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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미국 핵 위협 한반도 핵전쟁 확률 높다”

 
 
“미국 대조선적대정책 근본적으로 철회결단 내려야 할 것”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2/03 [05:0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이정섭 기자

 

조선이 미국의 핵위협공갈책동으로 정전협정이 백지화된 상태에 있는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우발적인 요소에 의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높다고 경고했다.
 
재미동포단체가 운영하는 웹싸이트는 2일 조선중앙통신 논평을 인용 이같이 밝히고 미국이 대조선적대정책을 군본적으로 철회하는 결단을내려야 한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지금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가들과 주요언론들이 우리의 핵무기보유의 정당성을 긍정하면서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핵무기를 처음 만든 나라도 미국이며 조선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몰아간 나라도 미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앙통신은 지난달 22일 로씨야(러시아) ‘떼웨 쩬뜨르’TV방송이 방영한 정계, 학계, 전문가들의 대담에서 로씨야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이며 국가회의 국제문제위원회 1부위원장인 깔라슈니꼬브가 “이라크, 리비아, 유고슬라비아의 실례를 놓고 볼 때 조선의 핵무기보유는 정당하다. 조선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게 한 나라는 50년대부터 이 나라를 위협해온 미국”이라고 말한 소식을 전했다.

 

이 통신은 로씨야 과학원 동방학연구소 조선 및 몽골 과장 워론쪼브가 “북조선은 다른 나라를 폭격하거나 정권전복을 시도해본적도 없는 나라”라며 “그런 나라가 세계에 위협으로 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북조선에 대한 제도전복시도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라는말을 덧 붙였다.
     
통신은 지난 달 20일 미국 국제관계잡지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는 조선이 지난 10년간 진행한 4차례의 핵 시험은 핵무기와 관련한 미국의 부정적 정책이 초래한 것이라는 것을 미국이 인정해야 한다는 기사를 인용했다.

 

논평은 “미국 내에서는 물론 추종세력들 속에서도 현 미행정부의 대조선정책이 ‘북을 체제강화와 핵보유에로 떠민 철저히 완패한 정책’이라는 혹평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면서 “여론들이 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미국이야말로 우리가 핵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당사자”라고 꼬집었다.
     
또한 “우리가 자위적인 핵전쟁억제력을 갖추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날로 더욱 노골화되는 미국의 핵공갈 책동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우리 공화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것도, 조미관계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것도 다 미국이 시대착오적인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실시하여왔기 때문”이라고 조-미 관계의 악순환이 미국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오늘 날로 더욱 노골화되는 미국의 핵위협공갈책동으로 정전협정이 백지화된 상태에 있는 조선반도에서 우발적인 요소에 의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높다.”며 “미국이 반공화국적대시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한 핵위협은 계속될 것이며 그에 대처하여 핵 억제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우리의 보다 강도 높은 조치가 계속 취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논평은 특히 “조선반도에 오늘과 같은 정세가 조성된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지배층에 있다.”면서 “미국은 현실을 냉철하게 보아야 하며 하루빨리 대조선적대시정책을 근본적으로 철회할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한편 북은 지난달 6일 핵융합 탄 성공 이후 인공위성발사 계획을 국제해사기구와 국제전기통신연합에 통보하며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과 조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대화에 나설 것을 압박하고 있어 미국의 대응이 주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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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카 바이러스가 뭔가요?

 

 

 

 

 

WHO에 따르면 최근 ‘지카 바이러스(Zika Virus)’가 남북 아메리카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올해 말까지 400만 명이 감염 될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질병 관리 본부의 관계자는 특히 임산부의 경우 몇몇 나라들을 방문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카 바이러스’에 대해 문답 형식으로 알아보기로 합니다.

 

 

1. 지카 바이러스가 뭔가요?

 

지카 바이러스는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바이러스로, 뎅기열이나 황색 열과 연관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47년 우간다의 Zika 숲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흔한 바이러스이나 서반구(western hemisphere)에서는 작년 5월 브라질에서 발생하기 전까지는 발견된 적이 없었습니다. 

 

적도가 지나가는 지역인 중앙아메리카와 브라질에는 수백만 명이 감염된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까지도 이 병에 감염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갖고 있지 않아 확산이 빠른 편입니다. 

 

일반 사람은 대부분의 바이러스처럼 감염이 되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산모의 경우에는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감염된 산모의 태아에서 소두증(microcephaly)이 유발 될 수 있다는 보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임신 시에 감염되면 태아에게 엄청난 기형을 일으킬 수 있는 풍진과 비슷한 경향을 보입니다.

 

 

2. 바이러스는 어떻게 전파되나요?

 

대부분의 경우 모기(특히 숲 모기)에 의해 전파됩니다. 이 모기들은 물웅덩이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습기가 많은 곳을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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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카 바이러스 전파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이집트 숲모기의 유충

(출처- AP)

 

모기 말고도 수혈에 의해 감염된 사례가 보고되었으며, 성 접촉에 의해서 전파되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정자에서 바이러스가 발견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카 바이러스의 감염자와의 일상적인 접촉으로는 전파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3. 지카 바이러스는 어떻게 소두증을 일으키고 신생아의 뇌를 파괴하나요?

 

솔직히 말씀 드려서 잘 모릅니다. 지카 바이러스가 소두증의 원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작년 10월, 지카 바이러스가 ‘소두증(얼굴이 아니라 머리입니다. 머리가 작은 것을 의미하며 뇌 발달에 장애가 있을 수 있습니다)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적도가 가까운 브라질의 북쪽 지역에서 지카 바이러스가 유행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두증을 가진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습니다. 

 

브라질의 한 해 신생아 숫자는 300만 명 정도인데, 이 중 소두증을 가진 신생아가 15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 그 숫자가 4,000명까지 늘었다고 하니, 지카 바이러스가 소두증의 주요 원인이 아닐 수는 있지만 정황상 의심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소두증과 소두증의 경계에 있는 신생아들을 모두 소두증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소두증은 염색체 이상을 비롯한 유전적 원인, 산모가 임신 중 방사선, 술, 수은 등에 노출되었을 때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 거대세포바이러스(cytomegalovirus, 헤르페스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신생아나 에이즈 환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음), 매독, 톡소프라즈마에 감염되었을 때도 생길 수 있습니다. 

 

최근 지카 바이러스에 의해 생긴 소두증이 다른 원인에 의해 생긴 소두증 보다 더 특이하고 위험하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산모가 지카 바이러스에 걸린 경우, 신생아의 머리 크기는 정상이어도 아기의 뇌 발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보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아직 원인을 모르니 더 큰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밖에 산모가 저영양 상태에 있거나 당뇨를 갖고 있어도 신생아가 소두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4. 소두증이 무엇인가요?

 

소두증은 말 그대로 머리가 정상보다 작은 증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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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지만, 머리둘레 크기가 평균에서 2 표준편차를 뺀 수치보다 더 작거나 성장차트의 백분위에서 3 보다 작을 때를 말합니다(Fenton, Olsen, CDC, or WHO growth curve). 

 

15% 정도는 머리만 작을 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만, 나머지의 경우 임신 중 혹은 어렸을 때 뇌의 성장이 멈춰 발달 장애나 지적 능력 부족 혹은 듣는 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증상은 뇌손상의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합니다.

 

안타깝게도 소두증에 대한 치료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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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yse Kelly da Silva가 소두증에 걸린 딸 Maria Giovanna를 안고 있는 모습 

(출처- AP)

 

 

5. 임산부들은 어떤 나라를 피해야 하나요?

 

중남미 카리브 해 주위를 피하시고, 태국도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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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가는 나라로는 태국이 있습니다. 

임산부는 브라질 올림픽에 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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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카 바이러스의 증상엔 뭐가 있나요?

 

가장 특징적인 증상은 발진을 동반한 갑작스런 발열이 있으며, 관절통, 결막염, 근육통, 두통 등도 동반할 수 있습니다. 증상은 보통 3~7일 정도 경미하게 진행되며 감염된 사람 중 20% 정도에서만이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최대 잠복기(감염에서 증상이 나올 때 까지 기간)는 2주입니다(참고로 대부분 바이러스가 2주입니다. 메르스도 에볼라도 그렇습니다). 잠복기 중에는 모기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 될 수 있으니 아무튼 모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중증 합병증은 드물고 사망 사례는 아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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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카 바이러스에 의한 홍반성 구진성 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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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카 바이러스에 의한 결막염

 

 

7. 진단과 치료는 어떻게 하나요?

 

진단은 환자의 혈청에서 RT-PCR 검사(감염증 유전자 검사의 일종. 여기서 RT는 역전사를 의미)로 지카 바이러스 유전자를 검출하여 확진합니다. 국내에서는 질병관리본부 국립보건 연구원에서 확진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다른 바이러스성 질환과 마찬가지로 충분한 휴식 및 수분을 섭취하면 저절로 좋아집니다만, 아직까지 지카 바이러스는 백신도 없고 치료제도 없습니다.

 

 

8. 임산부가 최근 지카 바이러스가 있는 지역에 방문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위에서 언급한 증상이 있으면 의사의 면담을 받고 진단 검사를 해야 합니다. 물론 위험 지역을 방문한 모든 산모는 태아에게 소두증이 발현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꼭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임 여성이 지카 바이러스 지역에 방문 했을 경우는 반드시 피임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임신의 50% 정도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입니다.

 

 

9. 임신 이전에 위험 지역을 방문했고, 현재 임신 중입니다. 위험한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카 바이러스는 우리 몸속에 오래 있지 못하며, 감염된 적이 있다고 해도 회복 되는 중에 항체가 생겨서 오히려 안심할 수 있습니다. 임신 전에 감염이 되었고 한국에 와서 임신이 되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자카 바이러스는 성접촉에 의해서도 전파가 가능하나 감염력은 매우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영국에선 유행지역에서 돌아온 남성의 경우, 무증상이라도 28일간 콘돔을 사용하고 감염 증상이 있거나 확진을 받은 경우에는 완치 후에도 6개월간 콘돔을 쓰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오버한다는 느낌입니다. 아마 곧 완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10. 산부인과 의사로서 임산부들이 어떻게 해야 할 지 한 번 더 말씀해 주세요.

 

임산부의 경우 최근 2개월 이내 환자 발생 국가로의 여행을 하지 않고. 불가피하게 여행을 할 경우 태아의 상태와 예방법에 대해서 상담을 해야 합니다. 주로 모기에 의해 전염이 되므로 모기를 조심하시고, 모기기피제를 사용하셔도 됩니다(모기 기피제는 임신 중 사용이 가능합니다).

 

귀국 후에는 여행 전 상담 받은 의료 기관에서 주기적으로 산전 진찰을 받고, 2주 이내에 지카 바이러스 의심 증상이 나타나면 의료 기관에 말씀을 하셔야 됩니다.

 

 

모기 기피와 관련된 오해와 진실

 

 

 

개방된 장소에서 모기향을 피우는 건 효과가 별로 없다.
모기는 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 운동을 마친 사람을 더 좋아하므로 운동 후에는 반드시 샤워를 하자. 
임산부는 체온이 높고 대사량이 많아 일반인보다 모기에 더 잘 노출된다. 
모기는 어두운 색에 더 반응하기 때문에 야간 활동 시 가능한 밝은 옷을 입자.
모기들은 위에서 언급한 사람 옆에 몰려드니, 그 옆에 있는 게 모기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 Reference

"Short Answers to Hard Questions About Zika Virus" - <Newyork Times>

질병관리본부 매뉴얼

 

 

 

raks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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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더 지으면 안 돼요, 다 죽는다니까요"

 

[원전재앙은 막자] ⑪ 지역주민 역학조사가 드러낸 위험

16.02.01 20:46l최종 업데이트 16.02.01 20:47l

 

 

지난해 8월 21일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에서 열린 갑상선암 공동소송 2차 재판에 희끗희끗한 눈썹의 외국인이 원고 측 증인으로 나왔다. 유럽방사선위험위원회(ECRR) 과학위원장인 크리스토퍼 버스비(71) 박사였다. 

유럽방사선위험위원회는 1997년 유럽의회 내 환경보호그룹의 주도로 설치된 단체다. 각국 원자력업계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와 달리 독립적인 활동을 펼친다. 지난 2003년에는 '저선량 전리방사선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통해 낮은 수준의 방사선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했고 2010년에는 학계가 소홀히 다뤘던 인체 내부피폭 문제에 주목하는 등 ICRP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유럽 방사선 권위자, 한국 법정에 서다

"한국수력원자력의 피폭량 계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준치 이하의 피폭도 암 발생의 원인이 됩니다."

버스비 박사는 이날 5시간 여에 걸친 증언을 통해 '원전과 인근 주민의 암 발생은 관련이 없다'는 한수원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ECRR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으로 세계 곳곳의 원전 건강피해 관련 소송에서 30여 차례 증언한 경험이 있는 그는 먼저 ICRP가 정한 피폭량 계산 기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설명했다. 

'방사능 에너지의 크기'를 '인체의 질량'으로 나누어 평균값을 구하는 ICRP의 단순 대입방식은 외부 피폭에만 적용 가능하며, 방사성 물질이 몸속에 들어가 세포 수준에서 피폭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원전 주변에서 발생하는 피폭의 대부분은 물이나 음식 등을 통해 인체 내에 흡입돼 일으키는 내부 피폭인데, 특정 방사성물질이 세포에 흡착되면 본래 에너지의 1만 배 이상으로 피폭을 일으킨다. 이 경우 한수원이 측정한 피폭량에 1만 배 이상을 곱해야 실제 피폭량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 버스비 박사의 주장이다. ICRP의 계산법으로 국내 원전 주변 지역의 암 발병률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피폭량 측정값이 지나치게 낮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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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연구결과 원전과 갑상선암은 관련이 없다'며 홍보하고 있는 한수원. 그러나 우리나라는 원전이 주민들의 거주지역과 아주 가깝게 자리하고 있다는 특수성이 있다. ⓒ 한수원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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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비 박사는 기준치 이하의 피폭, 즉 저선량 방사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상황이 암 발병에 더 치명적이라는 주장도 했다. 고선량 방사능은 세포 자체나 유전자를 파괴하지만, 저선량 방사능은 세포 유전자를 암세포로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약리학에서는 높은 독성이 있는 물질이라도 소량을 사용하면 오히려 좋은 효과를 내는 것을 '호메시스(Hormesis)'라고 한다. 여기서 유래한 말로 '방사선 호메시스(Radiation hormesis)'라는 용어가 있는데, 소량의 방사선은 오히려 생명체의 생리 활동을 촉진해서 암 발생률을 낮추거나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김종순(64) 가톨릭의대 방사선과 초빙교수는 "저선량 방사능의 경우 암과 관계가 없다고 본다"라며 "우리가 독을 소량 먹으면 몸에 좋은 경우가 있듯이 저선량 방사선의 경우 오히려 암 발생을 줄이는 경향성을 갖는다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도 "일부에서 실험을 해보니 저선량에서도 암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인차라고 생각한다"라며 "아직 확실한 과학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다"라고 덧붙였다. 티 디 러키 미국 미주리대 교수가 주장한 이 이론은 국내 원전찬성론자들이 자주 인용하지만, 일관된 결과가 없어 근거가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원전 주변 지역 남녀 갑상선암 발병률 높아

한수원은 원전 때문에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문제 제기에 "기준치 이하의 방사능을 배출하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암 발병에 책임이 없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국내 원전 지역 주민 545명의 갑상선암 공동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법무법인 민심의 변영철 변호사는 버스비 박사의 증언과 함께 서울대 안윤옥 연구팀의 보고서 및 후속보고서를 중요한 증거로 내세워 이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서울대 의학연구원이 진행하고 안윤옥 서울의대 명예교수가 연구책임을 맡았던 '원전 종사자 및 주변지역 주민 역학조사 연구'는 원전과 암 발생의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 1991년부터 2011년까지 20년간 진행된,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코호트 연구(전향적 추적조사)다. 

