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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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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유엔사 유신의 과정
2. 유엔사 유신의 목적
1) 위기관리권으로 전작권환수 뒤집기
2) 전시 다국적 사령부 만들기
3) 일본 평화헌법 흔들기
4) 중국압박하기
5) 평화협정 차단하기
6) 북한점령권
3. 유엔사 유신, 실패의 길
1) 유엔 없는 유엔사
2) 미국 책임
4. 나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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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는 2019년 4월 18일, 2014년부터 시작된 유엔사의 ‘revitalization’이 2018년 완료되었다고 공표했다. 유엔사는 ‘revitalization’을 ‘재활성화’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글에 인용된 숀 크리머 대령의 논문에서는 한국군이 이 단어를 ‘유신’으로 이해하는 경향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우려가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고 보기에 나는 낡은 잔재를 새로운 것처럼 분식했다는 점에서 ‘유신’이란 번역에 동의한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그렇고 그를 계승한 박정희의 유신이 현재 유엔사의 행태와 가장 유사하기 때문이다. 유신이 원래의 의미와 달리 역사적 반동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점에서 유신쿠데타로 비유했다.
이 글은 1장 유엔사 유신의 과정, 2장 유엔사 유신의 목적, 3장 유엔사 유신 실패의 길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유엔사 유신의 과정’은 최근 자료를 통해 사실 확인에 집중했다. ‘2장 유엔사 유신의 목적’에서는 유엔사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미국이 목적하는 바를 추론한다. ‘3장 실패의 길’에서는 유엔사 유신반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국제법적 근거를 제시한다. ‘4장 나는 주장한다’에서는 유엔사 해체의 단계적 현실적 방법에 대해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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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유엔사 유신의 목적
1) 위기관리권으로 전작권 환수 뒤집기
전작권 논란에서 위기관리권은 사실 시작이자 끝이다. 연합사는 형식적으로는 한미 간에 평등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기조치에서부터 전시로 가는 과정을 지배하는 측이 전시작전권을 지배한다. 위기시관할권은 군사+정치결정구조를 갖는다.(주30) 백악관에서 정치인과 군인들이 함께 결정한다. 그러나 정치와 군사 중 당연히 정치가 우위이다. 전시관할권은 오직 군사적 결정구조만이 작동한다. 따라서 전쟁으로 갈지 말지는 위기단계에서 거의 결정되는 셈이다. 정전 후 한반도에서 전작권이 문제가 된 모든 사례는 위기였지, 전쟁이 아니었다. 푸에블로호 사건, EC-121기 사건, 판문점 미루나무사건 모두 위기절차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사건에 대한 백악관 회의록은 위기조치를 결정하고 당사국에 통보하는 과정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유엔사유신에서는 위기관리권을 양대 목표 중 하나로 명시하고 있다.
“유엔군사령부재건의 주요목적은 위기와 적극적 적대행위가 재개되는 동안 사령부의 능력을 보다 잘 활용하는 것이다.”(주31)
‘적극적 적대행위가 재개되는 동안’이란 전시를 말한다. 즉 유엔사를 위기시와 전시에 활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전투사령부로 재건하겠다는 것이다. 2006년 전작권전환 합의시 유엔사는 예하에 병력이나 부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전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병력이나 부대는 연합사를 통하여 제공받고 있었다. 이것은 미 합참에서 유엔군사령관에게 지시한 ‘유엔군사령관을 위한 관련약정’(1983.1.19)에 근거한 것이다. 약정에는 “연합군사령관은 유엔군사령관의 정전업무 관련 지시를 따르고 상대측의 정전위반에 대한 대응으로 필요시 전투부대를 제공하는 등 유엔군사령관을 지원할 것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연합사가 해체되면 자연히 유엔사는 정전관리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병력이나 부대를 제공받을 길이 없어지기 때문에 별도의 대책이 강구되지 않는 한 임무수행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버웰 벨(Burwell Bell)전 유엔군사령관은 2007년 1월 18일 외신기자클럽 기자회견에서 “연합사 해체 시 전작권 반환에 따라 유엔사의 군사권한과 책임의 부조화를 야기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벨 사령관의 기자회견 내용을 요약하면, 연합사의 해체와 한국군이 독자적인 군사령부를 가지게 되는 전작권 전환은 유엔군사령부의 군사권한과 책임에 있어 부조화를 야기시킬 것이다. 연합사 해체시 유엔군사령관은 연합사령관이 보유하고 있는 DMZ와 다른 지역에 배치된 한국전투부대에 대한 즉시적인 접근권한이 없게 되고,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정전을 신뢰할 만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며, 전시와 같이 평시에도 조직을 구성하지 않으면 위기가 고조될 때 지휘구조를 변경할 시간이 없다. 그러므로 연합사가 해체되면 조직을 정비하여 정전에서 위기가 고조되어 전시로 전환될 시 유엔사 지휘관계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벨사령관은 정전유지책임에 대해 재검토를 제기하였다.(주32)
그런데 3개월 뒤인 2007년 4월,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은 미 상원 청문회에서 한국군에 대한 전작권 전환 이후, ‘정전관련 권한과 책임을 한국에게 전환 또는 위임’하는 동시에, 유엔사가 침략억제와 한반도 전쟁 발발시 전투작전을 지원토록 보장하겠다고 밝혔다.(주33) 당시 벨은 유엔사전시조직화에 방점을 찍은 나머지 정전시 위기관리권의 가치를 소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이 정전관련 업무를 한국군에 넘길 생각도 했다는 것이다. 즉 연합사에 더해 유엔사일부기능의 해체까지 갈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협의의 정전업무는 군대행정업무처럼 보이고 전투에 비해 꼬리나 깃털로 보인다. 그러나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오래지 않아 깨달은 듯하다. 유엔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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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김영식 신부
현대사의 고비마다 거리의 미사를 통해 민중들의 갈 길을 앞서 걸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돌이킬 수 없는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매주 월요일 미대사관 앞 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 미사를 거행한다. 첫 미사는 15일 오후7시다. 특히 오는 8월12일엔 1989년 여름 사제단이 문규현 신부를 평양에 파견해 당시 ‘임수경 학생’과 함께 분단선을 넘어온지 30돌을 맞아 대규모 미사를 계획 중이다. 광화문을 시작으로 전국 교구별 순회 미사를 봉헌하겠다는 사제단 대표 김영식(60) 신부를 만나 거리로 나선 이유를 들었다.
“지난 6월30일 김정은 북 국방위원장과 트럼프 미 대통령이 아무런 경호 조치 없이,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 사상 최초로 북한 땅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 만남은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종착지에 이르러야한다. 문재인 정권 5년의 소명은 어떤 정파나 당략에 의해 더 훼손될 수 없는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우리의 뜻을 모아 문재인 정부에 격려와 채찍을 하며, 미국엔 우리의 강력한 의지를 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사제단은 찢기고 짓밟힌 약자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해온 전력 때문에 ‘거리의 사제’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들도 각기 본당에서 책임을 맡고있는 사제들이다. 따라서 사제단도 거리 미사에 나설 때는 교회 안팎의 비난조차도 감내할 각오를 하지않으면 안된다. 사제단이 처음부터 교회 밖 거리로 나선 것은 아니다.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와 서울대교구 김수환 추기경이 나설 때는 대부분의 활동이 성당 안에서 이뤄졌다.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로 불렸다. 그러나 점차 명동성당이 약자들을 외면하면서 약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교회 내 공간이 사라지자 거리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사제단은 노무현 전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이던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드러난 불평등한 한미조약인 소파협정 개정을 요구하면서 한겨울 광화문광장에서 노숙교회를 열었고, 이를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목회자정의평회협의회가 이어가면서 촛불광장의 서막을 열었다.
이처럼 사제들이 거리미사를 봉헌하자 주교 가운데는 ‘지붕이 없는 곳에서 미사를 봉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가톨릭 교회 내 상황이 한결 나아졌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북한을 방문할 뜻을 밝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어서 요즘은 교우들만이 아니라 주교회의에서도 내놓고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게 김 신부의 해석이다. 따라서 교회 안 평화미사도 얼마든지 가능해졌지만, 다시 거리로 나서는 이유를 김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21세기 한복판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운명을 우리 마음대로 못하니,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안방의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창호지 숭숭 뚫려 찬바람이 들이치는 곳이 아닌가. 우리가 놓인 현실이 얼마나 척박하고, 강대국들에 의해 잘못될 수 있을만큼 백척간두에 서있는지 알리는데는 거리 미사가 적절하다.”
실제 사제단도 남북교류가 외부 여건에 의해 얼마나 좌우되는지 경험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남북 교류가 한창 진행될 때 평양과 개성, 금강산을 다녀왔다는 그는 “지난 10월 남북 가톨릭 대표단이 중국 심양에서 만나 북의 조선가톨릭교회협회 창립과 장충성당 설립 30돌을 맞는 올해 남북 가톨릭 공동 정기총회를 복원하고, 하반기엔 남쪽 가톨릭 대표단이 평양 장충성당에서 미사도 봉헌하고 백두산도 방문하기로 합의했었는데, 지난 3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돼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남북 가톨릭 간에도 교류에 차질을 빚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신부는 30살에 늦깍이로 신학교에 들어갔다. 엄혹한 시절에도 권력에 굴하지않고 저항하는 사제들을 보며 ‘일당 백의 삶이 여기에 있구나’란 생각으로 사제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경북 안동교구 소속인 그는 안동시내 태화동성당 주임을 맡고 있다. 태화동성당은 한 프랑스인 신부가 복권을 샀다가 당첨된 돈 전액을 초대 안동교구장인 두봉주교 서임 25돌 기념으로 쾌척해 세워진 곳이다. 김 신부는 “평화라는 열매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시일반의 나눔의 결실로 얻어지는 것이라는게 성서의 가르침”이라며 “우리의 평화를 남에게만 맡겨두지않고 사제들뿐 아니라 교우와 국민들까지 우리의 온 마음을 함께 모을때 한반도 평화정착이 로또처럼 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열혈사제’보다는 ‘낭만 사제’다운 그는 <아우라지 술집>이란 이동순의 시를 들려주며 ‘남북민이 함께할 그 날’을 꿈꾸게 했다.
‘사발 그릇 깨어지면 두셋 쪽이 나지만/삼팔선 깨어지면 한 덩이로 뭉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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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민족주의인가(5)
- 박기민 4.27시대연구원 연구위원
- 승인 2019.07.13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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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구 민족주의의 침략 제국주의로의 전개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서구 진영에서 발생한 침략민족주의(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변질형태)와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제3세계 저항민족주의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부르주아 민족주의 유형으로서 침략민족주의는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발생하여 그 전개방식에서 일정한 변화를 수반하면서 오늘까지 존속하고 있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형태입니다. 침략민족주의의 본질은 대체적으로 백인우월주의, 인종주의, 서구중심주의, 기독교중심주의, 민족 배타주의로 나타납니다. 침략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자본가들의 경제적 이득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오리엔탈리즘 입장에서 동양, 혹은 제3세계 피식민지를 정치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 문화적으로 정신과 의식을 식민지화하며 그들의 물리력으로 자국민과 제3세계 민족을 차별화시킵니다.
침략민족주의는 지국 내에서 민족주의(대국주의)를 선전하여 이런 이념을 통치의 명분으로 내세움으로써 그 기능면에서 두 가지 작용을 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자민족의 역사신화와 영광 만들기 작업, 조국의 위대성 선전으로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합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민족주의를 체제유지, 권력유지를 위한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국내 노자와 자본가간의 적대적 모순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활용합니다.
그 전형적 사례로는 팍스-브리타니아(대영제국), 팍스-아메리카, 1930년대 독일,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 등이 민족주의 선전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 민족주의 열광은 프랑스 혁명기로서,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던 시기(1803-1815)가 되겠으며 유럽에서는 프로이센에서 피히테의 애국심의 분발 호소를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시 독일은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부르봉왕조의 프랑스, 엘리자베스왕조의 영국보다 뒤떨어진 공후국과 도시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국가와 개신교지지 국가들 사이에 일어난 30년 종교전쟁으로 황폐화는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에게 정복되어 굴욕을 당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때 프러시아귀족들은 프레데릭 왕의 궁정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프랑스관리들의 모욕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히테는 공격적인 민족감정을 독일국민에게 고취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비스마르크시대에 와서 프러시아 민족주의가 독일민족주의로 정립되었을 때, 이런 독일 민족주의는 이웃나라들에 대한 침략적 복수감정으로 부국강병 기치를 내걸고 독일 게르만 민족이란 이름 아래 제1,2차 제국주의 식민지 영토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러한 독일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와 문화 후진성을 극복하자 팽창주의 길에 들어서며 침략민족주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빌헬름 2세 때 독일 민족주의는 범게르만주의를 선전했습니다. 범게르만주의는 게르만 민족의 범민족 통합을 제창하면서 독일에 의한 유럽제패, 세계제패를 지향한 야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침략민족주의의 대내적 기능인 체제 유지는 민족주의 상징 조작을 통해 국민 에너지를 체제 유지의 방향으로 몰아갔습니다.
