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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종편 앵커가 말장난 하자 ‘면도칼 일침’

표창원, 종편 앵커가 말장난 하자 ‘면도칼 일침’

등록 :2015-12-31 09:16수정 :2015-12-31 17:57

MBN 화면 갈무리
MBN 화면 갈무리
‘사무실 인질극 문재인 대표 뭘 잘못?’ 질문에
‘면도칼 공격 당한 박근혜는 뭘 잘못했나’ 되물어
누리꾼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고 깔끔한 설명”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장이 종합편성채널(종편)에 출연해 앵커의 황당한 질문에 돌직구 답변을 해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를 낳고 있다.

 

표 소장은 30일 방송된 MBN ‘뉴스 BIG5’에 직접 출연해 이 프로그램 김형오 앵커와 1대1 대담을 나눴다.(▶관련 동영상)

 

김 앵커는 이 자리에서 이날 오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부산 지역구 사무실에서 벌어진 인질극 사건을 언급한 뒤 “야당을 비판하시는 분들 입장에서 질문을 드리겠다”며 “문재인 대표 부산 사무실에서 인질극이 벌어졌는데, 이유야 어찌됐든 제1야당의 대표 사무실에 국민이 들어가서 인질극을 벌이면서 제1야당 대표에게 대표직 사퇴를 요구했다. 이게 바람직하진 않지만 그래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문 대표가 뭘 잘못했을까?”라고 물었다.

 

표 소장은 이 질문에 대해 “역으로 한 번 질문을 드리고 싶다.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이 많다”며 “그 질문을 하신 앵커 입장에서 그게 정말로 문 대표에 대한 문제 혹은 책임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김 앵커는 “글쎄요, 제가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저 분(인질범)의 이상한 행동이라고 그냥 몰아붙이기에는…”이라고 답했다. 표 소장은 이에 대해 “그러니까 책임이나 문제의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라며 “그렇다면 2006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선거 유세 중에 면도칼 공격을 당하셨다. 박근혜 대표의 잘못인가? 똑같은 대답을 한 번 해보라”라고 되물었다.

 

김 앵커는 “아… 그때 그분은 정신이상이었잖아요”라고 말했고, 표 소장은 다시 “지금 이분도 정신이상으로 나오고 있다. 어떤가, 사람에 따라 다른가? 상황에 따라 다른가?”라며 “지금 계속해서 여러 종합편성채널에서 유사한 형태의 공격들을 하고 있다. ‘문재인 대표 사무실에 누가 들어가서 인질극을 벌인 걸 보니 문 대표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라고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2006년 그 사건도 똑같이 취급을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라고 지적했다.

 

 

 

표 소장은 이어 “북한의 김양건 노동당 비서가 사망하고 우리 정부가 주적임에도 불구하고 애도를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같은 나라의 야당 대표가 이런 피습을 당했는데 어떤 의사 표시하셨나? 위로나?”라며 “여당이나 정부나 방송의 태도 자체가 상당히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표 소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공격을 할 때가 아니라 범죄나 테러 행위에 대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같이 규탄을 할 때”라고 말했다.

 

누리꾼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방송 영상을 공유하며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튜브에 올라온 방송 영상은 31일 오전 8시50분 현재 31만회에 이르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율마러브’는 “와 정말 속이 다 시원하다. 저 상황에서 저렇게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라고 했고, ‘앵두양 1030’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명쾌한 설명”이라며 “편향적인 종편들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아리랑’은 “종편에서 표창원은 인터뷰 기피 대상이 되겠다”고 했고, ‘gooood’는 “이 나라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잘 보여준다”고 했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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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중·고등학생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12/31 21:04
  • 수정일
    2015/12/31 21:0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경찰에 잡혀간다고? 2학년 8반 내가 시켰다고 해"

[올해의 인물]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중·고등학생들
15.12.31 14:02l최종 업데이트 15.12.31 14:02l글: 선대식(sundaisik) 편집: 김지현(diediedie)

< 오마이뉴스>가 선정한 2015년 '올해의 인물'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에 나선 중·고등학생들입니다. 많은 독자의 추천이 있었습니다. 백남기씨를 올해의 인물로 추천하는 독자도 많았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와 집회가 억압받는 시대에, 백씨는 당당하게 거리에 섰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난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 집회 때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날 집회를 불법폭력집회로 몰아갔습니다. 훗날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요. 백남기씨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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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이 12월 26일 오후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앞에 모여 올해 마지막 '국정교과서반대 청소년행동'집회를 열고 거리행진을 하고 있는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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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거부한다.'

지 난 10월 11일 오후 중·고등학생 10여 명이 거리에 나섰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뜻을 담은 팻말을 들고 인사동에서 정부서울청사까지 행진했다. 쌀쌀한 날씨에 시민들은 잠시 눈길을 줄 뿐, 이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들의 목소리를 전한 언론사는 <오마이뉴스>를 포함해 몇 군데 되지 않았다(관련 기사 : 청소년들도 국정교과서 논쟁에 '뿔났다').

이 튿날 정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밝혔다. 국정교과서를 '올바른 교과서'라고 포장했다. 10월 17일 다시 중·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70여 명의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인사동 거리를 걸었다. 근조 표시가 된 '대한민국 역사교육은 죽었습니다'라는 펼침막을 앞세웠다.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어른들에게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고등학교 3학년생 전혜린양은 이날 2차 거리행동에 참여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과 버스에서 '나는 그저 역사다운 역사를 원한다'는 손팻말로 1인 시위에 나섰다. 그 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혜린양의 말이다.

"제 게 다가와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데,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눈물을 흘리면서 저를 안아줬고, 저도 하염없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물을 건네주는 분도 계셨고, 외국인도 응원했다. 이 때문에 끊임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역 사교과서 국정화는 박근혜 정부의 민주주의 퇴행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어른들도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인데도, 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나섰다. 어른들은 다시 한 번 학생들의 외침을 마주하며 부끄러워했고, 이를 계기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행동에 나선 중·고등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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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서울 구로고등학교 2학년생 이찬진군이 교내에서 선후배와 친구들을 상대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 이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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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울 구로고등학교 2학년생 이찬진(17)군은 3차 거리행동부터 지난 12월 26일 열린 12차 거리행동까지 빠짐없이 거리로 나섰다. 고2면 한창 공부해야 할 때다. 학업에 대한 걱정은 없었을까. 찬진군은 "공부도 중요하지만, 후배들에게 떳떳한 모습으로 졸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라면서 "교육은 정치인이 하는 게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독재자의 딸인데, 누가 보더라도 속이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누군가는 찬진군의 말을 두고 좌편향됐다고 혀를 찰지도 모른다. 찬진군은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다른 대통령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했다면 역시 거리에 나섰을 것"이라고 말했다.

찬 진군은 교내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서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전교생의 절반가량인 400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그는 "서명운동을 하면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잘 모르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국정화에 찬성하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라고 전했다.

서 명운동을 하면서 선·후배와 친구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찬진군은 "(경찰에) '잡혀가는 거 아니냐'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라면서 "겁먹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잡혀가면 2학년 8반 이찬진이 시켜서 했다고 하라고 했다"라고 밝혔다.

경 기도 광주시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생 이한수(18)군은 아는 동생에 이끌려 우연히 3차 거리행동에 참여했다가, 이후 12차 거리행동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한수군은 "사실 역사교과서 국정화든 아니든 상관없었다"라면서 "청소년이 이렇게 입장을 내고 거리에 나서는데도, 정부는 듣지는 않고 계속 국정화를 강행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라고 전했다.

중학교 2학년생 권혁주(14)군은 집 인근 중학교 앞에서 3주가량 1인 시위에 나섰다. 혁주군은 "저랑 같은 입장을 가진 분들이 음료수를 사다줬다, 비가 온 날에는 어떤 형이 비닐 우산을 사와서 건넸다"라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고, (세상이) 바뀔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국정교과서가 계속 나와도, '송곳' 같은 학생과 시민이 튀어나와서 국정화 반대 물꼬를 틀 것"이라고 덧붙였다.

4.19혁명도 고등학생의 시위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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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17일, 역사교과서 국정화반대 청소년 2차 거리행동에 참여한 초중고생들이 종로구 인사동거리에서 평화행진을 하는 가운데, 한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행사에 불만을 표시하며 갑자기 현수막에 발길질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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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생들의 외침은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울림을 이끌어냈지만, 이를 비판하는 어른도 적지 않다. 지난 10월 <오마이뉴스> 기자와 인터뷰했던 한 학생은 학교의 우려와 부모님의 반대에 기사화 포기를 요청했고, 또 다른 학생은 기사가 나간 뒤 "부모님이 알게 됐다"라면서 기사 삭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2차 거리행진 때는 5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너희가 역사교과서를 아느냐"고 펼침막을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혁주군은 "거리행동 때 박수나 격려를 받기보다는 욕을 더 많이 먹었다"라면서 "학생들의 말을 무시하고 '니들이 뭘 알아서 말하냐'고 하는 건 좋지 않다"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무모한 외침일까. <오마이뉴스>는 2008년 올해의 인물로 '촛불 소녀'를 선정했다. 그해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한 여중·고생들은 당당하게 최고 권력자를 비판했다. 어른들은 여중·고생들 앞에서 부끄러워했다. 이후 수십만 명의 시민이 거리에 나왔다.  

제4대 대통령선거를 보름 앞둔 1960년 2월 28일 오후, 대구의 고등학생 1200여 명은 "학원의 정치 도구화 반대" 등을 외치며 교문을 나서 경북도청까지 시위를 벌였다. 학교가 민주당 장면 후보 강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인데도 등교 명령을 내린 것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곧 경찰이 출동했고, 2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이후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3월 15일 대통령선거일에 마산에서 한 고등학생이 실종됐다. 한 달 뒤 바다에서 이 학생의 시체가 떠올랐다. 마산을 포함해 전국이 들끓었고,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중·고등학생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겠다고 했다. 또한 다양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겠다고 했다. 혁주군은 "앞으로 국정화가 철회될 때까지 열심히 활동할 것"이라면서 "학생들도 충분히 이 사회에 의견을 낼 수 있는 존재며, 자신의 의견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존재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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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교과서 반대' 청소년 거리행진 역사교과서 국정화반대 청소년 2차 거리행동이 17일 오후 종로구 인사동거리에서 초중고등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정교과서반대청소년행동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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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오마이뉴스> 창간 이후 '올해의 인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2000년 문정현 신부(매향리 공대위 활동)
2001년 화덕헌(이문열 도서 반환운동)·박경석(장애인이동권연대 상임공동대표)·덕성여대 총학생회 및 교수협의회
2002년 행동하는 누리꾼
2003년 문규현 신부(새만금 및 부안핵폐기장 투쟁)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여의도 천막농성단 1000명
2005년 노충국 부자
2006년 평택 대추리 사람들
2007년 참언론실천 시사기자단(전 <시사저널> 기자들)
2008년 촛불 소녀
2009년 용산참사 유가족
2010년 천안함 북풍 이겨낸 6·2 지방선거 유권자들
2011년 송경동 시인
2012년 김효원(왕복 40시간 버스 타고 투표 참여)
2013년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
2014년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 부모들
2015년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중·고등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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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황-김 라인’ 뜰까?

 

 

김양건 당비서 급서, 대남총책 공백 오나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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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30  21:5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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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건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겸 통일전선부 부장이 29일 교통사고로 사망해 향후 남북관계에 미칠 파장이 주목된다. 북한은 이날 당과 공화국, 최고인민회의 공동명의로 부고를 내고, 김정일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위원장을 맡은 국가장의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고 김양건 비서는 지난 8월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과 함께 남측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을 상대로 이른바 ‘2+2 고위급 접촉’에 나서 ‘8.25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대남업무를 총괄해왔다는 점에서 그의 부재가 북한의 대외정책과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관심거리다.

갑작스런 대남 총책의 사망

   
▲ 김양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겸 통일전선부 부장이 29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사진은 지난 8월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 당시의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29일자 ‘김양건동지의 서거에 대한 부고’를 통해 “김양건 동지는 교통사고로 주체104(2015)년 12월 29일 6시 15분에 73살을 일기로 애석하게도 서거하였다”고 발표했다.

29일 오전 6시 15분이면 남측 시간으로 29일 오전 6시 45분으로 새벽 내지는 이른 아침 시간이다. 28일 김정은 제1위원장은 군 제3차 수산부문열성자회의에 참석해 연설하고 당 및 국가표창을 수여했지만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박영식 인민무력부장 외에는 수행인물이 파악되지 않는다. 군 행사인 관계로 김양건 비서는 참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29일 중앙보고대회에서는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보고를 했고, 김기남, 최태복, 당 비서 등이 참석해 만약 김양건 비서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참석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그만큼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김양건 비서가 북한 언론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지난 17일 동평양대국장에서 열린 김정일 국방위원장 4주기 회고음악회인 것으로 통일부는 파악하고 있다. 당시 보도에 김 비서의 이름은 실리지 않았지만 영상에는 그가 참석한 모습이 포착된 것. 북측 공식보도에 이름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이달 1일 김 1위원장의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방문에 동행한 것이다.

김양건 비서는 지난해 10월 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황병서, 최룡해와 함께 전격 방남했고, 올해 8월 군사분계선(MDL)을 사이에 두고 남북간 팽팽한 대치가 벌어진 상황에서 황병서와 함께 판문점에서 남측 김장수, 홍용표와 고위급 접촉을 통해 당국대화 추진 등을 담은 ‘8.25합의’를 전격 도출하는 등 최일선에서 대남사업을 총괄해왔다.

이외에도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 서거시 조문특사단의 일행으로 김기남 당 비서 등과 함께 방남했고, 김대중 대통령 5주기인 지난해 8월에는 맹경일 아태위 부위원장을 대동하고 개성공단에서 조화를 전달하기도 했다.

후임자는 결정될까?

당장 대남비서 겸 통전부장의 급서는 대남정책 책임자의 부재를 뜻한다. 김양건 비서는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회담에 단독 배석했을 만큼 일찌감치 이 분야에 독보적인 역할을 구축해왔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임이 지난 8월 북측 보도를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허담-윤기복-김용순-김양건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대남담당비서는 대남사업 분야에서 성장한 간부들이 아니라 주로 당 국제부와 내각 외교부(윤기복은 경제관료)에서 성장한 관료(당료)들이었다”며 “통일전선부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오랜 측근으로 활동했다고 하는 림동옥 제1부부장도 2003년 김용순 비서가 사망한 후 통전부장직을 승계하지 못하고, 3년이 지난 뒤에야 부장직만 승계했고, 후임 비서에는 김양건 국제부장이 임명됐다”고 짚었다.

일각에서는 당분간 대남비서를 공석으로 두고 통일전선부에서 예를 들어 김기남 비서를 통해 김정은 제1비서에게 보고하는 방식을 점치기도 한다. 정 교수는 “신임 통전부장이나 비서에는 통전부 바깥의 인물이 기용될 가능성이 크다”며 “일단 국방위원회 대외담당 참사가 가장 유력하지 않을까”라고 관측했다.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명단에는 직책 없이 ‘김영남, 황병서, 박봉주, 김기남, 최룡해, 최태복...’순으로 명기됐고, 특히 통일전선부 부부장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김완수, 원동연, 리종혁, 김진국, 박진식’이 마지막으로 명단에 올랐다. 김완수 6.15북측위 위원장과 원동연 통전부 부부장, 리종혁 아태위 부위원장은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고 김진국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사다. 박진식은 통일신보 주필을 거친 내각 참사로만 알려져 있다.

김완수(74) 위원장은 유엔대표를 비롯해 다양한 외교 경력과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국전선 의장 등 다양한 경륜을 쌓았고, 남측 언론에 한때 숙청설이 보도되기도 했던 원동연(68) 부부장은 아태위 부위원장을 겸직하며 남북회담 대표로 나서는 등 대남실무에 정통해 후임자로 남측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대남비서 자리는 권력 핵심이 맡을 수 밖에 없는 자리이므로 상당기간 공백으로 두거나 통전부 밖에서 비중있는 인사가 맡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아직은 우세하고, 통전부장 역시 장의위원 명단에는 없더라도 더 실질적인 역할을 맡고 있거나 맡을 수 있는 인물이 발탁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조평통 서기국장에서 지난 10월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강지영이나 남북관계 현안을 챙기고 있는 맹경일 통전부 부부장이 통전부장 후보로 거론되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남북관계, ‘황-김 라인’ 뜰까?

   
▲ 지난 8월 남북 고위급 접촉 한 당사자인 김양건 비서가 급서함으로써 남북 고위급 접촉은 '2+2'에서 '황병서-김관진' 라인만 남게 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북한 정권기관들의 공동부고는 “김양건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충직한 혁명전사이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가장 가까운 전우, 견실한 혁명동지”라고 3대에 걸친 충성을 평가하고, 특히 김정은 제1위원장의 ‘가장 가까운 전우, 견실한 혁명동지’라는 최상의 칭호를 부여했다. 무엇보다 김 1위원장이 장의위원장을 맡은 것이 그에 대한 사후 평가의 기준으로 볼 수 있다.

부고는 또한 “김양건동지는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 부장, 비서의 중책을 지니고 우리 당의 자주적인 조국통일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면서 “위대한 수령님들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온갖 지혜와 정열을 다 바치였다”고 기렸다. ‘수령님들의 조국통일유훈’과 ‘당의 자주적 조국통일정책’을 위해 헌신했다는 것.

이는 향후 후임 대남비서와 통전부장의 자격조건이자 통전부의 나아갈 지침인 셈이다. 특히 김양건 비서가 마지막으로 이룬 ‘8.25합의’는 통전부가 실현시켜야 할 당면과업으로 될 것으로 보인다.

남북은 8.25합의에서 군사적 대치상태 종식이라는 당면 문제 해결과 함께 △서울 또는 평양에서 당국자 회담을 개최하고,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고, △다양한 분야에서의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난 11~12일 개성공단에서 열린 차관급 당국회담은 성과없이 사실상 결렬된 상태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지난 17일 관훈클럽 초청토론에서 일단 차관급 당국회담의 틀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연말연시가 지난 뒤 다시 차관급 회담을 가동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꾸준히 ‘2+2 고위급’ 수준으로 회담의 격을 높여 실질적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돼 왔다.

이같은 상황에서 김양건 비서가 급서함에 따라 이제는 ‘황병서-김관진 라인’이 유일한 고위급 접촉점으로 남게 됐다. 따라서 향후 차관급 당국회담이 지지부진할 경우 이제는 ‘황-김 라인’이 ‘황금라인’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일각에서는 김관진 실장이 현 정부의 외교안보 '원톱'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고 싶어한다는 전언도 있는 실정이었다.

정상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김정일 정권에 이어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까지 계속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해온 김양건 당중앙위원회 대남 비서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남북대화의 장기 중단이 불가피할 것으로 우려된다”며 “특히 제1차 차관급 남북당국회담이 결렬된 가운데 김 비서가 사망해 남북관계가 더욱 경색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아울러 “강석주의 와병으로 김양건 비서가 사실상 국제비서 역할까지 최근에 수행했기 때문에 북한의 대중 관계 개선도 지연될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짚었다.

그러나 지난 10월 대남 라인 인사가 일단락됐고, 내년 김정은 제1위원장의 신년사에 담길 대외 메시지는 이미 정리가 끝났을 것으로 추정돼 대남, 대외정책에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더 우세한 상황이다.

중국과의 관계도 지난 10월 10일 당창건 60주년 기념행사에 류윈산 중국공산당 상무위원 방북을 계기로 궤도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난 12일 북한 모란봉악단이 공연 직전에 북한으로 철수한 것은 당분간 북중관계를 멈칫거리게 할 수는 있지만 관계개선의 흐름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북측 부고에 “김양건동지는 위대한 주체사상, 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위업에 무한히 충실하였다”고 기록한 점은 그의 죽음을 순직으로 내부평가한 것으로 읽히며, 이는 그가 주도한 대남, 대외정책에 큰 변화가 없을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룡해 등장과 북한 내부의 권력구도

   
▲ 김양건 비서 국가장의위원회에는 지난해 10월 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전격 방남한 황병서 총정치국장(가운데)과 최룡해 당 비서(오른쪽)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특히 '혁명화 교육'설이 돌았던 최룡해 비서는 다섯 번째로 호명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위원장을 맡은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서 가장 눈에 띠는 대목은 역시 장의위원 최룡해 당 비서다. 최룡해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박봉주 내각 총리, 김기남 노동당 비서에 이어 다섯 번째로 호명됐다.

