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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저 교황입니다" ...나에게도 전화가?

"여보세요, 저 교황입니다" ...나에게도 전화가?

[해외리포트] 베네토 신학원 총장신부가 본 프란치스코 교황

13.10.29 16:31l최종 업데이트 13.10.29 16:36l
신수영(irene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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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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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교황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적인 행보가 화제가 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난국의 혼란속에 잔뜩 우울해진 이탈리아인들에게 교황의 이같은 행보는 신자는 물론 비신자들에게까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난민들에게 휴대폰과 전화카드 선물한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초에 있었던 이탈리아 '람페두사'섬의 처참한 아프리카 난민들의 익사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갔던 것을 비롯해, 바티칸으로 돌아와서는 구출된 생존난민 159명 전원에게 휴대전화와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전화카드를 함께 보내주었다.

교황 측 대변인 몬테네그로 신부의 발표에 따르면 생존 난민들이 고국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과 직접 통화를 통해 생존을 알리고, 그들이 겪는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배려 차원에서 마련한 휴대폰이라고 한다.

그와 함께 이번에 알려진 또 다른 사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2년 7월 유럽의회에 제소되었던 람페두사의 열악한 난민수용소 개선을 위해 실질적으로 힘을 썼다는 점이다. 그는 아이를 위한 수유시설과 운동장, 놀이시설 마련을 제안하는 등 세밀한 부분까지 직접 챙겨, 이를 개선시켰다. (그는 올 3월 교황취임이후 있었던 바티칸의 첫 공식외부 방문지로 람페두사 난민수용소를 정해 7월 8일 난민들을 방문, 어려움을 청취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었다.)

지난 12일 현지언론 보도에 따르면, 교황은 베네치아 근교인 메스트레에 사는 할머니에게 200유로(약30만원)를 송금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한 자신의 남편을 간호하러 가던 중 버스에서 넘어지면서 50유로(7만 5000원)가 들어있는 지갑을 분실했고 아무런 연고자가 없는 자신과 남편의 딱한 사정을 바티칸에 호소했다. 이에 교황이 즉시 자비로 할머니에게 돈을 송금하고, 콘라드 크라예스키(Konrad Krajewski) 추기경을 보내 할머니의 근황과 어려움을 점검하기도 했다.

올 여름 <라누오바> 신문에 게재돼 화제가 됐던 또 다른 소식은 베네치아 근교 파도바시의 한 대학생이 교황에게 보낸 진로상담편지에 대해 교황이 직접 청년에게 전화를 걸어 자상한 조언을 해준 것이다. 그 청년은 베네토 교구의 교황방문팀의 일원으로 바티칸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당장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민을 교황에게 직접 털어놓는 편지를 보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름 없는 천주교 일반 평신도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깜짝 놀라게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열심히 살아가는 평신도들과의 직접 소통을 통해 그들이 느끼는 어려움과 건의내용을 접수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범한 자들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경청함으로써 그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행동을 보여주거나 혹은 재치있는 한마디로 큰 웃음을 주고 있다. 현실에서 항상 함께 하는 교황을 온몸으로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탓에 교황은 공식석상에서 고상하게 다듬어진 발표문을 제쳐놓고, 즉석에서 자신의 진심을 담은 연설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교회내 성직자들을 향한 파격적인 조치 또한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9월 교황은 모든 주교좌 성당의 교구장급 신부들의 특별직함(monsignore)의 사용을 금했다. 행정직 신부들에게 그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직함을 금하며, 모두가 똑같이 '신부'로만 호칭받도록 지시했다. 직함이 아닌, 역할에 충실할 것을 당부한 조치다.

이달 중순 <코리에르> 신문은 교황의 아르헨티나 추기경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강론 어록들을 모은 내용을 책으로 펴내 구독자들에게 배부하기도 했다.

종교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지식인을 주독자층으로 가진 <코리에르>의 이러한 시도 역시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평가받고 있다. 더욱이 취임한 지 얼마되지 않은 교황에 대한 어록 출판이 비판성향이 강한 언론사에서 제일 처음 시도됐다는 것은 그만큼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자와 비신자들 모두에게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얻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 이탈리아인들에게 교황은 더 이상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곳의 그분'이 아니다. 따뜻하고 친근하게 내 문제를 함께 염려해주는 친구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

"교황의 행보는 지극히 성서에 충실한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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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교황인 베네딕스 16세와 베네토교구 신학원 루치오 칠리아 총장신부가 다른 신부들과 함께 찍은 사진. 베네딕스 16세(가운데) 오른쪽 옆이 인터뷰를 진행한 루치오 칠리아 총장신부.
ⓒ 신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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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현상과 교황의 면모에 대해, 바티칸을 빈번하게 방문해 교황을 자주 접하는 베네토교구 신학원 루치오 칠리아(L.Cilia) 총장신부를 이달 초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베네토지방은 마가복음을 쓴 마가성인의 첫 복음전파 사역지였던 '아퀼레이아'(Acquileia)가 있는 곳이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성당에는 마가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2011년 베네딕토16세 교황은 베네치아를 방문해 '세계로의 말씀파송의 도시'로 선포하기도 했다. 그는 차기교황이 유력했던 스콜라 추기경과 함께 필자의 어머니에게 세례와 축성을 베풀어 언론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개혁이 시작되었다고 환영하는 세력이 있는 반면에, 기존의 바티칸 전례를 깨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교황은 실천하는 신앙, 생활 속에서 함께 하는 신앙을 외치며 천주교가 더이상 형식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에 얽매여 본질적인 소중한 것들에 대해 소홀함이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교황의 행보는 모든 게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행동들입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보는 건 현 세태가 그만큼 비상식적이기 때문이겠죠. 또한 교황의 행동들은 개혁과 전통 혹은 진보와 보수 등으로 구분할 성질도 아닙니다. 지극히 기독교적인, 성서에 충실한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늘 군중들과 함께 계셨고,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함께 해주셨으니까요. 이제는 삶속에서, 일상 생활에서 함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저 개인적으로는 두손 두발 들어 기꺼이 환영하는 바입니다. 천주교에 있어서 늘 필요했던 부분이기도 하거든요."

- <가톨릭시민사회(Civilta Cattolica)> 예수회신문과의 공식인터뷰에서 대담자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A.Spadaro)에게 교황은 "신이 동성애자, 낙태, 이혼자들을 본다면 과연 신은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랑으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할까 아니면 그들을 거부하고 내쫓으며 비난, 정죄만을 하겠는가, 우리는 '긍휼함'(misericordia)을 갖고 그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죠. 이것에 대해 어떤 의견이신가요? 이것이 확대해석되는 면도 있는 것 같은데요.
"물론 천주교 교리에 있어서는 낙태, 피임, 동성결혼 등은 허용치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딱히 옳고 그름의 문제로만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가 있다면 교회는 병원처럼 그들을 살려주고 회복시켜주는 것이 우선이죠.

고통속에 신음하는 자에게 왜 건강수칙, 안전규칙을 지키지 않아 이 지경이 된거냐고 마냥 꾸짖고 정죄만 한 채 외면하는 게 과연 맞을까요? 사회의 온갖 편견과 종교의 잣대로 이미 아픔을 겪는 그들을 교회와 신앙인들마저 내치고 비판만 하게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요? 신앙인들이 그같은 태도를 취한다면 이것은 자신의 믿음을 배반한 것이고 안 믿는 자들보다도 더 악한 행위라는 것이죠.

성서에도 예수님은 사람들이 강간하다 잡혀온 여인을 데려오자 '너희 중 죄없어서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에 모두들 슬금슬금 자리를 떴고, 그렇게 여인을 구하신 후에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교황은 모든 것에 우선해서 긍휼함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신앙인들은 상대를 향해 정죄해대던 손가락질의 방향을 우리 자신에게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죄인일뿐입니다. 정죄함을 멈춰야 합니다. 그건 교만이고 그게 더 무서운 죄악입니다. 특히 신앙인들은 종교를 빙자한 정죄를 멈춰야 합니다. 아고스티노 성인의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타입의 죄인이 존재할 뿐이라고. 하나는 자신의 실수와 연약함을 인정하는 죄인이 있고, 또다른 하나는 자신이 전혀 죄인이 아니라면서 강퍅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죄인.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일뿐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교황의 모습 특히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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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
ⓒ 위키피디아 공동자료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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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장신부님은 바티칸을 자주 방문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황에 대해 감명을 받았거나 인상 깊은 부분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
"감명 받은 점은 교황이 바티칸의 교황 전용 아파트와 전용 리무진 자동차를 사양하고 바티칸의 다른 일반 방문자들이 머무는 싼타 마르타 수도원 건물에서 다른 사제들, 수도사들과 함께하는 평범한 공동생활을 선택한 부분입니다. 바티칸의 교황 아파트는 외부와 차단된 구중궁궐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외부의 의견을 듣고 수렴하기 힘든 곳으로 자칫하면 교황 스스로 외부와 차단될 소지가 있어요. 이런 폐단을 고치기 위해서 교황 스스로 일반수도원에서 기거하며 그들과 똑같이 먹고 생활하는 등 일체의 특별대우를 사양하고 있지요. 교황이 그렇게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제로서 인상 깊은 부분은 그의 겸손함입니다. 특히 전임교황에 대한 겸손함이 인상적입니다. 이번 7월 5일 발표한 교황의 첫 신앙회칙, '신앙의 빛'(Lumen Fidei)이 그렇습니다. 신앙의 중요성과 의미를 일깨우는 회칙으로 역대 모든 교황들이 자신의 회칙을 발표했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자신만의 생각을 드러내는 회칙을 발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사임을 하느라고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던 전임 교황의 회칙, 영원히 미완성으로 폐기될 뻔했던 전임자의 회칙을 과감하게 수용해 자신의 것과 함께 세상에 드러나게 했습니다. 전임 교황에 대한 배려와 예우가 깃든 겸손함이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교황은 어느 것이 자신의 것이고, 어느 것이 전임교황의 것인지를 굳이 따로 나누지 않고, 함께 발표해 똑같이 존중 받도록 했습니다. 그의 겸손함이 더 돋보이는 부분이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직자, 사제들은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자들'이어야지, 그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자가 되어선 안 된다고. 그리고 그 점을 자신이 몸소 실천하고 계십니다. ('신앙의 빛' 회칙은 80여쪽 분량의 4개장 60조항으로 구성돼 있다. 교황이 재임기간 중에 신자들에게 전하는 신앙의 회칙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 회칙에서 우리를 사랑으로 변화시켜서 세상에 대해 눈뜨게 하는 신앙의 힘과 가정의 존중, 겸손한 신앙, 타종교의 존중을 강조했다. )

- 독일에 있는 <오마이뉴스> 최서우 해외통신원이 질문한 내용입니다. 그간에 구설에 올랐던 바티칸의 '검은 돈' 연루사건에 대해선 어떤 입장이신지요. 물론 총장 신부님은 사제양성과 신학출판 담당 사역이시고, 행정과 무관해 대답이 곤란하시다는 걸 이해합니다만.
"곤란할 건 없습니다.(웃음) 바티칸에서 이 문제에 대해 솔직히 인정했고, 그 부분의 명확한 수사를 교황이 지시한 것으로 압니다.

물론 저는 사제양성과 성서해석과 출판담당인지라 깊이 알지는 못합니다. 단지 제가 아는 선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해외선교자금을 해외선교지에 송금하는 부분에 있어서 출처가 불분명한 돈들이 바티칸 계좌에 흘러들어온 것으로 압니다.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으면서 묵인한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 알지만 어떤 이유가 있어서 진상규명을 할 수 없었던 것인지, 혹은 관련된 성직자들이 있었는지 등등 모든 부분에 대한 조사를 교황이 요청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불미스런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고 드러나는 건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교회나 바티칸에 있어서도 당장은 곤혹스럽고 수치스런 일일 수 있지만, 되레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계기로 더욱 새롭고 건강한 모습의 개인, 교회, 바티칸이 될 수 있으니까요. 빛이 환한 곳으로 갈수록 미세한 먼지들이 속속 잘 드러나듯이, 어둠에 있으면 먼지는 잘 보이지 않잖아요. 문제를 문제로만 두지 않고, 그것을 교훈으로 다시 일어서는 자세가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끝무렵 총장신부님은 필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 이번엔 제가 질문해보고 싶은데요. 한국은 어떤가요? 개신교 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한국은 특정종교만이 아닌, 여러 종교가 함께 공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러자 이런 이야기가 돌아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 '신앙의 빛' 회칙에서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록 기독교(천주교, 개신교 포괄) 신자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능력과 힘을 넘어선 그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막연히나마 인정한다면 그는 이미 신앙인이라고 봅니다. 각자가 믿는 그 어떤 존재에 대해 추구하는 건 결국 진리이고 공동선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긴 시간 허심탄회하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교황전화 받으셨어요? 언제 전화가 올지 모르는거 아시죠? '여보세요? 안녕? 저, 교황이에요'하고 말이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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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민보가 아니라 박원순시장이 더 큰 목표

자주민보가 아니라 박원순시장이 더 큰 목표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3/10/29 [06:00]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이정섭 기자

서울시의 자주민보 등록취소관련 청문회에 참여하기 위해 자주민보 애독자 20여명과 함께 자주민보 이정섭 대표가 서울시청을 찾아갔으나 서울시에서는 청문회가 아니라 이정섭 대표와 서울시청의 관련 직원 3인의 청문을 실시한다며 애독자들은 청문을 방청하지 못한 채 이 대표만 참여하였다.

청문 후 이정섭 대표는 주로 서울시가 왜 자주민보 등록취소 행정소송을 제기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고 밝혔다.

“블루유니온이라는 보수 단체와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 등이 자주민보 이창기 전 대표의 국가보안법 위반 판결을 이유로 자주민보에 발행정지나 폐간 조치를 취하라는 민원을 끊임없이 제기하였고, 그것을 즉각 이행하지 않자 서울시청 앞에서 자주민보를 감싸고 도는 박원순 서울시장은 종북시장이라는 등의 현수막시위를 여는 등 압박을 가했으며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언론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서울시에 무지막지한 압박을 가해오자 민원에 답변을 성실히 해야할 의무를 지닌 서울시로서는 박근혜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에 자주민보 폐간 사유가 있는가를 질의하여 사유가 있다는 답변이 와서 결국 자주민보 폐간 심판 청구소송을 제기하기로 방향을 잡고 그 사전 절차로 청문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번 청문에서 자주민보가 제출한 자료와 이정섭 대표의 답변을 서울시 문화예술과 심의위원들이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자주민보 폐간 심판 청구소송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조만간 그 심의 결과를 통보해 주겠다.”

이것이 서울시청 문화예술과 담당자들 발언의 개요인데 그 안에 담긴 뜻은 결국 자주민보에 대해 서울시에서 어떤 판결을 내리기가 곤란하니 법원에 그 판단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정섭 대표가 청문장에서 서울시의 행정심판 소송 제기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한 자주민보 의견서(법무법인 정평 김승교 변호사 등이 무료로 작성해 줌)를 제출했지만, 이 의견서의 취지가 받아들여져 서울시청 담당자들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 한 서울시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것이 확실해 보였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행정소송 제기 사유가 있다는 대답을 서울시에 준 상태에서 서울시가 이를 거부하고 무혐의처분을 한다면 보수진영이 더욱더 서울시를 압박할 것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시의 태도가 더욱 아쉽다는 것이다.

현 문화체육부는 박근혜 정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정부기관인데 거기에 의견을 묻는 순간 서울시의 길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다.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처리를 할 권한을 가진 서울시가 왜 이에 대해 문화체육부에 의뢰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이는 지방자치시대에 역행하는 처사이며 부당한 일부 보수세력들의 압박에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한발 물러서면 두발 세발 물러서게 되고 종당에서는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만고의 진리를 왜 잊어버렸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만약 자주민보가 행정소송에서 이겨 기각판정을 받는다면 서울시가 종북 공세를 모면하기 위해 죄 없는 언론사를 법정에 세운 것으로 될 것이다. 책임 회피, 지방자치제 정신을 저버렸다는 기록은 영원히 지울 수 없으며, 보수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여 서울시가 지키고 육성해가야 할 자기 지역의 언론을 길고 어려운 고난의 법정으로 내쳤다는 사실은 이성이 있는 서울시민들의 가슴에 가시처럼 남아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서울시를 압박한 보수진영의 의도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든다.
개혁진보진영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오른 박원순 시장을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보수진영이었으니 이런 흠집에 만면 가득 미소를 띄울 것이 자명하다.

특히 오늘도 거의 50여명에 가까운 보수단체 사람들이 총동원 자주민보 기자회견장 옆에서 '서울시장은 반드시 자주민보 폐간시키라'하며 대형 엠프를 동원하여 외쳐댔다.

자주민보 정도의 작은 언론사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했다기에는 너무 큰 움직임이다.

훗날 만약 대선 토론이라도 열리는 날엔 보수진영 후보는 이 문제로 지방자치제 정신을 저버리고 언론자유를 억압한 시장이라는 공격을 가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과연 있을까.
 
▲ ©이정섭 기자

그렇다고 이 문제의 본질이 서울시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자주민보에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종북시장이라는 억지 논리를 만들어 서울시를 아주 야비하게 궁지로 몰아간 보수진영에 1차적이고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블루유니온과 어버이연합 등 보수세력들의 자주민보 관련 서울 시청 기자회견에서 나온 연사들은 “자주민보 폐간은 시작일 뿐이다. 자주민보를 깨끗이 폐간시키고 차례차례 하나 하나 모조리 청소해버리겠다. 다시는 진보 언론이 이 땅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고 핏대가 붉어진 목으로 소리 높이 외쳤다.

어쩌면 이런 반민주적이고 독재적인 무지막지한 주장을 백주대낮 서울 한 복판 시청 앞에서 할 수 있는지 가슴이 아팠다.

블루유니온 권유미 대표를 만나 인사도 나누고 대화도 잠시 해보았는데 대화도 잘 되고 예의도 있어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진보-보수 진영사이의 오해와 갈등을 풀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마이크를 잡자 그렇게 돌변했다.

어쨌든 보수단체의 민원과 고발, 그리고 압박 시위, 그 후 이어지는 경찰 검찰의 수사, 이를 대대적으로 보수언론들이 보도하여 종북 조직, 종북 언론이란 멍에가 들씌워져 고난의 길로 내몰리는 공식과 같은 보수세력의 굿판은 앞으로도 더욱 더 현란한 춤사위를 보여줄 것이 확실해보인다.

이 굿판의 제물이 어찌 진보진영만이겠는가. 어쩌면 개혁진영의 와해, 나아가 진보 개혁진영의 갈등이 정작 제상에 올리려는 제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용한 무당도 끝도 없이 춤을 출 수는 없다. 제 춤에 취해 계속 뛰다간 심장마비에 걸리기 십상이다. 부디 이성을 차리기 바란다.


이제 자주민보는 본격적인 폐간 저지를 위한 법정 투쟁준비에 돌입했다. 청문 직후 변호사 정식 선임하고 편집위원과 자문위원이 모여 확대 대책회를 진행했다.

