을 받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날의 주인공인 11명의 신입생들이 무대 한가운데 자리한 가운데 입학식이 진행됐다.

개식 선언에 이어 축전 소개, 학교장 인사, 신입생 호명, 교과서 전달, 각계각층이 보내준 선물 전달 그리고 재학생 대표의 축하의 말과 신입생 대표의 입학 결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신입생들을 주인으로 놓고 진행됐다.

신입생들은 호명 소개 때 자기 이름이 불러질 때마다 한 명씩 일어나 “예”하고 크게 소리쳤으며, 교과서와 선물이 전달될 때마다 한 명씩 나와 내용물을 받곤 무대 아래 가운데 서서 참가자들에게 큰절을 하고 자리로 빙 돌아가는 수고스러움(?)과 활달함을 보였다.

   
▲ 재학생 대표들이 신입생들에게 꽃을 선물하자 장내는 참가자들의 환호 속에 절정에 달했다.[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기념촬영. 신입생들이 깃발을 든 '응원단'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특히, 입학식 말미에 재학생 대표들이 연단에 올라 신입생들의 입학을 축하하며 비닐에 싼 조그마한 꽃을 선물하자 장내는 참가자들의 환호 속에 절정에 달했다.

새로운 담임선생님 소개는 한국이나 재일동포에게 있어 그 호기심은 마찬가지인 듯. 입학식 말미에 교장 선생님이 8명의 교사들과 함께 연단 아래로 나오자 식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교장 선생님이 각 학년 담임선생님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소개하자 학생들의 박수와 환호, 학부모들 참가들의 호응에 입학식은 피날레를 장식했다.

기념사진 촬영시간이 되자 신입생들은 선생님들, 학부모들 그리고 ‘응원단’과 함께 차례로 사진을 찍으며 이날의 주인공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응원단’, 5월 운동회 때도 참가할 것

   
▲ 입학식 후 ‘응원단’과 학교 교장, 이사장과의 간담회가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입학식을 마친 후 ‘응원단’은 학교 응접실로 이동해 학교 교장, 이사장과의 간담회가 진행됐다.

만물이 소생하는 4월 초순, 학교엔 온갖 꽃들이 활짝 피는 날 재일동포 학생들과 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일본시민들로 구성된 ‘응원단’과의 인연은 이렇게 한 번도 빠짐없이 13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한편, ‘응원단’은 5월에 열리는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 운동회에도 참가하며, 그 뒤 뒷풀이를 할 예정이다.

<미니 인터뷰> “응원단 운동은 ‘모든 운동의 입구’”
- OR란 이니셜로만 표기해 달라는 일본시민(여, 55세) ‘응원단’

□ 기자 : 응원단엔 언제부터 참가했나?
■ OR : 처음부터다. 2003년부터다.

□ 참가 이유는?
■ 일본사람으로서 재일동포의 차별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재일동포들에게 왜 차별이 있는지 혼자 공부해왔다. 일본사람으로서 식민지 역사에 대한 기초교양과 지식을 가져야 하는데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조선학교 관련 모임에 참석했다. 그게 계기가 되어 응원단에 참가하게 되었다.

□ 응원단 운동의 의미는?
■ 이 운동은 아주 쉽다. 어려운 게 없고 그냥 참가하면 된다. 입학식을 보러오고 축하의 마음으로 오면 된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 다른 운동으로, 조금 높은 차원의 운동으로 이어가면 된다. 매년 이런 식으로 참여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응원단 운동이 다른 ‘모든 운동의 입구’로 이해하면 된다.

□ 앞으로 계획은?
■ 재일동포 차별문제를 모르는 일본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재일동포 2세, 3세, 4세, 5세에 걸쳐 차별문제가 계속 있는 한 그 문제를 계속 고민하는 일본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재일동포 차별을 없애는 일을 할 것이다.

(후기 : 일본시민들도 사상, 정견의 자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터뷰이(interviewee)인 이 일본인 여성은 이름은커녕, 본인을 특정 지을 수 있는 사진도 삼가해 달라고 했다. 다만 이니셜은 가능하다고 했다. 일본시민들 중에는 이처럼 재일동포와 ‘우리학교’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같은 어려움 때문에 집회에도 참가하지 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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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한홍구 "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
 
 

과거는 오늘의 교훈이다. 

'걸어 다니는 현대사'라 불리는 역사학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냉철한 비판에는 지난 역사의 교훈이 담겨 있다. 침묵하기를 강요하는 현실에서 기형적 근대화 산물인 '종북'이라는 낙인찍기는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폭식투쟁, 냄비폭발물 투척, 언론의 마녀사냥 등 극단적으로 과잉된 행동이 '애국(愛國)'이라는 이름으로 집결되는 데는 분명 왜곡된 담론이 수용된 결과다.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터. 새도 좌우의 양 날개가 균형을 갖춰야 고공비행을 할 수 있듯 우리 사회의 왜곡된 좌와 우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때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야당성을 잃은 진보와 합리적 보수의 부재를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 정말 큰 문제는 진보가 약한 게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보는 충분하진 않지만 많이 복원됐다. 그러나 합리적인 보수는 복원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 동의하는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어야 한다."

돈과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슬프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물질만능주의, 즉 돈과 욕망의 지배 속에 살고 있다. 그는 룰을 강조한다. 

"'룰(rule)을 지키지 않으면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구나, 룰을 어기면 망하는 거구나'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룰을 지키는 놈이 바보가 된다. (중략) 대중들이 정당한 욕망을 가지는 것은 나쁘지 않다. 다만 그 욕망을 충족하는 방식이 적법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장발장은 빵 한 조각 때문에 19년 옥살이를 했다. 바로 그 유명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 이야기다. 가난한 것도 죄라는 한탄이 쏟아지고, 가난이 곧 형벌인 현재가 지금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최근 '장발장 은행'이 출범했고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겐 자베르의 잣대는 너무 가혹한 것 같다.

돈이 없어 벌금형을 받고도 감옥에 가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1년에 4만 명이 넘는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 시작할 때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병역 거부로 수용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몇 명이나 징역을 살고 있나?'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1600명이나 감옥에 있더라. 이들은 벌금 수십만 원이 없어 노역장에 간다. 그곳 하루 일당이 5만 원이다.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한가? 누구는 '황제 노역'이라 해서 하루 5억 원씩 깎아주고, 누구는 수십만 원이 없어 하루 5만 원씩 감옥살이하고…. 징역형에는 집행유예가 있어, 훨씬 무거운 죄를 짓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인권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세심한 눈길이 필요하다. 구치소 강연을 많이 다닌 서해성 작가와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등이 이 문제를 제기했고 홍세화 선생님, 김희수 변호사, 도재형 교수 등 많은 전문가가 발 벗고 나섰다. 나는 그냥 이름을 올린 정도다. 우리 벌금 체계가 재벌이나 날품팔이, 실업자, 기초생활자나 다 똑같이 벌금을 매긴다. 이건 평등이 아니다. 소득에 따라 벌금도 차등을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 조선시대 학자 한백겸 선생의 14대손, 한치응(韓致應) 선생의 7대손, 독립운동가 한기악 선생님의 손자, '일조각(一潮閣)' 창업주이자 언론인 한만년 선생의 4남, 교육자 유진오 선생의 외손이다. 명문가 집안 출신이라, 어렸을 때 교육환경도 남달랐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하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아버지가 출판사를 했는데, 상업적으로 큰 출판사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학술서적에 있어서는 권위가 있었다. 특히 한국사 분야는 거의 독점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책밖에 없어 책과 친숙하게 지냈다. 물론 표지나 목차 정도지만, 중고생 때부터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봐야 할 책을 다 봤다. 우리 세대 전체를 놓고 봐도 지금에 비해 그때가 청소년 입장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기에 좋은 시절이었다. 나는 한 10살 때쯤부터 사학자(史學者)가 되고 싶었다. 대한민국에서 10살 때 하고 싶었던 것을 지금까지 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역사가 재밌었고, 의미 있는 일도 많이 할 수 있다.  

- '걸어 다니는 한국 현대사'라 불리고,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일성 전문가'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금기다. 김일성을 연구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만 30살이 안 돼 미국을 갔는데, 그때까지 공부하면서 느낀 책임감 같은 게 있었다. 사실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보다 우리 또래가 현대사를 먼저 공부했다. 서중석 교수는 나보다 11년쯤 윗 학번인데, 이분이 학교 졸업 후 <신동아> 기자로 오래 있다 대학원을 들어왔다. 이보다 앞서 대학원에서 현대사를 해야 한다고 왔다갔다 설치고 다녔었다. 80년대엔 현대사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니, 현대사에 대한 수요가 폭발할 때였다. 당시 젊은 나이였지만, 여기저기 강연을 다녔다. 1987~88년 무렵엔 내가 어디 가서 무슨 얘기를 하든지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항상 "김일성이 진짜냐, 가짜냐?"였다. 이 질문을 받아보지 않은 적이 없다. 흔히 '주사파'라고 불리는 집단도 이보다 2~3년 전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북한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번질 때였다. 그때는 '북의 지도자 김일성이 진짜냐, 가짜냐'가 절박하게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우리 사회에 대한 절절한 호소력이 분명하게 있었다. '북한을 추종한다'는 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말이 안 되지만, 북에 대한 정당한 관심이었다. 그래서 김일성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른바 '북한바로알기운동'이라는 게 적극적으로 일어났는데, 그에 앞장섰던 사람으로 박사논문에서 '김일성은 도대체 누구며, 항일무장투쟁은 무엇이고, 또 이것이 분단된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 

- 주간지 <한겨레21>에 2001년부터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를 연재하며 한국 현대사의 금기를 많이 고발했다. 어조가 굉장히 강했는데, 어떤 계기로 쓰게 됐나.  

처음에는 현대사를 대중화하는 역할을 했다. 내가 민청련(故 김근태 상임고문이 초대 의장을 지낸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약칭) 선전국 출신이라 대중화에 책임감이 있었다(웃음). 우리 현대사에서 꼭 짚어야 할 주제를 대충 50개 정도 뽑아서 연재를 시작했는데, 몇 번 연재하다 보니 그때그때 발생하는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생겼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다 역사적인 맥락이 있고, 역사가 왜곡된 부분도 많다. 

미국 유학 후 돌아오니, '호주제 폐지' 문제가 한참 논쟁이었다.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토론자들이 TV 토론회에서 호주제와 관련해서 미풍양속이 어쩌고저쩌고하더라. 그런데 여성 쪽 토론자가 이 부분에 대해 방어를 잘 못 하더라. 호주제가 무슨 미풍양속이냐. 이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대표적인 친일 잔재다. 이런 건 박살을 내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었지만, 시시각각 사건이 터지며 논쟁거리가 되다 보니 민족문제, 친일파문제, 민간인 학살 문제 등 50가지 주제에 대해 차근차근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때그때 벌어지는 현상을 역사적으로 풀어서 설명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또 그런 요구도 생겼다. '시민사회에 내가 이걸로 기여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연재했다. 주위에서 걱정도 많이 했지만,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왔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말을 세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인데, 내가 이분들과 친하게 지냈다. 주간지에 몇 번 글을 쓰자, 그분들이 "한 박사, 그렇게 글 써도 됩니까. 조심해야 하지 않습니까?"라며 "몸조심하라"고 하더라.(웃음)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로 투고한 글을 묶은 책 <대한민국史>(한겨레출판사 펴냄)가 2008년 국방부 불온서적으로 지정돼 논란이 있었다. 그때 기분이 어땠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한 게 당시 내 책이 처음이었는데, 요즘은 책이든 온라인상에서든 이런 관점에서 쓴 글이 많아졌다. 당시만 해도 칼럼니스트 조갑제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조선일보사 펴냄)는 박정희에 대해 '백마 타고 온 초인', '고독한 철학자' 등으로 평가하던 분위기였다. 그런데 내가 박정희의 젊은 시절을 기회주의자라고 해석한 것이 대중들에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은 사실 한발 늦은 학문이다. 다른 학문에 비하면 현실 대응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나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현실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나름대로 재밌게 시도해볼 수 있었던 것이 <대한민국史>였다. 

 

ⓒ프레시안(최형락)

불온서적으로 지정됐을 땐 한국 민주화의 취약성, "아! 세상이 아직 다 안 바뀌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재밌었던 건, 국방부 불온서적 지정으로 책이 훨씬 많이 팔렸다는 점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대한민국 史>가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데에는 약간의 비화도 있었다. 당시 군대에서 후배 대학생들이 책 보내주기 운동을 하면서 추천도서를 선정했는데, 그 도서 전부 금서가 됐다. 권정생 선생의 동화책이 왜 금서가 돼야 하나. 그런데 그 운동을 한 친구들이 조금 NL 쪽에서 학생운동 하던 친구들이었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좌파들이 쓴 책이 오히려 불온서적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민주정책연구원 우석훈 부원장, 동양대 진중권 교수 등이 쓴 책도 빠져 있더라. 그들 중 몇몇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국방부를 야유했고, 불온서적 필자들은 그들을 보고 '축에도 끼지 못한다'라고 낄낄대기도 했다.(웃음)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불온(不穩)으로 낙인찍거나, 검열과 통제를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벌어질 텐데, 되도록 이런 건 유쾌하게 넘어갈 필요가 있다. 물론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 민주사회에 불온이라는 말이 어디 있나. 불온한 것이 역사를 발전시켰다. 

- <대한민국史>에서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아니고 친일파에게 역으로 청산을 당했다. 식민지에서 해방됐는데, 식민국에 빌붙은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면, 정의, 상식은 어떻게 됐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일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고 했다. 친일파 청산 문제, 어떻게 하면 근원을 해결할 수 있나?

과거 청산은 과거의 영역에서 싸워서는 이길 수가 없고 이겨도 무의미하다. 나는 과거 청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과거 청산을 잘하는 길은 현재(現在)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바로잡음으로써 과거에 잘못된 부분까지 역사적인 의미에서 바로 잡히는 것이다.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결국은 과거를 지배하게 된다. 지금 친일파는 현실적으로 다 죽었다. 그러나 친일파의 후예들이 여전히 현실을 잡고 있다. 친일파를 찬양하거나 그리워하거나 고마워하는 태도가 지배적인 위치가 되지 않게 하려면, 현재가 바뀌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민주화되면 민주화 된 것으로써 친일문제를 청산할 수 있다. 그래야 뒤늦게나마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에게 "늦었지만, 이제야 좋은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친일문제는 현실과 동떨어져서 개혁하거나 청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민주주의를 잘하면 친일문제를 제기할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를 하려면 친일파, 그리고 그 후손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를 바꿔야 하는데 이것이 민주화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구를 그런 사람들의 손에 맡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국가란, 양면적인 성격이 있다. 약자의 보호기구이면서도 가장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인권 탄압을 할 수 있는 것이 국가다. 극악한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살인하면, 몇십 명이 죽는 것이지만 국가는 몇십만 명을 죽인다. 단위 자체가 다르다. 이런 국가를 유영철보다 나을 게 없는, 더 흉악한 이들에게 맡겨둬서는 안 된다. 그놈들이 국가를 장악하는 과정이 바로 민간인 학살이었다. 수십만 명을 죽이며 힘의 불균형을 만들어 지배했는데, 그나마 우리가 민주화해서 턱밑까지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 문제의 해결은 과거로 돌아가 친일문제를 파헤쳐 승부가 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바꿔 독립투사들이 꿈꿨던 세상을 만들어야, 처절히 죽어간 독립투사들에게 "죄송합니다. 근 70년 걸렸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청산 작업을 했다면, 아주 관대하게 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을 밀고하고 체포하고, 학살한 놈들 빼고는 웬만한 건 다 봐줘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바로 이런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다는 거다. 이런 놈들이 민족적 양심을 가진 합리적 보수들까지 다 잡아 죽인 거다. 합리적 보수의 씨가 마른 이유는 바로 악질 친일파가 합리적인 보수를 빨갱이로 몰아 처단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조차 빨갱이란 소리를 들었다. 장준하 선생 같은 극우파가 왜 재야의 원조가 됐겠는가. 친일파가 양심적인 보수를 몰아냈기 때문이다.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잡혀간 사람들도 좌파가 아니라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파였다. 해방 직후, 좌파 대부분은 북으로 넘어가고 5.10선거에는 아예 참여하지 않았다.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파들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세울지'를 고민하며, 공산당에게 넘길 수도 친일파에게 넘길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공산당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개혁해야 되고 개혁을 하려면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친일파가 진짜로 위기감을 느끼고 이들을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1946년 백범을 쏴 죽였다. 