군 총정치국장 시절보다는 뒤로 밀린 순서지만 정치적 비중을 잃지 않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위치다. 더구나 최근 혁명화교육을 위해 하방됐다는 설이 나돈데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정통한 소식통은 “최룡해는 숙청된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성장 실장은 “최룡해가 지방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어 혁명화교육을 받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대북 소식통에 의하면 최룡해는 계속 평양에 있었다”며 “김정은의 청년중시정책에 반대하다가 해임된 것이 아니라 제7차 당대회 개최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표명했다가 해임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최근 남북 차관급 당국회담 결렬과 모란봉악단의 중국 공연 취소 등 대외정책을 둘러싼 북한 내부의 강온대립을 김양건 비서의 교통사고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움직임도 있지만 확인된 사실은 없다.

지난 10월 대남라인 인사 등 김양건 비서의 영향력 강화 과정에서의 충돌로 보는 또다른 관측도 있다. 특히 한 민간 소식통은 “최근 김양건 비서가 김정은 1위원장의 측근으로 자리잡으면서 인사권에서도 칼을 휘두르는 등 영향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반발을 샀을 수도 있다”며 “단순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보도는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 전문가들은 대체로 북한이 공식보도한 교통사고에 비중을 두면서, 한명 한명 비서들의 성향이나 내부 영향력 보다는 역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의중이 대남, 대외정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다만, “남북관계의 틀이 원만하게 가동되는 국면에서는 큰 영향이 없겠지만, 남북대화가 막혀 있고, 접점을 찾지 못하는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는 그의 공백이 클 수밖에 없다”며 “김 비서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남북관계의 불확실성이 더 커진 느낌”이라는 정창현 교수의 우려는 눈여겨 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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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법 폐지가 자주통일”

국보법 철폐 양심수 전원 석방을 위한 결의의 밤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12/31 [00:3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국가보안법 철폐,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결의의 밤 참석자들이 국가보안법 철폐가 자주 통일을 앞 당기는 길이라며 투쟁에 나설것을 결의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국 가보안법철폐 국민연대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양심수후원회가 주최하고 국가보안법에 의해 피해를 당한 범민련 남측본부, 이석기 내란음모사건 피해자 구명위원회, 코리아연대, 성직자 노동자 공안탄압대책위원회, 국가보안법피해자모임 등은 국가보안법 폐지가 자통일이라며 국보법 폐지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 단체들은 30일 저녁 6시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2층에서 국가보안법철폐, 양심수전원석방을 위한 결의의 밤을 진행하며 ‘국가보안법 없는 2016년’을 희망했다.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내란음모 조작사건, 정당강제 해산, 간첩조작, 통일운동단체 탄압 그리고 자주통일에 대한 이사 표현 등을 이적행위로 몰아 쉴 새 없이 압수수색을 진행하고 강제 연행, 구속 기소하여 법정에 세웠다”고 주장했다.

▲ 양심수 후원회 권오헌 명예 회장은 2015년 국가보안법에 의한 탄압사례를 일일이 거론한 후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강력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권오헌 명예회장은 “국가보안법은 전가의 보도로 무소불위의 악역을 다했다.”면서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제 혼자만으로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지만 공안기구와 결합하면 공안권력이 원하는 그 무엇이든지 해내는 요술단지가 된다.”고 꼬집었다.

 

권 명예 회장은 범민련 남측본부를 비롯한 통일운동 단체와 개인에 대한 탄압 사례를 열거 한 뒤 “이 땅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짓밟으며 자주적 평화통일에 결정적 장애가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과 함께 보안관찰법을 폐지하고 국정원과 보안 수사대 등 공안기구를 해체하라고 촉구했다.

 

범민련 남측본부 원진욱 사무처장은 “범민련이 결성 당시부터 독재정권에 의한 탄압이 시작 되어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남을 25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범민련은 여전히 부당한 탄압을 받고 있다.”면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당하고 있는 단체가 바로 범민련”이라고 주장했다.

 

원진욱 사무처장은 현 이규재 의장과 전 의장들에 대한 탄압사례에 대해 말하고 “역대의장은 모두 구속되어 징역을 살았다. 6명의 사무처장 역시 구속되어 3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지난 25년 동안 대규모 침탈만 20여 차례가 넘고 밤민련 간부들의 구속 기간을 합치면 180여년에 이를 정도”라고 고발했다.

 

원 사무처장은 “범민련에 대한 탄압은 본질적으로 남북해외 3자연대를 가로막고 정부의 간섭과 통재로 자주통일 운동의 원칙과 힘을 거세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통일을 이루는데 있어 서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북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상식일 수가 없듯이 우리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통일을 실현해 나가는 통일운동은 결코 ‘이적’이나 ‘종북’이 될 수 없다. 또 다시 유신독재가 되살아나고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합법적인 모든 활동이 ‘이적’으로 ‘불법’으로 메도 되어 국가보안법의 희생물이 되는 악랄한 탄압이 이어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진욱 사무처장은 “범민련은 25년의 자랑스러운 투쟁 전통을 이어 불굴의 정신력과 뜨거운 애국의 열정으로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이루기 위한 통일애국 투쟁을 벌여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 소위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한동근 선생은 내란음모사건은 세계사에 없는 정치 탄압이라며 사건 피해자들의 석방을 위해 싸워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소위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 된 한동근 선생은 “소위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박근혜 정권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해보고자 조작한 사건이라는 것이 내.외 여론”이라며 “33년만에 드러난 내란 사건은 대한민국 입법기관인 현직 국회의원을 뚜렷한 증거 없이 구속 시키고 90분 강의를 이유로 9년 이라는 중형을 선고한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정치 탄압이었다.”고 단죄했다.

 

한동근 선생은 “국정원에 의해 기획된 내란음모사건은 재판도 받기 전에 종편 등 보수언론을 동원한 마녀사냥식 여론 재판으로 종북 주의자 국가전복세력, 내란법으로 낙인찍었다”면서 “북과 연계되었다는 설도, 지하조직을 결성하려 했다는 설도 내란음모도 사실이 아니거나 무죄를 선고 받았다.”고 말하며 공안당국의 거짓을 폭로했다.

 

한 선생은 “한국 사회에서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내란사건의 진실은 무죄라는 판단으로 밝혀졌으나 현 정권의 정치 탄압으로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구속자들은 지금도 차디찬 독방에 갇혀 있다.”며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인권이 실현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피해자들의 조기 석방을 이루어 내야한다. 현실은 어렵지만 봄을 이기는 겨울이 없듯이, 모든 정치 탄압 피해자들이 석방되는 희망의 그날을 앞당기는 그날을 위해 힘을 모으겠다.”고 약속했다.

 

코리아 연대 양고은 공동대표는 지난해부터 시작 된 후 계속 되고 있는 탄압 사례를 발표하고 “국가보안법 철폐와 국정원 폐쇄, 우리민족을 고통에 빠뜨린 미국을 몰아내는 투쟁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성직자 노동자 공안탄압 대책위원회 권명희 위원장은 김성윤 목사에 대한 국정원의 불법 위법적 행위에 대해 하나하나 고발한 뒤 “오늘 남한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비극은 노동운동도 통일운동도 모두 용공 빨갱이로 매도되어 온 분단 된 한반도의    현실”이라며 “국정원과 검찰은 박근혜 정권의 독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오늘 정권의 시녀, 폭압기구를 자임하며 통일. 노동운동에 대한 전면적 탄압을 예고하며 조작 사건을 만들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권명희 위원장은 “우리가 굳게 뭉쳐서 기가 막힌 혐의로 감옥에 갇힌 김성윤 목사를 가족 품으로 돌아오게 하고 피해자들과 가족들도 더 큰 고통을 받지 않도록 투쟁해야 한다.”며 “국가정보원과 검찰, 국가보안법으로 작동 되는 박근혜 정권의 공안몰이를 널리 알려서 우리와 같은 피해자들이 나오지 않도록해야 한다.”고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나서 줄 것을 호소했다.

▲ 범민련 남측본부 이규재 의장은 국가보안법이 관에 들어갈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며 신념을 가지고 투쟁해 나갈 것을 호소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범민련 남측본부 이규재 의장은 “소위 왕재산 사건으로 구속된 임순택 동지에게 일제시대 항일혁명 투쟁에 나섰던 사람들의 자손이 떳떳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친일파의 후손 들이 국회의원을 하며 가문의 영광이라 하는데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우리가 지금하고 있는 자주통일 운동은 우리 후손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삶이라고 얘기했다.”면서 “일제 시대 우리민족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치안유지법 보다 현재의 국가보안법이 훨씬 악랄해 하다. 우리민족에게 고약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단죄 규탄했다.

이규재 의장은 “국가보안법이 관속에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신념을 가지고 투쟁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장경욱 변호사는 “국가보안법으로 이득을 얻고 있는 세력들은 미국과 사대세력 그리고 밥벌이를 하는 세력들”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가 안일하게 대처하는 것은 제 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장경욱 변호사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공포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들은 취약하다.”며 “우리가 국가보안법에 위축되지 않고 전면적으로 투쟁을 벌인다면 허깨비 같은 국가보안법은 사라 질 것”이라고 피력했다.

 

장변호사는 “국가보안법은 조작의 역사”라면서 “지금 까지 탈북자들에 대한 조작 간첩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앞으로 빙산의 뿌리까지 캐 낼 것이다.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에 분단 극복의 길이 있다.”고 역설했다.

 

▲ 이날 모임 참석자들은 악법 중의 악법인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국가보안법 철폐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결의의 밤에 참석한 단체 성원들과 인사들은 “우리는 국정원 위법행위의 근간이 되고 종북몰이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말살하는 악법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면서 “악법 중의 악법이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박근혜 정권이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 다시금 국가보안법폐지의 결의를 다진다. 평범한 시민에게 서로 어우러지는 선량한 세상을 위해 작은 힘을 모아왔던 개인에게 국가정보원의 국가 폭력은 너무나 무섭고 두렵고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작은 힘을 모아 우리 곁의 사람 사람의 힘을 믿고 정의의 손을 잡아 부조리하고 부당한 거대한 힘에 맞서 싸워 나갈 것”이라고  결의했다.

 

참석자들은 끝으로 ‘국가보안법 철폐하고 양심수를 석방하라’ ‘표현의 자유 인권유린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국민탄압 불법자행 공안정치 국가정보원 해체하라’ ‘종북몰이 공안통치 즉각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행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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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버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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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9일 23시 50분 화요일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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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화가 엔화로 바뀌었다, 박정희-박근혜 부녀의 '불법 환전'

 

[게릴라 칼럼] 법적 책임 묻지 않고 봉합한 한일 회담, 최대 수혜자는 미국

15.12.30 10:28l최종 업데이트 15.12.30 10:28l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손지은(93388030)

위안부(일본군 성 노예) 문제가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외무대신의 28일 회담에서 타결됐다. 위안부 강제동원이 일본군에 의해 자행됐으며 일본 정부가 이 점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데 양쪽이 공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책임이 법적 구속력을 띠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양측이 공개한 발표문에 따르면, 아베 총리대신이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는 수준에서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또 양쪽 외무장관은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의 설립책임을 한국 정부에 넘겼다. 일본 정부는 이 재단에 자금을 기부할 뿐이다. 자금 액수와 관련하여 기시다 대신은 "대략 10억 엔 정도를 상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내용은 두 정부가 정말로 강조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핵심은 다른 데 있는 듯하다. 기시다 대신은 "이번 발표를 통해 이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강조했다.

또 윤 장관과 기시다 대신은 똑같이 "앞으로 국제연합 등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를 두고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한다"고 약속했다. '앞으로는 이 문제를 재론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 양국 관계가 훼손되도록 하지 않겠다'는 언약이 두 정부가 진정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엔 8억 달러, 이번엔 10억 엔으로 '봉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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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모습(가운데).

50 년 전인 1965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도 이번과 유사한 청구권협정을 체결했다.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무대신 명의로 체결된 협정의 제1조에서는, 3억 달러 무상원조 및 2억 달러 유상차관으로 식민지배 문제를 해결한다고 규정했다.

협상 과정에서 양쪽은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 제공을 별도로 합의했다. 3억 달러 무상원조와 2억 달러 유상차관과 3억 달러 이상 상업차관을 합한 총 8억 달러로 식민지배 문제를 종결하기로 한 것이다.

50 년 뒤인 이번에 기시다 외무대신은 "이번 발표를 통해 이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언급했다. 유사한 표현이 50년 전의 청구권협정 제2조에도 있었다. "(이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는 규정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양쪽이 똑같이 하고 싶은 말은 "이번으로 끝이야!"다. 제대로 해결하지도 않았으면서 항상 그 말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점을 본다면, 지금이나 그때나 양국 정부는 서로를 상대로 합의했다기보다 한국 국민을 상대로 공동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아버지 박 대통령은 8억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식민지배 문제를 봉합했고, 딸 박 대통령은 10억 엔을 받는 조건으로 식민지배 문제에 속하는 위안부 문제를 봉합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한 일은 본질에서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8억 달러와 10억 엔이 아닐까. 달러화가 엔화로 바뀐 것 말고 더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1965년과 2015년은 50년 차이다. 50년이란 시차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은 게 있다. 50년 전에도 '박 대통령', 50년 후에도 '박 대통령'이라는 점?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한일 양국 합의의 최대 수혜자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런 류의 합의를 통해 최대 이익을 얻을 나라는 일본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다. 양국이 위안부 문제로 계속 충돌하면, 가장 큰 손실을 입을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한일이 계속 다투면 한미일 삼각동맹이 훼손되고, 이렇게 되면 동맹의 리더인 미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를 봉합하는 이런 합의는 미국에 최대 이익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과거와 현재, 한-일 합의 수혜자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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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병세 외교부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지난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한일외교장관회담을 마치고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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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은 1945년에 세계 패권을 장악했지만, 50년대 들어 세계 각지에서 도전을 받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신생국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고, 유럽에서는 서유럽 국가들이 경제통합운동을 일으켰다. 또 아시아·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이 비동맹운동을 통해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냉전질서에 도전장을 내걸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퇴조하는 속에서, 60년대 들어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현상이 출현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상대적으로 미국의 패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 국은 1951년 일본과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고 1953년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런 상태에서 1960년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으로 격상시켰다. 상호협력안보조약은 자위대가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을 통해 주일미군과 공동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하는 조약이었다. 1951년 조약은 미군의 일본 주둔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만 의의가 있었다. 1960년 조약으로 미국은 일본군과의 합동작전으로 동아시아 전략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미국의 지도를 받는 한국과 일본을 한데 묶는 것이었다. 한일 양국이 친해야만 미국이 두 나라를 움직여 동아시아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두 나라가 군사동맹을 체결하는 게 최선이지만, 양국 국민의 감정상 이것은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미국은 양쪽이 수교하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일 수교가 이루어지려면 식민지배 문제가 어떻게든 봉합되어야 했다. 이때 구원투수 역할을 한 게 아버지 박 대통령이다. 1965년에 그는 8억 달러의 유·무상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식민지배 문제를 봉합하고 한일관계를 정상화했다.

1965 년 한일관계 정상화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점은, 1964년 10월 국무성이 윌리엄 번디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를 서울에 보내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지지한다고 공개 천명한 사실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천명으로 미국은 한국 국민의 조약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 했다.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양국관계가 정상화됨에 따라,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낮은 수준에서나마 한미일 삼각동맹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한일 군사동맹이 체결됐다면 높은 수준의 삼각동맹이 작동됐겠지만, 한일 국민감정을 고려하면 이 정도의 성과만 거둔 것도 한·미·일 삼국 정부로서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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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청구권협정에 표기된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이나 외무대신의 서명.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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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일 삼각동맹은 낮은 수준에서 이뤄졌지만, 이것은 60년대에 미국과 동아시아 해양세력이 동아시아 대륙세력을 능가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대륙세력에 속한 소련과 중국은 제각각 핵무장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상호 분열한 데 반해, 해양세력에 속한 미국·한국·일본·대만·필리핀 등은 미국이 제공하는 단일한 핵우산 하에 뭉쳐 있다. 이 점도 해양세력의 우위를 가능케 했지만,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인해 이쪽 진영의 우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1960년에 미일동맹이 업그레이드되자, 1961년 북한은 소련 및 중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했다. 하지만 이 동맹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962년에 소련은 쿠바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미국 코앞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다 미국의 전쟁 위협을 받고 계획을 포기했다(쿠바 미사일 위기). 이로 인해 소련에 대한 공산권 국가들의 신뢰도가 크게 떨어졌다. 북한 역시 실망했다.

1964년경부터 중국에서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지향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한미일 삼각동맹이 체결되는 중차대한 상황에서 '다분히 한가하게' 문화대혁명에 빠지는 중국의 모습은 북한 지도부가 볼 때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의 실망감은 문화혁명 기간에 벌어진 양국 간의 갈등이 잘 증명한다.

이 렇게 60년대 전반에 한미일 관계는 더 견고해진 데 반해 북중소 관계는 더 약해졌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해양세력이 북중소 대륙세력보다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60년대에 북한이 1·21 청와대 기습이나 울진·삼척 침투 같은 무장 도발을 많이 일으킨 데는 이 같은 불리한 역학 구도 속 두려움도 분명히 작용했다.

60년대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해양세력이 우위를 강화한 데는 아버지 박 대통령의 역할이 큰 몫을 했다. 그가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한일관계 정상화는 더뎠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지장이 초래됐을 수도 있다. 70년대엔 핵개발로 미국에 반기를 드는 듯했지만, 60년대에 박정희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임을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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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정상 기념촬영 (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11월 2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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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곤경을 겪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김정은 정권의 출범 뒤로 북한은 한층 더 예측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거기다가 중국마저 노골적으로 미국에 도전하는 일이 잦아졌다.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미국이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중국은 난사군도 분쟁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당장에라도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처럼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도 북한을 어느 정도는 모방하고 있다.

이 런 상황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되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힘이 실릴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미국이 곤란한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50년 전에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돈 몇 푼' 받는 조건으로 또다시 일본에 면죄부를 제공했다. 아버지가 했던 일을 딸이 또다시 해낸 것이다. '달러화'를 '엔화'로 바꾼 것만 빼면, 65년에 박정희가 한 일과 2015년에 박근혜가 한 일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불법 환전'이라는 점만 빼면 두 부녀의 행위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얻은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이 약화하는 걸 당분간 면하게 됐기 때문이다. 존 케리 국무장관이 미국 시각으로 28일 공식 논평을 통해 "이번 합의를 이끌어낸 한일 양국 정상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며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를 묶어 칭송하면서 적극적 환영의 뜻을 표시한 사실은 이번 타결의 최대 수혜자가 누구인지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는 박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는 위안부 문제를 적당히 봉합함으로써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수행을 돕고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국무성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나 미국의 51번째 주지사가 해야 할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으로 살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환기해야 한다.
 
 

역사 연구자. 주요활동: 삼성경제연구소 강의,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연재, tbs FM 95.1(목) 10:19 출연, 웅진씽크빅 생각쟁이 감수 및 연재 등. 출간도서: 조선상고사(번역서), 遺大投艱集, 조선 노비들, 왕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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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에는 "제발 같이 살자!"

 

[독서통] <섬을 탈출하는 방법> 쓴 조형근 한림대학교 교수
이대희 기자 2015.12.30 08:01:31
외환위기 이후 모두 깨달았습니다. 한국은 정글이 됐습니다. 노동자 각자가 자기 살길을 찾아 싸워야 했습니다.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됐습니다. 회사는 언제든 내 책상을 뺄 수 있고, 이웃은 언제든 내 뒤통수를 치리라는 생각이 믿음으로 변했습니다. 이미 <프레시안>이 '독서통'을 비롯해 여러 자리를 빌려 각 분야 전문가의 입으로 전해드린 내용이죠. 신자유주의 광풍이 휩쓴 한국에 이웃의 정, 마을 공동체 정신은 박제된 신화가 돼 버렸습니다. 
 