1989년 전남 영광원전에서 근무하던 경비원의 아내가 뇌 없는 아기(무뇌아)를 두 번이나 유산한 후 원전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자, 정부는 서울대 원자력영향·역학연구소에 조사를 의뢰했다. 영광, 고리, 월성, 울진 등 전국 4개 원전지역 주민과 대조지역 주민 등 총 3만6176명을 대상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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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수원 월성본부 앞에 원전 수명 연장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월성 원전 1호기는 지난해 6월 수명 연장이 결정돼 현재 재가동되고 있다. ⓒ 이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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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는 원전 5km 이내에 거주하는 여성들의 갑상선암 발병률이 원전에서 30km 이상 떨어진 대조지역에 거주하는 여성들에 비해 2.5배 높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정작 결론부에서는 "원전 종사자 및 주변지역 주민의 암 발병 위험성과 원전 사이에 인과적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는 과학적 증거는 찾을 수 없다"라고 결론을 내려 논란을 일으켰다. 연구팀은 남성의 경우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갑상선암 외에 다른 암의 증가 경향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 보고서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자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를 비롯한 15명의 전문가들이 보고서 재검토 및 재조사에 들어갔다. 백 교수팀은 지난해 9월 '원전 주변주민 역학조사 관련 후속 연구'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원 보고서의 자료를 다시 분석한 후속 보고서에서는 이 지역 여성 주민들의 갑상선암 발생률이 대조지역에 비해 3.1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기존 보고서와 달리 남성 갑상선암도 대조 지역에 비해 3.3배 높은 발생률을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후속 연구에 참여한 주영수 한림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남성 암 환자의 경우 비교 대상 표본의 수가 적어 통계적으로 의미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태라고 설명했다.

"남성 갑상선암은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라고 말하기보다 '경계성 수준의 유의성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표본 수(암 환자 수)가 적은 것을 원인으로 보는데, 앞으로 관찰기간이 오래되고 암환자가 많이 확보되면 통계적으로도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김종순 가톨릭의대 방사선과 초빙교수는 "원전 주변이나 서울이나 방사선량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없으니까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조사할 가치가 없는 상황"이라며 후속 보고서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전국 128개 지역에 환경방사선감지기를 설치해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원전 주변 지역과 수도권의 방사선량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결국은 토양이 오염됐을 때 문제가 될 수 있는데 토양이 오염되면 이렇게 암이 산발적이 아니라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남녀차이도 없다"라며 "우리나라는 (갑상선암이) 서울과 원전 주변 지역을 포함해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다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다른 원인으로 '초음파 검진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후속보고서는) 원자력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심을 조장하는 사람들의 비과학적 주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속 연구보고서에서도 검진으로 환자 발견이 늘어났을 가능성에 대해 검토가 이뤄졌고, 주변지역에서 대조지역에 비해 더 많은 검진이 이뤄졌거나 의료이용률이 높다는 정황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국 원전 지역 주민대상 세밀한 추적조사 필요

지난 2014년 법원은 '균도소송'(관련기사: '원전 옆 살았더니 온 가족이 암과 장애')에서 역학조사 결과를 인용, 원전 주변지역 주민의 갑상선암 발병에 대한 책임의 일부가 한국수력원자력에 있다고 판단했다. 

원전 근처(원전으로부터 5km 이내)에 거주하는 것이 갑상선암 발병에 영향을 끼쳤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제시된다. 원전으로부터 직접 누출된 방사선에 주민들이 피폭됐거나, 방사능에 오염된 해조류를 과다 섭취하는 등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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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기장군 고리 원전 앞바다.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미역, 다시마 건조대 뒤로 원전이 보인다. ⓒ 이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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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수 교수는 먼저 원전으로부터의 방사능 누출 가설에 대해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필요하지만 '누출이 없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아직 근거를 못 찾아냈다고 표현하는 게 맞다"라고 말했다. 그는 "만약 근거가 없다고 한다면 이는 너무 많은 것들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 번째 가설에 대해서는 "해조류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는 방사성 물질은 반감기가 짧지만 지역 주민들의 경우 생으로 섭취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주민의 건강 염려가 과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두 번째 가설을 설명하려면 해조류와 다른 오염 물질들은 왜 방사능에 오염이 됐는지부터 증명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아직 증거를 찾아내고 오염 과정을 입증할만한 조사는 진행된 것이 없다.

주 교수는 "국가가 암 등록 자료와 같이 국가적 차원에서 구축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매년 전국을 대상으로 주기적으로 관찰하면 원전과 관련한 다양한 문제를 잘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며 관련 분야에서 꾸준하고 상세한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랐다. 안윤옥 교수팀의 역학조사 보고서도 "코호트 규모가 작고 추적기간이 짧아 통계적 검정력의 한계가 존재한다"며 "코호트를 확대해 지속적으로 추적 관찰하는 후속연구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원전은 다른 나라와 달리 매우 가까운 거리에 마을이 형성돼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주민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좀 더 세심하게 관찰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국내 첫 상업용 원자로인 고리원전 1호기가 1977년 가동을 시작한 지 40여 년이 되도록 건강권 관련 연구가 이뤄진 사례는 매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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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의 반핵운동가들이 고리원전이 보이는 해안가 곳곳에 붙인 반핵 스티커. ⓒ 이문예
ⓒ 이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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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선암 공동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변영철 변호사는 암에 걸려 목소리까지 잃어버린 사람들을 만나면서 원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균도소송과 주민공동소송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이 원전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주길 희망했다.

"원전은 더 이상 지으면 안 되고, 있는 원전도 폐기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암 걸려 다 죽는다니까요. 우리 모두가 전기를 쓰고 있으면서 원전 주변에 안 산다고 이렇게 (무관심)하면 안 되죠. 한수원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원전은 꾸준히 방사선을 방출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주민들은 암에 걸리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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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사드 배치, 김정은 돕고 싶나?

 
[특별기획 : 코리아, 제2의 핵시대를 묻는다(4)] 김무성의 '무대포' 사드 배치 발언
 
| 2016.02.02 09:37:40
'무대포'다운 발언이 나왔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2월 1일 최근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국의 전역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 즉 사드(THAAD) 배치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북핵은 국가의 안보와 국방에 직결되고 우리의 생사가 걸려있는 치명적인 사안인 만큼 국제적 이해관계는 부차적 문제로 누구의 눈치를 볼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한마디로 '중국 눈치 보지 말고 사드 배치하자'는 취지이다.

하지만 이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정치인, 특히 집권 여당 대표가 가져야 할 '책임성'(accountability)을 망각한 무대포식 발언이다. 본인은 이러한 발언을 통해 '안보에 강한 남자'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겠지만, '묻지마식 사드 배치'는 한국의 안보와 국익을 위태롭게 할 '트로이의 목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근혜 대통령의 사드 배치 '검토' 발언 이후 국방부는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한다. 미국 정부와 군부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집권 여당 대표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사드 배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함으로써 '사드의 정치화'는 불가피해졌다. 총선을 앞두고 여당과 일부 언론은 야당의 입장이 뭐냐고 다그칠 것이고, 이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반대 입장을 밝히면 '종북주의'와 '친중 사대주의'로 몰아가려고 할 것이다. 

김무성 대표의 발언 속에 내포된 사드에 대한 인식의 문제점은 한둘이 아니다. 그는 마치 사드가 없어서 한국의 안보가 생사의 기로에 놓인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대북 억제의 힘은 사드를 비롯한 미사일 방어체제(MD)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핵우산을 비롯한 강력하고도 압도적인 한미동맹의 보복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더구나 사드는 북핵을 막는데 별로 실효성도 없고, 북한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과 단거리 미사일 등 사드 회피 수단을 늘리려고 할 것이다. 

김 대표는 또한 사드가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단세포적 이해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 능력을 갖고 있는 쪽이 방어력까지 강해지면, 그 방어용 무기는 어떠한 공격용 무기보다 강한 것이 된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이 1972년 탄도미사일 방어(ABM) 조약을 체결했고, 40년 동안 이 조약을 '전략적 안정과 세계 평화의 초석'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무대포 정신의 백미는 '중국의 눈치를 보지 말자'는 것이다. 화끈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김 대표의 '책임성' 결핍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발언을 통해 정치인으로서의 주가를 올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대가는 국익 손실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중국의 입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드 배치를 강행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직접 나서 사드를 챙길 정도로 국가적 문제로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사드 배치를 수용하면 그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질 수밖에 없다. 양국 내 민족주의 감정이 충돌해 한중 관계의 악화는 불가피해진다. 이미 노란불이 켜진 한국 경제가 빨간불로 바뀌는 것도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또한 사드 배치는 전략적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이 약'이 될 수도 없다. 

또 주목할 것이 있다. 사드 배치의 최대 수혜자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은 사드를 회피할 다양한 투발 수단을 갖고 있거나 개발 중이다. 반면 사드 배치로 인해 한중 관계와 미중 관계는 일대 파란을 피할 수 없다. 이는 북핵에 대한 국제공조의 균열을 키워 북한의 전략적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사드와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의 우려가 합리적인 것인가의 여부이다. '눈치' 운운하면서 감정적으로 접근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한결같은' 공식 입장은 "모든 국가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다른 국가의 안전이익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국 내 사드 배치는 중국 안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중국의 입장이 '기우'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이유를 설명해주면 된다. 그런데 한국이든, 미국이든, 사드 논란이 불거진 지 2년이 넘도록 중국을 설득하는 데 실패해 왔다. 왜 그럴까? 미국의 '이중 게임' 속에 그 답이 담겨 있다. 

미국은 한 입으로 두말을 하고 있다. 어떨 때는 사드가 중국과 무관하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입으로 중국이 강력한 대북 제재에 동참하지 않으면 미국도 중국의 안보 우려를 더 이상 고려하지 않고 MD 구축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위협한다. 사드는 '지역 MD'의 핵심적인 무기체계라는 점에서 사드 역시 중국 견제용과 무관치 않다.

결론적으로 사드 배치론을 들고나온 김무성 대표는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비겁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발언을 통해, 그리고 실제로 이게 이뤄지면 김 대표 개인적으로 손해 볼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국내 반대파와 중국이 강하게 반발할수록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고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대다수 국민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이 '가짜 안보 프레임'에 장단을 맞춰져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 사드를 비롯한 MD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MD 본색 : 은밀하게 위험하게>를 참고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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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수소탄 핵대국보다 몇십 . 몇백배 위력

“미국 공생공존법 배워야할 것” 강조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2/02 [08:2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이정섭 기자

 

조선은 '수소탄' 핵실험의 폭발력이 작았다는 점을 이유로 '실패'로 규정한 외부의 평가에 대해 1일 "핵폭발 능력을 임의로 조절,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반박했다.

 

연합뉴스는 지난 1일 조선의오늘을 인용 정일철 '남조선문제연구사'가 ‘조선의 오늘' 기자와 나눈 대담에서 "수소탄이 폭발하면 몇십 Mt(TNT 화약 백만 t에 해당)의 폭발력이 발생하는데 조선에서 시험한 수소탄은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인 몇 kt의 폭발력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것이 실패의 근거라고 강변하고 있다"면서 이같이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정인철 연구원은 "만약 우리 령토(영토)가 미국이나 기타 나라들처럼 땅덩어리가 넓다면 얼마든지 지금껏 핵 대국들이 실시해온 수소탄 시험보다 몇십, 몇백 배나 위력한 수소탄을 터뜨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연구사는 "미국과 적대세력들은 대조선(대북) 적대시 정책을 당장 걷어치우고 수소탄까지 보유한 세계 최강의 핵보유국인 조선과 공존, 공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국가정보원은 지난달 6일 단행된 북한의 4차 핵실험과 관련해 "3차 핵실험(위력)은 7.9㏏, 지진파 규모는 4.9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위력이) 6.0㏏, 지진파는 4.8로 더 작게 나왔다"고 지적하는 등 국내외 전문가들은 '수소탄' 폭발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4차 핵실험이 사실상 실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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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하철 미화원들이 의식화 되었습니다

부산지하철 미화원들이 의식화 되었습니다
 
 
 
김욱 | 2016-02-02 08:56:5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부산지하철 미화원 노동자들이 바뀌기 시작한 건 7년 전이다. 그 전에도 노동조합이 있기는 했지만 미화원 노조의 활동이 본격화 되기 시작한 건 부산지하철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서비스지부로 편입되면서부터다.

그러나 당시의 변화엔 한계가 있었다. 스스로 상황을 돌파하면서 만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비스지부의 출범은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의 비정규직사업에 힘입은 바가 컸다. 미화원 노조 자체의 투쟁력이나 조직력은 아직 탄탄하지 못했다.

정규직 노조와 함께 한다는 기대가 컸지만 그만큼 위기의식을 느낀 용역업체의 견제도 심했다. 서비스지부의 투쟁에 대한 사측(용역업체)의 압박이 점점 세졌고 이를 견디지 못한 미화원들이 노조를 탈퇴했다. 그 때문에 조합원 가입자 수가 서비스지부 출범 때보다 오히려 줄어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소득이 없지 않았다. 서비스지부가 단련되었다. 미화원 노동자들의 처우가 일부 개선되면서 조합의 필요성을 조합원들 스스로 깨닫게 되었고 여러 투쟁을 겪으면서 서비스지부에 맞는 운영과 투쟁 방식도 터득했다.

서비스지부가 처음으로 자신들의 힘을 실감한 것은 선거였다. 부산에서 가장 크고 활발한 노조라는 부산지하철노동조합위원장을 뽑는데 자신들의 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부산지하철노동조합위원장 선거는 보통 100표 내의 차이로 결정되는데 서비스지부 조합원은 300명이 넘었다. 표를 얻기 위해 고개 숙이는 정규직 노조위원장 후보들을 보고서야 자신들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서비스지부가 그냥 노조에 곁불이나 쬐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간의 단련과 자각이 힘을 발휘하면서 서비스지부는 지난 투쟁에서 몇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중에서 출퇴근 차비 확보 투쟁에서의 승리는 조합원들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준 쾌거였다.

