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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3일 이후로 달라지는 북미대결전의 양상

 

 

 

북핵문제, 세계비핵화문제로 되나?
 
<북미대결전>2013년 1월 23일 이후로 달라지는 북미대결전의 양상
 
한성 기자
기사입력: 2013/01/23 [17:56] 최종편집: ⓒ 자주민보
 
 

▲최근 미국 정보당국은 북이 북 전역에 북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KN-08을 배치 이동하고 있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 © 한성 기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지난해 12월 12일 ‘광명성 3호-2기’를 발사한 북에 대해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자 북이 23일 이를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서 북미대결전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해들어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안보리는 22일, 북에 대한 기존 결의 1718/1874호를 확대.강화한 결의 2087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87호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5항과 15항 그리고 19항 등이다. 위성 발사를 주관한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 등 단체 6곳과 백창호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 위성통제센터소장 등 4명을 제재목록에 추가시키고 있는 것이 5항이다. 이로써 북 단체 17곳에 대해 자산동결조치가, 개인 9명에 대해 여행금지 및 자산동결조치가 취해지게 됐다.

15항은 6자회담 재개 그리고 2005년 9월 19일 공동성명을 완전하고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도록 촉구한다는 항목이다.

북의 추가 발사 또는 핵실험이 있을 경우 중대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것이 19항이다.

당초 예상보다 강한 제재 내용으로 평가받을 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북의 반발은 아예, 예상치 못한 수위였다. 신속하기까지했다. 안보리 결의 채택 2시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외무성 성명이 나온 것이다.

외무성 성명은 결의안의 즉각 철회를 요구하고 평화적 위성 발사를 계속하겠다는 것을 밝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반도비핵화의 종말을 천명하기까지 했다. 이어 제재 압박에 물리적 대응조치로 대처하겠다고 선언해 3차핵실험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외무성 성명은 북이 이후 위성발사 그리고 심지어는 핵실험 등 국제사회와 대립을 치고 있는 핵심사안에 대해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한 대강을 윤곽으로나마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외무성 성명에 의하면 북은 이후 위성발사를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가 어떤 제재를 가하든 이에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것을 외무성 성명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북은 위성 발사를 문제 삼는 유엔제재에 대해 자국의 경제발전과 국방력강화를 저해하기 위한 미국의 포악한 적대적 조치라고 규정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는 평화적 위성발사를 안보리가 비법화하는 것과 우주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국제법을 적극적으로 충돌시켜내고 있다. 이는 미국이나 안보리의 부당함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이후 위성발사를 계속해나갈 것을 강조하기 위한 논리인 것으로 보인다.

북이 위성발사를 계속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세삼스러울 수 없는 이유이다. 지난해 4월 위성발사 실패 이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으며 광명성3호-2기가 성공하고 난 뒤에도 그와 관련된 내용의 기사들은 쉬지 않고 내놓았던 것이다.

외무성 성명에 의하면 북은 이후 핵억제력 강화에도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날로 로골화되는 미국의 제재압박책동에 대처하여 핵억제력을 포함한 자위적인 군사력을 질량적으로 확대강화하는 임의의 물리적 대응조치들을 취하게 될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북의 3차핵실험이 이제 단순히 추정의 수준에서 머물러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피해갈 수 없는 현실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껏 그 어떤 정세분석가들이나 군사전문가들치고 북의 3차핵실험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사람은 없다.


북의 3차핵실험이 만약 있게 된다면 그 이후 북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북미대결전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될 지와 관련해서 외무성 성명은 적지 않은 것들을 시사해주고 있다.

외무성 성명은 내용을 보게 되면 그것은 단순히 유엔 제재결의에 맞서는 항의 혹은 반발로서의 성격에서 애초 벗어나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보리 제재 결의를 계기로 삼아 북이 공세적으로 한반도비핵화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천명하고 나선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북 외무성 성명에서 가장 크게 주목되는 것은 북이 한반도비핵화문제에 대해 종말을 선포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외무성 성명은 한반도비핵화문제에 대한 북의 입장을 천명하기 전에 6자회담과 9.19공동성명에 대한 입장부터 먼저 정리해들어가는 수순을 밟았다. 6자회담은 북핵을 둘러싼 북미대결전의 외피였다. 그리고 6자회담의 가장 큰 성과로 평가받아왔던 것이 2005년 9.19공동성명이었다. 그런데 북이 마침내 외무성을 통해 6자회담과 9.19공동성명의 사멸을 선언한 것이다. 그것도 공식선언이다.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문제이다. 이는 북이 1월 23일 외무성 성명을 통한 한반도비핵화문제에 대한 종말을 선포한 것에 대한 완결성을 더 담아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가증되는 대조선적대시정책으로 말미암아 자주권존중과 평등의 원칙에 기초한 6자회담 9.19공동성명은 사멸되고 조선반도비핵화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 선포로 인해 북핵문제라는 이름으로 북과 미국이 20여년 간 정치외교적으로 치열하게 쟁투를 벌여왔던 북미대결전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던 한반도비핵화문제는 마침내 북미대결전에서 전혀 다른 위상을 부여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 다른 위상에 대한 단초의 일단을 외무성 성명은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세계의 비핵화가 실현되기 전에는 조선반도비핵화도 불가능하다는 최종결론을 내리었다고 언급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북의 비핵화문제를 세계비핵화와 연동시켜내겠다는 것을 북이 공식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단연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북핵문제를 핵군축문제로 전환시킬 것을 공식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북핵문제는 이제 바야흐로 한반도비핵화문제에서 세계비핵화문제로 그 위상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위상변화, 이것 역시 북미대결전의 치열한 범주이다. 그 치열함을 우리는 2013년 연초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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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표조작의 마술인가? 역전 불가능과 철저한 닮은꼴 !!!

개표조작의 마술인가? 역전 불가능과 철저한 닮은꼴 !!! [184]

그루터기추억(chf****)

주소복사 조회 4759 13.01.23 06:25

지난 번에 선관위에서, 이번 선거의 개표에 대한. 지역별 1분당 누적 득표수를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자료를 가지고서, 자료의 불일치성에 대한 글들을 올렸었습니다.

 

 

 

자료가 불일치 하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이나 쌍방 모두가, 자료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는 중이라는 소리입니다.

 

또, 자료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가지고 있는 자료가 실제 데이타가 아니라 조작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연스러운 자료일수록, 일반 자연현상에서 나타나는 무질서와 혼돈, 즉 카오스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반면에, 인위적인 자료일수록 어떤 규칙적인 특징이나 뚜렸한 일관성을 지니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작위적이고 조작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선관위에서 공개한 1분당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인위적인 < 조작의 냄새 >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이런 조작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특징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올린 자료는, 전국 자료를 다 검토해 본 것은 아니지만, 모두 동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검토하지 않은 지역들은, 관심이 있으신 네티즌 분들께서는, 직접 검토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만약 네티즌들께서 제가 분석하지 않은 다른 지역의 그래프에서

 

두 후보 사에에 누적득표수가 역전되는 현상을 발견신다면, 꼭 댓글로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가 여러가지 일들로 너무나 바쁜데다가, 시간도 없어서, 전국의 모든 자료를 다 검토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광역시나 도 지역들의 그래프 모습을 보고서, 다른 지역도 동일할 것이라고 유추한 것입니다.

 

 

 

< 먼저 >, 전국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개표 초중반이후로는 거의 역전 현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박근혜가 우세한 지역에서는, 계속 박근혜만 우세할 뿐, 문재인이 역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또한, 문재인이 우세한 지역에서도, 계속 문재인만 우세할 뿐, 박근혜가 역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영호남 지역에서만 그런 것이아니라, 수도권과 경기 강원 충북등 ...

 

전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이와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영남지역에서 박근혜가 시종일관 우세하고, 호남지역에서 문재인이 시종일관 우세한 것은

 

그나마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지역에서도, 두 후보간에 역전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일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역전이 발생할 수 없게끔 득표 수치를 손댔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개표 초반에는, 수치상으로 약간의 역전을 보이는, 극히 일부 지역도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두 후보간에 역전현상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그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 두번째 >, 조작의 냄새는 두 후보 사이의 누적득표수 그래프가 너무나 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SBS에서 발표된, 두 후보의 로지스틱곡선이 닮은 것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이곳 아고라에서 이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각 지역에서는 서로 차이가 많이 나지만

 

이를 합산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두 그래프가 닮은 꼴을 보이는 것이라고 반박했었습니다.

 

 

 

하지만, 선관위에서 공개한 1분당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런 반박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sbs의 로지스틱 곡선의 닮은 점 ... 즉, 전국적인 누적득표수 그래프가, 두 후보사이에 닮은 꼴로 나타난 것은

 

각 지역 시군 단위에서부터, 닮은 꼴이 되도록 세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기초 지역에서부터 닮은 꼴 득표수가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

 

이들을 합산한 광역시와 각 도 단위에서도, 두 후보사이의 그래프는, 철저하게 닮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각 광역자치단체의 득표수를 합산한, 전국의 누적득표수는 완전히 닮은 꼴로 나타나는 것이고

 

나중에는 아예 평행을 그리면서, 누적득표수 그래프가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와 같은 사실들에 대해서, 선관위에서 공개한 1분당 지역별 누적득표수 자료를 이용하여

 

각 시군단위와 광역시 및 도 단위의 그래프를 만들어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각 시군의 그래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붉은색은 문재인 후보의 그래프이고, 파란색은 박근혜 후보의 그래프 입니다. )

 

 

 

(1) 닮은 꼴로 진행되고 있는 그래프들 입니다.

 

 

 

 

 

 

 

 

 

 

 

 

 

 

 

 

 

 

 

 

 

 

 

 

 

 

 

 

 

 

 

 

 

 

 

 

 

 

 

 

 

 

 

 

 

 

 

 

 

 

 

 

 

 

 

 

 

 

 

 

 

 

 

 

 

 

 

 

 

 

 

 

 

 

 

 

 

 

 

 

 

 

지금까지 각 시,군 단위에서 박근혜와 문재인 후보의 누적득표수가 닮은 꼴로 진행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위의 그래프들을 가운데는, 두 그래프 사이가 벌어져서, 안 닮은 것처럼 보이는 그래프들이 더러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서, 이들은 별로 안닮지 않았냐고, 그리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들 그래프들도 역시, 실제로는 모두가 다 닮은 꼴 입니다.

 

제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 지에 대해서,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2 ) 전혀 닮지 않게 보이는 그래프들 사이의 닮은 꼴

 

 

 

영호남 지역의 경우에는, 어느 한 후보가 자신이 유리한 지역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기 때문에

 

두 후보의 그래프를 함께 그려보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를 보고, 아~ 이 지역에서는 두 후보의 득표모습이 전혀 닮지 않았네 ... 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역에서도, 득표수가 상대적으로 매우 저조한 후보의 그래프를, 별도로 따로 그려보면

 

정말 놀랍게도, 두 후보의 그래프 모습이 아주 닮은 꼴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할 뿐입니다.

 

 

 

즉, 영남지역에서는 문재인 후보의 그래프를 별도로 그리고

 

또, 호남지역에서는 박근혜 후보의 그래프를 별도로 그려서, 두 후보의 그래프를 모두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두 후보의 그래프를 살펴본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우측에 그려진 그래프는, 좌측 그래프에서 득표수가 매우 낮은 후보의 그래프를, 단독으로 그려 본 것입니다.

 

 

 

( 그래프의 색깔로 인해서 혼동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

 

 

 

 

 

 

 

 

 

 

 

 

 

 

 

 

 

 

 

 

 

 

 

 

 

 

 

 

 

 

 

 

 

 

 

 

 

 

 

이상으로 두 후보가, 상대적으로 우열이 분명한 지역에서, 득표한 모습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후보의 그래프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수치상으로는 거의 동일한 패턴으로 득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실제 현실이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 3 )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역의 그래프들

 

 

 

이제 세번째로는, 아예 대놓고 두 후보의 그래프를 거의 일치하게끔 만들어 놓은 지역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들 지역은, 진짜 박빙의 지역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한 것 같습니다.

 

 

 

이들 지역의 그래프에서, 두 후보의 사이의 차이가 매우 미미함을, 아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이들 지역의 그래프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살펴보신 것처럼, 이들 지역에서 두 후보의 그래프는, 거의 일치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시 군 단위에서부터 두 후보가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패턴으로 움직이도록

 

득표수를 미리 조작해 놓았기 때문에, 그런 와중에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시 군 단위에서부터, 두 부보사이에 서로 다른 패턴을 전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 자료를 취합한 광역시와 도 단위에서도, 두 후보의 누적득표수 그래프는 전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들 두 후보의 득표수가 전체 득표수의 99%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 누적득표수 그래프도, 두 후보 각각의 누적득표수 그래프와, 동일한 패턴을 보이게 됩니다.

 

 

 

시군 단위에서부터 수치조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광역시와 도 단위에서도 역시

 

당연히 조작된 수치들의 합계로 만들어진 그래프가, 아주 일률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각 광역시와 도 단위의 자료를 가지고서, 각 도와 광역시에 대하여

 

광역지역 전체 득표수 그래프와, 박근혜, 문재인 후보 각각의 득표수 그래프를, 모두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모든 광역지역의 그래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각 광역지역별로 너무나도 동일한 패턴으로 그래프가 그려지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런 패턴은, 박근혜나 문재인 어느 한 후보의 수치만 알면

 

나머지 다른 후보의 수치는 자동적으로 알 수 있게 되는 구조입니다. 왜냐하면 그 패턴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각 시 군에서부터, 두 후보의 득표수는, 아주 닮은꼴로 조작되어진 수치였고

 

 

 

이들 수치를 취합한 광역지역의 득표수 역시

 

두 후보의 그래프와 득표수 전체 그래프를, 이처럼 꼭 닮은 꼴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광역지역의 득표수들을 모두 다 취합한 것이, 전국의 누적득표수가 되는 것이므로

 

전국 그래프 역시, 당연히 닮은 꼴로, 또 아주 평행한 모습으로,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면서, 그토록 이상하고 신기하게 생각했었던

 

SBS에서 발표한, 두 후보의 로지스틱 곡선인 것입니다.

 

 

 

이제 위의 광역시와 도지역의 득표수들을 모두 합산한, 두 후보의 전국 그래프를 그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SBS에서 발표된 것과 동일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그래프 입니다.

 

 

 

 

 

 

 

 

 

 

이상으로 왜, 이런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누적 득표수 그래프가 공개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시 군 단위에서부터, 득표수에 대한 조작 즉, 개표조작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 군 단위의 득표수 조작은, 먼저 로지스틱함수를 이용하여, 전국의 득표수를 추정해 놓은 다음에

 

이를 각 광역 지역별로 배분하고, 또 광역지역에서 시군단위로 배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역지역으로 배분할 때는, 지난 번 글에서 올렸던 것처럼

 

경북지역이 최종 마무리를 감당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다른 지역과는 달리, 경북지역은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득표수가 치솟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전국의 추정된 득표수를 각 지역으로 배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지역오차를

 

경북지역에 마지막 순간에 다 몰아 넣었기 때문에, 그런 모양의 그래프가 발생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 올려 놓은 그래프들을 보면서도, 이런 모든 시, 군과, 광역시 및 도와, 전국지역 그래프가

 

그래도 여전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그런 분들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아니~ 그래프들이 어떻게 저렇게 될 수 있지??

 

하고, 반문을 해 보아야만 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관위는 아마도 처음에는 이런 이상한 자료를, 전혀 공개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료를 처음부터 공개하지 않은 것이거나

 

 

 

아니면 나중에 최종 득표수 자료만을 가지고, 이 자료를 추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공개된 이 자료는, 여러가지로 신뢰하기 힘든 매우 이상한 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선관위는, 이 자료를 공개하더라도, 설마 국민들이 눈치를 챌까?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공개된 자료라는 아주 분명한 fact에 대해 분석한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모든 모습들이, 이미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선관위에서는, 이런 역전이 전혀 없고, 모두가 닮은 꼴인 모습들까지도

 

다른 모든 선거에서도 다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주장할는지 또 지켜보겠습니다.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모든 의혹들을, 단 한 번에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면적인 수개표를 통해서, 개표한 모든 표들을, 일일이 다 점검하고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전면적인 수개표 방법에 의해서 확인한 모든 표들이

 

선관위에서 공개한 모든 자료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제가 그동안 아고라에 올렸던 모든 글들을 자진 삭제하고, 앞으로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모든 네티즌들과 또 저의 글을 읽었던 모든 국민들에게

 

분명한 사과문을 이곳 아고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실은 항상 하나이며, 언제나 같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거짓의 승리는 잠깐이며,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오직 진실 뿐입니다.

 

 

 

이런 진실들이 우리 대한민국 땅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하루속히 목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곳 아고라 이슈청원 란에 올려놓은 청원 건이 있습니다.

 

아직 이 청원에 서명하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번거러우시더라도 한 번 찾아가셔서, 서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향후, 모든 선거의 100% 전면 수개표를 위한, 국회입법 청원건 >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petition/read?bbsId=P001&articleId=132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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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 바로잡아야 할 때는 바로 지금

[경남도민일보] 바로잡아야 할 때는 바로 지금
(경남도민일보 / 주중식농사꾼 / 2013-01-23)


 

2012년 12월 19일 화요일, 개표가 시작되고 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한국방송 텔레비전에서 박근혜 후보 당선 유력이라는 화면을 띄우더니 한 시간쯤 뒤에는 당선 확실이라는 화면을 띄운다. 표 계산이 틀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인터넷 신문에서 소식을 찾아 읽고,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라온 이웃들 마음을 읽어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를 옮겨놓는다.

'얘네들은 초반부터 심리전으로 밀어붙이더니 결국 확정도 아닌데 대세로 만들어버리는 조직력을 보여주는구나. 부정선거의 역사가 이번에만 비껴갔을 거라 생각지 않는다. 부정을 찾아낼 수도 알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5년 후에도 똑같겠다.'

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지난밤에는 끙끙 앓았다. 눈 치우느라 힘 좀 썼더니 이제야 가벼운 몸살이 왔다. 그날 함께 눈 치운 분들 가운데는 침 맞으러 다니는 분도 있다는 말이 들린다.

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보내온 쪽글도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목을 보고 열어보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는데, 어느 쪽글 하나를 열었더니 전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냈던 분이 이번 선거는 부정선거라고 하면서 그 증거 몇 가지를 들어 이야기하는 동영상이 나왔다. 나는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연결하여 이웃에게 알렸다.

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다음 카페 '선거소송인단 모임' 회원으로 들었다. 거기서 알리는 말을 읽어보고, 전자개표 관련 부정 사례를 다룬 유튜브 동영상을 여럿 찾아보았다.

선거소송인단 참가 신청서를 만들어서 보냈다. 소송에 드는 돈도 조금 보내기로 하였다.

2013년 1월 4일 금요일, 선거소송인단이 오후 2시에 대법원으로 가서 이번 대통령 선거가 적법 절차를 따르지 않은 부정 선거였다며 '제18대 대통령 선거 무효 소송'을 냈다. 이 과정을 인터넷 텔레비전으로 중계방송하는 것을 보면서 한마음으로 응원하였다. 몹시 추운 날씨에도 100여 명이 모인 것 같고, 그 가운데는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달려와 눈물을 글썽이는 아주머니도 있다. 수염이 허연 노인 한 분도 일찍부터 나와서 그 자리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모습이 비쳤다. 보기 좋았다.

앞장서시는 한영수, 김필원 두 분을 하느님께서 잘 보살펴주시기를 빈다.

2013년 1월 5일 토요일, 민족문제연구소에 신청한 디브이디 <백년 전쟁>을 받았다. 근대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동영상이다. 인터넷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어서 본 사람이 아주 많다고 한다.

2013년 1월 11일 금요일, 헨리 데이비드 소로 책 <숲속의 생활(월든)> <시민 불복종>을 읽은 지 아마 35년은 된 것 같다. 소로가 쓴 다른 책을 있는 대로 다 찾아내어 주문하였다. 절판인 것은 헌책 가운데서 찾아내기도 했다. 그래도 두어 권은 찾지 못하였다. 영문 <월든>도 한 권 주문했다.

2013년 1월 17일 목요일, 인터넷 검색창에서 '개표 부정'을 찾아 뉴스 최신순으로 보니, 셀 수 없이 많이 올라와 있다. 중앙선관위가 국회에서 투표지분류기 한 대를 돌려 개표를 다시 해 보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부정 선거를 묻을 수 있는 일인가? '독일에선 개표가 어떻게 이루어질까?'(http://blog.daum.net/meinstern/219)를 찾아보니, 하나하나 손으로 세어도 바르고 빠르게 개표하는 방법이 있다. 제대로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금방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내별'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einstern/219

 

 

 

 

 

 

 

 

 

 

 

 

한쪽에서는 다 지나간 일이니, 이제 부정선거 시비 가리는 일은 그만 접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다. 의혹은 밝혀야 하고, 잘못은 찾아내어 고쳐야 한다. 선거는 앞으로 또 다가올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드러났을 때 고칠 것은 즉시 고쳐서 바로잡아야지, 그때 가서 하려면 또 못하고 만다. 투표한 그 자리에서 손으로 개표하도록 바로잡아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출처 :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02913

주중식 농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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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 등 78명 죽었는데 "억울하면 소송해!"