독서통은 이 고단한 현실을 극복할 방법을 알아봤습니다. 사실 현실 진단은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그리는 장밋빛 미래상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일 뿐이었습니다. 금융 자본주의를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경험을 이미 온 세계가 했습니다. 다만, 아직 이를 극복할 방법론을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섬을 탈출하는 방법>(조형근·김종배 지음, 반비 펴냄)은 지금 우리 사회를 섬으로 비유하고, 현실을 극복할 방안을 모색하는 책입니다. 팟캐스트 <사사로운 토크>에서 다룬 대안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대담 형식으로 옮겼습니다. 이번 독서통은 저자인 조형근 한림대학교 교수를 모시고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물론 진행자인 김종배 <시사통> 대표도 공동 저자입니다만, 미묘한(?) 자리의 특성상 김종배 대표는 이번 독서통 시간에는 되도록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 책은 협동경제, 사회적 경제 모델 등의 여러 대안을 찾는 한편, 현재 우리보다 더 나은 사회로 여겨지는 스웨덴, 독일 등 여러 나라의 현존 모델도 진단해봅니다. 다만 시간 관계상 독서통은 이를 모두 다루진 않았습니다. 
 
독서통은 김종배 <시사통> 대표와 강양구 <프레시안> 기자가 공동 진행합니다. 29일 서울시 마포구 <시사통> 스튜디오에서 열린 섬 탈출 모색의 자초지종을 알려드립니다. 
 
 
 

▲ "우리 시대의 유토피아, 바로 신자유주의였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팟캐스트 이야기를 책으로!
 
김종배 : 화요일 오후의 독서통입니다. 이번 주 소개해드릴 책은, (오늘은 저자인 '지식통'의) 조형근 교수님께서 직접 소개해 주시죠? (웃음)
 
조형근 : <섬을 탈출하는 방법> 입니다. '각자 도생의 경제에서 협력과 연대의 경제로'라는 부제가 있습니다. 
 
김종배 : 출판사는 반비입니다. 조형근 한림대학교 교수님의 저서입니다.
 
강양구 : 또 한 분이 더 있죠? (웃음) <시사통> 김종배 선생님이 공저입니다.
 
김종배 : (웃음) 저는 되도록 이 책이 나오게 된 과정까지만 말씀드리고, 오늘은 뒤로 물러나 투명인간처럼 있을 예정입니다.
 
제 가 <시사통> 말고도 2013년에 '공부하는 팟캐스트'를 표방하면서 <사사로운 토크>라는 별도의 팟캐스트를 진행했습니다. 그때 조형근 교수, 현재 '지리통'을 진행하시는 임동근 서울대학교 교수와 인연을 맺었죠. 두 교수께서 팟캐스트를 통해 풀어낸 콘텐츠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이 모두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도시 정치학을 다룬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경제학사를 훑어본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이 그것이죠. 마지막 하나가 대안 경제인데, 그게 이번에 이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강양구 : 저는 세 책을 다 읽었습니다. 세 책 다 주옥같죠. (웃음) 저의 경우에는 팟캐스트는 안 듣고 책으로만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고 흥미진진했습니다.
 
김종배 : 저 자로 제 이름이 올라가 있긴 하지만, 사실 저는 이름만 올린 거예요. 문답식으로 정리하면 훨씬 더 독자에게 잘 다가갈 것 같아서 독자를 대신해 묻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섬을 탈출하는 방법>의 콘텐츠도 모두 조형근 교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조 교수님이 단독 저자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까지만 하고요, 어쨌든 책의 관계자이니 오늘 저는 독서통 진행에서 빠지겠습니다. (웃음)
 
강양구 : 그런데 김종배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섬을 탈출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세 권의 책에서 계속 반복되는 질문 패턴이 있습니다. 독서통 진행 때도 같은 질문을 하시죠. "제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건데요"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몰라서 그렇게 질문하시나요? (웃음)
 
조형근 : 심 지어 저는 그 얘기를 이 책 서문에 썼습니다. 방송 때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데요" 하는 김종배 선생님의 질문이 정말로, 원고에 없는 얘기예요. 그럴 때마다 정말 당황합니다. 청취자께서 이 책을 읽으시면 그 질문에 제가 대답을 잘하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는 많이 허둥댔죠. (웃음) 여러분이 보시는 책은 출판사가 보내준 녹취록을 바탕으로, 방송 이후 새롭게 내용을 보충해 다시 정리한 것이죠.
 
김종배 : 제가 방송 때 하는 질문의 90%는 실제로 몰라서 묻는 거예요. (웃음) 다 만 10% 정도는 이런 이유도 있습니다. 학계에서 당연하다 생각하고 생략하고 넘어가는 것들이 있죠. 그런데 그 분야를 잘 모르는 대중은 바로 그 지점부터 훑어야 맥락이 이해가 될 때가 있거든요. 그걸 짚고 넘어가려고 질문을 던지는 일도 있습니다.
 
강양구 : 팟캐스트를 정리한 책이다 보니, 편집자가 중간중간 '빵' 터지는 부분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살려놓으셨더라고요. 재미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김종배 선생님의 영어 실력이 드러나는 대목. (웃음)
 

▲ 로빈슨 크루소의 삶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우리 삶과 다르지 않다. 섬에 익숙해질 것인가, 탈출할 것인가. ⓒwikimedia.org


로빈슨 크루소의 시대는 끝났다
 
김종배 : 이 책 같은 경우, 애초 팟캐스트 방송 이름은 '대안 경제'였어요. '지금 삶이 너무 힘든데, 평생 이러라는 법이 있느냐. 새로운 삶의 모델을 찾아보자'는 취지의 방송이었죠. 이 책에서 말하는 '섬'이라는 건 현재의 개개인이 각자도생하는 고립된 삶을 강요하는 사회 구조를 말하는 거죠.
 
강양구 : 책머리에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도 하셨더라고요.
 
조형근 : 네, 맞습니다. 사실 제가 어제 팟캐스트 '지식통'에서 유토피아 사상의 계보를 말씀드렸거든요. 플라톤부터 토머스 모어를 거쳐 프랜시스 베이컨까지. 그런데 아마 귀 밝은 청취자라면 이 방송을 듣고서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셨을 거예요. 제가 방송에서 16, 17세기 이야기를 하다가 바로 19세기로 넘어가요. 그 사이(18세기)를 공백으로 뒀죠.
 
실 제 유토피아 사상에서 그 시기가 공백입니다. 물론 전혀 없었던 건 아니고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약했죠. 그 공백을 메웠던 일종의 유토피아 사상의 상징이 바로 로빈슨 크루소예요. 새로운 종류의 유토피아죠. 뭐냐 하면, 고립된 사람이 합리적으로, 혼자서도 사적 소유의 관념을 실천하면서 효용 극대화를 실천하는 전혀 새로운 유토피아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유토피아의 에너지가 소진된 것처럼 보이는 우리 시대에도 사실 유토피아가 있었던 겁니다. 굉장히 강력한 유토피아요. 바로 그게 신자유주의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유토피아를 약속했던 거죠. 이렇게만 하면 정말 좋은 세상이 온다, 이렇게요.
 
김종배 : 그런데 해보니 '어, 이게 아니네!' 이렇게 깨닫게 되었죠. 특히 2008년 금융 위기를 기점으로 해서요.
 
조형근 : 그렇죠. 그래서 이제 세상에 믿을 놈이 정말로 하나도 없게 됐죠.
 
강양구 : 지금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건 명백히 아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이 보이지 않는 시대인 것 같아요.
 
조형근 : 그렇죠.
 
김종배 : 일반적으로 진단이 나오면 처방이 따라와야 하는데, 지금은 진단은 되는데 처방이 안 되는 시대, 그렇죠? 그렇다면 결국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는데,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이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조형근 : 예, 그렇습니다. (웃음)
 
기본 소득은 우파도 좋아한다, 왜?
 
강양구 : 책을 읽은 소감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약간 울컥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특히 뒷부분을 읽고서요.
 
사 실 제가 어렸을 때는 선배들과 같이 대안 사회에 대한 세미나도 하고 그랬어요. 책 뒤에 참고 문헌으로 적어놓은 책들을 보니, 예전에 읽은 책도 꽤 되더라고요. 그런데 소위 진보 언론에서 기자로 밥벌이하는 저조차도 어느 순간에 그런 '대안'을 괄호 안에 넣어두었더라고요. 현실 가능성이 없는 거로 생각한 거죠. 책을 읽고 나서 '아, 이런 대안을 까맣게 잊고 살았구나!'하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책 중간에 꽤 많은 비중을 할애해서 사회적 경제를 다뤘잖아요. 협동조합도 한 장에서 다뤘고요. 그런데 저희 회사인 프레시안이 바로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했거든요.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고, 저를 포함한 구성원 여럿이 마음고생 몸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런 생각도 났고요.
 
아마 청취자 여러분도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기 경험이나 처지에 따라 여러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김종배 : 맞아요. 현실 곳곳에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같은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조형근 : 실험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생존의 문제죠.
 
강양구 : 책 에서 너무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여기서는 시사와 관련된 흥미로운 대목만 몇 가지 짚어보죠. 일단 기본 소득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최근 화제가 되잖아요? 성남시 이재명 시장이 청년 배당을 준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고, 서울시의 박원순 시장도 비슷한 정책 아이디어를 도입했다가 보건복지부에서 딴죽을 걸어서 논란 중이고요.
 
김종배 : 외국도 마찬가지죠. 핀란드, 네덜란드에서 기본 소득 도입을 놓고서 논쟁이 있잖아요?
 
강양구 : 핀란드, 네덜란드에서는 우파 정부가 기본 소득 도입을 제기하고 나섰죠. 네덜란드는 전체적으로 도입하는 건 아니고, 한 지역에서 시범 운영을 한다고 합니다.
 
조형근 : 일인당 115만 원 정도 지급한다고 하죠.
 
강양구 : 이 런 뉴스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는 굳이 따지자면 좌파 성향으로 분류할 만한 두 지방자치단체장이 기본 소득의 아이디어를 채용해서 정책을 밀어붙이는데, 우파 중앙 정부가 훼방을 놓잖아요? 그런데 다른 나라로 눈길을 돌려보면 오히려 우파 정부가 적극적으로 기본 소득을 주장하는 거죠.
 
김종배 : 일단 기본 소득 개념부터 확인하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은데요. '매월, 혹은 매년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조건 없이 제공한다'고 정리하면 될까요?
 
조형근 : 예. 직업을 갖고 있건 없건, 소득이 있건 없건, 자산이 얼마건 간에 자격 심사 없이 무조건 제공한다는 겁니다. 한 가지 각주를 달자면, 기본 소득을 둘러싼 많은 논의를 살펴보면 5년 이상 합법적으로 거주한 외국인에게도 시민권이 없어도 기본 소득을 주자는 안이 많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기본 소득을 우파까지 나서서 도입하자고 한단 말이죠. 이처럼 기본 소득 개념은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요.
 
강양구 : 네, 독일에서 기본 소득 도입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유통 재벌이라고 하더군요. 
 
조형근 : 네. 독일 DM그룹의 베르너 회장이죠. 독일 같은 경우 우파부터 좌파 정당까지 '기본 소득을 도입한다'는 데는 합의가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할 거냐를 두고 10년, 20년씩 토론을 이어나가는 상황입니다.
 
우파가 기본 소득을 주장하는 것을 놓고서 진정성을 의심해보자, 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불가피한 면도 짚어보고 싶습니다.
 
일 단 '꿍꿍이가 있을 거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생각부터 짚어보죠. '차라리 기본 소득으로 다양한 복지 수당을 통합해버리면 비용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이 (우파에게) 있습니다. 실제 복지 국가에서 재정 적자 주범으로 복지 지출이 많이 비판받는데, 그 경우 상당히 많은 부분이 복지 시스템 유지에 들어갑니다.
 
강양구 : 그 대목에서는 우파도 솔깃할 것 같아요.
 
조형근 : 그렇죠.
 
강양구 : 어쨌든 복지 국가 유지를 위해 심사하고, 점검하고, 분류하는 과정을 대폭 생략하면….
 
조형근 : 그런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일인당 계좌로 돈을 쏴주면 되죠.
 
강양구 : 국가(정부) 규모가 굉장히 축소될 수 있겠군요. 작은 정부를 좋아하는 우파 구미에 맞고요.
 
조형근 : 맞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논의하는 쪽을 보면, 상대적으로 오른쪽 정당의 세력일수록 그 면을 강조하면서 효율성 관점에서 접근해요. 예컨대 인센티브와 결합해서 차등을 두려는 시도도 있죠.
 
반 면 왼쪽으로 갈수록 (기본 소득을) 국민이라면, 설사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한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누구라도 받을 수 있는 권리, 즉 배당권으로 생각하죠. 마치 주식회사의 주주가 주인으로서 배당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국민이 주인이라면 국가에서 나오는 공유 재산을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는 거죠.
 
그럼, 이제 우파도 기본 소득 도입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면을 점검해 보죠. 이건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겁니다. 기존에 우리가 오래 꿈꿔 온 현실적 유토피아로서 복지 국가라는 대안이 과연 유지가 가능한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 회의가 드는 상황이라는 거죠. 지속 불가능한 모델일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 책의 스웨덴 모델 부분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스웨덴 모델은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완전 고용을 전제로 합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고성장, 또 안정적으로 고용된 다수 노동자가 고부담 즉, 많은 세금을 내서 그것을 재원으로 높은 수준의 복지를 누리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절감하다시피, 고용 없는 성장이 구조화되잖아요? 우리가 기술 발전을 인위적으로 거부하고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한, 이 추세를 막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죠.
 
강양구 : 완전 고용 신화라는 건 앞으로도 없다?
 

▲ 다양한 대안 모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모범 답안은 없다. ⓒpixabay.com


유럽식 복지 국가, 쉽게 만들 수 있을까
 
조형근 : 뭔 가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난다면 모르지만, 예견 가능한 한에서는 이 추세는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거죠. 안정적으로 소득을 확보할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이 갈수록 약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그렇다면, 인구 절대다수가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없게 되고, 세금을 낼 수 없게 되고, 재원이 없어서 복지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죠.
 
보통 이렇게 얘기합니다. "재벌에게 더 많이 내라고 하면 되지!" 그런데 복지 국가가 그런 식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케인스주의 복지 국가 모델은 노동 경제 복지 모델이라고 얘기합니다. 다수가 정상적으로 노동한다는 상황이 전제되고, 그중 일부가 실업자가 될 때, 일시적인 기간 국가가 실업 수당을 주고, 취업을 알선한다는 거죠.
 
그런데 다수가 실업자인 상황이 만성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과연 기존처럼 노동 연계 복지 모델이 가능하겠느냐. 이 문제 인식을 우파 좌파 모두 큰 틀에서는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 파든 좌파든 기본 소득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부분이죠.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조금 더 왼쪽으로 갈수록 기본 소득 모델을 더 급진적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본 소득을 철저히 할수록 경제 구조가 더 바람직해질 수 있거든요.
 
요 즘 우리가 매일 금융 자본주의를 비판하잖아요? 자본금융화의 핵심은 자산 거품의 상승입니다. 그런데 자산 거품은 구조적으로 꺼질 수밖에 없죠. 결국 (현 경제 체제에서) 기본 소득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려면 자본 이득세를 포함해 자산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노동 인구가 갈수록 부실해지니까요.
 
강양구 : 토지 건물을 비롯한 부동산 또 이자 소득, 주식 거래 등에 더 많이 과세해야 한다는 거죠?
 
조형근 : 그렇죠.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구체적 안이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 그런 모델이죠. 일반인의 증세 부담을 최소화하고 자산 거품에 대해 과세하는 방법이죠.
 
여 기에 키 포인트가 있습니다. 왼쪽에서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꾀한다고 할 때는 결국 경제 체제의 민주화, 즉 소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옛날처럼 전부 다 국유화한다는 수준은 아니라도 상당 부분 사회적 통제가 가능해야 하죠. 지금처럼 자산이 거품이 되면 설혹 사회주의 정당이 정권을 잡는다 할지언정, 폭력적으로 빼앗지 않는 한 자산을 인수할 수 없어요. 너무 비싸기 때문에.
 
이 정도의 생각도 있을 정도로 기본 소득의 사상적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습니다.
 
기본 소득만 준다고 사회는 나아지지 않는다
 
강양구 : 책 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기본 소득 논의가 국내에서 한창 꿈틀댈 때,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와 저녁 식사 자리에서 기본 소득을 놓고서 잠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장 교수가 딱 한 가지 문제를 언급하더군요. 요약하면 이런 문제의식입니다.
 
지금은 재화나 서비스 등 모든 것이 시장에 맡겨져 있잖아요? 기본 소득은 자신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득을 개개인에게 준다는 거죠. 그런데 재화나 서비스 등 모든 게 시장에 맡겨진 현재 상황에서는 개인의 기본 소득을 운용할 때 결국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다면, 기본 소득이 되레 공공 영역을 축소하고 시장을 불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죠.
 
조형근 : 중 요한 지적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의 서문에서 소개한 여러 대안 사이의 경합 관계, 우열 관계 등은 따지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대안 간의 경쟁보다는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요. 실제로 현실에서 대안을 만들어 가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올 겁니다.
 
기본 소득 하나로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사회적 경제도 마찬가지고요. 책에서 소개한 가장 급진적인 대안인 참여 계획 경제도 마찬가지고요. 조금 전 말씀하신 반론은 우파가 주도하는 기본 소득 안이 그대로 통과됐을 때 아주 타당합니다. 우리가 현재는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로 생각하는 밀턴 프리드먼이 사실 기본 소득 아이디어의 중요한 창시자 중 하나인 것도 그런 맥락이고요.
 
강양구 : 삐딱하게 보자면, 기본 소득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죠. 복지는 없애고 일인당 N분의 1로 돈을 나눠 줄 테니, 각자가 일인 기업가가 되어서 알아서 해보라는 식으로요. 현재 핀란드 우파 정부의 태도가 이런 거고요.
 
조형근 : 예, 그렇습니다.
 
스 웨덴 모델을 다루면서 이 책에서 쓴 이야기인데, 복지 국가 모델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탈상품화입니다. 그러니까 시장에 예속된 우리 삶을 다시 시장으로부터 되찾아오는 게 필요합니다. 사람이 상품처럼 거래되는 상황을 가능한 한 없애보자는 게 스웨덴 모델의 목표 가운데 하나였거든요.
 
이런 점에서 기본 소득 논의를 보자면, 그냥 기본 소득을 주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이를 통해서 우리 삶이 얼마만큼 시장에 내동댕이쳐지지 않게끔 할 것인지가 아주 중요하죠. 그래서 기본 소득은 비시장적 삶에서 재생산될 수 있는 여러 가지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강양구 : 먼 저 읽은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는 한 가지 팁을 말씀드릴게요. 미처 두 분 저자께서 언급하지 않은 공백을 채워가며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이 책에는 기본 소득과 함께 '지역 화폐'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기본 소득이 주어진다면 돈벌이를 위한 일을 지금보다 조금 덜해도 되잖아요?
 
그때 남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요? 그냥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데 쓰지 말고, 자기 재능을 이웃과 나눌 수가 있겠죠. 자기가 기타를 연주할 줄 안다면 이웃에게 기타 강습을 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웃으로부터는 또 내가 필요한 어떤 것을 받는 거죠. 기본 소득과 지역 화폐가 연결되는 거죠.
 
조형근 : 맞습니다. 그렇죠. 
 
김종배 : 강양구 기자 말처럼 이 책에서는 대안 모델을 각각 따로 짚었지만, 이 대안들이 각개 약진하는 건 아닙니다. 대안 모델 간의 연대도 모색되어야 한다는 얘기죠.
 

▲ 협동 사회 경제 네트워크의 대표격인 원주협동경제네트워크. 대안 경제는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한살림


 
새누리당도 원하는 협동 사회 경제
 
강양구 :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답답했던 부분이 바로 연대입니다.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내심 기대했던 게 기존에 자리 잡은 큰 협동조합의 도움이었어요. 사실 전환할 때 저희가 찾아가기도 했어요. (웃음) 그런데 실제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 간 연대는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조형근 : 협동조합 간 연대가 힘들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 분야가 사실 생활협동조합(생협)이죠. 생협 조합원 많으시죠? 그런데 생협끼리 경쟁을 합니다.
 
강양구 : A 생협 매장이 목 좋은 곳에 있는데, 바로 옆에 B 생협 매장이 들어서는 거죠.
 