하여 자주민보폐간저지범국민대책위를 더욱 확대 강화하고 실질적인 언론자유수호, 공안탄압분쇄를 위해 투쟁에 나설 것이며 공안탄압을 받고 있는 제 단체들과 연대의 끈도 더욱 튼튼히 엮어 애독자, 지지자들과 더욱 더 굳게 뭉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어갈 것이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하지 않는가. 어찌 되었건 오늘도 연합뉴스, 뉴시스, 뉴스1 등 3대 통신사에서 취재를 해갔다. 살다보니 이런 큰 언론사의 집중 취재도 받아보게 되었다. 작은 언론사이기에 자주민보가 회자되는 거야 나쁠 게 없다. 사실 자주민보는 위기와 역경에 익숙하다. 의연히 헤쳐나갈 것을 독자 여러분께 약속드린다.✍


* 청문이 열린 28일 보수단체가 서울시장에게 가하는 자주민보 폐간 압박 시위
이들의 그간 시위 장소와 발언을 종합해보면 공격의 촛점은 자주민보가 아닌 서울시장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 참 썬글라스를 좋아하는 사람들! ©이정섭 기자
▲ 블루유니온 권유미 대표 ©이정섭 기자
▲ ©이정섭 기자


*28일 서울시청 앞에서 진행한 자주민보폐간저지범국민대책위원회 기자회견
 
▲ ©이정섭 기자
▲ ©이정섭 기자
▲ 권오헌 공동대표 ©이정섭 기자
▲ ©이정섭 기자
▲ 자주민보폐간저지 범국민 대책위가 주최한 기자회견 참가자들 ©이정섭 기자
▲ 결의문 낭독하는 범국민대책위원회 청년 ©이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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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 쏘여도 끄떡없는 사막 쥐, 새 진통제 개발 열까

전갈 쏘여도 끄떡없는 사막 쥐, 새 진통제 개발 열까

 
조홍섭 2013. 10. 28
조회수 14053추천수 0
 

통증 전달 통로 차단하도록 진화, 전갈에 쏘여도 몇 초 문지르면 끝

사막의 드문 먹이 전갈 사냥 위한 선택…뺨 뻣뻣해지지 않는 치과 진통제 나올까

 

m1.jpg » 독침이 달린 꼬리를 들고 경고하는 전갈을 공격하려는 남방메뚜기쥐. 사진=매튜, 애쉴리 로

 

통증은 난로에 닿은 손을 재빨리 떼어내도록 한다. 우리 몸에 손상이 일어난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감각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통증의 진화가 광범하게 일어난 것은 이 반응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당연히 통증을 이용하려는 동물도 있다.
 

자신을 해치려는 포식자에게 주입하는 독이 꼭 그 포식자의 조직을 파괴할 필요는 없다. 강력한 통증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멍해 있는 틈을 타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일시적이지만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동물들로는 해파리, 개미, 말벌, 거미, 전갈, 오리너구리, 쏨뱅이 등이 있다.
 

물론 독침에 대항해 고통을 둔화시키는 쪽으로 적응할 가능성도 있지만, 뜨거운 난로에 손을 오래 대는 것처럼 자칫 닥친 위험에 둔감해 치명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예상과 달리 고통을 둔화시키는 쪽으로 적응한 드문 사례가 발견됐다. 애쉴리 로 미국 텍사스 대학 오스틴 캠퍼스 진화 신경생물학자 등은 과학저널 <사이언스>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사막에 사는 쥐가 맹독성 전갈의 침을 이런 방식으로 무력화시킨다는 사실을 밝혔다.
 

m2.jpg » 독침에 쏘이면서 물어죽인 전갈을 바라보고 있는 남방메뚜기쥐. 사진=매튜, 애쉴리 로

 

m3.jpg » 전갈을 맛있게 먹고 있는 남방메뚜기쥐. 날카로운 전갈의 독침이 덧없어 보인다. 사진=매튜, 애쉴리 로

 

북아메리카 남부에 서식하는 남방메뚜기쥐는 매우 거칠어 메뚜기 등 곤충과 거미는 물론이고 다른 쥐와, 먹을 게 없으면 동족 쥐까지도 잡아먹는다. 이 쥐는 특히 사막에 사는 전갈을 즐겨 잡아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중앙아메리카가 주 서식지인 사막 전갈은 길이가 11㎝에 이르며 강한 독성을 지닌 침이 위협적이다. 이 전갈에 쏘이면 일반적으로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그런 고통이 여러 시간 지속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쥐는 전갈을 만나면 쏘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쏘이더라도 몇 초 동안 상처 부위를 쓰다듬은 뒤 공격에 나서 잡아먹는다.

 

 

연구진은 이 쥐에는 중추신경으로 통증 신호를 전달하는 통로에 특별한 아미노산이 있어, 이것이 전갈 독의 펩티드와 결합해 통로의 흐름을 차단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처럼 자신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통증 차단을 적응시킨 까닭에 대해 연구 책임자인 로는 “메뚜기쥐가 사막 전갈에 대한 내성을 진화시킨 것은 쥐의 서식지인 애리조나 사막에 풍부한 전갈을 잡아먹기 위해서였다. 먹잇감이 희박한 이 생태계에서 전갈은 정말로 가치있는 먹이 자원이다.”라고 <사이언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 쥐는 통상 다른 종류의 통증은 잘 느끼지만, 전갈 독에 노출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통증 감각이 모두 사라진다고 로는 밝혔다. 메뚜기쥐가 이처럼 통증을 전달하는 통로를 차단하는 능력을 잘 응용하면 선택적이고 비의존적인 새로운 차원의 진통제 개발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로는 말한다.
 

메뚜기쥐의 방식을 응용해 원하는 통증만 사라지고 다른 감각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 진통제가 개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치과에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마취주사를 맞은 잇몸 주변 뺨이 한동안 뻣뻣해지는 불편이 사라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Ashlee H. Rowe et. al.,Voltage-Gated Sodium Channel in Grasshopper Mice Defends Against Bark Scorpion Toxin, Science 25 October 2013: Vol. 342 no. 6157 pp. 441-446 DOI: 10.1126/science.1236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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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장 박승춘,‘변종 보수’ 민낯 보여주다

한국적 ‘변종보수’ 회피성 발언 아니면 황당한 궤변으로 일관
 
육근성 | 2013-10-29 10:13:1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대한민국에는 진정한 보수가 없다. 한국적 ‘변종 보수’는 태생적 모순을 안고 출발했다.

한국적 보수의 모순과 기형

보수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이승만 정권을 보수의 시발점이라고 말한다. 이것부터 모순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지키고 보존해야할 회고적 가치가 아니라 장차 만들어 나가고 추구해야할 미래적 가치였기 때문이다. 당시 자유민주주의는 형성되지 않은 낯선 이념이었다.

보수(保守)할 것 없는 보수세력은 모순의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이후 보수를 자처했던 세력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면서 권위주의를 실천해고, 국가와 경제개발을 빌미삼아 민주주의를 억압했으며, 냉전과 반공을 자유주의와 동일시하는 과오를 범했다. 한국의 보수는 이런 모순된 토양에서 기형적인 형태로 자라났다.

태생적 모순 때문일 것이다. 이 땅의 보수정권은 엄정한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지켜야할 가치를 고수하는 정통 보수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한국적 ‘변종 보수’는 산업화와 경제개발의 수행자가 되면서 많은 문제와 비리를 양산하며 정치를 혼탁하게 만들었다. 양식과 상식을 존중하고 공정과 원칙을 덕목으로 여기는 건강한 보수주의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국적 ‘변종보수’의 민낯 보여준 박승춘

한국적 ‘변종 보수’ ‘가짜 보수’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이 28일 국회 국감장에서 벌어졌다.

반 유신은 종북이고 6.15남북공동선언은 6.25전쟁보다 더 무서운 사변이며, 야당과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정일과 한패라는 주장을 담은 DVD 동영상을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부부처와 시도교육청 등에 대량 배포해 물의를 일으킨 박승춘 보훈처장이 피감기관 증인으로 나왔다.

박 처장은 자체 예산과 모처(국정원으로 추정)로부터 협찬을 받아 DVD와 책자를 제작해 안보교육을 빌미삼아 학생과 교직원 등을 상대로 편향적 사고를 주입시켜 왔다. 각 지역 보훈지청이 해당 교육지원청과 ‘나라사랑교육’ MOU를 체결하는 식으로 일선학교까지 파고들었다.

보훈처가 교재를 제공하고 강사를 알선해주면 교육지청은 대상학교를 선정하고 강사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같은 젊은층 우경화 공작은 국방부, 행안부 등의 협조로 예비군과 민방위 교육장에서도 이뤄졌다.

회피성 발언 아니면 궤변으로 일관

박 보훈처장은 문제의 DVD 협찬처가 어디냐는 의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끝까지 회피하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불법 선거 개입에 도움을 준 기관이 어디이고 누구로부터 지원을 받았느냐고 다그치자 박 처장은 뜬금없이 개인정보보호법을 들고 나왔다.

누군지 밝히려면 협찬자로부터 개인정보 제공에 대해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협찬자가 밝히기를 원치 않으니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국가가관의 선거 개입 정황과 위법 사실(기부금품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이 드러난 상황인데도 자료제출 거부의 명분으로 개인정보보호법을 들고 나온 것이다. 국감장에서 이런 궤변을 늘어놓은 건 국감 사상 초유의 일이다.

“곤란하다, 밝힐 수 없다... 검토해서... 확인해서”

국감 의원들의 계속되는 질문에 대해 피감기관 증인인 박 처장은 이런 식으로 답변을 피해 나갔다.

“(협찬처가 어디냐고 추궁하자) 거기에 대해서 말하기 곤란하다.”

“(협찬 관련 자료 제출 요구에) 검토하겠다고 했지 (요청한 자료를) 제출한다고 답하지 않았다.”

“(편향된 안보교육에 대해 따지자) 확인해서 오후에 답변하겠다... 말하기 곤란하다.”

“(김대중 대통령에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 판단도 확인해서 말하겠다.”

“(국정원으로부터 협찬 받았느냐고 묻자) 그것은 제가 밝힐 수 없다.”

냉전적 대치와 극단적 반공을 자유주의-민주주의와 구분하지 못하고 스스로 보수 중의 보수라고 착각하는 군 장성 출신 국가기관장이 국회에 나와 국민이 보는 가운데 ‘변종 보수’ ‘거짓 보수’가 어떤 모습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다.

그가 보여준 ‘변종보수’의 프레임

한국적 ‘변종 보수’는 영혼과 뿌리가 없다. 때문에 원칙도 양식도 흐릿하다. 지켜내야 할 가치와 철학이 박약하다 보니 근시안적 사고를 한다. 자신들에게 적합한 체제유지에 집착할 뿐이다.

박승춘 보훈처장이 그렇다. 상식과 양식, 진실과 가치보다는 이승만 정권 이후 형성된 ‘변종보수’의 프레임을 추종한다.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하고, 편향된 역사관을 젊은층에게 주입시키는 망동을 일삼으면서도 무엇이 잘못인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감 의원들의 질문에 피감기관 기관장이 저토록 황당한 언동으로 답변을 회피하는 건 국민을 우롱하는 거나 다름없다.

2011년 12월 그가 보훈처장 자격으로 광복회 워크숍에서 강연을 하며 한 말이다. 명백한 대선 개입이다.

“이 정도로 살게 된 것은 다 박정희 대통령 공이니 다가오는 대선에서 누구를 뽑아야 할지 다들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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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발굴 1등 공신은 '마을 어르신들'이었다

[인터뷰] 살구쟁이 유해발굴 현장에서 만난 석장리 사람들

13.10.28 22:09l최종 업데이트 13.10.29 00:37l
심규상(dj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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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째 문화재 발굴을 해온 석장리 주민들. 28일 공주 살구쟁이 유해발굴을 마친 후 한자리에 앉았다. 왼쪽부터 전은성(60), 김희환 (73), 박홍래(79), 김종근(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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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증말 고생들 했어유."

27일 공주 왕촌 살구쟁이에 묻힌 유해발굴이 마무리됐다. 1950년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짧은 생을 마감한 79구의 유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14일 동안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유해발굴 작업을 벌였다. 그래도 예상보다 작업 속도가 빨랐다. 유해 발굴 현장을 총지휘해온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비법(?)을 공개했다.

"40여 년간 발굴 현장을 누볐던 석장리 마을에 사는 어르신들 덕분입니다. 정말 베테랑이에요."

박 교수가 말한 '석장리 어르신들'은 김종근(76), 김희환(73), 박홍래(79), 전은성(60)씨 등 4명이다. 박 교수가 다시 이들을 치켜세웠다.

"한국의 어지간한 구석기 문화재 발굴현장은 다 참여했어요. 유물발굴에 관해서는 최고 전문가예요."

'석장리 어르신들'의 주업은 농업이다. 공주 금강변에 있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대대손손 땅을 일구며 논농사와 밭농사로 삶을 잇고 있다. 이들이 유물 발굴 최고 실력자라고?

이들의 얘기를 듣기에 앞서 공주 석장리에 대한 약간의 상식이 필요하다. 한반도 구석기시대 유물의 발굴은 1964년 공주 석장리 금강 변에서 시작됐다.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다던 학설을 보기 좋게 뒤집은 곳이 석장리다. 교과서에 처음으로 구석기 유물 분포지역으로 소개된 곳도 석장리다.

40년간 주업같은 부업, 우리는 '자칭 문화재발굴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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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리 주민이자 문화재발굴 숨은 실력자인 박홍래(79)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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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리 구석기 유물발굴은 1964년부터다. 박홍래(79)씨는 서른 살 때 석장리 유물 발굴 일을 처음 접했다.

"1964년에 석장리 유물발굴이 처음 시작됐어. 이전에는 동네에 품앗이 외에 품을 파는 일 자체가 읎었어. 내다 파는 건 나무뿐이었어. 산에서 나무를 해다 공주읍내에 갖다 팔았어. 구석기 유물발굴을 하는데 일꾼이 필요하니께 인근 동네사람들이 죄 동원됐지. 나무장사보다 돈벌이가 낫더라구. 그때부터 농사짓다 틈나는 대로 발굴현장에서 일당 받고 날품을 팔게 됐지."

같은 마을 김종근(76)씨가 얼른 박씨의 말을 받았다.

"처음엔 동네 처녀 총각까지 다 불러들였지. 발굴하는데 인력이 부족했어. 어떤 역할을 했냐고? 역할은 무슨… 그냥 땅 파고 또 파서 유물을 파내는 일이지."

인근 마을에 사는 김희환(73)씨는 스물네 살 되던 해부터 석장리 유물발굴 현장에서 일했다.

"기억에 남는 유물들이야 많지. 주먹도끼, 찍개, 몸돌… 발굴된 구석기 유물은 전부 인부들이 찾은 거야. 교수들이야 일 시키고 분석만 하지 직접 땅은 안팠으니까…."

박 교수와 인연을 맺은 곳도 석장리 발굴현장이다.

"박 교수님은 그때 대학원생이었지. 유해 발굴하러 와서 같이 일하면서 알게 됐으니… 세월 참 빠르네 그려."

단양 금굴-구낭굴, 제천 점말동굴, 청원 두루봉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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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리 주민이자 문화재발굴 숨은 실력자인 김희환(73)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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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된 유물발굴이 40년 동안 주업 같은 부업이 됐다. 우선 석장리 유물발굴이 1992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경험이 쌓이다보니 학계에서도 단순 노무자가 아닌 기술직으로 분류했다.

일반 노무자에 비해 일당도 높았고 현장의 대우도 달라졌다. 농사일을 하다가도 불러 주기만 하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이들의 손을 거친 문화재발굴 현장만 어림잡아 40여 곳이다. 교과서와 뉴스에서만 보고 들었던 지명이 이들 입에서 술술 쏟아져 나왔다.

"그걸 어떻게 기억해. 못하지. 대충 기억나는 곳? 어디 보자 경기도 연천 전곡리, 도라산역 부근, 단양 금굴-구낭굴, 제천 점말동굴, 청원 두루봉 동굴, 전라도 어디더라… 전국을 다 다녔지, 중국하고 러시아? 거긴 문화재 발굴하러 간 건 아니고 구석기 문화 학술 발표하는 데 따라가 봤어."

전문가들이 이들을 찾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지형에 따라 어디를 어떻게 발굴해야 하는지, 발굴 방법은 물론 발굴 기간까지 판단해 낸다. 그들만의 유물 발굴 노하우도 수두룩하다. 일례로 이들은 비가 올 때도 발굴작업을 할 수 있는 초간편 비가림 시설을 고안해 사용하고 있다.

"발굴 작업이 끝나면 집으로 두꺼운 책자로 만든 '발굴보고서'가 배달돼. 책장을 넘기며 '이건 내가 찾아낸 거고 요건 전씨가 발굴한 거고' 생각하지. 그땐 참 뿌듯하고 기뻐. 여러 학자들과 술 마시며 정도 많이 들었어, 돈 벌려고 한 일이지만 보람을 느끼지." (김희안씨)

"엉망이고 우리 눈에 안차... 인자 그만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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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리 주민이자 문화재발굴 숨은 실력자인 김종근(76))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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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도 속상할 때가 많다. 현장에서 사정을 잘 모르는 관계자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하지 않을 때도 많다.

"아이엠에프(IMF) 오고부터 노임 단가가 뚝 떨어졌어, 지금은 일반 근로자들하고 품삯이 똑 같아, 타지를 가도 숙박비에 담뱃값도 우리가 내야 돼. 근래엔 발굴하는 곳이 부지기수로 늘어나서 발굴작업도 대부분 직접 해, 하는 것 보면 다 엉망이고 우리 눈에 안차지…….우리도 나이도 있고 인자 그만해야지." (박홍래씨)

"석장리 땜이 품 팔아 애들 가르치고 어려운 시절 잘 보냈어, 고마운 일이었지, 근데 마을 농지가 대부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묶이면서 재산권행사에 제한이 많아, 4대강 공사한다고 금강변 농지 보상할 때도 다른 사람들보다 보상금이 한창 적게 나왔어, 땅값 시세도 옆 동네하고 평당 20만 원씩 차이가 나, 석장리 문화재가 주민들 발목을 잡으니 원……" (전은성 씨)

살구쟁이, 열네살 때 들었던 생생한 총소리

이들이 왕촌 살구쟁이 유해발굴에 뛰어든 것은 지난 2009년이다. 당시 발굴단장을 맡은 박 교수의 요청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유해수습만을 위한 발굴은 처음이었다.

"고인돌 주변이나 구석기 동굴에서 문화재 발굴을 하다 유해를 찾아낸 적은 있지, 그치만 이번처럼 유해만 무더기로 찾는 발굴을 한 것은 (2009년) 그때가 처음이야." (박홍래씨)

옆자리에 앉은 김씨가 소주잔을 벌컥 들이켰다. 목소리도 가라 앉았다. 그때의 꺼림칙하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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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리 주민이자 문화재발굴 숨은 실력자인 전은성(60)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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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마, 처음 유골을 파내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기분도 안 좋고… 한참동안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고, 근데 박 교수님이 데려온 젊은 여학생들이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척척 유골을 만지는 거야, 어린 학생들한테 우리가 배웠지 많이 배웠어."