지난해까지 미화원들은 지하철에 출퇴근하면서 차비를 내고 다녔다. 만약 차비를 내지 않고 출퇴근하다 발각되면 일반인처럼 30배의 과태료를 물어야 했다. 돈이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였다. 자신이 일하는 작업장에 돈을 내고 다니는 것에 서비스지부 조합원들은 서러움마저 느꼈다. 지난 12월 서비스지부의 출퇴근 차비 확보 투쟁이 전국적 이슈화에 성공하면서 이 문제는 즉각 해결되었다.

부산지하철 미화원 31년만에 출퇴근용 승차권 받는다

이제 서비스지부 조합원들은 예전의 그 조합원들이 아니다. 선거를 통해, 투쟁을 통해 자신들에게 힘이 있다는 것과 그 힘을 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7년 동안 이어져온 사측의 탄압에도 단련되었다.

한마디로 ‘의식화’된 것이다. 주어진대로 생각하고 시키는대로 따르면 그대로지만 의식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면 자신의 노동조건과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의식화된 미화원 노동자들은 이제 거칠 것이 없다. 힘이 없는 게 아니었다. 힘이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자신들에게 힘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힘을 쓰면 된다.

▲부산과 대구를 제외하고 다른 지하철은 정부 권고대로 미화원들에게 시중노임단가를 주고 있다. 최저임금 시급은 6천 원대이고 시중노임단가는 8천 원대다.

부산지하철 미화원들은 최저임금만을 받는다. 그 이상 절대 넘지 않는다. 고로 부산지하철 미화원들의 임금을 결정하는 건 최저임금위원회다.

이게 얼마나 모욕적인 상황인가? 부산지하철 사측은 미화원들의 적정임금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이다. 이건 부산지하철 미화원들은 최저임금을 받아도 당연하다는 말과 다름없다. 최저임금은 법적 하한선이지 적정임금이 아닌데 말이다.

서비스지부 조합원들은 서울, 인천, 광주가 시중노임단가를 받는데 자신들은 최저임금을 받고 있는 이유를 안다. 그건 노사의 문제를 벗어난 정치의 문제다. 부산지하철만을 상대해선 결코 풀릴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부산시 민원실에 들어서는 서비스지부 조합원

자신들에게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의식화된 서비스지부 조합원들에게 이제 넘어서지 못할 벽은 없다. 지부장은 부산시장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조합원들은 시내 곳곳에서 일인시위를 펼치고 있다.

50대 이상의 아주머니가 대부분인 서비스지부 조합원이 부산 곳곳에서 만드는 일인시위 모습은 부산시민에겐 낯선 풍경이다. 눈길을 돌리게 하는 그 낯선 풍경이 또 다른 의식화의 씨를 심어주게 될 수 있다. 서비스지부 조합원들의 의식화는 그래서 그 어떤 의식화보다 가치가 있어 보인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0&table=wook_kim&uid=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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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위성발사가 임박했다고 말하는가?

[개벽예감190] 누가 위성발사가 임박했다고 말하는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6/02/01 [10:19]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흰색 가림막 쳐놓은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2. 위성은 하늘문이 열리는 시간에 발사된다
3. 경비와 노력을 소모하는 어리석은 탐지작전
4. 별지도 보면서 전천후 지구관측위성 쏘아올린다
5. 사드기동군 전진배치해도 수도피폭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사진 1> 위의 사진은 2015년 9월 미국의 인터넷언론매체 에 실린 상업위성사진인데, 촬영날짜는 2015년 9월 6일이다. 위의 위성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이동식 전이구조물(Movable Transfer Structure)'에 흰색 가림막을 쳐놓은 것이 보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1. 흰색 가림막 쳐놓은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일본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교도통신> 2016년 1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최근 며칠 동안 조선의 서해위성발사장을 촬영한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위성발사를 준비하는 조짐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같은 날 일본 텔레비전방송 <NHK>의 보도에 따르면, 서해위성발사장에 있는 발사대에 거대한 흰색 가림막이 덮여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발사대라는 것은 위성발사탑이 아니라, 위성발사탑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movable transfer structure)을 뜻한다.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안에서 3단 로켓을 조립하여 세우고, 거기에 위성을 탑재한 다음, 그 구조물을 두 줄기 궤도로 이동시켜 150m 떨어진 위성발사탑에 가닿게 하여 위성운반추진체를 위성발사탑으로 옮겨 세우고 나면, 추진연료를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정보기관 당국자의 추산을 인용한 <조선일보> 2012년 3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현대화된 서해위성발사장의 각종 시설들을 건설하는 데 8억5천만 달러가 들었을 것으로 추산된다는데,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이야말로 서해위성발사장에 도입된 여러 현대화된 시설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을만하다.


외신들은 서해위성발사장의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안에서 진행되는 작업상황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으려고 최근에 흰색 가림막을 쳐놓은 것처럼 보도하였지만, 그 가림막은 최근에 설치된 게 아니라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원래부터 거기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1년 365일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은 자국의 정보수집위성이 조선의 서해위성발사장을 촬영한 영상자료를 분석하면서 위성발사징후를 확인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징후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최근 미국과 일본에서 나온, 서해위성발사장에 관한 외신보도들에서 언급한 위성발사징후들은 위성발사탑 주변에 쌓였던 눈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 그리고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차량왕래가 잦아지고 현장작업인원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 <사진 2> 서해위성발사장을 촬영한 위성사진을 보면,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을 최종조립공장에 붙여놓고 3단 추진체를 조립한 뒤에 그 구조물을 위성발사탑으로 이동시키게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사진은 2012년 12월 20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기록영화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령도밑에 인공지구위성 <광명성-3>호 2호기 성과적으로 발사'에 나오는 한 장면인데, 당시에는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이 없었기 때문에 은하-3호를 최종조립공장 안에서 옆으로 눕혀놓고 조립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중앙일보> 2016년 1월 29일 보도기사에서 한국 정보기관 당국자는 2016년 1월 29일 현재 서해위성발사장 위성발사탑 인근에 있는 최종조립공장에서 위성운반추진체가 조립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서해위성발사장을 촬영한 위성사진을 보면,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을 최종조립공장에 붙여놓고 3단 추진체를 조립한 뒤에 그 구조물을 위성발사탑으로 이동시키게 되어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지적한 대로 지금 최종조립공장에서 위성운반추진체가 조립되고 있다면, 최종조립공장에 붙여놓은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안에서도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므로 위성발사가 임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진 2>


하지만 옅은 파란색 지붕을 씌운 최종조립공장과 흰색 가림막을 쳐놓은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안에서 위성운반추진체가 조립되고 있는지 외부에서 확인할 길은 없다. 위성운반추진체를 조립하려면, 조립작업에 요구되는 각종 설비와 물품을 실은 수송열차와 수송차량들이 서해위성발사장으로 분주히 들락날락해야 하는데, 아직 그런 분주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므로 위성운반추진체가 조립되고 있다는 한국 정보당국자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그는 왜 사실과 다른 말을 언론매체에 전해준 것일까?

 

▲ <사진 3>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에 세워진 위성운반추진체를 150m 궤도를 따라 이동시켜 위성발사탑에 옮겨 세우면 1단 추진체와 2단 추진체에 액체연료를 주입하는 공정이 시작된다. 위의 사진은 2012년 12월 조선의 기술자들이 서해위성발사장 위성발사탑에 수직으로 세워진 은하-3호 1단 추진체 곁에서 작업하는 모습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2. 위성은 하늘문이 열리는 시간에 발사된다


외신들은 현대화된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위성발사준비를 매우 짧은 기간에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보도했는데, 그런 보도내용은 사실과 부합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선이 제작한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추진체는 1단 추진체와 2단 추진체에 각각 액체연료를 주입하고, 3단 추진체에는 고체연료를 장입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에 세워진 위성운반추진체를 150m 이동시켜 위성발사탑에 옮겨 세우면 1단 추진체와 2단 추진체에 액체연료를 주입하는 공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진 3>


둘째, 액체연료는 자동화된 시설에서 주입된다. 이를테면, 연료수송차량들이 위성발사탑 인근에 있는 지하화된 연료주입시설 안으로 들어가 연료주입기에 액체연료를 공급하면, 그 연료주입기가 도관과 케이블을 통해 1단 추진체와 2단 추진체에 액체연료를 자동적으로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연료주입시설이 이처럼 지하화, 자동화되었기 때문에 서해위성발사장을 공중에서 정탐하는 미국의 정찰위성과 일본의 정보수집위성이 연료주입여부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연료주입시간도 매우 짧아져 연료주입을 24시간 만에 신속히 끝낼 수 있다. 이 현대화된 연료주입시설이 건설되기 전에는 연료주입에 사흘이나 걸렸다. 


셋째, 위성운반추진체에 주입되는 액체연료는 추진연료와 시동연료로 구분된다. 추진연료는 위성운반추진체를 지구중력에서 벗어난 지구궤도로 밀어올릴 때 사용되는 것이고, 시동연료는 발사순간에 로켓엔진을 점화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 추진연료는 발사시각보다 48시간 앞서 주입되고, 시동연료는 발사시각보다 24시간 앞서 주입된다.


넷째, 위성은 추진체 내부에 장입된 각종 전자장치들에서 정전기가 발생하여 오작동을 일으킬 위험을 피하기 위해 습도가 낮고 바람이 적게 부는 시각을 택하여 발사하게 된다. 이런 기상조건을 고려하여 발사시각을 먼저 정한 다음, 발사시각보다 24시간 앞서 마지막으로 시동연료를 주입하는 것이다.


넷째, 무릇 인공위성은 하늘문이 열리는 시간에 발사된다. 하늘문이 열리는 시간이란 위성이 태양에너지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만일 지구궤도에 진입한 위성이 지구 그림자 속에서 비행하게 되어 태양에너지를 받을 수 없게 되면 자기 안에 장입된 축전지의 전기를 너무 많이 소모하여 운행수명이 짧아지기 때문에, 태양에너지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시간에 맞춰 발사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몇 가지 사정을 살펴보면,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이 이동하여 위성운반추진체를 위성발사탑에 옮겨 세워놓은 시각으로부터 48시간 뒤에 발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위성운반추진체가 위성발사탑에 세워진 때로부터 이틀 뒤에 발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위성운반추진체가 위성발사탑에 세워졌더라도 그것을 어느 시각에 쏘아올릴 것인지는 외부에서 알 수 없다. 이를테면, 2012년 12월 12일 조선이 지구관측위성을 발사하였을 때도, 미국 정부 고위관계자는 조선이 위성을 발사하려면 앞으로 1주일 이상 지나야 할 것 같다고 예견했지만, 그가 그런 예견을 꺼내놓은 때로부터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조선의 지구관측위성이 전격적으로 발사되는 바람에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사진 4>에서 보는 것처럼, 조선의 위성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위성발사 2시간 전에 최종명령을 내려야 발사되는 것이다.

 

▲ <사진 4>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위성운반추진체를 위성발사탑에 옮겨 세워놓은 시각으로부터 48시간 뒤에 위성이 발사된다. 그러나 조선의 위성운반추진체가 위성발사탑에 세워졌더라도 그것을 어느 시각에 쏘아올릴 것인지는 외부에서 알 수 없다. 조선의 최고영도자가 직접 명령을 내려야 발사되는 것이다. 위의 사진은 2012년 12월 12일 오전 10시에 위성을 발사하라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친필명령을 촬영한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 친필명령을 하달한 시각은 위성이 발사되기 2시간 전인 2012년 12월 12일 오전 8시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3. 경비와 노력을 소모하는 어리석은 탐지작전


일본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교도통신> 2016년 1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이 “이르면 1주일 전후로 (위성을) 발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미국 국방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교도통신> 2016년 1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이 지난 시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위성을 발사하겠다고 예고한 뒤 발사할 공산이 큰데, 아직 그런 예고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한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며 앞으로 몇 주 안에 발사할 가능성이 보인다고 하였다.


2012년 12월 12일 위성을 발사하기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조선은 위성을 발사하기 전에 위성발사를 공식적으로 예고할 것이며, 위성발사를 예정한 대략적인 시점과 위성이 발사된 직후 위성운반추진체의 1단계 추진체와 덮개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해상위치좌표를 국제해사기구(IMO)에 미리 통보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에서 2012년 11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위성발사준비절차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 <사진 5>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했다는 징후는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수송열차와 수송차량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현장작업인원의 움직임이 크게 증가하며, 조선이 위성을 어느 날부터 어느 날 사이에 발사할 것이라고 공식발표하는 것 등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위의 사진은 서해위성발사장 위성발사탑, 최종조립공장,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이 자리잡고 있는 구역을 촬영한 상업위성사진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첫째, 일본 <아사히신붕> 2015년 9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2012년 11월 6일부터 서해위성발사장에서 각종 차량이동이 잦아지고 작업인원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위성발사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명백한 징후였다. <사진 5>


둘째, 2012년 12월 28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보도화면을 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위성발사를 최종적으로 승인한 친필명령을 하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보도화면에 따르면, 2012년 11월 14일 김정은 제1위원장은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올린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3호 2호기를 발사하기 위한 인원들과 기재들을 서해위성발사장에 전개시킨 정황과 대책적 의견’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받아보고, 그 표지에 “비준함. 12월 10일~15일 사이에 발사하는 것으로 계획해서 준비사업 진행하며 정확한 발사날짜와 시간은 차후 지시. 대기할 것! 김정은 2012. 11. 14”라고 썼다. 이것은 위성발사를 준비하고 차후지시를 기다리라는 친필명령이었다.


셋째, 2012년 12월 1일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는 대변인 담화를 통해 2012년 12월 10일부터 22일 사이에 지구관측위성을 남쪽 방향으로 발사할 것임을 예고하였다.


위와 같은 위성발사준비절차에서 알게 되는 것은,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수송열차, 수송차량, 작업인원이 늘어나고, 최고영도자가 친필명령을 하달한 뒤 약 1개월이 지나 위성이 발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서해위성발사장에서는 수송열차, 수송차량, 작업인원의 움직임이 크게 증가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2016년 1월 27일 해상자위대 소속 미사일구축함 한 척을 출동시켜 그 무슨 ‘감시태세’라는 것을 시작하였고, 2016년 1월 28일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조선의 위성발사에 대처하겠다고 부산을 떨었고, 한국과 미국도 우주, 지상, 해상, 공중에서 탐지수단을 총동원하여 조선의 위성발사징후를 파악하기 위한 입체적인 탐지작전에 돌입하였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위성발사준비를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한국, 미국, 일본이 대규모 탐지작전에 돌입하였으니 경비와 노력을 소모하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인다.

