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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년, 한미동맹 60년

정전 60년, 한미동맹 60년

 

<칼럼> 노중선 통일뉴스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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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27 0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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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선 / 통일뉴스 상임고문

전쟁과 냉전의 쌍생아적 산물

올해는 정전 60년이고 한미동맹 60년이다. 그것은 곧 8.15에서부터 정전까지의 8년이 분단 설정 과정이었다면 그 이후 정전 및 한미동맹 60년은 내외적 한반도 분단 세력에 의한 분단 고착화 기간이었다. 한편 한반도 분단세력과 평화적 자주통일세력의 대립 갈등으로 이어진 남북 및 북미간 대결의 60년이기도 하다.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모두 한반도의 전쟁과 냉전을 모태로 해서 불과 10여일의 시차를 두고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의 한반도 지배 정책의 쌍생아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8월 8일 서울에서 가조인된 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되었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됐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규정의 핵심은 제2조 13항의 군사인원 증원 금지 및 각종 군사 장비와 탄약의 한반도 영내 반입 금지, 그리고 제4조 60항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한 참전국 정치회담을 3개월 내에 소집하여 외국군대 철거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협의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미 당국은 정전협정의 금지 규정에도 불구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래서 그에 따른 미군의 상시적 남한 주둔, 핵무기 등 각종 군사장비 반입과 연례적인 한미합동군사훈련 강화를 불러왔고 이는 필연적으로 남북갈등과 적대적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한반도 평화 정착의 길이 가로 막혀 평화협정 문제와 관련해서는 논의조차 해보지 못한 채 늘 긴장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내용은 한미 양국 중 어느 1국이 외침 위협을 받을 때 그에 대한 방지 조치, 외침에 대한 공동투쟁 전개 선언, 그리고 “양국은 미 육․해․공군을 한국 영토에 배치하는 권리에 대해 한국은 이를 허용하고 미국은 이를 수락한다”, “이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며 이 조약을 폐기하고자할 때는 그 의사를 상대국에 통고한지 1년 후에라야 폐기할 수 있다”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한미동맹은 남한에서 주한미군의 영구주둔과 무기한적 기지 사용이 가능하게 하였고 그 결과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미국은 유엔에서의 토의 및 결정의 절차 없이도 즉각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분단 유지의 두 축

이와 같이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두 축의 버팀목이 한반도에서 전쟁도 평화도 아닌 불안정한 분단 상태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전협정에서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즉 한미동맹에서는 남한 역대정권의 외세공조가 한반도 분단 유지의 본질적 요건으로 되고 있다.

그래서 북에 대한 변치 않는 적대감을 갖고 있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은 곧 우리 민족의 분단과 그 이후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한 긴장 및 전쟁위기의 출발점이었다.

이 같은 적대 관계 60년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며, 냉전종식 직후 이른바 4강에 의한 교체승인론에 따라 소련과 중국은 남한 정권과 수교를 했지만 미국과 일본은 오늘에 이르도록 북과 수교를 하지 않고 있는 것에서도 대북관계의 불공정성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또한 이승만의 분단 정권 이래 현 정권의 ‘한미동맹 60주년기념 공동성명’에 이르기까지 대미의존적 한미동맹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곧 남한 역대정권의 대미예속화를 의미한다.

이 같은 대미의존적 예속화는 군사작전권까지도 주둔외국군 사령관에게 넘겨져 그야말로 세계적 유례가 없는 치욕일수밖에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통일을 이루어 함께 살아가야할 한 핏줄의 동족을 적대하는 나라와 동맹관계라면 이미 남한 정권에서의 통일문제 거론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탈냉전 시대와 민족 공조

분단과 그 유지 과정에서 비롯된 우리 민족의 불행한 모습은 두 가지 현상에서 확인된다.

우선 정전과 한미동맹은 60년 전 전쟁과 냉전의 산물이고, ‘냉전종식’은 1989년 12월 미국과 소련의 정상이 몰타에서 합의 선언한 이후 20여년이 지난 이미 낡은 유물이다. 그런데도 한반도 정전체제는 아직도 평화협정으로 대체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6.15남북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10.4선언에서는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 한다”라고 이미 남과 북의 선임정권 최고지도자들은 ‘우리민족끼리’와 ‘평화체제 구축’을 합의 선언했는데도 아직도 민족공조는 요원한 형편이다.

그렇다면 이제 “평화협정 체결하여 평화체제 수립하자”는 각계의 절규와 대중적 의지를 반영하여 탈냉전과 ‘우리민족끼리’의 시대에 걸맞게 한반도의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시급히 구축해야할 시점이다.

여기에서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언제가 됐건 우리 민족의 문제는 ‘우리민족끼리’의 화해와 협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결코 외세와의 동맹을 통해서는 명실상부한 평화적 자주통일을 기대할 수 없음이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엄중한 현실은 동족에 대한 적대정책과 외세와의 공조는 곧 긴장 격화와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대적 역행의 길이고 ‘우리민족끼리’의 화해와 협력의 이행 실천은 평화 정착의 길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냉전시대의 정전협정은 통일시대의 평화협정으로 대체가 화급하고, 그것은 소수 집단의 희망이 아니라 21세기 미래를 향한 다수 대중 요청이다. 따라서 그 어떤 패권적 강대국이나 분단유지 세력이라고 하더라도 더는 미루거나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다.

앞으로 한반도 평화 정착과 우리 민족의 통일은 반드시 ‘우리민족끼리’의 기초위에서 다수 민족구성원 대중의 단합과 헌신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개성공단이든, 금강산 관광이든, 또 다른 어떤 형태로의 남북교류이든 그리고 정권 당국간의 교류 접촉이든, 남북공동행사든 ‘우리민족끼리’의 기조는 유지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오늘과 같은 전쟁위기에 직면한 다수 대중의 절박한 요구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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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을 방문한 사연

 

[한호석의 개벽예감](64) 어느 쪽이 특사파견 요청했을까?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3/05/26 [02:03] 최종편집: ⓒ 자주민보
 
 

어느 쪽이 특사파견을 요청하였을까?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자신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한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2013년 5월 24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예방하고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를 전하였다.

최고지도자가 파견한 고위급 특사가 방문국의 최고지도자를 예방하고 친서를 전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외교관례다. 그런 외교관례의 의전절차는 특사파견 이전에 양측 사이에서 합의되어야 하며, 만일 의전절차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특사를 파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남측 언론매체들은 이번에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런 ‘예측’이야말로 국제적 외교관례도 모르고, 북과 중국의 특별한 우호관계도 모르는 무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중국 국가주석이 파견한 특사가 평양에 가는 경우에도, 김정은 제1위원장을 예방하고 친서를 전하게 되는 것이다. 북과 중국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그 두 나라 사이의 특사파견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외교관례에 따라 진행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최룡해 총정치국장을 자신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한 것은 국제적 외교관례에 따른 특사파견을 사전에 요청하고 그 요청이 수락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과 중국 가운데 어느 쪽이 특사파견을 요청하였고, 어느 쪽이 특사파견 요청을 수락하였을까 하는 문제다.

2013년 5월 24일 <뉴욕 타임스>는 중국 분석가들의 견해인 것처럼 얼버무리면서 “지난 몇 달 동안 북이 베이징 회동을 요청해왔으나, 중국 지도부가 그 요청을 거부해왔다”고 서술함으로써 마치 북이 중국에게 특사파견을 간청해오다가 이번에 중국의 허락을 받아 특사를 보낸 것처럼 보도하였지만,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른 엉터리 보도다. 그런 엉터리 보도와는 정반대로, 특사파견을 요청한 쪽은 중국이었고, 특사파견 요청을 수락한 쪽은 북이었다.

이번 특사파견을 어느 쪽에서 요청하였는지에 관한 정보는 북에서나 중국에서 전혀 보도되지 않았지만, 아래와 같은 작금의 동향을 분석해보면 중국이 북에게 특사파견을 요청한 것이 자명해진다.

북은 중국에 특사를 파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북은 이미 ‘조국통일대전’을 선포하였고, 그것을 위한 결전돌입태세를 취하고 있으며,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병진시키는 전략노선을 내외에 천명한 바 있다. 북의 이러한 단호한 태도와 결심은 북이 중국에 특사를 보내는 외교적 행동단계를 완전히 넘어섰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러한 북과 달리, 중국은 북을 상대로 특사외교를 펼쳐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떠밀려갔다. 중국이 처한 상황은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첫째, 누구나 짐작하는 것처럼, 중국은 북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중국은 미국의 북침전쟁도 당연히 반대한다. 전형적인 양비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은 자기의 양비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지는 못한 채, 북과 미국이 서로 충돌을 자제하면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식으로 말해왔다.

그런데 중국은 자기의 양비론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말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미국이 지난 몇 달 동안 대북적대정책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북을 극도로 자극하였고, 미국의 그런 극단적인 적대행위를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북은 미국과 최후 결전을 벌일 태세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최후 결전에 관한 북의 발언들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한 중국은 얼마 전 미국이 두 달에 걸쳐 감행한 대북전쟁연습을 끝내자, 이제 북이 최후 결전을 개시할 때가 임박하였구나 하는 심각한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절감한 당면과제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대화와 협상을 재개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북미관계에 조성된 전쟁위험부터 일단 막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 처한 중국으로서는 북측 고위급 특사의 중국 방문을 요청하여 물리적 충돌 직전에 이른 북미관계의 살벌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 2013년 5월 23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이 오는 6월 하순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고 발표하였고, 이튿날 청와대도 같은 내용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중국이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관해 발표하기 하루 전인 5월 22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특사로 파견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우연하게 이어진 시간적 연속이 아니다.

중국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가 자국에 도착한 직후에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예정되었음을 발표한 것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대북관계와 대남관계를 적절히 조절하는 중국의 외교술이었던 것이다.

2013년 5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은 언론사 정치부장들과 함께 만찬을 나눈 자리에서 “중국이 방문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이른 시점에 중국을 방문하려고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박근혜 대통령도 바라고 있었던 일이고 중국도 바라고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만일 북과 중국이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리면, 중국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북의 6자회담 폐기와 핵보유 문제를 둘러싸고 북과 중국이 갈등을 빚고 있다고 하면서 두 나라 사이를 이간하려는 여론이 미국과 남측에서 일렁이고 있는 판에, 만일 북과 중국이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리면 미국과 남측은 북과 중국의 전통적 우호관계가 완전히 깨졌다는 선전공세를 퍼부을 것이고, 중국으로서는 그 공세에 반박할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다.

북의 6자회담 폐기 및 핵보유 문제와 ‘조국통일대전’ 선포 문제를 둘러싸고 북과 중국 사이에 심각한 이견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두 나라 사이에서 그런 외교갈등은 이번에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그 두 나라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비록 전통적인 우호관계라고 하더라도 양측의 국가적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외교갈등을 겪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상사’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시기 북과 중국 사이에서는 오늘 양측이 겪고 있는 견해충돌보다 훨씬 더 심각한 갈등도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외교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북과 중국이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저버리는 것은 아니며, 두 나라는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저버리고 싶어도 저버릴 수 없는 ‘숙명적 관계’에 있다.

그렇지만 북을 고립상태에 몰아넣으려는 미국은, 이번에 북과 중국 사이에서 일어난 견해충돌을 전통적 우호관계의 파탄이라고 왜곡선전하여 북을 고립시키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그런 속셈을 모를 리 없으며, 미국의 그런 속셈을 못 본 척하고 방치할 리도 없다. 바로 이것이 중국이 남측과 한중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북에게 고위급 특사방문을 서둘러 요청한 배경이며, 북의 고위급 특사가 베이징에 도착한 이튿날 중국이 한중 정상회담이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한 배경이다.

셋째, 중국의 <인민일보> 2013년 1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1월 23일 박근혜 당선인 특사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희망한다. 중국은 대화와 협상을 통해 당사국들의 관심사가 균형 있게 해결되고 반도의 비핵화와 장기적 안정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넉 달이라는 시차를 두고 있지만, 중국은 자기의 6자회담 재개의사에 대한 동의를 남과 북 양측으로부터 모두 받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넷째,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3년 6월 7∼8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게 되는데, 그 회담은 그가 국가주석에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되는 미중 정상회담이다. 따라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첫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미관계에 조성된 전쟁위험을 완화하고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다시 협상으로 끌어낼 어떤 현실적인 제안을 꺼내놓아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런 제안을 꺼내놓으려면,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우선 북과 의견을 교환해야 하며, 북으로부터 6자회담 재개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야 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서둘러 요청한 것이다.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인 북의 외교술

위에서 언급한 맥락을 살펴보면, 이번에 남측과 한중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북에게 고위급 특사방문을 서둘러 요청한 중국이 북의 고위급 특사방문에서 기대한 것은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에 동의를 표시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중국이 북에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요청하였으므로, 베이징에 도착한 북의 고위급 특사를 최상의 예를 갖춰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로 특별비행기를 타고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중국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부부장을 공항에 보내 영접하게 하였고, 대외연락부 부장과 회담하고, 정치국 상무위원과 회담하고,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과 회담하고,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하는 순으로 방문일정을 진행하였다. 중국으로서는 최상의 예를 갖춘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고위급 특사를 파견해달라는 긴급 요청을 받은 북은 중국이 특사파견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2013년 5월 23일 인민대회당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류윈산 상무위원을 만나 회담하면서 “조선은 중국과 함께 조중관계를 부단히 발전시켜나가기를 희망한다. 중국이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 조선반도 문제를 대화의 궤도로 올려놓기 위해 기울인 거대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조선은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련국들과 대화에 나서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북이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화에 나서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북이 최후 결전 태세에 진입한 상태에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흔들림 없이 추구하겠지만,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이 바라는 대화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발언에 담긴 뜻은, 만일 중국의 건의가 없었다면, 북은 대화에 나설 용의를 표명하지 않았을 텐데, 중국이 대화를 재개할 것을 북에게 건의하였기 때문에 대화에 나설 용의를 표명한다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그 발언은 대화 재개를 요청한 중국의 체면을 세워준 외교적 발언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이튿날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하면서 “조선은 유관국들과 공동으로 노력하여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6자회담을 통해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하지 않고,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한 것이다.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과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한 것은,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기 바라는 중국의 입장에 부합되는 게 아니다.

북은 이미 오래 전에 6자회담이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하고, 6자회담에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였으므로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또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채택하고, 핵보유국의 지위를 자국법으로 공고히 하였으므로 미국과 중국이 바라는 북의 핵무기 폐기는 북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다.

그렇지만 북은 6자회담 재개를 절실히 바라는 중국의 요구를 외교석상에서 전면 거부할 수는 없으므로, 문제 해결의 방식을 거론하면서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외교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논거는, 2000년 10월 12일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고위급 특사로 미국에 파견한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워싱턴 방문 중에 미국 측과 합의하여 발표한 북미 공동코뮈니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미 공동코뮈니케에는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4자회담 재개는 당시 미국이 북에게 요구한 것인데, 북은 미국의 요구로 진행하다가 미국의 무성의한 태도로 중지된 4자회담을 재개할 의사가 조금도 없었지만, 고위급 특사를 워싱턴에 파견한 외교활동에서는 미국의 4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라는 문구를 북미 공동코뮈니케에 집어넣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2000년 10월의 대미 특사파견에서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대중 특사파견에서도 북은 6자회담을 재개할 의사가 전혀 없지만, 고위급 특사를 파견한 외교활동에서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어째든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외교적 발언으로 북은 6자회담 재개의사에 동의를 표시해주기 바라는 중국의 기대에 외교적으로 부응한 셈이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한 자리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를 전하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 내용을 사실상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 우호관계에 있는 중국을 대하는 북의 세련된 외교술이 돋보인다.

북은 중국의 기대에 외교적 발언으로 부응함으로써 중국의 체면을 세워주었고, 시진핑 국가주석이 며칠 뒤 오바마 대통령을 만날 때 6자회담을 재개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할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이로써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강력한 정치적 요구를 받게 될 상황으로 밀려간 것이다. 전통적 우호관계에 있는 중국을 움직여 전통적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을 압박하는 북의 세련된 외교술이 돋보인다.

미국이 직면한 양자택일, 정치적 항복이냐 군사적 항복이냐

외교적 발언은 어디까지나 외교술에 한정되는 것이므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을 6자회담 재개의 가능성이 살아났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북의 의중을 읽지 못하고 엉뚱한 상상에 빠지는 어리석은 짓이다. 고위급 특사의 외교적 발언이 북측 최고영도자의 결심이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북을 이끄는 조선로동당의 정치노선과 북측 정부의 대외정책이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외교술은 외교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상황을 아전인수 격으로 읽기 좋아하는 남측 언론매체들은 중국을 방문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으로 마치 한반도 정세가 대결에서 대화로 돌아서는 극적인 전환국면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심지어 미국의 주요 언론매체들과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도 이번에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하여 6자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2013년 5월 10일 북측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 기자가 제기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조선반도 정세격화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미국 대통령의 궤변을 비난”하면서 “미국이 우리에 대한 적대행위를 그만두고 적의를 버리지 않는 한 긴장의 근원은 없어질 수 없으며 정세악화와 충돌의 위험은 반드시 재발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다른 누구의 <변화>를 칭얼거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그릇된 관점부터 제때에 돌이켜보고 교정할 대담성 정도는 가져야 할 것”이라고 따끔하게 책망하였다.

그보다 앞서 북측 국방위원회 정책국은 2013년 4월 18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미국이 “진실로 대화와 협상을 바란다면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는 용단부터 내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첫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북에 대한 “모든 도발행위들을 즉시 중지하고 전면 사죄”하고, “유엔안전보장리사회 <제재결의>들을 철회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두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북을 “위협하거나 공갈하는 핵전쟁연습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것을 세계 앞에 정식으로 담보”하는 것이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세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남조선과 그 주변지역에 끌어들인 핵전쟁수단들을 전면적으로 철수하고 재투입 시도를 단념할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전제조건은 북이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한 것이다. 세계 정치사에서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하면서 최후 결전 태세에 진입한 나라는 오직 북밖에 없다.