[현장]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피눈물 "박근혜가 나서라"

남빛나라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1-22 오후 4:43:11

 

"2011년 1월에 집사람과 뱃속 아이모두 잃었다. 남은 아들도 간질성 폐렴 때문에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한다. 2011년 여름텔레비전 방송을 보고서야 2010년 겨울부터 사용한 가습기 살균기문제라는 사실을 알았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 정부는 어떠한 결과도 대책도 없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 안성우 씨)

햇수로 3년째에 접어들고 있지만 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피해자들이 입을 열었다. 이들은 "박근혜 당선인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피해 대책을 마련하고 무고한 시민을 죽음으로 내몬 살인 기업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관련 기사 : 사람 잡는 폐 질환, 당신의 가습기를 의심하라!, 사람 공격한 가습기…당신 폐가 위험하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가습기살균제피해자시민모임은 22일 오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있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 금융연수원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78명의 사망자, 147명의 폐질 환자(2012년 10월 8일 기준, 환경보건시민센터 집계)가 발생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정부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피해자들이 가습기 살균제 사망 관련 피해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이들은 "갓난아기 등 세 살 미만의 영·유아 36명을 포함한 78명이나 되는 사망자가 나오고 폐 질환자가 발생해 보건복지부의 질병관리본부가 나서 상황을 파악하고 역학 조사를 했다"며 "그러나 정작 책임 부서인 지식경제부와 환경부는 나 몰라라 뒷짐 지고 물러서서 구경만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여러 부처가 관계된 일이어서 총리실이 테스크포스(TF)팀을 꾸려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담당 부처가 모인 적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며 "피해 대책 마련 및 유사 사건 발생 예방 등의 조치를 당연히 취할 것으로 기대했던 피해자는 물론 많은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 사건은 환경부, 보건복지부, 지식경제부가 각각의 책임을 분담해야 하지만 부처 간 책임을 미루기에만 급급한 모양새다. 이들은 "독성 물질을 관리하는 게 환경부 소관이고, 이런 물질의 판매를 허용한 것은 지식경제부다. 또 질병 발생에 따른 정부 차원의 해결책 마련은 보건복지부의 몫 아니냐"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피해자들은 해당 제품을 판매한 기업의 사과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기업은 제품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버티기를 하고 있다. 이들은 "문제의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판 기업 중 한 곳은 적반하장격으로 '질병관리본부의 역학 조사가 잘못됐다'고 주장하며 법적 소송을 위해 대형 로펌 '김&장'을 앞세운 상태"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들은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환경안정청을 설치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각종 화학 물질의 사용이 불가피하다면 안전이 담보되어야 한다"며 "환경피해보상법과 같은 법률을 제정해 화학 물질로 인한 피해를 신속하게 구제·보상하는 사후 관리 대책이 보완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발언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박근혜 당선인과의 만남을 요구했다. 이들은 "차기 대통령으로서 박근혜 당선인이 어처구니없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희생된 사망자들의 유족과 환자들을 만나 아픔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냐"고 밝혔다.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성은 지난 2011년부터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습기 살균제가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이며 질병관리본부의 조사 연구를 보면 국민의 18.2퍼센트(874만 명)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드러나 실제 피해 규모는 짐작하기 어렵다.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활동 중인 임흥규 씨는 "질병관리본부에 접수된 사례까지 포함하면 현재 피해 사례는 347건이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는 피해 소송을 개별적으로 진행하라는 식이고 사측은 소송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앞으로 질병관리본부의 조사위원회 활동에 매진할 예정"이라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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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에 얻은 귀한 딸, 인질로 잡혀갈 줄이야

[사극이 못다 한 역사 이야기 1편] 제국의 마지막 옹주, 덕혜

13.01.22 20:18l최종 업데이트 13.01.22 21:35l

 

 

일본에 끌려갈 당시인 열네 살 때의 덕혜옹주. 사진 출처: <덕혜옹주 그의 애환과 복식>.
ⓒ 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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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복궁 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있다. 그곳에서 열리는 '덕혜옹주 특별전'이 오는 27일 끝난다. 지난달 11일 시작된 이 특별전에서는 옹주의 탯줄을 담은 태항아리에서부터 어린 시절의 옷과 신발,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일본에 있었던 유물들이 일본 측의 협조로 한국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덕혜옹주는 대한제국이 망한 지 2년 뒤인 1912년에 덕수궁에서 고종과 양귀인(귀인 양씨)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고종은 예순한 살이었다. '환갑에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를 빼닮는다'는 속설처럼 덕혜는 아버지와 흡사한 외모를 갖고 태어났다. 둥근 얼굴, 시원한 이마, 쌍꺼풀, 오뚝한 코 등등.

기쁨을 감추지 못한 고종은 덕혜의 출생을 기념하는 행사를 여러 차례 성대하게 열었다. 후궁의 딸을 이렇게까지 환대한 전례는 없었다. 그만큼 덕혜를 끔찍이 위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문에서도 덕혜의 동정을 흥미롭게 보도하곤 했다. 덕혜는 일종의 '국민옹주'였다.

환갑에 얻은 귀한 딸, 유모도 앉은 자리서 젖 물리게 해

고종이 덕혜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는 유모를 대한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루는 고종이 덕혜의 방에 불쑥 들어왔다. 덕혜에게 젖을 먹이던 유모 변복동이 깜짝 놀라 일어나려 하자, 고종은 "아이가 깨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라면서 "그대로 있거라"라고 말했다. 유모가 그냥 앉은 채로 자신을 맞이하도록 한 것이다.

고종은 덕혜의 교육에도 신경을 썼다. 덕수궁 즉조당에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어줄 정도였다. 이 유치원에는 덕혜를 포함해서 귀족 집안의 아이들이 입학했다. 어린 덕혜는 덕수궁 안에서 부모만 바라보며 마냥 즐겁게 살았다. 궁 밖에는 망국의 분위기가 만연했지만, 덕혜는 그런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의 장래 희망은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덕혜를 위한 유치원이 있었던 장소인 덕수궁 즉조당.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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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가 다섯 살 때인 1916년에 이복오빠인 영친왕 이은이 일본 왕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훗날 이방자로 개명)와 약혼했다. 일본과 이완용이 이 약혼을 추진한 것은 왕족을 일본인의 곁에 둠으로써 조선 왕실의 혈통을 끊기 위해서였다. 이은과 이방자는 4년 뒤에 결혼했다.

이은의 약혼으로 충격을 받은 고종은 덕혜도 동일한 운명에 처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래서 그는 시종인 김황진의 조카에게 덕혜를 시집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계획이 탄로 나서 김황진의 덕수궁 출입은 금지되고 덕혜의 결혼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때 품은 고종의 우려는 그가 죽은 뒤에 현실이 되고 만다.

고종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덕혜의 운명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고종은 1919년에 여덟 살짜리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발생한 3·1운동 시기에 덕혜는 아버지를 잃었던 것이다. 그 뒤 덕혜는 어머니와 함께 덕수궁을 나와 창덕궁 관물헌에 살다가 열네 살 때인 1925년에 어머니와도 헤어져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덕혜옹주... "얼굴에는 애수와 절망감이 깃들어"

명목상으로는 일본 유학을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인질로 끌려간 것이다. 일본은 왕족을 떼어놓음으로써 그들이 조선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아버지와 사별한 덕혜는 이로써 어머니와 생이별하게 됐다. 도쿄에 도착한 덕혜의 막막한 모습이 올케인 이방자의 저서 <지나온 세월>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이방자는 서울에서 덕혜를 만난 적이 있었다.

"굉장히 성장했지만, 얼굴에는 애수와 절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하고 영롱했던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작년 11월 3일 서울문화재단의 주최로 덕수궁 함녕전 앞에서 열린 덕혜옹주 연극.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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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는 일본 귀족 소녀들의 학교인 여자학습원에 다녔다. 하지만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세라복을 입은 그는 항상 우울하고 쓸쓸한 표정이었다. 반 친구들이 말을 걸어도 그냥 "하이, 하이"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하루는 소마 유키카란 친구가 덕혜에게 시비를 걸어 보았다. 소마가 지은 <마음에 놓은 다리>란 책에 따르면, 소마는 "내가 너의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을 할 텐데, 너는 왜 안 하니?"라고 물어봤다. 상처를 받을 만한 말인데도 덕혜는 말이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상처를 받았겠지만, 대꾸할 기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덕혜는 멍한 표정으로 학교생활을 했다.

덕혜는 사실상의 인질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다. 그는 열다섯 살 때인 1926년에 오빠인 순종 황제가 위독해지자, 일본의 허가를 받아 한국에 와서 오빠를 간호했다.

하지만 오빠는 곧 죽고 말았다. 이때 일본은 덕혜의 장례식 참석을 불허했다. 분노한 한국인들이 덕혜를 중심으로 뭉칠까봐 염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덕혜는 장례식도 못 보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순종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인들이 6·10만세운동을 일으킬 당시, 덕혜는 쓰라린 마음을 누르며 일본 집에서 슬픔을 달래야 했던 것이다.

열여덟 살 때인 1929년에 덕혜는 어머니 양귀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그런데 일본은 덕혜가 상복을 입지 못하도록 했다. 덕혜는 조선 왕족으로 인정했지만 양귀인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덕혜는 상복도 입지 못한 채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다. 문상객의 자격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것이다.

스무 살 된 덕혜에게 일본은 또 다른 불행을 강요했다. 네 살 연상의 대마도 도주인 종무지(소 다케유키)와의 정략결혼을 명령한 것이다. 조선 왕족을 조선인들로부터 확실히 떼어놓을 목적이었던 것이다.

1931년에 거행된 이 결혼으로 덕혜는 이덕혜에서 종덕혜가 되었다. 부인이 남편의 성씨를 따르도록 한 일본 법률 때문이었다. 그 뒤 덕혜의 성씨는 한 번 더 바뀐다. 이 점은 뒤에서 설명한다.

정략 결혼한 덕혜옹주, 우울증과 불면증의 시작

결혼을 전후한 시점부터 덕혜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 구체적인 병명은 조발성 치매증 즉 정신분열증이었고, 덕혜는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고종·순종·양귀인의 잇따른 죽음이 상처가 됐겠지만, 단지 그런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례식은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을 위한 의식이다. 장례식을 통해 산 자는 슬픔을 치유한다. 그런데 덕혜는 일본의 방해 때문에 슬픔을 제대로 치유할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오빠의 장례식 때는 참석조차 못했고, 어머니의 장례식 때는 상복을 입지 못했다. 마음에 한이 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정신분열증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덕혜옹주와 종무지의 결혼을 축하하는 기념비. 대마도 이즈하라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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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의 결혼은 행복할 리가 없었다. 정략결혼 자체도 불행한데, 거기다가 정신분열증까지 겹쳤으니 말이다. 종무지가 지은 시에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란 대목이 나온다. 집안에 멍 하니 앉아 있는 덕혜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덕혜는 스물한 살 때인 1932년에 딸 정혜를 낳았다.

덕혜의 결혼생활은 처음 15년간은 그럭저럭 유지됐다. 이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두 부부에게 돈이 많았기 때문에, 가사 도우미들이 덕혜를 보살폈다. 그래서 남편은 성가실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덕혜가 서른네 살 때인 1945년에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정은 덕혜 부부를 포함한 귀족들의 신분을 박탈하고 재산헌납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이 부부는 평민으로 전락하고 재산도 대부분 헌납했다.

이 때문에 도우미를 쓸 수 없게 되자, 종무지는 덕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버렸다. 덕혜를 간호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서 아예 방치해버린 것이다. 덕혜는 자신이 정신병원에 갇힌 줄도 모르고 그저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이때 덕혜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덕혜는 마흔 살 때인 1951년에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 무국적 상태가 된 것이다. 덕혜를 보호해줄 법적 장치가 사라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불행이 닥쳤다. 1955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서 종무지가 아무것도 모르는 덕혜를 상대로 이혼절차를 진행한 것이다. 물론 오빠 부부와의 협의는 거쳤다. 이혼 뒤에 종무지는 새장가를 들었다.

이혼과 함께 덕혜는 종덕혜에서 양덕혜가 되었다. 원래는 이덕혜로 돌아가야 했지만, 친정인 이씨 집안에서 이혼녀라는 이유로 거부했기 때문인지 덕혜는 이씨 성을 못 쓰고 어머니 성을 쓰게 되었다. 물론 덕혜 본인은 이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이 당한 비극의 상징 덕혜옹주
불행은 끝이 아니었다. 덕혜가 마흔다섯 때인 1956년에 딸 정혜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눈 덮인 설산에 올랐던 것이다. 산에 오른 뒤 하늘에 오르는 것이 이 등산의 목적이었다. 정혜는 그렇게 세상과 이별했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덕혜는 정신병원에서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창덕궁 낙선재 구역.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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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덕혜의 불행이 가중되고 있을 때, 대통령 이승만은 조선 왕실이 자신의 위상을 침해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영친왕과 덕혜의 귀국을 불허했다. 결국 덕혜는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인 1962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온 덕혜는 승용차를 타고 덕수궁 앞을 지나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다. 자기 집이었던 덕수궁 정문을 지나는데도 덕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귀국했던 것이다.

덕혜는 서울대병원에서 요양했다. 한동안은 건강이 호전되는 듯했다. "정혜야! 정혜야!" 하고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얘가 어디 갔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그는 "아리랑~ 아리랑" 하며 혼자서 흥얼거리기도 했다.

덕혜의 기억에 존재하는 것은 정혜와 아리랑, 그리고 10대까지의의 추억뿐이었을 것이다. 부모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만 선명할 뿐, 그 외의 것들은 거의 다 흐릿하거나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대병원에서 나온 덕혜는 창덕궁 낙선재 구역의 수강재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서울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에 눈을 감았다. 향년 78세였다. 한편, 전 남편 종무지는 새 부인과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낳고, 문학 활동을 즐기며 마음 편하게 살다가 덕혜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멀쩡했던 덕혜를 정신질환자로 만들어서 돌려보낸 일제의 만행. 그 만행의 피해자는 비단 덕혜옹주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 모두가 그런 만행의 피해자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옹주로 태어나 망국의 한을 고스란히 안고 살다 간 덕혜옹주는 우리 민족이 당한 비극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27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덕혜옹주 특별전에 가본다면, 덕혜옹주를 포함해서 우리 민족 전체가 겪은 근대사의 비극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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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흡 청문회와 ‘한 방’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1/23 04:42
  • 수정일
    2013/01/23 04:4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이동흡 청문회와 ‘한 방’
 
[정운현 칼럼] 새누리 “‘결정적 한 방’ 없다”... 대체 얼마나 큰 흠결 나와야?
 
정운현 기자 | 등록:2013-01-22 20:15:52 | 최종:2013-01-22 22:20:2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동흡 후보자
“‘결정적 한 방’이 없다”

 

이동흡 헌재 소장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나온 새누리당 사람들의 얘기다. 말하자면 이 후보자를 낙마시킬 비장의 무기, 즉 결정적인 흠결이 없다는 얘기인 셈이다. 현직 대통령이 지명한 사람을 집권여당이 감싸는 건 더러 있어온 일이라고 쳐도 이건 도저히 말이 안된다. 대체 얼마나 큰 흠결이 있어야 ‘한 방’이라고 할 것인가?

청문위원인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지난 18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언론에서 ‘결정적 한 방’을 말씀하시는데 꼭 감옥 가야 될 일이 있어야 되는 건 아니잖나. 감옥갈 일이 없으면 아무나 소장해도 되는 건가”라고 반문한 바 있다. 오죽하면 헌법기관의 수장 자격을 범죄자와 빗댈 상황이 됐겠는가.

‘인사청문회’ 제도는 제16대 국회 때인 지난 2000년 6월 인사청문회법 제정을 계기로 마련됐다. 이는 대통령이 행정부 고위 공직자 임명 시 국회의 검증을 받도록 하는 제도로 국회가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인사 청문회의 대상인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감사원장, 대법관은 반드시 국회의 임명 동의를 거쳐야 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로 장상 전 이대 총장이 지명됐을 때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을 부결시켰다. 장 후보자는 아들의 미국 국적 취득 문제, 부동산 투기 및 위장전입 등이 문제가 됐다. 뒤이어 장대환(매일경제 회장) 총리 후보자 역시 위장전입 및 부동산 의혹 등으로 국회에서 임명동의안이 부결됐다.

청문회법, 16대 국회 제정...대통령 견제 취지

참여정부 시절엔 정치적인 이유로 임명동의가 무산된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있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원장 후보로 지명된 윤성식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이렇다 할 흠결도 없었음에도 보수진영의 반대로 임명이 무산됐다. 국민대 교수 출신의 김병준 부총리 후보는 논문표절 의혹 등으로 임명된 지 13일만에 사퇴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가히 극치를 이뤘다. 여성부장관 후보 이춘호 씨는 부동산 투기의혹, 통일부장관 후보 남주홍 씨는 자녀 이중국적 문제, 환경부장관 후보 박은경 씨는 부동산 투기의혹 등으로 인사청문 요청이 철회됐다. 또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는 스폰서 의혹 등으로,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 역시 스폰서 의혹과 박연차 게이트 뇌물수수 의혹으로 낙마했다.

이밖에 신재민 문화부장관 후보, 이재훈 지경부장관 후보도 투기의혹 등으로 청문회 후 사퇴했다. 지난해 7월엔 김병화 대법관 후보자가 위장전입과 세금 탈루, 아들의 병역 편의 등이 문제가 돼 결국 자진사퇴했다. 이들은 기본이 소위 ‘2관왕’ ‘3관왕’이었는데, 청문회를 마치고도 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동흡 후보는 어떨까? 21일자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그간 이 후보자를 두고 제기된 문제점은 개인 비위 17건, 의혹 14건 등 무려 31건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분야의 신기록을 수립한 셈이다. 위장전입, 증여세 탈루, 공금 횡령 의혹 등을 비롯해 자녀들까지도 거론됐다. 그야말로 총체적·입체적 비리-의혹투성이인 셈이다.

어제 청문회에서 논란이 됐던 ‘특정업무경비’의 사적 유용을 두고 헌재 사무관은 청문회에서 ‘위법’이라고 증언했다. 이 후보자의 헌법재판관 재임 당시 2년간 경리 담당을 맡은 김혜영 헌법재판소 법원사무관은 22일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특정업무경비를 개인 계좌에 입금한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지 않느냐”는 민주당 박범계 의원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강기정 인사청문 위원장이 “특정업무 경비 30만원 이상은 현금으로 지급할 수 없도록 돼 있는데 이 후보자에게 매달 400~500만원씩 주고 영수증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법 위반이 아니냐”고 추궁하자 김 사무관은 “위반인 것을 알면서 했다”며 이 후보자 요구 때문에 불법인 줄 알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시인했다.

헌재 사무관, "특정업무경비 개인계좌 입금, 잘못됐다"

‘반드시 낙마시키겠다’고 벼르고 있는 야당 의원들은 21일 인사청문회에서 이 후보자에 대해 파상 공세를 폈다. 이에 대해 이 후보자는 근거자료를 통한 해명보다는 ‘남탓’ ‘관례’를 들며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평이다. 특히 야당 의원들은 이 후보자의 특정업무경비 유용 의혹 등을 지적하면서 ‘생계형 권력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최근 법원노조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9%가 이 후보자에 대해 반대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를 두고 김도읍 새누리당 의원이 법원의 부정적 여론을 지적하자 “저는 주위 분들하고 잘 지내지만 ‘바른 것은 바르다’고 말하는 원칙주의자였다. 일부 반대하는 분들은 저와 직접 관계를 맺은 분들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오히려 법원 직원들 탓을 하기도 했다.

이런 얘기도 있다. 최근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 후보자가 낙마할 경우 당분간 헌재소장 자리가 공백이 불가피한 데 헌재의 한 관계자는 “‘그 사람’은 안 된다는 분위기가 워낙 강해 취임하면 헌재소장 공백보다 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다”고 우려를 표명했다고 한다. 심지어 헌재 사상 초유의 ‘소장 취임 반대 연판장’ 사태로 번질 공산도 있다고 한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은 ‘결정적 한 방’이 없다며 이 후보자를 감싸고 있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인격살인” “도살장” 운운하며 야당을 비난했다. 이 후보자에 대한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야당의 정치공세로 치부하며 ‘이동흡 감싸기’에 나선 이 원내대표야말로 목불인견이다. 두 사람은 경북고 선후배 사이로 이 원내대표가 ‘후배 봐주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은혜 민주당 부대변인은 22일 논평을 통해 “청문회가 진행될수록 이동흡 후보자의 잘못된 가족사랑은 존경받아야 할 헌재소장의 지위를 조롱거리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밝히고는 “가족 사랑밖에 모르는 이동흡 후보자가 갈 곳은 가정뿐”이라며 자진사퇴를 촉구했다. 말이 ‘잘못된 가족사랑’이지 이보다 더한 모욕도 없지 싶다.