권력구조와 결합된 체제유지 이데올로기로 전화된 민족주의는 부르주아 지배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의 민족 감정을 배타, 침략주의로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유럽민족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모순에 의해 파생되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습니다. 유럽 자본가집단은 민중의 지반을 잃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조국의 번영, 민족의 영광 같은 관념에서 심리적 충족감을 얻도록 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는 정치수단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였습니다. 이같이 강대국 침략민족주의는 민족국가들 간의 경쟁과 자국의 국익추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자본가와 지배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역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런 서구의 침략민족주의는 자민족의 우월감을 고취하고 다른 민족에 대한 증오를 설교하는 인종 우월주의 관념에 뿌리는 두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서구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익을 민족적 이익이라고 선전하며 민족 이익이라는 간판 아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제 민족에 대한 침략과 약탈을 자행한 것입니다.
이런 인종적 민족우월주의의 최초의 사례는 영국의 팍스-브리타니아주의에서 나타났습니다. 영국인들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모방 계승하여 자신을 현세의 이스라엘인이라고 자처했고 앵글로색슨 족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라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선조가 해적이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영국 앵글로색슨 족은 약탈을 우월민족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인종 우월주의는 미국인들에게 그대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광신적 배타주의의 최초 사례는 프랑스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에서 민족주의는 쇼비니즘으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나폴레옹 군대의 병졸이었던 쇼빈이 프랑스의 대외침략을 광신적으로 제창한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쇼비니즘이란 용어는 프랑스 민족주의가 배타적애국주의, 광신적 배외주의, 국수주의적 민족이기주의로 변질된 양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유럽 민족주의의 자기 전개 과정의 다음 단계에서는 서구 민족주의가 침략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더욱 약탈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갔습니다. 개별국가의 성향으로 나타났던 인종 우월주의, 광신적 배타주의, 대국적 팽창주의, 침략전쟁주의는 서양에서 침략민족주의의 일반 속성으로 굳어지면서 유럽 내부에서 모순과 대립, 갈등이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식민지의 분할, 재분할이 강화되면서 침략민족주의는 식민지약탈과 지배의 정당화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법은 구미사회에서만 적용되는 것이지 비유럽지역에서는 적용되지 않아도 된다는 관념을 생겼습니다. 서구진영은 비유럽지역에서는 유럽적인 법 관념에 구애되지 않고 무력을 행사하여 식민지지배를 실행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침략민족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제국주의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는 무인지역에 대한 선점권을 행사하듯 침략을 자행했고 북아프리카 및 아시아에서는 무제한적 침략전쟁을 벌렸습니다. 이렇듯 침략민족주의는 식민지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우월민족에 주어진 천부의 권리로 인정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침략의 권리와 사명을 ‘메니페스트 데스티니’라 불렀습니다.(박성옥, 신민족주의론, 살림터,1997, 236쪽 참조) 메니페스트 데스티니는 미국이 원한다면 미국인은 대륙과 세계의 어떤 지역도 병합할 사명을 가졌다는 침략적 미국 민족주의의 논리입니다. 침략민족주의가 인류의 역사발전에 역기능한 최대의 과오는 침략민족주의가 파시즘과 결합된 때였습니다. 파시즘은 민족 또는 민족국가의 막중함을 명분으로 내세워 인간의 기본권과 모든 민주주의적 요소를 흔적도 없이 말살하였습니다. 파시즘의 시조인 무쏘리니가 ‘이탈리아 민족은 민족을 구성하는 분리된 개인이나 개인의 집단들에 우월하는 목적의식적 생활수단을 가진 하나의 유기체이다.’라고 선포했을 때 세계는 독재자의 광신적 미신을 보았고 민족주의가 파시즘으로 변질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파시즘은 광신적 애국주의를 인종주의와 결합시켜 자기의 대외침략과 세계제패의 야욕을 정당화하였습니다. 히틀러의 파시즘은 아리아족의 피의 순결성을 이어 받은 독일민족만이 세계를 통치할 사명을 지녔다 하며, 일본 군국주의는 천황제와 우월적 야마도 민족이 아시아를 통치할 팔굉일우*의 사명을 지녔다고 선전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반인류적 범죄를 민족주의 명분을 빌어 정당화했습니다.
* 팔굉일우(八紘一宇, 일본어: 八紘一宇 핫코이치우) :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접어든 일본 제국이 세계 정복을 위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로,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편집자 주)
제2차 제국주의 전쟁에서 파시즘의 패망은 파시즘적 민족주의의 종말과 함께 침략민족주의는, 뒤에 거론할 탈민족주의(초민족주의, 코스모폴리터니즘) 즉 세계주의, 국제주의,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라는 역사적 변형을 가져왔습니다.
오늘날 침략민족주의는 타민족나 구식민지에 대해서 영토적 지배 형태를 취하지는 않지만, 경제 정치적으로 예속시켜 자국 자본가의 수탈과 착취한 용이한 제도를 구식민지에 이식시켜 간접 지배하는 신식민지 내용을 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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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8월 16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의 당시 명칭)에서 석방된 항일운동가들이 환영인파 속에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 |
2. 저항민족주의
저항민족주의는 제3세계 식민지 해방민족주의, 피압박민족의 민족주의로 서구 열강의 침략민족주의에 의해 세계가 분할 지배되자 민족해방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개념입니다. 19세기 중반, 20세기 초반에 세계정치사에서 일련의 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세계는 종주국과 식민지(반식민지), 선진국과 후진국, 열강과 약소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런 정세에서 식민지, 후진국, 약소국으로 전락한 나라들 경우 민족생존이 위협당하게 되었습니다. 제국주의에 의한 지배와 침탈로 민족자주권의 박탈, 민족경제 파탄, 민족문화가 파괴되었습니다.
저항민족주의는 제3세계 식민지 민족 운명공동체가 자주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민족해방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식민지에서의 저항민족주의의 기본특성은 식민지 침탈과 종속으로부터의 민족해방을 실현하고 민족의 자주적 발전을 보장하기 위한 민족적 저항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입니다. 식민지 지역의 민족주의가 아랍민족주의나 아시아민족주의 혹은 중남미민족주의 등으로 지역적 특성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같은 유형의 민족주의로 분류된다 하겠습니다. 그 까닭은 영미서구 제국주의 지배로부터의 민족해방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입니다. 저항민족주의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주의 후진국, 약소국들이 서방 강대국들의 상품시장, 원료공급지, 노동력공급지로서의 식민지로 전락되는 19세기에서부터 세계적 저항운동의 흐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 배경에서 출범한 사조이기 때문에 제3세계 민족주의는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을 지향합니다.
식민 지배에 대한 민족 저항은 저항민족주의가 형성되는 역사적 바탕을 이루지만 그 속에서 민족주의가 정립되는 양상은 민족적,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나 중국과 같이 민족형성과 민족국가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는 민족적 저항이 시작됨과 동시에 이념으로서 저항민족주의 담론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렇듯 민족 저항은 역사 진보의 과정이었고 저항민족주의는 그 역사적 진보과정의 필연적 소산이었습니다. 민족적 저항이 민족생명의 자기 보존, 자주독립의 확보라는 목표하에 진행되고 사회의 기본세력인 농민과 함께 수공업자, 나라를 잃은 군인, 봉건지배세력까지를 포함한 여러 계층이 참가하였던 초기 저항민족주의에서는 민족보존과 국가수호, 국체수호 사상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1919년 조선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중국 5.4운동이 일어나는 등, 저항민족주의의 내외적 조건은 크게 변하였습니다. 민족해방투쟁의 강화로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가 뒤흔들리게 된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 저변에는 식민지와 제국주의 간 모순이 첨예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 민족전체를 수탈 대상으로 감행된 제국주의 침탈은 민족의 처지를 고통스럽게 하였으며, 그 부담은 노동자 농민 최하층민중이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광범한 민중이 저항에 참여하였고, 그것은 저항의 주체역량을 강화시켰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기점으로 민족주의적 저항에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담론이 흘러들면서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은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식민지 노동자의 계급해방은 민족해방을 전제로 하는 만큼 사회주의운동이 민족해방운동과 결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20세기의 민족주의 전개과정의 외적조건에서 나타난 변화의 중요한 측면은 식민지지배의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제국주의 지배방식에서 변화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지배방식에서의 변화는 우선 종전과 같은 폭력탄압 일변도에서 기만적 양보를 결합한 정책으로 이행한 것입니다.
식민지지배자는 식민지 민족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듯한 양보를 취하면서 회유 정책을 쓰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식민지에 자치와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기만정책이었습니다.
그것은 영국이 인도에,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대하여 식민지 총독 밑에 자치의회를 설치한 정책, 프랑스가 알제리에 실시한 본국의회에 식민지의원을 참여시키는 정책 등이 있습니다. 미국은 한술 더 떠서 윌슨주의를 통해 민족자결주의가 식민지에도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라고 선전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민족해방운동의 약체화를 겨냥한 제국주의정책입니다.
지배방식에서의 변화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방식인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분할통치방식을 지능적 정책으로 실시한 것이었습니다. 민족 내부를 분열시키기 위해 식민지 지배세력과 결탁을 강화하고 지식층을 식민지 제도 속에 편입시키며 토착자본을 매판 세력으로 육성하는 정책이 실시되었습니다.
외래자본 침탈의 안내자, 협조자로서 육성된 매판세력(식민지 부역 지배블럭- 한국의 친일 친미파)으로 하여금 민족주의의 슬로건을 내걸고 제국주의와 타협하도록 만든 것은 식민지통치자들에게는 ‘손 안대고 코푸는’ 식민지 통치술이었습니다. 또한 제국 식민주의자들은 민족사회의 내부를 이념적으로 분열시키기 위해 반공이념으로 민족 저항운동을 분열시켰습니다.
이상과 같이 20세기의 저항민족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일어난 내외 조건의 변화상황은 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를 뜻하는 동시에 저항민족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의 새로운 도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매판자본을 중심으로 편성된 제국주의 부역세력이 제국주의 앞에 굴복하며 결탁, 협조하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면 제국주의 타협세력은 개량적 방법으로 민족독립과 발전을 도모한다는 반민중적 입장으로 전락하여 민족개량주의사조가 대두하였습니다. 민족개량주의의 본질적 성격은 겉으로는 민족독립을 표방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식민지통치하에서의 자치권을 내세워 민족적 저항의 청산을 꾀하고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반민족적 조류였습니다. 상해 임정의 안창호와 이광수의 경우를 보더라도, 민족개량주의는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을 얻어 보려는 사대주의로서 제국주의 반공정책에 동조하여 민족저항운동을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밀어 넣는 민족운동의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민족개량주의같은 제국주의 타협세력은 중국 국민당 우파의 사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중국 매판 자본가 이익을 대변하는 국민당 우파세력은 1927년 장개석으로 하여금 반공쿠데타를 감행케 하여 중국혁명에서 반제 노선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와 타협하면서 통일중국건설이라는 국공합작을 파괴하고 중국을 민족의 내전으로 전화시켰습니다.
피압박민족의 민족적 역량은 제2차세계대전 시기에 와서 반파쇼전쟁에서 연합국 측이 승리를 획득하는데서 큰 역할을 할 만큼 커다란 성장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2차 대전은 민족해방운동발전에서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45년 전쟁종결 후 민족해방운동의 획기적 발전은 그것이 세계적 범위로 확대된 데서 표출되었습니다. 동방아시아에 편재해 불타오르던 민족적 저항은 아랍동맹과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대륙에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습니다.
저항민족주의는 제2차세계대전후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로 발전하였습니다. 제3세계를 중심으로 등장한 자주적 민족주의 흐름은 민족주의의 새로운 발전적 형태를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면 자주민족주의의 성격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자주민족주의 성격은 선행한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전개되던 시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정치의 틀 속에서 규정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침략민족주의의 구식민지적체계가 붕괴되고 피압박민족들이 민족독립을 성취하여 제3세계를 이루는 신생국가군이 출현하면서 식민지 체제는 무너져 갔습니다. 이러한 세계사적 정치기류의 변화는 두 개의 중대한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지난날 지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였던 피압박민족, 피압박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자주 지향세력을 이룸으로써 자주화의 흐름이 세계사의 흐름을 결정하게 된 변화입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제3세계의 등장으로 인류공동체전체가 민족국가단위로 민족들이 생존 번영해 가는 시대에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민족국가건설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안은 자주민족주의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정치의 틀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은 민족주의운동의 주도세력도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민족주의의 성격변화에 영향을 끼친 요인입니다.