6자회담을 재개하기 전에 북이 먼저 핵무기 포기의사부터 밝혀야 한다고 요구한 미국의 전제조건을 북이 받아들일 리 만무한 것처럼, 미국도 북이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하는 세 가지 전제조건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북과 미국의 적대관계에서 대화와 협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어느 한 쪽이 정치적으로 항복하는 길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북에서는 최후 결전 진입태세를 갖추고 모란봉악단과 은하수 관현악단을 내세워 ‘결전의 노래’를 계속 부르는 중이고, 그에 맞선 미국은 북에서 예고한 ‘최후 결전의 날’에 하루하루 다가서는 참으로 고달픈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정치적 항복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쪽이 마지막에 취하는 행동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북의 정치적 항복 요구를 끝내 거부한다면, 미국에게는 북에서 말하는 최후 결전에서 패하여 군사적으로 항복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미국이 대북관계에서 직면한 양자택일은 정치적 항복이냐 군사적 항복이냐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2013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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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을 기부합니다

표정을 기부합니다

 
법인 스님 2013. 05. 25
조회수 493추천수 0
 

 

 

라다크의 소년들-.jpg

히말라야 잔스카르의 오지마을 소년들의 순진무구한 미소. 사진 조현

 

 

어느 날 우연히 서울의 큰 빌딩 앞에서 본 생경한 아침 풍경 하나가 잊히지 않는다. 회사의 수위 아저씨는 아주 밝은 얼굴 가득히 상쾌한 소리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좋은 날입니다.” 옆에서 보는 내가 저절로 기운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 인사였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는 그 자리가 무언가 낯설고 어색했다. 그 까닭은 다름 아닌 일방적 인사였다. 그 회사의 직원들 대부분이 수위의 인사에 그저 고개만 숙여 대응할 뿐, 눈을 마주하지도 않고 간단한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다. 표정 없는 마주침이다. 분명 수위와 직원들은 한 발쯤의 거리인데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를 벗어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시스템과 매뉴얼만 있고 인간의 온기가 사라진 관계가 일상적으로 발견된다. 백화점, 호텔, 항공기, 열차, 고급 음식점 등에서 보게 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곳에는 종사하는 직원들의 미소와 깍듯한 인사가 있다. 그런데 그곳의 손님들은 대부분 인사와 미소에 응답하지 않는다. 일방적 관계가 당연한 관행인 듯하다. 성의 있는 눈길의 마주함과 마음 있는 표정의 부딪침에서 기쁨과 사랑이 발생하는 법인데 사이가 이러하니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계는 소통을 하고 있는데 인간은 불통을 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긴장과 억압의 일방적 관계 또한 곳곳에서 발생한다. 최근 큰 기업과 대리점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감정노동자는 서글프고 경제적 약자는 억울하다. 그래도 ‘갑’에게 ‘을’은 자신의 표정을 숨겨야 한다. 당장에 ‘밥줄’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존엄한 인간이 밥 때문에 속내를 드러내는 맨얼굴을 숨기고 무표정하거나 비굴한 표정으로 화장까지 해야 한다. 이 모두가 돈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본의 횡포라고 할 수 있다.

 

 

고래-이임정-.jpg

미소는 미소를 전파시킨다. 고래의 미소. 그림 이임정

 

 

그러나 생각해 보자. 돈의 시선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깊이 생각해 보자. 존엄해야 할 우리들의 ‘밥’과 ‘마음’이 돈에 휘둘리고 있는 현실을, 그리하여 돈으로 친절과 복종을 사고 그 사이에서 잠시 우쭐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이웃 사람의 감정을 억압하고 존엄을 짓밟아 얻는 행복은 얼마나 초라하고 서글픈 것인가.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돌이켜야 할 지점에 있다. 우리, 서로, 모두가, 존엄해지기 위해서, 이웃에 대한 나의 표정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표정을 살리기 위해서 먼저 이웃에 대한 시선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먼저 나에 대한 시선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너에 대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서로가 갑과 을이라는 허망한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하면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너에 대한 시선이 열릴 것이다. 그 열린 눈에 비친 너와 나는 거래의 관계가 아닌 도움과 은혜로 얽힌 고마운 관계로 오지 않겠는가.

 

언젠가 식당에서 본 흐뭇한 일이 생각난다. 일이 바빠 급하게 움직이다가 종업원이 손님의 옷에 음식을 쏟았다. 종업원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손님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집에 가서 세탁기에 돌리면 됩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나는 그때 그 남자의 얼굴에서 미안해하는 이웃의 마음까지 헤아리고 따뜻하게 보듬는 마음을 보았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웃는 얼굴은 번역과 통역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이다. 그날 그곳에서 돈이 들지 않는 표정을 기부한 그 남자, 그 자리에 갑과 을은 존재하지 않았다.

 

법인 해남 일지암 암주

 

법인스님-.jpg

필자 법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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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오자, 송전탑공사 일시 중단...할머니들 오랜만에 ‘웃음’

참가자들 “할머니들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김백겸 수습기자
입력 2013-05-25 16:17:23l수정 2013-05-25 16:43:33

즐겁게 공연 보는 밀양 송전탑 할머니들

25일 오전 경남 밀양 단장면 바드리 한국전력 89번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공사 중단을 촉구하며 농성 중인 마을 주민들이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의 장기자랑을 보며 박수치고 있다.ⓒ양지웅 기자

희망버스 오자, 송전탑공사 일시 중단...할머니들 오랜만에 ‘웃음’

참가자들 “할머니들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민‧환경단체로 구성된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밀양에 도착해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에 들어가면서 한전은 25일 하루 공사를 중단했다.

환경운동연합, 나눔문화, 녹색당, 에너지정의시민연대 등 탈핵희망버스 참가자 250여명은 24일 밤 밀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송전탑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밀양시 4개면(부북면, 상동면, 산외면, 단장면)으로 흩어져 25일 새벽부터 공사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에 들어갔다.

탈핵희망버스는 핵발전소 건설과 이로 인한 대규모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뜻을 담고 있으며, 지난해 3월에도 밀양에 왔었다.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 주민들과 함께 하는 시간 가져

이날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 학생 일부와 핵 없는 사회 공동행동 회원들은 주민들과 함께 127번 송전탑 건설 현장으로 올라가는 부북면 화악산 입구를 지켰다. 화악산에 위쪽에 위치한 공사 현장에는 성미산학교 학생과 지도교사, 통합진보당 경남도당 당원들이 일부 주민과 함께 올라 탈핵희망버스 행사를 진행했다.

탈핵희망버스가 도착과 함께 한전의 공사가 일시 중단되자 고령의 주민들은 밝은 미소를 보이면서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날 한전 쪽 직원들은 탈핵버스 참가자들을 지켜보며 127번 송전탑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127번 송전탑 현장 입구를 지키던 공혜원(18) 양은 “저번 탈핵 도보여행에서 알게 된 할머니들이 다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며 “여기 말고 다른 마을도 걱정되고 한 분이라도 다치지 않을까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말했다.

탈핵희망버스에 참가한 환경운동연합 안재훈 에너지기후팀 간사는 “전기를 편하게 쓰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앞으로 어떻게 전기를 적게 쓰고 정의롭게, 착하게 쓸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밀양의 할머니들이 던져주고 있다”고 말했다.

단장면 바드리골 89번 송전탑 건설 현장에는 대구환경운동연합 회원들과 청도 송전탑 반대주민들 15명이 공사현장에 올라 탈핵행사를 진행했다.

대구에서 온 신혼부부인 장우석(37)씨와 황정화(35)씨는 할머니들 앞에서 “(할머니들을) 돕는 흐름이 끊기지 않게 될 때까지 이곳에 와야 겠다”며 “이곳에 송전탑보다 예쁜 집을 지어 살고 싶다”고 ‘님과 함께’를 불러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지난해 1월 송전탑건설을 반대하던 이치우 할아버지가 분신한 산외면 보라마을로 간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보라마을회관 등에서 숙식을 하고 108번, 109번 송전탑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이들은 차를 타고 산 중턱까지 이동한 뒤 1시간30여분을 걸어 건설현장으로 향했다.
 

밀양 송전탑 '웃음 가득한 할머니들'

25일 오전 경남 밀양 단장면 바드리 한국전력 89번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공사 중단을 촉구하며 농성 중인 마을 주민들이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의 장기자랑을 보며 박수치고 있다.ⓒ양지웅 기자



종교계, 외신 등 관심이 이어져

이날 종교계의 방문도 이어졌다.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거룩한 말씀의 회, 천주교 창조보전연대 소속 수녀 17명이 127번 송전탑 건설현장에 방문에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둘러봤다.

불교 조계종 환경위원회로 한전 밀양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사 중단과 전문가협의체 구성 등을 촉구했다.

외신기자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에 관심을 보였다. 이날 부북면을 찾은 동경신문‧중일신문 기자 쯔지후치 사토시는 “탈핵희망버스가 밀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둘러보러 왔다”며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사건 때문에 핵발전소를 반대하는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송전탑 공사 막는 밀양 평밭마을 주민들

25일 오전 경남 밀양 부북면 평밭 127번 송전탑 공사현장 앞에서 마을 주민들과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공사중단을 촉구하며 농성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시민‧환경단체로 구성된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밀양에 도착해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에 들어가면서 한전은 25일 하루 공사를 중단했다.

환경운동연합, 나눔문화, 녹색당, 에너지정의시민연대 등 탈핵희망버스 참가자 250여명은 24일 밤 밀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송전탑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밀양시 4개면(부북면, 상동면, 산외면, 단장면)으로 흩어져 25일 새벽부터 공사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에 들어갔다.

탈핵희망버스는 핵발전소 건설과 이로 인한 대규모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뜻을 담고 있으며, 지난해 3월에도 밀양에 왔었다.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 주민들과 함께 하는 시간 가져

이날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 학생 일부와 핵 없는 사회 공동행동 회원들은 주민들과 함께 127번 송전탑 건설 현장으로 올라가는 부북면 화악산 입구를 지켰다. 화악산에 위쪽에 위치한 공사 현장에는 성미산학교 학생과 지도교사, 통합진보당 경남도당 당원들이 일부 주민과 함께 올라 탈핵희망버스 행사를 진행했다.

탈핵희망버스가 도착과 함께 한전의 공사가 일시 중단되자 고령의 주민들은 밝은 미소를 보이면서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날 한전 쪽 직원들은 탈핵버스 참가자들을 지켜보며 127번 송전탑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127번 송전탑 현장 입구를 지키던 공혜원(18) 양은 “저번 탈핵 도보여행에서 알게 된 할머니들이 다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며 “여기 말고 다른 마을도 걱정되고 한 분이라도 다치지 않을까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말했다.

탈핵희망버스에 참가한 환경운동연합 안재훈 에너지기후팀 간사는 “전기를 편하게 쓰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앞으로 어떻게 전기를 적게 쓰고 정의롭게, 착하게 쓸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밀양의 할머니들이 던져주고 있다”고 말했다.

단장면 바드리골 89번 송전탑 건설 현장에는 대구환경운동연합 회원들과 청도 송전탑 반대주민들 15명이 공사현장에 올라 탈핵행사를 진행했다.

대구에서 온 신혼부부인 장우석(37)씨와 황정화(35)씨는 할머니들 앞에서 “(할머니들을) 돕는 흐름이 끊기지 않게 될 때까지 이곳에 와야 겠다”며 “이곳에 송전탑보다 예쁜 집을 지어 살고 싶다”고 ‘님과 함께’를 불러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지난해 1월 송전탑건설을 반대하던 이치우 할아버지가 분신한 산외면 보라마을로 간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보라마을회관 등에서 숙식을 하고 108번, 109번 송전탑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이들은 차를 타고 산 중턱까지 이동한 뒤 1시간30여분을 걸어 건설현장으로 향했다.

 


25일 오전 경남 밀양 단장면 바드리 한국전력 89번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공사 중단을 촉구하며 농성 중인 마을 주민들이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의 장기자랑을 보며 박수치고 있다.ⓒ양지웅 기자

종교계, 외신 등 관심이 이어져

이날 종교계의 방문도 이어졌다.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거룩한 말씀의 회, 천주교 창조보전연대 소속 수녀 17명이 127번 송전탑 건설현장에 방문에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둘러봤다.

불교 조계종 환경위원회로 한전 밀양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사 중단과 전문가협의체 구성 등을 촉구했다.

외신기자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에 관심을 보였다. 이날 부북면을 찾은 동경신문‧중일신문 기자 쯔지후치 사토시는 “탈핵희망버스가 밀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둘러보러 왔다”며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사건 때문에 핵발전소를 반대하는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25일 오전 경남 밀양 부북면 평밭 127번 송전탑 공사현장 앞에서 마을 주민들과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공사중단을 촉구하며 농성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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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에 대한 동상이몽

 

CJ 비자금수사 경제민주화와 연결 말아야
 
경제민주화에 대한 동상이몽
 
편집부 | 등록:2013-05-26 08:36:28 | 최종:2013-05-26 09:32:55

 

 

 

<조세피난 한국인명단을 발표한 뉴스타파 기자회견>

 


돈에 발이 달렸나?

 

뉴스에서 처음 조세피난처(tex haven)란 단어를 듣고 잠시 멍해졌습니다. 조세, 즉 세금을 피해 도망간 행위를 ‘피난’이라 표현하는 순간 대한민국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은 6.25때 남침한 북괴군과 동급이 되어버립니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합니다. 언론들이 저런 범죄자들의 표현을 직역해서 받아 쓸 이유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같은 단어를 ‘조세회피처’, ‘조세도피처’로 바꿔 사용하기로 한 한겨레와 참여연대의 결정을 칭찬합니다.

 

지난 4월 한국인들이 세계적인 조세회피처 버진 아일랜드에 숨겨 놓은 은닉자산의 규모가 870조에 이른다는 국제 탐사보도 언론인협회(ICIJ)의 보도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조세를 북괴군만큼이나 무서워했던 한국의 기업가들은 완전한 ‘피난’에 실패한 것 같습니다. 뉴스타파가 이들의 명단을 입수∙공개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뉴스타파의 조세회피자 명단발표가 있기 하루 전 검찰은 해외비자금 운용 혐의로 CJ그룹을 전격 압수수색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터진 두 가지 이슈로 인해 한국사회는 다시 한번 재벌들의 비자금조성과 조세포탈에 대해 공분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민주화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는(되어야 할) 지금의 시기에 터져 나온 조세피난처와 재벌비자금 이슈는 뭔가 찜찜합니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동상이몽

 

대선이 끝난지 반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경제민주화'는 관념적인 개념입니다. 이런 모호한 단어는 해석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규정됩니다. 시장주의자들은 경제민주화를 공정거래감시나 비자금감시 정도로 온건하게 해석하는 반면 사민주의자나 진보주의자는 이것을 비정규직해소 문제와 최저임금문제, 정년연장문제에까지 확대시켜 해석합니다. 같은 것을 두고 각자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으니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4월 임시국회에서 대표적인 경제민주화 법안인 가맹사업법(프랜차이즈법)과 공정거래법(공정거래위원회 전속 고발권 폐지)이 여야간의 이견으로 무산된 것 역시 이런 해석의 문제에서 비롯됐습니다. 경제민주화가 정치구호를 넘어 현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정부와 여권은 이것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경제민주화관련 법안들에 무리한 측면이 있어 기업활동을 억누를 수 있다 - 박근혜 대통령

기업 경영 자율성을 해치는 법안은 정부가 수용하기 어렵다 - 현오석 경제부총리

경제민주화는 경제를 살리는 경제민주화가 돼야 한다 -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

환자가 기초체력이 안 되는데 무조건 수술부터 하는 상황이 생긴다 - 김기환 정책위 의장

 

 

 


경제민주화를 가장 앞장서서 환영해야 할 공정거래위원장(노대래)마저 "경제 민주화의 개념을 확장해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정부의 속도조절론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 '과연 박근혜 정부하에서 경제민주화가 가능한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듭니다. 이런 시점에서 터진 조세회피처와 재벌비자금 이슈가 자칫 경제민주화의 의미를 애써 협소하게 규정하려는 여권의 노력에 도움을 줄까 우려됩니다.

 

 

<CJ비자금 경제민주화와 연결말아야>

 


분명한 선긋기 필요

 

두 사건이 경제민주화에 미칠 영향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재벌가의 부도덕이 국민적 지탄을 받음으로써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이 환기되는 측면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재벌비자금사건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켜 추진동력을 얻게 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입니다. 국민들의 관심이 재벌가의 비자금문제에 매몰되면서 경제민주화의 참 의미가 퇴색∙은폐되는 경우입니다. 재벌의 불법∙탈법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은 경제민주화의 개념과는 무관한 정부의 기본적인 역할이자 사명일뿐입니다.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인 시대에 이런 탈세와 조세회피 행위는 끝까지 추적 조사해 일벌백계함이 마땅하다. - 5.24 국회 경제민주화포럼

 

경제민주화 제도화의 선봉에 서있는 '국회 경제민주화포럼'이 조세회피와 비자금문제를 경제민주화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우려스럽습니다. 지난 대선을 뜨겁게 달궜던 경제민주화라는 것이 고작 재벌의 탈세방지를 말하는 것이었다면 허탈합니다.

 

분명한 선긋기가 필요합니다. 재벌의 비자금조성과 역외탈세를 처벌하지 않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경제민주화와는 무관한, 기존의 법률로도 충분히 처벌가능한 차원의 문제들입니다. 굳이 여기에다 경제민주화라는 개념을 끌어다 쓸 경우 경제민주화의 개념이 기존의 법질서에 매몰될 위험이 생깁니다. 이미 존재하는 법과 도덕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에 매몰되다보면 새로운 법과 질서의 탄생은 요원해집니다.

 

만약 정부가 두 사건을 통해 형성된 재벌비자금 규탄 분위기를 이용해 경제민주화의 범위를 재벌의 탈세감시 정도로 축소시킨다면 경제민주화는 결국 서민의 삶과는 무관한 수준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진정 경제민주화를 새로운 시대정신이라 여긴다면 대기업의 순환출자금지, 부당거래 금지와 같은 경제정의의 구현은 물론 수평적 갑을관계 정립, 임금격차 해소, 비정규직 해소와 같이 서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책에까지 전향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6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4월 임시국회때 미뤄졌던 경제민주화 법안들을 두고 여야간의 치열한 격돌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이 이번에도 경제민주화 입법에 반대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공약이 사기공약이었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세력이 무슨 이유로 경제민주화를 반대하는지 6월 국회를 관심 갖고 지켜봐야 할 이유입니다.

 


( * 시사블로거 다람쥐주인님이 25일 자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필자의 동의하에 소개합니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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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전설의 빨치산'이었다

[공모-나의 아버지] 평생 한량이었던 아버지, 하지만 나쁘지 않다

13.05.25 20:58l최종 업데이트 13.05.25 21:0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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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부군>(1989)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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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우리 마을 전설의 빨치산이다. 그가 빨치산 부대원으로 복무한 기간은 대략 일주일가량이었다. 당시 마을 인근의 험준한 산맥의 최고봉인 말봉산 자락에는 여순반란사건의 잔류세력인 제14연대 소속 빨치산 부대가 주둔 중이었다. 아버지는 남태인 대장이 지휘하는 부대에 강제 입산 당해 일주일 동안 그의 '동무'로 사상개조를 받은 바 있는 빨치산 출신이다.

전쟁 막바지 끝까지 결사 항전한 진정한 전사들은 거의 잊혀졌지만 고작 일주일 '병영체험'이 전부인 아버지는 우리 마을 전설의 빨치산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가, 일주일 동안 산에 머물면서 한 일이란 어떡하면 무서운 빨치산 대장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무사히 산을 내려갈까 하는 고민에 몰두한 것이 전부였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첩첩산중 우리 마을도 어지러운 전란의 소용돌이를 비켜 갈 수는 없었다. 인민군과 군인들이 엎치락뒤치락 번갈아 가며 마을을 장악하는 가운데 현명한 주민들은 양 세력에 적절하게 동조, 부역함으로써 아슬아슬한 등거리 전략으로 생존을 모색했다. 인근에서 가장 큰 동네인데다, 엄청난 인구과밀지역인 우리 마을이야말로 인민군도, 국군도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첨예한 분쟁지역이었다.