비록 청문회를 통과해 헌재 소장이 된다한들 이 후보자가 얻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과도한 권력욕을 부린 나머지 그는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명예마저도 통째로 잃어버렸다고 본다. 이 판국에 그나마 남은 한 가닥의 명예를 지키고자 한다면 그건 이제라도 물러나는 길일 것이다. 그에게 이런 얘기를 들을 귀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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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지가 남긴 지워지지 않는 흉터

미군 기지가 남긴 지워지지 않는 흉터

 
김동규 2013. 01. 21
조회수 89추천수 0
 

미군이 유발한 환경오염 피해에 시달리는 필리핀
 

 

영화 <괴물>은 미군이 무단으로 버린 독성 화학물질로 인해 돌연변이 괴물이 된 물고기가 주인공이다. 봉준호 감독은 2006년 7월 영화개봉 당시 한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의 배경에 대해 “2000년에 벌어진 맥팔랜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혔다. 맥팔랜드 사건은 2000년 7월 13일 환경보호단체 녹색연합이 “2000년 2월 9일 미군이 용산 미군부대 영안실에서 시체를 방부 처리하는 데 쓰는 포름알데히드 수용액 20상자를 한강으로 방류했다”고 폭로하면서 알려졌다. 당시 영안실의 부책임자였던 미국인 맥팔랜드는 한국인 군무원에게 막말까지 하며 방류를 지시했다고 한다. 이 군무원이 세 달 뒤 상부에 방류 사실을 보고했을 때 미군 측은 “물에 희석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포름알데히드는 성인 남자가 7그램 정도만 섭취해도 목숨이 위태로운 독극물이다. 이를 동맹국 수도의 강물에 대량으로 방류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미군의 환경의식으로 인해 한반도 곳곳은 오염으로 신음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주한미군기지에서 발생한 환경오염사고는 총 47건이고 그중 29건은 기름유출이다. 미군이 사용하는 지하유류탱크가 낡은 것이 주요 원인으로 용산과 군산 기지는 2회 이상 기름유출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심각한 오염이 발생해도 국내법이 적용되지 않는 미군에 적극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주둔군지위협정(SOFA)에도 오염원인 제공자에 대한 명확한 책임 규정이 없다. 같은 기지에서 사고가 재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군기지가 위치한 지역 곳곳은 환경오염에 시달리고 있고 주민들의 저항도 끊이질 않는다. 지난 9월 평택시가 수행한 환경오염 조사에 따르면 평택 미군기지 이전지역에서 반출된 토양에 기준치를 초과한 카드뮴과 니켈이 검출됐다고 한다. 2011년에는 한 퇴역 미군의 증언으로 미군기지 내 고엽제 매립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인천지역 시민단체들은 부평 미군기지 맹독성 폐기물 처리 진상조사 인천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중금속과 다이옥신이 검출된 기지 주변 지역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정화를 촉구하고 있다. 최근 강원도 원주시는 2008년 3월 발생한 캠프 롱 기름유출 사건에 대한 복원비용 청구소송에서 최종 승소하기도 했다.

 

해외주둔 미군기지에는 미국 본토의 엄격한 환경오염 관련 규정이 적용되지 않아 미군들은 독성 폐기물 등을 적절한 처리과정 없이 버리는 경향이 있다. 1901년부터 미군기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필리핀은 미군의 오랜 주둔으로 인해 발생한 광범위한 환경오염으로 미군기지가 철수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각종 오염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11월 29일 오전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에서 만난 코라존 파브로스 전쟁중단동맹 필리핀 공동의장은 미군기지가 철수한 자리에 남은 흉터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차분히 설명해줬다. 코라존 씨가 알려준 필리핀의 현실은 미군기지가 국토 곳곳에 자리 잡은 한국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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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한강에 독성물질을 무단 방류한
맥팔랜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괴물>
 
세계 최대 해외 미군기지 철수하다
 
고된 일정으로 피곤할 텐데 이른 아침부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인터뷰에 앞서 코라존 씨 소개를 부탁드린다.
 
내 이름은 코라존 파브로스(Corazon Fabros)이고 필리핀에서 왔다. 현재 전쟁중단동맹 필리핀(Stop the War Coalition Philippines)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핵 없는 필리핀의 공동의장도 겸하는 등 여러 비정부기구에 관여하고 있다. 내가 속한 단체들은 군사기지문제, 핵문제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 전쟁중단동맹은 필리핀의 미군기지와 사법 이슈들에 많은 관심이 있는데 팔레스타인, 오키나와, 괌, 강정 등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세계 여러 지역의 평화 문제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꼭 필리핀 문제가 아니라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성 인권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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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존 파브로스(Corazon Fabros)

핵 없는 필리핀 연대(Nuclear Free Philippines Coalition) 전 사무총장으로 필리핀에 핵발전소 건설을 막는 성공적인 캠페인을 이끌었으며 필리핀 미군 기지 폐쇄를 요구하는 캠페인 주도.
 
-전쟁중단동맹 필리핀 공동의장
-아시아유럽민중포럼 평화안보 실무그룹 아시아 담당
-시민평화감시단 공동의장
-핵 없는 필리핀 공동의장

 


필리핀에 미군기지가 들어서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필리핀과 미군기지의 역사에 대해 알려 달라.
 
먼저 2012년은 미국이 필리핀에서 모든 군사기지를 철수하겠다고 밝힌 지 20년이 되는 해라는 걸 밝힌다. 1947년에 체결한 미-필리핀 군사기지협정이 만료된 해인 1991년 9월 16일 필리핀 상원은 새로운 협정 체결을 거부했는데 일년 뒤인 1992년 모든 미군이 철수하며 군사기지도 폐쇄됐다. 1901년부터 필리핀에 있던 세계 최대 규모의 해외주둔 미 해군기지와 공군기지가 폐쇄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우리는 1898년 6월 12일 독립하기 전까지 350여 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조상들은 독립을 위해 오랜 시간 힘겹게 싸워왔는데 미국이 필리핀 땅을 밟은 후에야 스페인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우리는 다시 미국의 식민지가 됐다. 미국은 필리핀은 물론 괌,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등도 침략했다. 미국은 스페인이 만든 군사기지를 다시 자신들의 기지로 고쳐 썼고 규모는 더 확장됐으며, 필리핀은 곧 미국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군사 요충지가 됐다. 그때부터 많은 군사기지들이 필리핀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가장 큰 기지는 수빅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다. 이외에도 여러 기지들이 있는데 작은 주둔지 규모의 기지를 뺀 주요 기지는 총 7개였다. 거의 한 세기 동안 필리핀에 주둔하던 미군기지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미군의 군사활동 중심지였으며 각 기지마다 고유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7개 기지마다 고유 기능이 있다는 말인가?
 
앞서 말한 수빅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부터 설명하겠다. 클라크 공군기지는 총면적이 4,440헥타르로 싱가포르와 맞먹는 넓이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미군기지로도 이름을 떨쳤다. 이 기지는 미 공군이 사용하는 250만 갤런에 달하는 석유, 윤활유 등을 저장하고 있었다. 또한 200,000㎡에 달하는 거대한 무기고를 보유하고 있는 기지이기도 했다. 수빅 해군기지는 1884년 스페인이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1904년 미국이 이곳을 빼앗았다. 수빅 해군기지의 가동률이 최고조일 당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보급창이었으며 매달 백만 배럴에 달하는 연료를 취급했다.
 
또한 아시아 지역에 배치된 모든 미국 함정을 수리할 수 있는 주요 선박 수리시설로도 활용됐다. 베트남전, 한국전쟁, 이라크전 등에 참가했던 배들이 모두 이곳에서 기항하며 수리나 보급을 지원 받았다. 수빅에도 300여 개의 무기고가 있다. 다른 기지들도 고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존헤이 공군기지의 경우 통신, 훈련뿐만 아니라 휴식과 오락에 특화된 곳이다. 캠프 월레스 공군기지는 훈련과 통신을, 산 미구엘 해군 통신기지국은 이름처럼 통신에 특화된 기지였다. 그밖에 미 해군 라디오 방송국, 오도넬 전송국 등이 있다.
 
존헤이 공군기지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 휴식과 오락 기능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말 그대로 놀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존헤이는 고급 주거 시설과 잘 다듬어진 골프 코스를 가지고 있는데, 북쪽 산악지역에 위치해 풍광도 좋다. 조용한 지역이라 지친 군인들이 쉬기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보면 된다. 이밖에도 클럽, 바, 카지노 시설이 들어서 있어 놀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병사들도 가끔 오긴 하지만 주로 간부들을 위해 마련된 시설이다. 존헤이 기지 주변 거리는 군인들이 놀기 위한 시설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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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0일 필리핀 예인선을 따라 수빅만으로 들어오고 있는 미해군 에식스 상륙함
© US NAVY, Petty Officer 2ND CLASS MARK R. ALVAREZ
 
공해병 앓는 정착민들
 
조금 방향이 다른 질문일 수도 있지만, 존헤이 기지 주변에 성적 쾌락을 위한 시설들도 있었나? 한국도 예전에는 기지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돼 많은 여성들이 성매매에 종사했다. 특히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가가 개입해 많은 여성을 성매매 종사자로 전락시켰다.
 
물론이다. 모든 군사기지 주변에는 자동으로 그러한 시설이 따라온다. 왜냐하면 군인들이 그런 시설이 주는 쾌락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즐거움을 통해 그들은 전쟁터에 나갈 힘도 얻고 스트레스도 해소한다. 혈기왕성한 남성 군인들은 대부분 여성과의 하룻밤 관계를 원하는데 이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 누드쇼를 보며 여성의 나체를 탐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 때문에 많은 필리핀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성적으로 학대당했다. 죄를 저지른 미군이 법정에 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필리핀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면 미군은 합의금을 주거나 해당 군인을 다른 지역으로 전출시켜버렸다. 한국으로 오키나와로 혹은 본국으로 간 그들을 필리핀 법정에 세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이 명백한 유죄라도 말이다.
 
필리핀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2세를 낳는 경우도 있다. 한국도 예전에 이런 문제들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태어난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필리핀을 떠나기 때문이다. 태어난 아이들은 필리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생김새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차별에 시달리기도 한다. 다른 필리핀인과 달리 피부가 하얗거나 검다. 그래서 이들은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입으며 자란다.
 
한국도 예전에는 그런 문제가 많았다. 물론 성폭행과 같은 범죄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필리핀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한 기지 주변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들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이 앓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미군 기지가 있던 지역은 심하게 오염돼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하기 전까지는 그들이 우리 땅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일 텐데 미군 기지는 출입이 강력히 통제된다. 심지어 필리핀 정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 미군 기지였다. 이 때문에 사전에 어떤 조사활동을 벌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철수한 후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빅 해군기지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 기지 안팎에 흐르는 강의 지류와 강 주변에 거주하는 마을사람들에게서 희귀질병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클라크 공군기지 통신센터에 정착한 사람들은 식수의 맛이 이상하고 기름이 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병에 걸리기 시작하자 필리핀 비핵동맹 산하 미군기지정화위원회가 해당 지역의 보건 관련 사건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각종 질병의 발병률이 상당히 높은 것이 명확해졌고 독극물 전문가, 전염병 전문가를 포함한 전문가 단체가 환경과 주민들의 건강상태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다.
 
수빅 해군기지 주변 강의 지류는 사람들이 목욕도 하고 수영도 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유독성 폐기물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려졌다. 클라크 공군기지 주변의 정착민들을 위해서는 203개의 우물 펌프가 설치됐다. 그러나 정착민들은 그곳이 미군이 차량을 운용했던 수송부 근처라는 사실을 몰랐다. 차량을 세척하기 위해서는 강한 독성을 지닌 화학약품을 사용하는데 미군은 약품을 그냥 땅에 버린 뒤 철수할 때는 시멘트로 덮어 은폐했다. 그 결과 미군기지 주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각종 암과 피부병에 시달렸다.
 
구체적인 오염 피해 사례들을 알고 싶다.
 
세계보건기구는 1993년 미군기지내에 수질오염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기지 매립지에 유독성 폐기물을 포함한 다량의 쓰레기들이 버려져 있으며 산업 폐수, 오염된 하수 등이 정화 작업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수빅만으로 흘러들어갔다고 한다. 여기서는 필리핀 국내 기준을 초과한 중금속, 살충제, 납, 수은, 비소, 석면 등이 발견됐다. 이후 필리핀 보건부는 1995년 클라크 지역 내 우물에서 가져온 물 표본에서 다량의 기름성분을 발견했다.
 
또한 캐나다 전염병학자인 로잘리 베르텔이 1998년 밝혀낸 바에 따르면 클라크 지역 13개 공동체에서 굉장히 높은 비율로 신장 질환이 발견됐다고 한다. 1992년 필리핀 탐사보도센터는 수빅에 주둔하던 미 해군이 아무런 제재 없이 산업용 유독성 화학물질을 계속 버렸다고 주장하는 한 예비역 해군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당시 이 예비역은 배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미국이 독성 물질과 폐기물을 반복적으로 버리고 씻어냈는지 자세히 회상했다.
 
미군기지정화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다량의 수은이 수빅만 침전물에서 발견된 것을 밝혔다. 벤젠, 톨루엔, 크실렌 등 가솔린에서 발견된 오염 물질은 큰 문제였다. 벤젠은 백혈병, 재생 불량성 빈혈, 염색체 이상, 골수 퇴화와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톨루엔은 신장과 간을 손상시키고 태아를 죽인다. 크실렌은 신경계에 장애를 일으키는데 피해자들은 성인이 돼도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자기 몸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
 
그린피스 독성감시단은 마발랏캇 지역에 있는 변압기가 폴리염화비페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폴리염화비페닐은 1987년부터 OECD 국가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독성 물질인데 미군은 이를 변압기에 이용해왔다. 폴리염화비페닐에 노출되면 적은 양이든 많은 양이든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다. 태아의 체중을 줄이고 조산을 유발하며 지적 능력까지 영향을 끼친다.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피부병에 걸리고 각종 암도 유발한다.
 
평화 위해 지속적 연대 필요
 
미국 정부가 그러한 환경오염 피해에 대해 보상한 적이 있나?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에게는 주민들에게 보상을 제공할 책임이 없다. 왜냐하면 군사기지협정을 통해 법적 책임을 면제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지를 떠나기 전 정화활동을 성실히 펼쳤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오염지역을 시멘트로 덮는 식으로 눈속임만 하고 떠난 경우가 많았는데도 말이다. 미국의 연방법에는 ‘슈퍼펀드법’이라는 환경법이 존재하는데 이 법에 따른다면 미군은 오염된 필리핀의 땅을 정화하고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이 법은 미국 영토 안에서만 적용되는 법이고 버려진 미군기지는 미국 영토가 아니기 때문에 소용없었다.
 
12년 전 클라크와 수빅에 거주하던 수백 명의 주민들이 미국과 필리핀 정부를 상대로 동시에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미군기지정화위원회는 유독성 폐기물 피해자들과 관련해 272개의 사건을 기록했다. 피해자들이 기지 지역 정화를 요구하고 질병과 죽음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지만 필리핀과 미국 정부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오늘날 피해자들의 상황은 심각하다.
 
사이버사진2. 코라존파브로스.JPG
 
심각한 문제다. 미국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감정이 좋지 않을 것 같다. 한국은 효순이미선이 사건 이후 격렬한 반미 바람이 불었다. 필리핀도 마찬가지인가?
 
한국과는 다르다. 필리핀인들은 친미성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를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구해줬기 때문에 보호자이자 동반자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 환경오염과 각종 범죄가 벌어져도 감정이 크게 나빠지지는 않는다. 또한 기지는 철수했지만 소규모 임시 주둔지에 미군들이 많이 머물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임시주둔지라고는 하지만 오랜 시간 여러 부대가 돌아가면서 머무는 경우가 많은 데도 말이다.
 
평화 운동가들의 국제연대에서 제주해군기지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들었다. 코라존 씨는 제주해군기지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제주해군기지 문제는 한국 정부의 최우선 고려사항이 그들의 시민이 아니라는 걸 잘 보여준다. 내가 본 강정마을 사람들과 평화 활동가들은 매우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을 힘으로 짓누르고 많은 사람들을 체포해간다. 한국인이건 외국인이건 강정을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우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놀랍다. 여러 아시아 국가의 평화 운동가들이 강정을 지원하고 지켜보고 있다. 강정마을은 더 이상 한국만의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연대는 매우 중요하다. 제주해군기지가 완성되면 그곳은 한국 해군만을 위한 기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 명백하다. 나는 강정마을의 투쟁에 지지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평화운동가로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를 위해 한 마디만 부탁드린다.
 
2012년 1월 미 국방부가 발표한 국방 전략 가이드는 21세기 미국의 개입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미 국방부의 가장 큰 함대와 군사력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배치될 것이다. 또한 중국을 둘러싸고 중국의 주요 방어 거점으로 군사력을 재배치할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계획을 막기 위해 일본, 필리핀, 미국 사람들이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투쟁을 계속해 나가고 국제 연대를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의 지속적인 연대와 헌신적인 노력이 우리가 가슴 깊이 원하는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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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디펜스21+ 기자
가진 거라곤 ‘안보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밖에 없던 청년실업자 출신.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경상도의 모 대도시에서 20년을 보냈다. 〈디펜스21+〉에서 젊음과 차(茶)를 담당하고 있다.
이메일 : ppankku@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sem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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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아고라 / 거제해룡 / 2013-01-20)


아래글은 제 페친이 대화중,방금 제보한 사실 입니다.

1.저는 안철수가 있었던 IT 보안 업계에서 10여 년을 몸 담고 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안철수의 현재까지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문재인도 안철수도 누구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수개표가 진행되어 설사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그는 민주당의 대통령이 아니며, 국민이 건져 낸 대통령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휴리스틱 데이터가 어떻게 실시간으로 제공되었는지도 저는 대략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한, 4.11 총선 때에서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 만들어져서 정확하게 딱 과반을 새누리당에 만들어 주게 된 과정도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있습니다. 단지 사법적인 공권력이 집행되어야만 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한영수씨와 같이 수개표를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2. 4.11 총선 때는 한영수 씨 표현으로 하면 비승인 선거정보시스템을 8코어 서버 20개를 1달간 임차해서 기존 선거정보시스템 옆에 붙여놓고 작업했습니다. 그리고 1달 후에 뺐습니다.

조달청 입찰 시스템에 증거가 명백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그렇게 했고, 1/4일(금) 무효소송 접수되고 1/6(일)에 몽땅 뺐습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2268260

 


 

대선,선관위 조달 입찰 정보
(다음아고라 / 거제해룡 / 2013-01-21)


1.지난 3월에 무선랜과 3G지원되는 갤럭시 10.1 2000대 조달 입찰 정보입니다.

그리고 12월 대선 관련 입찰 정보도 조달청 홈페이지 www.g2b.go.kr. 에서 중앙선관위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그리고, 2011년 12월과 2012년 3월 사이에 중앙선관위 전산담당 인사이동과 이명박 대통령과의 관계를 조사하시면 어떤 인물이 무었을 했는 지 다 아실 수 있습니다. ㅡ그리고 현직 중앙선관위 전산담당 서기관.

3.이 조달 건이 실제 로지스틱 조작 관련 중요.
수상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4.11 총선전 IT시스템 관련 예산 처리 사례2.

- 갑자기 제 19대 국회의원선거 대비 선거정보시스템 주전산기를 8core 짜리 21대나 외부에서 임차- 4.11 총선까지 개찰일부터 Working Day 17일 밖에 안남긴 상태에서 선거 종료일까지 급하게 처리- HW 임차임에도 입찰참가자격을 소프트웨어사업자로 한정 및 장비에 Java, C compiler 포함하고 있어서 장비에서 개발이 진행되는 것으로 보임- 통상의 검수 과정이 생략된 것으로 평가됨.

2012년 3월 13일 조달청(www.g2b.go.kr)에 공고된 - 입찰공고 20120315320-00 - 배정 예산 : 46,200,000원(부가가치세 포함)

1. 목 적본 시방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정보시스템 주전산기 임차사업과 관련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갑”이라 한다)와 계약업체(이하 “을”이라 한다)간에 체결되는 사업계약서 내에 명시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조건 등 사업수행 상 이행되어야 할 세부내용을 규정함에 있다.

2. 개 요사업대상 : 주전산기 임차(21대)사업기간 : 2012. 3월 中旬부터 ~ 선거종료시까지(약 1개월정도)설비장소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악청사 전산기계실 (서울 관악구 남현동 소재) 개찰(입찰)일시 : 2012/03/16 11:00

3. 입찰참가자격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2조 및 동법 시행규칙 제14조에 의한 자격조건을 갖추고,트웨어사업자로 등록하고 나라장터에 소프트웨어사업자[컴퓨터관련서비스사업(업종코드 : 1468)]로 입찰참가 등록한업체

4.이 건은 비정상적 거래 시도로서 관련 업체로 돈 세탁 이슈로 중요.수상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IT시스템 관련 예산처리 사례1 - 통신회선을 년단위에서 6년 장기계약 160억원을 9일만에 처리
- 갑자기 160억원 가까운 금액을 working day 9일만에 처리
- 제안서 평가 없이 제안서 제출 시간과 금액 입찰 시간을 동시에 처리
- 제안 규격서 게시된 실제 내용과 완전히 다른 별건 처리.