이들에게 공주 살구쟁이는 어린 시절부터 넘어설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시선조차 둘 수 없는 금기의 땅이었다.

"전쟁 나던 해니까 중학교 다니던 14살 때였어. 아침부터 요란하게 총소리가 나는 거야. 끊겼다 또 나고 끊겼다 또 나고… 우리 동네하고 여기 살구쟁이가 강을 건너면 바로 거든. 어른들 말이 빨갱이들을 총살하는 거라고 했어. 그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박홍래씨)

"예전에는 공주 읍내를 가려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거든. 배 타고 강을 건너면 바로 살구쟁이 앞에 닿았어. 무서워서 살구쟁이 쪽으로는 고개를 못 돌렸어" (전은성씨)

"수백 명이 죽어 묻혀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무서워서…" (김희환씨)

"평생 피해다니던 땅... 우리 손으로 땅팔 줄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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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군경에 의해 총살 후 암매장된 구덩이에서 희생자의 유해가 드러났다. 이곳 살구쟁이에서는 2009년과 지난 24일까지 모두 396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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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왕촌 살구쟁이 유해발굴 현장에 세운 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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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다시 말한다.

"평생을 피해 다니던 땅을 우리 손으로 파서 유해를 수습할 줄을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어, 이번에는 하나도 안 무서웠어."

유물 발굴과 유해발굴 작업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른 유물 발굴 작업보다 힘은 덜 들어, 대신 신경을 무지 써야 해, 살짝만 잘못 건드려도 뼈가 부서지거든, 머릿속으로 뼈 조심, 뼈 조심하면서 일을 해."

"가장 기억에 남는 유해? 2009년에 발굴 때 의족을 한 유해가 나왔는데 어찌나 안쓰럽던지, 첫 번째 구덩이 맨 오른쪽에서 나왔어."

유해발굴을 끝낸 이들은 살구쟁이 매장지가 있던 맨 위쪽에 투박한 솜씨로 솟대를 만들어 세웠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긴 장대 꼭대기에 날지 못하는 나무새를 조각해 올려놓았다. 무릎 높이 만한 키 작은 솟대도 있다. 땅 속 구덩이에 오랫동안 묻혀있던 희생자 혼백들과 쉽게 다가가기 위한 배로 보였다. 새의 머리가 향하는 곳은 석장리 박물관이 있는 마을 쪽이다.

"땅속에 있던 억울한 혼령들이 하늘도 올라갔으면 하는 거지 뭐… 우리 마을도 잘 되게 해주고… 유물발굴은 못하더라도 유해발굴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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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동안 공주 왕촌 살구쟁이 민간인 희생자 유해추가발굴을 함께 한 발굴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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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식 '대독 정치'와 '4S' 우민화 정책

박근혜식 '대독 정치'와 '4S' 우민화 정책

 

 


정홍원 국무총리가 10월 29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에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처음 열린 총리의 대국민담화문 발표였지만, 정홍원 총리는 A4용지 4장을 그냥 읽고 기자 질문도 받지 않은 채 9분 만에 퇴장했습니다.

정홍원 총리는 덴마크와 핀란드를 순방하고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이것은 이날 정 총리의 담화문이 청와대의 지시와 명령, 문건 작성으로 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책임총리제를 운운했던 박근혜 정부는 말뿐이었고, 국정원 사건 등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단순히 모면하기 위해 '바지 총리'를 내세워 '대독 정치'를 했습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벌이는 '침묵'과 '회피'의 정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대선 부정 시비를 막기 위해 '뻥'치는 국무총리'

정홍원 국무총리 담화문의 대부분은 '경제'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물론 중간에 국정원 사건과 관련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는 처음부터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검찰수사와 함께 국정조사를 통해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서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는 기존의 대통령 주장을 앵무새처럼 낭독했을 뿐입니다.
 

 

 


정홍원 총리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우리 기업을 돕기 위해 직접 세일즈 외교로 세계를 누비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정 총리는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는 후속 조치, 즉 여야와 노동계 등 사회 전반에서 대통령을 괴롭히지 말고, 세일즈 외교의 성과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홍원 총리의 대국민담화문 요지는 지금 '경제'가 중요하니 국정원 사건보다 '경제'에 집중해야 민생이 안정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정홍원 총리가 여야가 빨리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외국인투자촉진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 총리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2조 3천억 원 규모의 공장착공으로 총 1만 4천 명의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자산 22조 원 GS칼텍스의 고용 인원은 총 3,383명이고, 자산 5조 원의 SK종합화학 고용 인원은 총1,184명입니다. 자산 27조원 짜리 회사 두 개가 2조 3천억짜리 일본계 기업과 합작 추진을 해도 전체 고용인원 4,522명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정홍원 총리의 발언은 국정원 사건을 덮기 위해 '경제와 민생'을 강조하기 위한 과대포장, 즉 '뻥'에 불과합니다.

' 광주학살을 덮기 위한 전두환의 3S 정책'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킵니다. 1980년 광주에서는 전두환의 집권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 시민들이 일어섭니다. 그 후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 폭행, 연행됩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1년 후인 1981년 5월, 전국에서는 광주 시민을 추모하고, 광주학살에 대한 전두환 퇴진 요구시위가 일어날 조짐이 보였습니다.
 

 

 

 


1981년 5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는 야간통행 금지도 해제된 '국풍 81'이라는 행사가 열립니다. 행사에 동원된 인원만 16만 명인 이 행사는 5일간 밤낮없이 진행됐었습니다.

1980년 광주의 아픔을 말하려고 하는 자들은 연행,구속하고, 일반 시민들에게는 볼거리, 먹거리, 야간통행 금지의 일탈을 허용한 '국풍 81'은 전두환이 벌인 광주학살을 숨기기 위한 통치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전두환은 정치의 3S( 스포츠.섹스.스크린)를 활용해 대한민국 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했던 인물입니다.
 

 

 


1981년 전두환은 '88올림픽'과 '86아시안게임'을 유치합니다. 이것은 박정희의 정치적 멘토였던 일본인 '세시마 류조'의 조언에 따른 것입니다. 세시마 류조는 국민의 눈을 '올림픽'으로 돌리면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전두환에게 조언했습니다.

그 후 전두환은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씨름', '농구대잔치' 등의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장려했습니다. 여기에 1980년 12월 1일 컬러텔리비전을 보급한 컬러 방송을 시행합니다. 전두환이 1982년 야간 통행금지를 37년 만에 해제한 덕분에 거리는 불야성을 이루었고, 술집과 성매매업소가 급증했습니다.
 

 

 


1980년대 대한민국 영화 관객 수 10위 내 영화는 '깊고 푸른밤', '어우동', '매춘', '애마부인', '자유부인', '무릎과 무릎 사이' 등의 에로 영화였습니다. 달동네 서민들의 삶을 미화시킨 드라마 '달동네'와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는 시청자를 사로잡았습니다.

전두환이 벌인 3S 통치 전략 때문에 국민은 그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국민을 살해한 범죄자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그를 스포츠와 문화를 부흥시킨 지도자로 추앙했었습니다.

' 3S가 아닌 4S로 정권을 잡은 박근혜'

이제 세상은 3S (스포츠,섹스,스크린)의 시대가 아닙니다. SNS로 불리는 소셜네트워크 서비스가 추가된 4S의 시대가 됐습니다.

박근혜는 지난 대선에서 철저하게 4S를 활용해 정권을 잡은 새로운 기법의 통치 방법을 대한민국 사회에 보여준 인물입니다.
 

 

 


트위터,블로그,유튜브,온라인 게시판 등에서 국가 정보기관이었던 국가정보원,사이버사령부가 활약했습니다. 국가보훈처,행정안전부는 박정희를 찬양하고, 자칭 보수를 응집하는 '종북','좌익'론을 펼쳤습니다.

새누리당과 연계된 십알단과 국정원,사이버사령부는 철저하게 협업체제로 SNS를 장악하며, 박근혜의 대선을 도왔으며, 이는 4S 시대에 걸맞은 범죄 수단이 됐습니다.

신성해야 할 스포츠와 문화가 통치 수단으로 전락했듯이, 시민들의 자유로운 소통이 조직적으로 정치에 이용된 것입니다.

 

 

 


박근혜는 전두환이 했던 통치방법을 그대로 따라, 대통령의 임무 중의 하나인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는 한 달째 열지 않고 문화,스포츠 행사에만 참석하고 있습니다.

[정치] - 구중궁궐 청와대 '여왕과 환관내시'

지금 외신조차 대한민국의 정치는 국정원 사건으로 마비됐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국 언론은 대통령의 패션 외교와 야구장 시구, 가수와 함께 노래 부르는 장면만 헤드라인 뉴스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언론통제와 함께 이루어지는 3S 정책의 기본 형태가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자칭 보수'들은 국정원 사건을 단순히 야당의 '대선 불복'이라고 강조하며, '경제'가 우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혼자만 잘살면 이 세상은 좋은 세상일까요?
돈만 있으면 무조건 행복할까요?
'경제'만 잘 되면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까?
북한과 전쟁만 하면 무조건 이기고, 우리는 전쟁의 피해를 겪지 않으리라 생각합니까?
미국,일본이 평생 한국을 지켜줄 것이라는 역사의 왜곡을 그대로 배우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눈과 귀를 정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는 통치자들의 수법은 결국 여러분의 인생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짓밟는 '우민화 정책'입니다. 그것을 왜 똑똑한 여러분이 그대로 당하고 살고 있습니까?

아돌프 히틀러는 "국민을 다스리는 데에는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권력자가 무엇을 하든 다 용서할 수 있습니까?

아이엠피터는 그저 주인이 주는 짬밥에 살만 찌는 돼지보다는 하루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인간의 삶을 지키며 살았던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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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왜곡보도가 ‘언론자유’는 아니다

<연재> 정창현의 ‘김정은시대 북한읽기’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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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28 08: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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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대화가 막히고 막말이 오가는 긴장국면이 조성되면 덩달아 느는 것이 북한 관련 오보 기사들이다. 심지어 단순 오보 차원을 넘어 의도적인 왜곡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죽했으면 ‘오늘 자 북한 기사 내일이면 오보’라든지 ‘북한 관련 보도는 특종 아니면 오보’라는 냉소적인 평가까지 나왔겠는가?

문제는 이러한 오보기사가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고, 북한 체제가 불안정하다는 잘못된 판단을 가지게 할 뿐만 아니라 정부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남북관계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북한 관련 오보가 남북관계에 악영향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김정일 제1위원장의 부인 리설주 관련 보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지난 8월 29일 <조선일보>는 중국 내 대북 소식의 말을 인용해 현송월과 문경진 은하수 관현악단장, 정선영 은하수 관현악단 차석 바이올리니스트 등이 공개 총살됐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지난 6월 김 제1위원장이 ‘성(性)관련 녹화물을 보지 말 것에 대하여’란 지시를 내렸는데, 이들은 이를 어긴 혐의로 지난 17일 체포돼 3일 만에 전격 처형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 기사를 통해서는 “은하수관현악단과 왕재산경음악단 등이 해체됐다고 주장했지만, 해체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며 리설주 부인의 사건 개입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신중하게 보도했다.

9월 21일 이번에는 <아사히(朝日)신문>이 일본 북한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부인 리설주와 관련된 추문을 은폐하기 위해 은하수관현악단과 왕재산예술단 단원 9명이 지난 8월 공개처형됐다고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최근 탈북한 북한 고위간부의 전언을 인용해 이들 9명은 자신들이 출연한 포르노를 제작했으며 북한 인민보안부가 이들의 이야기를 도청, ‘리설주도 전에는 자신들과 똑같이 놀았다’는 대화 내용을 확보했다고 전했다. 또한 두 악단도 해산됐고, 이같은 사실은 한국과 일본 정부도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신문은 전했다. 국내언론은 경쟁적으로 이 보도를 기대로 인용해 기사화 했다. 그렇다고 <조선일보>가 보도한 내용에 대해 추가 취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러한 언론보도는 국회로까지 불똥이 튀었다. 10월 8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은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외신에 보도된 은하수관현악단 단원 10여명에 대한 총살 내용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단원들이 김정은의 부인인 리설주의 추문과 관련돼 총살됐다는 내용을 두고선 “관련 정황은 알 수 없다”고 했다. 국가정보원은 예술단원 10여명이 총살됐다는 내용은 알고 있지만 리설주 관련 정황은 없다고 보고한 것이다. 대체로 <조선일보>의 보도 내용을 확인하고, <아사히신문>의 보도내용을 부정한 셈이다. 일단 <아사히신문>은 오보일 가능성이 커졌다.

 

   
▲ 지난 10월 10일 김정일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리설주 부인과 함께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전국 도 대항 체육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지난 9월 15일 국제 역도경기를 참관한 이후 10월 9일 김일성종합대학 교육자 살림집(주택) 준공식에 모습을 드러낸 리설주 부인은 이후 공개활동을 늘리고 있지만 특별히 달라진 모습을 찾기 어렵다. [자료사진 - 민족21]
북한도 리설주 부인 관련 보도가 계속 이어지자 대응에 나섰다. 지난 10월 9일 아침 북한 라디오 평양방송은 해체설이 나돈 은하수관현악단이 부른 ‘조국찬가’를 방송했고, 이날 리설주 부인도 김정은 제1위원장과 함께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교육자 살림집(주택) 준공식에 참석했다. 이를 두고 국내 일부 언론들은 ‘리설주를 둘러싼 추문을 잠재우기 위한 포석’이라든가, 인민복 스타일의 정장 차림에 짧은 머리를 한 모습을 근거로 ‘자숙 모드’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았다.

일부 국내 언론에서는 주민들 사이에 의혹과 설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북한 당국이 상당 기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 대응책을 내놓은 것이라고 보도했다. 리설주 부인이 공석에 등장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의혹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북한의 리설주 공개 카드는 시간의 문제였을 것이란 정부 당국자의 설명도 곁들였다.

그러나 리설주 부인의 공식 석상 등장은 지난 9월 15일 국제 역도경기를 참관한 이후 24일 만이다. 정상적인 공개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과 다름없이 미소를 띤 표정으로 등장했고, 주택 내부를 돌아보며 수도를 틀어보거나 찻잔을 직접 정돈하는 모습도 지난해와 마찬가지였다. 또한 리설주 부인 관련 의혹이 북한 주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부 언론에서는 탈북자나 ‘의문의 대북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 제1위원장과 리설주 부인과 관련된 근거 없는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오보’를 덮거나 합리화기 위한 또는 ‘오보’에 기초한 추가보도다.

<중앙일보>는 “김정은의 내연녀라고 알려진 현송월과 관련해 북한 내부 소식통에게서 ‘려심과 관련한 내용이 현송월로 와전된 것’이란 말도 들었다”고 한 탈북자의 말을 인용해 김정은 제1위원장이 북송 교포 집안의 은하수관현악단 출신 20대 피아니스트 려심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한술 더 떠서 대북소식통을 인용해 결혼전 리설주 부인의 라이벌은 은하수관현악단의 독창가수 서은향이었다며 “리설주는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결혼 상대가 아니라 김정일 사후 ‘나이 어린 지도자’라는 세간의 우려를 극복하기 위해 급하게 발탁된 사람”이라고 보도했다. 심지어 국책연구소 관계자를 인용 “리설주는 김정일 사망 3개월 전인 2011년 9월까지 공연을 했다. 만약 당시 김정은의 배우자로 확정된 상태였다면 무대에 서지 않았을 것”이라며 2009년 결혼했다는 국가정보원의 국회 정보위 보고내용까지 부정했다.

 

이러한 보도내용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만 구체적으로 살펴봐도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첫째, 김정은 제1위원장은 후계자로 확정되기 전인 2002년 4월부터 2007년 4월까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1983년생이라고 보면 19살부터 24살까지 군사교육을 받은 것이다. 과거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학교, 대학교를 다닐 때 노동당 고위간부의 지도 감독아래 있었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당시 김일성 수상에게 보고된 것으로 전해진다. 노동당 조직지도부와 인민군 총정치국 고위간부의 주도로 진행된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교육기간에 김정은 제1위원장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간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탈선행위(?)를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국정원이 밝힌 것처럼 김정은 제1위원장이 리설주 부인과 2009년 결혼했는지는 더 확인이 필요한 사인이지만 리설주 부인이 늦어도 2009년에는 김정은 제1위원장과의 결혼이 확정돼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무렵 ‘장관급 여성인사’의 도움을 받으며 유럽을 다녀오는 등 ‘퍼스트레이디’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리설주 부인이 학생시절부터 김정은 제1위원장과 친분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늦어도 2009년 시점에는 두 사람의 결혼이 내정된 것은 확실하다. 리설주 부인이 일찍부터 노동당의 관리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의 후계자나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관리시스템을 조금만 파악하고 있었어도 리설주 부인 관련 오보나 해석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보도된 은하수관현악단 관련 보도는 왜 나온 것일까? 북한 소식에 밝은 한 탈북자에게 물어봤더니 필자가 알고 있는 내용과 비슷한 대답이 나왔다.
“여러 경로로 확인을 해봤는데, 은하수관현악단 단장이 잘못된 것은 분명한 것 같으나 현송월 총살 등 다른 내용은 북측 사람들도 잘 모르더라.”
<조선일보>의 첫 보도가 나온 후 필자도 중국의 대북소식통을 통해 “은하수관현악단의 일부 단원들이 어떤 내용이 문제가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검열(조사)을 받았고, 그 중 일부는 처벌을 받았다”는 전언을 들었다.

이런 점에서는 일부 사실에 오류가 있거나 부풀려졌다고 하더라도 <조선일보>의 첫 보도 자체가 큰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사히신문>에 리설주 부인 관련 보도가 나가고 국내언론이 이를 그대로 인용보도하면서 ‘정치적 문제’로 비화됐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아사히신문>의 보도에 대해서는 국내 기사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장우성 <기자협회보> 기자는 “<아사히신문>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국내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 기사는 사실이라는 확증이 부족했다”며 “그래서 일부 국내 기자들 사이에서도 단순 인용보도 할 게 아니라 좀 더, 최소한의 어떤 우리 정부의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지 않았어야 했느냐는 지적들도 나오고 있다”라고 밝혔다.