제주 양씨, 하동 정씨. 양대 성씨가 주류를 이루는 씨족 마을에서 한 성씨는 군인 쪽에, 한 성씨는 인민군들에 호의적이면서 좌우의 균형을 유지했다. 빨치산 보급투쟁의 작전 내용은 군량미 비축과 생필품 확보에도 있었지만 특별히 농사 일로 잔뼈가 굵은 신체 건강하고 억센 농촌청년들의 모병에도 주력했다. 한 명의 전사라도 더 확보하기위해 그들은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스무 살이 된 아버지도 어느날 밤, 마을을 급습한 '산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입산하게 되었다.

빨치산 부대원들 눈에 유독 거슬렸던 아버지

빨치산은 주로 야밤에 암약했다. 그날 아버지와 마을 청년들을 대량 나포한 빨치산의 보급투쟁도 한밤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고 젊은 남자는 닥치는 대로 끌고 가기에 바빴다. 그렇게 행해진 간밤의 무리한 작전이 약간의 차질을 빚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침이 되어 지난 밤 마을을 돌며 차출해온 서른 세 명의 청년들을 앞마당에 도열해 놓고 보니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데려온 청년들 중에는 빨치산 전사로 길들이기에는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을 지닌 이들이 다소 섞여 있었던 것이다. 아직 나이가 한참 어려 엄마를 찾으며 징징 울어대는 미성년자가 없질 않나 다리를 심하게 저는 사람, 팔이 한 쪽 없는 사람,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약간 정신연령이 모자라 보이는 사람 등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 외, 정상등급을 받은 청년들을 따로 분류해 놓고 보니 거기에도 또 한 명의 청년이 유독 부대원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는 육안으로 봤을 땐 특이한 신체적 결함은 없었다. 허우대도 멀쩡했다. 그런데 유난히 흰 얼굴과 굼뜬 행동이 문제였다. 깔끔한 외모에 단정한 용모는 높이 살 만 했지만 장차 빨치산 전사에게 요구되는 신체조건은 아니었다. 다른 청년들은 지금 당장 총을 쥐어줘도 혁명전사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농촌청년들 사이에서 그 청년만이 유독 출신성분이 의심되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농부는 아닌 것 같고 필시, 사상개조가 시급히 요구되는 '먹물' 든 인간이 분명해 보였다.

"쟤는 뭐하다 왔나? 학교 교직원인가 아니면 면서기인가?"
"아닌데요. 쟤도 우리랑 같이 농부인데요."
"우린 척보면 안다. 그러니까 바른대로 대라. 공무원인가 아니면 선생인가. 그럼 혹시 경찰? 딱 봐도 농부는 아니고 도대체 정체가 뭐야!"
"걘 원래 일은 안 해요. 그냥 놀아요. 그렇지만 공무원은 아니고 선생도 아닙니다. 농부가 맞습니다."

빨치산 간부들의 집요한 의심도 당연했고 친구들의 말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공무원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농부가 맞긴 하지만 일은 거의 하지 않는 농부였다. 한 마디로 처치 곤란한, 보급투쟁의 '실패작'이었다.

그는 함께 잡혀온 농촌청년들처럼 체격이 다부지지도, 행동이 날렵하지도 않았다. 생전 힘든 일이라곤 거의 해본 적 없는 허약한 심신은 빨치산 부대에서 요구하는 신체조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약한 성격에 굼뜬 행동은 군인들과 첨예하게 대치중인 빨치산 부대의 신임 전사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였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누구보다 아버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입산 첫날부터 그는 줄곧 하산할 궁리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예리한 눈빛의 저 빨치산 대장이 호락호락 하산을 허락해 줄 리는 만무했다. 탈영은 꿈도 못 꿀 일이었고 아버지는 그럴 용기도 없었다. 오로지 누군가 붙잡고 하소연 하는 수밖에. 그러나 분위기는 살벌하고 규율은 엄했다. 빨치산 부대에서 하산은, 나이 어린 미성년자이거나 팔 한 쪽이 없거나 다리를 심하게 절거나 정신연령이 모자라는 등 심각한 결격 사유에 한하여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위의 사항에 해당되지 않는 멀쩡한 사람의 하산 요구는 탈영으로 간주되어 곧바로 처형감이었다.

아버지가 산에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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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부군>(1989)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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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빨치산 대장은 달려가는 고라니를 가볍게 쫓아가서 잡아올 만큼 행동이 날렵했다. 작고 다부진 체격에 상대방을 쏘아보는 듯한 눈빛은 강렬했다. 꼭 다문 입술에 과묵한 표정으로 부대를 순시하는 그는 감히 근접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렇지만 부대 내에서 유난히 인자한 표정의 한 간부를 아버지는 눈여겨보았다. 더군다나 그 사람은 알고 보니 같은 성씨 동성동본이었다. 아버지는 그 인정에 약해 보이는 빨치산 간부를 집중 공략했다.

"전 우리 집 삼대독잡니다. 아버지는 병환이 깊어 제가 가장이나 다름없으니 제발 내려 가게 해 주십시오. 제가 아니면 부모님과 동생들은 당장 굶어 죽습니다."

잡혀온 서른 세 명 청년들 중 저마다 집안의 삼대독자거나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거나 아님 처자식이 달렸다거나 하는 절박한 사연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개인 사정을 일일이 봐주다간 빨치산 전선은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애처로운 하소연에 서서히 마음이 약해진 빨치산 간부는 아버지의 하산계획에 그만 동조해 버리고 말았다. 살벌한 빨치산 진지에서 아버지는 마음 약한 간부의 동정심을 유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너처럼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이 하산하겠다면 탈영으로 간주되어 당장 총살이야. 그러니까 넌 지금부터 밤눈을 아예 못 본다고 둘러 대라. 우린 밤에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빨치산에게 야맹증은 치명적이거든. 그러니까 이제부터 밤눈 어두운 행세를 잘 해야 해. 알겠지?"

아버지는 그때부터 그가 시키는 대로 야맹증 환자 행세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입산한 밤부터 산 중턱의 보초병으로부터 이상한 정보가 들려왔다. 아래 산중턱에 밤마다 한 여자가 나타난다는 내용이었다. 그 산은 감히 남자들도 오르기를 꺼려하는 험준하고 으슥한 곳이었다. 하물며 여자가 혼자서 밤에. 산 생활에 익숙한 빨치산 전사들도 오싹할 일이었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 졸지에 삼대독자 아들을 산사람들에게 빼앗겨버린 할머니는 밤마다 산중턱에 서서 부대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이다.

빨치산 부대는 한 여인의 출현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더군다나 그 여인은, 하산을 설득한 보초병을 향해 오히려, '아들을 돌려주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노라' 빨치산 대장을 향해 포고를 했다는 전갈이었다. 남편은 병들고 어렵게 얻은 삼대독자가 산으로 끌려간 마당이라 할머니는 빨치산 대장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오로지 귀하디귀한 삼대독자를 무사히 데려가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집념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연이은 일인시위와 아버지의 가짜환자 행세는 급기야 강철 같은 빨치산 대장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입산 일주일 만에 팔이 하나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 등 등급 외의 신체부자유자들과 더불어 의가사제대를 했다. 멀쩡한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하산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말봉산 자락에 제14연대 빨치산 부대가 주둔한 이래 사지 멀쩡한 사람이 아무 조건 없이 하산을 허락받은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동네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뒤로 한 채 아버지는 그렇게 하산을 했다.

아버지의 귀가로 마을은 술렁였다. 생떼 같은 자식을, 남편을 산으로 보내놓고 노심초사하던 동네 사람들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 사람들'은 한 번 데려간 사람을 아무런 하자도 없는데 그냥 돌려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유례없는 하산으로 인해 '전설의 빨치산'이 되었다. 당시 뒤에 남겨졌던 신체 건강한 친구들은 훈련을 통해 전사가 되었거나 작전 중 전사 하거나 훗날 토벌대의 소탕작전으로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다.

"산 사람들이라고 보는 눈이 왜 없었겠냐. 저 양반을 데려다 어따 쓰겠냐, 골치만 아프지. 너희 할머니는 밤마다 아들 내놓으라고 울어쌓고."

엄마 말은 일리가 있었다. 평생 한량으로 유유자적한 아버지 인생을 짚어보면 만약 그때 산에 남았더라면 심각한 '고문관' 병사로 빨치산 부대에 두고두고 민폐를 끼칠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가정경제와는 담쌓은, 아버지는 '천상 한량'

아버지는 '전설의 빨치산' 외에도 '천상 한량'이라는 칭호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게으른 농부에 불성실한 가장이었다. 가정 경제는 일찌감치 상황을 간파한 엄마 몫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한 여름이면 시원한 모시 한복을 차려 입고 한가하게 마을 앞을 배회하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낮잠을 청하곤 했다. 아니면 말쑥하게 양복을 갖춰 입고 바깥출입을 했다.

양복을 멋있게 입고 나선 아버지의 출입처는 주로 관공서였고 늘 공사다망했다. 마을에는 그가 처리해야 할 미해결 사안들이 산적해 있었다. 지지부진한 신작로 막바지 공사 건으로 이장 대신 면사무소에 압력 넣기, 삽질도 못하고 있는 신설저수지 건으로 주민들 설득하고 면장하고 담판 짓기, 졸업장 없는 이웃집 총각 청탁으로 중학교 서무과에 위조서류 만들러 가기, 새로 부임한 초등학교 교장하고 학교 상수도 건설 건 의논하기, 군청 과장한테 모종의 건으로 줄 대러 가기 등등.

그는 면소재지, 군청, 학교, 대도시 광주, 서울 등지로 몇날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열과 성을 기울이는 그 모든 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가정경제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명예직 관련 업무들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이웃과 마을과 사회의 미해결 사건을 처리하러 다니는 동안 우리 집 돼지우리는 다 쓰러져서 돼지가 튀어 나와 마당을 활보하고 다니고 부려만 놓고 타작을 미처 못 한 볏단은 비에 홀딱 젖어 일 년 농사를 망쳐버리곤 했다. 타인과 사회를 향한 그의 멸사봉공 정신은 길이 칭송받을 일이지만 결코 바람직한 가장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또 농촌문화에 어울리지 않게 지독한 활자 중독자였다.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읽을거리가 변변찮은 시골에서 독서는 그다지 좋은 취미가 아니었다. 정 읽을 것이 궁해지면 하다못해 <농민신문>이라도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렸다. 한 번은, 그런 유약한 아버지 옆에서 언니가 교과서에 실린 소설 한 편을 소리 내어 읽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에 매료당한 아버지는 새벽마다 감동적인 그 소설, 황순원 <소나기>를 같이 읽자고 우릴 깨워댔다. 그럴 때마다 우리 자매들은 아버지랑 나란히 누워서 언니가 대표로 낭독하는 <소나기>를 조용히 경청해야 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읽어서 다음 장면을 다 외고 있음에도 아버지는 바야흐로 죽어가는 소녀의 유언에 다시금 눈시울을 붉힐 것이고 우린 그런 아버지의 감동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다.

다른 어른들은 진즉 일어나서 거름 지게를 지고 들에 나갈 시간에 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 속 주인공의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부엌아궁이에서 엄마가 지피는 새벽 군불소리가 타닥, 타닥 정겹게 들려왔는데, 그렇게 평화로운 정경만큼 무능한 가장이 방치한 가정경제는 그때쯤 바닥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그는, 뜻 맞는 마을 청년들과 연극공연을 한다고 어울려 다녔는데 그 자신이 직접 연극 대본을 집필하느라 몇날 며칠 밤을 새는가 하면, 마을에 공식 지정곡이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길이 남을 마을 찬가를 짓는다고 고심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명 아마추어의 손을 거쳐 탄생한 '마을 찬가'는 악보도 없이 현재까지 구전되어 오고 있다. 비공식 마을의 지정곡으로 채택되어 마을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는 관광버스 안에서 음주가무가 시작되기 전 첫 순서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난 어렸을 적에 어른이라면 누구나 그처럼 공자와 논어를 무시로 외고,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줄줄이 꿰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간파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그가 지은 시가 일본인 선생의 눈에 띄어 지방신문에까지 실렸다는 회고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가정경제에 드리운 그늘을 한 번도 자책하지 않은 아버지

'무능한 가장'이라는 원성을 달고 사는 그였지만 다양한 사회활동 외에도 조상을 섬기고 가문을 보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는 충만해 있었다. 유서 깊은 정씨 문중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마을의 상대 성씨인 제주 양씨를 은근히 견제하고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의, 가문에 대한 의무감은 남달랐다. 정씨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선양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특히 그가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과년한 문중 처자들을 외부의 음흉한 청년들로부터 무사히 지켜내는 것이었다.

마을의 우편배달부는 수신인이 정씨로 되어 있는 모든 편지와 서류에 한해서 아버지에게 먼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마을 입구에 버티고 선 아버지의 철통같은 검열을 마친 편지들만이 비로소 수신인에게 배포 될 수 있었다. 내용이 의심되는 모든 편지는 가차 없이 아버지 손에서 개봉되어 그 민망한 사연이 낱낱이 드러나곤 했다. 익명을, 가명을 사용한 청년들의 교묘한 위장편지도 아버지의 예리한 시선을 비켜가진 못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아버지는 그 모든 부고와 문서로 위장한 연애편지들을 여지없이 가려냈다.

그렇게 적발된 불온한 편지의 여파는 컸다. 사건의 전모를 들켜버린 큰댁언니는 마을 밖 출입이 금지되었고 발신인으로 지목된 청년은 끝까지 추적하여 감히 하동 정씨 가문을 능멸한 죄 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아버지 한 사람의 고독한 몸부림에도 과년한 일가 처자들은 계속 자라났고 혼자서 연애의 진원지인 그 많은 물방앗간을 통제하는 일은 점점 버거워졌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해이해진 기강과 유교문화에 기반 한 씨족사회의 붕괴를 한탄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야말로 남의 청춘사업에 개입하여 연애편지를 붙들고 부들부들 분노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자신도 마을의 전쟁 미망인으로 부터 날이면 날마다 구구절절 구애의 편지를 받는 수신인이었던 까닭이다.

집에서는 소설 속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에 눈물 흘리던 아버지는 학교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운동회나 어버이날 행사에서 아버지는 항상 내빈석 중앙에 교장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학생들의 사열을 받았다. 아버지가 앉아 있는 육성회장 자리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영진이 아버지나 경숙이 아버지 같은 분들이 더 어울림직했다. 그러나 고졸 학력의 그들은 들에서 열심히 쟁기질을 하느라 바빴고 육성회장 자리는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아버지가 차지했다. 학교 상수도시설추진위원장, 마을 개발위원장, 신설저수지담당총무, 농협비상근명예이사 등 모호한 이름의 감투를 그는 평생 몇 개씩 달고 있었다.

아버지의 지나친 대외활동으로 인해 우리 집 가정경제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논에는 벼보다 피가 많이 자랐고 제때 손보지 않은 무논은 끄떡하면 방천이 나서 논두렁이 비에 휩쓸려갔다. 수확시기를 놓친 농작물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당연히 단위면적당 소출이 형편없었다.

"한나절만 '출입' 안 하고 피를 뽑으면 될 것을. 내가, 나락 적게 나올까 이러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논에 피가 끓으면 남 보기가 민망해서 그러요. 눈 딱 감고 한 나절만 피를 뽑으면 안 되겄소?"
"어허, 이 사람이. 나도 다 생각이 있다니까. 지금 '우루구아이 라운드'협상이 한참 진행 중이란 말이지. 난 그거 결과 나오는 거 보고 농사지을 거니까 귀찮게 말라구."

도대체 시골의 소농규모 농부에게 논에 피 뽑는 거하고 우루과이라운드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아버지는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는 채 엄마 말을 단번에 묵살해 버렸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바라는 바는 소박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장을 하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밖으로 돌아다닐 바에야 이장이라도 하고 있으면 그러려니 포기하고 살겠다는 것이 엄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가장 재미없어 하는 일이, 직책이 바로 그 이장이었다. 이장도 싫지만 학교선생도 지서경찰도 심지어 면장, 농협조합장도 아버지가 한심해 하는 직업군들이었다. 그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하는 골치 아픈 일들을 극도로 꺼렸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애덤스미스가 제시했던 '푸줏간 주인의 이기심, 빵집 주인의 이기심, 양조장 주인의 이기심'이라는 명제는 내 아버지의 경우에 적용되지 않는 이론이다. 아버지가 방치한 우리 집 가정 경제는 엄마의 극심한 희생과 이웃 친척 아저씨들의 자발적인 박애심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유교적 성향이 짙은 씨족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엄마는 평생 재봉틀 앞을 떠날 수 없었고 이웃 친척들은 십시일반으로 가장이 해야 할 일을 거들어 주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무능으로 인해 가정경제에 드리운 그늘을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았다. 그에게 인생이란 항상 즐겁고 행복하고 순조로운 평탄대로였다. 그래서 특유의 유머와 낙천적 기질을 유지할수 있었다.

양지만 밟아온 아버지의 유일한 불행은 '세월'

이제 82살의 아버지는 예전의 훤칠했던 풍모를 대부분 상실한 채 틀니를 낀 볼품없는 노인으로 늙어가고 있다. 과거 한때 한 전쟁미망인 아주머니를 지독한 상사병으로 몰고 갔다는 그 잘생긴 외모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평생을 양지만 밟으며 살아온 그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불행이란 비켜 갈수 없는 '세월'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공사다망하다.

"아가. 김 서방이 김해 김씨 무슨 파였더라? 이번에 우리가 종회에서 큰돈 들여 족보를 갱신하는데 새 족보에는 사위들도 모두 올리기로 했다. 그러니까 김 서방이 정확히 김해 김씨 어디 누구 자손 몇 대손인지 적어서 모레까지 보내주라."
"어? 저, 김 서방하고 끝까지 살지 말지 아직 생각중인데 족보에 올려버리면 어떡해요?"

부녀지간에 예사로 오가는 농담을 보면서 가족들은 나야말로 아버지 기질을 쏙 빼 닮았다고 '지적'한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억울한 누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를 닮아서 한량 기질이 다분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평생 한량이었던 아버지 말년이 크게 잘못돼 보이지 않는 점이 내게는 위안이 된다.

"저 잘난 인물에, 저 인품을 지녀서 가장 노릇까지 잘했으면 내가 복에 겨워서 또 뭔 일을 당할지 알았겄냐. 암, 세상이 공평한 법인데 그런 과한 복을 내가 바라면 쓰겄냐. 저 인물 에 바람 안 피고 돈 안 망해 먹은 것만도 사하지. 난 평생 그 마음으로 살았다."

엄마는 거의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 훤칠한 외모에 잘생긴 얼굴을 하고 늘 밖으로 나돌면서 그 숱한 유혹에도 여자문제, 돈 문제 안 저지르고 살아준 것만도 엄마는 감사하단다. 그런 체념이 없었다면 그 오랜 세월에 걸친 가장의 무능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이웃과 공익에 재능기부 한 아버지

일주일 만에 빨치산 부대를 의가사제대 했던 아버지는 이듬해 장가를 들어 다섯 자식을 낳았다. 하산을 하던 날, 각각 팔 하나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정신연령이 낮은 하산 예정자들을 앉혀 놓고 빨치산 대장이 했다는 작별 인사를 아버지는 지금도 종종 회고하시곤 한다.

