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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사과'도 '쿼터제'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심층 취재-한국 해외입양 65년] 2. 입양의 정치경제학 ④
2017.10.06 00:24:47
 

 

 

 

※이 기사는 이경은 국제인권법 전문가,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나는 한국의 고아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은 가난하다며 돈을 받고 나를 스웨덴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경제사정이 좋아진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을 해외에 팔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로서 이런 해외입양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1989년 야당 총재로 스웨덴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계 입양인 레나 김 씨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었다. 이 질문에 김 전 대통령은 "죄송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이날 간담회 자리는 울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정치인 김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첫해인 1998년 10월 23일 청와대로 8개국에서 온 29명의 해외입양인들을 특별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우리가 정말 잘못을 저질렀다. 과거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기도 했고 한국의 불행한 관습 때문이기도 했다"고 입양인들에게 사과했다.

 

 

▲ 김대중 정부 시절 해외입양인 초청행사에 참석한 영부인 이희호 ⓒ국가기록원

 

▲ 김대중 정부 시절 한국을 방문한 미국 입양부모회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영부인 이희호 ⓒ국가기록관


김대중 정부는 1999년 친가족을 찾기 위해 모국을 방문하는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시작했고, 준정부적 성격의 글로벌 입양 정보 사후서비스 센터를 설립했다. 그 후 입양정보센터, 중앙입양정보원(2009년 7월)을 거쳐, 현재 보건복지부 산하의 중앙입양원(2012년 8월)으로 자리 잡았다. 김대중 정부는 또 1999년 입양인들에게 해외동포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그 결과 이들은 2년까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가 허용되고, 취업, 투자, 부동산 취득, 의료보험 취득, 연금 취득이 가능하게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009년 8월 서거했을 때 입양인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도사(바로 보기)를 따로 내기도 했다.

이처럼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계 해외입양인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국가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사과했던 김대중 정부도 입양정책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1997년 IMF 경제위기로 해외입양에 대한 규제를 풀어 해외입양 아동 숫자는 오히려 증가했다. 또 김대중 정부는 매년 국가예산을 들여 입양인 초청행사를 가졌는데, 애초 의도와 달리 '성공한 입양인'의 존재만 부각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한국의 허술한 입양 관련 법과 제도 때문에 양부모의 나라로 보내져서 입양이 되지 못해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거나, 학대, 방임, 극단적인 경우 살해까지 당하는 어려움에 처한 입양인들의 문제는 오히려 정책 시야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2기 민주정부인 노무현 정부에서도 입양정책에 큰 변화가 없었다. 노무현 정부 들어 2004년 국내입양 가정에 양육수당(당시 월 10만 원, 현재 월 15만 원)을 보조하는 정책이 도입됐다. 또 2005년 '입양의 날(5월 11일)'이 제정되고, 국내입양 가정에 입양수수료(당시 200만 원, 현재 270만 원)를 보조해주는 정책도 도입됐다. 김근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4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인입양인대회'에 참석해 "여러분을 사랑한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겪어야만했을 아픔과 고통, 상처를 알고 있기에 그냥 사랑한다고 말 못하지만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해야만 하겠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정부 차원에서 입양인들에게 사과했다. 김근태 장관은 이어 2005년 국정감사에서 "향후 4-5년 내에 해외입양이 완전히 중단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앞서 박정희 정권, 노태우 정권에서 '해외입양 중단 계획'을 밝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언'에 그치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가 다시 끄집어낸 '쿼터제' 

1990년부터 노무현 정부 중반기인 2005년까지 16년간 해외입양 아동 숫자는 2000명 선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노무현 정부에서는 해외입양을 줄인다며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 시행한 정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인 2007년 국내입양 우선제(5개월 동안 국내입양을 우선적으로 추진한 뒤 이에 실패할 경우 해외입양을 추진하도록 함)와 쿼터제(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줄이기 위해 입양기관들에 국내입양 추진 실적에 따라 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배분함)를 도입했다.  

'쿼터제'는 박정희 정권 이후 정부가 해외입양을 근절하겠다고 발표할 때마다 등장하는 정책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6년 북한이 '남한은 고아를 수출한다'는 비난하자 '요보호 아동에 대한 입양 및 가정위탁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쿼터제'를 도입했다. 1975년 당시 5000여 명이던 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국내입양 500명, 가정위탁 500명씩 증가시켜, 매년 1000명씩 줄이겠다는 '단순무식'한 계획이었다.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쿼터제는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때도 반복된 정책이다. 입양은 아동이 출생 가정에서 분리돼 다른 가정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마치 상품이 왔다 갔다 하는 일처럼 '숫자'로만 접근하는 정책은 그 자체로 반인권적인 발상이며, 성공하기도 어렵다. 안타깝게 노무현 정부도 입양이 발생하는 사회적 조건이나 배경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국내입양을 늘려 국제입양을 줄이겠다는 안이한 접근을 했던 셈이다.  

이경은 박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입양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지난 세월 정부가 사적인 입양기관에 취약한 미혼모들과 그 자녀들을 내맡겨온 정책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선한 의도와 달리 한국 해외입양 정책은 오히려 더 왜곡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이 박사는 "쿼터제는 보건복지부의 국외입양 아동 수 규제 정책의 골간을 이루는 정책 수단이었다"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쿼터제는 관료집단에 의해 정권의 의지로 받아들여졌고 더 굳건해졌다"고 비판했다.  

이 박사는 "국외입양 문제는 보건복지부라는 한 부처를 넘어 민법과 아동보호체계 전반을 변혁해야 하는 과제"라며 "가정과 국가의 양육 지원, 부적절한 친권에 대한 국가의 개입, 아동보호체계의 정비와 같이 오랫동안 미뤄왔던 법제 정비를 해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1993년-2007년까지 연도별 해외입양 아동수 (출처 : 보건복지부) ⓒ프레시안

 

 

'냉온탕' 오간 국내입양 촉진 정책...아동 노동 착취 부작용도

박정희 정부 이후 해외입양 정책은 '냉온탕'을 왔다갔다 했다. 아동보호 비용을 아끼기 위해 해외입양을 보내는 것이 기본 정책 방향이었다가, 북한이나 서구에서 '고아 수출'이란 정치적 비난이 쏟아지면 쿼터제 등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입양 아동 숫자를 줄이는 방식이 되풀이 됐다. 어느 정부도 입양이 왜 일어나는지, 입양이 친생부모와 그 아동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일인지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국내입양을 늘리겠다며 도입한 정책에서 아동 인권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박정희 정부 때 1962년 국내입양을 늘리겠다며 '고아 한 사람씩 맡아 기르기 운동'을 벌였던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 입양이나 위탁을 보냈는데, 이런 '강제 결연'은 입양된 어린이의 일부가 다시 시설에 수용되거나 버려져서 부랑아가 되는 일로 귀결됐다. 또 맡겨진 아동이 가사노동자나 단순 노동자로 노동착취를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우리나라 입양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9 참고)

또 쿼터제나 직접적인 양육비 지원 이외의 국내입양 활성화 정책은 입양기관들이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정부가 입양아동의 '이주허가서'를 발급하는 것 이외 모든 입양과정을 입양기관들에게 맡겨놓은 상태에서 관련 정책을 강제할 행정적 수단이 없었고, 무엇보다 의지도 없었다. 2008년 복지부의 입양기관들에 대한 감사 결과를 보면, "홀트아동복지회는 입양대상 아동에 대해 국내입양 우선추진 기간 중 국내입양은 시도하지도 않고 국외입양을 추진하고, 국외에 입양된 아동의 국내입양 추진 기록을 유지 하지 않고 있다"며 "홀트아동복지회의 경우, 2007년 12월 및 2008년 4월부터 6월까지의 기간 중에 국외에 입양된 153명 중 139명(90.8%)은 국내입양 우선추진기간 중에 국내입양 추진기록도 유지하지 아니하고 국외입양을 위한 성.본 창설을 신청했다"고 위반 사실을 지적했다. 

이같은 행태는 2013년 있었던 홀트아동복지회에 대한 특별감사에서도 지적됐다. 홀트는 당시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실시된 2012년 8월 5일 이후 출생한 아동 115명 가운데 17명(14.8%)에 대해 국내 양부모를 찾아보지도 않고 해외입양을 추진한 것이 감사 결과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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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직통전화, 80년대 이후 최장기 중단

개성공단 중단 이후 22개월 째 연락채널 폐쇄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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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05  1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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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2월 개성공단 전면중단 이후 남북간 연락채널이 20개월 간 끊긴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사진은 개성공단이 운영되던 시기의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남북간 연락채널이 22개월째 중단된 상태이다. 1980년이후 가장 오래된 중단 상태로 정부는 북한에 육성으로 통보할 뿐이다.

박주선 국민의당 국회의원은 5일 "작년 2월 개성공단 전면중단 이후 남북간 핫라인이 끊어진 지 20개월이 지났으며, 이 기록은 1980년 2차 단절사태 이후 최장기간"이라고 밝혔다.

박주선 의원이 통일부로부터 제출받은 '남북 핫라인 구축현황' 자료에 따르면, 1971년 9월 22일 남북 직통전화(핫라인) 설치 이후 단절된 사례는 지금까지 모두 6차례이다.

남북 간 핫라인이 처음 단절된 때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로, 북한이 핫라인은 단절해 약 3년 5개월간 지속됐다. 이후 1980년 2월 6일 남북총리회담 개최를 위한 제1차 실무대표 접촉을 계기로 재개통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25일 북한이 남북총리회담 실무접촉 중단을 발표하면서 약 4년간 남북 간 연락채널은 막혔다.

이후 남북 간 핫라인 중단은 모두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발생했다. 2008년 유엔총회 북한 인권결의안에 남한이 공동제안자로 나서자 북한은 약 9개월 동안 연락채널을 중단했다. 김대중 대통령 북측 조문단 파견으로 재개된 핫라인은 2010년 '5.24조치' 발표에 반발해 북한이 7개월 동안 중단했다.

2013년 3월 유엔 안보리 제제결의 및 한미합동군사훈련으로, 북한은 약 3개월 동안 직통전화 단절을 발표했으며, 3개월 뒤 북한이 남북당국실무접촉을 제의하면서 다시 재개됐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2016년 2월 개성공단 전면중단 조치를 내리자, 이에 북한은 군 통신선 및 판문점 연락통로를 폐쇄한다고 발표했으며, 1년 10개월 째 남북 간 연락채널은 막힌 상황이다.

남북 간 연락채널 중단이 장기화되면서, 정부는 북측 주민 송환 등을 통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엔사 정전위원회의 협조로 판문점에서 확성기를 이용한 육성을 활용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7월 17일 문재인 정부가 처음으로 군사분계선 상 적대행위 중단을 위한 남북군사당국간회담,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등을 제안할 때는, 언론성명 식으로 발표하는 등 남북 간 직접 통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통일부는 매일 두 차례씩 판문점 연락채널로 북측과 연락을 시도하고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묵묵부답인 상황이다. 북한이 연락채널을 열지 않는 한, 남북 간 핫라인 단절 상황은 지속될 전망이다.

박 의원은 "핫라인 재개는 대화의 시작점이며, 대통령 취임 후 5개월이 지나도록 핫라인조차 재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첫발도 떼지 못했다는 방증"이라며 "군사적 긴장 고조로 우발적으로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까지 나오고 있는 만큼, 정부는 조속히 남북 핫라인이 가동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판문점을 경유하는 남북 직통전화는 총 33회선으로,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 5회선, 서울-평양 21회선, 항공관제용 2회선, 해사당국 2회선, 경협사무소용 3회선 등이 있다. 그리고 판문점을 경유하지 않는 군 통신선 9회선, 남북열차운행을 위한 직통전화 6회선 등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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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개정협상 착수 사실상 합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10/05 12:32
  • 수정일
    2017/10/05 12:3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한-미, FTA 개정협상 착수 사실상 합의

등록 :2017-10-05 09:05수정 :2017-10-05 11:3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 둘째)이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무역대표부에서 ‘제2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에 참석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왼쪽 둘째) 등과 양국 FTA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 둘째)이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무역대표부에서 ‘제2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에 참석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왼쪽 둘째) 등과 양국 FTA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한국, ‘협상 전 효과분석 먼저’ 기존 주장 철회
산업부 “호혜성 강화 위해 개정 필요성 공감
개정협상 개시 필요한 제반 절차 진행 예정”
한국과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에 착수하기로 사실상 합의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4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에서 제2차 한-미 자유무역협정 공동위원회 특별회기를 열어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고 산업통상자원부가 전했다. 이날 협상은 지난 8월 22일 서울에서 열린 1차 공동위 이후 한달 반 만에 이뤄진 것이다.

 

 산업부는 이날 협상이 끝난 뒤 보도자료를 내어 “양쪽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상호호혜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개정 필요성에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미국 쪽은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한 각종 이행 쟁점들과 일부 협정문 개정 사항들을 제기했으며, 우리 쪽도 이에 상응하는 관심 쟁점들을 함께 제기하면서 향후 자유무역협정 진전방안을 논의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산업부는 “이에 따라 우리 쪽은 ‘통상조약의 체결절차 및 이행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경제적 타당성 평가·공청회·국회보고 등 한-미 자유무역협정 개정협상 개시에 필요한 제반 절차를 착실히 진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공식적으로 개정에 합의했다는 언급은 없었지만, 개정을 염두에 두고 관련 절차를 밟아 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미 무역촉진권한법(TPA)에 따라, 미국 행정부는 개정협상 개시 90일 전에 의회에 협상 개시 의향을 통보해야 한다. 연방관보 공지, 공청회 등 절차를 거쳐야 하고 협상 개시 30일 전에는 협상 목표도 공개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양쪽은 개정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한다.

 

 우리 쪽이 개정 협상에서 앞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효과부터 먼저 분석하자는 기존 입장에서 물러선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폐기’까지 거론하며 강하게 협상을 압박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 쪽은 지난 8월22일 서울에서 열린 1차 공동위 뒤 한국의 ‘지연 전략’에 상당한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1차 공동위 종료 열흘 뒤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폐기를 준비하도록 참모들에게 지시했다는 미국 언론 보도가 나왔다. 김현종 본부장도 지닌달 27일 워싱턴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미국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위협이 실제적이고 임박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우리 쪽은 이날 2차 특별회기에서 “한 미 자유무역협정의 상호호혜성,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미국 무역적자와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하는 효과분석 내용을 미국과 공유했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효과분석 결과, “한국의 대미 수출보다 한국의 대미 수입과 관세철폐 효과 간 상관관계가 더 크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특히 “대미 수입 규모가 대폭 증가한 자동차·정밀화학·일반기계·농축산물 등의 품목에서 관세철폐와 수입증가 간 연관성이 뚜렷했다”고 밝혔다. 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무역적자 폭이 커졌다는 미국 쪽 주장을 반박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라이트하이저 대표는 이날 회의 종료 뒤 성명을 통해 “중요한 이행 쟁점들을 해결하는 한편, 상호 공평한 무역으로 가는 개정 협상을 위해 신속한 방식으로 한국과 강도높은 협상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김미나 기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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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민소환법 발의한 박주민 “‘국민 위해 정치한다’는 국회의원들, 국민 눈치 보나요?”

 

다음 총선까지 3년, 그 전에 불량 국회의원 해임할 수 없을까?

남소연 기자 nsy@vop.co.kr
발행 2017-10-05 09:09:54
수정 2017-10-05 09: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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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정치권의 '막말' 경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적절한 막말 사례를 찾기 위해 포털사이트에 한 국회의원의 이름과 '막말'을 함께 검색해봤더니 그 역사도 유구하다. 처음에는 '막말' 뿐인 기사 제목이 '또 막말', '연이은 막말', '계속되는 막말' 등 수식어도 제법 화려해졌다. 막말 분야도 다양하다. 철 지난 색깔론 공세가 더 이상 먹히지를 않는지 이제는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아무리 '말로 먹고사는 국회의원'이라지만 이 정도면 도가 많이 지나쳤다.

비단 거친 말뿐만이 아니다. 사사건건 발목 잡고 몽니를 부리는 탓에 빈손 국회를 만들기 일쑤고, 다수 국민의 뜻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통해 일부로 국정에 차질을 빚게 한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바로 그 국회의원, 그 의원의 왼쪽 가슴에 달고 있는 금배지를 당장이라도 떼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현재로서는 그 국회의원이 자진사퇴하지 않는 이상 다음 총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참고로, 21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은 2020년에 실시된다. 앞으로 3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방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심지어 대통령도 국민들이 소환하고 탄핵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국회의원만은 내 손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아무리 자질이 없는 국회의원이더라도, 내 속을 후벼 파는 국회의원이더라도 이들을 파면시킬 '법'이 없다. 이 때문에 '국회의원 국민소환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요구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그러자 정치권에서도 국민소환제를 입법화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논의로 온 국민의 시선이 국회로 쏠렸던 2월,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민의 뜻을 외면하거나 무능하고 부패한 국회의원에게 국민들이 직접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유권자에 의한 직접적인 통제가 가능토록 하자는 게 법안의 취지다. 그러나 법안을 발의한 후 반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국민소환법은 소관 상임위원회 논의 테이블에도 한 번 올라가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말은 국민 위해 정치한다면서…"
쟁점 법안 하나 통과 시키기 어려운 국회 현실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제정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한 어린이와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있다.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제정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한 어린이와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있다.ⓒ뉴시스

박주민 의원은 지난 26일 국회에서 가진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정치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다. 국회의원 당선 후 수많은 법을 발의해 '박주발의'라는 별명도 얻은 박 의원이었지만, 그가 발의한 개혁 법안들은 번번이 특정 정당의 당리당략에 의해 발목 잡히기 일쑤였다. 평소와 달리 박 의원의 목소리에도 짙은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박 의원은 "국민을 위하는 일이라면 정당이 다르거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해나가야 한다"며 "그런데 실질적으로 보면 정치적인 이해타산만 따지면서 개혁과제나 국민들이 원하는 일을 안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국민들이 실망한다. 그런데 또 말은 '국민을 위해서 정치한다'고 하니, 정치인들에 대한 괴리감이 더 커 보이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박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몸소 느꼈던 아쉬움은 국민소환법 발의로 이어졌다. 박 의원은 "국회라는 곳이 정치 불신의 핵심 대상이 되고 있다"며 "그런데 국회가 제대로 일을 하고, 국회의원들이 말하는 것처럼 국민을 진짜 위한다면 처리해야 하는 법들이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다 보니까 저 자신도 무력감을 많이 느끼는 상황이었다"며 "국민소환제가 도입되면 조금 더 국회가 생산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발의 배경에 대해 밝혔다.

박 의원이 발의한 국민소환법의 주 내용은 임기 중인 국회의원이 위헌적이거나 위법한 행동, 부당한 행동을 하면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서 해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현재 20대 국회에는 국민소환과 관련된 법안은 3건이 발의된 상태다. 박 의원뿐만 아니라 민주당 김병욱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회의원의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 바른정당 황영철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회의원의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도 모두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국회의원을 소환할 때 필요한 요건이 조금씩 다른 정도다.