기존의 서구 민족주의는 봉건시대를 끝냈다는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그 발생시초부터 부르주아지가 주도한 민족주의였습니다. 서유럽 근대민족국가의 산파역을 맡아 수행했고 서유럽민족주의의 발단을 열어놓은 세력을 주도한 것이 서구 부르주아지 세력이었습니다. 부르주아는 그들의 이익에서 출발해서 민족주의를 제국주의 위장물로 변질시켰습니다. 저항민족주의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본격적 전개는 민족자본의 형성과 연결된 민족부르주아지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3세계 민족주의 시대에서는 부르주아지의 주도성이라는 역사적 한계성이 극복되어야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조건은 2차 대전 후 1960년대까지 제국주의 식민지체계가 무너지고 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세계 피압박민족들이 민족적 독립을 성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제3세계에서 제국주의의 실질적 지배와 수탈이 끝난 것은 아니었으나 형식적으로는 완료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민족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하였던 저항민족주의는 성취한 민족 독립을 공고화해 나가야 하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신생국가군이 자기의 후진성을 극복해야 할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안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신생국들이 식민지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바로 후진국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식민지 개화를 명목으로 자행된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는 식민지나라들의 사회발전 후진성을 새로운 경제 정치 예속된 형태로 더욱 세련되게 심화시켰습니다. 제국주의는 식민지에서 경제와 사회 각 분야의 후진적 제 관계를 온존시켰고 세계자본주의경제권에 편입시켜 경제 잉여를 수탈하였습니다. 이식된 식민지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착취의 영토였고 근대화를 실현하려는 민족적 지향은 억제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식민지에서 벗어난 신생국은 여전히 후진국의 처지에 신식민지로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독립한 피식민지 나라들은 미영 서구 제국주의 종속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실현하는 문제가 핵심적인 과제로 요구되었습니다.
또한, 신생국가들이 민족의 통합과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중대한 민족적 과제를 안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생국가는 대체로 구식민지 시대의 국경선을 따라 독립하였던 까닭에 때로는 종족, 부족까지 분리되는가 하면 역사적인 단일민족이 분리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인도의 경우, 제국주의 분할정책에 의해 종교적 기준으로 분리 독립되었고 언어, 종족, 종교, 풍속 등의 복잡한 구성을 그대로 안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일부 나라들에서는 민족국가를 기본으로 해서 종족, 부족으로부터 민족을 형성하고 민족국가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보다 복잡한 과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미국에 의해 인위적으로 민족이 분단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복잡한 민족문제들을 안게 된 신생국들은 민족의 보존, 통합 내지 통일 이라는 민족적과제를 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신생국가에서는 민족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의 대표세력이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었습니다. 1950년대까지 적지 않은 신생국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 전통 엘리트의 지배는 민중적 지도세력에 의한 정치지배로 바뀌어집니다. 즉 밑으로부터의 민중의 요구와 이익을 대변하는 민중적 지도세력에 의해서 탈종속의 과제, 민족 자주성을 구현하기 위한 과제의 해결이 제도화되는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생국 등장은 우로부터의 종속적 체제유지의 정치가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민중 변혁을 지향하는 정치로 모습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신생국가군의 자주적 발전을 침해하는 제국주의에 의한 새로운 종속의 위험이 국제적 환경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후 제국주의는 그 모습을 달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전후의 동서대결의 양극 구조 속에서 서방세계의 초 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자유수호란 명분으로 신생국을 미국의 국제질서에 편입, 종속시키기 위해 정치 간섭과 군사경제 원조정책으로 신생국들의 민족 자주권을 침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뿐 아니라 지난날의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서방 강대국과 일본도 자본의 자유화정책에 따라 과잉자본을 신생국 독립지역에 이동시켜 경제적 종속과 수탈을 감행하고 부등가교환에 의해 구 식민지 나라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강대국중심의 국제 경제질서를 재정립하게 됩니다. 즉 직접 지배방식이 아닌 간접지배방식을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1945년 이후 구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나라들의 경제수탈, 정치 경제종속은 1945년 이후 새로는 제국주의의 세련된 특징으로 됩니다. 낡은 식민지제국이 무너진 자리에서 경제 수탈의 검은 손을 움직이는 신식민주의가 다시 활개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생국가군은 탈바꿈한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반대하여 탈 종속을 위한 저항을 계속해야 했으며 새로운 종속의 위험으로부터 민족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신생국들의 반외세,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의 민족 저항은 또 하나의 역사적, 시대적과제로 부상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생국가들은 민족의 자주적 발전을 위한 국제 연대의 넓은 영역이 형성하게 됩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의 역사체험을 공유하고 있는 나라들은 국제 연대를 형성하였고 그 연대의 공통분모는 민족의 자주적 발전이었습니다. 이런 공통된 역사체험과 국가발전의 주객관적조건, 민족적과제로부터 정치, 경제, 문화의 각 영역에서 자주성에 기초한 연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하여 신생국들은 기존세계와는 다른 제3세계를 형성, 비동맹운동의 주되는 담당자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의 역사적 조건들은 그것 자체로서 저항민족주의가 기존 민족주의와 구별되는 새로운 수준, 새로운 유형의 민족주의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제3세계민족주의, 즉 저항민족주의는 민족국가가 세계의 보편적인 생활단위로 형성되고 민족과 민중이 역사창조의 주체로 등장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수렴하여 민족을 바로 인식하고 자주적으로 건설하려는 지향성에서 출발하는 민족주의로 정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민족과 민족국가의 자주적 발전, 민족사회의 자주자립적인 발전과 통합, 대소 민족국가가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자주적 민족주의라는 점입니다. 저항민족주의는 그 이념의 공정성과 제3세계의 연대적 집단력에 의해 세계의 자주적 발전에 기여하는 현대 민족주의의 기본흐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주된 흐름은 민족주의일반이 아니라 자주적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과 민중의 주체적 운동으로서의 저항민족주의인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저항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한 유형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3. 저항민족주의에 대한 미국의 대응
제2차 제국주의 전쟁(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전쟁으로 피폐화된 상황에서 미국은 세계 제1의 패권국으로 등장합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부정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주의 자체가 부정되었습니다. 민족주의가 부정된 자리에는 미국은 세계전략에서 이념으로서의 코스모폴리터니즘, 즉 세계주의를 내세웁니다.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의 저변에는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발톱이 숨겨져 있습니다. 세계주의는 약소민족에게 민족주의와 자주권을 말살시키고 약소민족의 대문을 열게 하여 유럽의 구식민지를 미국의 신식민지로 만들겠다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놓여 있습니다.
미국은 각 나라의 민족주의를 부정하고 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선전하며 부르주아 독재인 미국식 민주주의와 미국식 생활양식, 미국식 세계관을 퍼뜨렸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미국식 정치경제제도로 편입시키기 위하여 제3세계 나라들에게 교육, 종교, 언론 매체를 동원하여 이념 전파 기지로서의 상부구조 진지를 구축하여나갔습니다. 이것은 개별국가단위의 민족성이나 민족감정을 소거시키고 민족주의를 소멸시키려는 미국의 이념적 목표입니다.
미국의 후진국 문제 전문가들은 1945년 이후 독립한 민족의식이 강한 신생국 민중들이 사회주의의 길을 택한다는 것을 알고, 현재 조선(북한)과 이란, 시리아, 베네수엘라를 악마화하듯, 사회주의 진영인 소련과 중국을 악마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유대전쟁자본가들의 사상은 ‘전 인민 소유’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반공주의입니다.
미국은 지배계급 이념인 반공주의를 유포하기 위한 정치선전에 미 CIA(미국 중앙정보국)를 정치공작 선두에 세웁니다. 미 CIA는 포드 재단, 록펠러 재단, 뉴욕카네기 재단 등 수많은 재단과 랜드연구소 등을 통해 제3세계 민족주의를 파탄 내고자 반공주의 프로파간다를 수행했습니다. 미 CIA는 이런 우익 민간 재단들을 통해 노조, 청년단체, 대학, 출판사 등에서도 비밀첩보 활동을 전개하며 구좌파를 동원하면 정치선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과거 사회주의 활동을 했거나 반소, 반스탈린 입장으로 돌아선 사람에게 생활비, 직장, 연구소, 출판사 등 자금을 지원하며 사회주의 나라와 자주적 민족주의 나라에 대하여 문화(이념) 전쟁, 즉 문화 냉전을 수행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미 CIA 문화냉전의 포섭 대상은 과거 좌파 지식인, 유럽의 사민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들, 신좌파들이었습니다.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문화적 냉전 CIA와 지식인들』, 그린비, 옮긴이 유광태 · 임채원)
스탈린 사후, 반 스탈린 공세가 고조되었는데 미 CIA의 최종 목표는 스탈린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각종 수정주의를 유포시켜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 사회주의를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공격하며 세계의 민중들이 사회주의에 반감을 품게 하였습니다.
2차 제국주의 전쟁은 국가독점자본이 제국주의로 전화하는 파괴적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 유럽제국주의세력은 제2차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의 전쟁 책임을 히틀러 개인에게 전가시키며 제국주의 전쟁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미국 역시 히틀러와 파시즘 배후에 국가 독점자본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야 했기에 미국 유대자본은 <쉰들러 리스트>같은 영화를 만들어 전쟁 책임을 히틀러 개인에게 전가시키며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덮고자 하였습니다.
1945년 이후 자유주의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혔던 책은 2차 대전 중에 저술된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이었는데, 포퍼는 이 책에서 역사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였습니다. 그는 플라톤 정치 철학에는 전체주의가 내재되어 있다는 비판을 시작으로 플라톤에서 헤겔, 마르크스에 이르는 계보가 20세기 전체주의의 뿌리라면서 소련 사회주의를 전체주의로, 폐쇄 사회로 규정하고 열린사회를 지향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계보는 칼 포퍼 이전, 러시아 혁명기부터 있어왔던 입장으로, 카우츠키는 혁명 러시아를 국가자본주의라고 비판하였고 트로츠키 역시 『배반당한 혁명』 에서 스탈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동일한 현상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입니다(레온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역, 갈무리, 2018년). 이 책은 세계 최초 노동자국가인 소련이 혁명 이후 생산력 발전에서 무엇을 성취하였고 권력창출에서 어떻게 스탈린이 승리했으며 관료집단이 어떻게 지배계급이 되어가는가에 대해 소련 관료제를 비판하며 해부한 책입니다).
미국은 제3세계 민족주의를 반 서구주의로, 반제 반미주의, 사회주의로 가는 사상으로 규정지었습니다. 미국과 서구 진영은 제2차 대전 후 독립한 나라들의 자주적 민족주의는 미국과 서구의 이익을 유지하는데 장애로 판단하여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주의)를 퍼뜨렸는데, 이것은 개인주의, 위아주의*, 고립주의를 내세우는 반공주의의 부드러운 얼굴이라 하겠습니다.
* 위아주의 : 자기본위로 생각하는 사상, 열자 양주편에 나온다.(편집자 주)
이런 식으로 저항민족주의를 부정하던 미국은 제3세계진영이 비동맹회의를 만드는 등 저항민족주의를 표방하자 패권을 유지하기위하여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즈음 나온 1960대의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그런 미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증표가 된다하겠습니다.
미국 사회학자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 은 과학 기술 발전과 복지사회 등장으로 마르크스주의는 낡은 이론이며 정보 지식 탈산업사회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미래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소비에트 나라의 반인권 사태, 수정자본주의에 의한 복지국가 대두, 중산계급의 출현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벨의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저술되었습니다. 그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노자간의 대립이 첨예화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며 노동자들은 사회복지와 노사분쟁조정으로 개인에게 관심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은 1950년대 후반기에 나온 수렴이론(Convergency theory)으로서 립셋, 레이몽 아롱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수렴이론의 요지는 장차 사회는 이념보다 경제 기술적 요인이 중요하므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결국은 하나로 수렴된다는 것입니다. 탈산업사회는 과학지식, 전문기술을 소유한 테크노크라트 사회로서 이들 테크노크라트가 뷰로크라트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장차는 미국과 유럽뿐 아니라 소련, 중국에서도 이데올로기보다는 기술적 기능이 우선시되므로 이데올로기는 정당성이 상실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벨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발표하던 1960년대에는 이념과 민족주의라는 정념으로 세계가 불타던 항쟁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에 4.19의거, 6.3사태, 베트남 전쟁, 세계적 반미투쟁, 프랑스 1968.5월 항쟁, 일본의 전공투, 미국의 흑인운동 등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란 신생국 민족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 자본가들이 원하는 이데올로기의 재정립을 필요로 하는 미국의 곤경이 나타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에 맞추어 미국은 세계전략 속에서 ‘민족주의’를 다른 의미로 정립할 필요성을 가졌습니다. 미국에서 새로이 정립한 민족주의이데올로기는 신생국 민족주의의 반미적, 반식민주의적 지향성을 거세하고 서방의 이념을 주입하여 서구 근대화로 민족주의를 탈색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식민주의적 지배를 민족주의로 위장하여 정착시키기 위한 책략인 신식민주의 지배를 위한 허구적 민족주의였습니다. 미국은 제3세계의 민족해방 민족주의 경향을 미국의 이익에 매우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항민족주의를 방지하는 것이 미국의 지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목표였고, 미국은 서구 지향이 아닌 자주 지향의 민족주의를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미국은 저항민족주의에 대한 비난을 정당화하기 위해 저항민족주의를 배타적,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로 공격하고, 그것을 지난 시기의 독일나치즘이나 일본군국주의와 동일 계열로 체계, 범주화하는 이론적 왜곡을 하였습니다. 즉 조선(북한)이나 쿠바 시리아 이란 등의 저항민족주의는 봉건주의며 파시즘이라고 비난하며 그 나라의 진보적 의미를 부정해 버렸습니다.