 

4. 별지도 보면서 전천후 지구관측위성 쏘아올린다

 
2012년 12월 12일 조선이 위성운반추진체 은하-3호에 실어 쏘아올린 지구관측위성 광명성 3호 2호기가 극궤도에 진입하였다. 위성발사에 성공한 것으로 하여 한껏 고무된 조선에서는 2013년 4월 1일에 발표된 최고인민회의 결정에 따라 국가우주개발국이 창설되었고,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5월 초에는 평양에 국가우주개발국 위성관제종합지휘소가 현대적인 시설로 완공되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2015년 5월 2일 조선에서 새로 건설된 국가우주개발국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현지지도하면서 “주체조선의 위성은 앞으로도 당중앙이 결심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련이어 우주를 향하여 날아오를 것”이라고 하면서 우주정복을 향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조선의 최고영도자가 우주개발사업에 대해 그처럼 강한 의지를 가졌으므로, 그를 따르는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합심하여 우주개발에 전력을 기울여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사진 6>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우주개발사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세우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조선의 최고영도자가 우주개발사업에 그처럼 강한 의지를 가졌으므로,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합심하여 우주개발에 힘써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제작하였으며, 정지위성에 대한 연구사업에서도 커다란 진전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위의 사진은 2015년 5월 초 현대적 설비를 갖춰 완공된 조선국가우주개발국 산하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촬영한 것이다. 이 위성관제종합지휘소는 평양 시내 한 복판에 건설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2015년 9월 14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조선국가우주개발국 국장의 대담기사에 따르면,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새로운 지구관측위성개발을 마감단계에서 다그치고 있”으며, “정지위성에 대한 연구사업에서도 커다란 전진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광명성 3호 2호기보다 더 발전된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개발하기 위해 지혜와 노력을 기울였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지위성을 개발하기 위한 사업에도 힘써온 것이다. <사진 6>  


3년 전에 발사된 위성운반추진체 은하-3호는 길이가 30m, 발사초기추진력이 120톤이었고, 거기에 실린 지구관측위성 광명성-3호 2호기의 무게는 100kg이었는데, 이번에 새로 쏘아올린 신형 위성운반추진체와 신형 지구관측위성이 얼마나 발전된 것인지는 서해위성발사장에 그 실물이 나타나야 가늠할 수 있다.


지난 3년 동안 조선의 우주개발사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척되어왔는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3년 전에 비하여 크게 발전된 신형 위성운반추진체와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신형 위성운반추진체와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만들려면, 그것의 설계와 제작에 관련된 과학기술수준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연구를 앞세워야 한다. 신형 위성운반추진체와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설계하고 제작하는데 필요한 과학기술연구를 진척시키기 위해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사실은 대규모 우주과학기술토론회를 연속 두 차례 진행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2014년 12월 10일과 2015년 11월 25~26일에 대규모 우주과학기술토론회를 각각 진행한 바 있다. 


2015년 11월 25~26일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진행된 우주과학기술토론회 소식을 전해준 조선의 언론보도를 통해 지난 3년 동안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이룩해놓은 과학기술성과들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데, 그들의 여러 성과들 가운데서 세 가지만 선별하여 언급하면 아래와 같다. 

 

▲ <사진 7> 조선의 우주과학자들이 컴퓨터로 만든 별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외부에서 알 수 없다. 위의 사진은 고구려의 천문학자들이 평양에서 돌에 새겨넣은 별지도 비석의 탁본을 가지고 1395년에 다시 만든 별지도다. 천상렬차분야지도라는 이름의 이 별지도는 국보 제228호로 보존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고인돌을 만들던 청동기부터 천문학을 당대 최고 수준에서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고구려의 천문학자들은 그런 우수한 별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첫째,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위성이 우주공간에서 자기 궤도를 따라 안정적으로 비행하는데 필요한 별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로동신문> 2015년 12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만든 별지도는 “천체들의 운동과 지구의 미세한 진동, 중력마당에서의 빛의 특성은 물론 영향을 줄 수 있는 자그마한 요소들도 모두 찾아내여 측정하고 분석, 종합”한 천체물리학의 완성판이다. <사진 7>


둘째, 위에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도형합성법으로 작동하는 광학수감부마스크를 만들었다고 한다. 도형합성(graphic composition)이라는 것은 컴퓨터그래픽으로 작성한 매우 복잡한 도형들을 합성하여 3차원 영상을 만들어내는 컴퓨터기술이며, 광학수감부(optical sensor)라는 것은 무중력상태인 우주공간에서 위성의 비행자세를 바로잡아주는 보정장치다.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도형합성법으로 작동하는 광학수감부마스크를 만들어냄으로써 조선이 발사하는 위성들은 미리 정해진 자기 궤도에 오차 없이 진입할 수 있는 과학기술적 담보가 마련된 것이다. 


셋째, 위에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일기에 관계없이 지상의 대상물들을 관측”할 수 있는 전천후 지구관측위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지구관측위성에 장입된 광학관측장비는 구름이 끼는 날씨에는 지구를 내려다볼 수 없기 때문에 관측할 수 있는 시간이 크게 줄어드는 단점이 있었는데,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구름이 낀 날씨에도 지상의 대상물을 관측할 수 있는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5. 사드기동군 전진배치해도 수도피폭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2016년 1월 25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백악관 비밀회의에서 대북핵타격씨나리오 검토하는 중인가?’에서 서술한 것처럼, 미국군 태평양사령부는 일곱 가지 대북전쟁씨나리오를 작성해놓고 조선과의 전면전을 준비해왔다. 미국군 태평양사령부가 대북전쟁씨나리오를 작성해놓은 것은 미국이 조선과 전쟁을 벌이는 경우 전시작전을 태평양사령관이 직접 지휘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조선이 말하는 ‘최후결전’에서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전술핵탄미사일로 타격할 우선타격대상이 미국군 태평양사령부로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전시상황을 예견한 미국군 태평양사령관이 조선의 전술핵탄미사일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미국군 태평양사령관 해리 해리스(Harry B. Harris)는 2015년 5월 25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 대담하면서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조선”이며, “나는 그런 조선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고 답변하였으며, 2016년 1월 25일 <연합뉴스>와 대담할 때는 “내가 매일 매일 직면하는 최대 위협은 바로 북한이다. 지금까지 중국을 최대 위협이라고 말해왔지만 지금 북한이 가장 큰 위협이다....본능적으로 느끼는 실제적인 위협이다”고 말했던 것이다. 

 

▲ <사진 8> 조선이 말하는 '최후결전'에서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전술핵탄미사일로 타격할 우선타격대상은 미국군 태평양사령부다. 위의 사진은 미국 하와이주 캠프 스미스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군 태평양사령부 본부청사인 '니미츠-맥아더 태평양사령부센터'를 촬영한 것이다. 겉을 보면 평온한 호텔처럼 보이는 이 건물 안에서 조선을 파괴하려는 일곱 가지 핵타격씨나리오가 작성되었으며, 그 씨나리오에 따른 대북침공작전모의가 계속되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미국군 태평양사령관이 그런 실제적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해낸 방도는 태평양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는 하와이주에 미사일방어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2016년 1월 27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진행된 토론회에서 하와이주에 ‘지상배치 이지스미사일방어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와이주에는 2009년 6월부터 사드기동군(THAAD Task Force)이 배치되어 있는데도, 가중되는 피폭공포에 떠는 태평양사령관은 사드기동군만 믿을 수 없어 지상배치이지스미사일방어체계도 하와이주에 추가로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진 8> 


그런데 조선에서 말하는 ‘최후결전’이 벌어지면, 조선인민군 전략군은 태평양사령부만 타격하는 게 아니라, 워싱턴 D.C.도 타격하게 되어 있다. 조선은 전시에 평양을 타격하려는 미국의 핵공격에 맞서 워싱턴 D.C.를 타격하겠다는 대응전략구상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미국은 전시에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북극상공궤도를 타고 워싱턴 D.C.로 날아갈 때 도중에서 요격하기 위해 알래스카주에 지상배치요격체(Ground-based Interceptor)를 배치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지상배치요격체를 알래스카주에 배치해놓은 것만으로는 피폭악몽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시에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발사할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북극상공궤도만이 아니라 남극상공궤도를 타고서도 워싱턴 D.C.를 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화성-13호를 실은 8축16륜 자행발사대에도 싣지 못할 만큼 큰 초대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남쪽 방향으로 쏘면 그 미사일이 남극상공궤도를 타고 지구를 돌아 워싱턴 D.C.를 타격할 수 있다. 그처럼 큰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있을까? 러시아 전략로케트군이 보유한 R-36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있다. 그것의 길이는 32.2m, 지름은 3.05m, 무게는 209톤이며, 사거리는 16,000km다. R-36은 그처럼 크고 무거워서 8축16륜 자행발사대에는 싣지 못하고, 수직갱발사대에 설치한다. 조선이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수직갱발사대에 설치된 목성 계열의 초대형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이 바로 그런 전략무기들이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거리가 12,756km이므로,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험준한 산악지대에 건설한 수직갱발사대에서 사거리 16,000km의 초대형 목성-3호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남쪽 방향으로 쏘면 남극상공궤도를 타고 날아가 워싱턴 D.C.를 남쪽 방향에서 타격할 수 있다. 전시에 화성-13호는 북극상공궤도를 타고 날아가고, 목성-3호는 남극상공궤도를 타고 날아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워싱턴 D.C.를 남쪽 방향에서 방어해줄 미사일방어체계가 없다는 점이다. 미국 수도권의 남쪽 하늘은 그야말로 뻥 뚫려있는 셈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평화적인 우주개발사업에 따라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추진체를 남쪽 방향으로 쏘아올리는 데도, 그럴 때마다 미국이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날아오르는 것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극단적인 거부반응을 보이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추진체발사기술에서 위성운반추진체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서로 ‘사촌지간’이므로,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위성운반추진체를 남극상공궤도로 쏘아올리는 것은,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초대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남극상공궤도로 쏘아올리는 실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 <사진 9> 최근 미국은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한 것처럼 여론을 조작하면서 사드기동군을 한국에 전진배치하려는 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사드기동군은 미국 육군이 운용하는 미사일요격부대인데, 도로이동식 미사일발사차량 6대와 요격미사일 48발로 무장하였으며, 배치병력은 약 205명이다. 위의 사진은 사드기동군이 도로이동식 미사일발사차량을 작전구역으로 이동시키는 모습이다. 경계병력이 그 발사차량을 호위하며 따라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이 사드기동군을 한국에 전진배치해도 전시에는 조선인민군 금성친위여단의 기습침투전술에 걸려 파괴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수도피폭악몽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드기동군 전진배치가 아니라 평화협정체결과 주한미국군 철군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워싱턴 D.C.가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 파괴되는 피폭악몽에서 미국이 벗어나는 길은 한국에 최후요격수단을 전진배치하는 것뿐이다. 바로 그 최후요격수단이 사드기동군이다. 사드기동군은 미국 육군이 운용하는 미사일요격부대인데, 도로이동식 미사일발사차량 6대와 요격미사일 48발로 무장하였으며, 배치병력은 약 205명이다. <사진 9>


전시에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남쪽 방향으로 발사한 목성-3호 대륙간탄도미사일을 1차로 요격할 수 있는 최적의 지리적 위치는 한국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에 사드기동군을 전진배치하려는 계략을 오래 전부터 꾸며왔고, 지금은 그 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위성발사준비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미국이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한 것처럼 소문을 내면서 위성발사에 대처하는 그 무슨 탐지작전까지 벌여놓은 것은 상황을 오판한 행동이 아니다. 미국은 임박하지 않은 조선의 위성발사를 구실로 내세워 사드기동군을 한국에 전진배치하려는 것이다. 


사드기동군의 미사일요격고도는 40~140km이므로,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남쪽 방향으로 발사한 목성-3호가 서해 상공에서 상승궤도를 타고 빠른 속도로 솟구쳐 오를 때, 100km 정도의 고도에서 요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에 사드기동군을 전진배치해도 수도피폭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조선에서 말하는 ‘최후결전’에서 조선인민군은 사드기동군부터 제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드기동군이 조선인민군의 작전구역에 가까이 다가가 전진배치될수록, 조선인민군이 사드기동군를 공격할 조건은 그만큼 더 유리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에 배치된 사드기동군을 전시에 제거하게 될 조선인민군 전투단위는 복엽기를 타고 기습적으로 침투하는 금성친위여단이다. 금성친위여단의 기습침투전술에 대해서는 <자주시보> 2015년 4월 27일에 실린 나의 글 ‘금성친위여단은 복엽기 타고 어디로 날아가나’에서 자세히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사드기동군에는 1개 헌병중대가 호위대로 배치되는데, 조선인민군 중에서도 최정예전투단위인 금성친위여단은 자기들이 미국군 1개 헌병중대를 ‘벼락 같이’ 제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다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은 사드기동군을 한국에 전진배치하려는 자기의 계략에 따라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한 것처럼 여론을 조작하고 있지만, 미국이 조선의 요구대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수도피폭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19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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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폰서 검사님!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2/01 10:51
  • 수정일
    2016/02/01 10:5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삭제요청까지 했는지 궁금합니다
 
임병도 | 2016-02-01 09:30:5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뉴스타파와 인터뷰중인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 ⓒ뉴스타파

 

지난 1월 14일 뉴스타파가 ‘총선에 뛰어든 그때 그 사람들’을 보도했습니다. 4.13 총선에 출마한 예비 후보 중 과거에 비판을 받거나 논란이 됐던 사람들을 취재한 기사였습니다. 뉴스타파가 취재한 사람 중에는 유독 아이엠피터의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입니다.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을 아느냐고요? 제대로 대면해서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전혀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만나고 싶었느냐고요? 박기준 전 검사장이 아이엠피터가 쓴 글을 명예훼손으로 삭제 요청을 했기 때문입니다.

 

박기준의 대리단체가 명예훼손으로 게시물 삭제 요청을 했다고 통보한 Daum 클린센터 안내문

 

 

박기준의 대리단체가 명예훼손으로 게시물 삭제 요청을 했다고 통보한 Daum 클린센터 안내문

 

2015년 11월 20일 박기준 전 검사장의 대리단체는 아이엠피터가 쓴  [‘김영란법’ 범죄를 꿈꾸는 자에게 유린당하다]는 글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게시물 삭제 요청을 했고, 그날 해당 글은 임시조치(글이 블라인드 처리돼 외부에서 볼 수 없는 상황) 됐습니다.

불과 10여 일 뒤인 12월 2일 박기준의 대리단체라는 곳에서 또다시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글에 명예훼손으로 게시물 삭제 요청을 했습니다. 물론 똑같이 임시조치됐습니다.

불과 2주 사이에 썼던 글 두 개가 임시조치됐으니 글을 천천히 읽어봤습니다. 언론 보도에 나온 팩트를 기반으로 작성했던 글이라 사실관계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만약 사실이 아니었다면 다른 언론사의 기사들도 언론중재위에 제소가 됐을텐데 그런 말도 없었습니다. 글에서 박기준 전 검사장은 주인공도 아닌 보조출연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명예훼손으로 글이 임시조치되니 이 사람이 총선 출마를 앞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기준 전 검사장은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지역의 건축업자에게 뇌물을 받아 면직처분된 전력이 있는데.
– 뇌물 받고 그랬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판결문에 스폰서로부터 호텔비, 회식비를 받았다고 명시돼 있는데.
– 특검을 통해서 혐의가 없는 걸로 다 정리가 된 사항이다.