다만 박 의원의 제정안은 지역구 국회의원을 소환할 경우 해당 지역의 유권자뿐만 아니라 타 지역의 유권자도 소환 청구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박 의원은 자신의 팟캐스트를 통해 국민소환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예시를 들었다.

"예를 들어, '춘천' 지역의 의원을 소환할 때 기존에 발의된 법안은 '춘천'에 사는 분들만 소환이 가능할 수 있는데요. 제가 발의한 법안은 '춘천'에 거주하지 않은 유권자라도 소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박 의원이 발의한 국민소환법은 ▲지역구 의원을 소환하는 경우(①지역구 주민이 소환하는 경우 ②타 지역구 주민이 소환하는 경우)와 ▲비례대표 의원을 소환하는 경우로 나눠진다.

이중 해당 지역구 주민이 국회의원 소환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해당지역 투표권자 수×직전 총선 투표율×15/100 명 이상의 서명이 필요하다.

타지역구 주민이 소환하는 경우와 비례대표 의원을 소환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전국투표권자÷지역구 수)×(투표율×15/100) 명 이상의 서명이 필요하도록 규정했다.

이 같은 요건이 충족되면 국민소환투표를 실시하게 되고, 그 투표 결과에 따라 국회의원의 소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박 의원은 기존의 법안과 달리 타 지역구 주민도 지역구 국회의원을 소환하도록 한 이유에 대해서 "국회의원은 해당 지역구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지위가 헌법 기관이고, 전체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특정 지역 정치인을 지역감정에 기반한 정치적 목적으로 소환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한 지역에서 소환 투표를 요구하는 사람이 전체의 1/3을 넘으면 안 된다는 규정을 안전 장치로 마련하기도 했다.

17대 국회부터 잇달아 발의된 국민소환법
번번이 통과는 무산, 대체 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과 은평구 지역 협의회장들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민원지원센터에서 관계자에게 국민소환제 제정 청원서 제출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주민 의원, 오덕수 역촌동 협의회장, 김현수 녹번동 협의회장, 정남형 응암1동 협의회장.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과 은평구 지역 협의회장들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민원지원센터에서 관계자에게 국민소환제 제정 청원서 제출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주민 의원, 오덕수 역촌동 협의회장, 김현수 녹번동 협의회장, 정남형 응암1동 협의회장.ⓒ뉴시스

과거에도 국회의원에 대한 자질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국민소환제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나왔다.

특히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 이후인 17·18·19대 국회에서는 잇따라 국민소환제 법안이 발의됐다. 그러나 결국에는 흐지부지되면서 무산됐다. 당시에도 국회는 민심과는 동떨어진 선택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박 의원은 "국회의원 스스로 자기 목에 방울을 다는 법이다 보니까 (국민소환법을) 통과 시키는 것에 대해 썩 내켜 하지는 않았다"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국민소환제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굉장히 세기 때문이다. 상황은 달라졌다고 본다"고 내다봤다.

박 의원의 설명처럼 국민소환제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앞서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들은 국민소환제 도입을 공약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당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였던 홍준표 대표도 포함됐다.

그러나 국회 통과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현재 국민소환제 도입을 위한 3건의 법안은 모두 상임위에서 계류 중이다. 전체회의에서 올라오지도 못한 채 법안을 심사하는 소위원회에서 가로막히는 상황이다.

박 의원은 "지금 현재 국회 전체적인 상황이 무쟁점 법안 중심으로 통과되는 상황"이라며 "만장일치제인 법안심사 소위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검토해보자'라고 한다면 전체회의에도 못 올라온다. 논의조차 안 하는 상황"이라고 답답해했다.

박 의원은 "5개 정당(민주당·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정의당)의 후보들이 대선 때 국민소환제를 도입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만장일치 아닌가"라며 "그런데 대선이 끝났다고 국민소환제가 또 논의가 안 된다? 그러면 국민 입장에서는 '우리들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정치인들이 또 거짓말했네'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이 이렇게 원하고, 또 실제로 대선 때도 국민소환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통과시키기 위한 노력을 안 하지 않느냐"라며 "그런데 이런 국회의원들을 통제할 장치가 없다. 지금 국회의원들이 국민들 눈치를 크게 보나? 국민소환제가 도입되면 국회의원들이 적어도 국민들 눈치는 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의원은 국민소환법을 둘러싸고 오남용의 우려나 위헌 논란이 제기되는 데 대해서도 단호히 일축했다.

박 의원은 우선 오남용의 우려에 대해선 "오남용이 되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하면 되는 것"이라며 "그리고 나머지는 이제 국회의원을 소환할 수 있는 국민들이 현명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을 기대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제 우리 국민들은 단순한 선동과 선전에 현혹돼 일 잘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을 날려 버리진 않을 것 같다"고 강한 믿음을 드러냈다.

국민소환법이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는 국회의원 임기를 4년으로 규정한 헌법이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이 조항을 두고 국회의원의 임기 4년은 무조건 보장받아야 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에는 허점이 존재한다. 국회가 자율적으로 국회의원을 제명하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박 의원은 "4년이라는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조항은 국회의원의 임기를 '최대' 4년으로 보장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며 "국회 윤리위원회에서 결의하면 국회의원을 제명할 수 있다. 그러면 이것도 위헌이라고 할 것인가"라고 맞받아쳤다.

20대 국회에서 국민소환법의 운명은?
"이번에 통과 안 되면 사실상 어려워"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국민소환법 통과를 위해 자발적으로 서명 운동에 나선 시민들도 생겨났다. 벌써 13만여 명의 목소리가 모아졌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국민소환제의 조속한 제정을 위한 청원서가 국회에 접수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소환법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박 의원은 지금과 같은 높은 열망을 다시 모으기 어렵기 때문에 20대 국회가 국민소환법을 도입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고 내다봤다.

박 의원은 "국민들은 국민소환제 도입을 굉장히 원하고,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 찬성한다고 말은 한다"면서도 "그러나 실제로는 얼마나 심도 있게 논의될지 자신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는 "국민들이 지금 같은 관심을 계속 표명해준다면, 국민소환법이 통과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며 "이번에 통과가 안 된다면 사실상 (다시금 국민소환제 도입을 위한 열망을 모아내기가) 어렵다. 다음 대선 때 또 대통령 후보들이 국민소환제를 도입한다고 약속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약속을 어겼는데 별탈이 없었으니, 다시는 안 할 것"라고 단호히 말했다.

'너무 험난한 것 같다'는 혼잣말에 박 의원은 쓴웃음으로 답했다.

 

 

 

"험난하다고 느껴지면서 특정 정당이 머릿속에 떠오르죠. 그분들을 소환하고 싶죠. 그러면 국민소환법을 위해 조금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요. 트위터든, 페이스북이든, 기사 댓글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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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든 모바일이든 ‘진보’ 이름값 하는 좋은 콘텐츠가 답이다”

[창간 기획-신문의 미래]“종이든 모바일이든 ‘진보’ 이름값 하는 좋은 콘텐츠가 답이다”

노도현·허남설·권도현·김지혜·심윤지 기자 hyunee@kyunghyang.com

입력 : 2017.10.05 10:00:00 수정 : 2017.10.05 10:00:09

 

 

ㆍ‘경향신문의 길’ 시민에게 묻다

종이신문만으로 뉴스를 보는 이용자는 1%다.<br />가판대에서 신문을 찾는 이들을 찾기 힘들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전통의 신문사들은 생존이 화두가 됐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종이신문만으로 뉴스를 보는 이용자는 1%다. 가판대에서 신문을 찾는 이들을 찾기 힘들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전통의 신문사들은 생존이 화두가 됐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경향신문은 팔리지 않았다. 지난달 20일 오후 5시부터 한 시간 동안 종로1가 가판대를 맴돌았다. 중년 남성과 노인이 신문을 1부씩 사갔다. 하루 3부 갖다놓는 경향신문은 그대로 남았다. 가판대 앞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여기 신문이 22종이나 있다는 걸 모르겠지. 사람들 눈은 스마트폰을 향한다. 

“경향신문 망할 것 같지 않아요?” 신문을 팔아서는 가판대 깔고 접는 수고비도 안 나온다는 주인 아저씨에게 자조 섞인 말투로 물었다. “에이, 망하지는 않지!” 3개월차 수습기자인 나를 위로한다. “인터넷으로, 휴대폰으로 읽잖아. 종이는 10년이면 거의 없어질 거야.” 주변 가판대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마찬가지. 1시간 동안 7명이 음료를, 2명이 각각 초콜릿과 껌을 사갔다. 주인 할머니는 냉장고 빈자리에 음료를 채워넣었다. 신문은 팔리지 않아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신문 1부 가격은 800원. 주인 할머니는 600원이 신문을 가져다주는 ‘박 서방’ 몫이라고 한다. 1부 팔면 200원이 남는다. 이날은 400원을 벌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쏴야 5부 팔린단다. 한때는 하루에 100부를 팔았다고 한다. 20년 전 이야기다. “신문 팔아봐야 종이값도 안 나오지 않아?” 할머니가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40대 회사원은 퇴근길 아이와 함께 볼 영자신문을 샀다. “온라인에는 얕은 정보밖에 없잖아요. 속보 말고 심층기사를 다룰 언론은 필요하죠.” 작은 희망을 주고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가판대를 유심히 쳐다보다 신문을 사진 않은 50대 김모씨는 말한다. “전자책 나왔을 때 일반 책이 금방 사라질 것 같았죠. 실제로 물성을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죠. 종이신문도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더 반가운 손님을 만난 건 광화문의 한 가판대에서다. 

40대 직장인 ㄱ씨는 경향신문 1부를 사서 청록색 크로스백 안에 넣었다. 2년 전 스마트폰을 없앤 이후 매일 신문을 사서 읽는다고 한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오피니언면을 열심히 읽는단다.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아쉽게도 다시 목이 말라왔다. 

거리에 나가지 않아도 종이신문을 읽는 사람이 확 준 건 안다. ‘1%.’ 닐슨코리아 ‘2017 뉴스미디어 리포트’ 조사에 ‘한 달간 뉴스를 볼 때 이용한 매체’를 묻는 질문에 종이신문만 읽는다고 답한 비율이다. 나부터 기자 지망생 시절부터 신문 읽는 것을 썩 즐기지 않았으니…. 큰 흐름을 파악하고 싶다면 스마트폰으로 포털 뉴스 제목을 훑어도 충분하다. 읽을 만한 기사? SNS에 알아서 퍼진다. 힘들게 입사한 경향신문과 수습기자인 나의 존재 이유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사람들을 붙들고 ‘신문의 미래’라는 식상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창간 기획-신문의 미래]“종이든 모바일이든 ‘진보’ 이름값 하는 좋은 콘텐츠가 답이다”
웹을 보는 이들은 줄어간다. 모바일 독자가 확 늘진 않았다. ‘경향 뉴스’나 ‘뉴스 자체’를 외면하는 건 아니다. 기사의 플랫폼 유통도 언론사의 고민거리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웹을 보는 이들은 줄어간다. 모바일 독자가 확 늘진 않았다. ‘경향 뉴스’나 ‘뉴스 자체’를 외면하는 건 아니다. 기사의 플랫폼 유통도 언론사의 고민거리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그들이 뉴스를 보는 법 

종이신문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김모씨(32)가 일하는 공공기관에는 매일 여러 조간신문이 배달된다. 김씨는 신문 1면을 쭉 보면서 북핵 ICBM 관련 기사 제목을 어떻게 뽑는지, 어떤 이슈를 비중 있게 다루는지 관찰한다. “전통신문의 장점은 ‘1면에 어떤 걸 보여주겠다’같이 지향점을 확실히 드러내는 거죠. 경향은 청년·민주주의 등 기획이 괜찮아요. 기획은 지면으로 보면 느낌이 확 달라요.” 기자 지망생 송모씨(24)도 매일 신문을 읽는다. 같은 사안이라도 신문마다 제목과 맥락이 달라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금준경씨(28)는 종이 맛을 아는 기자다. ‘미디어오늘’에서 미디어산업정책 분야를 담당한다. 팔을 뻗어 자신이 만든 종이신문을 펼칠 때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여기까지다. 

금씨가 주요 일간지를 모니터링하는 방식은 정반대다. “지면 스크랩 프로그램으로 봐요. 검색도 되고 편하거든요. 저도 기자지만 종이신문을 보는 데는 익숙하지 않아요. 온라인 뉴스는 담당 분야 지인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것을 참고해요.” 송씨에겐 신문사 지망생 외에 신문 읽는 지인이 있냐고 물었다. “한 명도 없어요.” 취업준비생 장모씨(27) 집은 10년째 일간지를 구독한다. 장씨가 보는 일은 거의 없다. “흥미가 없어요.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신문 읽으려고 시간을 투자하고 싶진 않아요.” 직장인 박성연씨(25)는 입사 전 취업을 위해 신문을 구독했다. ‘기득권’의 사고방식을 익히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면접 답안을 짜기 위해 일부러 보수성향 일간지를 골랐다. 취업과 동시에 구독을 끊었다. 예상한 답이지만 듣고 나니 울적하다. 

‘경향뉴스’나 ‘뉴스 자체’를 외면하는 건 아니다. 유모씨(28)는 3년째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하고 있다. 유씨는 주요 언론사 홈페이지와 포털에서 뉴스를 본다. 종이신문을 보는 건 1주일에 한두 번. 대학 언론고시반에서 보거나 가판대에서 사본다. “정기구독을 할까 했는데 자취생이라 돈도 없고 신문 보고 나면 쓰레기가 나와서 안 했어요. 스크랩도 인터넷이 더 편해요.” 건설업계에서 일하는 임세현씨(32)는 틈날 때마다 경향신문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주로 정치 기사와 사설, 만평 ‘장도리’를 본다. “홈페이지가 많이 촌스럽긴 해요. 앱은 콘텐츠가 없어서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형식이 올드한 게 아쉽죠.” 또 다른 과제, 걱정거리가 생긴다. 

신문사의 경쟁 상대는 ‘신문사’가 아니다. 박성연씨는 출근 전 화장을 하면서 팟캐스트 뉴스 프로그램을 듣는다. “업무 기사만 보면 현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잖아요. 현실 감각이 떨어질 것 같아 팟캐스트를 틀어놔요.” 언론사 홈페이지, 포털, 팟캐스트, 페이스북 같은 갖은 플랫폼이 스마트폰 모니터를 놓고 경쟁하는 꼴이다. 

인테리어 기업 인사팀에서 일하는 김대원씨(30)가 말했다. “‘내일 전쟁 날 것 같다’ 이런 속보는 네이버를 통해서 보고요. 출근할 때 좋은 기사를 소개해놓은 경제·정치학 전문가들 페이스북을 봐요. 전문가들이 ‘이 기사 한번 읽어보시라’ 평가해주니 믿을 만하죠.” 김씨는 언론 전문성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 경향은 들어라 

경향신문도 신뢰 위기를 겪었다. 지난 5월 대선 전후 진보 성향 언론인 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를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한경오’라는 말이 번졌다. 입사 전 그 말을 들으면 그러려니 했다. 6월 입사 후 ‘한경오’는 달리 다가온다. 그저 넘길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임세현씨는 열렬한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다. ‘한경오’에 할 말이 많다. “요새 온라인 커뮤니티에 정치 기사나 기자 발언을 재생산한 글이 많이 올라와요. 그걸 보면 ‘한경오’가 쓰레기구나 싶죠. 사안을 왜곡하는 건 ‘한경오’나 다른 언론사나 다를 바 없잖아요. 경향은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편을 든 것 같아요. 홍준표, 안철수는 까지 않고 문재인은 작은 티끌 가지고도 뭐라 하는 느낌이에요.” IT업계 종사자 박모씨도 경향신문에 ‘한경오’ ‘가난한 조중동’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경향신문이 거만하다고 생각한다.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나요? 내부적으로 ‘한경오’ 프레임을 고민했다고 하지만 미디어 소비자들은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그럼 그냥 노력 안 한 거죠.” 그가 보기에 경향신문의 소통방식은 일방적이다. ‘한경오’ 비판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는다. “비판이 나왔다면 공개적으로 기사를 썼어야죠. 경향신문이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공유해야 소통이 돼요.”

경향신문을 좋아하는 이들도 부족함을 가감 없이 지적한다. 언론사 입사준비생 유씨는 여성혐오를 다루는 시각을 예로 든다. “경향신문은 적당한 수준의 진보지죠. 여성·환경·노동 문제에 관해 확실히 진보적 색채를 드러냅니다. 다만 공정성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요. 여성혐오를 부각하기 위해 사건을 제멋대로 재단해요. 남성혐오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건 문제가 있어요. 그래도 경향을 보는 건 사회적 약자를 적극 대변하고 환경을 제대로 감시하는 언론이기 때문이죠.” 취업준비생 조민경씨(28)는 젠더나 청년 이슈에 관심 많다. 경향신문의 여성 이슈 제기는 좋은 제스처라고 생각한다. “경향신문은 젊고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은데 가끔 헛발질을 해요. ‘문제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이슈를 선별할 때 젊은 시각을 반영하지만 다루는 방식이 고루하다고 할까요. 기본 방향은 잘 잡고간다는 생각입니다.” 

200명에 가까운 기자들이 경향신문을 만든다. 정치·이념 성향이나 페미니즘·성소수자 등 사회문제를 보는 시선도 제각각이다. 여러 선배들은 5월 대선 때도 지금도 불편부당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젠더·여혐 기획도 고민을 반복한 끝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한경오’ 비판이 억울하다는 한 선배는 “대나무숲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독자들과 머리를 맞댄 설득·해명·대화를 했다면 억울함이 핑계 아닌 진심으로 통했을까? 권력의 ‘불통’을 비판해온 언론이 정작 자신의 기사를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건 아닐까?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널리즘, 미디어 문화, 매체비평을 연구한다. 언론 소비자와 기자들을 직접 만나 여러 책과 논문을 썼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기자들이 수용자들에게 좀 더 낮은 자세로 다가가야 합니다. 기자들이 건방지다는 인식이 많아요. 기자들은 정치인이 아니라서 수용자에게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죠. 기호에 영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고 보고 싶어 하는 뉴스가 무엇인지 공부해야 합니다.”

■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입사 후 취재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경향신문이 ‘진보지’라는 막연한 이미지만 갖는다. 어떤 의제에 주목하고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이름값’ 못한다는 소리다. 이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김대원씨에게 경향신문은 ‘진보적이지만 덜 과격한’ 신문이다. 지면을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다른 신문도 마찬가지란다. 언론이 어떻게 변해야 존재감을 높일 수 있을지 물었다. “가끔 일간지를 보면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종이 문제는 확실히 아니라고 봐요. 일간지는 다 얕고 넓게 다루는데, 굳이 차별점 없는 걸 볼 필요가 있는가 싶은 거죠. 뭔가 다르고, 또 깊어야지 보겠죠.” 

금씨는 경향신문이 잘하는 것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난해 ‘부들부들 청년’ 같은 기획보도를 강점으로 꼽는다. “경향이니까 앞으로도 더 젊은 느낌으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신문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줄 만한 시도를 했으면 좋겠어요.” ‘경향이니까’ 한마디가 가슴에 훅 들어온다. 가능성을 알아주니 기분은 좋다. 