반미, 반제 민족주의에 대한 미국의 적대감은 1982년 9월 리차드 워커 주한미국대사가 한국 민중의 자주적 민족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에서 나타났습니다. 워커는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과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태 등에 대하여 미국이 한국에 가한 침략 지배행위와 내정 간섭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1980년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반미주의를 광신적 국수주의, 외국인 혐오로 비난하며 자주적 민족주의 의식은 가진 한국 민중들을 모욕하였습니다. 미국은 자주적 민족주의를 비이성주의, 비합리적인 인간의 충동으로 선전하였는데, 이런 미국의 태도는 민족주의를 세계전략을 위한 도구로서 이용하려는 미국 대외 정책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21세기에 와서도 미국은 민족국가의 자주성을 유린하는 세계지배전략을 물리력으로 실현하여왔습니다. 미국의 21세기전략에서 주목되는 것은 세계제패를 위해 핵전략을 정책화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1970년대 초, 나토성원국들에 7,000여개, 태평양지역에 2,000여개의 핵무기를 배치하였습니다. 냉전이 종식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미국은 여전히 방대한 양의 핵무기를 사회주의권을 제외한 지역에 배치하고 있습니다.(월간조선, “지난 1월 3일 국제 통계조사기관 스태티스타(Statista)는 미국과학자협회(FAS) 자료를 인용해 전 세계 핵무기 보유량을 발표했다. 각국의 보유량은 러시아(6800개), 미국(6600개), 프랑스(300개), 중국(270개), 영국(215개), 파키스탄(140개), 인도(130개), 이스라엘(80개), 북한(20개) 순이었다.”고 보도했다. 2018.1.7기사)
미국의 21세기전략은 본질상 냉전시대의 핵전략을 그대로 유지하는 군사 패권전략을 바탕으로 한 달러패권 유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미국이 21세에도 여전히 자주를 지향하는 민족주의를 억압하고 핵전략으로 세계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맞서 우리는 우리의 민족주의 저항 담론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겠습니다.
( <마르크스 엥겔스 중기, 후기의 민족주의>는 다음 회에 올리겠습니다.)
박기민 4.27시대연구원 연구위원 webmaster@minplus.or.kr
icon관련기사icon마르크스, 엥겔스 초기의 민족문제 - 『독일 이데올로기』, 『공산당 선언』icon마르크스·엥겔스의 민족, 민족주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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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익 | 2019-07-12 10:5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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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에 대한 무역 규제로 한일 관계는 최악의 국면에 접어든 듯하다.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문제’ 등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번 사태는, 이 문제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 극우 세력의 지지와 ‘평화 헌법 개정’을 달성하려고 하는 아베 내각총리의 정치적 계산에서 발단되었다는 것은 거의 명확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이번 여름 한국 개봉을 앞두고 새삼 주목을 받고 있는 ‘위안부’ 관련 영화 『主戰場』. 이 글은,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 영화의 감독을 『世界』에서 인터뷰한 기사이다. 일본 개봉 후 쏟아진 관심에, 영화에서 감독과 인터뷰한 우익들이 감독을 고발하는 사태까지 발생한 영화. 감독은 어떤 시각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며,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평은 어떤 곳일까? - 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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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논쟁’에 공전의 대담함으로 도전하는 - 영화 『主戰場』
- 잘 오셨습니다, 논쟁의 ‘주전장’에 -
Miki Dezaki
1983년생. 미국 출생. 다큐멘터리 영상 작가. 일본계 미국인 2세. 미네소타 대학에서 의학을, 죠치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강제 연행은 없었다” “성노예는 아니다” “20만 명은 거짓이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결렬하게 대립하는 의견과 의견. 일본계 미국인 2세 미키 데자키 Miki Dezaki 감독(35세)에 의한 다큐멘터리 『주전장』은, 이러한 ‘論戰’ 그 자체를 가시화하여, 그것이 어떤 문맥으로, 어떤 구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마치 파노라마처럼 묘사해 낸다. 보는 사람은 이 ‘논전’을 추체험하게 된다. 지난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이래, ‘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던 작품으로 폭 넓은 층으로부터 “새롭다” “이색적이다”라고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납득이 간다. 4월 말부터 일본 공개가 시작되어, 여름에는 한국 공개 예정. 일본 공개 전에, 감독에게 영화 제작에 이르는 과정과 생각을 물었다.
‘역사 수정’에 대한 집념은 왜?
- 첫 영화 작품이라고 하는 데,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삼은 이유는 뭡니까?
최초 계기는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씨가 ‘위안부’ 문제 기사와 관련하여 이른바 ‘인터넷 우익’으로부터 비방 중상을 당하는 것을 안 것입니다. 저는 많은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20만 명의 여성들이 강제적으로 성노예를 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왜 일본과 한국에서 이것이 논쟁으로 되어 있는 것일까 의문으로 여겼던 거지요.
그래서 영화 모두에 제시했듯이, “왜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이렇게까지 역사의 사고방식을 바꾸려고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추구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위안부’ 문제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사실이 왜 말살되려고 하고 있는 것일까를 되묻는 과정을 밝힌 것입니다.
- 영화에서는, 크게 세 가지 쟁점 “20만 명” “강제 연행” “성노예”가 제시되고, 역사 수정주의자·부정론자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지향하는 연구자·활동가 등의 인터뷰가 속도감 있게 컷 분할되어 재구성되고 있었습니다. 마치 실제로 논쟁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는 서로 직접 만나서 논쟁하는 분들은 아니지요. 각각의 분들이 저를 설득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 논쟁은 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인터뷰 대상은, 일본·미국·한국의, 이 논쟁의 중심인물들 약 30명. 사쿠라이櫻井 요시코(저널리스트), 켄트 길버트Kent Sidney Gilber(캘리포니아 주 변호사/탤런트), 스기타 미오杉田水脈(자민당 의원), 가세 히데아키加瀬英明(일본의회) 등 역사 수정주의자·부정론자, 와타나베 미나渡邊美奈(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 윤미향(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필리스 킴(캘리포니아 코리안 미국인 협회) 등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활동가,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역사학), 나카노 고이치中野晃一(정치학), 아베 고우키阿部浩己(국제법학), 이나영(사회학) 등 연구자들입니다. 후반에는 의외의 인물도 등장합니다.
재미있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우파 인사들이 제가 만든 인종 차별을 다룬 You Tube 작품을 보고 있고, 저를 ‘反日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을 악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어요. 다만 이것은 우파로부터 인종 차별에 직면해 있는 재일 코리언이 아닌 저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에 대한 ‘질문’과 편집 과정
- 인터뷰를 하면서 어떤 점을 느꼈을까요?
인터뷰만이 아니라, 병행하여 수많은 뉴스 영상, 역사적 자료 등의 리서치를 거듭하며, 제 자신이 보도를 통해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반론할 것이 제 내면에 없었어요. 그런데요 감정은 요동하고, 괴로운 시간이었어요. 예를 들면, ‘성노예’를 둘러싼 부분에서는, 와타나베 미나 씨도 말하듯이, “상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법의 정의로 말한다”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성노예라고 하는 것은 국제법상에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거기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또, “20만 명”이라는 숫자를 둘러싼 논쟁 부분은 복잡했습니다. 이것은 양 진영이 각각의 문맥으로 이용해 온 경위가 있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제 자신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몇 번이나 ‘질문’을 들이대어, 검증하고 분석하며, 제작자들과 토론을 거듭해 갔습니다. 그리고 편집 단계에서 처음 확고한 무엇인가에 이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영화 제작 과정 가운데 편집 작업을 아주 좋아하지만, 이번은 혼자서 세 달에 걸쳐서 편집했어요. 이 영화를 보는 분들도, 잇달아 떠오르는 의문이나 ‘질문’을 소중히 여기며, 논전을 체험해 주셨으면 합니다.
- 아베 정권은 ‘한일 합의’로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하고, 매스미디어는 그 검증도 충분히 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한국 쪽에 원인이 있는 듯한 보도가 눈에 보입니다.
미디어에서 중요한 것은, 그 문제의 취급 방식, 말하자면 framing이나 관점입니다. 예를 들면, 각국에서 소녀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일본인은 분노한다거나 하지만, 그것은 문맥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인 거지요. 왜 만들어지고 있는가라고 하면, 일본 교과서에서 ‘위안부’ 문제가 지워지려고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응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 많은 일본인이 몇 번이나 사죄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상대에게는 반밖에 전달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자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전체 속의 문맥이 결락되어 있는 것이 문제예요. 이 점에서는, 일본·미국·한국의 매스컴도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쟁점을 캐내어, 쌍방의 의견을 확실히 듣고, 명확하게 비교하여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도록, 두 시간이나 되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포괄적으로 보이고 싶었습니다.
- ‘한일 합의’를 둘러싼 미국의 책임에 대해, 구조 속에서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점도 중요합니다.
제가 미국인인 것도 물론이지만, 처음부터 넣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안부’ 문제도 그렇고요, 다양한 국제 분쟁에 대해서도 미국의 영향력은 크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감독은 2007년부터 일본에서 영어 교사로 중학교·고등학교에서 5년간 가르치고 있던 무렵에, You Tube로 미국과 일본의 차별 문제를 주제로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 『일본에는 인종 차별이 있습니까?』는 약 89만 회의 시청이 이루어져서, 이른바 ‘인터넷 우익’으로부터 상당한 공격도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 작품을,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느꼈고, 그것은 『주전장』에 공통하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이 영화는 오락적인 요소라기보다, 교육 도구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큐멘터리가 교육에서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라는 것은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관람한 사람으로부터는 오락적 부분이 있고 스릴 있는 전개로 재미있다는 등을 이야기해 주시지만, 미국적인 다큐멘터리와 비교하면, 그 정도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미국인에게는 특히 전반은 느리다고 들었습니다. 내레이션은 직접 했는데요, 속도를 올릴 궁리도 했었고, 또 음악은 감정을 조작하지 않고, 관객을 refresh시키면서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성장과 의외의 경력
- 의사나 승려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개인사를 조금 들려주시지요.
저는 일본계 미국인 2세예요. 부모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70년대로, 아버지가 고급 요리사로 알래스카로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일본 외교관이었습니다. 저는 1983년 테네시 주에서 태어났고, 한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플로리타 주에서 살았는데, 미국 남동부에 있는 플로리다 주는 인종 차별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처음 일본에 온 것은, 2003년, 교환 유학생으로 히로시마 대학에 온 스무 살 때였어요. 1년간 체재했는데, 그때는 일본 문화와 자신의 뿌리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물론 원폭 자료관을 본 것은 커다란 충격으로, 미국의 사죄는 부족하고, 미국의 전쟁 범죄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 돌아가 의학부에 입학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는데, 의대에 입학해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명상을 권유받고, 시도하자마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명상을 통해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승려 수행을 하러 가려고 했는데, 어머니께서 한 번 일해 보고나서 생각하라는 말씀을 하셔서, 일본에서 교사를 하기로 했던 겁니다. 교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도 사실이었는데, 일본은 태국에 가까워서 승려 수행 조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 무렵 합기도 철학에 매료되었습니다. 공격이 아니라, 수비 무술이며, 거기에서 파생하는 평화와 조화라는 것에 홀렸습니다. 그 후 1년간, 태국에서 승려로 지냈고, 2015년에 다시 일본에 와서 죠치 대학 대학원에서 국제 관계학을 전공하고, 이윽고 영화를 찍기 시작하게 되었던 거지요. 이런저런 경험을 해 왔는데, 저의 일관된 생각은 “남의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 어떤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습니까?
우선 일본과 한국의 일반 분들에게 보이고 싶습니다. 이 영화가 한일 관계에 뭔가 도움을 준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만들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는 인터넷에 넘치고 있지만, 양의 문제가 아니라, 전문가의 정보가 확실히 전달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에는 역시 교육이 중요하지 않을까 새삼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 후, 대화가 가능하다면, 문제 해결을 위해 보다 건설적인 논의가 가능한 것은 아닐까 확신합니다.
- 영화 제작 과정에서, 일본 국내의 성폭력 피해 실태에 놀라서, 앞으로 성차별 문제에 몰두하고 싶다고 생각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다음 번 작품으로는 복수의 구상이 있습니다. 『주전장』에 대한 반응도 보면서 생각해 가겠습니다. 성차별 영상을 만드는 것 자체는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죠치 대학에서 ‘입장의 심리학’이라는 수업의 교육 조교를 하고 있었을 때, 다수의 특권이라는 수업 중에 학생으로부터 가장 저항이 컸던 것이 성차별 문제였어요. 어떤 관점에서 몰두하는가, 보다 나은 관점을 찾게 될까 어떨까가 열쇠입니다.