조형근 : 딜레마입니다. 경쟁 자체는 필요할 수도 있어요. 경쟁이 없으면 무조건 선발 주자의 기득권을 보호해주는 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과다한 경쟁은….
 
책 에는 못 쓴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에도 협동조합 간 연대 사례가 있습니다. 원주협동경제네트워크가 대표적이죠. 본격적으로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건 몇 년이 안 됩니다만, 원주가 협동조합의 오랜 역사를 가진 곳입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여러 형태의 경제 생활을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 형태로 묶으면서 네트워크로 발전했죠. 네트워크 안에서 일정한 부분은 경쟁도 있지만, 서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생기는 거죠. 그리고 자원과 노하우를 공유할 수도 있고요.
 
우리가 협동조합을 포함해 사회적 경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따라오는 게 지역이지 않습니까? 앞서 문제가 된 생협 사이의 경쟁도 전국 조직을 기반으로 겨루다 보니 일어나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지역 차원에서 협동조합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장기화한다면 그 안에서 룰이 생길 수 있습니다.
 
경쟁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협동조합 정신에 어긋나죠. 협동조합보다 훨씬 급진적 안인 참여계획경제에서도 경쟁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거든요. 특히 협력적 경쟁은 흔히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경쟁만큼이나 중요하죠. 그래서 이걸 무조건 나쁘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강양구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만, 그래도 이제 막 시작하는 상황에서는 서로 돕는 게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웃음)
 
조형근 : 맞 습니다. 사회적 경제가 뿌리내리려면 정부도 잘해야 하고, 주체들도 잘해야 합니다. 하지만 특히 잘해야 하는 곳이 그래도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곳이에요. 그쪽 입장에서도 대기업과 경쟁해야 하니 힘든 건 맞습니다. 다만 그래도 좀 더 여유 있는 곳이 후발 주자를 보살펴야죠.
 
특히 사회적 협동조합 같은 경우 다른 조직을 돕도록 제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협동조합에서 생긴 일정 금액을 새로운 협동조합을 만드는 데 지원금으로 쓰게 하는 법률이 있어요. 내가 돈 벌어서 남 좋은 일 하게 법으로 만들어 놓은 거죠. 이런 협동의 규칙을 함께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종배 : 새누리당이 주도해서 사회적경제기본법을 제정했잖아요? 이건 어떻게 보세요?
 
조형근 : 2006 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이 만들어졌고, 2012년에 협동조합기본법이 일반법으로써 만들어졌습니다. 다 여야 합의로 만들어졌죠. 이런 법이야말로 현재의 지배 질서가 오늘날 사회적 경제를 담론으로, 제도로 육성할 만큼 필요로 하는 면이 있다는 증거죠.
 
강양구 : (새누리당과 지배 체제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스웨덴 같은 복지 국가를 만들 생각은 없겠죠. 하지만 복지의 공백을 그대로 놔두자니 사회가 망가질 것 같으니 최소한도로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도록 이런 법을 만든 거죠.
 
조형근 : 네, 그렇습니다. 심지어 이 일이 보람까지 주거든요.
 
복 지 수당을 주면 사람들이 열패감을 가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적당히 지원하면서 '너희끼리 해라'고 하면 사람들이 보람을 느낍니다. 국가의 의무로 받아들여야 할 것들을 시민이 대부분의 부담을 지면서 그 공백을 메우는 거죠. 심지어 보람까지 느끼면서요.
 
사회적 기업 대부분이 임금 수준이 낮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기꺼이 일하는 거예요. 보통 '열정 페이'를 받으면 화가 나는데, 여기서는 보람찬 일을 한다는 생각에 만족할 수도 있죠.
 
동 상이몽의 측면이 있는 겁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런 상황 자체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있죠.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불가피한 공백이 생기는데, 그럴 때 지배층에서는 사회적 경제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교묘하게 회피하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체제에 통합되게 만드는 방법으로 쓰죠.
 
그럼, 사회적 경제 종사자는 어떨까요? 그들 대부분이 다양한 부류의 사회운동가 출신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에 이런 노림수가 있다는 걸 잘 아세요. 덫이 있다는 걸 알고 들어가는 겁니다.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거죠. 유명한 말입니다만, 협동조합은 적의 군대를 하나씩 점령해가는 평화의 군대라고 하죠. 사실 아주 위태로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런데도 이걸 회피할 수 없다면, 이를 극복할 건 연대의 힘밖에 없죠.
 

▲ 대안 경제의 성공에는 정치의 힘이 매우 중요하다. ⓒ프레시안(최형락)


노조, 정부도 도와야 사회적 경제 싹튼다
 
김종배 : 팟 캐스트에서 대안 경제를 방송하고, 이 책까지 이어진 계기가 이런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이 비판하고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신자유주의적인 삶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왜냐면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으니까.
 
사람이 가장 답답한 게 문제의식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잖아요? 바로 여기서 연대의 단서, 실마리를 고민해보자는 차원에서 대안 경제를 다뤘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하나의 단초'가 되리라 생각하고 시도했는데, 그것이 더 큰 실패로 끝나고 열패감만 남게 될 때입니다.
 
강양구 :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저로서 가장 걱정되는 대목이 그 부분입니다.
 
김종배 : 저는 그런 면에서 조합 간 연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경험의 공유가 가장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강양구 : 이 책에서 세 장을 할애해서 사회적 경제를 짚어주셨는데, 긍정적 사례와 문제점이 적절히 다 다뤄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책을 읽지 않은 대다수 시민은 사회적 경제의 긍정적 사례는 잘 모를 가능성이 크죠. 그리고 당장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보이는 안 좋은 사례, '협동조합했더니 망했더라' 하는 현실을 보면서 또 열패감을 느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조형근 : 제가 책에서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이 일반적 자본주의 기업(주식회사 등)에 비해 생존 주기가 훨씬 깁니다. 협동조합하면 망하는 것 아니냐 하시는데, 아니에요.
 
강양구 : 그래서 프레시안 협동조합도 오랫동안 갈 겁니다. (웃음)
 
조형근 : 책 에서 미처 말씀 못 드린 것 중 하나가, 협동조합과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산업경제론이라든지, 경제지리학이라든지, 산업사회학과 같은 주류 쪽에서도 사회적 경제를 높이 평가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공단의 이점이 있다는 거죠. 왜 공단을 만들까요?
 
강양구 : 규모의 경제가 작동해서 그러지 않나요?
 
조형근 : 규 모의 경제도 있고요. 공단 안에 동종만 들어오지 않잖아요? 관련 산업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일단 정보의 소통, 인력의 공유, 자원의 공유 등으로 효율성이 높아져요. 세계적으로 산업 클러스터가 잘 된 사례 중 대표적으로 꼽는 곳이 이탈리아 협동조합 경제 지역인 에밀리아로마냐입니다. 이곳은 주류 경제학의 눈으로 봐도 굉장히 효율적이죠.
 
김종배 : 저는 협동조합, 대안 경제 하면 리오넬 메시가 뛰는 팀, FC 바르셀로나가 가장 기억에 남더군요. 1년 매출액이 1조 원이 넘는다는 태양의 서커스단이나요.
 
조형근 : 자,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바로 정치입니다.
 
그 런 협동조합 성공 사례의 특징은 대부분 주 단위 수준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개념 좌파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거죠. 어떻게 사람들의 자발성을 끌어내고, 이런 것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를 제도로 만들었습니다. 쉽게 말해 개별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이 시장 경쟁에 내동댕이쳐지지 않도록 정치권력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준 거죠.
 
여기에 기존의 시민운동, 노동운동이 또 가세합니다. 대표적인 곳이 노동조합연맹이죠. 노동조합연맹의 기금을 종잣돈으로 활용해 사회적 경제의 시동을 걸고, 주 정부가 또 금융 지원, 제도 지원 등을 통해서 생존 기간을 늘려줬죠. 이런 힘들이 모여서 바로 그런 성공 사례를 만든 겁니다.
 
이기적 존재로 살 것인가, 이타적 사람으로 살 것인가
 
강양구 : 제가 서문을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씀을 2005년에 하셨잖아요? 그때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권력을 찾아올 수 있는 제도적 틀이라던가, 사회적 토대를 만들었다면 나중에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대안을 궁리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사람들의 여건이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더라고요.
 
조형근 : 당 시 민주 진보 진영의 희망을 안고 정권을 잡은 분들이 여러 가지 고민을 하셨겠죠. 아마 그 안에서 큰 틀의 합의로 선택한 게, 제가 볼 때는 시장을 통한 합리화가 아니었나 싶어요. 당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할 때도 한 이야기가 이를 통해 우리의 개혁을 끌어낸다는 거였으니까요.
 
시장은 분명히 그런 힘을 가진 측면이 있어요. 효율을 위해, 더 높은 이윤을 위해 거기에 어긋난다면 어떤 비합리성도 용납하지 않죠. 그런 의미에서 가장 시장화된 나라인 미국을 두고 "미국의 시장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에서 내부자 거래를 한다면 얼마나 가혹한 처벌을 받는지 아시죠?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처벌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것 자체가 거대한 비합리성일 수 있어요. 굳이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우리 모두 (금융 위기 등의 사례를 통해) 생생히 경험했죠. 청취자들께서도 고민되는 분이 있으실 거예요. 설혹 다른 신념이 있더라도, 당장 우리 사회의 시장이 조금 더 합리화되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제대로 된 경쟁 시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얘기가 완전히 틀린 건 아니죠.
 
자본주의 가 성장하고, 우리 삶의 질이 함께 조화되던 시절에는 그런 이야기가 합리적이었을 수 있어요. 지금은 이미 그런 시점을 넘어선 지 한참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으로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논의의 시발점이 되고자 쓴 것입니다.
 

▲ <섬을 탈출하는 방법>(조형근·김종배 지음, 반비 펴냄.) ⓒ프레시안

김종배 : 대 안 경제 모델을 논의하고, 적용하고, 실천하는 데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전제가 깔린 것 아니겠습니까? 이기심이 더 발현되는 환경으로 가느냐, 이타심이 더 발현되는 환경으로 가느냐. 결국 그 문제 아니냐. 여기에서부터 실천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거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라고 이해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양구 : 오 늘 주로 이야기한 건 책 뒷부분입니다. 앞부분은 지금까지 현실에서 있었던 유토피아를 지향한 모델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를 짚어주셨어요. 우리가 스웨덴이나 독일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이들 나라가 어떻게 오늘의 복지 국가 모델을 이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있는 분들 외에는 잘 아시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가 이 책 앞부분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추상적으로만 아시던 분들도 이 책을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종배 : 오늘 <섬을 탈출하는 방법>의 저자인 조형근 교수를 모시고 독서통을 꾸며봤습니다. 저는 오늘 가급적 투명인간으로 있었습니다. 
 
강양구 : 이렇게 재미있고 좋은 책을 내주신 두 분께 고맙습니다.
 
김종배 : 올해 마지막이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조형근 :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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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붕괴 노려 일제와 손잡으면 역사의 심판 면치 못할 것

북 붕괴 노려 일제와 손잡으면 역사의 심판 면치 못할 것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12/30 [10:0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위안부 합의에 대한 일본 언론들의 반응을 전하는 mbn     © 자주시보

 

 

29일 ytn 도쿄 특파원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한일 일본군위안부협상 타결에 대해 일본 정부는 잔뜩 고무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일본 정부는 ‘불가역적’ 즉, 더 이상 위안부 문제를 한국 정부에서 거론하지 않기로 합의한 점에 대해 큰 의미를 두고 있다는 일본 언론들의 보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기시다 외상에게 불가역적인 합의라는 점에 대해 한국정부가 동의하지 않을 경우 협상을 그만 두고 돌아오라는 특별지시까지 내렸었다는 후일담도 소개하였다.

 

협상 직후 기시다는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잃은 것은 무엇이냐’는 일본 기자들에 질문에 ‘10억엔뿐이다’라고 답했다. 종군위안부와 관련하여 법적책임이 없다는 기존 일본의 주장에서 조금도 벗어난 것이 없었던 협상이라는 점을 이렇게 강조한 것이다.

 

그러니 본지에서 우려했던 대로 이번 협상안에서 일본군의 관여 하에 위안부 문제가 발생했다는 합의내용도 일본군이 불법을 저지르며 관여한 것은 아니라고 일본 정부는 보고 있는 것이다.

 

보수성향의 요미우리 신문은 “‘강제연행’ 오해 퍼진다”, “위안소 주로 민간에서 경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29일 싣고 일본이 위안부 문제로 국제사회에서 비판을 받아온 배경에는 ‘일본군이 많은 여성을 강제연행해 위안부로 삼았다’는 오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극우 망종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전 일본 오사카 시장도 29일 자신의 트위터에 “군의 관여라는 문언이 들어갔어도 그것이 강제연행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현재 국민 다수에 스며들었다”고 주장했다.

 

협상안에 일본군이 직접 여성들을 강제연행했다는 사실과 일본이 법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내용을 적시하지 않았기에 이런 일본의 주장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윤병세 외무장관과 박근혜 대통령은 이럴 것을 정말 예상치 못했을까. 그 정도 머리라면 거의 백치 수준인데 그럴 리는 없다. 이것은 박근혜 정부가 민족의 존엄에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한미일공조에만 목을 메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깡패국가 미국에서 박근혜 정부에 공개적, 노골적으로 일본과 과거사문제를 풀고 한일공조를 강화하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어 박근혜 정부로서도 애로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의 문제는 이렇게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전히 한반도 재침야망에 들떠있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뻔뻔하게 우기는 것만 봐도 이는 명백하다. 이런 일본에게 위안부 면죄부를 주는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한국은 정말 주권의식도 없는 맹물나라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재침야망만 더 부추길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박근혜 정부가 미국과 일본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것은 한미일공조로 어떻게든지 북을 붕괴시키겠다는 전략에 역점을 두고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고구려를 붕괴시키기 위해 당나라 외세를 끌어들여던 신라 때문에 고구려를 붕괴시키기는 했지만 국토의 2/3를 잃고 말았던 우를 다시는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북이 전쟁이 아닌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자고 6.15남북공동선언에 합의도 하고 지금도 남북관계를 개선시키자고 끊임없이 제안하고 있는 조건에서 북을 적대시하여 일제와 손을 잡겠다는 발상에 어떤 국민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박근혜 정부가 계속 이렇게 굴욕적 한일공종에 나선다면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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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졸속타결, '한국판 국민기금'될 듯

 

 

<초점> 일본 정부 10억 엔 출연해 한국 정부 재단설립 합의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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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29  2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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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내타결을 공언한 박근혜 정부가 지난 28일 한.일 외교장관회담을 열고 '위안부' 문제 타결을 선언했다. '최종적 및 불가역적'인 타결로 앞으로 정부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재론 여지가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이번 한.일 합의에서 주목된 점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통감과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이 대독한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의 사과문이다. 그리고 후속조치로 한국 정부가 재단을 설립하고 일본 정부가 10억 엔(약 97억 원)을 출연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출연하는 10억 엔의 용도는 기시다 외무상이 밝혔듯 '모든 전 위안부분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으로 해당 기금은 '법적 배상금'이 아니다.

이는 일본 정부가 1995년 설립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국민기금)을 확대해 문제를 해결하려던 안이 피해자들의 반대에 부딪힐 것을 예상, 한국에 이와 비슷한 재단을 설치하고, 일본 정부가 기금을 출연하는 '창조적 해결방식'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국가 범죄에 대한 해결원칙인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공식사죄, △법적 배상, △재발방지 등이 아닌 보상금 혹은 위로금에 불과해, 해당 재단은 '한국판 국민기금'이 될 것이 뻔하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금전적 보상이 아닌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설립할 재단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 한.일 양국이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출연해 한국 정부가 재단을 설립하는 데 합의했다. 사진은 28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회담 공동기자회견 모습. [자료사진-통일뉴스]

일본 '국민기금'과 한국 재단, 설립 배경과 목적, 사업도 비슷

한국 정부는 이번 합의 이후 후속조치로 재단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본격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와 여성가족부 등을 중심으로 내년 상반기에 출범할 예정인 재단은 한.일 외교장관들이 밝혔듯이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 마음의 상처 치유'를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 서비스 제공, 건강관리 및 요양.간병 지원 등 생존자복지사업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운용될 재단 목적과 사업은 1995년 설립 이후 2007년 해산될 때까지 활동한 일본의 '국민기금'과 유사하다.

'국민기금'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고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것에 기초하여, 국민적인 보상사업을 정부와 2인 3각으로 실시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리고 일본 총리의 사과문과 기금 이사장의 편지 발송, 국민 성금을 통한 사과금 지급, 일본 정부 예산이 투입된 의료.복지지원 등이 주요 사업이다.

현재 한국 정부가 설립할 재단의 구체적인 목적과 활동방향이 제시되지 않았지만, 기시다 외무상이 대독한 아베 총리의 사과문이 피해자들에게 전달되고, 의료 서비스 지원 등 생존자 복지사업이 주요 활동이 되리라는 전망에 비춰, 일본의 '국민기금'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일본의 국민기금은 일본 정부가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데서 출발했고, 한국에 설립될 재단은 '도의적'이라는 표현이 빠진, '책임을 통감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존엄과 명예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는 수준에 그쳤다.

이는 국민기금의 출발이던 '고노담화'(1993)의 '구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했고, 위안부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아서 업자가 주로 맡아왔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과 강압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한 사례가 많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즉,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등장한 '국민기금'과 달리 이번에 합의된 재단은 '도의적'이라는 표현만 빠졌을 뿐, '강제성'과 법적 책임 주체 불인정을 기반을 두고 있어, 오히려 후퇴된 내용을 지닌 재단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재단 설립이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 한다. 구성이나 운영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10억 엔이라는 돈이 나온 것 외에 일본 정부가 책임진다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도의적이라는 표현은 빠졌지만, 법적 책임은 부정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는 "국민기금은 법적 책임을 불분명하게 하고 도의적인 책임을 진다면서 개별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한국 정부가 세울 재단도 원칙적으로 같다"며 "한국 정부가 재단을 만들게 되면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회피에 공식적으로 동의해준 것"이라고 꼬집었다.

   
▲ 일본이 설립한 국민기금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과 함께 일본 내각총리의 사과편지를 보냈다. [자료출처-국민기금 디지털기념관]

게다가 해당 재단 설립 합의는 피해자가 배제된 상태에서 진행됐고, 국민기금도 피해자 중심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번에 설립될 재단을 두고 일각에서 2000년 독일이 설립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이 되리라 전망한다. 하지만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은 설립 당시 상황 자체가 '국민기금'과 합의된 재단과는 다르다.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은 독일 정부가 50억 마르크를 출연해 설립했는데, 여기에는 '유대인청구권협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국가 당사국간 협의가 아니라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재단인 것이다.

하지만, 국민기금과 이번에 합의된 재단은 피해자 중심원칙이 빠졌다. 국민기금은 피해자들이 원치 않는 '위로금'을 지급하는 방식을 채택해 공분을 샀고, 한.일 정부는 피해자들의 요구를 외면한 채 재단설립에 합의했다.

이재승 건국대 교수는 "국민기금과 재단은 피해자가 있든 없든 국가가 알아서 한다는 방식"이라며 "피해자가 분쟁해결 과정에서 권리자로 등장할 필요가 있는데 무시한 것이 잘못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기금이나 재단은 같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 예산에서 출연도 동일...한국 정부, '국민기금식 위로금' 지급

한국 정부는 이번에 합의된 재단 설립과 일본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것을 두고 일본의 '국민기금'과 다르다고 설명한다. '국민기금'은 일본 국민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설명과 달리, 국민기금에는 실제 일본 국민의 성금 외에도 일본 정부의 예산이 투입됐다. 국민기금은 전쟁범죄에 대한 국가배상원칙을 회피한 채, 피해자들에게 '사과금(atonement money)' 명목으로 국민 모금에 기초해 1인당 2백만 엔을 책정했다.

그리고 의료.복지 지원사업에는 일본 정부가 '도의적 책임'에 따라 5년간 총 8.3억 엔의 정부 예산을 투입, 한국인 피해자에게 1인당 3백만 엔을 지급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2007년 해산 당시까지 일본 정부는 약 7억5천만 엔을 투입했다. 물론, 일본 정부는 국민기금이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차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정부의 예산이 투입됐다는 점에서 반관반민 성격을 지녔다.