어쩌면 기자보다 신문을 많이 볼 기자 지망생의 시각도 다르지 않다. 매일 신문을 읽는 송씨는 저출산과 육아 문제를 다룬 ‘맘고리즘’ 기획을 기억한다. “페미니즘이라든지 사회적 약자라든지 앞으로도 경향만이 할 수 있는 걸 했으면 해요. 시대가 변해도 기본을 지키는,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쓴 기사는 통한다고 생각해요.” 

김 교수는 ‘신뢰’ 키워드를 제시한다. “출처는 오래 기억되지 않고 결국 메시지만 남아요. 그럼에도 가장 믿을 만한 정보는 전통신문에서 나온다는 것을 신문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내용과 더불어 지면과 온라인에서도 새로운 형식을 찾아야 하고요. 유용한 정보를 다양한 포맷에 담아내는 종합정보매체로 나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취재를 하면서 ‘아프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사람들이 건넨 모든 말들이 달다가도 쓰다. 두번째 형용사를 꼽자면 ‘갑갑하다’이다. 속보도 쓰고, 탐사·기획도 내보내야 한다. 특종은 말할 것도 없다. 텍스트도, 비디오도, 오디오도 해야 한다. 힘든 노동의 결과물을 홈페이지에도, SNS에도 유튜브에도 올려야 한다. 들어와보니 인력이 부족하다. 수습기자들은 이번 창간기획에도 여기저기 불려다녔다. 이 기사도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까지 채널 6개 관리…‘뷰수’에 울고 웃고”. 사회부·정치부에서 오래 일하다 신설한 SNS팀으로 간 선배가 ‘SNS팀은 뭐하는 데야’라는 내부 일각의 차가운 눈초리에 어려움과 절실함을 토로하며 노보에 쓴 글 제목이다. 태어나서 처음 본 가산동 경향신문 윤전기도 떠오른다. 경향신문의 길을 구하는 거창한 기획에 동원한 선배들이 야속하다. 앞으로 더 험난할 미디어 생태계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왜 ‘경향신문’이어야 하는지 현장 취재와 좋은 기사로 증명하는 것 말곤 다른 답은 잘 모르겠다. 미래에 관한 고민은 잠시 미뤄두련다. 

※ 경향신문 수습기자 3명과 모바일팀 기자 2명의 취재를 수습기자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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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선언 10년, 여전한 '금단의 선'

[친절한 통일씨] 10.4선언 발표 10주년 그리고 문재인 정부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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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04  12: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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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일 오전 9시경. 북으로 향하는 도로 위 군사분계선(MDL)을 표시한 폭 30cm의 노란색 선이 상징으로 그려져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가 노란색 선을 걸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일성.

"오늘 이 자리에 서고보니 심경이 착잡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있는 장벽입니다.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또한 발전이 저지돼왔습니다. 다행히 그 동안에 여러 사람들이 수고를 해서 이 선을 넘어가고 또 넘어왔습니다. 이제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MDL를 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길'로 향한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3일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4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남북정상선언')에 서명했다. 7년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았듯, 이날도 양 정상은 손을 잡고 들어올렸다.

10.4선언이 발표된 지 꼭 10년이 됐다. 하지만 10.4선언 서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 2개월 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고,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9년동안 말그대로 휴지조각이 됐고, 국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준비위원장이던 문재인 대통령. 10.4선언은 부활할 것인가.

7.4성명, 6.15공동선언을 이은 10.4선언

10.4선언은 1972년 7.4성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을 계승하고 있다. 또한, 2005년 9.19공동성명, 2007년 2.13합의도 잇고 있다.

"군사적 신뢰조치가 확대되고 한반도 평화체계를 구축하는 발판이 마련되는데 의미가 있다. 남북경협, 교류협력 관계를 양적, 질적으로 한단계 진전시키는 새로운 한반도 구상을 논의하여 다음 정부에서도 화해협력기조가 지속돼 나가는데 확고한 기반을 조성하는데 여할 것이다."

10.4선언은 총 8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1항은 6.15공동선언을 명시해 이행을 약속하고, 2항은 남북기본합의서에도 담겨있는 상호존중과 신뢰 원칙을 재확인하고 있다. 3항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보장 협력을 담고 있다.

1.2항의 원칙에 따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수역을 공동어로수역으로 지정해 평화수역으로 만든다는 것.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NLL을 포기했다고 비방하지만, 정작 공동어로수역은 1972년 7.4성명 발표 이후 박정희 정권이 검토를 시작했다. 그리고 1982년 전두환 정권이 북한에 제안했고, 1992년부터 본격 논의가 됐다. 이를 받아 10.4선언에 명시된 것이다.

4항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이를 위해 남북.미.중 4자가 만나며, 9.19공동성명과 2.13합의를 준수해 핵문제를 해결하자는 원칙을 담고 있다. 

   
▲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4정상선언'에 서명한 뒤 손을 잡고 기자들을 위해 다시 포즈를 취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5항은 남북경제협을 골자로 하는데, △민족내부협력사업 특수성 인정,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를 통한 해주 개발, △개성공단 2단계 개발 착수, △개성-신의주 철도,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및 공동이용, △안변.남포 조선협력단지 건설, △이를 위한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구성 등이다.

6항은 △백두산-서울 직항로 개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북응원단 경의선 열차 이용 등 남북교류.협력을 담고 있다. 7항은 △이산상봉 확대, △금강산면회소를 통한 상시 이산상봉, △자연재해 등에 상부상조 원칙 협력 등 인도주의 협력사업 추진을 밝히고 있다. 8항은 국제무대에서의 남북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10.4선언'은 유엔 총회에서 지지를 받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물거품이 됐다. 14조 원을 퍼준다며 공격을 하던 보수정부는 10.4선언 이행에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결국, 2010년 천안함 사건을 빌미로 '5.24조치'를 발표, 경제협력을 주요 골자로 한 10.4선언은 폐기 수순을 밟았다. 박근혜 정부도 이를 이어받았고, 9년 동안 10.4선언은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았다.

10.4선언 10년, 문재인 정부에서 부활할까

그러나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발표 10년을 맞은 10.4선언은 문재인 정부의 공약으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않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핵심은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이다. △금강산, 원산.단천, 청진.나선을 남북이 공동개발해 동해안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동해권 에너지.자원벨트 구축', △수도권, 개성공단, 평양.남포.신의주 연결 서해안경협벨트 건설 및 경의선 개보수, 서울-베이징 고속교통망 건설 등 '서해권 산업.물류.교통벨트 건설', △설악산.금강산.원산.백두산 관광벨트 구축 및 DMZ 생태.평화안보 관광지구 개발 등을 담고 있다. 10.4선언 5항을 그대로 옮겨온 셈이다.

   
▲ 문재인 대통령은 9월 26일 열린 '10.4선언 발표 10주년' 기념식에 참석, 연설을 통해 북한을 향해 10.4선언의 정신으로 돌아오라고 촉구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통일부 내 '한반도 신경제지도 TF'를 설치하고, 관련 예산으로 내년도 경제협력기반 세부사업 예산을 1천억 원 이상 증액.편성해 2천 480억 원을 책정, 장기적인 사업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10.4선언 발표 10년을 맞은 현 상황은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꺼낼 형편이 못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은 두 차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을 시험발사했고, 중장거리탄도미사일 '화성-12형'은 두 차례 일본 열도를 넘어갔다. 탄도미사일 장착용 수소탄 실험(6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에 맞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대북제재를 보다 강화하는 추세이다. 당장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신규투자를 금지하고 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구현하려면 미국 정부의 도움없이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문재인 정부가 별다른 실력발휘를 하고 있지도 않다. 강력한 대북응징력을 보인다며 자체 개발한 탄도미사일 '현무-2'를 대응발사했다. 미국의 전략무기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 전략폭격기 'B-1B'는 처음으로 동해 NLL을 넘어 함흥지역까지 날아갔다.

   
▲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 일행이 북녁으로 향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평화의 운전수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는 남북 관계 물꼬를 트기는커녕, 악화시키는 주범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대화로 풀어야 한다더니 아직은 대화할 때가 아니라고 하고, 꾸준히 제기되는 특사 파견 요구에도 귀를 닫은 모양새이다. '긴 호흡' 필요성에 '신 한반도평화비전'(베를린구상) 발표, 남북대화 제안 등 성급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왜 서두르냐고 주변을 탓하고 있다.

인도주의 문제는 정치.군사와 무관하다고 강조하지만, 정작 문재인 정부는 국제기구에 800만 달러를 공여하는 문제를 두고서도, 오락가락하더니 '정치적 상황과 분리'한다면서도 '남북관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여론 설득에 실패한 듯하다.

"10.4정상선언은 한반도 평화지도였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신북방정책 역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며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고, 10.4정상선언의 정신으로 돌아오라"고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다. 

하지만 10.4선언 발표 10년. 정작 문재인 정부가 10.4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까.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넘은 금단의 선은 여전히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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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라는 불교와 범불자 결집대회

 
  •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교수
  • 승인 2017.10.03 08:55
 
 

지난 학기 ‘불교윤리’라는 제목의 강의를 시작하면서, 수강생들에게 ‘나에게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진 후에 한 주 동안 생각해보고 발표하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주로 윤리 교사가 될 준비를 하는 20대 초반 대학생들 개개인에게 불교가 과연 무엇으로 인식되고 있을까가 궁금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을 알아야 이후 강의 진행이 제대로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각각의 배경과 성향에 따라 여러 답들이 나왔지만, 불교에 비교적 긍정적인 답변은 크게 나누면 다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과목에서 배운 원효와 지눌, 연기와 공 같은 개념지식을 불교와 동일시하면서 수능시험 준비 과정에서 애를 먹은 것이 불교라는 답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이 어지럽고 고통스러울 때 떠올릴 수 있는 휴식처로서의 절을 불교와 동일시하면서 무언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대상이라는 답이다. 후자에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템플스테이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그 과정을 인상적으로 묘사하면서 다른 학우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는 사례가 포함되어 있다.

조계종 교육원과 한국불교문화사업이 개최한 제3회 청년출가학교. 불교포커스 자료사진.

이 둘에 속하지 않는 대부분의 답변은 불교에 대한 거부감과 무관심, 스님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다. 특히 스님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외제차를 타고 거드름을 피우며 고급 식당에서 나오는 스님과 도박에 빠진 스님, 나이 든 보살인 자신의 할머니를 함부로 대하거나 거짓말을 일삼는 스님 등과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수행자로서의 본 모습을 잃어버린 승려에 대한 직ㆍ간접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떤 학생은 그런 스님들과 자신이 알고 있는 불교이론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2015년을 기준으로 우리 한국사회를 평가해본다면, 급속한 개인화와 물질화, 분단구조의 고착화로 인한 전쟁 위험의 상시화 등을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꼽을 수 있지만, 탈종교화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에 속한다. 사람들의 삶이 근원적으로 불안해지면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높아지고 있지만 기존의 제도종교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는 종교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의 분석과 진단은 우리사회에서도 이제 충분한 유효성을 갖는다. 10년 사이에 거의 10%가 줄어든 종교인구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고, 특히 불교의 경우 300만 불자가 준 사실에서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탈종교화 현상에 대응하는 방안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각 제도종교, 즉 불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전통종교들이 시대의 흐름을 이끌면서 그 변화를 주도해가는 방안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인구수와는 달리 점차 늘어가고 있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껴안을 수 있는 다양한 대안들을 제도종교 안에서 마련하는 방안이다. 후자에는 이미 일정한 한계에 봉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의 심화와 다양화, 종교를 초월해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명상공간의 확충, 도심사찰 중심의 불교인문학 강좌의 확산 등이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에 앞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각 제도종교가 본래의 모습을 간직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정신과 삶을 중심에 두어야 하고, 불교는 붓다와 보살의 삶과 정신을 그 중심축으로 오롯이 간직해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백약이 무효일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우리 개신교와 불교는 그 점에서 내부와 외부 사람들 모두에게서 불신 받고 있다. 목사와 스님에 대해 욕설에 가까운 비속어를 남발하는가 하면, 신도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일반인들이 헤아림의 범위를 넘어선다.

우리 승가공동체와 재가공동체에는 물론 그런 비난을 훌쩍 뛰어넘는 수행과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성원이 없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분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고, 특히 법정스님이나 성철스님으로 상징되는 탁월한 정신적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점이 문제다. 우리 시대가 정신적 영웅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객관적 여건과 상황도 충분히 고려해야겠지만, 그럼에도 청정비구와 비구니로 상징되는 승가공동체가 엄존하고 있는 한국불교계에 그런 기대를 쉽게 접을 수는 없다. 더 나아가 보살불교인 한국불교에서는 유마힐과 같이 석가의 제자들도 경외할 만한 청정한 재가보살에 대한 기대 또한 접을 수 없다.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기반삼아 깨달음을 구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우리 시대 중생인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건강한 사부대중공동체가 바로 우리가 바라는 불교의 미래다.

9월14일 열린 '조계종 적폐청산과 종단개혁을 위한 범불교도대회' 모습. 불교포커스 자료사진.

유례가 없이 긴 한가위 연휴가 지나고 나면 ‘범불자 결집대회’가 조계사와 인사동 로터리 사이의 공간에서 열릴 예정이다. 10월 11일 수요일 저녁 6시 30분부터 시작되는 이 대회는 ‘청정승가 구현과 조계종단 적폐청산’을 끈질기게 외쳐온 우리들의 함성이 방점을 찍는 자리가 될 것이다. 한 보살의 조계사 앞 1인 시위로 시작해서, 그런 재가자들 보기가 부끄럽다며 단식에 돌입한 명진스님과 그 뒤를 이은 효림, 용상, 대안, 허정스님, 비구니 선광, 석안스님의 간절하고 절박한 외침, 매주 목요일 저녁 보신각 앞 광장을 채운 촛불법회, 그리고 지난 9월 14일 범불교도대회를 잇는 대장정의 한 정점을 이룰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함께해온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더위와 한기, 모기, 소음 등을 나누며 동지애를 지닐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이날 대회를 기점으로 새로운 한국불교의 미래를 꿈꾸고자 한다. 그 미래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불교이고, 출가 수행자들이 수행과 포교에만 몰두할 수 있는 불교이며 재가불자들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깨달음과 자비의 지향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불교이다. 그런 미래는 우리 앞에 다가와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상당한 성공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11일 저녁 범불자 결집대회에서 그런 열망과 함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설렘과 경외감이 함께 요동치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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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는 민주열사의 주검까지도 서울 밖으로 쫓아냈다

 
[르포] 민주열사 묻힌 모란공원, 이제 기념관 건립 논할 때
2017.10.04 13:38:46
 

 

 

 

많은 이가 지난 겨울 길거리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새삼 깨달았다. 과거 한국은 혁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민이 피 흘려 독재체제를 민주공화정으로 바꿨다. 동북아에서 한국처럼 민주의 의의를 국가 정체성으로 확고히 새긴 나라는 없다. 
 
하지만, 달리 보면 우리는 지난겨울 촛불을 들기 전까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생생하게 경험해 보지 못한 탓이다. 우리는 4.19민주혁명의 의의가 무엇인지, 전태일의 항거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반추해보지 않았다. 수십 년간 이어진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사를 밑줄 그어가며 공부해본 경험도 없다. 기성세대 대부분이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해 볼 겨를이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몸으로 체득한 이전 세대의 반민주적 교양을 자식에게 대물림할 뿐이었다. 
 
마석 모란공원 묘역이 특별한 이유다. 이곳은 방문한 이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의 의의를 되새기게끔 하는 곳이다.  
 

▲ 김근태 전 의원의 묘 인근에서 바라본 마석 모란공원 전경. ⓒ프레시안(최형락)


모란공원 묘역은 민주주의 산 교육장 
 
지난 19일 한국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인 모란공원을 찾았다. 모란공원 묘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위치한 경춘선 마석역에서 도보로 약 20분가량 거리에 있다. 범 민주계열 정치인들이 중요한 시기마다 찾는 곳이다. 현재 약 13000기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약 160여 명의 민주열사가 묻혔다.  
 
공원 입구에서 위로 쭉 뻗은 길을 중심으로 묘역은 크게 좌우로 나뉜다. 오른편이 주로 민주열사가 묻힌 곳이다. 오른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민주열사 묘역 안내 책자 비치대와 민주열사가 묻힌 곳을 표시한 묘역도가 들어서 있다. 이들은 2013년 세워졌다. 묘역도는 구글 지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모란공원 묘역은 사설 묘지이기에 희망하는 누구나 안장은 가능하다. 실제 대부분 묘소는 일반인의 묘역이다. 3년에 25만 원가량 정도의 관리비, 약 1500만 원가량의 묘역비, 15년의 묘역권 등 묘역 이용 기준도 민주열사와 일반인에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모란공원 묘역이 상징성을 띈 이유는 1970년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이곳에 묻혔기 때문이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이하 추모연대)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 등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노동권 존중을 요구하며 분신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낳은 전태일 열사의 유해가 서울시내에 묻히길 원치 않았다. 이에 보안당국은 유가족에게 전태일 열사의 묘지를 서울과 먼 거리에 조성하길 종용했다. 이에 유가족이 고른 곳이 모란공원이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기란 쉽지 않았다. 대중교통도 하루 두세 대 뿐이었고, 눈이 오는 날엔 접근도 어려웠다"며 "당시 정권은 최대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전태일 열사를 떨어뜨려두려 했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만 해도 모란공원은 새 묘지라 다른 묘를 찾기도 어려웠다"던 이소선 전 유가협 회장의 말과 일치한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전 회장은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평생을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이 전 회장은 지난 2011년 타계 후 전태일 열사 묘소 왼편 두 칸 뒤에 안장되었다. 대부분 언론이 이소선 전 회장을 '이소선 여사'로 표현하는데, 남성에게는 대체로 전 직책을 붙여 호명하는 것과 비교하면 부당한 표기로 보인다.  
 
전태일 열사가 묻힌 후, 점차 더 많은 민주열사가 모란공원 묘역에 안장되기 시작했다. 1971년 5월 노조 활동 중 구사대에게 피습 당해 살해된 김진수 열사(당시 한영섬유 노동자), 1973년 10월 이른바 '유럽거점대규모간첩단' 명단에 포함돼 안기부의 고문으로 숨진 최종길 열사(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 1979년 신민당사 점거 투쟁 중 경찰의 살인진압으로 사망한 김경숙 열사(당시 YH무역 노동자) 등이 모두 모란공원에 묻혔다. 이들 모두 문민정부가 들어서 시민권을 인정받기 전까지는 이른바 '빨갱이'로 모욕당한 민주화의 산증인들이다. 
 
추모연대에 따르면 사실 전태일 열사 이전 이곳에 묻힌 민주열사가 있다. 권재혁 열사다.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던 열사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추진하려 했으나, 1968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소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주범으로 내몰려 1969년 사형 당했다. 권재혁 열사는 사망 다음 날인 1969년 11월 5일, 모란공원 묘역에 안장됐다. 
 
모란공원이 본격적으로 세간에 알려진 계기는 박영진 열사 장례 투쟁이다. 박 열사는 1986년 신흥정밀에 입사해 임금 인상안을 놓고 사측과 맞서던 도중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했다.  
 