국민의 대표자가 되기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나.
– 나름대로 행정적인 책임도 졌고 4~5년 넘게 성찰의 시간을 통해서 스스로 다듬었다고 생각한다.

저는 4~5년 넘게 성찰의 시간을 통해서 스스로 다듬었다는 생각에 갑자기 웃음이 터졌습니다. 보통 성찰의 시간을 보낸 사람은 굉장히 온화한 표정과 행동을 합니다. 그는 총선 예비 후보로 등록하기 불과 20여 일 전에도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자신이 보조 출연한 글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한 사람입니다.

 

명예훼손으로 삭제요청을 했던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의 심의대리가 접수되지 않아 자동으로 복원됐다는 안내문

 

 

 

박기준 전 검사장의 대리단체가 명예훼손으로 삭제 요청해 임시조치된 글은 지난 1월 2일 복원됐습니다. 이유는 박기준 전 검사장으로부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받을 수 있도록 심의대리 접수를 해야 했는데 아무 연락이 없어서 자동으로 복원된 것입니다.

진짜로 성찰의 시간을 통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를 포기했는지 아니면 싸워봤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리라 예상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단 하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심의받더라도 글은 복원됐을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의 최시중 게이트 관련 글도 김학인 전 이사장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삭제요청을 받았지만, 방송통신심의위원회까지 가서 위반내용이 ‘해당없음’으로 복원됐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담긴 글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위반 내용이 없어 복원됐다.

 

아이엠피터는 글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명예훼손으로 삭제요청을 했으면 제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가서 심의를 받았으면 합니다. 임시조치가 된 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심의 요청을 하면 훨씬 빠르게 글이 복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 연락이 없으면 30일 후에나 복원이 됩니다. 30일 동안은 사람들이 글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글에 문제가 있거나 오류가 있다면 당당하게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고, 그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는 판정을 객관적으로 받기 원합니다. 무조건 자기 이야기가 비판적으로 나오니 명예훼손이라고 하니 참 답답합니다. 특히 총선 예비 후보로 출마하실 분은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전과와 학력 등 정보를 모두 공개해야 하는 공인에 속합니다. 그런 분이 마음대로 삭제 요청했다가 정작 심의 때는 연락이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MBC PD수첩 ‘검사와 스폰서’ 편에 연루된 박기준 부산지검장이 취재진에게 협박성 발언을 하는 장면, ⓒMBCPD수첩 화면 갈무리

 

박기준 전 검사장이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고 했지만, 명예훼손으로 삭제요청을 하는 모습을 보면 과거 PD수첩 취재진에게 협박하는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정치블로거에게 명예훼손으로 글 삭제를 요청했다는 것은 가장 큰 위협 중의 하나입니다.

지면을 빌려 박기준 전 검사장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삭제요청까지 했는지 궁금합니다. 총선 전에 알려주실 수는 없나요?’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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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와 민족

외세와 민족
 
 
 
정설교 화백
기사입력: 2016/01/31 [11:2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조선인민군을 환영하는 학생들,   출처-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 정설교 화백

▲  조선인민군 서울입성을 환영하는 인파와  미군 전쟁포로 , 출처- 한국전쟁의 전재과정

© 정설교 화백

 

   [▲인민군과 조선일보]

 

 

노동자자농민에게 미군과 북한의 인민군은 어떤 존재였을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 같이 미군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의의 용사고 북한의 인민군은 불법남침과 야만스런 학살을 저지른 전쟁도발자들일까?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 대전전투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된 미국의 고위 장교였던 미 24사단장인 딘 소장은 후일 자신의 회고록에서 “남한지역에서 이승만은 나쁘게 평가되고 타도의 대상이었지만 북한 인민군에 대한 지지열기가 매우 높았다고 했다.” 미국의 CIA 조지프 굴든은 이승만 군대가 후퇴한 뒤 서울의 상황에 대하여 “서울시민 상당수가 이승만과 그의 정부가 사라져버린 것을 환영하고 있었으며 거리는 북한군에 동조하는 학생들로 붐볐다”고 미국정부에 보고하였다.

 

미국의 데이비드 콩트는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뭔가 죄지은 반동들만 빼고는 모든 서울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28일은 굉장한 휴일이었다".했다. 당시 국회의원 60명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고 북한군에 협조할 자세를 취했으며 북한 인민군 대다수의 한국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월스트리저널이 전했다. 조선일보도 인민군 서울입성을 보도하며 우리민족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장군 만세!라고 보도했다.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던 이승만정권과 미군이 그래서 거창, 노근리 등 전국 곳곳에서 국민을 적으로 여기고 민간인 학살을 마구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토마스 매그로우 중령은 UP통신 기자에게 “북과 남 모든 노동자, 농민은 미국인들을 싫어하고 있다”고 말하고 미군은  대다수 한국인을 적으로 한다고 말했다. 1951년 2월 미군은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을 내렸다.

 

작전지역 안의 모든 양민은 총살하라.

공산유격대의 근거지 모든 건물을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과 은신처는 모두 소각하라

 

한국인의 머리에 총탄이 명중될 때 기분이 정말 통쾌했다. 두개골이 날아가고 눈에서는 눈동자가 뽀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야말로 명사수가 아닌가? (브루스 커밍스 존 할리데이 224쪽)

 

미군은 한국인의 손과 귀, 코를 쇠줄로 꿰뚫었다. 이마에 못을 박고 그가 죽을 때 까지 고문했다. 아내가 남편의 고문을 제지하려하자 미군은 여성의 머리채를 잡고 나무에 비끌어매고 발가벗겨 젖을 베고 여자의  음부에다 막대기를 막았다. 그리고 기름을 부은 다음 산채로 불을 질렀다. (출처-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미군은 이성을 잃어갔고 그들이 주둔하는 곳에서 저지른 수많은 엽기적인 만행은  한국에서 계속되었다. 미국은 한국인을 국(gook)이라고 불렀는데 gook이란 오물찌꺼기를 말한다.

 

한국인들은 늘 미국을 좋게 말하지만 치외법권을 누리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한국인을 없애치워야할  오물로 보고 있다. 1950년 7월 13일  맥아더는 자신의 목표를 이렇게 공언하였다. "나의 임무는 한반도 전역의 오물들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라고... 

 

한국인은 한국인의 운명을  주한미군에게 맡기고  얼룩무늬 가스통 늙은이들은  성조기를 흔들며  침략자로 우리의 국민들을 국(Gook)으로하는 미군을 찬양하며 한핏줄기 같은 언어에 민족을 아는지 모르느지 역사를 배반하며 너무 태평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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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실험 때마다 반복 보도되는 단둥의 '긴장감'

수소탄 터질 때, 北 사람은 <내부자들> 보면서…
[강주원의 '국경 읽기'] 북한 4차 핵실험 이후, 단둥 ①
 
| 2016.02.01 08:08:34



핵실험 때마다 반복 보도되는 단둥의 '긴장감'

2006년 10월, 장기간 현장 연구를 계획하고 단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북한의 1차 핵실험(2006년 10월 9일)이 연일 방송과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주변 동료와 선배들은 "뭐 대단한 박사 학위 논문을 쓴다고, 위험한 중-조 국경 지역에 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진심어린 걱정을 해 주었다. 핵실험과 관련된 '긴장감 감도는' 단둥 현지 소식을 읽으면서, 나 역시 무모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단둥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10년 전 일이지만 단둥에 도착 한 다음 날, 눈앞에 펼쳐진 압록강변의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핵실험 직후 문을 닫았다는 북한 식당은 영업을 하고 있었고, 강변 광장에는 산책하던 중국 사람들이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여러 쌍의 신랑과 신부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한국의 언론을 통해서 접한 중-조 국경 지역에 대한 선입견을 하나 둘 없애는 작업이 필요했다. 

2009년 5월, 한창 연구실에서 박사 논문 초안을 고민하던 나는 북한의 2차 핵실험(2009년 5월 25일) 소식과 함께 보도되는 단둥 소식에 망연자실이 되었다. 단둥과 신의주 두 도시 사람들의 삶의 수단인 국경 넘나들기에 관한 3년 동안의 연구가 허사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언론의 보도와는 다르게 그 이후에도 단둥과 신의주의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2013년 2월 12일) 이후에도 '단둥의 긴장감'과 함께 '압록강의 황량함'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익숙한 내용은 반복되었다.

 

▲ 북한의 핵실험이 있을 때마다, 단둥은 긴장감이 감도는 도시로 묘사된다.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에 목격한 단둥의 풍경은 평화로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2006년). ⓒ강주원


나는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2016년 1월 6일)이 보도되는 순간 단둥의 날씨를 체크했다. 이번에도 단둥과 압록강의 영하 10도 내외의 기온은 고려하지 않은 채 기사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서 3번의 핵실험 때와 마찬가지로 다음 날부터 한국 언론은 단둥을 "북한 접경 중국 단둥…고요 속 긴장감 고조"라는 비슷한 머리기사로 묘사하였다.

북한의 핵실험 소식이 전해진 6일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접경한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분위기는 외견상 고요한 가운데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 북한 신의주 맞은편 단둥 압록강변 공원에는 평소 산책 나온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북적댔으나 이날따라 오가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 단둥 열차역 부근에 조성된 '조선 한국 민속거리'에 있는 음식점과 가게도 종일 썰렁한 모습을 보였다. (<연합뉴스> 2016년 1월 7일)

특파원이 긴장감이 가득한 단둥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전해왔습니다. (MBC 2016년 1월 8일) 

"도대체, 매번 반복 보도되는 '긴장감이 가득한 단둥'의 근거는 무엇일까?", "영하 10도의 날씨에 압록강의 칼바람을 맞으면서 산책을 할 사람들과 관광객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 정말로 단둥의 상황이 바뀐 것일까?"라는 질문을 계속하자 와이프가 한마디 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단둥에 갔다 오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여행용 가방을 찾았다.

 

▲ 인천공항에서 단둥행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 만에 삼국이 공존하는 단둥에 도착한다(2016년). ⓒ강주원


북한 4차 핵실험 일주일 이후, 찾아간 단둥 

1월 13일, 점심 때 대학로에서 회의를 마치고 귀가한 나는 저녁 6시쯤 집을 나섰다. 2015년 가을에 시범 취항을 한 인천-단둥 비행기의 출발 시간은 22시 05분이다. 전세기 형식이었던 이 비행기는 약 3달 동안 운행되었지만 이번이 마지막 비행이다. 언제 다시 인천-단둥 간 비행기가 뜰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북한의 핵실험과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운행 중단이 공지되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한국 언론 보도 내용에 대한 확인 및 핵실험 직후의 변화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숙제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나는 인천공항에서 이날 발표한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전문을 읽었다. 그 속에서 단둥에서 무엇을 봐야 되는지를 고민했다.

이륙한 후 한 시간 남짓 지나, 단둥 공항에 도착한 나는 자신이 부탁한 이런저런 물건을 받기 위해서 마중 나온 조선족 H 덕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두 시간도 안 되어서 단둥 시내 호텔에 도착하였다. 로비 한쪽에서 북한 여성 4명이 단장(부한 무역일꾼들의 대표)을 찾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단둥에 도착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였다.

조선족 지인과 함께 호텔 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요즘 단둥에 북한 사람들이 없다고 한국 언론이 보도"한다는 말을 그에게 던졌다.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연말연시에 단둥에 나와 있던 무역일꾼들이 신년 학습 때문에 고향(북한)에 돌아가는 것은 연례 행사인데, 그들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며칠 전부터 다시 단둥에 북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던데…." 

그는 핵실험 이후에 북한 사업 파트너들과 나눈 이야기와 어제 그들과 함께 본 한국 영화 <내부자들>(2015년)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늘어놓았다. 그 사이 해는 압록강 너머 신의주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 호텔 창 너머 단둥의 풍경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 어디에도 한국 언론이 보도하는 긴장감은 없었다. 다만 삼국이 공존하는 그 자체였다(2016년). ⓒ강주원


언론의 보도대로, 호텔 조식을 먹는 동안 북한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20명 정도의 북한 사람들이 주변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 호텔 객실이 140여 개이고 1년 내내 주로 북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대북제재를 하면 호텔은 어떻게 될까?"라는 대화를 조선족과 나눈 뒤, 나는 북한 화교 C 사무실로 걸어갔다. 역시 추웠다. 평소와 달리 걸어가는 약 10분 동안 북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도 보기 힘들었다. 

북한의 2016년 달력이 걸린 사무실에 들어가자, 그는 "신의주 공장에 하청을 준 물건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반겨준다. 

"신의주에 1000명의 월급을 주는 날이 다가왔고, 월급 가운데 일부분은 현금 대신에 식자재를 사서 보내는 날이기 때문에 바쁘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3000만 원 정도의 쌀과 콩기름 등을 보낸다. 며칠 전 신의주에서 건너 온 30명의 남자 노동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40평 아파트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 

그는 나와 함께 "그들이 먹을 식자재를 사기 위해서 시장에 같이 가자"고 했다. 얼떨결에 따라가서 며칠 동안 먹을 부식과 내일이 생일인 북한 노동자를 위해서 맥주까지 구입한 그가 1500위안을 지급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단둥의 북한 노동자 2만여 명이 하루에 구입하는 중국 쌀과 채소 그리고 고기의 양은 얼마나 될까? 북한 노동자 계약 서류에 보면 한 달 평균 한국 돈으로 약 8만 원이 1인 식비로 책정되어 있으니까, 어림잡아 한 달에 그들을 위해서 중국 재래시장에서 구입하는 식비 총액은 15억이 넘는다. 그럼 단둥의 북한 노동자가 1년에 300억 넘게 중국 재래시장에 돈이 돌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다 월급 대신에 신의주에 보내는 식자재 구입 금액까지 합치면 얼마나 될까!' 

 

▲ 북한 노동자들의 식재료 구입처로 이용되는 시장 풍경이다(2016년). ⓒ강주원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한국 식당에는 북한 사람 4명이 식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은 예의상 안 찍었지만 그들이 떠난 테이블 위에 남겨진 한국 소주 빈 병을 사진에 담았다. 

방금 북한 사람들이 먹었던 똑같은 음식으로 식사를 하면서 몸을 녹인 나는 일본 언론이 "북한 접경 지역 관광 업체들에게 관광객들을 북한 쪽으로 접근시키지 말라는 중국 당국의 긴급 지시도 내려졌다"고 보도한 압록강변의 선착장에 가보았다.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영하의 날씨에 유람선을 타고자하는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다.