국내언론의 ‘맹목적인 베끼기’가 문제

역시 이번 오보기사의 두드러진 문제점은 외국, 특히 일본 언론의 북한 관련 기사에 대한 ‘맹목적인 베끼기’다. 일본 주요 언론이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하여 보도하는 북한 관련 기사들을 아무런 검증 없이 한국의 보수언론이 베끼고 나면, 그 다음에 방송이 이를 그대로 받는 식이다. 사실 북한 정보가 가장 많은 곳은 한국이고, 외신도 한국에서 나온 기사를 토대로 기사를 쓰는 경우가 대체적인 경향이다. 그런데도 외신에 나면 아무런 추가 취재 없이 그대로 받아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는 국내언론에 단신으로 난 기사를 외신이 받아쓰면 이를 다시 국내언론이 크게 소개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아니면 말고 식’의 기사, ‘외신에 났기 때문에 소개하는 것일 뿐’이라는 무책임한 기사가 넘쳐나고 있다. 외신발 북한 뉴스가 초래하는 정보 오염, 정보 공해의 폐단에 대해서는 꾸준히 비판이 있어왔지만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10월 15일 평양 동평양대극장에서 리설주 부인과 함께 러시아 21세기관현악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자료사진 - 민족21]
특히 과거에는 북한을 흠집내기 위해, 또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당국에서 일본 언론에 자극적인 소재를 제공해 기사화하고 이를 국내언론에 크게 받게 하는 행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이번 은하수관현악단 관련 기사가 리설주 관련 기사로 ‘변질’되는 과정을 보면 그런 의혹까지 제기될 만하다.

 

외신에 대한 ‘맹목적인 베끼기’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이후 북한 관련 보도에서 보여주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일정한 ‘정치성’이 내재돼 있다는 점이다. 즉 북한은 비정상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곧 붕괴할 것이라는 이미지, 북한 체제가 대단히 불안정하다는 이미지를 확산시켜 남북관계의 단절을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내부 권력의 혼란, 권력 암투, 주요인사의 숙청 내지 와병설, 사망설 등이 검증 없이 보도되거나 과장하고 부풀려지고 있다. 이를 통해 남북관계의 단절이나 신중한 대북정책이 우리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 북한 내부의 문제라는 인식이 심어진다.

김경희 비서의 ‘중병설’ 보도가 대표적이다. 권력 실세인 김경희 비서가 사망할 경우 북한 권력 내부에서도 심각한 변화가 있다거나 김정은체제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설명을 하면서 김경희 비서의 건강이상설이 여러 차례 보도됐지만 김경희 비서는 아직까지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건강이 좋지 않은 김경희 비서가 언젠가는 사망할 것이기 때문에 공개석상에 나오지 않는 기간이 조금만 늘어나도 선제적으로(낙종하기 않기 위해) 중병설을 기사화하는 무책임한 보도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정치성 오보’들이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사안에 따라서는 치명적이다. 실제로 일부에서는 ‘리설주 관련 오보’, ‘선정적 보도’가 북한의 갑작스러운 이산가족상봉 연기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북한은 10월 들어 “우리의 최고존엄과 체제를 조금이라도 헐뜯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이건 추호도 용서치 않고 단호히 징벌할 것”이라고 박근혜 대통령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특대형도발의 대가는 무자비한 징벌”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우리의 최고존엄에 대한 괴뢰들의 무엄한 도전행위는 당국자들의 도발적 망발과 각종 모략극, 보수언론들의 날조보도 등 각이한 형태로, 지난 시기와 달리 더욱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며 언론의 보도태도까지 문제삼았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초보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은 비이성적” 발언이라고 반박하며 북한에 대해 “대통령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는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류길재 통일부장관가 지난 8월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 등을 자제해줄 것을 주문하고, 최근 “(남북간) 신뢰를 쌓기 위해 약속을 지키고 상호존중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한 것처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남과 북 상호간에 상호존중의 자세로 상대방에 대한 자극적인 발언은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 관련보도에서도 사실확인 철저하게 거쳐야

특히 언론들도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와 근거로 기사를 쓰는 것이 대단한 주요한 시점이다. <디펜스21+> 김종대 편집장은 한반도 위기관리를 위해서라도 북한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고, 종합적인 판단에 기초해 북한 보도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은 뒷전으로 밀리고, 이데올로기, 편가르기, 조롱하기, 반대편에 대한 윽박지르기에 몰입하기 때문에 하나의 체제로서의 북한, 합리적 행위자로서의 북한에 대한 분석과 판단 능력은 매우 뒤떨어진다. 이런 식견은 한반도 위기관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한다. 예컨대 북한이 군사적으로 우리를 위협했을 때, 그것은 우리의 특정한 행동에 대한 북한의 반응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우리 측 요인을 생략하고 북한 측 요인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게 되니까 위기를 분석하고 판단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불구 상태에 빠진다.”

기사윤리라는 측면에서도 국내언론들이 북한보도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오보로 판명 난 기사에 대해서는 정정보도를 반드시 해야 한다. 국내 언론은 2003년 5월 ‘길재경 북한 노동당 부부장 미국 망명’ 기사가 오보로 판명난 뒤 사과, 정정보도를 낸 바 있다. 당시 KBS가 9시 뉴스에서 “이번 망명설과 같은 북한 보도는 사실확인이 어렵다는 고충이 있기는 하지만 진상을 끝까지 확인하지 않고 보도한 것은 잘못”이라는 사과방송을 내보낸 것처럼 ‘아니면 말고 식’이 아니라 정정보도를 내야 북한 관련 기사의 오보를 줄일 수 있고, 신중한 보도 자체도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국내외 관련 기사를 쓸 때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으면 일단 기사화를 보류하는 원칙을 북한 관련 보도에도 똑같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국내언론의 보도에 대한 북한의 ‘협박성 발언’을 문제삼기에 앞서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얼마나 정확한 보도를 하고 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대한 오보나 왜곡보도는 공정보도를 사명으로 있는 언론이 ‘언론자유’란 명분으로 합리화될 수는 없는 사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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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 성녀의 차이는?

마녀와 성녀의 차이는?

 
양태자 2013.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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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유럽(500-1500/1700)에 살았던 신심 깊은 여인들은 종교적인 신비나 환시 체험에 많이 빠졌다. 이런 여인들에 대한 관심사는 대개는 두 부류인 마녀인가? 성녀인가? 에 대한 해석이었다. 어떤 해석이 내려지느냐에 따라 이들의 삶은 천국과 지옥을 왕래했다. 이들 중에는 마녀로 찍혔다가 성녀로 추앙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성녀로 추앙 받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마녀로 찍힌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마녀가 성녀로 추앙 받는 경우를 보자; 마녀로 고문당하거나 장작불에 처형당했던 이들이 생전이나 사후에 새로운 해석이 따르지 않았었더라면, 이들은 교회에서 영원히 마녀로 배척 받았을 것이다. 그 반대로 성녀가 마녀로 된 경우는; 이들의 비밀이 생전에 들통나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교회에서 영원히 성녀로 머물렀을 거다. 이렇게 마녀냐? 성녀냐! 를 해석하는 꼭지점에는 주로 당시 교회수장들의 취향과 독선적인 판단이 작용했다. 이런 연구의 기초는 가톨릭적인 신학분석이 아니고 종교 현상학적인 연구물이다. 말하자면 1900년경부터 신학에서 떨어져 나온 종교학이라는 딸 덕택에 이런 연구의 기틀 마련이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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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에 빠진 중세 여인들은 성당에 다니면서 열심히 고백 성사를 보고 영성체(예수의 몸이라는 밀떡)를 모신다. 더 나아가 이들은 오직 영성체만 받아 먹을 뿐 일반적인 다른 음식은 먹지 않고도 생명유지를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뚜껑을 열어보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이들은 방안 침대 밑에 음식을 비밀스럽게 저장해 두고서는 뒤에서 먹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을 일 삼은 이도 있었다. 또 스스로가 거룩한 자라고 표명하고 다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들 앞에 엎드려 절하고, 심지어 이들의 옷자락을 찢어 잘라서는 성물(聖物)로 간직 하기도 한다. 당시는 이런 성인 성녀들의 물품을 수집 하는 게 혈안이 되었고 이것을 소유하고자 열광했다. 이런 물품이 어떤 거룩한 힘을 뿜는다고 생각 했고, 이런 성물을 지닌 자들은 천국 행이 빠르고 쉽다는 종교적인 생각이 내포 되었기 때문 이기도 하다.

 

이태리 페루지아에도 살았던 이런 여인의 한 유형을 보자. 축일이 5월 20일 인 골롬바(1467-1503) 성녀는 도미니카 수도원의 평신도 3회원으로 살아간다. 여기서 제 3회란? 1회가 수도승, 사제라면, 2회는 수녀들이고, 3회는 평신도로서 수도자들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칭한다. 매일 고백성사를 보며 늘 속죄하는 삶을 살았던 그녀는 자주 환시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예언적인 역할도 하였다. 그녀 역시 다른 음식은 일절 먹지 않고 오직 성당에서 주는 영성체만으로 산다는 거다. 그녀가 성당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그녀를 마치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처럼 공경 했다. 다른 성녀들이 행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성스런 종교적인 삶을 살았다 보니 사람들로부터 자연히 살아있는 성녀처럼 추앙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1347-1380: 축일 4월 29일)와 동일시까지 했다. 카타리나 성녀의 행적이 실린 글에서 카타리나 이름 대신에 골롬바로 대치시키면 똑 같다고 여겼을 정도의 흠숭을 받았다.

 

그녀는 기적도 일으켰다. 1494년 페루지아 시에 페스트가 돌 때 하늘에 성인들이 나타났다지만 페스트 치유에는 별 도움이 안되었고 사람들은 그냥 죽어 나갔다. 이 때 골롬바가 나서서 페스트에 걸린 이들을 치유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회개하는 속죄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외쳤다. 당시는 페스트가 돌면 병원균으로 보기보다는 하느님의 벌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런 병자들에게 손을 대기만 해도 나았고, 심지어 등잔불의 기름으로도 페스트를 치유했다. 후에는 병자 치료에 몰두 하던 그녀 역시도 이 페스트에 감염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병균에도 거뜬히 살아 남았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그녀의 꿈속에 나타난 수호성인과 카타리나 성녀가 그녀를 살려 주었다는 것이다. 참 아쉽다. 수호성인과 카타리나 성녀가 어차피 이런 치유능력이 있으면 꼭 골롬바 한 사람만 택해서 살려 줄 것이 아니라 통 크고 관대한 성인답게 신음하면서 죽어가는 이들도 다 좀 살려 주었더라면 좋으련만…… 성인 성녀 치고는 관대함이 철철 넘치지 못하는구나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이런 그녀의 행위와 말들을 인정한 시주무청은 그녀를 공경하는 행사를 일년에 한번씩 열어줄 정도였다. 그것도 모자랐던지 살아 있는 이 성녀가 가해라도 당할까 봐 두려운 나머지 그녀를 지키는 무장한 호위병까지 두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판단이 두 가지 부류로 갈라졌다. 그녀에게 잔뜩 의구심을 품고서는 기회를 봐서 언젠가 그녀의 정체를 파헤치겠다는 부류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를 옹호하기에 나선 이들이다. 특히 그녀의 고해 신부는 그녀가 성녀임이 틀림 없다는 것을 교황에게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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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년 교황 알렉산더 6세가 페루지아에 왔다. 여기서 우리는 골롬바 얘기에 들어가기 전, 잠시 이 알렉산더 교황을 좀 보기로 하자. 이 교황은 종교적인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여러 여인을 축첩으로 거느리고 9명의 자녀까지 두었던 양반이다. 1430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1492년에서 1503년까지 교황 재직을 했다. 그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부정적인 방법으로 교황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교황이 되는 데는 삼촌인 교황 갈리스토 3세(1455~1458)의 영향으로 높은 서열로 오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선 쉽게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그가 추기경이었을 때부터 이미 종교적인 경건성은 뒷전이고, 정치적인 권모술수에 더 능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가난정신을 실천했던 당시의 한 수도자는 길거리의 군중들 앞에서 타락한 당시의 그리스도교를 ‘똥통’이라고 설교까지 하고 다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이 설교가의 목을 친 뒤 불에 태워 죽였다. 사실 이 시절은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 사이에 경계가 없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자식을 가진 교황도 비일비재했다. 골롬바 얘기와 연결 된 알렉산더 교황의 아들과 딸이 있다. 아들은 체사레 보르지아(1476-1507)다. 그는 열 일곱 살에 주교 품에 올랐고, 열 여덟 살에 추기경으로 임명 되었지만 세속정치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추기경 자리를 포기했다. 그리고 딸 이름은 루크레치아(1480-1519)로 교황은 이 딸을 특별히 사랑했는데 골롬바와도 연관성을 가진다.

 

이런 뒷 배경을 가지고 다시 골롬바의 얘기로 돌아와 보자. 이 도시에 온 알렉산더 교황은 골롬바를 만났다. 이 교황을 만난 골롬바는 교황의 옷에다 손을 대자말자 몸이 차디찬 돌처럼 변하면서 즉시 신비체험에 빠졌다. 그녀가 이 신비체험에서 깨어나자 교황은 그녀에게 계시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질문 하기에 이르렀고, 교황의 아들 체사레도 여기에 합류한다. 이 두 사람은 그녀의 신비함과 거룩함에 무척이나 놀라워하면서 그녀의 경당에 죄 사함의 면죄부 보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희대의 탕녀로 알려진 교황의 딸 루크레치아가 나타나자 상황은 돌변했다. 그녀는 먼저 골롬바를 떠 볼 참이었다. 병이 깊을 대로 깊어 이미 의사도 포기한 종양으로 죽어가는 한 아이를 데려와서는 그녀에게 살려보라고 명령했다. 이 때 골롬바는 이 아이에게 치유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고 거부 했다. 그 이유는 이 아이가 혼외에서 태어난 사생아 이기 때문 이란다. 이 과정을 지켜본 교황 딸 루크레치아는 당장 그녀를 마녀로 찍으면서 고발했다. 당시에 루크레치아는 교황 아버지를 등에 없고 막강한 힘 행사를 하던 여인이었다. 또한 교황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잣집 아들과 몇 번이나 결혼 한 여인이었다. 그러니 교황 아버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녀에겐 별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독일 자료에는 그녀의 근친상간 얘기도 자주 나온다. 이렇게 호기심 어린 역사물이 전해 내려오다 보니 독일에서는 이미 그녀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가 영화로도 찍히고 역사 드라마로 TV에서 방송 될 정도다. 이렇게 막강한 힘을 지녔던 그녀는 골롬바 만을 마녀로 몰아 넣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성인전 저자이자, 영혼안내자, 점성학자 인 그녀의 고해신부에게도 마찬가지로 죄를 뒤집어 씌운다. 그의 죄목은 골롬바의 계시를 세상에 퍼뜨렸다는 거다. 그녀는 이들을 태워 죽일 계획에 까지 돌입했다.

자 보자! 골롬바는 종교적인 신비체험을 하였다. 하지만 교황과 교황의 아들은 그녀를 성녀로 판정 했고, 교황의 딸은 그녀를 마녀로 판정 했다. 어쨌든 그녀는 성녀와 마녀라는 이 두 영역을 넘나 들다가 죽은 것은 틀림이 없다. 정확히 124년이 흐른 1627년, 그제서야 그녀는 후대 교황의 축복을 통해서 정식 가톨릭 성녀로 공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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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공업자의 과부였던 성녀 도로테아 폰 몬타우(1347-1394)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다른 이들처럼 신비가로서 살면서 유사한 전철을 밟았다. 기쁜 미소를 얼굴에 머금은 그녀는 자주 신비 체험에 빠지는가 하면, 성당에서는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당시에는 눈물을 잘 흘린다는 것은 신의 은총으로 간주 했다. 마녀 재판 때도 마녀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여러 방편 중에는 눈물로 판정하는 잣대가 있다. 재판관이 한 여인을 마녀인지 아닌지 심문 할 때 눈물을 흘려보라 명한다. 만약에 그 여인이 눈물을 철철 흘리지 못하면 당장 마녀로 판정 되었다. 마귀가 마녀와 교통해 눈물 주머니를 말려 눈물을 못 흘리게 만든다는 거다. 시대가 규정한 한 종파의 교리에 묶인 종교적인 옹매듭이 이렇게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도구로 작동 했다. 그럼 오늘날은 이런 식으로 고착된 유사한 종교적인 옹매듭은 과연 없을까? 하고 우리는 스스로 의문을 던져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도로테아는 자주 고해 신부에게 그녀의 이런 체험을 보고했고, 그녀의 고해신부는 그녀가 신적인 환영에 빠졌다고 단정했고 성녀로 간주 했다.

 

하지만 그녀를 못 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그녀가 마녀 짓을 한다는 죄목을 건다. 이 여인이 가톨릭 믿음의 근본을 뒤 흔들고 있으니 반드시 태워 죽여야 한다고 소리 높였다. 44세가 되던 해인 1391년 7월에 고발 당한 그녀는 단찍히의 주교관 재판장 앞에 섰다. 하지만 그녀는 불에 타 죽는 것을 전연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신을 위해 죽을 것을 자처했다. 자기가 마녀로서 불에 타 죽어야 한다면, 자기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불에 타 죽을 때 드는 장작비용을 자기 주머니에서 지불 하겠다 고 선언 했을 정도다. 다행히 그녀는 장작더미에서 불타는 것은 모면했지만 그녀 역시 살아 생전엔 마녀와 성녀라는 위태 위태한 줄 타기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녀가 죽고 난 몇 년 후인 1404년 사람들이 그녀를 성녀 품에 올리고자 시도 했다가 중단 되었다. 다시 572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1976년에서야 그녀는 가톨릭의 성녀 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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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녀와 마녀라는 이름은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보인다. 그 판가름 또한 모호하다. 누굴 만나서 어떤 심판을 받느냐에 따라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갈라진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만약에 이들이 후에 성녀 품에 오르지 못했다면 이들은 교회사에 영원한 마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죽은 후에 이들이 성녀로 추앙 받았기에 하늘에서 기뻐할까? 만약 이들이 후세기에 구제되어 성녀로 칭송 받지 못했다면 지금 이들은 하늘에서 고통스러워 할까? 단지 말 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만을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신학적인 해석이 아닌 종교 현상적인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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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새마을운동'이 수상하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10/28 12:04
  • 수정일
    2013/10/28 12:0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서리풀 논평] 제2의 새마을운동이 뜻하는 것

시민건강증진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0-28 오전 8:29:38

 

 

제2의 새마을운동이 뜻하는 것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20일 전국새마을지도자 대회에서 말한 내용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관련 기사 : 박 대통령 "제2 한강의 기적 위해 새마을운동 살려야") '정신 혁명', '의식 개혁', '문화 운동'과 같은 말을 유난히 강조했다. '공동체'를 언급한 것도 허투루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새마을운동이 '부활'하고 있던 참이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 새마을운동을 수출한다는 것은 이미 이번 정부의 기본 방침이 된 지 오래다. 안전행정부가 나서서 전 세계로 '전파'할 것을 공표했다.

아직은 새마을운동의 부활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데, 지붕 개량이나 농로 포장 같은 '삽질'이 웬 말이냐고 말한다. 나아가 의식 개조니 정신 운동까지 말하면 냉소적 반응이 대부분이다.

이것으로 무얼 해 보려는 쪽으로서는 고민이 클 것 같다. 아무리 새롭다고 포장해도 박정희 시대와 유신, 개발 독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라도, 그리고 스스로 내세우는 대로, 다른 형태의 '국민 운동'이 될 공산이 크다.