노동계는 박 열사 유해를 모란공원에 안장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상당수 민주열사 묘역이 모란공원에 조성된 터라 부담감을 느낀 정권과 대립, 한 달 열흘간의 투쟁 끝에 유해를 안장했다. 이 사건이 회자되면서 모란공원은 중요한 민주화의 성지로서 존재감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가 이곳에 안장된 사건은 20년 넘게 지속된 독재에 지친 시민이 대대적 항쟁에 나서는 도화선이 되었다. 
 
자발적으로 조성된 민주화 성지 
 
전두환 정권 붕괴로 형식적 민주화를 이룩한 다음에도 이곳의 상징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직장 투쟁으로 노동 현장의 민주화를 이루자는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이후 모란공원에는 많은 노동열사를 비롯해 사회 각계의 누적된 모순과 싸우던 이들이 안장되었다. 수은 중독으로 15세 당시 입사 2개월 만에 사망한 문송면 열사, 백골단의 학생운동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김귀정 열사, 원진레이온에서 근무하다 얻은 직업병으로 사망한 김봉환 열사와 고정자 열사 등 숱한 이가 이곳에 묻혔다.  
 
평생을 통일운동에 전념한 문익환 목사, 정부의 강경한 노점상 철거에 맞서 싸우다 위법적 공권력 행사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이덕인 열사,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평생을 바친 계훈제 전 <사상계> 편집장, 효순이미선이 사건 당시 시민운동을 이끌다 귀가 도중 의문사한 제종철 열사, 레미콘 노동자 노동권 보장을 위해 사측과 협상 도중 사측이 고용한 대체차량에 치어 사망한 김태환 열사, 한미FTA 반대를 요구하며 분신한 허세욱 열사 등 숱한 이가 이곳에 묻혔다. 정권의 폭력적 철거에 맞서다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숨진 이상림·양회성·한대성·이성수·윤용헌 열사는 나란히 이곳에 묻혔다. 민청련 사건으로 군부의 살인적 고문을 받았던 김근태 전 국회의원도 이곳에 묻혔다. 
 
모란공원이 일방적으로 주입받은 화장한 한국의 얼굴이 아닌,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역사의 장인 셈이다. 이창훈 추모연대 집행위원장은 "모란공원은 자연스럽게 조성된 민주열사 묘역"이라며 "권력의 인위적 조성이 아니라, 시민의 열망이 만든 일종의 성지"라고 강조했다.  
 

▲ 전태일 열사의 묘소 뒤로 이소선 전 유가협 회장의 묘소가 자리했다. 전태일 열사가 모란공원에 묻힌 후, 이곳은 점차 민주열사의 성지가 되어갔다. ⓒ프레시안(최형락)


언제까지 시민 손으로 관리를... 
 
그간 민주열사 묘역은 그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관리가 쉽지 않았다. 유가족을 중심으로 한 각 열사 추모단체가 개별적으로 개별 묘를 관리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어디에 묻혔는지 확인키도 어려웠다. 추모연대 등 여러 단체가 민주열사 묘역을 전반적으로 관리했지만, 인력과 자금의 부족으로 한계가 있었다.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때는 2013년이다. 최재성 의원 등이 주도해 지역구 예산 2억 원을 관리에 투입했다. 묘역을 크게 가로지르는 이동로가 시멘트로 포장되고, 약자의 이동을 돕기 위한 손잡이가 이동로에 설치되고, 주요 묘소를 안내하는 나무 표지판이 설치된 게 이 때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예전에는 길이 전부 흙이라,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노약자는 이동조차 어려웠다"며 "그나마 지금은 예전에 비해 민주열사를 찾기가 쉬워진 셈"이라고 말했다.  
 
유가협 등 각 단체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이 매월 둘째 주 일요일마다 전반적인 묘역 관리에 나선 때도 2013년이다. 이에 따라 개별 열사 묘역이 따로 관리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민주열사로 확인된 이들의 묘역이 함께 관리되고 있다. 묘역 관리자를 위해 공원 입구에 컨테이너 박스가 세워진 것도 이 즈음이다. 자원봉사자들의 주요 업무는 묘역 잔디 관리, 이동로 관리, 표지판 관리 등이다.  
 
하지만, 더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해 보였다. 안내 책자 비치대는 외력으로 추정되는 힘에 의해 찌그러져 있었고, 안내 책자는 모두 바닥났다. 일부 나무 표지판은 이미 썩어 조금만 손을 대도 흔들렸다. 한편으로 크게 기운 표지판도 눈에 띄었다. 
 
개별 민주열사 묘역에는 그들의 행적을 간략히 소개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일부 표지판은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훼손한 듯 부러져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후 사망해 이곳에 묻혔음에도, 자원봉사단 관리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이가 여전히 많다는 데 있다. 통상 민주열사는 매년 6월 열리는 범국민추모제에서 확인하는 민족민주열사 안장 명단에 들어간 이로 구성된다. 이 명단에 든 이 중 모란공원 묘역에 묻힌 이의 묘지가 자원봉사자들의 관리 대상이다. 하지만 유가족 중 이 절차를 모르는 이는 서류신청이 필요하다는 절차조차 알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그나마 노동열사는 상급 단체 등이 추모사업회를 꾸려 관련 절차를 밟아주기에 괜찮지만, 개별적으로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가신 이의 유족은 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여기 묻힌 이 중에도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음에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가 많다"고 말했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사진 왼쪽)과 이창훈 추모연대 집행위원장(사진 오른쪽)이 모란공원 기념관 설립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제 기념관 건립을 논할 때 
 
무엇보다 유가족 단체는 모란공원의 상징성을 후대에 더 적극적으로 알릴 방안을 우리 사회가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 아니냐고 묻는다. 
 
모란공원은 사설묘지여서 민주열사와 일반 안장자의 무덤이 혼재되어 있다. 이미 묘역이 꽉 차, 더 많은 이를 받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일부 민주열사의 묘지는 이동로에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단순히 공권력의 힘으로 해결하기란 어렵다. 묘지란 기본적으로 함부로 손대선 안 되는 공간인 데다, 이런 혼재성이 역설적으로 모란공원이 시민의 자발적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임을 알리는 상징성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가족 단체는 모란공원의 상징성을 살리되,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 장소인 이곳의 의의를 시민에게 더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안을 범정부 차원에서 논의해주기를 원했다. 구체적 대안으로 이들이 요구하는 안이 기념관 건립이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모란공원을 비롯해 전국에 산재한 민주열사 묘역은 그 어느 곳보다 한국 현대사를 생생하게 공부할 수 있는 장소"라며 "궁극적으로 모란공원 기념관을 설립해 시민 누구나 이곳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의의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제화된 묘역보다, 살아있는 역사인 이곳에서 청소년이 우리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며 "자라는 세대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가장 좋은 곳이 모란공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정부는 과거 기념관 설립을 검토한 바 있다. 모란공원 입구에 위치한 모란미술관을 정부가 매입한 후, 이곳을 추모시설로 바꾸는 방안이다. 당시 정부는 약 200여억 원의 사업비가 소요될 것으로 봤다. 하지만, 일반 묘역이 민주열사 묘역과 섞인 만큼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와 관련해 최근 유가협, 추모연대 등 민주열사 관련 단체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모란공원 재정비 방안을 마련해 다시금 정부에 관련 논의를 이어줄 것으로 요청할 예정이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엄밀히 말해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은 관리가 어렵다기 보다,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대통령을 비롯해 주요 민주계 정치인이 찾는 곳인데, 그에 걸맞은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올해로 시민의 힘으로 군부 독재를 끝내고 민주화 체제를 이룩한 지 30년이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기를 위해 시민이 흘린 피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선거권 획득이라는 중대한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민주화의 의의를 상징할 모란공원은 더 큰 관심을 원한다. 
 
민주화의 상징 묘역들
 
모란공원 외에도 전국 각지에 한국 현대사의 상흔을 보여주는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 
 
먼저 손꼽을 곳은 광주 망월동 구 묘역(3묘역)이다. 망월 구 묘역은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상징성을 얻었다. 1980년 신군부는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숱한 이를 학살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이 사건의 희생자 상당수가 망월 묘역에 묻혔다. 이후 이곳은 80년대 학생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광주에 빚을 진 숱한 민주화운동가들이 망월동을 찾았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망월동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민주화 운동이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는 유족마저 망월동을 방문하기 어려웠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망월 구 묘역에서 추모제를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징역형을 살았다. 
 
이후에도 숱한 민주 열사가 망월 구 묘역에 묻혔다. 이한열 열사가 대표적이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한열 열사는 사후 망월 구 묘역에 묻혔다. 1991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다 숨진 강경대 열사도 망월 구 묘역에 안장됐다. 경찰의 물대포로 인해 숨진 백남기 열사도 망월 구 묘역에 안장됐다. 
 
망월 구 묘역은 최근까지도 접근이 쉽지 않은 공간이었다. 지난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곳을 찾을 당시 8000여 명의 전투경찰이 망월동 인근을 에워싸, 구 묘역을 참배한 후 신 묘역으로 이동하던 유족을 막았다. 현재 구 묘역에는 민주열사 묘지 40여기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149명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본래 망월 구 묘역에 있던 5.18 희생자들의 묘소는 1997년 신 묘역이 완성된 후 그곳으로 이장됐다. 신 묘역은 2002년 국립 묘지로 승격됐다. 
 
경남 양산 솥발산 공원묘역은 한국의 대표적인 노동열사 묘역이다. 경남 일대는 중공업 단지가 밀집된 탓에, 일찍부터 노동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 상당수가 솥발산 공원묘역에 묻혔다. 이곳이 ‘노동운동의 성지’가 된 까닭이다. 
 
2003년 사측의 탄압에 항의하다 살인적 손배소에 짓눌린 끝에 분신한 배달호 열사가 이곳에 묻혔다. 배달호 열사의 죽음은 형식적 민주화가 완성됐다 여겨진 당시 사회에 직장 민주화가 여전히 요원함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이후 노동운동가와 싸우던 주요 회사는 가장 손 쉬우면서도 잔인한 무기로 손배소를 꺼내들어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현재 이곳에는 노동열사 30여 명이 묻혀 있다. 
 
'보수의 성지'로 알려진 대구에도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 대구 현대공원 묘역이다. 
 
현대공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악명 높았던 인민혁명당 사건 희생자들의 유해가 남은 곳이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하리라 점찍은 인물들을 증거 없이 연행해 대법원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 속칭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는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도예종 삼화토건 회장, 여정남 전 경북대 학생회장, 서도원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김용원 경기여고 교사 등 8명이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현대공원에는 인혁당 희생자 8명을 비롯해 민주열사 17명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이들의 죽음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음을 발표한 후, 2007년 정부가 희생자 유가족에게 245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뒤늦게 바로 잡혔다. 인혁당 사건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희생자 유가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처럼 전국 각지에 자리한 민주열사 묘역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마석 모란공원과 대구 현대공원, 양산 솥발산 묘역은 지금도 사설 묘지다. 망월 구 묘역은 현재 광주광역시가 관리하는 시립묘다. 
 
민주열사를 모시는 유일한 국립 묘역은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다. 지난 2001년 민주공원 묘역 사업이 결정된 후 수년 간 적절한 후보지를 물색하던 정부는 2007년 12월 이천시 모가면 공원로를 최종 부지로 확정했다. 이후 2016년 6월, 총예산 497억 원을 들여 시공한 국립 묘역을 개원했다. 
 
이곳에는 90년대 초반 학원 민주화와 노태우 정권 타도, 노동 해방 등을 요구하며 민주화 이후에도 학생운동이 이어지게끔 산화한 강경대 열사를 비롯해 민주열사 56명이 안장되어 있다. 전체 안치 규모는 136기다. 일정한 조건에 부합하는 국가 인정 사망자만 안장될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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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다 잊었다” 말하지만...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족의 명절

 

67년 세월 동안 수많은 미제사건으로 남아

구자환 기자 hanhit@vop.co.kr
발행 2017-10-04 10:15:23
수정 2017-10-04 10: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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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자료사진
민중의소리 자료사진ⓒ구자환 기자


 ‘사랑의 자리’낙엽이 떨어져도 생각이 나고
강물이 흘러가도 생각이 난다.
돌아온다고 약속해놓고 오지않는 무정한 님아.
사랑이 머물던 자리 그님은 어디가고
어디가고 돌아올 줄 모르나.

할머니는 불쑥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둘째 딸이 ‘어머니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는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88세의 고령에 맞지 않게 고운 음색과 음정을 갖춘 노래가 잔잔한 침묵을 뚫고 있었다.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며 먼저 가버린 남편의 그리움과 원통함을 애써 달랬다. 어떤 때 할아버지(남편)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이젠 다 잊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대답은 외려 무덤덤했다. 수십년이 흐르면서 눈물도 말라버렸다. 숱한 세월이 흐르면서 죽은 사람을 슬퍼하기보다 당장 삶을 이어가는 것이 급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하는 것이다. 가해자들이 침묵을 강요하며 노린 것이 ‘시간’이었을까. 통한의 아픔도 숱한 세월 속에 묻혔다. 당시 농사를 지으며 마산소방서에 다녔던 남편 황치원씨는 21세 나이의 청춘이었다. 20세인 할머니는 첫딸에 이어 둘째 딸을 태안에 품고 있었다. 다행히 열서너 마지기의 논이 있어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 수가 있었지만 남편이 없는 농사일은 ‘골병’ 그 자체였다. 홀로 어린 딸을 키워야 했던 가혹한 시간이 어느새 67년이 흘렀다. 할머니는 가혹한 시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하느냐고 했다.

20세의 나이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이귀선 할머니
20세의 나이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이귀선 할머니ⓒ구자환 기자

노래를 마친 이귀선 할머니는 잠시 자리를 벗어낫다. 67년의 세월이 흐른 동안 국가는 할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 진상조사에서 진실규명이 되었지만 법원은 증거능력이 부족하고 마산형무소 수감된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심마저 기각했다. 현재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부역 사건 등 다수의 유족들은 법원으로부터 ‘국가 잘못’이라는 판결을 받고 보상을 받았으나 유족 일부는 법원으로부터 비슷한 이유로 기각 당했다. 보도연맹학살 사건 등 진실규명 미신청 유족은 신청자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다.

“돌아와서 들에 풀어놓은 소를 찾아오겠다고 나갔어. 그리고 안 돌아오데”

2일 찾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8월 11일 미군 폭격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2002년 영국 BBC에서 이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 방송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침묵했던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국민보도연맹학살 사건이 그 이전에 있었다. 당시 마산과 진주일대 국민보도연맹원은 한국전쟁 초기인 음력 6월1일 소집 통보를 받고 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산의 계곡과 인근 바다에서 집단 학살됐다.

“아침에 ‘나중에 돌아와서 들에 풀어놓은 소를 찾아오겠다’고 하고 나갔어. 그리고 안 돌아오데”

남편은 진전지서에서 ‘가입하면 군에도 안 가고 좋다’는 권유를 받고 가입했다. 그것이 국민보도연맹인 줄은 알지 못했다. 1949년 이승만 정권은 좌익세력을 대상으로 사상을 전향하고 계도하기 위한 관변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역 할당제가 실시되면서 국민보도연맹원에는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농민이 다수 가입됐고, ‘말 깨나 한다’는 지식층과 중고등학생까지도 가입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위협하고, 농민에게는 대출과 농기계 대여를 해주고,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취급한다고 협박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가입시켰다. 시골마을에서는 이장이 주민에게 알리지도 않고 지니고 있던 도장을 찍기도 했다. 이때부터 ‘도장을 함부로 주지 말라’는 말이 생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37만명으로 추정되는 국민보도연맹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에게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예비 검속되고 전국 곳곳에서 무차별 학살됐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에는 가입하지 않은 인사들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논과 밭을 팔아 뇌물을 주고 풀려난 보도연맹원도 곧잘 회자된다. 집안이 부유했던 아버지는 자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논과 밭을 팔아 포대자루에 담아 뇌물을 전했다. 그럼에도 돌아오지 못한 자식도 있었다. 뇌물을 받은 순경 등은 ‘담배 사가져 오라’는 등의 말로 풀어주었지만 순박했던 사람은 담배를 사들고 다시 되돌아와 죽임을 당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한 순경이 자신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를 살리기 위해 ‘선생님, 목욕하고 오시라’고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가 역시 목욕을 하고 다시 돌아왔다. 죄가 없으니 도망갈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순경은 크게 탄식을 하면서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욕설을 마구 퍼부으며 울었다고 한다.

유족들이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헌화하고 있다.
유족들이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헌화하고 있다.ⓒ구자환 기자

남편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풀려난 마을주민으로부터 남편의 소식을 들었다. 이 마을에는 진전면장의 힘으로 주민 3명이 살아서 돌아왔다. 마을로 돌아온 주민 중 한 사람은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음력 7월 10일 제사를 지내라’는 단 한마디만 전했다. 이날이 남편인 황치원씨가 마산 구산면 ‘괭이바다’에서 수장 학살된 날이었다.

마산 괭이바다에 수장된 음력 7월 10일

“우짤거고, 아무리 한이 맺혀도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

할머니는 끝내 그 비통했을 순간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랜 고통을 되새기는 질문을 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던 것에 비해 무척 허탈한 답변이었다. 듣고 있던 둘째 딸이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는 듯이 대신 거들었다. 당시 할머니의 태안에 있던 유복자다.

“말 안 해도 뻔 한 거 아닙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을 치고 대성통곡을 했겠지. 죽은 사람은 그렇다 치고 산 사람의 원이라도 풀어줘야 하지 않습니까.”

할머니는 참혹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제는 남편의 생각도 잊었고 눈물도 말라버렸다. 담배와 술을 먹으며 지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애써 웃었다. 살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체념이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한 일을 당하면 사람은 웃는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 벌어진지 67년이 지났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당시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수많은 민간인학살 사건 등에 대해 진실규명을 했지만 이명박 정부로 접어들면서 활동기간을 연장하지 못하고 종료됐다. 짧은 활동기간은 여전히 수많은 미제 사건을 남겼다.

문재인 정부는 ‘민간인학살 사건’을 10대 국정과제로 설정하고 2018년 초 ‘제2의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재조사 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현재 남편을 잃은 유족들 대부분은 기억을 상실하거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나마 생존한 유족들도 오랜 시간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 체념하거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이것이 제2의 진실위가 하루빨리 활동을 재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침묵을 강요당하고, 역대 반공우파 정권에서 배척한 대한민국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이제 살아있는 자들을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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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원래 ‘하루’만 쉬는 날이었다?

 
등록 :2017-10-04 09:29수정 :2017-10-04 09:51
 
추석 풍경 변천사
1970년 고향길 대표 풍경은
‘만원 열차·무임 승차’
첫 ‘연휴’는 전쟁 중인 1951년
작년까지 최장 추석연휴는 5일
가족·친척들과의 긴 만남보다 해외여행과 ‘방콕’이 일상이 되고, 극장가가 붐비는 지금 추석 모습은 예전과 어떻게 다를까? 대체휴일과 임시공휴일이 만나 사상 초유 ‘10일 연휴’를 갖게 된 2017년 추석을 맞아, 추석 연휴의 역사와 모습을 살펴봤다.