"동무들. 오늘은 우리가 아쉽게 작별하지만 곧 해방정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여러분들이 피치 못할 사정, 부자유스런 신체조건 때문에 이렇게 하산을 하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해방의 그날까지 동무들 검둥개, 노랑개들한테 동조하지 말고 부디 목숨 부지하고 살아남기 바라오. 우리는 산에서 혁명과업 완수를 위해 투쟁할 테니 동무들은 후방에서 지상낙원 건설을 위해 노력해 주기 바라오. 곧 해방을 맞을 준비를 하시오. 그때 다시 만납시다."

그러나 곧 도래할 것으로 장담했던 사회주의 국가는 오지 않았다. 이후 펼쳐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아버지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대대적인 토벌작전에도 그 빨치산 대장의 행방은 끝내 묘연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야맹증이라는 병역면제 사유를 제공해줬던, 인정에 치우친 빨치산 간부는 훗날 오랜 세월이 지나 해후했다.

하산하던 날 혁명과업을 위해 매진해 달라고 당부했다는 빨치산 대장의 당부를 아버지는 어느 정도 실천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총 대신 특유의 낙천적 성격과 유머를 무기로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한 열성분자였다. 우리에겐 무능한 가장이었으나 빨치산 대장의 당부대로 자신의 능력과 지식, 낙천적 기질과 유머로 이웃과 공익을 위해 재능기부 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이 험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무혈혁명의 전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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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세계 비핵화는 미국부터 시작해야”

 

 
 
"오바마 '핵무기없는 세상'은 조선 비핵화 노린 기만술"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5/26 [10:21] 최종편집: ⓒ 자주민보
 
 

한국의 언론과 정치권이 조선의 6자회담 가능성을 점치며 “진정성 있는 태도가 전재되어야 한다”는 등의 논평까지 내고 있는 상태에서 실질적 당사자인 북은 “한반도 비핵화가 아니라 세계비핵화를 위해서는 미국의 비핵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6자회담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 가능성을 부인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관지인 우리민족끼리는 “오바마대통령의 〈핵무기없는 세상〉을 〈한〉반도에서 먼저 실현하겠다.‘”라고 말한 박근혜 대통령의 미상하원 의회에서의 발언을 언급하며 “한마디로 공화국이 핵을 포기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세계비핵화의 첫 꼭지를 떼겠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다. 언젠가 미국대통령도 이런 소리를 했다. 남조선집권자가 미국에 가서 그 말을 앵무새처럼 되받아 외운 것”이라고 비난했다.

우리민족끼리는 “얼핏 듣기에는 요란해 보이는데 따지고 보면 세계의 비핵화를 이루는 순차, 조선반도핵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하고 천진난만한 생각이 아닌가 한다.”며 “

《핵무기없는 세상》을 제창한 것은 미국이다. 물론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면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미국이 바라는 것이 진정 핵무기 없는 세상인가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이른바 《세계의 경찰관》으로서의 미국의 행세는 핵무기보유와 함께 시작되었다. 인류사상 처음으로 핵무기를 만든 미국은 그것을 휘둘러 미국중심의 유엔을 축으로 한 세계질서를 만들어내고 국제무대에서 자국의 리익실현을 위한 침략과 전횡을 일삼아왔다.”면서 “미국의 세계지배는 본질에 있어서 핵무기독점에 기초한 것이며 바로 이 핵무기의 절대적인 우위를 믿고 미국은 힘으로 다른 나라들을 마구 억누르며 자기의 침략적 요구를 강요하여왔다. 침략과 간섭, 전쟁을 생리로 하는 미제국주의에 있어서 핵무기야말로 없어서는 안 되는 생존수단, 지배수단으로 되고 있는 것”이라고 미국의 핵독점 야욕을 고발했다.

신문은 “하다면 미국의 《핵무기없는 세상》구상은”이라는 물음표를 찍고 “그것은 한갖 사탕발림의 눈속임수이다. 핵무기들을 철페하는 척하면서 자기 나라 핵무기들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핵무기들을 없애버리려는데 주되는 목적을 두고 있다. 미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공화국을 비롯하여 반미자주적인 나라들의 손에 핵무기가 쥐여지는 것이다. 미국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조선반도에서 먼저 실현하겠다고 떠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공화국의 핵이 침략과 살륙을 꾀하는 미국에 제일 위협으로 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아메리카대륙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겨 침략과 전쟁으로 살쪄온 그 《초대국》”이라면서 “지금껏 다른 나라들을 마음대로 침략하고 세계도처에서 전쟁을 무시로 일삼아오면서도 자국영토에는 단 한발의 포탄도 떨어지지 않아 전쟁을 말 그대로 기쁨과 쾌락으로 여겨온 그 미국이 자기도 핵 불바다에 잠길 수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 잡혀본 적이 과연 있었던가. 지금 미국이 그 공포를 한껏 느끼고 있다. 그것이 선군조선의 핵이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이 조선의 핵무기를 없애버리기 위해 그토록 혈안이 되여 날뛰고 있는 것도 이 때문(미국의 핵 독점을 통한세계 재패 야욕)”이라며 “그런즉 세계의 비핵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조선반도의 비핵화가 아니라 미국의 비핵화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비핵화를 주장해온 공화국이 끝내 핵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것도 수십년간 갖은 핵위협공갈을 가해온 미국”이라고 피력했다.

아울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비핵화》가 《먼저》라고 떠드는 것은 무엇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라며 “미국이 비핵화 되어야 세계의 비핵화가 이루어지고 조선반도의 비핵화도 이루어지는 법이다. 이것은 엄연한 과학적 이치이고 정의와 양심, 시대와 역사가 내리는 판단”이라고 미국의 비핵화가 선행 되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우리민족끼리는 “남조선의 집권자는 자기 손을 가슴에 얹고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핵무기없는 세상〉을 〈한〉반도에서 먼저 실현하겠다.》고 한 발언이 미국의 지배주의적인 이익에 부합되는 것인지, 조선민족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인지.”라며 “공화국이 보유한 핵은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대대손손 굳건히 지켜나가며 통일조국의 융성번영을 영원히 담보하는 민족공동의 귀중한 재부”라며 핵무력 건설의 병진 노선을 굳건히 할 것임을 표명했다.

이 신문은 “민족의 존엄이고 생명인 정의의 핵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은 결국 자기 민족자신을 해치려드는 매국행위”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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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번식 나서는 홍도 괭이갈매기 미스터리

한겨울에 번식 나서는 홍도 괭이갈매기 미스터리

 
조홍섭 2013. 05. 24
조회수 1174추천수 0
 

1월초 홍도에 들러 둥지 손보고 짝 찾아…번식 여러달 전에 왜 하는지는 의문

고양이 울음소리에 새우깡 좋아하는 익숙한 새는 '수수께끼의 새'이기도

 

gull2.jpg » 경남 통영 홍도에 날아드는 2만여 마리의 괭이갈매기 떼. 이들의 정확한 행동 이유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에만 분포하는 괭이갈매기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바닷새이다. 주로 작은 물고기나 연체동물, 갑각류, 또는 죽은 바다 생물을 먹거나 다른 바닷새의 먹이를 빼앗아 먹지만 배를 잘 따라다니며 ‘새우깡’을 잘 받아먹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갈매기는 동료를 부를 때 고양이 소리를 내 ‘괭이갈매기’란 이름을 얻었다. 일본에서는 비슷한 의미로 ‘바다 고양이’라고 부른다. 드물게 이 새가 나그네새로 들르는 영어권에서는 ‘검은 꼬리 갈매기’라고 형태적 특징에 주목했다.
 

이 흔하디 흔한 괭이갈매기에 무슨 숨겨진 비밀이 있을까 싶다. 사실 권영수 국립공원연구원 철새연구센터장이 지난해 이들의 번식행동을 조사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그랬다.
 

그때까지 알려진 괭이갈매기의 번식행동은 이렇다. 해마다 4월 중순께 홍도, 독도, 난도 같은 무인도에 큰 집단이 모여 둥지를 틀고 번식한 뒤 7~8월이면 번식지를 일제히 떠나 섬이나 해안가에서 겨울을 나는 텃새라는 것이다.
 

gull1.jpg » 홍도에 내려앉은 괭이갈매기.

 

권 박사는 정확한 이동시기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 2월 한려해상국립공원 홍도에 무인카메라를 설치해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번식은 예년보다 9일쯤 이른 4월4일 시작했지만, 예상과 크게 어긋난 건 아니었다.

 

흥미로웠던 건 갈매기 무리가 2월에도 섬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섬에 왔다 떠나는 행동을 되풀이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권 박사는 올해는 아예 1년 내내 무인카메라로 갈매기의 도래를 조사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한겨울인 1월 초부터 괭이갈매기들이 섬에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번 오더니 차츰 방문 횟수를 늘려 하루 3번까지 왕복하더라고요. 산란시기인 4월이 가까워지면서 드나드는 횟수가 점점 잦아졌습니다.”

 

번식기를 여러 달 앞두고 무엇 때문에 번식지에 찾아드는 걸까. 처음 권 박사는 좋은 둥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서 그럴 것으로 짐작했다.

 

홍도는 국내 최대의 괭이갈매기 번식지로서 2만여 마리가 이 섬에서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고, 그 결과 번식지로 향하는 시기가 점점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gull4.jpg » 홍도에 둥지를 튼 괭이갈매기.

 

gull3.jpg » 괭이갈매기의 알. 보통 2~3개를 낳는다.

 

하지만, 관찰 결과는 그런 가설을 쉽게 무너뜨렸다. 괭이갈매기는 이전에 자신이 번식했던 둥지를 또 찾아가 알을 낳았던 것이다. 그럼 대체 왜 이렇게 일찍 번식지를 찾는 것일까. 권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기 둥지를 찾아 부서진 곳을 보수하고 또 헤어졌던 짝을 찾는 일도 그 많은 갈매기 떼 속에서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몇 달씩 일찍 찾아올 이유가 되지는 않아 앞으로 중요한 연구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gull5.jpg » 홍도에서 2만여 마리의 괭이갈매기가 일제히 둥지를 틀고 번식에 나선 모습.

 

 

겨울 바다를 구경하러 바다에 가도 괭이갈매기는 있다. 이들은 홍도 등 번식지로 떠나지 않은 3년 미만의 어린 개체일 확률이 높다고 권 박사는 설명한다. 또 번식지에서도 먹이 터를 왕복하기 때문에 겨울부터 괭이갈매기가 일제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괭이갈매기가 번식을 모두 마치고 섬을 일제히 떠난 날은 지난해의 경우 7월30일이었다. 그 전해의 8월3일보다는 많이 당겨진 것이지만 올해 또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른다.
 

어쨌든 해안가에서 괭이갈매기를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기간은 8월부터 12월 사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머지 7달 남짓을 괭이갈매기는 외딴 번식지에서 주로 보낸다. 그 이유는 아직 무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흔하고 친근한 바닷새는 수수께끼의 새이기도 하다.

 

글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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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박통' 맞은 진중권, 파란만장 '스타트렉'!

 

[노정태의 논객시대] 미학자이자 논객(이었던) 진중권의 책들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5-24 오후 6:49:28

 

1.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며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서문을 인용해도 식상하지 않았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저 문장이 어떤 용도로 어떻게 쓰였는지 안다면 이건 너무 지겨운 인용이다. 반면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대체 저 뜬금없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하늘의 별'이나 '가야만 하는 길' 같은 아름다운 비유가 너무도 허공에 붕 떠버린 탓이다.
 

 

▲ <미학오디세이>(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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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해방되어야 할 노동자 계급이 있었고, 외세에 의해 반으로 쪼개졌지만 결국 다시 하나가 되어야만 할 조국이 있었고, 쟁취해야 할 민주화의 과제가 있었고, 직선제 개헌 이후에도 남아있던 이른바 '앙시엥 레짐'과의 최후의 결전이 다가왔다고 모두가 믿었던 그런 때가 있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앞서 나열한 문제들이 해결되거나 해소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우리는 저러한, 혹은 저기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들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런 때가 있었다. 저 문제들을 문제로 똑바로 바라보고,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당위를 향해 나아가자고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일이, 지금처럼 어색하고 머쓱하지 않았던 그런 때가, 루카치가 말하는 '별'이 하늘에 떠있어서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그런 때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루카치가 말하는 '별'은 공산주의 혁명의 텔로스이고,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을 가리킬 것이다. 전략적으로 돌아갈 수는 있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궁극의 목표를 뜻할 터이다. 그럼에도 저 비유는 너무도 아름답고, 시적이며, 어떤 식으로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강한 영감을 준다.

1990년대의 어느 날 밤, <미학 오디세이>의 원고가 되었을지 모를 글을 쓰다가 밤하늘을 바라본 청년 진중권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속으로 나직하게 저 문장을, 어쩌면 그가 능통한 독일어로 읊었을지 모르겠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책을 쓰며 지새우던 밤. 자판기 커피를 뽑으러 나와서 올려보던 하늘의 희미한 별들만 기억에 남아 있다. 여느 '386 세대'처럼 당시 나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내적으로 방어하던 중이었다. 거의 10년 동안 나를 지탱해주던 하나의 신념체계가 무너졌다. ('작가의 말',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작가 노트>(휴머니스트 펴냄, 2004년))

<미학 오디세이>는 이렇듯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충격 속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청년 진중권 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에게 역사의 종착점, 텔로스 노릇을 하던 사회주의가 거대한 역사적 실험 끝에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 민주 공화국, 즉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된 것은 1990년, 소비에트 연방이 몰락한 것은 1991년, 진중권이 <소비에트 연방의 유리 로뜨만의 구조기호론적 미학 연구>로 미학 석사 학위를 받은 것은 199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은 1993년의 일이었다.
 

 

▲ 2011년 반값 등록금 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촛불집회 현장에 나온 진중권. ⓒ프레시안(최형락)


2.

박사 학위를 따지 못한 상태로 국내에 돌아오게 된 1999년까지, 진중권은 독일에서 다양한 국적친구들을 사귀고,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고, 심지어 애도 낳았다.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 중 안 그런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진중권 역시 자신의 유학 시절을 즐겨 곱씹고 다양한 방식으로 칼럼 등에 인용하며, '한국사회'의 문제를 마주쳤을 때 판단의 준거로 삼는다.

이것은 단지 그가 '선진국'에 유학을 다녀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선진국 중에서도 구 동독의 한복판에 있던 베를린 자유대학을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스탈린주의로 악명이 높았던, 문화적으로 그리 별 볼 일 없던 소련이 아니라, 동구권 국가 중 가장 선진국이었던 동독이 서독에서 쏘아 보내던 TV 전파 때문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을 때, 진중권은 실로 큰 충격을 받았다. 진중권이 1991년이 아니라 "1989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줄줄이 몰락하는 것을 본 후, 약 1~2년간의 숙고 끝에 공산주의라는 '주의'를 포기"(<생각의 지도>(천년의 상상 펴냄, 2013년), 171쪽)했다는 말은 연도를 잘못 표기한 게 아니다. 진중권의 머릿속에서 공산주의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그날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내 생각은 우리가 1980년대에 '유로코뮤니스트'라 비웃던 서유럽 사민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유학을 통해 동서독 체제를 비교할 기회를 가졌던 게 계기였다. 트라비(Trabi)를 타고 연 30일 휴가를 보내는 동독의 노동자와 폭스바겐(Volkswagen)을 타고 연 40일 휴가를 보내는 서독의 노동자. 어느 쪽이 더 사회주의적일까? 당시에 접한 소련-스웨덴의 비교연구도 이른바 사회주의적 가치의 모든 측면에서 외려 스웨덴 사회가 소련보다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같은 곳)

진중권은 공산주의의 최고 선진국 동독에 가고 싶었지만 베를린 장벽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베를린 장벽의 가짜 잔해를 판매하는 기념품 상인들만이 주위를 맴돌던 그런 시절이었다. 독일에서 비트겐슈타인과 발터 벤야민을 공부하고, 유럽을 두루 돌며 관광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그 중 한 친구와 연인을 넘어 부부로 발전하고, 아들을 낳고, "교포 자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07년), 181쪽)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진중권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민주의자'가 되어서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3.
 

 

▲ <시칠리아의 암소>(진중권 지음, 다우출판사 펴냄). ⓒ다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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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혹은 '장기 20세기'가 시작되던 무렵, 독일에서 돌아와 조국의 문제와 싸우기 시작한 진중권은 숱한 명문을 흩뿌리기 시작했는데, "별자리 진보"도 그 중 하나다. 이 텍스트가 주는 진한 울림은 저 루카치의 메타포 아래에서 온전히 이해 가능하다. 만약 <소설의 이론>의 서문을 모른 채 "별자리 진보"를 접했던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저 위에 인용된 문장을 음미한 후, 다음 인용문을 읽어보도록 하자.

최근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바라보며 나는 별자리를 생각한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깜깜한 사회, 거기에서 갖가지 이름의 별들이 서로 연결되더니 별자리를 만들어낸다. 까만 밤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별자리, 나는 거기에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결사체. 그것은 별자리를 닮았다. 시민연대는 총선이 끝나면 별자리를 해체하고 다시 별들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일이 생기면 따로따로 빛나던 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또다시 새 별자리를 짜고, 그러다가 또 흩어지고……. (<시칠리아의 암소>(다우출판사 펴냄, 2000년), 64쪽)

물론 이것은 루카치의 비유와 1:1로 대응되지 않는다. 루카치가 말한 '별'은 역사의 텔로스, 공산주의 혁명이지만, 진중권은 "자유로운 개인"들 각각이 '별'이 되자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루카치의 '별'이 목적어라면 진중권의 '별'은 주어다. 루카치는 '별'을 통해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밖에 없는 목적지를 가리키고자 한다면, 진중권의 "별자리 진보"는 한시적이고 임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개인들의 창발적 연대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 텍스트를 잇는 거대한 정서적 끈을 감지할 수 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진보'에의 희망을 품는 지식인의 선량한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다. 1993년 독일로 훌쩍 떠났던 진중권이, 귀국하여 대표적인 '안티조선' 논객으로 활약하던 그 시절의 분위기는 아무튼 그랬다. 단 하나의 북극성이건, "밤하늘에 그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그려져 있지 않"(63쪽, 같은 책)은 별자리이건, 어쨌건 '우리'는 별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 캄캄한 밤을 헤치고 신중하게 한 걸음씩 전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년의 운동권 진중권은 당시 활발히 진행되고 있던 진보정당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1997년 대선에 노동자 후보를 내기 위한 운동이었던 국민승리21이 명맥을 이어가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진지하게 대선에 임하고 총선에서 의석을 획득하여, 현실 정치를 통해 현실에 개입하고자 했다. '혁명의 전초기지'를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 그때까지 진보진영에서 이른바 '부르주아 정당'이라고, 자본가들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리기 바빴던 의회정치에 직접 뛰어들어 구체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시도가 벌어지고 있었다.