이렇게 민족을 중시하는 진짜 보수들이 산산이 흩어지고, 이 중 일부가 재야인사가 된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나 장준하 선생은 해방 직후의 기준으로 볼 때 진짜 보수적인 분 아니었나? 문익환 목사는 70년대 카터(Jimmy Carter)가 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하니, 주한 미군 철수 반대 서명 운동을 했다. 리영희 선생은 국군 장교였다. 김수영 시인은 반공 포로였다. 이들의 우산 밑에서 진보가 컸는데, 원래 진보는 아니었다. 해방 후, 진짜 진보는 전쟁 때 다 죽거나 북으로 갔다. 그 이후 한국의 진보는 진짜 보수의 그늘서 컸다. 진짜 보수들이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젖을 물려준 거다. 진보는 진짜 보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 동의하는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어야 한다.

- 일간베스트(일베)나 서북청년단 재건 논란 등 금기시되어야 할 용어와 움직임이 다시 태동하는 것 같다.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왜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것인가.  

솔직히 이들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이다. '일베', '서북청년단' 같은 세력이 형성될 때 이에 기겁해 억누르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사실 보수여야 한다. 유럽도 극우파의 등장을 제일 경계한 이들은 좌파가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였다. 한국 사회는 합리적인 보수가 없다. 사실 친일 청산할 때 친일파에게 청산 당한 사람들이 합리적인 보수다. 지금 한국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구도가 너무 이상하게 형성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 정말 큰 문제는 진보가 약한 게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보는 충분하진 않지만 많이 복원됐다. 그러나 합리적인 보수는 복원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 동의하는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어야 한다.

지금은 80년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보수는 책을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진보는 책을 쓰고 읽긴 하지만, 자기들 책만 읽는다. 콘텐츠로도 비교가 안 된다. 해방 전 독립운동 과정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해 제 한 몸을 바친 보수인사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 이후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 보수인사, 찾을 수 있나? 참으로 슬프고 다시 되풀이돼선 안 될 일이지만, 진보진영에는 공동선을 위해 분신하고 투신한 열사들과 관련해 '별걸 다 기억하는 역사학자'라는 별명이 붙은 나도 다 기억 못 할 정도로 열사가 많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보수를 보라. 도덕적으로 존경할 만한 보수가 어디 있나. 콘텐츠를 갖고 방향을 제시하거나 이 사회가 위기에 빠졌을 때 헌신할 수 있는 보수가 없다. 보수 중에 병역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 없다. 진보진영은 수감생활로 차마 군대로 끌고 가지 못한 사람 빼고는 거의 다 의무를 마쳤다. 백낙청 선생은 미국 유학시절, 입대하기 위해 귀국했다. 하지만, 병역의 의무를 충실히 하기 위해 귀국했다는 보수는 없다. 

모택동의 아들도 한국전쟁에서 죽었고, 벤 플리트(Van Fleet) 미 8군 사령관 아들도 한국전쟁에서 죽었다. 미군 고위직 아들 중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만 35명이라고 한다. 한국 장관이나 장성, 국회의원 아들 중에서 한국전쟁에서 희생됐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있었으면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3페이지 쓰고 전쟁박물관에 별도 공간도 만들었겠지만, 없지 않나. 우리 사회에 진짜 보수가 없다는 증거다. 건전한 보수가 있다면, '일베 현상'이 나올 수 없다. 건전한 보수가 없어 진보에 밀리다 보니, 한다는 게 폭식투쟁 등 턱도 없는 조롱만 하는 것이다.  

- 합리적 보수를 다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보수들이 진짜 각성하고 깨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보수는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우리나라 보수의 역사를 스스로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보수의 계보는 김창룡이나 노덕술, 서북청년단 같은 자들이 아니라, 백범을 중심으로 또는 그도 아니라면 김성수나 방응모 같은 사람을 중심으로 재정리해야 한다. 김성수, 방응모가 친일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고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친일한 것도 사실이지만, 해방 직후 <동아>나 <조선>이 친일 신문이니 복간하면 안 된다'고 한 사람이 있는가. 

김성수는 친일한 게 맞지만 재평가해야한다. 제헌헌법 86조에 농지개혁이 명시되어 있다. 농지개혁은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자는 것이다. 조선 8도에서 땅을 제일 많이 가진 김성수가 제헌헌법을 만들 때 그 조항에 반대하지 않았다. 자기 땅을 다 뺏어서 나눠준다는데도 동의했다. 지금의 수구꼴통과는 격이 달랐다.  

친일 문제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장덕수는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학도병 나가라는 연설을 했다. 내가 "장덕수가 학도병 연설을 하고 젊은이를 군대로 내보내지 않았느냐"라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야 이놈아, 내가 그 연설을 들었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장덕수가 그 연설을 울면서 했고, 아버지와 학생들도 울면서 들었다는 거다. "장덕수가 진짜로 친일파여서 그런 연설을 했으면, 이철승 같은 깡패가 돌아와서 장덕수를 때려죽였지 가만뒀겠느냐"며, 학도병으로 갔던 학생들이 살아 돌아와 장덕수를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하시더라. 학도병 연설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학도병들은 장덕수를 아무도 친일파라고 보지 않았다는 거다. 

한국 역사의 복잡함 속에서 보수의 계보를 다시 세워야 한다. 인류 역사에서 진보를 실제 진보로 바꾸는 과정을 진보가 했나, 보수가 했나. 진보는 악을 썼고, 진보의 주장과 헌신적인 투쟁을 보면서 '세상이 바뀔 수밖에 없구나!'를 깨달은 보수가 그동안 범죄시 되고 탄압받던 진보의 주장을 제도화해 세상을 바꾸는 거다. 그런 역할을 보수가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큰 문제는 보수파가 자신들의 진짜 족보를 모른다는 거다. 지금 진보에서 장준하 선생에게 제사를 드리며 '재야의 큰 어른'이라고 하는데, 이 분은 사실 문창극보다 더한 보수다. 백범을 극우라고 얘기하지만, 장준하는 백범보다 훨씬 더한 극우였다. 백범의 수행 비서였던 장준하가 백범과 갈라선 이유는 백범이 남북협상에 대해 '빨갱이와 무슨 협상이냐'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우파가 뭐냐? 민족을 얘기하는 거다. 그런데 한국에는 글로벌스탠다드에 맞는 우파가 없다. 우리나라 우파는 '앞잡이 우파'다. 친일파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이들이 '반공'으로 갈아타면서 우파가 된 거다. 그러니 민족 대신 동맹을 얘기하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민족을 얘기하면 잡아 죽였다. 진보당 조봉암 선생이 그렇게 죽었고, <민족일보> 조용수가 그렇게 죽었다. 인민혁명당, 통일혁명당, 남조선해방전략당,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가 또 그렇게 죽었다. 한국의 자칭 우파들은 정말 주인으로서의 자격이 없고 자부심과 책임이 없다. 그러니 공동체를 위한 책임감과 헌신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합리적인 보수가 있는 곳에는 일베나 서북청년단이 설 자리가 없다. 국가기관이 대선에 개입해서 댓글을 다는데도 보수는 침묵하고 있다.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을 막는데, 진보와 보수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걸 비판하면 '종북좌파'가 된다. 이런 구도를 만들어야만 서식할 수 있는 게 일베와 서북청년단이다. 그러니 이 환경이 무너질까 봐 통일도 반대하는 거다.  

- 책 <특강>(한겨레출판 펴냄)에서 "그들이 공포의 정치는 놓아버렸지만 욕망의 정치를 더욱 강화한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욕망을 향해 뛰고 있다. 공포의 국가에서는 무서워서 뛰었다. 하지만 욕망의 정치 속에서는 거기에 세뇌되어 우리 스스로 쫓아가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어렵고 힘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현재 욕망의 정치, 돈을 숭배하는 마몬의 정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여실히 드러난 관피아의 문제 역시 욕망과 마몬의 정치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룰(rule)을 지키지 않으면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구나, 룰을 어기면 망하는 거구나"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룰을 지키는 놈이 바보가 된다. 그러나 욕망을 거세하려고 하면 안 된다. 우리가 다들 수도승은 아니지 않나. 다 잘 먹고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 아닌가. 대중들이 정당한 욕망을 가지는 것은 나쁘지 않다. 다만 그 욕망을 충족하는 방식이 적법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기회는 균등하게, 과정은 공평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고 했는데,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9회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을 담당했던 유현 피디가 한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했다. 자신은 '독재자 박정희가 정권 유지를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해서 간첩 만든 것을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보니 박정희의 더 큰 죄악은 부동산 투기에 올라타지 못한 채 그저 성실하게 일해 온 우리 숱한 아버지들을 무능력자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죄악을 어떻게 씻겠느냐'는 얘길 하더라. 정말 명언이다. 1966년도 국민학교 입학식 때 '회풍각'이라는 집 앞 중국집 짜장면이 30원이었다. 이번에 평당 4억 원에 팔린 한국전력 부지 땅값이 그때 30원이었다. 짜장면값이 100배, 150배 오르는 동안 땅값은 수백만 배 뛰어버렸다. 성실한 아버지를 무능력자로 만들어 버린 게 바로 부동산 투기다. 박정희가 한 건 바로 공포의 정치와 욕망의 정치다. 

- 2013년 10월 한 인터뷰에서 "자칭 진보라는 민주당과 지식인, 언론이 손을 놓고 있었으니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민생을 도외시한 채, 그들만 '민주화'가 된 것이다"라며 야당이 야당성(野黨性)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 야당이 걸어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중도'라는 개념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한국에서 중도라는 용어는 미래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이념 사이에서 양자를 아우른 제3의 길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겠다는 거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해 댓글을 다는데, 이런 짓을 하는 놈과 하면 안 되는 놈 사이에 중도가 어디 있나. 이건 아니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을 중도라고 포장하는 게 현재 한국 야당의 병폐가 됐다.  

그리고 야당이 '486', '친노'라고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가 '말만 세게 한다'는 거다. 물론 민주당이 새누리당보다는 더 많이 얘기하지만, 선거 때 비정규직이 누구를 찍나? 새누리당을 찍는다. 왜냐하면, 야당이 말로만 떠들기 때문이다. 절박함이 묻어나지 않는 연설과 떠들지 말자는 중도를 표방하는 놈들은 싸우지 않겠다는 거다. 이걸 우린 옛날에 '사쿠라(さくら, 사기꾼)'이라고 불렀다. 이게 무슨 놈의 중도냐. '한국 사회가 어떻게 나가야 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방향성의 중도를 얘기한다면, 그걸 누가 비판하겠는가. 이런 의미의 중도라면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는 대상이 될 수도, 서로 자극하는 경쟁자가 될 수 있다. 단테는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에서 중도를 표방하는 자식들에게 차려질 것이다"고 했다. 

한국 사회 대의정치는 정말 문제가 있다. 비정규직이 670만 명(2014년 통계청)이면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자가 국회에 적어도 2~30명은 있어야 하지 않나. 세상이 변하면서 호남이 가졌던 동력도 떨어졌다. 호남 출신 의원들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지역 토호들의 이익을 대변하다 보니, 야당이 비리비리 맥을 못 추고 있다. 야당성과 투쟁성을 회복하고 야당이 야당다워야 한다. 현재 호남은 하나의 지역이지만, 6·70년대와 80년대 호남은 그냥 하나의 지역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성격이 죽어버렸다. 호남 정치의 복원, 투쟁성의 복원을 해야 한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 임기가 2년 남았다.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박근혜 하는 걸 봐라. 저렇게 못하는데, 저걸 못 바꾸면 바보 아아니냐." 그런데 야당이 하는 걸 보면, (정권)을 바꾼다고 바뀔 리가 없다. 박 대통령도 '어쩜, 저렇게 못할 수가 있는지' 의문이다. 그런데 야당을 보면, 저들보다 훨씬 더 못한다. 박 대통령이 '축복받았다'라는 건 바로 이런 거다. 

 

 

 

ⓒ프레시안(최형락)


- 2004년부터 3년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밝힌 내용을 <한겨레>에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로 연재했다.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 '오욕'의 역사가 과거의 지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사법 체계와 판결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사법부에 절망스러운 부분과 희망적인 부분이 공존하고 있다. 절망만 얘기해서는 안 된다. 국정원 과거사 보고서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사법부 얘기다. 과거사의 모든 심급이 결국은 사법부에 가서 판결을 어떻게 받느냐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걸 할 수 있는 게 바로 '국정원 과거사위'다. 나로서는 보람 있는 작업이었다.  

<한겨레>에 연재한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에 부제를 단다면, '바짓가랑이를 올려보라 하지 않은 죄에 관한 보고서'라고 하고 싶다. 그 사람들이 "여기 아직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라며 고문당했다고 하소연하면, 사법부가 "거, 바짓가랑이 한번 올려보시오"라는 얘길 하지 않고 간첩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 죄를 어떻게 물어야 할까? 정말 착잡했다. 그래도 그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좋은 판결이 더 많이 나온다. 50년대 진보당 판결과 관련해 반공 청년들이 법원에 쳐들어가 '빨갱이 판사'를 때려잡자고 했고, 60년대엔 군인들이 법원 앞에 가서 왜 영장을 발부하지 않느냐며 데모했다. 하지만 70년대부터 그런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 조금씩 다시 나타난 게 '미네르바 사건'과 강기갑 전 의원의 이른바 '공중부양 사건', 'PD수첩 사건', '한명숙 전 의원 사건' 등의 판결을 앞두고 보수단체 회원들(일명 '가스통 할배들')이 사법부 앞에서 데모를 했다. 그만큼 사법부에서도 양심적인 판결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법부는 여전히 보수적인 구성이 지배적이지만, 그럼에도 세대가 교체되면서 건강한 부분이 돋아난 것이다.  

사법부의 '회한과 오욕의 역사'를 쓴 탓인지 재판에 자주 불려 갔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도 피고로 여러 번, 또 전문가 증언으로 불려 갔다. '국가보안법 문제'와 '정수장학회 사건' 때도 그랬고, '이석기 사건'에도 증인으로 참석했다. 아직도 이런 재판을 해야 한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정말 시대착오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수 생활을 했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나라다. 이런 면에서는 한국이 참 대단한 나라다. 사형수를 17년 만에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난 미국에 있었지만, '아, 다시는 한국에서 내란음모 사건은 일어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국민의 정부 이후 17년 만에 내가 내란음모 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역사적으로 내란음모 사건이 많았는데, 대개 쇼였다. 보도 간첩, 보도 내란이란 말을 적용할 수 있다. 내란죄로 일단 잡아서 기소할 때는 '소요죄(騷擾罪)'로 이름 붙인다. 내란죄에 비해 소요죄는 훨씬 약하다. 데모를 조금만 세게 하면, 소요죄 적용이 가능하다. 그런데 내란죄는 다르다. 조직적인 무장동원 체계를 갖고 국가기관을 점거하고 파괴하는 행동이 있어야 내란인데, 내란으로 뻥튀기해서 걸어놨다가 막상 기소할 때는 '내란'을 슬그머니 빼고 기소할 때가 잦다.  

- 헌법재판소에 의해 결국 정당이 해산됐다. 역사적 의미를 따지자면?

우리가 어렵게 이룩한 민주화가 공안 세력들에 의해 다시 짓밟혔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대한민국을 국민의 것이 아니라 자기들 것으로 천년만년 누리고자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무게 중심을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누리려고만 하는 자에게서 일반 국민 대중으로 옮겨야 한다. 통합진보당이 부당하게 해산됐을 때 새정치민주연합이나 정의당이 보인 태도는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웠다. 우리가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왜 당당하게 선언하지 못하나. 통합진보당이 여러 가지 잘못으로 대중에게 외면받은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들 역시 이 문제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글 <그들이 처음 왔을 때>가 다시 생각나는 밤이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지난해 12월 19일 헌재의 통진당 해산 판결 후, <한겨레> 특별 기고를 통해 "'진보적 민주주의'는 김일성만이 얘기한 것이 아니라 백범 김구 선생도 했고, 임시정부 헌법도 진보적 민주주의 기초위에 섰다. 지금 학교들에서 제헌헌법을 가르치지 않는데, 이유는 통합진보당의 강령보다 더 세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제헌헌법도 그동안 충실히 배우지 못한 것인가.  