이는 일본 정부가 비공식적 예산책정이라는 '국민기금'과 달리 한국 정부의 재단에 공식적으로 예산을 출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재단 설립 목적과 사업 내용은 같아 '위로금'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 '국민기금'이 1998년 1월 <한겨레신문>에 낸 전면광고 중 주요사업 부문. 한국 정부가 설립할 재단의 성격과 유사하다. [자료출처-국민기금 디지털기념관]

이나영 교수는 "국민기금은 일본 정부가 돈을 내지만 민간을 앞에 내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 정부가 돈을 준다는 것을 공식화하면서 한국이 재단을 만들게 됐다"면서 "일본의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이 국민기금과 별반 다르지 않고, 심지어 한국 정부가 하고 있는 사업을 왜 일본의 돈을 받아 재단을 설립하면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창록 교수도 "국민기금과 이번에 설립될 재단은 일본정부가 예산을 지급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라며 "둘 다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진다는 것이 없고 돈만 있을 뿐이다. 95년과 차이가 없다.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왜 그 안을 받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한국 정부가 기존 국민기금이 일본 정부의 법적 배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거부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법적 배상이 아님에도 일본 정부의 예산을 투입한 재단 설립을 받아들여 태도 바꾸기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1998년 당시 피해자들이 국민기금을 거부하자, 정부는 법적 배상이 아님에 주목해 국민기금의 국내 활동을 거부하고 피해자들에게 49억 원의 정부 지원금 지급을 결정해, 법적 책임 요구에 있어 우위를 선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2012년 3월 일본 정부가 제시한 '사사에 안'이 일본 정부 예산에 의한 인도적 조치로 의료비, 간병비 등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기존 국민기금을 확대하려 한 데 대해 정부는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번 합의는 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재단만 다를 뿐, 대부분 '사사에 안'을 수용한 측면이어서, 한국 정부가 국민기금 방식인 '위로금'을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는 형국이 됐다. 김 교수는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인 결과"라며 "국가 차원의 배상요구는 포기된 것이다. 더는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법적 배상을 요구할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한국판 국민기금', 실패할 가능성 크다

내년 초에 설립될 예정인 재단은 피해자 지원사업과 일본 정부의 예산이 투입된다는 점에서 '한국판 국민기금'이 될 전망이다. 그리고 이는 국민기금이 실패한 사례와 같은 길을 걸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가 국민기금을 설치한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더러운 돈'이라며 수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피해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민기금' 반대운동을 펼쳤고, 국민 성금을 모아 피해자들 지원 사업을 펼쳤다.

결국, '국민기금'은 돈을 이용한 각개격파식 해결을 하려다 공분을 샀고, 2002년 한국에서의 사업을 종료했다. 그리고 2007년 공식 해산했으며, 한국에서 실패한 사례로 남았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재단설립을 합의하면서, 이러한 실패사례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28일 한.일 외교장관회담 발표 직후, 피해자들은 "더럽다"라는 표현으로 재단의 지원을 받을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 1991년 처음 공개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가 생전에 국민기금 반대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정대협도 "재단을 설립함으로써 그 의무를 슬그머니 피해국 정부에 떠넘기고 손을 떼겠다는 의도가 보인다"며 "일본 정부의 국가적 법적 책임 이행이 반드시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는 앞으로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국내외 시민사회와 함께 올바른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더욱 경주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나영 교수는 "재단설립을 통해 위로금을 지급하는 방식은 피해자들이 가장 원하지 않는 방식이다. 피해자들이 철저히 외면할 것"이라며 "실패할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이전에는 일본 정부를 향해 싸웠지만, 한국 정부에 대한 문제도 제기해야 하고 세계적으로 문제를 이슈화하는 데 있어 시민의 몫이 더 커졌다"며 "이런 방식은 결국 국론분열을 일으킬 것이다. 너무 우려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설립될 재단이 피해자 지원 외에 '명예와 존엄 회복 및 마음의 상처치유'에 맞는 사업계획을 내놓을지 의문이다. 일본군'위안부' 범죄에 대한 강제성과 주체가 불분명한 아베 총리의 사과문에서 출발해, 일본 정부의 기금이 투입되는 재단이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진상규명과 후세교육 등을 통한 재발방지사업, 추모사업 등을 담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재승 교수는 "피해자들이 돈만 받는다고 한다면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돈을 요구하고 있느냐"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자행한 중대한 인권침해, 인도에 반한 범죄이다. 사실인정, 책임인정, 역사기록 등 가해자 측면의 변화는 전혀 담보된 것이 없다. 양국이 합의한 재단이 그런 역할을 할 리 만무하다"며 실패 가능성을 점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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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북, 2015년 10대 변화

 
 
로동당 70돐. 과학기술 전당. 장천남새 농장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12/29 [05:16]  최종편집: ⓒ 자주시보
 
 

  

다사다난했던 2015년 을미년이 지고 있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동반자가 되어 조국과 민족의 평화번영을 이루어야 할 북의 2015년은 어떤 주요한 일들이 있었을까?

 

북의 최대 행사는 조선로동당 창건 70돐로 역대 가장 큰 규모의 열병식과 청년학생들의 횃불 행진. 1만명이 대동강에 수상에서 펼친 대합창공연이었다.

 

또한 전민의 과학기술인재화를 선언하고 그에 대한 실현을 위해 과하기술 중심기지인 과학기술전당을 숙섬에 세우고 운영에 들어갔다.

 

미래과학자거리와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원 연구사를 위한 살림집 건설과 미래과학자 거리는 과학자 기술자 교원 연구사들을 중시하는 조치였다.

 

평양 제2 순항공항이 국제적 시설을 갖추고 건설 되었으며 만경대 학생 소년 궁전도 개건 완성되었다.

고아들의 요람인 애육원 육아원이 평양과 원산은 물론 각지에서 마련되었고 무의탁 늙은이들의 생활 터전인 평양양로원이 마련되었다.

 

북의 이런 발전상에도 자연재해에 의한 시련도 있었다. 나진 지역에 엄청난 홍수로 살림집과 도로 등이 파괴되었다. 나진의 홍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최고지도자와 조선인민군, 각계층 주민들이 나서 3개월만에 살림집 복구를 끝냈다.

 

‘농촌 도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장천 남새 농장의 이채로운 풍경은 북의 또하나의 자랑거리였다.

학생 소년궁전과 원산 송도국제소년양영소가 개건완성 되었다. 사진으로 북의 2015년을 돌아본다.

 

* 전민의과학기술 인재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세워진 과학기술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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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자들을 위해 새로 건설 된 미래과학자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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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공업종합대학 교원살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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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순안공한 제2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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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남새농장(농촌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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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진살림집복구(백학동에 1,800 세대를 3개월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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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대학생소년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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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무지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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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원산 애육원 육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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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양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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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의 ‘백년 한(恨)’, 10억 엔으로 엿 바꿔 먹다

[논평]위안부의 ‘백년 한(恨)’, 10억 엔으로 엿 바꿔 먹다
 
‘평화의 소녀상’ 이전 문제가 오르내리는 것은 우리 정부의 협상 실패
 
정운현 | 2015-12-29 15:27:4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90년 1월 4일자 <한겨레>는 한 면을 털어서 이색 연재를 시작했다. 제목은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의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 윤 교수는 이대 영문과 교수로 평양 출신이다. 첫 회 연재를 시작하면서 윤 교수는 서두에 ‘필자의 말’을 장황하게 썼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필자가 정신대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의 비참한 과거를 밝혀 보려는 데에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44년 12월 내가 이화여자전문학교 1학년 때 일제가 한반도 각지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들을 마구 정신대로 끌어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이에 많은 학생들이 서둘러 결혼하기 위해 자퇴를 하기 시작하자 당황한 학교 당국은 “학교에서 책임지고 말하는 데 너희들에게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우리들은 국민 총동원령에 응한다는 서식에 지장을 찍어야 했다.

나는 부모님의 권고에 따라 학교를 자퇴해 정신대를 모면했지만 그 무렵의 내 또래의 많은 처녀들이 일제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일어난 이 끔찍한 일이 자칫하면 21세기에까지 이어져, 제2차 세계대전조차 들은 적이 없는 세대에게로 옮겨갈 것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 금할 수 없다. 나는 이 일만은 잊어버려서는 안 되고 역사적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야 한다는 믿음에서 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만일 일본이 우리나라 젊은 여성을 왜, 어떻게, 얼마나 끌고 갔으며, 무슨 짓을 했는지, 전쟁 뒤에는 어떻게 되어서 이렇게도 돌아오는 사람이 없는 지를 진작 밝히고 응징했더라면 오늘날처럼 기지촌에서 또는 관광지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외화벌이에 나서는 한국의 매춘여성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키나와와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일본군 위안부였던 우리의 여성들이 전후 연합군 위안부로 고스란히 넘어간 경우를 발견하고 이런 느낌은 더욱 절실했다.

이 글은 1980년 12월, 1988년 2월과 8월, 그리고 지난해 7월 등 네 차례에 걸쳐 일본 홋카이도와 오키나와, 타이 핫차이, 파푸아뉴기니―그러니까 우리 정신대의 피눈물 자국을 따라 현지 신문 등 옛 자료를 뒤지고 관계자들의 증언을 모아 작성한 기록이다.

‘구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렇게 한국사회에선 처음으로 공론의 장에 오르게 됐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 거론한 사람은 역사학자도, 여성학자도, 정부 관료도 아닌 영문학자였다.

‘필자의 말’에서 밝힌 대로 윤정옥(91) 교수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비를 들여 해외취재를 한 것은 순전히 ‘개인적 기억’에다 지식인으로서 양심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기생관광’, 기지촌 여성 문제 등 여성 인권이 사회문제여서 접근한 측면도 없진 않다. 

<한겨레> 1990년 1월 4일자에 실린 윤정옥 교수의 위안부 취재기 첫 회 

지난 2000년 3월 1일, 광화문 네거리 교보문고 앞 대로변에서 열린 제400회 ‘수요 집회’ 때 만난 윤 교수는 필자에게 “당시 내 고향 친구들 가운데도 여러 명이 정신대로 끌려갔다”며 “70이 된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우리 역사에 엄연히 있었던 일임에도 그 누구도 잘 몰랐던 역사,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역사, 그리고 감추고 싶었던 역사를 윤 교수가 어두컴컴한 지하창고에서 끄집어 낸 것이다. 해방 55년이자 1965년 한일협정이 타결된 지 25년만의 일이었다.

윤 교수의 한겨레 연재는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언론사 기자 못지않은 현장취재와 방대한 증언 채록, 관련 사료를 총망라한 역작이었다. 역사학계, 언론계, 정부 관련부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88년 여름 취재차 찾은 삿포로에서 윤 교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찾아간 곳은 ‘다치마스 미사키’라는 절벽이었다. 이곳은 매춘 강요를 견디다 못해 조선인 위안부들이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어머니―, 어머니―”하고 울부짖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해방 반세기가 넘도록 위안부 문제가 등한시되고 외면돼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윤 교수는 연재 첫 회에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우리 쪽 기록이 없고, 둘째, 정신대로 나간 여성이 거의 서민층 출신인데다 남성 위주의 한국사회에서 외면당한 점, 셋째, 일본이 자신들의 죄상을 감추기 위해 관련 자료를 폐기한데다 관계자들도 증언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두 번째다. 만약 역대 한국 대통령이나 정부 고위인사의 피붙이 가운데 위안부 피해자가 있었다면 이 문제가 이토록 방치돼 왔을까. 일본의 죄악을 결코 도외시 할 순 없지만 역대 한국 정부 책임자들의 책임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할 것이다.       

2.

1965년 한일 간에 체결된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의 주된 목적은 한일 국교정상화였다. 일제 강점 35년사에 대한 과거사 청산문제는 전제조건, 즉, 선결과제였던 셈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시작된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은 1952년 2월 제1차 회담 개최를 시작으로 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되기까지 14년 동안 무려 일곱 차례나 열렸다.

박정희 정권 출범 초기, 미국의 원조가 대폭 삭감되자 당시 최대 국정 현안은 민생고 해결이었다. 게다가 박 정권은 경제개발을 모토로 내걸고 있어서 거액의 자금이 필요했다. 이때 박 정권이 생각해 낸 것이 대일 청구권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성사시킬 경우 어떠한 형태로든 자금문제는 해결이 가능할 걸로 봤던 것이다. 

박 정권으로선 행운도 없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特需)로 자본이 축적돼 기업들이 해외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 정가에서는 소위 ‘부산적기론(釜山赤旗論)’, 즉,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도 위험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여기에 미국 또한 중공(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일 안보벨트를 필요로 하고 있어 한-미-일 3자간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협상의 핵심은 청구권 문제였다. 박정희는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해 막후협상에 나섰다. 양국은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상 간에 소위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청구권 문제 해결에 전격 합의했다. 그 내용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연리 3.5%, 7년 거치 20년 상환)에 1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한일협정을 타결한 김종필-오히라 회담. 왼쪽이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

문제는 청구권 금액이었다. 제2공화국 때 장면 총리가 요구한 23억 달러와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로, 5분의 1정도에 불과한 금액이었다. 청구권 금액도 문제지만 어업권·문화재 반환문제 등에서 우리 측은 거의 백지위임을 하다시피 했다. 야당과 재야, 대학가가 들고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제2의 을사조약’이라며 연일 반대시위를 펼쳤다.

청구권 자금이 한국의 경제개발에 도움이 됐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었다. 일본상품 및 일본자본의 한국 진출이 급증하면서 1980년대 들어 대일무역 누적적자가 300억 달러에 달하였다. 당시 일본의 대한무역의존도가 8.3%인데 비하여, 한국의 경우 일본은 제1수입국으로 의존도 40%, 제2수출국으로 의존도 20%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대일 경제예속이 심화되었고 이후 한국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 왔다.  

한일협정이 안고 있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은 ‘모든 과거사 문제는 불문에 부친다’고 규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인적 피해와 관련해 강제징용, 징병 등은 거론(논의)됐었으나 위안부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양국이 일괄 처리키로 합의함에 따라 위안부 문제는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터질 때마다 한일협정을 거론하며 콧방귀를 뀌곤 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에 하나의 시금석이 된 것은 1990년 11월 16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결성이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시킨 윤정옥 교수는 같은 대학의 이효재 교수와 함께 37개 여성단체가 참여한 정대협을 발족시킨 후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정대협은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수요 집회’를 시작한 이래 24년째 이어오고 있는데, 이달 30일이면 1,211회가 된다.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이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1997년 작고) 할머니의 증언이다. 김학순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시절의 참혹한 경험을 낱낱이 증언했고, 이후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 증언이 잇따랐다. 문서나 제3자의 증언이 아닌 ‘살아있는 증거물’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의 증언은 한일 양국에 큰 파장을 가져왔다.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해오던 일본 정부는 표면적이나마 사죄와 반성을 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뒤늦게 우리 정부도 ‘정신대 문제 실무대책반’을 설치했으며, 이듬해 6월에는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했다.

1993년 6월 일본 정부는 2차 조사결과를 토대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이른바 ‘고노 담화’다. 이듬해 1994년에는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총리가 특별담화를 통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반성 및 사죄를 표명했다.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이었다.

1995년 7월 일본 정부는 민간모금 형식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이 기금은 피해자들로부터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우선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급한 배상금이 아닌데다 피해자들의 요구와는 무관하게 일시금 지급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기금은 2002년에 활동을 중단하였다.

일본 내에서 사태가 급반전 된 것은 2007년 아베 정권이 출범한 때부터였다. 일본 극우세력을 정치기반으로 하는 아베 정권은 “위안부가 폭행과 협박에 의해 끌려갔다는 증거가 없다”며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인했다. 반면 그해 7월 미국 하원은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 문제의 책임 인정 및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일에 앞장선 사람은 일본인 2세 출신의 마이클 혼다 의원이었다.

2011년 한국에서 위안부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첫째, 8월 30일 헌법재판소가 “(한국)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청구권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보름 뒤 9월 15일 한국 정부는 외교공한을 통해 일본 측에 청구권 협정상 분쟁 해결절차에 따른 양자협의 개시를 요청했다. 그간 무소신, 무대책으로 일관해왔다는 비난을 사온 한국 정부로서는 큰 변화라면 큰 변화였다.

고 김학순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3명이 1991년 12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2004년 최고재판소에서 최종 패소 판결을 받았다. 일본 법원 역시 ‘가제는 게 편’이라는 식으로 번번이 일본 정부와 같은 입장에 섰다. 게다가 아베 2차 내각은 “고노담화 작성 경위를 검증하겠다(2014.2.28, 스가 관방장관).”며 퇴보에 퇴보를 거듭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 정부의 윤병세 외교장관은 2014년 3월 5일 열린 제25차 유엔인권이사회 고위급 회기 기조연설에서 “고노 담화 수정 움직임은 반인도적·반인륜적 처사”라고 비판했다. 국제적으로 또다시 망신을 당한 일본 정부는 한 걸음 물러섰다. 급기야 아베 총리는 3월 14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고노 담화의 수정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후퇴했다.

한일 양국이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놓고 처음 대좌한 것은 2014년 4월 16일 서울에서 열린 제1차 한일 국장급 협의 자리였다. 이 실무회의는 금년 12월 27일까지 총 12차에 걸쳐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진행됐다. 양국의 극우정권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보인 것은 더 이상 밀쳐둘 수만은 없는 막다른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8차 회담 이튿날인 지난 6월 12일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간의 논의가 상당한 진전을 보였으며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며 상당한 협상이 이뤄졌음을 암시했다. 11월 2일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타결을 위한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합의했다.

2000년 3월 1일 광화문 교보문고 앞 대로변에서 열린 제400회 ‘수요집회’에 참석한 윤정옥 교수 (필자 촬영)

3.

어제(28일) 한일 양국은 외교장관회담에서 위안부 문제를 타결했다. 국장급 실무협의를 시작한지 1년 8개월만이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이날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외교장관회담 직후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위안부 문제 해결방안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양국이 합의한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
2) 아베 총리의 사죄 표명
3) 위안부 재단 설립비용으로 10억 엔 지원 등

1, 2항은 별로 주목할 것이 못 되는 게 일본은 총리가 공식 사죄한 것도 뒤집고 무시한 사례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극우 정치인인 아베의 사죄는 진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눈여겨 볼 대목은 ‘재단 설립비용 10억 엔 지원’건이다. 이에 대해 기시다 외상은 “이 같은 지원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며,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하는 것을 자제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기시다의 발언 속에 숨은 속셈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베 정권이 형식적으로나마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선 직접적인 동기는 미국, 유엔 등 국제사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서라고 판단할 수 있다. 미 하원은 2014년 1월 15일, 2007년의 위안부 결의안 준수를 촉구하는 법안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이튿날 상원을 통과했으며, 그 다음날로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다.

현재 미일 양국은 어느 때보다도 밀월을 구가하고 있다. 지난 4월 27일 양국은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에 합의했다. 이로써 미일 ‘신동맹 시대’가 열렸다. 최근 양국은 안보 관련 부처 핵심간부들이 참여하는 군사협의체를 설치하고 평시부터 미군과 자위대 운용을 일체화하는 등 군사동맹을 가속화하고 있다. 총리의 ‘립 서비스’와 10억 엔으로 미국에 잘 보이면서 국제적 비난을 피해갈 수 있다면 일본으로서는 거저먹다시피 한 셈이다.

이에 대해 한국 측 반응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날 윤병세 외교장관은 “일본 정부가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했다”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실시하는 조치에 협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한국 정부에게 위안부 합의는 앓던 이가 빠진 격이니 윤 장관이 반기는 건 당연하다 . 그러나 이런 행태는 참으로 무식한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일본 정부가 이번에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부터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처사다. 아시아여성기금 운용 사례나 과거사 사죄 발언 번복 등 지난 역사가 입증하듯이 일본은 신뢰를 담보하기 어려운 집단이다. 걸핏하면 역사왜곡과 한국 침략 야욕을 드러내는 아베의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다음은 이번 협상결과를 두고 ‘최종적 및 불가역적(不可逆的)’이라고 한 대목이다. 한 마디로 이는 언어도단이다. 이미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의 사례에서 보듯이 협정이나 조약은 지나고 보면 늘 미비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65년 당시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짚었다면 이 문제가 오늘에까지 이어졌을까? 항상 협상은 재논의의 여지를 남겨둬야 하며 제대로 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차기 정부로 넘겼어야 했다.

