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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한껏 멋 부린 ‘진객’ 흰눈썹울새

윤순영 2019. 06. 18
조회수 130 추천수 0
 

극히 드물게 찾아오는 나그네새, 날쌘 땅 위의 사냥꾼

 

크기변환_YSY_2326.jpg» 파랑, 빨강, 주황색으로 한껏 멋을 부린 흰눈썹울새 수컷.

 

우리나라가 애초 번식지나 월동지가 아닌 새가 어쩌다 들르는 일이 있다. 반가운 이런 손님을 나그네새라고 부른다. 흰눈썹울새는 나그네새 가운데도 극히 만나기 힘든 새인데, 운 좋게 관찰 기회가 왔다. 지난달 전북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에서 흰눈썹울새를 만났다.

 

수컷의 멱과 가슴은 푸른색이며, 가운데는 진한 주홍색 깃털이 있다. 자세히 보면, 푸른 가슴 아래 검은색, 그 밑에 흰색, 진한 주홍색의 깃털이 차례로 나 있다. 가슴과 멱까지 울타리를 쳐놓은 것 같은 깃털이 특이하다. 인디언 추장이 목걸이를 한 것 같다.

 

 

크기변환_YSY_2396.jpg» 흰눈썹울새의 자세가 당당하다.

 

크기변환_YSY_0484.jpg» 꼬리를 바짝 올린 채 풀밭 위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흰눈썹울새는 땅 위에서 걸어 다니기를 좋아한다. 하천과 습지 주변의 갈대밭이나 풀밭에 살며 땅 위에서 곤충이나 거미를 잡아먹는다. 가슴을 활짝 펴고 꼬리를 위로 바짝 치켜든 채 덤불을 바쁘게 돌아다니거나 뛰어다니며 먹이를 찾는다.

 

처음 만난 흰눈썹울새는 절대 곁을 주지 않고 얼굴만 내밀었다. 마주치면 숨어버리기 일쑤다. 돌아다니는 동선이 매우 정확하다. 매우 가까이 곁을 주는 듯하다가 멀리 가고 다시 다가오는 듯하다 멀리 떠나는,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다.

 

 

크기변환_YSY_2152.jpg» 몸을 숨긴 흰눈썹울새.

 

크기변환_YSY_1700.jpg» 꼬리를 치켜세워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땅에서 사냥하는 새들은 발걸음이 매우 빨라, 위협을 느끼면 재빨리 풀숲으로 몸을 숨긴다. 예민하고 경계심과 조심성이 강하다. 몸을 바짝 세워 주변을 살피기도 하고, 쉬지 않고 꼬리를 흔들어 댄다.

 

크기변환_YSY_0819.jpg» 달음질치는 흰눈썹울새. 

 

크기변환_YSY_1804.jpg» 먹이를 사냥하는 흰눈썹울새.

 

빠른 걸음으로 갑자기 ‘휙’ 지나가면 뭐가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다. 먹잇감은 영문도 모른 채 순식간에 사냥당한다. 흰눈썹울새는 진정한 ‘땅 위의 사냥꾼’이다.

 

크기변환_YSY_1940.jpg» 도망치지 않고 버틴다. 배짱이 두둑해 보인다.

 

크기변환_YSY_2261.jpg» 돌 위에 올라서서 가슴을 한껏 내밀고 자신감을 과시하는 흰눈썹울새.

 

크기변환_YSY_1805.jpg» 다리를 쩍 벌리고 선 모습이 당당해 보인다. 

 

빠른 행동이 다소 방정맞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14~15㎝의 작은 새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잠시 멈춰 주변을 살필 때, 이 작은 새는 천하를 호령하듯 가슴을 내밀고 꼬리를 한껏 위로 치켜든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도도하게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보면, 호랑이가 다가와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크기변환_YSY_1676.jpg» 경계심이 강하지만 반대로 호기심도 많다.

 

크기변환_YSY_0539.jpg» 높은 곳에 올라 주변을 경계한다.

 

크기변환_YSY_2020.jpg» 사냥감을 발견하면 꼬리를 바짝 치켜세운다.

 

나는 새가 나무보다 땅을 좋아하는 것은, 목숨을 걸더라도 먹을거리가 당장 눈앞에 널려있다는 얘기다. 흰눈썹울새는 겨울에 단독으로 생활하다 번식기에 암수가 함께 땅 위에서 산다. 5∼7월 땅바닥 작은 구멍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5∼7개의 알을 낳아 13~14일 동안 품는다.

 

크기변환_YSY_9185.jpg» 바닷가를 찾은 흰눈썹울새.

 

곤충이나 거미를 좋아하지만 식물의 열매도 먹는다. 수풀 규모가 작거나 늪지, 단일 종의 나무숲 산림지대를 좋아한다. 수컷은 다양하고 매우 모방적인 노래를 부른다.전형적인 채팅 방법을 동원하여 수다를 떨듯이 울어댄다 

 

크기변환_YSY_0497.jpg» 바위에 올라서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는 흰눈썹울새.

 

크기변환_YSY_2410.jpg» 긴장을 풀고 몸단장을 한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오호츠크해 연안, 캄차카, 알래스카 서부에서 번식하고, 겨울에는 아프리카 북부, 인도, 동남아시아로 이동한다. 우리나라를 통과하는 나그네새다.

봄철에는 4월 초순부터 5월 중순까지, 가을에는 10월 초순부터 11월 중순까지 통과한다. 귀하고 흔하지 않은 새다. 매우 적은 수가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월동하기도 한다.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한겨레 환경생태 웹진 ‘물바람숲’ 필자, 촬영 디렉터 이경희, 김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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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끼리”라면 개성은 열린다

[기획연재] 6.15와 판문점선언(3) 6.15와 경제협력

6.15공동선언 발표 19돐을 맞아 6.15시절 ‘우리민족끼리’가 사회 전반에 어떻게 구현됐는지를 통해 4.27시대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기 위한 과제를 조망해 본다.

[기획연재] 6.15와 판문점선언
(1) 6.15와 민족화해 : 너와 나 함께했던 그 시절
(2) 6.15와 반미자주 : 미국이 점점 싫어지는 이유
(3) 6.15와 경제협력 : '우리민족끼리'라면 개성은 열린다
(4) 6.15와 수구보수

“개성공단에서는 개성공단에 맞는 운전면허증을 발급합니다. 면허증 일련번호 마지막 숫자는 ‘615’로 통용됩니다. 개성공단이 남과 북, 6.15공동선언이 만든 ‘옥동자’라는 의미 때문입니다.”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이 한 라디오(팟캐스트) 프로그램에서 했던 말이다.

2000년 발표된 6.15남북공동선언 4항.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6.15선언 발표 이후 남북은 착실히 합의를 지켜나갔다.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이라 하는 ‘개성공단’.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한(조선) 아시아태평양위원회의 <개성공단 건설 및 운영 합의서> 체결을 시작으로, 12월 남북이 장관급회담을 열어 <남북경협 4대 합의서>에 서명하면서 남북경협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2003년 6월 개성공업지구 착공식을 연다.

1년만인 2004년 6월, 시범단지 2만 8천 평 부지조성을 완료하고 15개 입주업체를 선정해 입주 계약을 체결한다. 2005년 3월엔 남측 지역에서 개성공단으로 전력공급이 시작됐고, 2005년 12월엔 개성공단과 남측 지역 간 통신이 연결됐다.

▲ 개성공단의 모습 [사진 : 뉴시스]

개성공단이 위치한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봉동리는 군사분계선에서 최단거리가 2.5km, 비무장지대에서 서쪽으로 고작 500m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개성공단이 들어서기 전 북한(조선)군 6사단, 64기갑사단, 62포병여단이 배치돼 있었다. 북한(조선)은 개성공단 부지조성을 위해 이 지역 군병력을 10~15km 뒤로 물렸다. ‘군사지역’을 ‘경제협력지역’으로 변화시키고 남과 북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개성공단이 담당했다. 김진향 이사장이 개성공단을 “평화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개성공단을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개성공단은 남쪽의 자본과 기술, 북쪽의 노동력과 토지를 활용해 진정한 의미의 ‘남북 상생의 경제협력모델’을 창출했다고 평가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징’이라는 표현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개성공단이 처음 가동된 2004년을 시작으로 10년간 개성공단 기업체 수는 8배, 생산액은 30배로 늘었다. 2005년 1500만 달러로 시작해 10년간 누적 생산액은 23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개성공단 방문 인원은 누적 94만 명에 달했다.

2000년 이후 남북교역액은 개성공단이 전면 중단되기 전까지 꾸준히 증가해, 2015년 남북교역 규모는 27억 1500만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교류 건수에 있어서도 2000년 이후 총 470여 건, 이중 개성공단 관련 사업이 총 390건으로 약 80% 이상을 차지했다.

▲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조선) 노동자들 [사진 : 뉴시스]

남북의 경제협력, 나아가 남북 간 긴장 완화와 관계발전에 기여했던 개성공단은 남북관계에 따라 부침을 겪기도 했다.

2010년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건을 빌미로 북한(조선)에 대한 남북교역 중단과 대북 신규투자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북제재 조치 ‘5.24조치’를 발표해 개성공단을 축소하고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교역도 모두 중단했다. 2013년 4월 한미합동군사훈련으로 인해 잠시 가동중단을 겪기도 한 개성공단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북한(조선)의 4차 핵실험을 이유로 2월 전면 중단에 이른다.

남북경제교류협력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남북철도 연결, 그리고 금강산관광이다.

6.15시대였던 지난 2003년 경의선을, 2005년 동해선 일부를 복원한 남과 북은 철도로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다. 2007년, 한국전쟁 이후 56년 만에 경의선이, 57년 만에 동해선이 남북을 종단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활발하게 추진된 남북철도연결 사업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남북관계 경색으로 중단된다.

1998년 금강호 첫 출항 이후 6.15의 바람을 타고 2005년 관광객 100만 명을 돌파한 후 금강산관광은, 2008년 이후 10년 이상 멈춰 있다. 그간 금강산을 찾은 관광객은 200만 명이 넘었다.

6.15공동선언 발표로 활발했던 남북경제교류협력은 결국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모두 멈춰 섰다.

대북제재로 멈춰선 남북경협… 공동선언 정신으로 돌아가야

▲ 사진 : 뉴시스

지난해,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엔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4월 판문점선언에서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하고, “이미 채택된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관계 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 나가기로 했다. 9월 평양공동선언에선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우선 정상화하기로 했다. 연내 동·서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도 갖기로 했다. 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개성공단 전면 중단의 이유이기도 하면서 미국이 대북제재를 시행한 이유는 북한(조선)의 핵실험이다. 북한(조선)은 이를 1년이 훨씬 넘도록 중단했다. 그러나, 원인은 해소됐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개성공단은 여전히 폐쇄상태에 있다. 미국의 대북제재, 그리고 한미워킹그룹의 간섭과 통제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한국은 미국의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발언에 이어,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방한 직후 개성공단 기업인의 방북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1월 비건을 미국 측 대표로 해, 대북제재와 남북관계를 조정하는 ‘한미워킹그룹’ 출범 이후 미국은 사사건건 남북관계의 속도를 조절했다.

미국은 남북철도 연결, 그리고 금강산관광 재개 역시 제동을 걸었다. 지난해 8월,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 합의에 따라 남과 북은 남북철도 연결을 위한 경의선 북측구간 남북공동조사를 추진했다. 그러나 유엔군 사령부의 통행불허로 무산됐다. 연내 치르기로 한 동·서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은 한미워킹그룹을 거치고 나서야 지난해 12월26일 겨우 치를 수 있었다. 전문가들도 “대북제재와 관련없다”, “행정명령으로 재개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금강산관광 역시 대북제재에 묶여있다.

▲ 지난해 12월 26일 북한(조선) 개성시 판문역에서 열린 남북 동·서해선 철도, 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에서, ‘서울-평양 표지판 제막식’ [사진 : 뉴시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미국의 대북제재는 더욱 노골화됐다.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해 “아직 적기가 아니”라고 말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 “제재 유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철도·도로 연결 등 남북경제협력에 노력을 기울이던 문재인 정부에 한미워킹그룹은 한미사이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자리가 아니라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로 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김연철 통일부 장관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남북관계 발전은 북미관계의 발전과 발을 맞춰야 한다”면서 남북관계 발전에 속도조절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제재가 남북경제협력에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도 제2의 6.15시대, 판문점선언 시대를 열겠다는 시민, 사회단체들의 여론은 쉬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리얼미터가 지난 2월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한 국민여론을 조사한 결과, 찬성 68.9%, 반대 26.5%로 집계됐다. 지난 2017년 6월에 실시한 ‘개성공단 재가동에 대한 국민여론’ 조사(찬성 49.4% vs 반대 39.9%)에 비해 찬성 여론이 약 20%p 확대된 결과다. (사)겨레하나는 6.15공동선언 발표 19주년을 앞두고 지난 14일, 6150명이 작성한 금강산 방문신청서를 통일부에 직접 접수하는가 하면, 금강산 가기 운동은 지역과 단체들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 (사)겨레하나는 지난 14일 6.15공동선언 발표 19주년 맞아 6,150장 금강산 방문신청서를 통일부에 직접 접수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북남 사이의 협력과 교류를 전면적으로 발전시켜… 온 겨레가 북남관계개선의 덕을 실지로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4월 시정연설에선 “(대북제재는) 우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전인 것만큼 결코 그것을 용납할 수도 방관시 할 수도 없다…”면서 제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사 또한 명확히 했다. 6.15공동선언, 판문점선언을 합의했던 정신으로 돌아와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북 합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의지다.

지난달 17일, 정부는 3년 만에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자산점검을 위한 방북신청을 승인하면서 “기업인들의 조기 방북이 성사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남북경제협력과 남북관계 개선, 대북제재를 대하는 남쪽의 선택 역시 다른 데 있지 않다. 6.15공동선언과 이를 계승한 판문점선언에 답이 있다.

“나라의 통일 문제는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조혜정 기자  jhllk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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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부인 “그냥 아는 아저씨, 내가 아니면 결혼 못할 것 같았다.”

검사가 돈을 쫓아가면 스폰서 검사로 타락합니다
 
임병도 | 2019-06-19 09:02:0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지명됐습니다. 윤 후보의 이력이야 워낙 많이 알려져 있어, 언론은 잘 보도되지 않았던 그의 부인 관련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대부분 윤 후보자 부인의 재산이 많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윤 후보자가 부인과 결혼하게 된 사연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냥 아는 아저씨로 지내다 한 스님이 나서서 연을 맺어줘
돈도 없고 내가 아니면 결혼 못할 것 같았다.

윤석열 후보자 부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냥 아는 아저씨로 지내다 스님이 나서서 결혼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대표는 윤 후보를 왜 아는 아저씨라고 불러왔을까요? 김 대표는 윤석열 후보자보다 12살이 어립니다. 단순히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결혼 당시 윤석열 후보자의 나이는 53살이었습니다.