 

 

■ 추석은 원래 ‘하루’만 쉬는 날이었다

 

추석이 법정공휴일로 제정된 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이다. 이후 1986년에는 추석 다음날, 1989년에는 추석 전날이 휴일로 지정되면서 지금과 같은 ‘3일 연휴’ 체제가 완성됐다.

 

하루만 쉬던 추석이 2일 이상 쉬는 ’연휴’가 된 건 추석 다음날 일요일이 붙은 1951년이 처음이었다. 이후 연휴가 법제화된 1986년에 이르기까지 일요일을 앞뒤로 낀 추석연휴는 1951, 1954, 1958, 1967, 1974, 1975, 1981, 1984년 등 모두 8번 있었다. 10월3일 개천절과 이어진 이틀짜리 연휴는 1963년 한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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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연휴가 법제화된 1989년 전까지 3일짜리 추석 연휴는 이틀짜리 추석 연휴(10월7일, 8일) 뒤로 한글날이 맞물린 1987년 단 한 차례 뿐이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하루 또는 이틀 안에 고향을 다녀오려는 귀성객들로 열차와 버스가 몸살을 앓았다. 추석 3일 연휴가 5일로 길어진 때도 있긴 했다. 1990년 당시 법정공휴일이었던 국군의날(10월1일·월)이 일요일과 추석 연휴 사이에 끼면서 사상 첫 5일 연휴를 만들어냈다. 그 탓이었을까. 국군의날은 그해 11월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됐다.

 

4일 이상의 연휴가 흔해진 건 2004년 토요일을 쉬는 ‘주5일제’가 시행된 이후다. 2014년 대체휴일제가 도입되면서 추석은 어지간하면 4일을 쉬는 ‘가을 휴가’가 됐다. 해외를 다녀오려고 여행객들로 공항이 붐비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사람들은 주변 휴일과 공휴일 사이로 개인 휴가를 끼워 일주일 안팎의 기간 동안 해외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 광복 이전: 하루만 쉬어도 텅~비었던 서울

 

가족끼리 모여 차례를 지내고 송편을 나눠 먹는 추석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장거리·대규모 귀성은 과거에 흔치 않았다. 일가친적이 가까운 곳에서 대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 의미의 귀성은 일자리와 학업을 위해 타지로 나간 이들이 늘어난 일제시대부터 본격화했다. 당시 추석은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대규모 귀성은 없었으며, 고향이 가까운 사람들만 주말을 끼고 가족을 찾아갔다. 1924년 9월12일자 <동아일보> ‘임박한 추석과 가을의 선물’ 기사는 당시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다.

 

 

“고향 가까운 사람들은 부모형제 모여앉아 송편 한 개라도 달게 먹으려고 고향으로 다니러 가는 사람이 많다는 바, 추석날은 마침 토요일이므로 학생들도 일찍 공부를 마치고 나오리라는 데 금년에는 여러 가지 재앙으로 연사가 전만 못함으로 따라서 추석 놀이도 전에 비하면 매우 쓸쓸하리라더라.”-1924년 9월12일 <동아일보>

 

 

그런 상황임에도 추석이 되면 서울은 텅 비었던 것 같다. 1921년 <동아일보>는 텅 빈 서울의 모습을 잘 묘사해 놓았다. 100여년의 세월 차이에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다.

 

 

“어제 16일은 음력 추석이라. 있는 집에서는 곰국을 푸지게 끓여놓고 아이들까지도 모두 재미있게 지내는 모양. 더욱이 어제 하루 동안은 시내의 각병문에 인력거 구경을 할 수가 없었고 3~4전 하던 무 한 단에 십전씩 주어도 얻어볼 수가 없었으며 관에는 고기가 동이 났다 함은 아무리 죽네 하여도 경황이 전보다 나은 것을 증명”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신세를 비관해 명절에 자살하는 이들이 있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사람마다 그 준비에 분망중인 지난 29일 밤 극도의 생활난으로 세상을 비관하여 사랑하는 자식 두 명을 양팔에 안고서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참극이 있었다.”-1933년 10월3일자 동아일보 3면 ‘명절이 고통 애자양명을 포옹코 진행차에 투신자살’

 

“한 노파가 (열차에) 뛰어들어 무참히도 자살을 하였는데, 조사 결과 그는 서성리 김씨(61)로서 추석 명절이 닥쳐왔건만 생활이 곤궁하여 한끼니의 밥도 지어 먹을 수 없음을 비관하고 추석날 미명에 목숨을 끊고 말았다 한다.”-1935년 9월14일 동아일보 5면 ‘생활난 비관 노파가 자살’

 

 

 

■ 광복부터 1950년대까지: 승차권 못구한 승객들 무임승차…미군 객차까지 투입돼

 

1949년 추석 당일이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고향을 찾는 이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귀성의 핵심은 기차였다. “서울역 광장에는 차 탈 사랑들이 문재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섰다. 서울역 오후 5시45분발 열차는 개찰도 하지 않았는데, 용산에서부터 초만원이 되었다” 1949년 10월7일자 <경향신문>이 묘사한 추석 하루 전날 서울역의 풍경이다.

 

1951년은 사상 첫번째 연휴였지만, 전쟁으로 명절 분위기를 한껏 낼 수는 없었다. <동아일보는> 9월15일자 신문에서 “고난과 궁색 중에서 맞이한 조상의 제례도 못 올리는 오늘의 추석 명절…(중략) 그래도 무심히 뛰노는 새 옷 입은 거리의 아이들이 조국의 꽃봉오리다. 그리고 변함없이 반가이 맞아주는 만월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새 희망으로 고난극복”이라고 짧게 썼다.

 

고향가는 길은 휴전선이 정해진 뒤인 1952년부터 다시 혼잡해졌다. ‘대규모 무임승차’로 열차가 연착하는 등 지연운행이 극에 달했다.

 

 

“추석을 앞둔 부산역의 혼잡은 극도에 달하여 비난의 초점이 되어있는데, 지난 2일 부산역을 출발한 서울행 급행열차와 대전행 여객열차는 승차권을 구입치 않은 여객들도 초만원을 이루어 여객차는 스프링이 주저앉아 이날 아침 8시에 출발, 6열차는 삼랑진에 이르러 2시간이나 늦어 대구역에 이르렀으나 극도의 초만원을 이루어 열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1952년 10월3일자 <경향신문> 2면 ’삼랑진 대구서 연발소동‘

 

 

 

열차 귀성객이 폭증하자 정부는 1955년에는 미군에 객차 10량을 긴급 요청해 투입했으며, 1956년에는 임시열차를 증편 운행했다. 하지만 열차만으로 장거리 여객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서민들이 정원 초과 열차표마저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일부 국회의원은 역무원에게 특권을 요구하는 등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추석의 명절을 앞두고 제각기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시민들은 서울역이 갑자기 좁아진 듯 터져라고 몰려들고 있다. 언제나 2~3할 정도의 여유를 보여주던 각선 열차는 그 전날에 벌써 정원을 초과하고 차표를 못산 승객들은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특히 가족 수행원들을 이끌고 귀향하는 국회의원 제공들의 접대에 서울역장실은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1955년 9월29일 <경향신문> 3면 ‘혼잡한 추석 열차 어제 서울역 풍경’

 

 

 

무리하게 승객을 태우다보니 크고 작은 교통사고도 잇따랐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사고는 ‘평해호 침몰 사고’다. 1949년 10월 5일 인천항을 출발한 여객선 평해호가 강화군 작약도 100m 앞에서 전복해 71명이 숨졌다. 50인승 ‘똑딱선’에 귀성객을 비롯해 200여명이 넘는 승객을 태워 발생한 인재로, 당시 선장은 만취한 상황이었다.

 

 

■ 1960년대: 기차로, 비행기로…빈부 따라 갈라진 고향길

 

산업화로 고향을 떠난 ‘이촌향도’ 현상이 사회문제로 떠오른 60년대의 귀성길 혼잡은 극심했다. 몰려든 승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열차의 스프링이 내려앉는 등의 사고가 잇따랐다.

 

6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부유층이 이용하는 백화점과 아파트 상가를 중심으로 흥청거리는 명절 분위기가 퍼졌다. 1968년 10월4일자 경향신문 ‘추석경기 흥청-사치품이 날개돋혀’ 기사는 서울 시내 일부 백화점에서 매상목표 5천만원을 예상했던 상품권이 매진되는가 하면, 귀금속 등 사치품과 냉장고, 에어컨 등 고가 전자제품의 거래가 늘어나는 등 과거와 다소 다른 명절 분위기를 전했다. 항공편을 이용하는 귀성객이 부쩍 늘어 서울-부산을 비롯한 주요 노선의 예매가 완료됐다는 소식과 함께 ‘초만원’ 서울역에 질서 유지를 위해 사복경찰이 투입됐다는 소식이 함께 전해졌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의 1977년 추석 모습. 국가기록원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의 1977년 추석 모습. 국가기록원
■ 1970년대: ‘고속도로 시대’ 개막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대전-대구 구간을 끝으로 전 구간 개통하면서 본격적인 고속도로 시대가 열렸다. 철도를 이용한 귀성객은 1969년 60만5000여명이었으나 1970년에는 36만명 수준으로 줄었다. 귀성객들은 출발 간격이 짧고 정류장이 가까운 고속버스를 선호했다. 역 앞에서 펼쳐졌던 귀성길 혼잡은 고스란히 버스정류장으로 옮겨갔다. 고속버스가 입석 승객을 받는 위험천만한 일도 빈번했다.

 

고속버스로 승객이 분산된 데다 승차원 예매제도가 시작되면서 추석 당일 서울역 등 주요 기차역의 혼잡은 줄었다. 하지만 날짜가 옮겨졌을 뿐 매표소에 길게 늘어선 줄은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에서 여전했다. 1970년 9월12일 <매일경제>는 “추석을 사흘 앞둔 12일 서울역을 비롯한 시내 35개 열차표 매표소는 이날 낮부터 귀성객들로 붐비고 있으며, 이미 12일용의 호남선 특급열차 태극호와 백마호의 차표는 11일의 예매에서 매진됐다”고 전했다.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주차장이 된 1989년 경부고속도로 궁내동 톨게이트 모습. 연합뉴스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주차장이 된 1989년 경부고속도로 궁내동 톨게이트 모습. 연합뉴스
■ 1980년대 이후: 사라질뻔한 5일 연휴

 

1986년 추석 다음 날이, 1989년 추석 전날이 휴일로 지정되면서 지금과 같은 ‘3일 연휴’가 시작됐다. 길어진 휴일과 승용차 보급으로 명절 고속도로 혼잡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매표전쟁에 질린 시민들은 포니 엑셀, 프레스토, 르망, 프라이드 등 신형 국산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됐다. 마을로 묘지로 향하는 시골길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의 성묫길 풍경. 연합뉴스
80년대의 성묫길 풍경. 연합뉴스

 

“붐비는 건 고속도로뿐이 아니었다. 인터체인지를 빠져 국도와 시골길을 거쳐 고향 마을에 들어서자 황토길에도 서울 넘버의 포니와 르망과 시골택시와 봉고차에 경운기까지 뒤엉켜 마을안길 역시 차량들로 어수선했다.-1986년 9월19일자 <동아일보> 5면 ‘고향찾는 마음’

 

 

승용차의 증가로 고속도로 정체가 절정에 이르면서 사람들은 막히지 않는 철도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PC통신’의 전성기인 1990년대 중반부터 역과 터미널 앞에 길게 늘어선 예매 줄이 모니터로 옮겨갔고, 혼잡을 피해 서울의 가족 친지를 찾는 ‘역귀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1984년 추석 연휴를 맞아 서울역에 몰린 귀성객들. 연합뉴스
1984년 추석 연휴를 맞아 서울역에 몰린 귀성객들. 연합뉴스
지금은 5일 연휴가 비교적 흔하지만, 1990년대 전까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공휴일 조정’을 구실로 추석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90년 8월24일 국무회의에서 국군의날과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내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정부는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었다. 5일 연휴가 ‘기사회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짧았던 일주일 동안 여행을 계획했다가 취소한 사람들도 있었다. 시민들은 정부의 오락가락 졸속행정에 분통을 터뜨기도 했다. 그해 유지됐던 국군의날과 한글날은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2017년. 역 앞에 늘어선 긴 줄은, 컴퓨터 화면을 거쳐 모바일로 들어왔다. 명절엔 반드시 고향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도 희미해지면서 3일 이상 연휴를 여행이나 긴 휴식으로 보내는 이들도 늘어났다. 올해는 ‘7일 연휴’도 아쉽다는 여론에, 정부가 10월2일 하루를 더 붙여 10일을 쉬기로 했다. 추석이 법정공휴일로 지정된 지 68년 만에 하루였던 휴가가 10일이 된 것이다. 5일 쉬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며 휴일의 허리를 자르고자 했던 과거 정부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세상이 바뀌었다. 다음번의 추석은 어떤 모습일까.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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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조선학교 차별 4년 반...그 재판 결과는?

 
[기고] 전면승소와 최악의 부당판결: 판단이 갈라진 조선학교 '무상화'재판

 

 

일본정부가 교육의 기회균등을 목적으로 창설한 '고교무상화'제도의 적용 대상에서 일본 전역의 조선고급학교(10교) 학생만 제외한 것이 2013년2월. 그로부터 4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이 부당한 차별조치에 항의해 오사카, 아이치, 히로시마, 규슈, 도쿄의 조선고급학교 학생 또는 학교법인이 일본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일으켰다. 길고 힘든 재판투쟁 끝에, 올해 들어 히로시마, 오사카,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각기 판결이 선고되었다. 그 중 오사카의 판결(7월 28일)에서는 원고가 전면 승소하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뒀지만, 히로시마(7월 19일)와 도쿄(9월 13일)에서는 원고 패소라는 부당판결이 선고되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나는 일제 식민지시기를 중심으로 한 한국근현대사 연구자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 정책의 범죄성에 대해서는 숙지하고 있다. 또 재일조선인에게 대한 일본정부의 무자비한 탄압과 억압의 역사에 대해서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각지의 재판 진행과정과 결과를 지켜보면서, 일본국가가 바로 식민지주의적 가치판단의 기준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부정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의 인식이 부족했음을 통감하고 있다. 나는 민족차별 정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사법부가 민족교육의 의의를 처음으로 인정한 오사카지방재판소의 판결 의의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오사카의 판결(7월 28일)에서는 원고가 전면 승소했다.ⓒ후지나가 다케시

▲그러나 히로시마와 도쿄에서는 '최악의 부당 판결'이라는 평이 나왔다. ⓒ후지나가 다케시

무상화제도 적용을 막은 '불령선인(不逞鮮人)'관  
 
각지의 고교무상화 재판에서 피고인 일본국가가 주장하는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북한, 조선총련'의 '부당한 지배'를 받고 있다고 의혹이 있는 조선학교에 취학지원금을 지급하면 지원금이 '북한, 조선총련'에 유용될 의혹이 있으므로 조선고급학교를 지원금 지급 대상 학교로 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로시마와 도쿄의 판결은 둘 다 이 논리를 추인해 원고패소의 부당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국가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제2차 아베 신조(安倍晋三)정권은 발족 직후 우선 조선학교를 고교무상화 제도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조선고급학교의 지정을 염두에 둔 근거규정을 삭제하는 문부과학성령을 개악했다. 그 이유가 정치적 외교적 판단에 의한 것임은 너무나 명확하다. 예를 들면, 2012년 12월 28일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대신(당시)이 기자회견에서 "조선학교에 대해서는 납치문제의 진전이 없는 점, 조선총련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교육 내용, 인사, 재정에 그 영향이 미치고 있는 점 등으로, 현시점에서 지정에는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없어 불지정의 방향으로 수속을 진행한다"고 말한 것 등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부당한 지배'를 들고 나온 것은 정치적 외교적 이유에 의한 근거규정 삭제 조치가 교육의 기회 균등을 추구한 무상화 제도의 목적에 반하는 것임을 정부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나중에 덧붙여 억지로 꾸며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심리 과정에서 일본국가 측은 근거규정의 삭제가 쟁점화되는 것을 피하고자 대부분 소문에 지나지 않는 산케이신문의 보도나 공안조사청의 치안관리 정책 의의를 강조하는 보고서 등의 기술에 근거해, 조선학교의 교육이 조선총련의 '부당한 지배' 아래 실시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공안조사청 보고서에는 조선학교의 교직원과 학생, 일본인 지원자들이 고교무상화 적용을 호소하는 활동조차 조선총련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히로시마 및 도쿄 지방재판소는 이러한 공안기관의 편견적인 '분석'이 "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이며…… 일정한 조사, 분석 능력을 대비한 조직"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해 증거로 채용했다.  
 
이렇게 고교무상화제도 부적용이라는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정책을 정당화한 것은 그뿌리를 파고들면 실은 국가에 의한 치안관리의 사상이었다. 원래 이 재판은 교육행정의 본연의 자세를 둘러싼 것이었을 터인데, 일본국가 측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치안대책이라는 논점으로 몰고가는 전략을 취했다. 결국 일본의 공안기관에 식민지시기부터 뿌리 깊게 자리잡은 '불령선인'관에 기초한 차별의식이, 조선고급학교에 대한 무상화 적용을 가로막는 벽으로 작용한 것이다.  
 
'짜고 친' 국책 판결  
 
물론 가령 '부당한 지배'이 논점이 되었다 하더라도, 조선학교가 취학지원금을 부정 수급할 "의혹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지정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히로시마와 도쿄의 지방재판소는 일본국가 측의 의도에 부응한 판결을 내렸다. 
 
특히 도쿄의 원고 변호인단은 조선고급학교가 무상화제도에서 배제된 과정을 면밀히 분석하고, 또 증인심문에서는 문부과학성의 당시 담당자에게 철저히 따져, 조선고급학교 지정의 근거규정을 삭제하고 불지정으로 정한 진짜 이유가 정치적 외교적 판단에 의한 것임을 논증했다. 조선고급학교에 대한 불지정이 위법임을 확실한 증거로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부당한 지배'론에 가담한 도쿄지방재판소는 치안정책적 관점에서 문부과학대신의 판단을 적법으로 인정하고, 정치적 외교적 판단에 의한 근거규정 삭제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판단할 필요가 없다"고 내쳤다. 원고 변호인단의 주된 주장을 무시하고 전혀 응답하지 않는 모욕적이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짜고 친' 판결이었던 것이다. 임기가 아직 남아있던 전 담당 재판관을 결심 직전에 교대시킨 이례적인 조치에 대해 의혹의 시선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도쿄 지방재판소의 경우는 문부과학대신의 판단을 "불합리한 것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며"라고 언급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조선학원이 "취학지원금을 부풀려 대리 수령"할 경우 "부당한 공작 등에 의해" "그러한 사태가 표면화되지 못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는 피고 일본국가의 주장을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고까지 단언했다. 즉, 히로시마의 판결은 사실상 '조선인은 신용할 수 없기에 취학지원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판결이 있던 날 저녁에 열린 판결보고집회에서 아다치 슈이치(足立修一) 원고변호인 단장이 "조선학교 아이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헤이트(혐오) 판결"이라고 엄중히 지탄한 것도 당연하다 (히로시마 "헤이트 판결": 역전 승리를 맹세한 재출발의 날' <월간 이어> 제22권 제9호, 2017년 9월, 7쪽).
 