 

▲ 식사를 하는 북한 사람들은 사진을 촬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와 한국 소주 빈병은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2016년). ⓒ강주원


조선족 거리에 지난 가을에 개업했다는 북한 식당과 북한으로 수출하는 물품 내역이 빼곡히 적힌 간판을 찍은 뒤 북한 화교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북한 무역 일꾼들 5명이 진을 치고 있는 관계로, 옆방에서 커피만 3잔 마시다가 한국 지인의 저녁 식사 자리에 합석을 했다. 마침 그는 한국에서 어제 온 사업 거래처 사람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술자리의 주제가 되기보다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냉면 기계 1000여 대 이상을 평양의 냉면 식당에 팔았다"는 사업 이야기가 술 잔 사이로 오고갔다.
 

▲ 조선족 거리의 한국어 간판은 북한으로 수출하는 물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중국은 북한으로 석유만 수출 혹은 원조하지 않는다(2016년). ⓒ강주원


(이번 단둥 현장 연구의 후반부 내용은 다음 연재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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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냄새 맡았는데 화약 냄새 없었다? 말이 되나”

 

[인터뷰] 천안함 전문가들 “재판 결과에 실망… 여전히 많은 의혹, 판사가 판단할 문제 아니다”

조현호 기자 chh@mediatoday.co.kr  2016년 02월 01일 월요일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현 서프라이즈·민진미디어 대표)의 재판에서 천안함이 북한어뢰의 공격으로 침몰됐다는 결론을 내린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에 대해 의혹을 제기해왔던 학계 및 전문가들이 비과학적 판결이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천안함 진실규명은 판사가 아닌 과학자가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황수 경성대 명예교수와 양판석 캐나다 매니토바대 지질과학과 분석실장(박사) 등 일부 과학자들은 미디어오늘과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재판부의 결론에 일일이 반론을 제기했다.

국제학술지에 잠수함충돌론을 게재했던 김황수 교수는 30일 미디어오늘과 이메일 인터뷰에서 “천안함 사건 진실을 가리는 것은 한 재판관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해당 과학자들이 모여 판단할 문제라고 본다”고 평가했다. 양판석 박사도 이날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 재판이 신상철 대표의 명예훼손 사건이었지만 재판과정을 통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길 기대했던 저는 합조단 보고서와 동일한 판결내용에 실망했다”고 평가했다.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이강훈 변호사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천안함 사건은 추가 조사를 통해 사고원인을 보다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며 “합조단 조사보고서를 주된 근거로 하는 법원의 판결로서 논란이 잠재워질 사안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물기둥을 못봤다는 증인들의 증언에도 물기둥을 목격했을 것이라고 판단한 재판부의 판단에 대해 학자들은 한목소리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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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평택 해군2함대 안보공원에 전시된 천안함 함수. ⓒ연합뉴스

김황수 경성대 명예교수는 천안함 폭발당시(추정) 30여 미터 직경의 물기둥이 100미터 가량 솟았다는 합조단 보고서(계산으로는 물기둥 높이 82미터) 내용을 들어 “호주에서 보여준 이 실험에서 보면 물기둥은 배 전체 영역을 넘어 떨어진다”며 “그런데 물방울만 견시병 뺨을 때렸다는 것은 소가 웃을 판단”이라고 반박했다.

 

양판석 캐나다 매니토바대 박사도 물기둥에 대해 “합조단 모델에 따르면 물기둥이 생성되기 약 1.1초 전에 먼저 충격파가 선체에 도달한다”며 “충격파는 물기둥과 마찬가지로 승조원과 선체에 수직으로 전달되므로, 견시병은 물기둥이 생기기 약 1.1초전에 위로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면서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견시병이 앞만보고 있어서 뒤에서 생성된 물기둥을 보지못했을수도 있다는 재판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반박했다.

양 박사는 “설령 다시 떨어지면서 넘어지지 않았더라도 1초라는 시간은 충격파가 온 쪽으로 직감적으로 몸을 돌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라며 “이런 추론을 근거로 수십미터에 달하는 물기둥이 있었다면 견시병이 놓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또한 좌현 견시병 발목이 빠질 만큼 물이 고여있었다는 것을 물기둥의 정황으로 제시한 재판부에 대해 양 박사는 “작은 양이어도 배가 기울어진 상태라면 물이 한쪽으로 몰려 발목까지 빠질수도 있으므로 배의 상태가 전제되지 않은 물의 양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반박했다.

초병이 본 방향을 임의로 수정 판단한 재판부 결론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천안함 조사결과 언론보도 검증위원회 책임연구위원을 했던 노종면 전 YTN 노조위원장도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천안함 폭발원점이 초소 기준 230도(서남)인데 초병들은 일관되게 북서, 그것도 북쪽에 있는 두무진 돌출부와 함께 ‘무엇’을 봤다지 않느냐”며 “더욱이 늘 경계하는 곳이라 착각할 수 없다는데 이런 판결문이 가능하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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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서방 연화리 초소에서 본 사고해역. 사진=조현호 기자


노 전 위원장은 “초병들이 붕어요? 엄격하고 적확해야 할 법관의 논리도 버블제트를 맞은 것인가”라며 “내가 두번이나 증인 출석해서 한 말”이라고 지적했다.

 

화약냄새를 맡지 못한 증언을 ‘고속으로 버블가스가 공기중으로 방출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 재판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반박이 나왔다.

김황수 교수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폭발 화약에 생성된 가스(화약냄새)는 공기중에 방출된 것이 아니라 수중에서 구 대칭으로 방출되고 솟구치는 물기둥과 함께 대기중으로 방출된다”며 “호주 실험에 의하면 물기둥에는 바닷물과 함께 검은 화약재(화약냄새)가 다량 석여 나오고 배 전체를 커버한다(덮는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그런데 견시병 뺨에 물방울만 튀겼으니 물기둥은 없는 것이고 또한 화약냄새도 없다라는 것이 과학적 합리적 판단”이라며 “재판부는 전혀 이치에 닿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판석 박사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화약냄새 대신 대부분 생존장병이 맡았다는 기름냄새에 주목했다. 어뢰폭발이 있었다면 기름냄새와 함께 화약냄새도 동시에 나야 한다는 것이다. 양 박사는 “대부분의 선원이 사고 직후 화약냄새는 없었고 대신 기름냄새를 맡았다고 증언했다”며 “기름이 어뢰에 의해 파괴된 가스터빈 및 주변장치에서 왔다면 당연이 그 곳을 타격한 버블에 있던 화약냄새도 동시에 맡아야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천안함이 충돌했을 가능성도 부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천안함 측부에 충돌선 선수 형상이 없고 충돌선 잔해 미발견 △해군전술자료처리체계(KNTDS) 및 선박위치자동식별체계(AIS)에 천안함 5.5마일 이내 항해 선박 미확인 △사건 직후 TOD 영상에서도 천안함 주변 선박 미확인 등을 들어 수상 선박과의 충돌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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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투브에 있는 호주 토렌스함 폭발장면.

특히 재판부는 TOD 동영상에 나타난 미상의 물체(점)에 대해 “사고 당시 남서풍이 20~25노트로 불고 있었던 점 등에 비춰 보면, 함체에서 떨어져 나간 프라스틱 재질의 구명정 등이 바람의 영향으로 주변을 떠다니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인다”라고 추정했다.

 

이 같은 분석과 관련해 실제로 수상함과 충돌했을 가능성이나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없다. 잠수함 충돌 가설을 언급한 것을 수상함과 충돌 가설과 혼용했다는 지적이다. 수상함은 레이더에 잡히지만, 잠수함은 잡히지 않는다.

이를 두고 양판석 박사는 “수상함과의 충돌은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다. 잠수함이면 충돌방향에 따라 천안함이 입은 유사한 형태의 피해양상을 보일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천안함의 피해양상엔 좌우로 작용한 횡방향의 손상흔이 남아있고 이는 수중 폭발로 기대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양 박사는 “TOD 상의 미상물체가 구명정일거란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며 “구명정이라면 수중에 잠긴 부분이 수면위에 드러난 부분보다 훨씬작아 조류속도보단 바람의 영향을 더 받아 표류속도가 함수 보다 빠르게돼 함수보다 더 좌측에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흡착물질이 폭발물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재판부 판단에 대해서도 반박이 이어졌다. 양판석 박사는 “소위 (천안함과 어뢰의) 흡착물은 수화물이며 수화물은 폭발로인해 생성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양 박사는 “수중폭발이던 공기중 폭발이던 폭발과정은 폭발후 에너지가 공기를 통해 전달되느냐 아니면 물을 통해 전달되느냐의 차이 뿐이고 최초 폭발생성물은 따라서 동일해야 한다”며 “장약에 불이 붙어 주변 폭발물이 연소되고 외피가 파괴되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까지 계속되는 연소반응에 의해 고온-고압의 환경이 만들어진다. 산화알루미늄을 포함한 이 같은 폭발생성물은 어뢰외피가 터지기 전에 생성돼 외피가 터진 후에야 대기 또는 수중과 같은 외부환경으로 방출된다. 한번 생성된 고온-고압의 폭발생성물은 다이아몬드가 수중에서 단기간에 변질되지 않듯 수화물로 쉽게 변질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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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촬영된 국방부 조사본부 천안함기념관에 전시된 1번어뢰의 프로펠러에 붙은 백색흡착물질. ⓒ연합뉴스

양 박사는 “(천안함 선체와 어뢰추진체에서 채취한) 문제의 흡착물은 다수의 물질이 섞인 혼합물이지만 에너지분광분석이나 전자현미(경)분석은 ‘전자빔’의 크기를 해당물질의 크기에 맞춰 조절함으로써 분석한 것”이라며 “이렇게 혼선을 없앨수 있음에도 합조단의 이근득 박사(국방과학연구원)가 혼합물이어서 물질규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변명”이라고 비판했다. 양 박사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해당 물질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폭발생성물이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5년6개월간 신상철 대표의 변호를 맡아온 이강훈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하여 사고원인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재판부가 합조단 조사보고서와 실질적으로 거의 동일한 결론을 내려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천안함 좌우견시병을 포함해 물기둥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물기둥이 있었다거나 초병들이 목격한 섬광의 방향이 천안함과 유사하다고 한 판단은 실제 증인들의 진술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며 “또한 합조단의 조사결과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세가지 중 하나는 수중 폭발 시뮬레이션 결과와 천안함 선체의 절단 형상이 정성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나 수중 폭발 시뮬레이션이 천안함 절단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백색 흡착물질에 대한 합조단의 조사결과는 국내외 학자들의 검토 결과 매우 불완전한 것이어서 합조단이 내린 결론을 뒷받침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점을 법정 증언 및 관련 학자들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천안함 사건은 추가 조사를 통해 사고원인을 보다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하는 과제가 있으며 합조단 조사보고서를 주된 근거로 하는 법원의 판결로서 논란이 잠재워질 사안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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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 지키는 대학생들과 24시간, 그 6가지 기록

소녀상 옆에서 24시간
절망했다 "전기장판이 모자라요"

[현장 12시간] 소녀상 지키는 대학생들과 24시간, 그 6가지 기록 ①

16.01.31 21:02l최종 업데이트 16.01.31 21:02l

 

 

빠른 취재와 짧은 기사가 미덕인 이 시대 저널리즘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저는 천천히, 차근차근, 깊숙이 현장을 기록하려 합니다. 짧게는 12시간에서 길게는 24시간 현장을 지키려고 합니다. 제 글은 짧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글을 쓴다면, 여러분은 이를 허투루 넘기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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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8일 새벽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침낭 속에 한뎃잠을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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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새벽 1시 평화의 소녀상 옆. 거리에 은박 깔개를 깔고 그 위에 매트를 덮었다. 이제 전기장판을 찾을 차례다. 영하 6도의 날씨. 오전 9시부터 16시간을 꼬박 소녀상 옆에서 취재했다.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24시간 현장 취재고 뭐고, 어서 빨리 전기장판 위 침낭에 들어가고 싶었다. 곧 대학생들한테서 절망적인 얘기가 들려왔다.

"전기장판이 모자라요."

눈에 불을 켜고 노숙 물품더미를 샅샅이 뒤졌더니, 전기장판이 나왔다. "어라, 전원 코드가 없어요." 필사적으로 다시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전기장판은 여학생들에게 양보하고 기자를 비롯한 남자들은 매트 위에 몇 겹의 이불을 깔고 침낭을 폈다. 핫팩을 양쪽 양말 안으로 넣었다. 2개의 핫팩을 손에 들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올겨울 가장 고단한 하루를 보낸 만큼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느 순간 깼다. 몸이 덜덜 떨렸다. 침낭 밖에 얼굴을 빼꼼 내미니, 아직 깜깜한 새벽이다. 소녀상 앞 일본대사관 터에서 중장비가 움직이는 소리에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억지로 눈을 붙이려 노력했다. 

자고 싶어도, 더 잘 수가 없을 정도로 춥다고 느꼈을 때 일어났다. 새벽 6시 30분. 한 여고생이 '박근혜 정부는 경술국치 재현 말고 석고대죄하라'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어젯밤 대학생 언니 오빠들과 노숙을 하겠다며 불쑥 찾아온 학생이었다. 밤을 꼬박 지새운 뒤, 팻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후 일어난 대학생들은 출근길 시민을 상대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부당함을 알리는 1인 시위에 나섰다. 오전 9시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과 함께 한 지 24시간이 흘렀다. 돌아가는 길, 취재수첩을 살폈다. 많은 이들이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많은 기록 중 6개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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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노숙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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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①] 스무 살을 경찰서에서 시작하다

서울 종로구 율곡로2길. 평화로라고 더 많이 불리는 이곳에 소녀상이 있다. 앉은키 130cm의 단발머리 소녀의 마음은 어지럽다. 그 자리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일본은 지난달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소녀상 이전을 정해진 일로 보고 있다. 

합의문에는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함'이라고 명시돼있다. 우리 정부가 소녀상 이전을 약속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소녀상 이전은 민간단체의 일"이라며 선을 긋고 있지만, 정부 말을 믿는 이들은 많지 않다.  
                                           
위안부 합의 이후 한 달이 지났지만, 소녀상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녀상 지킴이 대학생들 덕분일 것이다. 위안부 합의 이후 첫 수요시위가 열린 지난달 30일부터 소녀상을 지키고 있다. 학생들은 교대로 한뎃잠을 잔다. 오전 9시에 교대한다.

기자가 찾은 1월 27일 오전 9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게 분명한 기색의 학생들이 몸을 일으켰다. 인터뷰 요청에 손사래를 친다. 곧 팔팔한 학생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에게 "오늘 함께 24시간을 보낸다"라고 하자, 깜짝 놀라는 눈치다. 청년단체 '청년하다'에서 활동하는 중앙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에게 춥다고 엄살을 피우자, 전기장판 쪽에 앉으란다. 이양선(20)씨는 "저는 '히트택'을 입고 왔다"며 깔깔 웃었다. 오늘 처음 소녀상 지키기 노숙농성을 한다고 했다. 한껏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선배를 따라온 철없는 대학 새내기 아닐까. 양선씨는 지난달 31일 일본대사관 기습시위로 스무 살의 첫날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냈다고 했다. 멋모르는 건 나였다.