2012년 3월29일 조달청(www.g2b.go.kr)에 공고된 – 입찰 공고 20120337486-01

- 총 사업예산 15,985,000,000원

1차년도(계약일~2012.12.31) : 1,332,000천원
2차년도(2013.1.1 ~ 2013.12.31) : 3,197,000천원
3차년도(2014.1.1 ~ 2014.12.31) : 3,197,000천원
4차년도(2015.1.1 ~ 2015.12.31) : 3,197,000천원
5차년도(2016.1.1 ~ 2016.12.31) : 3,197,000천원
6차년도(2017.1.1 ~ 2017.07.31) : 1,865,000천원

- 총 사업기간 : 계약일 ~ 2017.07.31.(장기계속 1차 납기 :계약일~2012.12.31)

3-2. 제안요청서 설명회 일정
*일시 : 2012.03.30. (금) 14:00
*장소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악청사
*설명회관련문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장병호 님(☎02-

- 가격 개찰 및 제안서 제출 요건

개찰(입찰)일시 : 2012/04/12 15:00

3-5. 가격개찰 일시 및 장소* 일 시 : 제안서 기술평가 후 개찰
*장소 : 국가종합전자조달시스템(나라장터)

4. 제출서류4-2. 제안서 및 입찰관련서류 : 직접제출

*일시 : 2012.04.12. 15:00
*장소 : 서울지방조달청 별관입찰실/제안서접수실(별관 2층)

제안 규격서 : 2012033748601-1.hwp

실제 내용 : 2012년도 민속아카이브 자료 Digitalizing 추진 제안요청서"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2268415

 

거제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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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춤꾼' 이애주, 국립극장 '블랙리스트' 오른 이유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1/22 08:38
  • 수정일
    2013/01/22 08:3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이애주 서울대 교수 "춤은 생명의 깨달음"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1-21 오전 10:45:45

 

1987년 6월 항쟁 당시 박종철, 이한열 열사를 기린 '살풀이 춤'으로 대중들에게 '민중춤꾼'으로 알려져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인 서울대 이애주 교수를 만났다. 서슬 퍼렜던 시절, 광장에서 바람맞이 춤을 추는 것이 무섭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때 나는 국민들의 열망과 함께 몸으로 말한 것뿐이다. 그림 하는 사람은 그림으로, 문학 하는 사람은 글로 이야기하듯 나는 몸으로 나의 생각을 춤추었을 뿐이다. 안하고는 못 배길 만큼 시급한 상황이었다"라고 답한다.

"춤은 경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 안 되면 막을 올릴 수 없다. 근 7,8년 동안 나는 제대로 된 극장에서 춤판을 벌인 적이 없는데 극장을 얻을 자본도 없고, 정치력도 없고 '내가 가진 것은 오로지 춤뿐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기득권들이 싫어하는 현장에서 춤을 췄던 것이 대관도 힘들어지고 후원도 받기 힘들어지게 한 것은 아닌가 궁금했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지는 않았나 물었다. 그러자 "타협이라는 것조차도 생각해 본적이 없고 그냥 내 갈 길을 가는 거다. 타협이니 비타협이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나한테는 질문 자체가 안 맞는 질문이다. 어렵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을 계속하다 보면 뜻 맞는 사회와 뜻 맞는 사람들을 만나 잘 될 때가 있겠지. 오로지 자기가 생각한 그 길을 가는 거다"라고 이야기한다.

춤, 마당, 판이라는 말을 처음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라는 질문에 "1974년에 개인 춤 발표를 했다. 그런데
발표회 제목을 그 당시는 '이애주 무용발표회'라고 하여야 했는데 도저히 그렇게 쓸 수가 없어 '이애주 춤판'이라고 했다. 왜냐, '무용'이란 말은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식민 용어로서 그때부터 춤이, 몸짓이 본격적으로 왜곡되고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식민용어로 바꿔진 우리말을 제대로 회복시키려고 하는 사람을 두고 불온한 용어를 쓰는 색깔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분류시켰고 국립극장 '블랙리스트' 10명 안에도 포함돼 있다고 들었다". '춤'이란 단어가 이렇게 편하게 쓰이기까지 이런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정말 융합적인 우리의 몸짓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춤 대학이 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기관이 없다. 내게 우리 몸짓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자율성을 준다면 춤 학교를 제대로 만들어서 교육하고 싶다. 우리 후손들뿐 아니라 생명의 정통몸짓을 원하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라고 한다. 춤 대학 이야기를 들을 때 마치 "내 공연은 무용발표회 대신 춤판이라고 할 거야"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재잘대던 20대의 이애주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겁이 난다. 한번은 다리가 아파 쓰러진 적이 있는데 '이러다 영 못 일어날 수 있겠구나.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이야기에 나도 겁이 난다. "이번 년도 상반기까지를 춤 60년으로 보고 그 안에 꼭 정리를 해야만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호흡도 그렇고 어쩌다 삐끗해서 몸이 잘못되면 영영 내 춤은 구체적 몸짓이 영상으로나마 남게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작업을 여태 못했다. 음악, 조명, 연출, 의상을 정통으로 갖추고 음향, 영상 작업 등을 헤아려보니 억대 이상이 든다고 한다. 1000만 원도 없는데 말이다(웃음)"라는 이야기에 춤은 경제라는 말이 서늘하게 들려온다.

공연 예술가로서 무대에 설 기회를 차단당하면서도 그 당시 주류 담론인 무용이라는 말 대신 한국 전통의 춤, 마당, 판이라는 말을 쓰기로 작정하고 밀어붙였던 20대 청년 이애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1970년대의 그가 그럴 수 있었듯이 201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20대도 그저 힐링을 당하는 세대가 아닌 세상을 힐링할 수 있는 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제주 4·3 희생자,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핵 없는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대한문 앞에서 지금도 특별한 무대 없이 현장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는 그의 춤을 2050년대의 청년들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다만, 이런 아픈 현실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 이애주 서울대 교수는 1987년 6월 박종철·이한열 열사를 기리기 위해 '살풀이 춤'을 췄다. 이후 그는 '민중춤꾼'으로 알려졌다. ⓒ프레시안(최형락)



1987년 6월 항쟁 당시 박종철, 이한열 열사를 기린 '살풀이 춤'으로 대중들에게 '민중춤꾼'으로 알려져 있다. 서슬 퍼렜던 시절에 시국 열사들의 죽음을 기리는 자리에 홀로 서 한풀이 춤을 춘다는 것이 보통 용기가 없으면 못했을 일인 것 같다.

그 당시는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지나 독재가 몇십 년 이어진 상황이라 나뿐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폭발 직전에 있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죽고 이 사건이 신문에 대서특필 되면서 전 국민이 경악을 금치 못했고 한마음으로 모이면서 6월 항쟁이 일어났는데 그날 바로 바람맞이를 추게 되었다. 사실 1960, 70, 80년대에 독재정권이 이어지면서 그들의 표현대로 반합법적이고 비합법적인 집회와 투쟁들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이 와중에 서울대생 박종철의 사망으로 6월 항쟁이 일어난 도화선이 되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춤으로 몸이 그렇게 움직여진 것이다. 춤이 삶의 몸짓이 축적된 것이라면 과거의 살아온 몸짓, 지금의 사는 몸짓, 미래의 살아갈 모든 몸짓 등이 춤의 생생한 토대라고 본다. 춤은 사상과 철학이 몸놀림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때 나는 국민들의 열망과 함께 몸으로 말한 것뿐이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때도 그랬다.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쓰러지고 나서 병문안을 갔더니 연세대 도서관 앞에 수천 명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모여 밤샘 집회를 하고 있었고 나에게도 발언을 좀 해달라고 하여 "나는 말도 잘 못하고 춤으로 할 수 있을 때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돼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춤을 추게 된 것이다. 그림 하는 사람은 그림으로, 문학 하는 사람은 글로 이야기 하듯 나는 몸으로 나의 생각을 춤추었을 뿐이다. 안 하고는 못 배길 만큼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 후보격이었던 노태우 씨도 국민의 폭발적인 민주화 투쟁에 6.29 선언으로 굴복한 척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 바람맞이 춤을 추게 된 것인가?

그 당시는 연습장도 없어지고 주위 사람들은 다 감옥 가고 고문 받고 있을 때였다. 혼자 활동도 못하고 리듬도 다 죽어가는 것 같았고 내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침잠해 있을 때 서울대생 박종철 물고문 사건이 터졌다.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 현상은 도대체 뭘까' 하며 저절로 몸으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마침 그때 처음 김민기, 김석만, 이상우 등 연우무대 후배들이 신촌에서 혜화동 이전 개관 공연을 부탁한 게 계기였다.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며 고문, 탄압과 관련된 춤을 다 조사해 봤는데 고문 춤은 서양이고 어디고 세상에 없더라.(웃음) 성춘향을 어르며 추는 칼놀림 정도밖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연우무대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러자고 승낙하고 나니 기운이 막 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물놀이 원조격인 이광수, 김덕수한테 요청을 했더니 흔쾌히 악을 맡기로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물놀이 10주년을 맞으며 돌파구가 없었는데 아주 잘 됐다고 좋아하였다. 그렇게 만들어 나간 것이 '바람맞이'이다. 일주일간 공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표도 환불해 줄 정도였다. 돈을 받으려면 제대로 최고로 받자고 하였는데도 표가 동이 났었다.

그때 학생들은 대부분 못 들어왔다. 그 후 서울대 학생회에서 학교에서 꼭 해주셨으면 하는 간청을 하여 선뜻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서울대에서 하기로 한 전날 사물놀이패가 일본 공연 운운하며 못하겠다고 하여 방까지 붙였는데 하지 못했다. 내가 지도교수로 있던 춤패 '한사위' 학생들이 나에게 선생님 공연취소로 자기네들이 얼굴을 못 들고 다니고 나는 서울대 학생들에게 약속을 안 지킨 비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웃음) 당시 춤패 '한사위'는 남북한 통틀어 최고의 춤패라고 소문이 났을 정도로 대단한 춤패였다. 그냥 있을 수 없어 '한사위'에게 제안을 했는데 "내가 밤을 새워 장단을 가르쳐줄 테니 할 수 있겠어?"라고 물었더니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러겠다고 해서 밤을 새워 반주 음악을 가르쳤고 아주 어려운 장단은 그냥 그리듯이 했다. 기본으로 깐 장단이 도당굿장단이었는데, 도당굿장단하면 기법적으로 정말로 까다롭고 어렵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고도의 기법과 예술성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그 악과 같이하는 춤도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사위' 학생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장단을 비슷하게 그려가며 밤새워 연습했고, 다음날 새벽에 학교로 이동해서 포스터를 붙이며 준비했다. 공연을 하려고 대기실에 있는데 햇빛은 눈이 부셨고 밤에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눈이 시큼시큼하며 눈물이 저절로 났다. 소도구 준비과정에서 물춤을 추기 위해 물자배기가 필요한데 학교에 있을 리 만무하고 여기저기 뒤지다가 그냥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잘라 광목을 씌웠고 어디 가서 가마때기 하나를 장만해서 멍석 대신 깔고 하는 그런 식이었다.

그날이 바로 6월 26일이었고, 1시에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바람맞이 춤판이 열린 것이다. 원래는 연우무대라는 작은 실내 공간에서 춤을 췄었는데, 그날 춤을 춘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하늘 뚜껑이 열린 것 같았다. 장단이 시작되면서 눈부신 파란 창공이 보이더니 나도 모르게 하늘과 땅을 껑충 오르내리는 춤사위로 바뀌어 붕붕 뛰어올랐다. 당시의 춤판과 관객과 학생들의 기운이 하나가 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춤사위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우무대에서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바람맞이가 되었다. 한 시에 시작한 그 춤이 두 시에 끝나니 바로 전국적으로 민주화 대행진이 일어나는 시각이었다. 두 시를 기점으로 서울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대도시와 방방곡곡에서 전국적으로 국민들의 거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신문에 하늘로 뛰어오른 춤 사진(한국일보 최규성 촬영)이 게재되어 모두가 충격이었고 신참이었던 그 기자는 덩달아 유명해졌다.(웃음) 그 춤판에 외신기자를 포함해서 웬 기자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찍어대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다음날 보니 춤춘 사람이 서울대 모 여교수라고 하며 '이애주 교수가 민주화 대행진에 불길을 댕겼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이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하나의 진혼의식으로서 춤을 추며 뜻하지 않게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자연스럽게 현장과 연결되어 인천 수은공장에서 명을 달리한 16살 소년 문송면, 태백 탄광에 성완희 열사, 거제도 조선소에 이석규 열사 등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 등 전국으로 각 지역으로 다니며 또 다른 바람맞이 의식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 당시의 상황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다.

장례식 때 춤 의식을 치르기 위해 밤을 새워 노동자 풍물패대학생 풍물패에게 장단을 가르쳤다. 내 춤을 반주하겠다고 연세대 강당에 전국에서 모여든 200여 명 풍물패에게 짧은 시간에 장단을 가르치느라고 한숨도 못 잤다.(웃음) 나는 학생회 측에 "전 세계에서 외신기자들도 속속 모여들고 있는데 기독교식 장례는 우리 민족 문화의 망신이다. 우리 식의 장례식을 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며칠을 토론한 후 마지막 날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현 민주당 국회의원)가 "선생님 뜻대로 하기로 했습니다"라고 하더라. 그러나 장례식 당일 날 보니 기독교식으로 진행됐고 사회자가 장례식이 끝난 후 모교수가 춤을 춘다는 식으로 발언을 했다. 밤새고 난 새벽에 준비하고 앉아 있는데 후배 조경만(현 목포대 교수)이 "누님, 사회가 춤추게 해야 합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맞는 말이었다. 또 민문연(민족문화연구소) 후배이자 정책국장으로 있던 정희섭이 핏빛 물든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나에게 "누님,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습니까?" 하더라.(웃음) 이런 이야기들을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눈물겹다. 그러고 나서 민주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올라 그 열기로 그야말로 사회가 춤춘 것이다.
 

▲ '승무'를 추고 있는 이애주 교수.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이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13일 이 교수의 퇴임기념 학예굿에서 찍었다. ⓒ프레시안(최형락)


'바람맞이'라는 춤의 이름에 담긴 뜻이 궁금하다.

바람이라는 것은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바람에 의해서 춤이 추어진다. 움직이는 자연이다. 나는 우리 춤을 자연춤이라 하는데 '스스로 自'에 '그러할 然'자라 스스로 그러하게 몸짓이 나오는 거다. 모든 춤은 움직여지는 것이고 그 움직임은 바람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는데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현상, 꽃봉오리가 마지막에 터뜨려지고 씨앗이 흩뿌려지는 등 모든 과정이 자연이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매개체가 바람이다. 바람은 생명 그 자체로서 생명의 몸짓을 일어나게 하고 쓰러지게 하고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바람을 맞이해서 스스로 그러하게 같이 간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해맞이 춤을 출 때 여명이 밝아오며 해 뜨는 찰라 그 밝은 빛을 맞이하게 되고 모든 만물을 따뜻하게 비춰주고 꽃피우게 한다. '맞이'라는 의미는 해가 지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지는 해를 보내고 다음날 뜨는 해를 또 맞이하는 것이다. 바람맞이도 그렇다. 그 춤거리가 씨, 물, 불, 꽃으로 이루어졌는데 맨 처음 씨 춤은 바람에 의해서 흩뿌려진 씨가 싹으로 움트는 과정이다. 물춤에서는 비가 오고 적당량의 물이 있을 때 제대로 된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데 반대로 물이 너무 넘쳐 버리면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물춤이다. 불도 마찬가지인데 불이 없으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지만 이것을 과도하게 잘못 사용했을 때 사람이 죽어 넘어가고 생명활동은 끝이 나게 된다. 바로 불춤의 주제이다. 마지막 꽃춤은 물고문과 불고문으로 목숨이 스러지고 그 죽음이 거름이 되어 다시 생명의 꽃이 피어나는 상생의 과정을 빚어낸 춤이다.

'맞이'가 '환대'의 뜻이 있는 건가?

춤에 '올림채'라는 춤사위가 있다. 나를 숙이고 비우면서 상대방을 모시는 것인데 '모신다'는 것은 공경으로 맞이한다는 뜻이다. 곧 올리고 모시며 하늘을 맞이하는 의미다.

그 시대 사람들의 열망을 바람맞이 춤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춤은 몸의 언어이자 시대의 언어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된다.

루쉰 예술론이든, 마르크스 예술론이든 그리고 좌파이론이든 공통적으로 예술이란 정치, 경제, 사회와 하나로서 인민들의 삶과 같이하는 개념이다. 이전엔 글로만 읽고 알고 있었지 그것을 몸으로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바람맞이를 추며, 이한열 열사의 춤을 추며, '춤은 정치이고 사회이고 모두가 하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기자는 내 춤을 보며 '시국 춤'이라고 했고, 어떤 기자는 사회적인 관점에서 '사회 춤'이라 했고 정치의 관점에서 본 기자들은 '정치 춤'이라고도 했다.

춤은 경제라고 해도 맞는 말이고, 정치라고 해도 맞는 말이다. 결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연결된 것이 예술이고 그 안의 핵심 정신이 어우러져 움직여지는 운동성이 춤이라고 본다. 1990년대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단독 춤판을 벌였을 때 서울대 민교협 교수들이 많이 오셨는데 그 중 경제학을 하시는 원로 교수님 한 분께서 막이 올라가는 순간 '춤은 경제다'라고 느꼈다고 말씀하시더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 안 되면 막을 올릴 수 없다. 근 7,8년 동안 나는 제대로 된 극장에서 춤판을 벌인 적이 없는데 극장을 얻을 자본도 없고, 정치력도 없고 '내가 가진 것은 오로지 춤뿐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요즘 같아서는 제대로 한번 펼치고 싶다. 2012년이 춤 60년인데, 제대로 60년 춤을 정리해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웃음)

극장을 마련할 만한 후원을 얻을 수는 없는지?

없다. 공연을 해도 광고 하나 못 얻는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내 일에는 100만 원짜리 광고 하나도 못 딴다.(웃음) 올해 2월에 정년퇴임을 하니 이번 년도 상반기까지를 춤 60년으로 보고 그 안에 꼭 정리를 해야만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몸도 나이가 들면서 달라질 것 아닌가? 호흡도 그렇고 어쩌다 삐끗해서 몸이 잘못되면 영영 내 춤은 구체적 몸짓이 영상으로나마 남게 될 수 없다. 영상으로도 제대로 남겨 둔 것이 없다. 춤을 출 때 함께 하는 반주 가락 연주도 후대를 위해 남겨 두어야 한다. 앞으로 비록 이 세상에서 안 보이더라도 반주 음악이나 영상을 꼭 남겨 둬야 한다. 그 작업을 여태 못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건 갖춘 극장을 얻고 비용을 다 따져 봤는데 음악, 조명, 연출, 의상을 정통으로 갖추고 음향, 영상 작업 등을 헤아려보니 억대 이상이 든다고 한다. 천만 원도 없는데 말이다.(웃음) 그래서 지금껏 공연을 기획할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올해가 중요한 해이고 앞으로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 하는 강박관념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춤 한 판 작업으로 영상 등 자료를 남기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누님, 그래도 지금 움직일 수 있을 때 남겨놔야죠. 음악도 CD로 남겨 둬서 후손들한테 전해야 됩니다"라는 얘기들을 벌써 십여 년 전부터 한다. 같이 했던 동료ㆍ후배들의 말이다. 1989년에 스승이셨던 한영숙 선생님이 타계하셨다. 그 이듬해인 1990년에 '한영숙 류 이애주 춤'을 호암아트홀에 올렸는데 그때 내 춤의 연주를 바람맞이 장단을 같이 했던 김덕수, 이광수 같은 명인들과 선율악기 명인들이 붙어서 해주었다. 한 20여 명 정도의 연주단이 자발적으로 반주를 한 것이다. 그야말로 차비 정도도 제대로 못 챙겨 줬을 거다. 요즘도 지방에 심사를 가거나 학술대회 등에서 만나면 "누님, 우리 그때 했던 것 빨리 재연합시다. 우리들도 이제 기운이 좀 약해집니다"라고 말한다.(웃음) 자기네들이 더 하자고 한다. 그런데 내 몸은 더 급박하다.(웃음) 사실 겁이 난다. 한번은 다리가 아파 쓰러진 적이 있는데 '이러다 영 못 일어날 수 있겠구나.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바로 다리를 너무 쓰고 혹사해서 생긴 직업병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회복해서 일어나 춤을 출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만할 때 꼭 남겨야 한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거다.
 