오사카 판결의 역사적 의의 
 
한편,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일본국가에 대해 오사카조선고급학교에 대한 취학지원금 지급에 관한 불지정 처분을 취소할 것, 이 학교를 취학지원금 지급 대상 학교로 지정할 것을 명하는 원고 전면승소의 판결을 내렸다. 쟁점이 된 조선고급학교 지정에 관한 근거규정 삭제에 대해서는 시모무라 문부과학대신이 재량권을 일탈 남용한 것으로 위법이며, 또 오사카조선고급학교는 적정한 학교 운영을 요구한 '규정' 제13조에 대해서도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부당한 지배'에 관한 일본국가 쪽의 주장을 물리치고 히로시마·도쿄 판결과는 정반대인, 역사에 기록될 만한 획기적인 판결이 선고된 것이다.  
 
판결에서는 시모무라 문부과학대신이 "교육의 기회균등의 확보와 관계없는 외교적 정치적 판단에 근거해" 근거규정을 삭제한 것은 고교무상화법에 정해진 위임의 취지를 일탈한 것이라고 명확히 인정했다. 또한 '규정' 제13조 적합성 판단, 특히 '부당한 지배'에 관한 판단에 대해 문부과학대신의 재량권은 인정받을 수 없고, 이 쟁점에 관한 일본국가의 주장의 대부분이 "합리적 근거에 기초하는 것으로서의 주장도 입증도 없다"는 등의 이유로 "본건은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판결은 조선학교와 조선총련과의 관계, 재일조선인에서 민족교육의 의의 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조선총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우리나라(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자주적 민족교육이 수많은 곤란을 겪는 가운데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실시를 하나의 목적으로 결성되어 조선학교의 건설과 인허가 수속 등을 진행해 왔으며, 조선학교는 조선총련의 협력 아래 자주적 민족교육시설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기에 …… 이같은 역사적 사정 등에 비춰보면, 조선총련이 조선학교의 교육활동 또는 학교운영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 한들 양측의 관계가 우리나라(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의 유지 발전을 목적으로 한 협력관계일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양측의 관계가 적정하지 못하다고 바로 추인할 수는 없다. 또한 조선고급학교는 재일조선인 자녀에게 조선인으로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하나의 목적인 외국인학교인 바, …… 모국어와 모국의 역사 및 문화에 대한 교육은 민족교육에 있어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민족적 자각 및 민족적 자존심을 양성하는 데 기본적인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고급학교가 조선어로 수업을 실시하고, 북조선의 시각에서 역사적, 사회적, 지리적 사정을 가르침과 동시에 북조선을 건국하고 현재까지 통치해 온 북조선의 지도자, 국가이념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조선고급학교의 앞의 교육목적 그 자체에는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에, 조선고급학교가 북조선이나 조선총련의 부당한 지배로 인해 자주성을 잃고 앞서 언급한 교육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바로 인정하기 어렵다."
 
이렇듯 오사카 지방재판소 판결은 일본 사법이 처음으로 조선학교의 민족교육 의의를 정면에서 인정한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재판투쟁  
 
히로시마와 도쿄의 판결은 행정부의 조선학교 차별정책을 사법부가 자신의 권위와 신뢰성을 해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잡한 논리로 추인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러한 부당판결을 용인한다면, 일본국가는 자의적으로 '반일' 딱지를 붙인 개인과 집단에 대해 마음놓고 차별 정책을 취할 것이다. 만약 제소를 당하더라도 사법부가 정당화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조선고급학교에 대한 무상화제도 부적용은 이미 민족차별이라는 틀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의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사법 독립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다. 부당판결을 내린 재판관은 마땅히 수치스러운 국책 판결의 장본인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오사카에서 획기적인 판결이 내려진 뒤라서 국가권력의 중심지인 수도 도쿄 지방재판소의 판결 내용은 한층 비정상적으로 비쳐졌다. 배외주의를 선동해 차별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일본국가의 의도는 이미 명백하다. 무상화 재판의 행방에 대한 일본사회의 관심은 그리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국지인 아사히신문 이외에 도쿄신문, 가나가와신문, 시나노일일신문, 교토신문 등의 지방지도 도쿄 판결의 부당성을 엄중히 비판하는 사설, 해설기사 등을 게재했다. 
 
히로시마에서는 8월1일에, 도쿄에서는 9월25일에 원고가 항소해 조선학교 관계자와 지원자들은 불굴한 투지로 역전 승소를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오사카 판결에 대해서는 8월 10일 일본국가가 항소해 국가측이 총력을 다해 공격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내년에는 아이치와 규슈에서 판결이 선고될 전망이다.  
 
투쟁은 이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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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실천하면 우리민족에게 평화 올 것”

민족종교.단체, 개천절 기념식 개최..남북해외 공동행사 불발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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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03  22: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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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족종교협의회와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3일 광화문광장에서 ‘단기4350년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를 개최했다. [사진제공 - 개천절준비위]

“조국통일의 주체는 전체 단군민족이며 온 민족이 힘을 합쳐 민족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확립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와 300여 민족단체가 참가한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3일 정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전쟁반대! 평화가 답이다!’는 기치 아래 ‘단기4350년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를 개최했다.

민족종교와 민족단체 소속 참가자들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 선의식’을 봉행한 뒤 기념식을 갖고 ‘남북·해외 8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남북·해외 온 겨레가 분단을 걷어치우고, 조국통일의 그날을 속히 앞당길 것을 단군민족의 이름으로 뜨겁게 호소한다”고 밝혔다.

주최측은 당초 평양 단군릉에서 남북해외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남북관계 악화로 불발돼 북측은 평양 단군릉에서 별도의 천제와 기념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해외 8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 역시 남북 간 협의가 진행되지 못해 남측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와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의의 목소리만을 담았다.

참가자들은 도천수 공동대회장이 낭독한 호소문에서 “홍익정신으로 단군민족 본래의 모습을 찾고, 단군 민족의 저력을 배가시켜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갈 것을 호소한다”며 “홍익인간이라는 개천정신으로 동북아와 한반도 모두가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한반도 통일을 방해하는 그 어떤 행위도 결단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명백히 반대하고 역사왜곡과 독도침탈 책동에 대해 결단코 맞설 것이며, 동북아와 인류 전체의 평화와 공동이익, 발전을 위해 앞장설 것”이라고 일본과 대립각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개천절은 우리민족의 생명의 근원이며, 우리민족 건국의 기원”이라며 “민족의 분열을 타파하여 모든 대립과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관계를 민족공동의 이익에 맞게 확대발전시키고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길을 열어나가기 위해 적극 나설 것을 호소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한 이강산 한민족운동단체연합 공동대표가 낭독한 ‘개천선언문’을 통해 “우리민족의 원형질(D.N.A)인 3․1 독립정신, 8․15 단결정신, 홍익인간 정신이야말로 오늘날까지 민족의 3대 한민족의 정신문화”라며 “민족수난의 역사를 하나로 한 결 같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오게 한 단군성조의 개천절 홍익인간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 하였던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이 혼불에 남과 북이 함께 되돌아가 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담론을 하나로 소통시키지 못할 일이 없다”고 강조했다.

   
▲ 이날 기념식에는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소속 민족종교 관계자와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 소속 300여개 민족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사진제공 - 개천절준비위]

앞서, 박우균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은 대회사 나서 “우리는 민족종교와 민족운동진영을 중심으로 지난 2002년, 2003년 그리고 2014년 평양 단군릉에서 남북이 하나되어 개천절민족공동행사를 개최해 왔다”며 “올해 개천절은 남북간의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사죄했다.

이어 “개천절을 계기로 남과 북은 무한정 대결을 지양하고 교류와 협력을 통한 평화의 새장을 열어가기 위해 남북이 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온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민족에게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은 기념사에서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은 바로 문화의 힘”이라며 “‘홍익인간’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나아가 세계 정신문화를 선도한다는 자부심으로 오늘의 개천절을 기려주시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윤승길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기념식에서 김영두 대종교 종무원장과 이범창 천도교 종무원장 등이 축사를 했고, 개천절 노래와 단군 경배.분향으로 마무리했다.

기념식에 앞서 강화도 참성단 마니산 천제를 지내는 항일운동의 총본산 대종교가 주관하여 천제 선의식을 봉행하고 기념식에 이어 이정희 문화위원장의 사회로 ‘개천절 민족화합대축제’를 같은 장소에서 진행했다.

 

<남북·해외 8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 (전문)>

오늘은 원시조 단군성조께서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하늘 이치로 이 땅과 인간을 깨우치시고 나라를 세우신 지 건국 4350년이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

원시조 단군성조 이래 ‘우리는 하나’라는 정신은 민족 전체의 합의로 일구어낸 정신이기에, 그 어떤 정세의 변화에도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야 할 통일의 기치이며, 종교와 이념, 지역과 계층을 떠나 모두 하나가 되어야 단군민족의 저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분단 72년인 금년 단기4350년(2017) 개천절을 맞아, 우리는 원시조 단군의 한 후손으로 하늘에 천제를 올리고 하나가 되어, 온 민족이 단합하여 거족적인 통일운동으로 조국통일을 이룸으로써 단군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담아 남과 북, 해외 8천만 온 겨레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첫째, 자주는 민족의 자존이며,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 존엄한 자주민족입니다.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단군민족의 자존으로 긍지와 자부심을 안고 자주통일의 길을 열어갈 것이며, 우리의 역사와 철학, 전통문화가 전 인류를 홍익인간으로 이끌어갈 인류의 문화유산임을 자각하고, 홍익정신으로 단군민족 본래의 모습을 찾고, 단군 민족의 저력을 배가시켜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갈 것을 호소합니다.

조국통일의 주체는 전체 단군민족이며 온 민족이 힘을 합쳐 민족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확립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 겨레를 사랑하는 단군민족의 후손들인 우리들은 민족의 안녕과 이 땅의 평화번영을 지키기 위한 운동에 단합하여, 홍익인간이라는 개천정신으로 동북아와 한반도 모두가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한반도 통일을 방해하는 그 어떤 행위도 결단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고대사에 대한 내외의 어떠한 왜곡도 막아내고, 특히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명백히 반대하고 역사왜곡과 독도침탈 책동에 대해 결단코 맞설 것이며, 동북아와 인류 전체의 평화와 공동이익, 발전을 위해 앞장설 것입니다.

셋째, 단군민족이라면 남과 북, 해외 어디에 살건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남북관계 개선과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남북관계를 전진시키고, 공동선언을 계승, 실천하여 남북 화해와 협력을 더욱 강화함과 동시에 한겨레로서 동질성을 확인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아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대단합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자주, 자강, 자립의 정신과 원칙으로 민족의 분열을 타파하여 모든 대립과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관계를 민족공동의 이익에 맞게 확대발전시키고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길을 열어나가기 위해 적극 나설 것을 호소합니다.

개천절은 우리민족의 생명의 근원이며, 우리민족 건국의 기원입니다!

건국 반만년! 뜻깊은 단기4350년(2017) 개천절을 맞이하여, 우리 선조들이 발휘한 호국정신을 되새기며 경천·숭조·애인의 미덕을 이어받아 남과 북, 해외의 동포가 개천절의 큰 뜻으로 하나가 될 것을 호소합니다!

남북·해외 온 겨레가 분단을 걷어치우고, 조국통일의 그날을 속히 앞당길 것을 단군민족의 이름으로 뜨겁게 호소합니다! 단군민족 통일만세!

단기 4350년(2017) 10월 3일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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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숨긴 오염물질 검출 위치, 주유소·동물병원 주변이었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10/03 14:29
  • 수정일
    2017/10/03 14:2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단독]미군이 숨긴 오염물질 검출 위치, 주유소·동물병원 주변이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입력 : 2017.10.03 10:00:00 수정 : 2017.10.03 10:01:01

 

 

ㆍ한·미 3차례 합동조사…대법 압박에 위치 뺀 1차 결과 공개
ㆍ경향신문 확인 결과, ‘벤젠 기준치 162배’ 관정도 주유소 옆
ㆍ미군 책임 확실한데도 모호한 KISE 기준 탓 늘 빠져나가

그래픽 | 엄희삼 기자사진 크게보기

그래픽 | 엄희삼 기자

 

용산 미군기지가 반환을 앞두고 있지만 기지 내부의 오염 상태는 여전히 철저한 비밀에 부쳐져 있다. 2013년 6월 열린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환경분과위원회에서 한·미 양국은 용산 미군기지 내부에 대해 3차례 합동 환경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2015년부터 3차례 실시된 조사 결과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미군의 반대를 이유로 한국 정부도 공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SOFA 합동위원회 각서에는 한·미 양측이 모두 동의하지 않으면 자료를 공개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조사 결과를 봉한 정부는 환경·시민단체가 제기한 법정 소송에 휩싸였다. 지난 4월 대법원이 1차 조사 결과를 공개하라고 판결하자 환경부는 1장짜리 자료를 내놓았다.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쪽 용산 미군기지 내부 주유소의 반경 200m 안쪽 관정 14곳만 대상으로 한 소규모 조사 결과였다. 지하수·토양 조사를 위해 뚫은 관정 14곳 중 7곳에서 벤젠·톨루엔·에틸벤젠·크실렌이 검출됐다. 모두 발암·유해 물질들이다. 정부가 내놓은 자료엔 해당 관정들의 연번이 공개됐지만 위치는 공개되지 않았다. 

2001년 7월 발생한 녹사평역 기름 유출 사고의 휘발유 오염원으로 지목된 용산 미군기지 내 주유소(AAFES).  김기범 기자

2001년 7월 발생한 녹사평역 기름 유출 사고의 휘발유 오염원으로 지목된 용산 미군기지 내 주유소(AAFES). 김기범 기자

환경부 관계자는 “관정 위치도 기지 내부 정보이기 때문에 미군이 동의하지 않으면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 6월 서울행정법원이 2·3차 조사 결과도 공개하라는 1심 판결을 내놨지만, 환경부는 미군 반대에 부딪혀 다시 항소한 상태다. 

 

경향신문은 추가 취재를 통해 환경부가 공개 안 한 관정 14곳 중 12곳의 위치와 기준치 이상 오염물질이 검출된 관정 7곳 중 6곳의 위치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미군 측 자료 ‘녹사평역 오염 프로젝트: 유출 관련 관정과 배수조에서 지하수와 생성물의 샘플링 및 레벨 측정 결과Ⅰ’을 보면, 미군 자체조사에서 기준치 이상 오염된 관정 7곳 중 6곳(B01-868·869·870·

873, RW-101·102)은 휘발유가 유출됐을 것으로 추정된 주유소(AAFES)와 동물병원(NVC) 주변에 모여 있다. 나머지 1곳(B09-256)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는 미 육군 공병대가 삼성물산에 용역 조사를 맡겨 2002년 11월부터 2003년 2월까지 주유소와 동물병원 주변 반경 500m의 지하수·토양을 채취·분석해 2003년 7월 제출한 것이다.

환경부가 공개한 1차 조사 결과 자료를 참고하면, 주유소 옆 ‘B01-873’은 가장 심각한 오염이 발견된 관정이다. 1급 발암물질 벤젠이 기준치의 162배나 검출됐다. 동물병원 뒤편의 4개 관정에서도 기준치의 최대 96배에 달하는 벤젠과 2배 안팎의 톨루엔·에틸벤젠·크실렌이 검출됐다. 군견 훈련장 쪽 언덕의 1개 관정에서도 기준치를 초과하는 벤젠이 나왔다. 

지난 8월9일 용산 미군기지 메인포스트 담장 밖에서 토양오염조사 전문가들이 토양 시료를 채취하고 있다. 서울시는 10여년간 약 70억원의 비용을 들여 기지 주변 정화작업을 해왔지만 여전히 기준치의 최대 수백배에 달하는 독성물질이 검출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월9일 용산 미군기지 메인포스트 담장 밖에서 토양오염조사 전문가들이 토양 시료를 채취하고 있다. 서울시는 10여년간 약 70억원의 비용을 들여 기지 주변 정화작업을 해왔지만 여전히 기준치의 최대 수백배에 달하는 독성물질이 검출되고 있다. 연합뉴스

녹사평역은 2001년 7월 지하 터널에서 유류 오염이 발견된 곳이다. 2002년 미군은 유출된 기름의 일부인 휘발유에 대해서는 책임을 인정했지만 대부분을 차지한 등유는 인정하지 않았다. 녹색연합 등은 녹사평역에서 발견된 등유 ‘JP-8’이 미군이 사용하는 유종이라는 근거를 들며 추궁했다.

당시 서울시는 농업기반공사(현 한국농어촌공사)에 2001년 1차 조사, 2002년 2차 조사를 맡겨 휘발유·등유의 오염원이 모두 미군기지라는 결론을 냈다. 비슷한 시기 미군은 삼성물산에 조사를 맡겨 2002년 2월 결과 보고서를 받았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녹사평역 오염 지하수에 대한 조사 보고서’는 기지 밖 오염 지역 동쪽·북쪽의 난방유 탱크와 대성주유소 등을 오염원 후보로 지목하면서 기지 내부 군견훈련장 옆 주거단지는 오염원 후보에서 제외했다. 

이 주거단지에 있던 지하 유류탱크 2기는 2001년 2월 누유 점검을 통과하지 못해 지상 탱크로 교체된 것들이었다. 그해 8월 추가 검사에서는 군견 훈련장 인근 탱크 1기가 더 교체됐다. 이 탱크들엔 1999년 이후 등유 ‘JP-8’이 저장돼 있었지만 보고서는 지하수·토양 조사 결과 등유 유출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서울시는 녹사평역은 2001년부터, 캠프 킴은 2006년부터 약 70억원의 비용을 들여 주변 정화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시료 채취를 시작한 2004년 녹사평역 주변 관정에서는 기준치의 최대 1957배에 달하는 벤젠이 검출됐다. 10여년 동안 정화를 계속하고 있지만 벤젠·톨루엔·에틸벤젠·크실렌·석유계총탄화수소(TPH) 모두 기준치의 수배~수백배가 남아 있다.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는 1966년 한·미가 체결한 SOFA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SOFA에는 환경오염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2000년 미군이 한강에 맹독성 물질 포르말린을 무단 방류한 사실이 알려진 뒤인 2001년에야 한·미가 합의한 ‘환경보호에 관한 특별양해각서’에 “인간 건강에 대한 공지의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해(KISE)”라는 모호한 기준이 담겼다. 미군은 KISE에 해당하는 오염만 정화하겠다고 시간을 끌다 2007년 정화작업 없이 23개 기지를 반환했다. 이 중 22곳에서 기준치를 초과한 TPH가 검출됐다. 정부는 땅을 다시 매각할 17개 기지 정화비용으로 1865억5000만원을 지출해야만 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미국과 공동환경평가절차서(JEAP)에 합의했다. 이후 반환 미군기지 오염 조사 방식은 국내법에 의한 ‘토양 정밀조사’에서 ‘위해성 평가’로 바뀌었다. 위해성 평가는 오염이 인체에 미치는 위험을 산출한 뒤 KISE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반환된 부산 하야리아 기지는 전체 면적의 0.26%만 위해성이 인정돼 정화비용 3억원이 책정됐지만 정밀조사에선 17.96%가 오염된 것으로 드러났다. 정화비용은 146억원으로 불어났다.