겉모습이 아니라 새로운운동을 추진하는 내면의 동력과 구조에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시 새마을운동을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왜 하고 싶어 하는가? 그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원조' 새마을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선, 농민들의 생활과 경험을 바탕으로 새마을운동을 꼼꼼하게 분석한 역사학자 김영미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을 국가가 주도하는 근대화 전략과 대중 동원 체계라는 두 축으로 파악했다(<그들의 새마을 운동>(김영미 지음, 푸른역사 펴냄, 2009년)). 앞은 그렇다 치고, 뒷부분을 더욱 주목해야 한다.

"새마을운동이 농촌 근대화 운동을 넘어선 박정희 정부의 종합적 지배 전략이라고 했을 때 운동의 수행 주체인 농민들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동원된 주체들이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의 국민 운동은 대중들을 정치적 목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든 대중 동원 메커니즘이다." (336쪽)

같은 분석이 지금도 유효한지는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이런 시각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중에서도 제2의 새마을운동이 단순히 개인적 회고와 '응어리'의 차원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은 소중한 깨우침이다.

특히 대통령이 강조한 정신, 의식, 문화, 공동체와 같은 말들은 의미심장하다. 말들이 낯설지 않아서 더 그런 지도 모른다. 사실 이는 과거 새마을운동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기억을 되살려보자. 새마을운동은 초기에는 농가의 소득 배가 운동이었지만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도시, 직장, 공장 새마을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근면, 자조, 협동을 강조하는 의식 개혁 운동으로 확대된 것이다. 50대 이상의 연배에서는 이 익숙한 새마을운동의 구호를 지금도 술술 말할 정도다.

새로 말하는 의식 개혁이 정확하게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대통령이 말했다는 "나눔, 봉사, 배려의 실천적 덕목을 더해 국민 통합을 이끄는 공동체"도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 애써 새마을운동을 되살리려고 하는 것을 우연 또는 회고로 돌릴 수 없다는 점을 되새긴다. 단순한 정치적 유산으로만 보기에는 이익 못지않게 손해 또한 감수해야 할 형편이다. 좀 더 근본적인 동력이 있지 않고서는 현실의 적극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지배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사실 과거 대부분 정권이 시도한 여러 '국민 운동'들이 같은 맥락에 있다). 오래된 부대에 새 술을 담는다고 할까.

관심을 둘 것은 '자조'라는 (오래된) 새마을운동의 핵심 구호이다. 다시 김영미의 분석을 보면, 새마을운동 자체가 바로 자조를 강조하는 데서 출발했다. 1970년 4월 22일 지방장관회의 자리에서 대통령이 처음으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언급했고, 자조는 이 연설의 핵심을 차지한다.

자조가 농민들을 깨우치려는 계몽의 가치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근면이나 협동이 도구적이라면, 자조는 다분히 이념적이다. '스스로'라는 뜻이 말하듯, 이는 사회철학이자 '관(觀)'으로서의 '개체주의(개인주의)'와 직접 연결된다. 개인주의의 핵심 내용은 널리 알려진 그대로다.

개인과 개체는 고유하고 독립된 존재로 스스로의 가치와 목적을 추구한다. 따라서 개인이 사회와 집단보다 중요하며 외부로부터의 간섭이나 개입은 적을수록 좋다. 책임과 자조는 이러한 개인의 독립성을 지키는 중요한 가치다.

물론 과거의 새마을운동이 국가 동원 체제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새로운 운동에서도 동원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 점에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동원이 국가적으로 제도화된 것과는 달리 그것의 이념적 기반은 존재론적 개인주의와 사회적 다윈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새마을운동에서 경쟁과 차별적 지원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신-구 새마을운동의 이념적 친화성은 처음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새마을운동의 동원 전략이 신자유주의와 그리 멀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또한, 정책적으로는 많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위기에 대응하는 공통적인 방법과 맞닿아 있다. 국가와 사회적 책임은 가능한 한 줄이면서 부담을 개인화 그리고 민간화 하는 방식.

이런 전략이 현실과 부닥치는 현장이 보건과 복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또 다른 관심사다. 개인과 공동체, 사회, 국가가 긴장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면 이보다 더한 분야를 찾기 힘들다. 빠르게 증가하는 비용 때문에라도 체제를 흔드는 위기의 직접 원인이 된다는 점도 보태야 한다.

새마을운동과 보건-복지는 진작부터 이런 긴장 관계를 품고 있었다. 1979년 10월 8일부터 10일 사이에 경주에서 '새마을운동과 주민복지연찬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논의되었던 새마을운동이 뜻하는 것, 그리고 의도하는 것은 이랬다.

"'우리 마을의 보건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고 우리의 건강은 우리가 지키겠다'는 지역 사회의 자조적이고 협동적인 정신과 아울러, 이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일차 보건의료' 사업을 전개시켜 나간다면 고도의 복지 정책이 경제 성장의 파탄을 초래한 몇몇 선진국의 전철을 밟지 아니하고도 훌륭한 복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기초였다(<연찬회 보고서>, 5~6쪽).

"주민 복지는 서구에서 볼 수 있는 협의의 복지 즉 국가에 의한 사회 보장 제도와는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민 복지는 이보다 광의로 이해됨은 물론 '국가에 의하여 받을 수 있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성취할 수 있는 것'도 포함되어야 하며, 오히려 후자에 높은 비중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찬회 보고서>, 28쪽)

놀라운 일이지만, 35년이란 시간을 건너뛰어 지금 것이라 해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한편으로는 제2의 새마을운동이 갖는 기반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새로운 새마을운동의 본질을 가볍게 보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이 정부가 충실하게(?) 새마을운동을 되살릴 때 선택할 보건 복지의 기조는 분명해 보인다. 지역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스스로 돕기(자조)가 핵심이 될 것이다. 결국 보건과 복지의 탈-사회, 탈-공공, 민영화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보건복지에 관한 한, 새마을운동 전략의 한계는 워낙 뚜렷하다. 신자유주의의 한국판 '신장개업'은 시대착오가 되기 쉽다는 뜻이다. (개인, 가족, 지역, 공동체)-(자조, 협동, 봉사)-(의식, 정신, 문화, 전통)으로 이루어지는 패키지가 '지배 전략'이 되기에는 힘에 겹다.

정치적 기반 때문에라도 스스로 포기하지는 못할 터, 대항하는 힘을 키워야 착오를 바로잡을 수 있다. 모순에 따른 긴장과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신 혁명과 의식 개혁이 아니라 공공성과 민주주의, 그리고 연대가 사회적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프레시안>은 시민건강증진연구소가 매주 한 차례 발표하는 '서리풀 논평'을 동시 게재합니다. (사)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모두가 건강한 사회"를 지향하는 비영리 독립 연구기관으로서, 건강과 보건의료 분야의 싱크탱크이자 진보적 연구자와 활동가를 배출하는 연구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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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 와글와글~ "막장!" "사기!"

"지난 대선은 '개콘 황해'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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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과 함께 만드는 뉴스] '대선 부정' 인포그래픽에 댓글 달아주세요

13.10.28 08:41l최종 업데이트 13.10.28 11:10l
이 기사는 시민기자와 독자 여러분들이 만들어갑니다. 지난 대선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너무나 많은 부정 사건이 터져서 정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아래 인포그래픽을 본 뒤 하시고 싶은 말을 댓글로 달아주시면 기사에 반영하겠습니다. 현 상황에 대한 기탄없는 비판과 대안을 제시해 주십시오. 많은 참여 바랍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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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은 □□□다?' 엄지뉴스 공모에 막내아들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결론은, 지난 대선은 개콘의 '황해'다!
ⓒ 한.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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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 : 28일 오전 10시 35분]
지난 대선은? "막장드라마" "짜고 치는 고스톱"

국가정보원에 이어 국방부, 국가보훈처까지 대선개입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이들이 지난 대선 기간에 저지른 '선거부정' 증거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거개입 시비의 진원지인 지난 18대 대선을 시민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오마이뉴스>는 지난 25일부터 28일까지 엄지뉴스와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 대선은 □□□다' 공모를 진행 중입니다. 28일 오전 10시 현재 많은 독자들이 캠페인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데요.

엄지뉴스 회원 '한.밝.우'님은 "지난 대선은 '황해'다"라고 적은 종이를 인증사진으로 직접 보내주셨습니다. 여기서 '황해'는 KBS <개그콘서트>에서 보이스피싱을 소재로 웃음을 유발하는 코너의 제목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 회원은 "극중 사장 이상구 밑에서 일하는 정찬민과 이수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벌어 사장에게 잘 보이려고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나온다"며 "지난 대선 때 국정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등이 특정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일련의 과정과 100% 닮았다"고 설명했습니다.

'6748'님은 중립을 지켜야할 정부와 국가기관이 선거운동의 한복판에 뛰어든 지난 대선을 "범죄스릴러영화"라고 평가했습니다. '9008'님은 "난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많은 분들이 이벤트에 참여해주셨는데요. 특히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논란이 불거진 지난 대선을 두고 '민주주의의 훼손'이라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페이스북 회원 이남희님은 "지난 대선은 '똥밭에서 뒹구는 민주주의'다"라고 힐난했습니다. 김혜원님은 "끝이 없는 막장드라마"라고 돌직구를 날렸습니다.

이외에도 김수철님은 "지난 대선은 '성형수술'됐다"고, '파즈'님은 "지난 대선은 '눈 뜨고는 못보겠다'"고 비꼬아 말했습니다.

몇몇 독자들은 <오마이뉴스> 메인화면에 게재된 이벤트 홍보기사 속 소셜댓글을 통해 참여해주셨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soju_jjoa'님은 "지난 대선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라고 힐난했습니다.

"지난 대선은 '이심박심'이다"('pnajana')라는 의견도 있었는데요.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벌어진 대선개입 사태와 박근혜 정부가 무관치 않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전반적으로 지난 대선을 "부정선거"라고 평가하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등 속속 밝혀진 불법 선거개입 행위들을 근거로 '18대 대선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다.

이외에도 페이스북 회원 지창기, 이경희님 등은 "지난 대선은 '대국민 사기극'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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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 28일 오전 9시]
"한국은 독재해야... 아멘?" 참, 기가 막힙니다

국정원, 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기관원들이 밀실에서 댓글공작을 벌였습니다. 일부 군인들은 사이버 군사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동원됐습니다. 뒤늦게 이를 수사하려는 경찰과 검찰 수사 책임자들은 무장해제 당했습니다. '국정원으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은 적이 없다'는 박근혜 정부가 한 일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근조 민주주의'라는 말이 역병처럼 번지고 있는데도, 국민의 알권리를 지킨다는 방송사들은 '단풍놀이'를 톱기사로 올리고 있습니다. 지난 25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추모 예배장에서는 "한국은 좀 독재를 해야 한다"는 기도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기막히지 않습니까? 온 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말문이 막힌 누리꾼과 댓글러, 페이스북 친구들, 트위터리언에게 오늘의 톱 기사를 개방하겠습니다. 또 상근 기자들도 현장에서 시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겠습니다. 이 기사는 시민기자와 독자 여러분들이 만들어가는 지면입니다.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는 음지에서 댓글을 달았지만, 우리는 '양지 댓글'을 지향합니다.

 

기사 관련 사진
대선개입사건 주요 일지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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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침묵한다면, 탄핵이든 하야든 끝까지 간다.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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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3/10/28 11:31
  • 수정일
    2013/10/28 11:3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18대 대선이 끝난 지도 벌써 10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18대 대선은 아직도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유는 국정원,사이버사령부,국가보훈처 등의 국가기관이 대선 기간에 개입한 댓글 의혹과 관련 범죄를 수사해야 할 경찰,검찰,법무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선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나오는 충격적인 증거들은 여야의 '불공정한 선거 VS 대선 불복'을 넘어 국민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점점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점점 사그라지지 못하고 격렬한 논쟁을 거듭하고 있는 18대 대선 관련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 방법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18대 대선무효소송,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국민의 태반은 모르고 있지만, 현재 제18대 대선 선거무효확인 소송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18대 대선선거무효소송인단' (공동 대표 한영수,김필원, 1997명의 시민으로 구성)이 원고가 된 선거무효 소송의 피고인은 김능환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입니다.

'선거무효소송인단'이 제기한 소송은 크게 ① 전자개표기 (투표지 분류기)의 부분과 ② 수개표 확인 부분입니다. 소송인단은 18대 대선에서 이러한 불법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선거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소송인단이 제기한 무효소송이 힘을 얻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개표 과정의 문제점 때문입니다. 네티즌들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보한 자료를 보면, 여러 개표구에서 선거개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천시 선관위 개표상황표를 보면 투표지 분류 종료시각이 12월 19일 20시 57분이었는데, 위원장의 공표시각은 21시 18분이었습니다. 불과 21분만에 3,127매의 투표용지를 수작업으로 확인한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관위는 부정선거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지난 1월 17일에 국회에서 개표시연회를 했습니다. 이날 투표용지 6천 매 확인에 2시간이 넘게 걸렸던 점과 비교하면, 21분 만에 이루어진 위원장 공표시각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투표용지는 3,126매였지만, 투표수는 3,127매가 됐던 부분과 이런 현상이 구미,안동,강동구 등 전국 여러 곳에서 발견됐던 점은 18대 대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소송인단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선거무효 소송인단은 투표함,투표지 등에 대한 증거보전과 수개표 재검증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투표지 증거보전과 재검증 신청 등에 대해 '각하결정'을 내렸습니다.

법원은 각하결정 이유로 '투표지 증거보전과 재검표 신청은 후보자를 추천한 정당과 후보자에게만 있다.'고 밝혔습니다. 법원의 이런 결정을 2002년 제16대 대선과 비교해봐야 합니다.

 

한나라당은 2002년 16대 대선이 끝난 5일 후인 12월24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상대로 선거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한나라당의 요청에 대법원은 전국 35개 지방법원에서 총 1,104만 9,311장에 대한 수작업 재검표를 진행했다. 수작업 재검표 결과, 당시 노무현 후보는 816표가 줄었고, 이회창 후보는 단 88표가 늘었으며, 한나라당은 대국민사과를 했다.


민주당이 대선 직후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2002년 한나라당의 과정을 밟지 않겠다는 의도와 단순 의혹을 쟁점화하기 어려운 증거수집에 있었습니다.

민주당의 입장도 이해되지만, 지금 새누리당이 뻔뻔하게 '대선 불복'이냐는 정치 공세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시민들의 선거무효 소송의 한계에 민주당이 어떻게든 함께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 노무현처럼 박근혜도 탄핵당할 수 있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2월 24일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 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하며, 대통령이 뭘 잘해서 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라고 발언했습니다.

중앙선관위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공직선거법및 선거부정방지법'을 위반했다며 대통령 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했습니다.


2004년 3월 9일 한나라당 의원 108명과 민주당 의원 51명이 서명한 <대통령(노무현)탄핵소추안>이 발의됐으며, 3월 12일 국회의원 195명이 투표에 참여, 찬성 193명, 반대 2명으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사이버사령부,경찰,검찰 등의 대선 개입에 대해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면 탄핵사유로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당장은 어렵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의석을 보면 새누리당이 153석으로 과반수 (51.34%)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민주당의 127석(42.62%)과 통합진보당 6석,정의당 5석을 합쳐도 탄핵소추안을 발의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당장은 탄핵소추가 어렵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이후 열린우리당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152석을 확보합니다. 선거 전 47석에서 탄핵 사건 이후 무려 105석이나 얻은 것입니다.

과거의 사례를 통해 2016년에 시행되는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과반수 의석 이상을 확보하고, 다른 야당과 합쳐 200석이 넘으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2017년 19대 대선을 불과 1년 앞두고 총선에서 야당이 과반수를 확보하고 대통령을 탄핵하는 일이 의미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사망,사퇴 사유가 없는 한 지속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현상에서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일입니다.

또한, 임기를 1년 앞두고 있더라도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을 통해 19대 대선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치를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수도 있습니다.

'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국민, 박근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앞서 봤던 여러 가지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이 침묵을 계속 지키고 있을 경우입니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정말 투명하게 18대 대선과정에서 벌어졌던 불법적인 국가기관 개입과 새누리당의 문제를 처벌하면 대선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수혜자였던 사건을 쟁점화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수사방해'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이승만 정권에서 벌어졌던 4.19혁명을 다시 재연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외치며 '부정선거 사범 처벌'을 외치는 전국적인 시민의 목소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승만을 '국부'로 미화하는 사람들 중에는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이었던 1960년 4월 12일 국무회의록을 통해 이승만이 '하야'를 결심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승만이 4.19혁명 전에 하야를 결심했다면, 박근혜 대통령도 이승만의 뒤를 이어 '선거에 문제가 있으니' '하야'를 하는 일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의 정치적 멘토 '박정희'를 본다면 아마 이것은 어려울 듯싶습니다. 박정희는 1979년 벌어졌던 부마항쟁 당시에도 국민과 대화가 아닌 총칼을 동원한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열흘 뒤에 죽지 않았다면, 캄보디아와 같은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박정희식 통치를 재연하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스타일로 봐서, 이번 18대 대선 해결 방식도 박정희식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18대 대선 문제를 해결할 가장 중요한 열쇠는 박근혜 대통령이 갖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민은 그에 맞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 그 누구도 대한민국이 혼돈에 빠지는 것을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 들어온 도둑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집주인 또한 없습니다. 경찰이 도둑을 잡아 법원이 정당한 처벌을 내린다면 집주인은 수긍하겠지만, 경찰이 그 도둑을 놔둔다면 스스로 도둑을 잡아 범죄 행위를 낱낱이 밝혀낼 것입니다.

국민에게는 18대 대선에 대한 선택의 폭이 그리 넓거나 희망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선거무효소송','탄핵','하야' 그 무엇이 됐든 국민은 나설 것입니다.

기나긴 싸움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서운 일도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이 늘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지켜왔듯이 2013년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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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경핵병진노선이 일으킨 놀라운 변화

북, 경핵병진노선이 일으킨 놀라운 변화
 
한호석의 개벽예감 <8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3/10/28 [09:49] 최종편집: ⓒ 자주민보
 
 


✦배출구에서 온배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북의 현실을 사실대로 보도하지 않는 미국 언론과 남측 언론의 ‘시계차단’에 가려 북의 실상이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요즈음 북에서는 처음 보는 특별한 현상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있다. 그런 현상들 가운데는 2013년 8월 31일에 일어난 매우 특별한 현상도 있다. 2013년 8월 31일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은 평범한 날로 지나가버렸는데, 그 평범한 날에 도대체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말일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연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나온 목격담에서 시작된다.