윤 후보자가 53살에 결혼했으니 재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초혼입니다. 김 대표의 말처럼 그냥 아는 아저씨처럼 살다가 옆에서 보다 못한 스님이 나서서 연을 맺어준 셈입니다.

윤석열 후보자의 결혼이 늦은 이유는 사법시험을 무려 9수 끝에 합격했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윤 후보자는 서울대 법대 재학 도중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학내 모의재판에서 검사역을 맡았습니다. 윤 후보자는 전두환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한동안 강원도로 도피하기도 했습니다.

윤 후보자는 서울대 법대 4학년 때 1차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차에서 계속 낙방하다가 1991년에야 합격합니다. 32살의 나이로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윤 후보자는 나이가 많았던 탓에 23기 사이에서는 형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윤석열 후보자보다 4살 어린 우병우 전 청와대 수석이 4 기수 선배이고, 14기였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고작 1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아저씨’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김건희 대표는 윤석열 후보자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 “가진 돈도 없고 내가 아니면 영 결혼을 못 할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결혼할 때 남편이 가진 것은 통장에 2000만 원이 전부
자기 명의 집도 없는 검찰총장 후보

김건희 대표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결혼할 때 보니 남편이 가진 것이라고는 통장에 2000만 원이 전부였다. 돈이 너무 없어 결혼 안 하려고까지 했다”라고 밝혔습니다.

김 대표는 윤 후보자가 돈이 없었던 이유로 “빚내서라도 자기가 먼저 술값 내고 밥값 내는 사람이라 월급이 남아나질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마 윤 후보자가 나이가 많았기에 형이라며 따르는 사람이 많아, 술값이고 밥값을 도맡아 낸 것으로 보입니다.

윤 후보자가 돈이 없는 것은 결혼하고 7년이 지났지만 똑같습니다. 2019년 3월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현황을 봐도 윤 후보자의 재산은 예금 2억 1300만 원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김건희 대표의 재산입니다.

김건희 대표의 재산을 살펴보면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의 토지와 서울 서초구에 주상 복합 건물 한 채가 있습니다. 이외에는 49억의 현금과 주식 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재산 내역 어디를 봐도 윤석열 후보자 명의로 된 집이 하나도 없습니다. 검찰총장 후보자가 집도 한 채 없이 살아온 것입니다.

윤 후보자가 재테크 등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그가 여주지청장 시절이었던 2013년 공직자 재산공개에서 잘 드러납니다. 당시 윤 후보자는 부인 재산 신고를 누락했다는 오해를 받았는데, 재산을 축소한 것이 아니라 대출금 4억 5000만원까지 포함해 과다 신고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윤석열 후보자는 “지난해 결혼해 처음으로 아내 재산을 신고하면서 착오가 생겼다”고 해명했는데, 착오가 아니라 재산 신고를 별다르게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검사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부동산이 하나 없었던 사람이 부인이 보유한 부동산을 신고하려니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부인 재산? 김건희 대표 재산이 맞다.
결혼 후 재산이 늘기는커녕 오히려 까먹고 있다.

만약 지금 윤석열 후보자가 이혼하면 재산분할은 어떻게 될까요? 윤 후보자 예금 이외에는 분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보유한 재산 대부분은 김건희 대표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 만들어 왔기 때문에 윤 후보자의 기여도는 0입니다.

“결혼 전에도 시아버지가 맨날 남편 빈 지갑 채워주느라 바빴다고 들었어요. 결혼 후 재산이 늘기는커녕 오히려 까먹고 있어요. 나중에 변호사 하면 그래도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그 기대도 접었습니다. 1년 동안 변호사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의뢰인들 혼내다 끝났다고 하더군요.”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 주간조선 인터뷰 )

언론은 윤석열 후보자 부인의 재산이 50억이 넘는 점을 앞다퉈 강조합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이미 결혼하기 전이었던 1990년대 IT 주식으로 종잣돈을 마련해 문화콘텐츠 등의 사업으로 재산을 만들었습니다.

김건희 대표는 윤 후보자를 가리켜 “남편은 거짓 없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부인이라 남편을 치켜세운 말은 아닙니다.

과거 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국회의원 당선 후 사법연수원 동기들끼리 축하 모임을 했습니다. 당시 윤석열 검사는 모임에 참석해 10분 간 말없이 술 한 잔만 마시고 떠났습니다. 박범계 의원은 “국회의원과 현직 검사가 사석에서 함께 있으면 검찰의 정치 중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에게 깨우쳐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검사가 돈을 쫓아가면 스폰서 검사로 타락합니다. 그런 면에서 윤 후보자는 평생을 돈이 아닌 검사의 길을 걸어간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있지만, ‘검찰 장악 저지’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윤 후보자 인사청문회에는 참여할 듯보입니다. 하지만 인사청문회 내내 윤 후보자의 부인 재산을 공격하며 꼬투리를 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집 한 채 없이 평생 검사로 살아온 윤석열 후보자에게 물을 것은 부인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가 아닙니다. 앞으로 검찰 개혁을 어떻게 해나가고 끝까지 국민에게만 충성하겠다는 굳은 의지입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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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노동자의 손과 발을 묶기로 작정했다”

“정부가 노동자의 손과 발을 묶기로 작정했다”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6/18 [23:16]  최종편집: ⓒ 자주시보
 
 

경찰이 지난 3~4월 국회 앞에서 열린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을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김 위원장이 간부들과 사전 공모해 국회에 무단 침입하는 등 불법폭력 시위를 주도한 혐의가 상당하고도주와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 신청 이유를 밝혔다.

 

이에 민주총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민주노총은 김 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에 대해 정부가 결국은 그릇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의 손과 발을 묶기로 작정했다며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 정책 추진에 거세게 저항하는 민주노총을 굴복시키기 위한 시도이며자유한국당을 비롯한 극우 집단들의 끊임없는 민주노총 때리기에 대한 편승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정가 구속하려 하는 것은 김명환 위원장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노동자의 삶과 노동이라며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모아 노동기본권 보장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근절을 위한 더욱더 힘찬 투쟁에 온 몸을 던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중당도 대변인 논평을 통해 김 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은 경사노위 불참에 대한 정치 보복이며적폐세력의 반격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 만들기라며 “‘너희도 민주노총 꼴 나기 싫으면 잠자코 순응하라는 대국민 협박에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민중당은 온갖 불법으로 경영권 승계하고 증거까지 인멸하는 재벌과는 희희낙락 맥주 마시며 기념사진이나 찍는 주제에 노동자에게 불법 시위를 죄로 묻다니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불법이 그렇게 죄라면 이재용부터 잡아 가둬라고 주장했다.

 

노동당도 성명을 통해 노동자들의 당연한 요구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대응은 노동존중 사회가 얼마나 기만인지를 다시 보여준다며 노동법 개악이 전제된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라며 민주노총 길들이기를 시도하더니이제는 민주노총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경찰은 당시 국회 앞 투쟁에서 민주노총 조합원 74명이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보고 이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 하고 있다민주노총 조직쟁의실 소속 간부 3인은 이미 구속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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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구속영장 신청에 대한 민주노총 성명

 

정부가 결국은 그릇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의 손과 발을 묶기로 작정했다.

 

경찰은 18일 온갖 혐의를 붙여 김명환 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이는 개별 사안으로 책임을 몰아 본질을 흐리려는 탄압에 불과하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 정책 추진에 거세게 저항하는 민주노총을 굴복시키기 위한 시도이며자유한국당을 비롯한 극우 집단들의 끊임없는 민주노총 때리기에 대한 편승이다.

 

민주노총은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삶과 노동을 대변하는 조직이다정부가 구속하려 하는 것은 김명환 위원장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노동자의 삶과 노동이다.

 

민주노총이 이 같은 겁박에 굴복한다 생각하는가정부가 자본의 탐욕과 구태에 무릎 꿇고 이전과 다름없이 후진국형 저임금장시간 노동체계를 유지하고 악화시키겠다는 의도를 보인 이상민주노총의 답변은 확실해졌다.

 

민주노총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모아 노동기본권 보장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근절을 위한 더욱더 힘찬 투쟁에 온 몸을 던질 것이다.

 

2019년 6월 18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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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노동신문 기고 통해 ‘북중친선’ 강조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6/19 11:18
  • 수정일
    2019/06/19 11:1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한반도 문제 관련 대화와 협상 진전 이루도록 추동”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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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19  09: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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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일 북한을 첫 국빈 방문하는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19일 <노동신문> 기고를 통해 북중친선 강화,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한반도 문제 진전 추동 의지를 밝혔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이날 시 주석은 ‘중조친선을 계승하여 시대의 새로운 장을 계속 아로새기자’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중조친선협조관계를 공고발전시킬데 대한 중국당과 정부의 확고부동한 입장에는 변함이 없으며 변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아울러 “중국 측은 김정은 위원장 동지께서 조선당과 인민을 이끌어 새로운 전략적 노선을 관철하며 경제발전과 인민생활개선에 총력을 집중하여 조선이 사회주의건설에서 새롭고 보다 큰 성과를 이룩하시는 것을 견결히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우리는 김정은 위원장 동지의 올바른 결단과 해당 각측의 공동의 노력에 의하여 조선반도에 평화와 대화의 대세가 형성되고 조선반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쉽지 않은 역사적 기회가 마련됨으로써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인정과 기대를 획득한데 대하여 기쁘게 보고 있다”면서 “중국 측은 조선동지들과 함께 손잡고 노력하여 지역의 항구적인 안정을 실현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함께 작성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이번 방문을 통하여 김정은위원장동지와 조선동지들과 함께 중조친선협조관계를 설계하고 전통적인 중조친선의 새로운 장을 아로새기려고 한다”고 밝혔다.

“전략적 의사소통과 교류를 강화하고 서로 배우면서 전통적인 중조친선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할 것”이고 “고위급 내왕의 훌륭한 전통과 인도적 역할을 발휘하여 중조관계발전의 설계도를 잘 작성하고 중조관계발전의 방향을 잘 틀어쥘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여러 급의 의사소통과 조율을 강화하고 당적교류를 심화시키며 국가관리 경험을 교류하여 자기 당과 자기 나라의 사업을 훌륭히 계승하고 훌륭히 발전시켜 나갈 것”이고 “친선적인 내왕과 실무적인 협조를 강화하여 중조관계발전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밝혔다.

시 주석은 “의사소통과 대화, 조율과 협조를 강화하여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 나갈 것”이라며 “중국 측은 조선 측이 조선반도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올바른 방향을 견지하는 것을 지지하며 대화를 통하여 조선 측의 합리적인 관심사를 해결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조선 측 및 해당 측들과 함께 의사소통과 조율을 강화하고 조선반도문제와 관련한 대화와 협상에서 진전이 이룩되도록 공동으로 추동함으로써 지역의 평화와 안정, 발전과 번영을 위해 적극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18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14년 만에 이뤄지는 이번 방북 기간 시 주석이 김정은 위원장과 회견, 회담하고 평양 시내에 있는 ‘중조우의탑’ 등을 방문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 주석은 오는 28~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계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확대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일주일 사이에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을 모두 만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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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에 묻혀있는 진실, 유해의 주인 찾아낼 수 있을까?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19-06-18 10:50:31
수정 2019-06-18 10: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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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뉴시스
 

10세 아동을 성폭행한 35세 남성의 형량이 2심에서 대폭 감형돼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누리꾼들은 2심 재판부 재판장의 이름과 사진을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며, ‘아동 성폭행범 감형 판사를 기억하자’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보습학원 원장 이 씨(35)는 지난해 4월 채팅앱으로 만난 초등학생 A 양(10)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소주 2잔을 마시게 한 뒤, 취한 피해자의 양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눌러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 13일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판사 한규현)는 이 씨의 항소심에서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혐의를 인정해 징역 8년을 선고한 1심을 깨고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아울러 이 씨의 정보를 5년간 공개하고, 10년간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의 취업제한과 보호관찰 5년을 명령했다.

1심과 2심의 형량을 가른 것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혐의 인정 여부다. 이 씨는 애초 해당 혐의로 기소됐고, 1심은 이를 유죄로 봤다. 해당 혐의는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중범죄다.

그러나 2심은 강간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 씨가 A 양을 ‘폭행·협박’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대신 13세 미만 미성년자와 성행위를 하면 폭행·협박 여부와 관계없이 처벌하는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를 인정했다. 형법은 해당 혐의를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선고 직후 각종 SNS는 한규현 판사의 이름과 사진으로 도배됐다. ‘자기 자식이어도 그랬을까’, ‘국민 법 감정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등 반응이 터져 나왔다. 다음 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아동 성폭행범을 감형한 ***판사 파면하라”라는 제목으로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신청인은 “어떻게 아동과의 관계를 합의라고 인정할 수 있는지”라며 “가해자들의 감형은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나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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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안 때렸으니 강간 아니다?
35살 남성이 10살 여아 눌렀는데 ‘폭력’ 아니라는 법원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서울고법은 지난 17일 이례적으로 사후 설명자료를 배포하며 해명에 나섰다. 선고와 동시에 판결문 설명자료를 배포하는 일은 종종 있으나, 논란이 된 판결 내용에 대해 사후에 해명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법원은 피해자 진술만으로 이 씨의 폭행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경찰 조사 시 피해자 진술을 녹화한 영상물만으로 ‘이 씨가 손으로 피해자의 양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누르는’ 방법으로 폭행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법원은 “(영상물 속) 피해자는 ‘이 씨로부터 직접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라고 진술했는데, 조사관이 ‘이 씨가 그냥 누르기만 한 거야?’라는 취지로 묻자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라며 폭행 여부 관련 경찰 조사가 불충분했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의 나이가 만 10세 불과하다는 사정을 염두에 놓고 살펴봐도, 이 씨가 피해자의 몸을 누른 행위가 피해자가 반항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의 폭행·협박이라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재판부는 피해자가 법정 진술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했지만, 피해자가 증인 출석이 어렵다는 의사를 밝혀 무산됐다고 법원은 덧붙였다.

법원의 이러한 해명은 상식적으로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35세 성인 남성이 10세 여아의 몸을 눌렀다면 강간죄의 구성요건인 ‘폭행’에 해당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현행 법체계는 피해자가 반항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어야 강간죄를 인정한다. 이른바 ‘최협의설’은 피해자의 저항 여부로 폭행·협박을 가장 좁게 해석해 현실 속 성폭력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두 사람의 물리력 차이를 생각한다면 최협의설로 판단해도 피해자의 저항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충분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강간죄 구성요건인 ‘폭행’은 주먹 등으로 신체를 때리는 행위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반항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의 물리력까지 모두 폭행으로 간주한다. ‘이 씨로부터 직접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라는 피해자 진술을 근거로 이 씨의 강간 혐의에 면죄부를 준 법원이 비판받는 이유다.

가해자 의심한 1심은 유죄
피해자 의심한 2심은 무죄

2심 판단이 잘못된 이유는 1심과 비교해보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피해자 진술만으로 강간죄를 판단할 수 없다던 2심과 달리, 1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을 토대로 이 씨의 강간 혐의를 유죄로 봤다.