-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불가결한 주제이며, 많이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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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섭 기자 | 기사입력 2019/07/14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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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자 축구 일본꺽고 세계 대회 우승
조선 여자축구단이 세게대회를 재패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조선중앙통신은 13일 조선 여자축구단이 제30차 여름철 세계 대학생 체육 경기 대회(하계유니버시시아드)에서 제1위를 쟁취하였다고 밝혔다.
이로써 조선 여자 축구가 세계 축구의 강자임을 확인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탈리아에서 진행 되고 있는 제30차 여름철 세계 대학생 체육경기대회에서 조선 여자축구선수들이 제1위를 쟁취 하였다"고 보도했다.
중앙통신은 "지난 2일부터 12일까지(현지시간) 진행 된 이번 경기대회 여자축구 경기에는 조선과 중국, 로씨야, 브라질, 메히꼬를 비롯한 12개 나라와 지역의 대표단들이 참가하였다."고 전했다.
통신은 "조선 여자 축구 선수들은 조별 연맹전에서 카나다, 남아프리카 선수들을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이기고 준준결승 경기에서 이딸리아 대표를 4:1로,준결승 경기에서 아일랜드 선수단을 5:0으로 물리쳤다."고 전했다.
그리고 "12일(현지시간)에 진행 된 결승 경기에서 조선 대표 선수단은 일본을 2:1로 타승하였다"고 쾌거 소식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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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페미시국광장-시위는 당겨졌다. 시작은 조선일보' 집회 열려
분노한 여성들이 다시 모였다. 정확히 <조선일보>를 겨냥했다. 12일 저녁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조선일보사 건물 옆면에는 '폐간하라', '고 장자연 배우에게 사죄하라', '수사 외압 언론 적폐' 등의 대형 문구가 빛을 발했다.
350개 여성단체 연대체인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은 12일 서울시 동화면세점 앞에서 고 장자연 사건의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제1차 페미시국광장-시위는 당겨졌다. 시작은 조선일보'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10여 년 만에 이뤄진 검찰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고 장자연 사건 진상조사가 재수사 없이 종결된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고 장자연 사건은 2009년 3월, 배우였던 장자연 씨가 소속사 대표의 술자리 접대와 사회 유력인사들의 성접대 강요 등을 고발하는 문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다. 당시 사회 유력인사가 연루됐다는 의혹과 부실수사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특히 <조선일보>는 이 사건의 중심에 얽힌 것으로 추정돼 왔다. 장 씨가 당시 남긴 문건에 '(소속사 대표가) 2008년 9월 경 <조선일보> 방 사장이라는 사람과 룸싸롱 접대에 불러서 잠자리 요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남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여성들의 주장이다.
지난 3월,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진상조사가 시작됐고 지난 5월 20일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보고서는 수사가 미진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재수사를 권고하지는 않았다.
▲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사 건물 옆면에 '폐간하라'는 문구가 떴다. ⓒ프레시안(조성은)
이날 집회의 여는 발언을 맡은 박인숙 고 장자연사건 관련 법률지원단 변호사는 "당시 술 접대를 받고 잠자리를 요구한 유력인사들은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며 "유일하게 법원의 판단을 받은 것은 당시 기획사 대표 김 씨였으나 법원은 장자연 씨 폭행 사실만 인정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이어 "강요행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었음에도 문건 내용이 모호하다는 등의 이유만으로 불기소처분이 내려진 건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검찰이 2009년 당시 수사 문건에 등장하는 '<조선일보> 방 사장이라는 사람'이 정확히 누군지도 조사하지 않고, 당시 <스포츠조선> 사장 하 모 씨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불기소의 내용을 작성하기도 했다"며 "수사가 이뤄지지 않도록 은폐한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박 변호사는 이어 "심지어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이 경기처장 조 모 씨를 찾아 '우리는 정권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등 압력을 행사한 사실도 드러났다"며 조선일보사가 장자연 사건에 깊숙이 연루된 의혹이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박 변호사는 특히 "장자연 씨의 수첩과 다이어리 사본이 남지 않았"으며 "장 씨가 사용하던 분홍색 모토로라 휴대폰이 사라지는 등 의도적인 증거 은폐마저 의심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고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사건을 두고 "사회 특권층에서 일어난 이들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말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한 것을 언급하며 "우리는 우리나라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는) 사회 유력 인사들도 불법적이고 위법적인 행위를 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줘야 한다. 이런 사람을 비호하는 경찰 검찰들도 처벌 받는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12일 서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제1차 페미시국광장' 집회에 참여한 참석자가 작성한 요구안 ⓒ프레시안(조성은)
익명을 요구한 눈사람 씨는 "조선일보사가 10년 전에도 피했고 이번 재수사도 피했지만 언제까지고 영원히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라며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 잊지 않고 기억하고 앞으로도 싸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모리(가명) 씨도 "검찰인줄 알았는데 가해자였다"며 "여성을 마치 물건처럼 거래하고 착취한 권력형 범죄를 검경이 방조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여성도 동등한 국민의 위치에 있는 것인지 의심 된다"며 "범죄자가 아닌 남성도, 범죄를 처벌하는 위치의 권력도, 여성대상범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검찰에 대한 신뢰도가 왜 낮은지 검찰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페미시국광장은 이날을 시작으로 8월 9일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김학의 사건, 버닝썬 등 여성 성폭력과 성 착취, 그리고 이에 유착 의혹을 받는 검경을 차례로 규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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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대표단 선출...부대표에 김종민·임한솔·박예휘
19.07.13 18:18l최종 업데이트 19.07.13 20:08l
▲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심상정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5기 정의당 대표단 선출 보고대회에서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 후 당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남소연
심상정 의원(경기 고양시갑, 3선)이 정의당 5기 대표에 선출됐다. 부대표에는 김종민·박예휘·임한솔 후보가 당선됐다.
정의당은 13일 오후 6시 국회 의원회관에서 '제5기 대표단 선출 보고대회'를 열고 당대표 결과를 발표했다. 심 의원은 총 16177표로 득표율 83.58%을 기록했다. 심 대표와 경쟁한 양경규 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위원장은 3178표(득표율 16.42%)를 얻었다.
심 대표는 당선 일성으로 "자유한국당을 역사의 뒤안길로 퇴출시키고 더불어민주당과 개혁경쟁을 넘어 집권경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심 대표는 "정의당은 더 이상 소금정당, 등대정당 역할에 머무를 수 없다. 1800만 촛불의 대표정당으로 발돋움해 총선 승리와 진보 집권의 길을 열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수락연설 하는 심상정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5기 정의당 대표단 선출 보고대회에서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 후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 남소연
또 심 대표는 "총선에서 비례의석 한두 석 더 얻기 위해 대표된 것 아니다"라면서 "지역구 후보들의 출마와 당선을 위해 당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겠다. 지역에 출마하는 후보들이 외롭게 싸우지 않고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선거 전략, 홍보, 정책 모두 당이 책임지고 지원할 것"이라고 내년 총선에 임하는 자세를 밝혔다.
심 대표는 당장 국회에서 풀어야할 선거제 개혁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걸고 선거제도개혁을 기필코 완수하겠다"면서 "불공정한 선거제도를 바로잡아 민심이 살아 숨쉬는 국회, 국민주권주의를 온전히 실현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정의당 대표를 지낸 심 대표는 2년 만에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 대표직에 복귀하게 됐다. 심 대표의 복귀는 '힘 있는 진보정당'을 원하는 당원들의 선택이 집결된 결과로 풀이된다.
▲ 심상정 대표와 함께 선출된 정의당 부대표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5기 정의당 대표단 선출 보고대회에서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 후 차기 부대표들과 함께 손잡고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임한솔·박예휘 부대표, 심상정 대표, 김종민 부대표.ⓒ 남소연
3인을 선출하는 부대표 선거에서는 김종민·박예휘·임한솔 후보가 선출됐다. 선거 시작 전부터 '당대표보다 치열한 부대표 선거'라는 말이 돌 정도로 경쟁이 뜨거웠다. 총 7명의 후보가 나왔다.
김종민 후보가 37.10%, 6986표를 얻어 1위를 해 여유있게 부대표가 됐지만, 임한솔 후보는 14.85%, 2796표를 얻어, 3위인 이혁재 후보(2711표)를 근소한 차이로 따돌렸다. 4위는 2228표를 얻은 이현정 후보가, 5위는 2222표를 얻은 한창민 후보가, 6위는 1333표를 얻은 박인숙 후보가 차지했다.
정의당은 당헌 및 당규에 의거 부대표 3인 중 청년 및 여성 할당을 실현해야 한다. 박예휘 후보가 득표율 2.95%, 556표를 얻는데 그쳤지만 청년과 여성 할당을 동시에 실현한 것으로 인정받아 부대표가 됐다.
정의당의 이번 당대표 및 부대표 선거는 지난 8일부터 이날까지 당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투표를 취합해 발표된 결과다. 앞서 정의당은 8~11일 온라인 투표를, 12일에는 각 광역시도당 당사에서 현장 투표를 마쳤다. 이날 오전 10시30분과 낮 12시30분, 오후 2시에는 자동응답시스템(ARS) 투표를 실시했다. 당권자 3만213명 중 64.56%가 대표 선거에서 투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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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과 재벌체제
- 김성혁 서비스연맹 정책연구원장
- 승인 2019.07.12 12: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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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는 총수요를 ‘내수’보다는 ‘수출’에 의존하므로, 수출 대기업들은 국민들의 임금과 소득 향상보다는 외국자본의 요구를 우선하게 된다. 국가경제가 세계경제의 변동에 좌우되는 불안정성도 지속된다. 이러한 수출주도성장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대침체 국면에서 한계에 직면했다.
수출주도성장을 추진한 결과, 국민총소득에서 수출입 비중이 2010년 100% 수준으로 상승했다가 2016년 이후 저성장 국면에서 80% 수준으로 하락하자,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대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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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총소득 대비 수출입 비중 추이 (자료 : 한국은행(2019) 국민계정에서 재작성) |
한국의 수출입 비중(86.7%)은 주변국가 미국(34.8%), 일본(37.3%), 중국(45%)보다 매우 높다. 독일이 한국보다 높으나, 독일은 관세가 폐지되고 단일 통화가 실현된 국가연합 수준인 유럽연합(EU)으로의 수출이 59%이므로 우리와는 기본 조건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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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요국 국민총소득(GNI) 대비 수출입액 비율 비교. 2015년 통계(자료 : OECD 「Nation Accounts」(2018)) |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 침체 국면에서 자국 경제를 우선하는 보호무역과 관세전쟁으로 국제무역은 위축되고 있다. 대침체 국면에서는, 수출이 감소되므로 대기업의 투자에 의한 성장은 쉽지 않다. 따라서 한국경제의 대안은 줄어든 수출 부분을 민간소비와 정부지출을 통해 보완하고, 과도한 대외의존 경제정책을 수정해 수출과 내수의 균형 있는 성장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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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DP에서 민간소비 비중 추이(%), (자료 : 한국은행(2019)에서 재작성) |
내수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소득을 높여야 하며, 남북 경제통합으로 한반도 차원으로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
한편, 세계 대침체 국면에서 주요 국가들은 4차 산업혁명 또는 디지털 경제 등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기 위한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미국의 첨단제조파트너십(리쇼어링)’, ‘중국 제조 2025’, ‘일본의 Society 5.0’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도 산업통상자원부가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 및 전략(2019)’을 통해 양적·추격형에서 벗어나 (수출규모기준)세계 4대 제조강국으로 도약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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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6월18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 및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
그러나 문재인정부의 산업정책은, 수직계열화와 간접고용을 통해 이윤을 확보하는 재벌중심 산업 생태계에 기반하고 있으며, 기술중심·자본위주의 혁신성장으로 노동을 배제하고 공공성을 약화시키고 있어 박근혜식 창조경제의 연장선에 있다.
한국의 재벌체제로는 제조업 침체를 돌파하고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 재벌 대기업은 첨단기술보다는 중화학 장치산업의 대량생산 체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하드웨어 중심의 경쟁력은 디지털 시대에서 약발이 다한 상태다.
둘째, 디지털 시대의 핵심 경쟁요소는 중간재와 소프트웨어인데, 이는 창의적인 중소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재벌의 수직계열화와 전속거래로 하청화 된 한국의 중소기업은 혁신의 기회와 유인이 부재하다.
최근 일본이 한국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반도체 소재 3개의 수출을 통제하자 한국 반도체 전체의 생산중단이 우려되고 있는 것은, 최종재 중심의 허약한 산업구조를 가진 재벌체제의 단면을 보여준다.