2010년 11월 16일 미국 한미경제연구소(KEI) 잭 프릿처드(Jack Pritchard) 소장은 워싱턴 주재 남측 특파원들과 만나 자신의 방북에 대해 말하면서 평안북도 녕변에 있는 핵시설단지를 방문하였을 때 보고 들은 목격담을 전해주었다. 그의 목격담에 따르면, 당시 착공한지 불과 며칠 되지 않은 경수로건설공사현장을 방문한 자신에게 북측 관계자는 “(경수로건설이) 처음 해보는 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지, 어떤 장애물에 부닥칠지 알 수 없다. 모든 건설이 김일성 주석의 탄생 100주년인 2012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북이 2010년 10월 말에 착공한 경수로건설을 초고속으로 다그쳐 2012년 말까지 완공하려는 목표를 세웠음을 말해준 것이었다. 북이 녕변경수로건설에 착공한 때로부터 1년 4개월이 지난 2012년 3월 26일 북측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리기성 교수는 <교도통신> 기자와 진행한 대담에서 녕변경수로가 2012년 말까지 완공될 예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프릿처드 소장은 3년 전 녕변경수로건설현장을 방문하고 미국에 돌아와 남측 특파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북이 녕변경수로건설공사를 2012년 말까지 완공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수로를 처음 만든다는 북이 어렵고 방대한 경수로건설공사를 착공의 첫 삽을 뜬 날로부터 불과 2년 2개월 동안에 끝내겠다고 하였으니 어찌 그 말을 선뜻 믿을 수 있었겠는가. 2009년 4월 14일 북의 위성발사를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규정한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을 전면 거부한 북이 그런 부당한 조치에 맞서 자력으로 경수로를 건설하겠다고 공언하였을 때,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 박군철 교수는 “북한이 가진 원자로가 영변의 5MW급 흑연감속로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직접 경수로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고 말하면서 회의적 전망을 꺼내놓은 적이 있다. 남측 핵과학자들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북정보에 밝다는 미국의 정부관리들과 전문가들도 북이 경수로를 2년 2개월 만에 건설하겠다고 말한 것은 북의 핵과학기술수준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희망사항’을 언급한 것뿐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원래 완공예정시점으로 정해졌던 2012년 말보다 8개월이 늦은 2013년 8월 31일 녕변경수로가 마침내 가동을 시작한 것이다. 15년 전 북이 첫 자국산 인공위성을 쏘아올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던 바로 그 날, 이번에는 자국산 경수로를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은 미국상업위성이 녕변핵시설단지를 촬영한 위성사진에서 밝혀졌다. 2013년 9월 11일과 10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미국-코리아연구소(US-Korea Institute) 웹사이트 <38노스(North)>에 그 위성사진이 각각 실렸는데, 그 위성사진에서 녕변경수로 가동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위성사진은 2013년 8월 31일 녕변핵시설단지에 신축된 경수로발전시설에서부터 인근에 있는 구룡강으로 길게 뻗어나간 대형 지하배수로의 배출구에서 많은 양의 온배수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경수로발전시설에서 많은 양의 뜨거운 물이 배출되는 것은 경수로가 가동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비록 완공예상시점보다 8개월이 늦어졌지만, 북이 처음으로 건설한다는 경수로를 불과 2년 10개월 만에 완공한 것은 믿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일이다. 요즈음 북의 건설현장과 생산현장 그 어디서나 ‘마식령속도’를 강조한다는데, 경수로를 2년 10개월 만에 완공한 것을 좀 과장한다면 ‘마식령속도로 창조한 기적’이라 해야 할지 모른다. 북에서 말하는 ‘마식령속도’란 해발고가 너무 높아 말도 쉬어 넘는 높은 고개라는 뜻으로 옛날 선조들이 그 이름을 지은 마식령 정상에 “세계 일류급”이라고 하는 스키장(ski resort)을 건설하는 초대형 공사를 고속으로 진척시킨다는 뜻이다.

3년 전 녕변경수로건설현장을 방문하고 미국에 돌아와 남측 특파원들과 만났던 프릿처드 소장은, 199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채택된 북미기본합의의 경수로건설공약에 따라 미국이 지어주겠다는 말만 꺼내놓고 시간을 질질 끌다가 구덩이만 파놓은 채 결국 2003년 11월에 공사를 중단하였던 “금호지구 경수로 건설에 사용된 중장비나 자재는 (녕변경수로 건설공사에서) 사용되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프릿처드 소장의 이 말을 새겨들으면, 북은 경수로를 자력으로 설계, 제작하였고, 경수로발전시설도 자력으로 설계, 시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발전시설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장비와 자재도 자체로 마련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녕변경수로는 북이 100% 자력으로 만든 경수로이며, 북에서 쓰이는 표현을 빌리면, ‘사회주의자력갱생의 조선형 경수로’라고 할 수 있다.


✦제논 검출과 녕변흑연감속로 재가동

미국의 몇몇 분석가들은 2013년 8월 31일 녕변핵시설단지의 지하배수로 배출구에서 온배수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보여주는 위성사진을 분석한 글에서 그 온배수가 녕변경수로에서 배출되는 게 아니라 녕변흑연감속로에서 배출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녕변흑연감속로 재가동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녕변경수로 가동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그런 주장이 미국 언론과 남측 언론에 그대로 실리는 바람에 녕변경수로가 가동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세상에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녕변흑연감속로는 2013년 8월 31일에 재가동을 시작한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재가동되었다.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2013년 4월 2일 북측 원자력총국 대변인이 발표한 담화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원자력총국 대변인은 2013년 3월 3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동시에 추진하는 경핵병진노선에 따라 “원자력부문 앞에는 자립적 핵동력공업을 발전시켜 나라의 긴장한 전력문제를 푸는데 적극 이바지하며, 세계의 비핵화가 실현될 때까지 핵무력을 질량적으로 확대, 강화하여야 할 중대한 과업이 나서고 있다”고 하면서, “현존 핵시설들의 용도를 병진로선에 맞게 조절, 변경해나가기로” 하였는데, 우선 녕변핵시설단지에 있는 우라늄농축공장과 흑연감속로를 “재정비, 재가동하는 조치”부터 “지체 없이” 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위의 담화에 따르면, 북은 녕변우라늄농축공장 재정비와 녕변흑연감속로 재가동을 지체 없이 실행한다는 것이다. 녕변우라늄농축공장를 즉각 재정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래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고, 우선 녕변흑연감속로를 즉각 재가동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측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 2013년 8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이 2013년 6월 21일부터 24일까지 포집한 기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방사능핵종인 제논(Xe)이 세 차례나 검출되었다. 제논이라는 기체는 자연상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핵실험을 실시하였을 때나 원자로를 가동하였을 때만 대기 중에 방출되는 방사능핵종이다. 그러므로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이 2013년 6월 21일부터 24일까지 포집한 기체에서 제논이 세 차례나 검출된 것은 녕변흑연감속로가 6월 21일부터 재가동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사진 1>은 녕변흑연감속로가 들어있는 건물을 촬영한 것이다.
 
▲ <사진 1> 녕변흑연감속로가 들어있는 대형 건물에는 뾰족하고 높은 굴뚝이 설치되어 있다 ©이창기 기자, 한호석소장 사진제공
2013년 4월 2일 북은 녕변흑연감속로를 “지체 없이” 재가동하겠다고 원자력총국 대변인 담화를 통해 밝혔는데, 그로부터 불과 두 달 반밖에 지나지 않은 6월 21일에 녕변흑연감속로가 재가동에 들어간 것이다. 북의 건설자들이 아무리 ‘마식령속도’로 일한다고 하지만, 2007년 10월 6자회담 합의에 따라 가동을 완전 중지한 이후 5년 동안 거의 폐허처럼 방치되어 녹슬었던 흑연감속로를 2개월 반 만에 재가동한 것은 착공 3년 만에 경수로를 완공한 것만큼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것도 북미 합의 이행 차원에서 냉각탑까지 폭파시킨 상태에서 말이다. 녕변경수로만이 아니라 녕변흑연감속로에서도 어떻게 그런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을까?

남측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 2009년 10월 6일 보도에 따르면, 북은 북미합의이행을 위해 가동을 중지했던 녕변흑연감속로를 원상복구하는 작업을 2009년 초부터 시작하였는데, 2009년 10월 5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남측 국방부와 합참본부 관계자들은 녕변흑연감속로의 원상복구 진척상황에 대해서는 기밀이라는 이유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 바 있다. 이런 정보를 통하여 북이 2009년 초부터 녕변흑연감속로 원상복구작업을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상복구작업이 2009년 초부터 시작되었고, 녕변흑연감속로 재가동이 2013년 6월 21일에 시작되었다면 재가동을 위한 원상복구작업에 4년 6개월이 걸린 셈이다. 녕변흑연감속로 원상복구작업에 왜 그처럼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2009년 10월 5일 국정감사에서 남측 국방부와 합참본부 관계자들은 북이 녕변흑연감속로를 원상복구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원상복구가 아니라 새로운 설비로 개조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2005년 11월 9일 <AP> 보도기사에서 미국의 저명한 핵전문가 씩프릿 헥커(Siegfried S. Hecker) 박사는 북측 관계자가 녕변흑연감속로를 재가동하기 위해 아예 “일신하겠다(refurbish)”고 자기에게 말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것은 원상을 복구하는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설비로 완전히 개조한다는 뜻이다.

녕변흑연감속로를 새로운 설비로 완전히 개조하였다면, 그 발전용량은 얼마나 증대되었을까? 이 물음에 답해주는 자료는 아직 찾을 수 없지만, 북이 녕변흑연감속로를 4년 6개월 동안 새로 개조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북이 녕변흑연감속로를 새로운 설비로 개조하여 2013년 6월 21일부터 재가동을 시작하였다면, 녕변경수로와 마찬가지로 녕변흑연감속로에서도 온배수가 배출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2013년 10월 17일 헥커 박사가 미국 원자과학자협회 회보(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에 발표한 글에 따르면, 북은 녕변흑연감속로를 개조하고 녕변경수로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배수시설을 건설하였는데, 그 두 원자로에서 나오는 온배수를 한 군데로 모아 배출하는 지하배수관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38노스> 웹사이트에 게시된 위성사진이 말해주는 것처럼, 녕변경수로가 가동되기 시작한 2013년 8월 31일 이전에도 지하배수로 배출구에서는 온배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8월 31일부터 배수량이 갑자기 폭증하였다. 이러한 배수량의 갑작스러운 폭증현상은, 녕변흑연감속로가 2013년 6월 21일부터 재가동되면서 온배수를 배출하던 중 8월 31일에는 녕변경수로까지 가동되어 배수량이 폭증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북은 대형 경수로건설에 곧 착공할 것이다

지금 녕변핵시설단지에서는 종류가 서로 다른 두 기의 원자로가 돌아가고 있다. 2013년 6월 21일 북이 재가동을 시작한 흑연감속로는 직사각형 건물 안에서 돌아가고 있고, 2013년 8월 31일 가동에 들어간 경수로는 거대한 반구형 지붕을 씌운 건물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경수로(light water reactor)의 영어머리글자를 따서 ‘LWR’이라고 써넣은 반구형 지붕의 건물이 경수로가 들어있는 건물이고, 오른 쪽에 ‘5MWe Reactor’라고 써넣은 직사각형 건물이 흑연감속로가 들어있는 건물이다.
▲ <사진 2> 녕변핵시설단지를 촬영한 위의 위성사진에는 경수로와 흑연감속로가 보이고, 경수로에서 구룡강으로 뻗어 나간 지하배수로가 설치된 매설공사흔적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위의 사진에서는 지하배수로를 '경수로 냉각관(cooling pipes for LWR)'이라고 표기되었다. 사진에는 온배수를 배출하기 위한 '양수장(pump house)'도 보인다. (image credit=getty images) © 이창기 기자, 한호석 소장 사진제공

그렇다면 녕변경수로는 용량이 얼마나 큰 원자로일까? 3년 전 북측 관계자는 경수로건설공사현장을 방문한 프릿처드 소장에게 녕변경수로 용량이 100메가와트급이라고 말한 바 있다. 메가와트(MW)는 발전시설의 열출력을 표시하는 단위인데, 녕변흑연감속로 열출력은 25메가와트이고, 녕변경수로 열출력은 100메가와트다. 열출력을 전기출력으로 환산하면, 녕변흑연감속로 전기출력은 5메가와트(MWe)이고, 미국 핵전문가들의 추산에 따르면 녕변경수로 전기출력은 30메가와트(MWe)다. 30메가와트는 30,000킬로와트(KWe)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3년 전 착공 당시 경수로를 처음 건설해본다고 하였던 북이 불과 2년 10개월 만에 완공한 불가사의한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불가사의한 현상은 북이 미국 정찰위성의 감시를 벗어난 은폐공간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또 다른 경수로를 비공개로 가동해왔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은폐공간에서 소형 원자로를 가동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지방언론지인 <디머크랫 앤드 크로니클(Democrat and Chronicle)> 2012년 5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기업체 이스트먼 코닥(Eastman Kodak)이 소형 원자로를 지하실에 설치해놓고 30년 이상 가동해왔다고 하는데, 일개 민간기업체가 하는 일은 어찌 북이 할 수 없었겠는가. 그러므로 북이 녕변경수로를 그처럼 짧은 기간에 완공한 것이야말로 오래 전에 북이 비공개로 건설한 경수로가 그 동안 가동되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북이 미국의 집요한 봉쇄, 제재,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력으로 경수로를 건설하고 가동하는 높은 기술과 풍부한 경험을 확보하였음을 말해준다.

3년 전에 녕변경수로 건설공사현장을 방문한 프릿처드 소장에게 북측 관계자는 “우리가 짓는 경수로는 실험용 경수로이며, 건설역량을 입증하기 위해 비교적 소규모의 경수로를 우리 힘으로 지으려 한다”고 말하였다. 경수로건설역량을 입증하기 위해 소형 경수로를 자력으로 건설한다는 그의 말은, 비공개경수로를 가동해오던 중에 이번에는 경수로건설역량을 외부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소형 경수로를 건설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그 북측 관계자가 프릿처드 소장에게 “녕변경수로를 완공하면 그보다 큰 대규모 경수로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세워두었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북이 대형 경수로 건설계획을 2010년에 세워놓았으므로 언제든지 착공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소형 경수로를 2년 10개월 만에 완공하는 능력을 과시한 북은 이제 대형 경수로 건설공사에 곧 착공할 것으로 보인다. 그 대형 경수로는 또 얼마나 짧은 기간에 완공될 것인가?

핵은 불이다. 녕변경수로 완공은 열핵이라는 불을 다루는 첨단과학기술을 자력으로 확보한 북이 그 열핵의 불길이 솟구치는 경핵병진노선을 따라 그들이 목표로 내세운 사회주의기술강국건설에로 나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성능 원심분리기 4,000대 돌아가는 녕변우라늄농축공장

지금 가동되고 있는 녕변경수로에는 녕변핵시설단지의 우라늄농축공장에서 생산된 저농축우라늄이 연료로 장입된다. 녕변우라늄농축공장은 2009년 4월에 착공되었고 2010년 10월 말에 완공되었는데, 북은 공장가동을 시작한 직후인 2010년 11월 12일 그 공장내부를 헥커 박사에게 보여준 바 있다. 북이 녕변우라늄농축공장 건설공사를 시작하였던 2009년 4월은 북측 외무성이 2009년 6월 13일 핵무기추가생산과 우라늄농축개시를 공개적으로 언명하면서 대미협상을 완전히 중단하였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헥커 박사가 현장에서 육안으로 확인하고 깜짝 놀랐던 것처럼, 녕변우라늄농축공장에서는 고속회전하는 초경량 원심분리기인 알멜로(Almelo) 원심분리기와 같은 급의 고성능 원심분리기들이 돌아가고 있다. 그런 고성능 원심분리기를 만들려면, 희토류로 만드는 특수자석, 초강도 마레이징강(maraging steel), 진공펌프, 고속회전동체, 분리기 고속회전을 제어하는 동력제어장치 등을 만드는 핵심기술이 필요한데, 녕변우라늄농축공장은 북이 그런 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녕변우라늄농축공장의 존재가 헥커 박사의 현장방문으로 세상에 알려졌을 때, 세계 각국 전문가들은 북이 그런 첨단핵기술을 몇 해 사이에 개발할 수 없으므로 아주 오래 전부터 우라늄농축기술을 발전시켜왔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유엔안보리 외교관들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 2011년 2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유엔전문가집단은 북이 우라늄농축을 이미 1990년대에 시작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런 사실들은 북이 우라늄농축부문에서 2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경험을 축적해왔음을 말해준다.

헥커 박사가 2011년 1월 24일 <연합뉴스> 기자와 대담한 기사에 따르면, 그가 녕변우라늄농축공장에서 목격한 것은 고성능 원심분리기 2,000대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에서 대북제재조정관 기술보좌관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스캇 켐프(R. Scott Kemp) 교수는 2012년 3월 22일 <동아일보> 기자와 대담하면서 북의 원심분리기가 2,000대가 아니라 6,700대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그런 추산을 뒷받침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2013년 8월 7일 미국의 핵군축연구소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는 위성사진 분석을 통해 녕변우라늄농축공장이 불과 6개월 만에 두 배 이상 확장되었고, 그로서 고성능 원심분리기 4,000대가 가동되고 있다고 밝혔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2013년 8월 초 녕변우라늄농축공장 능력확장공사를 끝낸 북은 그 공장에서 4,000대에 이르는 고성능 원심분리기를 가동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런데 2010년 11월 19일 과학국제안보연구소는 북이 25∼30메가와트급 녕변경수로를 가동하려면 저농축우라늄을 해마다 약 1t씩 추가로 장입해야 하며, 저농축우라늄을 해마다 1t씩 생산하려면 원심분리기 1,000대를 돌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고성능 원심분리기 1,000대만 있으면 녕변경수로에 장입할 연료를 생산할 수 있는데, 북은 고성능 원심분리기를 왜 4,000대로 증설한 것일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 북은 고성능 원심분리기 1,000대에서 나오는 저농축우라늄을 녕변경수로 장입연료로 사용하고, 나머지 3,000대의 고성능 원심분리기에서 나오는 저농축우라늄을 고농축하여 무기급 핵물질인 고농축우라늄(HEU)을 대량생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녕변우라늄농축공장에서 돌아가는 고성능 원심분리기 4,000대 가운데 녕변경수로에 장입할 연료를 생산하기 위한 원심분리기 1,000대 이외에 3,000대의 원심분리기에서 생산되는 저농축우라늄을 순도 90% 이상으로 고농축하면 연간 60kg의 고농축우라늄이 나온다. 그것만이 아니라, 녕변흑연감속로에서 나오는 폐연료를 재처리하면 연간 6kg의 무기급 플루토늄이 나온다. 이러한 정황은 올해 하반기부터 북이 무기급 핵물질을 대폭 증산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북의 무기급 핵물질 대량증산과 지하핵실험 준비

녕변경수로 완공과 녕변흑연감속로 재가동을 바라보는 미국은 무거운 침묵에 빠져있다. 하지만 미국의 무거운 침묵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미국을 무거운 침묵으로 몰아넣은 물체는 녕변경수로와 녕변흑연감속로 이외에도 두 개가 더 있다. 그에 대한 사연은 아래와 같다.