1심은 피해자 진술이 구체적이고 자연스러워 믿을만하다고 판단했다. 2심이 강간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근거로 든 ‘이 씨로부터 직접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라는 피해자 진술에 대해, 오히려 1심은 “솔직하다”라고 평가했다.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는 증언임에도 피해자가 숨기지 않고 말해 진술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두 사람의 나이 차이 등을 생각하면 가해자가 몸을 누르는 행위만으로도 피해자가 저항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 씨의 폭행을 인정한 것이다.

2심 재판부는 가해자의 진술 번복을 고려하지 않았다. 1심은 이 씨의 강간 혐의를 인정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의 진술 신빙성을 따졌다. 조사 과정에서 처음 이 씨는 피해자와의 성행위 자체를 부인하다가 DNA 증거가 나오자 ‘성관계는 있었지만, 성폭력은 아니다’로 말을 바꿨다.

이번 판결에서 사법부가 여전히 아동·청소년 성폭력 범죄를 바라보는 시각이 형식적인 법리에만 치우쳐져 있음이 드러났다. 13세 미만 미성년자와의 성행위를 무조건 처벌하는 미성년자의제강간죄의 존재 이유를 생각할 때, 직접적인 폭행·협박 여부가 아동·청소년 성폭행범의 형벌을 결정하는 중대한 기준이 된 이번 판결은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다.

폭행·협박은 가중 처벌의 요소일 뿐, 그것이 없었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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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기득권 안주라는 달콤한 유혹을 벗어던져야 한다

<시론> 소수기득권과 부정의, 민중과 정의의 요구앞에서 양자택일해야 한다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6/18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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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보통 그 자리를 차지하기위해서 온갖 미사여구와 화려한 언변을 동원해야하는 자리이다. 군사깡패도당은 말할가치조차 없지만 소위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인물들조차도 온갖 달콤한 말로 국민들을 현혹하고 구슬러서 일단은 그 자리에까지 올라가고 보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가지는 속성이 아닌가하고 그 구성원들이 이제 여기는 상황이다. 이것은 정치권력에 대한 대중적 신뢰가 산산히 깨져버린 이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암담한 단면이 아닐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지난 대선에 나서서 온갖 화려한 수사로 자신이 당선되면 무슨 무슨 일을 해주겠다, 어떤 어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온갖 있는 없는 약속을 다해서 그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바로 그러한 국민대중의 여망을 안고 행정부수반이라는 최고결정권자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자세는 그가 과연 그같은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는지 조차도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는 이석기 의원이나 노조 통일인사 등 양심수들의 석방, 납치된 북식당 종업원의 귀환조치 등 마음만 먹으면 할수있는 최소한의 조치조차도 취하지 않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자세는 한마디로 촛불정권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스러운 철저한 전대 보수정권의 지속, 그것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것들이다. 대체 무엇이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다는 말인지 묻고싶다. 
 
그 가운데서도 국민들과 한 가장 큰 약속이 바로 부정부패를 뿌리뽑고 정의가 살아 숨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부의 불균등해소 부정부패척결 재벌개혁 양심수석방 규제개혁 대미종속탈피 사드폐기 갑갑한 남북합의 실천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국민들은 제대로 나가고 있다고 느끼질 못하고 있다.
 
 
대통령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국민들의 여망을 대변하지 않고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는 것일까. 그는 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일까. 그가 변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 그런 인물이던가.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자리란 국민들의 온갖 소망을 대변하는 자리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실상은 기득권을 고수하고 지켜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즉, 일단은 그 자리에 올라가봐야 그 인물의 본질적인 정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당선되기 전에 아무리 꿀발린 소리를 해 봐야 그것은 하나의 신기루일 뿐인 것이다.  막상 그 자리에 올라간 이후에 기득권의 편에 서느냐 아니면 민중의 편에 사느냐는 오로지 그 인물의 됨됨이와 그릇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된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지금 대통령과 집권당은 충분히 할수도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기본적인 일 조차도 방기하고 또 외면하고 있다. 양심수석방 같은 최소한의 조치조차도 외면하면서 마치 야당등 기득권의 저항으로 인해 할일을 못하는 것처럼 대립구도로 만들며 민중들의 눈을 호도하기에 급급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것은 다분히 의도된 그들만의 정략적 정쟁이며 기득권체제를 개선시킬 의향이 배제된 그들만의 닭싸움식 대척구도를 즐기고 있다는 말이된다.  
 
국민대중들은 지금 엄청난 회의와 함께 정치염증을 느끼고 있다. 적폐를 청산해 줄 절호의 기회를 놓칠수도 있다는 안타까움으로 비판도 지지도 할수 없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여론이 양분되고 국론은 분열되고 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면 국민들은 또 다시 분노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꼭 때를 놓친후에 가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개혁을 못했다고 땅을 칠 것인가. 얼마나 더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인 자세를 보여줄 것인가.
 
 
촛불민심은 지금의 문재인 정권에 대해 둘도 없는 기회를 주었다. 천금과도 바꿀수 없는 민심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이 끝까지 나몰라라하고 이런 민심을 외면한다면 성난 민심은 추호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자리, 집권당의 자리가 그리도 느슨할 수 있다고 여겼다면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적폐에도 못하고, 재벌에도 못하고,  미국에도 말 못하고, 오직 야당만을 상대로 한 인기대결 여론조사 결과만 내세워서 무얼 어쩌자는 말인가. 그것이 한때 인권변호사였던 대통령의 정부가 취해야 할 자세인가. 
 
대체 무엇을 하자는 말인가. 그저 검찰이나 내세워 뒷조사나하고 몇몇 구속시킨다고, 행사장에 가서 몇마디 진보적인 발언 따위로 차별성을 보인다고해서 이 나라가 달라지고 이 땅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대다수 정책들에서 재야세력과 시민단체 노동자대표 단체들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독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촛불정부가 가야할 길인가. 지금 상황에서 재벌의 경제기여를 강조하며 삼성의 재벌범죄자와 함께 동행하면서 재벌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기계적인 중립을 취하는것이 과연 국민들의 개혁여망에 부응하는 행위인가. 언제까지 어처구니없는 촛불정부 흉내를 내자는 것인가. 
 
문재인 정권은 이제 반도 지나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자신들의 뿌리라는 참여정부에서 저지른 실수를 수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이같은 자세가 계속된다면 민심은 철저하게 촛불의 배신자들로부터 등을 돌릴 것을 정녕 모른다는 말인가. 
 
대통령은 스스로가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달콤한 유혹을 먼저 벗어던져야 한다. 소수기득권과 부정의, 민중과 정의의 요구앞에서 이제는 양자택일해야 한다. 권력의 달콤한 맛에젖어 복지부동하는 아랫사람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본인에게 적폐청산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스스로가 계속해서 이리 저리 눈치를 보면서 지금처럼 양다리를 걸치다가는 정권자체가 공중분해되고 다시 적폐들의 세상이 다가올 것이다. 그 험악한 꼴을 국민들이 또 다시 감당하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박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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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남북 정상회담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인터뷰]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2019.06.18 09:50:23
 

 

 

 

이달 말로 계획된 한미 정상회담이 북한 비핵화 협상에 분수령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이전에 남북 정상회담이 필요하다며 재차 북한에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남북 정상 간 먼저 만나 비핵화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을 설득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미 정상회담 전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실제 북한 비핵화 협상에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지난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책임이 남한에도 있는 만큼, 남북 정상회담의 목적을 북한의 비핵화에만 한정 지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김동엽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지난해 6월 12일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올해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언급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미국에 의해 종전선언과 핵 신고를 교환하는 프레임이 만들어졌는데, 회담 이후 미국 내부 비판에 직면한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을 이어가기 위해 '핵 신고' 카드를 꺼내 들었다고 분석했다.  

갑작스러운 핵 신고 카드에 북한은 '강도'라는 표현을 쓰며 극렬히 반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1차 북미 정상회담의 합의 사항인 미군 유해 송환은 예정대로 진행했다. 이는 미국에 불만은 있지만 일단 협상은 이어가겠다는 의지로 해석됐다.  

그렇게 7~8월이 지나간 이후 9월 19일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핵 신고와 종전선언 교환이 북미 간 협상의 핵심이었던 이 때 남북은 이 프레임을 뛰어 넘어 영변 핵 시설 폐기라는 다른 카드를 제시했다. 종전선언과 핵 신고를 덮을 수 있는 더 큰 프레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남북은 평양공동선언 5조 1항에서 "북측은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우선 영구적으로 폐기하기로 하였다"고 합의하면서 검증 문제까지 들고 나왔다.  

이 합의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나쁘지 않은 그림이었다. 문제는 또 다른 당사자인 미국이 이 합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았고, 미국과 협의된 내용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김동엽 교수는 "한미 사이에 종전선언과 신고‧검증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한 공유된 의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조항이 한미 양측 간 사전에 논의된 결과였다면 이후 협상은 좋은 방향으로 풀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종전선언과 핵 신고를 영변 핵 폐기와 미국의 상응 조치로 덮어버린 상황에서 북한은 올해 2월 미국과 2차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여기서 북한은 영변 핵 시설 폐기와 5개의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결과는 회담 결렬이었다.  

김 교수는 "북한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남북 간 합의한 것을 미국에 요구한 셈"이라며 "따라서 이 회담은 북미 간 결렬이 아니라 남북 정상회담 5조 2항의 결렬이고 남북이 합의한 사항이 결렬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지금 북한이 남북 관계에서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태도로 나오는 것은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5조가 무산됐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9월 평양공동선언 전체가 불발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실제 북한의 매체들에서 남한에 중재자나 촉진자 역할 하지 말라고 하지 않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대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북 정상회담이 북미 정상회담을 견인하는 역할은 할 수 없는 것일까? 김 교수는 "아예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북미 간 협상에서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행동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남북 정상회담이 마치 북미 정상회담과 비핵화를 하기 위한 디딤돌인 것처럼 인식돼 있고 일정 부분 사실인 측면도 있긴 하지만,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면 자연스럽게 북미 비핵화 협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지, 남북 정상회담이 북미 정상회담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북한은 남북 간 9월 정상회담의 합의 내용을 가지고 남한이 트럼프를 설득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은 '남한은 우리와 만나봐야 또 우리를 설득하려고 할거야'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라며 "물론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남북 정상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는 중요하다. 남북 정상이 남북의 평화를 보여주는, 국제사회의 제재를 깨지는 않지만 담대함을 담은 내용이 필요하다"라고 주문했다. 

인터뷰는 지난 14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김동엽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프레시안 : 지난 2월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추가적인 정상회담은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다. 이에 어떻게 비핵화 협상의 돌파구를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는데, 이후 협상 가능성을 타진해 보려면 우선 2차 정상회담의 결렬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김동엽 : 2차 정상회담에서 북미 양측 모두 서로에 대한 이해 및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실기하고 실수하게 된 것인데, 북한은 실기, 실수라고 볼 수 있지만 미국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북한이 이렇게 실기, 실수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남한이 제공했다고 본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은 1차 북미 정상회담에 비해 남한이 아주 깊게, 간접적으로 개입됐다는 점에서 이러한 분석이 가능해 보인다.  

일단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 정상회담부터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회담에서 나온 북미 공동선언만 보자면 이 회담은 북한의 명백한 승리였다. 또 당시 회담에서 합의문에는 담겨있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시 발언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나 북한 <노동신문>, 또 회담 이후 나왔던 북한의 입장 등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데 북한은 1차 정상회담 이후 2~3달 동안 종전선언을 대단히 강조했다. 또 안팎에서 들려오는 여러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때 북미 간 종전선언과 관련한 약속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일부에서 제재와 연락사무소 이야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것을 보면 상당 부분 구체성이 있는 대화가 오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구체적인 조치가 담겨있지도 않았던 합의문을 들고 미국에 돌아갔을 때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미국에 돌아와서 본인이 북한과 이야기한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인식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합의문을 없던 것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종전선언과 북한의 핵 신고가 교환돼야 한다는 프레임이었다. 

이건 북한 입장에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프레임이었다. 북한 입장에서 종전선언은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하고 핵‧미사일 시험 유예한 것에 대한 미국의 대응조치라고 생각했다. 즉 북한은 이같은 조치를 비핵화 프로세스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고 미국으로부터 종전선언 정도는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즉 북한은 싱가포르의 북미 공동선언을 통해 비핵화 프로세스의 시동이 걸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4월 2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경제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어떻게 보면 치욕스럽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중국의 비행기를 빌려 타고 싱가포르까지 날아갔다. 이를 보더라도 김 위원장이 이미 비핵화를 향한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김 위원장은 인민들에게 미국의 군사적 압박이나 국제사회의 제재에 굴복해서 싱가포르행을 택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대신 미국과 담판을 통해 인민들이 경제에 매진할 수 있는 안보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핵을 사실상 내려놓으려는 상황에서 그러면 안보는 어떻게 하냐는, 내 자식들 군대에 가 있는데 국가 안전은 누가 지키냐는 생각이 인민들 사이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한 이유를 정당화하고 인민들의 불안함을 달랠 수 있는 카드가 종전선언이었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를 통해 종전선언을 받아 왔다고 하면 인민들은 김 위원장의 선택이 맞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김 위원장은 최소 9.9절 전에 이를 달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 돌아가서 엄청난 비판에 시달린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종전선언에 대한 확답을 주는 대신 '핵 신고'라는 또 다른 조건을 던졌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지난해 7월 평양에 들어가서 종전선언을 위해서는 비핵화와 관련해 북한이 더 많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자 북한은 폼페이오가 평양을 떠난 이후 미국이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를 들고 나왔다고 비난했다. 그렇지만 거기서 판을 깰 수 없었던 북한은 일단 북미 합의대로 유해송환은 진행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당시 양보하고 핵 신고와 종전선언을 교환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설사 북한이 양보해서 미국이 제시한 이번 허들을 넘었다고 치더라도 이후에도 허들은 계속 생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지금까지 세계의 모든 나라와 관계에서 강자가 패자를 굴복시켜야 한다는 프레임을 계속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북한은 일단 약속한 유해송환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이 허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지난해 9월 19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여기서부터 찾을 수 있다.  

프레시안 : 남북 정상회담이 왜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인가? 

김동엽 : 평양에서 열린 당시 회담의 결과를 보면 남북은 '종전선언 대 핵 신고' 라는 허들을 넘지 않은 상태에서 '장대높이뛰기'를 시도했다. 즉 기존에 북미 간 이야기되고 있던 차원을 넘어 영변 핵 시설을 폐기할테니 미국에게 싱가포르 합의 정신에 따라 다음 조치를 취하라는 식으로 협상의 프레임을 바꿨다. 남북은 9월 평양 공동선언 5조에 이 내용을 담았다. 

북한은 자신들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없앴다면서 이제 종전선언 하자고, 출발점에 들어섰다고 했는데 미국은 "그게 출발점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풍계리 정말 없앴는지 모르겠는데?"라며 검증이 더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북한은 5조에 검증을 이야기했고 1항에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실험장을 집어 넣었다.  
 