진중권이 계간 <사회비평> 2002년 여름 호에 기고한 '적, 녹, 흑: 진보정당을 중심으로'는 바로 그 당시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역작이다. 별도의 단행본으로 편집된 바 없지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바로 찾을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진 이 글에서, 진중권은 당시까지의 진보 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21세기에도 생존이 가능한 세 가지 이념을 추려내어, 사민주의와 생태주의와 무정부주의(즉 자율주의)를 진보정당 운동의 고갱이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런데 당연히, 한 사람이 완전한 사민주의자이면서 생태주의자이고 동시에 무정부주의자일 수는 없다. '적, 녹, 흑'의 이념이 진보정당 안에 구현되기 위해서는, 그 각각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 할 공동의 선을 구현하기 위한 조직을 형성해야 한다. 즉, '별자리 진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간의 시간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러므로 저 두 텍스트는 서로 상보적으로 독해될 수 있다. 총선연대 뿐 아니라, 안티조선이 됐건 진보정당 운동이 됐건, '역사의 텔로스', 혹은 북극성을 상실한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각자의 빛을 뿜어내고, 별자리를 형성하며, 또 그 별자리를 읽어냄으로써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한 걸음씩이라도 진보를 이룩해 나가는 것이다. 비단 진보정당 운동이 아니어도,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어떤 이념이 허락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민주의, 생태주의, 무정부주의의 느슨한 결합 정도일 것이다. 진중권은 그러한 꿈을 꾸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활자 매체와 인터넷을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글을 쏟아 부었다.

4.
 

 

▲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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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폭풍의 세월을 어느 정도 보내고 난 후, 자신이 쓴 글 중 단행본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 묶던 진중권은 문득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박정희 망령은 물러갔고, <조선일보>는 제 몫을 찾았고, 한나라당은 몰락했고,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진출에 성공했다. 모든 게 내가 원하던 대로 된 셈이다. 그런데도 까닭 없이 느껴지는 이 허탈함의 정체는 뭘까?"(머리말, <빨간 바이러스>(아웃사이더 펴냄, 2004년))

2013년 5월 현재 이 문장을 보면 "모든 게 내가 원하던 대로" 되었다는 등의 소리를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진중권이 저 글을 쓰던 시점이 2004년 6월이라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야당으로 전락하고, 신생 여당 열린우리당이 탄핵 역풍을 타고 과반수 의석을 획득했다. 정당투표제가 도입되면서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에서 무려 8석을 얻어, 지역구의 2석을 합쳐 총 10석으로 심지어 구 민주당도 앞지르며 원내 3당이 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기존 언론의 영향력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는 인터넷의 활약이 도드라진 것은 물론이다.

하여 진중권은 선언한 것이다. '다 이루었다.' 심지어 그는 "4월 15일, 당사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을 들으며 [나는] 4년 동안 견지해 왔던 이 당에 대한 지지를 비로소 접을 수 있었다."(같은 곳)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진중권은 계속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진보정당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들을 쏟아냈지만, 2004년 이후에 출간된 책들의 목록을 통해 그의 정치적 입장의 변화를 더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2004년 6월 출간된 <빨간 바이러스>의 다음 책은 2005년 3월에 나왔다. 그 제목은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휴머니스트 펴냄, 2005년)이었는데, 본문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이 책은 그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원고를 묶어서 만든 것이었다. 안티조선운동이 <조선일보>를 넘어 '조중동'에 대한 포괄적 거부로 나아갔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을 만도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당시는 모두가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시기이기도 했고, 책 그 자체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칼럼집이 아니라 미학을 다루는 것이기에 그리 큰 논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한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으로서 진중권의 이력에 중요한 기점이 된다. 한국 사회를 향해, 뭔가 '돈벌이'가 될 수 있는 방향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최초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직전에 출간된 책의 제목이 <빨간 바이러스>였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고 보니 더욱 역설적으로 느껴지지만 아무튼 사실이 그렇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1인칭 전지적 진중권 시점으로 말하자면, 스마트폰 시대를 선취한 책인 것이다. 진중권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상상력의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미래의 생산력은 상상력이 될 것이다."('상상력 혁명',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라는 문구에 등장하는 "힘"은, 뒤따라 이어오는 "미래의 생산력"에서 말하는바 '생산력'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돈으로 수렴하게 된다. 물론 마르크스가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경기침체보다는 경제성장을 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 녹, 흑"의 저자가 '놀이, 예술, 상상력'을 통해 "미래의 생산력"을 증진해야 한다고 말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어쨌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진중권은 '정치'를 경유하지 않고, 곧장 '사회'를 향해 발화할 수 있는 지점을 획득했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키워서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미학적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인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놀이'와 '상상력'을 강조함으로써, 이른바 '구시대적 좌파'들과 한층 더 확실하게 선을 그을 수 있게 된 것도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공장 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에만 집착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한 이론적 초석을 다져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표명을 함부로 '우경화'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진보 혹은 좌파야말로 전통적으로 기술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상력'을 자신의 주요 화두 중 하나로 삼는 것이, 그가 즐겨 인용하는 벤야민의 말마따나 "유행하는 책을 유행이 지난 후 읽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2009년 <괴짜 사회학> 출간 기념 공개 대담에 참석한 진중권. ⓒ프레시안(최형락)


5.

총선 결과를 본 후 본인이 추구했던 사회적 목표들이 전부 완수되었음을 확인하고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을 쓴 진중권의 판단은, 당시로서는 타당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남은 3년 반 가량의 시간이 얼마나 스펙터클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력이 부족한 독자를 위해 진중권의 타임라인에서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두 가지 사건만을 언급해보자. 본인이 수십조 달러의 가치를 지니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던 한 과학자가 있었는데, 그 연구 결과라는 것이 포토샵을 이용한 사진 조작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났다. 또한 본인이 수백억 달러의 흥행을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던 한 영화감독이 있었는데, 그 영화가 개봉하고 나니 수많은 관객들이 극심한 재미없음과 당혹감을 호소하며 극장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 <첩첩상식>(진중권 지음, 새움 펴냄). ⓒ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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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황우석 사건을, 후자는 심형래의 <디 워> 개봉을 둘러싼 논란을 다소 장황하게 늘여서 써본 것이다. 황우석 사건은 진중권의 내면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고, 그렇게 비틀거리던 그는 <디 워> 사태를 통해 훗날 '촛불 스타'로 떠오르게 될 초석을 닦았다. 두 사건 모두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대중의 열광이 드러났는데, 전자는 진중권이 "지금 나는 썩어가고 있다"(<첩첩상식>(새움 펴냄, 2006), 17쪽)는 쓰라린 자기 선언을 하게 그를 몰아붙인 반면, 후자는 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사상 최초로 대중들에게 "횽(형)" 소리를 듣는 지식인이 되게 만들었다.

일단 2005년 말부터 2006년 초까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황우석 사건으로 먼저 들어가 보자. 진중권에게 결정타를 안긴 것은 2006년 4월 24일 벌어졌던 이른바 '감금 사건'이 아니었다. 그가 경남 창원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나오려는데 황우석의 지지자 30여명이 들이닥쳤고, 4시간가량 옴짝달싹 못하도록 강의실을 봉쇄하고 있었던 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중권 본인의 설명을 들어보자.

내가 진짜 상처를 받은 것은 그때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거의 모든 국민이 황우석을 신봉하고, MBC의 광고를 끊어버리고, 황우석 비판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언어적 폭력을 가하던 상황. 솔직히 그때 무서웠다. 이른바 '노빠'와 '박빠'가 '황빠'로 뭉쳐서 함께 퍼붓는 애국적 언어폭력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가공할 수준이었다.

웬만한 욕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나지만, 그때 퍼부어진 욕은 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입은 심리적 상처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후유증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 프로그램의 청취자 게시판에 올라온 욕설 중에는 나와 절친했던 학교 후배가 제 실명을 걸고 써놓은 것도 있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첩첩상식>, 16쪽)


6.

"혹시 국민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07년), 9쪽)

황우석 사건을 취재하던 일본 방송사 PD가 진중권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한다. 물론 그 자리에서는, '민족성', '국민성' 등의 개념을 거론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독일식 사고방식의 소유자답게 "국민성 같은 게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는 답을 돌려주었지만, 저 질문이 진중권의 뇌리에 오래 남아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건 그에게 있어서 "황우석 사태는 이 이념의 대립 너머에 존재하는 분열의 새로운 차원"에, "이념보다 더 깊은 차원의 대립, 한마디로 서로 다른 인성의 대립"(같은 책, 109쪽)이 존재함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2006년 무렵의 인터뷰 기사 등을 짚어볼 때, 그 무렵부터 진중권은 월터 옹이 만들어낸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대립구도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마 진지하게 미디어아트 등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월터 옹, 마샬 맥루한 등을 (다시) 읽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월터 옹이 만들어낸 저 개념이 대단히 유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황우석 사태와 같이 기존의 개념 틀로 해석이 안 되는 사태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진중권에게는 차라리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그는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출간하기 전, 2006년 6월경에 논객으로서 절필 선언을 했다. 이후 또 절필 선언을 하기 때문에 이것을 '1차 선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1차 선언'이 이루어진 곳은 그와 다른 진보 논객들이 자주 칼럼을 연재하던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코너였다. 그는 "이제는 규범을 말하고 지키는 논객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기술하는 기록자나 허구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이고 싶다"며, 라디오 진행자를 그만두고, 정치·사회적인 의견을 게시하기 위한 지면을 반납하고,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들어버린 아비투스(습속)가 무엇일지 고민하며, 비행기 조종을 배우기 시작했다.

<호모 코레아니쿠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출현한 책이기 때문에,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만큼이나 그의 오랜 독자들에게는 다소 뜬금없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몸은 한국에 살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독일에 있던 진중권이, 심지어 술에 취하면 영어 불어 독어로 술주정을 한다는 믿기 어려운 전설이 나돌기도 하는 그 진중권이, 갑자기 이 무슨 한국인 타령이란 말인가. 그와 오래전 틀어졌을 뿐 아니라 사실 글 쓰는 방식과 성향 등 많은 부분에서 다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점까지 꾸준히 같이 거론되고 비교되었던 강준만이 2006년 <한국인 코드>라는 책을 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이상해 보였다.

앞서 우리는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 이전까지 진중권의 글을 읽어오던 이들에게 의아한 기분을 안겨주는 책이라고 확인했다. 그런데 <호모 코레아니쿠스> 역시 그랬다. 특히 전자보다 후자가 안겨주는 이질감이 매우 컸다. 비록 그 내용을 뜯어보면 '신체'에 대한 현대철학의 논의를 검토하는 것이 절반, 그 논의들을 적용해볼 수 있는 현대 한국 미술 작가들의 작업을 검토하는 것이 절반 정도지만, 애초에 제목과 주제가 '한국인'으로 잡힌 책을 낸다는 것은 당시의 진중권이 거느리고 있던 독자들이 아는 '그 진중권'이 할 행동은 아니었던 것이다.

두 개의 오답을 합친다고 해서 하나의 정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통해 진중권은, '앞으로는 이걸 밀어야지'라고 점찍어둔 '구술문화 대 문자문화'의 구도를, 앞으로 자신의 독자가 되어줄 한국인들에게 과감하게 적용했다.

한국의 선진적인 인터넷 인프라는, 역설적이게도 역사적 후진성의 덕분이다. 한국의 경우 해방 직후 문맹률이 90퍼센트에 달했다고 하니 문자문화로 진입한 지 채 60년이 안 된 셈. 당연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구술문화의 습속이 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한국인들 역시 급속히 익명화, 원자화되어갔다. 하지만 오랜 촌락공동체 생활에서 형성된 인격적 접촉의 열망까지 사라지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사라져가던 촌락공동체 문화는 인터넷을 만나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는다. (같은 책, 192쪽)
 

 

▲ <호모 코레아니쿠스>(진중권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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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한국문화사 서술은, '구술문화'를 '전근대'로, '문자문화'를 '근대'로 치환하고 읽으면, 근대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포스트모던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기존의 담론과 사실상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이른바 '압축적 근대화'로 인해 제대로 된 근대를 형성하지도 못했고, 그 상태에서 다시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서, 그 두 단계를 모두 착실히 밟은 서양 사회에서 모두 거쳐 간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다는 그런 종류의 진단 말이다.

하지만 단어를 바꿈으로써 얻게 된 것이 없지는 않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다음에는 '영상문화', 혹은 '디지털문화'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은 바로 그 구술문화적 성격으로 인해 인터넷 보급률이 순식간에 높아졌고, 따라서 문자문화 단계에 오래 머물러있는 다른 서구권 국가에 비해, 비록 문자문화 자체는 부실하기 짝이 없지만, 다음 단계로 비교적 빨리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자문화에 밀려 사라졌던 영상문화와 구술문화가, IT(정보기술)에 힘입어 문자문화의 이후에 다시 주요한 소통매체로 되돌아오고 있다. 아직 문자문화가 충분히 무르익지 못한 후진성이 외려 문자문화 '이후'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잔혹하기 짝이 없었던 역사가 한국에 보여주는 약간의 공정함이랄까? (같은 책, 187쪽)

그런데 앞서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패기 있게 선언된 바와 같이 21세기는 상상력이 곧 경쟁력인 시대다. 우리에게 문자문화가 부족한 대신 문자문화 '이후'를 만들어갈 원동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이 단지 '영상문화' 차원에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앞서나갈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이 된다.

2006년에서 2007년 사이 진중권이 구체적으로 표현해낸 '영상문화-상상력'의 논의 구조는 상당히 건설적이고 발전적이며 미래 지향적이기도 하다. 그를 단지 '모두까기 인형'이나 tvN의 <SNL 코리아>의 '진중건'처럼 오직 네거티브한 논의만을 펼치고 남을 깎아먹기 급급한 누군가로 치부하는 이들의 생각과 달리, 진중권의 머릿속에는 한국 사회가 어떤 형태를 띠고 굴러가야 할지에 대한 대략적인 큰 밑그림이 들어있는 것이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위에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포개보면, 기왕 넘어가버린 영상문화를 긍정하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폐단을 모두 피해가는 그런 사회가 보인다. 그 영상문화의 힘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백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높은 문화의 힘을 갖추고, 그것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여 높은 소득도 올리는 그런 나라의 청사진이 나오는 것이다.

동시에 미디어아트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진중권 본인도 이제는 거리낌 없이 포스트모던의 원리를 자신의 글쓰기와 삶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이라고 안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 장벽이 이론적 근거를 통해 제거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적어도 '우리 포스트모던 똑바로 하자'보다는, '우리 영상문화 시대에 올바르게 적용해보자'가 좀 더 그럴듯한 말처럼 들리는 것이다.

7.

문제는 이번에도 진중권이 유행 지나간 책을 늦게 읽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좀 많이 늦었다는 데 있다. 영상매체와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함께 던지면 <쥬라기 공원>이 떠오를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 한 편이 올린 수입이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몇십만 대를 수출한 것과 같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난다면, 당신은 나와 비슷한 연배거나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문화적 상상력으로 높은 수입을 올린다는 발상 자체만큼은, 전혀 상상력과는 무관한, 일종의 클리셰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 심형래 감독의 <디 워>. ⓒ영구아트무비


그 클리셰를 가장 진지하게 실천에 옮기고 있던 사람이 바로 심형래였다. <디 워>를 만든 바로 그 심형래 말이다. 진중권이 2006년에 이르러서야 '상상력이 곧 경쟁력'이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심형래는 <쥬라기 공원>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오래도록 공룡 특촬물을 만들며 근성 있게 기술을 갈고 닦은 끝에, 김대중 정부에 의해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디 워> 논란은,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이론가가 주창하기 시작한 것을 진작부터 실행에 옮기고 있던 한 창작자가 있다. 그런데 그 창작자의 결과물을 보고, 이론가는 진저리를 내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소리를 외치기 시작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마법소녀의 주문 같기도 하고 뭔가 묘한 매력이 있다고 느낀 대중들은 이론가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하며, 이론가는 기존의 독자층을 벗어나 대한민국 최초로 자신을 '횽'이라고 부르는 일군의 팬 집단을 거느리게 된다.

물론 심형래라는 한 창작자가 내놓은 결과물이 후지다고 해서, 창조성이 곧 경쟁력이라는 진중권의 테제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2007년 9월 14일 <디 워>가 개봉하던 그날까지, 진중권이 제시한 창조성과 상상력으로 경제드라이브를 거는 모델을 가장 잘 실행하고 있던 사람이 심형래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칸트의 말처럼, 개념 없는 직관은 공허하고 직관 없는 개념은 맹목적이다. 진중권은 스티브 잡스가 '붐' 하면서 꺼내들었던 아이폰이 국내에 정식 출시되고 성공하기 전까지, 마음 편하게 어떤 사례를 지칭하며 '내가 말하는 상상력이 힘이 되는 경제는 이런 거지, 하하'라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난점을 제하고 나면, <디 워> 논란은 진중권의 인생에 역전의 기회를 제공해줬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디 워>의 스토리를 설명하기 위해, <100분 토론>에 출연했던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고전적인 서사의 개념을 들이밀었고, 그것이 아직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국내에서 활성화되기 전 주로 '디시인사이드'에 모여 있던 '잉여' 청년들의 감수성에 제대로 꽂혔다. 진중권은 본인 스스로가 '소스'가 됨으로써, 텍스트가 아니라 이미지로 사유하는 새로운 신체를 가진 '호모 코레아니쿠스'들이 존재함을 입증한 것이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외치는 진중권 짤방.

이 '짤방'을 독해해보자. 진중권의 얼굴을, 당시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16세의 몸에 대충 합성하고, 위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써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대략 세 가지 사실을 즉각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1) 이 짤방을 만든 사람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딱히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2) 이 짤방을 만든 사람은 그러나, 하필이면 교황과 진중권을 합성했다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 말이 어느 정도 권위 있(어 보이)는 표현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3) 그런데 누군가 그런 말을 하면 아무튼 웃겨 보인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합성은 '발로 한' 것처럼 낮은 퀄리티로 이루어져 있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이행하고, 문자문화에서 다시 영상문화로 이행하는데, 심형래처럼 구술문화적 힘을 이용해 영상문화에서 한몫 잡으려는 사람을 한 차례 걸러내 보자. 그러면 이렇듯 문자문화가 요구하는 지적 능력이나 교양은 부족한 상태로, 다만 보고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네티즌이 나온다. 그런데 이 네티즌이라는 것은, 1999년 귀국한 이후 진중권이 신물이 나도록 상대해온 바로 그놈들이다.

영상문화는 이미 와 있었다; 다만 돈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8.