제헌헌법은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다룬다. 우리 사회에서 제헌헌법은 잘 가르치지 않는다. 수능시험에 나오지도 않는다. 이유는 너무 빨갛기 때문이다. 이석기 전 의원의 항소심 증인으로 법정에 갔을 때도 얘기했다. "현행 헌법을 보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임시정부 헌법을 읽어본 적 있나?"라며, 임시정부 의회인 임시의정원 의사록과 선언문, 백범이 쓴 성명서 등을 제시했다. 1944년 개헌 이래, 임시정부의 헌법 자체를 역사적으로 '진보적 민주주의'에 기초해서 만들었다. 그리고 '제헌헌법 해설서'인 유진오 박사의 <헌법해의>를 보면, 대한민국 헌법은 경제 질서에 있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했다 되어 있다. 또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 성격을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조화한 것이라고 했다. <헌법해의>에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정치적 민주주의가 흔히 말하는 자유 민주주의고 여기에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더한 게 '진보적 민주주의'다. 경제 민주화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원래 제헌헌법에도 제기된 과제인데 친일파가 우리나라를 접수하면서 사라졌던 것이 뒤늦게 나온 것이다. 옛날 백범이나 임시정부에서 얘기한 내용과 조금 달라질 수는 있지만, 기본정신은 이거다. 제헌헌법이 이런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인데, 그 약속의 내용을 가르쳐야 할 것 아닌가. 이 큰 약속보다도 약한 약속(강령)을 내건 사람을 '헌법 위반'이라고 잡는 나라가 어디 있나. 이게 '반(反) 헌법'이고 '반(反) 대한민국'이라고 하면서 법정에서 악을 쓰고 나왔다(웃음). 

- <대한민국史>·<특강>·<유신>·<지금 이 순간의 역사>(한겨레출판 펴냄), <장물바구니>(돌아온산 펴냄) 등 다양한 책을 썼다. 앞으로 꼭 쓰고 싶은 책이 있다면? 

지금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아, 이 형 별 볼 일 없었네. 나랑 같은 과(課)네?' 하고 느낄 수 있도록 역사 속 인물들을 친근하게 푼 '형과 누나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중근이 형', '봉길이 형', '봉창이 형'처럼 말이다. 요즘은 위인전이 너무 거룩하게만 쓰여 있다. 안중근이 지금 고등학교에 다녔다면 어떤 과였을까? 비범한 인물이었을까? 껌 좀 씹고, 다리 좀 떨고, 침 좀 뱉고, 삥 좀 뜯으며 어디선가 일진 노릇했겠지(웃음). 위인전을 보면 애들이 안중근을 따라 배우지 못하게 만들어 놨다. '태어날 때부터 비범했고, 오색구름이 뜨고 등 안중근처럼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이 한 몸 던져서 총을 쏘려면 등에 하다못해 별을 7개는 달고 태어나야 한다'는 식으로 만들어 놨다. 안중근도 삥도 뜯고 좌충우돌하며, 총도 뽑아들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오각성해서 정의를 위해서 나선 거다. 안중근 어머니도 대단하다. "아들아, 더 살려고 하지 마라. 넌 이미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 이런 얘기들이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 김 알렉산드라(1885~1918)는 한국인 최초의 외국 장관이었다. 러시아극동인민공화국이라고 잠깐 세워졌다가 없어진 나라지만, 100년 전에 한국 여성이 외무담당 인민위원(외무부장)을 했다. 그녀가 사형당할 때 마지막 소원이 "8보(步)만 걷게 해다오" 였다고 한다. "왜 하필 8보냐?"라고 물으니, "비록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8도라고 들었다. 내 한발 한발에 조선에 살고 있는 민중들, 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라고 하면서 죽었다. 얼마나 멋진가. 매일 영어 단어 외워야 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읽혀야 하지 않겠나. 

또 과거사와 관련해 고문과 용공조작 등 '조작 간첩 사건'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 것인가 등 '반헌법행위자열전'을 쓰고 싶다. 영화 <변호인>을 보면서 생각했다. 거기서 나오는 국밥집 아들 진우가 현실에선 내 나이 또래다. 나중에 아들딸이 커서 영화를 보며 "아빠, 송 변호사는 어떻게 됐어?"라고 물으면, "음…. 정의를 세우려고 왔다 갔다 하다가 잘못돼서 죽었어“라고. 또 "그럼 차동영은 어떻게 됐어? 감옥 갔어?"라고 물으면 "연금 또박또박 받아먹다가 얼마 전에 늙어 죽었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차동영이 하다못해 감옥에는 못 보냈지만, 국밥집에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했어." 이렇게는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하고, 사죄를 안 한다면 현실 법정에는 못 세웠지만 역사의 법정에는 세워야 하지 않겠나. 그 사람들의 자료를 모아서 전기를 써주려고 한다. 물론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하루 이틀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 같이 쓰는 방식을 구상 중이다.  

- 2011년 한 인터뷰에서 청년들을 향해 "지금 20대가 능력은 예전보다 뛰어난데, 패기와 저항정신이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슬슬 자기 싸움을 시작할 때"라고 조언했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지금은 젊은이들에겐 단군 이래 가장 야박한 사회다. 개인의 역량이나 세대를 놓고 보면 가장 능력이 있지만, 사회적으로 기가 죽어 있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게 가장 적은 시대다.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자신을 내던질 때 비로소 참된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젊은 사람들에게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 한홍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어렸을 때 김수영 시인을 참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김수영 시집 하나만 가방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그중에 제일 이해가 안 되었던 시가 '푸른 하늘을'이었다. 김수영 시는 굉장히 난해하고 헷갈린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푸른 하늘을'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득도(得到)하는 느낌이었다. 첫 구절이 "푸른 하늘을 制壓(제압)하는 노고지리가 自由(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시인)의 말은 修訂(수정) 되어야 한다"다. 당시 내가 고1 때였으니, 유신시대였다. 부러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날면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라. 

김남주 시인도 "싸울 때 자유로워진다"고 했듯이 정말 자유라는 게 싸움을 통해 꿈꾸는 것을 얼마만큼 밀고 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지만, 자유는 실천하는 것이다. 1974년에 '자유언론실천선언(自由言論實踐宣言)'에 참여했는데, 한국 언론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언론 자유를 수호하라"에서 "자유는 실천하는 거다"라고 전환한 것이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 및 정리는 조경일 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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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마지막 SOS’에 김무성 서청원 이완구 김기춘은…


등록 :2015-04-12 19:43수정 :2015-04-12 23:15


 

(왼쪽부터) 이완구 총리,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김기춘 전 비서실장, 이병기 비서실장.
청·여당 지도부에 “도움 달라” 전화
목숨 끊기 전 필사적 구명운동 드러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지난 9일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까지 검찰 수사의 부당함과 억울함을 호소하며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 등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필사적인 구명운동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성 전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고 밝힌 여권 인사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친박’(친 박근혜)계 좌장 서청원 최고위원,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 이완구 국무총리 등 모두 4명이다.

 

김무성 대표는 12일 기자회견에서 “성 전 회장이 사망하기 4~5일 전께 통화를 했다”며 “본인(성 전 회장)이 ‘자원외교 비리와 관계가 없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해 내가 ‘검찰이 없는 일을 뒤집어 씌우겠느냐. 변호사 대동해서 잘 수사 받으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성 전 회장과의 통화 사실을 공개했다.

 

같은 당 서청원 최고위원도 이날 충남 서산의료원 성 전 회장 빈소에 조문한 뒤 기자들과 만나 “성 전 회장과 전화했고 만난 것도 사실”이라며 “(그가) 7일께 전화를 해 도움을 요청했다”고 털어놨다. 다만, 성 전 회장이 도움을 요청한 구체적 내용에 대해선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입을 다물었다.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9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성 전 회장이 경남기업에 대한 검찰 수사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을 즈음 통화에서 결백을 호소하며 구명을 요청한 바 있다”며 “검찰 조사에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요청해 검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설명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실장과 함께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이완구 국무총리는 지난 10일 언론 인터뷰에서 “4월 4~5일께 성 전 회장과 통화했다”며 “(경남기업에 대한) 검찰 수사가 총리 담화와 관계있는 게 아닌가 오해를 하고 있어, 내가 ‘검찰 수사는 총리 취임 이전부터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내게 서운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구명 요청’ 연락 내용 (※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시기별로 보면, 성 전 회장은 검찰수사가 시작된 지난달 중순께 가장 먼저 이병기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했고, 이어 검찰수사가 본격화되자 4~5일께 이완구 총리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구명 전화를 했고, 이어 7일께 서청원 최고위원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성 전 회장이 여당 지도부 등 현정부 실세에게 구명 요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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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째 ‘수취인 불명’ 남해의 부고… 선체 인양해 희망적 국면 열기를

[소설가 김훈 세월호 1년 특별기고] 1년째 ‘수취인 불명’ 남해의 부고… 선체 인양해 희망적 국면 열기를

최종수정 2015-04-10 11:11

곡절 끝에 두려움과 비겁함으로 빚어낸 특별법 시행령… 국민은 이런 ‘정부 합동 허수아비’를 원하는 게 아니다

[온라인뉴스팀] 

원본보기
▲2014년 4월 16일 저녁 가라앉는 세월호. 구조와 수색의 조명은 밝았지만 그로부터 1년이 된 지금도 우리의 바다는 여전히 캄캄하다. 사진제공 세계일보
 

 

다시 4월이다. 꽃보라가 흩날리고 목련이 피어서 등불로 돋아나고, 여자들도 피어서 웃음소리가 공원에 가득하다. 생명의 아름다움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사람이 입을 벌려 말할 필요는 없을 터이지만, 지난해 4월 꽃보라 날리고 천지간에 생명의 함성이 퍼질 적에 갑자기 바다에 빠진 큰 배와 거기서 죽은 생명들을 기어코 기억하고 또 말하는 것은 나의 언설로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겨우 쓴다. 늙은이의 춘수(春瘦)는 어수선하다. 

새벽의 꿈에, 배 빠진 맹골수로에도 4월이 와서 봄빛이 내리는 바다는 반짝이는 물비늘에 덮여 있었다. 그 바다에서 하얀 손목들이 새순처럼 올라와서 대통령의 한복 치맛자락을 붙잡고, 친박 비박 친노 비노 장관 차관 이사관들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우는데, 바짓가랑이들은 그 매달리는 손목들을 뿌리치고 있었다. 그 바다는 국가가 없고 정부가 없고 인기척이 없는 무인지경이었다. 손목들은 사람 사는 육지를 손짓하다가 손목들끼리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하였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5월에 김영랑(金永郞·1903~1950)은 모란이 다시 피는 5월을 기다리듯이 나는 생명들이 바다 밑으로 뚝뚝 떨어져버린 4월에, 앞날에 다시 올 4월을 기다리면서 나의 악몽을 달래고 있다. 그러하되 그 새로운 4월은 봄이 오듯이 꽃이 피듯이 날이 흐려서 비가 오듯이 저절로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풍랑이 없는 바다에서 정규 항로를 순항하던 배가 갑자기 뒤집히고 침몰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원인과 배경이 불분명한 사태는 망자(亡者)의 죽음을 더욱 원통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 망자들이 하필 불운하게도 그 배에 타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아무런 정당성의 바탕이 없이 우연히 재수 좋아서 안 죽고 살아 있는 꼴이다. 삶은 무의미한 우연의 찌끄레기, 잉여물, 개평이거나 혹은 이 세계의 거대한 구조 밑에 깔리는 티끌처럼 하찮고 덧없다. 이 사태는 망자와 미망자(未亡者)를 합쳐서 모든 생명을 모욕하고 있고, 이 공허감은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발적이라는 공허감, 보호받을 수 없고 기댈 곳 없다는 불안감은 사람들의 마음을 허무주의로 몰아가고, 그 집단적 허무감은 다시 정치적 공략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이 선박 불법증축, 과적, 고박(固縛) 불이행, 평형수 부족, 급변침 등이었다는 정부의 조사결과 발표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결국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배가 빠졌다는 것이다. 밥을 굶으면 배가 고프고, 심장이 멎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 사태가 선박의 복원력을 검증하는 물리실험이라면, 정부의 발표는 나무랄 데 없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태는 물리실험이 아니다. 이 사태는 한 시대 전체의 도덕적 침몰과 국가기능의 파탄이다. 

세월호가 바다에 빠진 지 1년이 되지만 특별조사위원회는 정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에 가로막혀서 실무 조직을 구성하지 못하고 기능은 작동되지 않고 있다. 작년 하반기에 ‘특별법(2014.11.19 공포)’이 국회에서 입법되는 과정에서 여야 정치권의 리더십은 파탄되었다. 이 파탄은 이미 침몰한 세월호가 다시 물속으로 끌어들인 제 2의 침몰이라고 할 만하다. 정부와 여야의 정치력은 진실을 밝혀서 분노와 슬픔을 조정하는 데 무력했고, 자신들의 존망과 안위를 챙기는 사활의 생존술로 중원무림(中原武林)을 할거했다. 이 ‘특별법’의 입법과정은 사태의 진상을 규명해서 ‘안전사회 건설’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리더십이 작동된 것이 아니고, 이 비극이 몰고 올 무서운 파괴력의 폭심(爆心)으로부터 도망치고 벗어나려는 정치세력들이 국민과 유족들의 아우성에 몰려서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자 강고한 보호벽으로 자신들을 방호하면서 탈출구를 뚫어내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는 수사권, 기소권이 없이 조사권만을 갖는 한시적 기구로 발족되었다. 게다가 정부가 3월 27일 입법예고한 시행령에 따르면 위원회의 조사권의 영역은 정부가 이미 시행해서 발표한 결과를 분석하고 재조사하는 범위로 국한되었다. 그리고 조사 실무를 지휘감독하는 실무 부서장과 그 휘하 직원들은 모두 행정부가 시한부로 파견하는 공무원들로 충원하게 되어 있다. 

이 시행령대로 위원회가 작동된다면 위원회는 정부의 조사결과를 추인하거나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뿐, 사태의 핵심부와 주변부, 심층부와 수뇌부를 향해 기획력 있는 조사를 수행할 도리가 없고, 다만 해양수산부의 하부 조직으로 전락해서 사태를 뒤치다꺼리하고 유족들의 분노와 슬픔과 요구사항을 상대해야 하는 정부의 곤욕을 대신하는 바람막이가 될 것이 뻔하다. 이것은 국민이 원하는 ‘위원회’가 아니다. 이것은 ‘조사권’이 아니다. 이것은 정부 합동의 허수아비다. 이석태 특별조사위 위원장과 유가족들은 이 시행령을 거부했고 위원회는 작동 불능이 되었다.

‘시행령’을 들여다보면 이 사태에 대한 정부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고 근원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사태 초기에 정부는 우선 어쩔 줄 몰라서 갈팡질팡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태의 심층에 대한 두려움은 점차 노골화되었고, 그 두려움은 다시 그 사태로부터 달아나려는, 권력 방어적인 비겁함으로 발전했고, 그 두려움과 비겁함을 이번에 ‘시행령’으로 명문화해서 입법예고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 4월에 남해바다 맹골수로에서 온 부고는 수취인 불명으로 팽목항에 되돌아갔으니 탈상(脫喪)의 날은 아직도 멀었고 유족들은 광화문과 팽목항에 모여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4월이 왔다. 

거칠게 말해서, 나는 세월호 참사의 발생과 추이를 3단계로 나누어서 이해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제 1사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 나라에 쌓인 적폐(積弊, 나는 이 말을 대통령에게서 배웠다)가 세월호를 침몰시키기까지의 70년에 가까운 세월이고 세월호 참사의 제 2사태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그해 11월 7일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의 7개월간이고 세월호 참사의 제 3 사태는 ‘시행령’ 이후 위원회의 활동과 인양이 논의되는 미래의 시간인데, 이 3개의 국면은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며 원인으로 맞물려 있다. 그리고 제 2사태는 제 1사태에 잇닿은 또 다른 침몰이고, 제 3사태도 지금 위태롭게 기울어 있다.

이 나라의 돈은 오래전부터 가치의 저장이나 측정, 교환, 유통, 지불, 결제의 수단을 넘어서서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돈의 위상은 법의 보호를 받고 돈의 작동은 시장경제의 축복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채찍’을 휘두르는 이 권력의 지배는 완벽하고도 철저해서 그 지배권으로부터의 이탈은 곧 죽음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돈은 화폐라기보다는 알파벳 대문자를 써서 DON으로 표기해야만 그 유일신다운 전능의 위상에 합당할 것이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70년에 가까운 적폐는 이 DON과 거기에 붙좇는 정치권력과 행정권력의 연합세력이라는 사실의 흐린 윤곽은 이미 드러나 있다. 그 연합세력이 어떤 인적, 행정적 지휘-복종과 공생의 네트워크를 통해 그 배에 작동되어서 감히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깔아뭉갰던가를 시대사 전체 속에서 밝히는 것이 정부의 통상적인 업무기능 안에서는 불가능하다면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서 밝혀야 한다는 쪽으로 국민들의 뜻이 모아졌고, 국회는 파행을 거듭한 끝에 매우 허약한 권한만을 부여한 위원회법을 통과시켰는데, 정부가 다시 시행령으로 그 기능을 박탈하고 있으니 정부는 대체 무엇이 그토록 무섭고, 그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국민들은 오랜 세월동안 정치권력에 속아왔다. 불신은 사람들의 정치정서 속에서 허무주의로 자리 잡았고, 그 허무주의는 일상화된 악(惡)이 서식하는 토양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이 아니라, 그 일상화된 악의 폭발인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시대의 난제를 극복해본 역사적 경험이 전무하거나 매우 빈곤하다. 고통은 늘 고통을 당하는 계층에게 전가되었고 기회와 정보와 우월적 지위는 늘 강하고 러키한 자들의 몫이었다. 이 불신과 고통분담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빈곤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데, 정부가 제시한 이 무력하고 자기방어적인 ‘시행령’은 갈등과 불신에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이는 꼴이다.