▲ 문재인(왼쪽)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 19일 평양 백화원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9월 평양 공동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즉 미래 핵의 물리적 장소인 풍계리와 미래 미사일과 관련한 물리적 장소인 동창리를 모두 없애고, 미국이 못믿겠다고 하니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이를 진행하겠다며 검증을 시사한 것이다. 물론 1항에는 동창리만 언급돼있으나 이는 풍계리에 대한 검증도 가능하다는 의향을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미국에서 종전선언을 못하겠다고 한 가장 큰 이유가 북한의 풍계리 폐쇄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북한이 미국에 "너네들이 여기 들어와서 직접 보라"고 한 것을 미국이 넙죽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검증단이 들어갔는데 북한 말대로 정말 풍계리가 모두 폐쇄됐다면 미국은 종전선언을 해줘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부분에 있어서 남한과 미국이 협의가 안됐던 것 같다는 점이다. 즉 한미 사이에 종전선언과 신고‧검증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한 공유된 의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조항이 한미 양측 간 사전에 논의된 결과였다면 이후 협상은 좋은 방향으로 풀렸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전에 논의된 것은 없었고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최선희 부상은 하노이에서 별도의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들은 영변 핵 시설을 폐기하는 대신 민생 부문의 5개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는 9월 19일 평양공동선언 5조 2항과 연관돼 있는 사항이다. (평양공동선언 5조 2항 : 북측은 미국이 6.12 북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즉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남북 간 평양에서 합의한 내용을 미국에 요구한 셈이다. 따라서 이 회담은 북미 간 결렬이 아니라 남북 정상회담 5조 2항의 결렬이고 남북이 합의한 사항이 결렬된 것으로 봐야 한다.  

지금 북한이 남북 관계에서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태도로 나오는 것은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평양공동선언의 5조가 무산됐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9월 평양공동선언 전체가 불발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 북한의 매체들에서 남한에 중재자나 촉진자 역할 하지 말라고 하지 않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대목 때문이다.  

프레시안 : 종합해보면 북한은 남북이 합의한 대로 북미 회담을 추진했고 이를 미국이 보장해줄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은 셈이다. 

김동엽 :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정상회담 당시 평양공동선언에 사인하기 직전 김 위원장과 단독 회담을 했다. 당시 회담 마치고 나오는 문 대통령의 얼굴이 상당히 어두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북한이 이 때 5조 2항에 언급돼있는 미국의 상응조치 부분에서 제재 해제를 요구한 것 같다. 즉 제재 해제를 위해 남쪽이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 같다. 

실제 남북 정상회담 끝나고 문 대통령은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문 대통령은 순방 중간중간에 계속 제재 해제 이야기를 했다. 여기서도 남한 정부가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했던 것 같다. 당시 정상회담에서 비핵화라는 문구를 집어넣는 대신 제재 해제에 대한 협조를 요청받은 셈인데, 대통령은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참모들이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를 말렸어야 했다.  

프레시안 :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부터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까지 남한의 상황 인식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고 보는 것인가?  

김동엽 :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고 본다. 평양공동선언에 넣은 내용을 미국에 설득했다면 2차 북미 정상회담은 성공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남한 정부가 이러한 노력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런 이야기는 안하고 대통령이 제재 이야기만 하다가 미국이 세게 견제하니까 사실상 북미 중매 역할을 끝낸거 아닌가 싶다.  

북미 양측이 하노이에서 만나게 됐는데 중매를 했던 이후에 남한은 '이제 만나게 했으니까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빠진 것 같다. 이렇게 놓고 보면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을 믿고 갔다가 결국 창피만 당하고 돌아온 셈이 된 것이다. 

북한의 실기는 경제적 발전을 해야한다는 김 위원장의 조급함과 상황 자체에 대한 안이한 판단, 여기에 남한의 중재 등이 맞물리면서 벌어진 일로 봐야 한다. 

프레시안 : 미국은 2차 북미 정상회담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나? 

김동엽 : 1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로 코너에 몰려있던 트럼프는 그래도 북한과 협상을 복원해보기 위해 종전선언 대 핵 신고라는 프레임을 만들어서 김 위원장의 양보를 얻어내려 했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으로 이 프레임은 사실상 없어져 버렸다. 게다가 문 대통령이 10월 이후에 제재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미국은 남한에 경고장을 날렸다. 그래서 우리가 중매 역할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북미 간 협상 상황을 6월 12일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2차 북미 정상회담을 '빅딜' 아니면 '노딜'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트럼프가 강자로서 북한을 굴복시킨 상태로 승전물을 가지고 워싱턴에 돌아갈 수 있으면 협상이 성과가 있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협상 결과물은 없는 것이었다.  

또 트럼프는 북한이 빨리 비핵화를 해서 성과를 내고 싶다는 조급함을 읽은 것 같다. 그걸 알고 북한에 더 센 요구사항을 던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핵화 협상의 답은 북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2차 북미 정상회담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래도 북한이 핵 실험과 미사일 시험을 하지 않는다고 언급했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즉 트럼프는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됐다고 하더라도 협상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한 지난해 5월 24일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 정상회담의 '목적' 바꿀 때  

프레시안 : 북한이 남한의 남북 정상회담 제의와 인도적 지원에 대해 일체 대응하지 않는 것이 핵 문제와 관련한 남한의 중재 역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가? 

김동엽 : 그렇다고 본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가장 큰 원인으로 북한은 자신들이 남한을 믿은 것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에 대한 불신도 있고. 

그런데 지금 비핵화 협상이 진척되지 않는 이유는 북미 간 서로에 대한 불신 때문은 아니다. 북한은 미국에 대한 불신이 있지만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를 할 것이라는 대목에서 북한을 불신하기보다는 오히려 신뢰하고 있을 수 있다. 싱가포르, 하노이까지 온 김정은을 통해 미국은 오히려 그의 비핵화 의지를 두 번이나 확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에게 비핵화에 의지가 있냐고 묻는 것은 '너가 비핵화 한다고? 너 비핵화 하는 순간 죽여버릴 건데 그래도 할 수 있어?'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으니 지금보다 더 꿇으라는 것이다. 즉 미국은 북한 비핵화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신뢰로 인해서 생기는 강자의 유혹에 빠져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는 미국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보장자 역할이 아니라 미국 내부를 움직이는 것에 힘을 써주는 역할이 더 필요하다.  

프레시안 : 이렇게 되면 앞으로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닌가?

김동엽 : 북한은 남북, 북미 관계를 따로 가져가려는 것 같다. 즉 북미 관계에서 남한의 중재나 촉진 역할을 기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 김동엽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이런 것이 북한 내부 인사에도 반영됐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교체됐는데, 이는 지난해부터 협상 국면을 만들어 온 서훈-폼페이오-김영철 라인을 더 이상 가동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즉 북한 입장에서는 그동안 유지됐던 남북미 라인이 필요없어지게 됐다는 뜻이고 이는 남북은 남북대로, 북미는 북미대로 가져가겠다는 의도가 들어간 것으로 해석된다. 남한이 미국을 설득하는 모습은 기대하지 않겠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 그러면 북미 간 협상에서 이제 남한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어진 것인가? 

김동엽 : 아예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북미 간 협상에서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행동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이 남북관계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마치 북미 정상회담과 비핵화를 하기 위한 디딤돌인 것처럼 인식돼 있고 일정 부분 사실인 측면도 있긴 하지만,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면 자연스럽게 북미 비핵화 협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지, 남북 정상회담이 북미 정상회담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긍정적인 선순환 관계가 되면 좋겠지만, 지금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서 미국의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남북이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남북 간 군사적 합의를 이행하고 사람이 오가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고 이를 국제사회에 보여준다면 그 자체로 미국을 설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프레시안 : 하지만 여전히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가지고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김동엽 : 우리가 북미 간 사안에 대해 전혀 개입하지 말자는 건 아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한 김 위원장의 친서만 보더라도 현재 남한이 상당히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지금까지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가지고 있던 구조를 깨자는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이 북미를 견인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난해 5월 26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은 꺼질 뻔한 1차 북미 정상회담의 불씨를 살렸다. 또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7~8월 교착상태를 보였던 북미 간 협상을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다시 시동을 걸게 했다. 결국 남북 정상회담이 1,2차 북미 정상회담의 디딤돌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는 남한의 역할에 대한 북한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북한은 남북 간 9월 합의 내용을 가지고 남한이 트럼프를 설득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은 '남한은 우리와 만나봐야 또 우리를 설득하려고 할거야'라는 생각을 갖게된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트럼프를 설득하겠다는 것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남북 정상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면 남북 정상이 어떤 메시지를 들고 나가야 할까? 저는 여기서 남북의 평화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이게 좀 교묘하게, 즉 국제사회의 제재를 깨지는 않지만 뭔가 좀 담대함을 담은 내용이 필요하다. 미국이 보면 기분은 나쁘지만 당장 직접적으로 견제할 수는 없는 것이 필요하다. 

김정은, '새로운 길'로 가나?  

프레시안 :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연말까지로 협상 시한을 사실상 정해놓은 상태다. 또 올해 신년사에서는 '새로운 길'을 언급하기도 했다. 북한이 북미 협상이 아닌 새로운 길을 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김동엽 : 북한이 유엔이나 국제기구, 국제사회에 식량 문제를 이야기하며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구조 신호를 보낼까? 아프리카 돼지열병 문제도 국제사회에 이야기한 이유가 뭘까? 하나는 정말 이게 문제적인 사안이고 북한이 대처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전 북한이었으면 국제사회에 이야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번에 이렇게 태도가 바뀐 이유는 '우리 국가 제일주의'와 '새로운 길'에 있다고 본다.  

북한은 지금 만들어 놓은 핵을 장기적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 핵을 내려놓고 경제 발전하고 국가를 정상적으로 가져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해내기 위해 가장 빠른 길은 미국과 담판이다. 지난해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미국이 '핵 신고' 카드를 들고 나왔음에도 북한이 협상 판을 깨지 않은 이유는 미국과 담판이 경제 발전과 정상국가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은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인 지난 3월 주중국, 주러시아, 주유엔대사를 평양으로 소집했고 중국과, 러시아와도 별로 사이가 좋지 않지만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우군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또 남한에 대해서도 실망은 했지만 남북 관계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고 있다. 그렇게 남북이 나름 계속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국제사회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내용에 명분이 생길 수 있다. 이게 시간이 걸리겠지만 계속 이러한 방향으로 만들어 가려는 생각이 북한에 있는 것 같다. 북미 간 담판이 아닌, 정교한 '플랜 B'를 만드는 것이 북한의 새로운 길이라고 본다. 
 

▲ 지난 1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 전원회의를 주재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로동신문


김 위원장은 연말까지는 지름길을 생각하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자력 갱생'을 바탕으로 먼 길을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하려면 주변국뿐만 아니라 특히 남한과 잘 지내야 한다. 남북관계가 나쁜데 국제사회에서 평화나 비핵화를 이야기할 수 없지 않나? 그러니까 이를 통해 국제사회와 소통하려고 할 것이다. 대북 제재를 통해 굴복시키려는 세력을 '닭 쫓던 개'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완전히 미일 동맹으로 붙어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유연함과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 한미동맹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남북이 손을 놓지 않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남북이 한반도의 평화를 전달할 수 있는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즉 남한에서 북한에 이번에는 북미 정상회담이나 비핵화 이야기하지 말고 남북 이야기하자고 어젠다를 던지면 북한도 나올 가능성이 높다.  

덧붙여 북한이 연말을 제시한 이유는 북한이 미국의 정치 일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통령 선거가 있으면 선거 앞뒤로 6개월에서 1년 동안은 뭔가를 하기가 어렵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내년에 있기 때문에 북한은 그걸 알고 연말이라는 시한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전망도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크게 양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남북관계를 원활하게 가져가면 이것 때문에 미국이 움직일 수도 있다.  

프레시안 : 북한이 한미 연합 군사 훈련에 대한 반발로 지난달 초에 방사포와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김동엽 : 북한의 반응을 너무 확대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북한은 상대방의 훈련에 대한 자신들 자체 매뉴얼에 따라 그들 입장에서 당연히 해야 할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본다. 또 이렇게 해야 나중에 협상 국면에 가서 이를 하나의 카드로 쓸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또 남쪽만 훈련하고 북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인민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점도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군의 사기 문제도 걸려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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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에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물려주자!”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100인 청와대 앞에서 삭발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6/18 [07:52]  최종편집: ⓒ 자주시보
 
 

▲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 100인이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집단 삭발식을 진행했다. (사진 : 학비노조)     © 편집국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학교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100인 집단 삭발식을 가졌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이하 학비노조)는 17일 오전 11시 청와대 사랑채 옆 도로에서 집단삭발식 및 대통령 공약이행 촉구 기자회견을 공정임금제’ 시행과 교육공무직 법제화’ 등을 요구했다.

 

▲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진 : 학비노조)     © 편집국

 

학비노조는 오늘 학교비정규직 여성노동자 100인의 청와대 집단 삭발은 3년차 문재인정부 노동정책을 평가하는 상징적인 자리가 될 것이라며 왜 보수야당과 재벌들적폐세력의 공격에 초심을 잃고 운전대를 돌리는가?”라고 현 정부를 비판했다.

 

학비노조는 공무원 최하위 직급의 60~70% 수준인 학교비정규직의 임금을 80%수준으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며 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격차 80%의 공정임금제는 2017년 더불어 민주당 대선공약집 87페이지에 있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학비노조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50%가까이를 차지하는 학교비정규직은 작년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에 따른 가장 큰 규모의 피해 직군이라며 단체교섭으로 어렵게 만든 복리후생비가 산입범위에 포함되면서 일부 직원은 작년보다 임금이 줄어들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 집단 삭발식을 진행하고 있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진 : 학비노조)     © 편집국

 

또한 학비노조는 전체 교직원의 41%를 차지하는 학교비정규직을 당당한 교육의 주체로 인정해 달라며 교육공무직에 대한 법제화를 요구했다학비노조는 교육공무직법은 2016년 현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야당국회의원으로 대표발의하고 100명 가까운 국회의원이 동참했던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학비노조는 전국 교육청이 두 달 넘게 집단 교섭을 파행시켰다며최근 시작된 본 교섭에도 불성실하게 임한다면 7월 초 총파업에 나서겠다고 예고했다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는 교육부 17개 시도교육청과 집단교섭을 진행하고 있으나, 2달째 교섭절차조차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학비노조는 18일 오전 11시 파업찬반투표 결과발표 및 총파업 선포 전국 동시다발 기자회견을 열고, 7월 2일 최종 총파업 돌입 기자회견을 개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 삭발로 7월 총파업 결의를 다지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사진 : 학비노조)     © 편집국

 

기자회견을 마친 뒤 삭발식이 이어졌다. 100명의 노동자들이 삭발을 거행하자 곳곳에서 울음들이 터져 나왔다.

 

학비노조의 기자회견 후 서비스연맹 차원으로 ‘7월 총파업 승리결의대회를 개최하고 광화문 정부종합청사까지 행진을 벌였다. 