<교도통신> 2005년 6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북은 1985년에 착공하였다가 1994년 북미기본합의에 따라 건설공사를 중단했던 녕변핵시설단지의 50메가와트(MWe)급 흑연감속로 건설공사를 재개하였을 뿐 아니라, 1989년에 착공하였다가 역시 북미기본합의에 따라 건설공사를 중단했던 평안북도 태천의 200메가와트(MWe)급 흑연감속로 건설공사도 재개하였다. 이처럼 녕변과 태천에서 대형 흑연감속로 두 기를 건설하는 공사가 동시에 재개되었다는 정보는, 2005년 5월에 방북하였던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존 루이스(John W. Lewis) 교수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당시 미국 국무장관에게 자신의 방북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언급한 것이다.

대형 원자로를 건설하는 데 걸리는 공사기간은 6∼7년이므로, 북이 2005년에 녕변과 태천에서 대형 흑연감속로 두 기를 건설하는 공사를 동시에 재개하였으므로, 2013년 10월 말 현재 거의 완공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정찰위성을 동원하여 녕변과 태천의 대형 흑연감속로 건설공사현장을 지난 7년 동안 줄곧 감시해왔으면서도 사안이 너무 심각한 까닭에 그 두 곳의 공사진척도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완공을 앞두고 있는 50메가와트급 흑연감속로와 200메가와트급 흑연감속로가 공사를 완료하고 가동되면, 그 두 곳에서만 연간 300kg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 그러므로 5메가와트급 녕변흑연감속로와 30메가와트급 녕변경수로에 이어 50메가와트급 녕변흑연감속로와 200메가와트급 태천흑연감속로까지 모두 가동되는 경우, 북은 연간 366kg의 무기급 핵물질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미국 정찰위성이 포착하지 못하는 다른 비공개시설에서 생산되는 무기급 핵물질까지 더하면 북은 연간 약 400kg의 무기급 핵물질을 생산하게 된다고 예상할 수 있다.

북이 대량생산하는 무기급 핵물질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정밀화된 각종 핵탄을 만드는 데 사용할 것이다. 북이 생산하는 연간 약 400kg의 무기급 핵물질을 전량 핵무력증강에 투입하면, 핵탄두, 핵어뢰, 핵가방 같은 각종 핵탄을 연간 약 50기씩 증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증산추세를 보면, 북이 세계의 비핵화를 위한 핵군축회담을 미국에게 제의한 까닭을 알 수 있다.

주목하는 것은, 북이 이전에는 무기급 핵물질을 지하시설에서 비공개로 생산해왔는데, 지금은 미국 정찰위성이 감시하는 지상시설에서 보란듯이 공개적으로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3년 8월 북이 녕변우라늄농축공장을 두 배 이상 늘리는 능력확장공사를 끝내고 곧이어 녕변경수로를 완공한 것은, 2013년 3월 3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경핵병진노선에 따라, 그리고 2013년 4월 1일에 제정된 “자위적 핵보유국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한 법”에 따라 각종 핵탄을 기하급수적으로 증산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준다. 그 법에 따르면, 북은 “가중되는 적대세력의 침략과 공격위험의 엄중성에 대비하여 핵억제력과 핵보복타격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실제적인 대책을 세운다”는 것이다.

북이 경핵병진노선과 핵보유국지위 공고화 법령에 따라 급속도로 밀고 나가는 핵무력증강사업은 무기급 핵물질 증산과 핵탄 증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하핵실험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북의 핵무력증강과 지하핵실험의 직접적 연관성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2013년 6월 25일 <38노스>가 발표한 위성사진 분석결과에 따르면, 북은 이미 2013년 4월 말부터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의 지하핵실험장에서 새로 갱도굴착공사를 시작했고, 2013년 10월 23일 <38노스>가 발표한 위성사진 분석결과에 따르면, 그 지하핵실험장 서쪽과 남쪽에 각각 새로 뚫어놓은 두 개의 갱도입구가 보이고, 갱도굴착과정에서 파낸 거대한 흙더미가 갱도입구 밖에 쌓여 있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북이 불시에 제4차 지하핵실험을 실시하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북이 제4차 지하핵실험을 실시하는 목적은 미국을 북미협상으로 다시 끌어내는 초강경한 압박을 가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경핵병진노선에 따라 핵무력을 증강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면, 9.19공동성명 등 북미 사이에 합의한 미국의 자기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북을 핵포기로 유인하려는 데만 집착하였던 미국의 대북정책은 북의 경핵병진노선 추진에 의해 완전히 파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핵병진노선 추진은 미국이 자기에게 제기된 북의 평화협정 체결요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하지 않으면서 북의 일방적인 핵포기만을 요구해온 대북협상전략이 결국 어떻게 파산되고 말았는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파산된 대북정책을 복구하지 못하게 된 미국은 침묵에 빠졌고, 대미협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북은 사회주의기술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경핵병진노선을 선포하고 인민생활향상과 핵무력증강을 ‘마식령속도’로 병진시키고 있다. 북과 미국이 이처럼 극적으로 대비되는 모습을 각각 보이고 있는 가운데, 서해5도 분쟁수역에서 전면전을 촉발할 무력충돌위험이 전례 없이 고조되었고, 미국은 일본자위대의 교전권을 인정해주면서 3자연합 대북전쟁체계 수립을 급속히 추진하고 있고, 그에 맞서 북은 ‘조국통일반미대전’을 잠시 유보한 채 제4차 지하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 한반도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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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타는 장민호씨 가족들 마음 알아주기를

애타는 장민호씨 가족들 마음 알아주기를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3/10/27 [03:33] 최종편집: ⓒ 자주민보
 
 
 
▲ 보안법으로 7년 옥고를 석방되자마자 외국인 보호소에 다시 구속수감된 장민호 씨, <구속노동자회 소식지 펌> ©자주민보


구속노동자후원회 이광열 집행위원장은 최근 본지와의 통화에서 장민호 양심수를 외국인보호소가 아닌 집에서 가족과 보내며 정부의 해외로 추방 결정에 대한 이의신청 결과를 기다릴 수 있게 해달라는 청주 외국인보호소 보호일시해제조치를 바라는 청구서를 보호소에 제출할 때, 청주보호소에서는 가급적 25일 토요일까지 결정을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그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어 장민호 씨는 계속 또 다른 감옥인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되어 있고 기다리는 가족들은 더욱 애가 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관련기사: http://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4128&section=sc4&section2=)


“아마 정부에서도 고심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청주 외국인보호소는 환경이 열악해서 한 방에서 열 명도 넘는 사람이 기거하고 있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난방 등도 부족하며 생필품 구입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입니다. 장민호 씨도 보호소 생활을 감옥 못지않게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특히 난치병으로 병원을 왔다갔다 하며 치료를 받고 있는 장민호 씨 어머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부디 하루빨리 가족들과 만날 수 있게 정부에서 인도주의적인 결정을 신속히 내려주기를 바랍니다.”

사실 장민호 씨 가족들은 하루를 천년처럼 느끼며 장민호 씨가 석방되기만을 간절하게 기다려왔다. 그 마음이 구속노동자후원회 소식지 ‘구속노동자’ 2012년 6월호(68호)에 잘 실려 있어 아래에 소개한다.


소개한 내용 중에 국정원의 협박으로 장민호 씨 아내가 급히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귀국했고 바로 이혼장을 감옥에 있는 장민호 씨에 보내게 되었다는 가족들의 입장은 사실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면이 없지는 않다.

필자도 국정원 수사를 받아보았지만 국가기관답게 인권을 잘 보장해 주었었다. 아내의 방은 여성 수사관들이 와서 조사하고 변호사 접견과 가족 면회도 자유롭게 보장해주어 국정원 면담실에서 장인 장모님께 큰절까지 올리며 안심시켜 드릴 수 있었는데 왜 장민호 씨의 아내는 국정원을 갔다 온 후 넋이 나가 안절부절 못하고 바로 짐을 싸서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넘어갔으며 가자마자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첫 편지이자 마지막 편지가 된 이혼장을 보내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말 관타나모 수용소를 들먹이며 협박을 한 것이 맞는지 믿기지 않는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의 입장이 있다면 그것도 충실히 보도할 생각이다.


이런 논란의 여지가 없진 않지만 장민호 씨의 구속기간 심장병 수술을 했음에도 아들이 걱정할까봐 알리지 않고 감옥 안이지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는 어머니의 그 절절한 자식사랑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어, 정부에서 이런 가족들의 마음을 좀 헤아려 달라는 취지로 소개하게 되었다.

일일천추 석방을 기다려온 어머니가 7년만에 감옥에서 나온 아들에게 밥한끼 따듯하게 해먹이지 못하고 또 다른 감옥인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되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동네에서 착하기로 소문난 동생을 자랑스럽게 여겨온 누이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면 어찌 하늘이 무심타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건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고 있는 것 아닌가.


부디 정부에서 이런 가족들의 마음을 고려하여 인도주의적인 결정을 하루 빨리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가슴에 한 맺힌 걸 어떻게 다 푼대”
-국가보안법 ‘일심회 사건’으로 구속된 장민호 님 가족 인터뷰
<구속노동자후원회 소식지 ‘구속노동자 2012년 6월호(68호)에 실린 글>


전국교사대회와 쌍용차 범국민 대회가 있던 지난 5월 19일, 오전에 국가보안법(일심회 사건)으로 구속된 장민호(마이클 장) 동지의 어머님 성경완 님(80)과 누님 장화옥(57) 님이 살고 계신 일산 댁을 찾았다. 5월 18일 민주화 항쟁 다음날이기도한 이 날,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명 아래 여전히 국가의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고통 받고 있는 동지의 가족을 만나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두 분께서는 친히 마중까지 나와 주시며, ‘먼 길 오느라 애썼다’며 두 손을 맞잡아 주셨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누이는 국가보안법을 비판하면서도, 동생의 신념에 반하거나, 다른 가족들에게 누가 될 것을 염려하시며,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 구속 수감 당시 장민호 씨에 대한 탄압을 규탄하는 가족들 ©자주민보, 민중의소리 제공

누나 : “저희 가족들도 동생 생사를 며칠 동안 몰랐어요. 애가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나, 행방불명이 됐나 걱정을 하다가 뉴스를 보고 알았어요. 그래서 너무 놀랐죠. 우리 민호가 뉴스에서 총책(총책임자 : 편집자 주)이라고 나오는데, 저희는 총책이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제 입장은 국가보안법이 폐지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이)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고, 동족인데, 그것을 가지고 대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하필 ‘내 동생이 왜 그 길에 앞장섰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국가보안법 같은 것도 없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잖아요. 미국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포섭됐다고 하는데……. 믿기지가 않아요. 그렇다고, 동생이랑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나 얘기를 해 본 것도 아니에요. 항상 곁에 누군가 있는 감시받는 상황 속에서 접견을 해서 지금껏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적이 없죠. 저희로서도 언론보도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죠. 믿고 싶지는 않지만…….”


어머니 : “아주 혼이 빠졌어. 뉴스에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고 딱 나오는데, 장 마이클이 국정원에서 말이야, 그래서 변호사들이 쳐들어가니, (누나 : 얼마나 겁박을 했겠어!) 변호사들을 못 들어가게 막았다고 하잖아. 뭐 꾸미느라고. 검찰에서 국정원한테 빨리 넘기라고 하니, 일주일만 더 여유를 달라고 해서, 일주일 더 연기돼서 얼마나 당했는지. 검찰에 와서 면회했는데 애가 이상해.”


누나 : “국정원에서 너 어서 고해라, 안 불면 미국의 부인이랑 관타나모 수용소라 했나? 감옥에 보낸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벌벌 떤 거죠. 미국에 간첩들만 보내는 곳이라며.”


어머니 : “그 당시에도 우리 아들이 나한테 직접 말할 기회도 없고, 가면 (손으로 면회하는 곳을 그리시며) 너 잘 있었니? 잘 있어라 밥 잘 먹고 있어라. 엄마도 조심하고 누나도 조심하고. 그 말 하면 시간이 있어야지! (흐느낌) 가서 일심회가 뭐냐? 이랬더니 ‘나도 몰라!’ 지도 모르는데 검찰이 붙인 것인지…….”


누나 : “그때 당시에 애가 넋이 나간 거야. 정신이 없던 거야. 그 착한 애가…….”


장민호 씨는 어릴 때부터 약자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고 한다. 누이는 장민호 씨가 미국에 유학을 간 것도 집안이 부유해서 간 게 아니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가슴에 한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씀을 이었다.


어머니 :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좀 특이했어요. 우리 남편이 일찍이 간경화로 고생하셔서, 일을 못하고 제가 대신 나가서 생활을 꾸렸어요. 민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저녁 늦게 들어왔어요. 목욕을 시키는데, 온 몸이 시뻘겋게 피멍이 들었는데 걔는 말을 안 해. 그래서 계속 왜 그러냐고 채근하니, 싸움을 했대. 왜 네가 매를 맞았니? 생전 싸움도 안 하는데……. 그래서 내가 학교에다 전화를 걸어서 엉엉 울었어요. 알고 보니, 지금으로 말하면 왕따인 어떤 애를 급우들이 괴롭히니, 우리 아들이 역정 내서 싸움을 한 거야.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라더라고. 민호가 통일운동을 한 계기도 의로운 마음 때문이었다고 생각해. 그때는 학생들이 다 데모했잖아요. 우리 아들은, 마이클은 성균관대학교였는데, 대학을 다니면서……. 얼마나 착한 아이인데.”


어머니는 장민호 씨가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고 하셨다. 신림동 산꼭대기 마을에서 용산까지 학교를 다녔는데, 먼 거리라 일찍 나와야 하는데, 남들보다 더 일찍 나와서 버스에서 무거운 짐을 이고 내리는 분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도와줬다고 하셨다.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이 책가방을 옆에 두고 그 짐들을 다 받는 모습을 떠올리면 왜 이리 애가 착하기만 하고 미련하냐고 말씀하시며, 그런 아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리다고 했다. 어머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Q 그렇게 반듯하고, 착한 장민호 씨가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 가족들, 당시 집안 상황은 말도 아니었을 것 같네요.


누나 : “그렇죠. 회사에서 쫓겨났지, 집도 하루아침에 날아가고, 부인은 미국으로 애 데리고 가 버리고……. 누구를 시켜서 접견하며 이혼 신고를 하더라고요. 더 황당한 것은 감옥으로 서신이 왔는데, 이혼장인 거예요.”


어머니 : “그 아이는 제 것이라는 게 없어. 그렇게 산 애가 왜 피붙이들이랑 생이별을 하고 감방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지. 난 너무 무서워. 세상에 그런 보도가 나고, 난리가 나서 동네에서 내가 걸어가면 사람들이 다 외면하는 거야. (사람들이) 신문이랑 방송에 난 것을 그대로 믿더라고. 한번은 며느리는 나가고, 애들은 학교에 있는데 동아일보 기자가 우리 집에 왔어요. 그 기자에게 불리지도 말고, 줄이지도 말고 ‘고대로’ 쓰라고 말했지. 그 기자는 며느리도 만날 요량이더라고.

우리 며느리가 이 사람이랑 만나고 있다고 전화가 왔는데, 밤10시가 돼도 안 들어와요. 그래서 제가 기자한테 전화를 걸어서 며느리랑 있느냐 했는데, 헤어진 지 오래됐다고 해. 그래서 제가 늙은이한테 거짓말 하지 말라고, ‘우리 며느리 해코지 하지 말고, 어디 가두거나 이러면 나 이 세상에 편지 쓰고 자결할 거야’ 이러니까, 그 기자가 ‘어머니 저 믿으세요. 손 끝 하

나 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일이 있겠죠.’ 이러는 거예요. 그날 12시 쯤 며느리가 들어오더라고요. ‘너 왜 이제 들어오니?’ 이러니 애가 말을 안 해요. 애가 제정신이 아니야. 뭘 집으려고

해도 손을 덜덜 떨고, 안절부절 못하는 거야. 그리고 열흘 후에 짐 같은 것도 어디다 부탁을 했는지 사람들이 짐을 다 꾸려서 다 가져가. 저녁 때 오더니, 애가 반죽음이야. 우리 손녀가 그때 여섯 살이었는데, 나를 막 껴안고 ‘엄마 무서워!’ 이러는 거야. 그러더니 ‘어머니 얘 옷 좀 입혀 주세요!’라고 하고, ‘저 어디 다녀올 테니, 형님 집에 좀 계세요’라고 말하고 큰 가방을 놓고 나가며, 집안 세간을 다 버리래. 나가기 전에 뭘 싼 것을 나에게 주면서 ‘이거 가지고 고모네 집에 가 계세요! 제가 다시 갈 테니까!’ 이러는 거야. 그때 내 생각에 이제 난 죽었구나. 국정원에 갔다 와서 그렇게 된 거예요. 가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애가 정신을 못 차려요. 집이 텅텅 비어서 너무나 무섭잖아요. 얘(누이)한테 전화를 건 거예요. 그리고 싼 게 뭔지 봤더니 돈이더라고요. 내가 걸을 수가 있어야지. 무서워서. 심장이 떨려서. 얘(누이)한테 전화를 하니, ‘엄마 택시 타고와!’ 버스를 타고, 내렸는데, 넘어졌어. 밤중이라 눈도 어둡고. 그래서 이튿날, 얘(누이)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비행기 타기 직전에, 그것도 얘(누이)네 신랑에게 얘기한 거야. 집을 청산한 거야. 아니, 열흘 안에 집을 파는 게 어딨어? 난 집 판지도 몰랐지. 열흘 후에 집을 내주래. 그 말 딱 하고 소식이 없는 거야.”



Q 장민호 씨는 부인에게는 어떤 남편, 아이들에게는 어떤 아버지였나요? (어머니께서 보청기를 끼고 오셨다.)


어머니 : “잘했지. 며느리는 영어 강사를 했는데, 주로 저녁에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까……. 아마 좋은 남편은 못 됐을 거요. 저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더라고요.”


누나 : “애들 안 예뻐하는 아빠가 어디에 있겠어? 부인이 직장이 있어서, 늦게 들어오니까. 애들 데리고 호수 공원에 가서 자전거 타고, 나보고도 호수공원 앞이니까 오라고 하고, 같이 저녁 먹고, 헤어지고 그랬는데, 그 아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다는 거야~! 이해가 안 가고 (허탈한 웃음) 예전에도 그렇지만, 집권당이 뭔가 크게 터뜨리는 희생양이 그 시기에 필요했던 것 같아.”



Q 장민호 씨처럼 부인이나, 자제 분들도 미국 국적인가요? 면회는 종종 오나요?


누나 : “조카들은 어리죠. 17~18살이에요. 면회는 안 오죠. 아이들도 상처가 큰 것 같은데, 이혼은 했지만, 그래도 고모니까 아이들에게 이메일도 보내고 그러면 답장이 오기는 와요. 한 다섯 통 보내면 한 통 오나? 아마 그곳에서도 굉장히 살기가 힘들 거예요.”


어머니 : “며느리는 미국 사고방식이었어. 국적도 미국이고, 깊은 말뜻도 모르고, 무슨 일 있으면 폴리스 부른다고 하고……. (한국식으로) 싹싹하지는 않았지만, 잘했지. 어서 다 만나야 하는데……. 한국에 있는 우리가 면회를 가기는 하는데, 자주는 못 가지. 그때 최기영, 이정훈 그 양반들은 형량도 3년 정도 나와서 나왔는데, 우리 아들은 아직도 있고 말이야, 왜 우리 아들이 주도했다는 건지…….”