이번 합의문의 결정적인 하자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과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명쾌히 규정하지 않은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언제라도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피해 할머니들이 바라는 건 ‘돈’이 아니다. 이미 8, 90이 넘은 노인들이 큰돈을 쥐게 된들 뭣에 쓰겠는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들이 바라는 건 진솔한, 그리고 공식적인 사죄다.

그럼에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 이전 문제가 오르내리는 것은 우리 정부의 협상 실패라고 봐야 한다. 합의문 발표 후 기시다 외상은 소녀상이 이전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일본으로서는 소녀상이 몹시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매주 수요일이면 소녀상 앞에서 ‘수요 집회’를 벌이는 데다 이 소녀상을 시작으로 곳곳에 파급되고 있으니 말이다. 소녀상 하나가 일본 극우세력들의 목줄을 쥐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우리 정부는 그런 일본 편을 들고 나섰다. 윤 장관은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한다.”며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정도면 소녀상을 이전키로 이면합의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 ‘소녀상’은 얘기도 꺼내지 못하도록 했어야 마땅했다.

2000년 3월 1일 광화문 교보문고 앞 대로변에서 열린 제400회 ‘수요집회’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필자 촬영)

양국의 합의문이 발표된 뒤 국내 언론의 논조는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것 같다. ‘그 정도면 됐다’는 식이다. 평소 위안부 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언론의 ‘제3자적 입장’에서야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100년 한(恨)’을 안고 살아온 피해 할머니들 입장에서는 또다시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에도 없는(없을?) 일본 총리의 사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10억 엔, 그럼에도 자신들의 분신과도 같은 소녀상이 현 위치에서 쫓겨나야 한다니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 아니겠는가?  

나라가 없을 때는 나라가 없어서 못된 짓을 당했다고 쳐도 나라가 있고서도 그들은 한동안 제대로 된 보호나 위로를 받지 못했다. 어언 80세가 넘은 고령에다가 건강도 좋지 않다. 지난 5일 최갑순 할머니가 숨지면서 정부에 등록된 군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46명이 됐다. 올해만도 아홉 분이 세상을 떠났다. 일본 정부는 할머니들이 다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간 해온 처사를 보면 한국 정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위안부 협상은 아베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일본은 해묵은 숙제를 단돈 10억 엔으로 ‘퉁치고’ 이로써 국제적으로도 온갖 생색을 다 내게 됐으니 말이다. 아베는 이제 조만간 ‘북일 수교’ 협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그는 한반도의 과거사 청산 문제를 전부 매듭짓게 되는 셈인데 이를 성과로 내세워 아베가 노벨평화상을 노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아베에게 반가운 일이 또 있다. 최근 한일 양국은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문제를 놓고 한국 국방부와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다. 그런데 한국 국방부는 한국인의 국민정서를 감안해 회담 개최 사실을 ‘쉬쉬’해오고 있다. 아베에겐 꿩 먹고 알 먹고 여기에 깃털 뽑아 모자까지 만드는 ‘1거3득’이 아니겠는가?

반면 상대국인 한국은 ‘쓰리고에 피박’까지 덤터기를 쓴 셈이다. 특히 이번 위안부 협상은 피해 할머니들의 ‘백년 한(恨)’을 10억 엔으로 엿 바꿔 먹은 것이나 다름 없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매국조약 체결에 이어 박근혜 정권의 위안부 협상은 ‘제2의 한일협정’이라는 비난을 사 마땅하다. 졸속 합의로 일본에 면죄부를 준 데 대해 박근혜 정권은 책임을 져야 한다.  

합의안 발표 직후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합의에 대해 피해자 분들과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이해를 해 주시기 바란다”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수용을 요구했다. 그간 위안부 할머니들이 기거하는 ‘나눔의 집’ 한번 방문한 적이 없는 마당에 이런 협상결과로 이해를 구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이해를 구할 것이 아니라 사죄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합의안 발표 직후에 나온 보도에 따르면, 정대협이나 피해 할머니들은 협상 진행과정이나 협상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정작 당사자의 의견은 무시된 채 당국자들끼리 앉아서 탁상공론을 한 꼴이다. 한국 측 협상 실무자가 정대협 홈페이지에 한번이라도 들어가 봤으면 이 따위 협상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정대협 7가지 요구사항>

하나,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둘, 진상규명
셋, 국회 결의 사죄
넷, 법적 배상
다섯, 역사교과서 기록
여섯,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일곱, 책임자 처벌

(사진- 한겨레)

정운현(언론인, 친일문제연구가)


출처: http://www.ddanzi.com/ddanziNews/62867518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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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 선정 ‘2015년 한반도 10대뉴스’

통일뉴스 선정 ‘2015년 한반도 10대뉴스’8.25합의 / 류윈산 방북 / 민중총궐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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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28  18: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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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을 맞는 2015년은 정초부터 남북이 정상회담 운운하면서 호기롭게 출발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년간 고착화된 한반도 정세에 무언가 변화가 올 것으로 기대됐습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변화나 진전이 전무했습니다. 남과 북은 8월 초 지뢰 폭발로 촉발된 위기상황에서 ‘2+2’ 고위급 긴급접촉을 갖고 8.25합의를 이끌었으나 12월 초 후속 당국회담에서 차기 일정도 못 잡고 결렬됐습니다. 북미관계에서도 북한 측의 평화협정 회담 제의와 미국 측의 비핵화 합의 이행 요구로 지루하게 평행선만 그었습니다.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행사 때 류윈산 중국 상무위원의 방북으로 북.중간 관계회복이 점쳐졌으나 이마저 12월 초 공연차 중국을 방문한 북한 모란봉악단 등의 돌연한 철수로 시계제로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2015년은 최악의 해였습니다. ‘빈곤한 해’를 마감하면서 통일뉴스가 ‘2015년 한반도 10대뉴스’를 선정 발표합니다. / 편집자 주

 

1. ‘8월사태’와 8.25합의 (8월 4일-25일)

   
▲ ‘2+2’ 고위급 긴급접촉에서 8.25합의를 이끈 남북 대표단.

8월 4일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 지뢰폭발사건으로 촉발된 이른바 ‘8월사태’는 곧바로 대북 전단 살포 및 확성기 심리전 방송에 이어 남북 포격전으로 상승했다. 군사적 충돌이 우려될 정도였다. 이에 남과 북은 남측에서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북측에서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참석하는 ‘2+2’ 고위급 긴급접촉을 갖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당국회담 개최’ 등 6개항에 걸친 8.25합의를 이끌었다. 그 성과의 하나로 추석 계기 이산가족 상봉(10월 20-26일)이 진행됐다. 8.25합의의 후속 조치로 차관급 남북 당국회담이 12월 11-12일 열렸지만, 북측이 금강산 관광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을 연계한 것에 반해 남측은 이산가족 상봉만을 고수해 회담은 결렬됐다.

2. 북 노동당 창건 70주년 행사와 류윈산 방북 (10월 10일)

   
▲ 김일성광장 주석단에 나란히 선 김정은-류윈산.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류윈산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의 방북 보도가 나와 주목을 끌었다. 북.중관계는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급속히 냉각된 상태였으며, 더구나 당 창건 70주년에 즈음해 북의 ‘위성 발사설’이 나왔기 때문이다. 열병식 하루 전 회동한 김정은 제1위원장과 류윈산 상무위원은 양국이 “피로써 맺어진 관계”라는 점을 강조했으며, 10일 열병식이 열린 김일성광장의 주석단에 나란히 서서 열병식 행사를 지켜봤으며, 함께 박수도 치며 대화도 나눔으로써 북한과 중국의 전통적인 ‘혈맹관계’ 복원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3.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민중총궐기대회

   
▲ 1차 민중총궐기 대회.

정부가 11월 3일 한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는 확정고시를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정부의 국정화 시도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정당화하고 친일과 독재를 미화할 우려를 낳아 국민의 반대 여론이 거셌다. 이에 ‘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비롯한 ‘노동개악 저지’, ‘공안탄압 분쇄’, ‘세월호 진상규명’ 등을 골자로 한 1차 민중총궐기 대회가 11월 14일 10만명이 넘게 모인 가운데 광화문에서 열려 차벽을 두고 공권력과 공방을 벌였다. 이 와중에 농민 백남기 씨가 경찰의 직격 물대포를 맞아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이어 2차 민중총궐기(12월 5일), 2차 민중총궐기(12월 19일) 대회가 열렸으며,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12월 10일 은신 중인 조계사에서 자진출두해 경찰에 연행됐다.

4. 전쟁가능한 나라로 돌아간 일본

   
▲ 미.일 방위협력지침 확정.

올해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 아베 정권은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격이었다. 4월 27일 미국과 일본은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확정했다. 18년 만에 개정된 이 지침은 일본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한 것으로 드디어 일본 재무장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에 맞춰 아베 정권은 9월 19일 안보 관련법 제.개정안을 강행 처리했다. 전후 70년 만에 평화헌법이 붕괴돼 ‘전쟁할 수 있는 보통 국가’로 돌아간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동맹국 등이 공격당했을 때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선제공격까지 할 수 있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해졌다. 북한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허용과 관련 이는 북한 침략을 위한 것이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5. 리퍼트 미국 대사 피습 (3월 5일)

   
▲ 피습 당한 리퍼트 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3월 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주최 조찬 강연회에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로부터 흉기 피습을 당했다. 사상 초유의 주한 미 대사 피습으로 한미관계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다. 박 대통령은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이라 부추겼으나 미국이 “한미관계와 무관한 단독사건”으로 규정해, 그러한 우려를 잠재웠다. 오히려 보수단체들이 그의 쾌유를 비는 부채춤과 난타 퍼포먼스 그리고 개고기 선물 등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김 대표는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으며, 리퍼트 대사는 12월 18일 비공개로 열린 민화협 초청 토론회에 참석해 지난 3월 5일 중단된 강연을 진행했다.

6. 박근혜 대통령 중국 열병식 참가 (9월 3일)

   
▲ 톈안먼 성루에 오른 박근혜-시진핑.

박근혜 대통령은 9월 3일 한국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중국 ‘항일 전쟁 및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전승절)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 톈안먼 성루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함께 열병식을 참관했다. 사드 한국 배치를 비롯해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 미.중 남중국해 갈등 등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인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승절 행사에 참가한 모처럼의 주체적인 외도(外道)는 그러나 10월 미국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미국 쪽으로 심하게 치우치는 말들을 쏟아냄으로써 변함없는 대미 종속성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7. 남북 노동자통일축구대회 (10월 29일)

   
▲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린 남북 노동자통일축구대회.

남측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방북해 북측 직총과 함께 29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10만 명의 평양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남북 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앞서 1999년 8월 평양에서 대회, 2007년에는 경상남도 창원에서의 대회에 이은 세 번째였다. 아울러 남북 노동3단체는 2016년 축구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백두산에서 노동자행사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남북 노동자통일축구대회는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가 꽉 막힌 상태에서 이뤄진 대규모 행사라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언론보도가 미흡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8. 이희호 여사 방북 (8월 5일-8일)

   
▲ 평양 육아원을 방문한 이희호 여사.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8월 5-8일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방북했다. 이 여사의 방북은 경색된 남북관계에서 오랜 기간, 특히 지난해 12월 김정은 북한 제1위원장의 친서 초청을 통해 추진됐다는 점에서 관계 개선의 돌파구가 될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남측 정부가 ‘개인적 방문’으로 선을 그었고, 박근혜 대통령 역시 방북하는 이 여사를 만나지 않자 이 여사와 김 제1위원장과의 면담은 불발됐다. 이 여사는 귀경 후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방북에 어떠한 공식 업무도 부여받지 않았다”면서도 “6.15정신을 기렸다”고 밝혔다. 단발성으로 끝나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는 이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남북관계 개선은 멀어졌지만 그나마 6.15정신을 이은 게 성과였다.

9.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 DMZ를 넘다 (5월 24일)

   
▲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의 WCD.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이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 여성의 날’인 5월 24일 판문점 북측 지역을 거쳐 경의선 도라산 출입경사무소(CIQ)를 통해 남측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국제여성평화걷기’(Women Cross DMZ, WCD)를 진행한 것이다. 이번 WCD에는 세계적인 여성인권운동가인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을 비롯해 12개국 여성 지도자와 해외동포 평화운동가 등 30여명이 참가해 주목을 받았다. 이들 ‘평화 여성’들이 DMZ를 도보로 건넌 것은 곧 한반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자는 것으로 한마디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10. 북 모란봉악단 철수 (12월 12일)

   
▲ 북한으로 철수하는 모란봉 악단.

한 모란봉악단과 공훈국가합창단이 12월 12-14일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해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의 공연을 앞둔 12일, 돌연 철수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더구나 북한 공연단의 방중은 지난 10월 류윈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식 참석을 기점으로 일기 시작한 관계개선 움직임을 본격화한 것으로 풀이돼, 그 무산은 아쉬움을 줬다. 북한 공연단의 철수를 둘러싸고 여러 설들이 난무하지만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주변 정황으로 보아 이 사건으로 양국관계가 다시 틀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향후 북.중이 관계회복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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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국운이 기울고 있다"

 
[유라시아 견문] '다른 백년' : 대반전의 길을 묻다
 
이병한 역사학자 2015.12.29 10:36:14
 
 
 

 

새 역사

한 해가 저문다. 유라시아 견문 10개월 차다. 벵골만 지나 콜카타에 있다. 아랍어 공부를 시작했다. 인도양 세계와 이슬람 세계로 갈 준비를 한다. 새해는 남아시아와 서아시아에 주력할 참이다. 허나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온라인이 말썽이다. 시시각각 나라 소식이 들려온다. 國運(국운)이 기울고 있다는 방정맞은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애가 탄다.

안과 밖의 낙차가 심하다. 북방의 울란바토르에서 남방의 자카르타까지 쏘다녔다. 신장의 카슈가르에서 운남의 샹그리라까지 서역도 살폈다. 동북아와 동남아를 막론하고 한국의 위상을 확인한다. 공항서부터 한국 대기업의 광고판이 휘황하고, 숙소서는 현지어로 더빙된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다.

쿤밍에서는 카페베네에서 커피를 마시고, 반둥에서는 교촌치킨에서 맥주를 마셨다. 하노이의 주부들은 '강남 스타일'에 맞추어 춤을 추고, 프놈펜의 어린이들은 하얀 도복을 입고 태권도를 배운다. 매달 신곡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컴백한 빅뱅의 음악은 동유라시아 도처에서 흘러나왔고, 따리(大里)와 리장(麗江)의 고성(古城)까지 한글로 된 표지판이 친절하다. 마닐라의 택시 기사부터 만달레이의 식당 주인까지 'Anyonghaseyo!'라고 인사한다. 패션부터 음식까지 한류는 세계인의 일상 문화가 되었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환영받고 환대를 누린다. 대한민국은 필시 세계화의 물결을 가장 잘 탄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작 들어가면 갑갑하다.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여름에는 학술 회의에서 논문을 발표했고, 가을에는 부산 국제 영화제에 패널로 참석했다. 둘 다 때가 공교로웠다. 전자는 메르스 사태의 말기 국면이었고, 후자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파동의 초입이었다. '세월호' 이후의 세월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어지럽고, 어리석다. 國體(국체)는 망가지고, 國魂(국혼)은 흔들린다. 光復(광복) 70주년, 공든 탑이 무너진다.

업이 업이니만큼 국정화 논란에 무심할 수가 없다. 열불이 나다가도 착잡해진다. 사학계 전체를 좌파로 몰아가는 행태가 황당하면서도, 기존의 교과서에 담겨 있는 역사 인식에는 나 또한 수긍하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른'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에는 일백 번 찬성한다. 다만 좌편향은 괴담이다. 실상은 근대 편향이다. 좌/우 공히 근대로 기울어졌다.

내 학창 시절 국정 교과서의 기조가 내재적 발전론이었다. 조선 후기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는 억지를 부렸다. 경영형 부농을 부르주아와 연결시키고, 실학을 계몽주의와 잇는 식이다. 그래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되치기를 당한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은 명백하게 일제에 있다. 개항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되었고, 식민지가 됨으로써 전면화되었다. 부끄러워할 일이 전혀 아니다. 조선이, 동방이, 내발적으로 자본주의로 이행할 까닭이 전혀 없었다. 필연보다는 우연이었다. 교통사고 같은 것이었다. 역사도 울퉁불퉁, 돌발의 연속이다. 매끈한 진보사관은 과학이 아니다. 근대의 주술이다.

'자학 사관'도 피장파장이다. 좌/우 모두 전통 문명을 천시한다. 조선은 '중세'로 가두고, 동양은 '봉건'으로 박제한다. 전통과 근대에 만리장성을 쌓는다. 근대를 華(화)로 섬기고, 전통을 夷(이)로 배척한다. 古今(고금) 간 분단 체제이다. 그래서 내재적 발전론도 식민지 근대화론도 '시각의 차이'가 아니라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냐, 일제 시대냐. 오십 보, 백 보이다.

고로 진보도 보수도 올바르지 못하다. 올드레프트도 뉴라이트도 서구 근대를 전범으로 삼는 도깨비 놀이를 반복한다. 교통사고를 낸 쪽을 따지기보다는 도리어 따르려고 한다. 이 도착과 당착의 기원에 개화파가 있다. 동방 문명에 무지한 새파란 선무당들이었다. 개발파와 개혁파도 개화파의 맹점을 답습했다. 산업화에 성공하고 민주화를 성취했다며 각자 뻐겨댄다.

겉으로는 앙숙이지만, 실제로는 짝꿍이다. 산업화+민주화=근대화의 대서사를 공유한다. 그래서 근대 문명의 파국이 임박한 작금의 시대정신과는 도무지 어긋나는 역사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개발파의 시대착오만큼이나, 개혁파도 구태의연하다. '근대 문학의 종언'(=독립적 개인의 성장사)에 이어 근대 사학(=독립적 국민국가의 발전사)도 종언을 고한다.

새 체제

역사 논쟁의 빈곤은 체제 논쟁의 부실로 이어진다. 한때 87년 체제냐 97년 체제냐 논쟁이 일었다. 내발론과 외인론의 사회과학적 판본이었다. 87년 체제론은 내부의 주체적 역량을 과도하게 추킨다. 민주화 세력의 자긍과 자부가 자충수를 연발한다. 반면 97년 체제론은 외부의 충격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만사가 신자유주의 탓, 세계화의 덫이란다.

조금만 시야를 넓혀도 87년도 97년도 한국만의 현상이 아님이 자명하다. 필리핀, 태국(타이), 대만(타이완) 등이 동시적으로 '민주화'에 진입했다. 즉, 87년 체제는 예외적인 성취가 아니다. 일반적이고, 전형적이다. 그리고 딱 10년 후에 금융 위기가 이 지역을 휩쓸고 지나간다. 냉전기 개발 독재 국가들이 축적한 국부를 글로벌 자본주의가 회수해 간 것이다.

87년 체제와 97년 체제는 차라리 연속적이다. 민주화가 세계화로 가는 디딤돌이었다. 동아시아에 동유럽까지 보태어 유라시아를 망라하면, 냉전형 좌/우 독재를 허무는 '민주화'(=체제 이행)가 자본이 천하를 통일하는 '평평한 세계'의 전조이자 전제였음이 더욱 확연해진다.

새 천년의 역설은, 그럼에도 세계사의 축이 점점 더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 이후에는 아시아가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심장으로 약동한다. 중국(Made in China)이 앞에서 끌고, 인도(Make in India)가 뒤에서 민다. 친디아(Chindia)에 덩달아 '이슬람 자본주의'도 약진한다. 중국과 인도와 이슬람이 만나는 동남아는 이미 한 몸(ASEAN)이다. 19세기의 유럽, 20세기의 아메리카처럼, 21세기에는 아시아가 세계의 성장판이다. 87년 체제와 97년 체제와는 상이한 흐름이 저류에서 크게 일었던 것이다.