진중권이 진저리를 내건 말건 <디 워>는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진중권은 그러한 결과를 전혀 원치 않았겠지만,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4년 총선 이후 '역사의 종언'을 보고,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생각하며, 근대적 기준만을 고집하지 않고 탈근대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재주조해낸 진중권은 다른 여느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센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다음 선거에서 한국 유권자의 '38.6퍼센트가 중도적인 정부를 원했고, 다음으로 34.2퍼센트가 진보적이기를, 20.1퍼센트는 보수적이기를 바랐다'고 한다.(<시사저널>, 2006/10월/03) 하지만 '누가 가장 진보적인 후보냐'는 설문에 '이명박'이라고 대답하는 게 한국의 정치 상식이니, 이런 설문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같은 책, 177쪽)
 

 

▲ <생각의 지도>(진중권 지음, 천년의상상 펴냄). ⓒ천년의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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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진중권 본인은 한국에 구술문화만 충만하고 문자문화는 부족하다고 말했지만, 본인이 다소 '포스트모던'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어쨌건 예전에 비해 구술문화가 아닌 문자문화적 요소가 늘었다는 낙관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우리의 조국은 언제나 우리의 눈높이를 훌쩍 뛰어넘어, 대중은 '가장 진보적인 후보'라는 단어를 들으면 '이명박'을 떠올렸다. 반면 그 이명박에 맞서 선거를 해야 할 민주당, 아니 대통합민주신당은 내부 계파 싸움으로 분열되어, 이른바 '친노' 계열은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고, 그 와중에 내세워진 후보는 17대 총선에서 '노인 발언'으로 잘 나가던 선거에 큰 위기를 불러왔던 정동영이었다. 그 정동영이 얻은 득표수는 고작 600만 표 가량으로, 이는 <디 워>의 관객 수인 780만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사회가 한 발자국, 혹은 반 발자국이라도 '모던'으로 향할 것이라는 믿음 하에 '포스트모던'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더니, 대한민국은 더더욱 현란한 탈근대의 경지로 훌쩍 뛰어 들어간 것이다. 100명이나 읽을까 말까한 미학 책을 쓰고 싶다는 진중권의 삶은 그 이후로 더욱 바쁘고 정신없고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2008년 촛불시위, 그는 '아프리카 TV'로 생중계되는 시위 현장에서 진보신당의 <칼라 TV> 리포터가 되어 체스를 두는 자동인형이 되는 체험을 한다. 그 과정에서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진중권이 촛불시위 당시 누렸던 인기는 향후 그 어떤 지식인도 쉽게 넘볼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본인이 설명하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요소가 결합된 영상문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진중권이다. 열정적으로 뛰어다니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밴 예의가 바르기 때문에 마땅히 흠 잡을 구석이 없자, 일군의 노인들이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담배 똑바로 피우라'고 훈계를 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대립이다. 그러자 그 상황이 녹음된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영상문화의 네티즌들은 '진중권 담배 송'(바로가기☞)을 만들어 화답했다. 이렇게 철저히, 자신이 대중에게 소개한 이론이 자신을 통해 육화되는 것을 경험한 지식인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 너무 잘 나간다 싶었다. 그러더니 그를 겸임교수로 임명하고 있던 중앙대학교에서 문득 진중권을 해고해버렸다. 더 이상 국내에서 버티기 힘들겠다는 판단을 한 그는, 기왕 배우기 시작한 비행기 조종을 완벽하게 만들 겸, 영어 회화도 익힐 겸, 필리핀 항공학교에 등록을 하고 3년을 기한으로 잡아 출국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가 관심을 갖지 않아도 상대편에서 집착하는 누군가에 의해 제기된 소송들이 얽혀있었고, 그로 인해 꾸준히 재산과 체력과 정신을 갉아 먹히게 된다.

결국 본인이 꿈꿨던 것처럼 3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진중권은 한국에 돌아왔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몇몇 미학 서적을 출간하고, <씨네21>에 연재했던 철학적 에세이들을 모아 <아이콘>(씨네21북스 펴냄, 2011년)이라는 제목으로 묶어서 내고, 꾸준히 비행기 연습을 하며 필리핀 사람들이 즐겨 먹는 '발롯(balut)'을 음미하며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곱씹었다. 뇌물수수 혐의로 교육감 직을 상실하게 된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다, 다시 한 번 논객을 그만두겠다며 '2차 선언'을 했지만, 대선을 앞두고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한 이상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12월 19일, 즉 대선 당일까지만 하겠다는 한시적 조건을 걸고, 진중권은 다시 한 번 논객으로서 시동을 걸었다.

9.
 

 

▲ <아이콘>(진중권 지음, 씨네21북스 펴냄). ⓒ씨네21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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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싸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중권은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고, 특유의 순발력과 언어감각 및 기존의 인지도로 인해 이른바 '파워 트위터리안'이 되어 대선 정국에 개입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쌓여가는 트윗만큼이나 숱한 '흑역사'를 적립했는데, 그 모든 내역을 일일이 기입하기에는 이 지면이 모자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의 정치적 판단만을 기억해보기로 하자.

대학에 들어가 운동권이 된 후 진중권은 단 한 번도 NL, 그 중에서도 특히 주사파와 가까워진 적이 없었다. 현재 확인 가능한 그의 텍스트에서 주사파가 긍정적으로 묘사된 경우는 없다. 이것은 단지 대학 시절 운동권에서 조직이 달랐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특히 독일 유학을 기점으로 내면의 근대화를 이룩한 그는 북한을 한국의 대안으로 여기며,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신처럼 모시고, 온갖 유교 봉건적 습속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주사파와 도저히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가 없는 사이인 것이다.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당 간 이합집산이 극심해졌다. 민주노동당은 이미 주사파에게 점령당한지 오래였고, 자신들이 일궈놓은 정당을 빼앗긴 이들은 탈당을 하여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한편 남아있던 민주노동당 다수 세력은 구 민주당 계열에 정착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유시민의 '국참계'와, 진보신당에서 탈당한 심상정, 노회찬 등과 손을 잡고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그것이 2011년 12월의 일이다.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 통합진보당에서 총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경선을 진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관악을 선거구에 출마한 이정희 의원 측이 모바일 투표에 나이와 성별 등을 속이고 참여하라는 문자를 보낸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정희 의원은 구 민주노동당 출신으로 이른바 '주사파'로 간주되는 인물이었다.

진보정치는 옳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정당한 과정을 통해 획득되어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던 진중권은, 게다가 그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이른바 '주사파'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우호적으로 이정희 측을 감싸고 나섰다. 이정희와 상대방인 김희철이 재경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이정희가 경선 과정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았고, 그 증거가 당시로서는 명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의 뜻은 한결같았다. 원래 NL은 도덕성을 무기로 삼는 자들이 아니니, 이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재경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한 벌이 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진중권의 이러한 발언은 그의 오랜 독자, 혹은 팬 층을 실망 내지는 충격에 빠뜨렸다. 사실 그의 취지가 무엇인지는 모를 수가 없다. 부정경선을 하다가 적발되었는데 재경선을 하라는 것은, 커닝하다 들켰는데 재시험을 보게 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만약 또 다른 진중권이 보고 있었다면 반드시 지적했을 것이다. 다만 '파워 트위터리안'이 된 진중권은, 야권연대가 깨지고 선거 결과 형편없이 패배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을 따름이다.

이후 대선 과정에서 보인 모습 역시, 놀라우면서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는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단일화가 되지 않으면 통합진보당의 후보인 심상정을 찍겠다는 취지의 트윗을 올렸다. 강준만과 유시민이 그 어떤 식으로 공격하고 회유해도 넘어가지 않고 민주노동당의 깃발을 지키던 그 진중권이 아니었다. 어차피 구 민주노동당 자체가 형해화된 상황이긴 했지만, 그 다음의 진보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대신, 진중권은 12월 19일 선거 이후에는 아예 세상이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단일화와 정권교체라는 한 가지 이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중권은 스스로 선언한 논객으로서의 마지막 날을 맞았고, 그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섰던 '야권'은 패배했다.

10.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진중권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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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던 글쓰기는 이런 게 아니었다."('들어가는 말', <시칠리아의 암소>(다우 펴냄, 2000년)) 본인이 원치 않게 청탁을 받아 쓴 정치적 글을 모아 책으로 엮으면서, 진중권이 저자 서문에 내놓은 첫 문장이다. 그에 따르면, "원래 내가 생각하던 글쓰기는 '책'을 쓰는 것이었"지, 이렇게 구성도 안 되고 다만 대충 그러모아서 주제별로 묶어놓는 것이 최선인 그런 글을 쓰는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진중권은 술회한다. "요즘은 가끔 삶이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런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독일에 있을 때 받은 어떤 원고 청탁에서 비롯한 것이다."(같은 곳) 그 원고 청탁은 아마도, 이인화가 편집위원으로 있었던 잡지 <상상>에서 '악마주의'에 대해 원고를 써달라고 했던 그것일 터이다. 진중권은 열심히 원고를 준비했는데, 알고 보니 그 원고는 이인화가 박정희를 '낭만주의적 악마'로 묘사하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기왕 원고를 쓴다고 했으니 쓰되, 반론할 수 있는 지면도 요구했고, <상상> 측에서도 허락했다.

그런데 이인화의 심기가 불편했던지 진중권의 원고는 아예 실리지도 않았고, 대신 그것을 고스란히 살려 <문학동네>에 기고했는데, <조선일보>를 비판한 문단이 삭제된 채 글이 실렸다. 한 번은 쓰게 웃고 넘어갔는데, 비슷한 주제로 쓴 다른 글이 거부당하자, 진중권은 <조선일보>를 겁내지 않는 언론을 찾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강준만이 만든 '저널룩' <인물과 사상>이었다. 그 지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진중권은 그 작업을 쭉 이어나갔고, 그렇게 만들어진 원고가 모여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개마고원 펴냄, 1998년)가 되었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전략은 매우 단순하다. 진중권은 "대한민국 우익들이 쓴 텍스트에서 뽑은 인용"을 서로 충돌시킨다. "즉 나는 이들의 논리를, 이들 자신이 내세우는 논리로 반박하려는 거다. 이게 내 전략이다."(<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권, 27쪽) 하여 진중권은 자신의 책을 "순문학으로 이해한다."(28쪽) "한국 민중문화의 풍자적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 내가 개척한 새로운 문학 장르", "20세기의 김삿갓", "논문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포스트모던"(같은 곳)을 자처하는 것이다. 독일 유학생이던 진중권의 혈기와 재기가 한껏 느껴지는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같은 사람이 15년 후에 쓴 또 다른 서문을 살펴보자. 그는 <씨네21>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묶으며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붙인다. "여기에 묶인 글들은 논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필도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논문과 수필을 뒤섞어 놓은, 아주 특정한 의미에서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생각의 지도>, 5쪽)

본인의 '풍자문학'이 "논문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포스트모던"이라고 스스로를 조롱했던 이가, 15년이 지난 후에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글을 "굳이 말하자면 논문과 수필을 뒤섞어 놓은, 아주 특정한 의미에서 '에세이'"로 소개한다. 전자는 '놀이'로 '포스트모던'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굳이 말하자면) '일'로 '포스트모던' 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글을 모아서 책을 내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2000년의 진중권은 "내가 생각하던 글쓰기는 이런 게 아니"라고 절규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의 '잡문'을 하나씩 흩뿌린 후 '별자리'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실패한 유학생 진중권이 개척한 길은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것이었다. 그는 인터넷이라는 광장에서 질펀하게 뛰어노는 지식인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자신이 동경하는 디오게네스에 가장 잘 부합하는 지식인을 단 한 사람 꼽자면,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진중권을 따라올 자가 없다. 자동차 면허증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항공기 면허증은 있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많은 글을 쓰지만 가장 선호하는 작업실은 대한민국 어디서나 반경 2킬로미터 안에 하나씩은 있는 PC방이며, 음악에는 조예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울적할 때에는 샹송을 듣는 그런 지식인의 모습을 진중권은 만들어냈다. 그것을 우리는, 그가 선호하는 표현대로라면, '존재미학'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미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진중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한국에서 독일로, 다시 독일에서 한국으로 던져진 자신의 삶이 비루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것을 견뎌내기 위한 작은 보루로서 존재미학을 꺼내들었다.

내 꿈은 삶의 예술가(lebenskünstler).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생존 예술가(Überlebenskünstler). 앞으로도 전망이 좋아 보이지 않지만,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누구 허락받지 않고 책을 번역할 자유, 누구에게 욕먹지 않고 책을 쓸 자유,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인정사정 보지 않고, 소위 분위기라는 이름의 상황 논리, 대중이란 이름의 평균성에 구애받지 않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할 자유. 이 귀중한 자유의 대가라 생각하면 그뿐. 물론 나도 남 잘사는 거 보면 배가 아프다. 이 현실적 결핍감을 심리적 풍족감으로 보상하는 방법. '존재 미학'. 객관적으로 보잘것없는 내 삶을 주관적으로 심오하게 포장해주는 사적 이데올로기. (<시칠리아의 암소>, 269쪽)

그러나 진중권이 본인의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를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라 진지한 학문적, 문예적 실천으로 간주하게 되었을 때, '존재미학'의 크기도 한없이 커졌다. 이제 그것은 단지 초라한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사적 이데올로기에 머물지 않는다. '포스트모던'해진 관계로, 어떤 정치적, 도덕적 당위를 타인에게 강요할 수도 없게 된 진중권이, 궁극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최종 심급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삶에 의미를 주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공약을 해야 한다. 공약을 한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부담 역시 기꺼이 지겠다는 선언이다. 하지만 이를 귀찮은 의무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공약을 통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자신을 형성하는 존재미학의 실천이다. 그림을 그릴 때에 화면에서 미적 필연성을 따르면서도 우리가 그것을 제약으로 느끼지 않듯이, 공약의 부담을 지는 것도 자유로운 행위가 될 것이다. (<생각의 지도>, 190쪽)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그들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방법론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 '공약'과 그것을 지키는 '존재미학'이다. 진중권의 지적 체계 속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회적 원칙은 궁극적으로는 이것뿐이다. 마치 원칙과 공약을 잘 지킬 것 같은, 약속과 신뢰의 존재미학 그 자체였던 정치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지금, 이 구절은 더욱 씁쓸하게 다가올 뿐이다.

11.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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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04년의 그때로 돌아가 보자. "박정희 망령은 물러갔고, <조선일보>는 제 몫을 찾았고, 한나라당은 몰락했고,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진출에 성공"했던 그 때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박정희는 별개의 인격체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당선을 박정희 망령의 귀환으로 바라보고 있다. <조선일보>는 제 몫의 종편을 찾았다.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개명하고 붉게 타올랐다. 민주노동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다. 그때의 성취 중 지금까지 제 모습을 하고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철학과 미학의 텍스트에서 배운 내용과,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통해 익힌 문자문화적 습속을 가지고 왔던 진중권은, 어쨌건 이 세상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생각을 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자신의 완강한 모더니즘을 서서히 털어냈다. 그는 스스로가 '포스트모던' 하게 글을 쓴다는 것을 시인하고, 서양의 철학적 개념을 한국의 현실에 적용하는 '잡문'을 평생 써야만 하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는 '포스트모던'을 모던한 문체로 설명하는 작가가 되었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달랐다. 어차피 그것이 전부 유희일 뿐이므로, 지금도 보기 힘든 '미치광이 같은' 문체 실험이 마구 쏟아졌다. 동음이의어, 특수문자, 한자, 알파벳 등 온갖 '비-한국어'의 요소들이 끼어들었고, 인용문과 인용문이 서로 헐뜯었으며, 모든 페이지가 현란한 지성과 능란한 조롱으로 폭발했다. 강고한 모더니스트가 쓴, 최고의 포스트모던 텍스트였다고 우리는 그 책을 기억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언제나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으면 다행이었다. 진중권은 또 다른 진중권이 되면서 우리에게서 진중권을 빼앗아갔다. 그의 초창기 활동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가장 올바르고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그를 잃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촛불시위 이후 스타가 된 진중권만을 아는 이들은, '비판적 지지' 논쟁을 하며 게시판에서 밤을 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네티즌의 속을 긁어대는 진중권을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진중권은 예전의 진중권이 아니다. 하지만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닌 것은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날렵한 논객과 함께 논객시대를 살아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프레시안(손문상)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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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고등학생들 "저도 민주화를 몰라요"

일베도 문제지만 고등학생들도 걱정입니다

13.05.24 21:44l최종 업데이트 13.05.24 21:46l

 

 

# 장면1. "저도 민주화를 몰라요"

"야, 요즘 시크릿 전효성이 민주화시킨다는 발언을 해서 난리가 났잖아. 넌 민주화가 무슨 뜻인지 알지?"

수업 시간에 떠드는 학생(고등학생) 한 명을 수업이 다 끝난 후 조용히 데려와 함께 수다를 떨다가 던진 질문이었다. 이 정도는 당연히 알겠지 기대했었다.

"아... 저도 잘 몰라요...."
"어, 그래? 그럼 요즘 5.18도 말이 많잖아. 5.18은 알지?"
"그거 알았었는데, 갑자기 물어보시니까 생각이 안 나요."
"아....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5.18이 어디서 일어난 사건인지는 알지?"
"갑자기 물어보셔서 그것도 생각이 안 나네요."


유머 사이트에서 퍼온 농담도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도 아니다. 학생과 대화를 나누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다.

# 장면2. 예능이 걱정하는 한국사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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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질문을 던진 무한도전의 한 장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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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MBC의 시사교양 프로그램 '컬투의 베란다 쇼'에서 '역사교육의 현실' 편을 방송했다. 중간에 중학교 하나와 대학교 하나를 각각 방문해 학생들에게 다짜고짜 역사 퀴즈를 내는 장면이 있었다. "고려를 세운 사람은 누구인가?", "삼국시대부터 대한민국까지 역대 왕조를 써라" 등 초등학교 수준의 간단한 문제였다. 그런데, 꽤 여러 명의 학생들이 이 초등학교 수준의 문제에 정답을 말하지 못했다. MC와 게스트들은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며 걱정을 했다.

지난 18일, MBC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한국사 특강을 했다. 멤버들이 전문가에게 배워 아이돌에게 가르쳐 주는 방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사실 전달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이미 한국사를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이 프로그램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우리 역사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시청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심어주었다는 점에서였다. '무한도전' 측에서는 한국사를 제대로 알자는 취지에서 기획한 것 같은데, 예능에서도 걱정할 만큼 젊은이들의 역사 지식이 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 장면3. 5.18에 북한군 개입?

최근 TV조선과 채널A 등 일부 종편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내고,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라는 극우사이트에서 5.18은 폭동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극우 보수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조갑제씨가 북한군 개입설은 사실이 아니라며 비판하자, 이번에는 "조갑제도 좌파종북이다"라고 몰아붙이는 웃지못할 일도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이 사이트가 10대, 20대 젊은이들도 많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사이트라는 점이다. 어떻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주장을 믿고 퍼 나르고 있는지 걱정스럽다는 의견이 많다.

집중이수제의 허실... 중간고사 시험 범위, 구석기-강화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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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위주의 특강을 준비하고 있는 무한도전 멤버들(유재석,길,하하)과 설민석 강사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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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2, 3은 모두 젊은 세대가 역사를 잘 몰라서 벌어진 사건들이다. 젊은이들이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한국사도 제대로 안 가르치고 뭐했느냐는 비판 여론도 높아진다. 역사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잘못했다고 석고대죄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역사 교사들만 그 책임을 오롯이 뒤집어쓰기에는 억울한 구조가 있다.