지금 정부는 공적 개방성을 상실하고 자장면협회나 상가번영회처럼 사인(私人)의 이익집단 같은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이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몇몇 고위 관리들이 문책 경질된 것은 책임을 지는 행위가 아니다. 고위 공직의 자리가 개인의 사유재산이 아니고, 잘나가는 공무원의 물 좋은 취직자리가 아니며, 천하의 공물(公物)일진대 그 자리를 내놓는 것이 어떻게 사태를 책임지는 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지게꾼이 지게를 진다는 말이 아니다. 자리를 내놓고, 감옥에 가고, 할복을 하고 분신을 해서 지옥에 간들 이미 그 해악이 세상에 퍼져버린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책임을 진다”는 행위는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말은 쫓겨났다는 뜻이고, 그 쫓겨남으로써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빈말이다. 그 공허함은 “세월호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침몰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로되, 하나마나한 말이다. “기업이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도 모두 그러한 것인데, 그 명석함에 가려진 폭력성이 세상의 강자로 행세하고 있다. 

지난해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에서 여당의 세력이 커지자 이 비극적 사태에 오래 매달려 있는 것은 경기부양과 경제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논리가 언론의 중심부로 진출했다. 이 경제논리 역시 맞는 말이로되 하나마나한 말이고, 명석성으로 폭력을 위장하고 있다.

주어와 술어를 가지런히 조립하는 논리적 정합성만으로는 세월호 사태를 이해할 수도 없고 진상을 밝힐 수도 없을 것이다. 또 이 사태를 객관화해서 3인칭 타자의 자리로 몰아가는 방식으로는 이 비극을 우리들 안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다. 나는 죽음의 숫자를 합산해서 사태의 규모와 중요성을 획정하는 계량적 합리주의에 반대한다. 나는 모든 죽음에 개별적 고통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에 값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명과 죽음은 추상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이 불가능하고 대체가 불가능한 일회적 존재의 영원한 소멸이다. 

그래서 한 개인의 횡사는 세계 전체의 무너짐과 맞먹는 것이고, 더구나 그 죽음이 국가의 폭력이나 국가의 의무 불이행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세계는 견딜 수 없는 곳이 되고 말 것인데, 이 개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체제가 전체주의다. 이 개별적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다면 어떤 아름다운 말도 힐링이 되지 못하고 경제로 겁을 주어도 탈상은 되지 않는다.

국가개조(國家改造! 나는 이 말도 대통령에게서 배웠다)는 안전관리와 구조구난의 지휘부와 조직을 재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뉘우침의 진정성에 도달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좀처럼 개조되지 않는다. 다만 뉘우침의 진정성 위에서 자신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서 뭉개다가 무너질 뿐이다.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에 수많은 나라들이 멸망했다. 그 나라들은 대부분 반성하는 기능의 마비, 무책임, 무방비 때문에 망했고 여러 나라들이 줄줄이 망해가는 꼴을 보면서 그 뒤를 따라서 똑같이 되풀이하다가 망했다. 고통의 맨살, 죄업의 뿌리와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뉘우침의 진정성과 눈물의 힘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젊어서 기자 일을 할 때 함석헌(咸錫憲·1901~1989)의 이름에 붙은 타이틀은 종교인도 철학가도 사상가도 아니었다. 그의 타이틀은 반체제인사였다. 그 반체제인사가 말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가면 영원의 문간에 이르고 만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1977. 한길사 444쪽). 

쓰기를 마칠 때 정부가 세월호 선체를 인양키로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 사태를 둘러싼 정치적 조건들을 제거하고 진실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만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정치력으로 정치를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길을 우리는 가야 한다. 선체 인양이 이 사태의 희망적 국면을 열어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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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도에서. 김영훈(도서출판 안나푸르나 대표) 촬영.
 
김 훈

 

소설가, 자전거 레이서. 1948년 서울 출생. 고려대 영문과 중퇴. 한국일보 시사저널 한겨레신문 기자생활을 거쳐 마흔 넘어 소설 집필 시작. 장편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소설집 ‘강산무진’, 산문집 ‘선택과 옹호’ ‘자전거여행 1·2’ 등.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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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최고인민회의, 산림.기본건설에 방점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4/12 20:39
  • 수정일
    2015/04/12 20:3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꾸준한 경제성장과 내각의 책임확대<초점> 북한 최고인민회의, 산림.기본건설에 방점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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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12  17: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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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3기 제3차회의가 9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렸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불참해 주석단 가운데 자리가 비어있다. [캡쳐사진 - 노동신문]

북한은 9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개최한 최고인민회의 제13기 제3차 회의에서 주로 경제문제를 다루고 ‘경제사업에 대한 당의 유일적 영도’와 ‘주체화’를 강조했다.

한국의 정기국회에 해당하는 북한의 4월 최고인민회의는 전년도와 해당년도의 ‘과업’(사업)과 ‘예결산’, 그리고 ‘조직’ 문제를 다루지만 이번 회의에서는 주목할 만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내각 총리가 과업을, 재정상이 예결산을 보고하고 각계 대표가 토론하는 방식이므로 주로 내각이 관할하는 공식 인민경제(제1경제)가 중점적으로 검토, 의결되지만 최근 군수경제(제2경제)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유훈 관철 사업까지 내각이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음이 확인돼 주목된다.

◯ 꾸준한 6% 수준 경제성장..올해 예산수입 축소 이유는?

북한의 내각이 관할하는 국가재정은 6% 정도의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발표됐다. 최근 북한을 방문한 외국이나 재외동포들의 경제상황에 관한 전언과 대체로 일치하는 셈이다.

<2014, 2015년 북한 예결산 비교>
                                                                                  (단위 %)

예결산 구분

2014년

2015년

전년 국가예산수입
(전년 지방예산수입계획)

106
(107.7)

106
(122.2)

전년 국가예산지출

105.6
 

106.5 추정
(99.9% 집행) 

전년
예산지출
구성비

경제건설부문 지출

45.2

46.7

문화건설부문 지출

38.8

37.2

전년 국방비 지출

16

15.9

당해 국가예산수입 계획

104.3

103.7

당해 국가예산지출 계획

106.5

105.5

당해 예산
지출 계획 중

당해 국방비 구성비

15.9

15.9

최고 증액률 부문

체육(117.1)

산림(109.6)

(정리 - 통일뉴스)

기광호 재정상은 보고에서 2014년 국가예산수입계획은 106%(이하 백분율 6% 방식으로 표기) 성장했고, 국가예산지출계획(6.5%)은 99.9% 집행됐다고 밝혔다. 2013년의 경우 최광진 재정상 보고에 따르면 예산수입 6%, 예산지출 5.6%가 증가해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국가예산수입은 3.7%, 국가예산지출은 5.5%로 늘려 잡았고, 초과수행분을 고려한다면 지난해와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국가예산수입계획이 2014년 4.3% 수준에서 2015년 3.7% 수준으로 성장률을 다소 낮게 책정한 점은 주목된다. 국가기업리득금이 2014년 7.9% 상향 책정된데 비해 올해는 4.3%로, 부동산리용료가 9.5%에서 0.7%로 제시됐다. 점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제무역지대수입의 경우도 5.1%에서 3.6%로 오히려 축소 편성됐다.

<2014, 2015년 북한 국가예산수입 비교>
                                                                              (단위 %)

구분

2014년

2015년

국가예산수입

104.3

103.7

 

거래수입

104.5

102.6

국가기업리득금

107.9

104.3

협동단체리득금

104.8

103.2

부동산리용료

109.5

100.7

사회보험료

105.1

102.8

재산판매 및 가격편차수입

102.4

101.4

기타

101.7

100.8

경제무역지대수입

105.1

103.6

(정리 - 통일뉴스)

지난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5.30담화로 확인된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와 농업에서의 분조관리제 확대실시, 그리고 경제개발구 추진 등의 적극적 개혁개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기업이득금이나 부동산이용료, 경제무역지대수입이 기대만큼 빨리 늘어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 경협 전문가는 “외국인 투자가 들어오지 않고 중국 정부가 대규모 투자를 막고 있는데다 자원 수출단가가 하락하고 있다”며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안 풀리면 북한의 경제 형편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른 북한 전문가는 “기존에는 대규모 연합기업소의 경우 국가로부터 할당된 토지나 인원을 무조건 수용해야 했지만 지금은 자체 계획을 세워 꼭 필요한 토지나 인원만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같은 현상이 과도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에 반해 지방예산수입계획은 지난해 122.2% 수행됐다면서 “자기 지방의 특성에 맞게 지방살림살이를 자체로 꾸려나가기 위한 투쟁이 힘있게 벌어”진 점을 이유로 들었다. 올해 국가예산수입도 중앙예산수입 79%와 지방예산수입 21%로 구성됐지만 “도.시.군들이 지방자체의 수입으로 지출을 보장하고 수입금을 중앙예산에 들여놓을 것으로 예견”했다.

박봉주 내각 총리는 “수많은 공장, 기업소들이 인민경제계획을 넘쳐 수행함으로써 전반적인 나라의 경제가 상승의 궤도에서 활력있게 전진해나가고 있다”면서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이 더욱 악랄해지고 례년에 없는 혹심한 가물이 지속되는 엄혹한 환경속에서” 이루어진 성과라는 점을 강조, “더없이 자랑스럽고 귀중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 ‘우리 식’과 국산화 추진

최고인민회의에서 보고자들과 토론자들은 곳곳에서 ‘우리 식’ 또는 ‘주체화’ 등의 표현을 사용해 눈길을 끌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수입병’은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국산화’는 등장했다.

박봉주 총리는 올해 과학기술부문 계획을 밝히면서 “우리 식의 현대화, 정보화를 적극 다그쳐 자기의 힘과 기술에 의거하여 자기 부문을 추켜세우기 위한 된바람을 일으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금속공업의 주체화를 실현하는것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간곡한 유훈”이라며 “내각은 금속공업의 주체화를 더욱 완비하는데 힘을 집중”하겠다고 밝히고, 구체적으로 “수직식산소열법용광로에서 우리의 자원과 연료에 의한 선철생산이 성공하여 금속공업의 주체화를 실현할 수 있는 확고한 담보를 마련한 것”을 예시했다.

아울러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서 고온공기연소기술을 비롯하여 중유를 쓰지 않는 기술”도 제시됐다. 이 기술은 열손실을 대폭 낮추어 열효율을 관리하는 에너지 절약형 선진기술로 알려져 있다.

특히 김정은 제1위원장이 강조한 ‘국산화’와 관련 박 총리는 “경공업원료, 자재의 국산화를 적극 추진하고 생산을 결정적으로 늘여나감으로써 인민들에게 더 많은 소비품이 차례지도록 할것”이라고 말했다.

토론자로 나선 장철 국가과학원 원장은 전력생산과 관련 “원료, 자재, 설비의 국산화를 실현하기 위한 과학연구사업을 힘있게 벌려나가겠다”고 말했다.

부족한 전력사정이나 강수량 등의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도 소개됐다.

상원세멘트련합기업소 사례로 토론한 윤재혁은 전력소요가 많은 시멘트 생산에서 “전반적인 생산공정을 에네르기절약형구조로 전환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해선협동농장 사례를 토론한 백춘기는 “가물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 경험을 예시했다.

◯ 예산 증액률은 산림부문, 기본건설부문 순

초미의 관심사항인 북한의 식량사정과 관련해 박봉주 총리는 “높은 알곡생산성과를 이룩했다”고 밝혔으며 “올해에 당이 제시한 알고생상목표를 기어이 점령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김국진은 토론자로 나서 “황해남도에서 100년이래 처음 보는 왕가물”이 있었다면서 “형식주의.요령주의를 뿌리빼지 못하여 알곡생산게획을 미달하였다”고 자아비판했다.

이에 비해 백춘기는 “국가알곡생산계획을 넘쳐 수행”했다는 해선협동농장 사례를 들며 “가물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속에서..그 전해에 비해 정보당 논벼를 더 수확하였다”는 점과 “밭농사에서..토지리용률을 1.5배 높였다”는 점을 성과로 제시했다.

<2012~2015년 북한 국가예산 부문별 증액률 비교>
                                                                          (단위 %) 

   
▲ 전년도에 비해 증가율을 표시하는 통일연구원 자료를 토대로 재작성했다. 2015년 예산 중 수산과 산림부문 예산이 별도로 편성된 점이 특징이다. [정리-통일뉴스]


















국가예산지출 편성을 보면, 산림부문이 새롭게 등장해 9.6% 증액 편성돼 최고의 증액률을 기록했고, 지난해 농축수산부문이 올해는 농업부문과 수산부문으로 분리돼 농업부문이 4.2%, 수산부문이 6.8% 증액 편성됐다.

산림녹화사업은 지난 2월 26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전당, 전군, 전민이 산림복구전투를 힘있게 벌려 조국의 산들에 푸른 숲이 우거지게 하자>는 담화를 내놓은데 이어 지난달 초 내각 결정을 채택, ‘산림조성 10년 전망계획’ 추진을 확인한 바 있다. 

또한 산림녹화 책임부서인 산림총국이 내각 국토환경보호성에서 국방위원회 산하로 재편됐다는 보도도 이어져 예산 증액이 점쳐졌을 뿐만 아니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회의를 마치고 처음 참관한 곳도 평양 중앙양묘장이었다. [관련기사 보기]

산림부문 다음으로 두 번째 높은 증액률을 보인 것은 기본건설부문으로 지난해 4.3%보다 두배가 넘는 8.7% 증액편성됐고 지난해 17.1%로 최고 증액률을 보였던 체육부문은 올해도 6.9% 증액편성됐다.

박봉주 총리는 “산을 낀 곳에서는 산을 바다를 낀 곳에서는 바다를 잘 리용하며 농업지대나 공업지구나 할것없이 자기 지방의 특성에 맞게 지방경제를 발전시켜 자기 지역 인민들의 먹는 문제와 땔감, 기초식품문제를 비롯하여 인민생활향상에서 절실히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도록 하겠다”고 ‘지방경제’를 강조했다.

기광호 재정상은 “조선로동당창건 일흔돐과 조국해방 일흔돐을 혁명적대경사로 빛내이기 위한 우리 군대와 인민의 총공격전을 자금적으로 담보하여야 할 중대한 과업이 나서고 있다”면서 △세포지구 축산기지 △청천강계단식발전소 △과학기술전당과 미래과학자거리 등을 집중 투자 대상으로 선정, ‘10월 대축전장’에 성과를 빛내겠다고 밝혔다.

◯ 내각, 유훈 관철과 군수경제까지?

보고와 토론 곳곳에서는 지난해 사업에서 나타난 ‘결함’과 계획치 미달 등도 지적돼 주목된다.

박봉주 총리는 “지난해 내각사업에서는 결함들이 나타났다”며 ‘당의 유일적 영도’를 관철하지 못한 점과 ‘경제강국건설 관련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지 못한 점을 적시했다.

이에 따라 “내각은 올해에 위대한 장군님(김정일)의 유훈관철을 생명선으로 주선으로 틀어쥐고 일관성있게 밀고 나가”겠다고 밝히고 “위대한 수령님들(김일성.김정일)의 령도업적이 깃들어있는 단위들의 생산환경을 개선하고 현대화하는 수준을 끊임없이 높여 수령님들의 불멸의 업적을 계속 빛내여나가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내각은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병진시킬데 대한 우리 당의 전략적로선을 철저히 관철하여 인민군대의 싸움준비와 국방공업부문에 필요한 설비, 자재, 자금을 책임적으로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기존에는 국방공업은 제2경제라는 군수경제 부문이 별도 운용했고, 최고지도자 관심사항 역시 별도의 자금이 투입됐지만, 김정은 제1위원장 집권과 장성택 처형 이후 당과 군 등에서의 외화벌이 기관들이 대폭 축소돼 내각으로 이월된 사정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장성택 처형과 함께 제2경제가 구조조정됐다”며 “군수공업이 제1경제로 편입돼 민수생산으로 대체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심지어 “핵무력 건설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미사일 부품 생산 등이 필요한데 이것도 제1경제에서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병진노선을 채택하고 있는데 제2경제가 해체됐다는 정보는 믿기 어렵다”며 “국방은 핵무장력을 강화함으로써 해결하고 군수공업을 민수용으로 돌려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진단했다.