기지 안쪽에서 기름이 흘러 퍼지고 스며들어도 한국 정부에선 알 길이 없다. 지난 4월 녹색연합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은 미국정보자유법(FOIA)에 따른 절차를 거쳐 ‘용산 미군기지 내부 유류 유출사고 기록(1990~2015)’을 입수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6년 동안 용산기지 곳곳에서 일어난 유류 유출사고는 84건에 달했다. 3.7t 이상 유류가 유출된 사고는 7건, 400ℓ 이상 유출된 사고는 31건이다. 


<취재 지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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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얼 말 글 점점 사라지고 있구먼..!

우리 얼 말 글 점점 사라지고 있구먼..!

 

어른들은 옛날부터 사람은 나이, 날짜, 날씨만큼은 우리 말글로 해야 올바른 사람으로 알아주고 정겹게 받아주었지만 우리 말글이 많이 망가지고 없임여김 받는 요즘에는 안타깝고 서글픈 마음이 든다.

 

나이를 말할 때도 별별 못난이들이 있다. “쉰 둘 입니다.”하면 될 것을 ‘오십 둘, 오십 두 살입니다’ ‘오십 이 세 입니다’하는 사람 “마흔 여덟입니다.” 하면 쉽고 간편한 것을 ‘사십 팔세입니다.’ ‘사십 여덟입니다.’해서 쓴웃음을 짓게 하는 얼간이들이 종종 있다.

 

날짜도 오늘은 “시월 초사흘 개천절입니다.”하면 될 것을 ‘10월3일 십월삼일 입니다.’ ‘시월삼일입니다.’라거나 “시월 초나흘”하면 끝날 말을 ‘10월4일 십월사일’ ‘시월사일’이라고 해서 날짜도 제대로 말 못하는 팔푼이노릇을 하는 젊은이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아직 날씨만큼은 우리 말씨가 살아남아서 “맑음, 흐림, 구름 있음, 비 또는 눈 내림, 안개 낌, 해돋이, 해넘이 한가위, 둥근 보름달”등 우리 말글이 많이 살아있어 그나마 기쁨을 주고 있다.

 

옛 어른들은 이렇게 우리말글로 반드시 제 나이와 날짜 그리고 날씨만큼은 순우리말로 하게끔 했을까? 같은 겨레 한민족임을 가장 잘 들어내는 일은 나이와 날짜 날씨를 알려주고, 서로 말로 소통할 때 다정하고 정다울 수 있고 한 핏줄 같은 겨레임을 스스로 느끼며 사이좋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정겹고 아름다운 가르침인가? 우리 한 어버이들 남기신 얼 말 글 속에 담긴 엄청난 정신적 유산만 지켜나가도 우리 후손들은 얼마든지 슬기롭고 지혜롭게 살아나갈 수 있음을 깨우쳐 알고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외국 문화와 문명이 넘쳐나고, 물밀 듯 쳐들어오고 우리 말글을 밀어내고 쑤시고 들어와 제자리 차지하고 점령하려는 때에 속수무책으로 멀건이 맥 놓고 있노라면? 나라는 어느 틈엔가 “얼빠진 국가로 망해 버리고 말 것 같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지금이라도 일어서야 되지 않겠는가? 얼 말글이 죽으면 그 나라와 민족은 멸망하거나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시한번 외치고 외치며 남겨놓고 싶다. 왜 우리겨레가 이 세상에서 살아져버려야 하는가? 얼마나 억울하고 기막힌 일인가? 아름다운 동방에 횃불이던 코리아가 사글어 들어 없어졌다면? 우리 후손들에게 무어라고 말 할게 있겠는가?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얼 말 글 사랑에 힘을 쏟아야 하고, 열심히 빛나는 얼과 말글을 아끼고 다듬고 돋보이게 하는 일에 온갖 힘을 모아내야 한다. 들어온 말, 외국어를 바꾸거나 우리말로 새롭게 만들어 써야하고, 외래어 외국어도 모두 알기 쉬운 한글로 고쳐서 넉넉하게 쓸 수 있도록 바꿔내는 연구도 국립국어연구원 같은 곳에서 힘 기우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식민지 같은 72년간을 슬기롭게 벗어나는 독립운동에 발 벗고 나서야 하고 남북평화통일을 위해 모두 나서서 힘써야 한다. 북조선은 남녁보다 우리 말글사랑이 뛰어나서 살아있는 말글이 더 많고 활발한 것이 분명하니 서로 돕고 배워나가면 더욱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미군을 몰아내고, 민족통일을 이뤄내서 한겨레 한민족이 되어 양키유대자본 손아귀에서 홀연히 벗어나 새로운 독립국가로 거듭나게 될 날을 기다리며 남은 여생을 살았으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다. 얼마나 얼빠진 부모가 아직도 어린아이를 영어학원으로 보내 혀 꼬부라진 말을 돈 버리며 가르치는가? 어리석고 미친 노릇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참 사람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 얼굴로 진솔한 우리말글을 예쁘고 아름답게 쓸 줄 알아야 한다. 시건방지게 영어, 중국어, 일본어 나부랭이 지껄인다고 자랑할게 전혀 못 할 짓인 것을 알아야 된다. 오죽이나 못났으면 제 얼 뿌리를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말에 정성을 쏟고 있단 말인가? 바보짓이고 어른들에게 큰 잘못과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이다.

 

더없이 맑고 고운 우리 얼 말글을 아끼고 다듬고 사랑하며 자랑스럽게 가꾸고 바꿔내고 바로 잡으며 아들 딸 손자손녀 이어받을 아이들 위해 세상에 으뜸가는 얼 말 글이 되도록 우리 모두 애쓰고 힘 모아 살려나아 갔으면 소원이 없겠다..! 오늘은 이만~

 

단기4350년 시월초사흘 불날(화요일) 풀잎 이 필립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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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가의 승리, ‘번개’의 승리예감

[개벽예감268] 베가의 승리, ‘번개’의 승리예감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7/10/02 [21:08]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조선인민군에게 불리하고, 미국군에게 유리한 작전환경

2. 예상치 못한 기종이 참가한 9.23야간작전연습 

3. ‘낚시바늘’에 걸려들지 않은 조선인민군 방공망

4. 베가의 승리에서 ‘번개’의 승리를 예감한다

 

 

1. 조선인민군에게 불리하고, 미국군에게 유리한 작전환경

 

2017년 9월 23일 밤 11시 30분경 미국태평양공군사령부의 작전계획에 따라 공습편대가 동해 북부 상공으로 북상하여 약 두 시간 동안 야간작전을 연습하였다. 9.23야간작전연습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군사기밀이어서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지만, 보도기사에서 드러난 윤곽만 보더라도 미국태평양공군사령부가 그 작전연습을 오랜 시간에 걸쳐 꽤 치밀하게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섭 던포드(Joseph F. Dunford Jr.) 미국군 합참의장은 2017년 9월 26일 연방상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자신의 군직을 재신임 받은 자리에서 9.23야간작전연습을 준비한 정황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최근 작전을 진행할 때. 이 자리에서 기밀사항까지 언급할 수는 없으나, 우리의 작전능력과 상대의 작전능력을 알아보고, 작전시점과 예상되는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매티스 국방장관과 나는 각자 그 작전계획을 몇 시간에 걸쳐 검토하고 처리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다.”   

 

<동아일보> 2017년 9월 25일 보도에 따르면, 괌의 앤더슨공군기지에서 B-1B 전략폭격기 2대, 그리고 일본 오끼나와의 가데나공군기지에서 F-15C 전투기 6대가 각각 출격하였다고 한다. 이 보도기사는 미국태평양공군사령부가 제11공군 산하 제36비행단 소속 B-1B 전략폭격기들과 제5공군 산하 제18비행단 소속 F-15C 전투기들을 앤더슨공군기지와 가데나공군기지에서 각각 출격시켜 야간작전을 연습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1> 

 

▲ <사진 1> 2017년 9월 23일 밤 11시 30분경 미국태평양공군사령부의 작전계획에 따라 괌의 앤더슨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1B 전략폭격기 2대와 일본 오끼나와의 가데나공군기지에서 이륙한 F-15C 전투기 6대 등으로 구성된 공습편대가 조선 동해 상공을 북상하여 야간작전연습을 감행하였다. 위쪽 사진은 B-1B 전략폭격기를 촬영한 것이고, 아래쪽사진은 F-15C 전투기를 촬영한 것이다. 공습편대가 강원도 원산에서 동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동해 상공에서 벌인 야간작전연습은 조선인민군에게는 불리하고, 미국군에게는 유리한 작전환경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한국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B-1B 전략폭격기 2대와 F-15C 6대로 편성된 공습편대는 강원도 원산에서 동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동해 상공으로 북상하여 야간작전연습을 감행하였다. 350km는 원산에서 울릉도까지 거리와 같다.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조선 동해안에서 350km나 떨어진 동해 상공에 나타난 것은 조선인민군 방공망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것은, 9.23야간작전연습이 조선인민군에게는 불리하고, 미국군에게는 유리한 작전환경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첫째, 9.23야간작전연습이 진행된 작전구역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원산에서 동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동해 상공에 공습편대 작전구역이 설정되었으므로,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원산비행장이나 함흥 덕산비행장에서 미그-21 요격편대를 긴급히 대응출격시켜야 하였다. 

미그-21 전투기는 1959년에 처음 실전배치되었고, F-15C 전투기는 1976년에 처음 실전배치되었으므로, 17년의 격차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그-21을 얕볼 수 없다. 미그-21은 근접공중전에 적합한 기종이고, F-15C는 원격공중전에 적합한 기종이다. 미그-21이 적기의 공대공미사일 사거리 안으로 파고들어 근접공중전에 돌입하면, 민첩한 비행술로 F-15C와 대등하게 맞붙을 수 있다.   

그런데 F-15C 작전반경은 1,930km나 되고, 미그-21 작전반경은 370km밖에 되지 않는다. 작전반경이 370km밖에 되지 않는 미그-21이 발진기지에서 350km 떨어진 동해 상공으로 날아가 작전하려면 공중급유를 받아야 하는데, 미그-21에는 공중급유장치가 없고, 조선에는 공중급유기가 없다. 이런 사실을 아는 미국태평양공군사령부는 미그-21의 작전반경 한계선에 가까운 동해 상공으로 공습편대를 출동시켜 미그-21 요격편대가 대응출격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둘째, 9.23야간작전연습이 진행된 작전시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원산으로부터 약 350km 떨어진 작전구역에서 야간작전연습을 감행하던 미국 공군 공습편대는 원산비행장에서 미그-21 요격편대가 대응출격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약 150km 더 북상하여 함흥 덕산비행장에서 약 200km 떨어진 공역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덕산비행장에 주둔하는 미그-21 요격편대가 대응출격을 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덕산비행장에서 동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동해 상공은 그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그-21 요격편대의 작전반경 안에 있으므로, 미국 공군 공습편대를 상대할 수 있다. <사진 2> 

 

▲ <사진 2> 위쪽 사진은 2016년 9월에 진행된 원산국제친선항공축전에 참가한 미그-21 전투기를 촬영한 것이고, 아래쪽 사진은 함경남도 함흥 인근에 있는 덕산비행장을 상업위성이 촬영한 것이다. 미국 공군 공습편대는 원산에서 동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동해 상공에서 야간작전연습을 벌이다가, 약 150km를 더 북상하여 덕산비행장에서 약 200km 떨어진 공역에 들어갔다. 덕산비행장에서 약 200km 떨어진 공역은 미그-21의 작전반경 안에 들어가므로, 그 비행장에서 미그-21 요격편대가 대응출격하면, 미국 공군 공습편대를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야간작전은 미그-21에게는 불리하고, F-15C에게는 유리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미그-21 전투기의 전자장비성능은 F-15C 전투기의 전자장비성능에 비해 크게 뒤진다. 이를테면, F-15C에 설치된 APG-63 능동전자위상배열(AESA)레이더의 탐색거리는 250km나 되는데, 미그-21에 설치된 RP-21 레이더의 탐색거리는 30k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F-15C는 미그-21을 먼 거리에서 먼저 포착할 수 있다. 지상에서나 공중에서나 군사작전 중에 교전상대를 먼저 포착한다는 말은 교전상대를 먼저 공격한다는 뜻이다. F-15C가 발사하는 AIM-120 공대공미사일의 사거리는 180km이고, 미그-21이 발사하는 R-77 공대공미사일의 사거리는 193km이므로, 공대공미사일의 성능은 서로 비슷하지만, F-15C가 먼저 미그-21을 포착하면 곧바로 공격할 수 있다.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은 자기들이 모는 추격기의 전자장비보다 성능이 훨씬 더 우월한 전자장비를 갖춘 미국군 전투기들과 맞서 근접공중전을 벌일 수 있는 고난도 전술을 연마해왔다. 전 세계에서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들만 할 수 있는 고난도 공중전 전술은, 레이더와 통신장비를 모두 꺼놓고 낮은 고도로 날아가는 무전파저고도비행술로 적기의 공대공미사일 사거리 안으로 파고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전투비행사의 비행감각과 육안시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무전파저고도비행은 야간에 실행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캄캄한 밤에 나타나는 경우, 그에 대응출격하는 조선인민군 추격기들은 전자장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데, 미그-21이 전자장비를 켜는 순간, F-15C에게 비행방향, 비행고도 및 속도, 비행위치가 즉각 노출된다. 미국태평양공군사령부는 이처럼 F-15C와 미그-21의 작전성능격차를 타산한 뒤에 공습편대를 야간에 출동시킨 것이다. 그래서 조섭 던포드 미국군 합참의장은 2017년 9월 26일 연방상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미국 공군의 작전능력과 조선인민군 항공군의 작전능력을 알아보고, 작전시점과 예상되는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제임스 매티스(James N. Mattis) 국방장관과 자신이 각자 야간작전연습계획을 몇 시간에 걸쳐 검토하고 승인하였다고 말했던 것이다.

 

 

2. 예상치 못한 기종이 참가한 9.23야간작전연습 

 

조선인민군이 동해 상공으로 북상하는 미국 공군 공습편대를 상대하려면 작전성능이 우수한 미그-29 요격편대를 출격시키면 된다. 미국의 온라인 군사전문매체 <글로벌 씨큐리티(Global Security)>에 실린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미그-29 전투기 약 40대를 실전배치하였다고 한다. 군사전문지 <오릭스 블럭(Oryx Blog)>에 실린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서로 다른 비행장에 각각 2대씩 배치된 미그-29 4대를 긴급히 출격시킬 준비태세를 24시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9.23야간작전연습에 대응하여 미그-29 4대가 긴급히 출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동해안 일대에 있는 비행장들에 미그-29가 배치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는 없고, 평안남도에 있는 순천비행장과 온천비행장에 미그-29가 배치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들만 있다. 비록 동해안 일대에 있는 비행장들에 미그-29가 배치되지 않았다고 해도,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동해 상공을 북상해서 약 두 시간 날아다니는 동안, 순천비행장이나 온천비행장에서 미그-29 요격편대가 출격하면, 얼마든지 공습편대를 상대할 수 있었다. 2017년 6월 26일 국가정보원이 국회 간담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9.23야간작전연습이 끝난 때로부터 약 48시간이 지난 뒤 “평양 등지에서 남쪽으로 향해 있던 전투기 10여 대를 동해안으로 이동배치했다”고 한다. 평양 등지에서 동해안으로 이동배치된 전투기들이 바로 미그-29다. <사진 3>

 

▲ <사진 3> 위쪽 사진은 2016년 9월에 진행된 원산국제친선항공축전에 참가한 미그-29 전투기를 촬영한 것이고, 아래쪽 사진은 미그-29가 주기되어 있는 평안남도 순천비행장을 상업위성이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에는 지붕에 나무를 심어놓은 격납고들이 보이는데, 긴급대응출격준비를 마친 미그-29 2대가 격납고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동해 상공을 북상하여 야간작전연습을 진행한 때로부터 약 48시간이 지난 뒤,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미그-29 전투기 10여 대를 동해안에 있는 비행장에 이동배치시켰다. 미그-29 요격편대가 출격하면, 미국 공군 공습편대를 상대할 수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이런 사정을 미리 간파한 미국태평양공군사령부는 이번에 공습편대를 동해 상공으로 출동시킬 때, 미국 제5공군 F-15C 편대와 조선인민군 항공군 미그-29 편대가 공중전을 벌일 가능성을 예견하였고, 그에 따라 F-15C가 공중전에서 격추될 사태에 대비하여 전투기에서 비상탈출하여 낙하산을 타고 바다에 떨어진 전투비행사를 구조할 HH-60 탐색구조헬기를 함께 출동시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동해 상공을 북상해서 약 2시간 동안이나 야간작전을 연습하였는데도,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미그-29 요격편대를 출격시키지 않았다. 일반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방공망을 구축해놓았다는 조선인민군 반항공군이 동해 상공에서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약 두 시간 동안 야간작전을 연습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2017년 9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빈센트 브룩스(Vincent K. Brooks) 주한미국군사령관은 국회 정보위원장 이철우 의원에게 “북한의 반응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원산에서 동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동해 상공 작전구역에서 야간작전연습을 벌였는데도 조선인민군 방공망이 잠잠하자, 미국 공군 공습편대는 약 150km를 더 북상하였다. 이것은 동해안 일대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반항공군의 지대공미사일 사정권 안으로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깊숙이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참 이상하게 조선인민군 반항공군 지대공미사일기지들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잠잠했다. 여기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방공레이더가 가동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함경남도 해안 일대에 있는 지대공미사일기지들에서 방공레이더가 가동되면, 거기서 120~130km 떨어진 동해 상공까지 접근한 미국 공군 공습편대는 지대공미사일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알 수 없으므로 3km 고도로 급강하하는 회피기동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방공레이더가 가동되지 않았으므로 미국 공군 공습편대는 회피기동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지대공미사일기지들이 왜 그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한 한국과 일본의 언론매체들은 조선인민군이 야간에는 방공레이더를 꺼놓는다느니, 전기가 부족하여 방공레이더를 제대로 가동하지 못했다느니, 미국 공군 공습편대의 출현에 겁을 먹고 대응하지 못했다느니 하는 말이 되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조선의 함경남도 해안에서 120~130km 떨어진 상공까지 접근하고 있었던 긴박한 상황에서 조선인민군 방공망은 왜 가동되지 않고 잠잠하였을까? 이 수수께끼 같은 물음에 해답을 찾으려면, 미국이 9.23야간작전연습을 왜 감행하였는가 하는 물음부터 해명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한국의 군사전문가들은 9.23야간작전연습의 목적이 조선을 공중무력시위로 위협하려는데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9.23야간작전연습은 조선을 위협하려는 군사행동이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 측면만 보면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측면을 간과하여 실체의 절반밖에 볼 수 없다. 간과할 수 없는 다른 측면은, 공습편대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기종이 9.23야간작전연습에 동원되지 않은 반면, 전혀 예상치 못한 기종들이 9.23야간작전연습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미국 공군 공습편대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기종은 F-16CJ/DJ다. 이 기종은 F-16 전투기를 ‘적방공망진압작전(SEAD)’에 적합하게 개조한 것인데, 미국 공군은 이 기종을 전자전기로 사용한다. 전자전기가 방해전파로 적의 방공망을 무력화시키지 않으면, 공습편대는 적의 지대공미사일 공격을 받게 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만일 공습편대에 F-16CJ/DJ가 포함되면, 그 공습편대의 작전이 실전연습이 아니라 실전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만일 그 기종이 포함되지 않으면 맥빠진 실전연습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9.23야간작전연습에 동원된 뜻밖의 기종은 MC-130 수송기와 E-3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다. MC-130 수송기와 E-3 공중조기경보기가 9.23야간작전연습에 각각 동원되었다는 중요한 정보는 <동아일보> 2017년 9월 25일 보도와 9월 29일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9.23야간작전연습에 F-15C 전투기와 HH-60 탐색구조헬기를 출격시킨 미국태평양공군사령부 산하 제5공군 제18비행단에 MC-130 수송기와 E-3 공중조기경보통제기가 각각 배치되어 있다. <사진 4>