그 변곡점에 1992년 한-중 수교가 있다. 1987과 1997년 사이에 대륙과의 재회가 있었다. 시뻘건 '중공'이 아니라 개혁 개방 이후의 중국이었다. 그래서 세계화는 곧 미국화라는 등식도 성립하지 않았다. 한국의 세계화는 중국을 경유하는 세계화였다. 대륙을 발판삼아 세계로 나아갔다. 삼성(三星)이 글로벌 브랜드(SAMSUNG)가 된 것도, 한류가 세계인의 대중문화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래서 냉전기의 미-일 편중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여야의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남북 관계의 냉온탕과 무관하게 일관된 추세였다. 국지적인 정세의 변동이 아니라 역사의 대국, 대세였다. 그래서 불과 20년 만에 지난 100년의 흐름을 역전시킨 것이다. 목하 한국의 사회 구성체는 북조선 못지않게 대륙과 긴박하게 연동되어 있다. 서울부터 제주도까지 풍경마저 바꾸어 갈 정도이다. 하여 중국론이 결여된 한국론은 더 이상 성립할 수가 없다. 87년 체제도 97년 체제도 실격이고 실기했다.

실은 분단 체제 또한 한중 수교로 크게 흔들렸다. 본디 신중국의 개입으로 성립된 체제였다. 분단 체제는 1945년(미-소 담합)이 아니라 1953년(미-중 대결)에 확립된 것이다. 53년 체제였다. 미-소의 유럽형 냉전이 아니라 미-중의 아시아형 냉전의 소산이다. 마오쩌둥이 중국의 남-북 분단을 거부하고 장강을 돌파한 것처럼, 김일성은 한강을 건넜고, 호치민은 메콩강으로 향했다.

중일 전쟁의 제국주의 대 반제국주의 길항이 국공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을 연거푸 추동했다. '항일'이 '항미'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남북 전쟁이었다. 한반도에서는 북-중과 한-미가 길항했다. 그중 한-중이 적대 관계를 청산했으니, 분단 체제 또한 결정적으로 기울어졌던 것이다. 곧바로 불거진 것이 북핵 사태이다. 문민화 대 선군 정치, 비대칭적 분단 체제의 시발이었다.

돌아보면 한중 수교는 '장기 21세기'의 출발이었다. 1894년 청일 전쟁 이후 한국은 탈중국화의 일백년을 경험했다. 식민지가 되고 분단국이 되었다. 식민지 근대화 30년, 분단국 산업화 30년, 속국 민주화 30년이 대륙과 동떨어져 진행되었다. 하여 1992년은 반도의 남쪽이 다시 대륙과 연결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00년 만에 재회한 중국은 동아시아에 자족하는 왕년의 중화제국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와 중간지대론과 삼개세계론을 경유한 유라시아 제국이었다. 한국 또한 대륙과 접맥함으로써 부지불식 유라시아와 접속한 것이다. 동아시아(론)는 그 일부였을 따름이다. 중국화와 세계화의 상호 진화로 운동하는 중국의 서북 너머까지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담론의 넓이와 깊이 자체가 분단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냉전기 북조선 지식인들의 경험 세계는 퍽이나 달랐을 것이다. 과연 분단 체제의 길항은 갈수록 유라시아와 태평양으로 갈라지고 있다. 좌우 이념 대결에서 지리-문명(Geo-Civilization)의 길항으로 성격이 달라졌다.

새 문명

2008년 이래 세계 체제의 운명을 중국이 좌우한다. 이른바 '신상태(New Normal)'로 진입했다. 미국 발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경제 성장의 3분의 1이 중국에 의한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양적 완화보다도 중국 정부의 과잉 투자가 대공황 이래 최악의 위기에 처했던 자본주의를 구해냈다.

양적 완화는 금융 시스템의 연명에는 효과가 있을지언정, 실물 경제를 직접적으로 개선시키지는 못한다. 실제 경제를 지탱해온 것은 중국의 투자였다. 자국의 인프라 정비와 주택 건설 등에 재정을 쏟아 붓고, 원자재와 에너지도 왕성하게 수입했다. 그래서 중국이 부진하면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지는 글로벌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단기 처방이다. 오래갈 수 없는 임기응변이었다. 작년(2014년)부터 폐해가 도드라졌다. 거품이 푹 꺼지고 있다. 올 여름에는 주식 시장이 폭락했다. 주시할 대목은 당국이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상 방치했다. 올해부터 투자 증가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대신 '신상태'라는 언설을 널리 유포했다. 중국도, 세계도, 고도성장의 시대는 지나갔다. 향후 저성장 시대가 오래 지속될 것이다. 하여 체질을 개선하고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신문에서 방송에서 연일, 연중, 떠들어댄다. 선전이고, 선동이다.

물론 반동파도 있기 마련이다. 인위적 경기 부양으로 거품을 재차 일으키고자 하는 관성적 세력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반(反)부패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개혁 개방에 도취되고 성장(의 떡고물)에 중독되어 있던 공산당 상층부 유력자들을 제거해간다. 이들은 언제라도 외세(의 담론적 지원)를 등에 업고 다당제와 시민 사회로 작동하는 '민주화'를 요구할 수 있다. 시민 혁명으로 인민 혁명을 뒤엎어 권력을 시장으로 넘겨 사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동아시아와 동유럽의 '독재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각국의 주권을 약화시키고 자본의 영토를 대폭 확장시켰던 민주화=세계화의 전략을 변주할 수 있는 것이다. 마오쩌둥에 버금간다는 '시황제'의 '독재 권력 강화'에는 이런 측면도 있다 하겠다. 세계 체제의 전체 판세를 살피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민주주의' 타령만 해서는 심히 곤란하다.

내부 단속과 척결의 반면으로, 외부로는 새 틀을 짜고 있다. 국내의 과잉 투자를 여타 신흥국으로 돌리는 중이다. '일대일로'의 발진이다. 유라시아 전체의 고정 자산(인프라) 투자를 중국이 주도해 간다. 일대일로가 각별한 점 가운데 하나는 화폐의 전환이다. 종래에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달러와 유로를 조달하여 국내에 투자했다. 이제는 중국의 자금으로 세계에 투자한다. 올해 인민폐는 SDR에 편입됨으로써 국제통화기금(IMF)가 승인하는 기축통화의 하나가 되었다. 중국의 인민폐가 세계의 인민폐가 되어간다.

1945년 이후 미국은 '식민지 없는 제국'으로 군림했다. 군사 기지 연결망과 달러를 통한 금융망으로 전 세계를 지배했다. 모든 상품과 자산과 무역 거래의 최종적 가치가 달러로 표시되었다. 탈영토적 지배 방식이고, 비가시적 제국주의였다. 그로부터 70년, 그 그물망에서 벗어나는 대안적 제도들이 속속 등장했다. 브릭스 개발 은행이 IMF와 세계은행을 대체하고, AIIB는 ADB를 대체한다. 19세기 은화에서 파운드로, 20세기 파운드에서 달러로의 이행에 견줄만한 커다란 변화가 진행 중이다.

즉 중국이 경기의 규칙을 새로 쓴다. 미국의 '재균형'에 맞불을 놓고, 맞짱을 뜨기보다는 새 길을 낸다. 미국식 체스 게임에 응대하기보다는 게임의 종목 자체를 바꾼다. 판세를 뒤엎기보다는 판 자체를 갈아버린다. 분단되고 분열된 독립국들을 '거대한 체스판'의 졸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와 각 문명을 잇고, 엮고, 묶어내는 과업에 역량을 집중한다.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는 분할 지배(Devide and Rule)와는 정반대의 접근이다. 나와 남을 가르지 않고, 내 안에 너를 품고, 네 안에 나를 심는다. 초국가적(Trans-National)이고 간주체적(Inter-Subjective)이다. 이로써 유럽과 아시아를 공간적으로 분할하고, 근대와 전근대를 시간적으로 분리했던 19세기 이래의 대분기를 반전시키는 것이다. 대통합과 대융합, 유라시아의 대일통을 이룸으로써 자본주의 이후의 새 문명을 예비하는 것이다. 더 나은 100년을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다른 100년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United Eurasia

2015년, 미래가 언뜻 지나갔다. 9월 3일 전승절, 역사적인 사진이 연출되었다. 중국, 러시아, 한국, 카자흐스탄의 정상이 나란히 섰다. 그리고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했다. 22세기의 역사가들이 21세기를 회고하며 즐겨 언급할 사진임에 분명하다. 중원과 북방과 반도와 서역이 (다시) 합류했다. 'United Eurasia'의 부상, 세기적인 사건이다.
 

ⓒ연합뉴스


지난 세기, '抗日(항일)'이 무엇이었나. '脫亞入歐(탈아입구)', 일본이 추종했던 유럽형 근대화에 대한 아시아의 집합적 저항이었다. '진보(Progress)'에 맞선 '道德(도덕)'의 항쟁이었다. 패도에 맞선 왕도의 도전이었다. 20세기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양대 축이었다. 21세기에는 유라시아의 대륙주의와 고전적 문명주의가 양대 축이다. 역사의 되돌림, 문명의 되살림. 재생과 중흥이 21세기의 혁명이다.

북경(베이징)은 어느새 다시, 天下(천하)의 중심이다. 모든 고속철과 고속도로가 베이징으로 통한다. '거대한 체스판'을 촘촘한 바둑판으로 바꾸어간다. 그러나 21세기의 중국이 19세기의 영국이나 20세기의 미국처럼 과잉 성장하고 과대 팽창할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중국의 왕도에 막연한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 자체가 허약해졌기 때문이다. 영/미처럼 전일적이고 전횡적인 패권국의 부상을 예상하기 힘들다. 오히려 사물을 제 자리로 돌려놓고, 제 자리로 돌아가는 작업을 주도하는 데 중국의 역할이 있지 싶다. 유럽은 유라시아의 서쪽 동네가 되어갈 것이다. 미국 역시 태평양 건너,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로 돌아갈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진정한 '재균형'이다.

동방의 등불

인도양의 포근한 성탄절, 첫눈처럼 청량한 소식이 들렸다. 인도의 모디 총리가 파키스탄의 이슬라바마드를 깜짝 방문했다. 모스크바에서 카불을 거쳐 뉴델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샤리프 총리의 생일 잔치에 맞춤한 선물이다. 알자지라는 하루 종일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1947년 대영제국에서 독립하면서 힌두교와 이슬람교로 갈라섰던 두 나라이다. 그 후 두 차례나 혈전을 벌였고, 지금도 핵무기로 서로를 겨누고 있다. 실향민과 이산가족만 1억에 육박한다. 이 남아시아의 분단 국가들이 대화합의 여정에 들어선 것이다. 박수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한 해의 끝이 훈훈하다.

이들을 아우르고 있는 남아시아 지역협력연합(SAARC) 또한 국가 간 연대에 그치지 않는다. 힌두 대국 인도와 이슬람 대국 파키스탄은 물론이요 부탄과 네팔, 스리랑카와 같은 불교 소국들도 포함하는 문명 간 연합체이다. 19세기가 연합 왕국(United Kingdoms), 20세기가 연합 중국(United States)의 전성기였다면, 21세기는 문명 연방(United Civilizations)의 전성기가 될 법하다.

도래하는 유라시아의 세기에 한반도가 부응하는 길은 20세기형 분단을 종식하는 것이다. 유라시아의 문명 연방(United Eurasia)에 남북의 국가 연합(United Korea)을 조응시키는 것이다. 북조선은 핵 보유와 세습 권력 안정으로 반등의 계기를 확보했다. 비대칭적 분단 체제를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 적극적이다. 중원과 북방과 서역과의 협력을 통하여 나라를 재건하고 更張(경장)해 갈 것이다. 한국도 합류하여 장단을 맞추어야 하겠다. 그래서 70년이 지나도록 못다 이룬 해방과 광복도 완수해야 하겠다. 통일은 대박이고 축복일 것이다. 표류하는 한국호의 (아마도 유일한) 出路(출로)일 것이다.

이곳 콜카타에는 20세기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의 생가에서 <동방의 등불>을 음미해 보는 것은 각별한 체험이었다. 1894년 좌초한 東學(동학) 혁명에 감화되어 조선의 '가지 못한 길'을 아끼는 마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노래했다. 한 자, 한 귀 소중하게 되새기며, 새해 '동방의 밝은 빛'을 다짐한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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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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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결산]한국을 관통한 쟁점들: 메르스, 유승민, 안철수, 기본소득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12/29 10:31
  • 수정일
    2015/12/29 10:3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2015.12.28 16:35

물뚝심송 추천:10 비추천:0

 

 

 

 

 

벌써 한 해가 저문다. 올 한 해를 또 어찌 버티나 걱정하면서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왜 이리 빠르게 가는지 모르겠다. 노화현상인가?

 

점점 더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저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겨 버리고, 올 한해 여야 정치권을 관통하는 총정리를 해 보고 싶어졌다. 결단코 죽돌 부편짱이 닌자를 보내 위협해서 쓰는 것은 아니다. 절대 아니야..

 

보 통 연말에는 올 한 해 대한민국을 뒤흔든 10대 사건 같은 것을 뽑으면서 다이제스트를 해야 제맛이긴 한데, 그런 건 다 읽어 봐야 남는 것도 없고 하니 내 맘대로 방식으로 결산을 하기로 하자. 그것은 여야를 나누고, 각각의 진영을 관통하는 흐름을 설명하는 식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선정한 사건들의 시작은 바로,

 

 

메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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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니뭐니해도 2015년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가장 큰 사건은 메르스의 유행이었다. 베타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 중의 하나인 메르스-코로나 바이러스(MERS-CoV)에 의해 전염되며 전염 방식은 ‘접촉’이라고 알려져 있는 중동호흡기증후군(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MERS)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버렸다.

 

사실 이 메르스는 21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사스(SARS)와 유사하다고 한다. 그때 우리 사회는 위기를 기적적으로 잘 피했었다. 그러나 단지 정권이 바뀌었을 뿐인데, 이번에는 호되게 당했다.

 

가 뜩이나 어렵던 경기를 지탱해주던 중국인 관광객의 수는 급감했다. 이로 인해 관련 업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그 여파와 함께 때맞춰 엔저를 무기로 들이댄 일본 시장이 중국인 관광객들을 싹쓸이하는 바람에 지금도 회복이 안 되고 있다. 해당 업계에 종사하던 한 지인은 “차라리 메르스에 걸려 내가 죽어버리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표현을 해서 친지들의 마음을 써늘하게 만들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충격적인 사태였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이런 내용을 그리 잘 알지 못하고 지나가기 마련이다. 뭐 전염병이 조금 돌았나 보네, 마스크 쓰고 조금 조심하면 되겠네, 하는 정도의 인식을 가졌을 뿐이다.

 

그 러나 현대적인 국가에서 이런 종류의 재난이 발생하고, 그 재난에 대처하는 정부 조직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 국가의 기초체력, 즉 사회적 품질이 드러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메르스 상황으로 인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기초 체력은 말 그대로 빈사 상태였다고 밖에 평할 수가 없다.

 

확 실히 해두자. 메르스 자체로 인해 우리 사회가 입은 피해, 그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 2015년 12월 6일 현재 메르스의 누적감염자는 186명, 누적 사망자는 38명이다. 물론 단 하나의 생명의 손실도 우주의 붕괴에 버금가는 피해지만 국가 사회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38명의 사망자는 그리 크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일 년에 결핵에 걸리는 환자가 35,000명이 넘고, 사망자가 2,000명이 넘는다. 가끔 유행하는 독감의 경우도 합병증까지 합쳐 2012년 통계로 2,000명이 넘는 수준이다.

 

문 제는 대처 방식이다. 사망률이 20%에 육박하는 메르스의 경우 사회 전체에 만연하게 되면 어떤 상황이 올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또한 기존의 전염성 질환들과는 달리 새로운 종류의 질환이기 때문에 대처 방법도 그다지 잘 개발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도 위험성을 더 높이고 있다.

 

그 런 상황에 대한 이 정부의 대처 능력이 엉망이라는 것은 기타 예기치 못한 재난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 역시 바닥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해주며 이는 우리 사회 자체가 시스템적인 관점에서 전혀 능동적인 대처능력이 없는 무기력한 사회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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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탓이나 하고 말이지..

 

어 떤 사회라도 예기치 못한 재난에 대비한 시스템을 구성해 두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물론 그런 대비에는 재정이 소모되고, 만약 재난이 닥치지 않는다면 그 예산은 완전히 낭비라고 볼 수 있는 것 역시 상식이다. 그러나 그런 낭비는 필수적인 낭비라는 것이다. 재정의 일정 비율은 항상 유보시켜 두어야 하며 그런 재난 대처 비용으로 소모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것은 바로 안전비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간의 경기 불황으로 인해 누적된 재정적자가 늘어나고 있고, 이 정부를 운용하는 사람들은 그런 여유분을 채워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는 것이다.

 

거 기다가 메르스 유행은 이 정부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즉, 말로 하는 정치는 좀 하는데, 실무적인 행정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말이다. 정권 초기부터 장관들의 자율적인 결정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였다.

 

진 영 보건복지부 장관의 사퇴 과정에서 드러난 대로, 이 정부는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 기구인 '국무회의'를 스스로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버렸다. 각 부처의 장들이 모여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견을 조율하고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회의 체제”여야 할 국무회의는 기자회견도 안 하는 대통령의 대언론 지시문 낭독의 자리가 되었고, 국무위원들은 “적자생존” 즉 노트에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자세로 고개를 처박고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는 자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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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고, 또 적자..

 

장 관의 재량권은 하나도 없고, 모든 일은 청와대의 비서관들이 결정해서 장관을 바이패스하고 실무국장에게 직접 지시가 내려간다. 문제는 그 몇 안 되는 청와대 비서관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모든 행정 업무를 관장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결국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 안건만 관리하게 되는데 기타 각 부처의 업무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체가 운영되어야 할 업무들은 방기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시스템을 아무리 잘 만들어 두면 뭘 하겠는가? 실무 장관들이 스스로 '바지 장관'을 자처하면서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데 어떤 시스템이 살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이 런 문제는 이미 메르스 이전에도 벌써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던 바 있다. 바로 수많은 학생들과 승객들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이다. 그 사건을 그렇게 엉터리로 처리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찢어 놓고도 이 정권은 배운 게 없었다는 점, 바로 그 치명적인 부분을 입증한 것이 메르스 유행이었다.

 

2015년의 가장 큰 사건이며, 동시에 이 정권의 무능이 입증된 사건이 바로 '메르스의 유행'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유승민 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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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그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여당의 원내대표 유승민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잘려 버리는 사건이었다.

 

좋다. 행정적으로는 무능하다고 치자. 그러면 정치적으로는 유능했는가?

 

박 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아니 그 이전부터 '선거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사람이다. 그녀가 관계하는 거의 모든 선거에서 승리했다. 유일한 실패라면 이명박 후보와 벌였던 대선후보 경선 과정이었고, 사실은 거기서도 애매한 패배를 겪고 승복했지만, 그리 큰 참패는 아니었던 걸로 봐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거나 단 한 번 도전한 대선에서 승리해 대한민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지 않는가?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거나 그렇게 선거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정치적인 일, 흔히 '정무'라고 부르는 업무는 잘 처리할 것으로 기대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니었다.

 

대 통령으로 일단 당선이 되면 우리 헌법에 규정된 대로 단임에 그쳐야 하며, 따라서 권력은 내리막길을 걷게 마련이다. 당무에는 관여하지 말아야 하며, 당의 의견을 들을 줄 알아야 하고, 당청 간의 협의에 수완을 발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단 어 하나에 의미를 두는 것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청당이 아니고 당청인 이유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다수의 의견을 취합해야 하고, 그 취합된 의견을 집행하는 것이 행정부의 수장의 역할일 뿐이다. 우리 헌법은, 그리고 우리의 국가 체제는 대통령에게 그것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 러나 박근혜 정권은 그런 룰조차 무시해 버린다. 단 한 번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집권 여당의 원내 대표를 잘라 버렸다. 말 그대로 내쫓아 버렸다. 그 이후로 여당의 원내대표였던 유승민은 정치적 식물인간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중이다. 이번 총선에 공천이나 받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사실 이 사건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적용된 사회에서 권력이 움직이는 그렇고 그런 모습을 보여준 사건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널리 화제가 되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의미부여가 되지 못했던 사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이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이 정권은 최소한도의 의회주의에 입각하기는커녕 민주주의자들도 아닌 그런 사람들로 밝혀졌다는 것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상황은 이 정권이 스스로 정권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걸로 보인다. 일단 다가오는 2016년 총선에 사실상 공천권을 청와대가 쥐고 흔들려고 하는 조짐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유승민을 쫓아낸 것도 마찬가지고, 유승민을 지지하던 새누리당 내의 세력들에게 주어진 경고가 바로 그런 내용이었다. 그 줄에 서 있다간 공천도 못 받게 된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광범위하게 살포되었다.