셋째, 한국의 재벌은 ‘노동배제’ 경영으로, 작업자의 숙련과 혁신적 제안에 기반하지 않고 외주화와 무인화를 추구하는 신기술에 올인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미래자동차로 인해 내연기관차 생산의 감소를 예측해 기존 공장의 신규채용을 중단했다. 그러나 전기차와 자율주행차에 들어가는 새로운 부품은 현대모비스나 현대위아 등 비정규직 공장에 배치하고 작업자를 늘리고 있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서 시스템반도체를 개발하기로 했는데, R&D세액공제가 22조원이나 된다. 그러나 고용부분에 있어서는 1만5천 명이 직영으로 채용되고 42만 명의 간접고용이 발생할 예정이다. 신기술이 개발되고 정부지원도 수십조 원이 제공되지만 질 좋은 고용은 미미하게 창출될 뿐이다. 이는 장치산업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외주화 위주의 고용형태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넷째, 저성장 국면에서 진행되는 산업구조재편에서도, 정부와 자본은 조선산업에서 보았듯이 모든 희생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재벌과 사모펀드 중심의 인수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향후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으로 파급될 것이다.
대외의존 경제인 한국은 세계경제 장기침체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제조업 쇠퇴가 본격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성장동력은 발굴하지 못하고 있으며 중국, 인도 등의 기술 추격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기술무역수지(기술수출-기술수입)를 보면 미국에 대한 적자가 가장 크다. 선진국에는 만년 적자이며, 개발도상국에 대해서만 흑자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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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술무역수지 나라별 추이, 단위 : 백만 달러 (자료 : 한국은행(2019) 「국제수지통계」에서 재작성) |
시가총액 10위에 드는 글로벌기업들은 더 이상 제조업과 금융업이 아닌 ICT 플랫폼 기업들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 생태계는 공룡화되어 새로운 혁신기업이 등장하지 못하므로, 수십 년 째 30대 기업의 순위가 거의 바뀌지 않고 있다.
정부는 요란한 산업통상자원부의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 및 전략’보다는 실제 혁신을 가로막고 있는 ‘재벌체제의 수직계열화’, ‘과도한 간접고용과 외주화’, ‘노조의 경영참가와 작업자의 혁신적 제안을 거부하는 노동배제 경영’ 등을 먼저 시정해야 한다.
김성혁 서비스연맹 정책연구원장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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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긍정적인 변화를 환영한다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7/13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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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승리의 서막인가, 미국이 움직이고 있다
"대통령이 누구든 상관없이, 한반도문제를 푸는 해법은 외교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는것이 바로 우리국가의 이익입니다. 나 또한 평화를 추구하는 정부의 노력을 지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북과의 항구적인 평화협정체결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이제 곧 초당적으로 공식표명하려는 하원에 감사를 표합니다." - 로 카나 미 민주당 하원의원 -
미국이 반응하고 있다. 미 하원에서 이번에 통과된 2020회계연도 국방수권법안은 미국의 대조선 외교전반에 걸친 무시못할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조선의 힘의 실체에 대한 인정이기 때문이다.
예외는 없는 것이다. 힘의 논리란 힘의 논리일 뿐이다. 냉엄한 국제관계에서 이런 사변을 가져온 것은 역시 힘이 있었기때문에 가능한 현실이다.
이번에는 트럼프 미 합중국대통령이 판문점을 방문해 조선의 지도자를 만나는 특기할 사변이있고 난 다음 미 국내정치권에서 바로 벌어진 또 한차례의 사변이다. 상징적이다. 고무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음을 우리는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다.
비록 강제력을 가지지 못하는 수정결의지만 이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독립적인 법안이나 결의안이 아니어서 법적구속력은 없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연방의회에서 외교적 방식의 대북문제 해결과 대북전쟁종식을 추구하자는 결의를 전체회의에서 표결하고 의결했다는데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미국이 북의 <불법적인> 핵프로그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교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미국은 북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미국은 조선전쟁을 끝내기위해 지속적이고 신뢰할만한 외교적노력을 추구해야 한다, 미국은 신뢰할만한 방위와 억제태세로 북을 계속적으로 저지해야 한다"로 이어지는 하원 국방수권법안수정결의는 격세지감을 불러 일으키는 시대흐름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 더이상 우리민족에 대해 힘을 내세운 강압적인 군사외교를 해서는 안된다는 자기고백선언에 다름아니다.
미국특유의 복잡한 정치구조상 앞으로 더 지켜보아야 할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미 역사상 전례없는 의회차원의 첫 <대조선 평화주의선언>이라는 그 의미가 평가절하될 수는 없다. 단 한명의 공화당의원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시사한다.
여기까지 오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것을 추동한 힘은 오직 힘에 의한 평화를 절대가치로 밀고나온 민족주체세력의 올바른 노선이 가져온 큰 배짱의 승리이다. 이것은 오직 자기힘만 믿고 무소불위식 일방외교를 추구했던 제국의 방식과 자세에 있어서 본질적 변화의 시작이다. 미국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구도이다.
이것은 미국의 힘만 바라보고 그들만 믿고 허상을 쫓던 남쪽의 보수떨거지들과 제국의 앞잡이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 외면하고 싶은 역사의 한페이지가 되고 있다. 미국이 인정한 조선의 힘이 죽기보다 싫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어찌 되돌릴것인가. 미국이 느끼는 외교군사정치적 부담을 어찌 외면할수만 있을 것인가. 미국은 스스로가 변해갈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이번에 슬쩍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민족에 대한 자세의 대전환이다. 그것은 민족의 위상에 대한 상징적인 조치이다. 그것은 힘의 논리, 즉 민족의 정당한 노력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이다.
국방수권법안수정결의안(NDAA) 번호 217, 조선의 전도와 달라진 민족의 위상을 말해주는 일련번호의 시작이다. 이제 이것을 시작으로 제2 제3의 번호들이 줄을 잇게 될 것이다. 이미 하원에서는 <한국전쟁종전을 촉구하는결의안 HR152번>이 대기중인 상태이다. 이번 촉구결의가 통과되어 이 역시 탄력을 받을것으로 기대된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솔직한 고백일 뿐이며 솔직외에는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도 좋은 징조이며 앞으로 대통령 트럼프의 노력에도 큰 힘을 실어줄 천군만마가 될것이다.
로카나의원의 이번 하원본회의 발언은 상당부분 미국이 처한 자기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발언이 조선이 가진 힘의 실체를 모두 시인한것도, 미국이 지금 느끼는 불안감과 국가차원의 공포를 액면그대로 다 드러내는것도 아니다. 앞으로 민족의 힘은 전도의 구비구비마다 더욱 더 생활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세계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 본격적인 변화를 알리는 시작이 될것이다. 미국의 긍정적인 변화를 환영한다. 승리의 그날, 통일의 그날, 민족의 소원이 풀리는 그 날은 점점 더 가까와지고 있다. 그때까지 조선은 미국의 긍정적인 변화를 계속해서 예의주시할 것이다.
박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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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규협 기아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제발, 죄지은 사람 처벌 받았으면”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9-07-12 20:02:46
수정 2019-07-12 20: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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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차 비정규직 최정명, 한규협 씨가 고공농성 364일차인 2016년 6월 8일 오후 서울 중구 옛 국가인권위 광고탑에서 '우리는 정규직이다'라고 적힌 몸자보를 한 채 손을 흔들고 있다.ⓒ양지웅 기자
“바지사장 한명 세워놓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 아닌가”
수화기 너머로 그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4년 전 서울 중구 세종로 옛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전광판에 올라 고공농성을 펼쳤던 기아차 사내하청공장 해고 노동자 한규협 씨의 한숨 소리였다. 12일 민중의소리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 씨는 최근에서야 검사가 기아자동차 박한우 사장을 파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한 일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지난 9일 수원지검 공안부 김주필 부장검사는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박 사장을 불구속기소했다. 이는 지난 2015년 7월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박 사장과 정몽구 현대·기아차 그룹 회장을 검찰에 고발한 지 4년 만의 결과였다.
해당 사건 담당 검사들은 2~3년 간 사건을 가지고 있다가 발령을 받으면 이동해버렸다. 이 때문에 기소가 늦어졌다.
고용노동부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검찰 수사지휘 아래 해당 사건을 수사하던 근로감독관이 수사지휘의견서와 사건기록을 전달하려고 했으나, 담당 검사는 수 개월 간 접수를 보류했다고 한다. 의도적으로 수사를 지연시킨 것이다. 이에 지난해 10월 금속노조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지회 공동투쟁위원회는 현대기아차 불법파견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 2명을 고소·고발했다.
9일 기소는 이런 과정을 거친 뒤에야 나온 결과였다. 하지만 그 결과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검찰은 정 회장을 기소 대상에서 제외했다. 정 회장이 사내협력사 계약 및 관리에 직접 관여한 정황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규협 씨는 개탄했다. “여전히 재벌공화국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기아차뿐만 아니라, 모든 계열사의 수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을 불법파견 한 사용자 아닌가.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말을 믿지도 않지만, 좀 시늉은 해야 하지 않나.”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최정명 한규협 씨가 2016년 2월 28일 오후 서울 을지로 옛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광고탑 농성장에서 비정규직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263일째 농성 중인 가운데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양지웅 기자
노동부 시정명령, 대법 판결에도 꿈쩍 않던 회사
한규협이 363일 전광판 고공농성 나섰던 이유
4년 전, 한규협 씨는 최정명 씨와 50m 높이에 1.7미터 남짓한 폭의 옛 국가인권위 건물 전광판에 올랐다. 사측에 그해 2월에 있었던 대법원 판결에 따라, 직접고용 하라고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대법원은 현대·기아차 아산공장에서 일하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현대·기아차의 사내하청은 불법 파견에 해당하니, 2년 이상 근무한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직접고용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목숨을 건 고공농성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바람이 부나, 이들은 흔들리는 전광판 위에서 꼬박 363번의 밤을 보냈다. 추락하지 않으려면 밧줄로 피뢰침과 허리를 이어야만 했고, 온갖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잘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두 사람은 전광판에 오른 지 두 달 만에 해고를 당했다.
손해배상가압류 역시 이들의 숨통을 쥐어왔다. 두 사람이 땅을 밟기 하루 전날, 법원은 한규협·최정명 그리고 이들을 돕던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 사내하청분회장인 양경수 씨에게, 전광판 업자에게 물어내야 할 돈으로 5억4000만원을 선고했다.
이들은 2016년 6월 다시 땅을 밟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한규협 씨는 여전히 그때 복용했던 혈압, 고지혈증 약과 이뇨제 등에 의존하고 있었다. 손해배상청구금액은 일부 기금을 모아 변제했지만, 해마다 이자가 붙는 바람에 지금은 원금보다 더 불어난 상태다. 그 사이 한규협, 최정명, 양경수 씨 집의 가재도구는 가압류돼 경매에 붙여지기까지 했다.
한 씨는 “금액을 떠나서, 가족에게까지 미치는 직접적인 위협을 체감했다”고 말했다.
각오한 일이었다. 그는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측이 대법원 소송 당사자 465명에 한정해 특별채용을 해 사건이 무마시킬 분위기였다.
소송 당사자들 외에도 기아자동차 내에는 사측이 불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내하청 노동자가 2900명에 달했다. 이번에 불법파견 문제를 바로 잡지 않는다면, 현대·기아차를 비롯한 한국의 기업들은 또 손쉬운 비용절감과 책임회피를 위해 불법파견을 계속 자행할 게 분명했다.
2015년 대법원 판결 외에도 2010년 대법원 판결, 2004년 고용노동부 시정명령 등에서도 불법파견 문제가 드러났지만, 현대·기아차는 보란 듯이 이를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또 이 문제는 2013년 현대기아차에 직접고용을 촉구하다 해고를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윤주형, 박정식 씨 등이 남긴 과제이기도 했다.
한 씨는 “기아차가 만약 법을 제대로 지켰다면, 우리도 고공농성을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말고도 수천 명의 비정규직들이 10여 년 동안 그렇게 고통 받을 이유도 없었다”며 “그거 생각하면 바로 구속시키지 않은 것도 원망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발 죄지은 사람은 죄지은 만큼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기아차 비정규직 최정명, 한규협 씨가 고공농성 364일차인 2016년 6월 8일 오후 서울 중구 옛 국가인권위 광고탑에서 농성해제를 앞두고 '우리는 정규직이다'라고 적힌 몸자보를 한 채 손을 흔들고 있다.ⓒ양지웅 기자
“좋은 소식도 있었지만…과제 많아”
“고공농성, 얘기만 들으면 떠오른다”
그가 땅을 밟은 뒤, 반가운 소식도 있긴 했다. 아직까지 지켜지진 않고 있지만, 회사와 구두로 복직을 합의했다. 또 사내하청 노조 조합원이 줄고 있다. 회사가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특별채용 방식으로 직접고용 정규직화 하면서 자연스럽게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들이 줄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화성공장에서만 약 1천명이고, 전체적으론 1500명에서 1800명 정도가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그는 “지금 정규직으로 전환된 분들이 또 다른 차별을 받고 있다”며 “이후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지난해 기아차 화성공장 사내하청 노조는 새롭게 정규직으로 직고용 된 노동자들이 노동 강도가 높은 구간에 배치되고, 기존의 정규직들이 편한 자리로 배치되는 상황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본인의 복직 문제도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그는 “복직 약속이 지켜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최근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들의 고공농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들도 법원 판결에서 승소했지만, 직접고용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이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었고, 현재 서울 톨게이트 요금소 구조물 위에서 고공농성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불법파견 판결을 받았고, 농성 중에 일자리를 잃은 점까지 비슷했다.