문제의 시작은 2009 개정교육과정의 집중이수제였다. 집중이수제란 생물, 한국사, 윤리, 경제 같은 교과를 1주일에 5시간씩 한 학기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한 후, 다 마쳤으므로 다시는 배우지 않는 제도를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 과목을 집중적으로 배우니 제대로 완전하게 이해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고등학교는 1학년 때 한국사를 배운다. 수업 시간은 1년간 일주일에 2시간이다. 작년까지는 집중이수제를 선택했지만, 문제가 많아서 올해는 집중이수제를 적용하지 않고 있다. 집중이수제를 시행했던 작년에는 한 학기 동안 1주일에 4시간 한국사를 가르쳐서 한 학기 내에 한국사 과정을 끝냈었다.

1주일에 4시간이나 한국사 수업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5일제 수업이기 때문에 하루를 빼고는 매일 한국사 수업이 들어야 한다. 어제 배운 내용도 아직 다 소화도 하지 못했는데, 오늘 또다시 방대한 내용의 한국사를 배워야 한다.

이제 막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 얼떨떨한 기분으로 3월 첫 주에 조금 정신을 놓고 있으면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를 거쳐 고조선 시대, 초기 국가 시대가 끝나버린다. 3월 둘째 주에 아차 싶어서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 삼국시대를 시작해서 끝나버린다. 3월 셋째 주가 시작되면 고려 시대를 시작한다.

4월이 되면 이미 조선시대 중반을 지나 임진왜란을 배우고 있다. 이렇게 수업을 하면 1학기 중간고사의 한국사 시험 범위는 70만 년 전에 시작되는 구석기 시대부터 1876년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까지가 된다. 실제로 재작년 중간고사를 이렇게 치렀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하고 있지만, 교사로서의 솔직한 심정은 이 엄청난 내용을 공부해서 시험 보는 학생들이 신기할 정도다. 그래서 아주 많은 학생들이 방대한 분량에 질려서 한국사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사 시험을 포기해 버린다. 공부해야 한다고 애써 강조는 하고 있지만 포기하는 학생들을 뭐라고 다그치기 힘들다.

1/3 토막이 난 수업 시수 vs. 변함없는 교과서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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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 한국사 교과서(자료사진)
ⓒ 김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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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이수제를 적용하지 않으면 1년동안 1주일에 2시간씩 한국사를 배우게 된다. 필자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인 20년전 시절과 비교해 보아도, 수업 시간이 반토막이 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1학년 때 1주일에 2시간 씩 국사 상권을 배우고, 2학년 때 1주일에 2시간 씩 국사 하권을 배웠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의 수업 시수와 현재의 수업 시수를 비교해 보면 상황은 더 슬프다. 그 시절에는 국사를 1년 동안 1주일에 2~3시간, 한국근현대사를 1년 동안 1주일에 3~4시간에 걸쳐 배웠다. 그 때와 비교하면 현재의 한국사 수업 시수는 1/3 토막이 난 셈이다.

물론 시수가 이렇게 줄어든 만큼 교과서의 페이지 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과서를 읽어보면 가르칠 분량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과거 교과서에서 10줄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하던 것을 1~2줄에 압축해서 써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생들은 이 압축된 교과서 문장을 더 이해할 수가 없게 되고, 교사들은 그 압축파일 같은 교과서 문장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줘야 한다. 차라리 교과서 분량을 늘려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라도 했으면 수업하기 수월하련만, 분량을 줄이기 위해 많은 내용을 압축해 놓았으니, 책을 읽고 이해해야 할 학생들도, 가르쳐야 할 교사들도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많은 이들은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이야기하면서 외국처럼 학생들의 참여가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대화하며 수업을 해 보라고 한다. 교사인 나도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학생들이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화두를 던져주면서 수업을 해 보고 싶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가르쳐야 할 많은 내용과 엄청나게 부족한 시간 때문에 내용을 체계적으로 요약해서 정리한 후 강의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나도 정말 수업다운 수업을 해보고 싶다.

양날의 칼 서울대... 이과는 필요없는 한국사

최근 수능 시험을 준비할 때 사회탐구영역 선택과목으로 한국사를 택해서 공부하는 학생이 드물다. 서울대에 진학할 생각이 있는 학생이거나 한국사를 매우 사랑하는 역사 마니아가 아니면 선택하지 않는다.

한국사를 선택하면 서울대에 진학할 생각으로 공부하는 우수한 학생들과 경쟁해서 등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대는 한국사에 있어서 양날의 칼이다. 필수 선택으로 지정해 주어 고마운 면도 있지만,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한국사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방대한 분량과 부족한 수업 시간 때문에 한국사에 질려서 점점 멀어지는 이들은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는 대부분의 학생들이다. 그래서 이런 터무니없는 의심이 고개를 든다. 역사는 천하를 통치할 제왕들이 공부하는 학문이었으니, 서울대를 갈 학생들만 공부하라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나마도 모두 문과에 한정된 이야기다. 이과 학생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이과 학생들도 한국사를 1학년 때 배우기는 한다. 하지만, 수능을 볼 때 선택을 하지 않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 왜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어떤 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 이과 갈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사 들을 필요 없잖아요?"

1990년대 말, 이과 학생들도 수능에서 한국사를 필수로 시험보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이과 학생 하나가 내게 한국사 문제를 물어보러 온 적이 있었다. 모든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던 우수한 학생이었는데, 그 학생도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국사가 선택 과목이었다면 열심히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단 한국사뿐만이 아니다. 이과 학생들도 교양으로 사회 교과를 배우지만, 수능 시험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

작년 겨울,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었다. 저자는 진화론을 전공한 생물학자라고 하는데, 생물학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는 책이 아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에 대한 저자의 해설, 성경에 대한 심오한 분석과 평가도 담겨 있었다. 서양에서는 이과생들에게도 심도 깊은 인문학적 내용을 가르치는 것일까?

요즘 읽고 있는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도 그랬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생물학자인데, 사회학, 역사학, 인문학 등에도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과학자이지만, 과학과 인문학을 두루 섭렵했기에 요즘 트렌드가 되고 있는, 전체를 아우르는 통섭의 개념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두 과학자가 쏟아내는 화려한 인문학적 지식의 향연을 바라보며, 그저 부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우리나라의 이과 학생들도 20~30년 후 이런 통섭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황홀한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혹시 우리나라는 이과 학생들에게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 교육을 소홀히 하여 결코 이런 저작을 쓸 수 있는 학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사 교육 강화,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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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를 위한 시에 '눈물바다' 4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068차 수요집회'에서 한 시민이 할머니를 위한 시를 경청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날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함께 일본 위안부 범죄의 진상규명과 공식 사과를 촉구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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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학생들이 역사에 무지한 것은 어찌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한국사 수업 시수를 늘리고, 수능 시험에서 문과와 이과 모두 필수로 한국사 시험을 치르게 하면 된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러려면 중요한 교과인 영어와 수학, 국어의 수업 시수를 줄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국, 영, 수 과목을 제외한 다른 교과는 이미 수업 시수를 줄일 만큼 줄여서 더 이상 줄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독도 문제, 종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신사 문제 등을 가지고 역사를 왜곡한다고 하니 한국사 교육을 강화하자는 여론이 높아졌고, 정부도 한국사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없다. 그런 발표가 처음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생각도 든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으로 국민 여론이 들끓고 있으니, 정부도 뭔가 하고 있다며 여론을 달래기 위해 한국사 교육 강화 발표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대로 나가다가는 역사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양산될 것이라는 우려는, 몇 년 전 수능에서 한국사 시험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 과목이 되었을 때, 2009 개정 교육과정으로 역사 수업 시수가 확 줄었을 때, 이미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제야 현실로 드러난 것뿐이다. 우리 정부의 과거 행태를 통해 예측해 본 미래는 이렇다.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를 모른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여론이 안 좋아지면 정부는 또다시 한국사 교육 강화를 발표만 할 것이다. 그리고 여론이 잠잠해지면 모두가 잊어버릴 것이다. 어쩌면 7차 교육과정(2009년 집중이수제 이전 과정)으로 한국사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아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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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근평 주석, 김정은원수 친서에 깊은 사의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5/25 11:30
  • 수정일
    2013/05/25 11:3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습근평 주석, 김정은원수 친서에 깊은 사의
 
조.중 친선 개화만발 할 것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5/25 [10:20] 최종편집: ⓒ 자주민보
 
 
▲ 김정은 원수 친서를 전달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에게 습근평 주석은 깊은 사의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

김정은 원수의 특사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있는 조선인민군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주석에게 전달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습근평 주석과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회담 소식을 전하면서 “습근평 동지는 존경하는 김정은동지께서 최룡해 동지를 특사로 파견하시여 친서를 전달하도록 하신데 대해 다시금 깊은 사의를 표하였다.”고 전했다.

중앙통신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인 습근평동지가 24일 인민대회당에서 조선로동당 제1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특사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있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조선인민군 차수 최룡해 동지를 만났다.”고 회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중앙통신은 “우리 측에서 특사일행인 리영길 조선인민군 상장, 김성남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김형준 외무성 부상, 김수길 조선인민군 중장과 지재룡 중국주재 우리나라 특명전권대사가 참가하였다.”고 수행명단을 공개하고 중국측에서는 “양결지 국무위원, 왕가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장, 장업수 외교부 부부장, 정설상 당중앙위원회 판공청 부주임, 류결일 당중앙위원회 대외련락부 부부장, 양연이 부장조리와 관계일꾼들이 참가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조선로동당 제1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신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습근평 동지에게 보내시는 인사를 최룡해 동지가 전달하였다.”고 전하고 “습근평 동지는 이에 깊은 사의를 표하고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 자신의 따뜻한 인사를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며 사의를 표한 소식을 강조했다.

신문은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습근평 동지에게 보내신 친서를 최룡해 동지가 정중히 전달하였다.”며 “습근평 동지는 존경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최룡해 동지를 특사로 파견하시여 친서를 전달하도록 하신데 대해 다시금 깊은 사의를 표하였다.”고 습근평 주석의 거듭 된 사의표명을 부각시켰다.

또한 “김정은제1비서동지께서는 친서에서 두 나라 노세대 혁명가들께서 마련하시고 꽃피우신 전통적인 조.중 친선을 계승하고 공고 발전시킬 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고 하면서 그는 중국당과 정부는 전략적인 높이와 장기적인 견지에서 중조친선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전통계승, 미래지향, 협조강화는 중국당과 정부의 일관한 방침이라고 강조하였다.”면서 “중국당과 정부는 조선당과 정부와 함께 친선적인 교류와 협조를 확대하기 바란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는 중국당과 정부는 시종일관 조선식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을 지지한다고 하면서 조선이 경제발전과 인민생활향상에서 성과를 거둘 것을 축원하였다.”고 전해 조중 양국이 조중친선의 확대 발전을 기반으로 사회주의를 강화해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음을 시사했다.

이어 “최룡해 동지는 조중 두 나라는 산과 강이 잇닿아있는 친선적인 연방이며 조중 친선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세기와 년대를 이어온 전통적인 조중 친선을 강화발전 시켜나가는 것은 우리 당과 정부의 변함없는 입장이라고 강조하였다.”며 “두 나라 노세대 혁명가들의 노고와 심혈이 어려 있는 조중 친선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조중 두 나라 군대와 인민은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는 두 당,두 나라 최고영도자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 전통적인 조중 친선이 앞으로 더욱 개화만발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고 게재했다.

특히 “그는 중국인민이 습근평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중국공산당의 영도 밑에 《중국의 꿈》을 실현하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위업수행에서 보다 큰 성과를 이룩할 것을 축원하였다.”고 밝혀 지난해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는 메시지를 또 다시 던진 것으로 풀이 돼 조중관계와 함께 세계정세 변화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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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조치 해제하라"

"5.24조치 해제하라"

 

각계 5.24조치 3년 맞아 입장 발표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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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24 1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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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5.24조치 발표 3년을 맞아 정당, 시민사회, 남북경협기업 등은 5.24조치 해제를 촉구했다.

국민행동, '5.24조치 해제 및 남북관계 복원 촉구' 기자회견

 

   
▲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은 24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5.24조치 해제 및 남북관계 복원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제공-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

 

시민사회단체를 망라한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은 이날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5.24조치 해제 및 남북관계 복원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5.24조치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지난 3년간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상호 불신과 대결은 깊어만 갔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는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개성공단 폐쇄를 위한 수순 밟기에 돌입한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어야 할 때"라며 "평화실현을 위한 적극적 조치를 단행해야하고 5.24조치를 해제하고 새로운 관계 복원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6.15공동선언 민족공동행사 개최를 언급, "민간의 교류야 말로 그 동안 남북을 잇는 평화의 가교역할을 해왔던 만큼, 정부가 민족공동행사를 보장한다면 이 역시 남북관계 정상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5.24조치 해제와 6.15공동선언 허용을 촉구했다.

이영순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 '5.24조치 해제 촉구' 1인시위

 

   
▲ 이영순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이 '5.24조치 해제 촉구' 1인시위를 벌였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이날 낮 서울 광화문 이순신동상 앞에서 이영순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은 '5.24조치 해제'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이영순 이사장은 "오늘은 3년전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빌미로 모든 남북관계를 단절시킨 날"이라며 "이로 인해 남북관계가 위기에 봉착했다. 이를 해제하고 남북화해의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절박한 마음으로 국민들과 정부에 촉구하기 위해 나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6.15공동행사는 좋은 기회이다. 정부는 더 이상 전쟁놀이를 할 것이 아니라 빨리 6.15선언을 이행하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줘서 민간교류도 이뤄지고 국민들도 전쟁불안에서 해소되는 정책을 펴기 바란다"고 말했다.

남북경협 비대위, "정경분리 원칙 지켜져야" 성명서 발표

'남북경협기업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남북경협 비대위, 위원장 유동호)도 성명서를 발표, "천안함 사태 이후 중단된 남북경협으로 하루아침에 수만 명의 생존권이 달린 생업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은 처지가 되었다"며 "정경분리의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경협 비대위'는 "우리는 민족의 염원인 통일조국에 작게나마 이바지한다는 심정으로 남북한 경제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크고 작은 정치군사적 갈등으로 민간 차원의 순수한 결제활동은 항상 민감하게 영향을 받아왔다"며 "자유로운 기업 활동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장책을 마련할 것"을 호소했다.

또한 "군사적 위협보다는 즉각적인 대화를 통해서 사태를 해결해 나가기를 촉구한다"며 "민간차원의 순수한 경제활동은 보장되어야 한다. 보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북측의 책임있는 당국자의 약속"을 북측에 요구했다.

민주당 '5.24조치 철회와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간담회' 개최

 

   
▲ 김관영 민주당 수석대변인이 국회 정론관에서 '5.24조치 철회와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간담회'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에 앞서 민주당도 이날 오전 10시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 국제회의실에서 '5.24조치 철회와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모두 발언을 통해 "현재 남북관계는 남북교류협력 제로상태다. 민주정부 10년의 성과가 무너지고 남북관계 악화는 장기화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며 "남북교류협력과 한반도 평화의 토대를 마련한 민주당으로서는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김한길 대표는 "잘못된 대북정책으로 더 이상 남북경제협력 기업들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는 것, 피해에 대한 합당한 지원들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 조속히 개성공단이 정상화되고, 금강산 관광도 재개돼야 한다는 것"이라며 5.24조치 해제를 촉구했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통일부가 왜 이렇게 보이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남북관계 제로시대에 통일부가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면 통일부로서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 아닌가. 남북관계 제로상황일수록 통일부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한편, 5.24조치 발표 3년을 맞아,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5.24조치는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에 단호히 대처하고 그리고 이와 관련돼서 북한의 책임있는 조치를 유도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결자해지 차원에서 북한이 우리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책임 있는 조치, 그리고 또 재발방지책이 있어야 된다"면서 5.24조치 유지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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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 수사자는 '나쁜 남자' 아니다

사바나 수사자는 '나쁜 남자' 아니다

 
조홍섭 2013. 05. 23
조회수 6214추천수 0
 

세렝게티와 달리 크루거 수사자는 암컷 못지않은 사냥 성공률 보여

암컷은 트인 곳서 협동사냥, 수컷은 덤불 속에서 들소, 임팔라 사냥 밝혀져

 

lion2.jpg » 숲과 덤불이 있는 곳에 사는 수사자는 암컷 못지않게 사냥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사자의 사냥은 구보로 시작된다. 멀리서 먹이 동물을 보고 빠른 속도로 접근한 다음에는 집요하게 목표에 다가서는 ‘스토킹’에 접어든다. 눈을 먹이에서 떼지 않은 채 몸은 최대한 낮추고, 마치 아이들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처럼 목표가 이쪽을 바라보면 얼어붙고 고개를 돌리거나 풀을 뜯으면 다가선다. 거리가 20~30m로 좁혀지면 돌진해 단숨에 상대의 목을 물어 제압한다. 가속력은 뛰어나지만 지구력이 부족한 사자의 사냥술이다.
 

사자는 고양이과 대형 포유류 가운데 유일한 사회적 동물이다. 성긴 그물처럼 먹이 떼를 둘러싸 공격하기 때문에 사자 무리가 클수록 사냥 성공률은 높아진다. 얼룩말, 누, 임팔라, 젬스복 등 먹이 동물은 갑작스런 사자의 공격을 받아도 대개 재빨리 달아난다. 하지만 다가오는 사자를 뒤늦게 보고 허둥대거나, 장애물에 부닥치거나 발을 헛디뎌 몸의 균형을 잃는다면, 어리거나 늙거나 병들어 몸이 굼뜬 개체처럼 사자의 밥이 되고 만다.
 

Hunting_lionesses_ngorongoro3.jpg » 사냥의 시작. 성긴 그물처럼 먹이를 둘러싸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선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kenya masaimala_Dinner_time_-_Flickr_-_Lip_Kee.jpg » 몸을 낮춘 채 먹이에 접근하는 스토킹 자세. 사진=립 키, 위키미디어 코먼스

 

Schuyler Shepherd _640px-Serengeti_Lion_Running_saturated.jpg » 먹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암사자. 사진=쉴러 셰퍼드, 위키미디어 코먼스

 

jeffrey sohn_640px-Lions_and_a_Zebra_a.jpg » 사냥한 얼룩말을 먹고 있는 암사자들. 사진=제프리 손,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런 사회적 사냥의 주역은 암컷이다. 수컷은 사냥이 끝난 뒤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힘들여 사냥한 암컷을 쫓아내고 먹이에 먼저 입을 댄다. 물론 표범 등 다른 육식동물의 사냥감을 빼앗기도 하고 아프리카버팔로나 기린 같은 대형 먹이 사냥에 참여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가 탄자니아 세렝게티 국립공원의 대평원에서 촬영한 자연다큐멘터리에서 보는 수컷은 게으르고 욕심 많은 모습이다.
 

그런데 세렝게티 대평원이 아닌 숲과 덤불이 곳곳에 있는 남아프리카의 사바나에 있는 수사자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고 있다. 이곳에서 수사자는 암사자 못지않게 부지런히 사냥하며 성공률도 비슷하다.
 