▲ "춤은 경제다"라고 말하는 이애주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혹시 기득권들이 싫어하는 현장에서 춤을 췄던 것이 대관도 힘들어지고 후원도 받기 힘들어지게 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상황들을 실제로 맞닥뜨릴 때 타협하고 싶지는 않았나?

타협이라는 것조차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냥 내 갈 길을 가는 거다. 타협이니 비타협이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나한테는 질문 자체가 안 맞는 질문이다. 어렵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을 계속하다 보면 뜻 맞는 사회와 뜻 맞는 사람들을 만나 잘 될 때가 있겠지. 오로지 자기가 생각한 그 길을 가는 거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서민들의 지갑이 가장 닫히는 것이 문화 ㆍ 예술 쪽이고, 정치적으로 찬바람이 불 때 제일 먼저 칼바람을 맞는 곳 또한 저항적 기운이 센 문화 ㆍ 예술 쪽이 아닌가 싶다. 제2의 IMF라며 힘들었던 2009년 인터뷰에서 "빈곤한 무대를 겪고 나니 춤이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사회ㆍ경제와 맞물리는 예술 양식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고 이야기했는데, 한 사회에서 예술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지구가 망가지고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홍수와 가뭄이 많아지고 온도도 올라가면서 환경도 파괴되는 상황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왜냐, 춤이 예술이 자연 그 자체니까. 춤은 정치, 경제, 사회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제대로 춤을 출 수 있는 건데, 그 조건이 너무나 안 맞아떨어진다. 가진 자는 너무 많이 갖고 그런 사람들이 즐기고 원하는 부류의 예술만 많이 발표된다. 나같이 본질과 본성을 추구하는 자연 춤을 추는 사람은 모든 조건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내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다.(웃음)

현대 사회가 다 그렇지만 특히 한국에서 예술을 하기 위해선 돈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특히 춤은 종합예술이라서 다른 것보다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떤가?

복합 예술인 춤 분야에서는 모든 조건이 융합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발표조차 할 수 없다. 공간적 제약 때문에 연습조차 하기 어렵다. 춤 반주가 되는 생음악을 실제로 못하면 녹음이 된 음악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녹음을 한번 하려고 하면 몇천 대를 능가한다. 명인들을 자리에 모으려면 그 정도 비용이 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중요무형문화재이기 때문에 1년에 한 번씩 문화재 '승무' 공개 행사를 해야 하는데, 문화재청의 지원이 너무 미약해서 그걸 가지고는 한 시간은 넘어야 하는 공연 한 판을 채울 수가 없다. 승무만 3, 40분 내외로 발표하고 오신 손님들을 가라고 할 수 없으니 다른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다 자본이다.

며칠 전 문화재 공개행사에서 승무를 하는데 생음악도 제대로 못 쓰고 더구나 승무 의상인 장삼에 구멍이 나서 북 가락이 빠져나와 망신을 당했다. 제때 못해 입으니 그런 것인데 장삼을 한 번 새로 하려면 기백만 원이 든다. 600만 원 정도의 지원을 받는데 연주나 소리를 하시는 분들은 모르지만 춤은 그렇지가 않다. 생음악을 써야 하고, 의상을 맞춰야 하고, 조명에서부터 무대 구조까지 모든 조건이 춤에서는 달라진다. 그런데 똑같은 금액을 주고 춤 공연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는 정말 못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마이크 잡고 이야기를 했다. 정말 예술무대를 만들 수도 없고 해서 내가 직접 사회를 보면서 춤 이야기를 해가며 공연을 진행했는데, 춤에 맞는 극장 공간을 못 잡고 간편하게 해야만 했던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 풍류극장은 춤에 맞는 조건이 전혀 아니었다.

음악 연주는 몰라도 움직이는 공간이 필요한 춤은 그렇지 않다. 무대가 옆으로만 길쭉해 춤을 추기에는 전혀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헥헥'거리는 입김이 관객 앞까지 가서 민망할 정도로 확보 거리가 전혀 없었다. 생음악도 쓸 수 없어 처음에는 녹음에 맞추어 하고 북 치는 대목부터는 직접 장구와 바라를 두드리며 해설도 하는 식으로 공연을 진행했다. 재작년 행사 때에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이런 식으로 학예회처럼 하기 싫으니까 특수 분야에 지원을 늘리든가 2~3년 치 지원을 모아서 최소한 음악이라도 갖추고 춤을 추면 좋겠다"고 했는데 반영이 되지 않았다. 옛날 문화재 관리국 시절에는 인간문화재들의 발표를 위해 큰 극장을 잡아 각자 한 종목씩 발표하도록 했다. 그런 방식으로 하면 인간문화재들이 다른 것 신경을 덜 쓰고 자기 종목에만 매진할 수 있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승무에만 매진할 수 있고 말이다.

요즘에는 공연 자료집을 만들고 장소를 얻고 모든 기획을 알아서 해야 하니 힘든 것이다. 옛날처럼 며칠 기간을 잡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유산축제'의 성격으로 전 국민 대상으로 세계의 축제로 만들어 가면 좋겠다. 지역 축제에는 지자체에서 지원을 잘해 주는 것 같은데 정작 문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인간문화재 공연은 학예회 수준으로 만들 수밖에 없고 창피할 정도이다. 인간문화재 종목들이 마음껏 춤도 추고 악기하고 소리도 할 수 있게 있다면 훌륭한 사업도 될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살리는 의미에서 입장권을 판매할 수도 있고 기업에도 후원을 요청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오히려 문화재에 후원할 수 있는 판이 만들어져야 한다. 더 이상 개인적으로 마련해야 하는 허술한 무대에 서고 싶지 않다. 그러니 '춤은 경제다'라는 이야기가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좀 다른 얘기이지만 예술뿐 아니라 어느 학문 분야라도 제대로 하려면 어렵다. 서울대 경제학과 김수행 명예교수가 마르크스 경제학, 자본론을 했었는데 그 때문에 굉장히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이것을 보면 예술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제대로 하려고 하면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춤이 경제라는 말이 참 가슴에 와 닿는다.

춤은 경제인데, 경제는 정치와 연결되어 있다. 춤은 정치라는 말도 결국은 정치와 경제가 연결되어 하나라는 말이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서 이런 점이 정말 어렵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라는 것은 중앙에서 지정된 국가지정 문화재인데 시·도 단위에서 지정되는 그냥 '무형문화재' 종목들이 오히려 지역 차원에서 더 많이 지원을 받는다. 예컨대 각 시, 도에서는 자기 지역의 지정 무형문화재에 지원을 해주고 우리는 국가지정이고 역사도 오래지만 오히려 찬밥이다. 또한 예술원이나 학술원 회원도 우리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는다. 현대예술이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만년의 역사를 끌어온 살아 있는 국보급 종목이, 현대예술의 어버이라고 할 수 있는 종목이 어떻게 더 낮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가. 그런 것도 시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진짜 중요한 국보급 문화재들에게 좀 더 지원을 해 주어 제대로 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틀로 볼 때 만년 이상 문화의 맥을 이어나가기에는 너무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런 게 힘들다. 87년을 지나면서 몇 년 동안 여기저기서 정당에 들어와라, 비례대표를 해라, 뭘 만들자는 등 온갖 제의가 많았다. '만약에 했다면 이런 문제점들을 다 바꿀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까지도 들 지경이다. 만일 그랬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웃음)

이제 조금 더 개인 이애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다섯 살 때부터 춤을 추었는데, 중간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지?

춤 자체로는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70, 80년대부터 현장에서 했을 때 밖에서는 이해도 못 하면서 말도 안 되는 반응들이 나올 때 또 현대 자본사회에서 뭐 하나도 특히 춤판 하나도 제대로 펼칠 수 없을 때는 고민이 많다. 춤은 종합 예술이기 때문에 내 몸짓만 가지고 안 된다. 음악에 의상에 조명에 무대까지 붙어야 할 것이 더 많다. 그런 면에서 너무 힘들면 힘이 빠지고 처지게 된다.(웃음) 그렇지만 반대로 극한 상황을 넘어서기만 하면 어떤 것도 따라올 수가 없다. 그래서 춤이 위대한 거로 생각한다. 편한 것, 간단한 것만 해왔다면 오늘날의 내가 있겠는가. 어렵지만 내가 극복하고 그대로 가는 것이다. 또 지나고 보면 그런 것들은 별 게 아니고 여하간 몸짓이 최고더라. 몸짓을 통한 인간의 깨달음, 삶의 깨달음, 생명의 깨달음이 궁극의 화두이다.

"고 3 때 무용협회 주최 콩쿠르에 나가 장구춤을 췄는데, 춤만 춘 게 아니고 본격적인 가락을 넣어서 설장구를 막 두드려 부수면서 추니까 만장일치로 특상을 받았다"고 했다. 창조적 즉흥성, 그 자유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런 창조성을 기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어렸을 때 일들을 지내놓고 보니 그것이 창조성이다. 우리 춤에는 즉흥이 있다. 춤을 추며 팔을 올릴 때 어떤 경우에는 굿거리장단에 올릴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제일 느린 장단에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들어 올릴 수도 있다. 출 때마다 달라진다. 한국 춤의 장점이 기운에 따라 늘였다 줄였다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즉흥성이다. 생각의 확장, 몸짓의 확장, 판의 확장 등이 나중에 상징적으로 그렇게 표현된다. 그렇지만 그 안의 정신과 틀은 그대로다. 우리 선생님이 그렇게 자유자재로 춤을 추실 때 '저게 뭔가' 하고 따라 할 수가 없었는데, 나도 춤을 춰온 60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며 그렇게 되었다. 즉흥성이 고도로 가면 그 자체가 그냥 창조성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장단과 동작이 자유롭게 극대화되면서 창조로 나타나는 것이다.

20대 때 대학원 졸업 후 춤을 공부하기 위해 교수직을 포기했다고 들었다. 교수라는 직업은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었는데?

대학원 졸업장을 받기 전에 이미 모 대학교에 교수로 내정되어 있었다. 방콕 아세안 올림픽 때 예술단으로 2개월 돌고 오니까 그렇게 되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런데 그 무렵 한영숙 선생님이 승무 문화재로 지정되시면서 그것을 전수시킬 제자로 나를 발탁해 주셨다. 직전에 훌륭한 선생님들이 다 돌아가시자 덜컥 겁이 났을 때였다. 특히 '한영숙 선생님께 꼭 공부해야 하는데' 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 형편상 독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첫 제자로 들어오라고 하셔서 너무나 행복했는데, 마침 그 직전에 교수로 내정돼 있었다. 첫 학기 시작 전인 2월 말에 교수 자리 연결을 하셨던 선배 교수께 못하겠다고 하니 이해를 못 하시더라. 충격을 받으시며 "너가 이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 우리 졸업생들은 아무 데도 취직 못 한다"고 매우 노하시더라. 내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했겠다.(웃음) 그래도 내가 "지금이 아니면 춤을 공부할 수 없게 됩니다" 하고 고집을 피우니, 나를 끌고 당시 원로 교수이셨고 나의 정신적 스승이셨던 이병위 교수님께 갔다. 이 교수님께서 자초지종을 다 들으시더니 "O군, 애주 양을 공부하게 놔둠세!" 그 한마디로 끝났다. 역시 스승님이셨다. 이 분 덕분에 홀가분하게 해결되었다.(웃음)

집에서는 내가 교수가 됐다는 사실에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는데 차마 그만뒀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그냥 고민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한영숙 선생님께서 어머니한테 말씀을 드렸는지 그날 저녁에 난리가 났다. 그때는 엄마와 둘째 오빠네 내외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다음 날 아침 밥상에서 '네가 인제 네 밥벌이를 해야지 또 오빠한테 손 벌리려 한다'며 뭐라 하시는데 그 말을 다 듣고 있던 오빠가 "어머니, 그냥 애주 공부시킵시다. 학자 한 명 키웁시다" 그러더라. 그것 하나로 또 된 거다.(웃음) 이런 것들이 다 해결된 후에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공부의 궁극 목적이 결국은 바르게 살면서 진짜 깨달음을 얻어 가자는 것인데, 춤의 목적도 마찬가지다. 춤을 왜 추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왜 사는가라는 궁극적 물음으로 간다는 면에서 같은 것이다. 교수도 마다하고 공부하겠다고…. 참, 그러고 보니 나는 역사 이래에 없는 일을 굉장히 많이 한다.(웃음) 바람맞이라는 춤의 형식도 내용도 역사에 없다. 국민적 장례식 때 춤을 춘 것은 어느 나라의 역사에도, 춤 역사에도 없다. 내가 생각해도 딴 사람이 나를 참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웃음)

이십 대 후반에 교수임용이 된 것인데 어린 나이에 앞날이 보장되는 교수자리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교수고 뭐고 다 싫고, 이거 안 하면 나 죽는다, 이것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웃음)

뭔가를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면 뒤돌아보지 않고 뚫고 가는 타입인 것 같다.

그렇다. 내가 행한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 결국은 중심을 잡고 본질을 추구하는 것에는 양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거 아닌가. 그것을 생명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이애주 교수는 일제 치하 식민지 표현인 '무용'이라는 단어 대신 우리나라 말인 '춤, 마당, 판'을 처음 공식적으로 썼다. ⓒ프레시안(최형락)


지금 모두가 당연히 쓰고 있는 '춤, 마당, 판'이라는 말을 1974년의 '제1회 이애주 춤판'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썼다. 그때 '배운 애가 무식하게 춤이 뭐냐, 판이 뭐냐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는데, 사실 개인적으론 '무용'이라는 말이 식민지 표현이라는 것을 인터뷰 자료 조사를 하면서 처음 알았다. 이렇게 비판을 받으면서도 '춤, 마당, 판'이란 이름을 쓰기로 작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1974년에 개인 춤 발표를 했다. 그런데 발표회 제목을 그 당시는 '이애주 무용발표회'라고 하여야 했는데 도저히 그렇게 쓸 수가 없어 '이애주 춤판'이라고 했다. 왜냐, '무용'이란 말은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식민 용어로서 그때부터 춤이, 몸짓이 본격적으로 왜곡되고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 우리가 쓰던 '춤'이란 용어를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말로, 글로 나오고 앞으로 연구의 기본 토대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무슨 배운 사람이 상스럽게 춤이라고 하나"라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신문 사설에까지 격에 맞지 않는 용어를 쓴다고 욕을 먹었다. 배운 사람이 지식인답게 무용이라고 해야지 하며 사적으로도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나는 서구식의 사각 극장 무대와 달리 우리의 무대는 열려진 공간 개념의 마당이고 그 열려진 마당을 총칭하는 것이 판이라고 생각했다. 장소 개념만이 아닌 닫혀 있는 정신의 열림까지도 생각했다. 그래서 '춤판'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거의 매일 만나던 우리 문화패 몇 명이 서울 문리대 앞 '타박네(우리나라 카페 1호)'에서 왁자지껄 토론을 벌이며 통금 시간이 가까워져 올 때인데 누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바로 유홍준 교수로 옆구리에 보자기로 싼 것을 끼고 있었다. 펼쳐보니 고구려 고분 벽화가 담긴 북한에서 펴낸 책이었다. 당시엔 북한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옥 가는 행위였다. 일본에서 다시 펴낸 <고구려 고분벽화> 영인본이었는데, 첫 장을 들추자 '무용총'이라고 배운 말이 순수 우리말로 '춤무덤'이라고 되어 있었다. '삼실총'은 '세칸무덤'으로 '각저총'은 '씨름무덤'으로 되어 있더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내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식민용어로 바꿔진 우리말을 제대로 회복시키려고 하는 사람을 두고 불온한 용어를 쓰는 색깔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분류시켰고 국립극장 '블랙리스트' 10명 안에도 포함돼 있다고 들었다. 이 사람들이 극장을 빌리려고 하면 대관 절대불가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우리말인 '춤'이 많이 대중화 되었지 않나. 진짜 우리말을 제대로 쓸 때 사고와 행동이 바르게 된다. 서구식으로 무용이 어떻고 댄스가 어떻고 하면 행동 몸짓도 그렇게 되는 거다. 예부터 해 오던 변할 수 없는 순수 몸짓을 춤이라고 하면 된다. 그 당시 나는 무용계에서 쓰는 전체 춤 용어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뿐만 아니라 예술 용어, 학문 용어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부터 실천하자 하고 내 분야에 관해서는 용어를 본래대로 바꾸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민족문화의 복원이라는 것을 생각했고 현재 이 문화가 어떻게 중심을 갖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끊임없이 생각했다.

청년 시절 이애주를 생각하면 어떤가?

현장에 나오기 전인 학창 시절, 전통춤만 출 때는 '정말 춤 잘 추네'라는 소리를 듣던 평범한 어린 학생이었다. 그러던 내가 민주화 과정에서 현장춤으로 각종 집회에서 드러났다. 그러다 보니 각 대학의 축제에는 거의 다 초청을 받았다.(웃음) 전통춤만 추던 전통춤의 춤꾼이 시대와 역사의 아픔과 연결된 첨예한 시기에 창조적인 현장춤의 춤꾼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각 대학의 젊은이들과 노동현장의 젊은이들과 많이 어울리게 되었다. 그때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푸릇푸릇하니 젊었다.(웃음)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중 한복을 입고 꽃을 든 사진을 보니 무척 앳되어 보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학생 운동의 아이돌이었을 것 같다.(웃음)

그런가?(웃음)

88년 이후에 민중 개혁 춤 활동을 중단했던 이유가 몸으로는 안 뛰고 입으로만 활동하는 사람들에 문제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당시의 고민에 대해서 듣고 싶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될 기본 토대, 기본 실력이 안 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여러 상황에서 느끼고 있었다. 좀 더 기본적인 공부를 하고 중심이 제대로 잡힌 후에 서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 자신부터 기본을 다시 정리하고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10년간 승무에 매진해서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좀 독한 것 같기도 하다.(웃음)

나는 그냥 가야 할 길을 간 것뿐인데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안 하니까 상대적으로 내가 독해 보이는 거다.(웃음) 아니 독한 것이 아니고 그냥 생각대로 해 온 것뿐이다.

제주 4·3 희생자,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핵 없는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2012년 10월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대한문 앞에서 특별한 무대 없이 춤을 추었다. 계속해서 춤으로 현장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쌍용자동차 현장에서 춤을 추었을 때 느낌이 궁금하다.

그거야말로 몸으로 말한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내 말과 생각을 몸으로 표현한 것인데 다른 이가 봤을 때는 춤으로 보인 것이다. 부당하게 죽어간 생명, 억울한 죽음, 농성 현장 등 모든 삶의 문제에서 맺히고 잘못 된 것은 풀어주고 해결되어 제대로 나아가야만 생명이 생명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즉흥 몸 의식을 드린 것이다.

망자의 혼을 불러들여 위로할 때, 특히 살풀이를 할 때는 자기를 비워 내주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것이 힘들지는 않은지, 그런 비움의 작업들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힘들다기보다는 오히려 나 자신을 다 내려놓고 비우기 때문에 홀가분해지고 편안해진다. 몸과 정신이 맑아지면서 '뭔가 해야 될 것을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필요 없는 것을 다 비워낼 때 뿌듯함 같은 것이 꽉 차는 거다. 비움이 곧 채움이다. 무소유라는 것이 다 버리는 것 같지만 그 텅 빈속에 맑고 밝은 기운이 꽉 차는 게 무소유다.

전쟁을 할 때 나팔수가 있듯, 민주화 현장에서나 쌍용자동차 현장에서나 춤을 통해 사람들의 기운을 일으키는 역할을 해왔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선 자기가 서 있는 자리, 지향하는 삶의 방향에 대한 믿음이 더 많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그 방향을 잘 잡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나?
 

▲ 이애주 교수는 쌍용차 추모제에서 춘 춤이야말로 "생명이 생명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즉흥 몸 의식을 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방향을 잘 잡겠다고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늘 기초를 닦으며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자연스러운 것을 한 것이다. 삶 자체를 제대로 살아가고 생각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바른 쪽에 서서 바른 몸짓을 하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방향을 일부러 잡으려 한다고 되겠는가. 지나고 보니 '사람으로 걸어야 할 길을 제대로 걸어오긴 한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하게 춤을 출 때 나의 의식과 타인의 시신을 의식하지 않는 게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춤에만 집중할 수 있는지? 춤을 추다가 사람들의 기에 얼어붙어 버린 적은 없는지?

중심이 안 서 있고 경험이 없을 때 사람들 앞에 서면 얼고 떨 수도 있다. 나는 비교적 춤을 오래 추고 현장과 하나 되다 보니 오히려 남들의 시선이 상생의 기운으로 바뀐다. 타인의 기운과 내 기운이 하나가 되어 신명의 판으로 바뀔 때 그것이 바로 희열이다. 희열.(웃음)

사람들의 시선을 춤을 출 때의 에너지로 삼나?

당연하다. 나 자신은 물론 그 기운이 함께 축적되면서 새 판의 장이 펼쳐진다. 그리고 춤이란 또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흥이 난다.