‘혁명자금’ 등으로 불리기도 했던 최고지도자 관심사항 집행 자금도 평양을 집중 개발하는 수도건설과 마식령 스키장 건설 등에 투입돼 사실상 소진된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내각이 ‘유훈 관철’ 사업 재정소요를 담당해야 하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통상 한정된 자원으로 내각이 인민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조건에서 최고지도자의 유훈 관철이나 국방 분야까지 힘을 쏟을 경우 자원분배 왜곡이 나타날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 김정은 불참, 소폭 인사

   
▲ 이번 회의는 특별한 정책 변화나 인사 이동 없이 막을 내렸다. [캡쳐사진 - 노동신문]

이번 최고인민회의 제13기 3차회의에는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석하지 않았다. 건강이상설 등이 나돌기도 했지만 11일 노동당 제1비서 추대 3주년 중앙보고대회가 열려 충성을 다짐했고, 12일 평양국제비행장 2항공역사 건설장을 현지지도한 보도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큰 안건이 없는 통상적인 회의라서 김 1위원장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라는 평가가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주석단 호명 순서는 지난해 김영남, 박봉주, 최룡해, 리영길, 장정남, 김기남, 최태복, 박도춘 순에서 올해는 김영남, 황병서, 박봉주, 최룡해, 현영철, 리영길, 양협섭, 최영림 순으로 바뀌었다.

<최고인민회의 제13기 제1차회의 주석단 명단> (2014.4.9) 
김영남동지,박봉주동지,최룡해동지,리영길동지,장정남동지,김기남동지,최태복동지,박도춘동지,양형섭동지,최영림동지,강석주동지,리용무동지,김원홍동지,최부일동지,김양건동지,김평해동지,곽범기동지,오수용동지,로두철동지,조연준동지,태종수동지와 김영대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주석단에 자리를 잡았다. 

<최고인민회의 제13기 제2차회의 주석단 명단> (2014.9.25) 
김영남동지,박봉주동지,황병서동지,리영길동지,현영철동지,김기남동지,최룡해동지,박도춘동지,양형섭동지,강석주동지,최영림동지,리용무동지,김원홍동지,김양건동지,김평해동지,곽범기동지,오수용동지,로두철동지,조연준동지,태종수동지와 김영대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법제위원회 성원들이 주석단에 자리를 잡았다.

<최고인민회의 제13기 제3차회의 주석단 명단> (2015.4.9)
김영남동지,황병서동지,박봉주동지,최룡해동지,현영철동지,리영길동지,양형섭동지,최영림동지,리용무동지,오극렬동지,김원홍동지,김양건동지,곽범기동지,오수용동지,김평해동지,최부일동지,로두철동지,조연준동지,태종수동지,박도춘동지와 김영대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법제위원회 성원들이 주석단에 자리를 잡았다.


지난해 황병서가 거명되지 않은 점과 올해 김기남 당 비서가 빠진 점이 눈에 띈다. 황병서는 지난해 4월말경 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임명돼 4월 9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3기 1차회의에서는 주석단 명단 앞자리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최근 정치국 상무위원임이 북측 언론을 통해 공식 확인된 바 있다.

김기남 비서는 주석단이 아닌 일반 대의원석 앞줄에 모습을 나타냈고 11일 개최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추대 3주년 중앙보고대회 주석단 명단에도 이름이 없어 강등된 것으로 보인다. 선전선동담당 당비서를 맡고 있는 김 비서의 좌천은 최근 김정은 제1위원장의 위대성 교양 자료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어 주목된다.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인사문제는 유일하게 박도춘 당비서가 국방위원회 위원에서 ‘소환’되고 김춘섭이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됐을 뿐이다. 박도춘은 이번 최고인민회의 주석단에도 포함돼 건재함이 확인됐지만, 군수담당 당비서 자격으로 국방위원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수담당 비서에서도 소환된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진 박도춘의 자리 변동과 미국과의 핵협상을 책임져왔던 강석주 부총리가 명단에서 빠진 점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주목된다.

최근년 회의 때마다 고령으로 인한 교체설이 나온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오는 19일부터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와 반둥에서 열리는 ‘아시아.아프리카회의’와 반둥회의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다고 서면통보한 바 있어 이번에는 논란을 비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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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된다고 ‘제주 고사리’ 꺾다가 목숨까지 위험

돈 된다고 ‘제주 고사리’ 꺾다가 목숨까지 위험
 
 
 
임병도 | 2015-04-11 10:47: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제주 고사리 철이 왔습니다. 제주도는 고사리가 나는 4~5월이면 고사리 채취로 난리법석입니다. 제주도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육지에서도 고사리를 채취하러 제주까지 내려옵니다.

많은 사람이 제주 고사리를 채취하러 다니는 이유는 제주 고사리가 돈이 제법 되기 때문입니다. 요새 햇고사리 300g이 3만 원이 넘으니 한우보다 더 비싼 셈입니다.1 새벽부터 고사리를 채취하면 많이 버는 사람은 10만 원이 넘게 벌기도 합니다.

제주 고사리로 돈을 버는 사람도 많지만, 매년 4~5월이면 제주도는 고사리 때문에 몸살을 앓습니다.


‘고사리철만 되면 바쁜 119구조대’

제주도 소방서들은 매년 4~5월만 되면 바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사리를 꺾다가 길을 잃었다는 신고가 접수되기 때문입니다.

제주도 소방안전본부의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제주에서 ‘길잃음 사고’는 132건이었습니다. 그중 50건이 고사리 채취 때문에 발생한 신고입니다. 거의 절반 가량의 길잃음 사고가 고사리가 나는 4~5월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2
 
고사리를 채취하러 가는 곳이 대부분 오름이나 한라산 중턱 등 수풀이 우거진 곳입니다. 고사리를 더 채취하는 욕심에 자꾸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부부 또는 사람들과 함께 가도, 각자 고사리를 채취하면서 일행과 떨어지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3 특히 남보다 더 많이 고사리를 채취하려는 욕심으로 다니다가 휴대폰이 안 터지거나 배터리가 떨어져 실종 신고까지 들어가는 일은 매년 발생합니다.4
 
아무리 고사리가 돈을 벌게 해준다고, 자기 욕심 때문에 진짜 위급한 상황에 출동해야 하는 119구조대가 하루에도 몇 번씩 출동하게 만드는 일은 스스로 주의해야 합니다.5
 

‘고사리 철만 되면 운전하기가 겁나’

제주도의 오름이나 숲길 근처는 대부분 왕복 2차선 도로입니다. 제주는 대부분 갓길이 없어서 차량이 한 대라도 도로에 주차되어 있으면 차량들의 통행이 불편합니다. 유명 관광지 부근에는 몰려드는 차량 때문에 교통난이 심각하기도 합니다. 6

▲제주 사려니숲 입구 도로에 주차된 차량들 ⓒ한라일보

고사리가 나는 매년 4~5월이면 오름이나 숲길 도로 양쪽에는 고사리 채취하러 온 차들의 불법 주차가 극성을 부립니다. 차량이 통과할 수 있게 주차하면 그나마 낫지만, 갓길이 없으니 도로 쪽으로 주차를 해서 차량 통행이 불편해집니다.

그나마 일직선 도로에 차량이 주차되어 있으면 멀리서도 알 수 있겠지만, 커브 길에 주차된 차량을 갑자기 발견하면 깜짝깜짝 놀랍니다. 고사리철만 되면 차들이 도로를 점령하거나 갑자기 숲에서 튀어나온 사람들 때문에 사고 위험성이 높습니다.

제주는 4~5월이면 유채꽃이 피는 등 관광하기 좋은 시즌입니다. 5월 5일 어린이날 등 연휴가 있는 시기는 관광객이 몰립니다. 특히 이 시기 제주를 관광하는 렌터카 운전자들은 진짜 조심해야 합니다.7
 
가뜩이나 자동차 사고가 많은 제주에서, 고사리를 채취한다며 마구잡이로 주차하면 서로가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고사리 때문에 진드기에 감염될 수도 있어요’

제주도 고사리 철에는 무시무시한 진드기도 함께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SFTS(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의 매개물인 작은소참진드기는 주로 숲이나 목장, 초원 등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SFTS(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 매개물인 작은소참진드기.ⓒ제주레저신문

진드기에 감염되면 발열, 전신 근육통, 설사,구토 등의 증상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증상이 나오면 빨리 병원에 가야 합니다. 혹시나 진드기에 감염될 경우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습니다.

2013년 진드기 감염으로 6명의 환자가 발생해 4명이 사망한 사례도 있습니다.8 그만큼 위험한 진드기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긴 팔과 긴 바지, 모자 등을 착용해야 합니다.  
 
고사리를 채취하고 돌아오면 입었던 옷은 반드시 실외에 벗어 놓고, 꼭 샤워해야 합니다. 단순히 진드기 이외에도 각종 벌레도 옷에 있을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제주 고사리 채취, 돈 보다 즐기세요’

제주에서 고사리를 채취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듭니다. 제주도 할망들은 숙달됐기 때문에 괜찮지만, 보통 사람들은 온종일 허리를 구부리고 고사리를 꺾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아이엠피터의 아내도 이틀간 고사리를 꺾고 오더니 몸살이 나기도 했습니다.

▲채취한 고사리는 삶은 다음에 햇볕이나 건조기로 말린다. 건고사리 100g을 만들려면 2~3배 이상의 고사리를 채취해야 한다.

숙련된 제주 할망들은 자기만 아는 고사리 서식지가 있고,9 몸이 부지런해서 남들보다 빨리 채취하지만, 육지에서 오거나 제주로 온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 무작정 고사리를 찾다가는 길만 잃기 쉽습니다.

고사리를 채취하면 돈이 된다고 하지만 실제 채취한 고사리를 삶아서 말려 놓으면 양은 생각외로 적습니다. 10만 원 이상 벌려면 진짜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채취해야 됩니다. 보통 사람은 그 정도 고사리를 꺾으려면 약값이 더 들기도 합니다.

누구네는 고사리 꺾어 1천만 원을 벌었니 하는 소리가 항상 고사리 철에는들립니다. 물론 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제주의 억척스러운 할망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니, 평범한 사람들은 고사리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접어두는 편이 낫습니다.

▲ 고사리를 채취하던 도중에 미리 싸온 도시락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

제주에 살면서 고사리를 꺾어 말려 육지의 친척들에게 보내주면 좋아합니다. 제주에서 직접 채취한 자연산 고사리는 맛도 좋아 인기가 많기도 합니다. 그러나 돈 욕심에 전문적으로 고사리를 꺾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제주는 몸살을 앓습니다.

고사리를 꺾는 사람들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굳이 아이엠피터가 고사리 채취를 문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점점 고사리 채취 인구가 늘어날수록 그에 따른 피해 또한 늘어납니다.

동네 이웃끼리 소일삼아, 산책을 겸해 도시락을 싸서 오름을 오르면서, 안전하게 고사리를 꺾으며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고사리가 아무리 많이 나도10 너도나도 고사리를 꺾다 보면 언젠가는 제주도 고사리가 더 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연에서 나는 먹거리, 적당히 먹을 만큼만 꺾어 즐기는 삶도 그리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1. 한우 100g을 마트나 인터넷에서 구매할 경우
2. 고사리 따러 갈 때 호루라기 꼭 챙기세요. 한겨레 2014년 4월 1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630725.html 
3. 호루라기를 준비해 일행과 떨어져 있을 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방법도 좋다.
4. 제주서 고사리 채취 주민 실종신고 잇따라. SBS 2012년 4월 20일.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161145 
5. 고사리 채취 길 잃음 사고 주의보 발령. 미디어제주 2015년 4월 9일.
https://www.media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171680 
6. 사려니숲길 비자림로 주차난 심각. 한라일보 2014년 11월 8일.
http://www.ihalla.com/read.php3?aid=1415449499480512184&spage=1 
7. 제주에 사는 사람들은 대충 어디쯤 고사리 채취 차량들이 있어 주의를 하지만 렌터카 운전자들은 지형을 몰라 당황할 때가 많다 
8. 진드기 활동철, 고사리 채취 등 야외활동 주의. 제주레저신문 2014년 4월 11일.
http://www.leisure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216 
9. 제주 할망들은 자기가 아는 고사리 서식지를 며느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
10. 고사리는 꺾어도 또 자란다. 9번까지도 고사리가 돋기도 하는데, 비가 오면 금방 자라, 4~5월에 내리는 비를 '고사리 장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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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불법 대선 자금' 의혹에 불지른 성완종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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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GEUN HYE ELECTION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2012년 대선 때 당시 박근혜 후보 중앙선대위에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고 밝혔다는 <경향신문> 통화 내용이 11일 공개됨에 따라,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박근혜 정부를 뿌리까지 뒤흔들 초대형 이슈로 번지고 있다. 새누리당은 잇따른 폭로와 파장이 당장 4·29 재보궐선거와 내년 4월 총선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면서도 뚜렷한 입장조차 내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다.

성완종 전 회장은 지난 9일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2012년 대선 때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조직총괄본부장을 맡고 있던 친박근혜계 핵심 홍문종 의원에게 선거자금 2억원을 건넸다고 밝혔다고 이 신문이 11일 보도했다. 검찰이 전날 공개한 성완종 전 회장 메모에 적힌 ‘홍문종 2억’이 2012년 대선자금으로 건네진 것이라는 설명인 셈이다.

경향신문이 11일 추가로 공개한 고 성완종 전 회장의 인터뷰 음성파일.

관련기사 : [단독]성완종 인터뷰 음성파일 추가공개 “2012년 홍문종에 2억원, 2011년 홍준표에 1억원 줬다” (경향신문)

 
 

2006~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허태열·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사실에서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한 2012년의 대선자금까지 거론한 것이다. 당사자인 홍문종 의원이 11일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황당무계한 소설”이라고 전면 부인했으나,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돈 없는 깨끗한 선거’를 치렀다고 강조해온 박근혜 정부가 도덕성 논란에 휘말리며 국정 장악력에 치명상을 입고, 4·29 재보선에서도 새누리당에 큰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야당은 특검 주장 등 공세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 관계자들은 “지난해 정윤회 문건에 이어 대선자금 문제까지 터져나왔으니 현 정부가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고 한탄했다. 지난달 정부가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며 대대적 사정 드라이브에 나섰을 때 “무리한 기획수사가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비판했던 정병국 의원은 이날 <한겨레>와 통화에서 “파장이 간단치 않을 것”이라며 “당장 재보선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부메랑이 될 것’이라고 지난달 얘기해놓고도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니 소름이 끼친다”며 “역대 정부들도 그래왔지만 이 정부는 너무나도 적나라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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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12월 20일 대선에서 당선된 다음날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맨 앞줄의 김용준(오른쪽 두번째)·정몽준(오른쪽) 공동선대위원장의 바로 뒷줄에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앉아있다.

새누리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대선자금 문제까지 나왔어도 정확한 정보가 없어 당 차원에서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정리가 잘 안 되는 상황”이라고 답답해했다. 실제로 새누리당은 ‘성완종 리스트’가 처음 나온 10일에도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열려다가, ‘명확한 정보도 없고 최고위원들 견해도 다르다’는 이유로 회의를 열지 않았다. 당 지도부가 김무성 대표, 유승민 원내대표 등 비박근혜계와 서청원·이정현 최고위원 등 친박근혜계로 나뉘어 있어서, 이번 사태를 대하는 태도도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성완종 전 회장의 메모에 등장하는 8명 가운데 홍준표 경남지사를 제외한 7명이 모두 친박 핵심들이다. 성완종 전 회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까지 친박계 인사들에게 구명을 요청했고, 거절 당하자 크게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진다.

한 의원은 “이명박 정부를 겨냥한 자원외교 수사를 하다가 이번 사태까지 왔다”며 “전·현 정부 갈등에 이어 이번에는 잠시 시들했던 당내 계파 갈등으로 비화할 수도 있어서 걱정된다”고 말했다. 김무성 대표가 ‘철저하게 수사하라’는 명시적 태도를 밝히지 않은 채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으로 보인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과 달리 2012년 대선자금 문제는 공소시효(7년)가 아직 남아있어, 검찰이 수사할 경우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야당은 물론 일반 국민 여론도 2012년 박근혜 후보 캠프의 대선자금에 관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초·재선 의원들이 지난 10일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고, 12일에는 ‘미래연대’, ‘수요모임’, ‘민본21’ 등 새누리당의 역대 소장·개혁파 인사들의 회동에서도 ‘성완종 리스트’의 진상을 밝혀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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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시신 상의에서 발견된 메모가 11일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성완종 폭로] 관련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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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단일후보' 정동영?…절반의 단일화

 
노동당과 선거연대 성사…정의당과는 '단일화도 아닌, 아닌 것도 아닌?'
곽재훈 기자2015.04.10 19:18:37
 
 
 
4.29 재보선에서 가장 여론의 관심이 뜨거운 선거구로 떠오른 서울 관악을 지역에서, 정동영 무소속 후보가 '진보진영 단일 후보'의 타이틀을 달게 됐다. 정 후보는 법적으로는 무소속 후보 신분이지만 '대중적 진보정당'을 표방하며 창당을 추진 중인 '국민모임' 소속이다. 국민모임은 정의당, 노동당, 노동정치연대와의 4자 연대를 모색해 왔다.