 

▲ 청와대 측에 항의서한을 전달하려는 참가자들. (사진 : 학비노조)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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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 집단삭발식에 임하는 학교비정규직노동자

학교비정규직 정규직화 대통령 약속 이행 촉구” 기자회견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100인의 삭발은 유래가 없는 투쟁이다.

 

오늘 학교비정규직 여성노동자 100인의 청와대 집단 삭발은 3년차 문재인정부 노동정책을 평가하는 상징적인 자리가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를 향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바램은 한결같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대통령의 약속을 지켜주라는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으로 양극화를 해소하려면 확실히 해달라는 것이다왜 보수야당과 재벌들적폐세력의 공격에 초심을 잃고 운전대를 돌리는가촛불로 이번 정부를 탄생시킨 노동자들은 이렇게 삭발과 눈물로 여전히 호소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은 올해 2019년이 대통령의 학교비정규직 정규직화’ 약속 이행을 받아낼 마지막 해라고 생각한다마지막이기에 더 절절한 마음으로 투쟁한다.

 

먼저공무원 최하위 직급의 60~70% 수준인 학교비정규직의 임금을 80%수준으로 올려 달라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격차 80%의 공정임금제는 2017년 더불어 민주당 대선공약집 87페이지에 있는 내용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50%가까이를 차지하는 학교비정규직은 작년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에 따른 가장 큰 규모의 피해 직군이다단체교섭으로 어렵게 만든 복리후생비가 산입범위에 포함되면서 일부 직원은 작년보다 임금이 줄어들게 되었다.

 

2019년 집단교섭의 사용자 측 당사자인 교육부와 학교비정규직의 실질 사용자인 정부가 책임있는 입장을 보여 달라!

 

둘째국가적 차원에서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학교비정규직 즉, ‘교육공무직에 대한 법제화를 요구한다.

 

전국적으로 통일된 정원 배치기준과 인건비 예산 기준이 마련하고전체 교직원의 41%를 차지하는 학교비정규직을 당당한 교육의 주체로 인정해 달라교육공무직법은 2016년 현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야당국회의원으로 대표발의하고 100명 가까운 국회의원이 동참했던 사안이다.

 

현재 학교비정규직의 법적 사용자인 시·도 교육감들에게 강력히 경고한다. 2달째 계속된 집단교섭 파행의 책임은 권한없는 교섭위원을 내세우고 뒤에 않은 시·도 교육감들이다.

 

1년 전 선거 시기 진보교육감임을 내세워 맺은 학교비정규직 차별해소에 대한 정책 협약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중앙노동위원회 조정을 통해 어렵게 시작한 본교섭조차 파행이라면 우리는 7월 무기한 총파업으로 사용자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번 삭발에는 정년퇴직을 앞둔 조합원이 다수 동참한다취업준비생인 딸이 직접 엄마의 머리를 깍아준다특성화고 졸업생과 취업을 앞둔 대학생이 머리를 깍아준다.

 

오늘 머리에 흰서리 내린 노동자들이 삭발까지 하는 것은 단순하다.

 

본인은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살아왔지만 아이들에게만은 비정규직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정규직/비정규직이 사회적 신분이 되어버린 이 더러운 세상을 내버려 둘 수 없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의 완전한 이행을 요구하는 민주노총의 7월 총파업에 5만 5천 조합원의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은 가장 많은 파업 대오로 앞장설 것이다.

 

학교비정규직의 눈물어린 집단삭발에 대통령이 약속 이행으로 화답해주길 촉구한다.

 

■ 7월 강력한 총파업으로 집단교섭 승리하자!

■ 2019대통령은 학교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약속을 이행하라

■ 우리 아이들에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물려주자!

 

2019년 6월 17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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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층 옥상에 섰다, 행렬의 바닥도 끝도 안 보였다

[홍콩 현지취재] 이희훈 기자, 200만 운집한 홍콩 '검은행진' 24시간 추적기

19.06.17 23:07l최종 업데이트 19.06.18 07:23l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하며 애드미럴티역 인근을 지나고 있다. 이날 주최측 추한 참가자는 200만명이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하며 애드미럴티역 인근을 지나고 있다. 이날 주최측 추산 참가자수는 200만명이다.ⓒ 이희훈
   
홍콩의 중심이 검은 물결로 출렁였다. 검정색 티셔츠를 입고 흰색 리본을 단 홍콩 시민들이 길거리로 몰려나와 대규모 행렬을 이뤘다. 

홍콩정부가 추진했던 범죄인 인도법, 속칭 송환법이 추진되자 시민들과 야당은 거센 항의의 행동을 시작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와 저항하기 시작했고 정부는 무력진압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굴하지 않고 더 큰 집회와 파업을 예고했다.  

그 과정에서 고공시위를 하던 30대 남성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검은 행진'의 규모를 키우는 도화선이 되었다. 

격화되는 사회분위기에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집회가 열리기 전날인 15일 송환법 추진을 잠정 연기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16일 주최 측 추산 20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현지에 파견된 <오마이뉴스> 이희훈 기자가 홍콩 시민들이 벌였던 저항의 24시간을 시간대별로 기록했다.


[16일, 11:00] 노란 우비 청년의 죽음, 애도의 물결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열릴 예정인 16일 오전 홍콩 애드미럴티역 인근 공사현장에서 고공시위를 벌이다 추락사한 량씨를 추모하는 한 시민이 흰색 리본을 달고 있다.
16일 오전 홍콩 애드미럴티역 인근 공사현장에서 고공시위를 벌이다 추락사한 량씨를 추모하는 한 시민이 흰색 리본을 달고 있다. ⓒ 이희훈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열릴 예정인 16일 오전 홍콩 애드미럴티역 인근 공사현장에서 고공시위를 벌이다 추락사한 량씨를 추모하던 시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16일 오전 홍콩 애드미럴티역 인근 공사현장에서 고공시위를 벌이다 추락사한 량씨를 추모하던 시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이희훈
 
지난 밤, 송환법을 반대했던 30대 남성 량아무개씨가 홍콩정부청사와 가까운 애드미럴티역 부근 대형 쇼핑몰 외벽공사현장에서 추락했다. 소방당국과 경찰이 출동해 에어매트가 깔렸지만 사고를 막지 못했고 이번 시위의 첫 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청년의 죽음에 홍콩시민들은 흰 꽃과, 종이백합, 종이학 등으로 추모를 했고 그 규모는 점점 늘었다.

[16일, 13:00] 전장에 들어설 준비

홍콩 시내의 중심 코즈웨이 베이 골목 구석구석, 상점 곳곳마다 검정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검은 행진'에 참가하기 위한 홍콩시민들이 빅토리아 파크에 도착하기에 앞서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했고 주변에는 마이크와 확성기를 들고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사퇴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한 두꺼운 피켓 뭉치를 든 사람들은 행진 참가자들에게 재빠른 손놀림으로 메시지가 담긴 피켓을 나눠줬다. 

[16일, 14:30] 검은행진의 시작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결집 장소인 빅토리아 파크로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었다. 공원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히 운집한 군중은 홍콩 정부가 추진했던 '범죄인 인도법'을 향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무대에 설치된 스피커로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고 군중들의 함성이 모이자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 행렬은 움직이는 듯 움직이지 않는 듯 서서히 앞을 향해 전진 했다. 

[16일, 17:00] 다시 찾아간 코즈웨이베이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 참가자들이 홍콩 중앙정부청사를 향해 행진하는 모습을 목씨가 아파트 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다.
16일 오후 ‘검은 행진’ 참가자들이 홍콩 중앙정부청사를 향해 행진하는 모습을 한 주민이 아파트 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오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 나아가려 했지만 모든 골목은 검정 옷을 입은 사람으로 가득 차 쉽지않았다. 멀리 15층 높이의 아파트가 보였다. 걸어서 10분이 걸리지 않을 거리를 '익스큐즈미' 수 천번을 외치며 겨우 도달했고 마침내 옥상에 올랐다.

옥상 난간에 서니  두 가지가 보이지 않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 틈을 뚫고 나온 게 믿어지지 않았다. 홍콩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순간 몇 년전 광화문의 함성이 떠올랐다.

[16일, 18:00] 온종일 걷고 또 걷고

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뛰고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발이 너무나 아프고 지쳤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른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잠시의 휴식을 접고 조금이라도 빨리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로 향했다. 하지만 지하철에도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는게 보였다. 

[16일, 20:00] 행렬 속 혼자 멈춘 노란 우비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오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검은행진의 사람들은 조금씩 조금씩 중앙정부청사로 움직이고 있었다. 해가 지고 하늘은 검푸른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추락사한 량씨의 추모 장소에 추모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수 많은 인파 때문에 길을 건널 수 없어 맞은편에서 지켜보는 순간 한자로 '반송중(反送中.중국송환반대)'이라고 적힌 노란 우비가 보였다. 노란 우비는 량씨가 숨질 때 입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고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았다. 목적지를 눈 앞에 두고 행렬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6일 22:00] 우산혁명의 성지, 다시 모인 평화 행진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이 중앙정부청사 앞에서 검은 복장을 하고 피켓을 들고 서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이 중앙정부청사 앞에서 검은 복장을 하고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이희훈
 
5년전 홍콩 우산혁명이 일어난 중앙정부청사에 첫 시위가 열린 지난 12일 경찰의 고무탄, 최루탄 등으로 폭력진압이 일어났다. 이날 행진에는 경찰의 저지나 무력진압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코스의 마지막인 중앙정부청사의 고가 도로 위에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지막 행렬을 기다리며 잠을 청하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16일 21: 30] 환호성 속 울리는 하나의 외침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끝난 16일 오후 민주당 소속 로이 궝천유 의워이 중앙정부로 모인 시위 참가자들을 향해 발언을 하고 있다. 로이 의원은 폭력 진압에 대한 경찰의 진정성 있는 사과,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 등을 촉구했다.
‘검은 행진’이 끝난 16일 오후 민주당 소속 로이 궝천유 의원이 중앙정부에 모인 시위 참가자들을 향해 발언을 하고 있다. 로이 의원은 폭력 진압에 대한 경찰의 진정성 있는 사과,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 등을 촉구했다.ⓒ 이희훈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끝난 16일 오후 민주당 소속 로이 궝천유 의워이 중앙정부로 모인 시위 참가자들을 향해 발언을 하고 있다. 로이 의원은 폭력 진압에 대한 경찰의 진정성 있는 사과,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 등을 촉구했다.
‘검은 행진’이 끝난 16일 오후 민주당 소속 로이 궝천유 의원이 중앙정부에 모인 시위 참가자들을 향해 발언을 하고 있다. 로이 의원은 폭력 진압에 대한 경찰의 진정성 있는 사과,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 등을 촉구했다.ⓒ 이희훈
 
'로이, 로이, 로이, 로이" 군중들이 반복해서 외쳤다. 이내 확성기를 통해 목소리가 퍼져 나왔고 사람들은 환호성과 박수를 보냈다. 홍콩 민주당 소속의 로이 궝천유 의원이었다. 군중 사이를 뛰어다니며 집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송환법 반대와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 경찰의 폭력진압의 진정성 있는 사과 등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그의 검은 물결 속 외침은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었다.

[17일 24:00] 중앙정부청사 한켠에 밝혀진 촛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행진을 마치고 중앙정부청사 주변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행진을 마치고 중앙정부청사 주변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 ⓒ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행진을 마치고 중앙정부청사 주변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행진을 마치고 중앙정부청사 주변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 이희훈
 
 행진에 참여했던 일부 시민들은 대중교통이 끊기기 전 자리를 떠났지만 수많은 시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부종합청사 한켠에 촛불을 든 사람들이 보여 불빛을 쫓아가봤다. 고공농성 중 사망한 량씨의 임시분향소가 만들어져 있었고 촛불을 세워 추모했다. 추모의 메시지가 적힌 메모장도 벽면을 채웠다.

[17일 03:00] 끊이지 않는 평화를 향한 찬송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평화노래 밤샘 농성을 이어가던 시위 참가들이 바닥에 누워 쪽잠을 자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평화노래 밤샘 농성을 이어가던 시위 참가들이 바닥에 누워 쪽잠을 자고 있다. ⓒ 이희훈
 
중앙정부청사 광장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성가대에서 부를 법한 거룩한 분위기의 찬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확성기를 중심으로 눕거나 앉아 한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대부분 차가운 바닥에 누웠지만 순서를 바꿔가며 노래를 이어갔다. 

"싱 할렐루야, 싱 할렐루야, 싱 할렐루야 투 더 로드"

네 소절의 노래와 함께 동이 터 올랐고 도로를 점거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몇백명을 남기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17일 09:00] 충돌 없이 끝난 경찰과의 대치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도로점거 철수를 요구하며 다가오자 한 시민이 손 피켓을 들고 마주하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해산을 요구하며 다가오자 한 시민이 손 피켓을 들고 마주하고 있다.ⓒ 이희훈
'폭력진압' 대신 투입된 협상 경찰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도로점거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12일 '폭력진압'으로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어 경찰은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 '폭력진압' 대신 투입된 협상 경찰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해산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12일 폭력진압으로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어 경찰은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희훈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도로점거 철수를 요구하며 대치하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해산을 요구하며 대치하고 있다.ⓒ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도로점거 철수를 요구하던 경찰들이 자리를 떠나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도로점거 철회를 요구하던 경찰들이 자리를 떠나고 있다.ⓒ 이희훈
 
날이 밝자 거리에 긴장감이 돌았다. 밤을 새운 일부 시위참가자들이 헬멧을 쓰고 양팔에 비닐 랩을 싸기 시작했다. 취재하던 기자들도 행진 때는 쓰지 않던 헬멧을 착용하고 방독면도 준비했다. 

마침내 경찰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하지만 무장을 하지 않은 협상 전담 경찰관들이 선두에 있었고 시민들과 경찰은 대치했다. 일부 점거물을 철거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시민들과 마이크로 대화하던 경찰은 이내 모두 철수하며 아무런 충돌 없이 상황이 끝났다.

[17일 11:00] 평화롭게 마무리 된 검은행진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도로를 점거했던 시위대는 자리를 떠났고 거리는 평화를 되찾았다. '홍콩의 자유'를 외치며 행진한 200여만 시민의 행진은 폭력없이 끝났고 시민들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한 홍콩을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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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점점 싫어지는 이유


[기획연재] 6.15와 판문점선언 (2) 6.15와 반미자주

6.15공동선언 발표 19돐을 맞아 6.15시절 ‘우리민족끼리’가 사회 전반에 어떻게 구현됐는지를 통해 4.27시대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기위한 과제를 조망해 본다.

[기획연재] 6.15와 판문점선언
(1) 6.15와 민족화해
(2) 6.15와 반미자주
(3) 6.15와 경제협력
(4) 6.15와 수구보수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한국의 가장 큰 의식변화는 ‘반북’정서가 줄고, ‘반미’감정이 높아진 것이다.