 

▲ <사진 4> 맨위쪽 사진은 미국 공군 공습편대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전자전기로 개조된 F-16 전투기다. 가운데 사진은 이번 공습편대에 포함된 KC-130 수송기와 같은 기종이고, 맨아래쪽 사진은 이번 공습편대에 포함된 E-3 공중조기경보기와 같은 기종이다. 프로펠러식 비행기인 MC-130 수송기와 보잉 707 여객기를 개조한 E-3 공중조기경보기는 몸집이 비대하고 비행속도가 느려 지대공미사일의 표적이 될 수 있으므로 공습작전에는 나가지 않는데, 야간작전연습에 동원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프로펠러식 비행기인 MC-130 수송기나 보잉-707 여객기를 개조한 E-3 공중조기경보기는 몸집이 비대하고 비행속도가 느려 지대공미사일의 표적이 될 수 있으므로 공습작전에는 나가지 않는데, 왜 9.23야간작전연습에 동원되었을까?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함경남도 해안에서 120~130km 떨어진 동해 상공까지 접근하면, 조선인민군 반항공군의 지대공미사일 사거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므로, 지대공미사일기지에 격추될 위험이 커진다.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격추당하지 않으려면, 자기들의 접근비행이 공습이 아니라는 점을 조선인민군 반항공군에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MC-130 수송기가 공습편대에 포함된 까닭은, 그 공습편대의 접근비행이 공습이 아니라는 점을 조선인민군 반항공군에 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E-3 공중조기경보기는 적국의 미사일기지나 공군기지 등에서 발신되는 각종 전파를 포착, 식별하여 그 기지의 위치와 작전능력을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9.23야간작전연습의 목적은 공중조기경보기를 동원하여 조선인민군 방공레이더의 전파발신을 포착함으로써 지하기지 위치, 방공망 가동상태 및 작전능력, 방공레이더망이 포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 등을 파악하려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낚시바늘’에 걸려들지 않은 조선인민군 방공망

 

만일 조선인민군의 방공작전능력이 미국군에게 노출되면, 조선인민군은 미국군이 자기들의 방공망을 타격, 파괴할지 모르는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선이 미국의 직접적인 선제타격위험 속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9.23야간작전연습에서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조선인민군 방공레이더기지들은 지하화되었다. 그래서 미국 정찰위성이 그 위치를 찾아내기 힘들고, 가동능력이나 탐색범위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지상에 노출된 조선인민군 지대공미사일기지들을 촬영한 위성사진들이 인터넷에 나돌고 있지만, 그런 위성사진에 촬영된 지대공미사일기지들은 미국 정찰위성을 기만하기 위한 위장시설들이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방공레이더 화면을 촬영한 것이다. 화면에는 네 개의 비행체가 나타나 있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조선인민군 방공레이더기지들은 지하화되었다. 그래서 미국 정찰위성이 그 위치를 찾아내기 힘들고, 가동능력이나 탐색범위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지상에 노출된 조선인민군 지대공미사일기지들을 촬영한 위성사진들이 인터넷에 나돌고 있지만, 그런 위성사진들에 촬영된 지대공미사일기지들은 미국 정찰위성을 기만하기 위한 위장시설들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인민군 방공레이더기지의 실제 모습을 가장 실감나게 알려준 자료는 2008년 11월 조선인민군 군부대들과 군사시설들을 시찰하였던 미얀마 고위군사대표단이 2008년 11월 26일 조선인민군 방공레이더기지를 시찰한 소감을 서술한 보고서다. 원래 이 보고서는 미얀마군 내부보고서인데, 기밀유지에 허점이 생기는 바람에 인터넷에 유출되었다. 해당부분을 번역,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조선인민군 반항공군부대의 레이더체계는 전부 땅속에 건설되었는데, 지하기지 꼭대기에 두 개의 덮개가 있다. 그 덮개들에는 흙이 덮여 있고, 거기에 나무들을 심어 위장해놓았다. 전동장치로 그 덮개를 열고 닫는데, 덮개가 열리면 레이더가 지상으로 올라간다. 레이더를 사용한 뒤에 다시 땅속으로 내려 보내고 덮개를 닫으면, 덮개 위에서 자란 나무들로 위장된다. 그 레이더는 네 개의 지하시설과 연결되었다. 그 중에 한 지하시설에는 지대공미사일을 탑재한 발사대차들과 전투원들이 드나든다. 그리고 지대공미사일 네 발을 발사하는 발사대차 한 대와 미사일운반차량 두 대가 드나드는 지하시설 세 개가 더 있다. 이 지하시설들에는 각각 철문이 설치되었다. 미사일을 발사하려 할 때는 전동식 철문을 열고, 전동장치를 사용하여 발사대차를 밖으로 꺼낸다. 미사일을 쏘고 나면, 반격을 받지 않기 위해 전동식 철문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와 더불어, 지휘통제차량 한 대가 지하시설 안에 들어가 있다. 그 지휘통제차량은 레이더가 수신한 자료를 분석하고 미사일발사명령을 내린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미국 정찰위성은 철저하게 은폐, 위장된 조선인민군 방공레이더의 위치와 가동능력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미국태평양공군사령부는 이번에 E-3 공중조기경보기를 함경남도 동해안에 접근시켜 조선인민군 방공레이더의 위치와 가동능력을 탐지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E-C 공중조기경보기의 전자정찰이 B-1B 전략폭격기의 야간작전연습보다 더 중요하였다. B-1B 전략폭격기가 조선의 방공레이더를 지하에서 지상으로 불러내려는 ‘미끼’였다면, E-3 공중조기경보기는 그 ‘미끼’를 이용해 조선의 방공망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를 낚아채려는 ‘낚시바늘’이었던 셈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1986년 3월 미국의 리비아 공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미국은 리비아 근해에서 공습작전을 연습하는 중에 공중조기경보기를 동원하여 리비아군 방공망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한 뒤에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공습편대들이 리비아군 방공망을 파괴하였다.  

 

리비아군 방공망은 ‘낚시바늘’에 걸렸으나, 조선인민군 방공망은 ‘낚시바늘’에 걸려들지 않았다. 동해안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방공레이더기지들은 전파를 발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은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동해 상공에 출현하였을 때, E-3 공중조기경보기 한 대가 공습편대와 함께 북상하는 것을 포착함으로써 미국의 작전의도가 자기들의 방공망을 정찰하려는 데 있음을 일찌감치 간파하였고, 그에 따라 조선인민군 방공망은 전파를 발신하지 않고 자기 위치를 은폐하였다. 그래서 공습편대와 공중조기경보기를 동원하여 조선인민군 방공망을 탐지하려던 미국태평양공군사령부의 9.23야간작전연습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던 것이다. 

 

 

4. 베가의 승리에서 ‘번개’의 승리를 예감한다

  

9.23야간작전연습이 실패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2017년 9월 25일 당시 유엔총회에 참석 중이던 리용호 조선 외무상은 자신이 머물던 유엔플라자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발표문을 내놓았다. 그는 발표문에서 “미국이 선전포고를 한 이상 앞으로는 미국 전략폭격기들이 설사 우리 영공계선을 채 넘어서지 않는다고 해도 임의의 시각에 쏘아올려 떨굴 권리를 포함해서 모든 자위적 대응권리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만일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또 다시 조선 동해 상공으로 북상하면, 지대공미사일을 발사하여 격추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미국 공군 공습편대가 조선 동해 상공으로 또 다시 북상하면, 조선인민군은 그 공습편대를 격추할 수 있을까? 조선인민군이 동해 상공으로 북상하는 미국 공군 공습편대를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격추할 수 있는 유력한 공격수단은 장거리 지대공미사일이다. 

전 세계에서 사거리가 가장 긴 장거리 지대공미사일은 지난날 소련에서 개발되어 사용되었고, 지금도 러시아군이 성능을 향상시켜 계속 사용하는 S-200 지대공미사일이다. S-200이 세상에 출현한 때로부터 50년이 지났다. 그 동안 S-200의 우수한 작전성능이 실전에서 입증된 적은 딱 한 차례밖에 없지만, 미국 전투기들을 상대한 실전에서 미국 전투비행사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S-200이 자기의 작전성능을 과시한 실전은 1986년 3월 리비아군이 미국의 공습에 맞서 싸운 전투였다. 그 전투는 ‘초원의 불길(Fire on the Prairie)’이라는 작전명으로 미국 전쟁사에 기록되었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러시아군이 운용하고 있는 장거리지대공미사일 S-200이 발사되는 장면이다. 위쪽 사진은 이란의 언론보도사진에 나온 발사장면인데, 러시아가 이란에 수출한 제3세대 S-200 베가가 거대한 불줄기를 내뿜으며 날아오르는 장면이다. 그처럼 엄청난 추력을 내야 마하 4.0의 속도로 날아가 초음속 전투기를 격추할 수 있다. 아래쪽 사진은 S-200 베가의 상승비행 중에 보조로켓엔진을 가동하여 증폭분사하는 장면이다. 이 지대공미사일은 미국 전투기를 상대한 실전에서 위력을 발휘하여 미국 전투비행사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대통령과 아주 비슷한 정치성향을 가졌던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은 카다피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키고 친미정권을 세우려는 흉심을 품고, 1986년 3월 23일부터 26일까지 리비아 공습을 감행하였다. 

 

러시아 군사전문가 안드레이 포취타레브(Andrey Pochtarev)가 2001년 8월 29일 러시아 전문지 <붉은별(Red Star)>에 발표한 글 ‘베가의 초연(The Debut of Vega)’은 1986년 3월 리비아-미국 무력충돌에서 S-200 베가(Vega)가 발휘한 작전성능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자료다. 1980년대에 소련은 S-200 베가를 비롯한 자국산 무기를 리비아에 수출하였으며, 소련군 지휘관들과 무장장비기술자들 수 백 명을 리비아에 파견하여 리비아군의 군사지도를 맡아보게 하였다. ‘베가의 초연’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당시 리비아에 파견되어 리비아군 반항공군의 군사지도를 맡아보았던 소련 반항공군 제1부사령관이며 노력영웅인 예브게니 유라쏘브(Yevgeny Yurasov)의 회고담이 실렸다. 그 회고담 중에서 S-200 베가의 작전성능에 대해 서술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리비아군 반항공군은 지중해 해안선으로부터 약 300km에 이르는 수역의 상공을 S-200 베가로 방어하고 있었다. 1986년 3월 24일 오후 1시경 미국 해군 항공모함 3척에서 이륙한 각종 작전기 약 100대가 지중해 상공을 뒤덮었는데, 공중조기경보기와 전자전기가 가장 높은 고도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드디어 A-6E 전투기 2대가 리비아 해안으로 돌진했다. 그 전투기들이 해안선으로부터 약 115km 떨어진 상공에 접근하는 순간, 리비아군 반항공군은 S-200 베가 한 발을 발사하였다. 미국 전투기들은 그 미사일을 피하려고 비행고도를 4.5km에서 2.5km로 낮추며 황급히 회피기동을 하였으나, 리비아군 방공레이더 화면에는 전투기 한 대가 격추된 것을 보여주는 정황이 뚜렷이 표시되었다. 오후 3시경 리비아군 반항공군은 S-200 베가 한 발을 더 발사하여 75~100km 앞에서 날아드는 미국 전투기를 또 한 대 격추하였다.      

소련이 1967년에 실전배치한 제1세대 S-200 앙가라(Angara)의 사거리는 180km이고, 소련이 1970년 이후에 실전배치한 제2세대 S-200 베가(Vega)의 사거리는 240km이고, 제3세대 S-200 베가의 사거리는 300km다. 소련이 1976년에 실전배치한 제4세대 S-200 두브나(Dubna)의 사거리는 400km다. 위의 회고담에서 리비아군 반항공군이 미국 전투기를 격추한 지대공미사일은 사거리가 300km에 이르는 제3세대 S-200 베가였다. 

 

▲ <사진 7> 이 사진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S-200 베가를 살펴보는 장면이다. 조선은 1987년과 1988년에 S-200 베가 24발을 수입하여 4개 대대에 배치하였다. 1986년에 리비아군 반항공군이 S-200 베가로 미국 전투기들을 격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도 그 지대공미사일을 수입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사진 7>은 2017년 7월 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진행된 ‘대륙간탄도로케트시험발사 성공기념 음악무용종합공연’ 중에 공연무대에 설치된 초대형 배경화면에 비춰진 사진영상 190편 가운데 하나다. 그 사진영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S-200 베가를 살펴보는 장면이다. 조선은 1987년과 1988년에 S-200 베가를 소련에서 수입하여 4개 대대에 배치하였다. 그러므로 위의 사진은 1987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S-200 1개 대대마다 미사일이 6발씩 배치되므로, 당시 조선은 24발을 수입하였다. 1986년에 리비아군 반항공군이 S-200 베가를 발사하여 미국 전투기들을 격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에서도 그 지대공미사일을 수입한 것으로 생각된다.

 

▲ <사진 8> 이 사진은 2012년 4월 15일 태양절 100주년 열병식 중에 5축10륜 견인발사차량에 실려 등장한 번개-4 지대공미사일을 촬영한 것이다. 번개-4는 조선이 1987년에 수입한 S-200 베가와 겉모양이 같지만, 조선은 지난 30년 동안 성능개량을 거듭하여 작전성능이 크게 향상된 번개-4를 만들어냈다. 번개-4의 작전성능은 S-200 베가의 작전성능을 능가하는 S-200 두브나의 작전성능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S-200 두브나와 마찬가지로, 번개-4의 사거리는 400km이고, 요격고도는 40km이며, 400km 밖에서 날아가는 30평방센티미터 크기의 작은 비행체를 격추할 만큼 타격정밀도가 매우 높은 지대공미사일이다. 번개-4는 고폭탄두를 장착하면 지대공미사일로 쓸 수도 있고, 25킬로톤급 전술핵탄두를 장착하면 전자기파폭탄으로 쓸 수도 있다. 만일 미국 공군이 조선을 겨냥하여 야간작전연습을 또 다시 감행하면, 공습편대가 조선 동해안으로부터 400km 떨어진 동해 상공에 접근할 때, 번개-4가 날아갈 것이다. 번개-4가 미국 공군 공습편대를 격추하면, 조미핵대결이 종식될 수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사진 8>은 2012년 4월 15일 태양절 100주년 열병식 중에 5축10륜 견인차량에 실려 등장한 번개-4 지대공미사일의 모습이다. 번개-4는 조선이 1987년에 수입한 S-200 베가와 겉모양이 같지만, S-200 베가의 복제품이 아니다. 조선은 지난 30년 동안 성능개량을 거듭하여 작전성능이 크게 향상된 번개-4를 만들어냈다. 번개-4의 작전성능은 조선이 30년 전 수입한 S-200 베가의 작전성능을 능가하는 S-200 두브나의 작전성능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S-200 두브나와 마찬가지로, 번개-4의 사거리는 400km이고, 요격고도는 40km다. 번개-4는 400km 밖에서 날아가는 30㎠ 크기의 작은 비행체를 격추할 만큼 타격정밀도가 매우 높은 지대공미사일이다. S-200 두브나와 마찬가지로, 번개-4는 무게가 217kg인 고폭탄두를 장착할 수도 있고, 25킬로톤급 전술핵탄두도 장착할 수 있다. 번개-4는 원래 지대공미사일이지만, 고폭탄두를 전술핵탄두로 교체하면 전자기파(EMP)폭탄으로도 사용된다.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른 팔러씨(Foreign Ploicy)> 2013년 4월 1일부에 실린 분석기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반항공군은 번개-4를 40개 대대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번개-4는 1개 대대에 6발씩 배치되므로, 번개-4 240발이 실전배치된 것이다. 한국 정부 고위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 2012년 3월 7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은 지난 10년 동안 번개-4 보유량을 20배 증가시켰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2017년 10월 현재 조선인민군 반항공군에 실전배치된 번개-4는 300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F-15C의 비행속도는 마하 2.5인데, 번개-4의 비행속도는 마하 4.0이다. 그러므로 F-15C가 일단 번개-4 사정권 안에 걸려들면, 회피기동을 해도 번개처럼 날아오는 번개-4를 피할 수 없다. 

번개-4처럼 사거리가 긴 지대공미사일을 쏘려면, 유효거리가 긴 레이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장거리레이더가 없으면, 장거리지대공미사일을 쏠 수 없다. 

 

<연합뉴스> 2017년 3월 25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은 성능이 우수한 레이더 200여 대를 전국 각지에 촘촘히 배치하였다고 한다. 2015년 1월 31일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방영한 기록영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께서 적해상목표에 대한 군종타격훈련을 조직지도하시였다’에서 조선인민군 반항공군이 운용하는 P-35M 탐색레이더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효거리가 350km인 P-35M는 번개-4에 배속된 장거리탐색레이더다. 

번개-4를 발사하려면 탐색레이더만이 아니라 감시레이더와 사격통제레이더도 있어야 한다. 이 세 종류의 레이더가 서로 연동되면서 번개-4를 운용하는 것이다. 번개-4에 배속된 5N62 사격통제레이더의 유효거리는 400km이고, 번개-4에 배속된 5N69 감시레이더의 유효거리는 500km다. 

 

위에 열거한 성능지표들을 보면, 조선인민군 반항공군은 번개-4를 발사하여 미국 공군 공습편대를 격추할 수 있다. 하지만 번개-4를 발사하더라도, 지하방공망 위치가 미국 공군 공중조기경보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지하기지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차량견인식 방공레이더와 차량견인식 번개-4를 이동시킨 뒤에 발사할 것으로 예견된다. 조선인민군 반항공군은 9.23야간작전연습에서 은폐술로 대응하였지만, 만일 미국 공군이 그런 야간작전연습을 또 다시 감행하면 공습편대가 조선 동해안으로부터 400km 떨어진 동해 상공에 접근할 때 번개-4가 날아갈 것이다. 번개-4가 미국 공군 공습편대를 격추하면, 조미핵대결이 종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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