국민모임-노동당, 정동영으로 후보단일화 성사

이 가운데 노동당과 국민모임은 10일 오후 양자 간 단일화가 성사됐음을 밝혔다. 관악을 출마를 선언한 노동당 나경채 대표가 불출마하고, 노동·복지·탈핵 등 5개 분야의 공동 정책을 채택하는 내용으로 선거 연대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나 대표는 "저는 오늘 관악을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며 "제1야당 교체의 가능성을 진보정치가 열린 마음으로 통 크게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한 결과, 불출마를 통해 후보단일화 문제를 빠르게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나 대표는 "국민모임 정 후보의 갑작스러운 출마는 진보진영 선거 연대에 심각한 난관을 초래할 것으로 보여 유감스러웠다. 4자 연대가 무산될 위기가 오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지난 7일 정 후보는 당사를 방문해 제게 진심어린 사과를 했고, 노동당에 재보선 공동정책과 이후 만들어질 새로운 진보정당의 방향을 담은 제안서를 전달했다. 저희들은 제안서가 그동안 노동당이 다듬어 온 정책 및 진보정치의 발전방향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선거 연대 성사 배경을 설명했다.  

노동당과 국민모임이 합의한 '5대 공동정책'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및 노동 주도 경제 회생(최저임금 1만 원, 파견노동 철폐 등), △보편복지 확대(무상급식,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 △민생경제 및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실현(전월세상한제, 연기금으로 사회주택 확보 등), △핵발전소의 단계적 철폐 및 세월호 진상규명,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 등 정치개혁 등이다.  

국민모임은 "불출마로 '박근혜 정부 심판, 제1야당 교체'의 불씨를 살리고자 통 큰 결단을 내린 나 대표와 노동당 당원들께 깊은 경의와 감동을 표한다"며 "나 대표와 노동당원, 국민들의 염원을 무겁게 받들어 관악을에서 반드시 승리해 2017년 정권교체를 실현할 것"이라고 대변인 논평을 통해 밝혔다. 

정의당과는…단일화도 아니고, 단일화가 아닌 것도 아닌? 

나 대표의 불출마 결정으로, '진보 통합' 논의에 참여한 4자 소속 정치인 가운데 관악을 후보로 나선 이는 정 후보가 유일하게 됐다. 결과만 놓고 보면 단일화가 성사된 모양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라는 말이 붙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정의당은 전날 "4월 재보궐선거에서 4자 간 공동 대응을 논의해 왔으나, 후보단일화를 추진할 만큼 신뢰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며 "후보단일화는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고 대변인 논평을 통해 밝혔다.  

당초 전날인 9일 오전까지만 해도 정의당을 포함한 4자 연대가 성사될 것이라는 전망이 높았으나, 정 후보가 같은날 오전 이들과의 협의 없이 후보 등록을 진행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후보 등록을 정의당 등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이면서 정의당 내부의 부정적 여론이 높아진 것. 특히 2007년 열린우리당 탈당, 최근의 노무현 전 대통령 비판(☞관련기사 : 정동영 "노무현, 세상 바꾸지 못했다") 등을 이유로 처음부터 정 후보에게 부정적이었던 구 국민참여당계 당원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단일화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 9일 정의당 긴급상무위원회에 참석했던 박원석 의원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정의당 내에서 그의 과거행적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던 당원들의 많은 문제 제기가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박 의원은 같은 글에서 "정의당은 원내정당으로서 책임감과 인내심을 가지고 4자 연대를 추진해 왔지만, 국민모임의 정치적 미숙함과 목적과 수단을 분간 못 하는 정 후보 측의 방약무인함을 더 이상은 용인할 수 없었다"고 비난했다.  

이같은 상황이 '단일화가 아닌' 이유라면 '단일화가 아닌 것도 아닌' 것이라는 말이 나올 법한 정황도 있다. 정의당은 같은 논평에서 "관악을 이동영 정의당 예비후보의 후보 등록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타 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도 아닌데, 이미 출사표를 쓴 자당 후보를 사퇴시키겠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박 의원 등 정의당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사실상 정동영 지지가 아니냐'는 관측이 있는데 전혀 아니다"라며 "당 차원은 물론 지역에서도 그 어떤 형태의 선거 지원이나 선거운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10일 오전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가 S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진보 4자 연대를 지속하기 위해서 저희 후보가 결단을 내린 것이고, 그런 점에서 '정동영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서 사퇴했다'고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다. 다만 향후에 선거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논의 과정에 있다"고 말하는 일도 일어났다. 정의당 내부에서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빗발치자, 권태홍 당 사무총장이 나서 "긴급상무위에 심 원내대표는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했고, 회의의 결정에 대해서 오해가 있었다"며 "혼선임을 확인했다. 사과드린다"고 당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권 총장은 참여당 출신이다. 

국민모임 "4자 연대 신뢰 훼손 사과…광주·인천 정의당 후보 지지" 

정의당도 이처럼 후보 사퇴 결정에다 내부의 '혼선'까지 겹쳐지며 홍역을 치렀지만, 국민모임도 정치적 역량 부족을 드러내며 결국 양 측 모두 상처를 입은 셈이 됐다. 특히 정 후보는 대선 후보까지 지낸 '큰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을 것으로 보여, 향후 새누리당 및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와의 본선 3파전을 앞두고 얻을 '단일화 시너지 효과'의 크기에도 물음표가 찍히는 상황이다. 

국민모임은 이날 오후 오민애 대변인 논평을 통해 "우리 측의 본의 아닌 불찰로 연대의 신뢰를 훼손하고 4자 연대에 장애를 조성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공식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모임은 "정의당이 이번 선거에서 진보진영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지 않기로 한 것은 안타깝지만, 이동영 예비후보가 후보등록을 하지 않기로 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며 "후보 단일화가 무산되었지만, 진보 결집과 야권 교체를 위해 정의당 강은미 후보(광주 서을)와 박종현 후보(인천 서강화을)를 지지하며 이들의 승리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정의당은 이에 대해 아무 입장도 내지 않았다. 

한편 4자 연대의 한 축인 노동정치연대는 결국 정 후보와의 단일화 쪽으로 결론을 낼 것으로 보인다. 이병렬 노동정치연대 집행위원은 "아쉽게 4자 합의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 정신 자체는 계속 가져가야 하고, 이를 토대로 진보 결집을 논의해야 한다"며 "정 후보가 당선되거나 나름대로 선전하기를 바라고, 그와 관련한 대응 수위는 추후 논의해 선거운동기간 시작 전(16일)까지 결정할 것"이라고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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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세월호 행진단에 캡사이신 무차별 난사

두 번 눈물 흘린 유족들 "다음엔 8만·80만 모아달라"

[현장] 경찰, 세월호 행진단에 캡사이신 무차별 난사

15.04.11 17:06l최종 업데이트 15.04.12 00:54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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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에 가로막힌 시민과 유가족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열린 국민총력행동을 마친 시민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행진하던 중 경찰에 가로막혀 대치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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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사이신에 고통스러워하는 영석아빠 세월호 유가족 오병환씨가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열린 국민총력행동을 마치고 시민들이 청와대로 행진하던 중 경찰병력이 뿌린 캡사이신에 맞아 고통 스러워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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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유가족, 경찰벽에 제자리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열린 국민총력행동을 마친 시민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행진하던 중 경찰에 가로막혀 대치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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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함철 서북청년단 대변인이 세월호 시민-유족들의 행진을 막으려고 나섰다가 거부당하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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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신 : 12일 오전 12시 10분]
세월호 가족 두 번 울린 박근혜... "8만, 80만 모아달라"

세월호 가족들이 두 번 울었다. 11일 낮 서울 광화문 분향소에서 자식들 영정에 헌화하며 눈물을 훔쳤던 세월호 엄마 아빠들은 이날 밤 경찰이 뿌린 캡사이신에 눈물을 강요당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닷새 앞두고 광화문 광장에 열린 국민총력투쟁은 대정부 성토장이었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활동을 사실상 제약하는 정부 시행령을 입법예고한 데 이어, 오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남미로 떠난다는 소식이 불을 지른 것이다.

정부 시행령 폐기를 요구하며 5일째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태호 세월호국민대책위 공동운영위원장은 "애초 이번 주를 추모 기간으로 하려고 했지만 세월호 가족들이 지금은 추모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라면서 거부했다"면서 "4월 16일에 외국 나간다는 데 이런 대통령에게 진심이나 진정성을 기대할 수 있겠나"라고 비판했다.

세월호가족대책위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단원고 희생자 찬호 아빠 전명선씨는 "진상 규명 않고 선체 인양 선언이 없는 이상 우린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면서 "차라리 우리 국적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이어 "어제 이완구 총리 답변을 못 들었는데 세월호 진상규명과 선체 인양, 안전사회 답변은 박근혜 대통령이 해야 한다"면서 "답변 받을 때까지 함께 해달라"고 당부했다. 

전 운영위원장은 시민들에게 "오늘 그 답변을 받도록 하자"고 말했고 시민들은 약속을 지켰다. 이날 오후 7시쯤 행사를 마친 시민 수천 명은 청와대 행진에 동참했다. 경찰이 미국 대사관부터 청와대로 가는 길을 차벽으로 가로막자 종로와 을지로 일대로 시가행진을 벌인 뒤 광화문 광장으로 오후 9시쯤 재진입했다.

경찰은 방어벽이 뚫리자 시민들에게 매운 캡사이신을 무차별 난사했다. 이에 시민들은 우산이나 비닐로 가린 채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고, 뒤에 있던 시민들이 플라스틱 물병을 던지며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 3명과 대학생 등 시민 1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종로경찰서 경비과장은 '세월호국민대책위'만 지목해 해산을 요구하며, "유가족에게는 캡사이신을 뿌리지 말라"고 마치 유가족들을 배려하는 듯 했지만 '말장난'일 뿐이었다. 노란 재킷을 입은 세월호 유가족 30여 명이 이날 오후 10시 30분쯤 시민들 부상을 우려해 대치 중인 경찰들 사이로 들어갔지만, 경찰은 유가족에게도 예외 없이 캡사이신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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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사이신이 눈에 들어갔어'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열린 국민총력행동을 마친 한 시민과 세월호 유가족들과 청와대로 행진하던 중 경찰이 뿌린 캡사이신을 맞아 물로 씻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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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들어간 캡사이신 한 시민이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열린 국민총력행동을 마친 시민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행진하다 경찰에 가로막혀 대치하던 중 캡사이신에 맞아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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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청와대 앞으로 가 박 대통령의 답변을 받아내겠다던 유가족의 바람은 끝내 무산됐다.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들과 경찰의 대치 상태가 끝내 자정을 넘기고 만 것이다. 결국 유가족 3명은 풀려났지만 나머지 시민들은 석방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서 행진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전명선 운영위원장은 이날 자정께 "우리 가족을 보호하려고 끝까지 함께 한 시민 여러분께 감사하다"면서 "시민들이 더는 연행돼선 안 된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 가족들이 지켜드리겠다"며 시민들에게 귀가를 제안했다.

전 위원장은 "청와대 가려고 하니 8천 명 갖고 안 되겠더라, 오는 4월 16일에는 한 명당 100명, 1000명, 1만 명이라도 동원해서 국민들의 힘이 뭔지 보여주자"면서 "4월 16일은 추모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진상 규명 답변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참여를 호소했다.

[3신 : 오후 10시] 
"박근혜가 책임자다, 책임자를 처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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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사이신 뿌리는 경찰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열린 국민총력행동을 마친 시민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행진을 시작하자 경찰병력이 대치 도중 캡사이신을 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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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벽 앞에 붙은 노란리본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열린 국민총력행동을 마친 시민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행진하자 이를 가로막은 경찰 앞으로 세월호 노란 리본이 붙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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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방패에 눌린 유가족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열린 국민총력행동을 마친 시민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행진하던 중 경찰에 가로막혀 대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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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벽에 주저 앉은 세월호 유가족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열린 국민총력행동을 마친 시민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행진하던 중 경찰벽에 가로막혀 대치를 하다 바닥에 앚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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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혜 장벽'도 세월호 시민을 막진 못했다. 11일 오후 9시쯤 광화문 광장으로 돌아온 시민들은 철옹성 같았던 경찰 방어벽을 일부 들어내고 경찰과 직접 대치했다. 

경찰은 시민들을 불법 시위대로 간주하고 캡사이신을 난사하며 대응했다. 눈에 직접 캡사이신를 맞은 시민들이 고통을 호소하자 다른 시민들이 물을 뿌려 응급처치를 하고 있다.

시민들은 깃발로 사용했던 대형 비닐을 사용해 캡사이신를 막으며 맞서고 있다. 

이날 오후 8시쯤 경찰 차벽에 막혀 행진을 시작한 세월호 가족과 시민 수천명은 1시간만에 다시 광화문 광장으로 모였다.

이들은 종로와 을지로를 거쳐 시청 광장을 돌아 광화문 4거리까지 행진하며 구호를 외쳤다. 시청을 지날 때는 청사 벽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 "시행령 폐지하라" "화이팅" 등 응원 문자메시지가 떠 시민들이 환호하기도 했다.

경찰은 집회와시위에관한법 위반과 일반교통방해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거듭 해산을 명령했다. 종로경찰서 경비과장이 깃발을 든 사람을 체증하라고 명령하자 시민들은 손팻말을 높이 들고 "우리도 깃발이다"라고 맞섰다.

경찰 충돌 과정에서 일부 시민이 다치고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단원고 희생자 오영석군 엄마 권미화씨는 "이 정도 경력이면 우리 아이들 구했을 텐데 왜 우리를 방해하고 있느냐"며 "우리가 불법이 아니라 경찰이 우리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4.16연대에 따르면,오후 10시 20분 현재 대학생 권아무개군 등 14명이 연행된 것으로 파악됐다.

[2신보강 : 11일 오후 8시 30분] 
세월호 시민 막은 '근혜 장벽'... 광화문 광장서 대치

오후 7시쯤 국민총력행동을 마친 시민과 유가족 8천여명은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에 나섰으나 경찰이 광화문광장에 방어벽을 치고 차단했다. 시민들은 광화문 양방향 차도를 통해 이동하려 했지만 경찰은 버스를 동원해 차벽을 설치해 정부중앙청사 앞과 역사박물관 앞 차량과 사람 통행을 막고 있다. 

시민들의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 구호는 박근혜 퇴진 구호로 바뀌었다. 7시 50분 현재 시민과 경찰은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다. 경찰은 차벽 뒤쪽에 수천명의 경력을 배치하고 시민 해산을 명령했고 4.16연대쪽은 평화로운 행진을 보장하라며 차벽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곳곳에서 경찰과 시민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현재 큰 충돌없이 대치가 계속되고 있다.

장시간 대치가 계속되자 4.16연대는 8시쯤 유족들을 한 곳으로 불러모은 뒤 반대방향으로 우회해 행진에 나섰다.

행진단은 오후 8시 30분 현재 종로2가까지 진출했다.

[1신 : 11일 오후 4시 10분] 
"추모 아닌 결의"... 세월호 '눈물'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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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4.16연대)'와 세월호 유가족들이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와 청와대 규탄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이날 처음 설치된 희생자 분향소에 헌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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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보낸 지 1년이 다 되도록 부모의 눈물은 마를 줄 몰랐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자식 영정 앞에 꽃을 바치며 흘린 눈물에는 추모가 아닌 결심과 결의가 담겨있었다.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아래 4.16연대)'와 세월호 유가족들이 11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고 청와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자식들 영정 앞에 결의를 다졌다. 

"세월호 인양-시행령 폐기, 박 대통령에게 달렸다"

이날 농성장에는 1주기를 앞두고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광화문 분향소가 다시 설치됐고 세월호 희생자 사진과 이름이 새겨진 '기억의 문'과 노란종이배 모형이 설치됐지만 단지 '추모'의 의미만은 아니었다. 죽은 이의 증언을 들어야 할 박근혜 대통령에게 더 가까이 서겠다는 의미였다.