 

2016년 총선은 새누리당의 선거가 아니라 청와대의 선거가 될 것이다.

 

그저, 총선에서 자신이 속한 당이 잘 되길 바란다는 덕담 한마디를 하고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까지 겪게 된 대통령이 집권한 시점에서 딱 십 년이 지난 뒤, 우리는 대통령이 직접 배후 조종하는 총선을 겪게 될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그 총선에서 압승을 한 뒤 개헌을 하고, 개헌을 통해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해서 바지 장관을 넘어선 바지 수상을 세우고 막후에서 섭정을 하겠다는 스토리는 이미 여의도에 파다하게 퍼져 있다.

 

이는 실무적 무능에 비견될 만한 정치적 월권이다. 정치적 월권을 넘어선 삼권분립의 파괴이며 헌법을 초월하는 헌정파괴행위이자, 한반도의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려는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2015년의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집권세력은 이렇게 두 가지 사건으로 딱 정리가 된다.

 

실무적으로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집권세력인 주제에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파괴를 시도하는 반헌법적 불법 집단이라는 점 말이다.

 

그런 집단이 지배하고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2015년의 대한민국 되겠다.

 

 

안철수의 탈당과 야당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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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정부 여당의 맥락이 그럴진대, 야권의 가장 큰 사건은 역시 안철수 의원의 탈당 사건이다.

 

실 제로 대한민국 사회의 제1야당, 수권 경험이 있는 집단이자 양당제 하의 유일한 정권 반대세력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사실상 식물정당 상태로 2015년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후세의 역사가들은 도대체 2015년 한 해 동안 한국사회의 야당은 무엇을 하고 세월을 보냈는지 이해하기에 무척 애를 먹을 것이 틀림없다.

 

사실상 정당정치가 붕괴된 상황이었고, 그 책임은 아마도 집권 세력에게 51%, 그리고 새정연에게 49%를 지워야 할 것 같다. 그게 딱 지난 대선의 지지율 아니었겠는가.

 

대 선 패배 이후로 지리멸렬하던 야당에게 벌어진 초유의 사건은 안철수의 입당이었고, 안철수의 입당보다 더 큰 사건이 바로 안철수의 탈당이었다. 이 상황은 사실상 안철수의 공이 아니다. 야당의 전반적인 상태에 더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노 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과 탄핵, 그리고 이어진 2004년 총선에서의 열린우리당 과반수 달성 이후로 사실상 대한민국의 야당은 뼈대를 잃어버렸다. 그 이전까지의 야당은 삼김시대의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김대중이라는 걸출한 정치적 거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제왕적 총재 시스템이라는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러나 그 의사결정 구조가 붕괴한 이래, 야당은 아직 그 과거의 시스템을 대치할만한 새로운 의사결정 구조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제도 자체를 못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당헌 당규는 수시로 바뀌고 있고, 전당대회의 룰도 지속적으로 바뀌고 있다.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야권 지지자들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굳건한 룰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 내 선거에서 승리해서 당권을 잡고 나면 선거 한 번 치르고 나면 잘리고, 당권을 잡지 못한 쪽은 자고 일어나면 당권집단에게 책임지고 사퇴하라는 얘기만을 반복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당권을 잡으면 역할만 바꿔서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당 대표 사퇴하라는 주장은 매우 엄중한 주장이다. 아무나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정상적인 정당이라면 당 대표 사퇴를 요구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주장을 내뱉은 사람이 탈당을 해야 할 정도로 엄중한 말이기도 하다. 정히 당대표가 사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또 그 의견을 표출할 시스템이 있기 마련이다. 정해진 절차가 있고, 정해진 룰이 있다.

 

이런 모든 원칙을 다 무시하고 서로 당권을 교대로 잡아가며 서로에게 사퇴하라는 말만 늘어놓으며 비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모든 의원들의 관심은 차기 공천에만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쯤 되면 식물정당 이전에 미이라 정당이라고 불러야 한다. 피부와 살은 다 말라붙어 버렸고 당의 간판만 남아 버린 상황이다. 정권을 탈환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각자도생의 깃발 아래 각개약진을 하며 차기 공천만이 주 목적이 되어 버린 그런 상황이다.

 

결국 그 상황은 이어지고 이어져서 한때 입당하자마자 바로 공동 대표에 취임했던 한 축, 지난 대선에서 양보를 주고 받았던 강력한 야권의 대선 후보 안철수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탈당해버리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이 는 하나의 상징적 좌표가 될 수 있다. 탈당하자마자 안철수에게 몰린 지지율의 의미가 뭘까? 딱 그만큼이다. 양당제도 하에서의 이 미이라 야당의 행태에 질리고 질려 버린 사람들이 제3의 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안철수에게는 딱 그만큼의 지지율이 주어지고 있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전통적인 야당이 자신의 역할을 해야 되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지율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어 떤 사람은 이 상황을 '야권의 분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야권의 분열은 이미 오래전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상황이다. 호남은 호남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반정권은 반정권대로 온건 보수는 온건 보수대로 갈갈이 찢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박근혜 정권이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것은 천재적으로 잘한다. 야권은 거기에 말려 들어 아무도 맥을 못 추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숨은 희망이 있다. 무엇이든지 바닥을 치면 올라갈 일만 남게 되어 있는 법이다. 정당정치가 붕괴하고 야권이 미이라화 되고 있는 이 시점이 바로 붕괴된 정당정치를 다시 재건할 기회인 셈이다.

 

아 직 바닥을 치지 않았다면 더 내려가도 좋다. 언젠가 한 번은 쳐야 할 바닥이었고, 제왕적 총재가 사라진 이후 정립되지 않은 민주적인 야당의 의사결정 구조는 언젠가 다시 재건되어야 할 문제였다. 그런 시스템이 사라지면 어떤 종류의 국가적 재앙이 오게 되는지 우리 모두 값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공부하는 중이라고 생각을 해도 좋다.

 

양당제를 할 것인지, 다당제를 할 것인지, 선거제도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삼권분립과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의 헌법이 제역할을 못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우리 모두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봐두자.

 

2015년의 대한민국, 야권의 상황은 우리에게는 귀중한 경험으로 남게 될 것이다. 좋은 약일수록 입에 쓴 법이다.

 

 

기본소득의 본격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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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오늘도 역시 기본소득으로 마무리한다. 이건 정치적인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인 문제다. 아니 사회적인 문제도 넘어선 생존의 문제다.

 

정 치권이 개판을 치고 있거나 말거나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먹고사니즘을 넘어선 차원의 생존 문제이다. 우리의 정치권이 살벌하게 정치를 잘해봤자 국제적인 현실을 넘어설 방법도 없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목을 가장 심하게 조이고 있는 것은 바로 국제적인 차원의 자본주의의 위기일 수도 있다.

 

그 위기의 실체는 한마디로 “일자리의 소멸에 따르는 자본주의의 붕괴 위험”이다.

 

솔 직히 나는 그간 기본소득에 대해 떠들고 다니면서도 이거 뭐 한 십 년은 지나야 유럽에서 슬슬 논의되기 시작할 거고, 우리 사회까지 오려면 최소 삼십 년은 걸릴 것이라고 나태하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해 보인다.

 

지 금 당장, 2015년 말에 이미 기본소득제도가 공개적으로 논의가 되고, 핀란드에서는 2016년 말에 법안을 제출하겠다고 집권당의 수상이 공식 선언을 하고, 스위스는 국민투표에 회부하고, 독일에서도 기본소득 지지 여론이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온다는 것, 기본소득이 생각보다 빨리 와서 다행이라는 느낌보다 훨씬 더 크게 불안감이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을 2015년 최대의 빅 이슈로 꼽는 것이다.

 

바 로 저 사람들 모두 자본주의의 위기가 생각보다 빨리 오고 있다고 느끼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든다는 얘기다. 기술이 발전하면 일자리가 줄어든다. 그 동안의 역사에서는 언제나 기술이 발전해서 일자리가 줄어든 만큼 또 다른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걸로 메꿔 온 셈이다. 이제 갈수록 그렇게 새로 일자리가 생겨나는 속도보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언 제나 사례로 드는 얘기들이지만 점점 더 구체화 되고 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몇 년 안에 무인트럭이 화물을 운송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실제로 관련 법규를 개정하는 중이다. 벤츠가 양산한 무인트럭이 미 대륙에 상륙하는 순간 이백만이 넘는 미국의 에이틴 휠러, 장거리 트럭 운전수들의 일자리는 소멸한다.

 

구 글의 무인차는 이미 사고율 0%에 도전하고 있으며, 실제로 안전성을 입증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아이폰을 최초로 해킹해서 유명해진 GeoHot이라는 해커는 겨우 천 달러 미만의 비용으로 기존의 승용차에 자율주행 장치를 스스로 만들어 장착해서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했다.

 

 

 

이 런 자율주행 승용차가 합법적으로 운행이 되는 순간 택시 기사들과 대리운전기사의 일자리는 사라져 버린다. 아마존의 드론 택배 시스템은 택배 기사들의 일자리를 소멸시킬 것이며, 우라까이 전문 신문기자 아니 언론알바들을 대치할 자동 기사 생성 소프트웨어는 이미 일기예보와 스포츠 뉴스, 증권 기사들을 자동으로 작성해서 쏟아내고 있다.

 

현 대기아차의 최근 5년간의 통계를 보면 늘어난 매출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수의 일자리만이 생겼을 뿐이다. 극단적인 예측으로는 이미 몇 년 이내에 30%에 해당하는 일자리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중이다.

 

이 빈자리를 메꿀만한 새로운 일자리가 탄생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일자리가 없으면 소득도 없다. 소득이 없다면 소비도 없다. 소비가 없다면 시장도 없다. 시장이 없어지는 순간 자본주의는 붕괴한다. 이 단순한 논리의 수레바퀴는 이미 오래 전에 굴러가기 시작했으며,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술의 발전에서 시작하여 일자리의 소멸로, 또 시장의 붕괴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붕괴의 시나리오가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2015년 말에 등장한 핀란드의 기본소득 도입 소식인 것이다.

 

잘사는 나라의 돈지랄이 아니라, 줄어들어 가는 일자리와 그로 인한 세수의 감소, 그에 따른 국가 재정의 붕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 핀란드의 수상은 순순히 솔직하게 인정을 했다.

 

우리는 어째야 할까? 2015년의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우리가 그나마 생존권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2015년이여, 안녕!

 

그 렇게 올 한 해가 마무리되어 간다. 다가오는 2016년에는 또 어떤 걸로 ‘다이내믹 코리아’의 진면목을 보여줄지 걱정이 될 뿐이다. 저게 결코 좋은 소리가 아니다. 최근 들어 한 십 년간 좋은 일로 놀라 본 적도 없고, 좋은 일로 다이내믹 코리아라고 감탄해 본 기억이 없다.

 

이 제 막 시작하는 2016년이라고 해 봐야, 4월에 총선 있고 야당이 대판 깨질 것이 거의 확실해진 상황에서 무슨 낙으로 또 1년을 버텨야 하는가. 달도 차면 기운다는데, 도대체 이 내리막길은 언제나 끝날 것이며, 도대체 이 깜깜한 밤중이 언제 끝나고 동녘이 밝아 오게 될지 감히 상상도 잘 안 된다.

 

그 래도 해는 또 다시 떠오를 것이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고 했다. 근거 없는 낙관이 역사를 움직인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는 내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결코 놓지 않을 생각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런 뜻에서 새해 인사를 드린다.

 

딴지스 여러분, 2015년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고, 2016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그리고.. 새해 벽두부터 울려 퍼질 병신년 드립, 그거 절대 하지 말자. 우리도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면서 살아야 덜 쪽팔리지 않겠냐는 얘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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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한.일 합의? 더럽다"

 

정대협, '배신외교'..외교부와 후속조치 협의 거부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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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28  20: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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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28일 한.일 외교장관회담 발표에 대해 "더럽다. 무시한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한.일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타결을 발표한 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더럽다. 무시한다. 건방지다"라고 일갈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도 "외교적 담합"이라며 정부의 후속조치 협의를 거부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88세)는 이날 오후 서울 성산동 정대협 사무실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 공동기자회견을 TV로 지켜본 뒤, "뻔뻔하다. 무시한다. 내가 돈이 필요해서 이러느냐"고 반발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자청, "오늘 보니까 조금도 할머니들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명예회복이다. 책임지지 않고 지금 와서 뻔뻔하게 문제 해결? 보상? 아니다. 배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가 재단을 설립하고 일본 정부가 10억 엔(약 1백억 원)을 출연하기로 한 합의를 전면 거부한 것이다. 또한, 해당 기금은 국가범죄 책임 이행 방식인 법적 배상원칙과 동떨어져 있다는 시각이다.

실제 일본 정부가 1996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국민기금)을 설치하고 위로금을 지급하려 하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법적 배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받지 않았다.

이 할머니는 "보상은 너희가 돈 벌러 갔으니 불쌍해서 준다는 것이고. 배상은 죄에 대한 것"이라며 "더럽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한국 정부의 설득을 위한 접촉도 거부했다. 오히려 "무슨 설득이 필요하느냐. 일본 외교부인지 한국 외교부인지 모르겠다. (설득을) 듣고 있겠느냐. 전부 무시한다. 한 사람이라도 안 된다면 안되는 것"이라며 외교부를 질타했다.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이날 입장을 발표, 한.일 정부간 '위안부' 합의 후속조치에 거부할 뜻을 분명히 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정대협도 이날 입장을 발표, "진정성이 담긴 사죄라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의 이번 발표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의 대독이라는 점, 그리고 범죄 주체와 불법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지금까지 논란이 된 '오와비(おわび)'가 다시 사용됐다는 점도 지적됐다.

정대협은 일본군 '위안부' 범죄 사죄의 표현은 사과라는 뜻인 '오와비(おわび)'가 아니라, 사죄의 의미인 '샤자이( しゃざい)'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번에 기시다 외무상이 대독한 발표문에도 '오와비(おわび)'라는 표현으로 점철됐다.

그리고 전쟁범죄 책임 후속조치는 일본군 '위안부' 진상규명, 역사교육 등 재발방지 조치가 포함되어야 하지만, 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재단에 일본 정부가 10억 엔의 기금을 출연하는 것으로 그쳤다는 점도 제기됐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내각총리대신 명의라고 했지만, 총리가 자신의 입으로 발표한 것이 아니다"라며 "진심으로 사죄했다고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고 평가하고, 재단 설립에 대해 "1996년 일본 정부가 만든 국민기금과 다름없다. 가해의 주체도 빠졌고, 범죄에 대한 언급도 없다. 법적 책임과 연결해 애매한 조치"라고 지적했다.

정대협은 이번 합의에서 한국 정부가 △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확인하고, △ 평화비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를 위해 해결방안을 찾으며, △상호 국제사회에서 비난.비판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한 데 대해 "되로 받기 위해 말로 줘버린 굴욕적인 외교"라고 비판했다.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평화비 철거문제가 일본 언론에 나왔을 때, 한국 정부가 항의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번 합의에 들어갔다. 이중적인 태도"라며 "철거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외교부의 평화비 이전 협의에 응할 생각이 없다"며 "평화비는 정대협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것이다. 공공의 자산"이라고 이번 한.일 합의 후속조치를 거부했다.

이용수 할머니도 "우리나라에 세운 평화비다. 건방지다. 동경 한복판에 세워도 시원치 않을 판에 어디에 옮기라 말라 하느냐. 건방지기 짝이 없다"며 "소녀상 못 옮긴다. 그대로 둬야 한다. 무슨 권리로 옮기느냐. 무슨 검토가 필요하느냐"고 일갈했다.

   
▲ 정대협 입장발표 기자회견에 참가한 이용수 할머니 등은 평화비 이전 반대입장을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정대협은 "오늘 한.일 양국 정부가 들고나온 이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피해자들의, 그리고 국민의 바람을 철저히 배신한 외교적 담합에 다름 아니다"라며 "결코 원칙과 상식을 저버리고 시간에 쫓기듯 매듭지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일본 정부의 국가적, 법적 책임 이행이 반드시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는 앞으로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국내외 시민사회와 함께 올바른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더욱 경주해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한편, 정대협과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설립추진모임' 관계자들은 이날 한.일 외교장관 회담 발표를 앞두고 입장정리에 고심을 보였으나, 윤병세 외교장관과 기시다 외무상의 입에서 '국제사회 비난.비판 자제', '평화비 해결방안' 등이 나오자 탄식을 자아냈다.

이용수 할머니도 해당 발언이 나오자 탁자를 치며 "그 돈 너네나 다해라. 소녀상 건들기만 해봐라"라고 화를 삭이지 못했으며, 정대협 직원들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 합의에 대한 정대협 입장

오늘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한일외교장관회담이 열려 마침내 그 합의안이 발표되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국민들은 광복 70년을 며칠 남기지 않고 열린 이번 회담이 올바르고 조속한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에 이르기를 간절히 염원해왔다.

금번 회담 발표에 따르면 첫째,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는 것과 둘째, 아베 총리의 내각총리로서의 사과 표명, 셋째, 한국정부가 설립하는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에 일본정부가 자금을 일괄 거출하고 이후 양국이 협력하여 사업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비록 일본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지만 일본군‘위안부’ 범죄가 일본정부 및 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범죄라는 점은 이번 합의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관여 수준이 아니라 일본정부가 범죄의 주체라는 사실과 ‘위안부’ 범죄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또한 아베 총리가 일본정부를 대표해 내각총리로서 직접 사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독사과’에 그쳤고, 사과의 대상도 너무나 모호해서 ‘진정성이 담긴 사죄’라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이번 발표에서는 일본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범죄의 가해자로서 일본군‘위안부’ 범죄에 대한 책임 인정과 배상 등 후속 조치 사업을 적극적으로 이행해야 함에도, 재단을 설립함으로써 그 의무를 슬그머니 피해국 정부에 떠넘기고 손을 떼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그리고 이번 합의는 일본 내에서 해야 할 일본군‘위안부’ 범죄에 대한 진상규명과 역사교육 등의 재발방지 조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모호하고 불완전한 합의를 얻어내기 위해 한국정부가 내건 약속은 충격적이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하고,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평화비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를 위해 해결방안을 찾을 것이며, 상호 국제사회에서 비난/비판을 자제하겠다는 것이다. 되를 받기 위해 말로 줘버린 한국정부의 외교 행태는 가히 굴욕적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에 임하면서 평화비 철거라는 어이없는 조건을 내걸어 그 진정성을 의심케 한 일본정부의 요구를 결국 받아들인 것도 모자라 앞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입에 담지도 않겠다는 한국정부의 모습은 참으로 부끄럽고 실망스럽다.

평화비는 그 어떤 합의의 조건이나 수단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평화비는 피해자들과 시민사회가 천 번이 넘는 수요일을 지켜내며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과 평화를 외쳐 온 수요시위의 정신을 기리는 산 역사의 상징물이자 우리 공공의 재산이다. 이러한 평화비에 대해 한국정부가 철거 및 이전을 운운하거나 개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피해자들과 시민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번 합의를 두고 정부가 최종 해결 확인을 하는 것은 명백한 월권행위이며, 광복 70년의 마지막 며칠을 앞둔 이 엄중한 시기에 피해자들을 다시 한 번 커다란 고통으로 내모는 일이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지원단체, 그리고 국민들의 열망은 일본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범죄에 대해 국가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이행함으로써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고 다시금 이러한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한일 양국 정부가 들고 나온 이 합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피해자들의, 그리고 국민들의 이러한 바람을 철저히 배신한 외교적 담합에 다름 아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진정한 우호와 평화를 위해 해결되어야 하고 피해자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있을 때 해결되어야 할 우선과제이지만, 결코 원칙과 상식을 저버리고 시간에 쫓기듯 매듭지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지난 2012년 제12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각국 피해자들의 뜻을 담아 채택한 일본정부에 대한 제언, 즉 일본정부의 국가적 법적 책임 이행이 반드시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는 앞으로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국내외 시민사회와 함께 올바른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더욱 경주해 나갈 것을 천명한다.

2015년 12월 28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자료제공-정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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