1993년 여론조사를 보면 한국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북한 44% Vs 미국 1%]로 응답한 반면 2005년에는 [북한 14% Vs 미국 55%]로 조사됐다.

특히 대미 의존형 한미관계를 탈피해야 한다는 여론도 2002년 28%에서 2005년 72%로 급성장했다.

자료참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료참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반북의식이 사라진 이유는 이해가 간다. 6.15이후 평양 방문자 4만여명, 금강산 관광객 200만 시대였으니, 북한(조선)을 직접보고 느끼면 반감이 없어지는 것이야 당연한 이치다.

그렇다면 반미의식은 왜 이렇게 폭발하게 됐을까?

해방이후 미군정 기간 재등용된 토착왜구와 그 후손들의 숭미주의를 제외한 대부분 우리 사회 친미의식은 크게 두 가지 우려 때문에 생겨났다. 하나는 주한미군이 없으면 북한(조선)이 남침할 수 있다는 걱정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은 강대국이며 동맹국이기 때문에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들이 2000년 6.15 공동선언 발표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6.15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반북 정서는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주된 명분이 되었다. 예속적인 한미관계도, 독재정권의 폭압도, 과도한 군사비 지출도 모두 북한의 ‘적화통일’이니 ‘남침 위협’ 따위의 반북 선전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 주한미군 주둔으로 인한 주권 침해도, 주둔비 부담도, 끊임없는 범죄와 환경오염도 모두 북한(조선)에게서 한국을 보호해준다는 명분 때문에 우리 국민이 참아야 했다.

그러나 6.15공동선언에서 ‘우리민족끼리’가 강조되면서 남침으로 인한 전쟁위협은 사라지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남과 북이 잘살아보자는 기운이 넘쳐나면서 미국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이 터지면서 반미의식으로 폭발했다. 오죽했으면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미국에 NO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 미국에 사진이나 찍으러 가진 않겠다”고 했을까. 이런 발언은 반미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고, 득표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가능했다.

이 같은 국민적 의식변화에 힘입어 2000년대 반미투쟁은 활화산처럼 번져갔다. 부산 하야리야 미군부대 투쟁, 용산 군산 미군기지 폐쇄투쟁,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투쟁, 평택 미군기지 폐쇄투쟁, 경산 함안 대전 등 전국으로 번진 미국의 양민학살 진상규명 등 반미자주화 투쟁에 봇물이 터졌다.

▲ 미대사관 앞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6.15공동선언 발표 19년, 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이 있은지도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의 자주권은 오히려 후퇴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미국의 승인 없이 한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는 모욕적인 말을 대놓고 내뱉었다.

판문점선언에서 약속한 남북 철도•도로 연결, 개성 공동연락사무소, 적대행위 중지, 종전선언 등이 미국의 노골적인 방해와 거부로 중단돼 있다.

‘9월평양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설치,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 동서해 관광특구,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등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길이 미 국무부 일개 관리에 의해 차단됐다.

스티븐 비건을 미국측 단장으로 하는 한미 워킹그룹은 마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행세를 하며 남북관계 발전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방해한다.

비건의 워킹그룹은 이산가족 상봉 문제까지 미국의 승인을 받으라며 통제하고 있으니 아연실색할 일이다.

6.15시절 ‘우리민족끼리’ 정신으로 효순이•미선이 추모촛불을 들었던 것처럼 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반미자주의 촛불이 거대한 횃불로 번질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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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탈북민에게 천만 원으로 광수인정 요구했다 거절 당해”

“지만원, 탈북민에게 천만 원으로 광수인정 요구했다 거절 당해”
 
 
 
임두만 | 2019-06-17 09:32:0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5.18 북한군 특수부대원 600명 침투’라는 ‘북한군개입설’을 주장하고 있는 시스템클럽 지만원 대표가 탈북민에게 현금 1천만 원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광수(지 씨의 광주침투 북한군 지칭용어)’가 되어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2월 8일 국회 지만원 공청회를 계기로 지만원 구속, 5.18 망언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등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국회제명을 요구하며 2월 11일부터 123일째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인 ‘5·18농성단(대표 김종배 전 의원)’이 지만원 씨를 찾아가 기자회견을 열고 전한 공개질의서를 통해서다.

▲지만원 씨의 사무실 앞에서 5.18왜곡 중단을 요구하는 농성단 © 임두만

앞서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 (약칭 5·18농성단)은 지만원 망언 공청회 이후 4월 4일 학살주범 으로 꼽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집 앞에서 제1차 행동의 날을 선포하고 전 씨에게 진상을 자백하라고 요구한 뒤 현재까지 10차에 걸쳐 행동의날 행사를 개최했다.

이후 2차로 지난 4월 11일 영등포경찰서에서 지만원 수사촉구 집회를 열고, 4월 18일에는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의 과천 집 앞에서 3차 집회, 4월 25일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집 앞에서 4차, 5월 2일 허삼수 전 보안사 인사처장 집 앞에서 5차의 집회를 열면서 이들에게 진상의 자백을 촉구했다.

또 5월 9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지만원 수사촉구 집회를 연 것으로 6차, 5월 16일 허화평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집 앞에서 7차,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사살 39주기에 다시 전두환 집에서 8차, 5월 30일 최세창 전 3공수 여단장 집 앞에서 9차 집회를 열어 5.18 책임과 관련있는 이들을 추궁했다.

이어서 농성단 중간점검 전진대회로 10차 ‘5·18행동의 날’ 행사를 통해 역사왜곡 처벌을 촉구하고, 집단학살의 진범을 추적했으며, 농성 123일째인 6월 13일 오후 11차 집회로 지만원 씨의 ‘500만 야전군사령부’ 사무실 앞에서 공개질의 형식의 기자회견을 갖고 질의서를 전달했다.

이날 오후 2시 지하철 7호선 내방역에 집결한 농성단은 2시 20분 경 지만원 사무실 앞까지 행진한 뒤 농성단 김병운 회원의 사회로 행사를 시작했다. 이 집회에서 농성단 임태경 대변인은 “5.18민중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역사 왜곡하는 지만원은 즉각 사과하라”는 모두발언으로 지만원 씨를 비판했다.

이어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가 공개질의서를 낭독했으며, 이 질의서를 5.18 사형수였던 5.18농성단 대표 김종배 전 의원과 장성배 5.18 기획위원이 지만원 씨 사무실 관계자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이 질의서에 지 씨가 탈북민을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날 농성단이 지 씨에게 전한 공개질의서에서 농성단은 지만원 씨의 광수 얼굴 분석 기법이 허구라고 주장하고, 광수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로 계엄군의 사체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지금까지 행불자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것은 계엄군이 시체를 유기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어 농성단은 지 씨가 북한의 대남공작용 자료를 불법유출해 왜곡선전에 이용했다면서 기밀유출 행각을 지적하고, 마지막으로 지 씨가 탈북민을 돈으로 회유해 광수로 만든 조작을 추궁했다.

한편 이날 5.18 농성단의 ‘지만원 사무실 방문’행사는 태극기부대 80여 명의 시민들이 나와  맞불을 놓기도 했으나 이들의 충돌은 없었다. 아래는 이날 농성단이 공개한 공개질의서 전문이다.

공 개 질 의 서

― 5·18진실왜곡원흉 지만원은 국민과 역사앞에 석고대죄하라 -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의 국회앞 농성이 123일을 맞이한 오늘, 집단학살의 진실은 39주년째 묻혀있다. 이미 5·18민중항쟁은 대법원 확정판결, 국가기념일 제정·국립묘지 승격은 물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로 국내외의 평가가 완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등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왜곡주범 지만원이 북한의 대남공작용 자료를 악용해 주장해온 북한 특수군 개입 폭동설에 동조해왔다.

이로 인하여 국론은 분열되고 5․18의 역사적 가치는 훼손되었다. 우리 5·18농성단은 5·18의 진실에 대해 역사와 국민의 이름으로 묻는다.

첫째, 지만원은 5.18당시 투입되었다는 북한군 특수부대 629명의 광수놀이가 허무맹랑한 대국민 사기극임을 자백하라

5.18에 참여한 광주시민들을 황장엽 오극렬 최룡해 이을설등 북한인사로 둔갑시킨 영상분석기법이 황당무계한 엉터리임이 재판을 통해 밝혀져 당신은 1억 원이 넘는 벌금을 납부했다. 시스템공학박사임을 내세워 지만원 당신은 ‘노숙자담요’라는 가공인물이 건넨 자료를 최신 특수영상처리기법으로 분석 처리했다는 사기극을 당장 중단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

둘째, 지만원 당신은 5.18국립묘지 내 무명열사 5기의 묘지를 북한군 특수부대원이라 날조하여 5.18의 명예와 자긍심을 노골적으로 훼손했다. 당장 묘역 현장에 내려와 유가족과 광주시민에게 백배 사죄하라.

당초 3묘역에 안장된 11기의 무명열사 중 6기는 현 국립묘지로 이장하면서 유전자감식을 통해 가족을 찾았고 나머지 5기 중에는 4~5세 가량의 어린이와 70세가 넘는 희생자가 포함되어 있어 북한군이라는 당신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특히 당신의 주장대로 북으로 귀환한 특수부대원이 사망하여 묻힌 청진시 영웅묘역은 6.25당시 참전한 청진시민과 월남전에 참가한 북한공군사망자가 안장된 묘역임이 최근 국내 언론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분단 상황에서 직접적인 사실 확인이 불가능함을 악용하는 간교한 책동을 즉각 중단하라.

셋째, 당신의 북한특수군 침투주장대로라면 당신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전두환 등 신군부 책임자들과 북한군이 합동작전으로 광주시민을 살상케 했으므로 지금 당장이라도 즉결처분이 가능한 중대범죄이며 대한민국의 국군과 국방력을 능욕한 행위임을 자백하라.

지만원 당신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특수부대는 해안선과 휴전선,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해당 구간을 돌파당한 군부대는 한 곳도 없다. 당시 미군 정찰위성들이 휴전선과 광주상공을 집중 감시했으나 북한의 특이동향은 전혀 없었다고 한미 양국 군당국이 밝혔다. 북한의 대남공작 및 남남갈등 조장용 거짓선전을 대변하는 당신의 행위가 대한민국의 국방력과 국군의 명예를 훼손한 중대범죄임을 사죄하라!

넷째, 당신의 5·18왜곡의 원천 자료가 대부분 북한의 대남공작용 방송자료의 불법유출임을 자백하라.

지만원 당신이 증거라고 내세운 자료들은 국정원, 국방부, 통일부 등이 보유한 국가보안상 기밀정보로서 비밀취급 인가자만이 열람할 수 있다. 그 중 상당수는 북한이 대남방송용으로 허위사실을 선동하는 내용의 공작용이었다. 기밀취급 인가자가 아닌 당신이 내민 기밀자료의 출처와 유출자는 누구인지, 이들과의 불법적인 검은 거래가 있었는지 자백하라!

다섯째, 탈북민에게 금전을 제공하며 광수가 되어달라고 회유한 사실을 자백하라.

지금까지 탈북동포 중 5‧18 당시 북한 특수군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하고 국정원으로부터 입국허가를 받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 자신이 80년 광주에 침투한 북한특수군이라 책을 쓰고 강연을 하러 다녔던 탈북민 임천용은 지만원 당신에게 수시로 돈을 받은 것도 모자라 계속 돈을 요구하여 당신도 시달렸다.

탈북민 김유성에게 일금 일천만원을 주고 광수가 되어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제보가 농성단에 들어와 있다. 국내 입국 후 어려운 탈북민에게 금전으로 회유해 광수로 조작하려고 했던 행각을 낱낱이 자백하라!

우리 5·18농성단은 5·18의 진실이 밝혀지고 전두환 등 학살주범과 지만원 등 왜곡주범들에게 합당한 수사와 처벌이 이뤄질 때까지 계속 투쟁해나갈 것을 천명한다.

2019. 06. 13.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 일동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8&table=c_flower911&uid=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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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차기 검찰총장에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내정

청와대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 검찰 개혁과 조직 쇄신 기대”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 2019-06-17 11:01:15
수정 2019-06-17 11: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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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자료사진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자료사진ⓒ민중의소리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차기 검찰총장으로 윤석열(59·23기) 서울중앙지검장을 내정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제청을 받고 윤 지검장을 검찰총장 후보자로 지명했다고 고민정 대변인이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앞서 검찰총장 후보추천위원회(위원장 정상명 전 검찰총장)는 13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회의를 열어 검증 작업을 벌인 끝에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윤 후보자 등 4명을 박 장관에게 추천했다.

차기 검찰총장은 추천위가 선정한 후보자 4명 중 박 장관이 1명을 문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하고, 문 대통령이 제청자를 지명해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된다. 오는 18일 국무총리 주재로 열리는 국무회의에서 정부인사 발령안이 심의·의결되면 국회로 인사청문 요청서가 보내진다.

윤 후보자는 대전고검 검사로 지내다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됐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 신호탄'으로 불릴 만큼 파격적인 인사로 평가됐다.

검찰 조직에서 정치적으로 독립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던 윤 후보자는 박근혜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을 맡아 수사를 지휘했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국정원 특수활동비, 이명박 전 대통령, 사법농단 수사 등을 지휘했다.

그런 그가 검찰의 수장까지 오른다면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수사'와 '검찰 개혁'에도 탄력이 붙을지 주목된다. 윤 후보자가 문무일(58·18기) 현 검찰총장보다 5기수 아래인 점에서도 파격 인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고 대변인은 윤 후보자에 대해 "검사 재직 시절 부정부패를 척결해왔고 권력의 외압에 흔들리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라며 "서울중앙지검장으로서 탁월한 지도력과 개혁 의지로 국정농단과 적폐 청산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검찰 내부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고 대변인은 "윤 후보자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를 뿌리 뽑음과 동시에 시대적 사명인 검찰 개혁과 조직 쇄신 과제도 훌륭하게 완성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한편 문 대통령의 대표적인 검찰 개혁 공약인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를 두고 마찰음을 내던 문 검찰총장은 내달 24일 임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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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의 면상을 후려 갈겨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6/17 11:10
  • 수정일
    2019/06/17 11:1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특별기고> 박학봉 시인 격시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6/17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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檄詩(격시)

미제의 면상을 후려 갈겨라

 

박학봉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침략자 일본놈들에게

참패를 안긴 것으로 조선 여인의 비장함을 추켜세우지 말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여인으로 부각하지 말라

진정

조선의 여인은 돌멩이가 아니라 산도 능히 움직이며

고결한 애국적 순결과

자신의 심장을 녹이는 절개는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기느니

무참히 짓밟힌 조국은 피로 싸우고

침탈당한 행복한 보금자리 삶의 터전은 죽어

넋이 되더라도 끝까지 지키리라

 

약탈자의 증오와 적대감이

<이 악귀 같은 놈아원한에 사무친 조선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똑똑히 알아두어라외치며

왜장의 목을 두 팔로 꽉 조여 쥐고

남강 푸른 물에 몸을 던진 여인 논개

연광정에 꽃잎처럼 떨어진 의기 계월향은

<나으리는 살아 남으셔서 저 왜놈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저를 따라 오시오.