단원고 학생 '재욱 엄마' 홍영미씨는 "분향소는 애도하는 분향소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똑바로 세우는 분향소"라면서 "지난 1년 정부는 우리 아이를 살리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우린 아이들을 살려내고 어떤 게 사람 사는 세상인지 보여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유가족들은 전날 이완구 국무총리 면담이 무산된 데다 1주기 당일인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남미 순방을 떠난다는 소식에 분개했다(관련기사: 세월호 유족 "총리, 오라더니 왜" 대치 끝에 면담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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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4.16연대)’와 세월호 유가족들이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 청와대 규탄 기자회견에 앞서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해 묵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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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연대는 기자회견문에서 "떠나기 전 세월호 추모 일정을 갖겠다고 하지만 대통령의 추모는 추모가 아니다"라면서 "가족들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해 이대로는 추모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대답을 내놓고 해결을 해야 할 대통령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누구를 추모하겠다는 말인가"라고 비판했다. 

4·16연대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 양한웅 조계종 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은 "4월 16일은 전국민 추모일이다, 하루 동안 울면서 반성하는 날 떠난다면 정상적인 대통령은 아니다"라면서 "나갈 거면 들어오지말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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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종이배를 담을 모형 종이배가 11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 설치돼 있다. 유리 조각 하나하나에는 304인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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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월호 인양에 1년 6개월 이상 걸린다는 전날 정부 기술조사 결과에 대해서도 양 위원장은 "전 국민의 관심을 돌리는 수작"이라면서 "유가족은 1초가 급하다, 즉각 인양하라"고 촉구했다. 

유가족과 국민들은 이날 오후 5시 30분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국민총력행동을 진행한 뒤 청와대 앞으로 행진할 예정이다. 4·16연대는 "대통령령(시행령)의 최종 지휘자도, 세월호 인양을 공식 선언할 책임자도, 세월호 침몰사건의 최종 책임자도 대통령"이라면서 "말해야 할 단 한 사람은 대통령이고, 들어야 할 사람은 가족들과 국민들이기 때문"이라고 청와대로 향하는 이유를 밝혔다.  

문화예술인들, 광화문 일대서 세월호 진심 인양 '연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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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서울 광화문 농성장에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기억의 문'을 설치학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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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광화문 광장 일대에선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세월호, 진심을 인양하라'는 주제로 문화예술인들이 준비한 '3차 연장전'을 비롯한 추모 행사가 열렸다. 공연과 전시회에 머물지 않고 사진작가와 기자, 문학인, 연극인, 풍물단체 대표, 청년예술가 등 각 분야에서 토론회를 열어 세월호 참사의 의미를 되새겼다. 

하장호 예술인소셜유니언 사무처장은 "사진작가들이 세월호 희생 학생들의 '빈 방'을 찍은 사진전을 봤는데 끝까지 볼 수 없었다"며 "예술인 마음속에도 텅 빈 공간을 느껴 예술의 '연장'을 들고 진심 인양을 위한 연장전을 기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세 번째 '연장전'은 이날부터 12일까지 1박 2일간 이어진다.

○ 편집 ㅣ 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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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곡간 지었더니 참매부터 삵까지 '동물 천국'

 
윤순영 2015. 04. 10
조회수 996 추천수 0
 

철원 두루미 곡간 개장 6개월, 기대 못미쳤지만 "첫 술에 배 부르랴"

두루미 생태 맞도록 세심하게 문제 보완하고 올 겨울 기다릴 터

 

YSJ_9718.jpg» 햇살을 받으며 하늘을 나는 두루미 부부의 깨끗한 모습.

 

크기변환_곡YSY_8662.jpg» 두루미 곡간 앞으로 재두루미가 날고 있다.

 

지난해 1111일 강원도 철원군 이길리에 두루미 곡간의 문을 열었다. 이후 두루미가 좋아하는 벼와 옥수수를 주며 기쁜 손님이 날아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YSJ_4671.jpg» 두루미 곡간을 찾아온 때까치. 앙징맞지만 포식자다.

    

YSJ_3959.jpg» 큰말똥가리도 나타나 청둥오리를 노린다.

 

먹이를 주기 시작하자 제일 먼저 마을 인근에 사는 까치가 두루미 곡간을 찾아왔다그 후 까마귀멧새참새때까치물까치청둥오리잿빛개구리매큰말똥가리참매고라니 등이 차례로 두루미 곡간을 기웃거린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야 조심성 많은 두루미가 왔다.

 

 

YSJ_6590.jpg» 참매도 두루미 곡간에 나타났다.

 

YSJ_6892.jpg» 삵은 두루미 곡간에 앉은 청둥오리를 노린다.

 

땅거미가 깔릴 무렵이면 청둥오리가 어김없이 먹이를 먹으러 두루미 곡간에 날아든다참매는 이때 놓치지 않고 사냥을 시작한다.

 

참매는 일반적으로 낮에 사냥을 하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어두운 그림자처럼 보이는 청둥오리를 사냥하는 모습을 두루미곡간에서 처음 목격했다참매가 사냥한 청둥오리를 수리부엉이가 채 간다.

 

삵도 곡간 주변을 낮에 은밀하게 돌아다닌다이제는 멧돼지도 나타났다동물농장이다.

 

YSY_4830.jpg» 두루미 곡간으로 날아드는 청둥오리 무리.

 

YSY_5031.jpg» '이건 꿈일 거야' 참매에 붙잡인 청둥오리 암컷이 너무 놀랐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탄강에 있는 두루미 잠자리에서는 사진 촬영을 위해 4년 동안이나 먹이를 주었다. 따라서 이들이 두루미 곡간으로 당장 와서 먹이를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 아니다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길게는 3년 이상 걸릴 거라는 생각을 하고 시작한 일이다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먹이를 공급하여 두루미들의 먹이 터로 각인을 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두루미가 곡간을 찾아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이유는 뭔지 모르겠다성급한 마음이 앞선다.

 

크기변환_곡YSJ_2695.jpg» 두루미 곡간으로 처음 날아드는 재두루미 가족. 왼쪽의 새끼 두 마리가 어미를 따르고 있다.

 

YSJ_7661.jpg» 곡간에 처음 방문한 이 재두루미에게 '곡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다행히 1120일 재두루미 가족 4마리가 찾아와 황량한 두루미 곡간의 체면을 살려준다재두루미에게 '곡간이'라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 시기에 철원군은 이길리 지역의 관광을 활성화한다며 한탄강 두루미 잠자리에 탐조대와 1㎞에 이르는 한탄강 둑에 가림막을 쳐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게 만들었다. 한탄강에 탐조 관광객과 사진 촬영하는 사람들이 사전 지식 없이 무분별하게 다니고 있다.

 

크기변환_곡YSY_3035.jpg» 곡간 앞을 오가는 두루미 무리.

 

크기변환_곡YSJ_9295.jpg» 곡간 앞은 두루미들의 길목이기도 하다.

 

지역의 경제 활성화도 좋지만 예민한 야생동물을 탐조하는 기본이 안 되어 있다. 교란을 줄이기 위한 방안이나 프로그램 없이 운영하는 관광 사업 때문에 300여 마리에 이르는 한탄강 두루미의 잠자리에 생태변화가 생겼다.

 

YSY_3852.jpg» 재두루미 곡간 가족의 텃세 소리를 듣고 곡간을 스쳐가는 두루미들.

 

요즘 한탄강 잠자리에서 두루미는 잠을 자지 않는다탐조사업이 이대로 진행된다면 '두루미 자는 마을'이란 철원군 이길리의 자랑거리가 두루미 쫓는 마을로 전락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하루 빨리 이길리 주민들은 두루미 잠자리의 교란을 줄이는 방안과 두루미 탐조를 위한 프로그램을 모색해 두루미 쫒는 마을이 아닌 두루미 자는 마을로 다시 자리매김 했으면 한다.

 

YS1_8381.jpg» 한탄강에서 여유롭게 물을 마시며 물고기를 잡는 두루미와 재두루미.

 

YS3_9993.jpg» 2014년 1월 한탄강 두루미 잠자리, 올해는 잠을 자는 두루미를 많이 볼 수 없었다.

 

특히, 한탄강 잠자리에 모이를 줘 사진을 촬영하는 장소로 이용하는 것도 생태적으로 문제가 있다.

 

두루미들은 한탄강 잠자리에서 일어나 평야로 나가 낱알을 먹고 목이 마르면 한탄강으로 날아와 목을 축이고 목욕과 휴식을 취한다. 또 단백질이 풍부한 물고기를로 잡아먹곤 다시 평야로 나가는 일상적인 생활 질서를 유지한다.

 

YSJ_2695.jpg» 두루미 곡간에서 바라본 석양 속으로 두루미가 날고 있다. 

 

크기변환_곡YSY_3035.jpg» 두루미 곡간 앞을 지나 한탄강으로 두루미 무리가 날아들고 있다.

 

그러나 사진 촬영의 편의를 위해 한탄강에 곡식류를 공급하고 있다자연적인 생태를 인위적으로 바꿔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평야는 먹이 터로한탄강은 잠을 자고 또 단백질 공급을 하는 어장이 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크기변환_곡YSY_4293.jpg» 눈발을 헤치며 한탄강으로 날아가는 두루미.

 

크기변환_곡YSY_5123.jpg» 잠자리 한탄강을 뒤로 하고 토교저수지로 잠자리를 옮겨가는 두루미들.

 

한탄강이 아니라 평야에 지속적으로 먹이를 공급해야 두루미의 월동을 도울 수 있다. 또 두루미를 찾아다니며 무분별한 탐조와 사진촬영을 해 두루미를 방해하는 것을 막는 안정적인 탐조 장소를 제공하는 효과도 있다.

 

YSJ_2631.jpg» 두루미 곡간으로 날아드는 두루미 가족.

 

1SY_5337.jpg» 이 두루미에겐 '소란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두루미 곡간의 지명인 '소란'에서 따 왔다.

 

124일 두루미 가족 4마리도 두루미 곡간을 찾아왔다두루미 곡간 자리의 지역명은 소란이어서 '소란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빨리 두루미를 맞아들이고 싶은 성급한 마음이 들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앞서 곡간에 자리 잡은 재두루미는 두루미 가족을 받아들였다그 이후 지속적으로 두루미 곡간을 찾아온다두루미는 두루미에게 텃세를 하고 재두루미는 재두루미에게 텃세를 한다.

 

YSJ_2397.jpg» 두루미가 가족이 재두루미 영역을 침범했다. 왠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한다.

 

크기변환_곡YSJ_8684.jpg» 재두루미 '곡간이' 가족은 두루미 '소란이' 가족을 받아들였다.

 

크기변환_곡YSJ_1040.jpg» 다른 재두루미 무리가 날아와 앉는다. 그러나 잠시뿐 곡간이 가족 텃세에 밀려난다.

 

그래도 곡간이와 소란이가 한탄강으로 물을 먹으러 가면 두루미 곡간이 잠시 빈다그 틈을 타 다른 두루미들이 날아와 먹이를 먹는다그러나 잠시뿐 한탄강으로 내려갔던 곡간이와 소란이가 올라와 모두 쫓아낸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다정말 두루미 텃세는 대단하다두루미는 사적 영역과 집단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새다자기 공간을 간섭받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성격이다.

 

크기변환_곡YSJ_7428.jpg» 영역 침범에 경고하는 어미 곡간이. 새끼가 옆에 긴장한 듯 서 있다.

 

경계심이 많고 낯선 장소에 앉는 것을 꺼리는 두루미에게 두루미 곡간이 선뜻 다가서기 쉬운 곳은 아니다. 곡간의 구조물도 낯설고 처음부터 탐조대와 먹이 터 사이의 거리를 100m 정도로 잡은 것도 너무 짧았다.

 

300~400m 거리를 두고 서서히 앞으로 유인하는 방법이 옳았던 것 같다비닐하우스로 지은 탐조대 지붕 위에 형광색 차광막을 친 것이 오히려 눈에 띄어 거부감을 주는 것 같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검은색이 가장 무난할 것 같다소리도 덜 들리고 사람의 형체도 보이지 않게 두루미 곡간 주변의 가림막도 높이고 완전한 차폐 가림막 시설을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크기변환_곡YSJ_1238.jpg» 여유로운 소란이 가족 왼쪽에 갈색 목의 새끼 두루미 두마리가 보인다.

 

 

주변에 차량의 움직임이나 사람들의 서성임이 없게 사전에 차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했다. 갈대를 논 주변이나 논둑에 심어 자연적인 은폐물로 하는 것도 안정감을 주었을 것이다.

 

먹이만 주면 두루미가 모여들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은 큰 착오였다두루미는 예민하고 경계심이 강한 동물인데 쉽게 생각했다. 가장 편안하고 자연적인 두루미 은폐 시설과 안정적인 환경조성이 필요하다.

 

크기변환_곡YSY_2443.jpg» 석양빛을 받으며 먹이를 먹는 곡간이 가족. 항상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두루미 곡간의 곡간이와 소란이의 텃세가 유독 심했던 이유는 환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지난해와 올해는 눈이 적게 내려 두루미가 먹이를 찾기 쉬웠다눈이 많이 왔다면 먹이를 찾기 힘든 두루미들이 두루미 곡간으로 몰려들어 텃세가 먹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크기변환_곡YSY_3250.jpg» 두루미 곡간 앞을 줄지어 날아가는 재두루미.

 

크기변환_곡YSY_3280.jpg» 두루미 곡간 앞 전경.

 

두루미 곡간은 한탄강 잠자리와 목욕과 휴식을 하며 단백질을 섭취하는 길목에 있다천혜의 자리를 잡고도 인간 중심적인 생각에서 두루미에 세심한 배려를 하지 못했음을 새롭게 배웠다.

 

크기변환_곡DSC_0382.jpg» 곡간이 가족과 소란이 가족이 평화롭게 먹이를 먹는 곳에 고라니도 함께 한다.

 

크기변환_곡DSC_0422.jpg» 저녁 무렵 불청객 멧돼지가 나타났다. 두루미 가족들이 경계한다.

 

DSC_0443.jpg» 고라니가 놀라 달아난다.

 

많은 수의 두루미가 곡간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르랴! 

 

두루미를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점과 해결방법을 야생에서 두루미 생태를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배우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앞으로 야생관찰을 통해 소중한 자료로 축적하여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DSC_0563.jpg» 멧돼지가 소리를 지르며 심통을 부린다.

 

 크기변환_곡DSC_0610.jpg» 결국 두루미를 쫒아내는 멧돼지.

 

올 3월 중순까지 먹이를 3t 이상 주었다일반인을 비롯해 학생들의 먹이주기 체험 행사도 함께 했다.

 

지난 6개월 동안 기대했던 많은 수의 두루미가 오지 않아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후원을 아끼지 않은 많은 분들과 두루미 곡간에서 수고한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지금쯤 우리나라를 떠난 두루미들은 러시아 아무르 강 유역에 도착하여 짝짓지를 하고 둥지 만들기에 한창일 것이다. 그 동안 두루미곡간의 문제점을 보완해 올 10월 곡간이와 소란이가 두루미 곡간을 다시 찾아와 줄 것을 기대해 본다.

  

철원/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한겨레 <물바람숲>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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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 국무총리 면담 결국 무산.. 경찰 또 과잉대응

[현장] 세월호 유가족 “면담하러 오라더니.. 경찰 왜 막나”이완구 국무총리 면담 결국 무산.. 경찰 또 과잉대응
강주희 기자  |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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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10  20:27:11
수정 2015.04.11  09: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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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는 10일 오후 2시 30분 이완구 국무총리와의 면담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행령안 폐기 및 선체 인양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go발뉴스(강주희)
세월호 유가족과 이완구 국무총리의 면담이 결국 무산됐다. 유가족들은 “국무총리의 일정을 경찰이 이유 없이 막고 있다. 이럴려고 불렸냐”며 분노를 토했다.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이하 가족협의회)는 10일 오후 2시 30분 이완구 국무총리와의 면담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는 세월호 선체 인양을 정치적으로 이용 계산하지 말고, 특별법 시행령안을 즉각 폐기할 것을 약속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진상규명과 시행령안 폐기, 선체 인양을 통한 실종자 수습만이 최우선이라는 가족들의 울부짖음을 정부는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선체 인양 공식선언을 하지 않는다면 유가족들은 국민들과 오랫동안 준비한 1주기 추모식을 취소한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정부는 분명히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유가족들은 오후 3시 서울 삼청동에 있는 국무총리 공관으로 향했다. 노란색 점퍼를 입은 유가족 80여명은 인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러나 5분도 되지 않아 경찰 100여 명이 폴리스 라인을 치며 이들의 길을 막아섰다.

#. 오후 3시 8분 광화문 KT 앞

“국무총리가 우리 보고 면담하러 오라고 했다니깐. 경찰이 왜 막냐고.” 경찰이 유가족들을 막자 ‘성호아빠’ 최경덕씨가 내뱉은 말이다. 경찰은 추가인력을 동원해 유가족들을 막았다. 여경들은 세종대왕상 앞에 폴리스 라인을 그렸고, 채증을 준비하는 경찰들이 유가족들을 둘러쌌다.