기사를 발행해도 아무도 안 읽어주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인가?(웃음)

그렇다.(웃음) 하지만 춤을 추려면 사람만 많다고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당백이라고 수가 적어도 그것을 정말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인식하게 되면 상생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춤꾼과 관객의 기운이 맞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맞다. 요새 유명한 오페라니 연주니 하면서 대기업에서 후원한다고 하여 표를 몰아서 구입해 회사원들에게 다 나눠준다고 들었다. 그런데 연주자 입장에선 분위기가 안 살고 그 기운이 모이지 않아 연주를 망친다고 하더라. 연주자는 무대에 나가면 들을 만한 사람들이 왔는지 그냥 회사에서 표를 주니까 문화경험 한번 한다고 왔는지 단번에 알게 된다. 그러면 공연이 망하는 거다. 내가 현장에서 바람맞이를 출 때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불꽃이 튕겼던 거다.

이애주에게 전통춤이란 무엇인가?

한쪽에서는 내가 추는 춤을 순수예술이 아니고 어쩌고 말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순수의 개념이 무엇이냐가 관건인데 정치, 사회, 경제, 역사 등 모든 것이 융합된 시대의 삶, 민중의 삶에서 나오는 의지의 표현이야말로 순수예술인 것이다. 특히 전통춤에 일춤이나 탈춤, 놀이춤 등을 보면 그 시대의 사회상, 역사성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예컨대 양반에게 천대받고 억압받던 민중의 몸짓, 그것을 푸는 신명의 몸짓 등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그 당시에는 그 춤들이 또 다른 저항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면서 지금까지 왔다는 것에 참 행복하다.

말한 것처럼 전통춤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왕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춤, 또 하나는 억압받는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춤, 이 모두가 다 전통춤인데, 이애주의 춤은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나?

전통춤의 99.9…% 즉 거의 다가 민중의, 민중을 위한 몸짓이고 그 나머지 극소수가 왕과 양반들을 위해 추던 몸짓이다. 82년에 서울대 부임을 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 당시에는 학생운동이 거셀 수밖에 없었고 데모도 많이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학생들에게 기본을 가르치다 보면 그 자체가 민중춤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궁중춤의 대표격인 '춘앵전(春鶯囀)'을 가르쳤다. '춘앵전'과 같은 궁중춤은 삼진삼퇴와 좌우대전이라는 간이한 틀로 구성되어 있다. 제자리에서 앞까지 나아갔다가 절하고 창사로 할 말 하고 좌우회전으로 돌다가 다시 왔다갔다하고 빙그르르 크게 돌고 본래 자리로 돌아 와서 끝나는 춤이다. 그렇게 간결한 형식일 수가 없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선생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왕조의 궁중춤을 가르치십니까?"하더라. 궁중춤의 단순하고 간이한 틀은 극소수의 상위층들이 향유하던 춤이었고 민중춤은 억압받아 오던 대다수 서민, 민중들이 하던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 현실에서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학생들이 그렇게 성토하듯이 질문을 하자 나는 궁중춤 속에 안 보이는 보편적인 의미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삶 자체가 이렇게 단순 명료한 것이다. 민중의 춤도 즉흥적으로 자유롭게 추지만 결국은 진퇴의 문제이고 생사의 문제로 간결하게 정리된다"라고 얘기했다. 춤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 몸짓의 역학ㆍ몸짓의 구조에 나타난 간단명료한 철학을 가르쳤다고나 할까. 최고의 춤은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간이(簡易)의 철학'이다.

많은 청년들이 문화예술인을 장래 희망으로 삼고 있는데, 주로 순수 예술보다는 아이돌 같은 대중문화예술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 자체를 탓할 것은 아니지만 순수 예술, 그중에서도 한국 전통 예술을 하는 사람들 또한 많이 나와야 우리 문화예술이 튼튼해질 텐데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청소년들이 우리 유구한 역사의 진짜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가 없다. 정통성이 무엇인가를 공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웃음) 정말 교육이란 것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연아나 손연재가 어떻게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의 혼이 알게 모르게 밑받침이 되어 무한대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남들은 짧은 동작으로 끝낼 것을 김연아는 영혼의 움직임으로 길게 늘이지 않는가.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감탄을 하는 거다. 사람 마음을 이완시켜 주고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손연재도 어리지만 갑자기 두각을 나타냈다. 손연재가 체조하는 것을 보다가 다른 나라 1등 하는 선수가 하는 것을 보니 영 못 봐주겠더라.(웃음) 흐름이 뚝뚝 끊기는데 손연재의 동작에는 무한한 연속적 부드러움이 나타난다. 역사의 혼, 민족의 혼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강수진 같은 유명한 발레리나가 발레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강수진은 유려한 긴 호흡으로 영원한 선으로 늘이며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다. 이러니 제대로 체계적인 교육만 이루어진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니 민족혼의, 민족문화의 기반 토대가 되는 예컨대 정통의 중요무형문화재를 대우해주고 잘 활용하여 모든 후손들에게 제대로 이어질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내 바람은 몸으로 체득할 수 있게 하여 그 맥을 제대로 잇게 하는 것이다. 제대로 맥을 잇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대학 체제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서울대학교에도 춤 전공은 없다. 체육교육과라도 있어서 내가 이만큼 해 왔지만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고 본격적 교육기관인 춤 학교·춤 대학이 있어야 한다.

실질적 춤 자체의 교육은 물론 제대로 된 역사 교육, 민족혼 교육, 민족 철학과 사상 교육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의 몸짓을 가르치고 싶다. 그래서 정말 융합적인 우리의 몸짓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춤 대학이 있으면 좋겠다. 우리 민족춤을 제대로 교육하다 보면 창조적인 시대의 춤, 세계적이고도 우주적인 춤이 거기서 또 나올 것이다. 우리의 정통 몸짓을 제대로 체득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특히 창작에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초 교육부터 자기 민족의 정통 몸짓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기관이 없다. 내게 우리 몸짓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자율성을 준다면 춤 학교를 제대로 만들어서 교육하고 싶다. 우리 후손들뿐 아니라 생명의 정통몸짓을 원하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지금 현재의 꿈이다. 학교도 그만두는데.(웃음)

우리의 정통 몸짓을 제대로 전수할 수 있는 '춤 대학'에 대한 꿈이 참 멋지다. 이 꿈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내 제자라든가 극히 일부의 동료들은 함께 공유한다. 특히 내가 속했던 민교협 교수들이 대단히 격려해 주신다. 내용은 다 가지고 있다. 기반만 갖추어지면 된다. 그러나 물적 토대가 없는 것이 문제다.
 

▲ 이애주 교수는 "전통춤의 99.9…% 즉 거의 다가 민중의, 민중을 위한 몸짓"이라며 한국 전통의 몸짓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춤 학교·춤 대학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한국전통 예술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선 전승하고자 하는 앞선 세대와 전승받고자 하는 뒷 세대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싸이처럼 대중 예술로 한류를 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부분에서도 잘들 하고 있지만 갑자기 드러나서 각광받는 것만이 한국의 문화가 아니고 그것들을 지탱해 줄 정통의 한류 즉 기본 토대의 본질, 정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청년 대중문화만 열광하지 말고 지루하고 재미없더라도 한국인의 끈기로 내재된 힘, 역동적인 힘, 그 깊이 있는 혼의 무게를 인식해야 하고 공부해야만 한다. 그 예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은 전 세계에서 반드시 계승해야 할 문화유산을 지정하는 제도 아닌가. 그 제도가 바로 1964년에 시작된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 제도를 보고 만든 것이다. 이런 판에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재들이 허술하게 대우받고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있다. 진짜 본류의 한류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전 세계에 영적인, 정신적인 지도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이애주에게 '자유'란?

'자유'는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자연은 '스스로 자(自)'에 '연유할 연(然)' 아닌가. 스스로 그러한 것을 그대로 허용하게 할 때 그것이 '자유'다. '자유'는 생명이고, '자유'를 하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나 스스로 그러한 것을 허용하고 그렇게 하다 보니 내가 60년간 추어왔던 우리 춤에 자유의 몸짓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 춤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70년대 초부터 삿포로 동계 올림픽, 뮌헨 올림픽, 방콕 아시안게임 등 공산권까지 합쳐 30개국 이상을 돌아다녔다. 갈 때마다 국빈대우를 받고 꼭 국립무용단, 국립무용학교에 가서 그들 춤도 보고 교류도 하였다. 그러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 춤만큼 인간의 본성을 자유롭게 놓아 주는 몸짓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짓은 온몸을 써서 육체와 정신이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몸짓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는 자유를 본다. 자유의 몸짓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자유인이다. 자유인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고 자연스러운 사상을 갖고 궁극적으로는 사람다운 생각을 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자유인인 것이다. 나는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김민희)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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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업무경비, 끝내 해명 못한 이동흡

[인사청문회] 여당도 준비부족 질타... "말만 말고 자료 내라"

13.01.21 11:38l최종 업데이트 13.01.21 21:08l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21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문공세에 답변도중 목을 축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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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신: 21일 오후 9시 5분]

박범계 민주당 의원 : "후보자의 통장 거래 내역을 보면 특정업무경비 400만 원이 입금된 직후 개인 보험료가 빠져 나간다. 매달 마찬가지다. 이래도 특정업무경비를 헌법재판소 지침대로 썼다고 말할 수 있나. 이쯤에서 항복하시죠."
이동흡 헌재소장 후보자 : "……"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특정업무경비의 사용처에 대해 끝내 속시원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21일 이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특정업무경비의 사적 유용 의혹이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이 후보자는 핵심을 피해가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이 후보자의 입에서는 "규정대로 사용했다"는 식의 답변만 무한 반복됐다. 질의에 나선 의원들이 여야 할 것 없이 이 후보자의 답답한 태도와 답변 준비 부족을 질타했다.

이날 청문회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후보자는 월 평균 400만 원에 이르는 특정업무경비를 별도의 개인 계좌(B계좌)에 보관했다. 문제는 재판활동 지원비 성격의 특정업무경비를 입금해 놓은 이 통장에서 억대의 신용카드 대금, 개인 보험료, 개인 차량 구입비 등이 인출됐다는 것이다.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은 이 후보자가 공적인 용도로만 지출돼야 할 특정업무경비를 사적인 용도로 썼거나 개인의 재산 증식을 위해 유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야당 의원들의 거듭된 질의에도 이 후보자는 "횡령하지 않았다", "6년 동안의 일을 어떻게 다 아느냐", "규정대로 사용했다", "저는 부정한 일을 안 했다"는 답변만 앵무새처럼 되풀이 했다. 하지만 주장만 내놓았을 뿐 그 주장을 입증할 구체적인 사용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증빙 자료 제출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오후 추가 질의에 나선 박범계 의원이 이 후보자의 특정업무경비 입금 통장 거래 내역을 공개하면서 "이래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냐"고 추궁하자 이 후보자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는 부적절한 처신을 하기도 했다. 박 의원은 "지금 웃으시는 거냐"고 역정을 냈다.

"횡령 있었다면 사퇴할 거냐"... 즉답 못한 이동흡

박홍근 민주당 의원이 "특정업무경비 횡령이 있었다면 사퇴하겠느냐"고 묻자 이 후보자는 즉답을 하지 못하다가 "횡령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오전 질의에서 '항공권 깡' 의혹에 대해서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바로 사퇴하겠다"고 답변하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결국 보다 못한 새누리당 의원들도이 후보자의 답변 태도에 문제를 제기했다. 김재경 의원은 "6년 동안 특정업무경비 합계가 얼마인지, (개인적 용도로 써도 되는) 월정직책금은 얼마인지 파악하라"며 "다른 수입이 그 통장(B계좌)에 입금됐다고만 하지 말고 객관적인 자료를 내달라"고 말했다.

이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준비 부족도 도마에 올랐다. 특정업무경비를 별도로 관리하지 않고 보험료 등 개인 비용들이 출금되는 계좌에 넣어둔 것도 문제인데 인사청문회에 나오면서 본인 계좌에 어떤 돈이 입금되고 출금됐는지, 법에 규정된 대로 경비 사용 내역에 대한 증빙을 헌법재판소 사무처에 제출했는지 등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게 없었다. 때문에 이날 이 후보자의 답변은 질의자에 따라서, 질문에 따라서 오락가락을 반복했다.

김도읍 새누리당 의원은 "이 후보자는 청문회를 열심히 준비하지 않았다"며 "말로만 하지 말고 계좌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특정업무경비, 월정직책금, 경조금, 수당 등 입금 내역과 지출 내역을 하나하나 밝혀서 국민들의 검증을 받아야 할 것 아니냐"고 질타했다.

김 의원은 "준비 부족 자세가 더 문제"라며 "오늘 밤에 정리해서 해명되는 부분은 해명하고, 안되는 부분은 사과라도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강기정 인사청문특위 위원장은 "특정업무경비가 본래 취지대로 쓰였는지가 쟁점인데 (자금이) 어떻게 들어와서 어떻게 썼다를 해명하는 게 (헌법재판)소장으로 가는 길"이라며 "해명하지 못하면 소장으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2신: 1월 21일 오후 4시 50분]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21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사적 유용 의혹이 제기된 특정업무경비의 사용처에 대해 명확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오전 질의 과정에서 여야 의원들로부터 제기된 증빙 자료 제출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박홍근 민주통합당 의원은 이날 오후 질의에서 이 후보자가 특정업무경비를 입금한 은행 계좌의 지출 내역 일부를 공개했다. 신용카드 결제 대금 1억3000여만 원, 개인 보험료 6000며만 원 그랜저 차랑 구입비 3100만 원 등이다. 박 의원은 "이런 지출 내역이 헌법재판소 (특정업무경비 사용) 지침에 부합하는 것이냐"고 따졌다.

이 후보자는 "(해당 계좌에는) 특정업무경비 400만 원 말고도 다른 수입 (입금 내역)도 있다"고 반박했다. 개인적인 용도로 지출된 비용은 특정업무경비를 쓴 게 아니라 별도의 개인 수입으로 충당했다는 해명이었다.

하지만 박 의원은 "계좌 입출금 내역을 다 봤는데 그(다른 수입 입금) 내용이 많지 않아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재차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 후보자는 거듭 "(정해진) 용도 대로 특정업무경비를 사용했다"고 주장했지만 구체적인 지출 내역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인사청문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강기정 의원이 "잘 썼다고 말하지만 말고 매월 통장에 들어오는 돈을 어떻게 썼는지 시원하게 말해달라"고 별도의 발언 시간을 줬지만 답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후보자는 "재판 활동 지원금이니까 재판 관계인 만나거나 '필요할 때 쓰라'고 한 것으로 안다. 현금으로 쓰거나 카드로 쓰는 수도 있었다"며 "헌법재판소 다른 사람이 하듯이 했다"고 말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이 후보자는 국세청 공무원이 세금 징수비 30만 원을 집으로 가져가면 횡령이라고 했다"며 "이 후보자의 경우 횡령이라고 단언하지는 않겠지만 월 400만 원씩 2억5000만 원을 가져간 게 횡령이 아닐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1신 대체 : 21일 오후 2시 5분]

최재천 민주당 의원 : "공금이 내 통장에 들어와 (개인 돈과) 혼재됐고 공금을 어디에 썼다는 확인서도 없으면 횡령 아닌가.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횡령이다."
이동흡 헌재소장 후보자 : "저는 횡령하지 않았다."

21일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특정업무경비 사적 유용 의혹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후보자가 헌법재판관 재직 시절 받은 특정업무경비를 개인 통장에 입금시켜 신용카드 대금 결제와 개인 보험료 지급 등 개인적 용도로 사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특정업무경비는 헌법 재판관이 재판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거나 전문가 견해 청취시 식사비, 직원 격려 비용 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급되는 비용이다.

이 후보자를 상대로 질의에 나선 민주통합당 의원들은 이 후보자를 상대로 특정업무경비 지출 내역에 대해 매섭게 추궁했다.

박범계 의원은 "이 후보자의 은행 계좌를 분석해 보니 신한은행 안국동 지점의 이 후보자 명의 계좌에 매달 21일 전후로 급여 수당 외 정체불명의 돈이 300만 원에서 500만 원 정도 (헌법 재판 재직기간인) 6년 동안 입금됐다"며 "(입금 관련 정보는) 은행 지점 고유번호만 찍혀 있고 그 외 어떤 내용도 기재되지 않았는데 이 돈이 특정업무경비라고 단언한다"고 밝혔다.

민주당 "공금 유용해 개인용으로 활용해 치부한 것"

박 의원은 "헌법 재판관 재직 6년 동안 급여와 각종 수당, 경조사비 다 합치면 이 후보자의 전체 수입이 7억여 원 정도인데 가장 낮은 수준의 생활비를 고려해 계산 해보면 퇴직 기준 예금 잔고상 2억7000만 원의 출처가 소명이 안 된다"며 "이 후보자 계좌로 6년간 입금된 특정업무경비가 2억5000여만 원으로, 해명되지 않은 예금 증가액 2억7000만 원과 거의 일치한다. 이게 후보자의 예금 증가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 의원은 "특정업무경비를 개인용으로 활용해 치부한 것"이라며 "이게 공금을 유용한 흔적 아니냐"고 따졌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이 후보자는 "그 날짜에 재판업무 수행비를 받은 것은 맞다"며 본인 계좌에 입금된 돈이 특정업무경비라는 점은 인정했다. 헌법재판소로부터 수표로 받아 본인 계좌에 입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유용 의혹에 대해서 "규정된 용도로 모두 사용했다"고 해명했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21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모두발언을 마친뒤 청문위원들에게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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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보자는 "제 통장 전부를 의원들에게 제출했다. 통장의 모든 내역을 낸 사람이 내가 처음이라고 하는데 자신 있어서 그런 것"이라며 "공무원 생활 40년 가까이 하면서 조금도 부정한 돈을 받지 않았다, 전 재산이 30년 동안 살고 있는 집 포함해서 15억 원"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자의 해명에도 민주당 청문위원들의 공세는 계속됐다. 박홍근 민주당 의원은 "이 후보자는 특정업무경비를 공무용으로 사용했다고 하지만 계좌 내역을 보면 신용카드 대금도 결제하고 개인 보험료 지불, 해외 송금까지 한 것으로 나온다"며 "2010년 한 해만도 신용카드 대금이 2500만 원이다. 개인 보험료도 공적 용무냐. 공무용으로 썼다는 게 증빙 가능하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 후보자는 "(특정업무경비) 사용은 신용카드로도 하고 현금으로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후보자는 특정업무경비가 공적 활동에 사용됐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는 추궁에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특정업무경비 집행내용 확인서 제출 여부에 대해서도 오락가락한 태도를 보였다.

이동흡의 오락가락 해명... 집행 내역 확인서 제출 여부도 불투명

인사청문특위 야당 간사인 최재천 의원이 "특정업무경비는 국가재정법이나 재정경재부 지침상 반드시 공적 업무 추진시 집행하도록 돼 있고 영수증을 받도록 돼 있다. 현금 지급도 집행내역 확인서를 제출하도록 돼 있다"고 지적하자, 이 후보자는 "(헌법재판소) 사무처에서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후보자는 곧 말을 바꿨다.

최 의원이 "법이 있는데 사무처에서 알려줘야 준수할 의무가 생기나, 사무처에서 알려주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되는 건가"라고 따지자, 이 후보자는 "사무처에 제출된 것으로 알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왜 말을 바꾸느냐"는 추궁에는 "비서관이 담당해서"라며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최 의원은 "비서관은 후보자 개인 통장에 대해서 모른다"며 "(경비를) 쓸 때는 후보자 개인이 쓰고 처리는 비서관들이 가공해서 내는 것이냐"고 거듭 문제를 제기했다.

이 후보자는 여당 의원들의 질의에도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인사청문특위 여당 측 간사인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이 "특정업무경비가 입금된 통장에서 각종 보험료 등이 인출됐다고 하는데 맞나"라고 물었지만 이 후보자는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 후보자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하자 인사청문위원들은 여야 할 것 없이 이 후보자에게 특정업무경비 지출에 대한 해명자료를 오후 2시까지 제출해 달라고 요구했다.

권성동 의원은 "특정업무경비는 개인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며 "다른 재판관들이 이 경비를 받았을 때 어떻게 관리했는지 정확하게 확인하고,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하게 확인해서 답변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 후보자는 특정업무경비를 규정대로 사용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사적 유용이 사실로 드러나거나 제기된 의혹에 대해 제대로 해명하지 못할 경우 낙마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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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대결전> 미국에 대화를 압박하는 또 하나의 공세인가?

 

 

 

북, 신형 ICBM탄도미사일 KN-08 배치
 
<북미대결전> 미국에 대화를 압박하는 또 하나의 공세인가?
 
한성 기자
기사입력: 2013/01/21 [17:53] 최종편집: ⓒ 자주민보
 
 
▲ © 자주민보

최근에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탄도미사일에 대한 정보가 언론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풍부하게 보도되고 있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한 분석이 높게 요구받고 있다.