펀스턴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 대학 동물학자들은 크루거 국립공원에서 광범한 현장 조사를 통해 암사자가 주로 열린 공간에서 중·소형 초식동물인 얼룩말과 누를 주로 사냥하는 데 비해 수사자는 버팔로와 덤불 속에 숨어있는 임팔라를 많이 잡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Joachim Huber _640px-Ngorongoro_Crater,_Tanzania_(2288738372).jpg » 암컷처럼 몸은 민첩하지 않은 수컷은 은폐된 곳에서 사냥을 많이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요아힘 후버, 위키미디어 코먼스

 

스콧 로아리 미국 카네기과학연구소 동물학자 등 미국과 남아공의 연구자들도 최근 사자 7마리의 목에 원격추적장치를 부착한 뒤 이들의 서식지 일대를 광선 레이더(라이다)를 부착한 비행기로 훑으면서 지형과 식생의 3차원 지도를 작성했다. 이를 이용해 사자가 어떤 장소에서 어떤 먹이를 사냥했는지 정밀하게 분석했더니 열린 공간에서 무리지어 사냥하는 암컷과 달리 수사자는 주로 매복을 통해 버팔로 등을 사냥하며 사냥 성공률도 암컷과 비슷했다. 이제까지 숲 속 수사자의 사냥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위험하고 힘들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lion.jpg » 스콧 로아리 등 연구자들의 실험 결과. 빗금 부분은 암컷을 가리킨다. 숫자는 시야 거리(m). 수컷은 쉴 때는 트인 곳을 좋아하지만 사냥은 시야가 짧은 숲속에서 주로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스콧 로아리 외, <동물 행동>

 

사자는 암컷과 수컷이 매우 다른 대표적 동물이다. 수컷의 몸무게가 최고 250㎏로 암컷의 곱절에 가깝다. 게다가 야생의 수사자는 10년 이상 사는 개체가 드물 만큼 짧고 거친 삶을 산다. 버팔로 같은 위험한 먹이를 사냥하는데다 세력권을 놓고 다른 수컷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로 거칠 것 없는 삶을 누리는 것은 무리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는 3~4년 동안일 뿐이다. 그러니 수사자에게 게으르고 탐욕스런 남성우월주의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건 지나쳐 보인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Lion hunting behaviour and vegetation structure in an African savanna
Scott R. Loarie, Craig J. Tambling, Gregory P. Asner

Animal Behaviour
http://dx.doi.org/10.1016/j.anbehav.2013.01.018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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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짓밟은 TV조선·채널A, 단죄할 방법 있다

[게릴라칼럼] 종편 '의무전송' 폐지해야 하는 이유

13.05.23 21:39l최종 업데이트 13.05.23 21:39l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한국방송의 가장 큰 문제는 국가의 자산이자 국민이 주인인 전파가 공공과 공익이라는 공적(公的) 울타리를 벗어나 방송사 또는 방송 종사자의 정치적 기호에 따라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허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국가 안위가 걸린 상황이 닥쳤을 때 현재와 같은 전파관리 체제로는 나라의 기반자체가 뒤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2004년 3월 18일 <조선일보>가 '국민의 전파를 되찾아야 할 때다'란 제목의 사설에서 뜬금없이 강조한 대목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방송의 주인은 국민이며, 공공성과 공익성을 생명으로 해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지만 이어지는 행간 속에 의도하는 바가 숨겨 있었다.

사설은 "만약 방송이 공공성과 공익성의 핵심인 정치적 중립의무를 정면으로 거슬러 특정 정파의 대변인처럼 행세한다면 그 허가의 타당성을 재검토해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전파는 주인인 국민에게 되돌려줘야 마땅한 일"이라며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사들을 직접 거론하며 비판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 탄핵정국을 보도하는 방송사들의 보도행태를 비판한 내용이다.

방송은 공공성과 공익성 전제돼야 한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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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선은 5.18때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출연시켰다.
ⓒ TV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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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정권이 바뀌자 <조선>은 기어이 방송을 소유하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2008년 신설된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통신산업 성장을 촉진한다'는 명목 아래 거센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2009년 미디어 관련법을 여당과 합작하여 뜯어고쳤다.

그 결과 MB정부는 <조선>을 비롯한 국내 과점 보수신문들에게 종합편성채널(종편)을 안겨주었다. 이 바람에 국내 언론시장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돼 황폐화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치고, 전파관리 체제는 더욱 허약한 형세로 치닫고 말았다.

"국가가 주파수를 할당하고 무선국을 허가한 것은 공영이든 민영이든 공공성과 공익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그토록 외쳐대던 <조선>은 방송의 날개를 달고 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가 돌변하고 만다.

계열사인 TV조선은 최근 5.18 민주화운동 33주년을 앞두고 마치 북한의 기획과 작전으로 일으킨 폭동인 것처럼 5.18 민주화운동을 날조하여 방송함으로써 공공성과 공익성과는 전혀 먼 방송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5.18 정신을 폄훼하고 신군부 총칼 앞에 희생된 수많은 영령들과 유가족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겨주었다. 비판이 고조되자 사과를 했지만, 사과보다 검증의 정당성을 강조한 발언을 놓고 여전히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동아일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계열사인 채널A는 5·18 민주화 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탈북자의 발언을 여과 없이 내보내 5.18 민주화운동의 사실과 의미를 왜곡해 공분을 샀다.

오죽했으면 <채널A>기자들이 메인뉴스 사과방송을 요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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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 화면 갈무리 15일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은 1980년 5월 광주에 남파되었다는 전 북한군 특수부대원 김명국(가명)씨의 인터뷰를 방송했다.
ⓒ 채널A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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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일 방송의 날개를 달자마자 <동아일보>는 '미디어 빅뱅, 방송문화 선진화 계기 돼야'란 제목의 사설에서 "동아일보의 종편 사업자 선정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동아방송(DBS)을 31년 만에 회복했다는 의미가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신군부에 의해 피를 흘리며 죽어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인 것처럼 날조하여 방송하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극우세력과 다를 바 없는 궤변

국내 보수신문들과 그들의 종편이 지면과 전파를 통해 내뿜는 후안무치 궤변과 이중적인 행태는 틈만 나면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하려드는 일본의 극우세력 궤변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보수논객 조갑제 조차도 두 종편과 보수 인터넷 사이트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 제기된 '북한군 5·18 광주민주화운동 개입' 주장을 '허위 날조'라고 지적하며 정면 비판할 정도다.

이 모두가 따지고 보면 이명박 정권 출범에 기여한 보수신문들에게 종편을 선물로 안겨준 이명박 전 대통령과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옛 한나라당)의 책임이 크다. 대기업의 지상파 방송이나 보도·종편 진출을 규제하던 것을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빗장을 풀기 시작하더니 결국 법률까지 개정하면서 '조중동'과<매일경제>를 종편 사업자로, <연합뉴스>를 보도전문채널 사업자로 선정해 주었다.

당시 방통대군으로 불렸던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의 위세로 종편은 채널번호까지 시청접근성이 좋은 번호들을 받아냈다. 이명박 정권 출범 과정에서부터 친정부, 친여성향의 보도태도를 수미일관되게 보여 왔던 '조중동'에게 종편을 안겨준 데 대한 특혜논란과 여론의 획일화·독과점 우려는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최근 민주통합당 배재정 의원이 종편의 각종 특혜를 없애는 '방송법' 개정안과 '방송광고판매대행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정안은 종편을 의무재전송에서 제외시키고 직접 광고영업 특혜를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개국한 지 1년이 넘도록 종편은 각종 특혜를 고스란히 누리고 있다. 민영미디어렙의 등장 등 급변한 방송환경으로 어려운 지역방송과 중소방송사들은 차별적 규제로 직·간접적 피해를 보고 있는데 반해 종편들은 광고와 편성 등에서 특혜를 누리고 있다.

지상파 수준의 광고규제와 편성규제의 적용 및 승인 당시 부과된 조건의 이행여부를 방송통신위원회가 점검하고 공개함으로써 재승인시 반드시 이런 문제 지적을 반영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광고와 방송으로서 최소한의 공공성과 공익성을 외면하는 행태가 계속 이어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2014년 3월 예정된 재허가 심사 주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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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조선앞 1인 시위 "5.18 왜곡 보도 사과하라" 민주여성지방의원협의회 소속 한명희 민주당 서울시의회 의원이 22일 오전 서울 중구 <TV조선>(조선일보 종편) 사옥 앞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북한군 개입설을 보도한 종합편성채널 TV조선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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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 1년을 넘은 종편 4사의 평균 시청률은 1% 내외(4월 기준)다. 재방송비율도 4사 평균 50%를 넘기며 콘텐츠 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종편은 이처럼 낮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와 비슷한 광고단가를 요구하는 등 시장의 왜곡을 가져오며 방송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그들에게 더 이상 특혜를 주어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공정성조차 갖추지 못한 이런 채널에 대해 시청자들이 안 볼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종편에게 주어진 채널의무편성의 특혜부터 폐지해야 한다. 방송법 시행령 등 미디어 관련법을 개정하면 가능하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적으로 제창하게 해 달라는 광주시민사회의 들끓는 목소리와 함께 상식 수준을 넘은 5·18 민주화운동의 왜곡이 보수종편과 인터넷 사이트에서 판을 치고 있는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결국, 국회가 나서야 한다. 5·18 단체들이 TV조선과 채널A에 대해 민형사상 소송방침을 밝힌 것과 별도로 언론시민단체들도 2014년 3월로 예정된 재허가 심사에서 두 종편사를 탈락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을 필요가 있다.

종편을 '안 볼 권리'를 위한 법 개정안 통과를 위해 시민들의 힘을 모아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종편채널이 모두가 우려했던 대로 반사회적, 반역사적 흉기로 변해가고 있다"는 시민사회단체의 뼈아픈 지적을 이제라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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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송전탑' 전력난 때문? MB사기극 뒤처리 위해

 


한전의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과 반대 주민의 대립이 계속 깊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전력은 자사 직원을 동원한 밀양 송전탑 공사에서 20일부터는 경찰 500명을 동원한 공사 강행으로 더욱 주민과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송전탑 현장에서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이 한전 직원은 물론이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으며, '알몸 투쟁'이나 '오물 투척'도 나오고 있습니다.

밀양 송전탑에 대한 주민의 반대 시위와 시민 단체, 정치권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밀양 송전탑 공사를 놓고, 공사를 강행해야 한다는 주장과 주민 의견을 수렴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밀양 송전탑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그 이면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지 조사해봤습니다.

' 밀양 송전탑 공사는 전력난 때문?'

밀양 송전탑 공사가 문제가 된 것은 지난 2007년부터 입니다. 정부는 2007년 11월 신고리 원전-북경남변전소 756kV 송전선로 건설사업을 승인했고, 이듬해 2008년 7월 밀양주민들은 송전선로 백지화를 요구하며 첫 궐기대회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밀양 송전탑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2012년 1월 16일 밀양주민 이치우씨가 송전탑 반대를 주장하며 분신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고, 국회에서도 이 문제가 다루어지자, 한전은 2012년 3월에 공사를 중지했다가 다시 공사를 강행했습니다.

한전은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 이유가 심각한 '전력난'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조환익 한전 사장 호소문 중에서>

최근 전력 수급 상황이 정말 어렵습니다. 지난 4월에는 이미 예비 전력이 급속하게 떨어져 전력수급 경보 '준비' 단계를 발령했습니다. 지난 몇 년 간 쉼없이 달려온 발전기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멈춰 섰고 5월에 계획예방정비에 들어가는 원전만 6기에 달합니다. 게다가 다가오는 여름철 전력사용량을 고려한다면 올 12월 신고리 원전 3호기가 계획대로 가동되지 않을 경우 국가 전력수급 상황에 심각한 전력난이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조환익 한전 사장은 밀양 송전탑 공사가 재개되지 않으면 국가 전력 수급 상황에 심각한 우려가 있다고 말하면서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한전 사장의 주장에 맞춰 갑자기 신문들은 전력난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조선일보 5월21일 1면 기사, 출처:조선일보

 


5월 18일 주말에 한전 사장이 호소문을 발표하자 5월 21일 조선일보는 1면에 '전력수급, 이번주 무더위부터 비상체제'라는 기사를 시작으로 '원전 9기 스톱, 5월 무더위, 전력난 6월초 1차 고비'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 마치 밀양 송전탑 공사를 하지 않으면 여름은 물론이고 겨울부터 전력 수급에 차질이 있어 반드시 공사를 강행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더 타당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런 한전과 조선일보의 주장은 거짓에 가까운 협박에 불과합니다. 우선 공사를 당장 재개해도 2014년 1월 말이 넘어야 완공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공사를 한다는 가정하에서나 가능하지만, 결국 공사가 다 끝나도 올겨울 전력 수급과 밀양 송전탑 공사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신월성 2호기는 2012년 11월 이미 시운전을 시작했고, 7~8개월의 시운전 이후에 곧바로 상업운전을 할 예정이다.

 


또한, 오는 10월 100kW규모의 신월성 2호기가 상업운전을 시작하고, 정부도 올해와 내년 전력예비율을 각각 7.4%16%로 전망하고 있어 밀양 송전탑 공사와 무시무시한 '블랙아웃'을 무조건 연관 짓는 일은 무리가 따릅니다.

결국, 당장 밀양 송전탑 공사를 해야 올겨울 전력난이 해소된다는 얘기는 무조건 공사를 강행하려는 한전과 정부, 언론이 만들어낸 '협박성 여론 조성'에 불과합니다.

'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은 사실 UAE 원전 패널티 때문'

정부와 한전의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이 사실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와 맺은 원전 수출 계약 때문이라는 한전 고위 간부의 발언이 나왔습니다.
 

 

▲좌측 UA원전 조감도, 우측 신고리 3호기 원자로 설치 기념 사진, 출처:한국전력

 


변준연 한전 부사장은 5월 23일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신고리 3호기와 연결되는 밀양 송전탑 공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UAE 원전을 수주할 때 신고리 3호기가 참고모델이 됐기 때문에 (밀양 송전탑 문제는) 꼭 해결돼야 한다.2015년까지 (신고리 3호기가) 가동되지 않으면 페널티를 물도록 계약서에 명시돼 있다”

한전은 2009년 UAE와 186억 달러에 원전 4기 수출 계약을 맺었습니다. 당시 UAE에 수출한 모델은 한국이 자체 개발한 가압경수로형 'APR1400' 방식인데, 이것이 바로 신고리 3호기입니다. UAE는 아직 가동되지 않은 신고리 3호기의 성능을 의심쩍어했고, 한전은 신고리 3호기를 준공해 안정적인 모델임을 입증하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결국, 신고리 3호기가 준공 시점을 넘기고도 가동되지 않으면 매달 공사비의 0.25%에 해당하는 지체보상금을 부담하는 조항을 계약서에 명시했기 때문에 신고리 3호기가 완벽하게 가동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밀양 송전탑 공사가 절실히 필요하게 됩니다.

한전 변준연 사장의 말대로라면 그동안 한전과 정부가 주장했던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이 전력난이었다는 말이 모두 거짓이 되는 셈입니다.

' 퇴임하고도 국민을 괴롭히는 MB의 대국민 사기극'

2009년 12월 27일 UAE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현지에서 특별기자회견을 합니다. UAE 아부다비에서 한전 컨소시엄이 원자력 발전 시설 수주 최종 확정자로 결정됐다고 발표했다는 이 소식은 27일, 28일 대한민국 언론을 온통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습니다.
 

 

▲ 2009년 12월 27일 저녁 SBS·KBS·MBC 간판뉴스 보도 캡처

 


KBS,MBC.SBS 저녁 뉴스들은 온통 이명박 대통령의 정상외교가 원전 수주에 막대한 공헌을 했으며, 이는 '현대건설 회장 시절 경험'의 CEO 대통령만이 해낼 수 있었던 업적이라고 모두 그를 칭송했습니다.

여기에 조중동은 더 나아가 'MB, 입술 터진 보람이 있네'라는 기사 등을 통해 마치 원전 수출을 위해 이명박 대통령이 밤잠을 설치면서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노력했다는 드라마와 같은 스토리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원전 계약에 따른 페널티가 밝혀졌듯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원전 수출 업적은 아직도 미심쩍고 다시 조사해봐야 할 필요성이 너무 많습니다.
 

 

 


UAE 원전 수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가격입니다. 프랑스 아레바보다 45% 히타치,GE의 30% 낮은 가격으로 원전 수출을 했다는 사실은 덤핑으로 원전을 팔았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에 사막에 건설하면 당연히 들어가는 건설비 증가부분(모래 방지를 위한 시설, 바닷물 염분 농도에 대한 부품,기기 개량 등)까지 생각한다면 과연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을 어떻게 운영했는지에 대한 의심마저 듭니다.

<프랑스 아레바가 핀란드에 건설 중인 유럽형 경수로의 경우 건설 기간은 3년 반, 건설비는 2배 늘어나, 국제상공회의소에 추가 비용 부담에 대한 중재를 신청하기도 했었다>

1인당 국민소득 5만불인 나라에 2만불 수준의 대한민국이 100억불 자금지원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문제는 물론이고, '60년간의 보증기간'이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파격적인 계약조건을 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UAE 원전 수주는 축하할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한전과 정부는 보증기간은 전혀 근거 없는 얘기라고 주장했지만, 계약서 공개에 대해서는 수주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정확한 이면계약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2009년 12월 원전 수출 이명박 대통령 기자 회견 이후에 보도된 중앙,동아일보 기사

 


2009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UAE 원전 수주 기자회견이 있던 날부터 며칠간 모든 대한민국 언론은 MB 자서전 '신화는 없다'를 재구성한 드라마를 마치 뉴스처럼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1년만에 엄청난 특혜를 내주고 따낸 덤핑 공사에 불과하다는 '이면 계약'임이 밝혀집니다.

미국 블룸버그 등 해외언론은 이런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한국 언론은 몇 달이 지나서야 진실을 조금씩 보도했습니다. 당시 언론과 정부의 'MB업적 칭송'에 열을 올린 결과, 진실은 사라지고 그 뒷감당은 고스란히 대한민국 국민에게 남겨졌습니다.

밀양 송전탑 공사가 무조건 이명박 전 대통령의 UAE 원전 수주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연관된 부분과 단순히 업적을 홍보하기 위해 장기적인 대규모 프로젝트를 단순히 처리했다는 점을 본다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UAE 원전 수출에 따른 이면계약을 최초로 보도한 MBC시사매거진 2580. 출처:MBC

 


모두들 '가카의 업적'으로 추앙받던 일이 사실은 국민이 감내해야 할 막대한 채무로 남았다는 사실을 (한전이 지난해 이자로 낸 돈만 무려 2조3443억원이다) 그 누구도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적 이슈와 정치적 사안을 단순히 보면 찬반의 논리에만 몰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늘 양쪽의 얘기를 들어보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감시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언론을 보면 오히려 정부 홍보 전단에 불과한 모습을 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력난' 때문에 밀양 송전탑 공사를 무조건 강행해야 한다고 주위에서 말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원전 수출 때문에 빚어진 일도 그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각자의 판단이겠지만, 최소한 객관적인 사실만큼은 모두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와 언론이 국민을 협박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강행하는 것이 통하는 세상을 보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너무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멍청한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기는 합니다. 참고로 성인이라면 자기가 저지른 일은 자기가 책임지는 성숙한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전임 대통령부터 몸소 실천하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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