   
▲ 경찰의 제지에 항의 하고 있는 전명선 416가족협의회 위원장 ©go발뉴스(강주희)
유가족들은 경찰을 피해 광화문 수로 쪽 인도로 걸었다. 그러나 경찰은 유가족들을 방패로 밀며 차도로 몰아냈다. 이 때문에 달리던 차들이 멈추고 경적을 울려댔다. 

 

경찰의 막무가내 대응에 유가족들은 “길을 왜 막냐. 국무총리와 4시에 면담 약속이 되어있다”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경찰은 “신고 되지 않은 집회”라며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가족협의회에 따르면 이날 면담은 지난 7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에게 먼저 제안했다. 유가족들은 임원진 11명만 면담에 참석하고 총리 공관 앞에서 면담 결과를 기다릴 예정이었다.

#. 오후 3시 26분 광화문 KT앞

유가족들은 막아서는 경찰을 피해 주한미국대사관 쪽으로 이동했지만 경찰의 제지를 피하지 못했다. 결국 광화문 KT 앞에서 30분 넘게 경찰 대치를 이어가며 면담이 성사되길 기다렸다.

면담 참석자로 예정된 전명선 위원장은 국무조정실과 통화해 항의했다. 전 씨는 취재진에게 “국무조정실에서는 유가족들을 막으라고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종로서에서 나와 유가족들을 막고 있다. 이게 과잉충성이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말했다.

   
▲ 경찰의 저지에 가로 막힌 세월호 유가족.©go발뉴스(강주희)
시간이 흐르자 국무조정실과 경찰 측에 엇갈린 주장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유경근 위원장은 “국무조정실 측은 유가족들을 막으라고 지시한 적도 없고, 11명만 올라오라고 한 적 없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 정보관에게 물어보면 (국무조정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11명만 올라가시면 안 되냐고 한다. 어디 말을 믿어야 하냐”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 오후 4시 광화문 KT앞

국무조정실 관계자들이 세월호 유가족을 찾아온 시간은 오후 4시. 이완구 국무총리와의 면담이 약속된 시간이었다. 국무조정실 장상윤 사회복지정책과장은 “국무조정실에서 유가족들을 막으라고 한 적이 없다. 우리는 면담 참석자 11명만 온다고 들은 상황이다”라고 해명했다.

그는 “종로경찰서 관계자에게 집단적으로 이동하는 것은 질서 유지상 집회 신고를 해야 한다고 들었다”며 “면담 장소인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 앞은 매우 협소하고 청와대도 옆에 있고 해서 (단체로 가기 어려울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이완구 총리와의 면담이 지연되자 국무조정실 관계자들이 전명선 가족협의회 위원장과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전명선 416 가족협의회 위원장, 장상윤 국무조정실 사회복지정책과장, 이승규 세월호 피해자 지원단 피해지원과장. ©go발뉴스(강주희)
그러나 경찰이 유가족들을 막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계속 확인해봐야 할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유가족을 막는 주체에 대한 질문에도 답변하지 않았다. 정 국장은 함께 온 관계자들과 함께 다시 삼청동 국무총리실 공관으로 향했다. 유가족들의 기다림만 더 길어지고 있었다.

 

#. 오후 4시 20분 광화문 광장

경찰과 약 1시간 30분 가량 대치를 벌인 유가족들은 결국 광화문 광장으로 이동해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유경근 위원장은 “면담을 11명이 하든 안 하든 총리 공관 앞에서 기다려 면담 결과를 듣고 싶다는데 굳이 이것을 막아야 할 근거나 이유가 있느냐”고 성토했다.

그는 “국무조정실이 유가족들에게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허락 받는 11명만 갈 수 있다는 거다. 아무리 대한민국 국무총리의 파워가 막강하다해도 국민이 가고 싶은 땅을 걸어가겠다는데 그것도 총리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냐. 너무나 황당해서 웃음 밖에 안 나온다‘라고 비난했다.

#. 오후 5시 10분 광화문 광장

오후 5시 10분. 약속된 면담 시간은 한 시간이 지났다.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모인 유가족들은 저마다 “실망스러운 날들이 매일매일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성호아빠’ 최경덕 씨는 “유가족들 불러놓고 길 막는 것은 어느 나라 법이냐. 경찰이 막는 게 그게 부르는거냐”며 불만을 쏟아냈다.

   
▲ ©go발뉴스(강주희)
전명선 위원장은 경찰의 과잉대응을 비난했다. 그는 지난 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발생한 경찰의 과잉대응을 거론하며 “경찰은 방패로 유가족들을 차도로 내몰았다. 시민들이 그 모습을 보면 유가족을 무엇으로 생각하겠느냐. 왜 우리들을 자꾸 부도덕하고 파렴치한한 사람으로 만드냐”고 비난했다.

 

해양수산부가 발표한 세월호 선체 인양 기술 검토 결과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이완구 총리의 면담이 약속된 오후 4시. 해수부는 “세월호 선체를 기술적으로 인양할 수 있다”며 검토 결과를 서둘러 발표했다.

이에 ‘동수아빠’ 정성욱씨는 “오늘 해수부 브리핑 내용은 지난해 영국 TMC에서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읽은 것”이라며 “선체 인양 방법 또한 와이어를 사용한 가장 위험한 방법을 택했다”고 비난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은 5개의 요구사항을 밝혔다. ▶‘세월호 인양’ 이용한 여론몰이를 중단하고 즉각 구체적 인양 공식선언과 추진계획을 밝힐 것 ▶정부 시행령안 폐기하고 특별조사위원회가 제출했던 시행령안 수용할 것 ▲세월호 선체인양 공식선언과 정부 시행령안 폐기는 서로 주고받는 협상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할 것 ▲배보상액 발표 등을 통해 유족들을 분열시키려는 시도를 중단할 것 ▲국무총리 면담에서 위 요구들을 수용하지 않은 채, 감성·정치적 수사만을 반복하지 말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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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통은 북핵, 남·북 군사력 비교는 인용

분석: 헤리티지 보고서 ‘2015 Index of U.S. Military Strength’

이규정 2015. 04. 10
조회수 97 추천수 0
 

  지난 3월 국내 언론은 ‘남·북 군사력 격차가  2:11’이라는 보고서의 내용을 집중 보도했다. 미국의 손꼽히는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이 내린 남·북한 군사력 비교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보고서를 들여다보니 헤리티지 재단은 ‘2:11’을 말하려는 게 아니었다. 또 ‘2:11’이라는 사실도 새로운 게 아니다. 군사력 비교를 위해 인용한 자료는 2012년 한국 국방백서 영문판에 딸린 부록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South Korea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2012 Defense White Paper, p353) 보고서 전체를 봐도 남·북한 군사력 비교 대목은 큰 비중이 없다. 330쪽 분량의 보고서의 제목은 ‘2015년 미국 군사력 지수’(2015 Index of U.S. Military Strength)다. 남·북한 관련 내용은 10쪽도 되지 않는다. 그건 보고서의 부제가 ‘일반적인 국방(정책)을 수립하는데 요구되는  미국의 능력 평가’(Assessing America’s Ability to Provide for the Common Defense)‘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군사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초점이기 때문이다.
  보고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미국이 직면한 군사적 위협요소다. 보고서는 이를 6가지로 꼽았는데 그 중에 북한이 포함돼 있다. 미국이 보는 북한의 위협은 미국에 대한 위협이다. 당연히 남·북 군사력 비교는 초점이 아니다. 북한의 경우 핵무기 개발능력과 이를 운반할 수 있는 장거리투사능력이 평가대상이다.
  헤리티지 재단은 전통적으로 공화당 쪽 싱크탱크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규정하며 이른바 '스타 워즈(Star Wars), 궤도 탄도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레이건 행정부의 전략 방위 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 계획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방부 자료 보고 어이없다는 국방부

군사력.jpg
남·북 군사력 비교 2015 Index of U.S. Military Strength, ⓒHeritage Foundation

 

  헤리티지 보고서 발간 이틀 뒤 한국 국방부는 황당하다는 반응을 내놨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2월26일 남·북한 군사력이 2:11 수준이라고 이 보고서가 평가를 했다는 보도에 대해 "국방부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라며 "가령 가스레인지와 전자레인지가 있는 집에 옛날에 쓰던 석유곤로가 있다면 이것을 음식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느냐와 같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대변인은 "한국군은 오래된 것(무기들)은 운영비가 많이 들고 실질적인 전투력은 발휘하지 못해 빨리 빨리 폐기하지만 북한은 재래식 전투력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다"며 "전투력을 비교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래된 무기까지 단순숫자만 비교하는 것은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분석이어서 전혀 동의할 수 없다"라고 꼬집었다.
  그런데 국방부 대변인이 이 비판은 적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헤리티지 재단이 오히려 황당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헤리티지 재단이 인용한 남·북 군사력 수준의 원자료 즉, 그 자료의 출처는 다름아닌 2012년 국방백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근거로 헤리티지 재단이 남·북 군사력이 2:11로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다는 평가를 내린 것도 아니다.
  국방백서는 부록3에 연례적으로 남·북 군사력 비교 도표를 담아왔다. 2012년 국방백서 남·북 군사력비교 도표에 따르면 남한이 북한에 비해 우세한 건 장갑차, 헬기 보유대수 뿐이다. 나머지 11개 항목에서는 북한에 비해 뒤지는 것으로 나와 있다. 11개 부문은 현역병, 예비군, 전차, 대포, 로켓발사대, 지대지 미사일 발사대, 전투함, 상륙함정, 잠수함, 전투기, 수송기다. 한국 국방부가 올해 1월6일 발간한 2014년 국방백서의 숫자를 대입해 봐도 한국이 북한에 2:11로 뒤진다는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 세부적으로 보면 오히려 북한군이 수적으로 더 늘어난 분야가 많다. 북한군 탱크는 100대, 장갑차는 300대, 전투함정은 10척 늘었다. 반면에 대포와 지대지유도무기는 각각 300기, 30기씩 남한군이 늘었다.
  한국 국방부는 1968년 처음 국방백서를 발간하고 그 후 20년간 국방백서를 발간하지 않다가 1988년부터 발간해왔다. 한국이 북한에 앞서는 건 장갑차와 헬기뿐인데 2000년 이전까지는 북한군의 헬기가 집계되지 않았고 2000년부터 헬기가 집계되었다. 그래서 2000년부터 2014년까지 국방백서 남·북 군사력 비교는 헤리티지 재단 보고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14년 내내 2:11 구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국방백서는 이 숫자의 한계를 인정하는 문구를 집어넣었다. “질적 평가 표현이 제한되므로 공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양적평가를 실시한 결과”라는 것이다. 간단하게나마 질적 평가를 겻들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남한군의 육·해·공군의 대표적인 무기체계를 살펴보자.
먼저 전투기 부문이다. 남한은 460대를 보유해 820대를 보유한 북한의 절반 수준으로 추계됐다. 하지만 성능 면에서 한국 공군력은 북한 공군력과 비교할 수 없다. 남한 공군은 제4세대 전투기인 F-16, F-15K를 200여 대 보유하고 있다. 반면 북한이 보유한 4세대 전투기는 Mig-29 한 기종으로 대수는 40대 미만으로 추정될 뿐이다. 820대에는 심지어 한국전쟁 때 쓰였던 Yak-18도 포함되어 있다. 북한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전투기를 도입한 적이 없다.
  남한군의 주력 전차 K-1 시리즈는 3세대 전차로 북한의 주력 전차 천마호와 비교하기 어려운 전차다. K-1은 레이저 조준기, 열영상장비 등을 갖추고 있어 야간교전을 할 수 있으며 정밀한 디지털 탄도계산 컴퓨터를 활용해 이동 중 사격 명중률을 높였다. 반면 북한의 주력 전차 천마호는 3세대라고 보기도 어렵다. 천마호는 소련의 2세대 전차 T-62 전차를 개조해 성능을 강화해 온 것이다.
해군은 톤수가 클수록 전투력이 강하다. 일단 북한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배 중 가장 큰 배가 1,500톤 급이다. 남한은 1만9,000톤급 경항공모함인 독도함을 갖고 있다. 남한은 5,000 톤급 이상 구축함을 9척 보유하고 있다. 그 중 3척이 1만 톤급인 이지스함이다. 또 4,000톤급 구축함 3척을 포함해서, 무게가 1,000톤이 넘는 군함이 40척이 넘는다. 반면 북한은 250여척이 50톤 미만 어뢰정이며 1,000톤급을 넘는 선박은 4척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통은 북핵, 남·북 군사력 비교는 인용

 

미사일.jpg
북한 탄도미사일의 사거리 2015 Index of U.S. Military Strength, ⓒHeritage Foundation
  
  크게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이 직면한 6대 위협을 선정하고 그 내용을 서술한 뒤 능력(capability)과 행위(behavior)를 각각 나눠 평가하고 종합평가를 내렸다. 북한은 미국에 대한 6대 위협 가운데 하나다. 북한과 함께 미국에 대한 위협 요소로 지목된 대상은 중국, 러시아, 이란, 중동 테러리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의 테러리즘이다.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종합평가로 미국의 핵심이익에 대한 위협(Threat to U.S. Vital Intrerests) 평가를 내렸다.
  우선 종합평가를 보자. 미국의 핵심이익에 대한 위협 평가에서는 러시아와 중국만이 4번째 단계인 높은(high) 위협으로 분류됐고 나머지 북한을 포함한 4대 위협은 3번째 단계인 증가된(elevated) 위협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6대 위협의 능력(capability) 평가를 보면 북한은 3번째 단계인 ‘가능한’ 전력(capable)으로 분류했다. 나머지 3대 위협인 이란과 중동 테러리즘은 그보다 아래 단계인 2번째 단계 열망하는(aspirational)로 분류됐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보다 한 단계 위 4번째 단계인 ‘결집하는’(gathering)으로 평가됐다.
  6대 위협의 행위(behavior)에 대해서는 헤리티지 재단은 동일한 점수를 매겼다. 5단계로 설정된 위협 행위(behavior of threats) 지수평가를 보면 북한을 포함해 6개 위협대상에 모두가 최고단계 적대적(hostile) 단계보다 하나 아래인 공격적(aggressive)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북한 군사력 부문에서는 예상대로 핵무기 전력이 가장 큰 위협으로 꼽았다.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 당국자들의 발언과 전문가들의 분석을 인용하며 북한이 핵탄두 소형화와 이를 중거리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미국 대륙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헤리티지 재단은 또 북한이 핵탄두 10개를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했으며 탄도 미사일 사정거리가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 보고서가 무엇을 근거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핵탄두수 10개로 평가했는지는 불확실하다.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 국무부, 미국과학자연맹(FAS), 무기통제국제연대(arms control.org) 등을 출처로 명시했다. 무기통제 국제연대 자료를 보면 북한 핵탄두에 대한 내용이 있다. ‘핵무기: 누가 얼마나 갖고 있는지 한 번에 보기’(Nuclear Weapons: Who Has What at a Glance)에는 “북한이 6~8개 핵탄두를 만들기 충분한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라며 “고농축 우라늄을 얼마나 갖고 있을지는 불투명하다”라고 서술했다.
  또 헤리티지 재단은 북한이 현재 800기 단거리용 스커드 미사일, 중거리용 노동 미사일 300기, 그리고 이전보다 사정거리가 길어진 무수단 미사일 50기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헤리티지 재단은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심각한 핵운반수단을 만들었으나 핵탄두를 소형화할 수 있는 능력은 마스터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면서도 “북한이 소형화능력을 갖췄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스캐퍼로티 주한미군 사령관의 기자회견 발언을 언급했다.
  헤리티지 재단은 북한의 재래식 전력에 대한 평가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헤리티지 재단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에서 보여줬듯이 북한의 재래식 전력은 진정한 위협(real threat)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다음 문단은 정반대 내용이다. 헤리티지 재단은 “낡은 무기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평양은 비대칭전력을 강화해왔다”라며 북한의 재래식 전력을 평가절하했다. 그러면서 “비대칭전력 즉, 특수군, 장사정포 그리고 미사일이 위협이다. 특히 단거리 스커드 미사일은 남한의 대다수 주요시설을 겨냥하고 있다”라며 북한의 비대칭 전력의 위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유에 대한 헤리티지 재단의 평가는 냉정하고 핵심을 지적한다.  “지정학적 전략을 위해 다른 국가들도 핵무기에 기대고 있다. 이를테면 북한은 북한의 공격적 행동에 대한 남한의 대응을 제한하고 남한을 압박하기 위해 이를 ‘이용한다’(use)”

 

이규정 기자 okeygun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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