- 무섭지 않았어요? 
"일본이 '미안, 이제 됐지?' 하는 식의 사과 방식은 잘못됐잖아요. 많이 화가 났어요.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간 게 아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고, 떳떳했어요."

경찰 조사는 배후 찾기에 바빴다. "누가 교육을 시켰나", "누가 주동자인가"라는 경찰의 물음에 양선씨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서에서 48시간을 보낸 뒤 나올 때, "태어나서 이렇게 당당하게 나온 건 처음이었다"라고 했다. 

-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을 것 같아요.
"경찰서에서 나온 뒤 엄마랑 통화하는데, "두부 먹었어?"고 물으셨어요. 그 말에서 걱정이 묻어났어요."

그 길로 고향 울산에 내려갔다. 엄마한테 "내 이익을 좇기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딸의 신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②] 배후를 찾다

1시간이 지나니, 다리가 저려왔다. 영하의 거리에서 전기장판의 힘은 제한적이다. 그런데 대학생들은 힘들지 않단다. 즐겁단다. 

쌍화탕 네 박스가 배달됐다. 쌍화탕뿐이랴. 따뜻한 커피는 셀 수 없었고, 햄버거·피자·치킨·김밥·토스트 등 각종 먹을거리가 배달됐다. "필요한 거 없느냐"고 묻는 많은 시민들을 돌려보냈는데도, 농성장 한 편에 다 소화하지 못한 먹을거리가 쌓여갔다. 점심때는 '성동구 중구 엄마들 모임'(성중맘)의 밥차가 와서, 학생들에게 따끈한 북어국밥을 퍼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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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낮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이날 점심은 '성동구 중구 엄마들 모임'(성중맘)의 밥차가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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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대학생 이태우(27)씨가 시민들이 후원금을 마련해 제작한 식권 뭉치를 기자에게 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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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생들이 가장 맛있게 먹었던 건 25일에 배달된 피자였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학생들은 배달원을 통해 연락처를 알아냈다. 전화를 했더니 여중생이었다. 대학생들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니, 이 여중생은 "페이스북으로 대학생들이 밤새 소녀상 옆에서 지키는 걸 보고 도움 될 일이 없을까 해서 간식을 보내드렸다"라고 말했다. 

대학생들이 비싼 피자라고 걱정을 하자, 이 학생은 "저도 처음 먹어본 피자였는데..."라며 쑥스러워했다. "용돈도 많지 않을 텐데" 하는 걱정에, 이 학생은 "어떤 아주머니께서 후원금을 주셔서 피자를 샀다"라고 까르르 웃었다. 대학생들은 전화통화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 대학생대책위원회 상황실에서 일하는 이태우(27)씨는 식권 뭉치를 기자에게 내보였다. 소녀상 사진과 함께 '힘내서 소녀상을 꼭 지켜주세요'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누군가가 프린터로 뽑아 오려 만든 식권이었다. 태우씨의 말이다. 

"거리에서 밥을 먹으면 체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얼마 전 몇몇 시민들이 돈을 모아 식권을 만들어주셨어요. 주변 식당에 120만 원가량 내고 식권을 만든 거예요. 식권 한 장 내면 7000원짜리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어요. 그러면 힘이 납니다. 큰 감동입니다."

[기록③] 정권이 원하는 것

"왜 텐트 안쳐요?"

한 시민이 농성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렇게 묻는 이가 여럿이었다. 소녀상 옆에 텐트를 칠 수 있다는 기사가 나왔던 탓이다. 실제로는 소녀상에서 20m 떨어진 곳에서 텐트를 설치할 수 있다. 소녀상 지킴이를 자처한 학생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다.

소녀상 주변엔 경찰버스가 포위하듯 지키고 서있다. 많은 경찰이 소녀상 주변을 감시했다. 경찰은 학생들의 방한 용품 반입을 막고 있다. 학생들은 당초 농성장에 침낭, 텐트, 천막을 들이려고 했다. 경찰은 불법 시위 용품이라며 막았다. 학생들의 항의에 침낭만 허용했다. 대학생 대책위 상황실장 정수연씨의 말이다. 

"우리 대학생들도 '춥고 힘든데 매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노숙농성을 시작했어요. 경찰도 천막, 텐트 등을 허용하면 농성이 장기화될 수 있으니까 (학생들이) 알아서 그만두도록 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돼요."

수연씨 추측이 맞다면, 경찰의 판단은 오판이다. 수연씨는 "이미 1000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노숙농성을 했고, 2월에도 지역에서 많은 학생들이 올라온다. 대학생들은 즐겁게 노숙농성을 하며 소녀상을 지키고 있다. 힘들어서 포기할 일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활동 범위를 넓힌다. 2월에는 소녀상 지키기를 넘어, 한일 합의 전면무효 활동을 펼쳐 나간다. 

* 소녀상 지키는 대학생들과 24시간, 그 6가지 기록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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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 놓인 핫팩에 한 '꼬마 손님'이 붙인 쪽지가 눈에 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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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돌린 돈으로 삼겹살 파티? 정말 끔찍

아들 빈소에서 "건배", 군 지휘관 잊을 수 없다

[대한민국 군 인권 18년의 기록④] 군인 장례비로 지원하는 영현비, 투명하게 집행해야

16.01.30 17:39l최종 업데이트 16.01.30 17:3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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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기난사 사건으로 숨진 장병들을 단체조문 하러 가는 군인들.(기사내용과 관련 없음)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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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된 계기는 2011년 12월, 육군 모 부대 소속 김아무개 일병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였습니다. 당시 군 헌병대는 김 일병의 유족에게 "평소 고인이 앓고 있던 우울증이 악화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자살'이라고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김 일병의 아버지는 반발했습니다. 군 수사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며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아버지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매우 충격적인 글과 만나게 됩니다. 글을 쓴 이는 숨진 아들과 함께 근무했던 전역병. 한 때 세상에 큰 화제가 되었던 그의 양심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살인을 방관했고, 나 또한 살인자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전역병은 김 일병이 사망하게 된 전후 과정에서 벌어진 부대내 비밀을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김 일병의 죽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왜곡과 은폐, 조작. 김 일병의 죽음에 부대측의 잘못이 없었다는 군 헌병대 수사와 전혀 배치되는 폭로였습니다. 

이러한 전역병의 도움으로 김 일병의 아버지는 국민권익위원회에 '사건의 경위를 밝혀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권익위는 진실을 밝혀냅니다. 알고 보니 김 일병은 입대한 후 선임병에게 폭언과 잠 안 재우기 등의 가혹 행위를 당했으며 또 자살하기 전, 이미 여러 차례 자살도 기도했으나 부대측이 이에 따른 적절한 조치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권익위는 더 놀라운 비밀을 알게됩니다. 부도덕한 군의 치부가 드러난 그 사건, 이른바 '조의금 횡령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빼돌린 조의금으로 헌병대 격려금도 줘

김 일병의 아버지가 권익위에 진정한 내용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들의 사망 원인 규명'과 또 하나는 '수상한 돈과 관련한 의혹'이었습니다. 내막은 이렇습니다. 김 일병의 아버지는 아들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찾고자 부대를 상대로 정보 공개 청구를 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문서를 입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문서 중 김 일병의 아버지는 매우 뜻밖의 문장을 읽게 됩니다. 장례 과정에서 단 1원도 부대에서 받은 사실이 없는데 그런 아버지에게 부대가 '조의금을 전달했다'며 쓴 보고서였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자신에게 줬다는 이 조의금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혀달라고 진정서를 낸 것입니다.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권익위에 따르면 김 일병의 장례가 진행되던 이틀째 밤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김 일병의 장례를 지원한다며 김 일병이 속한 부대의 이아무개 상사가 빈소에 있었는데 이때 이 상사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 상사가 유족의 돈인 조의금 부의함을 멋대로 연 후 그 안에 든 300만 원을 꺼내 가져간 것입니다. 

한편 이 상사는 이 날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이런 방식으로 조의금을 더 꺼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 후 추후 보고서에서는 이 돈을 "유족에게 전달했다"며 쓴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돈은 유족에게 전달된 적이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권익위가 확인한 이 돈의 사용처였습니다. 이 상사는 이 돈 중 일부를 김 일병의 사건을 수사중인 헌병대와 기무반장에게 '격려금' 명목으로 줬습니다. 이 상사는 왜 김 일병의 사망 경위를 조사하던 헌병대에게 돈을 줬을까요? 더구나 죽은 김 일병의 조의금으로 왜 수사중인 자에게 돈을 준 단 말입니까?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상사는 이후 부대 대대장에게도 30만 원을, 그리고 대대와 여단 주임원사에게 80만 원을 격려금으로 줬다고 합니다. 죽은 사병의 조의금을 빼돌려 군 간부끼리 '격려금'이라며 나눠 쓴 황당한 사건, 이른바 '조의금 횡령 사건'이었습니다.

빼돌린 돈으로 삼겹살 파티? 정말 끔찍

이 사실이 알려진 후 국민들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군이 썩어도 이정도로 썩었나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김관진 국방부장관 역시 대노했다고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즉각 수사에 나서도록 군 검찰에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사에 나선 군 검찰은 이후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발표합니다.

김 일병이 사망한 그해, 김 일병이 사망한 해당 부대에서 연말을 맞이하여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날 여단장을 비롯하여 부대의 주요 간부가 전원 참석했는데, 이날 구입한 삼겹살과 술 등을 빼돌려진 김 일병의 조의금 중 일부로 샀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 부대 간부가 다 같이 나눠쓰고 먹어버린 기가 막힌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군 검찰은 이들 부대 간부 중 3명을 횡령 혐의 등으로 기소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피해 사례가 과연 김 일병만의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저는 군 사망사고 피해 유족을 상대로 확인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자식을 잃은 유족에게 군이 장례 중 제대로 예우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저는 아주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몰랐고, 유족도 몰랐던 또 다른 군의 '추악한 민낯'. 오랜 기간동안 관행적으로 벌어진 '군 영현비' 집행과 관련한 비리였습니다. 

경위는 이렇습니다. 복무중인 군인이 사망할 경우 국방부는 장례 비용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영현비'로 불리는 이 돈은 한국 전쟁중인 1951년 9월 28일 첫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군 복무중인 군인이 사망할 경우 국방부는 계급과 상관없이 유가족 접대비와 화장비, 장의비 등의 명목으로 영현비를 지급해 왔는데 2011년 12월까지는 이 금액이 총 2,674,000원 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액수만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민원이 거듭되자 국방부는 2012년부터 300만 원 늘린 5,674,00원을 영현비로 지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꾼 규정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영현비 중 1,674,000원은 '유족 여비'로 반드시 유족 통장에 지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400만 원은 유족의 장례를 지원하라는 지침이었습니다. 

빼돌린 돈은 김 일병의 '조의금' 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국방부의 지침과 달리 영현비가 바르게 집행되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국회 김광진 의원실에서 유족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유족에게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 1,674,000원의 '유족 여비'도 군 부대가 주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조의금 뿐만 아니라 '유족 여비마저' 빼돌린 것입니다.

만약 영현비가 정상 집행되려면 이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먼저 부대측이 유족에게 영현비에 대해 설명한 후 '유족 여비'를 받을 통장 계좌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게 될 영현비 400만 원을 장례 기간중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유족과 협의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장례 비용이 초과되지 않도록 계획적 지출을 도와야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족들의 경험은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자식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다들 넋이 빠진 상태로 영안실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대측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이 이후 술과 고기, 음료와 떡 등 음식물을 빈소로 가져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족들은 처음, 부대가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전우가 죽었다고 부대가 장례는 치러주는구나"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돈이 국방부가 주는 장례비였음을 알게 되는 것은 마지막 발인 날이라고 했습니다. 장례 비용을 전부 부대가 내는 줄 알고 뭘 사 오든 참견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부대 행정 보급관이 종지 한 장을 가져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장례 중 지출 비용이라며 유족에게 "지급받은 영현비보다 초과한 비용"이라며 그 돈을 유족에게 달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요구받은 초과 비용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 보니, 최소 수 십 만 원에서 많게는 최대 800만 원을 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가 없는 기억은 발인날 경험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장례 후 당연히 음식과 음료, 술, 과일이 남게 됩니다. 그런데 부대측은 유족에게 의사도 묻지 않고 전부 자기들이 가져 갔다고 합니다. 남은 술과 음료는 반품도 가능할 텐데 왜 부대측이 그것을 일방적으로 가져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초과 비용은 유족에게 달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더구나 아들이 군에서 자살했다는데, 부고를 널리 알리는 유족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니 대부분 가까운 친인척 20~30여 명 정도가 조문객의 전부인데 어떻게 국방부가 지급한 영현비 5,674,000원을 전부 다 장례 비용으로 썼다는 것일까요?

군인 장례비로 지급하는 '영현비'는 눈먼 돈?

도대체 그 많은 음식과 술, 음료, 떡은 누가 다 먹었을까요. 바로 장례기간 중 조문한 부대의 간부 등 군인들이었습니다. 유족들은 '자살로 처리된' 아들의 빈소로 매일같이 군인들이 조문을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술과 고기, 밥과 떡과 국, 과일, 음료수를 먹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 모습이 유족에게는 마냥 고맙기만 했을까요?

더구나 부대측이 이러한 음식을 구입하다 보니 영현비로 지급된 총액 5,674,000원을 다 썼다고 하는데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어 믿을 수도 없다고 유족은 말합니다. 추후 권익위가 확인해 본 결과 영수증도 제대로 구비하지 않았으며 또 있다 해도 대부분이 간이 영수증이었습니다. 얼마든지 허위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문제로 유족 중에서 부대측과 다퉜다는 사람은 또 없었습니다. 자식이 죽었는데, 그래서 아들을 화장하러 가는데 이런 문제로 싸울 기력이 없어 황당하지만 '그냥 부대측이 원하는 대로' 해줬다는 것이 대부분의 유족 말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확인한 후 국회 김광진 의원실은 2014년 9월경, 유족 여비를 받지 못한 세 가족과 함께 국민권익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유족 여비를 받지 못한 또 다른 피해자를 밝혀주고 또한 미지급된 유족 여비를 어디에 썼는지도 분명하게 밝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밝혀진 사실. 권익위는 지난 2012년 이래 육군에서만 모두 360건의 영현비가 집행되었는데, 그중 64명의 유족에게 군이 1,674,000원의 여비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부대측은 이처럼 지급해야 할 유족 여비를 장례 비용으로 전부 다 써 버렸다고 변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변명을 믿는 유족은 없었습니다.

권익위는 이후 육군본부에 미지급한 유족 여비를 전부 지급하도록 결정하는 한편 관련자와 해당 부대를 징계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후 육군본부는 영현비 집행 과정을 투명하게 정비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했습니다. '영원히 계속될 뻔 했던' 영현비 비리 관행이 그나마 바로 잡히는 계기가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요. 