<북한은 자체적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기술력과 자체 부품 조달 능력을 갖췄다>
이는 한국과 미국이 북이 작년 12월 발사한 장거리 로켓(미사일)의 1단 추진체를 조사 분석한 결과라면서 21일 언론에 브리핑한 기본 내용이다. 분석작업은 1개월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미국인을 포함 52명의 전략무기 전문가들이었다.
전문가들은 1976년 이집트에서 가져온 스커드-B 미사일을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미사일 자체 개발에 착수한 북이 36년 만에 ICBM 개발국 대열에 합류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이라고 평가하고 나선 셈이다.

구체적으로는 장거리 로켓의 핵심 기술로 꼽히는 1, 2, 3단의 분리 방식에 대해 안정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엔진계통의 터보펌프와 연소실, 보조엔진, 연료통, 산화제통 등 로켓의 핵심부품이 모두 북 자체 제작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핵심부품제작을 북의 능력으로 돌린 것은 과학계에서는 중요한 문제이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으로부터 로켓의 핵심 부품을 도입했을 것이란 것이 그간의 공식적인 관측이었는데 이러한 관측이 폐기되는 국면에 이르르게 된 것이다.
북이 중동 국가에 미사일분야핵심 부품과 기술을 역수출하고 있을 것이란 일각의 분석이 이후, 그럴듯한 타당성을 얻게 될 것으로도 보인다.


북의 미사일과 관련된 최근의 정보 중에는 이만큼이나 더 중요한 것이 또 있다.
북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탄도미사일 KN-08을 북 전역에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KN-08은 지난해 4월 김일성주석 탄생 100주년 기념 군사퍼레이드에 처음 등장해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북의 대륙간탄도 미사일이다. KN-08을 탑재한 이동식 발사대(차량) 배치 사실은 뉴욕타임스(NYT)의 17일(현지 시각)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미 정보 당국이 이를 포착했다는 것이다.

KN-08 발사대가 북 전역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쉽게 지나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적인 사안이다. 미 정보당국은 KN-08이 한 번도 실험 발사된 적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다만 로켓모터를 비롯한 부품들은 따로 실험 발사됐을 것으로 추정하기는 했다. 이것들은 KN-08이 실전에 배치되지 않고 있는 핵심적인 근거들로 쓰였던 것들이었다.

미 정보당국이 이러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언론에 흘리는 것 자체를 먼저 뉴스거리로 삼을 필요가 있다. NYT가 대서특필을 했다. 그리고는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까지 나서서 유독 강조를 했다.
이에 대한 분석작업은 전혀 어렵지 않으며 도달하게 되는 결론 역시도 매우 간단하다. 미국이 한국과 등 아시아 국가에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에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에 이미 탄도미사일 추적용 X-밴더레이더(AN/TPY-2 레이더)를 실전 배치해놓고 있다. 최근 패네타 장관이 아시아 지역을 빈번히도 자주 방문한 것도 이와 연동시켜 이해할만하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미사일 발사대 배치활동을 통해 미국 보다는 북이 의도하는 정치적 목적이 무엇일 것이냐에 있다. 북의 발사대 이동은 극히 정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북의 발사대 이동은 북의 정찰위성에 곧바로 포착될 수밖에 없는 공개 활동인 것이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당연하게도 북이 미국의 주목을 끌기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미국에 보다 적극적으로 모종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출해놓고 있다. 그 모종의 메시지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선명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북의 이러한 움직임을 두고 북이 지난해 12월 12일 ‘로켓발사’에 대한 유엔의 대북제재와 연관시켜 분석하는 견해는 아직까지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당연하게 보인다. 북의 ‘로켓발사’와 관련한 대북제재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만한 소재가 더 이상 되지 않는다.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과 중국은 19일 북의 로켓발사와 관련해 비난과 경고를 담은 의장성명을 발표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대북제재의 내용에 대해 그 어떤 관심도 주지 않는다. 다만 안보리에서 대북제재 논의가 일단락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만 의미를 둘 뿐이다. 로켓발사와 관련한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는 그 어떤 특별한 실효성이 확인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 정보당국은 북이 신형 미사일을 탑재한 이동식 발사대를 전역에 분산 중인 사실을 확인하고 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관련 정보 수집에 나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추정해볼 수 있는 결정적인 것은 북의 이러한 정치행보가 북미간의 대화국면을 압박하기 위한 위협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신형 미사일을 탑재한 이동식 발사대를 전역에 분산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북미간의 긴장을 높이는 북의 공세적 조치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이 곧바로 미국의 강경파들에 대한 위협으로 될 것은 분명해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KN-08이 실전에 배치되었다는 것을 두고 하게 되는 미 정보당국의 기본 판단은 북이 미국 동맹국과 아시아 주둔 미군을 타격할 능력을 증강하고 궁극적으로는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북이 미국본토를 타격할 능력을 갖췄다고 익히 인정하고 있는 터이다. 세계일보 1월 18일자 보도에 따르는, 패네타 국방장관의 발언 역시 특별한 것일 수는 없다. 패네타장관은 전날 이탈리아 주둔 미군부대를 방문해 “북한이 날마다 무엇을 하는지 누가 알겠느냐. 북은 이미 미사일을 발사했다. ICBM이다”라고 말하며 그것은 “미국을 타격할 능력을 갖췄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패네타장관이 ICBM으로 규정한 것은 광명성 3호-2기를 탑재한 로켓 은하3호이다.
(이기사에서 나오는 파네타의 발언 원문 부분-“Who the hell knows what they’re going to do from day to day?” Mr. Panetta said. “And right now, you know, North Korea just fired a missile. It’s an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for God sakes. That means they have the capability to strike the United States.”)

여기에서 확인되는 것은 북의 공세가 대화를 염두해둔 것이라고 할때 그 대화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압박하는 모양새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하는 시기와 우리 정부의 출범시기는 곧바로 맞물려있다. 미국에 대한 북의 현시기 공세가 대화를 위한 압박인지 아닌지는 조만간 확인되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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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와 SBS ... 둘 중에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선관위와 SBS, 둘 중에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아고라 / 그루터기추억 / 2013-01-20)


 

선관위에서, 당선무효소송 마감일이 지난 시점에서, 드디어 1분당 개표결과 자료를 발표했다. 왜, 선관위는 이렇게 늦은 시점에 자료를 발표했을까?

이미 이런 자료가 존재했다면, 얼마든지 좀 더 이른 시점에 자료를 발표해서 그동안 제기되고 있던 모든 의혹들을, 충분히 해소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도... 자료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확하게 일치된 자료를 내놓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발표를 못했을지 모른다. 또 어쩌면, 그동안 아예 없었던 1분당 자료를 애써 만드느라고, 그렇게 뜸을 들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선관위에서 발표한 자료를 가지고서 이 자료를 받아서 방송한 SBS와 선관위 사이에,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자료를 발표한 선관위의 홈페이지 화면이다.

 

화면에서 보면, 1분 단위로 제공된 개표자료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방송사는 < 실시간 >으로 선관위의 개표자료를 제공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방송사들에는, SBS가 포함되어 있음을 아주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SBS 방송도, 자신들이 발표한 매 30분 간격의 개표결과 수치를 선관위에서 정확하게 30분, 또는 매시 정각이란 시점에서 통보한 자료를 사용했다는 결론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자료는 1분 단위로 발표되고 또 방송사에 제공되기 때문이다.

1분만 더 기다리면, 정확한 시점에 자료가 공개될 텐데, 이를 1~2분 빠른 자료를 가지고서 방송할 이유가 없다. 또한 이미 매 30분과 정각에 발표되고 통보 된 정확한 자료가 있는데, 구태여 1~2 분 더 늦은 자료를 이용하여, 방송에 내보낼 이유도 전혀 없다.

따라서 선관위에서 매 1분 간격으로 자료를 발표하고 통보해 주었다면 선관위의 자료와 이를 받아서 방송한 SBS의 자료는 완전히 일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 실제로 이 두자료가 일치하는 지의 여부를 아래 표로 살펴보겠다.

보는 것과 같이, 다음 날 새벽 3시 이후에만, 자료가 일치하고, 그 이전에는 자료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도데체 어떻게 된 일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불일치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익일 오전 3시 이전까지만 자료가 불일치 하는 것인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왜 이들 시간에는 자료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인가?

이제 다시 한 번, 선관위의 자료와 SBS에서 방송한 자료가 일치해야만 하는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위와 같은 개표방송근거에 의하면, 선관위와 SBS방송의 자료가 불일치 하는 것은 절대로 발생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선관위가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개표 익일 오전 3시 이전에는 전부 다 < 불일치 > 하는 것으로 나온다.

더 크고 < 심각한 문제 >가 있다.

그것은 SBS에서 방송한 자료가, 선관위에서 통보해준 수치에 < 아예 없다 >는 것이다. 만약 SBS의 방송 자료가, 선관위보다 1~2 분 정도 시차를 가지고, 더 늦거나 더 빠르다면 그나마 방송국의 부주의와 실수가 있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치 새벽 2:30과 3:00의 경우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SBS 에서 방송한 자료는, 선관위에서 통보했고, 이번에 공개한 자료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SBS는 별도로 그 수치를 만들어 낸 것인가? 아니면 선관위의 수치가 나중에 만들어 진 것인가?

선관위에서 < 실시간 >으로 방송사에 통보했다는 주장과 개표방송에 대한 근거들을 살펴보아도, 둘 사이에 발표되는 수치에는 < 단 1표의 오차 >도 발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치 익일 오후 3시 이후에 두 곳의 수치가, 마지막 1자리 숫자까지 < 정확하게 일치 >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 이제 SBS에서 방송한 수치가, 선관위에서 발표한 1분당 자료의 그 어디에도 없음을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상과 같다.

붉은 색으로 표시된 SBS의 자료는, 선관위의 자료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고 파란 색으로 표시된 SBS의 자료는, 선관위의 자료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록색으로 표시된 것은, 1분이상 득표수에 전혀 변화가 없는 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SBS의 자료는, 선관위에서 발표한 1분당 자료의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뒤에 있는 1분전과 1분후의 자료를, '보간법'으로 산출한 것인가? 이렇게 보간법을 이용해서 20초나 30초 경의 자료를 개표방송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있는가?

만약 백번 양보해서 그렇게 되었다 치더라도, 또 발생하는 문제는, SBS의 수치가, 정확한 30분 또는 정각의 자료에 대한 보간법을 실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데체 이번 선거의 개표는 어떻게 치루어 진 것인가? 누가 과연 국민을 향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선관위 인가? 아니면 SBS 방송인가? ... 그도 아니면 이들을 사주한 세력들인가?

원래, 진실은 언제나 하나 밖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항상 그 말이 동일한 것이고, 진실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의 말도 역시, 모두가 다 동일한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경찰이나 검찰에서, 범죄 수사를 할 때는 그 사람의 말이 언제 어느 때나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예의 주시한다.

또 혐의자의 말과, 다른 목격자나 주변 다른 사람들의 말이 일치하는지도, 반드시 살펴본다. 범죄 혐의자의 말과 주장에 대한,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제 선관위와 SBS는 절대로 둘 다가 모두 진실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어쩌면, 이들 둘 다의 말이 모두 다 거짓인지도 모른다. 원래 거짓과 조작이란, 세밀하게 조사해 보면, 반드시 서로의 말이 항상 일치하지 않게 되어 있다.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 또 둘 다가 국민들을 상대로 거짓을 자행한 것인지는 '수개표'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어느 쪽이라도, 국가의 명운이 달린 중차대한 이번 대선과정에서 국민 전체를 상대로 거짓을 행했다면, 반드시 형사적인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건 결코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수개표'는 샘플이 아니라, 반드시 전수조사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일부지역에 대한 샘플조사는, 현 상황아래서 이미 그 표를 바꿔치기 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민주당과 후보가 제기할 수 있는 '당선무효소송'은, 그 시기가 다 지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유권자인 시민들이 제기해 놓은 '선거무효소송'은 대법원에 계류된 상태로 남아았다.

만약 이러한 명백한 거짓과, 개표조작 가능성에 대한 실제적인 fact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개표과정에서 드러난 모든 의혹과 문제점들을, 그냥 다 덮고 넘어가 버린다면 그 때는, 3.15부정 선거에 반발해서 일어났던 4.19 혁명에 비견할 만한 '제2의 4.19 혁명'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선거 관련자들과 정치가들은 명심해야만 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로지스틱 함수를 주장했던 저에게, 보다 더 실제적인 fact 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선관위에서 정확한 공식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어디서 실제적이며 구체적이고 정확한 fact 를 가져다가 내 놓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드디어 선관위에서 매 1분당 자료를 공개함으로써, 실제 fact 가 공개되었다. 이렇게 공개된 실제 fact 에 대해서, 또 다른 반론이 있다면, 그 분들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이곳 아고라에 글을 게시해서, 네티즌과 국민들의 정확한 판단을 받기 바란다.

그리고, 이런 불일치에 대해서, 모든 국민들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번 선거는 개표조작과 개표부정으로 인한 무효이므로, 수개표로 개표를 다시 제대로 해야만 되고 만약 이 일도, 모든 국민들이 납득할 만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재선거를 실시해야만 될 것이다.

그루터기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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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적자를 민영화로 해소? 부실 진짜 주범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1/21 08:09
  • 수정일
    2013/01/21 08:0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기고] 국토부, 부실 떠넘기기 말고 뭐했나?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1-20 오후 5:02:09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새 정부 출범을 준비하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는 가운데, 국토해양부가 철도 적자의 심각성에 대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많은 언론이 이 내용을 그대로 실어 날랐다. 기사의 제목 중 하나는 '코레일 경영 부실 심각-7년 연속 1조 원대 적자'다. 당장 철도공사를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수서 발 KTX 민영화를 추진하는 국토부는 철도의 부실을 부각할수록 민영화 추진 논리가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러나 국토부의 보도자료 내용은 사실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정책 실패를 운영기관에 떠넘기고 있다는 사실은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다.

철도 적자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매년 대통령 업무 보고나 정권 교체 시기의 인수위에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제기되어 온 단골 메뉴다. 38년 전인 1975년 <동아일보> 6월 30일 자 기사는 연간 200억 원이 넘는 철도 적자를 해결할 길이 없다고 질타했다. 30여 년 전인 1982년 7월 24일 자 같은 신문에도 1298억 원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 문제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1970년대나 1980년대에도 철도는 엄청난 적자를 안고 있었다. 정부 당국은 철도가 수십 년간 적자를 내온 이유를 경영 부실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한다. 정부 정책에 따라 일관되게 관리된 철도가 경영부실이라면 철도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정부 정책이 부실하다고 평가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노약자·장애인 할인, 벽지 노선 비용까지 적자로 떠넘겨

국토부는 '2011년 코레일 경영 성적 보고서'를 분석하면서 철도의 실질 적자액이 8303억 원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철도 부실을 부풀리기 위해 편법을 적용한 결과다. 적자면 적자지 '실질적 적자'라는 말은 왜 나왔나? 법적으로 보장된 철도의 공익 서비스 제공 의무(PSO) 보상비를 제외하지 않은 탓이다. 세계 각국 정부가 의무적으로 지출하고 있는 PSO 보상비용을 적자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PSO 보상비용이란 노약자, 장애인 할인이나 지방 벽지 노선 운영에 따른 비용이다. PSO 보상비를 제외하면 철도 적자액은 국토부가 밝힌 액수보다 3000억 원 가까이 줄어든 5478억 원이다. 일반적으로 정부 부처는 자신들이나 산하 기관의 성과를 부풀리는데, 철도만큼은 부실을 강조하고 전면화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부실을 부각해 수서 발 KTX 민간 사업자 선정을 강행할 명분으로 삼겠다는 심산이다.

국토부는 철도공사의 경영 부실을 이야기하면서 그 핵심을 인건비에서 찾는다. 철도공사 직원들을 적자 기업임에도 고액 연봉을 받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 실상은 다르다. 오랫동안 인력 충원이 되지 않아 철도공사 직원들의 평균 연령은 40대 중반을 넘고 평균 근속연수는 18년이 넘는다. 사실 철도공사 직원들은 정부 산하 공기업 중에서도 하위그룹에 속하는 연봉을 받고 있다. 매년 임금인상률이 정부의 지침을 벗어난 적이 없다. 같은 논리라면 100조 원이 넘는 적자를 가진 토지주택공사나 다른 공기업의 임직원들은 구조조정을 하거나 급여를 삭감해서라도 적자를 메워야 하지 않겠는가?

국토부는 철도공사가 정부의 구조조정 지시를 어기고 인력 감축을 등한시했다고 하지만 현장에서는 인력 부족 때문에 초과 근무나 휴일 근무가 일상화되어있다. 게다가 철도공사는 공기업이 앞장서서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게 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최근 2년간 인턴제를 거쳐 신입 사원채용했다. 이런 사정을 무시한 채 철도의 인건비 문제를 경영 부실의 핵심에 놓는 것은 역으로 철도의 적자가 부실 경영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정책에 따른 문제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 KTX ⓒ연합뉴스


철도에 투자 안 하는 국토부, 부실 떠넘기기 말고 뭐했나?

국토부는 높은 인건비 비중 때문에 경영이 부실해졌다고 질타하지만 철도는 수요에 따른 탄력적 대응이 힘든 산업이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처럼 수요에 따라 공급을 늘리거나 줄일 수 없다. 휴가철이나 명절 기간에 승객이 폭주한다고 선로를 늘릴 수 없다. 수요가 줄어드는 시기라도 선로나 역을 정상적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거대 장치산업인 철도는 일상적 유지비가 필요하고, 정비나 유지에 많은 인력이 필요한 노동집약적 산업이므로 인건비 비중이 다른 산업에 비해 높을 수밖에 없다.

철도산업의 인건비 비중을 낮추려면 철도산업의 토양이 바뀌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철도산업이 경영상 효율을 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업 거리가 4500km라고 말한다. 한국 철도의 총 길이는 3500km 남짓이다. 그런데 수서 발 KTX를 민영화 화면 영업 길이는 더 짧아진다. 결국 수서 발 KTX 민영화는 일부 재벌의 수익 창출을 위해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산업의 자생 능력을 제거하는 일이다. 기능 중복과 거래비용 증가 등 분할로 초래될 비효율이 철도 발전을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철도의 생산성은 노동자 1인당 수송량의 크기로 정한다. 이에 따르면 한국철도 생산성은 OECD 국가 중 5위로 상위권에 속한다. 협소한 철도 운영 거리와 낙후된 철도 환경의 한계를 그동안 철도 노동자들이 노력으로 극복해왔다는 의미다. 한국 철도는 또한 고속철도 건설과 개통을 전후로 각종 철도 발전지표(복선화율과 전철화율, 자동신호체계 등)들을 전반적으로 개선한 바 있다.

반면 철도 경영 부실을 질타하는 정부가 한 일은 무엇인가? 철도와는 관계가 먼 비전문가를 사장 자리에 낙하산으로 보내는 일을 반복해왔다. 경찰청장 출신의 허준영 전 사장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철도공사 사장의 경험을 살려 지역구에 고속철도를 놓겠다는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해당 지역구(노원병)는 서울 북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개그 프로그램에나 나올 만 한 일이다. 또, 국토부는 인천공항철도를 민영화해 효율성을 높여 철도 교통의 새 시대를 열겠다고 장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인천공항철도의 부실이 심각해지자 이를 슬그머니 철도공사에 떠넘겼다. 이 과정에서도 민간사업자들은 매각 대금을 챙겨서 떠났고 부실은 고스란히 철도공사가 받아 안았다. 정부의 철도 정책과 철도공사의 경영 상태 중 먼저 개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국토부 주장의 하이라이트는 철도공사가 매년 내고 있는 KTX 매출액의 31%에 이르는 1100억 원(2010년 기준)의 선로사용료가 고속철도 건설 부채의 매년 이자 4600억 원도 갚지 못하는 수준이며 이런 부실 상태를 더는 두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토부의 주장대로라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주장에는 심각한 하자가 있다. 철도공사가 내는 선로사용료로 고속철도 건설 부채를 감당하는 것 자체가 타당하지 않다. 국토부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를 하나로 결합해 엉뚱한 결론을 내고 있는 것이다.