Q 면회 때마다 마음이 힘드시겠네요.


누나 : “밖에서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죠. 인권 침해는 이루 말할 것도 없어요. 매년 8월 달에도 온 가족들이 대전을 가요. 작년에는 못 갔는데, 왜 그랬냐면 접견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왜 안 되냐?’ 물어 보니, 이유를 말할 수 없대요. 우리는 일단 대전 근처에 온천에 갔어요. 그런데 미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마이클 장이 가족들에게 접견을 요청했는데, 너희는 아느냐’고 하며, 그 안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예요. 제 동생이 미국 국적이라 대전 외국인 수용소(편집자주: 대전교도소 외국인 사동)에 있는데, 변호사를 통해 알아보니, 교도관이랑 싸운 거예요. 중국동포 그런 사람들을 교도관이 인권 탄압을 한 거예요.(옷 벗겨서) 남자 같은 경우에도 성기 같은 곳을 잡고 그랬대요. 동생이 그것을 못 참은 거죠. 제 동생이 교도관이랑 싸우고 교도소장 나와라 했는데, 걔네들은 항상 그렇잖아요. ‘지금까지의 관행이다’ 그래서 싸움이 붙은 거예요. 밉보인 거죠. 그래서 독방에 가뒀다는 거예요.”


어머니 : “저는 나이 팔십이 먹도록 옥안에 옥방이 있다는 것을 처음 들었어.”


누나 : “옥 안에 기대지도 못하게 똑바로 앉게 했어요. 조금이라도 자세가 틀어지지 않게 감시하고 말이죠. 특별 사면은 형량의 3분의 2를 하고 나면 자격이 주어진대요. 그래서 ‘올해 혹시 바라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게다가 요즘 통합진보당 사태랑 관련해 뉴스에 일심회 얘기가 다시 나오고……. 아, 사면이 되겠어요? 안 되지. 그나마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되면 될까 했는데, 요즘 돌아가는 거 보면……. 그래서 너무 속상해서,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냈어요. 국가보안법으로 들어가 있는 장 마이클 누나다, 사면이 그동안 많이 있었는데, 국가보안법은 사면이 없었던 것 같다. 7년을 받았고, 올해가 지나면 6년이 돼 간다. 형량의 3분의 2가 지났는데, 사면해 주면 감사하겠다. 어머니도 연로하시고, 꼭 제 동생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으로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도 사면되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그랬는데, 편지가 오더라고요. 말하기를, ‘귀하가 보내신 편지는 저희가 잘 받았다’ 걔네들은 늘 같은 말이고, 그렇게 대처하는 매뉴얼이 있나 봐요. 이 민원에 관해서는 잘 해놨다가, 사면에 참작을 하겠다. 그런 식으로 답변 오고 끝이 더라고요.”


어머니 : “내가 공부를 해서 유식하면 소설을 썼으면 좋겠어. 어휴. 가슴에 한 맺힌 것을 어떻게 다 푼대.”


어머니는 장민호 씨가 미국에 있을 때 가족들 곁으로 오려고 미군에 입대해서 4년 동안 복무하며, 그 안에서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미군의 병영 문화를 바꿨다고 했다. 또, 한국(의정부)으로 파견돼, 일산 집도 오가면서 매달 생활비를 300달러 이상씩 부쳤던 아들을 떠올리며 눈가에 엷은 촉촉함을 내보였다.



Q 마지막으로 어머니께서는 아드님께, 누님 분께서는 동생에게, 혹은 양심수·구속노동자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요?


어머니 : “난 우리 아들이 살아 있는 것만 해도 하나님께 감사해요. 살아서 우리 아들 보는 것만 해도 너무너무 고맙고……. 제발 딴 생각하지 말고, 만날 때까지 그저 무사하길 바래요. 저희 어린 가족들 불쌍한 것들이 무슨 죄야. 그것들을 생각해서라도 지가 빨리 나와야 할 거 아니야. 그게 부탁이야. 제발. 그저 무사히 나와서 얼른 어린 것들 만나고, 제 누나도 만나야지. 벌써 몇 년 동안이야. 내가 몇 년 동안 입원하고 퇴원하고 입원하고 퇴원하고 검사비가 얼마야?

2008년에는 심장 수술까지 했잖아. (가슴을 치면서) 우리 아들은 그것도 몰라. 그것을 알면 가슴 아파할까 봐……그저 딴 생각하지 말고, (흐느끼면서) 무사히 저희 가족 만나고, 엄마 품으로 돌아오길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그렇게 전해 줘요.”


누나 : “민호 힘내고! 출소할 때까지 운동도 잘 해서 몸 건강히! 양심수나 구속노동자 분들도 건강하셔야 되는데…….

(아휴) 구속노동자후원회 다음 카페도 가 보니 여러 분들이계시더라고요. MB 정권에 맞서서, 부당함에 투쟁을 하고 계신 거잖아요. 정권이 바뀌어서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편안히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정리-김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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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10.26과 김재규의 10.26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9> 안중근의 10.26과 김재규의 10.26

강응천 문사철 주간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0-25 오전 8:20:02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1990년대부터 <한국생활사박물관>, <라이벌 세계사>, <지하철 史호선> 등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만 30세의 한국인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68세의 일본인 노정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와 약 5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사된 세 발의 총탄은 정확히 급소를 꿰뚫었다. 안중근은 이토의 수행원들을 향해 세 발을 더 발사한 뒤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라고 외친 뒤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토는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졌고 안중근은 일본 측에 넘겨져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은 메모지조차 들고 있지 않았지만 막힘없이 열다섯 가지 거사 동기를 열거했다. 명성황후 살해 지휘, 을사조약 체결, 군대 해산, 의병 탄압을 빙자한 양민 학살, 한국의 정치 기타 권리 박탈, 동양 평화 유린, 한국 보호를 위장한 불리한 정책 시행…….

"한국은 무사하다고 세계를 속였다"는 것을 이토의 열다섯 번째 죄목으로 제시한 안중근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바로 일본 천황에게 알려달라고, 그렇게 해서 동양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하얼빈은 러시아와 일본의 야욕이 만나는 제국주의의 교차로였다. 일본 역사학자 나카노 야스오[中野泰雄]에 따르면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고무라 지타로[小忖壽太郞] 외상과 가쓰라 타로[桂太郞] 수상이 입안한 '한일합병' 계획을 승인하고 그 정지 작업을 위해 그곳에 왔다. 그러나 하얼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만이 아니었다. 무명의 젊은 한국인도 환영 인파 속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세계를 속이고 동양 평화를 해치는 범죄를 저질러 왔음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침착하게 총을 빼들었다.

일본 응원에서 이토 사살로…동양 평화를 갈망한 안중근의 변모

당시는 러일전쟁이 끝난 지 4년째 되는 해였다. 러일전쟁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영국과 대립하던 러시아가 힘에 부쳐 동쪽으로 전력을 돌리자, '큰형님' 영국이 동방의 '중간 보스' 일본에게 그 처리를 맡겨 일어난 청부 전쟁이었다. 그러나 당시 적잖은 아시아인에게 이 전쟁은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서구 제국주의와 이에 맞서는 동양의 작은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대한의 개화파 청년 안중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개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쳐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기를 바랐다. 일본은 개전 직후 강제로 대한제국 정부와 맺은 한일의정서 제3조에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이라고 명시해 이러한 안중근의 기대를 부추겼다. 그를 가톨릭 신자로 받아들인 빌렘 신부는 "한국은 일본이 이기면 일본의 속국이 되고, 러시아가 이기면 러시아의 속국이 될 것"이라 경고했지만, 안중근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1905년 5월 대한해협 해전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일본군에게 무참히 패배하면서 전세는 일본의 승리로 기울었다. 아시아 각국의 지도자들은 환호했다.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영국 유학 중에 날아갈 듯한 기분을 느꼈고, 인도인의 정신적 지도자 간디는 "일본의 승리가 사방 곳곳에 뿌리를 내려서 이제 그 열매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 런던에서 이 소식을 접한 중국의 국부 쑨원도 뜨거운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배를 타고 귀국하다가 그를 일본인으로 오해한 아랍인 노동자에게서 축하를 받았다고도 한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의 총성은 이런 아시아인들에게 짧은 사자후를 던졌다. "당신들은 속았소!"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동양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던 일본은 사실 또 다른 제국주의였을 뿐이며, 침략과 강탈의 전선에 동과 서의 구분 따위는 없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침략자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 중심에는 을사조약 후 한국에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 수장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안중근은 배신감을 느끼고 항일 구국 투쟁의 길에 올랐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거점을 옮겨 대한의군이란 의병 부대를 창설하고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지만, 적은 수의 군대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안중근은 그를 처단하고 일본의 정체를 만천하에 알리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 안중근 의사. ⓒ독립기념관


그해 11월 4일 일본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지는 가운데, 안중근은 아직 이토가 절명한 것도 모르는 채 뤼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잇단 심문에서 그는 이토를 동양 평화의 적으로 규정하고 평화란 모든 나라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일갈했다. 이듬해 2월 7일부터 벌어진 공판은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진군할 때 염두에 둔 최후·최대의 전장(戰場)이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판을 지켜보고, 재판정에서 자신이 폭로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실상을 정확히 깨달아 참된 평화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안중근의 기대는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은 안중근의 고발이 한국과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인 재판관, 일본인 검사, 일본인 변호사로 진용을 꾸려 재판을 진행하고, 대외적으로는 철저하게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몰고 갔다. 일본 정부는 제2, 제3의 안중근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라고 뤼순의 사법 당국을 압박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자신의 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만이라도 다 쓰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당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사 5개월 만인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뤼순 감옥의 좁고 더러운 형장에서 31년의 거룩한 생애를 마쳤다.

안중근의 큰 뜻을 뤼순 감옥 뒤편 광야에 묻어 버린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의 유지를 받들어 그해 8월 29일 한국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안중근의 조국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비참한 운명을 안겨주었다. 큰아들 중생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고, 둘째 아들 준생과 딸 현생은 일제의 공작에 넘어가 지금의 서울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박문사(博文寺)를 참배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분키치에게 '부친의 죄'를 사과하는 치욕을 당했다. '박문사'는 이름 그대로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이었다. 동생 정근과 공근은 형의 뜻을 이어받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그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평화란 모든 나라의 자주 독립이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한 안중근의 사상은 이처럼 그와 그의 일가를 풍비박산케 했다. 그러나 그의 동양평화론은 3.1운동을 비롯한 식민지 피압박 민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장엄하게 부활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황해도 해주 지역의 소년 접주로 반동학군의 안중근과 적으로 맞섰던 김구는 그의 넋과 화해하고 그 희생정신을 기리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안중근의 조카 안미생은 김구의 며느리가 되어 시어머니가 돌아간 후에는 임시정부의 퍼스트레이디 노릇까지 하며 성심껏 시아버지를 도왔다.

두 번째 10.26…군부 독재 무너뜨린 건 '외로운 총'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안중근의 숭고한 희생과 그 뜻을 이은 민중의 역사적인 항일 투쟁 위에 세워진 나라이다. 그런 나라의 국민을 상대로 독재를 휘두르다 못해 영구 집권을 꾀한 이승만은 정말 무모한 사람이었다. 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해 외세와 싸운 국민이 어렵게 세운 나라 안에서 국민의 주권과 자유를 유린하는 독재자를 용납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을 심판하고 축출한 4.19혁명의 대의를 계승하겠다고 해 놓고 이승만과 똑같은 길을 걸어간 박정희는 더욱더 무모한 사람이었다. 그런 무모함이 1979년 또 한 번의 '10.26'을 낳았다.

그해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책임자였던 김재규는 서울 궁정동의 안가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 당시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위기를 맞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독재 시위로 막다른 길에 몰려 있었다. 김재규는 온건 대응을 주장했지만 박정희는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김재규는 임박한 유혈 참사를 막고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앞당기기 위해 거사를 도모했다고 진술했다.

같은 10월 26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김재규를 안중근과 비교할 수는 없다. 김재규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20년에서 25년을 앞당겨 놓았다는 자부심을 안고 세상을 하직한다"고 밝혔지만, 그는 이미 유신 정권의 앞잡이로 너무나 많은 때를 묻힌 인물이었다. 안중근의 10.26은 아시아인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불러일으키던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폭로했지만, 김재규의 10.26은 그의 말대로 자유민주주의를 앞당긴 것이 아니라 몇 년을 더 늦춰 놓았다. 그의 거사로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국민을 상대로 한 유혈 참극은 몇 개월 뒤 광주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김재규는 국민이 자기 손으로 해야 했고 또 할 수 있었던 일을 미리 막아 버린 꼴이 되었다.

박정희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군부 독재를 결국 역사의 유물로 만들어 버린 것은 국민의 힘이었다. 그 힘은 10.26과 같은 비극이 이제는 불필요하고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을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도처에서 두 차례 10.26의 교훈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 독재자를 찬양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언동들이 도를 넘은 것 같다. 김재규라면 몰라도 안중근이 살아 돌아온다면 이들을 보고 어떤 결심을 할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안중근이 부활한다면, 그 '안중근'은 권총 한 정에 모든 것을 의지하던 외로운 의사(義士)가 아니라 이미 승리를 경험하고 역사의 주인이 되어 있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일 것이다.

 
 
 

 

/강응천 문사철 주간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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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그런 기자 한명쯤은 있어야 된다

국민참여재판 당시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의 최후진술
 
페북뉴스 | 등록:2013-10-26 11:56:40 | 최종:2013-10-27 10:06:0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및 주진우 시사인 기자에 대한 국민참여재판 당시 김어준 총수의 최후진술의 요지가 언론을 통해 일부 알려진 바 있습니다만, 대하여 페이스북의 이상곤님이 당시 재판에 참여한 방청객들이 메모한 것을 취합하고, 방청객 가운데 지인분들에게까지 물어가며 정리한 전문입니다. 이상곤님의 열정과 수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편집자주>

 

 

지난 국민참여 재판 당시 김어준 총수 최후 진술입니다. 여러 사람이 받아 적은걸 모아 제일 비슷한걸 정리해서 올린다고 좀 늦었습니다. 이미 개략적인 내용을 보신 분들은 뒷북이 되겠지만 전 전문을 올리는게 가장 좋을듯해서 당시 방청한 지인들에게 묻고해서 정리해서 올립니다. <페이스북 이상곤님>

 

 

 

 

 

 

김어준 총수 최후 진술

네. 고민이 많았습니다.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지 이 재판이 우리에게 유리할까 검찰 측 주장에 허점을 반박해 볼까 혹은 공직선거법위반의 문제점을 이야기해 볼까 아니면 살인현장 자살현장의 의문점들을 나열해 볼까 그거 고민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살현장 또는 살인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내가 알고 있는가 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정말로 박용수가 박용철을 죽이고 자살했는지... 아님 제3자가 개입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저만 모르는 게 아니고 사실은 저희에게 계속해서 죄가 있다고 거짓말 한다고 주장하는 검찰 측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잘 모릅니다. 왜냐면 그날 우리 모두 거기 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는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저한텐 유리하게 할 게 아니라 제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자 언제 어디서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문제가 된 나꼼수 방송은 2007년 4월 방송을 처음 했습니다. 제가 그 방송을 한 이유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무도 그 이야기를 대신해 주지 않았기에 그랬습니다. 그래서 방송을 직접 만들자고 생각 했어요 처음에는 세 명이 했습니다. 낙선한 전직 국회의원, 라디오에서 시사평론을 하는 친구, 저 그렇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시간에 2만원을 주고 골방에서 첫 방송을 했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에 2만원을 주고 첫 방송을 하고 난 뒤 5천원짜리 백반을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기자가 필요하다, 팩트가 필요하다 그 생각을 하자 가장 먼저, 저 이 바닥에 꽤 오래 있었습니다. 한 10여년 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기자가 주진우 기자였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주진우 기자가 다뤘던 기사들, 예를 들어, 주진우 기자가 삼성 이건희 회장의 개인문제 기사를 쓰려고 하다가 쓰지도 못했어요. 발행 되지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회사 전체가 공중분해 되어버립니다. 기자들이 다 길바닥으로 쫓겨납니다. 그리고 그 기자들이 일 년 동안 길바닥에서 돈을 모아 만든 매체가 <시사IN>입니다.

그리고 주진우 기자는 세상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라고 알려진 여의도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의 개인 비리를 찾아내 기사를 씁니다. 그리고나서 만명 신도들의 항의 방문을 받습니다. 기사를 쓰고 누군가의 항의방문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5명,100명이 아니고 만명의 신도들이 찾아옵니다. 주진우 기자를 따라 다니며 사탄이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여러번 거론 되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한 노건평 기사를 특종보도합니다. 그때도 진보진영으로부터 진보적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한다고 진보진영으로부터도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니까 가장강한 경제권력, 가장강한 종교권력, 가장강한 정치권력 즉 가장 힘센 사람들과 싸워왔어요. <나는꼼수다>는 어떤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달랑 4명이 하는 방송이기 때문에 그정도 배포가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때까지만 해도 주진우 기자가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기자사회에서나 좀 알려졌는데, 그것도 뭐 독종 그런 정도 였어요, 그런데 저는 일반인들에게도 좀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주진우 기자보고 함께 하자고 제안했고 중간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보시다시피 제가 올해 47입니다. 한국나이로 그런데 저도 세상에 태어나 이때까지 살면서 누구한테 기죽지 않았고, 또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행색을 보면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진우 기자를 만나고 나서 물론 그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방송을 본격적으로 하며 주진우 기자한테 물어봤습니다. 나도 내 맘대로 살았는데,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살았는데, 그 정도 힘센 사람들 불편하게 하는 기사를 쓰면 그 보복이 두렵지 않냐고 말입니다.

주진우 기자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무섭다. 특히 혼자 집에 돌아갈 때 밤에 으슥한 곳에서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장면을 항상 생각한다. 근데 즉사하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내가 빗맞아서 살아서 식물인간이 되어 남은 가족들에게 평생 짐이 될까봐 그게 걱정이다."

그게 가장 두렵다고 합디다. 그 이야기 있고나서 한참 있다가, 그런데 왜 월급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기사 썼다고 갑자기 부자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 짓을 계속 하느냐" 그랬더니 한참동안 이야기 하지 않다가.. 그런 질문 처음 받아 본거죠. 자기도 그런 생각 안해본거죠. "뭐, 기자 잖아요" 주진우 기자가 한 말은 그게 다였어요. 맞죠. 그러라고 기자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기자 잘 없어요 잘 생각해 보시면 그런 기자 잘 없습니다.

배심원들에게 요청합니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 하더라도 의심이 가면 끝까지 취재해서 기사를 쓰는 기자로, 주진우 기자로 남게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앞으로 제2, 제3의 주진우 기자 나올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그런 기자 한명쯤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기자가 대한민국에 한명쯤은 필요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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