나으리가 저를 베지 않으면 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 수밖에 없으니

부디 저를 베어주세요높이 외치며

가루개 언덕에서 자결하지 않았는가

 

누구를 위해 피를 흘렸으며 목숨을 던졌는가

살아서 지키지 못한 조국이여

죽어서 이 손으로 행복의 조국 지키리라

또 죽어서 이 몸 산산조각이 되더라도

행복한 가정 다시 찾으리

조국은 지아비로

백성은 하늘로 섬기고

지아비없이 어디 하늘아래 떳떳할 수 있는가

 

조선 여인의 용감성에

왜장 잃은 군졸은 오합지졸이라

자기 한 몸 희생에

침략자 왜군은 공포 속에 떨고 있어라

죽어서 넋으로라도

끝까지 지켜야 할 내 자식 내 가정

내 조국의 사랑은

뜨거운 단비가 되어 이 땅을 촉촉이 적시는데

역사의 여인들이여

조선의 꽃으로 다시 태어나리

 

침략자의 더러운 발길이 닿는 곳마다

짓밟힌 치욕의 핏자국

북녘의 신천 땅에서 남녘의 끝 제주까지

피로 물든 민족의 산하여

너의 불행과 고통과 아픔에

비수를 가슴에 품고

원한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꿋꿋하게 살아온

이 땅의 여인

절규의 외침소리

일제의 총칼에 빼앗긴 40

무자비한 굴욕의 나날

미제의 군화발로 짓밟힌 70

치욕의 역사를

이제 통일의 아낙으로 미제 침략에 맞서

싸우는 방패가 되리

다시는 사랑하는 가정을 빼앗기지 않으리

따듯한 조국의 품에서 나를 스스로 태우는 촛불이 되어

통일투쟁에 빛을 뿌리리라.

 

청춘의 무지개를 타고

활짝 피지도 못한 꽃송이 윤금이여

너의 육체는 산산이 부셔져 미제 원수에게

총알이 되어라

점령군 미친개 장갑차에 짓밟힌 효순 미선아!

채 피지도 못하고 쓰러진 애 어린 꽃망울

내 너희에게 뜨거운 심장을 주니 살아서 오라

웃는 얼굴로 사랑하는 우리 민족 앞에 와서는

너희의 식을 줄 모르는 원한과 분노를 풀어보렴

여럿이 모이고 또 힘을 모아

수백 수천의 미제 침략자 대갈통을 날리자

꼬꾸라지는 놈

기어가는 놈

뒤로 자빠지는 놈

모두 다시 일으켜 뒤통수를 후려 갈기고

냅다 태평양 건너 식민의 땅으로 던지자

 

미제는 우리 가슴에 박힌 쇠말뚝이다

70년이 지나 녹쓸대로 녹쓸어버린

쇠말뚝 뽑아 버려야 한다

 

치 떨리다

해방 이듬해 10월 1일 대구에서

미군정 반대하며 앞가슴을 헤치고 <쏠테면 쏴라외친

여성 노동자를 무참하게 사살하지 않았는가

한국전쟁 중에 미제침략군은

노근리에서 비행기 폭격과

기관총으로 노인과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처참하게 죽였고

마산재실거창에서 박격포탄과 기총사격으로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고

골짜기까지 끌고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죽은 시체에 마구 총을 쏘아댔다

젖먹이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다 멎은 후에 총을 멈추고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지 않았는가

무자비하고 능숙한 살인자가 되기 위한 미침략군은

탱크로 짚차로 깔아 뭉게 죽이고

총으로 조준 사격하여 즉사시키고

군화로 짓밟고 각목으로 때려 실신시켜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M-1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려서 죽이고

달리는 열차에서 던지고 다리에서 떨어뜨려 죽이고

쇠밧줄로 목 졸라 죽이고

미제가 저지른 치 떨리는 악행과

불장난 같은 전쟁연습에

우리 민족의 피가 흐르지 않을 날이 없었다.

무참하게 희생된 값진 죽음 앞에 너희 멸망을 선언 하노라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기는 듯 아프고

입술을 피나게 깨물며 울음도 씹어 삼키며

원수와 다시 피의 결전을 준비하자

몸이 다 타고 찢어져 죽더라도

침략군의 화살도 총탄도

죽음 앞에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어머니의 참 모습

복수하리라

주먹을 움켜줘라

무쇠보다 강한 주먹으로

미제의 면상을 후려 갈기자

오직 한 마음으로

한 길만 걸었다

행복의 보금자리 무참히 짓밟고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잔인하게 빼앗아 갔으니

기어이 너희 죄를 묻고 복수하리라 맹세한다

 

 

 

 

▲     ©프레스아리랑

 

 

 

▲     ©프레스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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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지났어도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개벽예감 352] 32년 지났어도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6/17 [07:31]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로 귀결된 민주항쟁

2. 불평등과 불공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3.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

4. 1987년 6월 민주로조가 없었다

5. 진보정당 없이 일어난 민주항쟁

6. 모습을 드러낸 씨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리브시  

 

 

1.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로 귀결된 민주항쟁

 

항쟁의 열기로 들끓었던 1987년 6월, 그로부터 어언 32년 세월이 지난 2019년 6월 10일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 홍익표는 논평에서 “더불어민주당도 6.10민주항쟁정신을 받들어 민주주의 완성과 한반도 평화의 길을 국민과 함께 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6월항쟁의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강령에서 천명한 정당이 집권당으로 되었고, 32년 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6월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인권변호사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되었다. 이런 사정을 보면, 지난 32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지만, 눈에 보이는 겉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   

 

돌이켜보면, 6월민주항쟁기간에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총궐기하여 광장과 거리에서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싸웠건만, 그들이 타도하려고 하였던 전두환 독재정권은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 노태우 독재정권으로 간판만 바꿔 달았다.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실현된 것이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야합한 보수대연합에 의해 이른바 ‘문민’이라는 명목으로 변형된 독재정권이 또 다시 출현하였다.  

 

32년 전,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항쟁의 광장과 거리에 쏟아져 나와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싸웠건만,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서 가장 초보적인 과업들 가운데 하나인 선거제도개혁(직선제 개헌)만 실현되었을 뿐이다. 6월민주항쟁의 집단적 체험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까지 얼마나 멀고 험한 투쟁의 길을 헤쳐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한국의 민중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 모두가 그런 이치를 깨달았다. <사진 1> 

 

▲ <사진 1> 1987년 6월 18일 부산에서 민주항쟁에 참가하여 투쟁하던 청년 한 사람이 전투경찰이 난사한 직격최루탄을 맞고 다리에서 떨어져 숨졌다. 민주주의를 위해 스물여덟의 짧은 생애를 바친 대학생 출신 노동자 이태춘 열사였다. 위의 흑백사진은 1987년 6월 27일 부산에서 거행된 이태춘 열사 장례행진의 한 장면이다. 이 흑백사진 속에는 장래에 대통령이 될 인권변호사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얼굴에 마스크를 쓴 채 열사의 영정을 두 손으로 정중히 받쳐든 노무현 인권변호사와 그의 곁에 있는 문재인 인권변호사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노무현 인권변호사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민주항쟁의 앞장에 섰고, 문재인 인권변호사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민주항쟁의 앞장에 섰다.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시위군중과 함께 싸웠던 인권변호사 두 사람이 각각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32년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20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를 짓밟고 부정부패와 폭압만행을 저지른 독재정권들 가운데서 특별히 악독했던 3대 독재정권이 있었다. 1961년부터 1997년까지 간판만 바꾸면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4대에 걸쳐 지속된 한국의 독재정권들, 그리고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존재하였던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정권, 그리고 1974년부터 1990년까지 존재하였던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정권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으로 4대에 걸쳐 지속된 독재정권기에 1979년 10월 부산마산민주항쟁,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1987년 6월 6월민주항쟁이 일어나 수많은 시위군중이 피를 흘리며 싸웠건만, 독재정권은 그때마다 간판만 바꿔달면서, 무려 36년 동안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계속되었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가 집권하여 4대에 걸친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는 종식되었지만, 김대중 정권의 출현은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한 보수적 정권교체에 지나지 않았다. 이명박 독재정권과 박근혜 독재정권의 연속적인 출현에서 보듯이 보수적 정권교체는 매우 불안정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한국에서 진행된 보수적 정권교체가 필리핀과 칠레에서도 똑같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1965년부터 1986년까지 21년 동안 존속하였던 마르코스 독재정권은 1986년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전개된 2월민주항쟁으로 막을 내리고, 1986년 코라존 아퀴노가 이끄는 민주당계 정당연합체인 통합국가민주기구가 집권하여 보수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였다. 다른 한편, 칠레에서 1974년부터 1990년까지 16년 동안 존속하였던 피노체트 독재정권은 1990년 빠뜨리씨오 아일윈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당의 집권으로 막을 내리고 보수적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한국, 필리핀, 칠레에서 일어난 보수적 정권교체는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세계 각국에 존재하는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은 당명에 민주라는 두 글자를 얹혀놓고, 민주주의라는 말만 요란하게 늘어놓을 뿐이다.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도 없고, 민주주의를 실현할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는 보수적 정권교체로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이 집권한 이후에 펼쳐놓은 현실이 이를 충분히 입증한다.  

 

 

2. 불평등과 불공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2019년 6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에서 진행된 6월민주항쟁 32주년 기념식에서 행정안전부장관이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제도로만 생각하면 이미 민주주의가 이뤄진 것처럼 생각할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제도이기 이전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더 자주 실천하고, 더 많이 민주주의자가 되어가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가 더 커지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며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경제에서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은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여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지만, 불평등과 불공정은 아직 청산되지 못하였으므로, 한국 사회를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 전변시켜 민주주의를 완성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아직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불평등과 불공정도 아직 청산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분적으로도 실현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 한국 사회에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은 극단적으로 벌어진 빈부격차로 표출되었고, 불공정은 극도로 악화된 대량실업과 부정부패로 표출되었다.  

 

▲ <사진 2> 위의 사진은 양극화된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를 보여준다. 사진에 보이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초호화 고층아파트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타워 팰리스이고, 사진에 보이는 허물어져 가는 판자집들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의 극빈층 거주공간이다. 세계경제연단(WEF)이 2015년 9월 7일에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12개국의 사회경제상황을 분석하였더니 한국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에서도 최악이고 구조적 부패도 최악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오늘 문재인 정부 시기에 불평등과 구조적 부패는 더욱 악화되었다. 32년 전,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항쟁의 광장과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피흘려 싸웠지만, 오늘 한국에서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불평등과 불공정, 빈부격차와 구조적 부패가 더욱 만연되고 있다. 이것이 보수적 정권교체가 가져온 오늘의 참담한 현실이다.     

 

명백하게도,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된 사회는 민주주의가 전혀 실현되지 못한 비민주적인 사회다. 독재정권은 사라졌으나,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된 사회를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된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청산될 때,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사회역사적 발전이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아져 대립적 사회계급관계가 폐절될 때,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오늘 한국 사회에 만연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된 사회에서 생겨나는 현상이 아니라,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class-dictatorship)의 직접적 산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독재는 권력과 재부를 과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이 절대다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구조적으로 지배, 억압하고 착취, 수탈하는 독재라는 뜻이다.

 

모든 형태의 독재는 권력과 재부를 독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에 의해 자행되는 계급독재이므로, ‘개인독재’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같은 독재자들은 계급독재의 집행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별적 독재자들이 퇴출되었다고 해서, 계급독재가 폐절된 것은 결코 아니다. 

 

 

3.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는 다음과 같이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 극우정당이 집권하면, 군대와 경찰, 정보기관과 사법기관을 동원하여 진보정당을 해산하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농민과 중산층을 억압하는 가장 폭력적이고 극악한 고강도 계급독재를 자행하게 되는데, 이런 고강도 계급독재를 패씨즘(fascism,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둘째, 극우정당이 퇴진하고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이 집권할 때, 고강도 계급독재는 저강도 계급독재로 이행된다.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이 집권하더라도 대립적 사회계급관계는 폐절되지 않기 때문에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여전히 만연되어 있는데, 그런 사회정치체제를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고 부른다.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여전히 만연되어 있고, 더욱이 지난 시기 역대 독재정권들이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던 악법(국가보안법)도 철폐는커녕 개정도 되지 않았다. 이런 고착현상은 오늘 한국 사회가 패씨즘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2018년 8월 9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진행한 제1183차 정기목요집회의 장면이다. 민가협은 1993년부터 서울 종로2가에 있는 탑골공원 앞에서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촉구하는 집회를 매우 목요일마다 진행해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민가협은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들어서자 문재인 대통령이 양심수를 사면석방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여전히 만연되어 있고, 더욱이 지난 시기 역대 독재정권들이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던 국가보안법도 철폐는커녕 개정도 되지 않았다. 이런 고착현상은 오늘 한국 사회가 패씨즘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익정치인들은 저강도 계급독재를 자유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말로 미화, 분식하지만,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계급적 지배의 강도와 계급적 착취의 강도가 이전보다 조금 약해졌을 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여전히 만연되어 있다. 전후맥락을 면밀히 따져보면, 대립적 사회계급관계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산생시키고,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산생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2019년 현재 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가 자행되는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고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권력과 재부를 과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이 혹독한 불행과 고통을 겪는데 비해,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억압강도와 착취강도가 약간 낮아지기 때문에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여전히 당하면서도 계급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때로 순응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저강도 계급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불평등과 불공정을 참고 견디게 만든다.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를 구분할 때, 6월민주항쟁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난다. 그 항쟁으로 전두환 독재정권이 물러가고, 노태우 독재정권이 등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6월민주항쟁 이후 고강도 계급독재가 저강도 계급독재로 이행된 것이 아니라, 고강도 계급독재가 여전히 지속되었던 것이다. 왜 이런 최악의 씨나리오가 펼쳐졌던 것일까? 

 

 

4. 1987년 6월 민주로조가 없었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 아래서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가장 가혹하게 당하는 사회계급은 노동계급(working class)이다. 계급독재 아래서 농민도 억압과 수탈을 당하지만, 농민은 독자적인 사회계급이 아니다. 자기의 생산수단을 전혀 갖지 못한 노동자는 자본가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사회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이지만, 농민은 토지와 농기계, 농기구 같은 자기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인다. 자기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개별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이기 때문에 농민은 독자적인 사회계급으로 되지 못한다. 자본주의사회에 존재하는 사회계급은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사회계급, 곧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이고, 나머지 근로대중은 사회계층(social stratum)으로 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계급은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누구보다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그런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조직하고, 농민과 도시중산층 등 다른 사회계층들과 전략적으로 연대하여 민주항쟁을 주도할 때,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위대한 변혁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민주로조를 건설한 노동계급의 조직력량은 민주항쟁을 이끄는 주도력량으로 된다. 