세계 각국, 철도 건설에 투자 왜?…철도 건설비 < 사회적 이득

세계 여러 나라는 미래의 대안 교통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는 철도시설 부분의 국가 투자 책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즉 국가가 철도산업 정책을 통해 고속철도 건설비용을 상당 부분 부담한다. 한국 정부도 철도의 운영과 시설을 분리하면서 정부가 시설을 책임지는 방식으로 운영기관의 부담을 줄여 철도산업을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는 시설 투자를 책임지지 않고 선로사용료를 거의 유일한 수익 구조로 고착화했다. 시설기관과 운영기관 간 불신과 갈등이 생겼음은 물론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KTX 매출액의 100%를 선로사용료로 내도 건설 부채의 이자를 갚을 수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흑자를 내고 있는 고속철도 부분의 매출액을 전부 갖다 바쳐도 재무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라면 다른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1987년 일본의 국철 개혁 당시 일본 정부는 국철의 누적 부채 37조 엔(약 310조 원) 중 31조 엔을 정부에서 인수하고 경영 안정 기금 명목으로 보조금을 지급했다. 2011년 한국의 국가 총 예산이 309조 원이다. 26년 전 화폐 가치를 생각해 보면 부채 31조 엔 해소가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 짐작할 수 있다. 철도왕국 일본의 신화는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유럽연합 국가들은 어떠한가? 독일 정부는 1994년 구조 개편 당시 연방철도 자산관리국을 만들어 건설 부채를 포함한 철도 부채 680억 마르크(약 42조 원)를 전액 인수했다. 프랑스 또한 1997년 구조 개편 당시 누적 부채 308억 유로(약 37조 원)의 3분의 2인 205억 유로를 시설공단으로 이관하고 나머지 1/3인 103억 유로를 정부 특별 부채계정으로 처리했다. 이탈리아도 운영회사의 부채 35억 유로를 정부로 이관하고 매년 구조개편 기금으로 약 10억 유로를 지원하고 있다.

프랑스는 한 발 더 나가 지난해 10월 '철도 경쟁체제 도입'이라는 명목으로 시행됐던 시설과 운영의 분리가 철도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며 통합을 선언했다. 통합적 체제가 더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처럼 철도 선진국들은 정부의 적극적 재정 지원과 부채 인수로 만성적인 재정 악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나라는 왜 이렇게 철도에 엄청난 재정을 쏟아 붇는 것일까? 철도가 창출하는 사회적 이득이 눈에 보이는 적자를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철도 교통은 철도 이용자뿐만 아니라 철도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혜택을 준다. 만약 서울시에 지하철이 없거나 8% 수송분담률을 담당하는 경부선 화물열차의 수송을 도로로 전환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사회는 교통 혼잡비용, 사고 처리비용, 도로 유지보수비용, 도로 추가 건설에 따른 건설비, 국토 파괴에 따른 손실비용, 환경오염 비용, 유류비용 등을 부담해야 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사회적 비용은 철도 적자액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스웨덴은 이런 비용을 계랑화해 '사회경제적 한계비용'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즉 철도의 사회적 기여도만큼 선로 사용료를 면제해주는 정책을 도입하여 지속 가능한 경영을 꾀하고 있다. 우리 국토부도 수년 전 철도의 사회경제적 창출 비용에 대해 연구용역을 실시했지만, 상당히 고무적인 결과가 나왔음에도 이를 창고 한편에 버려두고 있다.

KTX로 철도공사 수익 창출한다더니, 이제와 민영화?

국토부가 철도 부실을 소리 높여 강조하면서 내놓은 대안은 결국 민영화다. 수서 발 KTX 민영화를 통해 경쟁 체제가 도입되면, 이에 자극받은 철도공사가 경영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생력을 갖게 된다는 단순 논리가 철도 정책 담당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나 불과 2년여 전인 2010년 국토부는 지금과는 정반대의 논리를 폈다. 국토부는 철도공사가 수서 발 KTX를 개통하면서 철도공사의 재정이 상당히 호전되어 철도 적자 해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했다.

철도공사의 재무구조를 호전시키려면 우선 수서발 KTX 개통으로 한계에 다다른 서울역 중심의 선로 포화 상태를 해결해야 한다. 이용객들을 분산해 새로운 수요를 촉발시켜야 한다. 그래야 국민 부담이 줄어든다. 그러나 수서발 고속철도가 창출하는 수익을 재벌기업이 독차지하는 순간 철도공사의 재무구조 개선은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수도권 동남쪽의 열차 이용객 분산으로 철도공사의 수익성은 심각하게 떨어질 것이다.

철도 민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우선 영세한 영업 길이를 나누어 통합의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없다. 관제 우선권과 선로 배분권을 놓고 운영기관들도 첨예하게 대립할 것이다. 시설공단과 운영기관들은 선로사용료와 유지보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할 것이다. 영국의 철도 민영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생긴 뒤에도 책임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결국 시민은 철도를 근심‧걱정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떠올리게 될 것이다.

적자를 줄이고 효율을 달성한다는 명목하에 진행되는 철도 민영화는 실상 한국 철도의 재앙이다. 분단으로 인한 고립으로 한국은 섬과 다름없는 세월을 보내왔다. 겨우 3500여km의 영업 길이는 철도의 도약을 막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남북 평화협력, 대륙철도 연결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국 철도가 내실 있게 발전해야 한다. 철도의 시대적 사명을 외면한 채 반도 남쪽의 철도 노선을 이리저리 쪼개어 재벌의 수익창구로 전락시키려는 국토부의 방침은 한국 철도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국토부는 철도가 국민을 위해 거듭날 수 있도록 미래지향적 철도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맹목적인 경쟁 논리와 민영화를 통한 해법은 이미 유통기간이 지난 처방이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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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홍 '종북 타령' 겨우 이런 사람을 위해?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가 대놓고 트위터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재명 성남시장,김성환 노원구청장을 종북성향의 지자체장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퇴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정미홍씨는 19일 오후 자신의 트위터에 "서울시장, 성남시장, 노원구청장 외 종북 성향의 지자체장들 모두 기억해서 내년에 있을 지방선거에서 반드시 퇴출시켜야합니다. 기억합시다"란 트윗을 올렸는데, 이런 그녀의 글에 이재명 성남시장은 "방치와 관용은 다르다. 토론과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기본질서를 확보하기 위해 법적 조처를 시작하겠다"며 강력 대응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사실 정미홍씨의 종북 발언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지난 4.11총선에서도 창원시 의창구 새누리당 박성호 후보 지지유세에서도 "조선로동당 당원인지 대한민국 국민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며 망언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정미홍씨는 또다시 색깔론을 들고 나오면서 내년에 있을 지방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지자체장 낙선을 유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녀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좋은 후보는 누구일까요?

' 겨우 이런 후보들을 위해 선거유세를 했나?'

정미홍씨는 지난 4.11총선에서 '정미홍과 함께하는 2012 응원버스'라는 행사를 통해 새누리당 후보들을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 박사모 카페 등에 올라온 '정미홍과 함께하는 2012응원버스' 안내문.

 


'깨끗한 정치를 위한 국민연대' 및 '정미홍과 함께하는 2012응원버스' 안내문을 보면 '깨끗한 정치, 반듯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유권자 운동'을 시작하면서 새누리당의 좋은 후보를 선정하여 이들을 국회로 보내기 위해 응원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은 "좋은 후보들이 많이 있겠지만, 저희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몇 명의 후보를 선정했습니다. 이들은 ▲새누리당 부산 사상의 손수조 후보 ▲부산 사하갑의 문대성 후보 ▲광주 서구을의 이정현 후보 ▲세종시의 신진 후보 ▲서울 강남을의 김종훈 후보 ▲경기 안산상록갑의 박선희 후보 ▲경기 분당을의 전하진 후보 ▲경남 창원시 의창구의 박성호 후보 ▲포항 남구·울릉군의 김형태 후보 등 9명입니다."라면서 9명의 새누리당 후보들을 결정하고 이들의 유세를 돕기 위해 지역에 내려가 후보와 함께 지역유세를 펼쳤습니다.

정미홍씨가 지원유세를 했던 이 아홉 명의 후보가 진짜 좋은 후보들이었을까요?

 

 

 



부산 사하갑의 문대성 후보는 국민대 박사학위 논문 표절로 새누리당에서 탈당 권고를 받고 탈당한 사람이고, 전하진 후보는 국회 개원 전에 초선의원으로 스펙타파라는 행사를 주최하면서 거액의 기업협찬금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냈다가 행사가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조선로동당 당원' 운운하며 색깔론을 펼치면 지원유세를 했던 창원 박성호 후보는 공식 후보자 방송토론회에 계속 불참했던 인물인데, 토론 불참 사유가 '4대강 사업과 롯데백화점 비정규직 해고 사태'같은 '민감한 질문은 빼달라'는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박선희 안산시 후보는 토론회 도중에 도망을 갔던 후보였고, 포항 김형태 후보는 제수 성추행 사건으로 얼룩진 인물로 현재 사전 선거운동 혐의로 1심에서 징역1년 집행유예 2년의 당선무효형 판결을 받고 있는 후보입니다.

결국, 정미홍씨가 깨끗한 정치,건전한 보수를 주장하며 선거유세를 했던 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불법을 저지르며 후보 자질을 의심케 하는 후보들이었습니다.

' 다른 지역에서 부러워하는 지자체장을 왜 싫어하지?'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하고 난 이후 서울시는 많은 변화를 보였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는 점입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장면, 출처:뉴시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2012년 3월에 비정규직 종사자 2,916명 중 상시 지속업무에 종사하는 1.054명을 정규직(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호칭도 '단순잡역조무인부'가 아닌 '공무직'이나 '시설관리원'으로 변경해 이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소속감을 높이기도 했으며, 비대상자도 수당 지급 등 처우 개선을 하기도 했습니다.

취임 첫날부터 서울시내 초등학교 5~6학년 59만명을 대상으로 친환경 무상 급식을 시행하고, 서울시 부채를 줄이는 노력과 성과를 보이는 박원순 시장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엠피터'는 서울을 떠나 제주에 온 것을 후회한 적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재명 성남시장, 출처:연합뉴스

 


이재명 성남시장은 취임 후에 시장실에 CCTV를 설치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장실에 오는 사람이 너도나도 봉투를 주면서 압력을 행사하려고 해서 아예 CCTV를 설치해 사전에 막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성남시 인사를 단행하면서, 국회의원이나 고위직 등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통해서 인사 청탁을 했던 과장과 팀장급 승진대상자 4명을 탈락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시장은 새누리당 소속 성남시의원들의 보이콧으로 성남시 예산이 마비되자 긴급조치인 선결처분권을 행사해서 당장 시급한 사업을 먼저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무료급식소가 아니면 굶어야 하는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 운영비와 공공근로사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저소득층, 방학이라 어디 갈 곳도 없는 지역아동들을 위한 센터 운영비,추운 겨울 추위를 피해 경로당을 이용하는 노인들을 위한 경로당 운영비 등은 새누리당 소속 시의원들 때문에 1월1일부터 지급이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재명 성남시장의 선결처분권 발동으로 겨우 지급되고 있습니다.

 

 

▲노원구에서 진행하려고 했던 항홍구 성공회대 교수 특강. 출처:노원구청

 


노원구청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인문학 특강'을 노원구에서 진행하려다 보수 시민단체의 반대로 강연주최를 변경했습니다. 1월 7일 모집을 시작하자마자 3일 만에 정원 100명을 초과해 200명이 추가 신청한 한홍구 교수의 특강이 '종북타령' 논리에 밀린 것입니다.

돈을 내고 강좌를 신청해 듣는 특강을 단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토록 색깔론으로 공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종북'은 어떤 실체를 갖고 있을까요?

' 친일세력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들고 나온 '반공'

대한민국에서 '종북','빨갱이'라는 말은 죽음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대한민국에서 '종북','빨갱이'는 철저하게 법의 구속을 당하는 범죄적 행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법의 구속이 과연 타당한가는 의문이 들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종북','빨갱이'는 철저하게 권력에 반대하는 국민을 탄압하는 용도로 사용됐습니다.

 

 

▲한일협정비준 반대 학생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

 


1965년 경찰은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권석충군을 반공법위반등혐의로 구속합니다. 이유는 동국대학생들이 한일협정비준무효 시위를 벌일 때 사용한 "태우자 매국문서 세우자 민족정기"라는 현수막과 "매국노는 자책하고 민족 심판받아라"는 구호가 불온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문안의 초안자인 권석충군을 구속한 것입니다.

한일협정비준이 잘못됐다는 문구를 만든 것만으로 반공법으로 구속됐던 나라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당한 양민의 유해를 가족이 보고 우는 장면.

 


'수원, 인천, 시흥, 평택, 여주, 이천, 안성, 음성, 진천, 청원, 보은, 옥천, 영동, 괴산, 서산, 예산, 당진, 공주, 부여, 대전, 익산, 군산, 정읍, 나주, 진도, 해남, 여수, 문경, 예천, 칠곡, 울진, 영덕, 영천, 포항, 경주, 경산, 군위, 대구, 청도, 상주, 김천, 밀양, 양산, 울산, 부산, 김해, 함안, 마산, 통영, 거제, 진주, 사천, 하동, 남해, 거창, 함양, 제주'

위에 열거된 지명은 한국전쟁이 나자마자 정부가 '요시찰인'검속령을 내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을 학살했던 장소들입니다. 보도연맹학살로 전국에서 15~20만 명의 양민이 학살된 것으로 조사됐는데, 보도연맹은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보도연맹강령과 조직표.

 


오제도,선우종원,장재갑 등 사상검사에 의해 주도된 '국민보도연맹'은 사실상 내무장관과 국방장관이 주도한 정부단체였습니다.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제정된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따라 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는데, 이 숫자를 차지하는 사람 대부분은 공무원 실적 올리기에 동원된 평범한 양민들이었습니다.

정부가 주도했던 보도연맹에 이름만 올려놓았던 양민은 전쟁이 나면서 이승만이 단지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협조할 것"이라는 의심만으로 학살당했던 것입니다.

 

 

▲해방후부터 백범 김구 암살까지의 정치 상황. 출처:경향신문

 


한국에서 반공이라는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해방 후 나왔던 정치적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우후죽순처럼 정당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당시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이 부상하면서 제일 두려움을 느낀 계층이 친일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민당'으로 몰려들었고, 이승만이 귀국하면서 그와 손을 잡게 됩니다.

김구와 이승만은 단독정부안을 둘러싸고 대립을 벌였는데, 당시 이승만과 친일파들은 백범 김구가 연립정부수립을 위해 김일성과 협상을 벌인 일을 가지고 반공이데올로기로 공격했습니다. 일제잔재와 친일파 전면청산을 내세웠던 김구와 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낀 친일세력은 김구의 '연립정부안'을 '친공'으로 몰아세웠고, 이는 지금껏 반공의 논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반공'은 진정한 공산주의와의 투쟁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친일파의 생존 전략의 하나였고,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상대방의 주장을 막기 위한 아주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단지 이제는 '반공'이라는 단어보다 '종북'이라는 그럴듯한 단어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 차이일 뿐입니다.

흔히 종북타령을 하는 사람들이 전라도가 빨갱이들의 천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 현대사를 보면 오히려 대구가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지역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사상이라는 것도 시대의 흐름에 불과하건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실체가 없는 '종북'타령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정미홍이 이재명 시장을 고소하겠다는 트윗. 출처:정미홍 트위터

 

정미홍씨는 이재명 성남시장이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트윗에 대하여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하겠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미홍씨는 이미 명예훼손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던 인물입니다. 정미홍씨는 2000년 4.13 총선에서 정대철 후보의 개인 유세를 하면서 박성범 후보에 대해 "결혼식 때 자식들이 한명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등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었습니다.

정미홍씨는 새누리당 박선희 후보를 지지하면서 "불법을 저질렀는지, 어떤 국가관을 갖고, 소신을 지켜왔는지를 잘 생각해서 선택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좋은 후보로 선정하고 선거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비교해서 원순 서울시장,이재명 성남시장,김성환 노원구청장이 어떤 불법을 저지르고 그들이 과연 무슨 이적행위를 했는지 제대로 '공부'좀 하고 말을 했으면 합니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은 좋게 하나 마음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한다는 뜻인데, 아나운서 출신으로 언변은 뛰어난 정미홍씨의 발언은 불과 수십 년 전에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빨갛게 색칠할 수 있는 '종북'타령을 우리 사회에서 정녕 퇴출시킬 수는 없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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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 4주기... 철거민 희생자 묘역에 추모 행렬

"아빠를 테러범으로 몬 이 정부가 싫다"

[현장] '용산 참사' 4주기... 철거민 희생자 묘역에 추모 행렬

13.01.20 20:04l최종 업데이트 13.01.20 20:04l

 

 

용산 참사 4주기 철거민 희생자 추모 행사가 20일 낮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 모란공원에서 유가족과 철거민단체 회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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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이 가장 두려운 건 시간이 흐를수록 용산참사가 묻히고 잊히는 것입니다."

고 이상림, 양회성, 이성수, 윤용헌, 한대성. 이들의 맺힌 한이 안 풀린 탓일까. 그 죽음을 그냥 가슴에 묻기엔, 기억에서 지우기엔 4년은 아주 짧았다.

지난 2009년 1월 20일 용산 남일당 망루에서 숨진 철거민 유가족과 동지들이 그 무덤 앞에 섰다. 20일 낮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용산 참사 4주기 참배 행사는 전날 1500여 명이 참석한 범국민추모대회 못지않게 북적였지만 유가족들의 쓸쓸함을 달래진 못했다.

"5주기엔 아들과 함께 제사 지냈으면..."

중구 순화동 철거민으로 용산 지원 나갔다 숨진 고 윤용헌씨 부인 유영숙(53)씨는 두 자녀가 함께 오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했다. 유씨는 "두 아이가 이 자리가 싫다고 해 오늘은 참석하지 못했다"면서 "나도 남편을 잊지 못하고 죽음을 마주하지 못하는데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면 이 자리에 못 오겠다고 하겠는가"라며 눈물을 훔쳤다.

유씨는 "남편을 학살한 이명박 정권은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 우리 아빠를 테러범으로 내몰았던 이 정부가 싫다"면서 "용산을 잊지 말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책임자 처벌 때까지 같이 해 달라, 그때는 우리 아이들이 아빠의 죽음과 현실을 마주하면서 여기 같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용산참사 4주기 참배 행사가 열린 20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철거민 희생사 고 윤용헌씨 부인 유영숙씨가 남편 묘소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유씨는 이날 두 아이가 이곳에 오기 싫다고 해 참석하지 않았다며 더 안타까워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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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최고령 희생자인 고 이상림씨 부인이자 구속자 이충연씨(용산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 징역 6년 선고) 어머니인 전재숙(71)씨에겐 감옥에 있는 아들의 빈자리가 커 보였다. 전씨는 "4년이 흘렀지만 우리 마음엔 2009년 1월 20일로 멈춰있다, 그동안 달라진 게 없고 (아들은) 4년째 추운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구속자들 석방시켜 다음 5주기엔 아들이 아버지 제사를 함께 모실 수 있도록 열심히 앞장서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아들과 함께 참배객을 맞은 고 이성수씨 부인 권명숙(51)씨는 "며칠 전에 제삿밥 먹으려고 꿈속에 나타났다 보다, 배고프다고 하더라"고 울먹여 주변을 숙연케 했다.

권씨는 "유가족들이 최고 두려워하는 건 시간이 흐를수록 용산참사가 묻히고 잊히는 것"이라면서 "짓밟을수록 단단하게 굳어진다고 사람들이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고 묻어가지 않는 걸 보고 희망 갖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끝까지 같이 해달라"고 당부했다.

"용산 참사는 이명박정권 정치적 목적의 학살"

이날 참배 행사에는 용산 참사로 구속된 철거민 8명 가운데 지난해 처음 가석방된 김대원, 김재원씨를 비롯해 전국철거민연합회, 인권운동사랑방, 유가협, 문화연대, 쌍용차노조, 한진중공업노조 등에서 1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을 기렸다.

조희주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공동대표는 "시민과 노동자들이 관심을 갖고 언론들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데 현 정권과 박근혜 당선자 인수위만 용산 학살에 대해 어떤 답도 내놓지 않고 있다"면서 "이 정부에 뭘 기대겠나, 노동자, 시민 단결하여 우리 힘으로 구속자 석방시키고 진실 규명하고 재개발제도개선법 만들어 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탐욕의 개발 앞에 인권의 망루, 시대의 망루에 올랐던 ○○○ 열사... 2009년 1월 20일 경찰의 살인 진압으로 사망"

'민중열사'로 거듭난 용산 철거민 희생자들 비석 뒷편에 적힌 글이다. 사망 직후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병원 영안실을 떠나지 못했던 희생자들 시신은 숨진 지 355일 만인 지난 2010년 1월 9월에야 이곳 모란공원에 나란히 묻혔다. 2주기인 지난 2011년부터는 이들 5명이 서로 팔짱을 끼고 달리는 모습을 담은 철 구조물로 만든 추모비가 고인들의 넋을 달래고 있다.

부동산 경기 불황 여파로 용산 개발은 잠시 멈췄지만 용산 참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용산 참사의 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 <두개의 문>이 7만 관객을 동원하며 화제를 뿌렸다.

김승호 전태일노동대학 대표는 "용산은 아직도 재개발되지 않고 있다"면서 "당시 공사를 하려고 특공대를 투입한 것인지, 이명박 정권이 촛불 투쟁에 놀란 나머지 자기들 힘을 과시하려고 철거민에게 특공대 투입해 학살한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꼬집었다.

김 대표는 "재개발에 꼭 필요해서 특공대를 투입한 게 아니라 다른 정치적 목적을 가진 학살"이라며 "'용산 참사'가 아닌 '용산 학살'로 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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