그는 “고공농성 얘기만 들으면, 4년 전 생각이 자동으로 떠오른다”며 “고공농성은 단순히 뭔가를 쟁취해보겠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간절함, 절박함으로,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명박, 박근혜 시절에야 그렇다 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정부가 달라지지 않았나. 이분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억울할 것 같다”며 “정부가 어쨌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를 하겠다고 약속 했는데, 자회사 소속이면 비정규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 처음부터 제대로 된 공공부문 정규직화에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경부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에서 '한국도로공사 정규직 전환 민주노총 투쟁본부'노조원들이 한국도로공사 용역업체 소속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 직접고용 등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19.06.30.ⓒ뉴시스
한편, 한 때 한국도로공사 직고용 정규직이었던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들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차츰 비정규직화 됐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모두 민간위탁으로 전환됐다. 매년 재계약을 반복해야 했기에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려 왔다.
견디다 못한 요금 수납원들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1심과 2심 모두 승소했다. 법원은 한국도로공사가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가 바뀌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한국도로공사는 간접고용 방식을 고수했고, 정부도 자회사를 통한 간접고용 방식을 허용했다. 이에 반발한 노동자들은 자회사 전환을 거부했다. 그리고 1500명이 넘는 요금 수납원들이 용역업체와의 계약이 종료됨과 동시에 해고 상태로 거리에 내몰렸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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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에 일본자위대 끌어들이는 유엔사 해체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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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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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입력: 2019/07/12 [15:4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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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사가 일본 자위대를 한반도에 끌어들이려 하는 것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사진 : 평화행동)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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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주도하는 유엔군사령부가 한반도 유사시 전력과 장비를 지원받을 ‘전력 제공국’에 일본을 추가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정황이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진보정당 및 시민사회 단체들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노동당, 녹색당, 민중당, 민주노총, 전농, 한국진보연대 등 66개 진보정당 및 시민사회단체들은 12일 오전 11시 광화문광장 미 대사관인근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한반도에 일본자위대를 끌어들이려는 유엔사를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들은 “유엔사는 사실 국제기구인 UN의 산하기구가 아니”라며 “국제기구가 아님에도 국제기구 행세를 하며 한반도에서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권한, 북한지역에 대한 점령권 등을 가지고 있는 초법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단체들은 최근 미국이 유엔사의 기능과 합법성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을 지적하며 “원래는 최소한의 기능만 하고 있던 유엔사를 급속하게 강화하는 것은 전작권 반환과 한반도 평화 정착 이후에도 자신들의 역할을 놓지 않고 적극적으로 통제하겠다는 의도”라고 규탄했다.
실제 유엔사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 몰래 독일을 전력 지원국에 넣으려고 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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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사 해체를 촉구하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 : 평화행동)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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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이들 단체들은 “유엔사의 강화 구상에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NATO처럼 동북아에서 중국과 러시아, 북한을 견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국적 군사기구로 발전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고, “여기에 일본을 포함시켜 전범국가가 전쟁기능을 수행할 가능성을 열어놓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들은 “아직도 전범국가로서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 있는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준비시키려는 것”과 “앞에서는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뒤로는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패권을 강화하는” 미국의 행태를 규탄하며 유엔사 해체를 요구했다.
한편 주한미군은 ‘2019 전략 다이제스트’를 통해 “위기 시 필요한 일본과의 지원 및 전력 협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군 측은 “미국이 일본에 7군데 후방기지를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과 협력한다는 뜻”이라고 해명했지만, 연례적으로 발간하는 문서에 처음으로 이와 같은 문구를 넣은 것이어서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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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한반도에 일본자위대를 끌어들이는 유엔사를 해체하라!
한반도에서 일본 자위대가 전쟁상황 시 병력을 전개할 수 있는 방안을 미국이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져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유엔사는 유사시 병력과 장비를 지원하는 ‘유엔 전력제공국’에 일본의 참여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혀졌다. 주한미군사령부가 발간한 ‘주한미군 2019 전략 다이제스트’를 통해서도 위기시 일본과 지원 및 전력 협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엔사는 사실 국제기구인 UN의 산하기구가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유엔사가 만들어질 때도 UN의 하위기구나 관리에 놓인 기구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이 임의대로 유엔군사령부라고 이름을 붙였다. 미국은 75년에 조건부로 유엔사를 종료하겠다고 밝혔음에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94년에는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사가 UN안보리의 산하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유엔사는 국제기구가 아님에도 국제기구 행세를 하며 한반도에서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권한, 북한지역에 대한 점령권 등을 가지고 있는 초법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 남북이 9.19 군사 분야 합의서로 논의한 JSA 자유왕래도 유엔사가 비무장지대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가로막았다.
남북교류를 방해하면서 이에 대한 반감과 유엔사 유지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강해지면서 미국은 오히려 유엔사의 기능과 합법성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근 유엔사에 한국군 장교 20명을 충원해달라고 요청하면서도 유엔사의 참모를 따로 보충하면서 인력도 강화하고 있다. 원래는 최소한의 기능만 하고 있던 유엔사를 급속하게 강화하는 것은 전작권 반환과 한반도 평화 정착 이후에도 자신들의 역할을 놓지 않고 적극적으로 통제하겠다는 의도이다.
유엔사의 강화 구상에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NATO처럼 동북아에서 중국과 러시아, 북한을 견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국적 군사기구로 발전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리고 여기에 일본을 포함시켜 전범국가가 전쟁기능을 수행할 가능성을 열어놓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일본은 아직도 전범국가로서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해 오히려 더 열을 내며 경제보복으로 답하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 이러한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준비시키려는 구상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6월 30일, 판문점에서 북미 정상이 만나 평화를 이야기했다. 미국은 앞에서는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뒤로는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패권을 강화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국의 속셈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또한 역사속으로 사라져야 할 유엔사를 지금 당장 해체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2019년 7월 12일
(사)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21C한국대학생연합, 6.15 남측위원회 언론본부, 6.15 남측위원회 여성본부, 6.15 남측위원회 학술본부, 겨레하나, 구속노동자후원회, 국민주권연대, 노동당, 노동사회과학연구소, 노동자연대, 노동전선, 녹색당, 다른세상을향한연대, 민변 미군위,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민주노동자전국회의, 민주주의자주통일대학생협의회,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민중당,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보건의료단체연합, 부정선거진상규명시민모임, 빈곤사회연대, 빈민해방실천연대, (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 사월혁명회, 사회변혁노동자당, 사회진보연대, 새로하나, 서울진보연대, 세종민주평화연대, 알바노조, 예수살기,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전국빈민연합,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여성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학생행진, 전두환양민학살심판공동행동, 전태일노동대학, 전태일재단,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주권자전국회의, 진보대학생네트워크, 촛불문화연대, 코리아국제평화포럼, 통일광장, 통일의길, 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 평화연방시민회의,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평화재향군인회, 평화통일시민행동, 평화협정운동본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한국진보연대, 한국청년연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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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재건위’ 조근송·고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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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족 대표인 조근송(64)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왼족)과 사무총장을 역임한 고두병(48) 이사가 112주기 추모일을 앞두고 10일 오전 서울 인사동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1907년 7월 14일,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고종의 밀사 이준이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며 할복자결했다는 것이다. 그의 비분강개한 할복자결 소식은 온 민족의 가슴을 울렸고, 해방후 첫 열사 기념사업회로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가 독립운동 명망가들의 대대적 참여로 구성됐다.
그러나 112주기를 맞는 오는 14일, 기념사업회와 별도의 ‘이준 열사 순국 추모제전’이 오전 11시 서울 수유리 이준 열사 묘역에서 열린다. 주최 단체명도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재건위원회’다.
유족 대표인 조근송(64) 기념사업회 명예회장과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고두병(48) 이사가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고 싶다고 제안해 10일 오전 10시 서울 인사동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 자리가 마련됐다.
조근송 명예회장은 “2016년부터 별도 추도식을 하고 있다”며 “독립운동하고 거리가 먼 그런 사람들이 이준 할아버지한테 제를 지내는 건데, 제를 지내면 절을 받으시겠느냐. 용납 못 하겠다”고 단호히 선을 그었다. 조근송 유족 대표는 이준 열사 맏딸 이송선의 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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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근송 명예회장은 기념사업회가 분열, 무력화 된 이유를 전재혁 전 회장의 전횡 때문이라고 폭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기념사업회가 오늘처럼 쪼개지고 무력화된 것은 2006년 12월부터 최근 6월말까지 12년 6개월 간 회장을 맡아온 전재혁(77) 전임 회장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지난달 25일자로 전재혁 전 회장이 내세운 조승현(58) 신임 회장이 등기를 마친 상태다.
조근송 명예회장은 “탄원서를 적어서 보훈처에 2017년에 돌렸다. 자기가 쓴 책에 김구 선생을 몹쓸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안두희를 의열청년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이준 열사의 이름을 팔아서 당도 만들려고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사법권이 없는 국가보훈처는 자체 해결을 권유할 뿐이었다.
실제로 전재혁 전 회장은 ‘조국21’ 정당을 발기하면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내세우는가 하면, <블루투데이>에 ‘전재혁의 안보공감’ 등을 연재하며 극우 논지를 펴기도 했다.
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도 지난해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해방후 만들어진 첫 번째 조직이 이준 열사를 추모하는 일성회(一醒會)라는 조직”이라며 “내려오면서 극우가 장악하게 돼 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관련기사 보기]
조근송 명예회장이 특히 분노한 것은 이준 열사 관련 유물과 자료 일체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점이다. “2009년 동교동 사무실 시절에 훈장과 서류를 본 뒤로 본 적이 없다”며 “2011년 신길동으로 옮긴 사무실에서부터 캐비넷이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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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마련된 이준 열사 묘역. 네덜란드 헤이그의 니우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공동묘지에서 1963년 이장해 모셨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그는 전재혁 전임 회장에게 6월초 전화로 따져 물었다며 “전재혁 회장이 서류는 모르겠다고 하고 훈장이 어디 갔느냐 하니까 전화를 끊어버렸다”며 “그리고 난 뒤에 급박하게 회장을 넘긴 거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준 열사의 혼이 담긴 것들이 싸그리 없어져 유족들이 통탄한다”며 “그 많은 사진들도 없고. 추도식 때마다 썼던 훈장도 사라졌다”고 탄식했다. 기념사업회 초기 추도식 때 사용한 유명인사들의 추도사들이 적힌 두루마기 서류들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고두병 이사는 2010년부터 기념사업회 회원으로 참여해 2016년 6월 법인 등기이사가 됐고, 전재혁 전 회장과 손발을 맞춰 2017년에는 사무총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물론 그해 10월 곧바로 면직처리 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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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무총장을 역임한 고두병 이사는 지난달 전재혁 전 회장을 공금유용 및 횡령죄로 고소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고두병 이사는 “2018년 6월에 감사 결과 전재혁 회장이 기념사업회 공금을 유용하고 횡령한 혐의가 포착돼 국가보훈처 기념사업과에 고발장 형태의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며 “서울보훈지청으로 불러서 권고조치만 할 뿐 사법처리가 없었다”고 전하고 “6월 25일 내가 전재혁 회장을 공금유용 및 횡령 혐의와 유품이 사라진 것도 횡령혐의로 추가해서 고소장을 강북경찰서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사라진 유품들에 대해서는 “62년도에 추서된 대한민국장과 훈장증, 그 이외에 유품 일체, 기념사업회 보과하고 있던 서류 일체, 그 외에 기념사업회 보관된 증명사진 포함한 일체”라며 “유족 뜻도 그렇고 기사화 돼서 국민 심판대에 올려서 70년 넘은 단체의 일체 서류를 다 찾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고소장에 기재된 공금유용과 횡령은 횟수는 많지만 금액은 각각 30만원대 수준에 불과하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과 ‘훈장증’을 비롯해 ‘네덜란드 현지 흙’, ‘이준열사 증명사진’, ‘캐비닛 2개 분량’의 문서와 유품이 적시됐다.
조근송 명예회장은 “검찰은 한성판관학교를 기준으로 해서 이준 열사를 대한민국 검사 1호로 만들었다. 서울대에서도 한성판관학교를 서울대의 모태로 보고 서울대 1회 졸업생으로 삼았다”며 “김준규 검찰총장 재직시 이준 열사 역사박물관을 대검에 만들면서 이준 열사를 표상으로 내세웠고 표상도 만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검찰조차도 지금의 기념사업회에는 힘을 보태지 않고 있다는 것.