아들 죽은 빈소에서 진급 축하 건배 '참담'

그런데 이 영현비 문제를 조사하던 중 듣게 된 한 어머니의 사연은 정말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육군에서 복무중이던 아들을 잃은 이아무개 하사의 어머니였습니다.

이 어머니 역시 영현비와 관련한 설명을 부대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례 중 어머니는 부대에 미안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부대가 자기들 돈으로 음식과 술을 사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너무 미안해서 "우리 돈으로 사 올테니 그만 사라"는 말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돈이 유족에게 주는 돈까지 주지 않은 채 제 멋대로 부대가 썼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어머니는 '우롱당한 기분'이라며 언성을 높였습니다. "부대가 돈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며 쩔쩔매던 우리가 얼마나 바보처럼 보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머니 가슴에 남은 일은 장례 중 빈소에서 본 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아들이 죽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같은 부대 장교들이 조문 와서 빈소 한쪽에 앉더라구요. 그런데 그때 귀에 들리는 말이 있더라구요. 장교 중에 한명이 진급을 한 것 같아요. 그걸 축하한다고... 큰 소리로 떠들면서 빈소에서 축하 건배를 하더라구요. 건배를. 제가 정말 그 장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거기서 건배를 하는게 사람입니까?"

어머니는 "이게 전우애냐"며 울부짖었습니다. 아들은 죽었는데 그 빼돌린 조의금으로 삼겹살 파티를 하는, 그리고 유족에게 지급해야 할 여비도 주지 않은 채 그 돈으로 술과 떡과 고기로 회식을 하는, 그러다가 죽은 동료의 빈소에서 진급을 축하하는 건배를 외치는 모습에 어머니는 한이 맺힌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게 정말 말이 되나요?

군은 바뀌어야 합니다. 예능 프로인 '진짜 사나이'에서 포장되는 전우애가 아니라 목숨을 잃은 전우와 그 유족에게 '정말 같이 울어주고 배려해 주는' 대한민국 군대가 되기를 요구합니다. 적어도 전우와 그 전우의 유족에게 이런 문제로 한을 품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정말 비극입니다. 

만약 군 고위 관계자가 이 기사를 읽는다면, "우리 군을 매도하는 참 나쁜 기사"라며 불쾌해 하실까요?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시한번 '이런 문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대한민국 군, 이젠 정말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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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값의 총알받이 용병, JP가 말하지 않은 베트남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1/31 11:00
  • 수정일
    2016/01/31 11:0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 김종필에게 묻는다 ] 민주주의는 빵을 먹고 자란다? 명분도 실리도 없었던 비참한 전쟁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6년 01월 31일 일요일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이 기사는 스토리펀딩에서 후원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펀딩으로 이동]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먼저 빵을 먹고 자란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JP)가 중앙일보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군부독재시절 경제성장을 치적으로 내세우며 한 말이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남긴 명언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가 변형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통용되던 것을 빗댄 것이다.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는다. 당시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에 받은 청구권 자금(무상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과 1964년부터 1973년까지 9년간 베트남(월남)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 번 돈(전쟁특수 포함 약 10억 달러)이었다. JP가 말한 ‘빵’은 국민의 핏값이었다.
 
베트남전, 뭘 위해 싸웠나?
 
베트남전에 파병된 군인은 32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1000여명, 정확한 집계조차 힘든 고엽제 피해자들이 있다. 박정희 정권은 뭘 위해 국민의 피를 이국땅에 뿌렸을까? JP는 “월남이 사실상 공산군에 포위된 상태였다”며 “자유 우방들은 월남을 시급히 구출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참전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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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10월13일 김종필 공화당의장이 월남에 파병된 백마부대를 방문했다. 사진=국가기록원
 
1967년 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전 유세에서 “만약 한국군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당시 내 추측으로 주한미군 2개 사단이 베트남으로 갔을 것”이라며 “한국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종합하면 베트남의 공산화돼 중국 하에 놓이는 걸 막아야 하는데 주한미군이 빠져나갈 수 있으니 한국군이 대신 간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캄보디아·라오스 등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돼 중국 영향력에 놓일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을 주장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사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1954년부터 있었다. 베트남은 한국과 다르게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도 프랑스의 지배가 끝나지 않다가 1954년 제네바협정 결과 17도선에서 남북으로 분단돼 북베트남(월맹)에는 공산당, 남베트남에는 친미정권(베트남공화국)이 들어섰다. 
 
북베트남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남베트남 농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남베트남 정부가 친불(한국으로 보면 친일)정권에서 친미정권으로 주인만 바꿨을 뿐 부정부패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전쟁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내전이었고, 미국의 개입은 명분이 부족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는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베트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갈등이 조기에 나타났을 것”이라며 “베트남이 통일된 지 4년도 되지 않아 양국이 충돌한 것을 봐도 그렇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도미노 이론’이 오판이었다는 분석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 개입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다. 
 
JP는 “64년 8월 미군의 구축함이 월맹군의 어뢰정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져 월남전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며 자신이 64년 9월 미 상원의원들에게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이 통킹만에서 미국 매독스 호를 선제공격했다는 ‘통킹만 사건’은 조작됐다는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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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8월18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백마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사진=정부기록사진집
 
2003년 ‘전쟁의 안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2004년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 수상)에서 로버트 맥나마라 베트남전 당시 미 국방부 장관은 미 의회에서 참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1964년 8월4일 북베트남의 미국 공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미 국무부 ‘특별국가정보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참전 반년 전인 64년 5월 미국 존슨행정부는 북베트남에 대한 적극적 군사작전을 고려했고, 통킹만 사건 초기에도 곳곳에서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렇게 참전한 미국은 선전포고조차 없었다. 미군들조차 이 전쟁의 목표가 무엇인지, 왜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적이 북베트남인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인지 알 수 없었다. 베트콩에 우호적인 남베트남 민중은 포섭해야 할지 배척해야 할지도 기준이 없었다. 
 
미국은 23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물론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던 일본도 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수당을 지급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대만, 필리핀 등 6개국이 참전했다.  
 
미국은 용병 수당뿐 아니라 박정희 정부에 1억5000만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다. 왜 그랬을까?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종전쟁’이라는 비난을 피하고자 아시아 군인의 비용을 부담했다는 증언이 있다. 
 
강원용 목사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결국 한국군의 무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프랑스가 싸우다 나가서 백인 대 황인종의 전쟁인데 미국으로서는 이것을 면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며 “황인종 나라가 전쟁에 참여했어야 한다”고 주한 미 대사관 정무참사관 필립 하비브의 말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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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헬리콥터가 지원하는 장면. 사진=정부기록사진집
 
6개국 중 대규모 전투병력 파병은 한국이 유일했다. 한국의 월남 파병은 이렇게 시작됐다.  
 
피 팔아 얻어낸 빵은 충분했나? 
 
한국군 베트남 파병으로 미국은 명분만 얻은 게 아니다. 1970년 미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열린 월남 참전국 미국 지원내역에 대한 ‘사이밍턴 청문회’에 따르면 1인당 군 유지비용은 미군이 1만3000달러, 한국은 5000달러였다. 미국 입장에서는 1인당 8000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 한국군 32만명을 파병했으니 미국은 약 25억6000만 달러를 아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내에서도 한국군 파병이 늘어날수록 실제 비용도 적게 들고 미 참전군 숫자를 줄일 수 있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한국군 수당은 심지어 자기 나라를 지키는 월남군보다도 낮았다. 1967년 합동연감에 따르면 이병 수당을 보면 미군은 235달러, 월남군 55달러였지만 한국군은 51달러였다. 장교들 수당도 낮은 수준이었다. 미군은 569달러, 필리핀 475달러, 태국 406달러였지만 한국군은 190달러였다. 미군과 동일한 수준으로 대우하겠다던 미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쓴 돈이 총 1조110억 달러인데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한국이 받아온 총액은 10억3600만달러였다. 군 병력 10%를 채워주고 미국 전비의 0.1%를 얻어온 것이다. 그런데도 JP는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한국으로선 군이 살아있는 전투경험을 쌓고,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추켜세웠다. 
 
피로 얻어낸 빵은 어디로 갔나?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도 충분하지 않았다. 1966년 기준으로 하사 이하 사병들의 경우 전사 및 장애 1급인 경우 34만원(1320달러)이 지급됐는데 당시 직장인 1년 치 월급을 조금 웃도는 액수였다. 베트남전쟁 특수가 있었던 건 사실이며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임은 사실이지만 돈을 번 과정이 정당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박태균, ‘베트남 전쟁’ 참고)
 
군인뿐 아니라 기업 소속 기술자·근로자로 간 사람들도 대가를 제대로 못 받긴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1971년 2월에는 ‘한진 파월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 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서울 남대문로 대한항공 빌딩에 몰려가 매표실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농성자 13명에겐 징역 1~5년이 선고됐지만 한진이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윤충로, ‘베트남 전쟁시기 월남 재벌의 형성과 파월 기술자의 저항’ 참고)
 
전쟁으로 번 돈은 노동자들에게 가지 않고 어디로 흘러갔을까?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과 박정희 정권의 밀월관계를 살펴보자. 백악관 출입기자 출신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따르면 김대중 납치사건을 해결한 사람은 조중훈이었다. 그는 박정희 비자금의 운반책이었다.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사건’ 무마를 위해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를 정치자금 3억~4억엔으로 매수하는데 조중훈이 핵심 역할을 했다.
 
1973년 11월에는 JP가 박정희 친서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사죄했다. 당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돼 있었다. 문명자에 따르면 오사노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반(半)국영기업인 대한항공 주식을 10%나 가지고 있었고,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조중훈씨가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에게 1억엔을 헌금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1주일 후인 1973년 8월15일 청와대로 불려간 조중훈은 박정희로부터 김대중 사건 해결을 위해 다나카를 매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문명자에 따르면 조중훈은 다음 날 도쿄로 가서 오사노를 통해 이 뜻을 전하고 일본 돈 1억 엔을 건넸고, 그리고 8월18일 귀국하자마자 바로 청와대로 가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9월21일 드디어 하코네에서 다나카를 만나 외환은행에서 인출해 상자에 넣은 김대중 사건 정치적 해결 사례금 2억 엔을 다나카에게 건넸다.
 
이후 한진은 박정희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했다. 조중훈의 자서전에 따르면 한진은 790만 달러 규모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체결하는 등 베트남 전쟁 특수를 누렸다. 한진은 66년부터 71년까지 1억5000만 달러를 베트남에서 벌어들였다. 
 
그렇게 얻은 빵은 떳떳한가?
 
JP는 증언록에서 “무엇보다 5000년 한민족사에서 우리 군사력의 해외 진주는 전례 없는, 역사의 드문 경험”이라며 “맨날 침략만 받던 나라가 대의를 위해 파병한 경험은 민족의 진취적 기상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 방어조차 힘들었던 한국의 베트남전쟁 참전은 과연 자랑스러웠던 일일까. 
 
당시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등의 구호를 내걸며 월남 참전군을 ‘평화의 십자군’으로 포장했다. 전시 인권유린의 위험성은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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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파병 당시 포스터.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평화의 십자군' 등의 포스터를 통해 베트남전 참전을 독려했다.
 
베트남 평화활동가 구수정 박사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기간 중 한국군이 80여건에 걸쳐 약 9000명의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했다. 베트남엔 3기의 한국군 증오비와 50여기의 위령탑이 서있다. 
 
최용호 전쟁평화연구소장의 ‘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에 따르면 한국군 재판기록에 65년~72년까지 총 1384건의 범죄행위가 발생했는데 이중 살인 35건, 강간 21건, 과실치상 523건 등이 있다. 대부분 민간인 학살과 관련돼 있다. 당시 베트남에선 한국군에 대해 ‘잘 싸우지만 잔인하다’고 평가했다.  
 
박태균 교수의 저서 ‘베트남 전쟁’은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JP 말대로 “역사의 드문 경험”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 한국 사회는 한국군이 저질렀던 학살의 기억은 잊은 채, 오로지 전쟁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만 기억하고 있다. 베트남전 전사자는 총 110만명이고, 민간인 사망자는 이보다 많은 150만명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희생당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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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숨어있던 베트콩을 생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민주주의는 빵을 먹고 자랐나?
 
한국이 미국과 함께 남베트남을 지원했다면 북한도 북베트남을 지원했을까? 당시 한국군이 참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한미군이 있어서다. 베트남 파병은 60년대 미국에서 제기됐던 주한미군 감축 정책을 지연하는 역할을 했다. 북한은 전투 병력을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을 높여 한국의 추가 파병을 막는 형식으로 북베트남을 지원한 것으로 평가된다.
 
1967년 11월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대남 도발건수는 67년에 급증했다. 비무장지대 주요 사건이 65년 42건, 66년 37건이었지만 67년 423건으로 약 10배가 늘었다. 1968년은 안보위기의 해로 불린다.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부대는 청와대를 습격하려했고, 1월23일에는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울진·삼척에 침투했다. 
 
한국 내에서 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자유와 안보를 지키자’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불안감이 커졌다. 북한의 전략은 유효했다. 실제로 1968년 여름에 예정됐던 5차 파병은 1968년 안보위기로 무산됐다.   
 
같은 시기 국내 독재체제는 공고해졌다. 박정희는 대통령을 3연임할 수 있는 개헌을 69년에 통과시켰고, 72년에는 유신체제를 만들었다. 징병제가 강화됐고, 주민등록제 제도화도 이 시기에 완료됐다. 적어도 베트남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민주주의는 급속도로 후퇴했다.
 
베트남 전쟁이 남긴 것, 생명보다 돈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했던 64년으로 돌아가 보자. JP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피해 2차 외유(6월18일~12월31일)를 떠난 상황이었다. ‘4·19혁명 계승·민족주의’를 집권이념 중 하나로 제시했던 군사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정권의 실체적 성격을 드러낸 상태였다. JP가 “2차 외유 중 파병을 계획”한 이유는 악화된 여론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파병을 계기로 1965년 5월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하자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은 잦아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 특수로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얻었고, 이를 이용해 장기집권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권의 권력은 공고해졌지만 그들이 내건 베트남전의 애초 목표는 얼마나 달성됐을까?
 
베트남 파병을 통해 공산화와 중국 영향력 확대를 막자는 목표는 1975년 월남이 패망하면서 실패했다. 1968년 안보위기와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감축을 보면 한미동맹이 굳건해지고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자는 목표 역시 실패했다. 
 
베트남전 이후 해외파병을 판단하는 잣대는 경제적 득실로 굳어졌다. 지난 2003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경제적 이득만이 강조됐다. 이제 한국에서는 전쟁은 ‘누군가의 고통’이라는 이미지보다 ‘돈 벌러 가는 곳’이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됐다. 이 역시 베트남전의 후유증이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한 국가 이미지 실추, 수십만 명이 국가 폭력에 쉽게 동원되는 현상,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젠간 제기될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잊혔다. JP는 이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다. JP에게 듣는 베트남전은 반쪽의 기억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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