 

그러나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에 한국에는 민주로조가 없었고, 독재정권에 순응하는 어용로조만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로조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투쟁에 앞장선 노동계급의 자주적 조직이다. 오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바로 그런 조직이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6월민주항쟁 직후인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일어난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하여 지역별, 업종별로 민주로조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456개 단위로조가 참가하고, 16만 명 조합원이 망라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된 때는 1990년 1월 22일이었고, 전노협이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결성된 때는 1995년 11월 11일이었다. 

 

다른 한편, 한국의 농민들은 6월민주항쟁 직전인 1987년 2월 26일 전국농민협회를 결성하였고, 1989년 3월 1일 전국농민운동연합을 결성했다. 그리고 6월민주항쟁에서 선봉투쟁에 앞장선 대학생들은 6월민주항쟁 직후인 1987년 8월 19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결성했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1986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노동계급은 1,400만 명을 넘어섰지만, 그들 대부분은 조직화, 의식화되지 못하였다. 1987년 6월에 존재하였던 단위로조 2,742개는 모두 어용로조들이었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1987년 8월 4일 기독교백주년기념관 강당에서 진행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제1차 전국회의 현장을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속에 서 있는 세 사람은 6월민주항쟁의 지도부를 구성하였던 문익환, 김대중, 김영삼이다. 2,196명이 참가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야당정치인, 종교인, 사회단체대표가 주도하였고, 전체구성비율에서 노동자는 1.78%, 농민은 7.8%밖에 되지 않았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아직 조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으므로, 항쟁지도부는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략목표를 제시할 수 없었다. 항쟁지도부에서 발언권이 강한 우익정당(통일민주당)이 자기의 구상대로 항쟁을 이끌어갔다. 민주항쟁의 투쟁력량이 민주변혁의 추진동력으로 전화, 발전되지 못하고 유실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마땅히 민주항쟁의 주도자로 나서야 할 민주로조가 세상에 아직 출현하지 않은 시기에 민주항쟁이 일어나면,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사회계층들이 연대련합하여 항쟁을 주도하게 된다. 6월민주항쟁은 바로 그렇게 전개되었다. 1987년 5월 27일에 결성되어 6월민주항쟁을 주도하였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계급계층적 구성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2,196명이 참가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종교인 683명, 교육자 413명, 사회단체대표 343명, 야당정치인 213명, 농민 171명, 여성 161명, 문화예술인 100명, 언론출판인 43명, 노동자 39명, 빈민 18명, 청년 12명으로 구성되었다. 노동자는 1.78%, 농민은 7.8%밖에 되지 않았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주도한 것은 1987년 4월 21일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추로 하여 창당된 통일민주당과 1985년 3월 29일 민주주의정치활동가들이 결성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었다. 민통련 의장은 문익환, 부의장은 계훈제, 김승훈, 사무총장은 이창복이었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아직 조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으므로, 항쟁지도부는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략목표를 제시할 수 없었다. 항쟁지도부에서 발언권이 강한 우익정당(통일민주당)이 자기의 구상대로 항쟁을 이끌어갔다. 당시 우익정당이 6월민주항쟁에서 추구한 전략목표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각계각층 군중 500만 명이 총궐기하였으나, 민주항쟁의 투쟁력량이 민주변혁의 추진동력으로 전화, 발전되지 못하고 유실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5. 진보정당 없이 일어난 민주항쟁

 

민주로조로 조직화된 노동계급의 투쟁력량은 민주항쟁을 이끌어가지만, 민주로조가 새로운 민주정권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정권을 수립하는 과업은 언제나 정당에 의해 수행된다. 민주로조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을 이끄는 영도조직이라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정권수립의 직접적 담당자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역사적 과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 곧 독재정권을 퇴출시키고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진보적 정권교체의 과업은 민주로조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로조가 주도적으로 참가한 진보정당이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나면, 독재정권은 퇴출되고 민주정권이 수립되는 진보적 정권교체는 실현될 수 없고, 극우정당과 대립하는 우익정당이 민주항쟁을 주도하고 우익정권을 수립하는 보수적 정권교체가 실현된다. 

 

그런데 32년 전 6월민주항쟁은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는 보수적 정권교체마저 실현하지 못했고, 전두환 독재정권이 노태우 독재정권으로 간판만 바꾸는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진행되었다.   

 

진보적 정권교체의 직접적 담당자로 되어야 할 진보정당은 6월민주항쟁이 끝난 뒤 3년이 지난 1990년 11월 10일에 민중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되었는데, 1990년 1월 22일에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같은 해 11월 10일에 창당된 민중당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처럼 민주로조와 진보정당이 서로 분리된 비정상적인 정치현실이 펼쳐진 가운데, 1992년 3월 24일에 시행된 제14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한 석도 얻지 못해 해산되었다. 민주로조가 참가하지 않은 진보정당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든든히 구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청산하는 민주주의강령,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의 부분적 실현을 위한 민주변혁강령을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제시하는 한편, 조직화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힘에 의거하여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게 된다. <사진 5> 

 

▲ <사진 5> 위의 사진은 2017년 10월 15일 오후 서울시청 광장에서 당원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민중당 출범식 장면이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결성된 진보정당은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청산하는 민주주의강령을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제시하는 한편, 조직화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힘에 의거하여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게 된다.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은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당건설사업에서 시작된다. 대중적 지지기반을 강화한 진보정당은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며, 바로 그 길에서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을 추진하고,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진보정당의 민주주의강령,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실현하는 민주변혁강령이다. 진보정당의 민주주의강령은 그 정당의 전략목표이며 존재근거다.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은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당건설사업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을 건설하지 않고,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말은 공리공담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며, 바로 그 길에서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을 추진하고,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사회역사발전경로는 민주로조 건설과 자주적 대중조직 건설 → 진보정당 건설 → 진보적 정권교체 → 민주변혁 → 새로운 민주사회 건설로 이어지는 것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힘이 진보정당으로 결집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독재정권이다. 그래서 독재정권은 민주로조와 자주적 대중조직들을 악랄하게 탄압하고, 진보정당을 강제로 해산시킨다. 이를테면, 박근혜 독재정권은 2011년 12월 6일에 창당된 통합진보당에게 말도 되지 않는 내란음모죄를 뒤집어 씌웠고, 우익언론매체들은 통합진보당을 ‘종북정당’이라고 집중공격하였고, 그런 광란적 분위기 속에서 헌법재판소는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는 판결을 내렸다. 박근혜 독재정권의 폭거로 104,692명의 당원과 5명의 국회의원을 가진 통합진보당은 창당 3년 만에 강제해산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을 건설하려는 줄기찬 노력은 강제해산으로 막을 수 없었다. 통합진보당의 뒤를 이은 또 다른 진보정당이 2017년 10월 15일에 창당되었으니, 그 정당이 바로 민중당이다.  

 

민중당은 자기의 기본정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건설”하고, “민중 자신의 힘으로 노동존중, 인간존중의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진보집권”을 전략목표로 제기하였고,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고, “민중이 경제의 주인이 되는 평등사회를 실현”하고, “평화지향의 중립적 통일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민중당의 강령(기본정책)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명명백백한 민주주의강령이다. 그것은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강령이며, 사회과학용어로 표현하면,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변혁강령이다. 32년 전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그런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이 있었더라면 민주항쟁은 민주변혁으로 전화, 발전되었을 것이다.  

 

 

6. 모습을 드러낸 씨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리브시

 

1987년 6월 전두환 독재정권의 고문살해만행과 장기집권음모에 분노한 각계각층 군중이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대도시들에서 광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군중은 화염병을 던져 각지의 파출소들과 경찰차량들을 불태웠다. 항쟁의 폭발력은 무서운 속도로 증폭되었고, 최루탄을 난사하는 전투경찰의 진압으로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날로 불어나는 시위군중이 총공세를 벌여 경찰저지선을 돌파하는 날, 전두환이 있는 청와대까지 들이닥칠 판이었다.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해지는 것을 직감한 전두환은 최후의 대책을 꺼내들었다. 1987년 6월 19일 오전 10시 전두환은 국방장관, 고위급 군지휘관들, 안기부장을 청와대로 불러 비상회의를 진행하면서, 최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이 논의한 최후의 대책은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짓밟으려는 유혈진압대책이었다. 1980년 5월 군대를 출동시켜 광주민주항쟁을 짓밟고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살인악당이 6월민주항쟁을 총칼로 짓밟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위급한 정황이 조성되었다. 

 

<뉴욕타임스> 1987년 7월 6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 경찰이 시위군중을 진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1987년 6월 19일 밤, 전두환은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서울과 다른 대도시들의 외곽을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한국군 부대들이 출동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전두환은 갑자기 출동명령을 취소하였다고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워싱턴포스트> 1987년 7월 5일 보도기사에 당시 긴박했던 상황이 담겨있다. 보도에 따르면, 1987년 6월 20일 아침 오스트레일리아를 향해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던 전용기 회의실에서 미국 국무장관 조지 슐츠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개스턴 씨거가 당시 한국에서 벌어진 급박한 상황을 놓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씨거는 몇 시간 전에 주한미국대사관이 보내온 상황보고를 받고 밤잠을 설친 채, 아침 일찍 슐츠 국무장관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을 긴장시킨 것은 전두환이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한국군 출동을 검토하고 있다는 긴급보고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전두환에게 자제하라는 친서를 이미 보냈지만,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 전두환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아무도 몰랐다. 씨거는 슐츠에게 자기가 오스트레일리아 방문을 수행하지 않고 서울로 날아가 전두환에게 미국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슐츠도 그 의견에 찬성하였다.       

 

국무장관 슐츠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무부는 1987년 6월 22일에 발표한 공식논평을 통해 한국 군부가 6월민주항쟁에 개입하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경고했고, 슐츠와 헤어진 씨거는 6월 23일 허둥지둥 서울에 나타났다. 씨거는 6월 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나 90분 동안 회담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전두환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진 긴박한 움직임을 시간별로 파악하는 것이다. 전두환이 청와대에서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한 때는 6월 19일 오전 10시였고, 그가 위수령을 발동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한국군에게 시위진압출동명령을 내린 때는 6월 19일 밤이었고, 씨거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난 때는 6월 24일 오후였다. 그런데 6월 20일 새벽 전두환은 자기가 몇 시간 전에 내렸던 위수령발동지시와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갑자기 취소하였다. 전두환의 갑작스러운 취소와 씨거의 청와대 방문 사이에는 무려 4일이라는 시차가 있다. 이런 정황은 전두환이 씨거를 통해 미국의 강한 압박을 받고 취소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어떤 다른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취소결정을 내렸음을 말해준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워싱턴포스트> 1987년 7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씨거가 서울에 도착한 6월 22일 이전에 “워싱턴은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개입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미국 국무부는 그런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에게 개입하지 말라고 직접 요구하는 이례적인 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 보도기사는 전두환으로부터 시위진압출동명령을 받은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항명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적인 항명이 아니었다. 전두환이 6월 19일 오전 10시에 청와대에서 소집한 비상대책회의에서 위수령 발동과 한국군의 시위집압출동을 전두환과 함께 논의한 한국군 고위지휘관이 불과 몇 시간 뒤에 마음이 바뀌어 전두환의 명령을 자발적으로 거부하고 항명하였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항명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외압에 의한 것이었다.  

 

6월민주항쟁에 관한 역사기록에서 오랜 기간 은폐되었던 항명사태의 진상은 1987년부터 3년 동안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정무참사관으로 근무한 정태익이 <조선일보> 2013년 12월 9일부에 실은 기사에서 드러났다. 정태익의 서술에 따르면, 전두환이 안보위기를 빌미로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친위군사정변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미국으로 전해졌을 때, 미국은 “주한미군에 배치된 각급 장교들을 통하여 한국에서 군사쿠데타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신속히 한국군의 각급 장교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이것은 주한미국군사령관이 한국군 지휘체계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내막을 살펴보면, 1987년 6월 20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거부한 항명사태는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윌리엄 리브시의 긴급명령에 따른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리브시는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을 차단한 날로부터 닷새가 지난 1987년 6월 25일 전역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1987년 6월 24일 오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개스턴 씨거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나 악수하는 장면이다. 전두환-씨거 회담은 90분 동안 진행되었다. 회담에는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최광수와 당시 주한미국대사이었던 제임스 릴리가 배석하였다. 전두환-씨거 회담이 있었던 때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6월 24일 자정, 전두환은 야당지도자 김대중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면서, 그에 대한 사면복권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유혈진압을 감행하려고 광분하던 전두환이 갑자기 유화적인 태도로 돌변한 것은 미국이 씨거를 청와대에 보내 전두환을 강하게 압박하여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켰음을 말해준다. 그보다 앞서 6월 19일 오전 10시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진행된 비상대책회의에서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는 문제를 논의했고, 그날 밤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은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거부하는 항명사태를 일으켰고, 전두환은 하는 수 없이 시위진압출동명령을 취소하였다. 이런 돌발적인 항명사태는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윌리엄 리브시의 긴급명령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6월 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진행된 전두환-씨거 회담에서는 무슨 대화가 오갔을까? 전두환-씨거 회담이 있었던 때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6월 24일 자정, 전두환은 김대중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면서, 그에 대한 사면복권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유혈진압을 감행하려고 광분하던 전두환이 갑자기 유화적인 태도로 돌변한 것이다. 이런 태도돌변은 미국이 씨거를 청와대에 보내 전두환을 강하게 압박하여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켰음을 말해준다.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고,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시국관련 구속자들의 석방을 공약한 특별선언을 발표한 것은 6월민주항쟁에 총궐기한 각계각층 군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대민타협이 아니라 미국의 강한 압박에 무릎을 꿇은 대미굴종이었다. 

 

미국이 전두환의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키고 김대중을 사면복권하도록 비상조치를 발동하여 전두환의 유혈진압기도를 극적으로 차단한 까닭은 항쟁에 나선 시위군중의 안전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6월민주항쟁이 위수령과 군대출동으로 진압되기는커녕 더욱 강하게 폭발하면서 한국 군부가 친전두환파와 반전두환파로 분렬되어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내전위험을 직감한 미국은 전두환의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키고 김대중을 사면복권하도록 강하게 압박하는 비상조치를 발동하여 6월민주항쟁의 불꽃을 꺼버렸던 것이다. 각계각층 군중 500만 명이 총궐기하였으나, 민주항쟁의 투쟁력량이 민주변혁의 추진동력으로 전화, 발전되지 못하고 유실된 근본원인은 미국이 한국의 정치와 군사를 틀어쥐고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대미예속체제에 있었다. 

 

1986년 2월 22일 필리핀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독재자 마르코스가 필리핀군을 출동시켜 유혈진압을 감행하려고 하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은 필립 하빕을 자신의 특사로 마닐라에 급파하여 마르코스에게 당장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라고 압박했고, 마르코스는 그 압박에 굴종하였다. 미국의 막후공작으로 필리핀 2월민주항쟁의 불꽃은 사흘 만에 꺼지고 말았다. 

 

영원히 잊지 못할 민주항쟁은 미국의 장기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갖지 못하면 민주주의도 실현할 수 없고, 통일국가도 건설할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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