그는 “그간 언론 접촉을 안 했던 이유는 유족 입장에서 너무 창피해서 제 얼굴에 제가 침을 뱉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며 “유품과 과거 역사가 다 없어져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해 보훈처에다 기념사업회 보훈등록을 없애라고 요청했다”고 심경을 밝혔다.
고두병 이사는 “보훈처에 등록된 단체들이 나라로부터 제대로 지원을 못 받아서 사무실도 없는 단체들이 많다”며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많이 기려야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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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 열사 110주기인 2017년 7월 14일, 서울 안국동 152번지 해영회관 앞에 이준 열사 집터 표석이 설치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집터를 찾는데 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한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맨 왼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자료사진 - 통일뉴스] |
조근송 명예회장은 “독립운동해서 집안이 망했는데 국가에서는 3대까지에 한해 집안에서 한 사람만 지원해주고 있다. 광복회도 독립운동 후손 중 한 명만 회원으로 받아 준다”며 국가의 보훈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국가유공자와 유가족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라고 믿는다”며 “정부는 국가유공자와 가족의 예우와 복지를 실질화하고, 보훈 의료 인프라를 확충하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준 열사가 걸어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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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이그 특사 3인 왼쪽부터 이 준, 이상설, 이위종.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이준(李儁, 1859.1.21.~1907.7.14.) 열사는 1895년 37세 때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를 졸업(제1회)한 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됐고, 탐관오리들과 마찰을 빚다가 모함을 받아 33일 만에 면관 당했다.
1896년 38세 때 「독립협회」 평의장 직을 맡아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했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법과에 입학, 1898년 40세 때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독립협회」에 다시 가담하여 독립협회를 「만민공동회」로 개칭하고, 저항운동을 본격화하다 투옥 당하기도 했다.
1902년 44세 때 비밀결사 개혁당 결성에 앞장섰고, 1904년 46세 때 매국집단인 일진회(一進會)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맞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맡아 민권확립에 힘쓰다 검거돼 3년 형을 받고, 6개월간 황주의 고도(孤島)인 철도(鐵島)에 정배당하기도 했다.
1905년 47세 때 이준 열사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영애 ‘아리스'의 내한을 계기로 ‘한미공수동맹'을 제창했고, 1906년 48세 때 이준 열사는 「만국청년회」 회장에 취임하여 국제친선운동을 전개하였고, 정부에 ‘國政 구폐 진언서'를 제출했다.
「국민교육회」 회장을 맡아 국민교육운동을 전개하고 「보광학교」, 「오성학교」(건국대학교 전신), 「광신중상업고등학교」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이준 열사는 평리원 검사를 잠시 거쳐 곧 특별법 원 검사에 취임했고, 1907년 49세에 「국채보상연합회」 회장에 취임해 5월 고종황제의 위임장인 밀조(密詔)를 봉대한 특사가 되어 비밀리에 서울을 출발하여 1907년 5월 21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38세)을 만나 시베리아를 거쳐 ‘페테스브르크'에서 이위종(21세)과 합류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1907년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3인의 사절은 헤이그에서 각국 대표와 언론에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불법성 그리고 일제의 침략성을 알리는 활동을 하였고, 7월 14일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세계에 호소하였으나 열국의 냉담한 반응에 할복 자결로 대한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주었다.
일제는 이준 열사의 사망에 대해 병사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궐석재판을 통해 작고한 이준 열사에게 종신징역형을 선고하였다.
광복 후 아들 이용 장군과 독립투사 함태영(뒤에 부통령이됨)선생이 중심이 되어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결성됐고, 서거 55년째인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1963년 10월 4일 헤이그에서 열사의 유해를 모셔다가 국민장을 거행하고, 서울 강북구 수유리 묘소에 안장하였다.
(수정,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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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국민을 공포와 충격에 빠지게 했던 사건의 진실이 재판을 통해 제대로 밝혀지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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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도 | 2019-07-11 08:4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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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5일 제주의 한 펜션에서 전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한 일명 ‘고유정 사건’. 현재 고유정은 살인과 사체손괴·은닉 혐의로 기소된 상태입니다.
고유정 사건은 수사가 진행될수록 정말 경악할 만한 얘기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을 알아보겠습니다.
① 범행 장면을 사진으로 남긴 고유정
원래 범죄자들은 범행 현장에 증거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유정은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현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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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이 범행 전에 찍은 사진 ⓒ제주MBC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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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진은 저녁 8시 10분을 가리키는 벽시계와 피해자의 흰 운동화입니다. 마치 몇 시에 범행을 저지른다는 예고편 같습니다. 경찰은 이 사진을 근거로 범행 시간을 8시 10분에서 9시 50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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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이 범행 전에 찍은 사진 ⓒ제주MBC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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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사진은 주방 싱크대 위에 카레가 묻은 빈그릇과 수면제인 졸피뎀을 넣었던 작은 가방입니다. 실제로 고유정은 저녁 식사 시간에 수면제인 졸피뎀을 카레에 넣었고, 전 남편은 수면제 때문에 칼을 든 고유정을 피하지 못하고 살해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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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이 범행 전에 찍은 사진 ⓒ제주MBC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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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사진은 완도행 여객선 갑판 위에서 촬영한 시신이 든 여행용 가방입니다. 이 사진은 시신을 버리기 30분 전에 찍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고유정이 자신의 범행 기록을 사진으로 찍은 것은 ‘완전 범죄’라는 자신감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한편으로는 영화 속에서 나오는 살인 증거를 모으는 연쇄 살인범과 같은 모습입니다.
② 제주에도 시신을 버린 고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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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션 근처 쓰레기 버리는 곳인 클린하우스에 종량제 봉투를 버리는 고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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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고유정은 시신을 완도행 여객선에서 바다로 던지고, 김포 친정아버지 집 근처에만 유기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제주에서도 시신을 유기한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5월 27일 펜션 인근 쓰레기 버리는 곳인 ‘클린 하우스’에 고유정이 차를 타고 나타납니다. 고유정은 차 뒷좌석에서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꺼내는데 얼마나 무거운지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내려놓습니다.
고유정은 쓰레기봉투의 입구를 여러 차례 다시 묶으면서 7분 동안 무려 4개의 봉투를 버립니다.
이 영상은 경찰이 아니라 유족이 쓰레기 버리는 곳에 CCTV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 발견됐다고 합니다.
경찰은 이 영상을 알고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시신이 아니라 이불이나 수건 등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펜션에 폴리스 라인을 치지 않은 것은 주민들에게 불필요한 불안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고, 현장 검증을 하지 않은 이유는 ‘야만적 현대판 조리돌림’이 벌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경찰의 이런 변명은 부실수사를 감추기 위한 변명처럼 들립니다.
③ 전 남편, 그리고 의붓아들 사망 때도 나온 카레
고유정 사건에서 또 하나 쟁점은 재혼 남편의 아들. 즉 고유정의 의붓아들 사망입니다.
지난 3월 2일 제주에 살고 있던 고유정의 의붓아들은 청주로 온 지 이틀 만에 사망했습니다. 당시 국과수는 질식에 의한 사망일 가능성이라는 부검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청주경찰서는 살인이 아니라며 제대로 고유정을 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전 남편 살인 사건이 발생한 뒤, 재혼 남편이 고유정이 아들을 죽인 것 같다며 검찰에 고소하면서 다시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전 남편 수사 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고유정은 의붓아들 사망에는 3차례에 걸친 경찰 조사를 아주 성실하게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유정은 경찰 조사에서 의붓아들은 죽이지 않았다며 억울하다고 말했습니다.
고유정의 재혼 남편은 “고유정이 카레에 약을 섞어 전 남편에게 먹였다는 검찰 발표가 나온 뒤 소름이 끼쳤다”며 “카레 안에 약물을 섞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숨진 아들과 나에게도 카레를 해줬다”라고 말했습니다.
④ 강력한 전문 변호인단, 갑자기 사임계 제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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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의 변호를 맡았던 전문 변호인단은 언론에 알려지자, 사임계를 제출했다. ⓒ네이버 뉴스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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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은 5명으로 꾸려진 전문 변호인단을 선임해 재판을 대비했습니다. 변호인단에는 형사소송법 논을 썼던 판사 출신과 생명과학을 전공한 변호인 도 포함됐는데요, 지난 7월 5일 변호인단 5명이 돌연 사임계를 제출했습니다.
변호인단은 사건의 진실과 숨겨진 사실을 밝혀내고 싶어서 사건을 맡았지만, 강력한 변호인단 등의 부정적인 여론과, 같은 회사에 소속됐던 다른 변호사들도 함께 비난을 받는 상황이 벌어져, 사건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고 밝혔습니다.
변호인단이 사임하면서 다른 로펌에서도 고유정의 변호를 맡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만약 이럴 경우 국선 변호사가 변호를 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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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의 과거 모습. 평소 모습을 보면 결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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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 사건은 수사가 진행될수록 새로운 사실들도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도 더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온 국민을 공포와 충격에 빠지게 했던 사건의 진실이 재판을 통해 제대로 밝혀지길 기대합니다.
유튜브에서 바로보기:’고유정 사건’ 새롭게 드러난 충격적인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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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안인석탄화력발전소 '단속 권한 있다'는 법률자문 결과 받고도 숨겨... '거짓 해명' 논란
19.07.11 17:33l최종 업데이트 19.07.11 17:4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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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릉 안인화력발전소 건설에서 항만 건설을 위한 매립석을 쏟아붓고 있다. |
| ⓒ 김남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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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안인석탄화력발전소 건설 과정에서 시공사인 삼성물산의 위법 행위에 대해 "법률 자문 결과 관리 감독 권한이 없어서 직접 단속이 어렵다"는 강릉시의 답변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거짓 해명'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강릉시는 그동안 안인석탄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오탁방지막 부실 설치 등 각종 위법 행위를 단속해 달라는 민원에 "강릉시가 발주한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공사에 대한 관리 감독 권한이 없다"며 선을 그어 왔다. 전원개발촉진법에 따라 상급기관인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의제 처리(일체의 허가권)한 사업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입장은 지난 9일 열린 강릉시의회 제7차 안인석탄화력발전소건설사업대책특별위원회(위원장 배용주, 아래 발전소특위)에서도 이어졌다. 지난달 26일 현장에 방문해 위법 공사 장면으로 직접 채증까지 한 위원들은 강릉시를 상대로 "명백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왜 손을 놓고 있느냐"고 질책했다.
문제의 해명은 이때 나왔다. 신시묵 강릉시 경제환경국장은 "공사 시공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 측 감리단들이 알아서 할 것이고, 또 강릉시가 발주한 공사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답했다. 이는 "시가 법률 자문을 받은 결과에 따른 해석"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취재 결과 강릉시는 지난 8일 법률 자문을 의뢰한 변호사로부터 '시공사의 위법행위에 대한 단속 권한이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기자가 입수한 법률자문 회신서에는 "해당 업체가 상급기관으로부터 공유수면에 대한 점용·사용허가의 의제(일체의 허가권)처리 되었다고 하더라도, 공사 과정에서 허가 사항을 위반한 경우 공유수면 관리청인 강릉시가 이에 대한 단속 권한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런 해석이 특별하거나 이례적인 것도 아니다. 지난 9일 발전소특위 회의에 참석한 오치석 작은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전원 개발법 실시계획 승인으로 공유수면 점용·사용 허가가 의제 처리되었다고 하더라도 강릉시는 공유수면 관리청으로 점용허가를 받은 자가 허가 사항을 위반한 경우 얼마든지 허가 취소 또는 공사 정지, 시정 조치를 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서 같은 취지의 대법원 판례와 법제처의 유권해석 결과를 근거로 들었다.
즉, 복수의 대법원 판례가 이미 존재하고, 그에 상응하는 법적 자문 결과까지 받고도 정반대의 판단을 내린 것이다. 강릉시가 이 사안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삼성이 손해배상 청구할까봐..."
이에 대해 신시묵 경제환경국장은 11일 전화 인터뷰에서 "강릉시가 판단에 신중한 이유는 공사에 매일 20~30억 원이 들어가는데, 만약 강릉시가 잘못 판단해서 공사중지를 했을 때 삼성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200~300억을 물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권한이 있다는 법률 자문 결과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모두 3명의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고, 아직 공식 공문으로 회신 받은 사실은 없다"라면서 "구두로만 들었을 때는 권한이 있다는 사람과 없다는 사람이 있는데, 권한이 없다는 쪽이 더 많았다"라고 답했다.
"이달 초 회신 공문을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공문 하나가 오기는 왔는데, 아직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고, 권한이 있다는 비슷한 취지로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고 해명했다.
김한근 강릉시장은 지난해 6.13지방선거 당시 후보자 중 유일하게 안인화력발전소 건설 사업에 찬성 의견을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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